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의 화신(花信)이 가장 먼저 당도하는 강(江)이 섬진강입니다. 섬진강이야말로 굽이굽이 봄으로 흘러드는 강입니다. 섬진강변의 매화는 첫 꽃을 느지막이 터뜨렸으면서도 도무지 바쁜 기색이 하나도 없더군요. 강변을 끼고 이제 막 드문드문 피어난 매화꽃을 찾아다니다 조바심에 섬진강에 물을 보태는 지리산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섬진강의 시작은 전북 진안의 데미샘이지만, 섬진강물에 맑은 봄의 기운을 불어넣는 건 물길 가까이에 있는 지리산입니다. 지리산 아래 하동 땅에서 눈 녹은 물이 계곡을 넘쳐 섬진강으로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물소리가 얼마나 청아하던지요. 두 눈을 가리고 듣는데도 ‘봄날의 물소리’라는 걸 단박에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리산 아래 하동의 맑은 계곡 이름이 ‘화개(花開)’입니다. ‘꽃이 피다’는 뜻이지요. ‘화개장터’로 익숙한 그곳, 맞습니다. 조선 후기의 지리책 동국여지지에 적힌 화개천을 묘사한 문장을 펼쳐 봅니다. “양쪽 언덕에 핀 복사꽃은 길을 끼고 붉었으니, 여기가 무릉동천인가 의심하게 만든다.” 화개는 그때나 지금이나 꽃으로 이름났던 모양입니다. 지금 화개의 꽃은 터널을 이룬 벚꽃인데, 그때는 복사꽃이었군요. 화개천의 절정의 시간은 누가 뭐래도 천변의 벚꽃이 흐드러질 때지만, 몰려든 인파와 차량으로 북새통을 이루는 그 무렵보다 꽃은 없지만 호젓한 지금이 고요한 봄날을 느끼기에는 더 좋습니다. 하동의 봄은 지리산과 섬진강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동이 끼고 있는 남녘 바다에서도 봄기운은 물씬 느껴집니다. 바다를 발아래 두고 우뚝 솟은 높이가 849m인 하동의 금오산은, 그 자체로 쪽빛 남해와 다도해 경관을 파노라마 시야로 내려다볼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전망대입니다. 파도처럼 일어선 지리산의 수많은 연봉을 다 제치고, 주저 없이 금오산을 하동의 봄 전망대로 꼽은 건 거기서 보는 빼어난 경관과 270도가 넘는 거대한 시야각 때문입니다만, 수고 없이도 거기 닿을 수 있다는 이유로 보탠 가산점의 힘도 적잖았습니다. 이른 봄날에 떠나는 여행은 어느새 우리 곁에 매복한 봄을 관측(觀測)하거나 혹은 척후(斥候)하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봄으로 그득한 강과 바다는 물론이고 산까지 모두를 두루 거느리고 있는 하동이야말로, 봄을 정찰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입니다.
# 대숲 아래 봄꽃, 그 아래 차나무 경남 하동에서 봄볕이 가장 따스한 곳은 지리산 아래 화개계곡 일대다. 지리산 남쪽 화개천의 물길을 끼고 있는 계곡에는 따스한 봄볕이 오래 머문다. 화개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건 그 볕을 받아서 반짝이는 차밭이다. 물길을 끼고 있는 화개천 변에도 차밭이 있고, 가파른 경사가 턱을 치는 비탈면에도 차밭이 있다. 산자락의 거의 정상까지 차밭이 구렁이처럼 기어 올라간 곳도 있다. 계곡 전체가 아예 하나의 차밭을 연상시킬 정도로 계곡 안에는 크고 작은 다원들이 들어서 있다. 차밭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다. 화개골에는 심어 길러 거두는 차밭도 많지만, 100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와 대를 이으며 산비탈 바위틈에 저 스스로 뿌리를 내려 자라난 야생 차나무도 적잖다. 보성 등지의 재배형 차밭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건 그래서다. 야생 차나무를 가려내는 건 어렵지 않다. 바위 뒹구는 가파른 비탈면에서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건 모두 야생 차나무라고 보면 된다. 아직 새잎이 날 때는 아니지만 봄비를 맞은 찻잎이 제법 푸르다. 차밭보다 더 초록이 짙은 건 계곡 이곳저곳에서 모여 자라는 대나무들이다. 봄의 기미를 대나무가 가장 먼저 아는 것일까. 맑은 초록의 댓잎이 싱그럽다. 차밭의 두둑에는 초록의 새순들이 번져가고 있다. 냉이와 쑥이 머리를 내민 사이로 새끼손톱만 한 개불알꽃도 환하게 피었다. 움트는 새싹을 들여다보니 발끝이 간질간질해진다. 아예 봄볕이 쏟아지는 차밭 한가운데 매화나무와 벚나무 몇 그루를 심어 기르는 다원도 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아 나무는 앙상하지만, 이제 보름쯤 뒤면 새로 돋은 잎이 융단처럼 펼쳐지는 차밭 위에서 폭죽처럼 꽃을 피워낼 것이고, 뒤이어 남도의 가장 아름다운 봄날이 여기를 지나가리라. 첫 찻잎을 따는 건 아마 그 꽃이 분분히 질 무렵일 것이다. 꽃그늘 아래서 따낸 첫 차의 맛은 어떨까. 차 향에 꽃내음이 묻어나지는 않을까.
