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언율시五言律詩로 된 ‘귀전원거歸田園居‘는 대학 다닐 때부터 읽기 시작하였지만 20년이 지난 현재에 읽어도 여전히 가슴을 울린다.
少無適俗韻 (소무적속운) 性本愛丘山 (성본애구산)
젊었을 때부터 세속이 맞지 않았고, 성품은 본래 산을 좋아하였다.
誤落塵網中 (오락진망중) 一去三十年 (일거삼십년)
잘못돼서 풍진세상으로 떨어져 일거에 삼십 년의 세월이 가버렸다.
羈鳥戀舊林 (혁조연구림) 池漁思故淵 (지어사고연)
새장에 갇힌 새는 숲을 그리워하고, 얕은 연못에 갇힌 고기는 원래 놀던 깊은 못을 생각한다.
開荒南野際 (개황남야제) 守拙歸園田 (수졸귀원전)
남쪽의 황무지를 일구면서 소박함을 지키기 위하여 전원으로 돌아왔다.
方宅十餘畝 (방택십여무) 草屋八九間 (초옥팔구간)
집은 십여 이랑에, 초옥은 팔구 칸이다.
楡柳蔭後첨 (유유음후첨) 挑李羅堂前 (도리나당전)
느릅나무 버드나무는 뒤편 처마를 덮었고, 복숭아 오얏나무는 집 앞에 무성하다.
曖曖遠人村 (애애원인촌) 依依墟里煙 (의의허리연)
마을은 멀리 어슴푸레하게 보이고, 굴뚝마다 연기는 솔솔 피어 오른다.
拘吠深巷中 (구폐심항중) 鷄鳴桑樹顚 (계명상수전)
동네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뽕나무 위에서는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戶庭無塵雜 (호정무진잡) 虛室有餘閒 (허실유여한)
집안에는 번잡한일 없고, 빈방에는 한가함만 있도다.
久在樊籠裏 (구재번농리) 復得返自然 (부득반자연)
오랜 세월 새장 속에 있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왔구나.
무려 1,600년 전에 지은 시이지만 21세기를 사는 도시의 봉급쟁이들에게 아직도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천 몇백 년의 역사는 지상의 모든 것을, 웅장한 대리석 신전까지도 폐허로 만들어 버리지만, 그 폐허 가운데서도 불변하는 인간의 소망이 존재한다.
그게 바로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욕구이자 본능이다. 자연으로 회귀. 고품질의 삶은 자연과 가깝게 사는 삶이다. 하지만 월급쟁이들의 생각은 항상 호구지책이라는 장벽에서 막혀버린다. 조직과 인간관계의 스트레스에 달달 볶이는 삶이지만, 먹고사는 방도를 생각하면 때려치울 수가 없다.
직장을 그만두면 뭘 먹고산단 말인가! 대책이 있는가. 맹자님 말씀에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놈의 항산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브레이크가 걸린다.
봉급쟁이로 살면서 어느 세월에 항산이 축적될 것인가. 항산을 마련하는 도중에 결국 늙고 병들어서 인생 마감하는 것 아닌가. 설령 마련이 된다 하더라도 그때 가면 시간이 기다려 주질 않는다. 이미 늙어 버렸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행복의 조건을 추적해 들어가면 돈과 시간으로 압축된다. 이념, 가치와 같은 형이상은 빼고, 눈에 보이는 형이하만 따져보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돈과 시간, 이것이 문제이다. 한국사회를 둘러보면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그걸 유지하고 확장하느라고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린다.
시간과 일의 노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들 보기에는 성공한 인생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도대체 여유가 없다.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돈이 없는 사람은 없어서 시달린다. 부와 명성을 갖춘 사람은 시간이 없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생활고에 부대낀다.
행복을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배부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돈과 시간을 모두 거머쥔 행운아가 몇이나 될 것인가. 세계의 실상은 고금을 막론하고 돈과 시간의 노예살이가 아니었던가. 두 개를 모두 가지기란 정말 어려운 법. 이러한 현실을 눈치채고 내리는 타협안이 ‘밥을 굶지 않을 정도의 백수‘이다.
‘밥을 굶지 않을 정도의 백수가 되고 싶다‘는 서원誓願은 40대 후반의 어느 주류 일간지 사회부장과 점심 먹으면서 들은 이야기이다. 주류 일간지 사회부장 정도면 한국사회에서 못 나가는 인생도 아닐 텐데, 얼마나 조직생활의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면 이런 이야기를 다 하겠는가. 그것도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
과연 밥 굶지 않을 정도의 백수는 실천가능한 방안인가. 어렵다. 직장 때려치우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귀거래사는 자청해서 ‘밥이나 굶지 않는 백수‘가 되는 길이나, 그 결단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도시생활과 월급쟁이라고 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거스르는 반역의 삶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귀거래사는 반역의 삶이자, 방외지사方外之士의 삶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세속을 벗어나 명산대천을 순례하는 도꾼들이 방외지사였지만, 지금은 아파트와 매달 나오는 월급, 그리고 조직을 벗어나서 사는 사람이라면 가히 방외지사라 부를 수 있다.
