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 집착, 애욕의 뿌리 - 그 뿌리가 뭘까?
1) 탐욕 : 재력에 대한 것이든, 권력에 대한 것이든, 명예와 인기에 대한 것이든 탐욕은 그것들이 자기를 지키는 힘으로 믿는다. 돈에 대한 탐욕은 돈만 믿고, 권력에 대한 탐욕은 권력만 믿고, 인기와 명예에 대한 탐욕은 그것만 믿는다. 그것이 없으면 죽은 목숨으로 안다.
탐욕의 뿌리는 의심이다. 이를테면 돈에 대한 탐욕은 돈이 안되는 것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를테면 사람을 믿지 않는다. 인간적 신의나 정직성에 대한 의심이 있다. 정직이 밥 먹여주나?라는 의심이 있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인과에 대한 의심을 바탕에 깔고 있다. 돈 이외의 것은 믿지 않는,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자기 의심, 불신을 깔고 있다. 그래서 탐욕의 뿌리는 의심이다.
2) 집착 : 종교적 신앙에 집착하거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거나 자기 나름의 관습이나 습관에 집착하는 경우는 어떨까? 집착의 여집합은 적대, 분노이다. 이를테면 이교도에 대한 적대와 분노, 이념적 적대와 분노들이 그렇다. ‘너 같은 자들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집착은 분노, 적대를 먹고 산다. 타자에 대한 적대와 분노가 강할수록 더욱 집착하게 된다. 광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타자에 대한 분노를 자기 신념의 방어기제로 삼는다. 적대와 분노가 강하다는 것, 공포심리가 강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일상에서의 고집(固執)이란 것도 그렇다. 일하는 방식이든 생각하는 방식이든, 자기 고집에 저항하는 것에는 분노하고, 적대한다. 그러니까 집착은 타자에 대한 적대와 분노가 그 뿌리다.
3) 애욕 : 세속적으로 애정이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착오가 있다. 정말 사랑이라면 나 = 너라야 한다. 등가적인 지평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너를 구속할 수 없고 너는 나를 구속할 수 없어야 한다. 등가적이 아니고 구속하는 관계에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우리들이 말하는 애정, 사랑이란 것은 어떤 것일까? 배타적 점유, 독점을 전제한다. 나만을 사랑해야 하고 나만을 좋아하고 다른 자를 사랑해서 안된다는, 너는 내 것이라는, 내 것이 아니면 사랑할 수 없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니까 이건 사랑이 아니라 애욕이다. 배타적 독점욕이기 때문이다.
애욕은 질투(嫉妬), 미움이라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다. 나 이외의 어떤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미움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니까. 그래서 애정의 이면은 질투다. 애정과 질투는 동전의 양면이다. 질투를 동반하지 않는 애정이 있는가? 없다. 질투가 강한만큼 강한 애욕으로 나오고 애욕이 강한만큼 질투가 강하다.
그러면 질투 때문에 애욕을 갖는 것일까? 애욕 때문에 질투하는 것일까? 선차성을 따지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흔히 사랑하기 때문에 그만큼 미워한다고 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애욕이기 때문이다.
정말 사랑이었다면 미움이란 것은 없다. 사랑하던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는 것은, 원래 없던 미움이 생겨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있었던 미움이 드러난 것뿐이다. 눈이 맞고 애정고백을 할 때도 미움은 이미 있었다. 애욕(愛慾)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때는 피차 배타적 독점적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알았으니까. 애욕은 선점욕, 독점욕, 배타성을 갖는다. 그 자체가 이미 질투를 동반하게 되어 있다, 질투에서 시작한다. ‘남이 집어가면 안된다’는…, ‘너는 남에게 가서는 안된다’는…, 그걸 우리는 사랑이라고 꾸민다,
다시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탐욕의 여집합은 의심이고 집착의 여집합은 분노와 적대이고, 애욕의 여집합은 질투, 미움이다. 말하자면 의심의 또 다른 표현이 탐욕이고 분노의 또 다른 표현이 집착이고 질투(미움)의 또 다른 표현이 애욕으로 현상하는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나와 나의 소유 그 이외의 것들은 믿을 수 없고, 더불어 할 수 없고 공존할 수 없다는 불안과 공포심에서 의심, 분노, 질투가 유전 상속한다. 다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의심이 탐욕의 대상을 만들고 분노가 집착의 대상을 만들고 미움(질투)가 애욕의 대상을 만들고.
