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열차를 타고 달리는 내내 머리 위 짐칸 쪽에 붙여둔 시(詩) 한 구절이 규칙적인 레일음과 함께 내내 마음 속으로 따라왔습니다. 내륙의 협곡과 산간오지 마을을 지나는 중부내륙 순환열차. 이 땅에서 가장 험준하되, 가장 아름다운 백두대간의 협곡과 외딴 마을을 지나는 곳에 놓인 열차 길입니다. 여기에는 쾌속과 질주를 포기하고 유순해진 열차가 다닙니다. 열차는 첩첩산중의 낮은 목을 타 넘고 낙동강이 굽이치는 교각을 건너갑니다. 속도는 시속 30㎞ 미만. 목탄난로의 흰 연기를 증기기관차의 기적처럼 뿜으면서 슬로 모션으로 달립니다. 느린 속도의 열차가 선물처럼 가져다 주는 것은 오래돼 희미해진 추억, 혹은 동행과 나누는 따스한 교감입니다. 협곡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있었지만 차창 밖의 풍경도, 차창 안의 풍경도 온기로 따스했습니다. 그 열차로 독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기차 안에서 만난 시 한 편을 여기 독자에게 띄우는 연서(戀書)처럼 부칩니다. 이 고장에서는 눈을 치우지 않습니다. 이 고장에서는 봄도 치우지 않습니다. 대관령 산비탈 작은 오두막 여기서 내려다보면, 눈 내린 마을이 하얀 도화지 한 장 같습니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3월, 겨울이 긴 이 고장에서는 폭설이 자주 내리지만 치우지 않고 그냥 삽니다. 여름도, 가을도 치운 적이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도시처럼 눈을 포클레인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다만, 담뱃가게와 우체국 가는 길을 몇 삽 밀쳐놓았을 뿐입니다. 나도 그리운 그대를 몇 삽 밀쳐놓았을 뿐입니다. - 유금옥의 ‘춘설’ 전문
# 느린 속도가 불러오는 시간들 먼저 소리부터 이야기하자.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그 열차에서는 레일음이 들렸다. ‘쉬익∼’ 하고 단숨에 시속 300㎞까지 속도를 올리는 KTX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 새마을호에서도 이제 이런 소리는 없다. 규칙적인 레일음은 열차가 레일 이음매를 넘어갈 때 나는 소리다. 레일음이 사라진 것은 철로가 직선화하면서 용접해 붙인 레일 하나의 길이가 2㎞까지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기차를 타도 철커덕거리는 레일음은 좀처럼 듣기 어렵다. 낙동강 상류 비경의 협곡 구간을 달리는 협곡열차의 매력은 단연 ‘풍경’이지만, 그 못지않게 강력하게 환기해내는 건 추억이다. KTX며 새마을호의 속도로는 당도하지 못하는 지점에 추억은 있다. 협곡열차의 속도는 시속 30㎞. 경관이 빼어난 구간에서는 속도를 더 늦춘다. 분천역에서 철암역까지 협곡 열차가 달리는 구간은 27.7㎞. 시속 100㎞의 속도라면 15분 남짓에 닿는 거리를 협곡열차는 1시간 10분 동안 달린다. 그 시간의 간극에서 저마다의 추억이 호명되는 것이다. 속도와 효율 대신 느림과 여유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추억의 시간. 그 시간을 백두대간의 오지를 달리는 협곡열차에서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협곡열차의 등장은 의미심장하다. 빠른 속도와 정시성(正時性)을 앞세우던 열차가 속도를 늦추게 된 건 이제 멈춰서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차를 버리고 느린 도보로 여행의 방식을 바꿨듯이, 이제 느린 열차가 기차여행의 방식도 바꿀 수 있을까. 감속을 결정한 코레일의 모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 협곡열차 차창 밖으로 느리게 흘러가는 경관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시승객들의 밝은 표정에서는 그 답이 보이는 듯했다.
