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솥에서 죽을 뻔
희이 선생 진단(陳摶)은 이름이 도남(圖南)이고 호가 부요자(扶搖子)이다. 출생지는 박주 진원(眞源)사람이며 노자(老子)와 같은 고향 같은 동네라고 한다.
진단의 출생을 둘러싸고 일찍이 고향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전해 내려온다. 그곳에 사는 어부 한 사람이 어느 날 고기를 잡으러 갔다. 그물로 고기를 끌어 올리는데 그날따라 무척 무거웠다.
끌어 올려보니 그물에는 고기는 한 마리도 없고 '둥글고 자줏빛의 고기 살로 덮여있는 커다란 공'(肉球)이 하나 담겨져 있었다. 어부는 며칠째 고기가 잡히지 않아 배고픈 터에 살로 된 이 커다란 둥근 공을 삶아 먹으려고 가마솥에 물을 붓고 삶기 시작했다.
솥이 끓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가마솥 안에서 뇌성이 진동하면서 집이 흔들렸다. 깜짝 놀란 어부는 솥뚜껑을 열고 '고기 살로 된 둥근 공'을 꺼내다가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이때 둥근 공이 탁 터지면서 그 안에서 아이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그래서 그 어부의 성이 '진'(陳)씨라서 아이의 성을 '진'(陳)이라 하고, 이름을 '둥글고 고기 살로 된 공'(肉球)에서 나온 것을 뜻하는 '단'(摶)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단'은 둥글다(圓團)는 의미이다.
어려서 말을 제대로 못했으나…
진단은 태어난 후 한동안 말을 할 줄 몰랐다. 4-5세쯤 되었을 때 한번은 동네 인근 강가로 가서 물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한참 놀고 나니 배가 고팠는데 푸른 옷을 입은 부인 하나가 그를 부르더니 젖을 먹여주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입을 열고 보통 사람처럼 말을 하게 되었다.
철이 들면서 공부를 하는데 총명이 남달라 유교경전, 역사서, 제자백가의 모든 서적을 두루 읽었다. 한번 보면 그 자리에서 암송하였으며, 15세 무렵에는 시(詩), 예(禮), 서(書), 수(數) 및 의학서적 등 빠짐없이 두루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후당(後唐) 장흥(長興) 연간에 진단은 진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이때부터 다시는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거나 관록을 추구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젊은 날을 보내다가 그의 양부모가 돌아가시자 진단은 인생이 허무함을 절실히 느꼈다.
"전에 내가 배웠던 것들은 겨우 성명만을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 장차 고향을 떠나 태산으로 가겠다. 그곳에서 신선 안기생(安期生), 황석공(黃石公) 등 선배 신선들과 교류하면서 세월을 보내고자 한다. 어찌 세상 사람들처럼 세세생생 윤회(輪回)하며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허무한 삶을 살겠는가?"
곧 집안의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하인들도 모두 자유롭게 살게 해주었다. 다만 '돌로 만든 솥' 하나만 가지고 집을 나섰다.
고향에 있었을 때 먼 곳의 사대부들은 진단의 높은 뜻을 앙모해 서로 앞 다투어 교류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진단은 일체 교류를 사절하고 머리에는 커다란 삿갓을 쓰고, 몸에는 도롱이를 입고 저잣거리나 술집 등을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발길 닿는 대로 자유롭게 지냈다.
진단은 선도 수련을 하러 입산하기 전에도 세간에서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자유롭게 생활했다. 저잣거리를 다니며 민간에서 유행하는 속요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스스로 시를 지어 노래 부르기도 했다.
술좌석에 앉기만 하면 이야기꽃을 피워 좌중을 울리고 웃기곤 했다. 이러한 진단의 기이한 행적을 소문으로 듣고 후당(後唐) 명종(明宗)이 친히 조서를 내려 진단을 초청했다.
궁중에 들어온 진단이 명종을 알현하고 서서 읍할 뿐 무릎을 꿇지 않았다. 진단의 무례함을 보고도 명종은 오히려 더욱 진단을 공경하면서 ‘청허처사’(淸虛處士)라는 이름을 내리고, 아름다운 궁녀 세 사람을 하사하였다.
