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外之士

계룡산파의 秘訣

醉月 2008. 10. 19. 17:43

계룡산파의 秘訣과 탄허 스님이 남긴 일화들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cyh062@wonkwang.ac.kr)

 

秘訣이란 무엇인가. 과연 인생살이에서 비결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을 일컬어 ‘秘訣派’라고 부른다. 정도령이 출현한다는 ‘정감록’(鄭鑑錄)이나 ‘임오년에는 문둥이 觀相 지닌 사람이 王이 된다’는 ‘숙신비결’(肅愼秘訣) 등이 대표적인 비결들이다. 이러한 예측은 비결파들 특유의 세상 읽기 방법이다. 보통사람들은 사회과학적 조사방법에 의거한 여론조사에 의지하지만, 독특한 주관을 가진 비결파들은 하늘의 계시를 자신이 직접 중계방송함으로써 여론을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굳이 표현한다면 매스컴이 등장하기 이전의 여론 형성 방법이라고나 할까. 이번호에는 한국의 비결파, 그 중에서도 영험 높기로 이름 높은 계룡산파에 얽힌 일화들을 모아본다.

일제때 조선총독부 경찰국은 당시 민간에서 은밀하게 돌아다니던 비결들을 수집하였다. 다른 기관도 아닌 총독부 경찰국에서 조선의 비결들을 수집한 이유는, 이 비결들이 인심의 향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진단하였기 때문이다. 일제가 보기에 조선은 풍수도참을 원리로 하는 비결에 의해 민심이 움직이는 특이한 사회였던 것이다. 재야사학자들로부터 식민사학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이병도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도 하필 ‘고려시대의 연구 -도참사상의 발전을 중심으로-’다. 제목은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것이었지만, 그 내용은 우리나라의 풍수도참과 비결들을 분석한 내용이다.

제대로 제목을 붙이자면 ‘풍수도참사 연구’가 더 맞다고 하겠다. 왜 이병도씨가 그 많은 주제 가운데 하필이면 풍수도참이라는 미신스러운 주제를 가지고 학위논문을 썼겠는가. 무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지도교수였던 일본인 학자들이 “너희네 과거 역사는 풍수도참이 중요하니 그것 가지고 한번 학위논문을 써 보라”는 권유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시대에 비결을 신봉했던 사람들은 총독부에 의하여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분류되었다.

즉, 골치아픈 ‘안티’ 세력들로 간주되어 감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비결을 신봉하는 사람치고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이 적었고, 항상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갈망하는 ‘운동권’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운동권의 교본이 ‘정감록’(鄭鑑錄)이다. 그래서 나는 정감록을 ‘조선시대의 해방신학’으로 규정해야 옳다고 본다. 정도령은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미륵)였고, 메시아가 출현하면 민중은 부도덕한 체제의 탄압으로부터 해방된다고 믿었다. 총독부 경찰국에서 비밀리에 전국의 비결들을 수집하여 만든 소책자가 지난번에 말한 ‘조선비결전집’(朝鮮秘訣全集)이다. 이 책의 목차 앞부분에는 ‘비장’(秘藏)이라고 찍혀 있고, 다음과 같은 경구를 어떤 사람이 적어 놓았다.

‘이 비결전집은 이조시대에도 금서(禁書)이던 것을 일제 총독부 경찰국에서 민간인의 소장본 수백 종을 압수하여 그중에서 연구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여 일본인들의 연구용으로 몇십부 등사하여 극비로 하였던 귀중한 문헌이다.’일제때 몇십부 등사하여 총독부 관계자들만 보던 이 책이 해방후 우연히 흘러나와 필자도 소장하게 되었다. 필자의 풍수 사부님인 의산(懿山) 선생님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비결들의 제목들을 훑어보면 이렇다. ‘옥룡자청학동결’(玉龍子靑鶴洞訣)‘오백논사비기’(五百論史秘記) ‘도선비결’(道宣秘訣)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서산대사비결’(西山大師秘訣) ‘두사총비결’(杜師聰秘訣) ‘이서계가장결’(李西溪家藏訣) ‘토정역대비기’(土亭歷代秘記) ‘의상결’(義相訣) ‘류겸재일기’(柳謙齋日記) 등이다.

