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外之士

민중의술 명의(名醫)열전

醉月 2009. 7. 31. 08:34

출처 : 민중의술 명의열전  글쓴이 : 황종국 판사
인터넷까페 :
http://cafe.naver.com/lovelifejang

 

벌침 놓는 박사님 서영기
의사야 의사가 되려고 의과대학을 갔으니 의사가 되었겠지만, 의과대학도 가지 않고 의사도 아닌 사람이 병을 고치고 있다면 어떻게 해서 그리 되었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지 궁금한 일이다.
더구나 의사가 못 고치는 환자를 의사도 아닌 사람이 잘 고치고 있다면 의과대학은 쓸데없는 곳이고 의료제도도 잘못되어 있다는 증거가 되니 예삿일로 치부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적지 않고, 따라서 제 정신 가진 나라는 그런 경우까지도 고려해서 이를 포괄할 수 있도록 의료제도를 유연하게 만든다. 영국 같은 나라는 치료할 수 있는 자격에 아예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고
있으니, 세상살이에 대한 통찰에 있어서 역시 가장 세련된 나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모국이 된 것이 우연이 아님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반면에 의료인의 자격을 의사만으로 딱 고정시켜 놓고 어떤 명의가 있어도 의사 아니면 치료 못한다고 고집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야말로 이치도 모르고 인생의 맛도 멋도 모르는 벽창호 단세포 같은 하등동물 나라일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나라도 있다. 어느 나라인지 독자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서영기(徐英機) 선생님은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화학박사 학위를 받고(그러니 다음부터는 ‘박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평생(33년간) 봉직하다가 2002년에 정년퇴직하신 분이다. 이 분이 교수 재직시절부터 해서 근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벌침으로 환자를 고치고 있는데, 그것도 병원에서 치료를 못하는 난치병 환자를 쓱쓱 고쳐내고 있으니, 신기한 일이다.
어떤 병을 고쳤는지, 우선 그 분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자.

 

대장암(직장암)을 고치다

어느 날 50여세 된 남자가 연구소에 찾아왔다. 20대의 딸이 동행했다. 일견하여 얼굴이 핼쑥하고 걷는 힘이 없고 쇠약한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위나 장이 나쁜 환자라고 직감하였다.
오게 된 연유를 물으니 2년 전에 아랫배가 묵직하게 아프고 변을 볼 때마다 힘이 들고 변 줄기가 가늘어져 누기가 어려워지더니 얼마 후부터는 선홍색의 피가 변에 묻어 나오면서 하복부가 아프기 시작했다고 한다.
며칠 후에는 왼쪽 하복부 직장 위에 단단한 것이 만져지고, 그곳을 누르면 아프고, 속으로는 둔통을 느끼게 되었다. 증세가 이상해서 병원 대장항문과를 찾아가서 2,3일 동안 검사를 하니 직장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어처구니없는 진단 결과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수술을 해야만 산다는 의사의 말에 어떻게 할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웃 동네 친구로부터 ‘수술은 나중에 할 수도 있으니 벌침으로 치료해보라’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진단 결과가 정확하게 나왔으니 진찰을 따로 해볼 것이 없어 프로폴리스를 복용하게 하고 하초의 관원, 중극, 대혁 등 4혈에 벌침을 놓고 돌려보냈다. 이전에도 직장암 환자를 여러 명 고친 적이 있어서 별로 어려운 치료는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다음날은 수도, 귀래를 중심으로 6침을 직침하고, 3회째는 관원유, 방광유, 백환유, 상료, 차료, 중료, 하료, 요유, 장강 등 15혈에 직침했다. 프로폴리스를 계속 복용시키면서 침은 매일하되 하루는 하초부의 전체, 하루는 뒷면 엉덩이부분 전체를 침하면서 20여회 놓고 나니 효과가 나기 시작했는지 통증도 없어지고 항문출혈도 없어져서 그 부위가 개운해진다고 한다.
계속해서 20회를 더 맞고 병원에 가서 검사한 결과 암세포의 잔재가 조금 있을 뿐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계속 프로폴리스를 복용하면서 벌침을 1회에 거의 80침정도 맞아서 80여회 치료하고 병원에 가서 검사한 결과 완치상태라고 하기에 20여회를 더 맞고 모두 100여회 벌침으로 치료를 끝냈다.
그 후에도 염려가 되어 프로폴리스 액을 계속 복용하고 있는데, 3년이 지난 오늘도 정상인의 생활을 하고 있다.

 

위궤양을 고치다

환자는 58세 된 남자. 핏기 없는 얼굴에 아주 쇠약해 보이는 몰골로 교회 봉침센터에 들어서며 하는 말이 ‘저는 위궤양이 생긴지 15년이 됐는데 밥도 제대로 못먹고 거의 흰죽으로 때를 메꾸는데 아예 외식은 생각도 못한다’고 한다.
된 음식이나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으면 2,30분간 배가 아파서 견디지 못하고 하루 종일 배가 불편하다고 한다. 이런 생활을 근 10년이나 했으니 더 무거운 병으로 전이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우선 벌침을 맞을 것을 권하여 앞면에 중완, 상완, 불용, 양문혈에 6침을 하고, 위와 장 질환에 프로폴리스의 복용이 절대 효과를 낸다고 하여 이를 복용하게 하였다.
다음날 경문, 황유, 중극, 허리부분의 위유 등에 7침을 하고 3일째는 격유, 근축, 중추, 담유, 척중, 접골 등에 8침을 했다. 물론 위궤양이기 때문에 위(胃)부분의 앞뒤를 침하는 것이 아시혈 용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5일후에 와서 하는 말이 침과 프로폴리스를 복용했는데도 별 신통한 효과가 없다고 한다.
위통, 거북함이 있거나 음식을 먹었는데 팽만감 등이 있을 때 정제하지 않은 프로폴리스 덩어리를 팥알만큼 떼어 납작하게 만들어 한번에 30알 정도씩 입에 넣고 물로 삼키면 먹은 지 약 15분 후에는 어떠한 증상도 조용히 가라앉고 뱃속이 시원한 느낌을 갖게 되며 소화가 촉진된다. 그래서 이 환자에게 프로폴리스 덩어리(봉교)를 주먹만큼 주면서 하루에 한번 씩 보름 동안 복용하고

벌침은 날마다 빼지 말고 맞으라고 했다.
그 일주일 후에 와서 하는 말이, 음식을 먹어도 속이 편안하고 부대끼지 않아 살 것 같다고 한다. 벌침을 계속 60여회를 맞고 프로폴리스 덩어리(봉교)를 20일 동안 하루에 30알씩 먹고 20일후부터는 프로폴리스 액을 물에 타서 복용하게 했다.

그러고 나니 완전히 나은 것 같다고 한다.
(침점이 많으니 침놓는 순서는 상관없이 22혈을 3등분하여 하루에 7혈씩 3일에 침하면 된다. 20여회정도 후에는 앞뒤로 나누어서 2회로 침하고 40회 정도 후에는 위혈을 한꺼번에 침해도 무방하다)

 

피부암을 고치다

67세 된 노인이 하루는 전화로 문의를 한다. 엉덩이 밑 승부(承扶)혈 옆에 종기만큼 큰 부스럼이 생겼는데, 이상하게 생각되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니 피부암이라고 진단하더라는 것이다. 암이라는 충격에 한동안 걱정을 많이 했으나, 걱정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생각하고 우리 연구소에 문의를 하게 된 것이다.
연구소에서 시키는 대로 벌침을 시작했으나, 내용을 모르는 가족들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것이지 그까짓 벌침으로 치료되겠냐고 하는 반발에 부딪쳐 한동안 벌침치료를 망설이다가 문득 수년 전에 이웃사람이 피부암으로 죽은 것을 기억하며 병원에서도 암의 치료만은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가족들의 무책임하고 막연한 권고에 화도 나고 속도 상하여 어찌해야 할 것인가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벌침을 시작함에 있어 우선 온몸에 혈액순환이 잘 되어 피가 맑아지도록 담마진혈(두드러기혈)을 10여일간 사용하고, 다음부터는 암이 생긴 곳에 골고루 10혈침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30,40침씩 꽂게 되었다. 두드러기혈은 3일에 한 번씩 침하고, 환부는 매일 침하였다.
30회부터 암덩어리가 생긴 곳 중간 한곳에 10침씩하고 환부와 그 주위에 골고루 침했다. 이와 같이 20여회를 침하고 나니 환부 중간에 구멍이 뚫리면서 불그스레한 맑은 물이 나오고 그 속에는 희고 누른 고름 같은 암세포가 가득 차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30여회를 더 침하니 환부가 흐트러지고 냄새도 나고 통증도 느끼기 시작한다. 벌독은 페니실린의 1,200배 항생작용을 하니 벌독이 환부에 들어가면 찔깃찔깃한 세포가 녹아 흡사 고름과 같이 흐늘흐늘해진다. 그런데 흐늘흐늘해진 고름과 같은 것들을 부항을 붙여 빼내고 계속 환부에 침해서 3개월을 했는데도 환부만 커졌을 뿐 낫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환자는 벌침치료로 안되는 것이 아니냐고 조바심을 내며 전화를 걸어온다.
이와 같이 60회를 더 치료하고서는 환부도 좁아지고 얕아졌다. 그때부터 봉교(프로폴리스) 덩어리를 환부에 계속 붙이게 했다. 봉교가 암세포에 닿으며 그 세포를 무력화해서 고름처럼 흐느적거리게 한다. 이때 부항을 붙여서 무력화된 세포를 빨아낸다.
계속 치료를 했는데, 당사자는 암이라는 충격이 너무 커서 양방 한방의 여러 책을 찾아보았으나 어느 의학서적에도 피부암이 치료된다는 내용은 쓰여 있지 않아서 오직 벌침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그럭저럭 7개월 만에 완전 치료되었다는 전화 연락이 왔다. 그런데 치료된 환부가 평평하지 않고 쭈글쭈글하게 아물었다는 것이다.

 

반신불수를 고치다

환자는 고향 친정집에 갔다가 갑자기 쓰러져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어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으나 낫지 않고, 침도 수개월 동안 맞았으나 이것도 차도가 없어 포기상태였다. 그러던 중 친구가 병문안을 와서 벌침이 효과가 있다고 하니 치료해볼 생각으로 찾아왔다.
처음 봉독의 적응을 실험하기 위해 벌 두 마리만 마비된 쪽 다리 관절에 시침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음날도 환측에 벌 4마리를 시침했지만 아프지도 붓지도 않았다. 그래서 다음 3회째부터는 합곡, 곡지, 족삼리, 양능천, 삼음교에 직침하였다. 4회째에는 합곡, 곡지, 외관, 족삼리, 양능천, 삼음교, 용천혈에 직침하였다. 5회째부터는 위 혈에 모두 직침하고, 하루는 팔관절에 2,3침, 하루는 다리관절에 2,3침씩 모두 8~10침을 가침해 나갔다.
6회째도 위와 같이 침하고 승산, 곤륜에 가침하였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 7회째에도 위와 같이 침하였다. 그 다음날 몸살이 났다고 하여 벌침을 일시 중단하였다. 3일을 쉬고 나니 몸이 한결 가볍고 조금씩 움직일 수가 있다고 하면서 바깥출입을 할 정도로 좋아졌다.
벌침을 맞기 시작한지 한 달 쯤 지나서야 벌침이 몹시 아프다고 하여 격일로 시침해 나갔다. 그 전에는 따끔하기만 하고 별로 아픈 것을 모른다고 하더니 이제는 점차적으로 통증을 느껴 시술하기에 곤란하게 되었다.
위와 같이 120여회를 치료하고 나서 그전처럼 시장에도 다니고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새 인생을 사는 느낌이라고 하며 지금도 만날 때마다 감사를 표시한다.

 

신장염을 고치다

하루는 47,8세 된 여인이 남편과 함께 봉사센터에 찾아왔는데, 얼굴이 창백하여 병색이 완연하다. 침대에 눕게 하고 지실 부위와 장문(章門) 부위를 압진하니 격통을 느끼고, 아랫배 양쪽에 단단한 덩어리가 있다. 혈압을 재어보니 210-160이다. 피로도 자주 오고, 고개돌림도 불편하고, 가끔 심호흡이 답답하다는 것이다. 소변의 배출을 물어보니 단백이 있고 자주 보며 그때마다 양도 적고 잔뇨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상 제점을 검토하건대 만성 신장염에 틀림없다. 치료해 줄 것을 간청하기에 벌침을 천추, 격유, 간유, 비유, 위유, 심유, 지실, 척중, 삼음교, 태계에 발침해서 시술했다.
7회를 치료하니 어깨결림이 없어지고 몸이 가벼워지고 배뇨회수도 반감하고 요(尿) 배출이 순조로워졌다. 20회를 치료하고 나서 요단백도 없어지고 피로감도 거의 없다고 한다. 25회를 치료하고 나니 병증상이 완연히 없어졌으며 이후에도 15회 정도 더 받아 신장기능을 회복시켰다. 장기간 치료를 요하므로 로얄제리와 프로폴리스를 복용하도록 권하고 치료를 마쳤다.

 

방광염을 고치다

비오는 여름 어느 날, 중년 부인이 교회 봉사센터에 찾아왔다. 연령은 37,8세에 용모가 단정하고 언어가 명료함이 그 사람의 교양을 말해주고 있다.
수인사가 끝단 다음에 하는 말이, 8년 전 산고(産苦)가 있었는데, 산후조리를 잘못해서인지 늘 몸이 무지룩하며 무겁고 팔다리에 힘이 없으며, 머리가 아프다가 허리도 아프고, 하복부가 늘 개운치 않으며 가끔 동통을 느낄 때가 있고, 소변을 자주 보고 싶고 소변 볼 때 동통을 느끼고 7,8분 간격으로 뇨의를 일으킬 때가 많다고 한다.
병원 치료를 받았으나 별 쾌(快)하지도 않고 해서 계속 통원치료를 6개월간이나 했으나 겨우 요의(尿意) 시간이 1시간 정도로 느려졌을 뿐이다. 병원 처방대로 양약으로 살아왔는데, 위도 나빠지고, 약을 먹고 나면 그 때 몇 시간만 반짝하고, 월경은 순조로우나 4,5일에 1회씩 보게 되는 변통(便痛)이 상습변비를 일으켜 더욱 괴롭힌다고 한다. 그리고 배뇨시의 하복부 불쾌감이나 요도통은 별로 낫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에도 여러 병원을 찾아 다녔으나 신통한 치료는 받지 못했다고 한다.
진단을 해보니 하복부의 대혁, 중극, 곡골 부위에 압통이 심하고 대장유, 소장유, 상․차․중․하료 부위에 압통이 강했다. 여러 가지를 고찰하건대, 오줌을 자주 누고 싶은 것과 가끔 혈뇨가 비친 점, 산후조리의 부실로 맥박은 약하고 저혈압인 점, 이 모두가 만성방광염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 것이다.
첫날은 목뒤 1경추에서 7경추까지 5분간 광선을 쬐고 난 다음 중극과 대혁 양족에 직침으로 3침하고 돌려보냈다. 2일부터 상기 부위에 매일 50분씩 광선을 쬐고, 벌침은 2일째는 대거, 관원, 곡골 등에 4침하고 3일째 방광유, 상료, 중료 6침하고, 4일째는 신유, 지실, 대장유, 소장유에 8침하고 나니 5일째는 하는 말이 한기도 그치고 그렇게도 차던 하복부가 훈훈해져서 기분도 명쾌하고 요(尿)의 빈수도 상당히 줄고 통증도 꽤 가셨다고 한다. 자각증상이 이러하니 치료된다는 느낌이 확고해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봉침점을 3부로 나누어 20회 하고 나니 자각증상의 90%는 치유된 것 같다고 한다. 12회를 더 치료하여 완치시키니 본인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고 남편 되는 분은 뛸 듯이 기뻐했다.

 

갑상선염을 고치다

3년 전 어느 날 시모와 함께 30세쯤의 깡마른 젊은 부인이 교회 봉사센터에 왔다. 눈에 띄는 대로 목을 쳐다보니 목 앞부분 양쪽에 2-3센치 넓이로 나비형을 한 띠모양의 엷은 조직이 흡사 부어있는 것처럼 약 5센치 길이로 나와 있다. 직감으로 갑상선 환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 젊은 부인이 하는 말이 4-5년 전 처녀시절부터 갑상선염이 생겨서 체중이 58kg에서 지금은 44kg으로 감소되었다고 한다. 식사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함없이 하고 있는데도 체중의 감소는 물론, 조금만 움직이면 쉽게 피로를 느끼고, 특히 신경과민으로 사소한 일에도 흥분되고 화가 나며, 그럴 때는 손가락이 떨려 식사할 때 숟가락을 놓칠 정도라고 한다.
이런 중에도 2년 전 아들을 낳고, 지금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데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라 한다. 맥을 짚으니 부정맥인데 가늘고 약하게 뛰면서도 대중없이 일정치 않다. 저혈압이며 극심한 빈혈현상이라 툭하면 어지럽고 현기증이 온다.
거궐혈을 압진하니 놀란 새가슴처럼 두근두근한다. 척추의 신도혈을 압진하니 자지러지게 아픔을 느낀다. 그 밑으로 지양과 영태를 누르니 마찬가지로 심한 통증을 느낀다. 이상 제점을 고찰하건대, 이 젊은 부인은 갑상선 기능항진에서 오는 빈혈을 동반한 저혈압이다.
우선 조혈을 촉진하고 저혈압을 개선시키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봉산물인 화분을 복용케 하고, 용혈작용과 혈액순환을 원활케 하고 갑상선호르몬의 과잉분비를 억제시키는 봉교액(프로폴리스)을 복용시키고, 첫날 벌침은 갑상선 보조혈인 중완, 황유, 족삼리, 관원에 발침하고, 2회째는 백회, 곡지, 대추, 합곡, 격유, 명문, 신유, 십칠추하에 침했다. 3회에는 목 앞부분을 발침해서 1센치 간격으로 누벼서 산침했다.
이렇게 목 앞부분 전면에 3회 침하고, 위의 보조혈에 1회 침하여 모두 20회를 맞고 나니 목 앞부분에 종대한 부분이 다 없어지고 빈혈과 저혈압도 상당히 개선되었다.
계속해서 25회를 더 침하여 전부 45회를 침했는데, 이때는 갑상선 기능항진 증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이것으로 치료가 되었다고 단정하고 침하는 것을 끝냈다.
또 자연식품인 화분과 프로폴리스, 로얄제리 복용으로 빈혈과 저혈압도 거의 정상치가 되었으나 만약을 염려하여 3개월을 더 복용하게 했다. 그 후 그녀는 치료 6개월 만에 시모와 함께 연구소에 찾아와서 사의를 표하고 한보따리 선물을 두고 갔다.

 

동맥경화를 고치다

환자는 중소기업 사장이다. 부인과 함께 고급 승용차를 타고 왔는데, 외모상으로 인격과 지식을 갖춘 인물로 보인다. 후두부위에 순환장애가 있어 항상 두중(頭重)이 심하고, 가끔 두통이 오면 머리를 들지 못하고 한참 동안 의자에 기대어 진정시키고, 상열이 되면 정신이 착란해서 그 동안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기억력 감퇴와 서사력 장애가 있는 것을 보니 신경쇠약증이 심하다.
요즘에는 이러한 환자들이 많이 있는데, 주로 사회적 지위가 높고 책임이 중한 자리와 회사 중역 같은 경영자에게 많이 생기는 병이다. 이러한 환자는 대부분이 동맥경화에서 오기 때문에 진성의 신경쇠약이나 노이로제와는 그 양상이 다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이 환자는 심(心), 간(肝), 위(胃) 등의 내장의 장애를 치료하여 풀어주는 것이 필요하고, 후두부의 순환장애를 대상으로 치료해야 되겠기에 천주, 풍부, 백회, 태양에 직침했다.
두 번째 와서 하는 말이, 잦은 피로와 기억력 감퇴, 권태감, 불면, 두통, 두중, 후두부 열감이 심하다고 애소했다. 종합병원의 진단은 병이라 할 수 없고 격무에 시달리는 일종의 노이로제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주사와 약을 2개월에 걸쳐 사용해도 그때뿐이고 얼마 후 다시 그러한 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2회에는 화개, 전중, 거궐, 신봉, 기문, 중완, 황유, 대거, 관원 등 13혈에 벌 7마리를 써서 침했다.
3회는 신주, 심유, 격유, 간유, 신유, 혈압점, 견정, 운문, 천종, 대무 등 18혈에 침하고, 4회는 상지의 곡지, 수삼리, 신문, 합곡, 하지의 족삼리, 삼음교, 용천 등의 혈에 침했다. 5회부터는 이상의 혈을 전부(前部) 후부(後部)로 나누어 매일같이 치료했다.
위와 같이 15회를 침하고 물으니 두통과 상열감, 상지 하지의 비감(脾感=저리는 느낌)이 거의 없어지고 이제는 견딜만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용혈작용이 강한 프로폴리스 액을 복용시키면서 30여회를 침하고 치료를 끝냈다.

 

통풍을 고치다

어느 날 환자의 가족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이는 45세이고 환경과 가정형편도 좋은 편이며 전에도 10여일간 아픈 적이 있었는데, 진통제만 먹고 모면했다고 한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난 지금 갑자기 4,5일 전부터 무릎마디가 아프고 두 다리 발가락 마디가 아파서 꼼짝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의사에게 왕진을 받았는데, 류마티스 관절염의 시초라 하여 한약을 한제 지어다가 다려먹고 있는데, 진통은 조금도 안되고 오히려 더 심하니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며 묻는다.
환자를 보니 건강하고 비대한 편이며 튼튼한 골격이 소도 잡을 만큼 튼튼해 보였다. 한의사의 진단 결과 류마티스 관절염이라는 말을 듣고 증세가 비슷함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느낀 것은 6개월 전에 10여일간 아픈 적이 있었고 그 후 6개월 동안을 전혀 아프지 않다가 갑자기 통증이 심해서 거동을 못한다는 점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이 병은 류마티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순환계 병은 몸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찰과 맥진만으로는 병명을 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환자의 증상을 다 듣고 이리저리 종합해서 생각한 끝에, 그 전에 아픈 적이 있었는데 6개월 동안 괜찮다가 통증이 다시 시작되어 거동하기가 어렵다는 점, 열을 재어 보니 39.5도가 되고 평소에 술을 많이 먹고 육식을 많이 한다는 점, 소변을 자주 보고 양이 적다는 점을 종합하여 보니 이것은 류마티스가 아니고 통풍이라 단정했다. 그래서 당신의 병은 통풍이라고 말해주고 벌침으로 60-70회 치료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했다. 소개한 친구 분이 훌륭하고 신용이 있는 분이라 믿고 치료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백회, 천주, 대추, 심유, 격유, 신유에 발침해서 치료하고, 2일째는 지실, 몸 전면의 인형, 전중, 거궐, 중완, 황유, 관원, 중극, 대혁에 침하고, 3일째는 몸 후면의 백회, 천주, 풍부, 대추, 심유, 격유, 간유, 신유, 족삼리, 태계에 역시 발침했다.
4일째는 역시 전면의 인형, 전중, 거궐, 황유, 중국, 관원, 대혁, 족삼리, 삼음교, 태계, 용천, 혈압점 환부에 발침으로 시침했다. 5일째 놓고 6일째 아침에 전화가 왔는데, 아침부터 통증이 씻은 듯이 없어졌으니 치료가 된 것이 아니냐며 침은 그만 맞겠다는 것이다. 진통이 되었어도 60회 정도 맞아야 완치된다고 하니 반신반의하면서 “깨끗이 낫는다니 어디 해 봅시다” 하며 사무실에 나와서 격일제로 벌침을 맞았다.
10일째부터는 직침으로 서서히 바꾸면서 60여회를 침하고 끝냈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통풍의 발작이 없으니 완치된 것이다. 봉산물로는 프로폴리스, 로얄제리를 복용하면 치료기간도 단축되고 재발을 방지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봉침은 압통점은 어떤 병이든 꼭 놓아야 하는 것이다.

 

요통과 디스크를 고치다

벌침을 놓게 된지 몇 년 안 되어서 이다. 사관학교에 재직 중일 때인데 아침에 45세 된 환자가 찾아왔다. 증세를 듣기 전에 그 환자가 들어오는 태도가 엉거주춤 허리를 구부리고 의자에도 앉지 못하고, 허리에 통증이 심하니까 양쪽 손을 먼저 의자에 대어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의자에 대며 앉았다. 삔 허리거나 디스크에서 오는 통증을 감당하지 못하여서 저렇게 고통을 당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말을 듣고 보니 약 3년 전에 허리를 다쳤는데, 침을 수십 회 맞고 한약을 먹었으며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해서 나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조기축구회에서 축구를 하고 와서 아침식사를 하고 일어나니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혹시나 나을까 하고 하루를 지냈는데, 점점 더 아파서 먼저 침을 맞던 곳에 가서 침을 20일 맞아도 차도가 없었고, 약을 먹고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했으나 차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 침구사도 더 이상 고칠 수 없다고 치료를 포기하고, 물리치료를 해도 지압을 해도 금침을 30개나 맞아도 차도가 없었다고 했다.
환자는 벌침으로 꼭 치료가 되느냐고 묻기에 치료된다고 하였더니 하도 많이 속아서 믿을 수가 없다고 하며 한 번 더 속아보자고 하면서 벌침을 맞기로 결심했다고 하였다.
첫날은 약하게 놓고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강하게 놓기 시작해서 10일이 경과하니 허리가 부드러워지고 통증이 반으로 줄었다고 했다. 보통 완치는 50일 정도 치료하면 되는데, 중증이라 100일로 치료가 되었다.

 

만성 전립선염을 고치다

어느 날 외모가 귀품이 있고 언어행동 등에서 교양이 넘치는 신사분이 찾아왔다. 인사가 끝난 다음에 하는 말이 “소장님,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저는 나이가 50대 중반인데 소변을 볼 때 오줌줄기가 힘이 없고 소변 양이 적을 뿐 아니라, 소변을 보고나면 또 보고 싶지만 소변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소변이 나올 때는 항상 방광부위가 뻐근하여 고통을 느낌니다” 라고 하였다.
그는 또 가끔 소변에 약간씩이나마 피가 섞여 나온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성력(性力)을 물으니 부인을 가까이 한 지 7~8년 정도 되며 그때부터는 전혀 여자를 모른다고 한다.
환자는 그 후로 전국의 유명하다는 병원의 비뇨기과를 찾아다녔으나 신통한 치료가 되지 않아 4-5년 전부터는 치료를 포기하고 살았다고 한다. 남에게 말 못할 고통 중에 있다가 우연히 친구로부터 봉침에 대한 권유를 받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잘 오셨습니다. 그럼 벌침 치료를 받아보시겠습니까?” 하니 “저와 같은 경우에 얼마나 맞으면 치료가 되겠습니까?” 하는 것이다. 혈압을 재어보니 180-125이고 맥박은 88을 기록했다. 압진을 하니 하복부 전반에 통증을 느끼고, 허리에서는 17추하 압통을 크게 느끼며 고통을 호소했다. 어깨가 늘 저리고 두통도 자주 온다고 했다.
여러 징후를 관찰한 결과, 이분은 만성 전립선염으로 더 이상 방치하면 요폐(尿閉)에 빠질 수도 있다. 그래서 “선생님의 경우, 40~50회 정도 벌침시술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하니 환자는 “낫기만 하면 몇 백번이라도 시술을 받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벌침을 40여회 시침하자 전립선염이 호전됨은 물론 잃었던 정력까지 회복되었다. 50여회의 시술로 일단 치료를 끝낸 뒤 봉산물 복용을 계속 권하였다.


벌침과의 자연스러운 인연

해군사관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1980년 12월경의 일이다. 교직원 중에 중풍으로 팔을 못 쓰는 분이 있었다. 보기에 하도 안타까워서 불러서 봉침으로 치료해보겠다고 말하고는 놓기 시작했는데 15회 정도 맞으니 굳은 것이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4~5개월 만에 마비가 풀리고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다. 그때부터 소문이 나면서 환자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 전까지 벌침을 놓아본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다고 한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벌침을 바로 놓을 수가 있었어요?”하고 놀라서 물었다. 사는 곳 주변에 아카시아 나무가 너무 많아서 취미로 양봉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공부를 하고 맨 처음 취직한 직장이 농업은행이었는데, 지점장이 양봉을 몇 통 하고 있었던 것이 양봉을 만난 계기였다. 대구 동아양봉원에서 나오는 인쇄물에 봉침 사례가 실려서 자주 읽게 된 것이 봉침에 대한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지식으로 봉침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고생하는 동료 직원을 보자 측은함과 안타까움에 실행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생긴 것 같다. 처음에는 환자의 마비된 팔에 그냥 놓았다. 그런데도 효과가 생기는 것을 체험한 것을 계기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에도 놓아보고 실험도 해보았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3년간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는데, 본인이 직접 병 수발을 하면서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것을 체험하고는 본격적으로 봉침 공부에 나섰다.

