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에 간다면 다산 정약용을 비켜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18년의 유배 기간에 그가 강진 땅에 드리운 그늘이 넓고도 깊은 까닭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진에 꼭 다산만 있는 건 아닙니다. 어쩌면 다산의 그늘에 강진의 더 많은 것이 가려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수많은 이야기가 딸려 올라왔으니까요. 봄기운이 완연한 강진 땅으로 갑니다. 다산의 발자취를 좇아 정원을 거닐고, 동백꽃 낭자한 숲에 들었으며, 오랜 공력으로 쌓은 돌탑 앞에 섰고, 늙은 나무한 그루를 만나러 시골 마을의 골목을 기웃거려 보았습니다. # 백운동 정원, 그 비밀의 공간 강진을 여행하다 보면 도처에서 다산 정약용을 만난다. 다산이야말로 강진 땅에다 숨을 불어넣고 스토리를 부여하는 압도적인 인물이다. 그의 자취가 새겨진 곳은 어김없이 관광 명소가 된다. 18년의 유배 중 10년을 보낸 다산초당이야 말할 것도 없고, 혜장 선사와의 만남의 자취가 새겨진 백련사도 마찬가지다. 유배 직후 첫 번째 처소였던 주막집의 한 칸 방에 현판을 내걸었던 사의재 역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지나간 자리마다 명소가 되니,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 스타를 앞세운 스타 마케팅과 그리 다를 게 없다. 강진에서는 도리 없이 ‘다산’이지만 여기서는 다산초당처럼 일러주지 않아도 다 아는 명소는 건너뛰기로 한다. 한 해 중 지금이 절정인 백련사의 동백숲만큼은 아무래도 아쉬우니 따로 뒤에서 얘기하기로 하자. 다산의 발길이 닿은 곳 중에서 백련사에 앞서 그 빼어남을 이야기할 곳이 있으니 바로 ‘백운동 정원’이다. 백운동 정원은 월출산의 기묘한 암봉을 병풍처럼 두른 기가 막힌 자리에 있다. 정원 주위는 붉은 꽃을 떨구고 있는 아름드리 동백숲으로 어둑하고, 담 밖에는 물길을 끌어들여 만든 계곡이 흘러내린다. 백운동 정원의 주인은 조선 중기의 처사 이담로. 그가 정원을 만든 지 100년쯤 지난 뒤에 유배 중이던 다산이 찾아들었다. 때는 1812년 가을. 다산은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 등반을 마치고 백운동 정원에서 하룻밤 묵었다. 다산의 막내 제자가 정원의 주인 이담로의 6대손이란 인연 덕이었다. 다산은 백운동 정원의 아름다움에 적잖이 감동했던 모양이었다. 다산을 단번에 매료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은 딱 하룻밤 묵어갔으면서도 정원 주변의 빼어난 풍경 12곳을 정해 ‘백운동 12경(景)’을 정하고 초의선사에게는 백운동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뒤 자신의 친필 시를 한데 묶어 ‘백운첩’으로 남겼다. 다녀간 뒤에도 자주 이곳을 그리워하면서 그림을 꺼내 봤을 만큼 다산은 백운동 정원의 경관을 잊지 못했다.
# 풍류의 정원, 시와 그림으로 지켜지다 백운동 정원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방치되다시피 했다. 허물어진 담과 쓰러져가는 농가는 그곳이 정원이었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 없게 했다. 그러던 것이 정원 발굴과 복원 작업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다산이 남기고 간 백운첩이 큰 역할을 했다. 다산이 백운동의 아름다움을 그림과 시로 남기지 않았다면, 그만큼의 감동을 받지 않았다면 과연 여기에 이렇게 빼어난 정원이 있었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백운동 정원 주변은 지금 온통 동백꽃으로 가득하다. 지난겨울의 혹한에 꽃을 피우지 못한 동백들이 한꺼번에 피기 시작했다. 절정의 순간에 툭 떨어진 동백꽃의 핏빛이 정원으로 들어서는 계곡에 낭자하다. 여기 백운동 정원의 동백은 다른 곳의 동백과는 좀 다르다. 꽃잎이 두껍고, 꽃이 크다. 색감도 훨씬 짙다. 감히 말하건대 다산은 백운동 정원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백운동에 매료되기에는 가을날 하룻밤은 너무 짧다. 결정적으로 다산은 봄날의 정원에서 선혈처럼 붉은 동백의 낙화를 보지 못했다. 딱 이맘때 백운동 정원을 가보면 이 말에 수긍하게 되리라. 정원으로 이어지는 계곡 물가에 후드득 떨어진 동백꽃을 마주하게 된다면 말이다. 동백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지금 강진 백련사 동백숲의 동백도 절정이다. 딱 이맘때쯤 강진을 통틀어 첫손에 꼽히는 명소가 백련사다. ‘동백꽃’ 때문이다. 백련사 동백숲에서는 지금 동백의 낙화가 한창이다. 화려하게 꽃 지는 풍경이 예년보다는 좀 못한 듯해 아쉽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비장하면서도 처연한 낙화의 풍경을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 아무것도 없어 더 매력적인 곳
번잡스러운 건 하나도 없이 그저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 옴천이 가진 풍경의 전부다. 