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첫 봄꽃을 만났습니다. 남도 땅에서 꼬박 사흘을 머물며 찾아 헤매다가 만난 첫 꽃이었습니다. 전남 여수의 금오산 남쪽 자락. 길도 없는 숲 속을 헤매다가 복수초 군락과 마주쳤습니다. 콩짜개 초록 덩굴이 펜화처럼 선 소사나무 밑동을 휘감고 있는 숲에서 마른 낙엽 사이로 살며시 꽃대를 올린 복수초꽃이 샛노란 얼굴로 피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한두 송이뿐이던 꽃이 이내 무더기로 피어난 군락이 됐습니다. 여기 이렇게 꼭꼭 숨어서 흔전만전 피어난 줄도 모르고 여수 돌산도의 등지느러미를 딛고 가는 돌산 종주 코스를 밟으며 여덟 개의 산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봄꽃은 자취도 없었습니다. 겨우내 피고 지는 동백나무마저 올해는 혹한으로 꽃눈이 얼어 꽃 한 송이도 없는데, 벌써 무슨 봄꽃 타령이냐는 자책이 들 정도였습니다. 일찍 핀 꽃들도 혹한에 다 얼어버렸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막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때, 금오산의 양지바른 산자락에서 복수초꽃과 만났던 겁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어렵게 만난 봄꽃이 얼마나 반갑고 감격스러웠는지는 짐작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한 시인은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온다고 했지만, 기다리지 않기에는 지난겨울의 추위가 너무 혹독하고 길었습니다. 숲 속에 노랗게 피어난 복수초꽃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세히 보고자 했을 뿐 예를 갖추려던 건 아니었는데, 노란 꽃술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경건해졌습니다. 봄이 드디어 남도 땅에 상륙했습니다. 봄은 곧 꽃입니다. 꽃이 피어야 비로소 봄입니다. 남녘에 복수초꽃이 피었으니 이제 죄다 봄입니다. 복수초 핀 숲 사이로 쏟아지는 볕도 이제부터는 ‘봄볕’이고, 능선의 소사나무 숲을 지나는 바람도 ‘봄바람’이며, 향일암 뒤편의 기암 위에서 내려다본 바다도 ‘봄 바다’입니다. 이렇게 봄이 시작됐으니 이제 돌산 종주의 숲길에는 복수초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투며 변산바람꽃과 너도바람꽃, 노루귀가 피어나겠지요. 남녘의 너른 들판이 초록으로 물들어가며 새끼손톱보다 작은 개불알풀꽃이 피어날 때면 매화도, 그리고 벚꽃도 폭죽처럼 꽃을 터뜨리겠지요. 좀 이른 듯합니다만 남녘으로의 봄 마중 여행을 권합니다. 올해는 봄이 더욱 각별합니다. 겨울의 혹한이 너무 기세등등해서도 그렇겠고, 입춘과 우수가 지났지만 아직 바람이 차 봄이 멀다고 느껴져 그렇겠지요. 하지만 지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아니었더라도, 늦추위가 기승을 부리지 않았더라도 올해 봄은 특별했을 겁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 먹어가면서 ‘순환의 처음’으로 되돌아와 여린 싹을 내는 봄이 새삼스럽기 때문이지요. 지난해보다 올해, 올해보다 내년의 봄이 더 찬란한 건 이 때문일 겁니다. # 아홉 번째 섬에 있는 산 여덟 개
돌산도에는 여수의 대표적인 명소인 향일암이 있다. 돌산대교가 놓이기 전, 향일암에 가려면 도선을 타고 섬으로 건너가서 버스를 타고 찾아가야 했다. 이상한 건 그때도 향일암이 ‘돌산도 향일암’이 아니고, ‘여수 향일암’이었다는 것이다. 왜 돌산이 아니라 여수였을까. 짐작건대 향일암의 빼어남을 자랑하려면 낯선 이름의 섬이 아니라, ‘돈 자랑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번성했던 여수가 제격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 무렵 향일암이 돌산도에 있다는 걸 사람들이 잊었듯, 돌산대교가 놓이면서 사람들은 돌산도가 한때 섬이었다는 기억을 잊었다. 