진단은 상서를 올려 궁녀를 사절하면서 명종에게 시를 지어 올렸다.
雪爲肌體玉爲시 설위기체옥위시 피부는 깨끗하여 눈 같고, 빰은 옥으로 빚은 듯
多謝君王送到來 다사군왕송도래 임금이 (궁녀를) 보내온 것을 감사할 뿐이다.
處士不生巫峽夢 처사불생무협몽 산중처사는 남녀간의 정분이 일어나지 않으니
空煩雲雨下陽臺 공번운우하양대 공연히 남녀의 정조차 번거로워 양대를 내려온다.
* 남녀의 밀회나 육체적 즐거움을 ‘무산지몽’(巫山之夢) 또는 ‘운우지락’(雲雨之樂)이라 한다. 이 고사는 초 회왕(楚 懷王)이 운몽에 있는 오래된 집에 갔을 때 꿈속에서 무산신녀(巫山神女)와 즐겼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왔다.
* 양대(陽臺) : 무산에 있는 지명으로 아침에는 구름(朝雲)이 되어, 저녁에는 비(暮雨)가 되어 이곳 ‘양대’ 근처에 걸려 있다.
궁녀를 돌려보내고 곧장 속세를 떠나 은둔하였다. 이때부터 진단은 발길 가는 대로 가고, 하고 싶은 대로 산수(山水)간을 한가로이 두루 유람했다.
음식대신 매일 술 몇 잔으로
주유천하 하던 중 어느 해 진단은 이인들인 손군방(孫君方), 녹피(鹿皮) 처사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진단에게 “무당산(武當山) 구실암(九室岩)은 당신이 은거할 만한 곳이다.”고 귀뜸해 주었다. 그 후에 진단은 무당산 구실암으로 가서 은거했다.
기를 마시고 내단을 수련하는 호흡공부(吐納服氣)에 전념했다. 불에 익힌 음식을 일체 먹지 않았으며, 단지 매일 술만 몇 잔 마셨다.
이곳에서 고요히 침묵을 지키면서 20여 년을 수련했다. 이 기간 동안에 진단은 ‘지현편’(指玄篇) 81장, ‘입실환단시’(入室還丹詩) 50수를 지었으며, 또 ‘조담집’(釣潭集) 일만자를 저술하였는데, 모두 도(道)의 정미롭고 오묘한 이치를 명백하게 밝혀놓았다.
칼을 든 신인(神人)이 나타나
어느날 밤이 깊어가는데도 진단은 잠이 오지 않아 정원을 서성이고 있었다. 온몸에 황금빛이 빛나는 신인(神人)이 손에 칼을 들고 나타나 진단을 불렀다. 이어서 “너는 이미 수련하여 득도하였다. 이제 응당 네가 돌아갈 곳을 선택해야 한다.”
진단이 대답하기를 “당신이 말하는 돌아갈 곳이란 어디인가? 가을이면 만물이 수렴하고 결실을 맺는데, 그럼 가을을 나타내는 곳이 내가 장차 은거할 곳이란 말인가?”했다.
이때 진단은 이미 70여 세였는데, 이 말에 따라 살던 곳 무당산을 떠나 중원 오악 중 서악(西岳)인 화산(華山)으로 옮겼다.
진단은 신인(神人)의 계시로 화산(華山)으로 거처를 옮겼다. 화산에 가서 옛날에 도관이었던 ‘운태관’(雲台觀)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유적만 남아 있고 건물은 허물어져 있었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덥수룩하게 난 초목과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돌들을 제거하여 은신처를 만들었다.
진단이 무당산에서 화산으로 옮기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진단은 무당산 구실암(九室庵)에서 밤이 깊으면 향을 피워 놓고 주역(周易)을 읽었다. 이때 다섯 명의 노인이 늘 와서 경청했는데 이 노인들의 긴 눈썹, 백발, 얼굴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랜 기간동안 진단이 ‘주역’을 읽을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어느 날 진단은 다섯 노인들에게 “당신들은 어디서 온 누구입니까?” 물었다. 그 노인들은 “우리들은 무당산‘일월지’(日月池)에 살고 있는 용이고 이곳은 ‘현무제군’(玄武帝君)이 다스리는 곳이다. 화산이야말로 선생이 은거할 만하다.”라고 했다.
