方外之士

산중무예 ‘氣天門’ 사부 박대양

醉月 2008. 9. 14. 11:03
“눈밭, 모래밭 걸어도 발자국 안 남기지요” 산중무예 ‘氣天門’ 사부 박대양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수천년을 전해내려왔다는 산중무예 ‘기천문(氣天門)’.
태어나면서부터 고승이었던 스승으로부터 이 무예를 전수했다는 ‘진인(眞人)’이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다. 나이도, 부모도, 왜 산에서 자랐는지도 알지 못한다는 기천문 사부 박대양씨. 기천문을 기 운동으로 보급하기 위해 힘써온 그의 무협지 같은 삶을 들여다보자.

평당 2000만원이 넘는 ‘상류층 전용공간’으로 한동안 언론에 오르내렸던 주상복합아파트 타워팰리스가 건너다보이는 서울 강남구 도곡2동. 이곳 평범해 보이는 한 빌딩 4층에 전국 17곳의 도장에서 수백 명의 수련생이 연마하고 있다는 ‘민족무예 기천’의 본문(本門)이 자리잡고 있다. 이 민족무예의 ‘초대문주(門主)’라는 박대양씨를 만나기 위해 약속시간에 맞춰 도장에 당도했다.

신발을 벗고 실내로 들어서자 도장의 사면 벽이 온통 대형 거울로 채워져 있어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노출된다. 주위를 살펴보고 있는데 알맞은 키에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필자를 맞는다.

“저는 본문 원장인 변치호입니다. 대양진인 사부님은 지금 시내에서 오시는 중입니다.”

취재진을 맞이한 변원장에게서 ‘대양진인’이라는 호칭을 듣자 박대양씨에 대한 궁금증이 한층 깊어진다.

“사부님이 오시기 전에 기천문의 기본 동작을 한번 배워보시겠습니까. 한번 동작을 취하고 나면 밥맛이 나아지고 기도 좋아집니다. 무엇보다 양기에 좋지요.”

‘양기에 좋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변원장과 강난숙 범사(사범)의 시범을 따라 ‘내가신장’이라는 기초 훈련법 자세를 취해본다. 그런데 장난이 아니다. 기천문의 핵심이자 정수요, 이 한 수에 기천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설명을 듣고 보면 적당히 시늉만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준비자세에 들어가면 우선 두 발을 역 45도 각도로 한 채 구부려 자세를 취한다. 두 손은 내공을 한없이 받아들이는 자세로 앞으로 뻗는다. 30초쯤 지났을까,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다. 고문을 받듯 온몸에 통증이 달려든다.

 

양기에 좋다니 하긴 했는데…

“내가신장은 일분 일초마다 고통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고통을 뛰어넘는 과정을 통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익힐 수 있지요. 자, 이제 1분30초 지났는데 딱 3분만 해보세요. 이것만 제대로 하면 정력 하나는 자신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을 맑고 향기롭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도 생깁니다.”

단 1초도 견디기 어려운데 3분이라니.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결국은 주저앉고 만다. 민망한 얘기지만 필자는 3분의 수련도 다하지 못하고 나중에는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덕분에 당일로 취재가 다 이루어지지 못하고 며칠에 걸쳐 박대양씨를 만나야 했다.

한참 몸을 추스리고 있는데 박대양씨가 도장에 들어섰다. 평범한 장년과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인자해 보이는 표정이 눈길을 끈다. 필자가 내가신장 기초과정의 일부를 직접 수련했다고 변원장이 보고하자, 남의 속도 모르는 박씨는 말없이 웃으며 대견하다는 듯 필자를 바라본다.

박씨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천문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접근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기천은 단군 이래 내려오는 민족 고유의 심신 수련법이라는 것이 기천문 본문의 설명이다. 기천의 수련은 이해가 아닌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고, 그 체험을 통해 느낌에서 느낌으로 전달되는 가르침이라는 것. 때문에 기천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몸짓과 마음을 통해 전해질 뿐, 말이나 글의 형태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기천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그 몸짓에 대한 해석과 기천의 설화, 여러 사서(史書)와의 비교 분석에 의해 가능할 따름이라 한다.   

