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外之士

列仙小傳_갈현[葛玄]

醉月 2009. 7. 25. 08:07

列仙小傳_갈현[葛玄]

 

ⓒ 삽화 박영철

명문가 출신 신선

갈현(葛玄)은 위, 촉, 오가 천하를 다투던 삼국시대 사람으로 자(字)가 효선(孝先)이고 낭야(琅?)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벼슬을 했는데 고조할아버지 갈로(葛盧)는 한나라 때 표기대장군이었고 제후인 비후가 되었다.

갈로는 나중에 자기의 봉읍지를 동생인 갈문탁에게 물려주고 남쪽 강좌지역에서 유람했다.

단양지역 구용현(句容縣)에 도착하여 주변을 살펴보니 산수가 수려하고 풍속이 아직 순수하면서도 소박한 것을 발견했다.

가히 살 만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가족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해 살았다. 갈현의 할아버지는 황문시랑(黃門侍郞) 벼슬을 지냈고,

아버지 갈효유(葛孝儒) 또한 상서(尙書) 벼슬을 했다.

 

통현(通玄) 진인이 환생하여

갈현(葛玄)은 한 환제(漢 桓帝) 연희(延禧) 7년 (164년) 4월 8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갈효유는 원래부터 도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였다고 한다.

갈현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집 근처의 현정관(玄靜觀)이라는 도관에 사람을 보내 향수(香水)를 구해오게 했다.

이 향수로 갓난아기를 목욕시켜 사악(邪惡)을 씻어내기 위해서였다.

심부름하는 사람이 현정관에 가서 향수를 구하러 온 뜻을 이야기하였다.

어디서 왔는지 내력을 알 수 없는 낯선 ‘지도기(支道紀)’라는 도사가 그 근처에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통현진인(通玄眞人)이 대라천(大羅天)에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통현진인이 나에게 말하시기를 ‘너와 내가 이별한 지가 이미 일 겁(一劫)이 지났구나, 너는 설마 나를 잊어버리지는 않았겠지?’라고 하셨다. 나는 이에 얼른 서둘러 무릎을 꿇고 제자의 예를 취했다.

진인은 계속해서 ‘너는 집에 돌아가거든 나의 이 말을 갈효유에게 전하거라.

그리고 내가 내일 그 집으로 찾아가 태어난 아이를 축하하겠다고 전하여라.’라고 했다.

머리를 조아렸다가 다시 올려보니 진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 또한 꿈속에서 깨어났다.”고 했다.

 

도사 지도기(支道紀)의 축하 인사

그 다음날 도사 지도기는 아이 탄생을 축하하러 갈효유의 집을 찾았다. 방문하자마자 태어난 아이를 한 번 보자고 했다. 갈효유의 처는 얼굴에 난색을 나타내면서 아이를 보여 주지 않으려 하였으나 갈효유는 방문한 도사의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서 아이를 데려오게 했다.

아기를 찬찬히 살펴본 도사는 놀라면서도 기쁜 나머지 “이 아이의 몸은 상서로운 기운으로 덮여있고 주위에는 신광이 두루 감싸면서 빛난다. 과연 대라천(大羅天) 신선이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갈효유가 “신선의 가르침은 매우 아득하고 신비하여 헤아릴 수 없다. 나는 다만 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서 장수하기를 바라며, 나의 갈씨 가문을 이어가기만 한다면 그저 만족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도사는 “이 아이는 보통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다. 이 아이가 이곳에 태어나자 저 하늘 구천(九天)에서도 경하하고, 칠대 조상까지 함께 기뻐하니 당신 가문 하나만 복을 받은 게 아니다.”고 극찬했다.

이 말을 마친 도사, 지도기는 고개 숙여 작별 인사를 한 후, 대문을 나서는 순간 홀연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 삽화 박영철

인생이 무상하여 수련에 뜻을 두다

갈현이 8세 때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셨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책읽기를 좋아했으며  능히 자립할 수 있었다.

13세 무렵에는 고금의 경(經), 전(傳), 자(諸子), 사(史) 등 각종 전적을 두루 널리 익혀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느 하루, 우연히 그의 부친 갈효유가 남긴 글을 보자 죽은 부모님 생각이 간절했다.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울부짖는데 그 슬픔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한참 슬픔에 잠겨 있다가 울음을 그치고 스스로 탄식하면서 “산과 물은 옛날 그대로이고 터럭 하나 바뀐 것이 없는데 나의 부친은 다시 볼 수 없다. 세상에는 사람이 장생불로(長生不老)할 수 있는 도와 법이 이미 있는데, 나는 왜 수련하지 않는가?”라고 자문했다.