청정한 자연 속에서 길러낸 민물새우로 담그는 토하젓 말고는 변변한 산물도 없다. 농담을 좀 섞자면 옴천에서 가장 유명한 건 ‘옴천면장’이다. 전라도에는 속담처럼 쓰는 ‘옴천면장 맥주 따르듯이…’란 말이 있다. 누가 맥주잔에 거품만 따를 때 하는 얘기다. 혐의는 두 가지다. 하나는 면장이 맥주 따르는 방법도 모를 정도로 촌 동네라는 것. 다른 하나는 면장이 맥주한 병으로 여덟 잔을 따라야 할 정도로 가난하다는 것. 누군가는 ‘옴천면장 맥주’ 브랜드로 맥주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누구는 맥주 한 병으로 몇 잔을 따르는지 대회를 열어 기네스북에 등재하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옴천 주민들은 어느 쪽이든 자신들을 비하하는 듯해 불편하다. 옴천이란 지명은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옴’이란 글자를 지명으로 쓰는 곳은 전국에서 여기밖에 없다. ‘옴’은 여러 종교의 진언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음절이다. 힌두교도들은 기도나 명상을 할 때 이 음절을 외고, 불교도 의례에서도 자주 사용한다. 반야심경도 첫 글자가 옴으로 시작한다. 한자로는 ‘머금을 암(唵)’ 자를 차용해 쓴다. 그렇다면 이곳에 왜 옴천이란 지명이 붙었을까. 그 이유인즉 이렇다. 옴천면을 끼고 흘러내리는 물길인 옴천천의 본래 이름이 연천(燕川)이었는데, 주민들이 질병으로 고생하자 불경에 나오는 옴(唵) 자를 써서 옴천천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것이다. 옴천이란 지명이 기원과 의탁의 이름이라면, 그곳에 절 하나 들어서는 것도 썩 잘 어울리는 일이겠다. #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절집 두 군데
옴천사 일주문에서부터 돌탑이 도열해 있다. 기중기가 아니면 쌓기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것부터 무릎 높이를 겨우 넘는 작은 것까지 어마어마한 숫자의 돌탑이 경내 곳곳에 불상과 함께 세워져 있다. 손수 쌓은 돌탑이나 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다. 아무렇게나 쌓으면 돌탑은 몇 층 올리지 못하고 무너져버린다. 돌탑을 높이 쌓는 데는 여간 정성이 필요한 게 아니다. 절집이 속한 ‘선각종’이란 종파는 낯설지만, 다 제쳐놓고 탑을 쌓은 이가 바친 노고 앞에서 탄성을 거둘 수 없다. 군동면 풍동마을의 남미륵사는 아예 시골 마을 전체를 사찰로 삼다시피 한 절집이다. 절집의 경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상과 탑들로 가득해 독특한 느낌을 준다. 마치 무협지의 판타지 공간을 재현한 것 같은 분위기라고나 할까. 사찰 입구에는 거대한 코끼리 상을 놓아 두었고, 일주문에서 경내에 이르는 길의 철쭉나무 사이사이에 나한상 500개를 배치해 놓았다. 만불전에 모신 불상의 수가 자그마치 2만3000개다. 경내에는 다양하고 복잡한 건축물과 거대한 불상, 비석 등이 온통 뒤섞여 있다. 36m 높이의 청동 아미타불 좌상과 용을 딛고 선 석조 관음보살상, 관음전 등은 그 크기만으로도 입이 딱 벌어진다. 이 엄청난 불사를 단 한 명의 스님이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불가사의하다. 종교적인 시선으로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관광 사찰’임을 자임하고 있는 만큼 가볍게 볼거리로 들러 보는 것을 추천한다. 남미륵사 경내에는 1000만 그루가 넘는 철쭉이 심겨 있어, 꽃이 필 때면 사찰 전체가 붉은 철쭉으로 뒤덮인다. # 범상찮은 기운의 향나무 한 그루
마을이 자랑해 마지않는 귀기 넘치는 나무는 마을 안쪽의 민가 마당에 있는 700여 년이 넘는 수령의 향나무다. 이름하여 ‘양반 향나무’다. 조선 영조 때 왕명을 받아 마을에 당도한 벼슬아치들이 말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향나무 가지에 갓이 걸리자 할 수 없이 말에서 내렸다고 해서 이후부터 ‘양반’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높이는 5m에 직경은 1.5m 정도. 크기로만 겨룬다면 압도적인 거목이라 할 수 없지만, 죽은 고목을 감고 뒤틀며 자란 모습에서는 범상찮은 기운이 느껴진다. 그깟 나무 한 그루가 뭐 볼 게 있겠냐 싶지만, 막상 가보면 나무가 뿜어내는 느낌이 강렬하다. 16년 전쯤 한 조경업자가 나무 값으로 2억3000만 원을 불렀다고 했다. 오래된 향나무가 비싸다지만, 그 정도 가격이면 횡재나 다름없었다. 나무 주인은 처음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랬다가 하루 자고 나서 마음이 바뀌었다. 그 돈 없어도 살지만, 나무 뽑힌 자리를 보면서는 못 살 것 같았던 모양이었다. 김홍순 씨는 그렇게 향나무와 함께 살다가 일흔여덟의 나이로 5년 전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아들 김명식 씨가 향나무를 돌보고 있다. 