# 여행으로 최적화된 열차 코레일이 선보인 국내 최초의 관광전용 열차인 ‘중부내륙 순환열차’와 ‘백두대간 협곡열차’. 자칫 헷갈릴 수 있으니 먼저 두 열차에 대해 정리부터 하고 넘어가자. 먼저 겨울철에 한시적으로 운행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환상선 눈꽃열차’를 아시는지. 태백선과 영동선, 중앙선의 철도를 번갈아 타며 노선을 둥글게 이어붙여 제천-태백-영주를 거쳐 다시 제천으로 돌아오는 ‘환상(環上)’의 구간을 운행하는 열차다. 중부내륙 순환열차는 정확히 이 구간을 달린다. 설경의 시기를 겨눠 한겨울에만 임시 편성했던 열차를 사계절 운행으로 늘린 것이다. 사실 백두대간 협곡 구간을 달리는 환상선 노선에서는 눈꽃의 풍경이 압권이었지만, 첩첩산중 오지마을과 낙동강 상류의 굽이치는 물길을 따라가는 이 길은 다른 계절의 풍경도 이 못지않았다. 그래서 사계절 이 구간을 운행하는 열차를 매일 편성키로 했고, 그게 바로 ‘중부내륙 순환열차’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뭘까. 순환열차가 달리는 환상의 노선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경북 봉화의 분천역에서 강원 태백의 철암역까지의 구간. 순환열차를 타고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으론 아쉬움이 남는 구간이다. 그래서 이 구간만 따로 느릿느릿 왕복 운행을 하는 노선을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백두대간 협곡열차’다. 순환열차와 협곡열차의 매력을 단순히 ‘노선’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 두 열차는 국내 최초로 관광전용 열차로 만들어졌다. 기존에도 와인트레인이나 스키열차 같은 테마 열차가 있었으니 ‘국내 최초’라면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열차들은 기존 열차를 일부 단장해서 운행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순환열차와 협곡열차는 다르다. 애초부터 이 관광의 목적으로 이 두 구간을 달리는 객차를 따로 제작했다. 노선의 특성에 맞춰 좌석의 배치를 정하고, 인테리어를 했으며 창의 크기와 승강문의 형태도 정했다. 한마디로 해당 구간에서 승객들이 최적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맞춤식으로 배려했다는 것이다. 순환열차와 협곡열차에서 충분히 누려야 할 것은 이것이다. 협곡열차는 객차 외관부터가 파격이었다. 소화물차를 개조한 객차는 붉은색으로 도색됐으며 협곡의 경관을 즐기기 위한 구간을 달리는 열차이니만큼 창을 키우고 시야를 확보했다. 열차 전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복고. 열차의 창도 어쩐지 볕이 잘 드는 시골 초등학교의 유리창과 닮았다. 창문 외에 천장의 일부까지도 창으로 마감했으니 열차 안에서 느끼는 개방감이 대단하다. 특히 열차 맨 뒤칸은 상점의 진열장처럼 창을 내 시야가 탁 트였다. 파스텔톤의 색깔로 도색한 나무좌석의 배열도 독특했다. 차창을 바라보고 앉을 수 있도록 배치한 자리도 있고, 등받이를 앞뒤로 넘겨 원하는 쪽을 볼 수 있도록 한 자리도 있다. 객차 안에서 가장 이색적이었던 것은 기관차에 이어붙인 3량 객차마다 설치해 놓은 화목난로. 열차 안에는 냉난방 시설이 없다. 대신 겨울에는 열차 안의 화목난로로 난방을 하고 여름이면 천장에 매단 선풍기를 켠다. 제법 차가운 날씨임에도 후끈 달궈진 화목난로로 열차 안은 따스했다. 서늘한 심산유곡의 구간을 달리는 열차이니만큼 여름철에도 차창을 열고 달리면서 선풍기까지 켜면 더위를 느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3량의 협곡열차를 매달고 가는 백호 무늬의 디젤기관차도 평범하지 않다. 이즈음 디젤기관차는 날렵한 전기기관차에 밀려 승객수송에서 퇴역하고 있다. 이 기관차도 역 구내에서 열차를 붙이는 이른바 ‘입환용’으로 쓰이던 것. 간혹 단거리 구간의 승객수송용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1997년에는 남북 철도연결 합의로 동해선 철도의 제진역으로 옮겨져 57년 만에 북측 청년역에서 출발해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북한 열차를 만났던 화려했던 이력이 있다. 깊은 산중을 달리며 차창을 열고 바람을 맞는 기분은 더없이 상쾌했다. 느린 속도로 달리니 열린 차창으로 밀려들어와 얼굴에 닿는 바람이 딱 기분좋을 정도였다. 분천역을 출발한 협곡열차는 줄곧 낙동강의 물길을 따라갔다. 기차는 잔설이 남은 계곡 굽이를 돌고, 낙동강 위로 놓인 교량을 건너고 어둑한 터널을 통과했다. 협곡열차의 승객들은 저마다 차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바깥 경치를 구경했고, 경치가 심드렁해지면 이내 화목난로 앞으로 모여들었다. 난로 위에는 고구마와 오징어가 구워지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잘 구워진 고구마를 후후 불며 먹는 맛은 각별했다. 승객들도 난로 앞에서 자연스레 서로 말을 섞었고, 대화가 이어지는 간간이 웃음도 섞였다. 초봄의 열차 안이 따스했던 건 꼭 화목난로의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옆 자리에 앉은 이와 대화는커녕 눈맞춤 한 번 없이 목적지까지 가곤 하는 KTX나 새마을호 열차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이런 여정이라면 목적지가 어딘들 어떠하랴. # 열차가 선사하는 새로운 여행의 경험 협곡열차를 앞세우는 바람에 이야기가 미뤄지긴 했지만, 서울역에서 협곡열차 운행구간인 분천역까지 타고 간 중부내륙 순환열차에서의 경험도 특별했다. 누리로 전기기관차가 끄는 순환열차는 서울역을 출발해 제천에 도착한 뒤 순환구간을 시계 방향, 또는 반시계 방향으로 운행했다. 협곡열차가 ‘복고’를 주제로 했다면, 순환열차에서 돋보이는 건 ‘안락과 편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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