 

운명으로 타고난 의술

그런데 양봉을 하고 있었다거나 글을 통하여 읽고 봉침에 관한 다소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정도로는 봉침을 감히(?) 하게 된 운명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그 운명적인 단서를 포착하고자 질문을 계속한 결과, 마침내 그 해답을 찾았다.
박사님의 부친은 평생 침술을 하고 약초도 조제해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사셨는데, 침이 그렇게 잘 들었다고 한다. 박사님은 어릴 때부터 그 모습을 보고 자란 것이다. 나병 환자들도 많이 와서 집에 진을 치고 있는 것도 보았다. 그러니 병을 고쳐주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몸과 의식에 배어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부친의 의료자질과 치병의 심성 또한 박사님에게 유전적으로 대물림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해 오신 것을 기억하며... 공부를 했다”고 박사님 스스로도 말씀하신다. 바로 그것이 지식과 생각만으로도 대뜸 벌침을 놓게 한 자질이고 힘이다.
여기에 주마가편 격으로 작용한 것이 박사님의 화학 지식이다. 벌독은 화학적인 물질이어서 본인의 전공지식이 이의 변화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을 남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한 것이다. 박사님은 이 대목에서 “굉장히 남달리 이해가 빨랐다”고 강조하신다.
다른 사람에게서 봉침을 배운 것은 1999년도에 서울 총신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송기춘 교수가 지도하는 6개월간의 봉침 과정을 이수한 것이 전부라고 하니, 그때가지 근 20년을 책으로만 읽고 스스로 연구하고 터득하면서 수많은 환자를 치료할 수 있었다는 말인 셈이다. 특별한 소질과 능력이라고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리해서 소문이 나고 환자들이 많이 몰려오는 것과 본인의 봉침 공부는 서로 상승작용을 하면서 치료 실력을 상승시켰다. 삼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 해군사관학교 대표로 나가는 선수들의 치료도 박사님의 몫이었다.


명의의 자질

그러나 이러한 것들만으로 박사님을 명의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명의열전에 이름이 올라가려면 ‘과연 명의구나’하고 탄복할 수밖에 없는 필수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그 필요조건이 무엇인가? 지금이나 앞으로나 민중의술의 명의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이 점은 반드시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되므로 널리 민중의료계의 동의를 받아서 표준으로 정립되기 바란다.
병을 잘 고쳐야 함은 첫 번째이고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런데 병을 잘 고치는 것이 그냥 기술만 터득해서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의술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마음과 몸의 통합체이고 전 우주와 관계를 맺으면서 작은 우주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 전체성을 통찰하는 지혜가 없으면 치료의 기술 또한 한계가 뻔하다. 기술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지혜와 동반하는 것이다.


지혜를 얻으려면 마음이 맑고 발라야(正) 한다. 이것이 명의의 두 번째 조건이다.

돈 욕심, 명예 욕심, 세력 욕심 같은 사욕(邪慾)이 없고, 오로지 생명을 살리는 데에 가치와 보람을 두고 있어야 한다. 맑고 발라야 바른 기운이 나와서 상대방의 기운을 바로 잡을 수 있고, 우주의 좋은 기운과 파장이 일치되어 큰 기운을 받을 수 있고, 그래야 지혜가 생긴다.
어떤 경지 이상에 올라있어야 한다. 그 경지는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스스로 터득한 의술세계로서 그것을 통하여 치료의 효과가 상당히 확인되는 것이라야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가 명의의 세 번째 조건이 아닐까 싶다.
박사님은 의술을 하는 자세가 매우 맑고 진지하다.
치료를 해 오면서 의서를 많이 보았는데, 그대로 해도 치료가 안 되는 것들이 더러 있어서 “이것이 아니다”는 실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 치료한 환자에 대하여 저녁에 집에서 반드시 치료내용을 정리하면서 되새긴다. 그렇게 하다보면 경락 순서를 틀리게 하였거나 다른 경락으로 들어간 것들이 나오기도 한단다.
환자를 놓고 엄청나게 기도를 많이 하신다. 기독교를 모태신앙으로 가지고 계신데, 특히 새벽기도에서 ‘신들릴 정도로’ 기도를 하신다. 그렇게 하면 어떤 영감이 오고, 그 뒤에 그 환자를 만나면 환자도 ‘꿈에 선생님이 보인다’고 하는 등 감응이 오는 것을 참 많이 느낀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치료효과가 대단히 좋다고 한다. 이 부분을 박사님은 “남들은 잘 이해를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영혼의 세계, 본성의 세계에서 사람은 모두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경지에서 치료의 힘을 받고 그 힘을 활용하고 있다고 보면 틀린 것일까? 그렇다면 박사님은 진지한 기도를 통하여 치료의 근원적인 힘을 터득한 것이 아닐까?
박사님은 고향인 전북 익산에서 직장 따라 내려와 40년을 살고 있는 경남 진해에 ‘토라봉침연구소’라는 개인 연구실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산에 있는 민중의술살리기국민운동 부산경남연합 봉사실로 매주 3일간 출근하여 무료 봉사를 하시는데, 올 때도 항상 “하느님, 천사에게 명하셔서 저와 동행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빠짐없이 기도한다.


이러한 신앙의 힘, 영적 힘으로 치료하니 치료가 잘 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박사님이 하라는 대로 끝까지 응해주는 환자는 다 고쳤다.
중이염으로 서울, 부산 등지의 병원에서 세 번을 수술하고도 끝내 낫지 않아 치료를 포기하고 있던 선박회사 사장은 민중의술 사무실에서 박사님을 만나 봉침으로 효과를 보자 치료를 확신하게 되었고 아버지, 어머니, 며느리까지 다 데리고 오게 되었다.
박사님이 치료해준 간암 환자는 현재 사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복수가 차고 완전히 끝난 상태의 대장암 환자를 치료해서 한동안 더 살게 했다. 위암으로 복수가 차고 3개월밖에 못산다고 모두가 포기한 처녀를 6개월간의 벌침만으로 살려냈다. 지금까지 3만 5천여 명을 치료하였으니, 의사들도 그리 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환자들이 밤이고 새벽이고 가릴 것 없이 집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가족들의 생활에 지장이 많아 할 수 없이 조그만 연구실을 따로 내었는데, 병원에서 치료되는 사람들은 오지 말고 안 되는 사람들만 오라고 하는 데도, 아침 9시에 연구실에 나가면 환자들은 7시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있단다. 병원에서 못 고친 환자들이 벌침을 맞아 보고 몸이 변화되니까 아침부터 와서 기다리는 것이다.
봉사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하루에 150~200명을 ‘미친 듯이’ 치료한다고 하신다. 하루 종일 그렇게 하고 나면 등어리에 노란 땀이 나는데, 이는 무리하고 있다는 징표이지만 자신을 보고 온 환자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고 하신다. 대신 그 보람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게다가, 연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는 처지이면서도 진해에서 부산까지 일주일에 3일을 손수 차를 몰고 와서 봉사를 하는데, 그에 소요되는 교통비 ․ 벌값 등 월 70~80만원의 비용이 부담스럽지만, 봉사는 여유가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하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그런 것 따지면 못하는 것이고, 맡았으면 책임져야 할뿐, 말이 필요 없다고 하신다.

할 일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목소리만 크고 말만 많은 잡새 인간들에 대한 경종이다.
벌독의 효과는 48시간을 지속하니까 한 번 맞고 48시간 이내에 다시 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 시간이면 틀림없이 그 자리에 가서 앉아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박사님의 신념이고 철칙이다.

그래서 적어도 2일에 한번은 봉사함으로써, 일주일에 한번 씩 봉사하겠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
“환자들을 소홀히 하면 안된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환자가 많이 온다고 해서 소홀해지면 안된다.”
세상에 어느 의자(醫子)가 이렇게 철저할 수 있는가? 떼돈을 버는 의사들도 하지 못하는 것을 면허증도 없이 처벌의 위험 하에 놓여 있는 한 자연의료인이 보수도 안 받고 이렇게 철저한 사명감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그러면서도 정작 박사님은 항상 담담하다. 말없이 실천할 뿐,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지도 않는다. 얼굴에는 평온하고 선한 기운이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이렇듯 정성을 다하니 환자들이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1개월 정도면 박사님의 말을 믿는다고 한다. 어찌 이런 분을 명의라고 하지 않겠는가!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어 교회마다 15~20명씩 봉침요원으로 봉사하게 했다.


확고한 신념, 끊임없는 노력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지만, 환자들에게서는 한 번도 시비를 당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기자, 경찰, 한의사들이 고발한다고 위협을 한 적은 있지만, 박사님의 소신은 확고하다.
“나는 잡혀 들어가도 나와서 또 할 것이다. 고발해봐라. 나는 여기에 한이 맺힌 사람이다. 중풍, 치매 하나 못 고치면서 말이야.”
어머니가 3년 동안 치매로 투병하는 동안 손수 병수발을 하였으나 끝내 못 고치고 저 세상으로 보내고 나서 본격적으로 의술의 길로 들어섰는데, 그 한이 맺히신 것 같다.
잘 고치는 것이 진짜 의술이니, 생명 앞에 거짓말 못한다. 이것이 자연의 법, 하늘의 법이니 위축될 것도 눈치 볼 것도 없다. 인간의 법은 생명과 하늘법 아래 초라할 뿐이니, 대도를 가는 데 두려워하고 거리낄 것이 무엇인가! 듣는 사람도 신이 나고 힘이 생긴다. 박수를 보낸다. 마침내 우리는 진리와 정의로 승리할 것이니, 박사님, 힘을 내십시오!
의술 공부도 끊임없이 하신다.
중국 요녕성 중의대의 사체부검반에 한번 다녀 왔는데, 한번 더 갈 예정이고, 약초 공부를 하여 조약도 보조적으로 활용해 볼 계획이라고 하신다. 102살의 신의, 장병두 할아버지가 지금도 끊임없이 의술을 연구하신다더니, 뛰어난 의술 뒤에는 역시 반드시 그런 노력이 있고, 명의일수록 더 노력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민중의술의 맥을 거듭 확인한다

우리 민족, 민중의술의 명의가 어떻게 생겨나고 전파되고 전수되는지, 그 정신이 어떠한 것인지, 박사님을 통하여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 자연스러움, 무리도 부작용도 없음, 특별히 복잡하고 긴 교육제도도 필요 없음, 돈도 들지 않음, 자본도 시설도 필요 없음, 어느 누구도 항의하지 않음, 자질이 있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음, 병원과 한의원에서 포기한 환자들을 거의 살려 냄, 자발적이고 보람에 함으로 진정한 의도가 빛남, 타고난 자질을 살림... 이 무한한 가치, 아름다운 정경, 그것이 우리 백성들이 수천 년 가꾸고 물려온 의도(醫道)의 뜰이다.
그 아름다운 뜰을 유린하고 폐쇄하고, 그 곳에 비싼 돈과 고통스러운 기계장치와 거대한 인공의 건물을 세워서 고치지도 못하는 가짜 의술로 장난치며 백성을 조롱하고 우리 의도의 얼을 짓밟는 자들은 누구인가?
박사님 같은 분들이 계시어 민족 민중의술은 맥을 잃지 않고 이어져 간다.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이어 갈 것이다. 그들이 그 길을 쉽고 즐겁게 갈 수 있도록 우리는 길을 닦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닦자. 만고에 빛날 길이 이 길이다. 생명의 길, 하늘의 길, 보람의 길이다. 박사님께 맛있는 식사 한 끼 대접해 드리자.

 

… 활법과 뜸과 침으로 사람을 살리는 사람   박경숙

민중의술은 법률의 핍박을 받고 있다. 의사·한의사들이 눈을 부라리고 감방에 집어넣으려고 한다. 민중의술의 명의(名醫)를 이렇게 지상에 공개하는 것은 그러므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과감히 공개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이런 문제를 감추고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과거 50년처럼 민중의술이 고발을 피하여 음지에서 전전하는 것은 국민과 국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이것을 양지에 당당히 내어 놓고 국민의 심판을 구해야 한다. 민중의술이 법의 탄압을 받으면 결국 피해를 입는 사람은 국민이다. 그러므로 의사·한의사의 앞잽이인 의료악법이 심판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심판해야 한다. 이 빛나는 치료능력을 가진 민족의술을 계속 처벌해서 매장시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떳떳하게 할 수 있도록 해서 국민의 생명을 구할 것인가? 질병이 창궐하고 제도의료가 속수무책이 될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숨을 수 없다. 숨지 않을 것이다. 당당히 드러내고 싸울 것이다. 창생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의료면허가 환자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도의료와 민중의술 중 과연 어느 쪽이 병을 더 잘 고치는지 밝혀보자. 시합을 해보자. 국가는 의술의 본연이 어떻게 형성되고 자연적 명의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지 제대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국민들은 더 이상 엉터리 제도의료에 속지 말고 누가 내 생명을 더 잘 지켜줄 것인지 눈을 부릅뜨고 심판하기 바란다.

 

용두활수 그 곳에서 사람을 살리다

동해바다를 옆에 끼고 동해남부선과 나란히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낙동정맥의 기세가 동해남부 해안에 이르러 그 맥을 가라앉히기 전 기운차게 다시 솟구치는 달음산 아래 동해바다를 발아래 내려다 볼 수 있는 곳. 기장군 일광면 이천리. 이천천이 굽이쳐 흐르는 광경이 장엄하다는 용두활수(龍頭活水). 그 곳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여장부가 한곳에서 무려 40여년을 살고 있었다. 김수영 감독의 영화'갯마을(1965년. 원작 오영수)'의 무대가 된 일광의 이천리. 일제 때 매립으로 지금은 없어져 버린 용두머리(야산)를 휘감고 도는 이천천변의 박경숙 여사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 호기심이 발동한 필자는 집을 나설 때 일부러 전화도 하지 않고 인근 주민들에게 물어가면서 찾았는데 과연 인근 동리 사람들은 남녀노소 너나없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단법인 한국활법일광운동원 박경숙(朴敬淑)원장. 당년 70세.
그는 서슬퍼런 의료악법의 칼날아래서도 오로지 고통에 찬 민중들에게 의술을 펼치면서 많은 사람들을 구하였다. 치료를 하면서 공부도 하면서 생선을 머리에 이고 기장시장까지 걸어 다니면서도 잠시도 구료의 손길을 늦추지 않았던 의로운 여장부 민중의술살리기 부울경 연합 박경숙 고문님은 사람의 체위와 틀어진 골격을 무시하고 자침하는 침술에는 한계를 느껴서 활법을 시작했다는 여사님은 약 20년을 미치다시피 공부에 파묻혔단다. 필자가 취재를 하는 장시간에도 식을 줄 모르는 뜨거운 열정을 미루어보아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여사님에게 체험사례를 들려 달라니까 웃으시면서 수 없이 많았던 지나버린 사례들을 일일이 기록을 해놓은 것도 아닌데 하시며 난감해 하신다. 그러자 침대에 누워있던 환자들이 일어나서 같이 거드는데 침이면 침 뜸이면 뜸 그리고 활법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여사님의 다양한 체험사례들을 보고 들은 대로 여기에 옮겨 적어본다.

 

체험 사례

고향은 경북 의성이고 현재 충북 제천에서 철도청에 근무하는 이름은 최현주 당시 고1 여학생인 이 아가씨는 얼마나 아팠으면 자신이 겨우 앉는데도 15분 일어서는 데도 15분이나 걸리는 중증으로 하체는 거의 못 쓰는 상태였다. 그 당시 그는 내 제자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차도를 보이지 않자, 그 어머니의 원망 섞인 소리를 듣고 내가 치료를 대신 맡았다. 환자를 살펴보니 골반이 기이하게 틀어진 것을 확인하고서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그 학생은 병을 고치기 위해 온천장에 있는 고모 집에서 먹고 자고 통원치료를 하였는데, 쉬고 않고 열심히 성실하게 치료를 받은 탓인지 서서히 완쾌가 되었다. 거의 2년을 돌본 결과 이제는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많이 좋아져서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그 후 졸업도 하고 철도청 취직 시험까지 합격을 했다고 좋아하며 인사를 하러 내려왔다. 그녀는 감사한 마음으로 큰 절을 올릴 때 의자로서 치료한 보람을 느낀단다.

 

같은 동네에 사는 장대철 나이 70세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으로 대통령표창까지 받은 한국도로공사 임원으로 근무하는 분이었다. 지금은 감리를 보는 기술자로서 약 6년 전 심장병으로 경주 동국대학에서 너무 늦었으니 집에 가시라고 하더란다. 가셔서 재산정리를 하시고 병원에서는 침대에서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휠체어를 타고 다니도록 했다. 위험하니 걸어 다니는 것조차 못 다니게 하더란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과 병원의 검진 결과 내리는 처방이 주사쇼크 일어난다고 약도 못쓰고 집으로 가시라는데 결국 나흘 만에 퇴원을 하게 되었다. 알약 한 알 주고 퇴원을 하라는데 며칠이라도 입원하면 안 되겠느냐고 통사정을 하니까 집에 있으나 여기 있으나 별반 나을 것이 없는 상황이니 한 달에 한번 씩 약만 타러 오시란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같은 동네에 계시는 박경숙 여사님에게 왔다. 여사님께서는 여태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심장에 불을 한번 떠보자며 이 분에게 최초로 시도를 했단다. 오래 동안 치료를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아르바이트 여학생을 일당 3,000원을 주고 붙여서 매일처럼 뜸을 뜨게 했단다. 그렇게 하기를 몇 달 후 갈수록 증세는 몰라보게 나아져갔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걸어 다니며 일상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몇 년을 그렇게 치료를 한 결과 지금은 완전히 나았다.

 

기장에 사는 윤기우 (50) 5년 전 처음 왔을 때 그는 치료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치료를 받고자 하는 환자가 자기는 대학을 나왔는데 자형이 정형외과 의사이고 누구도 그렇고 하면서 아무도 이 병을 못 고치는데 여기서 고칠 수 있겠냐며 의심을 하더란다. 의사들이 득실대는 좋은 집안에서 무엇 때문에 굳이 이런 누추한 곳에 몸을 맡기냐며 나는 현재 회원들 수가 너무 많아 곤란하다며 돌려보냈어요. 보냈는데 돌아가더니 그 이튿날 다시 왔어요. 왜 왔느냐고 물으니 기장조기축구회에 운동을 하러 가서 일어난 일을 말하니 회원들이 듣고는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 원장님 심기를 건드렸다며 그 분은 돈을 바라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러니 가서 빌어라 하더랍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왔는데 와서 하는 말이 “어쨋거나 내만 좀 낫게 해주소” 카는 기라. 내가 웃으면서 “그러면 당신만 낫게 하고 다른 사람은 우짜능교?” 그날도 역시 치료를 안 하고 그냥 갔습니다. 삼일 째 되는 날 또 왔길래 참 보기가 민망하데요. 오죽 답답하면 저럴까 싶고 저 사람도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낀데 내가 안되겠다 싶데요. 그래서 그 사람도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었겠다 싶어 치료를 하기 시작했는데 한 달쯤 하니까 팔의 통증이 없어지고 몰라보게 좋아집디다. 그래도 밤에 자고나면 아픈 증상은 있어서 두 달을 계속 했지요. 두 달이 넘어설 때 내가 그만해도 된다고 하니까 자기는 불안해서 한 달은 더해야겠다면서 석 달을 치료하고 통증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기장에 사는 혜민이란 학생인데 지금은 대학생이 되었다. 중 3때 목욕탕에서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머리 검사를 하니까 뇌혈관 기형이라 수술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오면서 부터 자꾸 경기를 했다. 천안에 있는 특수학교에 다니는 그 아이를 정성으로 돌보았다. 2년이 넘도록 치료를 하였는데 가끔 천안에서 내가 보고 싶다며 방학 때마다 오곤 했는데, 그러다가 어느 날 아이가 실신상태가 되었다. 우선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고 약도 먹고 하다가 이리로 왔다. 엄마가 울어서 난리가 났고 구경꾼들도 많았는데 내가 치료를 하자 아이가 완전히 깨어났다. 정신이 든 아이가 나를 보더니 아이고 할머니 하면서 나에게 안기자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더랬습니다.

기장에 사는 김선희 할머니(82) 심장병을 뜸으로 치료를 하는데 좀 특이한 방법이다. 심장의 모혈 거궐은 안 뜨고 단중을 직구로 뜬다. 세 번을 뜨는데 목에 실을 감아서 단중까지 길이를 재어 그 실을 길이대로 입에 물고 독맥으로 넘기면 흉추6~7번에 맞닿는데 그 지점에다 뜸을 뜨면 아무리 가쁜 숨도 당장 돌아온다. 이 할머니는 밤낮없이 뜸을 뜨고 완쾌가 되었다.

 

의술 공부

친정아버님이 (朴天東) 공무원으로 독학으로 의술을 하셨는데 침술과 한약조제는 뛰어난 분이셨다. 그런 아버님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까닭으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시집을 와서 보니 남편의 수입은 빠듯한데다 눈 어두운 노모에다 주렁주렁 달린 6남매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어갈 생계가 너무나 막연했다. 아버님이 몇 번인가 오시더니 신랑은 나이가 많고 재산은 없고 무엇을 해서 먹고 살려는가 하고 물으셨다. 그러다가 하시는 말씀이 침술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 침술 공부를 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생선을 시장에 내다팔고 시장에서 파전도 구워 팔고 산에 가서 나무도 해서 팔고 그러면서도 아버님 말씀대로 틈틈이 공부를 하면서 침손님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연륜과 경험이 쌓이니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마흔 살 때쯤 그때는 침 값이 1,500원 2,000원 할 때 화폐 가치가 그런대로 있었죠. 다행히 자나 깨나 공부를 열심히 한 탓인지 환자들이 침을 맞으면 거의가 나았습니다. 당시 한 달 중 보름은 밤잠을 못 잘 정도로 경기 환자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많은 환자들을 구원하였습니다. 환자들이 잘 나으니 자연스레 소문이 나고 줄을 이었습니다. 열흘 침 값으로 돈을 모으면 식구들 양식 마련해놓고 나머지 여유 돈을 쥐고 공부 하러 다녔습니다. 그 때는 정말 미쳐있었습니다.

 

중국을 드나들며 공부를 하다

중국에서 침술 공부를 하면서 시혐을 쳤다. 세 사람씩 들어가서 편마비 환자에게 각각 침을 놓는 시험이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편마비와 반신불수를 구분 못하고 엉뚱하게 좌병우침 운운하며 자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아버지로부터 배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험을 본다고 생각하니 신경이 쓰여 시험관 앞에서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조금 있다가 시험관이 나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에게는 침을 뽑으라고 합디다. 틀렸으니까 유침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당시 침으로 뇌수술을 하신 유명한 중국의 정의동 선생님이 시험관이셨는데 나보고 침술을 누구에게서 배웠냐고 물으시며 아버지에게 배웠다니까 침술에 대한 열정과 의욕을 칭찬하셨다. 중국에 중의 연구원 정야월 서기관한테 침술을 배워서 국제침구사 자격증을 취득 하였는데 침을 놓으면 잘 낫긴 해도 활법과 병행하면 금상첨화란다. 열심히 배운다고 배우는데도 그래도 모르는 것도 많고 해서 중국 중의학 책을 가져와서 번역해서 책을 많이 만들었다. 중국에는 침구 배우러 두 번가고 기공 때문에 두 번 갔다 오고 많이도 드나들었습니다. 기공에 대한 공부도 한 20년 넘게 했습니다. 활법 시작하고부터 기공을 배웠습니다. 자기 몸의 기 흐름을 알아야 활법도 할 수 있고 기공하는 사람이 경락을 모르면 기공도 못하고 인체해부학을 모르면 곤란합니다. 활법공부는 협회에서 배웠습니다.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근 10년을 미쳐서 했습니다. 서울의 박금실 회장님이 우리나라 활법창시자입니다 ‘활법이란 무엇인가’ 책도 내고 활법을 체계적으로 틀을 세우신 분입니다. 그 분도 지금 민중의술살리기를 열정적으로 해 나가고 있습니다.

 

척추 측만 판별법

건강한 사람은 체형이 바르고 몸매가 유연하다. 그러나 병이 있는 사람은 신체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관절이나 근육이 변형되어 있다. 그리하여 환자의 측만을 판별하는 방법은 여간 어렵지 않다. 측만증이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를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 합니다. 선천적인 것은 치료가 어렵습니다. 먼저 거울 앞에 환자를 세워봅니다. 그리고는 환자에게 자신의 체위에 대해서 일러주고 나서 웃옷을 벗기고 엎드리게 합니다. 그리고 다리를 벌려서 자기 어깨 너비만큼 11자 모양으로 어깨와 평형을 이루어 엄지발가락 끝이 견정 혈을 보고 올라오게 합니다. 발끝을 들어 올리면서 두 손을 발끝을 향해서 (이 자세를 취하는 박여사는 기가 올라온다면서 움찔한다) 그대로 자연스럽게 숨을 내쉬면서 엎드립니다. 그러면 이손이 닿는 만큼 뒤에서 척추를 관찰하면 후천적인 사람은 척추가 바르게 나타나고 선천적인 사람은 누워도 비뚤어지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환자에게 골격과 체위에 대해서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을 시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바르지 못한 몸이나 체위에 대해서 의아해 하다가 이내 수긍을 하는데 그로부터 환자는 자기 몸의 체형에 관심을 가지고 올바른 자세를 가지려 노력을 기울입니다. 바로 그러한 생각과 실천이 염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쪽 어깨가 내려갔는지 항상 염두에 두고 올바른 자세를 취하면서 내가 어쩌다가 왜 이렇게 틀어졌을까 생각을 하고 생활 한다면 병은 수월하게 치료가 됩니다.

 

활법의 요령과 원리

활법은 약물이거나 기구에 의존하지 않고 맨손으로 번잡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우리 몸의 부자연스러움과 불편한 상태를 조정,

회복시키는 자연치유 기법입니다.
습성의 잘못이나 무리를 가하여 꼬인 근육은 풀어주고 신경과 혈관을 제자리에 돌려놓습니다. 환자를 돌려 눕게 하고 골격을 바로잡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이 경추가 틀어져있습니다. 나의 왼발로 올라간 왼쪽어깨를 밀어주고 오른발은 내려간 우측어깨를 잡아주고 목뒤에 놓인 수건을 듭니다. 앞의 흉골을 자세히 보세요. 같아지지요. 목도 이렇게 돌려주고 잘 돌아가는 목부터 당겨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내발로 환자의 어깨를 지지했기 때문에 많은 힘을 쓰지 않더라도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대퇴로만 자연스럽게 닫고 벌리고 합니다. 끙끙거리며 힘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편하게 경추와 흉추 1~2번 다 빠집니다. 목을 당길 때는 입을 벌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동적으로 숨을 쉬게 됩니다. 나중에 하는 사람들이 더 수월한 것은 내가 호흡조정을 하기 때문이지요.

내 몸에 갈수록 기가 축적이 되게 때문에 갈수록 더 힘이 납니다.

 

위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힘겹게 살아가면서 끼니를 놓치다보니 위장병이 도졌다. 병원에서 위암이라는 소리를 듣자 친정아버지가 쇼크를 받고 쓰러지셨어요. 부산의 거제리 친정에서 자고 있는데 새벽 4시경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진맥을 하시더니 너는 결코 위암이 아니니 다시 재검사를 하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루 있다가 재검을 하였는데 이틀 만에 결과가 다시 나왔는데 담당의사가 우리 남편을 붙들고 오진을 했다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나는 항상 아버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오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너무나 못 먹고 끼니를 자주 놓치는 까닭에 위가 말라 비틀어져서 위벽이 논바닥 갈라지듯이 갈라져 염증이 심하여 구분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서 위장치료제 암포젤과 약을 주는데 아버지가 못 먹게 하시며 대신 한약을 5첩을 지어 주시면서 이 것 먹고 부지런히 뜸을 뜨라고 하셨습니다. 콩 알만한 뜸을 3년을 하루같이 일회 3번씩 뜨고 결명자를 새벽마다 냉면그릇에 숨도 안 쉬고 마시기를 3년을 하고나니 그 덕인지 저 덕인지 병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보시다시피 나이 70에 이렇게 건강하잖아요?