이때부터 갈현은 이름 있는 신령스런 산(名山靈岳)을 두루 유람하면서 기인이사(奇人異士)를 찾아 도를 물었다.

틈이 있어 한가할 때는 거문고(古琴)를 즐겨 탔으며, ‘노자, 장자‘ 등 도가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심성(心性)은 점점 더 평온하면서도 담백해져갔으며 더는 공명과 부귀를 구하지 않았다.

그가 십오륙세가 되었을 때, 그 명성이 이미 강남 일대에 퍼졌다. 벼슬이 높은 관리 한 분이 그를 찾아와 관직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내가 원하는 것은 나물 먹고 갈포를 걸치고, 돌베개를 베고 샘물을 마시며 자유자재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어찌 벼슬살이를 하여 이러한 청정무위한 삶을 버리겠는가?”라고 했다.

 

좌원방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 갈현은 아예 도사복장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걸어서 멀리 천대(天台)의 우산(虞山)으로 가서 일심으로 도를 추구하였다. 그곳에서 우연히 진인 *좌원방 (左元放 일명 左慈)을 만났다. 좌원방은 갈현에게 ‘구단금액선경(九丹金液仙經)‘과 기를 단련하고 형체를 보존하는 도술과 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쫒는(治病驅鬼) 비법을 전수하였다.

십팔구 세 무렵 갈현의 도는 점점 깊어갔다. 이미 능히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등 변환과 출몰이 자유자재였다. 곧 천태산을 떠나 동으로 가서 괄창(括蒼)일대를 유람하다가 숙부인 갈미(葛彌)를 찾아 뵈었다.

숙부 갈미는 자가 효공(孝公)이고 그 당시 괄창에서 서당을 열고 있었다. 그는 학자로서 명성이 널리 알려져 사방에서 영재들이 몰려와 경학을 배우고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몰려드는 문하생이 그치지 않았다.

갈현이 숙부에게 절하고 자리에 앉자 숙부 갈미는 먼저 갈현의 근황을 물었다. 그 간의 공부과정을 들은 숙부 갈미는 “너의 지기(志氣)는 고상하다. 어려움과 각종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현들마저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했구나. 매우 기특하고 존귀하다. 그러나 현재 천하정세는 위, 촉, 오 삼국이 솥의 다리처럼 정립하여 경쟁하듯 인재들을 다투어 초빙하고 있다. 보아하니 너는 이렇게 심오한 학문을 겸비했으니 세상에 나오면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너도 벼슬살이에 나아가 너의 포부를 세상에 펼쳐보고 싶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다음호에 계속)

* 좌원방(左元放): 동한말의 도사이며 이름은 좌자(左慈)이다. 여강(안휘)사람이며 유학 오경에 능통하였고 점성술에 뛰어났다. 조조, 유표 등이 그의 도술을 꺼려하여 여러 번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는 갈현의 스승으로 태청단경(太淸丹經) 등 단경도서와 도법을 전하였다고 한다.

 

  

ⓒ 삽화 박영철

숙부와 이별하고

숙부 갈미가 조카 갈현에게 벼슬살이를 권하자 갈현은 공손하게 말했다. “저는 천성이 우둔합니다. 세상을 경륜하는 학문을 닦지 못했습니다. 저는 다만 산수간에 유랑하며 저녁놀과 안개 가운데 깃들여 살며, 세상을 버린 숨은 선비와 벗하고, 산과 들의 사슴과 짝하면서 그냥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숙부님은 오경(시, 서, 역, 예기, 춘추)을 강의하시고 널리 학술을 펴시니 세상에 시와 예술 그리고 교화에 앞장서고 계십니다. 저는 단지 숙부님께서 세상에 필요한 분이 되시고, 후학들에게 세상길에 길잡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숙부 갈미는 조카 갈현의 뜻이 굳어 더 만류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탄식하면서 말했다. “너는 이미 평범을 넘어 성인의 경지에 들었으니(超凡入聖), 보통사람과 비할 수 없다. 이미 너의 뜻을 이렇게 굳으니 도(道)와 술(術)을 닦는 데 매진하거라. 너의 자질로 보건대 수련하여 신선이 되는데(修成神仙)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