간편한 도복 차림에 말씨가 차분하고 조용한 박대양씨는 “기천문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질문에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이론을 중심으로 수련을 쌓았거나 개론이 정립된 수련법이 아니라는 방증일 것이다. 그렇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기천문이란 무엇입니까.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강남 도심 한복판에 도장을 차린 것이 도발적이기도 하고요.

“기천이란 하늘과 땅의 모든 기운을 포함해 대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민족 고유의 선도입니다. 누구는 국선도라고도 하고, 선도라고도 하는데, 그냥 기천문이라는 이름이 옳지요.”

옆에 있던 변치호 원장이 보충 설명을 한다. 박대양씨는 가능한 한 말을 아끼는 모습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시대 이후 정통 무예로서의 기천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춥니다. 배우기가 쉽지 않아서인지 특별한 사람에게만 전수되는 선(禪)의 일종이 되어 산중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말이 아니라 실제 동작과 모습으로 기본원리를 배우는 방식이다 보니 널리 보급되지 않았어요.

그나마 정통의 맥은 산속의 외로운 지킴이들에 의해 이어져왔습니다. 초기에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흐름이 이어지다가 조선조 중기부터 태백산맥으로 옮겨집니다. 그러다 현대에 이르러 기천의 마지막 전인(傳人)인 박대양 사부님께서 설악산 주변의 깊은 산중에서 하산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거죠.”

 

난 곳도, 부모도 모르지만

흡사 무협소설 첫 장을 읽는 듯 신비감이 물씬 풍기는 스토리를 듣다보니 ‘이걸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의아한 마음이 생긴다. 그럼 박씨는 기천문을 어떻게 전수하게 된 것일까.

-박선생은 누구에게서 기천문을 배웠습니까.

“원혜상인이라는 스님이십니다.”

-원혜상인은 어떤 분입니까.

“솔직히 저도 잘 모릅니다.”

스승을 잘 모른다니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그러나 이어지는 설명을 듣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씨는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10대 후반까지 설악산과 태백산 근처 깊은 산중에서 자랐다고 한다. 주민등록에는 1957년생으로 돼 있지만 이는 양부모가 호적에 올린 단순한 숫자에 지나지 않을 뿐, 실제로 자기 나이가 몇 살인지, 생일이 언제인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 저는 스승님이 위대한 스님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다만 제가 기억하는 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원혜상인이 저를 기르셨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났는지는 기억도 없고 들은 바도 없습니다. 그저 깊은 산중에서 노스님의 수발을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그러니 한편으로 저는 한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제는 옛일을 더듬을 때마다 눈물이 나지요. 마음이 약해져요.”

산중무예의 전수자답지 않은 섬세한 마음자락이 언뜻 드러났다.

박대양씨의 스승 원혜상인은 최근에 이르러 무예분야는 물론 품격과 태도면에서 당대 최고의 도인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원혜상인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도력이 높은 소수의 승려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다는 것. 이쯤 되면 신비스러운 인물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박씨가 열아홉살쯤 되어 속세로 내려온 1970년 무렵 원혜상인의 나이가 무려 159세였다고 한다. 단연 기네스북 감이지만 이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이는 없었다.

“제가 산을 내려와 떠돌던 1972년에 주민들이 제 행동거지가 이상하다고 경찰에 신고해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었어요. 출생지나 부모도 모르고, 행선지도, 고장 지리도 모르니 고스란히 간첩으로 몰린 거죠.

경찰서에서 ‘내 스승이 원혜상인이고 언젠가 탄허스님(1913~83·현대 한국불교의 고승이자 불교학자)이 스승님에게 삼배(三拜)를 드리는 것을 보았다’고 얘기했더니 경찰이 탄허스님께 연락을 하더군요. 예전부터 원혜스님을 잘 알고 계시던 탄허스님이 제가 그 제자라는 보증서를 써주신 덕분에 석방되었습니다.”   

 

신비로운 스승, 원혜상인

-원혜상인 스님은 어떤 면에서 뛰어난 분이셨습니까.