그로부터 몸무게가 80kg 까지 나갔을 정도로 건강해졌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같은 사람

세상에 널리 이로운 소금은 어떻게 만들어지며 빛 또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유리는 유리로써 자를 수는 없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그 어떤 금속보다 단단한 최고의 돌이자 보석인 금강석이라야 유리를 잘라낸다. 보통사람의 그릇으로 보통사람을 담을 수는 없다. 하늘은 이러한 일꾼들을 만들기 위해 먼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시련을 주어서 그 사람이 어떻게 헤쳐 가는지를 지켜본 후에 비로소 사람을 살리는 의자(醫者)로서의 길을 걷게 하신다. 자신의 아픈 상처가 아물고 여물어서 마침내 영롱한 진주가 되는 것처럼 그리하여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 캄캄한 어둠을 비추고 절망에 빠져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건져내듯이 여기에 그러한 오늘이 있기까지 파란만장한 드라마의 주인공 박경숙 고문님은 지금도 민중의술 살리기 재정을 걱정하시며 안타깝게 생각하신다. 자신의 도움이 미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모임에 열성으로 참여하는 일만이라도 실천한다며 황종국 판사님께는 늘 미안하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 피라미드 왕쑥뜸으로 만병을 고친다   김명옥
민중의술은 법률의 핍박을 받고 있다. 의사․한의사들이 눈을 부라리고 감방에 집어넣으려고 한다. 민중의술의 명의(名醫)를 이렇게 지상에 공개하는 것은 그러므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과감히 공개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이런 문제를 감추고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과거 50년처럼 민중의술이 고발을 피하여 음지에서 전전하는 것은 국민과 국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이것을 양지에 당당히 내어 놓고 국민의 심판을 구해야 한다. 민중의술이 법의 탄압을 받으면 결국 피해를 입는 사람은 국민이다. 그러므로 의사․한의사의 앞잽이인 의료악법이 심판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심판해야 한다. 이 빛나는 치료능력을 가진 민족의술을 계속 처벌해서 매장시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떳떳하게 할 수 있도록 해서 국민의 생명을 구할 것인가? 질병이 창궐하고 제도의료가 속수무책이 될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숨을 수 없다. 숨지 않을 것이다. 당당히 드러내고 싸울 것이다. 창생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의료면허가 환자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도의료와 민중의술 중 과연 어느 쪽이 병을 더 잘 고치는지 밝혀보자. 시합을 해보자. 국가는 의술의 본연이 어떻게 형성되고 자연적 명의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지 제대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국민들은 더 이상 엉터리 제도의료에 속지 말고 누가 내 생명을 더 잘 지켜줄 것인지 눈을 부릅뜨고 심판하기 바란다.-


부산의 진산 금정산이 범어사를 왼쪽에 꿰차고 동래 온천장 쪽으로 달리다가 잠시 허리를 튼 구서동 산기슭에 용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앉아 안개 같은 기운을 내 뿜고 있다. 암 용이다. 그 안개는 천지의 기운이 감응된 것이어서 이를 쏘이는 사람은 병이 잘 낫는다.
김명옥(金明玉). 당년 54세. 의사도 한의사도 아니면서 세상에 이름 내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 분이 믿는 것은 오직 하늘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미 오래 전에 하늘의 감응을 입은 사람이어서 그 믿음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이 분이 믿는 것은 의술의 정직함이다. 순리에 맞는 의술은 반드시 병을 고치게 되어 있고, 순리에 맞지 않는 엉터리 의술은 절대로 병을 못 고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의술인지 엉터리 의술인지는 치료 결과가 바로 말해준다. 바른 의술은 하늘(자연)에서 온 것이므로 그것은 인간세상의 인위적인 기준과는 관계없이 사람을 살리는데 쓰여져야 마땅하고, 엉터리 의술은 제 아무리 좋은 학벌과 인공적인 자격증을 자랑한다 한들 생명을 망치는 것이어서 사라져야 한다. 이 위대한 하늘(자연)의 법을 믿는 사람은 인간들이 이해타산으로 만든 세상의 법이 우스울 뿐이다. 오히려 “하느님, 저 자들은 저들이 하고 있는 일이 뭔지도 모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할 뿐이다. 그래서 오로지 잘 고치는 의술로 사람 살리는 일을 신나게 할 뿐이다.
명의란 무엇인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병을 잘 고치는 것은 당연한 기본이다. 그런데 병을 잘 고치려면 의술의 기술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기술에 기운이 실려야 하는데, 기운은 마음을 타고 흐른다. 그러므로 명의는 마음이 바로 선 사람이고, 그 마음따라 흐르는 좋은 기운을 의술을 통해서 잘 쓸 줄 아는 사람일 터이다. 그런 마음과 기운을 담을 그릇을 가진 사람일 터이다. 김명옥은 그런 사람이다. 이 분이 어떤 경위로 치료능력을 체득하게 되었는지는 잠시 접어두고 그가 고친 사례들을 먼저 살펴보자.

 

불치병이 있는가?

김명옥씨에게 불치병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치료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뿐이다. 양의학이 붙여 놓은 병명에 베체트병이라는 것이 있다. 면역계 이상으로 염증이 오는 병이다. 그 염증이 오는 신체 부위에 따라 병명이 다르다. 신장에 오면 ‘루프스’병이라고 한다. 눈에 오면 ‘포도막염’, 대장․소장에 오면 ‘크론’, 입안과 생식기에 오면 ‘패티씨병’, 피부에 오면 ‘홍반성 피부낭창’이라고 한다. 현대의학이라는 서양의학으로는 치료약이 없고, 스테로이드제를 사용해서 증세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래서 양의학에서는 불치병으로 친다. 그런데 김명옥씨는 이를 피라미드 왕쑥뜸으로 고쳐냈다.


대구에 사는 32세의 한아무개 간호사. ‘크론’으로 10년 이상 고생하다가 김명옥씨를 찾아왔다. 당시 하루에 혈변을 열 번 이상 보아 심각한 탈수현상이 왔고, 호흡이 안되어 집에서도 산소호흡기를 꽂아야 될 정도로 빈혈이 심각했다. 일반병원에서는 위험하다고 받아주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스테로이드제제를 사용하여 간(肝)과 신장․방광 계통이 치명적으로 손상되고 온 몸의 장기들이 엉망인 상태였다. 피라미드 왕쑥뜸을 한 달 정도 뜨고 나니까 음식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고 혈변의 횟수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헤모글로빈 수치도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면서 산소호흡기를 떼었다. 2개월 후에는 밥을 천천히 꼭꼭 씹어서 한 공기씩 먹기 시작했다. 3개월째부터는 수혈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6개월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 계속 왕쑥뜸을 떴고, 간호사로 다시 취직해서 일하고 있다.


서울에 사는 34세의 손아무개씨. 오랫 동안 ‘루프스’를 앓으며 스테로이드제제를 사용했기 때문에 신장․방광이 망가져 이뇨제를 쓰지 않으면 온 몸이 물이차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음식을 조금만 먹어도 체하고, 체하면 몸이 터질 것처럼 탱탱하게 부어올랐다. 한 달 정도 왕쑥뜸을 뜨니까 음식을 먹어도 체하는 게 현저하게 줄어들고, 2개월째 부터는 이뇨제를 쓰지 않아도 소변이 잘 빠지기 시작했다. 6개월 정도 쑥뜸을 뜨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계속 꾸준히 뜬 결과 지금은 경락맛사지실을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 다른 루프스 환자도 많이 고쳤다.
여고 3학년 수험생. ‘홍반성 피부낭창’으로 온 몸의 피부가 벌겋게 솟아 곪으려고 하는 상태에서 피라미드 쑥뜸을 한 번 떴는데도 눈에 띠게 염증이 가라앉았다. 1달 정도 집중적으로 뜬 다음에 척추를 중심으로 등, 다리, 팔과 앞쪽 12장부의 모혈에 쑥뜸을 놓아 주면서 염증이 있는 자리를 집중적으로 떴다.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


‘경피증’ 환자를 고친 사례. 54세의 여자 임아무개씨. 이 환자가 처음 왔을 때 김명옥씨는 깜짝 놀랐다. 온 몸이 미이라보다 더 끔찍하게 말라 비틀어져 딱딱하게 굳어 있고, 손가락과 팔꿈치가 굳어서 오그라들고, 무릎이 굳어서 잘 걷지도 못하였다. 내장도 굳기 시작하면서 변을 하루에 수없이 보고, 폐가 굳어서 숨쉬기가 곤란하다고 했다. 머리에서부터 얼굴, 몸 전체가 굳어 있는데, 만져보니 나무토막보다 더 딱딱했다. 침을 찔러보니 휘어질뿐 들어가지도 않았다. 전국의 유명하다는 의사, 약사, 종합병원, 한의원을 다 헤매다가 소개받고 왔다고 했다. 겨우 침을 꽂고 그 위에 피라미드 왕쑥뜸을 뜨기를 1달 정도 하니까 굳어있던 부위에 침을 빼면 침구멍에서 맑은 물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3개월째부터는 까맣고 찐득한 피가 나오고, 5개월째는 피가 맑아지면서 손가락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8개월째는 대소변 횟수가 줄고, 소변의 거품도 현저하게 줄고, 굳었던 팔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손가락도 조금씩 풀어지면서 변을 볼 때 식구들 도움 없이 본인 스스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혈소판 감소증’을 고친 사례. 경남 창녕에 사는 중3 여학생인데 어머니와 같이 만났을 때 얼굴은 창백하고 살은 통통한 편이었다. 몇 년 째 이름난 큰 병원과 한의원을 다 다녔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모녀가 눈물을 글썽였다. 상담을 통해 콜라․사이다․과자․스낵류 등의 인스턴트 식품을 일체 먹지 말고 엄마가 해주는 자연식만 먹으라고 하였다. 간식도 밤․고구마․감자․ 옥수수 등으로 대체하고 미네랄과 무기질이 풍부한 생수를 마시게 하는 등, 식이요법을 지도하면서 피라미드 왕쑥뜸을 뜨기 시작했다. 1달 정도 뜨고 나서 검사를 하니 수치상의 변화는 보이지 않으나 코피가 터지면 빨리 지혈되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5개월째에 혈소판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그 동안 문 닫았던 양품점을 다시 열었다.


‘류마치스성 냉증’과 ‘산후풍’을 고친 사례. 31세의 주부 조모씨. 전라도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 왔는데, 걷지를 못해 남편이 업고 들어왔다. 온 몸에 차가운 냉기가 흐르고 뼈 마디마디가 쑤셔서 밤에 잠을 못자고 집안일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울고만 있다고 했다. 전국의 유명한 병원과 한의원을 다 다녀왔다면서 절망감에 울먹였다. 첫날 등, 다리, 척추뼈 마디마다 피라미드 왕쑥뜸을 올려놓으니 몸에서 냉증이 빠지면서 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주 3회 정도 전라도에서 남편이 데려 왔다. 한 달 정도 뜨니까 명현반응이 왔는데, 온 몸이 퉁퉁 붓고 몸을 꼼짝할 수 없어 화장실에도 갈 수 없었다. 집안에서는 돌팔이에게 가서 몸이 망가졌다고 난리가 났으나, 요강을 옆에 갖다놓고 소변을 보고 음양탕(더운물과 찬물을 7:3의 비율로 섞은 물)을 만들어서 열심히 마시도록 지도한 결과, 하루 정도 지나니 부기가 빠지기 시작했고, 일주일 정도 지나니 통증이 가라앉아 살살 걷기 시작했다. 남편과 함께 부산으로 올라와 방을 얻어 놓고 집중적으로 왕쑥뜸을 뜨기 시작했다. 2개월째부터는 남편의 부축 없이 혼자서 다니기 시작했다. 5개월째는 택시를 타지 않고 지하철까지 뛰어 내려갈 정도가 되었다. 6개월 뜨고 완치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둘째 아이를 낳고, 아파서 모시지 못했던 시아버지를 모시고, 학교 영양사로 취직해서 잘 살고 있다.


‘간경화’를 고친 사례. 부산에 사는 56세의 박아무개씨. B형 간염을 오랫동안 앓았는데, 시숙이 의사라서 GOT,GPT 등의 여러 가지 검사를 지속적으로 하고 건강을 관리하는데도 결국 간경화로 발전하고 말았다. 시숙이 집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편히 쉬라고 하길래 결국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소개를 받고 김명옥씨를 찾아왔을 때는 얼굴색이 검고 몸이 퉁퉁 부어있었는데, 소화가 잘 안되고 걸레 하나 들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다고 했다. 피라미드 왕쑥뜸을 뜬지 1개월 정도 되니 질질 끌고 다니던 다리가 가뿐하게 걸어졌다. 2개월째에는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기운이 났다. 3개월째에는 부어 있던 몸이 차차 빠지기 시작했다. 4개월째에 GOT, GPT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고, 6개월째에는 간경화 수치도 정상으로 나오고 경화가 없어졌다고 하였다. 그녀의 딸이 영국 유학 갔다가 몸이 엉망진창이 되어 돌아왔다면서 딸을 데리고 와 상담을 하고는 뜸쑥을 사가서 집에서 딸에게 떠 주었는데, 생리통, 여드름, 수족냉증, 부기, 어깨결림이 다 없어지고 예뻐졌다고 고마워하였다. 남편이 의사인 이아무개씨. 간경화로 고생하였는데, 힘이 없고 밥도 못먹고 잠도 못잤다. 집안에 의사가 여럿 있고 한의학 박사도 있으나 소용없었다. 주치의인 부산 고신의료원의 안아무개 박사로부터 6개월 정도 밖에 못산다는 선고를 받았다.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입던 옷을 친구들에게 다 나눠주고 영정사진도 찍어 두고 살림을 정리하였다. 그런데 왕쑥뜸을 뜬지 한 달 후에 보호자 없이 혼자 다닐 수 있게 되었고, 몇 달 더 뜨고는 뜸 기구를 사가서 집에서 떴는데, 병원에서 선고 받았던 그 6개월이 다 지났을 때 병원에 갔더니 주치의가 정상이라고 하면서 깜짝 놀랐다. 간경화는 쑥뜸으로 가장 잘 낫는 병에 속한다.


심한 ‘자궁근종’을 고친 사례. 부산에 사는 43세 안모씨. 근종이 한두개가 아니고 온 자궁에 퍼져있는 특이한 상태였는데, 병원에서는 암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하면서 자궁을 들어내자고 하였다. 본인이 애기도 낳지 못했는데 자궁마저 없으면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하면서 거부하고 피라미드 왕쑥뜸을 뜨러 왔다. 생리 때 하혈이 심해 빈혈이 심하고 호르몬의 불균형으로 살이 많이 찌고 이뇨가 잘 안되어 항상 부어 있는 상태였다. 한 달 정도 쑥뜸을 하니 생리 때의 하혈이 현저하게 줄었다. 2개월이 되니 이뇨가 잘 되면서 부어 있던 얼굴이 예쁘게 빠지기 시작했다. 3개월부터는 허리라인이 생기고, 6개월이 되니 여러개의 근종이 다 없어졌다.

자궁근종은 2개월 내지 6개월이면 다 낫는다. 완치사례가 많다.


‘위암’에 걸린 68세의 이모씨. 웅상병원에서 오랫동안 위궤양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위암이라고 진단 받았다. 의사의 지시를 거부하고 왕쑥뜸을 떴는데, 6개월만에 완치되었다.


‘간암’에 걸린 유아무개 목사도 6개월간 왕쑥뜸을 뜨고 식이요법을 하여 완치하였다. 다른 간암 환자도 1주일에 두 번씩 6개월 정도 왕쑥뜸을 하였는데, 그 뒤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에 갔더니 암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


‘신장암’에 걸린 경북 고령의 차아무개씨. 주말에 부산에 와서 일요일까지 왕쑥뜸을 뜨고 가기를 6개월간 하였더니 암종양의 성장이 멈추었다. 농사일 잘 하고 있다.


‘류마치스 관절염’은 무릎에 물이 차는 증세까지, 환자의 나이에 관계없이, 한 번도 실패 없이 100% 왕쑥뜸으로 고쳤다. 염증성 질환은 쑥뜸만으로도 잘 낫는다.


당뇨와 퇴행성관절염을 한꺼번에 고친 사례. 김명옥씨 딸의 한문선생님이 나이 60세였는데 400mg/dl이 넘는 당뇨와 퇴행성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위험하니 수박도 먹지 말라고 할 정도로 엄격하게 식이요법을 시켰으나 환자는 오히려 먹고 싶은 과일을 마음대로 못 먹어 식이요법 스트레스 때문에 병원에 못 다니겠다고 하면서 쑥뜸을 뜨려고 찾아 왔다. 먹고 싶은 과일을 마음껏 먹게 하고 쑥뜸을 했는데, 1년 6개월만에 병원 검사 결과 몸 전체가 완전 정상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우울증’, ‘환청’환자도 많이 고쳤다. 정신질환은 쑥뜸으로 너무 치료가 잘된다. 이런 환자들이 신경정신과에서 주는 약을 먹으면 아무 의욕이 없이 멍청하게 눈이 풀어져 있다. 환청은 40일만에 고쳤고, 심한 정신질환은 6개월 정도 걸렸다.


지독한 알콜중독자도 40일만에 고쳤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소주 1병을 마시고 안주도 없이 계속 술을 마셔대는, 뼈만 남은 사람이었다.

 

오랜 투병생활

김명옥씨는 내과의사인 아버지와 국어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어릴 때(10살 무렵으로 기억한다) 결핵에 감염되어 그 이후 내내 꼬랑꼬랑 앓았다. 어린 마음에 사람은 본래 아프게 사는가 보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주사로 치료를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입안이 헐기 시작했다. 밥을 못 먹었고, 잘 낫지 않았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서 감기를 자주 하였다. 항생제를 사용하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이 왔다. 병명이 나오지 않으니 의사인 아버지도 답답해 했다. 시집을 보내면 나을까 싶어 빨리 결혼을 시켰다. 23세에 결혼하고 24세에 아이를 낳았다. 첫 애기 놓고 많이 아파 집안일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둘째 아이를 놓고는 더 악화되었다. 29세때는 못 일어날 정도로 아팠다. 입안이 헐고 생식기에도 염증이 생겨 레이저수술을 하였다. 의사는 세균도 없고 바이러스도 없는데 염증이 잡히지 않고 병명이 나오지 않으니 이상하다고 하면서 신경성이라고 하였다(지금 뒤돌아보니 그것이 바로 베체트병이 아니었나 생각된다고 한다). 하도 낫지 않으니 시어머니가 어디 가서 물어보고는 집안에 총각귀신이 있어서 몸에 붙었다고 하더라면서 용한 스님을 불러 며칠간 집에서 재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밥도 못 먹고 계속 꼬랑꼬랑 하면서 병원 신세를 졌다. 전라도 어느 산 속 절에 들어가서 스님에게 8개월간 침을 맞았는데, 못 먹던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침을 맞다가 거품을 물고 기절하는 바람에 하산했다.

 

수련과 마음공부

31살 때 전기(轉機)가 왔다. 이웃에 사는 교장선생님 내외분이 기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기(氣)를 넣어야 한다면서 ‘단(丹)’이라는 책을 건네주었다. 그 책을 보고 집(부산 괴정동) 근처에 있는 포교원에 다니면서 참선(명상)과 단전호흡을 배우고 마음공부를 했다. 스님은 ‘억지로 하지 말고 의식을 단전에 두고 자연스럽게 호흡하라. 생각도 버리려 하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고 가르쳤다. 그런 수련을 틈나는 대로 몇 년간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힘이 조금 나면서 건강이 조금씩 회복되었다. 시장도 못 갔는데 걸어서 시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35세 때 바로 밑의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즉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연락을 받고 병원 영안실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손을 비비며 무조건 동생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믿어 본 적이 없어서 그 무엇인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그냥 정신없이 빌었다. 한참 그렇게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노란색의 환한 빛이 비치며 몸 안으로 쫙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금이빨을 드러내고 너무도 편안하게 웃는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면서 본인도 편안함을 느꼈다.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고 이후에도 경험하지 못한 최상의 편안함, 몸에 실오라기조차 걸치지 않은 듯한 지극한 편안함이었다.


그 후 명옥씨는 사랑하고 아끼던 동생의 죽음에 대한 허망감과 고통을 안고 스님, 목사 등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다. 그러나 누구의 가르침과 지도도 흡족하지 않아 스스로 책을 섭렵하면서 사후세계 등을 공부했다. 티벳트 「사자(死者)의 서」등이 이 때 읽은 책들이다. 그러는 동안에 죽음에 대한 인식이 넓어졌다. 처음에는 동생의 죽음에 매달려 있었으나 모든 사람의 죽음에 대한 인식으로 생각이 확대되었다. 마침내 그 동생이 자신을 가르치려고 스승으로 이 세상에 왔다간 존재임을 깨닫고,

동생의 죽음 후 4년 반 동안 해 온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책을 덮었다.

 

의술 공부

자연의학을 배우면서 자신의 몸을 돌봐야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 과정에서의 일이다. 37,8세쯤 되었을 때 큰딸이 다니던 유치원의 자모가 권유해서 가장 간단하다는 수지침에 입문했다. 가족들이 제주도에 놀러 갔는데 옥돔 굽은 것을 먹고 큰 딸이 식중독에 걸려 밤중에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119를 부르려는 어머니를 만류하고 수지침을 놓고 압봉을 붙여 주었는데 다음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깨끗하게 나아 있었다. 귀로에는 집안 제사 때문에 급히 오느라 배를 타게 되었는데, 강풍 속에서 모든 승객이 심하게 멀미를 했으나 명옥씨가 압봉을 붙여준 사람들은 아무도 멀미를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술이 이렇게 신기한 효험을 발휘하는 체험을 처음으로 하면서 의술에 매료되어 갔다. 수지침 공부 중 음양맥진법은 유태우 씨에게 사사받고 나머지는 고려수지침학회 지회에서 배웠다.


그러는 중에 기공의 대가 김영조 교수에게서 수(手)기공도 배웠다. 김교수는 중국 화국봉 주석의 주치의를 지낼 정도로 대가였는데, 정부 고위층의 초청으로 한국에 와 있었다.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1년 정도 배웠다. 처음에는 소나무의 기, 풀잎의 기, 땅의 기, 손의 기감각 등을 느끼면서 그것이 마음먹는 순간순간마다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 달이 되도록 의념으로 기를 돌리라는 말을 들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느끼지 못하여 소주천, 대주천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 어느 날 척추로 물이 흐르는 느낌이 왔고, 임독맥이 통하면서 소주천, 대주천이 되었다. 1년을 수련하고 나서 환자의 통증 부위에 손을 얹으면 통증이 없어지는 여러 체험을 하였고, 미국에 있는 암환자 가족으로부터 통증을 없애달라는 전화를 받고 바로 염파를 보냈더니 5분 뒤에 통증이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수지침 공부를 하면서 오행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공부를 병행했다. 주역, 수맥, 염파, 오링테스트법 등이다.

그 과정에서 섬세한 맥진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2-3년의 수지침 교육을 마치고 바로 수지침 강사를 하였다. 학원과 사회복지단체 등에서 하루에 6-8시간씩 강의를 했다(1996년까지 수지침학회 소속으로 강의를 했다). 그렇게 하면서 6-7년간 중국 북경중의대를 왔다갔다하며 공부했다. 그 계기는 김영조 교수가 마련해 주었다. 김교수는 명옥씨의 기감이 대단히 발달되어 있다고 하면서 제자로 삼고는, 수지침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본격적으로 체침을 배우라고 권유하여 중국행 길을 열어주었다. 중국에서 침구와 방제학(한약처방학)을 주로 배웠다. 침구는 모혈침(12장부의 모혈에 놓는 침), 독맥침(척추에 놓는 침)을 특별히 배웠다. 말을 못하는 환자에게 혀 밑에 침을 놓아 말문을 열어주는 비법도 배웠다. 69개국의 의사들이 모여서 같이 침술 공부를 하는데, 교수들이 1:1로 철저하게 가르쳐 주었다. 방제학도 과목별로 너무 잘 되어 있었다. 인삼, 감초, 녹용 등 약재 1개를 가지고 교수들이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다만, 중국의 쑥뜸은 체계가 없고 어설펐다.

 

의술의 원천과 방법

김명옥씨 의술의 원천은 필자가 보기에 명상과 기도이다. 명상 중에 몸 안 좋은 곳을 스스로 치유하는 현상이 생긴다. 소위 자발공 비슷한 것이다. 기도는 대단히 영험하다. 마음먹고 기도하면 원하는 것이 글자로 찍혀 눈앞에 나타나거나 귀에서 소리로 바로 들린다. 기도한대로 정확하게 반응이 온다. 기도는 동생이 죽었을 때 처음 해본 이후로 수시로 해왔는데, 처음에는 그냥 천지신명에게 하다가 나중에 2년간 교회를 다닐 때는 하느님에게 했고 1998년부터는 약사여래 할아버지에게 한다. 철학관이나 무당에게 가 본 적이 있는데, 괘가 안 나온다거나 머리가 아프다면서 명옥씨를 피한다. 이는 명옥씨의 영력(靈力) 대단히 강하여 상대방의 배후령을 압도한다는 말이다. 제자들이 아플 때 명옥씨가 손을 얹어주면 사람의 손이 아니라고 한다. ‘느낌이 다르다’‘약사여래 손이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긴가민가하였으나 1998년경에 너무 과로하여 급성신우신염이 왔을 때 쑥뜸 뜨면서 간절하게 기도한 후 그 다음날 자고 나서 거짓말처럼 완치된 체험을 하고는 그 동안의 교만을 반성하고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치유방법으로 주로 쓰는 것은 피라미드형으로 만든 왕쑥뜸이다. 왕쑥뜸은 명옥씨가 처음 개발한 것이다. 수지뜸, 서암뜸, 중국뜸 등을 해보다가 1992년에 제자가 가져온 심주섭 뜸을 처음 접하고 딸에게 시험 시술을 하면서 문제점을 발견하고는 개선책을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가 원추형 왕쑥뜸으로 나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실험과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 우여곡절은 말로 다 못한다. 기구의 크기, 모양, 소재, 불씨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 장치, 쑥이 타는 시간, 인체가 느끼는 반응, 뜸쑥의 모양과 만드는 방법 등 관계되는 모든 것을 온갖 실험을 통해서 검토했다. 예컨대, 뜸쑥을 담는 기구의 소재를 세라믹, 옥, 황토 등으로 바꾸어 가며 사용해 본 결과 기분 좋은 온도가 나오지 않아 결국 현재와 같이 ‘콩으로 만든 링’이 가장 좋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연적인 소재로 자연적인 방법으로 떴을 때 몸이 가장 잘 반응하고 에너지를 최대화한다는 이치를 깨달은 결과이다. 콩과 쑥이 만났을 때 기운의 조화가 최고로 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조상들이 왜 쑥떡을 콩고물에 찍어 먹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쑥뜸을 하는 시간도 쑥이 타는 시간 25분과 타고 난 후의 열기와 원적외선을 몸에 흡수하는 시간 25분을 합하여 50분이 가장 쾌적함을 확인했다. 뜸쑥봉의 모양도 계속 사용해 본 결과 원추형보다 피라미드형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피라미드 모양이 기가 훨씬 잘 들어오고 효과가 배가 되었다. 피라미드 형태 자체가 우주 기운을 흡수하고 극초단파를 방사한다. 쑥이 다 타고 재만 남아 있어도 기운이 계속 들어온다. 자신이 개발한 원추형 왕뜸쑥을 다른 사람이 도용해서 전국에 팔아먹고 수출까지 하는 꼴을 당한 경험이 있어서, 피라미드 왕뜸쑥은 개발하자마자 2002년 의장등록을 하고 특허를 출원했다.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앓아온 병을 물리치고 건강을 정상으로 회복한 것은 기공을 배우면서 수지침, 수지뜸을 2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한 덕분인데, 그것도 효과를 체험하는 데 1년 반이 걸렸다. 나아가 원추형 쑥뜸을 하면서는 피로를 모르는 체력이 되었다. 지금은 피라미드 쑥뜸을 1주일에 한번만 해도 체력이 유지된다. 안 먹고 안 자고 일만해도 된다. 오히려 잘 먹고 잘 자면서 쑥뜸을 안 하면 피로가 쌓인다.
왕쑥뜸 외에 치유수단으로 쓰는 것이 여러 가지 있는데, 침법, 수기(手氣)치료, 따주기, 반지요법, 음식요법, 물요법, 두침, 수지침에서 배운 T침과 압봉요법 등이다. 손으로 하는 기치료는 신체에 접촉만 하면 상대의 기 흐름을 감지하고 1분 이내에 반응을 오게 할 정도다. 의념을 조절하면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다 느낀다.