다섯 노인이 다섯 마리 용으로 변하더니 진단에게 눈을 감으라 하고는 진단을 등에 태우고는 하늘 높이 솟아올라 바람을 타고 화산에 도착했다. 진단이 눈을 뜨니 자신은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있는데, 다섯 마리 용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번 잠이 들면 몇 달
진단이 처음 화산에 왔을 때 화산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가 있어서 산골 백성들이 야간에는 출입조차 어려워했다. 그는 호랑이를 불러놓고 큰 소리로 꾸짖으며 이곳을 떠나라고 했다. 이때부터 화산에는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없었다.
평상시에 그는 늘 눈을 감고 잠을 자곤 했다. 한번 잠들면 몇 달씩 깨어나지 않았다.
어느 하루 나무꾼이 산기슭에서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다가가 보니 시체 곁에는 도사나 승려들이 들고 다니는 사슴꼬리털로 만든 먼지털이가 세워져 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몸을 한번 더듬어 보았다.
그가 바로 진단이었는데 심장이 뛰고 있었고 입에만 온기가 미약하게 있는 듯했다. 나무꾼이 어쩔 줄 몰라 한참 서 있는데 진단이 그제서야 천천히 호흡을 되찾으며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깬 진단이 “아주 맛있게 단잠을 자고 있는데 너는 왜 나를 성가시게 깨우는가?”라고 오히려 꾸짖었다.
화산에서 진단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가 널리 알려지자 그곳의 지방관이 이 소식을 주(周) 세종에게 아뢰었다.
임금 앞에서 한달을 자고 나서
현덕(顯德) 3년(956) 세종은 화주의 지방관에게 진단을 궁으로 모셔오라고 명령하였다. 궁에 도착한 진단은 천자를 볼 생각이 없다는 듯이 객관에서 한 달 정도 잠을 실컷 자고난 후 조정에 나가 세종을 알현하였다.
진단을 만난 세종은 '연금술(點化金銀)'의 비법을 물었다. 진단은 세종에게 “폐하는 존귀하여 천자가 되었고, 넓은 사해가 폐하의 것이니 마땅히 천하를 잘 다스리는 것을 급선무로 알아야 합니다. 하필이면 연금술 같은 그런 작은 도술에 마음을 두십니까?”라고 했다.
세종은 진단의 직언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간의대부’(諫議大夫)라는 높은 벼슬을 내렸다. 진단이 벼슬을 사양하자 다시 한 달이 지난후 세종은 ‘백운선생’(白雲先生)이라는 호를 내리고 진단이 산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아울러 조서를 내려 그곳의 지방관들이 수시로 진단의 안부를 묻도록 하였다.
진단(陳?, 872-989)은 중국 당나라 말에 태어나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혼란기를 거쳐 송나라 초기까지 살았다.
이 시기에 주전충이 황소의 난을 토벌한 후 세력을 키워 국호를 ‘양’(梁)으로 바꾸면서 290년간 이어온 당나라가 서기 907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그 이후 960년 송나라 건국 때까지 약 50여 년간 오대십국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이 반세기 동안에 중국의 왕조는 다섯 번이나 바뀌었고 작은 국가들도 열이 넘었다. 나라의 평균 수명이 십여 년에 불과했으니 세상은 극도로 혼란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진단은 일신에 경국제세의 큰 재주를 지녔으나 산속에 은둔하고서 다섯 왕조의 빈번한 명멸을 그냥 지켜볼 뿐이었다. 한 왕조가 망하고 다른 왕조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늘 마음이 아픈 듯 며칠동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번은 그의 이러한 심경을 7언 율시로 읊었다.