이러한 비결 제목에 등장하는 의상·옥룡자·토정·이서계·남사고·류겸재(류성룡의 형)는 삼국시대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땅의 민초들로부터 ‘도인’이라고 존경받아온 인물들이다. 현재도 전국의 산속에서 기약없이 고군분투하는 낭인과(浪人科)들에게는 흠모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비결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요약하면 ‘언제쯤 좋은 세상이 온다, 그 좋은 세상을 몰고 오는 인물은 누구이다, 언제쯤 난리가 난다, 난세에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십승지는 어디 어디이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도탄에 빠진 민초들에게 희망을 주는 내용들이라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총독부는 한편으로는 이러한 비결들의 유통을 저지하고 감시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밀하게 분석하고 이용하였다. 그러한 연구 중 하나가 무라야마(村山智順)가 저술한 ‘조선의 점복(占卜)과 예언(豫言)’(1933년)이라는 책이다. 여기에 보면 조선의 각종 점치는 방법과 풍수도참에 대해 상세하게 밝혀 놓았다. 문헌은 물론이고 전국적인 현장답사를 거친 끝에 완성한 책자다. 무라야마는 유명한 ‘조선의 풍수’(朝鮮의 風水)의 저자이기도 하다. 조선의 민속과 역술, 전통문화에 대해 치밀하게 조사하였던 총독부 소속 학자다.

일본 학자들은 역으로 비결을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 예가 인구에 회자되는 ‘방백마각(方百馬角) 구혹화생(口或禾生)’이라는 도참이다. 이 글씨는 계룡산 연천봉(連天峯) 꼭대기 바위에 암각되어 있다. 방백(方百)은 네모진 100년으로 본다. 400년(四百年)이 네모진 100년이다. 그 다음에 마(馬)는 십이지로 환산하면 오(午)이다. 오를 파자하면 80(八十)이 된다. 각(角)은 뿔이 두개라는 소리다. 이를 전부 합치면 482년이라는 숫자가 도출된다. 뒷부분의 구혹(口或)을 합치면 국(國)자가 나온다. 역시 화생(禾生)을 합치면 이(移)자가 성립된다.

옛날에는 이(移)자를 화생이라고도 사용하였다. 앞뒤를 연결하면 ‘482년만에 나라(조선)를 옮긴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조선왕조 창업이 1392년이니 여기에 482년을 합하면 1874년이 나온다. 일본의 조선 침략이 시작되는 강화도조약이 1876년에 맺어졌으니 대략 이 무렵에 조선은 나라를 옮긴다. 즉, 망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일본 학자들은 해석하였다. 따라서 조선 합병은 하늘의 뜻이라고 일본 학자들은 주장하였다. 이와 비슷한 도참이 서울 삼각산 꼭대기 바위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방부복과(方夫卜戈) 구혹화다(口或禾多)’라는 글씨다. 방부(方夫)를 조립하면 경(庚)을 가리키고, 복과(卜戈)는 술(戌)을 가리킨다. 경술(庚戌)년에 나라를 옮긴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1910년인 경술년의 한일합방이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일본 학자들은 ‘자치통감’에 나오는 ‘天與不受反受其殃’(하늘이 주는 데도 받지 않으면 반대로 재앙을 받는다)를 인용하면서 조선 병합을 정당화하는 데 도참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정감록’ 굳게 믿었던 강원룡 목사 부친

이는 국가적 차원의 비결이고, 개인적 차원의 비결은 피난지지를 구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게 바로 ‘십승지’다. 지금도 전국의 십승지라고 소문난 곳을 가보면 할아버지나 아버지대에 비결을 믿고 고향의 전답을 팔아 십승지로 이사한 집안 후손들을 만날 수 있다. 예를 들면 풍기·무주·계룡산·변산 등이 그런 곳이다. 19세기말~20세기 초반에 걸쳐 비결파들이 가장 선호하였던 거주지들이다.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이끌었던 강원룡 목사의 자서전인 ‘빈들에서’(1권, 118쪽)를 보면 비결을 믿고 강원도로 이사했던 강목사의 부친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강목사의 고향은 함경남도 남송면 원평리였다. 강목사의 아버지는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주팔자나 풍수도참설을 전적으로 무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정감록’을 신봉했다는 것이다. ‘정감록’에 의하면 앞으로 큰 전쟁이 나는데 그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피난처가 강원도 횡성(橫城)지역이라며 1940년대 초반 가족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피난했다고 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강목사는 횡성으로 찾아가 풍수도참 같은 미신을 믿어서는 안된다며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였다. 그래서 다시 아버지는 함경남도로 되돌아갔다고 되어 있다. 강목사는 자서전에서 ‘그때 부모님을 그대로 그곳에 계시게 했으면 해방후 남북 분단과 전쟁의 와중에서 우리가 서로 갈라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분들이 이북 땅에서 자식도 없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하는 대목이 나온다.