이 정도의 기감각이니, 예컨대 따주기를 하면 상대방의 기혈이 막히고 뚫리는 것을 다 느끼면서 한다.


따주기는 수지침에서 배운 것 외에 스스로 명상 중에 만병통치혈 2개와 12장부의 기문을 전부 열어주는 방법을 터득하여 이를 응용한다. 그래서 책에도 없는 방법을 쓴다.
두침(頭鍼)은 명옥씨가 여러 가지 의술을 하면서 스스로 개발한 것인데, 수지침 보다 약간 두껍고 1mm 정도 더 긴 침(이것도 본인이 개발해서 특별 주문을 한 것이다)을 머리에 놓는 것이다. 놓는 장소는 혈을 따라 놓을 수도 있고, 손으로 느껴서 열이 오르는 곳이나 물렁한 곳을 놓을 수도 있고, 아무 데나 놓아도 된다. 혈자리를 몰라도 되기 때문에 누구나 1시간이면 배울 수 있고 효과가 그만이다. 몸이 굳은 사람들에게 수기요법을 시행하기 전에 두침을 놓으면 뭉친 곳이 엄청 잘 풀어진다. 얼굴에 놓으면 주름살이 다 펴지고, 처진 곳도 올라간다.

 

피라미드 왕쑥뜸이 잘 듣는 이유

명옥씨가 중병 환자를 고치는 방법은 모두 피라미드 왕쑥뜸이다. 이것이 왜 병을 잘 낫게 할까. 피라미드 모양 자체가 지닌 효능은 위에서 본 바와 같고, 나머지 근거는 무엇일까? 명옥씨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피(적혈구, 백혈구)를 잘 만들어준다. 재생불량성 빈혈, 혈소판 감소증, 백혈병, 항암치료중인 환자 등 피가 부족한 환자들은 한달간 쑥뜸을 뜨고 나면 거의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많이 체험했다. 현대의학이 밝혀낸 바로는 쑥뜸을 뜨고 2시간이 지나면 적혈구, 백혈구 수가 2배 이상 증가된다고 한다. 명옥씨는 그 원인을 면역물질이 생성되기 때문이라고 하나, 이 부분은 앞으로 규명해볼 과제이다.


둘째, 쑥뜸을 뜨면 심호흡이 저절로 된다. 쑥뜸을 떠주면서 관찰하면 시술받는 사람이 처음에는 흉식호흡을 하다가 5분정도 지나 복식호흡으로 바뀌고 막판에는 단전호흡을 하는 것을 본다. 이는 필자가 직접 쑥뜸을 받으면서 경험하고 있는 바인데, 대단히 놀랍고 신기한 체험이다. 단전호흡이 되니 상기(上氣)된 것이 정상화되고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잘 될 것은 당연하다. 위로 올라가는 기를 단전으로 내려주므로 심장, 신장의 기능이 정상화될 것도 당연한 이치다. 쑥뜸을 하면 더위도 추위도 모르고, 더운 여름에 쑥뜸을 해도 더위를 못 느끼고 오히려 시원한 감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열이 펄펄 끓는 환자에게 쑥뜸을 하면 바로 열이 내리고, 몸살 감기가 바로 낫는다. 수족냉증이 오래되어 어떤 방법으로도 안 되는 것도 이 쑥뜸을 한번만 하면 정상으로 돌아온다. 물론 명옥씨가 하는 쑥뜸은 인체의 혈자리와 운기의 이치에 통달하여 뜸쑥 놓는 자리를 잘 선택하기 때문에 효과가 더 잘 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피라미드 왕쑥뜸의 임상 효과가 너무 좋아,

명옥씨는 그 매력에 빠져 산다.


단전호흡의 위대한 힘을 아는 사람들은 다 놀랄 것이다. 인위적인 호흡수련으로는 어렵고 위험하기조차 한 단전호흡이 쑥뜸을 하면 저절로 된다니! 이런 기가 막힐 일이 있나. 그렇다면 이 쑥뜸은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편하면서 최상의 건강법이자 수행의 보조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설명이 쑥뜸의 신비를 다 말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신비는 훨씬 더 깊고 오묘한 곳에 무진장으로 숨어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쑥뜸을 올린 자리에는 암세포가 전이되지 않는다는 것도 명옥씨가 임상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옛부터 신령스런 풀이라 하여 영초(靈草)로 불린 쑥, 그래서 우리 민족의 건국역사에서부터 마늘과 함께 등장하여 보통의 인간 웅녀를 신인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기여한 쑥, 그 쑥과 우주의 양기를 대표하는 불(火)의 만남이 빚어내는 오묘한 생명의 조화를 많은 사람들이 더 깊이 연구하여 그 신비를 밝혀내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피라미드 왕쑥뜸은 그 신비를 빨리 밝혀서 우주 대전환기에 생명을 구하는데 활용하라고

우리에게 독촉하고 있지 않은가!

 

논평

한 개인의 삶을 이렇게까지 파헤쳐가면서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진정한 의자(醫子)가 어떻게 해서 탄생하는지, 그 전형(典型)의 하나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헌법재판소는 6년제 의과대학에서 체계적으로 의술을 공부한 사람이라야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가지고 사람을 치료할 자격이 있다고 하면서 민중의술을 금지한 의료법이 합헌이라고 줄기차게 판시하고 있다. 필자는 그 판시가 의료의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한심한 판시라고 비판하여 왔는바, 이에 진짜 의자가 어떤 것인지 이 글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병을 앓아본 사람이라야 환자의 심정을 알고, 그래야 환자의 마음과 하나가 되고, 그래야 치료가 효과를 본다. 또한 고통 끝에 병을 스스로 고쳐본 사람이라야 병의 원리와 치료의 원리를 제대로 안다. 절절한 경험만큼 살아있는 의술은 없다. 그래서 하늘은 올바른 의자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먼저 그를 병들게 하여 고통을 체험케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의사라는 직업이 보수가 높고 사회적 지위가 있고 근사해 보여서 의사가 되겠다고 의과대학을 간 사람은 지식으로 의술을 배울 뿐, 진정한 의술에 도달하기 어렵다. 지식이 어찌 생명에 비견할 것인가? 지식으로 어찌 생명을 다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생명은 오로지 생명으로 부딪쳤을 때 비로소 그 내밀함을 얻을 수 있을 뿐인 것을. 그래서 의과대학을 나와도 병을 못 고치고, 의과대학을 안 가도 병을 잘 고치는 것을. 그러므로 본질은 의과대학의 교육이 아닌 것을.


김명옥씨는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의자(醫子)로 예정한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원인도 모르게 계속 앓아 온 것도, 내과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것도, 다 하늘의 배려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명상과 참선, 호흡법과 기공수련으로 들어갈 계기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동생을 교통사고로 잃고 비로소 존재에 대한 의문에 빠져 삶과 죽음의 문제, 영혼과 사후세계까지 공부한 것도 예정된 길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역시 그런 경험이 없었더라면 생사를 모두 아우르는 지혜와 하늘의 기운을 얻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며 생명의 본질에 바로 접근하는 종합적인 의술을 터득하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뒤돌아보면 고통스러웠지만 예정된 길을 잘 밟아왔고, 그래서 하늘의 감응이 있어 천기가 그녀를 보살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병을 신통하게 잘 고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하늘이 인간을 통하여 펴는 의술이다. 진정한 의술은 이런 것이다. 우리 민족의술은 이렇게 생기고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래서 잡초처럼 끈질긴 야성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신통하고 생명의 본질에 즉응한 효능 때문에, 수십년의 탄압에도 없어지지 않고 살아서 이렇게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의과대학에서 지식으로 배우는 의술이 어떻게 이런 민중의술에 당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실제상황을 직시하라. 지식으로 유창하게 설명하지는 못해도 생명의 본질에 본능적으로 충실한 것이 민중의술이다. 어설픈 의학지식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하여 생명의 의술을 짓밟지 마라. 언젠가는 그것이 대단히 잘못된 일이었음을 깨닫고 통절히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다.


김명옥씨의 의술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이다. 돈에 욕심이 없고, 돈으로 사람을 치료하지 않고, 오로지 병고의 고통을 들어주려는 지극한 마음으로 자신을 버리고 너무나 열심히 불철주야 환자를 돌보기 때문이다. 하늘은 그녀를 계속 지켜주면서 궁극의 길로 이끌어 줄 것이다.
이제 민중의술살리기 부산울산경남연합이 처음으로 숨은 명의 한분을 세상에 알리거니와, 이 당당한 생명의 대의를 낡은 법률로 짓밟으려는 자들이 있으면 우리 단체는 명운을 걸고 일치 단결하여 맞서 싸울 결의임을 새삼 천명하노니,

이런 의술을 살려야 된다고 믿는 국민들께서 부디 지켜주기 바란다.

 

"천의선도는 천하제일의 민중의술이다"   김영생과 천의선도(天醫仙道)

공격적인 대증요법에 치중한 양의학이 이 땅의 의료계를 장악한 후로 백성들은 피검사를 하고 사진을 찍어 들여다보고 약을 먹거나 수술을 하거나 입원을 해야 의술인 줄 착각하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기실 의술의 본령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은 심기신(心氣身)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마음(心)이 주인이고, 그 마음과 몸을 연결하는 고리가 기(氣)이며, 몸은 마음과 기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병은 마음에서 먼저 오고, 그에 따라 기가 막히거나 위축되어 몸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병의 치료도 먼저 마음을 다스리는데서 출발하고, 그 다음에 기를 다스려서 자연히 몸의 증상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 순리이다. 침이나 뜸이나 약손이나 모두 그 기를 다스리는 방법일 뿐이다. 이것이 우리 민족 자연의술의 단순 간명하면서도 위대한 맥이다.
이와 같이 병이나 치료나 모두 자연과 생명의 이치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어서, 의술을 터득하는 것도 자연의 이치, 생명의 원리를 알면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다. 다만 그 앎에 있어서 지혜의 등차가 있는바, 어떤 이는 배우지 않고도 바로 알고, 어떤 이는 신령(神靈)을 통하여 갑자기 알고, 어떤 이는 이치를 통찰하여 깨닫고, 어떤 이는 노력하여 터득하는데, 각자의 인연과 길이 있으니 그 길은 실로 다단(多端)하여 한정할 수 없으니, 의도(醫道)가 열려있어야 하는 소이(所以)의 일단을 여기서도 헤아릴 수 있다.
그 수많은 의도의 길에서 참으로 기연(奇緣)으로 천명을 받아 도를 얻고 간명한 수행법을 얻어 만인에게 이를 전하면서 창생의 고통을 구제하는 어른이 계시다. 팔순이 다 되신 연세에도 정정한 기력과 형형한 지혜, 인자한 풍모로 쉼없이 중생의 아픈 심신을 쓰다듬으시며 참법을 전하시고, 한편 잘못된 의료법에는 변호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싸우시면서 사자후를 토하고 계신 태종선사(太宗仙師) 남궁(楠宮) 김영생(金永生) 선생님이시다. 가히 후학들의 귀감이요 거울이므로 여기에 비춘다.

 

세상에 고한 광고

「나는 ‘천의선도는 대체의학, 천하제일의 민중의술’란 제목의 책을 내면서 책값을 정가 500,000원이라 했다. 책값을 운운하는 사람은 이 책을 볼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책 서두에서도 밝혔듯 천의선도를 ‘활인의서(活人醫書), 불환금서(不換金書)’라 칭했다. 나는 1931년 전수한의원 집 3대 독자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의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 왔다. 그러나 내가 배운 것은 어린 시절 조부로부터 배운 한문 몇 자가 전부였다. 그런 내가 오늘날 대체의학서를 썼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976년 나는 왼쪽 수족이 마비되어 병원으로부터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남의 부축 없이는 대소변도 못 볼 정도로 증상은 심각했다. 현대 의학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육경신 정신 수련을 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천신(하나님)으로부터 천의선도를 받게 되었다. 그 후 나는 건강을 다시 찾게 되었고, 당시 인명을 구원해서 후천선경을 이루라는 계시를 받아 현대의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병자들의 치료를 위해 나서게 되었다.

 

지금까지 현대의학에서 포기한 환자 중 정상으로 회복된 이들이 100여명이 넘고 15년 동안 천의선도를 전수시키다보니 세계보건기구에서 불치병이라고 하는 고혈압 환자들이 4~5개월 수련 끝에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목격했다. 또한 목디스크와 허리디스크, 견비통, 전립선, 간질병 등의 환자들도 천의선도를 수련시켜 회복된 이가 2,000여명이 넘는다. 이런 노력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계속되어 지난 1998년 7월에는 미국 오하이오주 지사로부터 감사패와 명예시민증을 받기도 했다. 나는 정부에 묻고 싶다. 현대의학계에서도 포기한 환자들을 민중의술이 회복시켰다면 상을 줄 것인가, 아니면 벌을 줄 것인가? 의료법은 국민건강을 위한 법인가, 아니면 의료인을 위한 법인가? 나는 천의선도가 대체의학, 천하제일의 민중의술이라고 생각한다. 첨단과학의 의술 앞에서 당당히 검증 받고 싶다.」
이상은 지난 5월 31일자 한 일간지에 게재한 김영생 원장(천의선도 대체의학연구원. 이하 ‘원장님’이라고 예칭한다)의 글이다.

그 취지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운명적인 한학, 의학, 역학 공부

원장님은 1931년 11월 25일 신시(申時)에 7대 전수 한의집에서 3대 독신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분이 어려서부터 한학, 의학, 역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운명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선친의 뜻에 따라 어려서부터 난해한 사서삼경과 씨름하였다. 조부님한테 사상의학(四象醫學)의 처방과 사상침 보사법, 관형찰색론을 사사받고 오행론에 심취했다. 명리(命理), 홍범기문(洪範奇問), 하락이수(河洛理數) 설국(設局)에 원당(元堂) 부쳐 체질분류 하는 법과 인격형성 판단법도 사사(師事) 받고,

선친으로부터 가문에 비전되어 오는 건강 비방(秘方) 몇 가지를 물려받았다.

 

13세 때부터 육경신 정신수련

그런데 이러한 모든 공부에 있어서 기본과 바탕이 되는 그릇을 형성하고 평생 삶의 중심이 되면서 오늘의 원장님을 형성한 것은 13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는 육경신(六庚申) 정신수련이라고 할 것이다.
경신(庚申)이란 60갑자(甲子)에서 유래한 말이다. 일 년에 경신일이 여섯 번 있는데, 그때마다 잠을 한숨도 자지 않고 수련하는 것이 육경신 정신수련이다. 경신일 전날 밤 11시부터 경신일 밤 12시까지 25시간 잠을 자지 않는다.
원장님은 처음 조부님의 강요에 못이겨 육경신 정신수련에 임하게 되었다.
“앞에 촛불 하나 켜놓고 눈을 감고 촛불을 환상하면서 25시간 깜박 잠도 자면 안된다니, 어린 나이에 어찌 잠이 오지 않겠습니까? 졸음이 오는 기미가 보이면 조부님께서는 긴 장죽(담뱃대)으로 머리통을 불이 나도록 두드리십니다. 수없이 맞다가 육경신이 지나고 나면 몇 일동안 머리통이 부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갔는데 부처님 머리를 보니 울퉁불퉁하기에 부처님은

나보다 더 맞으셨나보다 생각도 했었습니다” 라고 말한다.


육경신 정신수련은 왜 하며, 어떤 성과가 있는가?
경신일은 천상 영계의 대행사라 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 주관하시는 천상 영계의 행사중에 가장 큰 행사가 육경신이다. 이 날은 인간은 물론 동물들까지 행동은 물론이요 생각하는 마음까지 천상 영계에 전달되고 기록되는 날이며 벌신 잡영들에게도 자기 범주 내에서 활동의 자유를 주는 날이다.
이날 일백성계(一白星界)의 오방(五方) 신장들은 사람들에게 잠을 재우려 하고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으려 하는데, 사람이 잠을 자면 신장의 승리요, 잠을 자지 않으면 인간의 승리다.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은 무엇을 하는가? 이 때에 사람의 마음은 오직 하늘을 공경해야 하며, 대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순간에 조금만 흐트러져도 게임은 신장의 승리로 끝난다.


일년중 첫 번째 경신일에는 동방 청제신장과 겨루고, 두 번째 경신일에는 남방 염제신장과 겨루며, 세 번째 경신일에는 서방 백제신장과 겨루고, 네 번째 경신일에는 북방 흑제신장과 겨루며, 다섯 번째 경신일에는 중앙 황제신장과 겨루고, 여섯 번째 경신일에는 오방 신장이 총동원해서 사람을 잠재우려 하는데, 잠을 재우지 못하면 신장들이 그 사람에 대한 관할권을 포기하기 때문에 6경신을 마친 사람은 신장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이렇게 여섯 차례 경신일에 한 번도 졸지 않고 지나면 1경신을 마쳤다고 하는데, 1년 경신을 마치면 오방신장들의 규제를 받지 않고, 4년 경신을 통과하면 일백성계의 규제를 받지 않으며, 8년 경신을 통과하면 이혹성계의 규제를 받지 않고, 12년 경신을 통과하면 삼벽성계, 즉 지신계의 어떤 신장한테도 규제를 받지 않는다. 16년 경신을 통과하면 사록성계의 규제를 벗어나고, 20년 경신을 통과하면 오황성계의 규제를 받지 않으며, 24년 경신을 통과하면 육백성계, 즉 수신계의 규제를 받지 않으며 지혜의 문이 열리고, 28년 경신을 통과하면 천신계의 초계인 칠적성계의 규제를 받지 않으며 우주 모든 현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32년 경신일을 통과하면 팔백성계에 도달할 수 있고, 우주의 모든 현상을 직접 볼 수 있는 천안이 열린다. 36년 경신을 통과하면 천상 상제님을 접견할 수 있고, 상제님의 참뜻을 전달받고 조화의 능력을 얻어 초인간적인 진인(眞人)이 되며 인류를 평화로 이끌어줄 신인(神人)이 된다.

 

그래서 고래로 육경신을 통하면 무불통지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육경신은 곧 구도의 길이다. 육경신을 한번 지킬 때마다 깨우침이 새로워진다. 혜안이 열리고 능력도 생긴다. 이것이 도통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원장님은 이 육경신 덕분에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영계를 네 번이나 다녀올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도통을 하고 의통(醫通)까지 하였다. 그 권능으로 불치의 환자를 돌보아주고 구천을 맴도는 조상신들을 천도시켜 주신다.
그럼에도 이 정신수련을 지금도 제자들과 함께 한 번도 빠짐없이 행하고 있다. 원장님은 ‘천의선도가 콩나물이라면 육경신은 콩나물을 길러주는 물과 같다. 천의선도를 아무리 열심히 수련해도 육경신을 통과하지 않고는 천의선도의 극치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신다.

 

방랑과 시련

어려서부터 이런 고차원의 공부와 수행을 해왔지만, 선친이 별세하시고 3년상을 모시는 동안 마음을 가다듬어 서책을 대하는데, 매가 무서워 글자나 익혀 두었던 처지에 천지만물의 생성변화 이치를 담은 주역을 펼쳐보니 얼마나 넓고 깊고 무한한 학문이든지,

태산이 앞을 가린 듯했다.
머리채를 움켜쥐고 흔들어 봐도 암담하기만 해서 김택성 형님(탄허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했더니 “너와 나는 한 서당에서 육경신 정신수련을 하다가 나는 중도에 포기했고 너는 조부님 임종 전까지 사사받지 않았나? 내가 감히 자네에게 무엇을 가르쳐드리겠는가? 답답하네, 그려” 하더란다. 그후 서울, 영남, 호남 등 전국의 유명하다는 학자들을 찾아 십여 년을 방황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시원한 해답을 듣지 못하여 허탈하기만 했다.


조부님을 통해 사상의학과 오행학을 배웠지만 의료업은 면허가 없어 할 수가 없었다. 6.25사변 직후 선친이 타계하자 혼자 몸으로 생업에 급급하다보니 한의사 면허시험 제도가 있는 줄도 모른 채 지나치고 만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남의 한의원에서 일을 봐주게 되었으나 엉터리로 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한의원을 나와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 뒤 공주 문암사 암자에 들어가 210일 동안의 정신수련을 마치고 서울 종로 5가에 ‘남궁 김기덕 철학원’이란 간판을 걸고 운명상담을 시작했다. 철학원은 예상보다 호응이 좋아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열역신서(閱易神書)」라고, 팔괘비전(八卦秘傳)을 담은 책도 출간하여 현대판 토정비결로 선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니 남의 운명을 감평하면서 좋은 일 나쁜 일은 날짜까지 적중시키면서 잘 봐 주었지만 기울어져가는 운명을 훤히 바라보면서도 붙잡아 줄 대안을 팔방으로 찾아봐도 없었다. 의사가 환자의 병을 보고 고칠 자신이 있으면 환자가 불신하더라도 이해 설득을 시켜 약을 써서 그 병을 치료해주는 것이 활인(活人)의술이요 의사의 사명을 다하는 것인데, 운명학자가 기울어져 가는 운명을 붙잡아 줄 길이 없다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여자가 과부팔자를 타고나면 고르고 골라도 명이 짧은 남편밖에 못 만나는 게 운명이라는 걸 깨달았다.

 

기연으로 벗어난 뇌종양

1976년 4월 1일, 생금밭이었던 상담실 문을 닫고 고향인 충남 논산 집에 내려가 두문불출하고 정신수련에 임하면서 ‘사람은 나면서 가는 날은 이미 정해졌다. 하지만 사는 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잠든 듯이 떠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는 상념 속에 정신수련을 하고 있는데, 그해 8월 추석 전에 같은 서당에서 공부를 하던 옛 친구가 찾아왔다. 어쩔 수 없이 밖에 나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누며 술을 마시다 전북 군산 한 호텔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려하니 정신이 몽롱하며 왼쪽 수족이 말을 듣지 않고, 말을 하려하니 혀가 굳어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거울을 보니 입이 한쪽으로 삐뚤어져 있었다. 호텔 지배인에게 서울 명동 성모병원 정환국 박사에게 전화를 하라 했더니 정 박사가 낮 12시경 구급차로 간호사와 함께 왔다. 정박사는 “동생, 이게 웬일인가?” 하면서 성모병원으로 이송하여 갔다. 병원에서 20여 일간 검진한 결과 연골 안에 뇌종양이 7cm정도 형성되어 수술도 할 수 없고 여명이 5~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원장님은 삼대 독신 외아들 하나 의지하고 사는 어머니에게 불구현상을 보여 줄 수 없어 대구에 거주하는 지인(이동화 씨)에게 부탁, 비산초등학교 앞 한일여관 뒷집을 빌려 요양을 했다. 아내에게는 “내가 죽거든 어머님한테 말하지 말고 화장했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에 어머님 산소 밑에 묻어 달라”고 유서를 써 놓고 죽을 날만 기다리며 하루하루 연명했다. 1976년 첫 8월 중순에 병이 왔는데 윤팔월이 있었으니 1977년 음력 정월이 만 6개월 되는 달이었다.


음력 정월 14일이 기미일 이어서 밤 11시에 육경신 정신수련에 임하면서 원장님은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께 빌었다. “하나님! 저를 데려가시더라도 내일 하루만 연기해 주십시오. 하루 더 살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내일은 오곡밥 지어 조상님께 올리는 날인데 여러 사람에게 누를 덜 끼쳐드리려고 합니다.”
기도하면서 사는 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다 가는 길은 없을까 하는 상념 속에 정신수련 중, 내 앞에 또 하나의 내가 나타나 기도하는 자기 자신을 쳐다보는데, 무엇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서 허공에 뜬 구름처럼 한없이 어디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얼마간 흘러서 눈이 부시게 으리으리한 궁전에 이르러 상제님을 만나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에게서 수승하강법을 전수받자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손이 서서히 벌어지면서 기지개켜는 운동을 하였는데,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던 왼손이 움직이고 왼발을 움직여 보니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전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처럼 몸이 정상으로 회복된 것이었다.
원장님은 이날(1977년 1월 15일 새벽) 이 후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여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

 

한의원 개업-무면허로 고발당해

천신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한 원장님은 그해 가을 원광대학교 한의대 1회 졸업생과 함께 전북 전주에 대남한의원을 개설했다. 한의원을 개설한지 3개월도 안되어 하루 평균 60~70여명의 환자가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한의사 면허가 없는 김영생 원장이 처방하고 침을 놓는다는 게 소문나자 전주시 한의사협회에서 무면허 의료행위로 고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의원을 남에게 양도했다.
원장님은 그 이후 무엇인가 세상에 남기자는 사명감에서 연구해 오던 이제마 선생의 사상대전(四象大典)을 계속 연구한 끝에 천기누설이라 하시며 선친께 전수받았던 팔상(八象)분류법을 인지하고 33년간의 연구와 실제 감별 분류면에서의 만무일실(萬無一失)함을 토대로 사상체질분류 기본비법과 세전비방(世傳秘方)을 공개한 책 『사상의학 체질분류 기본비법』을 1990년에 간행하여 전국 한의사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현대의학계에서 포기한 암환자들을 수없이 보살펴주었는데, 정상으로 회복된 분이 많이 있다.


하늘로부터 천의선도 전수받아

원장님은 1990년 12월 21일 6차 경신 수련 중에 28시간 동안 영계(靈界)를 다시 여행하고 천상상제(天上上帝)님의 계시를 받는다.
“이 지구상에 인구가 70억이 될 때, 현대의술로 해결하지 못하는 이름 모를 병마가 인명을 휩쓸고 갈 터인데, 인간의 능력으로는 대책이 없으니 참삶을 원하는 사람에게 천의선도(天醫仙道)를 전수시켜 영능선사를 양성하여 인명을 구원하고 후천선경을 이루는데 초석이 되라”는 천명을 받고 천의선도를 전수 받았다.
“사람들이 제 아무리 선하고 착하게 살려고 몸부림쳐도 빙의(憑依)가 된 조상신들이 사욕편정을 조성하며 정신을 혼란시키기에 제 정신대로 살 수가 없으니 너에게 사면령을 내려줄 터이니 천의선도를 전수시키면서 빙의된 조상신을 연화장 세계로 보내라” 라는

소명도 받았다고 한다.
그 자세한 과정은 원장님의 저서 「天門을 열어라」에 수록되어 있다.
원장님은 “큰 무당에게 천의선도를 전수시키면 그 순간부터 점(占)을 볼 수 없게 되는 걸 보고 천신의 천명을 믿고 수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천의선도(天醫仙道)란?

요즘 기(氣)란 말이 일반화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을 찾아보면 도가에서 전해오는 단전호흡법, 불교의 선법, 인도의 요가, 일본의 초염력, 중국의 기공법 등이 있다.
단전호흡법, 요가법, 기공법 등은 어느 것이나 심신단련에 다 좋은 수련법이지만 이는 단지 자기 몸의 기를 발달시켜 활용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천의선도는 내 몸의 기를 발달시켜 활용하는 게 아니라 우주에 넘치는 하늘의 서기(瑞氣), 즉 생명의 원천 에너지를 정수리를 통하여 몸속으로 흘러들어가도록 한다. 인간은 하늘의 서기를 받아 생명으로 태어나는데, 어머니 문밖에 나오면서 탯줄을 자르는 순간 - 누전이 되면 차단기가 내려가 전기 공급이 안되는 것과 같이 - 생명의 에너지가 차단되어 다시는 받지 못한다. 이 차단된 생명의 에너지를 다시 연결시켜 주는 것이 천의선도 전수법이라는 것. 이 서기는 물질적인 기가 아니라 영기(靈氣)이다.


또한 일반 기공(氣功)이 치료를 해 줄 수는 있으나 그 능력을 남에게 전수해 주지는 못하는 반면, 천의선도의 기(氣)는 환자를 치료해 줄 뿐 아니라 그 능력을 환자에게 전수시켜 줌으로써 환자 스스로 기를 발산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렇게 될 수 있게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천의(天醫)란 불로장생 하는 하늘의 의술이란 뜻이고, 선도(仙道)는 자연의 이치와 하늘의 가르침을 구체화한 수련법으로 삼륜(三倫)을 깨닫고 구서(九誓)를 수행하며 팔리강령(八理綱領)을 준수하여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면서 망령됨을 버리고 참으로 돌아가 본성을 깨닫고 자연과 하나 되는 길이다.