十年踪迹走紅塵 십년종적주홍진 십년의 발자취 홍진 속에 빠져 있는데
回首靑山入夢頻 회수청산입몽빈 머리를 청산으로 돌려 자주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紫陌縱榮爭及睡 자맥종영쟁급수 도성의 번잡한 길이 비록 영화롭지만 다툼이 졸음에 미치겠는가
朱門雖貴不如貧 주문수귀불여빈 화려한 저택이 비록 귀하지만 가난보다 못하다
愁聞劍戟扶危主 수문검극부위주 위태한 임금을 칼과 창이 보호한다는 말을 근심스럽게 들으며
悶聽笙歌?醉人 민청생가괄취인 생황소리 노랫소리, 술취한 사람의 떠들썩한 소리 듣기도 민망하다
携取舊書歸舊隱 휴취구서귀구은 옛날 서책들 챙겨서 옛 은거지로 돌아오니
野花啼鳥一般春 야화제조일반춘 들꽃 피고 새우는 봄은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
이 시는 혼탁한 정치와 세상에 대한 그의 불편한 심경을 잘 그려내고 있다.
한참 세월이 지난 뒤에 진단은 흰 나귀를 타고 개봉으로 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이 송 태조 조광윤이 나라를 개국하고 천자의 자리에 올라 천하통일의 새 국면이 열었다고 알려 주었다.
이때 그는 얼마나 기뻤던지 박장대소하다가 그만 타고 있던 나귀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그는 “천하는 이제부터 안정되리라!”하고 외쳤다.
이 일이 있고부터 화산에 은둔하며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송 태조 조광윤이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만나고자 했으나 한사코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의 윤두서가 그린 '진단타려도'
진단이 천하를 걱정하다가 송나라로 통일되었다는 소식에 나귀에서 떨어졌다는 고사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1700년대에 살았던 윤두서(恭齋 尹斗緖)가 이 재미있는 소재를 그냥 넘겨 버릴 리 없다.
그는 당파 싸움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면서 비단위에 ‘진단타려도’(陳?墮驢圖)를 그렸다. 이 그림을 본 조선임금 숙종(肅宗)이 1715년(재위41년)에 그림 위 좌측상단에 ‘제시’(題詩)를 몸소 지어 글씨를 썼다.
希夷何事忽鞍徙 희이하사홀안사 희이선생 무슨 일로 홀연 안장에서 떨어졌나
非醉非眠別有喜 비취비면별유희 취함도 아니요 졸음도 아니요 따로 기쁨이 있었다네
夾馬徵祥眞主出 협마징상진주출 협마영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된 임금(송 조광윤)이 나왔으니
從今天下可無? 종금천하가무리 지금부터 천하엔 근심이 없으리라.
曾向前朝出白雲 증향전조출백운 일찍이 전 왕조의 부름에 따라 산 속에서 나왔는데(주 세종의 부름을 받음)
後來踪迹杳無聞 후래종적묘무문 그 후 종적이 묘연하여 들리는 소식도 없다
如今若肯隨朝詔 여금약긍수조조 이제 만약 조정의 부름에 따른다면
總把三峰賜與君 총파삼봉사여군 화산의 세 봉우리를 모두 그대에게 주겠다
이 시를 받아 읽은 진단은 이때 비로소 조정의 부름에 응했다. 궁전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기 전에 먼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조용한 곳을 요구했다.
송태종은 진단에게 ‘건륭관’(建隆觀)에서 지내도록 했다. 진단은 문을 닫고 일 개월 동안 실컷 잠을 잔 후 깨어나 몸에 새 깃으로 된 옷(羽服)을 입고, 머리에는 화양건(華陽巾)을 쓰고, 발에는 풀로 만든 신(草鞋)을 신고 조정으로 나아가 황제를 알현했다.
송태종은 ‘연영전’(延英殿)에서 손님을 맞는 극진한 예절에 따라 진단을 접견하고 마주하여 긴 시간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전쟁 승패를 미리 알고
그 당시 송태종은 군대를 보내어 북한(北漢)을 정벌하려고 했다. 진단은 이 사실을 알고, 적과의 전쟁을 중지하도록 직언했다. 그러나 그땐 이미 군대를 출병시킨 상태였다.
태종은 진단의 직언을 듣고 불쾌히 여기면서 진단을 잠시 ‘어화원’(御花園) 내에 머물도록 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얼마 후에 송나라가 패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태종은 이때서야 비로소 진단의 선견지명을 알아보고 충심으로 심복하게 되었다.
3년이 지난 뒤 태평흥국 4년(979) 진단이 다시 화산에서 개봉으로 와서 태종에게 “지금이야말로 북한(北漢)을 정벌하여 하동(河東)땅을 되찾을 때 입니다.”라고 건의했다.