“제가 설악산에서 하산한 후 30여 년동안 수많은 무술가와 역술가, 도인들이나 저명한 인사들을 만나봤지만 원혜상인의 깊이와 높이를 따를 만한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요.

“원혜상인 스승님은 무공을 잘 안 쓰는 편이었지만, 한번 쓰면 대단한 폭발력을 지녔습니다. 스님이 솔장법이라는 무술을 쓰면 큰 나무가 벼락을 맞은 듯 재가 되었고, 쌀 한 가마니 정도는 공깃돌처럼 마음대로 다루셨어요.”

-그런 모습을 직접 목격했습니까.

“일부는 직접 보았고 일부는 전해 들었습니다. 옛날 도사들이 쓰던 축지법이나 수십 미터 절벽을 마음대로 뛰어내리거나 올라가는 경공법을 쓰신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이쯤 되면 황당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머리 속에 다시 무협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이 무럭무럭 피어 오른다.

“언젠가 한 노스님이 원혜상인 스님에게 ‘할아버지 스님’이라고 부르기에 깜짝 놀라 그 노스님에게 물었지요. ‘원혜상인 스님이 훨씬 젊으신데 어떻게 노스님이 원혜상인 스님을 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느냐’고요. 그랬더니 그 노스님이 ‘원혜상인 스님은 내가 어렸을 때에도 할아버지였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원혜상인 스님은 제가 하산할 때 159세셨는데, 그 후 3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듣고 황당하다고 얘기하지 않던가요.

“종종 그런 말을 듣곤 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듣는 사람은 황당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하고는 상관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전혀 뚱딴지 같은 생각에만 몰두하며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박대양씨도 스승으로부터 완벽하게 도를 물려받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무예만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터득했다는 것. 스승의 풍수설이나 역학, 점성술 등은 지식이 짧아 알 바가 없지만 몸으로 수행하는 것은 거의 모두 익혔다는 것이다.

 

속세의 삶은 힘겹기만 하고

“제가 하산할 때는 일본과 중국의 무술이 우리나라 무술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전통무예의 씨를 뿌리고 토대를 쌓는 일은 무모할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어요. 해방 후 한국의 무술계는 일본의 당수도(혹은 가라테) 합기도 검도와 중국계인 당랑권 태극권 소림권 등이 세를 양분해서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국기로 일컬어지는 태권도는 1960년대에 만들어져 막 이름이 정착되어 가는 단계였고, 정도술 정각도 수박도 등이 순수 고유 무술로서 고군분투하고 있더라고요.”

박대양씨는 이 시절, 민족 전통을 내세우는 무예는 전혀 대접받지 못하고 대신 일본 검도의 누구에게서 직접 전수했다거나 중국인 누구에게서 배운 것이 자랑이 되는 현실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말한다. 순수 우리 무예들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는 것. 때문에 도발적으로 세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스승님이 저에게 글공부를 열심히 시키지 않으셨던 까닭에 저는 학문이 짧아요. 하지만 정신은 어느 누구보다 맑고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불선도에 관해서는 들은 풍월로도 자신이 있었고, 스승님 밑에서 익힌 무도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곤 했지요.

하지만 스승님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 혹은 중노릇 하는 것을 아침해가 떴다가 지는 것처럼 생각하라’고 가르치셨어요. 인생무상의 가르침이죠. 때문에 저는 남과 무엇을 겨룬다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남의 나라 무예들이 우리 정신이나 국토를 오염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누구든 겨뤄보자는 심산을 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어요.”

이렇게 해서 그의 파란만장한 낭인생활이 시작된다. 밥만 사주면 누구와도 일합을 겨룬 것이다. 부산과 대구를 비롯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주먹깨나 쓴다는 무도계 인사들과 실력을 겨루며 한바탕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신장 154cm, 체중 40kg 안팎의 불리한 체격조건을 가진 그가 상대방을 메다꽂을 때는 누구나 탄복을 하곤 했다고 한다.