천의선도는 두 단계로 구성된다. 천문을 여는 과정과 수련을 하는 행공과정이다. (그 자세한 과정은 「천문을 열어라」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여기서는 요점만 적는다.).


우선 천문(天門)을 열어야 한다. 천문은 머리의 정수리 부분으로 백회(百會)와 전정(前頂) 부위이다. 천문을 여는 것은 김원장과 영능선사들만 할 수 있다. 천문은 즉석에서 열리는데, 그 방식은 이렇다.
천의선도를 전수받는 사람이 정심(正心), 정좌(正坐)로 두 손을 합장하고 삼신(三神)에게 삼배(三拜)를 올린다. 공기와 빛을 주신 천신(天神), 물을 주신 수신(水神), 곡식을 길러 주신 지신(地神)의 고마움에 감사하는 마음의 예(禮)이다. 내 생명을 길러주신 대자연에 감사의 예를 올리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하늘에 선서하며 깨우침을 기원하는 천서원(天誓願)을 낭독하는데, 오른손을 펴서 하늘을 향해 들고 선서문을 낭독한다.


그 내용은 ‘경천숭조하며 부모에 효도하고 가정에 충실하며 국가와 사회에 모범이 될 수 있는 인간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며 탐욕을 벗어놓고 천의선도를 성심 수련하여 중생제도에 헌신할 것을 서원하오니 강림하시어 천도를 깨우쳐 달라는 것’이다.
선서를 마치고 합장하고 앉아 있으면 그 다음 일은 원장님이 하시는데, 간단한 의식(儀式)으로 상제님께서 내리는 서기를 한 가닥 끌어다 전수자의 정수리(백회)를 통하여 몸속으로 흘러들어가도록 한다.


천문이 열리면 하늘의 서기(瑞氣)가 정수리를 통하여 서서히 몸속으로 유입되면서 전신에 강한 자장(磁場)이 걸린다. 합장을 하고 있던 두 손 사이에 자석의 밀고 당기는 자장과 같은 촉감을 느끼며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손이 서서히 벌어지면서 기지개를 하듯이 위로 올라가 정수리 위에서 두 손바닥이 닿을락말락할 정도의 간격을 두고 마주보게 하여 앞으로 서서히 내린다. 엄지손가락이 이마를 살짝 스치는 정도로 손을 내리다 보면 오목 가슴 앞을 손이 지날 무렵,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두 손이 무엇에 밀려나듯 다시 벌어지며 다시 처음과 같이 기지개를 켜는 동작을 반복한다. 이것이 천의선도의 수련법이다. 지극히 단순 간명하다.


이 때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양손에 심한 경련이 일어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자기 몸에 빙의가 된 조상의 영혼들이 생명의 에너지를 받으면서 반갑다는 인사를 하는 표시이다.
이 때 원장님이 “이 서기(瑞氣)를 받으시고 사면(赦免)되시어 생사(生死)가 고(苦)니 연화장 세계로 떠나소서. 천상 상제님의 명을 받아 OOO씨 조상 영혼들에게 사면령을 내려오니 감응하시고 연화장 세계로 떠나소서”하는 한마디면 이흑, 삼벽성계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천상낙원인 칠적성계로 떠나게 된다. 이것이 천의선도의 조상 천도식이다.


천문을 여는 순간 조상에게서 9대까지 경사가 일어난다. 후손의 몸에 들어오는 하늘의 서기를 받으면 조상들도 구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천의선도를 수련하다 보면 정신이 몽롱해질 무렵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며 흐느낄 때가 있다. 조상의 영혼이 찾아와 이 에너지를 조금씩 가져가겠다는 신호이다. 이때 수련하던 손을 가슴 앞에서 멈추고 팔에 힘을 빼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반대방향으로 손을 돌리면서 ‘마음껏 받으시고 떠나소서’를 마음속으로 해주면 영혼은 떠나게 된다. 조상의 영혼이 떠나게 되면 삼십년 두통이 즉석에서 시원해지고 집안이 편안해지며 답답하던 일들이 서서히 풀려 나간다. 원인모를 병증세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

 

천의선도 기수련의 치료효과와 의미

열심히 천의선도를 수련하다 보면 어떠한 유형의 고혈압이든지 정상으로 회복되고 당뇨병이 정상으로 회복되니 천의선도의 신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천의선도 수련을 40~50분 동안 열심히 수련하면 몸에 자장이 높아지면서 몸속에서 물분자 운동이 시작된다. 몸속은 70%가 수분이다. 이 수분의 물분자가 정렬했다 분열했다 하면서 전위력(電位力)이 발생한다.
우리가 호흡을 통하여 산소를 공급받고 질소를 내뱉을 때 유익한 산소 중에서 5%의 유해산소(활성산소)가 몸에 남게 되는데 이 유해산소는 우리 몸의 정상 세포를 못 견디게 자극한다. 그런데 천의선도 수련을 할 때 발생하는 전위력은 유해산소를 중화시키고 자율신경을 자극해서 혈액순환을 촉진시켜 준다.
전위력이 발생한지 40~50분이 경과하면 전위력이 왕성해져서 뇌가 자극을 받게 된다. 이때 앞이마 안쪽 가운데에서 분비물이 나오면서 정신이 몽롱해지고 내 육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지경의 환각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환각상태에 들어간 후, 30여분이 경과하면 목에 침이 가득 찬다. 삼키면 또 나오고 삼키면 또 나오는데, 한참 삼키다보면 배가 볼록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 침을 천상 영계에서는 감로수(甘露水)라 하고 현대 의학계에선 베타 엔돌핀이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계속 겪으면서 열심히 수련하다보면 현대 의학계에서 포기한 중환자도 정상으로 회복되는 사람이 많다. 얼마 간 침을 삼키다 보면 그저 즐겁고 즐겁기만 한 희열(喜悅)의 세계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 때에 자신의 과거를 볼 수도 있고 미래를 볼 수도 있다. 초저녁에 수련을 시작했는데 눈을 뜨고 보니 다음날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는데도, 그 시간이 순간처럼 느껴진다. 이 정도의 과정에 도달한 선사에겐 영능선사란 칭호를 주게 되는데 이는 생명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영능선사라 한다.
천의선도를 전수받고 수련하다 보면, 첫째는 건강을 얻고, 둘째는 조상영혼을 천도시켜 드리기 때문에 집안이 편안해지고 하는 일이 서서히 잘 풀린다. 셋째는 남의 생명을 구원해 줄 수 있으며, 넷째 자신의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볼 수 있다. 때문에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나의 의무와 사명감도 알게 된다.


천의선도 수련으로 기를 받았을 때 인체에 미치는 영향(치료효과)을 실제 일어났던 현상으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시야가 밝아지며 머리가 시원해지면서 이 삼개월 후에는 난시가 교정된다.
② 평생 지병으로 고생하던 환자는 십여일 수련하면서 두통이 사라지고 불 면증 환자는 이삼일 지나면 잠이 잘 오게 된다.
③ 불안과 초조감이 없어지고 소화력이 증진되며 변비가 없어진다.
④ 산만했던 정신력이 침착해지고 기억력이 좋아지며 학생일 경우 실력 향 상이 눈에 띠게 나타난다.
⑤ 신경통, 관절염, 요통, 좌골신경통 같은 신경계 질환의 통증이 신기하리만 큼 말끔히 사라지고 피로가 없어진다.
⑥ 불치병으로 알았던 고혈압이 정상으로 회복되고 저혈압의 현기증이 없어 진다.
⑦ 노이로제나 정신착란증 환자가 정상으로 회복된다.
⑧ 간질병 환자의 발작증이 서서히 줄어들면서 정상으로 회복된다.
⑨ 당뇨병 환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상으로 회복된다.
⑩ 재생 불능성 빈혈환자가 정상으로 회복된다.
⑪ 간경화 환자가 서서히 피로가 없어지고 정상으로 회복된다.
⑫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뇌종양환자가 정상으로 회복되는가 하면 식도암으 로 김치국물을 못 넘기던 환자가

     6개월만에 정상인으로 되돌아 왔다.


이밖에도 임파선암, 간암, 위암, 자궁암으로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몇몇 환자가 정상으로 회복되어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니 우아일체(宇我一體)가 되는 순간 암세포도 소멸된다는 천의선도의 치료효과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김원장은 이러한 신비가 우주공간에 넘쳐흐르는데 많은 사람들이 천문이 닫혀있어 받아들이지 못함이 심히 안타깝다고 한다.


천의선도를 전수받아 대자연의 서기를 받아들이면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이루어지며 자연의 신비를 몸소 체험하게 된다. 이로써 탐욕이 없어지고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력이 형성되며 초능력인 투시력과 예지력이 자연 형성되니 천의선도는 지상최고의 인간 완성의 수양비법(修養秘法)이라 할 수 있다.


“천의선도는 부질없는 망상을 훨훨 떨쳐 버리고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 수양에 있어 최고의 비결”이라고 원장님은 설명한다. 원장님은 또 “천의선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멀지 않은 날에 원인 모를 병마가 인류의 생명을 휩쓸고 갈 때 병마로부터 인간의 생명을 구원해서 후천 선경을 이루는 것이고, 그것이 천의선도 선사들의 의무요 사명”이라고 말한다.
우리 민족이 지상목표로 삼아온 홍익인간 ․ 이화세계의 이상, 신선도의 사상과 정신이 천의선도에도 그대로 들어있다. 그래서 이 수련은 민족의 3대경전(三化經)인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수행의 지표로 삼고, 팔리강령(八理綱領)과 삼륜(三倫) 구서(九誓)와 오계(五戒) 팔조(八條)를 받든다.

 

천하제일의 민중의술 신비한 치료법

원장님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수천명의 환자를 접했는데 목디스크, 허리디스크, 위하수 등을 3번 이상 손대지 않고 정상으로 회복시킨 사람이 지금까지 2,000여명이 넘는다. 그 한 예를 소개하는데, 독자들에게 믿음을 주기위해 환자의 실명을 밝힌다.
2005년 12월 7일 한일시멘트 정환진 부회장이 허리디스크로 3년간 고생하는데 밤에 진통제를 먹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원장님이 천의선도를 전수시켜주고 매선 침에 기(氣)를 모아 4군데에 접속시켜 주었다. 그 순간부터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으며 지금까지 정상으로 회복되어 회사 집무에 임하고 있다.
또한 정 부회장은 주변의 고통 받는 목디스크, 허리디스크 환자를 100여명 이상 보내 주었는데 그 어느 분도 원장님이 손을 3번 이상 대지 않고 모두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원장님은 이 신비한 민중의술을 사장시킬 수 없어『천의선도는 대체의학, 천하제일의 민중의술』이란 책을 간행했다.
이 책에서 몇 가지 한약처방을 공개했다. 이 처방은 동의보감에도 없고 방약합편에도 없으며 고방에도 없고 동의수세보원에도 없는, 대대로 한의원을 했던 김원장의 집안에서 8대 전수돼온 비방이다.

너무도 신기해서 사장시킬 수 없어 약제와 제조방법 및 복용방법까지 기재해 놓았다.
이 책에는 또한 사상의학의 팔상 분류법과 체질에 이로운 식품과 해로운
식품, 그리고 성격, 적성, 체질에 따른 보사법을 수록해 놓았고 집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은(銀)용해법도 실려 있다.
원장님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처방을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단 말이냐? 그래서 불환금서(不換金書)라고 했다”고 한다.
공개된 한약제조법은 보위환(寶胃丸), 선단(仙丹), 소염환(消炎丸) 등으로, 약의 효능은 다음과 같다.


① 보위환(寶胃丸) : 이 약은 특별 소화제다. 이 세상에 신경성 위장약은 보위환 외에는 없다. 적응범위는 위염, 위궤양, 십이지궤양,

    장염, 신경성위장병(가슴앓이)가 너무나도 신기하게 잘 듣는 약이다.
② 선단(仙丹)
선단은 막힌 데는 뚫어주고 상기되는 열을 하단전에 모아주며 체내의 독성을 중화시켜 대소변으로 배출시켜준다. 손발 저림, 수족냉증, 전립선 장애가 없어지고 요실금을 없애준다. 최고의 중풍 예방약이며 혈액순환 촉진제이며 최고의 정력제이다. 직접 제약해서 복용하면 5개월 복용분이 2 만원정도 밖에 들지 않으며 누구나 부담 없이 가정상비약으로 복용할 수 있다.
③ 은(銀)용해법 공개
시중에 나와 있는 은(銀)용해 기구는 값만 비싸고 증류수가 아니면 용해 되지 않을뿐더러 농도가 약해서 실용성이 적은데 비해 김원장이 공개한 은용해법은 생수를 이용하며 농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
적응 범위는 축농증 알레르기 비염은 1개월 이내에 정상으로 회복되고 아토피성 피부소양증, 무릎관절염은 4개월이면 정상으로 회복되며 손마디 관절염은 6~7개월 소요된다. 세균성 이질, 설사, 여성 냉증에는 몇 컵 마 시고 나면 개운해진다.

또한 감기 예방에 최고이며 폐병에는 다른 약이 필요 없다.
④ 소염환(消炎丸)
소염환은 뇌종양에 특효하며 암치질은 1개월 이내에 없어진다. 김영생 원장이 지난 30여 년간 현대 의학계에서 대책이 없다고 포기한 중환자(주로 암환자) 200여명에게 소염환을 주제로 도와주었던 주요 체험담을 몇 가지만 적어본다.

 

놀라운 치료 사례들

• 뇌종양 환자
원장님이 1977년 뇌종양에서 회복되어 사상의학 8상분류법의 원고를 쓰고 있는데, 50대 중반 신사 한 분이 찾아왔다. 명함을 받아보니 한때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인 정우개발의 안영승 사장이었다.
“선생님은 뇌종양을 어떻게 회복되셨습니까?”라고 물어 “어떻게 제 병력을 아십니까?”했더니 “제 아내가 뇌종양으로 한국에서 1년간 치료받다가 일본 동경의대에서 6개월, 미국 미시간의대에서 4개월 치료 받아봤는데, 시한부 인생이란 판정을 받고 며칠 전 귀국하였답니다. 명동 성모병원 측에서 말하길, 제 아내와 동일한 위치의 뇌종양 환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었을 거라고 하였답니다. 선생님의 투병생활을 알고 싶어 논산 자택을 방문했더니 지금은 건강이 회복되어 서울사무실에서 사상의학 원고 집필중이라 하여 찾아 뵈었습니다” 하며 자기 부인의 병력(病歷)을 설명하고 나서 “현대 첨단의학계에서 가망이 없다는데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마는 살아있는 동안 희망을 주고 싶은데, 똑같은 부위에 똑같은 종양으로 기사회생하신 선생님이 우리 집사람에게 위로 말씀 한마디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다.


원장님은 이 말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남현동 안사장 자택을 방문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육사 11기 동문들이 부부동반해서 문병을 와있고 환자 방에 들어가 보니 환자 우측에는 노신부(老神父) 한분이, 좌측에는 수녀(修女) 한분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신부는 서강대학교 박고용 교수이고

수녀는 마인드컨트롤에 통달했다는 정능 레지나 수녀였다.
환자(김여사)에게 “부축 없이 대소변 길도 못 가던 이 사람도 이렇게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지 않느냐”고 위로의 말을 해주고, 천문(天門)을 열어 기를 넣어주고 사면령을 내려 빙의가 된 조상신을 천도시켜주었다. 안사장과 같이 제기동 약재상에 가서 소염환과 보양환 재료를 사 가지고 논산집에 내려가 3일간 약을 달이는데 약솥에 불을 안사장 자기가 직접 때겠다는 것이다.


안사장은 3일 동안 주야로 불 앞에서 졸면서 불을 지피고, 밥도 불앞에서 국에 말아 먹으면서 정성을 다해 보양환과 소염환을 정성껏 만들었다. 환자가 약을 3개월 복용하자 머리가 새까맣게 나기 시작하면서 마비되었던 수족이 점점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1년 후에 정상으로 회복되어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

 

• 식도암 환자
1996년 3월중순경 천의선도 논산 본원에 20대 청년 두 사람이 50대중반 부인(손여사)을 양쪽에서 부축하고 찾아왔다. 사연을 들어보니 전주 예수병원에서 6개월간 식도암으로 치료를 받다가 김원준 내과과장이 소견서를 써주어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갔지만 검사 후에 가망이 없다고 하여 절망 속에 집으로 내려가는데 어떤 분이 천의선도 논산본원 주소를 적어주며 한번 들러보라고 하였단다.
천문을 열어주고 대천도식을 해준 뒤 선단과 소염환을 권했더니 “물만 마셔도 바로 내려가지 못해 우측으로 몸을 기울면 ‘꾸루룩’ 좌측으로 몸을 기울면 ‘꾸루룩’ 하고 제대로 내려가지 못하는데 어떻게 약을 먹느냐”고 했다.
약을 분쇄기로 갈아서 물에 타서 마시도록 권했더니 냄새가 역겨워 먹기가 힘들고 구역질이 난다고 하기에 원장님은 더 이상의 대책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의지할 데 없는 환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천의선도 수련을 열심히 하면서 꾸준히 약을 복용했는데, 2개월이 지나면서 약 먹기가 한결 부드러워 졌다. 6개월이 지나자 약을 끊고 기수련을 열심히 하면서 건강이 회복되어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 간암 말기 환자
1992년 5월 23일 원장님이 서울 답십리에 천의선도 전수도장을 개관한지 20여일이 지난 즈음 KBS 교수부장 이귀임 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KBS 인력동원부장의 형님이 경희대병원에서 간암 판정을 받고 치료를 해왔으나 증세가 점점 악화되어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이 없겠느냐는 것이다.
원장님이 환자를 한번 보내보라고 했더니 그해 6월20일 오후에 환자가 부인과 함께 전수도장을 찾아왔다. 이 환자는 서울은행 용산지점 근무를 하다 병으로 인해 휴직 중이던 조OO차장인데 얼굴은 회색빛을 띠고 복부는 부어 마치 임신한 만삭 부인 같았다.


환자는 기운이 없어 5분도 제대로 앉아 있지 못한다고 말하자 원장님은 천의선도를 전수받아 하늘에서 서기(생명의 에너지)가 정수리를 통하여 몸속에 유입되면 가뭄에 시달리는 초목이 단비를 맞은 것 같이 모든 세포가 활성화되니 피로가 덜 할 것이라면서 천의선도를 권했다.
환자가 흔쾌히 승낙하자 천문을 열어주고 조상 대천도식을 해주고 소염환과 보양환을 복용시킨 뒤 기수련을 열심히 하면서 식사 때마다 반찬은 씀바귀와 미나리 나물 외에는 다른 반찬을 먹지 말 것을 당부했다.
환자는 원장님이 시키는 대로 따르면서 매일 수련장에 나와서 열심히 기수련도 하고 약도 정성껏 복용하자 1개월이 지나면서 배에 부기도 빠지고 밤을 새워 수련을 해도 피로가 없다며 계속 수련을 열심히 했다.

1년 후 정상으로 회복되어 은행에 복직한 뒤 10년을 더 근무하고 정년퇴임하였다.

 

• 폐암에 결핵성 늑막염 환자
부산에 거주하는 윤기화씨(여)는 결혼과 함께 호주로 유학을 갔지만 1년 후 감기가 발병, 몇 달이 지나도 호전되지 않아 귀국했다. 부산대학병원에서 진찰 한 결과 폐암에 결핵성 늑막염 판정을 받았다.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는 점점 깊어져 6개월이 지나자 물만 먹어도 토하게 되어 111호실로 옮겼다. 그 병실은 의사가 돌보지 않고 간호원이 매일 링거 주사만 놓아주면서 이곳에서 임종을 맞던지 퇴원하던지 결정하라는 곳이었다. 40여 일간 물만 먹어도 토해서 살 길이 없는데, 어떤 분이 천의선도를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언니가 동생인 윤여사를 데리고 찾아왔다. 제대로 먹지 못해 뼈와 가죽만 남은 윤여사에게 천의선도를 전수시켜주고 대천도식을 올린 뒤 슈퍼에서 깨죽 2캔을 사다가 그릇에 따라 먹으라고 했다. 환자가 깨죽을 받아 마시려하니 언니가 호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두 손으로 벌리고 있기에 왜 그러냐고 했더니 물만 마셔도 토하는데 깨죽을 먹이면 토할게 뻔해 토하면 받으려고 준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여사는 깨죽을 기분 좋게 먹고 나서 “선생님, 깨죽이 정말 맛있네요” 하는데 토하지 않았다.


커피를 한잔 주었더니 언니가 “환자가 커피를 마셔도 괜찮을까요” 하기에 괜찮으니 마시라고 했더니 환자는 커피를 마시고 나서 “제가 1년만에 커피를 마셔보네요. 정말 제 취향에 맞게 타주셨네요” 하는데 토하지 않았다.
윤여사에게 소염환과 선단을 6개월 복용시키자 정상으로 회복되어 다시 호주로 가서 유학까지 마치고 귀국하여 현재는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 재생불능성 빈혈 환자
40대 중반 이철용씨는 철원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분인데 일을 하려하면 현기증이 나고 무리하게 일을 하다보면 눈앞에 노란 점, 빨간 점이 나타나서 도무지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재생불능성 빈혈증으로 판정이 났다.
살림 밑천으로 기르던 소 두 마리를 팔아서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치료를 받다 돈이 떨어져 입원비가 밀리자 병원에서 쫓겨났다.
이 분이 수소문 끝에 천의선도를 찾아왔다. 원장님이 천문을 열어주고 천의선도를 수련시키며 소염환과 선단을 복용시키자 백짓장 같은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6개월이 지나자 완쾌되어 농사일을 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 중풍으로 4년간 누워있던 한의학 박사
평소에 알고 지내던 기자가 중풍으로 4년간 고생하는 한의학 박사를 데리고 왔다. 원장님이 천문을 열어주고 열심히 수련하도록 안내해준 뒤 천의선도를 전수받으면 당신 손이 약손이니, 왼손이 움직이지 않으니 성한 오른 손으로 머리 위에서 목덜미까지 계속 쓸어 보라고 하자 이 분이 정성을 다해 수련했다. 수련 5개월 만에 병원에 가서 진찰해보니 3군데 있던 뇌혈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분은 지금도 열심히 천의선도를 수련하며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천의선도 경신수련회 참관기

필자(이상철)는 민중의술살리기 부산울산경남연합 우수종 사무총장과 함께 5.31 지방선거 전날인 지난 5월 30일 충남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에 있는 천의선도 전수도장 본원인 삼궁서기원(三宮瑞氣院)을 방문했다. 부산지역 천의선도 회원들과 함께 오후 7시 출발 9시경에 도착했다. 이날은 올해(丙戌年) 3번째 맞는 천의선도 경신 수련회였다.


천의선도 선사(수련자)들이 전국에서 모여 들었다. 이날 경신 수련회는 밤 11시부터 시작되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구서강독, 고천문 낭독이 이어졌다. 이어 원장님의 격려사가 있었다(종교적인 색채는 전혀 없음).
원장님은 올해로 천의선도가 태어난 지 30년이 되는 해임을 강조하고 전 세계 인류에게 이 신비한 민중의술을 전수시켜 고통 받는 이웃사람에게 큰 봉사를 하며 살아가자며 내년부터는 일본, 미국 등 해외로 무료의료봉사를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갈 것임을 천명했다.
원장님은 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천의선도를 전수받고 환신만 해주면 즉석에서 명의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천의선도는 콩나물이며 육경신은 콩나물을 기르는 물과 같으므로 수련에 힘써줄 것”을 당부했다.


원장님은 끝으로 경신수련일에는 만 25시간을 수련하는 게 원칙이나 오늘(자정이 지남)은 지자체 선거일이므로 국민의 신성한 주권행사를 위해 오전 6시까지만 수련을 한 뒤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빠짐없이 투표에 참여하기를 당부했다. 이어 명상음악과 함께 수련자들이 천의선도 수련에 돌입했다.


1년에 6번 경신수련을 빠짐없이 참가한 사람에게는 지도선사란 명칭이 부여된다. 이날에도 몇 사람에게 지도선사 임명장을 주었다. 천문을 열지 못한 필자는 수련장면을 뜬눈으로 지켜보는 게 고역이었다. 하지만 일부 초심자를 빼고 나면 대부분 선사들이 철야로 새벽까지 가부좌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수련에 몰두했다. 필자는 피곤에 지쳐 바닥에 눕고 싶었지만 수련의 엄숙함에 도저히 드러누울 수가 없었다.
드디어 새벽이 밝았다. 관계자의 수련회 폐회 선언과 함께 모든 일정이 끝이 났다.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전국에서 온 선사들은 각자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필자도 부산에서 올라온 선사들과 함께 버스에 올랐는데 피곤이 엄습했다. 하지만 천의선도 선사들은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이들에게 피곤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수련을 하면 할수록 정신이 맑아져 피곤함을 전혀 못 느낀다고 했다. 평소에는 25시간(밤 11시부터 다음날 밤 12시까지)을 수련하지만 전혀 피곤치 않다는 것이다.

 

신비한 민중의술, 검증받고 싶다

불교 경전에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란 구절이 있다. 백천만번 태어나도 참법을 만나기란 그렇게 어렵다는 말이다. 천의선도를 만나는 길도 그런 것이 아닐까. 천의선도가 생긴 계기, 거기에 담긴 하늘의 뜻과 의미, 그 간명하면서도 탁월한 효과, 그럼에도 그것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적 의료악법 때문에 고통당하는 이 땅에 내려온 점, 그래서 십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아는 사람만 아는 수련법으로 묻혀 있는 것 등을 보면 그럴 것도 같다. 원장님은 “천의선도는 하늘이 내려주신 참 진리의 길”이라고 한다.
원장님은 올해 76세이다. “지난 64년 동안 육경신 정신수련에서 깨우친 모든 것을 본인의 의식이 생생할 때 이 세상에 모두 남기고 가려고 한다”고 말씀 하신다. 이 신비한 민중의술을 사장시킬 수 없어『천의선도는 대체의학, 천하제일의 민중의술』이란 책을 간행하였다.


원장님은 또 한국의 민중의술이 얼마나 신기한가를 세계적으로 검증받아 보기 위해 그동안 미국, 일본에서 의료봉사 활동도 해왔다. 미국, 일본에만도 천의선도를 통해 고혈압 환자에서 정상으로 회복된 사람이 10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지난 1988년 7월 14일 미국 오하이오주 지사는 한국의 민중의술이 세계에서 으뜸이라 격찬을 보내며 감사패를 주었고 콜럼버스 시장도 그해 7월 17일 명예시민증을 전달한 바 있다. 이렇게 외국에 가면 정말로 인정받고 환대받는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여느 민중의술인들처럼 잘못된 의료악법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 그 동안 무면허의료행위로 몰려 재판을 받은 적도 여러 번이다. 그래도 치료능력과 소신이 확고하므로 변호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당당하게 법과 싸운다.
근래에는 신문에 낸 광고를 한의사협회에서 과장광고라고 고발하여 부산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 경찰서에 가서 연행 사유를 들은 원장님은 과장광고인지 아닌지 그 사무실에 있는 경찰관 중 몸이 아픈 사람을 즉석에서 고쳐 보일 테니 나오라고 하였다. 여섯 명이 나왔다. 모두 천문을 열고 천의선도를 전수 시킨 다음 아픈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모두 다 나았다고 했다. 효과를 즉석에서 체험한 조사반장은 바로 고발인에게 전화를 걸어 고발을 취하하지 않으면 무고죄로 책임을 묻겠다고 하였다. 고발은 즉시 취하되었고,

그 반장은 그 다음날 아픈 부인을 데리고 원장님을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원장님은 전 세계 인류의 고통을 들어주고자 오늘도 천하제일의 민중의술 전수에 전념하고 있다.
끝으로 왜곡된 우리나라 의료현실에 대한 김원장의 한 맺힌 외침을 그대로 옮긴다.

 

“나는 정부당국에 묻고 싶다. 현대의학계에서도 포기한 각종 환자들을 민중의술이 회복시켰다면 상을 줄 것인가, 아니면 벌을 줄 것인가? 의료법은 국민건강을 위한 법인가, 아니면 의료인을 위한 법인가? 국민의 건강을 위한 법이라면 민중의술인에게 상을 주지 못하더라도 활동 규제를 하루속히 풀어줄 수 있는 법적 대안을 마련해줄 것을 호소한다. 이 호소를 묵과한다면 분명 참여정부는 국민을 위한 정부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나는 천의선도가 대체의학, 천하제일의 민중의술임을 최첨단과학 앞에 당당히 검증 받고 싶다.”