 

각조산에서 수련

갈현은 숙부 갈미와 이별한 후 괄창(括蒼), 남악(南岳), 라부(羅浮)산 등 도처를 유람하면서 금단(金丹:신선도)을 수련하기 적당한 곳을 찾았다. 수련할 만한 장소를 찾으며 옥사산(玉?山)을 지나 강서지방 청강현(淸江縣) 동쪽 각조산(閣?山)에 도착했다. 갈현이 각조산 동쪽 높은 봉우리 위에 올라서 사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마음에 들었던지 기뻐하면서 “이 산의 형세는 다락집(閣)과 같고, 산의 색깔은 검은 듯(?)하다. 땅은 기름지고 물은 맑다. 정히 이곳이야말로 신선이 머물 만한 곳이다, 내가 금단(金丹)을 수련할 곳을 드디어 찾았다.”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이곳에서 은거하면서 신선도를 닦았다.

 

원혼들을 제도

갈현이 수도하던 그 당시는 위·촉·오 삼국이 천하를 차지하려는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가뭄과 장마 등 천재(天災) 또한 계속되었으며 백성들은 무수히 죽고, 원혼들은 고통에 빠져 윤회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었는데 이를 본 수행자 갈현은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도장(道藏) 영보경고(靈寶經誥)를 다시 정리하여 “제련대법(祭煉大法)”, “생천보록(生天寶菉)”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옥황상제(天帝)에게 아뢰었다. 그리고 법단을 만들고, 상원절(음력 정월대보름), 중원절(백중날 음력 7.15), 하원절(음력 10.15) 등 좋은 절기가 돌아오면 사방의 원귀들을 법단 앞으로 불러 모아 설법을 들려주고 부록(符菉:부적)을 주어서 원귀들을 제도하였다.

 

귀왕(鬼王)이 나타나 사례

건안 19년(214) 하원절(음력 10.15) 갈현이 막 원귀들을 불러 모아 제도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귀신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귀신의 키는 5장 정도이고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갈현을 보자 절을 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나서 “신선이시여, 저는 하계의 원귀(寃鬼)와 굶주린 귀신들을 통솔하는 귀왕(鬼王)입니다. 제가 통솔하는 원귀와 굶주린 귀신들은 모두 악도에 빠져 곤경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갈 신선께서 법단을 만들어 이들을 널리 제도하고 또 부적을 내려주어 수백만 무리를 구제하셨습니다. 저는 갈 신선의 깊으신 은혜에 감격하여 이렇게 특별히 나타나 사례 인사를 드립니니다. 하늘의 북방현천상제(北方玄天上帝)께서 갈 신선께 조서를 내리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갈 신선이 원혼들을 여러 해, 제도하여 그 공덕이 깊고 두터우며 이미 이름이 신선들의 기록인 금간(金簡)에 올랐습니다. 5년 후에 조서를 내려 하늘나라 조정에 참여하도록 관작을 내린다고 합니다.” 말을 마친 후 귀왕(鬼王)은 사라졌다.

 

 

ⓒ 삽화 박영철

 

갈현이 죽은 원귀들을 제도하면서 세상을 살펴보니,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정(情)과 욕심에 끌려 죄업이 날로 깊어짐을 보고는 살아있는 사람을 제도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상청(上淸), 영보(靈寶) 등 많은 진경(眞經)을 총괄하고 그 중, 요점을 정리해 ‘자비도장구유대참법’(慈悲道場九幽大懺法) 한 부를 저술하여 세상에 유포하였다. 이때 갈현은 진인 좌원방(左元放)의 가르침에 따라 수련하여 몸은 이미 자유자재로 변하고 영감으로 신령과 통하는 법술을 갖추었다.

 

입에서 불을 토해내 손님을 따뜻하게

일찍이 손님 한 사람이 갈현을 찾아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손님이 우연히 밖을 보니 자기를 영접한 갈현이 다른 손님을 맞이하여 인사를 나누면서 실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 광경에 놀란 그는 고개를 돌려 앞을 보니 갈현은 분명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뒤에 실내에 들어온 두 번째 손님도 자기를 맞이한 갈현과 똑 같은 사람이 대청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두 손님이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 있는 사이 두 명의 갈현이 하나로 합쳐져 한 사람의 갈현으로 되었다.