전남 나주시 금천면에 있는 죽설헌竹雪軒을 찾아가는 이유는 방외지사의 삶을 선택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서이다. 강릉의 오죽헌에는 율곡이 살았지만 나주의 죽설헌에는 시원枾園 박태후(朴太侯:1955~현재)라는 인물이 살고 있다. 선례가 있으면 결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귀거래사를 감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결단을 내린 모델을 많이 접해야 한다. 선지자들의 경험담을 많이 들어서 그 노하우를 섭취할 필요가 있다. 선례는 남들이 쉽게 가지 않는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품게 되는 두려움을 없애주는 효과가 있다.
시원은 농촌지도소에서 20년을 근무하며 공무원 생활을 했다. 20년이면 연금이 나오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이제나저제나 연금이 나올 시점만을 노심초사 기다리다가 드디어 20년이 되는 42세가 되자 과감하게 직장을 그만 두고 시골로 돌아왔다. 그때가 96년이다. 왜 잘 나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촌으로 들어가느냐고 모두들 말렸지만, 십 몇 년 동안 칼을(?)갈아온 결심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돌아온 나주시 금천면은 그의 고향이기도 하다. 나주역에서 승용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나주시 근교이다. 나주 일대는 야트막한 구릉으로 이루어진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지형으로, 험악하거나 날카로운 바위산이 주변에 보이지 않는다. 포근하고 편안하다. 옛사람들은 나주의 산세가 지닌 그 포근함을 비단 라羅 자로 표현하였다. 나주羅州라고 이름 붙인 까닭도 포근한 야산들로 이루어진 산세에서 연유한 것이다.
야트막한 구릉지대는 과수원이 들어서기에 딱 좋은 지형이다. 나주 일대에는 과수원이 많이 자리잡고 있다. 금천면은 과수원 중에서도 배 밭이 유명하다. 나주 하면 배가 유명한데, 나주에서도 배가 제일 먼저 재배되기 시작한 곳이 바로 금천金川이다. 나주 배의 발원지라고 알려져 있다. 왜정 때 일본사람들이 금천에 처음 배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배가 잘되는 조건은 땅이 기름진 충적토양이어야 한다는 점, 내륙지방이어서 바람이 잘 불지 않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강우량이 충분해야 하는 점인데, 나주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일본사람들은 왜정 때 이미 이러한 조건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배를 심기 시작한 것이다.
시원이 사는 죽설헌은 나주에서 영암 월출산 가는 국도로 10분 정도 가다가 ‘금천‘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옆길로 빠져야 한다. 금천의 야트막한 구릉지대의 과수원 길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서 1km 정도 가면 저수지가 나오고, 그 저수지 둑길을 끼고 돌면 죽설헌이 나타난다.
시원枾園이 사는 죽설헌은 숲 속에 있는 시골집이다. 전체 대지는 3천 평. 소나무, 대나무, 배나무 등 각종 과일나무를 합쳐서 총 150종의 나무가 우거져 있는 작은 수목원에 가깝다. 입구에서 살림집까지 들어가는 길은 S자로 돌아서 150m 정도 꼬불꼬불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그 들어가는 길이 참으로 유현하고 그윽한 느낌을 준다. 길옆에 켜켜이 쌓여 있는 기왓장들이 마치 돌담처럼 느껴져 방문객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준다.
그 기왓장 쌓여 있는 지점을 돌아서 우측으로 통과하면 다시 탱자나무와 꽝꽝나무로 이루어진 길을 30m 정도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좌측에는 탱자나무가, 우측에는 꽝꽝나무가 가슴높이로 빽빽하게 도열해 있는 길이다. 좌탱자 우꽝꽝이다. 꽝꽝나무는 상록활엽 관목으로, 남부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정원수이기도 하다. 잘 가꾸어진 탱자나무와 꽝꽝나무 사이의 흙 길을 걸어가다 보면 머리가 시원해진다.
이 탐스런 꽝꽝나무들은 집주인인 시원이 고등학교(원예고등학교) 재학 중에 심었다는, 그러니까 30년 간 키운 나무들이다. 30년의 애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여기를 통과해서 좌측으로 꺾으면 살림집이다.
시골의 평범한 단층 벽돌집으로,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우측 동산은 대나무들이 가득한 대숲이다. 현관 앞면이 온통 담쟁이 넝쿨로 둘러싸여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눈에 띄는 부분이 현관 바닥에 길게 깔린 마루이다. 아파트에 까는 매끈한 나무마루가 아니라 울퉁불퉁 질감이 느껴지는 투박한 마루이다.
폐교된 시골 초등학교의 교실에 깔려 있던 마루를 싼값에 구입하여 주인부부가 직접 손으로 다듬은 마루이다. 대패와 사포로 한 달 가까이 다듬었다고 하는데, 발을 디딜 때마다 투박한 나무바닥의 질감이 전달된다. 나무바닥 끝자락에 있는 벽난로는, 집 근처에 뒹구는 장작 몇 개 주워다가 집어넣으면 충분한 화력을 일으킨다. 고구마 구워먹는 용도로는 최적이다. 작설차를 한잔하고 나서 출출해질 때쯤, 벽난로 숯불에 꼬불쳐 놓은 고구마가 기다린다.