필자가 얻어들은 또 한가지 사례는 서울대 사회학과의 신용하 교수 일화이다. 신교수는 독도 문제나 한일간의 무슨 무슨 협정 때마다 일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인물로 유명하다. 적어도 일본 문제에 관한 한 신교수는 원칙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그는 제주도 태생이다. 신교수의 아버지도 역시 풍수도참을 신봉했던 모양이다. 왜정때 아버지의 주도로 신교수 가족은 계룡산 밑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계룡산 일대가 앞으로 나라의 중심이 되고 새로운 시대의 비전이 가장 먼저 시작되는 곳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고 고개를 넘어 계룡산까지 왔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신교수의 부친도 ‘정감록’과 풍수도참을 신봉하였던 비전파였으며, 일본에 대해 상당한 반일감정을 가졌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 영향이 현재의 신교수 심정의 저변에 면면히 이어지지 않나 싶다. ‘비결 따라 삼천리’. 근세 한국사회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구성하는 상당부분은 ‘비결 따라 삼천리’이다.

儒·佛·仙 모두 포용했던 탄허 스님

다시 비결로 돌아가 보자. ‘조선비결전집’의 목록 가운데 흥미롭게도 ‘숙신비결’은 발견되지 않는다. 일반인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는 비결인 것이다. 숙신(肅愼)은 숙신족(肅愼族)의 숙신을 말한다. 숙신은 만주 동쪽에 거주하던 부족을 가리킨다. 지금의 베이징 위쪽에 해당하는 지역이고 상고시대에는 고조선의 강역에 속하였다. 따지고 보면 숙신족은 우리 민족의 원류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 비결이 지금까지 전해지게 되었는가. 그 배경을 보면 탄허(呑虛:1913~83) 스님이 나타난다. 탄허 스님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자.

필자의 추적에 의하면 ‘숙신비결’은 불교의 탄허 스님을 따르던 일련의 제자 그룹들 사이에서 유통되던 비결이다. 탄허 스님은 불교의 고승이었지만, ‘주역’을 비롯한 역술과 풍수도참에도 깊은 식견을 지닌 독특한 스님이었다. 탄허 스님의 주전공이 ‘화엄경’이었다면 부전공은 ‘주역’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통현장자(李通玄長者)와 청량국사(淸凉國師)의 화엄경 주석을 종합하여 ‘대방광불신화엄경합론’(大方廣佛新華嚴經合論) 49책을 주석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선가적(禪家的) 입장에서 ‘주역’을 주석한 ‘주역선해’(周易禪解) 3권을 펴내기도 하였다. 두 책 모두 학술적으로도 비중 있는 저술이다. 한쪽 손에는 삼라만상을 모두 포용하고 긍정하는 불교철학의 최고봉인 ‘화엄경’을 가지고 있었다면, 다른 한쪽 손에는 삼라만상의 변화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주역’을 가지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는 쌍권총을 차고 있었던 것이다.

탄허는 ‘삼라만상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一切唯心造)와, ‘부분이 즉 전체요, 전체가 즉 부분이다’(一卽多 多卽一)는 도리를 밝히는 ‘화엄경’을 체(體)로 하고, 앞일을 예측하는 ‘주역’을 용(用)으로 하여 나라의 앞일을 예견하면서 1960~70년대 국사 역할을 하였다. 그는 ‘주역’의 육효(六爻)를 사용하여 점을 치는 육효점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주역’이 가지고 있는 점서적(占書的) 전통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것이 바로 육효점이다. 이는 역대 주역을 마스터했던 공자·주렴계·소강절·주자·서경덕·토정과 같은 모든 학자들과 구루(Guru)들이 실천했던 방법이기도 하다. 죽어라 하고 배우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현실에서 활용해야 할 것 아닌가.