“1972년 부산 동아대에서 무도 시범이 있었습니다. 모 관장이 합기도로 전국을 장악하던 때였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내렸는데, 저는 동아대에서 시범을 보이다 ‘북한의 특수공작원 교육을 받은 사람이 분명하다’는 오해를 받아 쫓기기도 했지요. 그런가 하면 해운대 백사장에서 부산 폭력조직 칠성파와 맞설 때는 상황이 불리해 도망치는데, 제가 냅다 달리며 모래밭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것을 보고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눈밭이나 모래 위를 걸어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무협지를 보면 만날 수 있는 ‘답설무흔’ 비법인 셈이다. 이 또한 오랜 내공훈련과 기 훈련을 통해 연마할 수 있다는 것이 박대양씨의 설명이다.   

 

다시 입산해 기천을 정리하다

그러나 스승에게서 배운 무예를 무모한 힘자랑, 기술자랑을 위해 사용하며 지낸 방랑생활은 이제 와 생각하면 부질없는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통해 돈을 벌거나 남의 재물을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매일 물만 마시고 채소를 데쳐먹는 극빈생활의 연속이었다. 우유배달 등 여러 가지 일을 해보았지만 국수 20원어치를 사다 하루를 때우는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제가 스승님에게서 익힌 기술이 단순한 게 아닌데도 너무 값싸게 써먹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속세에서의 삶이 좌충우돌 그 자체, 무모함의 연속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다시 산으로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역시 산은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한동안은 속세의 먼지에 내장이 썩어 내린 것 같았지만, 다시 소나무 잎사귀를 먹고 살아도 마음이 편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스승에게서 배운 것들을 하나하나 점검해나가기 시작했다.

“예전에 스승님께서는 몇 년 동안 제게 땔나무를 하거나 물긷는 일만 시키곤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도망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때서야 하나씩 무예를 가르쳐주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배운 게 입선이었죠. 가만히 선 채로 하는 참선인데, 이를 100일간 연마해야 다른 수행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랫배 호흡으로 입선을 하는데 경지에 이르면 바로 무심의 마음이 되지요. 무념무상에 젖어 고통 자체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나중에는 하루 종일 계속해도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지요.

그런 과정들을 다시 떠올리며 하나하나 기천의 가르침을 정리해나간 겁니다. 고정된 수행과정이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사실 스승님이 계셨을 때는 훨씬 수도가 쉬웠지요. 무조건 따라하기만 하면 됐으니까요. 하지만 이후에는 기억을 더듬거나 때로는 독학으로 이를 개발해야 했으니 공부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대양씨는 예닐곱살부터 내가신장을 배웠다. 그 후 반장 육합단공을 차례로 익혀나갔다. 식사는 거의 생식이었다. 가끔은 마른 육포를 찢어먹기도 했다. 발목에 모래와 돌을 매달고 뛰기도 하고, 윗주머니에 돌을 잔뜩 집어넣고 칠보정권을 하며 산을 넘어갔다가 오는 수련도 했다. 무릎을 굽히지 않고 수십 미터 뛰어오르는 수련도 연마했다. 스승으로부터 배운 훈련법을 더 철저하게 다지고 재현해나가면서 기천의 바탕을 마련해갔다.

기천문 본문에서 펴낸 ‘기천’이라는 책자는 박대양씨가 보여주었다는 여러 가지 일화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구름을 끌어당겼다거나, 산에 올라 나무들의 가장 높은 가지만 밟고 뛰어다니는 경공술을 보여주었다는 내용이다. 호두알만한 쇠구슬을 서예 액자에 던졌는데 유리 액자는 깨지지 않고 쇠구슬만 산산조각이 났다는 일화 등 중국영화에서나 봄직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쯤 되면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를 돈과 바꿀 수는 없다”

-우리 같은 소인배에게는 흡사 만화같습니다. 혹시 실연을 통해 보여줄 수 있습니까.

“이제는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기천문은 수양의 도로 보아야지 신비스런 무술로 보면 안 되니까요. 기천문은 기를 뚫어 막힌 기를 세워서 건강을 찾고, 특히 마음의 건강을 보살피는 심신수련법입니다. 실제로 기천을 통해 병이 나은 사람도 많아요.