방은 모두 네 개. 그림 그릴 때 쓰는 방이 하나 따로 있다. 이 방은 한쪽 벽면이 전부 유리이다. 유리 너머로는 곧바로 푸른 대숲이다. 방에 앉아 있으면 쭉쭉 뻗은 대나무 그늘이 방안으로까지 들어온다. 앉아서 감상하다가 누워서 보다가 뒹굴방굴 하면서 대나무들을 쳐다본다.
뒹굴방굴 하는 즐거움이여! 대나무를 보다 보니 왕유(王維:699~761)가 생각난다. 그가 자신의 별장이던 망천장輞川莊 근처의 죽리관竹里館에서 대숲에 앉아 읊은 시가 있기 때문이다.
獨坐幽篁裏 (독좌유황리) 彈琴復長嘯 (탄금부장소)
홀로 그윽한 대나무 숲에 앉아 거문고를 타면서 길게 휘파람 소리 내어 본다.
深林人不知 (심림인부지) 明月來相照 (명월래상조)
깊은 숲 속이라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만 밝은 달이 찾아와 비춰주는 구나.
벽 유리 너머로 대숲을 보는 심정은 죽리관에 앉아 있던 왕유가 부럽지 않다. 왕유도 방안에 편안하게 누워서 투명한 유리 너머로 대숲을 바라보는 체험은 못하였을 테니까.
뒹굴방굴 하면서 감상하는 일이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하면 현관문을 나와서 직접 대나무 숲으로 산책을 나간다.
몸도 서늘하고 마음도 서늘해진다. 호흡도 깊어진다. 글쓰면서 머리가 상기上氣될 때 대숲으로 들어오면 내려갈 것 같다.
대숲을 걷다가 집 뒤편의 밭으로 나가 본다. 봉긋한 구릉 사이로 배나무 밭이 널려 있다. 어디 배나무뿐인가!
사과나무, 감나무, 상추밭을 비롯하여 매화나무, 복숭아나무, 이름도 모르는 각종 들꽃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밭 가운데 조성한 연못에는 연꽃들이 자란다. 노란 수선화와 보라색 창포가 꽃을 피우려고 한다.
점심때면 슬리퍼 신고 밭에 나와 상추를 뜯는다. 몇 포기만 뜯어와서 된장만 얹어놓으면 너댓 명 식사거리로 충분하다.
고구마와 감자도 심어져 있다. 발 아래를 굽어보면 먹을 것은 지천으로 널려 있다.
한두 시간 몸만 꼼지락거리면 밥 굶을 염려는 없다. 밥 굶지 않으면서 이 풍광을 즐기며 사는 팔자는 어떤 팔자란 말인가.
상팔자가 틀림없도다! 먹고살기 위해서 매일매일 전투를 치러야만 하는 인간세에서,
이 집주인은 전생에 무슨 복을 지어놓아서 이렇게 청복淸福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단 말인가!
눈부신 이유는 바로 서민의 생활과 아름다움이 결합했다는 데 있다.
첫째, 본인이 원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점이다.
농촌지도소라는 직장에서 20년간 근무하다가 스스로 그만둔 것이 42세. 사표를 쓸 무렵 과장 대우를 받는 위치라서 직위도 괜찮았고, 그만하면 봉급도 먹고살 만하였다. 속된 표현으로 ‘철밥통‘이라 할 만큼 안정된 직장이었는데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물론 이는 일조일석에 진행된 돌발행동이 아니라 10년 이상 다짐하고 가꾸어 온 신념의 소산이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아도 자유에 대한 염원만큼, 그에 비례하여 치밀한 준비가 있지 않았던가. ‘출퇴근이 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전원에서 살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한 생각(一心)을 그는 실천에 옮겼다. 결단의 밑바탕을 추적하면 거기에 사고의 축적이 진행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고, 그 사고의 축적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제일 첫머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 생각이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 생각은 번쩍 하는 라이터의 스파크와 같다.
둘째, 죽설헌은 서민이 다듬어 놓은 집이라는 사실이다. 고위관료가 정년퇴직해서 유유자적하는 집이 아니다. 돈 많은 재력가가 지은 전원주택도 아니다.
그는 가난한 시골 소년으로 성장하였고, 수업료를 면제받으며 원예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말단 공무원 생활부터 시작했다.
그런 사람이 지은 집이다. 부부가 근검 절약하는 생활 끝에 만들어 놓은 죽설헌은 아름다운 집이기는 하지만 부티가 나는 집은 아니다. 이 점이 필자를 심정적으로 편하게 만들었다. 부자가 전망 좋은 명당에 아름답게 지어놓은 별장은 전국에 많이 있다. 그런 별장이나 저택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 하부구조에는 돈이 뒷받침되어 있다. 나는 몇 년 전 서울 성북동의 어느 대기업 회장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수목과 화초들이 잘 다듬어진 녹색의 정원을 둘러보면서 그 격조 어린 아름다움에 몇 번이나 감탄하였지만, 월급쟁이 서민들은 감히 모방할 수 없는 정원이었다. 돈 없는 서민에겐 실현 불가능한 모델일 뿐이었다. 죽설헌이 눈부신 이유는 재력과 아름다움의 결합이 아니라, 돈 없는 서민과 아름다움이 결합된 사례이기 때문이다. 돈이 그렇게 많지 않아도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 시원의 삶은 도시 월급쟁이들에게 한 가닥 비전을 제시해주고 있다.