이 말에 따라 태종은 군사를 일으켜 북한(北漢)과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단숨에 북한(北漢)을 점령했다. 북한(北漢) 왕인 유계원(劉繼元)을 포로로 붙잡았다.
송태종, ‘희이’(希夷)란 휘호를 내리다
송태종은 이때 진단에게 ‘희이’ 선생이란 휘호를 내렸다. 이 ‘희이’의 유래는 노자 도덕경 14장에서 나온다.
“이를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라, 지칭해서 ‘이’(夷)라고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이라 ‘희’(希)라고 한다.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 이 문장에서 ‘이를 之’는 ‘도(道)’를 가리킴)에서 나왔다.
진단에게 ‘희이’란 휘호를 내린 송태종은 진단과 자주 마주하고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하는 등 친한 벗처럼 지냈다.
한번은 태종이 물었다. “상고시대 요순(堯舜)이 천하를 다스리던 시대와 지금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진단이 답하기를 “요순시대는 황제가 거주하는 곳이 흙과 풀로 집을 지은 초옥이고, 흙 계단도 석자에 불과하고 지붕을 이은 띠 풀에 가위질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현재하고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정치를 능히 맑게 할 수 있으니 백성을 혹사시켜 물자를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요순의 치세(治世)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어느 날 송태종은 진단에게 자신의 셋째 아들 수왕(壽王)의 운명을 보아달라고 했다. 궁궐의 태감이 진단을 동궁으로 안내하였으나 마침 수왕이 아직 일어나지 않아 관상을 보지 못했다.
동궁에서 돌아오자 태종이 그 결과를 물었다. 진단이 “수왕의 궁궐에 있는 하인들은 모두 장군과 재상의 재목이니 수왕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고 했다.
진단이 본 사람은 장기(張耆), 양숭운 그리고 곽승우 등 3명이었는데 나중에 모두 재상과 태위 벼슬을 하였다. 그리고 수왕은 황제에 즉위했는데 이 사람이 송 진종(眞宗)이다.
뜻을 얻은 곳은 다시 가지 말라
진단이 송나라 수도 개봉에 있는 동안 선비 한 사람이 진단의 처소로 찾아와서 자신을 잘 단속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진단은 “쉽게 성취할 수 있는 일은 다시 하지 말라. 늘 놀러 가는 곳을 아쉬워하여 오래 머물지 말라. 뜻을 얻은 곳은 더는 가지 말라.”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그 선비는 지극히 가치 있는 말이라면서 가슴 속에 되새겼다.
송태종은 진단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라는 벼슬을 내렸으나 진단은 단호히 벼슬을 거절하고 자신이 산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놓아 달라고 사정했다.
태종도 더는 붙잡지 못하고 화산으로 돌아가도록 하였으나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불렀다. 진단은 산에서 나오지 않기로 굳게 결심을 지키고 상서를 올려 사절하였다.
주역에 통달, 앞날을 예견하다
진단은 유가경전에 통달하였고 고금의 일에 정통했다. 특히 주역에 일가를 이루었다. 사람을 관찰하여 선악, 길흉화복, 귀천에 대해 정확하게 맞추었다.
송태조 조광윤이 아직 송나라를 개국하기 훨씬 전, 주나라 장군이었던 시절이었다. 조광의, 조진 등 3명이 장안 시내에 놀러갔다. 이때 진단도 조광윤 등 3명과 함께 주점에 들어가 합석하여 술을 마셨다.
술집에서 조진이 상석에 앉게 되었는데 이를 본 진단이 조진에게 “당신은 단지 하늘의 자미성을 둘러싸고 있는 외곽의 작은 별에 불과할 뿐인데, 어찌 감히 상석에 앉아 있는가?”라고 말했다. 나중에 이들 중에 조광윤은 송태조, 조광의는 송태종으로 황제가 되었다.
또 한번은 주 세종(周 世宗) 시영(柴榮)과 조광윤, 조광의가 동행하여 성밖을 지나고 있었다. 진단이 사람들에게 “성밖에 세 개의 천자 기운이 지나고 있다.”고 예언했다. 이들 모두 천자가 되어 뛰어난 치적을 남겼다.