돌산(突山)이란 이름은 본래 뫼 산(山)에 여덟 팔(八), 큰 대(大)를 조합해서 만든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한자의 자획을 나눠 풀이하는 파자(破字) 식 해석이다. 돌산읍의 지리지인 ‘여산지’에는 섬 안에 여덟 개 산이 있는데, 산마다 돌이 많아서 돌산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돌산에 있는 산 여덟 개의 이름을 펼쳐보자. 천왕산, 두산, 대미산, 소미산, 천마산, 수죽산, 봉황산, 금오산. 이 중 돌산에서 가장 높은 산이 해발 441m 봉황산이다. 봉황산을 중심에 두고 북동쪽에는 천마산(271m)과 대미산(359m), 서쪽에는 천왕산(385m), 남쪽에는 금오산(323m)이 있다. 높기로는 봉황산이지만, 이름나기로는 향일암이 깃들어 있는 금오산이 으뜸이다. # 길게 또 짧게, 돌산을 타고 넘는 길 돌산도에는 섬의 잔등을 타고 넘는 ‘돌산 종주’ 산행 코스가 있다. 돌산대교에서 소미산과 대미산을 넘어 둔전고개와 수죽산, 봉황산을 거쳐 금오산 향일암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총연장 산행 거리가 32㎞.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라지만 수준점까지 다 내려갔다가 다시 해발고도를 높이는 구간이 많아 총 산행 시간은 11시간쯤 잡아야 한다. 건각의 산꾼들은 보통 새벽 서너 시쯤 출발해 종주 산행을 한다. 산꾼이 아니라면 좀처럼 엄두를 내기 어렵지만, 산행 코스를 짧게 끊어서 오르는 방법도 있다. 종주 산행의 중간쯤을 출발 지점으로 삼아 무술목에서 시작할 수도 있고, 더 당겨서 작곡재나 봉양고개에서 출발해 봉황산으로 바로 올라붙을 수도 있다. 아예 봉황산과 금오산 사이 고개인 율림치까지 차를 타고 올라서서 여기서 금오산 향일암까지 걷는 방법도 있다. 종주 코스 어디서든 쪽빛 바다와 아득한 포구의 경관, 그리고 따스한 봄기운이 느껴지니 시간과 체력에 맞춰 걸으면 된다. 돌산 종주 코스 중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두 구간이 있다. 짧게 걷고 싶다면 이 구간을 택하면 된다. 하나는 율림치에서 봉황산 정상까지 구간이고, 다른 하나는 율림치에서 금오산을 넘어 향일암에 이르는 구간이다. 두 구간 모두 17번 국도가 지나는 고갯마루인 율림치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봉황산 정상을 다녀오는 원점 회귀 산행을 하거나, 금오산을 넘어 향일암을 거쳐 내려가면 된다. 모두 느릿느릿 걷는다 해도 2시간이 채 안 걸리는 가벼운 산행 코스다. # 돌산에 피어나는 봄꽃 이야기
복수초가 꽃망울을 터뜨리면 이어 변산바람꽃과 노루귀가 피고 꿩의바람꽃과 개별꽃, 산자고, 용담 등이 뒤를 잇는다. 봄기운이 번져가는 보름쯤 뒤부터는 숲길 어디든 이런 봄꽃들을 만날 수 있다. 서걱이는 마른 낙엽 사이에서 꽃대를 올려 피어나는 봄꽃은 말 그대로 감격이다. 그깟 꽃 한 송이가 무어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숲 속에서 찾아낸 이른 봄꽃은 보물 중의 보물이다. 이르고 어렵게 찾아낸 봄꽃일수록 더 그렇다. 언 땅에서 내민 보드라운 순과 찬 바람에 피어난 여린 꽃은 봄을 상징하고, 삶을 은유한다. 예년 같으면 지금쯤 환하게 핀 복수초가 돌산 종주 코스 길섶까지 마중을 나왔어야 하는데, 어찌 된 게 봄꽃의 그림자도 없다. 이틀로 나눠 걸었던 종주 코스에서 단 한 송이의 봄꽃도 만나지 못했다. 봉황산 초소에서 만난 산불 감시원도, 다도해 국립공원 여수 분소에서 만난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도 ‘올해 꽃이 많이 늦다’며 고개를 저었다. 복수초 군락을 만났던 건 금오산 남쪽 자락의 양지바른 계곡이었다. 넝쿨이 우거진 마른 계곡 안쪽으로 들어서자 지난가을의 마른 낙엽 아래서 노란 복수초꽃이 저희끼리 숨어서 피어 있었다. 계곡을 따라 오르자 처음에는 한두 송이던 꽃이 이내 무더기였다. 