셋째, 죽설헌은 오랜 시간 가꾸어온 집이다.
원래 이 집은 시원 자신이 출생한 원초적인(?) 집이기도 하다. 그는 허름한 시골집터에다 30년의 세월 동안 나무를 심고 화초를 가꾸어 왔다. 이 집에 심어진 과실수, 나무, 화초의 종류만 해도 150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이쯤 되면 정원의 개념을 벗어난다. 작은 수목원에 가깝다. 꽝꽝나무는 30년, 대나무는 25년 전에 시원이 직접 심었다.
단풍나무는 장성 백양사白羊寺가 유명한데, 그 시절 백양사 단풍나무 종자를 받아서 심어놓은 것이 이렇게 컸다. 해남 대흥사大興寺에서는 동백나무와 비자나무 종자를 채취하여 심어 놓았다.
나주 불회사佛會寺에서는 호두나무와 산벚나무 종자를 채취하여 심었다. 30년 전만 해도 불회사 대웅전 뒤에는 두 아름이나 되는 수백 년 된 호두나무가 있었는데, 몇 년 전에 확장공사를 하면서 그만 잘라 버렸다. 그러니 죽설헌의 호두나무가 사라진 불회사 호두나무의 명맥을 잇고 있는 셈이다.
비자나무나 동백나무는 빨리 자라는 나무가 아니다. 성장속도가 느려서 최소한 20년은 성장한 연후에야 볼품이 있다고 한다. 30년 전의 그 열정과 정성이 오늘 꽃을 피우고 있다. 30년이란 세월을 두고 주인이 직접 가꾸어왔기 때문에 모든 풍경이 자연스럽고 눈에 익다. 오랫동안 숙성된 술에서 풍기는 친근함과 비슷하다고 할까.
넷째, 이 집은 나주 일대의 살롱이다.
집주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남도는 원래 풍류를 아는 고장이 아니던가. 계산풍류溪山風流를 즐기면서 호남가단湖南歌團을 배출했던 담양 소쇄원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 16세기 계산을 즐기던 풍류정신의 한 맥이 21세기에 죽설헌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어찌되었든 간에 호남문화 저변에 침전되어 있는 낭만적인 여유, 그 정신의 여유가 수백 년을 뛰어넘어 죽설헌으로 격세유전隔世遺傳 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이 집에는 호남 일대의 화가, 시인, 문화계 인사들이 자주 방문해서 놀다가곤 한다. 뿐만 아니다. 집 자체가 분위기 있다보니 잡지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다. 『행복이 가득한 집』 『공간사랑』 『주택저널』 등에서 다뤄진 적이 있다.
주로 집의 구조와 정원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한 이 잡지들을 본 독자들이, 강원도에서 찾아오기도 하고 경상도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뉴질랜드 대사, 일본 영사, 유럽에서 온 교환교수들도 이 집을 찾는 손님들이다. 광주일대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가끔 들러서 한국적 정취를 만끽하다 가곤 한다. 문화예술계 인사로는 가수 장사익, 피아노의 임동창, 섬진강 시인 김용택 등이 한 번씩 들르는 멤버라고 한다.
필자가 죽설헌을 알게 된 계기는 전남 장성에 사는 향토사학자 강기욱(43) 선생을 통해서이다. 그는 직업을 거부한 방사方士이지만 3천500평이나 되는 잔디 깔린 고택에서 사는 팔자이다. 비록 자기 집이 아니고 비어 있는 남의 집 고택을 관리해 주면서 살지만 얼굴에는 항상 미소와 여유가 충만하다. 무직無職의 삶이지만 그는 여의도 증권가에서 고액연봉 받는 펀드매니저들이 흉내낼 수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방사로서 자족하며 사는 강선생을 좋아하다 보니, 그가 한 번씩 놀러간다는 죽설헌을 소개받게 되었던 것이다. 유유상종이라고, 방사들은 방사들끼리 놀기 마련이다. 전남에는 이처럼 전원에서 한가하게 사는 방사들끼리 통하는 커넥션이 있다고 귀띔한다.
그 살롱 중의 하나가 죽설헌이다. 한국에는 룸살롱은 많지만 문화인들이 모여서 담소할 수 있는 살롱은 드물다. 돈버는 이야기, 부동산 증권, 술 먹는 일 빼고는 성인문화가 없다. 예술을 논하고 역사와 철학을 논의할 수 있는 문화적 여유가 너무나 없다. 프랑스 혁명의 단초가 살롱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사회의 질적인 변화는 국민들 의식의 전환에 달려 있고, 의식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장소로서 살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담론의 쾌감을 ‘엔조이‘ 할 수 있는 공간 말이다. 이제 그만하면 룸살롱에서 양주는 먹을 만큼 먹지 않았는가! 그러니 룸살롱에서 진짜 살롱으로 자리를 옮겨보자. 제대로 된 살롱에서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안주 삼아 삶의 무상함을 이야기 해볼 때도 되었다.
시간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면서 죽설헌은 이러한 차원의 살롱이 되어가는 중이다.