탄허는 불교 승려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자문화권의 ‘주역’ 대가들이 실천하였던 그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육효를 뽑아 보았다. 그날의 일진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를 예측하기 위해서였다. 그 방법은 엽전 3개를 던져 괘를 뽑는 방식이었다. 특히 오래 된 엽전이 영험이 있다고 한다. 오래 된 물건일수록 거기에는 신(神)이 붙는다고 본다. 신은 곧 마음이기도 하다. 탄허가 가지고 있던 엽전은 오래 된 ‘상평통보’였던 것 같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상평통보 3개를 한번 던져 하괘를 뽑고, 다시 한번 더 던져 상괘를 뽑으면 6효가 완성된다. 예를 들어 처음에 던진 3개의 엽전 가운데 한개는 앞면이 나오고 두개는 뒷면이 나오면 팔괘 가운데 진괘(震卦)이고, 두번째 던져 3개 모두 뒷면이 나오면 곤괘(坤卦)가 된다. 진괘와 곤괘를 합치면 지뢰복(地雷復) 괘가 되어 그날은 아주 상서롭다고 보는 식이다.

이를 보면 탄허는 불교의 일반 고승들과는 분명히 다른 전통을 잇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가에서는 주역을 은근히 거부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일체가 마음먹기에 달렸는데 무엇하러 번거롭게 괘를 뽑느냐는 것이 일반적으로 주역을 대하는 태도다. 그러나 탄허는 불교 승려이면서도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를 아울러 포용하는 포함삼교(包涵三敎)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포함삼교’는 신라말 최치원이 한 말이다. 최치원 이래 한국의 정신사는 유교 하나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교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다.

삼교를 모두 알아야만 전체를 볼 수 있다. 원효만 알고 퇴계를 몰라서도 안되고, 퇴계만 알고 북창(北窓, 조선 중종때 천문·의학에 능통했던 유학자 정렴의 호)을 몰라서도 이야기가 안된다. 유교로부터는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를 배우고, 불교는 마음의 구조를 밝히는 명심(明心)의 이치를, 선교로부터는 몸을 다스리는 양생(養生)의 비결을 배워야 한다. 탄허는 이 세가지 전통을 모두 섭렵한 고승이었다. 이러한 다양성을 수용할 줄 알았던 탄허에게는 전국의 내로라 하는 방외지사(方外之士)들이 모여들었다. 차별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속인도 있었고 한학의 대가도 있었으며 무술의 고단자, 의학에 밝은 기인, 차력술을 가진 역사, 기문둔갑을 연구한 술사, 정치인, 예술가 등이 탄허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실로 화엄경의 하이라이트인 입법계품(入法界品)을 연상할 만큼 온갖 인간 군상들과 교류하였다. 탄허는 그들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들어 주었다. 이야기 들어 주는 도력도 겸비하였던 것이다. 이들도 또한 탄허를 만나면 이야기가 즐거웠다.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는 즐거움이 배가된다. 일방적이면 재미가 없는 법인데, 한가지 알려주면 한가지를 배울 수 있는 관계였던 것 같다. 옆에서 차 심부름을 하면서 찾아오는 손님들과의 이야기만 들어도 공부가 저절로 되었다고 어느 제자는 술회하였다. 필자도 좀더 일찍 태어나 그 멤버들과 어울렸더라면 좀더 사는 재미가 있었을 텐데….

탄허가 머무르던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서울 대원암(大圓庵), 계룡산 학하리의 자광사(慈光寺)가 바로 그러한 방외지사들이 집합하는 아지트이자 살롱이었다. 아니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성싶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속물스럽게도 돈이 생각난다.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심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독자들이여! 내 책 좀 많이 사주시라! 그래서 내가 살롱이 됐든, 양산박이 됐든 하나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돈 벌어 어디에 쓰겠는가. 이런 데 써야지…. 천하의 건달과 술사 그리고 도인들이여! 다 여기로 오라. 내가 밥상 차릴 테니 우리 한번 놀아보자.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인생. 이때 안 놀고 언제 놀 것인가.

후천개벽 주장한 ‘正易’의 김일부 선생

숙신비결은 탄허가 계룡산 학하리의 자광사에 머무르던 시절 입수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가 1970년대 초반이었다. 학하리는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일명 추성낙지(樞星落地)의 명당으로 불렸다. 추성은 중심이 되는 별이니 북극성을 가리킨다. 북극성이 떨어진 자리니 그 의미가 심중하다. 계룡산 전체가 명당이 수두룩한 곳이지만 탄허는 그중에서도 학하리를 아주 좋아하였다. 자광사 터는 원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공부하던 집성사(集成社) 자리로, 우암이 여기에 주자(朱子) 영정 모셔놓고 공부하던 곳이다. 지금도 우암이 심은 소나무가 남아 있어 옛날의 자취를 전하고 있다.