탐욕의 뿌리는 의심이다. 이를테면 돈에 대한 탐욕은 돈이 안되는 것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를테면 사람을 믿지 않는다. 인간적 신의나 정직성에 대한 의심이 있다. 정직이 밥 먹여주나?라는 의심이 있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인과에 대한 의심을 바탕에 깔고 있다. 돈 이외의 것은 믿지 않는,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자기 의심, 불신을 깔고 있다. 그래서 탐욕의 뿌리는 의심이다.
2) 집착 : 종교적 신앙에 집착하거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거나 자기 나름의 관습이나 습관에 집착하는 경우는 어떨까? 집착의 여집합은 적대, 분노이다. 이를테면 이교도에 대한 적대와 분노, 이념적 적대와 분노들이 그렇다. ‘너 같은 자들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집착은 분노, 적대를 먹고 산다. 타자에 대한 적대와 분노가 강할수록 더욱 집착하게 된다. 광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타자에 대한 분노를 자기 신념의 방어기제로 삼는다. 적대와 분노가 강하다는 것, 공포심리가 강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일상에서의 고집(固執)이란 것도 그렇다. 일하는 방식이든 생각하는 방식이든, 자기 고집에 저항하는 것에는 분노하고, 적대한다. 그러니까 집착은 타자에 대한 적대와 분노가 그 뿌리다.
3) 애욕 : 세속적으로 애정이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착오가 있다. 정말 사랑이라면 나 = 너라야 한다. 등가적인 지평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너를 구속할 수 없고 너는 나를 구속할 수 없어야 한다. 등가적이 아니고 구속하는 관계에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우리들이 말하는 애정, 사랑이란 것은 어떤 것일까? 배타적 점유, 독점을 전제한다. 나만을 사랑해야 하고 나만을 좋아하고 다른 자를 사랑해서 안된다는, 너는 내 것이라는, 내 것이 아니면 사랑할 수 없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니까 이건 사랑이 아니라 애욕이다. 배타적 독점욕이기 때문이다.
애욕은 질투(嫉妬), 미움이라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다. 나 이외의 어떤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미움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니까. 그래서 애정의 이면은 질투다. 애정과 질투는 동전의 양면이다. 질투를 동반하지 않는 애정이 있는가? 없다. 질투가 강한만큼 강한 애욕으로 나오고 애욕이 강한만큼 질투가 강하다.
그러면 질투 때문에 애욕을 갖는 것일까? 애욕 때문에 질투하는 것일까? 선차성을 따지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흔히 사랑하기 때문에 그만큼 미워한다고 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애욕이기 때문이다.
정말 사랑이었다면 미움이란 것은 없다. 사랑하던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는 것은, 원래 없던 미움이 생겨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있었던 미움이 드러난 것뿐이다. 눈이 맞고 애정고백을 할 때도 미움은 이미 있었다. 애욕(愛慾)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때는 피차 배타적 독점적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알았으니까. 애욕은 선점욕, 독점욕, 배타성을 갖는다. 그 자체가 이미 질투를 동반하게 되어 있다, 질투에서 시작한다. ‘남이 집어가면 안된다’는…, ‘너는 남에게 가서는 안된다’는…, 그걸 우리는 사랑이라고 꾸민다,
다시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탐욕의 여집합은 의심이고 집착의 여집합은 분노와 적대이고, 애욕의 여집합은 질투, 미움이다. 말하자면 의심의 또 다른 표현이 탐욕이고 분노의 또 다른 표현이 집착이고 질투(미움)의 또 다른 표현이 애욕으로 현상하는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나와 나의 소유 그 이외의 것들은 믿을 수 없고, 더불어 할 수 없고 공존할 수 없다는 불안과 공포심에서 의심, 분노, 질투가 유전 상속한다. 다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의심이 탐욕의 대상을 만들고 분노가 집착의 대상을 만들고 미움(질투)가 애욕의 대상을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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