그렇지만 기천문이 마치 사이비 대체의학쯤으로 비쳐지는 것은 경계하고 있습니다. 병이 낫는다고 해서 이를 금전과 바꿀 수는 없지요. 원혜상인 스승님 또한 많은 이들의 병을 치료해주셨지만 한번도 돈이나 쌀을 받으신 적은 없었으니까요.”

-지금은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습니까.

이 질문에 그는 소리없이 웃어 보이며 담배를 연신 빨아댔다. 담배를 피워도 건강은 끄떡없다고 한다. 심지어는 담배가 수명을 줄인다는 이야기 자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는 도장이나 밖에 잘 나오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지요. 대신 월 150만원 정도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어요. 많은 돈은 아니지만 욕심을 줄이면 사는 데는 불편함이 없습니다.”

-혹시 스승을 신비화하고 싶어 그러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신비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만 제자들 입장에서는 스승이 자꾸 거리로 나대는 것이 보기 좋을 리 없겠죠. 범부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는 스승이 민망해 보이기도 할테고요.”

-제자들은 얼마나 됩니까.

“제 직속 제자들은 4~5명 가량 됩니다. 워낙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도라 익히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이들 제자들은 완전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도인들입니다. 이들 1세대 제자들이 한때 주도권 싸움을 하느라 뿔뿔이 흩어졌었는데, 이제 다시 뭉쳤으니 반가운 노릇이지요.”

기천문 본문의 변치호 원장을 비롯해 계룡산 수련원 박사규 문주, 경희궁 수련터의 전찬욱 중앙연수원장, 상계 도장의 김봉길 원장, 신림 지킴이 기천의 윤창호 사무총장 등이 그가 말하는 1세대 제자들이다. 경찰계 검도의 달인으로 꼽혀온 박성권씨, 수벽치기의 전인 육태안씨, 해동검도 총관장 김정호, 나한일씨 등도 그에게 무예를 배운 바 있다. “해동검법이 따로 살림을 차려 나간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잘되어가고 있으니 다행한 일 아니냐”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아직 사람이 무섭다”

박대양씨(위)의 젊은 시절 수련 모습

1세대 제자들에 의해 2세대들이 나왔고, 도장이 운영되어온 30여 년의 세월 동안 기천문을 경험한 수련생이 어느새 수천, 수만 명을 헤아린다는 설명이다. 제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그의 말 뒤끝에서 왠지 허전함이 느껴진다.

-도인생활을 해오면서 고뇌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습니까. 도전했으나 실패했을 때의 고뇌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만나고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입은 마음의 상처가 있는 모양입니다.

“솔직히 때로는 사람 만나는 것이 무섭습니다. 싸움패라면 누구도 두렵지 않지만 사람과 만나고 사귀는 것은 여전히 두렵습니다. 산속에서 자라는 동안 사람 사귀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잠시 한 스님의 경호원 생활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 또한 산 생활에 익숙한 박씨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설산 스님의 소개로 잠시 도선사에 계시던 청담 스님 곁에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분이 무슨 원한이 있길래 경호원을 두어야 안심을 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잣거리의 가난한 탁발승도 자신을 지키는데 그처럼 위대한 스님이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나 같은 사람을 경호원으로 데리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더군요. 그래서 어느 날 모든 것을 팽개치고 절을 나왔지요.”

다시 세상에 나온 후 불교 원효종의 한 스님 부부와 양부모 결의를 해 아들이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호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후 이 양부모의 주선으로 결혼식도 올렸지만 왠지 허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결혼 당일 다시 산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제는 산속에서 외롭게 수도한 사람만이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시대는 갔다고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정신은 그대로 이어져야겠지만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에 맞게 수도의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뜻인 듯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영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걷는 것처럼 거북하고 서툴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무엇 하나 낯익은 것이 없다는 토로가 이어졌다. 그런 그에게 변치호 원장이나 강난숙 범사 같은 제자들은 큰 힘이라고 한다.