# 꽃피는 계곡에서 신선이 노닐다 화개계곡에서 물길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가면 신선이 노닐던 곳, 곧 선유동(仙遊洞)이다. 선유동은 통일신라 때 최치원이 은거했다고 전해지는 곳. 선유동으로 들어서는 물길 옆에는 최치원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면서 귀를 씻었다는 바위 ‘세이암(洗耳岩)’이 있고, 그가 은거했다는 곳을 이르는 ‘삼신동(三神洞)’을 새긴 각자 바위가 있다. 지리산으로 들어설 때 꽂아놓고 간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자랐다고 전해지는 푸조나무도 있다. 화개골에는 쌍계사와 칠불사, 국사암 등의 절집과 암자가 있다. 쌍계사는 잘 알려진 절집이지만, 따지고 보면 절보다는 ‘가는 길’이 훨씬 더 이름났다. 쌍계사 가는 길이 이른바 ‘십리벚꽃길’이다. 벚꽃이 필 때면 서로 가지를 뻗어 맞잡아 황홀한 꽃터널이 되는 길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관심도 절보다 길이다.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해도 벚꽃 철이면 몰려든 상춘객들로 고즈넉한 절집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 그러니 적요한 쌍계사를 찾는다면 봄기운이 막 번지기 시작한 지금이 제격이다. 쌍계사와 칠불사, 국사암은 모두 봄볕이 환하게 드는 자리에 앉아 있다. 산문에 들어서자마자 완연한 봄기운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건 순전히 환한 볕 때문이다. 지리산이 워낙 큰 데다 그늘도 깊으니, 절집을 앉히자면 볕이 따스한 자리부터 찾았을 것이다. 쌍계사에는 ‘진감선사대공령탑비’가 있고, 칠불사에는 한 번 불을 때면 100일 동안 온기가 남아 있다는 ‘아(亞)’ 모양의 아자방이 있다. 칠불사 아자방은 아쉽게도 지금 해제 복원 중이다. 하기야 이런 것들은 다 보지 못한대도 어떨까. 절집으로 들고 나며 지리산의 깊은 품에 들어 계곡의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따스한 봄볕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거기 가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 수몰나무가 그린 그림…악양의 동정호 하동에서 봄날의 으뜸가는 명소로 꼽히는 곳은 소설 ‘토지’의 무대를 재현한 악양면 평사리의 ‘최참판댁’이다. 최참판댁은 허구의 소설을 TV 드라마로 제작하면서 조성해놓은 세트장을 관광지로 개방한 곳이다. 한낱 촬영용 세트장에 불과하지만,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건 우리 삶의 원형적인 풍경을 간직하고 있어서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땅과 함께했던 삶의 모습이 최참판댁과 평사리의 너른 들에 있다는 것이다. 최참판댁을 찾아갔다면 악양의 들판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한산사와 고소산성도 빼놓지 말자. 자그마한 절집인 한산사 앞마당의 전망대에서는 평사리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들판의 한가운데 눈에 담기는 자그마한 호수 동정호가 있다. 악양면의 지명을 중국 후난(湖南)성의 웨양(岳陽)에서 따왔듯이 호수의 이름도 후난성의 명소인 둥팅(洞庭)호에서 가져다 붙인 것이다. 동정호는 소설 ‘토지’를 주제로 하는 지방 정원으로 선정돼 내년까지 전통과 자연이 공존하는 명소로 꾸며지고 있다. 지난 2년여의 공사를 통해 호수 면적을 3분 1 이상 넓히고 호안을 따라 산책로를 조성해놨다. 동정호에서 인상적인 것은 정자 악양루와 어우러지는 수몰나무들이다. 비가 내린 뒤에 물에 잠긴 나무들이 수면 위에 거울처럼 비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평사리 들녘을 더 장쾌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가야 시대의 산성인 고소산성이다. 한산사에서 가파른 산길을 따라 20분 남짓 걸으면 산성에 오를 수 있다. 고소산성을 딛고 올라서면 섬진강의 물굽이와 악양의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산성에서 멀리 보이는 섬진강은 화려하거나 빼어나지 않다. 멀어서 봄꽃이 다 지워진 섬진강이 그려내는 풍경은 오히려 수더분하고 밋밋한 쪽에 가깝다. 