갈현과 손님 두 사람이 만나 담소하던 그 날은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갈현은 갑자기 “집이 몹시 누추하여, 따로 화로가 없습니다. 두 분께서는 매우 추우시겠습니다. 제가 불을 좀 피워 따뜻하게 해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입을 벌려 뜨거운 불을 토해냈다. 잠시 후 집안은 마치 봄날처럼 따뜻해졌다.

이야기가 무르익자 갈현은 술좌석을 만들어 손님들을 대접했다. 술잔에 술을 따르면 자동으로 손님에게 날아갔고 그 술잔을 받아 술을 마시고 나면 빈 잔이 술 호로병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하면서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또 한 번은 손님과 식사를 하고 있는데 손님이 갈현에게 기묘한 도술을 한번 보여 달라고 졸랐다. 갈현은 한 입 밥을 물었다가 토해냈다. 그러자 그 밥알들이 수백 마리 큰 벌로 변해서 손님 주변을 윙윙거리면서 날아다녔으나 사람을 쏘지는 않았다. 한 참 지난 후 갈현이 입을 벌리자 그 수백 마리 벌들이 입안으로 날아 들어갔으며 곧 모두 밥알로 변했다. 그 당시 갈현을 찾아왔던 손님들이 체험한 신기한 도술들은 그야말로 이루다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부적으로 사당을 불사르다

한 번은 갈현이 수레를 타고 외출하였다. 어느 사당(神廟) 앞을 지나가는데 한 나그네가 갈현에게 말했다. “무릇 이 사당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백보 밖에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야하며 이 사당을 통과해서 백보를 걷고 난 후에 수레나 말을 타야 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재앙을 당한다.”라고 경고했다. 갈현은 그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수레에서 내리지 않았다. 갈현이 탄 마차가 사당을 통과하는데 큰 바람이 갑자기 몰려오고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자 수행하던 자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갈현은 크게 노하여 “이 사악한 귀신이 어찌 이리도 대담한가?” 일갈하면서 손을 들어 올리자 순간 큰 바람이 멈추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부록(符菉) 한 부를 꺼내 사당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러자 벽력 같은 소리가 나면서 그 사당은 불에 타서 사라졌다. 

 

 

 ⓒ 삽화 박영철

뱀이 변한 요녀

갈현이 어느 날 화양(華陽) 지방을 경유하다가 숲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수레를 세우고 가던 길을 멈췄다.수행원들에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 변신술을 사용하여 ‘밭가는 소를 끄는 농부’로 변신했다. 그때 그 숲속에는 선비 한 사람이 산보하고 있었다.

농부로 변신한 갈현은 그 선비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 “젊은 선비 당신은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나왔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곳에 머무르며 떠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그 젊은 선비가 머뭇거리면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갈현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이곳을 꿈에서 바라던 곳(溫柔鄕)이라 여겨 차마 떠나지 못하는가?”라고 했다.

이어서 갈현은 정색하고서 “내가 당신에게 알려 주겠다. 당신 젊은 선비를 유혹하여 꼬드긴 그 미인은 사실 요망한 뱀의 화신이다. 최근 그 요망한 뱀에게 잡아먹힌 나그네가 이미 셀 수 없이 많다. 당신이 내 말을 못 믿겠으면 그 미인이 사는 집 뒤편의 마른 우물을 한번 살펴보고, 다시 그 여자 집 문 밖에서 집안을 몰래 엿보아라.”라고 알려 주었다.

그 선비는 갈현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숲속의 그 여자 집 뒤로 돌아갔다. 집 뒤편의 마른 우물 안을 내려다보니 말 그대로 백골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또 문틈을 통해 집안을 살펴보니 침상위에는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 선비가 줄행랑을 치자, 그 커다란 뱀이 그를 쫒아왔다. 바야흐로 큰 뱀이 혀를 널름거리면서 그 선비를 막 집어삼키려고 할 때 갈현이 나타났다. 그는 “이 요괴가 심히 대담하구나!”하면서 크게 사자후를 한번 토했다. 그 큰 뱀은 그 한 소리에 깜짝 놀라 순간 몸이 뻣뻣해졌다. 바로 그때 갈현이 칼을 날려 뱀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부적 하나를 꺼내어 그 젊은 선비에게 먹으라 하였다. 선비가 부적을 먹더니  갑자기 입안에서 지렁이, 개구리, 두꺼비 등을 토해냈다. 갈현 덕분에 그 젊은 선비는 목숨을 부지하였다.