탄허가 머무르던 1970년대 초반의 자광사에는 괴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 괴물 가운데 한사람이 해운(海雲)이었다. 해운은 탄허보다 대략 7~8년 연상쯤의 나이였으니 지금 살아 있다면 100세 정도 되었지 않나 싶다. 그는 한일합방이 되자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천지를 방랑하였다. 태산을 비롯한 중국의 명산들에 올라가 산세를 굽어보고, 대천을 방랑하면서 수많은 기인들과 만났다. 1920~30년대 중국에서는 독자적인 무력을 보유한 군벌들이 이곳 저곳에서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 군벌들의 우두머리들과 교류하면서 관상도 보아주고 사주도 봐줄 만큼 중국말에도 능통하였다.

그는 1년 열두달 항상 시커먼 중국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누가 욕하더라도 한번도 성질을 내는 법이 없을 정도로 그릇이 컸던 인물이었다. 기분 나빠도 ‘허-허’ 웃고 나면 끝이었다. 배고프면 아무것이나 먹고 잠이 오면 잠자리를 따지지 않고 잘 수 있는 낭인과의 전형이었다. 산에 가면 도인이요, 세속에 내려오면 영락없는 시정잡배였다. 잡배적인 기질은 그가 접촉한 여자만 해도 800명에 달했다는 고백에서도 나타난다. 미국의 소문난 플레이보이 클린턴도 200명 선에 그쳤다고 하니 해운에게 비교하면 족탈불급이다.

사나이 대장부가 1,000명을 채워야 하는데, 그것을 못 채워 좀 아쉽다고 한탄할 만큼 해운은 무애(無碍)의 기질을 지녔던 괴물이었다. 승속에 전혀 걸림이 없었다고나 할까. 그는 중국 일대를 방랑하는 과정에서 주역과 관상, 그리고 수많은 비결을 입수할 수 있었다. 걸림이 없는 성품에다 관상과 주역에도 능통했던 만큼 누구를 만나도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한시(漢詩)에도 대가의 경지에 들어 있었다. 박금규(원광대·한문교육과) 교수가 탄허 스님을 시봉하던 시절이었던 1968년 서울 대원암에서 해운을 만났을 때, 해운이 즉석에서 지어준 칠언절구는 다음과 같다.

水裏月何天上月(물 속에 있는 달이 어찌 천상의 달이겠는가)
鏡中人不案前人(거울 속에 비치는 사람은 책상 앞의 사람이 아니듯)
靜觀形影相依處(고요히 관찰하면 형상과 그림자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無是假時無是眞(가짜가 없으면 진짜도 또한 없는 법이다)

즉석에서 ‘무시가시무시진’(無是假時無是眞)이라는 절창을 읊을 정도의 사상적 깊이와 문장을 지녔던 해운. 그런 해운이었기에 당대의 고승이자 석학으로 알려진 탄허에게도 천연덕스럽게 반말을 사용하였다. 스님이라고 하지 않고 신도가 옆에서 보든 말든 ‘어이, 탄허!’가 호칭이었다. 한마디로 탄허는 해운의 밥이었다. 그런데도 탄허는 해운을 끔찍하게 좋아하면서 돌봐주었다. 필자가 추측하기로는 숙신비결은 바로 해운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옛 고구려 땅인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비결을 접하였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숙신비결을 입수하였던 것 같다. 숙신비결은 탄허에게 넘어갔고, 탄허의 제자들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셈이다.

1960년대에서 1970년에 걸쳐 계룡산파가 운집했던 자광사. 그 자광사에서 이루어졌던 해운과 탄허의 만남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숙신비결보다 ‘정역’(正易)이다. 해운은 ‘정역’에도 전문가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탄허가 해운에게 매료된 부분은 아마도 이 대목이었지 않나 싶다. 구한말 김일부(金一夫) 선생이 저술한 ‘정역’은 기존의 주역에 하도낙서·음양오행·십간십이지·고천문학·사서삼경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책이라서 난해하기 그지없다. 이 분야를 전부 알아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이는 마치 김일부라는 천재가 평생 공부한 것을 요약한 박사논문과도 같아서 범상한 IQ 가지고는 접근이 안되는 학문이다.