어쨌거나 나는 죽설헌의 삶이 부럽다. 서울에서 잘 나간다는 사람들의 인생을 보아도 별로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나주 시골 방외일사方外逸士의 사는 방식이 한없이 부럽게 느껴진다. 타인의 삶에 대한 감탄은 곧잘 자신의 신세한탄으로 이어진다.
‘나는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단 말인가!‘ 나는 어떻게 자신의 삶을 이토록 알뜰하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었는지, 집주인인 시원 선생으로부터 그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는 키도 과히 크지 않고 마른 체격이나, 강단진 인상이다. 체격은 가냘프지만 손을 보니 밭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군살이 박혀 있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논하는 일종의 살롱이 된 죽설헌. 그곳에서의 삶이 부러워진 나는 주인 박태후 선생을 만나 물었다. 그의 귀거래사에 대한 자초지종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 전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 번 해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 하지만 출퇴근이 있는 직장생활에서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수가 없다. 출퇴근이 없는 생활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시간 나면 사군자를 그렸다. 직장 다니면서 85년부터 광주대학교의 산업디자인학과(야간)에 편입하고, 88년에 조선대 미대 대학원에 다닌 것도 그림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틈틈이 그린 그림이 82년 전남미전과 85년 국전에 입상을 하였다. 용기를 얻었다. 본격적으로 한번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연금이 대안이었다. 공무원 경력 20년을 채우면 그때부터 연금이 나온다. 내 경우 나이 42세가 되는 96년까지 근무하면 경력 20년에 해당되었다. 때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나는 20년이 되기 3년 전부터는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시계바늘이 더디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군대에서 만기제대를 두세 달 앞두고 있을 때 느끼는 지루함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때로는 초조하기도 하였다. 혹시 연금법이 바뀌어서 20년에서 25년으로 연장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 아닌가 걱정까지 할 정도였다. 정확하게 20년을 채우는 시점에 사표를 던졌다. 평소 나하고 같이 귀거래사를 하겠다고 약속한 동료와 후배들이 몇 명 있었지만, 막상 20년이 되었어도 그들은 사표를 내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근무하고 있다. 실행에 옮긴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직장 그만두는 일을 엄청난 공포로 여긴 것 같다. 아마도 굶어죽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100이면 100명 모두 말렸다. 나도 약간의 두려움은 있었다. 하지만 그만두고 나니까 새로운 차원의 생활이 열렸다. 그 새로운 차원의 생활이란 시야가 넓어짐을 의미한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 만나는 사람의 계층이 달라진다. 조직에 있을 때는 그 세계가 전부인 줄 아는데, 나와 보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결단이 중요하다.
옆에 앉아 있던 부인 김춘란(1955년생)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처음부터 찬성하지는 않았다. 매일 집에서 놀면 어떻게 되는가 걱정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 남편의 결심을 지켜보아 왔기 때문에 나중에는 이해하는 방향으로 갔다. 연금 나오면 쌀은 살 수 있다고 보았다. 밥은 굶지 않으니까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소신을 이해해 주었다. 시집올 때부터 이곳에서 생활을 해온 탓에 시골생활에 익숙해 있었다.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지금까지 매월 90만 원 정도 받았다. 수령한 지 5년이 넘어가는 올해부터는 금액이 13만 원 정도 올라서 100만 원이 조금 넘는다. 인상돼서 기분이 좋다. 인상된 연금을 받은 날 기념으로 남편하고 같이 읍내의 맥주집에서 술 한 잔 하였다.
충분히 가능하다. 실제로는 남는다. 조금씩 저축도 한다. 왜냐하면 거의 자급자족으로 식생활을 하기 때문에 들어갈 돈이 별로 없다. 전화요금, 의료보험, 전기요금과 같은 공과금만 아니면 시골생활에서 들어갈 돈은 거의 없다. 또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직접 생산한 과일과 채소들을 선물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 손님들도 우리에게 선물을 사온다. 고기도 사오고 생활용품도 선물한다. 어떻게 보면 물물교환이기도 하다.
남편 박태후 씨에게 다시 질문하였다.
딸만 둘이다. 고등학교까지 이곳 시골에서 다녔다. 중, 고등학교는 자연을 접하는 시골에서 다녀야 좋다. 도시보다 시골생활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을 가까이 접하니까 감성이 열린다. 시골이니까 물론 과외비는 필요 없었다. 현재 큰딸은 전남대 미대 3학년이고, 작은딸은 1학년 재학중이다. 애들이 아르바이트도 해서 자기들 용돈은 충당한다. 등록금만 조금 보태준다. 국립대학이라 큰돈은 안 들어간다.
도시와 시골은 환율이 다르다고 보면 맞다. 도시 사람들이 전원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양손에 떡 들려는 욕심 탓이다.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 한다. 도시가 주는 편리함도 누리면서 전원의 한가함도 즐기려고 하는 건 모순이다. 특히 자녀교육 부분에서 결정적으로 막힌다. 시골에 오면 자식농사 버리는 줄 아는데 그것이 사람들을 전원으로 오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100평 정도의 텃밭을 가지고 있으면 4인 가족의 먹거리는 충분하다. 규모가 작은 텃밭일수록 병충해가 적다. 농약이 적게 들어간다. 초보자들에게는 2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하라고 권하고 싶다. 비닐하우스는 일조량과 강우량 등을 인위적으로 컨트롤 할 수 있다. 20평이면 상추, 열무, 배추, 쑥갓, 치커리, 딸기, 파, 마늘, 고추 등등을 재배할 수 있다. 4인 가족 먹고 남는다. 농사에 익숙해지면 1천 평 정도의 대지가 이상적이다. 유실수를 심는 면적이 500평, 그 밖의 500평 면적은 집터, 창고, 연못, 화초, 텃밭으로 활용할 수 있다.