* 원장님의 집이 있는 천의선도 본원

   소재지는 충남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 489-1 번지이고,

   전화번호는 041-741-7600, 741-4600 이다.

* 서울지역 전수도장은 동대문구 답십리 5동 483-39 삼용빌딩 403호이고

   전화번호는 02-2216-6278이다.

* 매월 마지막 주에는 부산에 내려와 활동하신다.

 

하늘이 내려준 벌침(봉침)의 달인   배칠근
좋은 인연

지난 설날, 고향에 갔을 때 뜻밖에 집안 형님이 중풍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형님은 70대 중반의 연세로 고향 동네 노인회장을 맡고 계셨는데, 평소 넉넉찮은 형편에서도 후덕하게 베풀고 따뜻하게 이웃들을 대하며 살아온 덕에 마을 사람들의 신망을 받고 계셨다. 척박해져 가는 농촌의 현실에 그런 분이라도 계셔서 그나마 고향의 인정이 살아있다 싶어 평소 고맙게 마음에 담아온 형님이다. 중풍으로 쓰러졌다면 병원에 있어봤자 수년간 병치레에 본인과 가족들이 고생하다가 재산 날리고 결국 돌아가실 것이 뻔하게 보이는 일인데, 이렇게 좋은 형님을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도리가 아닐 뿐더러 마을 전체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싶으니, 형님을 꼭 빨리 완치시켜 드려야겠다는 의지가 결연하게 일어났다. 막바로 형님댁을 찾았다. 마산 근교 한․양방 협진병원에 몇 달 입원해 있다가 설날이라고 시골집에 잠시 와 계셨다. 발병 경위와 병원에서의 치료 상황, 현재의 상태, 본인과 가족들의 투병 자세 등을 물어보고 나름대로의 치료방향을 마음속으로 잡았다. 병원에 몇 달 입원하여 약간 좋아지는 기미가 보이고 있으나, 좌반신이 마비되어 걷지 못하는 것이 제일 큰 병증이었다.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배칠근 선생이다. 병원, 한의원에서 포기한 중한 환자들의 절박한 구호 요청을 받을 때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의자(醫者)가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때마다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배선생이다. 그것은 그의 뛰어난 의술에 더하여, 무엇보다도 환자를 대하는 지극한 자세와 정성이 누구보다도 안심을 주기 때문이다. 필자는 배선생에게 형님의 병환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고, 형님은 필자의 의견을 따라 설을 쇠고 며칠 후 병원에서 퇴원하여 자식들이 살고 있는 울산으로 와서 배선생에게 벌침을 맞게 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한달 남짓, 형님은 지팡이를 짚고 스스로 걸어다니고 식사도 스스로 할 수 있게 호전되었다.

 

폐결핵으로 죽었다 살아난 삶

배칠근 선생은 현직 공무원이다. 1955년 생이니 올해 52세이다. 사무관 승진을 코앞에 둔 이 중견 공무원이 어쩌다 의사․환의사가 포기한 환자들을 귀신같이 살려내는 명의가 되었을까? 필자는 민중의술의 명의들을 확인할 때마다 명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의하여 태어난다는 것을 거듭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명의로 성장하기 전에 먼저 하늘은 그에게 온갖 병의 고통을 주어 단련시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배선생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폐결핵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벌을 붙잡아 자신의 몸을 쏘게 하여 기적적으로 회생한 사람이다. 그 체험이 그를 벌침의 전문가로 만들었다. 18년간 만 명을 훨씬 넘게 치료하였고, 가르쳐 길러낸 벌침 제자만 2천여 명에 이른다. 그것을 현상적으로 보면 기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과정을 보면 역시 하늘의 뜻이요 배려였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 다른 치료 사례를 들 것도 없이 그 자신이 치유된 과정이 벌침의 치료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참으로 극적인 사건이므로 먼저 이를 자세히 소개한다.
배선생은 경주시 산내면 시골 벽촌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개성중학교로 진학했으나 1학년을 마치고 돈이 없어 시골로 돌아와 산내중학교를 졸업한다. 부모들은 졸업을 하면 배를 탈 수 있는 부산 해양고등학교로 진학시켰으나 그는 1979년 공무원이 된다.


폐결핵이 발견된 것은 1987년. 88올림픽이 임박하여 그 준비작업으로 항상 과로하면서 몸이 피곤하였는데, 어느 날 아침 기침을 하면서 코피가 터졌다. 세숫대로 받을 정도였다. 숨을 내쉴 수만 있고 들이 쉴 수가 없었다.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의사는 참으로 운 좋게 살았다고 하였다. 폐결핵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이 시작되었다. 병원에서 주는 알약을 매일 오전 한웅큼씩 먹는데, 그것을 먹고 나면 하루 종일 온 세상이 노랬다. 1년 정도 복용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체중은 당초의 67,8kg에서 45kg까지 줄었다. 반은 누워서 지내고 반만 출근했다.


1988년 4,5월경 서울대학교병원과 연세의료원 등을 다녀 보았으나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약이 없다는 판정만 받았다. 합병증이 와서 주사 한 대, 링겔 한 대 맞을 형편이 안 되었다. 극심한 두통과 허리 통증, 불면증에다 소변을 거의 보지 못했고, 위장 장애가 말도 못하게 심하여 물도 못 마실 정도였다. 병원에서는 방법이 없으니 좋은 공기나 쐬고 하라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병가를 내고 죽을 날만 기다렸다. 체중은 40kg까지 떨어졌다. 방에 누워만 있고 일어나질 못했다. 머리도 못 들 정도였는데,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불면증으로 1주일 동안 한 숨도 못 자기도 하였다. 누워있으면 밤인지 낮인지 칠흑같은 어둠 속에 섬광 같은 환상만 번득였다. 죽음을 예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깨었는데 TV에서 잠깐 벌침에 대한 대담을 하는 것이 들렸다. 허리디스크 환자에게 벌침을 놓으니 났더라는 내용이었다. 약도 물도 못 먹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생각이 언뜻 떠올랐다. ‘벌침을 맞으면 나을까.’


마침 배선생의 집 앞 30m쯤 떨어진 곳에 양봉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내가 출근하고 나서 오전 9시나 10시쯤 되었을까. 정신을 추슬러 벽을 짚고 일어나 땅 짚고 담 짚고 하면서 거의 기다시피 해서 벌통 앞에 갔다. 기어 나오는 벌을 잡아 무작정 허리에 5마리를 쏘였다. 그러고는 그대로 벌통 앞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깨어보니 오후 3시였다. 볼에는 콩알만한 돌들이 박혀 있고 머리 위로는 벌들이 날아다녔다. 어떻게 왔는지 집으로 기어들어 와 누었다. 저녁에 귀가한 아내가 와서 보니 무릎과 팔꿈치가 피투성이였고 전신에 핏자국이었으며 이불과 방에도 핏자국 천지였는데, 본인은 전혀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다. 아내가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날 밤 자다가 일어나 소변을 보았다. 어떻게 일어났는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소변이 얼마나 시원하게 나오는지, 1시간 정도 소변을 본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잠도 잘 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이 되었는데 허리가 안 아팠다. 아내가 출근한 후 다시 벌통으로 갔다. 이번에는 살살 기고 조금 걷기도 했다. 어제 벌을 맞아 부은 자리에 또 다섯 마리의 벌을 잡아 쏘였다. 어지럽고 구토증이 올라왔다. 한 참 앉아 있다가 12시쯤 집으로 돌아와 누었다. 그 전까지 식사라고는 미음을 조금 먹는 정도였는데, 맥주 컵에 반 컵도 못 먹었고, 물도 못 마셨다. 그런데 그 날은 아내가 써 놓은 미음을 찾아내서 스스로 끓여 먹고 숭늉도 끓여 반 컵 넘게 마셨다. 식욕이 동했고, 먹고 나니 속이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것이 벌침 때문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는데, 저녁에 아내가 귀가할 때까지 숙면하였다. 깨고 나니 몸이 얼마나 개운한지! 허리는 안 아프고 두통도 많이 줄었다. 저녁에 미음을 한 컵 먹었다. 그 전에는 음식을 먹으면 그대로 토하고, 거기다 노랗고 쓰디쓴 똥물까지 올라왔는데,

그 날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매일 허리에만 5,6마리의 벌침을 놓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하고 나니 죽을 하루 3끼 다 찾아먹을 수 있게 되었고, 변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토끼똥처럼 새까맣고 똘똘 뭉친 게 나왔다. 일어나 앉고 밖에 나가 바람도 쐴 정도가 되었다.

 

의술공부

울산 중구 도서관에 전화를 하여 벌과 관계되는 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직원이 7,8권의 책을 자전거에 싣고 왔다. 그 중에서 농업기술자협회 성은찬 회장이 쓴 「벌침 108요법」(1972년 간)이라는 책을 보니 벌침이 만병통치약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 책을 일곱 번 통독했다. 벌침을 놓기 시작한지 50일쯤 되었을 때 밥을 하루 3끼씩 반공기 넘게 먹게 되었다. 이제 누워 있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8월경에 힘을 완전히 차렸다.
9월경에 성은찬 회장을 찾으러 서울로 갔다. 출판사로 수소문해서 어렵게 주소를 알았으나 5번을 가도 찾지 못하고 6번째에 비로소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찾아온 경위를 설명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일곱 번을 거절당하고 8번째 방문하여 공무원증을 제시하고 승낙을 받았다. 3개월을 배웠다. 위암, 유방암 환자들이 낫는 것을 보았다. 미국 LA에서 온 교포도 배웠는데, 몇 달 후 그 교포를 다시 만났을 때 그 교포가 가운을 입고 벌침을 놓는데 환자들이 줄을 선 모습이 반면(半面)에 보도된 뉴욕타임즈 신문을 보여주었다. 대부분 허리디스크 환자인데, 벌침의 효과가 대단하다고 쓰여있었다.


그렇게 벌침을 배우면서 자신의 몸에도 계속 맞았다. 4년간 벌침을 맞았다. 당초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 본 결과로는 오른쪽 폐가 균이 다 갉아먹어 거의 없는 상태였는데, 4년 후 찍어보니 갉아먹은 자리가 복구되어 많이 좋아져 있었다. 그러면서 아파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벌침을 놓아주었다. 많이도 놓아주었다. 소문이 나면서 나중에는 감당 못할 정도로 많이 찾아왔다.
그렇게 하면서 나름대로 체질학을 공부했다. 사상체질, 팔상체질, 오행요법 등을 배우고 음식요법도 공부했다. 마침내 ‘아~ 인체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터득하게 되었다. 체질에 따라 벌침 놓는 법을 달리하다 보니 병 낫는 속도가 두 배로 빨라졌다. ‘체질벌침’을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아마도 체질을 몰랐다면 벌침도 큰 진전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벌침과 함께 프로폴리스, 꿀, 로얄제리, 꽃가루 등을 함께 활용하는 법도 알았다.


배선생이 설파하는 의론(醫論)은, 첫째, 비위(脾胃)는 자동차의 엔진과 같으니 반드시 이를 먼저 돋우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환자의 체질 등 여러 사정을 감안해서 벌침을 놓아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 환자의 얼굴, 코, 눈, 입, 혓바닥 등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등이다. 세 번째 것은 소위 진단에 있어서 관형찰색(觀形察色)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진단법은 책을 보며 나름대로 연구하고 임상의 경험으로 터득한 것인데, 그렇게 해보니 다른 데서 못 고치던 환자가 고쳐지더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만 수천 명의 환자를 치료해 오다보니 이제는 환자를 보면 걸음걸이만 보아도 느낌이 오고 대화를 하면서 음성의 높낮이만 들어도 판단이 오는데 거의 백발백중이란다. 그렇게 해서 그가 고친 사례들을 좀 살펴보자. 물론 수많은 사례들 중 극히 일부분만 적을 수밖에 없다.

 

암을 고친 사례들

췌장암 말기로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73세의 김철강 씨는 그 중에서 두달을 또 넘기고 마지막 한달을 남긴 처절한 상황에서 벌침을 만났다. 키 175cm에 체중은 45~8kg, 물과 음식을 조금 섭취하는 정도였는데, 머리카락은 모두 빠지고 얼굴은 병색이 완연하였으며 거동이 대단히 불편한 상태였다. 벌침이 좋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배선생을 찾아왔으나, 정작 벌침에 대하여 설명하니 퉁명스런 표정으로 ‘현대의학에서도 두 손을 들었는데 어떻게 치료가 가능하냐’고 하면서 거부반응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가족과 주위의 강력한 권유에 못이겨 억지로 벌침을 배우고 맞게 되었다(물론 체질에 따른 음식 섭취와 프로폴리스, 꽃가루 등의 섭취를 병행했다).
민중의술살리기 부산울산경남연합 사무국에서 무료로 벌침강의를 듣고 1주일에 3회씩 꾸준히 한달을 맞았더니 그렇게 아프던 위장의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거동에 불편이 없어져 가벼운 산책을 하게 되었다. 환자와 가족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대중 앞에서 여러번 체험사레 발표도 했다.


벌침을 두달 정도 맞고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는데 의사가 깜짝 놀랐다. 시한부 3개월 선고를 하면서 더 이상 약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 좋은 공기나 마시고 계시라고 했는데 살아 있는 것이 우선 이상했고 피검사를 하니 너무 맑아져 있었던 것이다. 무슨 치료를 했느냐고 묻길래 벌침을 맞았다고 했더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3개월이 지났을 무렵 부인, 아들, 딸, 며느리, 손자를 데리고 배선생을 찾아와 “선생님 이제 병이 다 나은 것 같습니다”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복부를 누르면 약간의 통증은 있으나 기운이 넘친다고 했다.
54세의 김임순씨. 폐암으로 오른쪽 폐 절제 수술을 했으나 온 몸으로 전이되었다. 그 후유증으로 밥도 못 먹고 사경을 헤맸다. 힘이 없고 통증이 심하여 거의 누워서 지냈다. 딸은 약사이고 사위는 의학박사이나 속수무책이었다. 목소리도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벌침을 한달 맞고는 걷고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달이 되자 완전히 걷고 목소리도 정상이 되었다. 6개월 후 울산 현대병원에서 검진 결과, 많이 좋아졌고 암 걱정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지금은 완전 정상이다. 암의 전이도 없고 일상생활에 아무 불편이 없다.


위암과 폐암을 같이 앓은 김운호 씨는 3개월 치료만에 전이 없이 건강해졌다.

폐암 말기에 오줌, 똥 받아내던 이정부 씨는 6개월 벌침 맞고 완치되었다.
김성은씨. 말기 유방암을 수술했는데 온 몸으로 전이되었다. 벌침치료를 약 2년 한 현재 건강하다. 김수자 씨도 유방암 수술을 했는데 전이가 되어 심각한 상황이었으나 벌침치료 8개월만에 진단 결과 전이가 멈추고 아주 좋다.
위암 3기의 박덕식 씨는 4개월 치료로 호전되었고, 위암을 수술하고 전이가 된 강우수 씨는 8개월 치료 끝에 완치되어 아주 건강하다. 역시 위암 수술 후 전이된, 정양지 씨의 아버지도 1년간 벌침을 맞고 전이 없이 아주 건강해졌다. 위암 수술 후 전이되고 발목 복숭뼈에 물이 고이는 병을 앓은, 하미령 씨의 남편도 벌침으로 완치되었다.


위암 말기로 3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어느 주부는 6개월 치료 끝에 건강을 되찾아 현재 4년 정도 살아있다. 위암 절제 수술에 난소종양과 복수에 시달리던 이미정 씨는 벌침을 약 3개월 시술 받고 건강진단 결과 아주 좋아졌다는 판정을 받았다. 위암 3기 상태에서 수술 후 전이된 김홍률 씨는 불과 1개월 벌침 치료로 건강해졌다. 위암이 대장으로 전이되어 3주 시한부 선고받은 말기 환자는 벌침을 맞으며 7-8개월간 살아 있다가 통증 없이 저 세상으로 갔다.


자궁암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양준모 씨의 아내는 6개월간의 벌침 치료로 사회생활에 지장이 없게 되었다. 전립선암 3기의 최진석 씨, 3개월간의 벌침 치료로 아주 좋아졌다. 필자가 소개한 대장암 중기의 어느 환자도 벌침으로 많이 좋아지고 있다.

 

그 밖의 치료 사례들

가장 난치병인 암을 이렇게 잘 고치니 다른 병은 굳이 볼 필요도 없을 터이지만 특수한 몇 가지를 더 보자면 죽은 큰어머니를 살려낸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다.
배선생의 큰어머니는 70세 때 밭둑에서 굴러 떨어져 뇌혈관이 파열되면서 마비가 되었다. 울산 현대병원에서 수술에 실패하고 치료를 포기했다. 가족들은 장례를 준비하고 묘자리를 정해서 파기 시작했다. 배선생이 벌침을 놓아보자고 하자 사촌 형제들이 반대했다. 죽은 사람에게 뭐하려 벌침을 놓느냐는 것이었다. 배선생은 사촌들이 보지 않을 때 숨어서 몰래 큰어머니에게 벌침을 놓았다. 10마리씩 6,7회 놓았다. 그 길로 큰어머니는 살아났고, 78세까지 살다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35세의 여자가 치과에서 치료를 하고는 부작용으로 입이 마비되어 벌어지지 않는 바람에 음식을 먹지 못하고 국물도 흘러내리는 심각한 상태로 몇 달째 고통을 받고 있었다. 병원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치료를 해봤으나 효과가 없어 병원과 싸우다가 지쳐 법정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벌침을 5회 맞고는 거짓말같이 마비가 풀려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비부위는 피부가 냉하고 근육이 뭉쳐있었는데 따뜻해지고 풀린 것이다.


현직 부장검사 한 분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어깨, 척추, 하반신 통증을 앓으면서 사직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을 6개월간 간헐적인 치료를 해서 회복시켜 주기도 했다.
일반적인 병은 병원에서 불치병으로 분류해 놓은 것(갑상선질환 등)이라도 어렵지 않게 고치고, 희귀한 질병들도 많이 고쳤다. 안구 신경이 마르는 병, 전신의 수분이 마르는 병인 유사 쇼그랜증후군(8개월, 완치), 매일 생리를 하는 병(6개월, 완치) 등이 그러하다. 그것들을 일일이 적을 수 없어 대표적인 것들의 몇몇 병명만 나열해본다(괄호 안은 치료 회수나 기간).


-  수술 대기 중이던 심한 축농증(8회, 완치).

-  갑상선 항진증과 자궁물혹( 18회, 완치).

-  다리마비와 통풍. 심한 자궁근종. 자궁근종과 자궁암이 같이 있는 경우.

-  약 10년된 만성두통. 심장병과 신경쇠약 및 거동불편에 위 무력증이 같이 있는 환자(8회, 완치).

-  위장병과 심장쇠약에 원인 모를 병이 겹친 환자. 교통사고로 인한 하지마비로 하지가 어름장처럼 차가운 환자(6개월, 완치).

-  허리를 다쳐 3개월간 입원하고 치료불가 판정을 받은 환자(7회, 완치).

-  치료불가 판정을 받은 심한 신장염. 와사풍. 양 손목과 발목의 동상으로 병원에서 절단할 수밖에 없다고 한 환자(3개월, 완치).

-  아주 심한 당뇨(6개월, 호전). C형 간염. 고혈압(벌침과 말벌술 요법으로 호전).

-  수술해야 한다는 목 디스크(8회, 아주 호전).

-  뼈속 종양으로 다리 절단해야 한다고 진단 받은 환자. 대장이 썩어들어 가고 고름이 흐르는 대장농양(5개월, 아주 건강).

-  위무력증. 치료 불가하다는 풍치와 방광염 및 자궁염을 함께 가진 환자. 다리 골절상. 위장병이 심하고 심장질환이 있는 환자. 항문 절제

   수술의 후유증으로 대변 못 가리는 증세(조금 뛰면 변이 흐름. 약 3개월 시술로 괄약근 조절되어 완치).

-  병원 치료 안되는 만성위통과 소화불량. 전국 병원에서 치료불가 판정 받은 엄지발가락 신경염.

   완전 하지마비에 몸 뒤틀리는 병(5회, 완치).

-  역시 전국 병원에서 치료 불가 판정 받은 원인 모를 무력증. 심한 변비에 소화불량과 위장병. 치료불가의 전신 관절염(3개월, 완치).

-  교통사고로 인한 하지마비(1년 이상, 아주 좋음).

-  위무력증에 아주 심한 위통으로 병원에서 치료 불가 판정을 받은 환자(3개월, 완치).

-  얼굴 봉합수술의 후유증으로 수술자국이 선명하여 성형을 해야한다고 진단 받은 환자(3주, 9회 봉합자국에 직접 벌침 놓아 성형수술

    않고 완치).

-  머리와 어깨 저리고 떨림 심한 환자(3회, 완치).

-  치아를 빼야한다고 진단 받은 치조농루(8회).

-  결혼 2년차 무 임신(7회, 임신).

-  결혼 6년차 무 임신(10회, 임신).

-  뇌세포축소 부종과 의식불명(3개월, 아주 호전).

-  통풍(6회). 전립선 비대(7회). 오래되고 심한 비염(5회, 완치).

-  복부까스, 복통, 소화불량, 만성피로(벌침 지도 받고 자가치료로 완치).

-  중풍으로 사지마비(1년, 완치).

-  고혈압과 심장통증(3개월, 아주 호전).

-  탈항(5회).

-  종아리 염증. 전신 류마치스(3개월). 절단해야 한다고 진단 받은 다리발목 동상(2개월, 완치).

-  7년된 중이염(2개월).

-  12cm의 자궁물혹(1개월 20일). 측농증(1개월). 허리디스크(8회).

-  중증 우측마비. 심한 우울증. 다리 부정맥. 수년된 어깨통증(10회 미만, 완치).

-  우측마비 5년차(3개월, 완치).

-  3주 시한부 선고받은 뇌종양 말기(9개월 살다가 통증 없이 사망).

-  죽은 검버즘. 코 냄새 못 맞는 병(2개월).

-  거동 못하는 C형 간염(1개월).

-  본태성 고혈압(1개월).

-  고혈압과 당뇨 같이 있는 환자(2개월, 호전).

-  요실금(5회, 완치). 전립선(5회, 완치).

-  얼굴 종양수술 후유증 환자(1개월, 완치).

-  저혈압과 만성두통과 위장병 같이 있는 환자(2개월, 완치).

-  항문 수술후 괄약근 조절기는 상실증(8회, 완치).

-  머리종양과 비듬과 열성종기(8회, 완치).

-  고혈압과 심장병에 심통(10회, 건강).

-  본태성 고혈압에 심통과 협심증(1개월, 건강).

-  만성두통과 위장장애(8회, 완치).

 

사람뿐 아니라 강아지를 고친 사례도 있다. 집에서 아이들이 애지중지 기르던 강아지가 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에 눈 위쪽 머리를 맞아 분쇄골절이 되었다.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강아지는 스스로 나무토막을 입에 물고 고랑에 처박혀 신음하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물고 있었던지 도저히 놓지 않아 톱으로 나무토막의 양쪽을 쓸어내고 동물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강아지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수의사는 가망이 없다면서 포기하고 내다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강아지를 기르던 아이들이 울어서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다친 부위에 벌침을 매일 20마리씩 놓았다. 계속 놓았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면서 강아지는 거의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위대한 봉사정신

배선생이 공직에 있는 바쁜 와중에서도 돈 한푼 받지 않고 몸 사리지 않으면서 18년간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료봉사를 하게 된 정신적 또는 영적인 뿌리는 무엇일까? 배선생은 페결핵으로 병상에 누워지낼 때 마음속으로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한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저를 살려주시면 이 사회를 위해서 많은 공헌을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기도가 아니라도 그는 천상 타고난 사랑덩어리이다. 그가 환자를 대하고 치료하는 것을 보면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참으로 자상하고 사려깊다. 언제나 무한히 겸손하고 헌신적이다. 환자를 보살피는 자세가 얼마나 성실한지 가슴이 뭉클하다. 항상 환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자신의 수고로움은 아끼지 않는다. 때로는 옆에서 보고 있으면 ‘나쁜 마음 쓰다가 스스로 병을 얻은 환자에게 그렇게 까지 해줄 게 뭐있나’ 하고 생각될 정도이다. 이것은 천성일 터이고, 그 천성을 그의 혹독한 투병과 완치 체험이 더욱 닦아서 빛이 나게 한 탓일 것이다.


배선생의 이러한 자세가 사회적으로 확대된 것은 1999년경이다. 여기에는 필자도 본의 아니게 한몫 거든 셈이 되는데, 이 대목에서는 인연의 묘한 배려가 감지된다. 필자는 1999년 7월에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처음으로 의료제도를 신랄히 비판하는 대중강연을 했는데, 그 내용 중 일부가 양봉협회지에 실린 것을 배선생이 읽었던 모양이다. 그 때 그는 ‘현직판사가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는 뭔가가 있다. 벌침을 이렇게 썩혀서는 안된다. 하늘이 준 일이니 사명감을 갖자.’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바로 ‘울산봉침회’를 결성하고 150명에게 벌침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여러분께서는 이 좋은 일 하는데 큰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무작정 대학을 찾아다니며 벌침강좌 개설 요청을 한다. 그렇게 해서 지금 부산대학교, 경북대학교 등 전국의 11개 대학에서 벌침을 개강하고 있다. 조만간 15개 대학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벌침을 하는 사람들도 따라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치유근거와 효율성

벌침이 왜 질병 치료에 탁효인가? 이는 학자들이 학술적으로 밝힐 일이어서 필자가 이 난에서 굳이 상론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통상 알려진 학리만 적거니와, 우선은 벌침이 경혈을 찌르고 들어갈 때의 자극효과가 침술과 같다는 것이고, 그 다음은 벌침과 봉료(로얄제리, 프로폴리스, 꽃가루 등)에 함유된 특유의 성분이 갖는 약리작용 때문이라고 평가된다.
벌침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 해도 40여종의 특유한 약리작용을 하는데, 대표적으로 분류하면 피를 맑혀 주는 청혈작용, 온열작용, 살균작용, 소염작용, 진정(진통)작용, 조혈작용, 용혈작용, 항암작용, 면역작용, 불량세포 궤멸작용, 신경세포 부활작용 등이다.
벌침의 청혈작용은 고질병 환자들에게 벌침을 3,4주 놓고 병원에 가서 혈액검사를 하게 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만병의 근원은 피가 탁해지는 것이요, 따라서 치료의 기본원리도 피를 맑게 하는 것이라는 자연치유의 근본 이치에 비추어보면, 벌침으로 병이 잘 낫는다는 것은 당연히 벌침이 피를 맑게 해주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증거이다.


온열기능은 벌침 1방 당 쑥뜸 350장의 효과가 있을 정도라 하고, 살균기능은 페니실린의 1,000배가 넘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한다. 진통기능은 가장 심한 통증으로 고통받는 암환자의 경우에도 운명 직전까지 대부분 통증없이 편안히 가게 할 정도이다. 말기암의 단말마적 통증이 가져다주는 환자 본인과 가족들의 극심한 고통을 생각하면, 벌침이 설사 병을 고쳐주지 못할 경우라 해도 그러한 통증의 제거만으로도 얼마나 좋은 기능을 하는가! 면역기능은 벌침을 맞은 후 백혈구가 급증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어떤 환자든 간에 기력이 없을 때 벌침을 맞고 봉료를 복용하면 즉시 효과가 나타난다. 특히 항암치료로 기력을 잃은 환자의 경우, 15일에서 한달 정도면 대부분 기운을 차리는 것이 틀림없다고 한다. 그래서 양방으로 항암치료를 하는 환자가 벌침치료를 같이하면 기력이 떨어지지 않고 치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양방이든 한방이든 벌침치료와 병행해도 무방하단다.


이러한 벌침의 탁월한 효과에 비해 치료비용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저렴하다. 벌침치료에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를 구비하고 벌만 구입하면 된다. 기본도구는 특수핀? 1개(15,000원), 휴대용 벌통 1개(5,000원), 사혈침 1개(5,000원)가 전부이고, 벌은 양봉장에서 구입해 쓰는데 보름치 1통에 5,000원 정도이다.
(참고로, 요즘은 양봉이 많아서 양봉벌을 쓰고 또 그 벌침은 한꺼번에 맞이 놓기도 하나, 벌침의 원형은 우리 토종벌이고 토종벌은 한번에 3대를 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토종의 우수성을 모든 면에서 새삼 되돌아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처음에는 전문가에게 시술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조금 맞다보면 스스로 할 수 있다. 배워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민중의술(자연의술)의 자랑 중 하나인데(병원이나 한의원에서 하는 제도의술은 백날 다녀도 환자 스스로 할 수 없다), 벌침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하다보면 이치가 터득되고 지혜가 생긴다.