 

신발을 선물한 자매(姉妹)

갈현은 일찍이 형문(荊門)지역 자개산(紫盖山) 속 깊은 산골에서 수련한 적이 있었다. 당시는 바야흐로 땅도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인데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 추위 속에 갈현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에 옷 또한 헤져 맨살이 드러날 지경이었다.

이웃에 굴(屈)씨 성의 두 자매가 살고 있었다. 성품이 착한 자매는 이를 보고 차마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어서 밤을 꼬박 새워 신발을 만들었다. 이튿날 새벽, 그녀들은 갈현에게 신발을 전하러 갔는데 갈현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다만 책상 위에는 금단(金丹) 한 알이 놓여 있었다. 그녀들은 이 단약을 나눠 먹은 후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름도 없어졌다. 고요함을 좋아하고 번거로움을 피하여 나중에 두 자매는 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어 다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갈현에 대한 이런 일화들이 사천(四川) 지방에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잊혀지고 지금은 극소수의 일화만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 삽화 박영철

오나라 손권의 초청

갈현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남쪽 오나라 손권도 이를 알게 되었다. 손권은 갈현을 오나라 수도, 건업(建業)으로 초청해서 빈객의 예에 따라 대접하였다. 하루는 손권과 갈현이 높은 누각에 올라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멀리 눈길이 닿는 곳에 한 무리 사람들이 토지신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기우제를 지내고 있었다.

손권은 백성들의 기우제(祈雨祭) 현장을 가리키면서 갈현에게 “갈선생님! 저기 백성들이 가뭄이 오래되어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선생께서 저들을 위해 비가 오도록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하며 요청했다.

이에 갈현은 흔쾌히 대답하면서 그 자리에서 부적 하나를 썼다. 사람들에게 부적을 주면서 토지신 사당에서 불사르게 하였다. 부적을 막 불사르고 나자, 갑자기 바람이 불고 뇌성이 치기 시작하면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왔다.

천지가 순식간에 칠흑같이 어두워지더니 물을 퍼붓듯이 큰 비가 내렸다. 장대같은 빗줄기가 목마른 대지를 흠뻑 적시자 말라 비틀어졌던 벼이삭들이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파도를 밟으며 걸어와

어느 날 손권과 갈현은 함께 양자강에서 작은 배로 나누어 타고 유람을 하였다. 무리지어 움직이는 배가 강 중류쯤 닿았을 때, 갑자기 돌풍이 휘몰아쳐 왔다. 거대한 파도가 일면서 많은 배를 뒤집어 버렸다. 갈현이 탄 작은 배도 실종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손권은 “뜻하지 않은 풍랑에 이렇게 도술이 정심한 선인도 수장되는 재앙을 면할 수 없단 말인가?”하며 탄식했다. 그는 풍랑에 무사한 배들을 강가로 집결시켜 정박하고, 사람들을 시켜 갈현의 생사여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첫날 하루 종일 찾았으나 성과가이 없었다. 그 다음날 손권이 갈현을 찾아보려고 막 배를 타고 사방을 살펴보고 있는데, 돌연 갈현이 앞쪽 강위에서 파도를 밟으면서 손권이 탄 배로 걸어오고 있었다.

술에 흠뻑 취한 듯 얼굴색이 불그레한 갈현이 손권에게 미안한 듯이 “어제는 전국시대 장군인 오자서(伍子胥)가 저를 초청해서 같이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폐하께서 궁궐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 누추한 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사오니 정말 송구할 뿐입니다!”

이에 손권은 살아있는 갈현을 보자 기뻐하며 “선생께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저는 기쁠 뿐입니다. 신령(오자서)의 초청을 받아 함께 술을 마셨다니 선생의 도덕(道德)이 높아서가 아니겠습니까?”

오나라 손권은 여러 차례 갈현의 신묘한 법술을 보고나자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심이 일었다. 이에 손권은 어느 하루 좋은 날을 택해 목욕재계하고 향을 사른 후, 갈현을 궁궐로 초대하였다. 그리고 성의를 다하여 간절히 도(道)를 물었다.