“변치호 원장은 제가 지리산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따라온 학생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때 고려대 4학년생이었지요. 그들을 쫓아내겠다는 심산으로 ‘소나무 등걸을 무릎으로 100번 차면 데려가겠다’고 했지요. 정강이가 피투성이가 되는데도 결국은 횟수를 채우더군요. 이후 산속에서 하루 한끼 식사를 하면서 함께 수행생활을 했습니다.

이들이 지금 이렇게 든든한 소나무가 되어서 기천문의 이론적 기초도 다듬고 대중화에도 나서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을 두려워하는 저에게는 큰 자산이지요. 이들 덕분에 기천문이 오늘날 생활수련의 한 방법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셈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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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수양의 도구일 뿐

-처음 기천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해주는 이야기는 어떤 것입니까.

“세상에 널려 있는 어지러운 글과 말만 찾아 헤매다 보니 자기 몸조차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월을 지내다 보면 마음이 병들고, 몸도 늙어가게 됩니다. 기천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고, 무게도 형체도 없는 것을 이름하여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기천은 허상에 집착하지 않고, 무심한 상태에서 무위자연 속에 심취하여 몸을 다듬고 정신을 올바르게 갖는 운동입니다.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기를 배양해 육신의 병,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데 목적이 있지요.

기천인은 무엇보다 분쟁이나 충돌을 절대적으로 피합니다. 기천은 철저하게 자기 수양을 하는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해롭게 하거나 괴롭히면 기천문이 아닙니다.”

박대양씨는 칼 쓰는 솜씨 또한 남다르다. 칼날이 없는 칼로 무엇이든 벨 수가 있고 찌를 수가 있지만, 그러나 칼로 인명을 살상하는 일을 절대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기천문의 철학이자 수련자에게 제시하는 기본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칼은 자기 수양과 정신연마의 도구일 뿐, 남을 위해서든 나를 위해서든, 정의를 위해서든 불의를 위해서든 실제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검 철학’인 셈이다.

-말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나 혼란이 남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심, 그것도 강남의 한복판에서 묵묵히 자기 정진을 위해 기천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복잡한 세상의 다양한 욕구가 분출하고 충돌하는 모습이 힘에 겨울 때 기천문 도장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의외의 답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오랜 기간 전해내려온 우리 전통의 맑은 혼이 함께하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테니까요.”

영화에 나오는 도인마냥 아직도 독신으로 사는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그는 부인 정광순(48)씨와의 사이에 세 자녀(2녀1남)를 두고 있다. 무예의 길을 걸어온 사람을 묵묵히 따라준 아내가 더없이 고맙지만, 겉으로 고마움을 표시해본 적은 없다는 말에서 박씨의 고지식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결혼식 날 남편과 헤어져 긴 시간을 보내야 했던 아내지만 드러내놓고 섭섭함을 표시한 적은 없다는 것이 박씨의 말이다.

-자녀 교육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수도를 하는 사람은 무언가 남다를 듯도 한데요.

“아버지가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나왔듯 아이들도 스스로 노력해서 사회적 성취를 이루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나서서 가르치거나 손봐줄 것이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제 스스로 세상을 알지 못하는데 아이들에게 세상을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다고 아버지처럼 살라고 말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고요. 그래서 툭하면 잔소리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그저 묵묵히 지켜보자는 것이 제 교육관입니다.”

이계홍
● 전남 무안 출생
●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 동국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 동아일보 문화부 차장
● 문화일보 문화부장, 사회2부장
● 대한매일 논설위원, 수석편집부국장
● 용인대 겸임교수

서울 옥수동 동호대교 근처의 선무장에서 후진을 기르다가 현역에서 은퇴한지 어느새 17년째. 한 세상 바람처럼 살다가 기천의 가르침을 그나마 놓치지 않고 이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한다는 박씨는 “다만 제자들이 서로 다투지 말고 평안과 청정, 배려와 무위자연의 가르침을 실현해나가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도를 닦으며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도 삶은 그리 간단치 않은 것이었다. 돌아서는 박씨의 작은 체구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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