어찌나 대견하고도 고마웠던지…. # 산에서 보는 바다와 섬 다시 돌산 종주로 돌아가자. 율림치를 출발 지점으로 삼고 봉황산을 다녀오거나 향일암으로 넘어가는 두 개의 코스 얘기다. 봉황산과 금오산의 낮은 목을 넘어가는 고개 율림치는 17번 국도가 지난다. 율림치 정상에는 주차장을 갖춘 휴게소가 있다. 이미 해발고도를 올려놓았으니 여기서 봉황산을 향해 오르는 길도, 금오산으로 가는 길도 그다지 힘들지 않다. 돌산 종주 코스를 따라가다 보면 능선을 따라 암봉이 솟아 있거나 암반이 노출돼 있는 곳이 여러 곳이다. 이런 자리는 곧 빼어난 전망대다. 봉황산 능선의 바위에 올라서면 발아래로 아늑한 포구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경관의 정점은 봉황산 정상이다. 정상 전망대에 서면 봉황산 능선 너머로 다도해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숲이 워낙 울창해 검은색으로 보인다고 해서 거무섬으로 불렸던 금오도를 중심으로 섬들이 흩어놓은 구슬 같다. 섬이 기러기 형상이라고 ‘기러기 안(雁)’ 자를 쓰는 안도. 솔개처럼 생겼다 해서 ‘소리도’라고도 부르기도 하는 연도. 임진왜란 때 횟대(나팔)를 불어 적의 출현을 알렸다 해서 횟대 섬으로 불리다 지금의 이름이 된 화태도. 바다 위에 비스듬하게 비껴 있다고 해서 횡간이라는 이름을 얻은 소횡간도…. 화태도는 지난 2015년 다리가 놓여 차를 타고 건너갈 수 있는데, 섬 안에 도보 여행 코스인 여수 갯가길의 5코스 ‘화태갯가길’이 있다. 섬이 작고 길이 워낙 단순해서 길을 잃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도보 코스다. 화태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가리비 껍데기에 굴 유생(포자)을 붙여 채묘하는 굴 종패 밭. 말뚝을 꽂은 너른 종패 밭에 해 질 무렵 붉은 기운이 번지는 경관이 제법 훌륭하다.
# 길이 목적지의 풍경을 바꾸다 이번에는 율림치에서 금오산을 넘어 향일암으로 가는 길. 이 길은 전체 돌산 종주 구간 중에서 가장 극적인 경관이 펼쳐지는 코스다. 율림치에서 향일암까지 가려면 두 개의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먼저 금오산 정상인 깃대봉에 올랐다가, 급경사 구간을 내려간 뒤에 다시 향일암 뒷산인 금오봉을 넘는다. 이 구간의 주인공은 쪽빛 바다와 기기묘묘한 암봉이다. 향일암은 바다를 끼고 있는 율림리 임포마을 쪽에서 돌계단을 딛고서도 금세 오를 수 있지만, 금오산을 넘어서 이쪽 길로 가는 것이 몇 배나 더 감동적이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풍경이야 똑같지만, 아슬아슬한 바위 위에 올라 직벽의 벼랑에 암자가 앉은 자리를 내려다본 뒤에 향일암에 들어서면 풍경뿐만 아니라 벼랑 끝에 선 비장감과 구도(求道)의 마음까지도 읽을 수 있다. 똑같은 장소라도 ‘가는 길’이 그곳의 느낌을 전혀 다르게 바꾼다는 얘기다. 그러니 돌계단을 딛고 향일암에 올랐더라도, 향일암 뒤편의 금오봉 정상까지는 꼭 다녀오길 권한다. 어려울 건 없다. 향일암에서 금오봉 정상까지는 딱 30분만 시간을 내면 된다. # 고즈넉한 일출의 절집 용월사 절집 얘기가 나온 김에 여수의 사찰 몇 곳을 더 가보자. 여수의 다른 사찰들이 좀처럼 이름을 얻지 못한 건 두말할 것 없이 향일암의 유명세가 드리운 그늘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수에는 괜찮은 절집이 몇 곳 더 있다. 먼저 돌산의 용월사. 돌산도 등대 아래 자리 잡은 용월사는 향일암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마당으로 삼은 절집이다. 향일암이 바위 벼랑에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면 용월사는 시선을 낮춰 수면 가까이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향일암처럼 해 뜨는 동쪽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어 절집 마당에서 일출을 만날 수 있다. 