“저는 타고난 천품이 어리석고 어둡습니다. 대도의 심오한 이치(大法玄深之至理)를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신선에 관한 가르침(修仙)을 듣고자 하오니, 선생께서는 저에게 수련하여 신선이 되는(修煉成仙) 첩경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갈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권에게 답했다. “폐하께서 물으시니, 제가 어찌 신선술에 관해 숨길 수 있겠습니까?” 

 

 

ⓒ 삽화 박영철

대도(大道)와 가까우려면

오나라 손권이 갈현에게 신선술에 관해 간곡히 묻자, “‘진(眞)’을 수련해서 신선이 되고자 하는 것(修眞求仙)은 한 나라의 임금이 취미로 삼을 일이 아닙니다. 폐하는 나라의 임금으로서 우선적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것을 책무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 매일 모든 정사(政事)를 처리한 후에도 마음이 맑고 욕심을 적게 할 수 있다면 대도(大道)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손권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타고난 운명 때문에 임금이 되어 번거롭고도 겉만 번지르한 것에 빠져있는데 다행히 선생을 만났습니다. 선생에게서 지극히 이치에 맞고 가치있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땅히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궁궐을 떠나 와운암에서

가화(嘉禾) 2년(232) 정월 초하루, 갈현은 제자들과 마주앉아 담소하다가 세월이 덧없음을 탄식했다.
“폐하(오나라 손권)의 요청으로 한동안 성안에 머물렀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백발이 눈앞에 다가오는데도 깨닫지 못했다. 공덕(功德)을 비록 쌓았다고 하나 아직 금단(金丹)을 단련하여 이루지 못했다. 이제 더는 이곳에서 세월을 허송할 수 없다.”하며 결심을 굳히고 손권에게 이별을 고했다.

예전에 수도하던 강서지방 각조산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각조산 동쪽 봉우리에 도관을 세웠는데 이것이 ‘와운암’(臥雲庵)이다. 와운암 내에 법단을 세우고 조왕신을 모셨다. 일체 찾아오는 손님을 사절하였다.

오로지 한마음으로 구전금단(九轉金丹)을 수련했다. 와운암이 있는 산골짜기는 항상 상서로운 기운과 맑은 빛이 비쳤다고 전한다.

수련한 지 3년이 지나 갈현은 금단(金丹)을 이루었다. 그가 집 앞에 있는 연못인 ‘금사지’(金砂池)에서 금단을 씻는데 연못물이 돌연 용솟음치면서 끓어올랐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 금단은 화성(火性)이 너무 왕성하여 지금 곧 복용할 수 없다.”고 말하고 제단을 만들었다. 천지에 감사를 드리며 금단을 각조산 동쪽 절벽에 있는 석실에 보관했다. 나중에 천천히 금단을 복용하기로 했다.

지금도 각조산 동쪽 봉우리에 있는 ‘금사지’(金砂池)의 연못물은 여전히 끓어오르고 있다고 하며, 연못 밑의 금모래도 솟구쳐 오르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갈현이 금단을 씻으면서 남겨놓은 신비한 자취라고 전한다.

 

선약(仙藥)을 먹은 새가

갈현이 금단을 단련할 때 각조산 서쪽 봉우리 석벽 위에는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돌절구(石臼) 하나가 있었다.

그는 이 절구를 이용해서 선약(仙藥)을 제조했다. 이 절구에는 선약을 찧다가 남은 찌꺼기가 조금 있었다. 이곳을 날아가던 새 한 마리가 우연히 그 남은 선약을 쪼아 먹고는 이때부터 이 새는 장생불사했다고 전한다.

지금도 그곳에는 달이 밝고 청명한 밤이 되면 선약을 먹은 새가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새의 울음이 마치 돌절구에 약을 찧을 때 나는 절구질하는 소리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이 새를 ‘약 찧는 새’(搗藥鳥)라고 부른다.

 

 

ⓒ 삽화 박영철

타고 온 잉어가 바위로

동해 외진 곳에 살고 있는 신선 금고(琴高)가 갈현이 수련성취하여 득도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갈현을 축하해 주기 위해 잉어 한 쌍을 불러 등에 타고 동해를 출발하여 각조산으로 왔다.

갈현은 신선 금고와 함께 와운암에서 도담(道談)을 나누면서 서로 마음을 열고,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밤이 새는지 몰랐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채로 두 신선은 와운암에 걸린 구름 속에서 잠들었다.

