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질투에 불타 죽는 불세출의 영웅
내가 생애 처음으로 별 관측을 떠난 곳은 1984년 여름, 지리산 피아골 계곡이다. 변변한 망원경 하나 없던 그 시절, 별을 보기 가장 좋은 자세는 드러눕는 것이었다. 한여름이지만 깊은 계곡이라 한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비포장도로에 돗자리를 깔고 담요를 한두 장씩 덮고 일렬로 죽 누워 별자리를 익히며 별똥별 떨어지는 것을 세고 있었다.
자정이 넘도록 별을 보고 있는데, 산 아래에서 자동차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근처에 민가 몇 채가 있었으니 거기 사는 분이었을 게다. 우리는 하나둘 담요를 걷고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차는 한참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중 누군가가 차로 다가갔다. 운전석에는 차를 몰던 아저씨가 사색이 된 채 놀라 우리를 귀신 보듯 바라보며 떨고 있었다. 지리산이 어떤 곳인가. 6·25전쟁을 전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기서 죽어 묻혔던가. 운전자의 눈에는 거적에 싸여 있던 시체들이 하나둘 일어나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별 보기 좋아하는 독자에게 부탁한다. 인적 드문 산길이라도 길을 막고 별을 볼 때는 안전 표지판이라도 세워두기 바란다. 3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죄송하다.
지리산 피아골의 밤하늘
한동안 잊고 지냈던 피아골을 최근 뉴스를 통해 접했다. 정부가 다목적댐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환경단체와 지역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는 뉴스였다. 물론 자연 재해를 예방하고 대책을 마련할 필요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꼭 댐을 건설하고 자연을 훼손하는 개발 정책이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대부분의 시골 임야엔 땅 주인도 마음대로 집을 짓지 못한다.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방을 다니다보면 어떻게 저런 곳에 건물이며 골프장이 들어설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곳이 꽤 있다. 자연보호라는 말이 힘없는 서민들만 얽매는 굴레로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지리산 피아골 계곡에서 밤하늘의 별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과연 그곳에 댐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다. 물이 부족하면 물을 절약하는 방법을 찾고, 홍수를 막고자 한다면 나무를 더 심고 배수가 잘되게 하는 다른 방법을 먼저 찾을 순 없을까.
피아골 계곡에서 본 여름 별자리는 은하수 가에 자리한 백조자리와 헤라클레스자리다. 백조자리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변신한 것이고, 헤라클레스자리는 제우스의 가장 위대한 아들 헤라클레스의 별자리다.
맑게 갠 여름밤, 은하수를 따라 견우와 직녀 사이를 날아가는 백조자리의 모습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멋지고 우아하다. 백조는 남쪽으로 향한다. 철새인 백조가 추위를 피해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가는 걸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누군가 백조로 변신한 걸까.
백조는 일부일처를 상징하는 동물로 통한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제우스는 유명한 바람둥이다. 백조로 변신한 것도 바람을 피우기 위해서였다. 가끔 학계에는 백조가 바람을 피운 사실이 보고되곤 하는데, 아마도 제우스 탓이 아닌가 싶다.
백조자리는 밝은 별들로 이루어진 데다가 모양도 뚜렷해 찾는 데 큰 무리가 없다. 특히 이 별자리의 알파(α)별인 1등성 데네브가 역시 1등성인 직녀를 정점으로 견우와 직각삼각형 모양으로 놓여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세 별을 ‘여름철의 대삼각형’이라고 부른다.
데네브(Deneb·꼬리라는 뜻)는 이름대로 백조의 꼬리에 위치한다. 베타(β)별 알비레오(Albireo·부리라는 뜻)가 백조의 머리이고, 데네브와 알비레오 사이의 별들이 목과 몸통을 이룬다. 이 별자리는 전체적으로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기에 북십자성이라고도 불린다. 그림만 봐도 정말 그럴듯한 백조의 모습이다. 하지만 밤하늘에서 직접 보는 감동에 비할 수 없음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백조자리에는 여러 신화가 전해진다. 그중 하나가 이미 언급했듯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의 이야기다. 제우스는 아름다운 여인을 유혹할 때면 대개 동물로 변신했다. 백조가 그중 하나다.