어느 때 한번 진요자(陳堯咨)라는 벼슬아치가 진단을 예방했다. 그때 거실에 한 도사가 앉아있었다.
머리위에 삼끈으로 상투를 동여맸으나 기개와 도량이 보통사람과 달랐다.
그 도사가 진요자를 보자마자 연달아 “남암(南庵)! 남암!” 외치고 곧 그 자리를 떠났다. 진요자는 참으로 이상하다고 느끼면서 진단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방금 전의 그 도사는 누구입니까?”
八仙이 남암(南庵)을 부른 이유
진단은 “종리자(鐘離子: 팔선 중의 한 사람인 종리권)이다.”라고 대답했다. 진요자는 그 도사를 뒤쫓아 그 연유를 묻고자 나서는데 진단이 큰소리로 웃으면서 “이미 수 천리 밖에 있을 것이구먼! 종리자가 이야기한 남암(南庵)이라는 말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만류했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 진요자가 복건지방으로 가서 국가의 세곡 운반 책임자가 되었다. 복건지방 순사지역의 농촌마을을 지나는데 시골 부인이 아이를 부르면서 “너는 남암(南庵)에 가서 아버지께 빨리 집으로 돌아오도록 알려라.”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 말에 진요자는 깜짝 놀라면서 그 시골부인에게 남암(南庵)의 소재지가 어디인지 물었다. 서둘러서 남암이라는 곳에 가서 살펴보니 다만 찌그러져가는 사당 하나가 보였다.
사당에는 돌비석 하나가 서 있는데 비석에는 “모년 모월 모일 남암(南庵)이 죽어서 그 시체를 이곳에 묻고 제사를 지낸다.”고 새겨져 있었다. 비문에 새겨진 그 일자가 바로 진요자가 출생한 시간이었다.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미래를 간파
진단은 묻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의중을 능히 헤아렸다. 한번은 그의 서재 벽 위에 커다란 표주박이 걸려 있었다. 도사 ‘가부(賈復)’가 그것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나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았다.
“벽에 걸린 저 커다란 표주박이 네 마음에 드는 것 같구나!”하며 하인에게 표주박을 내리게 하여 도사 ‘가부’에게 주었다.
진단은 또한 사람의 길흉을 잘 예측했다. 어릴 때부터 화산 ‘운대관’(雲臺觀)에서 생활하던 ‘곽항’(郭沆)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하루, 진단은 한밤중에 ‘곽항’을 깨워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라고 하였다.
곽항은 길도 멀고 한밤중이라 무서워서 가지 않겠다고 했으나 진단은 곽항을 동행하여 길을 떠났다. 가는 길 도중에 ‘곽항’을 찾아오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곽항! 당신 어머니가 위급하여 돌아가실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때서야 진단이 서둘러 집에 돌아가라고 한 이유를 알았다.
진단은 곽항에게 약 한 봉지를 주면서 “급히 집으로 돌아가 네 어머니에게 이 약을 먹여라.”고 지시했다. 곽항이 어머니에게 약을 먹이자 얼마 되지 않아 기사회생하면서 건강을 회복하였다.
어느 때 한번 성도(成都) 태수 허중선(許仲宣)이 벼슬에서 쫓겨났다. 편지와 선물을 보내면서 앞으로 자신의 벼슬길과 길흉을 물었다. 진단은 영원히 벼슬을 회복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과연 얼마 되지 않아 ‘허중선’은 죽었다
신선들과 교유(交遊)하다
진단은 나이가 많아지고 세월이 감에 따라 세상 사람들과 왕래도 줄었다. 그러나 늘 신선 여동빈, 호공, 적송자 등과 화산에서 만나 담소하고 술 마시며 시 짓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어느 하루 진단은 제자 ‘가득승’(賈得升)에게 “오늘 귀한 손님이 올 텐데, 오자마자 신속히 나에게 알려라!”하였다. 잠시 후 몸에 짧은 두루 마기에 푸른 두건을 두른 사람이 와서 문을 두드린다.