늦잠 자는 재미가 가장 크다. 해가 중천에 뜬 아침 10시까지 방에서 뭉그적거릴 때 가장 행복감을 느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거 큰 즐거움이다. 간섭받지 않고 시간을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다. 하루종일 차를 타고 다녀도 피곤하지 않았다.
햇볕이 약할 때, 아침에 1시간 저녁 무렵에 1시간을 표준으로 정해 놓았다. 물론 더 할 때도 있지만, 대개 이 정도만 한다. 돈을 벌려고 농사일을 하는 게 아니니까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나름대로 생활규칙도 정해 놓았다. 홀수 날은 아침에 운동한다. 짝수 날은 집안 정원을 돌본다. 그 외의 시간은 되도록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내 인생의 양대 축은 나무와 그림이다.
농업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학생들 교과과정에도 국, 영, 수와 같은 필수과목에 농업을 추가해야 한다. 또 한가지는 정신적인 부분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가꾸어 놓은 곳을 보면 좋아하고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본인이 가꾸기는 싫어한다. 이게 모순이다. 자기가 들어가서 가꾸어야 한다. 완성시키는 그 과정이 재미있고 소중한 경험이다. 예를 들면 시골생활에서 힘든 부분이 풀과의 전쟁이다. 아무리 베어내도 또 나온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해보면 풀 자체도 아름답다. 사계절 철 따라 서로 다른 풀들이 자란다. 불가피한 경우만 아니면 풀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 자연을 닮아야 한다. 노자가 말하는 유위有爲에서 무위無爲로의 전환이란 이런 태도가 아닌가 싶다.
우리사회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 즉 각종 단체장, 판검사, 병원장 같은 사람들이 와서 하는 한결같은 이야기가 ‘내가 이렇게 살고 싶었는데, 시원 선생이 살고 있구만!‘이다. 그러면 나는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열심히 벌었으니까 돈 벌 생각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평상시에 하고 싶었던 일을 하라. 그게 성공하던 못하던, 그 과정을 엔조이하면 되지 않느냐.‘ 그러나 실천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하였다. 한 발만 옆으로 물러나도 실상이 바로 보일 텐데 한 발도 물러나지를 못한다. 인간은 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인 것 같다.
이 집은 85년도 농촌주택개량자금을 지원 받아서 지었다. 좋은 집이 아니다. 당시 700만원을 장기저리로 융자받아서 지은 집이다. 그 후로 여유가 생길 때마다 조금씩 고쳤다. 남자로 태어나서 자기 집은 꼭 한 번 직접 지어볼 필요가 있다. 이 집의 설계는 모두 내가 하였다. 줄자를 가지고 다니면서 다른 집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어떻게 하면 돈을 적게 들이고 집을 지을 것인가 하는 고민의 결과였다. 처음에는 내 고집대로 하였는데, 지어놓고 보니 집사람 생각을 많이 반영할 걸 하는 후회가 든다.
집이라는 것은 여자들이 더 많이 이용하니까 여자들이 편리한 방향으로 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바닥의 마루는 학교 교실의 나무바닥이었다. 왜정 때 지은 학교의 교실바닥이라서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는 스기나무를 사용하였다. 지금은 이런 나무 없다. 값이 싸길래 이걸 구입해서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때에 절은 부분을 전기대패로 일일이 밀어냈다. 그 다음에 무광라카 칠을 하고 사포로 다듬어서 다시 라카칠을 하였다. 이 과정을 네댓 번 반복해서 이 수준이 되었다. 나무바닥 하면서 집사람하고 먼지 많이 먹었다.
한국의 토속적인 정원은 장독대와 상추밭으로 보아야 한다. 그 특징은 자연스러움이다. 인위적인 손질을 별로 하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에다가 사람이 그냥 들어가서 살기만 하면 된다. 요즘 조성되어 있는 한국 주택의 정원은 거의 일본식이다. 가위를 많이 사용해서 다듬은 나무들은 일본식이다. 자연스러움을 살리는 정원,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듯한 정원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정원이다. 그런 점에서 죽설헌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다시 조경을 시작한다면 현재와는 다른 형태로 시도하겠다. 2,30년 전 정원을 처음 가꿀 때만 하더라도 자연스러움이 주는 멋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견문도 넓히고 나이가 들면서 그것을 깨달았다.