신선 금고가 술에서 깨어나 동해로 돌아가려고 자신이 타고 온 잉어를 찾았으나 이미 돌로 변해 있었다.

갈현은 금고에게 선학(仙鶴) 한 쌍을 주어 타고 가게 했다.

지금까지도 각조산 동쪽 봉우리 한편에는 잉어형상을 한 돌이 놓여있다고 한다.

 

승천을 준비하다

적오(赤烏) 원년(238) 11월 1일 갈현이 각조산 동쪽 절벽 석실에 감추어 보관했던 금단(金丹)이 충분히 숙성된 것을 보고 와운암 뜰에 단(壇)을 쌓았다. 이 단을 ‘팔경단’(八景壇)이라고 한다.

그는 좋은 날을 택해 팔경단에 올라 하늘과 땅에 감사함을 아뢰었다. 3일간 제사를 정성스럽게 올린 후, 무릎을 꿇고 금단을 삼켰다.

금단을 삼킨 후 제자들에게 각종 도가경전과 부록 등을 나누어 주어 잘 간직하게 하면서 백일비승(白日飛昇)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

 

하늘로부터 선직(仙職)을

적오(赤烏) 7년 8월 15일 공중에서 홀연 맑고 깨끗한 선악(仙樂)이 울려 퍼졌다. 이때 오색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면서 선동(仙童), 선녀(仙女), 하늘나라 관리(靈官), 시위(侍衛) 등이 각종 깃발과 기치를 들고 천천히 내려왔다.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하늘의 사자인 비천신왕(飛天神王)이 기린이 끄는 새깃으로 만든 우차(羽車)를 타고 내려왔다.

갈현은 옥황상제가 조서를 내려 보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무릎을 꿇고 교지를 받을 준비를 하였다.

하늘의 비천신왕은 옥황상제의 조서를 펼쳐들고 읽어내려 갔다.

“학선제자(學仙弟子), 영보경록대법종사(靈寶經菉大法宗師) 갈현(葛玄)에게 칙명을 내린다. 너는 오로지 한 마음으로 지극히 도를 닦아,

도태(道胎)와 정기(精氣)를 잘 길렀다. 그간 고통에 빠진 원혼들도 잘 제도하였다. 그리고 신선의 선적(仙典)들을 잘 수집하였다.”

“쌓은 덕과 수행으로 이미 원만하였다. 이제 특별히 너에게 ‘태상옥경태극좌관선공’(太上玉京太極左官仙公)이라는 직함을 내리고 ‘3계6천제대마왕’(三界六天諸大魔王)들을 거느리게 한다. 오늘 정오에 백일비승하여 곧 바로 천궁(天宮)으로 오라.”

 

우화등선(羽化登仙)하다

이에 갈현은 하늘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조서를 받았다. 그리고 제자와 이웃에게 이별을 고하고, 각조산 동쪽에 있는 신선복을 갈아입는 ‘착의대’(着衣臺)에 올랐다. 선동, 선녀가 내려와 갈현이 옷을 갈아입도록 도와주었다.

몸에는 ‘이라복’(離羅服)을 입고, 머리에는 부용관(芙蓉冠)을 쓰고, 등 뒤에는 둥글고 빛나는 원광(圓光)을 지고,

손에는 직첩(玉簡)을 쥐고, 발에는 붉은 신발(朱履)을 신고, 허리에는 부딪치면 맑게 소리가 나는 옥노리개를 찼다.

하늘나라의 신선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새 깃으로 만든 우차(羽車)에 오르자, 앞뒤로 오색 깃발과 각종 부절(符節)들이 뒤따르고,

좌우에는 시종들이 호위했다.

상서로운 구름이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공중으로 올라가는 가운데 갈현이 탄 우차가 천천히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하자,

제자들과 이웃이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수레를 놓지 않았다.

갈현은 수레를 잠시 멈추고 오언시(五言詩) 3편을 지어주고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갔다.
갈현이 저술한 ‘도덕경서’(道德經序), ‘단곡복식방’(斷穀服食方) 3권, ‘입산정사경’(入山精思經) 19권 등이 전해져 온다.

숭녕(崇寧) 3년(1104) 송 휘종은 조서를 내려 ‘충응진인’(沖應眞人)으로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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