가득승이 손님이 왔다고 미처 손쓸 틈도 없이 그 사람은 휑하니 가버렸다. 이 사실을 안 진단은 가득승에게 바로 뒤쫓아 가라 하였다. 그 사람을 뒤쫓아 가는데 몸에 ‘사슴가죽’을 걸친 노인 한분을 우연히 만났다.
가득승은 그 노인에게 “방금 이곳을 지나간 그 사람이 어디 갔는지 아십니까?” 물었다. 노인은 “방금 지나간 그 사람은 신선 ‘이팔백’(李八百)이다. 한번 움직이면 팔 백리다.” 하였다.
말을 끝낸 그 노인도 갑자기 사라졌다. 이때서야 사슴 가죽을 걸친 노인이 득도하여 ‘태청경’(太淸境)에 계시는 ‘백록’(白鹿)선생 이완(李阮)임을 알았다.
잠 속에도 미묘한 도리가 있다
진단은 잠을 무척 즐겼다. 한번 잠들면 반년 혹은 3-4개월, 짧아야 1개월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듣고 어떤 사람이 찾아와 공경스럽게 절을 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선생님은 잠을 잘 주무신다는데 그 속에 무슨 미묘한 도리라도 있습니까?”
진단은 이 말을 듣고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 “잠자는 도리를 모르면서 생사(生死)를 벗어나고 윤회(輪回)를 뛰어 넘기란 어렵다. 요즘 사람들은 종일 배부름을 구하고 권세에 빌붙어 이익을 취하는데 급급하다. 하여 피곤해서 잠이 들어도 하루저녁에 여러 차례 놀라서 깬다. 정신은 명예, 이익 등에 교란 받고 마음의 지혜는 술 때문에 어지럽게 되었는데 세속인의 잠자는 법은 이러할 뿐이다.”
“도인들은 잠잘 때 푸른 용이 동방을 지키고 있는 듯하고, 흰 호랑이가 서방에 엎드려 있는 듯하며 단전의 정기가 온몸을 두루 돌고, 오장(五臟)의 진액(神水)이 순환한다. 그런 후에 신령이 내 몸을 벗어나 곤륜 자부(紫府)세계와 복지동천(福地洞天)을 두루 다닌다. 이렇게 잠을 자야 세월의 변화도 인간세상의 근심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비로소 진짜 잠이라 하고, 진짜 꿈이라 할 수 있다.”
진단은 말을 마친 후 바로 잠들었다. 그 모습이 호흡이 끊어진 듯하였으나 얼굴색은 붉게 윤기가 난다. 자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은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며 절을 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진단 118세에 세상을 떠나다
단공(端拱) 원년(988) 어느 하루 진단은 제자 가득승에게 “나는 내년에 아미산으로 가려고 한다. 너는 ‘장초곡’(張超谷)으로 가서 석실하나를 마련해라.”하였다. 989년 7월 석실이 완성되자 진단은 화산을 떠나 아미산으로 옮겼다.
그 석실에서 수 백자 유언을 남겼는데 유언 가운데 “나의 천수는 이미 마칠 때가 되었다. 더 머뭇거릴 수 없어 이 달 7월 22일 연화봉 아래 장초곡에서 육신을 벗어 버리겠다.”고 하였다.
임종의 그 날이 오자 진단은 석실에 촛불을 끄게 하고 제자 한 사람만 남게 했다. 왼손으로 아래턱을 받치고 앉아서 좌탈(座脫)했는데 향년 118세였다. 죽은 후 7일간 몸에 온기가 남아 있었고, 상서로운 오색구름이 석실 입구를 둘러싸고 한 달이 지나도록 흩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시해(尸解)한 선인(仙人)
아미산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때 벼슬아치 태감(太監)이 아미산에 왔다. 태감에게 면회를 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도포에 모자를 쓰고 이름이 ‘동명’(東明)이며 관상에 능통하다고 소개하였다.
두 사람이 마주하여 담소를 하고 있는데 ‘동명’이라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 대부분은 ‘화산에 은거하였던 진단’선생에 관한 것이었다. 태감은 ‘동명’이란 관상가와 헤어진 후 가만히 생각해보니 조금 전에 만난 그 사람이 화산도사 진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태감은 사람을 급파하여 뒤를 쫓게 하였으나 종적이 묘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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