꽝꽝나무는 그때 꺽꽃이 한 것이다. 전정은 어려운 기술이었다. 나무의 성장생태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서 가지를 잘라줘야 하는 작업이다. 아무렇게나 자르면 나무를 버린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나는 전정을 마스터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으로서는 희귀한 일이었다. 소질이 약간 있었지 않나 싶다. 그때는 꽃나무를 재배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히말라야시다가 외국에서 막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이다. 시중에서 고가로 거래되는 것을 보고 히말라야시다를 재배하면 돈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이 나무의 씨가 아주 고가였다. 1되(2리터)에 당시 돈으로 3만4000원이었다. 그때 우리 집 전 재산이 논 두 마지기였다. 누님이 공장에 다니면서 근근히 모아놓은 논이었다. 나는 나무 씨를 사기 위한 일념으로 전재산인 논 두 마지기를 겁 없이 팔았다. 그걸로 히말라야시다 씨 석 되를 살수 있었다. 그 씨를 배 밭에 모두 뿌렸다. 그러나 5,6년 후에 묘목을 팔았지만 헐값에 팔아야만 하였다.
지금 죽설헌에 남아 있는 히말라야시다 몇 그루는 그 시절 심었던 것이다.
고교 졸업 후 광주교대 입학시험을 보았지만 보기 좋게 낙방하였다. 아마 교대에 합격하였더라면 인생진로가 확 달라졌을 것이다. 군대 가기 전 1년 정도 광주법원에서 정원사를 하였다. 시간이 생기자 의재 허백련 선생 제자 되는 분에게 6개월 정도 사군자四君子를 배웠다. 낮에는 정원사 일 하고 밤에는 그림 그리는 게 좋았다. 그리고 군대를 갔다. 전경으로 근무하면서 방통대를 졸업하였고, 제대 말년에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다. 발령 나기 전까지 다시 1년 정도 화실을 다녔다.
80년에 공무원 발령이 났다. ‘행정직‘과 ‘지도직‘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승진이 잘되는 행정직을 선호하였지만, 나는 남들이 기피하는 지도직을 선택하였다. 새마을 운동의 영향으로 농민들을 지도해서 농촌을 잘 살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다들 철없는 선택이라고 나무랐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지도직으로 오길 잘했다. 행정직으로 갔더라면 인생이 바뀌었을 게 틀림없다. 첫 발령지는 나주농촌지도소였다. 1년 정도 근무하다가 82년부터 광주농촌지도소로 옮겼다. 96년 5월에 그만둘 때까지 여기에서 근무하였다. 농업에 대한 실무적인 지식은 농촌지도소에 근무하면서 익혔다고 보아야 한다.
복숭아만 해도 세 종류가 있다. 조생종, 중생종, 만생종이다. 2, 30일 간격으로 조생종이 떨어지기 전에 중생종이 나오고, 이어서 만생종이 나온다. 조생종의 맛은 상큼하고 만생종으로 갈수록 맛이 깊어진다. 조생종은 저장이 어렵고 만생종은 저장이 잘된다. 살구, 복숭아, 자두, 포도, 사과, 밤, 감 등도 모두 조, 중, 만생종으로 고루 갖추어져 있어 돌아가며 맛을 볼 수 있다. 열매가 열리는 첫 시기는 5월이다. 5월초에 딸기와 양앵두가 나온다.
5월 중순에는 보리수, 6월 초순에는 매실과 버찌가, 그리고 6월말에는 자두, 살구, 복숭아가 나온다. 7월초에는 포도, 8월 초순에는 단감, 8월말에는 무화과, 9월초에는 배, 10월에는 밤과 홍시감이 나온다. 줄줄이 사탕이다. 죽설헌에는 홍시감이 탐스럽게 열린다. 시원枾園이라는 호號도 ‘감나무 동산‘이라는 뜻이다.
죽설헌에는 특히 유실수가 많다. 시원에 의하면 유실수를 재배하는 장점은 그 열매를 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사람의 손이 특별히 가지 않아도 되고, 농약을 안 해도 수확이 된다는 점이다. 배, 사과는 농약을 약간 해야 하지만, 다른 과일에는 약이 별로 필요 없다고 한다. 약을 안 하니까 벌레가 들 수 있어 상품성은 떨어지나 자급자족용이니 상관없다.
양앵두는 90% 새가 먹는다고 한다. 양주 속에 들어 있는 빨간 열매와 비슷하다. 나무가 높아서 사람이 따기 어려우니까 새들이 먹는다. 벚나무도 일본에서 들어온 사쿠라와 우리나라 야생 산벚나무로 나뉜다. 사쿠라는 활짝 핀다. 벚꽃놀이하기 좋다. 야생산벚은 자생한다. 차이점은 개화시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사쿠라가 빠르고 산벚나무는 늦다. 사쿠라는 꽃이 화려하고 산벚은 파스텔 색조처럼 잔잔한 색깔이면서 꽃이 작고 소박하다. 산등성이에 희뿌옇게 보이는 꽃이 산벚이다. 개화기간이 길다. 사쿠라는 열매인 버찌가 굵고 드문드문 열린다. 반면에 산벚은 꽃이 수태로 버찌가 열리기 때문에 수가 많다. 버찌의 맛은 달콤하면서 쌉싸름하다. 입술과 이빨이 시커멓게 된다. 버찌 술은 약주로 치는데, 과실주 중에서 아주 상품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죽설헌에는 산벚이 많아서 버찌가 많이 열린다. 주로 새들의 먹잇감이다. 5월 중순에는 버찌 열매를 따먹으러 나주 일대의 새가 모두 이 집으로 몰려든다고 한다. 나무도 무성한데다가 맛있는 버찌가 열려 있으니 온갖 잡새가 날아드는 것이다. 이 기간에 죽설헌에는 오케스트라처럼 온갖 새의 합창이 울려 퍼진다.