다만, 배선생의 경험으로는 체질과 병증에 따라 벌침의 효과가 미미한 환자도 가끔 있더라고 한다. 암환자의 경우, 병이 너무 깊어진 경우가 우선 그렇다(그렇지만 필자가 알기로 배선생만큼 말기암 환자를 잘 고쳐내는 사람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배선생은 언젠가 필자에게 ‘제 발로 100m를 걸어갈 체력만 남아 있다면 어떤 환자도 고칠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는데, 평소 겸손하기 짝이 없는 그의 감추어둔 자심감이 우연히 표출된 것이 아닌가 싶다). 신부전증도 벌침으로는 잘 안 되는 것 같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신부전증 환자를 몇 명 시술해 보았는데, 몇 번 맞고는 안 오는 것으로 보아 효과가 별로 없었기 때문 아니겠느냐는 추측에서 나온 말이다.


체질과 관련한 여담이지만, 배선생에게는 한가지 한이 있어 보인다. 그의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생전에 병을 낫게 해 드린다고 케일즙을 많이 드시게 했다고 한다. 케일에는 우유의 40배 영양가가 있고 그것을 마시고 암도 고쳤다는 강의를 듣고 집에서 케일을 재배하여 매일 드시게 했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설사를 했는데, 그 때는 몸 속의 좋지 않은 것이 배설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배선생이 체질 공부를 하고 나서 보니 아버지는 소음인 이어서 케일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회로 얼마나 목이 메였는지 모른단다. 아버지를 모시고 전국을 다니며 좋은 약이라고 지어드렸는데,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니 남은 약이 비료포대에 3포나 되었다. 알고 보니 모조리 체질을 모르고 한 어리석은 짓이었더란다.

 

촌평

벌침 자체의 기본적인 효능은 이렇게 뛰어나지만, 누가 놓든지 똑 같은 효과가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벌침을 놓기에 앞서 환자의 체질을 포함한 심신 상태를 통찰하여 진단하는 능력과 그에 맞추어 적절한 치료의 부위와 치료 강도를 선택하는 안목,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술자가 가진 마음자세와 거기서 우러나와 환자에게 전달되는 기운이 다르기 때문일 터이다. 환자의 마음을 다독거리는 지혜와 정성의 차이도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벌침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 명의는 드물 터이다. 이는 어느 의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필자는 배칠근 선생을 서슴없이 명의로 추천한다. 그는 의자(醫者)가 갖추어야 할 이 모든 점에서 이미 어느 수준을 넘어 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환자는 매일 매일 시시각각 상태가 달라진다. 그것을 살피지 못하면 치료는 안된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시술을 맡겨도 답답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필자는 이미 민중의술살리기 운동을 제2의 광복운동으로 규정하고 다니는 사람이지만, 아직은 야만스러운 이 땅의 현실 앞에서 현직 공무원인 배선생의 신분을 이렇게 공개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바 있어 그의 의중을 물었더니 그는 오히려 「민중을 위해서 일하다 다치면 그것은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지요」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것은 결코 허세나 만용이 아니다. 그인들 어찌 이런 저런 안위에 대한 인간적인 걱정이 없겠는가. 그러나 진리를 확신하고 나면 진리보다 더 크게 용기를 주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 어떤 방해도 그 용기를 꺾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처절한 투병체험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생명의 이치와 의술의 원리에 달통해 가면서 대자연과 인간에 내재된 진리를 이미 깨달아 확신에 이르렀고, 또한 생명을 살리는 것 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확인했기 때문에 어떤 부당한 제재도 물리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을 가지게 된 것일 터이다.
이렇게 해서 배선생 또한 이 땅의 자연의술, 민중의술이 생성되고 한 사람의 민중의술 명의가 탄생하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의과대학, 한의과대학을 다닌다고 터득될 수 있겠는가?
전 국민에게 거듭 묻노니, 이 의술과 명의를 단지 의사․한의사 면허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종전처럼 감방에 처넣어 짓밟아 죽일 것인가, 널리 펴도록 해서 병고에 신음하는 인류를 살리는데 활용토록 할 것인가? 살려야 된다면 이런 의자(醫者)와 인술(仁術)을 지켜주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이제 제발 미개와 야만의 의료제도로부터 벗어나자.
배칠근 선생을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늘에게, 그가 극단의 병고에 시달릴 때 지켜준 부인과 가족들에게 감사와 축복을 보내면서,

배선생의 인술이 세계에 빛날 날이 올 것을 확신한다. 민중의술 만세!

 

세계 최고의 신의(神醫) 장병두

 

심연(深淵)이다.

 물이 맑으면 깊어도 바닥이 보이지만, 너무 깊으면 물이 아무리 맑아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법이다. 장병두 선생님을 뵈면 뵐수록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다. 도대체 저 불가사의한 의술과 지혜는 어떻게 해서 터득된 것일까?

 

호칭부터 정리하자.

 사람들은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백 살 하고도 두 살. 범인이 생각하기 어려운 연세이시니 할아버지라 해도 증조부, 고조부 뻘이시다. 그러니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졸자(拙者)의 느낌은 다르다.

가까이서 꽤 대화를 나누어본 감으로는 선생님은 ‘할아버지’가 아니다. 강기(剛氣)와 포부를 아직도 간직하고 계시다. 사람을 호령할 기개가 여전히 살아있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시고, 스스로 ‘기분파’라고 하실 정도로 감정도 상당히 분방하시다. 이런 분을 어떻게 할아버지라고 하겠는가! 당신의 생각도 그러실 것으로 짐작하지만, 졸자는 그 강기(剛氣) 앞에서 감히 할아버지라고 보호성 존칭을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저 ‘선생님’, 무릎 꿇고 배울 것이 무궁무진하니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고 무난할 것이다.

감사의 말씀을 먼저 올린다. 먼저 하늘에 감사드리고, 다음으로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민중의술의 명의를 많이 찾아다녔지만, 정말로 그 표본 중의 표본, 대표자를 만났다. 우리 민중의술의 표상을 너무나도 그대로 지니신 분이다.


민중의술의 표상, 그것이 무엇인가?

 자생적인 것,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 속에서 저절로 터득된 것이 그 하나이다. 선생님은 서당을 몇 달 다닌 것 외에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않으시고도 독보적인 의술의 경지를 여셨으니 여기에 꼭 맞다. 지식으로 따지고 까부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통찰하여 단숨에 터득된 것이 그 둘이다. 그 지혜는 선천적인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아니면 반드시 정신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멀리 있지 않고, 생활 속에 있으며 간명한 것이 그 셋이다. 서양식 분석학으로 따지면야 복잡해질는지 몰라도 현상적으로 선생님이 펴시는 의술은 진단에서 처방까지 너무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탕약으로만 병을 고치시는데, 그 약 또한 먹기가 일반 한약과 달리 너무 자연스럽고 부담이 없다.

오로지 생명을 위한 것이고 돈을 위한 것이 아님이 그 넷이다. 약재가 들 어가고, 그것도 비교적 좋은 약재만 쓰시기 때문에(좋은 약재가 아니면 안된다고 하신다) 기본적인 원가가 소요되고, 따라서 최소한의 돈을 받지 않을 수 없지만, 어려운 사람, 어린이, 노약자 등에게는 무료로 많이 해주시고, 치료의 효과가 확실한 데 비하면 그 약값은 전혀 비싼 것이 아니다.


하늘만 아는 기연

 백 두 살이 되도록 소수의 아는 사람만 알고 있던 선생님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정말로 하늘만 아는 인연의 기묘함이라고 해야 할 것 같 다. 병을 너무 잘고치다 보니 한의사협회에서 고발을 하게 되었고, 법정에 서게 된 것이 바로 그 인연의 출발이다. 졸자와의 인연도 그로 인함이고, 그 후에 전개된 선생님의 생명의술 살리기 운동과 단체의 결성, 그리하여 마침내 매스콤을 통하여 온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 것도 그러하다.

한의사들은 선생님의 의술을 매장하려고 손을 댄 일인데, 그것이 오히려 천하의 신의(神醫)를 세상에 드러내고 그 의술을 살리면서 이 땅의 민중의술을 세계만방에 펼칠 기회로 전개되었으니, 인연의 기묘함을 하늘이 아니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 출발과 경위를 몇 가지 치료사례와 더불어 간략히 적는다.


치료, 수사, 재판

  **사에 계신 ** 스님. 20대부터 병을 앓았다. 17년간 여러 가지로 노력했으나 점점 안 좋아져갔다. 소화불량, 변비에다 피부는 습진 같은 것이있어 몇 년간 흰 장갑을 끼고 살았다. 황달, 흑달로 악화되면서 몸무게가 10kg이나 줄었다. 맥도 없고 의욕도 없어 하루종일 누워있어야 했다. 나중에는 심신이 분리되는 느낌이 왔다. 대전에 있는 노인 한의사에게서 암으로 진단받았다. 어머니가 위암으로 48세 때에 전주 우석대학병원에서 돌아가신 터였다.

 약을 지어 인천 **사에 갔더니 어느 스님이 ‘서울에 용한 할아버지가 있다’고 하였다. 한의사가 지어준 약은 팽개치고 그 길로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뵙고 할아버지가 지어주는 약을 먹었다. 지금부터 15년여 전의 일이다. 3개월을 먹고 나니 할아버지가 “됐어” 하였다. 차츰차츰 몸이 좋아졌다. 그 뒤로는 계절이 바뀌거나 할 때만 할아버지에게 몸을 점검받고 약을 지어 먹었다. 할아버지는 **스님의 집안 내력으로 위가 특수구조로 되어 있어 병이 온 것인데, 다른 사람은 못 고친다고 하신다.

  군산남중 한문교사 문선생은 갑상선암(임파선암)을 15년 정도 앓았다. 마침내 병원에서는 한 달밖에 살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오빠인 **스님을 통하여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완치되었다.

문선생 주변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문선생도 병고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보면 할아버지를 찾아가보라고 알려주었다. 환자들이 서울로 몰려가기 시작하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게 되자 환자들의 불편을 걱정한 할아버지께서 한 달에 한 번씩 군산으로 내려와서 치료를 해주게 되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오시기로 한 전날 저녁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기다렸다. 군산뿐만 아니라 전주, 익산, 광주, 순천, 여수, 목포, 대구, 서울 환자까지 해서 5백 명 내지 6백 명이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그 많은 환자들을 5박6일 동안에 다 봐주셨다. 하루에 100여명을 보신 셈이다. 100살 넘은 나이에, 놀라운 일이 아닌가! 맥활법으로 1인당 2~3분이면 진단과 처방이 다 끝나므로 가능한 이야기다.

 

  사람으로 하여금 병고에서 벗어나도록 치료의 인연을 맺게 해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좋은 일도 그 일에 너무 부대끼면 피곤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선생과 그 가족들은 그 인연을 오로지 ‘복을 짓는다’는 애틋한 정성으로 키워내었다.

  군산과 전북의 한의사협회에서 고발을 했다. 2006년 6월의 일이다. 무면허의료행위를 했다는 이유이다. 많은 돈을 받았다고 하여 부정의료업자로 몰려 보건범죄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죄가 되었다. 문선생과 동생도 함께 입건되었다. 경찰의 조사를 거쳐 9월에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문선생과 남동생은 구속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고령이라 구속을 면했다.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사이에 할아버지의 치료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암울한 일이다. 그러나 하늘의 인연은 기이하여 그 깊이를 헤아리기가 심히 어려운 법. 이 일이 앞으로 어떤 일을 연쇄적으로 몰고 올 것인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치료받은 사람들과 치료를 받던 환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미 경찰에서 조사하는 동안에도 할아버지는 환자들의 아우성 때문에 여관에서 진료를 해 줄 수밖에 없었던 터였다. 환자들의 말에 의하면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고 여관으로 돌아오시면 할아버지는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을 보면서 이렇게 한탄하셨다고 한다.

“이 죽어가는 환자들은 어떻게 하라고 ...”

 

  병원과 한의원을 전전해도 고치지 못하고 고생하던 병을 할아버지가 지어 준 약을 먹고 고쳤거나 고치고 있는데, 이런 명의를 왜 처벌하느냐, 선처해 달라는 등의 탄원서가 법원에 쇄도했다. 약이 중단된 환자들은 더 아우성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1심 재판이 끝나고 문선생은 항소를 포기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당한 수모의 고통과 그로 인해서 재발한 후두암이 그녀의 싸울 용기를 접어버린 것이다. 집행유예가 확정되면서 교직에서도 파면되었다. 나중에 재판을 받고 역시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병과 받은 할아버지는 항소를 하였다.

 

  분노한 환자들이 마침내 단체를 구성했다. 「장병두 할아버지 생명의술 살리기 모임」. 인터넷에 카페도 개설하였다. http://cafe.naver.com/lovelifejang 누리꾼들의 의견이 폭주했다. ‘장병두’라는 단어는 인터넷 검색어 1위가 되었다.

신문도 관심을 표하며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방송도 나섰다. 유례가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민중의술을 애써 외면하며, 왜곡될 대로 왜곡되어 백성의 생명을 옥죄는 의료제도에 한마디 발언도 하지 않던 언론 이 움직이는 역사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병들이 나았길래 이러는 것일까?

탄원서에 적혀 있는 치료사례들 중 몇 가지를 그 요지만 옮겨본다(선생님이 평생 치료해온 사례는 너무 방대하여 별도로 책으로 편찬되어야 할 일이고, 여기에서는 그 편린이나마 보여주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다).


치료사례 - 그 편린들

① 본인은 2003년 여름 뇌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3개월간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하였으나 의사 선생님 처방이 본인이 살아있는 동안은 혈전용해제, 혈관확장제 등, 정확한 이름을 모르나 매일 3번씩 복용을 해야 한다고 하여 약 2개월간 복용을 했었으나 너무 많은 약으로 인해 위까지 아프고 식욕이 떨어져 삶의 의욕을 잃어갈 때 장병두 할아버지의 치료(약 2개월분의 탕약치료)로 인해 오늘날까지 병원약이 없이 건강하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다시 약을 먹어야 될 때가 된 것도 같은데 이제는 할아버지의 약을 구할 수 없다고 하니 본인으로서는 막막하기 그지 없습니다.

 

② 본인은 고등학교 국어교사입니다. 아토피 피부병으로 심하게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피부과를 다니기 시작하여 유명하다는 한의원을 다 다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약을 4개월가량 먹고 건강해졌습니다. 제 아들도 그 약을 먹고 아토피가 없어졌습니다. 제 아들은 지난겨울 감기에 걸린 후 비염이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무료로 석 달 동안 한약을 지어주시어 완치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어머니의 병(오줌소태, 소화불량, 중풍)까지도 다 낫게 해 주셔서 저희 집안에서는 항상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아토피만 나은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제 몸에서 좋지 않았던 간, 장염, 위염 등 모든 잡다한 것들이 다 나을 수 있었습니다. 한약을 먹으면 위가 안 좋아진다고 했습니다. 실제 다른 한의사의 한약을 먹을 때에는 위가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달랐습니다. 몸 전체를 건강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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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저는 약사입니다. 1990년대에 충청북도 여약사회장을 맡은 바 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후 선방에서 3년간 입선하였는데, 남편의 간병생활과 사별의 충격으로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위염과 불면증으로 3년간 체중이 10kg 감소하여 40kg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주대병원에서 종합 진단해보 니 위염이 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하였고 특별한 처방이 없었습니다.

 

그 무렵 할아버지를 알게 되어 진맥을 받고 약을 썼습니다. 할아버님은 마치 신선과 같은 비범한 모습이셨으며, 특이한 진맥법으로 맥진하셨고 아무 음식이나 먹어도 좋다 하시며 명년 4월쯤 46kg이 될거다 하시며 명년4월에 다시 오라 하셨습니다. 처음엔 효력이 있는지 없는지 몰랐으나 어느새 체중이 늘어 이듬해 4월에는 건강이 회복되었으므로 할아버님과의 약속도 잊은 채 지났습니다. 2005년 5월 자고 일어나니 양쪽 안구가 충혈 되어 있었습니다. 2,3일 기다려 보아도 낫지 않아 청주에 있는 안과에 가서 치료해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고, 또한 위․소장․대장이 운동을 안하는 것처럼 소화도 안되고 먹먹하며 온 몸이 뻣뻣해지고, 표현하기 어렵게 몸의 상태가 몹시 불쾌하였습니다.

 

할아버님 생각이 떠올라 수소문 한 끝에 군산에 가끔 내려오심을 알게 되어 간청한 끝에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할아버님은 맥진하시고 중풍 초기 증세라 하시며 약을 지어 주셨는데 그 약을 먹자마자 혈액순환이 됨을 느꼈고 몸의 컨디션이 좋아졌습니다. 그제서야 생각해보니 가끔 씩 양쪽 손,팔에 쥐가 나고 마비감이 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사실 MRI 촬영이나 컴퓨터 촬영으로도 초기에 중풍을 발견하기란 어렵거든요. 그리고 눈에는 웅담으로 특수제조하신 안약을 주셨는데 그 약을 넣은 후 완전히 충혈이 가시고 나았습니다.

**사에 다니는 신도중에 6년 전 자궁암으로 하혈을 많이 하며 실의에 빠져있었는데 할아버님 약을 먹고 완전히 나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지내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도 치료해주고 선물로 대통령 휘호 액자를 받으셨고, 이병도 서울대 학장님 손자의 백혈병을 고쳐 주었고, 경북대 병원장 아드님의 백혈병도 5년 전에 치료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④ 본인의 어머니(87세)는 신태인읍에서 생활하시다가 2006. 5. 4. 갑자기 한쪽(우측 팔, 다리)에 마비가 와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하여 누운 채로 대소변을 받아내는 상태에서 우리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의사선생님께서 환자는 연세가 많을뿐더러 뇌경색에 중풍으로 우측에 마비가 와 팔다리를 못 쓴다고 하면서 치료가 어려우니 종합병원으로 옮기라고 하여 사실상 병원에서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저도 어머니 연세가 많아 고민하다가 병원에서조차 포기한 상태이므로 결국 한방으로 치료하기로 결정하고 모친을 노인복지단체인 전주 원심원에 위탁하고 아주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찾아가 진맥하고 한약을 복용한 결과 신기하게도 2주 만에 홀로서서 걸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집에서 평상시와 같이 아무런 문제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만, 어머니는 지금도 할아버지 약을 한번만 더 먹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시면서 왜 할아버지에게 데려가지 않느냐고 야단이십니다.

 

⑤ 태어난 지 10개월 된 아이가 홍역을 앓다 병원에 실려 간 건 2000년 12월. 심한 폐렴으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가까운 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시작하였으나 별 차도가 없어 다른 지방병원을 전전하다가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긴 건 2001년 5월이었습니다. 그때 아이는 중환자실에서 인공 호흡기를 달고 있었는데, 어렵게 병실생활을 하다가도 다시 나빠져 중환자실에 가기를 수차례 하였습니다. 2002년도에는 좀 좋아져서 집에 와 지내기도 했지만 감기만 걸려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폐 때문에 다시 중환자실로 가곤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으로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붉은 물결을 만들 때 우리는 중환자실에 연락 후 엠블런스를 타고 가며 차량 통제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 의식이 없는 아이 목의 캐뉼라에 숨이 멈추지 않도록 끝없이 앰브를 주물렀다 폈다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다 2003년 말에 전주로 이사하여 병원 가는 횟수를 줄인 대신 집에서 가정용 인공호흡기를 하고 지냈습니다. 2000년 이후로 산소발생기는 아이의 생명줄로 언제나 인공산소를 대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2005년 9월 언니 친구로부터 장병두 할아버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진료하시는 날에 찾아가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기위해 모여 있었다. 아침 10시쯤 갔더니 새벽부터 오셔서 기다리시는 분들도 많았는데 목에 호스를 하고 있는 아이를 보시고 문계수 선생님께서 “중환자니까 먼저 봐도 될까요?” 한마디에 그 많은 분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양보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이의 주된 증상은 끝없는 덩어리 큰 노란 가래였습니다. ‘일곱 살 15kg 아이의 작은 몸 어디에서 저런 가래가 끝도 없이 나올까?’ 싶을 만큼 아이는 가래가 많아 숨쉬기를 힘들어하며 자주 파래지고 산책을 나갈 때도 몇 발짝 걷고 나면 안아줘야 할 만큼 체력이 약했습니다.

할아버님이 조제해 주신 약은 작은 한 봉지를 하루 세 번 나누어 먹었는데 이틀 6번을 먹고 나자 “그 많던 가래가 다 어디로 갔을까?” 의구심이 생길 만큼 급격히 줄었습니다. 그러던 두 달을 복용한 어느 날, 산책을 가던 아이가 오빠와 함께 잰 걸음으로 앞서 가더니 껑충껑충 뛰는 것이 아닙니까?

 

“재미있다”하며 오빠와 달리기 경주를 하듯 달리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던지..... 그 후로 언제나 백짓장처럼 하얗기만 하던 얼굴에 분홍빛 혈색이 돌고 1km 떨어진 오빠학교에 천천히 걸어갔다 올만큼 회복이 되어 24시간 하고 있던 산소도 거의 하지 않을 만큼 건강해졌습니다. 얼마 전 외래 진료로 서울대학병원을 갔을 때 전에 중환자실에서 아이를 돌봐 주셨던 간호사님이 “애가 정말 그 아이 맞아요?”하시며 이리 저리 자꾸 만져보고 몇 번이나 확인하시던 모습에서 또 한번 아이의 회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할아버님이 진맥을 하시며 “애는 폐가 문제가 아니라 장에 있는 뭔가가 자꾸 폐를 건드리며 치는 거야, 심장과 위도 좋지 않고” 하셨을 때는 폐가 좋지 않을 뿐인데 왜 다른 장기가 문제라 하실까 의아 했지만 지어주신 약이 신기할 정도로 들어맞는 걸 보며 인체의 모든 면을 꿰뚫어 보시고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⑥ 본인(고등학교 교감)의 장남(1982년생)은 2003년 4월경 조울증으로 인하여 전북대학병원, 김제 미래병원 등에서 6차례나 입원치료를 받고 투병 중 이었던바, 우연히 주위에서 장병두 할아버지가 만성 및 불치병에 대하여 치료를 잘한다는 입소문을 듣고 2004년 10월경부터 약 4개월에 걸쳐서 한약을 구입하여 먹고 난후 완치되어 지금 현재는 학교생활(대학 3년)도 잘하고 있는바 전문 정신병원에서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⑦ 저(금강대학교 불교복지학부 교수)는 1991년 1월 척추인대 파열의 부상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사지마비 등 여러 증세가 악화되어 1992년 1월~2월 영동세브란스병원 재활의학과에 입원치료를 받는 등 여러 병원과 의원등에서 갖가지 치료를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점점 증세가 악화되어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1995년 우연히 장병두 선생님을 소개받아 그분의 치료를 받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분이 의술뿐만이 아니라 도학(道學) 분야 등에서도 그야말로 신이(神異)한 경지에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만난 것을 항상 감사히 여기면서 가르침을 받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2005년 7월 종합건강진단을 받아본 결과 갑상선결절이 발견되어 2005년 9월 을지병원 내분비과에서 정밀진단을 받고 갑상선질환이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바로 장병두 선생님의 진료를 받은 후 3개월 간 약을 복용하였는데, 금년 6월 건강검진을 받아본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⑧ 저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2003년 첫아이를 출산하고 두 달 무렵이 지났을 때 말초성 안면신경마비가 좌측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왼쪽의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고, 소리가 마치 귀 옆에 확성기를 켜둔 것처럼 여과 없이 들리고, 입이 점점 오른쪽으로 돌아가서 보기에도 흉측할 정도로 틀어졌습니다. 2003년 12월 초쯤 아이와 친정이 있는 전주로 내려가서 원광한방병원에 다니고 침과, 한약 물리치료 등 치료를 꾸준히 받았으나 증세는 그리 나아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찬바람을 쐬거나 몸이 안좋을 때면 다시 안면마비의 증후군이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개학이 임박하여 인천의 학익동에 위치 하고 있는 한의원에서 침치료를 받던 중 둘째아이가 2004년 4월에 생겨서 그나마 받던 치료마저 중단한 상태여서 심하지는 않았으나 다시 입이 틀어져 주변의 친척분들이나 직장에서도 한눈에 알아보시고 걱정하실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정말 너무 힘들어서 비관적인 생각만 하고 살았던 시기였습니다. 아이를 출산하고도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드러눕거나 특히 좌측 머리 부분이 심하게 아프고 조금만 감기증세가 있어도 안면신경이 점점 굳어지는 듯한 증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럴 때면 집 가까운 한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 임시방편으로 그 순간만 모면하면 또 며칠은 별다른 증세 없이 생활하고 하는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아픈 것을 남편이나 시댁에서도 걱정해 주셨지만 이유없이 멀쩡히 있다가 갑자기 아프다고 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점차 남편도 시댁어른도 꾀병이라고 생각하시기에 이를 정도로 원인 모르게 아픈 나날이 계속되었다.

 

2005년 8월 말경 시댁 식구들과 제주도에 여행을 가기 위해 둘째 아이를 맡겨놓은 상태여서 아이를 찾기 위해 친정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몸이 좋지 않아 친정어머니께서 잘 아시는 한의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진맥을 해보신 그때의 한의사님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몸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며 한심하면서도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일단 약을 한제 짓고 오기는 했으나 내 마음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셋째 언니로부터 군산할아버지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뵌 할아버지의 모습은 100세에 가까운 연세임에도 아이처럼 순수하고 해 맑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같이 갔던 남편과 친정어머니까지 아무 말 없이 할아버지의 진단을 바라보고 누구 하나 병의 증세를 말하거나 하지 않았는데 그 다음 순간 정말 기가 막히게도 허허 하고 호탕하게 웃으시며 “누가 봐도 꾀병이지” 하고 그러시는 거였습니다. 그 순간 나와 남편은 눈이 동시에 마주치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당시 나의 병은 정말 누가 봐도 꾀병이라고 할 정도로 멀쩡하다가 아프고 했으니 항상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남편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둘째 아이를 낳고 더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시며 그 자리에 데리고 가지 않은 아들아이의 증세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은 생후 한 달부터 아주 심하게 배앓이를 해서 병원을 자주 출입했었습니다. 그 때 병원에서는 아토피 때문이라고 했었습니다. 몸이 많이 흐트러지고 산후풍도 있다고 하시며 약을 지어 주셨습니다. 배가 아픈 아들아이에게는 따로 약을 지어 주시지 않고 내 약을 하루에 아주 작은 티스푼으로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한 달 동안 약을 먹는 동안 희한한 경험을 했습니다. 약을 먹는데도 침을 맞는 것처럼 안면신경마비가 왔던 왼쪽 얼굴이 찌릿찌릿하고 머리며 심지어 전에 삔 다리까지 아픈 부위가 다 나타나는 명현반응이 나타났습니다. 1년 1개월 동안 그 후로 6번 정도 더 약을 먹고 나니 이제 더 이상 약은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신기하게도 조금만 몸이 안 좋아도 나타났던 머리 아픈 증세며 안면이 경직되는 증세, 뒷목에서부터 어깨까지 바위 돌을 짊어지고 있었던 듯한 뭉특한 증세까지 모두 사라졌습니다. 또 전혀 미동도 않던 왼쪽 눈썹이 거의 85% 정도까지 움직인다는 사실이.... 지금은 표정을 지어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어 주변의 어른들로부터 정말 많이 좋아지고 건강해진 것 같다는 말을 들을 때면 그때마다 할아버지에 대한 감사함과 또 더불어 병을 이길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주셨던 문선생님에 대한 감사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얼굴의 표정을 과잉되게 지으면 약간 표가 나긴하지만 차차로 더 나아지는 것을 느끼고 지금은 아이를 하나 더 낳을 계획까지 세우고 있을 정도로 건강해졌습니다.

 

몇 년 동안 다닌 병원과 한의원까지 병을 낫기 위한 나의 노력과 시간과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할아버지와 문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노력은 계속 될 것이고 그때마다 나의 실망감도 더 커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의 시이모부님은 중한 병을 앓고 계시는데, 할아버지의 약을 두 번째 드시고 다리에 힘도 생기고 드시는 것도 나아지셨을 정도로 속이 편안해 지셨다고 합니다. 매번 나에게 질부의 은혜를 꼭 갚겠다고 말씀하시곤 하십니다.