‘정역’의 요점을 간단하게 말한다면 지축이 바뀐다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어마어마한 거대담론이 후천개벽설이다. 한·중·일 3국 가운데 후천개벽을 주장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일본·중국에서는 후천개벽이라는 용어가 아예 없다. 그만큼 독창적인 사상이자 예언이 바로 후천개벽설인데, 남들이 이야기 하지 않는 독창적인 예언인 만큼 위험부담은 따른다. 일부 선생이 주장한 후천개벽의 초점은 지축이 바뀐다는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현재 1년 365일이 360일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지구상의 총체적인 변화가 뒤따른다.

그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일본이 물속으로 점점 침몰한다는 내용이다. 지축이 바뀌면 북극의 빙하가 녹아 일본이 가라앉고 동해안도 강릉 일대는 물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반대로 서해안은 점점 융기되어 수천리의 바다가 육지로 변한다고 전망하였다. 탄허 스님은 특히 일본이 물에 잠긴다는 예언을 여러번 강조하였다.
탄허 스님이 밝혀 놓은 그 예언이 ‘주역선해’(周易禪解·교림출판사, 1982년) 3권의 마지막 부분인 427쪽에 나온다.

‘대덕(大德)이 지(地)를 종(從)함이여 지(地)가 좆아 말하도다.(水潮南天하고 水汐北地 등을 의미함)
천일(天一)의 임수(壬水)가 만번 꺾어 반드시 동으로 가도다(극동인 일본을 의미함)
지일(地一)의 자수(子水·陰水)가 만번 꺾어 돌아가도다(북극의 빙하가 필경 일본에 가서 그침을 의미함).’
이 예언의 요점은 북극에서 빙하가 녹아 내리면 해수면이 상승하고, 해수면이 상승하면 일본은 물속에 잠긴다는 내용이다. 탄허의 이 예언은 1970~80년대 신문·잡지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여러번 소개된 바 있는 유명한 예언이기도 하다. 이 예언의 원리적 근거는 일부 선생의 ‘정역’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정역’의 원문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水潮南天 水汐北地(물이 남쪽 하늘에 모여들고, 물이 북쪽 땅에서 빠짐일세)
天一壬水兮萬折必東(하늘의 임수는 만번 꺾여도 반드시 동으로 가고)
地一子水兮萬折于歸(땅의 자수는 만번 꺾어도 임수 따라 가는구나).’
김일부는 이미 1,880년대 중반 계룡산 국사봉 토굴에서 ‘정역’을 완성하면서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 일본이 망한다’는 예언을 하였던 것이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압박에 힘겨워하던 조선의 수많은 도꾼들은 그 희망의 메시지를 찾아 계룡산 국사봉으로 모여들었고, 아마 소시적의 해운도 그 도꾼들과 섞여 계룡산을 순례하면서 정역의 메시지를 접했던 것 같다.

피끓는 젊음을 가지고 있던 해운은 도저히 국내에서만 살 수 없었다. 광대한 천하가 열려 있는 중국 대륙과 만주 일대로 정처없는 방랑자의 인생을 살았고, 그 결과 ‘숙신비결’과 같은 비결의 세계를 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전 지구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본이 침몰한다고 하는 정역의 세계를 탄허에게 전달해 준 인물은 해운이라는 계룡산파의 이름 없는 술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근래에 외신을 통해 들어오는 뉴스를 보면 한반도 크기만한 북극의 빙하가 녹고 있고, 히말라야의 빙하도 급속도로 녹아내려 네팔과 티베트 같은 히말라야 주변 국가들이 홍수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한다. 일본이 절대로 침몰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이렇게 놓고 보면 19세기 후반 계룡산 국사봉의 허름한 토굴에 앉아 북극의 빙하가 녹을 것이라고 예언한 김일부와, 방랑자 해운, 그리고 이를 국민에게 고한 탄허는 같은 노선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들은 모두 국운융창이라는 계룡산파의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탄허는 일본 침몰 외에도 여러 가지 예언을 하였다. 굵직굵직한 예언을 간추리면 ‘월남전에서 미국 망한다’(패전한다) ‘울진·삼척에 공비가 침투한다’ ‘박정희 죽는다’ ‘전두환 죽는다’ 등이었다. 이 가운데 ‘전두환 죽는다’는 예언은 탄허가 1980년대 초반 텔레비전을 보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탄허가 보기에 당시 전두환에게는 신검살(神劍殺)이 내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옆의 제자들 보고 “전두환 죽게 된다”는 말을 여러번 하였다. 신검살이란 칼에 맞아 죽는다는 살이다.