철제 울타리 안에서 귀하게 자라는 앞마당의 향나무 말고 뒷마당에도 제법 굵은 향나무들이 어둑한 그늘을 드리웠다. 마당 장독대의 화단에는 분재가 가득하다. 마을을 둘러보니 이 집뿐만 아니다. 집집이 마당 한쪽을 우거진 숲으로 가꿨으니 시골 골목을 걸으면서 나무를 구경하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 봉황과 용이 함께 깃들인 산 나무 얘기로 이야기를 이어보자. 강진 병영면의 성동리에는 송학리 향나무보다 백 살쯤 더 먹은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 32m에다 둘레 7.2m의 거목이다. 은행나무는 하멜표류기에 등장한다. 대만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다 태풍으로 배가 좌초하는 바람에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 그는 350여 년 전 강진 병영에서 7년 동안 억류 생활을 했다. 하멜은 표류기에서 병영성 인근에서 큰 은행나무를 봤다고 썼는데, 그 나무가 바로 이 나무다. 은행나무는 그때도 450세쯤 되는 거목이었다. 병영성에서 고된 노역에 동원됐던 하멜은 함께 억류됐던 32명의 일행과 함께 이 은행나무 아래 바위에 걸터앉아 고향을 그리워했다. 은행나무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방인들의 한숨, 그리고 그들이 겪었던 파란만장한 삶을 봤을 것이다. 성동리 은행나무 인근에는 하멜 기념관이 있다. 하멜이 표류했다가 고국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이야기를 전시해놓았다. 병영성으로 내려온 하멜 일행의 표류부터 여수를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하멜이 노역을 했던 병영성도 빼놓을 수 없다. 병영성은 지금으로 치면 조선의 육군 총사령부 격이다. 성곽만 복원됐을 뿐 성안은 빈터로 남아 있지만, 성벽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느티나무와 팽나무 거목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강진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곳에 대한 얘기다. 덕룡산과 주작산. 능선이 맞붙은 두 개의 산은 거친 기암괴석과 암봉이 절경을 이룬다. 특히 암봉 사이로 진달래가 피는 이즈음이 덕룡산과 주작산이 최고의 경관을 보여주는 때다. 두 산을 이어 종주하려면 7시간이 넘는 노고를 바쳐야 한다. 잠깐 맛만 보겠다면 차로 주작산 전망대에 오르면 된다. 전망대는 주작산 자연휴양림의 임도 끝에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주작·덕룡산의 능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전망대에서의 일출이 이름났다지만, 저물 무렵의 풍경도 못지않다. 다산초당이 깃들어 있는 만덕산과 봄빛이 완연한 들녘 그리고 푸른 강진만을 내려다보면서 여행을 마무리하기 딱 좋은 곳이다. 저물어가는 강진 땅을 오래 굽어봤다. 강진은 다산이 있어서 좋지만, 다산을 지워도 모자람이 없다. ■ 여행정보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전남 강진은 내로라하는 관광지는 많지만, 의외로 숙소 사정이 좋지 않다. 가족 단위 여행이라면 강진군에서 운영하는 주작산자연휴양림(061-430-3306)을 추천한다. 강진읍에서는 프린스행복호텔(061-433-7300)이 가장 낫다. 강진에는 농가에서 숙박과 식사를 체험하는 ‘푸소(FUSO)’ 체험이 있다. 푸소란, 필링-업(Feeling-Up), 스트레스-오프(Stress-Off)의 줄임말이기도 하고 기분을 ‘풀다’의 사투리로 청유형의 뜻도 있다. 일정과 코스, 체험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데 보통 1박 2일 기준 조식 포함 1인 5만 원 정도. 2박 3일은 9만 원 안팎이다. 월출산 아래 한옥 펜션들이 모여 있는 달빛한옥마을의 ‘초연재’(010-2682-6898) 등에서 푸소 체험을 해볼 수 있다. 강진에는 고르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먹거리가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강진 한정식.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명성을 누리는 한정식집이 한두 집이 아니다. 대표적인 곳이 예향(061-433-5777), 청자골종가집(061-433-1100), 해태식당(061-434-2486), 다강한정식(061-433-3737) 등이다. 1인 1만 원 이하로 받는 백반집 밥상도 반찬 가짓수와 맛이 한정식에 버금갈 정도여서 황송하다. 백반집은 보통 2인부터 손님을 받는데 2인 상은 2만 원, 3인부터는 1인당 9000원을 받는 설성식당(061-433-1282)의 백반이 가장 이름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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