섬진강의 진짜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렇듯 멀리 물러나서야 비로소 섬진강이 강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 하동에서 만난 쪽빛 봄 바다 하동의 봄 풍경은 섬진강과 지리산에만 있는 건 아니다. 하동은 쪽빛 봄 바다의 경관도 품고 있다. 그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하동의 금오산이다. 금오산 정상에 오르면 늘 미안하다. 누구에게 미안해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해발고도 849m의 금오산 정상까지 차를 타고 단숨에 올라 일대의 경관을 내려다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차에서 내려 대여섯 걸음이면 여수와 남해, 사천 일대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 설 수 있다. 한껏 더 게으름을 피우자면 차 안에서 창문만 내리고 이런 경관을 굽어볼 수도 있다. 차를 타고 금오산으로 오르는 길은 임도처럼 거친 것도 아니다. 대부분 구간에서 교행이 가능한 아스팔트 포장도로다. 정상 아래 전망대 주위에는 주차공간도 넉넉하다. 지난해 하동군에서 금오산 전망대에다 레저시설인 집와이어를 만들면서 잘 다듬어 놓은 시설들이다. 널찍한 나무 덱으로 조성한 금오산 전망대 위에서 펼쳐지는 바다 풍경은 말 그대로 ‘일망무제’다. 여기서 보는 시야각이 270도가 넘는다. 풍경을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어 카메라 패닝 샷처럼 양쪽으로 고개를 돌려가면서 봐야 할 정도다. 전망대에 서면 일출·일몰을 다 볼 수 있다. 해가 바다 위로 뜨고 지는 건 아니지만, 아침 볕에 반짝이는 바다와 붉게 물든 저물녘의 바다 풍경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 보면 바다에도 봄의 색이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가까이서는 황량한 겨울 색에 가까웠던 풍경들이 이쯤 올라 멀리서 바라보니 초록의 기운이 완연하다. 해안가의 구릉에는 수채화 물감을 찍어 바른 듯 초록색이 번져가고 있다. 봄 바다의 빛깔도 다른 계절보다 더 진한 쪽빛이다. 이른 봄에 떠나는 여행은 매복한 봄의 자취를 찾아가는 정찰과 척후와 다를 게 없다. 적의 동태를 알아내려면 대개 다가서야 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멀리 물러나야 보이는 것들도 있다. 어느 결에 찾아온 봄을 만나는 방법도 다르지 않다. ■ 여행정보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매화가 필 때도 그렇지만 벚꽃이 본격적으로 개화하면 화개골은 꽃 사태가 난다. 문제는 십리벚꽃길의 교통체증이 극심하고 행락객들로 북새통이 된다는 것. 화개골의 꽃놀이를 즐기고 싶다면 숙소를 가까운 곳에 정해 놓고 행락객들이 드문 이른 아침이나 초저녁 무렵에 둘러보는 방법이 최고다. 화개골에는 계곡을 끼고 펜션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추천할 만한 숙소는 켄싱턴 리조트 지리산 하동(055-880-8000)이다. 켄싱턴 리조트 지리산 하동은 2015년에 개관한 객실 115개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리조트다. 16평 스튜디오 객실부터 방 3개짜리 35평까지 4가지 타입의 객실이 있다. 차분한 분위기도 괜찮지만 무엇보다 훌륭한 것은 객실에서의 조망이다. 객실에서 화개계곡과 차밭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인근 구례의 산수유축제와 광양의 매화축제 시기에 맞춰 숙박패키지상품도 내놨다. 패밀리 객실 1박에 평일 기준 7만4000원부터. 섬진강을 끼고 있는 하동에서는 재첩국과 참게매운탕이 이름난 먹거리다. 참게를 껍데기째 갈아 곡물을 넣고 함께 끓여내는 부드러운 참게가리장도 별미다. 19번 국도변에 참게와 재첩을 내는 식당이 늘어서 있는데, 대부분 식당의 맛이 평준화돼 어디를 들어가더라도 비슷하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쪽으로 들어서는 길 초입의 ‘쌍계명차’(055-883-2440)는 차 판매장과 다구 전시관 등을 두루 갖추고 있는 모던한 느낌의 대형 찻집이다. 차 한 잔 가격이 5000원을 웃돌아 부담스럽지만 만족도는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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