그러나 탄허가 전두환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어서 만나고 온 뒤에는 “직접 얼굴을 보니 신검살이 안보였다”면서 “그거 참 이상하다”며 제자들에게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전한다. 후에 아웅산 폭발 사건으로 거의 죽을 뻔했다 살아났으니 탄허의 예언이 전혀 맞지 않은 것은 아니다. 탄허 예언이 맞지 않은 사례는 1980년대 초반 대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는다는 예언이었다. 그해에 태풍이 몰아쳐 남해안 일대에만 머무르다 돌아간 일이 있었다.

탄허가 자광사에 머무르던 1970년대 후반의 일화다. 자광사에는 당시 국회의원인 윤길중씨가 자주 출입하였다. 윤길중씨는 정치인이면서도 선비가 지녀야 할 필수 교양과목인 서예와 바둑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한시를 좋아해 탄허 스님과는 통하는 면이 많았다. 탄허 스님도 바둑 실력이 상당해서 아마 5~6단들과 두어 이기는 경우가 많을 정도 실력이라서, 아마바둑의 고수인 윤길중과는 특별히 친했다고 한다. 하루는 윤길중이 자광사에 오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그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장난기가 발동한 탄허는 지금 윤길중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알아맞추기 위해 엽전 3개를 던져 괘를 뽑아 보았다. 탄허는 그 괘를 보고 윤길중이 현재 어디쯤 오고 있다고 예측하였다. 옆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과연 그 예측이 맞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 보니 그 시간에 탄허가 말한 지점을 윤길중이 통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제자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탄허가 1960년대 후반 오대산 월정사에 주석하고 있을 때다. 당시 고려대학교 철학과 남녀 학생 열서너명이 하계 수련대회를 월정사에서 하였다. 수련대회가 끝나는 날 학생들은 곧바로 오대산을 내려가려고 서둘렀다. 이를 바라보던 탄허가 오늘은 산을 내려가지 말라고 학생들을 말렸다. 그러나 학생들은 여름이라 땀으로 범벅이 되고, 샤워시설도 없는 절에서 더 머무르기가 불편하였기 때문에 그 말을 듣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 학생들은 계곡을 내려가다 갑자기 호우를 만났다. 계곡물은 급류로 변해 있었다.

위험한 상황에서 서로 손을 부여잡고 계곡 물을 건너던 학생 중 하나가 미끄러지자 나머지 학생들도 따라서 미끄러졌다. 열서너명의 학생들 모두 급류에 떠내려가 희생당하였던 것이다. 그후 근처 동네 사람들은 사고 현장의 계곡 부근에는 접근하지 못하였다. 밤에 산을 올라가면 귀신들이 쑥덕거리는 소리와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남녀 귀신들이 바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밤에 출입을 못한 나머지 탄허 스님에게 어떻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결국 탄허 스님이 원혼들을 달래는 비문을 써주면서 그 현상은 사라졌다고 한다. 그 비문은 지금 월정사 옆에 남아 있다.

이런 귀신 이야기를 하면 황당하다고 할 사람도 많겠지만 귀신은 있다. 겪어보면 안다. 다음번에 귀신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겠지만 인간은 육체를 벗으면 모두 귀신이 된다. 귀신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집중 능력이 없는 범부가 죽으면 귀신급에 머무르고 말지만, 수도하던 도인이 죽으면 산신(山神)으로 업그레이드되거나 그 지역을 지키는 토지신(土地神)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 월드컵에 참여한 FIFA 랭킹 1위인 프랑스가 한국에 와서 죽을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나는 한국의 토지신들이 프랑스 팀에 한방 먹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먹는 음식인 보신탕 가지고 프랑스 사람들이 그렇게 한국사람을 능멸하더니 한국에 와서 대가를 치른 것이다. 한국의 토지신들은 자존심이 강해 그냥 두지 않는다. ‘왜 남의 음식 가지고 야만인이네 어쩌네 하면서 사람 모욕을 주느냐. 그래 좋다. 너희들 한국에 왔으니 한방 먹어 보아라!’가 한국 산신들과 토지신들의 공통된 심정 아니었을까 하고 혼자 상상해 본다. 나는 요즘 보르도산 와인도 끊어 버렸다. 그 대신 고창에서 나오는 복분자술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