 

⑨ 저(중학교 교사)는 2004년 9월 5일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서 고관절 골절로 3개월을 입원했습니다. 전북대학병원, 전주21세기병원, 전주 송천동 정형외과 등에서 입원 치료를 했습니다. 물리치료, 약물치료, 방사선치료 다 받아보았고 원광대 한방병원에서 침술 치료도 받았습니다. X레이 상에 아무 이상이 없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하는데도 여전히 아프고 다리를 절뚝거렸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습니다. 꼭 꾀병을 부리는 줄로만 의사도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문계수 선생님을 통해서 장병두 할아버지를 알게 되어서 약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할아버지가 아직 뼈가 완전히 붙지 않았다고 하면서 한번 사진을 찍어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고관절 치료로 유명한 화순 전남병원 윤택림 교수한테 가서 CT와 핵의학 검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6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사진 상에 완전히 뼈가 붙지 않아서 아픈 거라고 하였습니다. 정말로 미심쩍었던 할아버지의 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약을 할아버지에게서 더 먹고는 뼈가 완전히 붙었다는 말을 듣고서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100% 정상적이진 않지만 많이 호전되어서 쾌활하게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으로는 특효약이 없다고 하는 고관절 치료에 할아버지의 약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생활하고 있어 항상 고맙고 감사한 마음 잊지 않고 있습니다.

 

⑩ 저는 1992년경 입안과 부인과 쪽이 헐어서 염증이 심하고 다리에는 붉은 반점이 나고 근육이 심한 염증이 나오며 걷기조차 불편하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질병을 지방병원에서 병명도 모르고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어서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희망을 갖고 찾아가 여러 가지 검사를 거친 결과 베체트병이란 희귀한 병명을 받았습니다. 더 무서운 경과도 올 수 있다 하셨어요. 심하면 관절로 들어갈 수 있고 눈으로 들어가면 실명도 할 수 있다 했어요. 실명한 환자도 보았어요. 무서웠어요.

 

별 차도는 없고 희망도 없이 여러 해를 치료하니 몸은 더욱 기력이 약해져서 주기적으로 영양제 주사제를 투약하면서 종교단체에 봉사를 하던 중 어느 스님을 만나 알게 된 장병두 할아버님.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할아버님의 치료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우리 가족은 의지하며 투병생활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세계적인 희귀병 베체트병을 할아버님은 ‘걱정하지마’ 하시며 제게 새 희망을 주시며 그 지겨웠던 10년의 양방치료과정을 단 1년에 떨쳐버리게 되었습니다. 증세가 없어져서 할아버님 몰래 병원에 가서 몇 차례 검사를 해봤는데 베체트증세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8시간의 긴 설악산 등산과 철야기도를 하고서도 다음날 정상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장병두 할아버님이 국보급 명의 지정을 받으셔서 저같이 힘든 병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낫게 해주실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⑪ 저(전북대학교 교수)는 2001년 7월 서울 현대중앙병원(현 현대아산병원)에서 위암 수술을 받고, 이후 6개월에 걸친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위암 수술이후 암 치료에 좋다고 하는 수많은 약과 보조식품 등을 복용하며 많은 돈도 엄청나게 들어 많이 들 때는 한 달에 1,500만원 정도의 지출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가까이 된 2004년 5월부터 이상 징후를 느껴 동년 5월 13일 검사결과 소장과 대장 연결부위의 장암과 복막암이 발견 되었습니다. 5월 15일 친구 *** 원장이 운영하는 전주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현대의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진통제를 주는 것 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고, 또 다른 친구 당시 전북의대학장 *** 교수는 인간이 할 일은 다 했으니 기도를 하자고 했었다는 말을 친구들을 통해 들었습니다.

 

당시 장폐색으로 엄청난 통증으로 고통을하였고 음식을 조금도 섭취할 수 없어서 아마도 며칠 이내에 세상을 떠나게 될 것으로 예상했었습니다. 저 자신도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예감했습니다.

그런데 약초즙과 장병두 할아버지께서 주신 한약을 5개월 정도 복용한 후 병세가 급격히 호전되어 지금은 휴강 없이, 국내외 출장도 다녀오는 등 거의 정상인과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등창으로 시작한 인생

선생님은 1906년 병오년 생이다. 그러니 올해 102살 되신다.전북 임실군 지산면 안하리(雁下里)골뜸마을에서 태어나,

]25세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생후 두 달째에 등창이 났다. 창자가 보일 정도로 구멍이 뚫렸다. 등 근육이 사방으로 뻗치니 전신이 아팠다. 백약이 무효였다. 심지어는 옛날 처방에나오는 인생(人生) 생골, 즉 살아있는 사람의 골을 등창에 넣으면 낫는다고 하여 구해보려고 하였으나 도저히 구할 수가 없어서 갓 죽은 아이의 골을 돈 주고 사서 써보기도 했다. 그러나 더 악화만 되었다. 사람들은 오늘 내일 죽겠다고 했다. 등창 때문에 누울 수가 없으니 어머니가 업고 키웠다. 그렇게 하기를 십 년을 했다. 십 년을 어머니의 등에서 자란 것이다. 십 년이 지나자 외조부가 연구를 해서 고쳐 주었다. 그때서야 어른들이 출생신고를 했다. 그래서 호적에는 1916년생으로,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이나 적에 올라있다.

 

외조부는 왕실의 전의(典醫)였다. 성함이 진(陳)응양이었는데, 대명의 이셨다고 한다.

이렇게 등창으로 인생을 시작하여 십 년을 고생한 덕택에 등창의 명의가 되었다고 스스로 말씀하신다. 10년, 20년 된 등창도 1주일이면 치료하신단다. 열아홉인가 스무 살 때, 30년간 등창을 앓아 온 여자를 고치는데, 평생 잠을 못 잔 여자가 약을 붙여주고 세 시간이 지나니 쿨쿨 잠을 잤다. “그런데 막상 등창의 명의가 되고 보니 등창 환자가 없어. 병원에서 다 죽여 버리니까.”

이것을 보면 의술을 할 수밖에 없었고, 명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을 타고난 분이다. 하늘이 날 때부터 이분에게 의술을 가르친 것이다.


스스로 연구하고 터득한 의술

의술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열아홉 살부터였다. 먹고살기 위해서 의술을 배웠노라’고 하신다. 열일곱 살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는 외할아버지의 의술을 외양만 보고 배웠다. 혹시 외조부께 전수받은 비방이 있지 않았느냐고 여쭈니,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스스로 연구해서 의술을 터득해가면서 동네 병을 다 고쳤다.

그 연구의 방법을 물었다. 책을 본 것은 전혀 없고, 우선 강남풍월로 듣기만 해도 공부가 되었다고 한다. 예컨대, 여섯 살 때 ‘치질이 있었는데 집 없는 달팽이를 구워서 먹으니 낫더라’는 말을 누구에게서 듣고는 잊어버리지 않고 그 방법을 사용해보니 낫더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번만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공부를 했는데, 기억력이 특이하셨다고 한다. 개, 토끼, 쥐 등을 수백 마리 잡아가며 약을 연구했다. 대구, 대전 등의 약전 골목을 부자(附子)를 씹으면서 돌아다녔다.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하신단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어떻게 탁월한 의술을 터득할 수 있을까?

선생님은 스승도 없이 독학으로 수승한 의술을 터득한 비결을 묻는 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물리를 터득하면 되는 거야. 물리는 사물을 잘 관찰하면 터득할 수 있지. 나는 말이야, 어릴 때부터 관찰을 잘했던 것 같아. 내가 여섯 살 때 일이지. 어느 날 똥 싼 옷을 어머니가 빨래하는 동안 담장 밑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데 고양이가 감나무 위를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것이 보여. 가만히 보니 쥐구멍 입구를 노려보면서 그러고 있는 거야. 그런데 쥐란 놈이 머리를 구멍에서 살짝 내밀어 두리번거리며 살피다가 쏙 들어갔다가 조금 있으니 또 살짝 머리를 내밀고 살피는데, 부엌에서 문밖으로 부어버린 개숫물에 섞여 나온 밥알을 주워 먹으려고 눈치를 살피는 거야. 결국 쥐가 나오지않으니까 고양이란 놈이 살금살금 다가가더니 쥐구멍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땅이 약간 솟은 곳을 앞발로 탁탁 치는 거야. 그쪽을 치면 쥐가 이쪽으로 도망오리라고 예상하고 유도하는 거지. 그때 고양이의 생태를 터득했지.

관찰을 해보니 그런 게 보이더라니까.”

이런 식으로 물리를 터득했다는 말씀이다.

 

“예를 들어 콩씨 있잖아. 그게 쌍을 짓지 않는가. 그 쌍으로 된 것에서 싹이 나고 대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지. 모든 ‘씨’는 다 똑같아. 두쪽이지. 정자와 난자도 마찬가지고. 쌍으로 되어 있지. 그 중 하나가 없으면 안돼. 이것이 바로 상대성 원리를 표현한 게야. 음양이 짝을 이루는 이치지.단순해.” 그래서 간에 독이 오면 그 상대독을 써야한단다.

“의사는 본래 이렇게 해서 형성된 거야. 면허는 무슨!”

자연의 이치를 통하여 터득한 선생님의 지혜는 끝이 없다.

“바다에도 의사가 있어. 이거 모르지? 바다의 의사가 뭐냐 하면 바로 거북이란 놈이야. 거북이가 왜 의사냐. 고래가 무엇에 부딪쳐서 어깻죽지를 다쳤어. 그런데 아무리 해도 낫질 않는 거야. 그것을 거북이가 고쳐주거든. 어떻게 고치느냐. 바다를 떠다니는 오래된 소나무 판자들이 있어. 뗏목 조각 같은 것이지. 거기에 붙어있는 송진을 거북이가 이빨로 뜯어서 고래 다친 곳에 발라주는 거야. 그러면 낫는 거야. 그래서 고래란 몸이 거북이는 잡아먹지 않아.”

“소가 말이야, 삼(대마)을 절대 먹지 않거든. 삼밭에 갔다 놔도 삼 잎은 한 잎도 뜯어먹지 않아. 그런데 소가 간이 안 좋아져서 병이 들면 쓸개에 단단한 것이 뭉쳐지는데, 이것이 우황이야. 이 우황이 생기면 소가 삼 잎부터 뜯어먹어. 그래서 스스로 고치는 거야. 그런데 요즈음 소보다 못한 것들이 의사라고 하고 있어. 참 내!”

 

지금 선생님의 의술은 필자가 보기에 거의 신의(神醫)의 수준이다.

암은 항암제 쓰고 수술한 사람도 고친다(물론 생사의 경계선을 이미 넘어버린 사람은 제외하고). 다만, 항암제의 독이 온 몸에 퍼진 사람은 약을 먹여봤자 항암독이 약을 잡아먹어 버려 치료가 안 될 수 있다고 한다.

중풍환자는 송장이 된 사람도 24시간 이내면 살릴 수 있다고 한다. 발병 6개월 이내면 침 한방 쓰지 않고 약만으로 완치할 수 있단다. 선생님의 집 인근에 있는 병원에서 중증의 중풍환자 10여명을 선생님에게 보냈는데, 모두 고쳐주었단다.

통풍은 3일만 약 먹어도 차도가 난다고 한다. 당뇨, 백내장, 실명방지, 치통 등은 쉽다. 당뇨는 합병증이 눈과 발끝으로 먼저 오는데, 한쪽 눈이 썩고 다른 한쪽마저 썩기 시작하는 것도 고쳤다. 일제 때부터 고쳤는데, 하도 잘 고치니 왜놈들이 “너 아편 쓰지” 하면서 추궁했다고 한다. 백내장과 치통은 바로 고쳐버린단다.

 

살찌게 하고 살 빠지게 하는 것도 마음대로 한다.

불임도 잘 고친다. 18년간 아이를 갖지 못하여 노심초사하던 어느 대갓집 며느리에게, “아, 한꺼번에 아들 둘 낳으면 되지 뭘 그래. 나이도 들었는데 한꺼번에 나아서 길러버리고 말지, 뭘 하나 낳고 또 낳고 하며 고생해? 걱정 마!” 하고는 약을 지어 주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덜컥 쌍둥이 아들을 낳아버렸다. 그 며느리가 이번 어버이날에 한복을 한 벌 지어왔다.

수술 시간을 받아 놓은 담석환자의 수술을 늦추고 약을 먹여 5,6시간만에 돌이 빠져나오게 해 버린다.

오래전에 이병도 서울대학교 총장의 외손자가 백혈병에 걸린 것을 서울대 학교병원 의사들이 보는 앞에서 고쳐 주었더니 측근에 있는 사람들이 환자들을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야단이었다. 결국 서울대 병원 의사들이 “이것 그대로 두면 서울대학교병원이 망한다”면서 반대하여 포기한 적이 있다고 하신다.

15,6년 전에 **병원에 재직하던 어느 목사가 그 병원에서 간암으로 죽는다고 판정받았는데 선생님이 살려 냈다.

업보로 온 병, 영적(靈的)인 병도 약으로 치료하신다. 영적인 병은 신경이 죽어 있는데, 그 신경을 고치면 된단다. 하늘이 내려준 병이라 하여 천질(天疾)이라고 불리는 일명 지랄병도 다 고쳐내셨다. 타고난 수명을 연장하는 것도 가능하단다. 약을 써서 체질을 두 번 세 번 바꾸어 주면 된단다.


환자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선생님은 환자가 오면 문진을 전혀 하지 않는다. 물어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떻게 문진을 해? 못하게 되어 있어. 문진할 필요가 없어.”찰진도 하지 않는다.

대신에 독특한 진단법을 쓰신다. 환자를 쳐다보고, 돌려 앉혀 놓고 손으로 등을 짚어 보신다. 심장과 위장을 만져보면 아신단다. 병이 왜 왔고, 어떻게 진행되어 왔으며, 그대로 두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다 알아버린다. 마음이 어떻고, 무슨 짓을 하다 왔는지도 안다. 도둑질했는지 강도질 했는지 다 안다. 병이 감기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까지도 안다. 심보, 성격, 버릇까지도 다 읽어 버린다.

그에 따라 약을 지어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한다. 아무 환자나 약을 지어주지는 않는다. 선생님은 직심(直心)으로 환자를 보신다.

 

◈ 장병두 할아버지 약력

◎ 출생년도 : 1906년

◎ 출생지 : 전북 임실군 지사면

◎ 생후 2개월째부터 등 뒤에 심한 등창을 앓음(그 당시에는 남자는 등 뒤의 등창,

    여자는 뒷머리 목 부위의 종기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다고 함)

◎ 이름난 한의사였던 외조부님의 정성어린 치료를 받아 오던 중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외조부님이 비법(秘法)을 고안하여

    마침내 등창을 완치하였음(지금도 장병두 할아버지의 등 줄기 한 가운데의 약 10센치 윗 쪽에 커다란 등창 자국이 있음)

◎ 그 때까지 생존을 확신할 수가 없어서 호적에 올리지도 못하고 있다가, 열살이 되어서 비로소 호적에 입적함

    (따라서 호적에는 실제 나이보다 십년이 늦어져서 출생연도가 1916년으로 되어 있음)

◎  장병두 할아버지는 외조부님과 함께 지내시면서 외조부님의 의술을 보고 들으면서 기본적인 의술을 터득함.

◎ 장병두 할아버지는 초등학교를 비롯한 정규 학교를 다녀 본 사실이 없고, 다만 시골 서당의 훈장이었던 백부님으로부터 석 달 동안

    한문 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한문의 문리를 터득함(주변으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불행하게도 본의 아니게 중단하고 말았다고 함)

◎ 장병두 할아버지가 어린시절 林學선생(당시 50세 정도)이라는 분이 자주 오셔서 자주 오셔서 기숙하셨는데 남루한 행색이었다고 함.

    이 분은 차가운 환경에 길들어서 그런지 뜨뜻한 방 안에 들어와서 자는 법이 없고, 언제나 신발 벗어 놓는 장소 같은 곳에서 눕는 일이

     없이 앉아서 잠을 잤다고 함. 그 분으로부터 이런 저런 것을 듣고 배우다가 그 분을 따라 나와 이곳저곳 다니면서 3~4년간 수련생활에

     돌입하였음. 장소는 지리산 아주 깊은 산골로서 인적이라고는 없는 곳이었다고 함. 바위 굴 등에서 짐승처럼 생활하였는데

     임학 선생님은 어쩌다가 오시거나 아니면 가끔씩 몰래 밥을 갖다 놓고 가셨다고 함. 그 밥의 분량은 굶어 죽지 않을 정도여서

     항상 배가 고파서 가재를 잡아먹거나 이것저것 풀을 뜯어 먹어가며 생존 하였다고 함.

◎ 11세에 부친께서 돌아가시고 그 해에 집에 화재가 나서 전소 하였다고 함

◎ 12세부터 17세까지 모친께서 일 나가시면 동생들(장병두 할아버지는 4남매 중 장남)을 업어 키우는 등 집안일을 도우고,

    생계를 돕기 위해 잡일을 함

◎ 18세부터 본격적인 도학(道學) 수련에 들어가 철저한 수행 끝에 21세에 도학의 이치를 밝게 터득함(지금도 장병두 할아버지의

     왼쪽 손등에는 수행할 때 칼로 내리찍은 자국이 크게 나 있고, 왼쪽 중지 끝 마디가 꺽여서 구부러져 있음)

◎ 일제 치하에서 해방 전까지는 전북 김제에서 광산업을 함

◎ 해방 후 2년부터 의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시술하기도 함(장병두 할아버지께서는 허준선생의 동의보감이 땅, 물, 공기가 많이

    오염되고, 육식을 많이 하는 현대인에게 효험을 발휘하는 힘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씀하심)

◎ 장병두 할아버지께서는 평소에 우주 천지가 명명백백 (明明白白 : 밝고 분명함)하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바른 마음(正心)과

    바른 행위(正行)을 행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심.

◎ 장병두 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이 장수하는 것은 파설(破舌)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무엇을 조금 안다고 이것저것

    쓸데없이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심.

◎ 또한 혼자서 옳지 못한 생각을 하거나 둘이서 비밀스러운 대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향의

    오방신중(五方神衆 : 다섯 방향에 있는 여러 신)들이 보고 알기 때문에 언제 어느 곳에서나 항상 바른 생활을 해야함을 강조하심

* <장병두할아버님 약력>은 금강대학교 권탄준교수님께서 할아버님과 인터뷰 및 면담 형식을 거쳐 작성 해 주신 글입니다.

 

장병두 할아버지의 마지막변론 

글쓴이: 무광   조회수 : 174    2008.08.19 10:52

http://cafe.daum.net/whdcnf/GYgS/253

 

이 글은 전주 지법에서 열린 장병두 할아버지의 무면허 의료행위에 관한 재판중 변호사의 최후 변론입니다. 한번 읽어봐 주시고 대한민국의 의료현실과 생명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최후 변론문_ 변호사 박태원

 
현대의학은 암을 치료하지 못합니다.
당뇨도, 중풍도, 치매도, 만성폐쇄성폐질환도, 파킨슨병도, 베체트병도 치료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오래된 위장병도 만성이라서 난치라고 말하는데, 사실상 치료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대의학은 암이나 당뇨, 치매, 파킨슨병이 왜 생기는지 조차 모릅니다.
현대의학은 인간질병의 고작 20%만 다스릴 수 있을 뿐이고, 특히 내과나 정신과 질환은 치료 가능한 영역이 극히 드뭅니다.
서울대병원, 연세대병원, 삼성병원, 아산병원 등 우리나라 4대 병원의 오진률이 40%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는 제가 이 병원들의 센터장 등으로부터 직접 득문한 사실입니다. 이 병원들이 이러할진대, 나머지 병원의 오진률은 불문가지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암이 아닌데 신체 부위를 잘라내고, 간암인데도 위를 잘라 내는 등,

지금 이 순간에도 숱한 의료사고가 전국 각지에서 빈발하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은 암이 왜 생기는지부터 모릅니다.
그런데도, 암이 발견되면 비교적 일찍 발견된 경우, 신체부위를 칼과 가위로 잘라냅니다.
조금 늦게 발견된 경우, 죽음의 광선이라는 방사선으로 인체를 지지거나, 독극물에 다름아닌 항암제로 건강한 세포까지 사멸시킵니다.
조금 더 늦게 발견된 경우, 현대의학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며, 불치라며, 그냥 죽으라고 사형선고를 내리고 맙니다.
이 정도가 현대의학의 수준입니다.
이 수준으로 이른바 과학적 검증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자신과 뿌리나 접근 방법이 다른 모든 의술들을 무시하고 핍박합니다.
이에 반해, 피고인의 의술은 암을 고칠 수 있습니다. 백혈병도, 간질도, 만성폐쇄성폐질환도, 중풍도 고칠 수 있습니다.

특히 만성폐쇄성폐질환은 대기 오염이 심해진 현대에 있어, 매우 중대한 질병으로 떠 올랐으며, 미국의 경우, 사망원인 제4위를 차지하고,

매 시간 12명이 이 병으로 사망한다고 하는데도, 일체의 치료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피고인은 이 질병을 치료하였습니다.
피고인 의술의 원리는, 저도 과문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만, 피고인께서 상대성 원리 혹은 음양 원리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동물이 태어나고, 암술과 수술이 만나 식물이 태어나듯,

병도 생명현상의 하나이므로, 반드시 어떠한 신체부위와 다른 신체부위가 조응하여 발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컨대, 간암의 경우, 간에만 문제가 있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신체의 다른 어떤 기관, 뇌나 폐 등의 다른 장부와 상대적으로 조응하여 발생하므로, 간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조응하는 그 장부를 함께 치료해야 근본적 완치가 가능하다고 설명하십니다.
피고인으로부터 시술받는 환자들과 현대의학에서 시술받는 환자들은 그 삶의 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현대의학에서 시술받는 환자들의 경우, 독한 방사선과 항암제에 머리가 빠지고,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우울증까지 발생하면서도,

결국은 많은 경우,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으로부터 시술받는 환자들은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자신의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면서도 병을 완치하고 있습니다.
피고인 의술의 효과를 본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대학교수, 의사, 정치인, 법조인 등 각계각층에서 수천명이 사람들이 치료를 받았고, 이 많은 사람들이 탄원서를 이 법정에 제출하였습니다.
이러한 탄원서나 증언들을 볼 때, 피고인 의술의 효과는 눈 앞에서 벌어지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다만, 현대과학이 그 원리를 아직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저 광대한 우주에 대해 현대과학은 모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원리를 모르지만 관찰되는 현상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태도로 더욱 연구하고 공부합니다. 이것은 과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의 몸은, 1000억개의 은하로 구성된 대우주처럼, 1000조개의 세포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소우주라 할 수 있습니다.
대우주와 마찬가지로 아직 우리 인류는 소우주인 생명의 메커니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의사들은 아는 것을 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원리를 모르지만 명백히 관찰되는 현상을 무시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의학으로 원리를 알 수 없는 의술은 처벌하고 매장해 버립니다.
이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생명에 대한 폭력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현대 서양의학은 종래의 오만을 반성하여,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대체의학, 영국의 경우는 보완의학이라는 이름으로 각 나라와 민족의 민중의술에 대해 연구하여 왔고, 현재 서국 각국은 이른바 통합의학이라는 명칭으로 이를 더욱 체계화 하고 있습니다. 수천억씩 쏟아부어 서양의학과 민중의술, 민족의술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보완대체의학센터를 그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이에 반해, 현재 한국의 의료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 없습니다.
돈을 받건 안받건, 무면허 의료행위는 그 치료효과가 아무리 뛰어 나더라도, 모조리 처벌합니다.
심지어, 봉사 목적으로 치료를 하더라도 처벌합니다.
또 심지어, 치료 효과의 검증 목적으로 행해지는 행위도 처벌 대상이 됩니다.
이는 인간의 생명보다 의료기득권을 우선시 하는 기막힌 현상이고, 극악한 악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왜곡된 법체계를 시정하는 가장 원칙적인 방법은 이 악법을 국회에서 개정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 다음의 방법은 헌법재판소에서 이 악법에 대해 위헌선언을 하여, 이를 무효화시키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들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극히 희박합니다.
우리나라가 완벽한 의료독점체제 하에 있고, 의료기득권 세력은 국회의 보건복지부를 장악하고 있으며, 헌법재판소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국민 모두의 의식까지 마비시켜 놓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방법들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절박한 사정이 있습니다.
피고인의 연세가 100세가 넘은 고령이신데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피고인의 의술을 통하여 생명을 건질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는 일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차라리 피고인이 보이지나 않았으면, 이들도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준비를 할 터인데, 지금 이들은 피고인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 조항을 적용하여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여 주시기를 재판부에 간절히 앙망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대법원은 범죄사실이 인정되더라도, 사회상규에 반하지 않으면 무죄를 선고하여야 한다고 판시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상규란, 법질서 전체의 정신이요, 사회윤리이고, 사회통념과 같은 것이라고 판시하였습니다.
이를 보다 간단한 말로 표현하면, 민심이나 천심으로 나타낼 수가 있겠습니다.
즉, 피고인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 행위가 비록 의료관련법에 위반되지만, 그 행위가 민심과 천심에 부합한다면, 이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피고인의 치료행위는 대법원이 판시한 사회상규의 요건에도 모두 부합합니다.
우선, 피고인의 행위는 인간의 생명과 신체를 옹호한 것이었기에 그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됩니다.
피고인은 무해한 천연약재만을 사용하여 치료를 하였고, 외과적 수술 등 어떠한 침습행위도 없었으며, 이 법정에서 어떠한 부작용의 사례도 드러난 바 없으므로, 수단의 상당성 또한 인정됩니다.
인간의 생명과 건강은 이 우주만큼의 무게를 가진 것이어서, 어떠한 법익과도 비교될 수 없기에,

피고인의 행위는 법익균형성 또한 인정됩니다.
또한 피고인을 찾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사나 한의사로부터 더 이상은 방법이 없다고 버림받았고, 피고인은 이들을 치료하여 그 생명을 구해 주었기에, 피고인의 행위는 긴급성과 보충성 또한 인정됩니다.
암 등 불치병의 확진을 받은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확진을 받는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다만, 어둡고 깊은 죽음에의 공포감이 이들을 휘어 쌀 뿐입니다.
이들에게 피고인은 하늘에서 내려온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입니다.
불치병 환자들도 누구보다 살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딸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도 가고 싶어 하고, 이쁜 손자들과 함께 햇살 비치는 공원에 놀러가고 싶어도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사료됩니다.
생명권이란, 자연법에서 유래하는 것이고, 모든 기본권의 전제이며,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라는 것이 우리 헌법재판소의 판시 내용입니다.
또한 우리 국민은 누구나 행복추구권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내에서의 생수 판매를 제한한 법령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마시고 싶은 물을 마실 행복추권을 제한하였다는 이유로 위헌선고를 하였습니다.
또한 각도별로 지정된 소주판매를 강제하는 [자도 소주 판매 제도]에 대해서도,

원하는 소주를 마실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선고를 하였습니다.
또한 과외 금지 조치에 대해서도, 사교육을 받을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선고를 하였습니다.
마시고 싶은 물을 마시고, 원하는 소주를 마실 권리, 과외를 받을 권리는 헌법상 기본권으로 보호하면서, 의사도 한의사도 고칠 수 없다 하여, 살아나고자 피고인을 찾은 사람들의 의료선택권은 전혀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처벌 대상으로 삼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죄는 이러한 악법과 잘못된 법적용으로 국민의 건강권과 생명권을 침해한 것입니다.
피고인의 죄는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국민들에게 약을 준 것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피고인의 생명의술 살리기 환자 모임 대표 한분의 글을 낭독함으로써, 변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나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요,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부디 저희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도와 주십시오.
대한민국 유명하다는 어느 곳에서도 고치지 못해
삶과 가정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는 저희들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장병두 할아버지께 치료받기를 원하니
제발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눈물로서 호소 드립니다.
저희는 장병두 할아버지께 치료받다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또 할아버님께서 고쳐만 주신다면 다시 태어난 삶
값지고 보람되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제발 더 늦기 전에 제 생명과 삶을 위해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생명의술 살리기 환자 모임 일동 대표 공학박사 신영득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글을 쓴 신영득 교수님은 지난 주에 사망하셨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께, 그리고 재판부에 간절히 호소합니다.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저 절박한 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여 주셔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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