일출 때면 향일암은 인파로 북적이지만, 여기는 법당 앞에서 고즈넉하게 솟는 해를 마주할 수 있다. 이른 봄이면 온 산이 진달래의 붉은 빛으로 달궈지는 영취산 아래 들어선 흥국사도 빼놓을 수 없다.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한 흥국사는 임진왜란 무렵 승려들로 구성된 해군, 즉 ‘의승수군(義僧水軍)’의 본부였다. 이순신 장군이 관할한 전라좌수영의 지휘를 받은 의승수군은 이곳 흥국사에서 관군 못지않은 훈련을 거쳐 각 초소로 파병됐다. 전쟁이 끝난 뒤 선조는 이곳에 쌀 600석을 보내 전사한 수군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수륙재를 지내도록 하기도 했다. 흥국사에는 그윽한 분위기의 부도밭도 있고, 우아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홍교도 있지만, 그보다 더 이름난 것이 ‘문고리’다. 흥국사 대웅전의 문에 달린 여섯 개의 큼지막한 문고리에는 한 번 잡기만 해도 ‘삼악도(三惡道)’를 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400여 년 전 대웅전을 지을 당시 마흔한 명의 승려가 문고리에 영험함이 깃들도록 천일기도를 올려 이런 효험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삼악도란 불가에서 ‘악인이 죽은 뒤에 가는 고통스러운 세 가지 세상’을 의미하는데, 그 세 가지가 지옥의 세계를 이르는 ‘지옥도’, 동물로 환생하게 된다는 ‘축생도’, 그리고 늘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괴로움을 겪는 ‘아귀도’다. 수많은 손으로 반들반들해진 법당의 문고리를 쥐면 알게 모르게 지어온 자신의 죄를 생각하게 된다. 문고리 한 번 쥐는 것만으로 어찌 그 많은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을까. 대웅전 문고리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기실 자신의 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효험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법당의 문고리를 잡아 삼악도를 면하는 것으로 그동안의 죄를 털어버리고 나면, 이제 새로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게 된다. 길고 혹독했던 겨울을 지나서 새로운 계절의 출발 지점에 선다. 다시, 그리고 기어이 봄이니 말이다. ■ 여행정보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여수 돌산에는 최근 고급 리조트를 표방하는 중급 규모의 숙박시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평사리의 라테라스(061-643-5544)다. 수영장과 야외 스파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수영장과 객실에서 눈부신 바다와 대경도를 조망할 수 있다. 무술목 부근의 핀란드의 아침(061-644-8277)도 빼어난 조망과 바다를 배경으로 한 낭만적인 수영장이 인상적이다. 여수의 숙소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오동도 인근의 엠블호텔(1588-4888)이다. 고층 객실에서 내려다보는 오동도와 바다의 모습이 근사하다. 지금 여수에 간다면 꼭 맛봐야 할 게 굴이다. 겨울 여수에서 굴 맛을 본다면, 똑같은 굴이면서도 산지에서의 맛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데 놀라게 된다. 여수에는 굴구이를 내는 식당들이 도처에 있다. 그중에서도 돌산 안굴전마을의 굴전원조직화굴구이(061-644-6553)를 추천한다. 굴 양식장과 작업장을 운영하면서 도소매까지 겸하는 집이다. 갓 따낸 굴을 내오는데 속살이 탱글탱글한 데다 특유의 단맛도 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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