제우스는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Leda)에게 반해 그녀를 유혹하고자 하는데, 질투가 심한 아내 헤라에게 들킬 것을 염려해 레다를 만나러 갈 때마다 백조로 변신했다. 레다는 제우스와의 사랑으로 2개의 알을 낳았다. 그중 하나에서 아들 카스토르(Castor)와 딸 클리타이메스트라(Klytaimestra·훗날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가멤논의 아내가 된다)가 태어나고, 다른 하나에서 아들 폴룩스(Pollux)와 딸 헬레네(Helene·훗날 절세의 미모로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다)가 태어난다. 성장한 카스토르와 폴룩스는 로마를 지켜내는 위대한 영웅이 되어 쌍둥이자리의 주인공이 된다. 제우스는 레다와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이 별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제우스의 외도가 낳은 영웅
여름이 시작되면 은하수의 물줄기는 점점 하늘의 정상을 향해 솟구치는 모양이 된다. 봄에 가장 밝은 별인 목동자리의 아르크투루스는 어느덧 서쪽 하늘로 기울고, 여름철의 사파이어별 직녀는 하늘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 아름다움을 뽐낸다. 이 무렵 ‘하늘을 거꾸로 걷는 사나이’ 헤라클레스의 별자리가 목동자리와 거문고자리 사이에서 빛나며 하늘의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이 별자리는 직녀를 향해 무릎을 꿇고 꽃다발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록 밝은 1등성이나 2등성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지만, 별자리 중 가장 그럴듯하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헤라클레스자리는 언뜻 봐도 사람이 거꾸로 서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의 모습을 빼닮았다. 옛날 그리스인들은 이에 그리스 신화의 가장 위대한 영웅, 헤라클레스를 떠올렸다. 오른손에 몽둥이를 들고 괴물 히드라를 무찌르는 용감한 투사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하늘에서 찾아낸 것. 그런데 왜 헤라클레스는 거꾸로 서 있는 걸까. 이 점에 대해서 신화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 별자리는 왕관자리와 거문고자리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수월하게 찾을 수 있다. 두 별자리 사이에 찌그러진 H를 찾는다면, 헤라클레스의 나머지 별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버지 제우스와 아들 헤라클레스의 관계에 비춰 찾는 게 더 쉬울 수도 있다. 이 부자는 직녀를 사이에 두고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거문고자리의 직녀(Vega)별에서 백조자리 데네브의 정반대로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찌그러진 H가 있다. 이 경우 헤라클레스 왼손에 있는 괴물 뱀 히드라를 꽃다발이라고 상상해보기 바란다. 헤라클레스가 무릎 꿇고 직녀에게 꽃다발을 바치는 모습이 보이는지? 필자가 별의별 상상을 다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신화 속 그림을 보면 미남은 허리가 가늘고, 미녀는 허리가 굵게 그려져 있다. 대표적인 미녀 안드로메다의 별자리를 보면 허리가 가슴보다 더 굵게 나타나 있다. 마찬가지로 헤라클레스의 허리인 H 가운데는 홀쭉하게 들어가 있을 것이다.
네수스의 저주
영웅 헤라클레스가 불사신의 몸을 포기하고 죽음을 맞게 된 것은 아내의 빗나간 사랑 때문이었다. 헤라클레스가 노예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의심한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되돌리기 위해 독이 묻은 괴물의 피를 남편의 옷에 발랐고, 그 고통으로 인해 헤라클레스는 스스로 몸을 불태워 죽고 말았다. 뒤늦게 남편의 결백을 알게 된 아내는 눈물로 후회했지만, 이미 제우스가 헤라클레스를 밤하늘에 올려놓은 다음이었다.
헤라클레스자리에 대한 신화가 여기서 끝난다면 좀 아쉬울 것이다. 여기,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가 알크메나(Alcmena)라는 여인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제우스는 알크메나의 남편인 티린스 왕 암피트리온으로 변장해 알크메나로 하여금 임신하게 했다.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영광’이란 뜻으로 바람 피워 얻은 아들을 올림푸스 산으로 데리고 오며 아내 헤라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헤라가 헤라클레스를 예쁘게 봤을 리 없다. 헤라는 어린 헤라클레스를 죽이기 위해 많은 일을 벌였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이윽고 헤라클레스가 청년이 되자 헤라는 그를 에우리스테우스(Eurystheus) 왕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 후 헤라클레스는 자유를 얻기 위해 12가지 위험한 모험을 겪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의 열두 가지 고역(the Twelve Lavors of Heracles)’이다.
네메아 계곡의 황금사자를 죽이는 일 등 12가지 고역을 마친 후에도 헤라클레스의 모험은 계속된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는 독수리를 죽였고, 강의 신을 굴복시켜 아름다운 소녀 데자니라(Dejanira)도 구했다. 헤라클레스의 아내가 바로 이 소녀다. 어느 날 강을 건널 때 헤라클레스는 네수스(Nessus)라는 반인반마(半人半馬)의 켄타우르(Centaur)에게 아내를 부탁했다. 네수스는 이를 허락한 듯했으나, 강의 가운데 이르자 반항하는 데자니라를 데리고 강물 아래로 도망을 쳤다. 이에 헤라클레스는 활을 쏘아 네수스의 심장을 꿰뚫어버린다. 네수스는 죽기 직전 자신의 피 일부를 데자니라에게 주며 그것이 헤라클레스의 사랑을 영원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남편의 사랑이 의심스러울 때 그의 옷에 피를 묻히면 남편이 영원히 데자니라에게 충실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데자니라가 헤라클레스의 옷에 묻힌 것이 바로 네수스의 피다. 헤라클레스는 죽음의 옷을 입자마자 자신이 속은 것을 알아채고 떼내려 했다. 그럴수록 옷은 살에 더 단단히 달라붙었고 네수스의 증오는 그의 몸속으로 점점 더 깊이 퍼져나갔다. 그 고통은 마치 몸을 둘러싼 불꽃같았고, 어떤 요술로도 제거할 수 없었다. 결국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헤라클레스는 높은 산에 올라가 장례를 준비했다. 그리고 숱한 모험에서 자신의 믿음직한 무기였던 곤봉을 머리맡에 두고, 어깨에는 사자 가죽을 걸치고 나무에 불을 붙였다. 용감했지만 가련한 영웅의 최후였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제우스는 흰구름 전차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아들을 불에서 꺼내 하늘에 올려놓았다. 이 영웅이 얼마나 크고 무거웠던지, 하늘을 떠받치고 있던 아틀라스(Atlas)도 우주에 더해진 헤라클레스의 무게에 신음하며 비틀거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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