시원과 함께 죽설헌 이곳저곳을 산책하면서 서식하는 나무와 꽃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이 기회에 실학을 연마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땅에 뿌리 내리고 대지와 대화가 가능할 것 아닌가. 이름을 모르면 나무는 나무요, 나는 나다. 대화의 선결요건은 이름과 생태를 파악하는 일이다.
길쭉하게 쭉 뻗은 나무의 이름을 물어보니 ‘메다세코이아‘라고 한다. 미국에서 들어온 나무이다. 전남 담양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가로수가 터널처럼 우거져 있는데 바로 이 나무이다. 여기 있는 것도 담양의 메다세코이아와 같이 25년 수령이다. 그 밑에는 돈나물이 자란다. 꽃이 노랗게 핀다. 봄에 초장 찍어서 먹는 나물이다. 옥잠화가 보인다. 여름에 피는데 하얗게 나팔처럼 피는 야생화이다.
산지닥나무는 종이를 만드는 나무이다. 향이 은은하게 풍긴다. 벌개미취는 야생화이다. 국화꽃처럼 핀다. 계단 옆으로는 노랑창포가 있다. 수선화 비슷한데 여름에 꽃이 노랗게 핀다. 연못주위나 습지에서 잘 자란다. 노랑창포, 붓꽃, 창포, 범부채가 모두 비슷한 모습이다. 치자나무는 겨울에 약해서 따뜻한 남부지역에 많다. 열매치자는 꽃은 수수하나 주홍색 열매가 이쁘다. 꽃치자는 꽃만 피고 열매는 없다. 관상용이다. 치자열매는 옷감을 물들이고 식용으로 음식에 물을 들이는 데도 쓴다.
회향목은 이른봄에 핀다. 나무재질이 단단해서 도장 만드는 재료로 쓴다. 꽝꽝나무도 단단하다. 집 뒤로는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구색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홍매, 청매, 백매, 분홍매가 모두 자란다. 청매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니까 꽃의 뒷부분이 연두색이라서 청매라고 부른단다.
녹색의 잎에 가시가 있어서 무슨 나무냐고 물어보니 동목서라는 나무라 한다. 가시가 있는데 호랑가시와 비슷하다. 대신 가시가 부드럽다. 겨울에 꽃이 피는데 향기가 아주 부드럽다는 설명이다. 은목서는 늦가을에 꽃이 피고 은은하면서 짙은 향기가 나오고, 금목서도 역시 늦가을에 꽃이 피면서 향기가 좋다고 한다.
죽설헌을 돌아보면서 시원 선생 부부가 귀거래사에 성공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비결은 현실과 이상의 겸비였다. 현실은 농업이라는 하부구조였다. 농업을 아니까 대지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전원으로 갔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이유는 대지에 뿌리를 못 내렸기 때문이다.
한편 성공했다고 이야기하려면 꿈꾸는 이데아가 있어야 한다. 시원에게 그 이데아는 그림이라는 예술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농업이라는 하부구조와 예술이라는 상부구조의 결합을 중요시한 것이다. 농업만 있고 예술이 없다면 진부하고 속된 생활이 될 수 있고, 예술만 있고 농업이 없으면 사상누각이 되어 버린다.
서민의 가정에서 태어난 시원은 운이 좋게도 이 두 가지를 모두 겸비할 수 있었다. 시원의 그림세계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그가 화단에 데뷔하기 전에 주로 그렸던 그림은 사군자 중에서도 대나무였다. 대나무 중에서도 ‘바람부는 대나무‘인 풍죽風竹이 주요한 소재였다. 그의 집에 대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데뷔 후에는 화풍이 달라졌다. 자기만의 독특한 그림을 그리자는 욕구였다. 거기에서 나온 시원 스타일의 그림이 〈전깃줄 위의 참새〉 〈감을 쳐다보는 새〉 〈똥을 누는 자화상〉이다. 〈전깃줄 위의 새〉를 보고 시인 김용택은 이렇게 평했다.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평화, 닿을 듯 말 듯한 아득한 그리움의 거리, 새털 같은 가벼움과 바위 같은 무거움, 아무 거리낌이 없이 나아가고 내려꽂히는 거침없는 선, 명주실 같이 아슬아슬 이어질 듯 끊어지는 현실 같은 꿈과 꿈같은 현실은 어디서 오는가. 자연과의 물러 설 수 없는 긴장과 아름다운 화해로부터 온다.“(「자연속으로…」, 2001, 8월. 현대아트 갤러리.)
필자가 보기에 시원의 삶이 귀거래사의 모델이 될 수 있는 배경엔 농업과 그림의 절묘한 결합이 있다. 너나할것없이 모두가 쫓기며 살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방외지사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예술과 그림에 대한 욕구야말로 그를 직장이라는 조직에서 벗어나게 한 동력이었다.
단조롭게 돌아가는 일상을 초월하게 만든 이데아, 그것이 바로 예술적 욕구였다. 아름답게 살고 싶다, 나의 세계를 가꾸겠다는 최초의 그 한 마음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 한 마음이 자신도 즐겁게 하고 그것을 쳐다보는 타인들도 흐뭇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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