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자 : 벽운 이경숙
출 판 사 : 정신세계사
출판사편제 : 정신과학총서 제4권
초판발행일 : 1999년 7월 31일(단기 4332년)
기 타 : 2001년 4월-5월 교보문고, 종로서적, YES24 인문분야 베스트셀러
글을 쓰기에 앞서
집안의 종교가 불교이고 어머니가 독실한 불자였던 탓에 나는 어려서부터 절에 다니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많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나이가 들면서 몰두하게 된 선(禪)과 명상(暝想)의 수행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여러 가지 영적인 체험의 기회를 가지게 해 주었다.
이런 종교적인 공부와 수행의 체험들은 나에게 더욱 본질적인 의문을 던져주었고 가르침에 대한 원리의 탐구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이 책은, 내가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체험들의 이유와 원리를 찾아
종교의 하늘과, 과학의 바다와, 신비의 땅을 헤매고 다닌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쓰는 방랑기이자 견문록이다.
나는 처음에 영적 체험의 항구에서 출발해서, 선(禪)을 지도(地圖)로 삼고,
수행을 돛의 바람으로 삼아 나의 내면 세계에 펼쳐진 거친 황파의 바다와 고요한 적막의 호수들을 건넜다.
그리고 여러 종교의 성전들과 철학의 대양을 지나 과학이라는 나라를 거치게 되었다.
나의 여행 중에 내가 보고 듣고 알게 된 것들은 아주 단편적이고,
또 극히 작은 일부분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여행에서 매우 소중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불교의 가르침과 선(禪)의 수행으로 엿볼 수 있었던 의식의 세계와, 우주물리학과 양자론을 비롯한 과학에의 여행은,
애초에 내가 찾으려고 했던 것들의 상당부분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얻은 결론들이 아직은 완전치 못하고 또 이 여행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의 긴 여행의 기록들이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진 많은 사람들,
그리고 불자들과 다른 종교를 믿는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분들에게 하나의 길잡이가 되고,
사고의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교리적으로 불교의 근본을 이루는 전생과 윤회는 이 세계의 생명들이 태어나고 죽는 생사의 문제와,
영혼과 사후 세계의 실상을 모르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인간이 죽은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를 인정한다면 그에 따르는 수십, 수백 가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필요한데
그러한 대답을 나는 어떤 책에서도 어떤 스승으로부터도 명확하게 듣지를 못했다.
전생과 윤회가 왜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법칙으로 행해지는 지에 대한 답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답에는 이 세계의 실상에 대한 설명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생과 윤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심령술사들의 영매 실험이 보여 주듯이
부정하기 어려운 영혼의 존재와 실상에 대한 의문들도 마찬가지였다. 영혼이 있고,
그것들이 사는 영계가 있다면, 그 세계도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이 세계의 일부인 것이며,
그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 역시 엄연히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 혹은 부처는 어디에 있으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나는 그에게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들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여행기가 약간의 도움이 기를 바란다.
나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려서부터 불교적인 환경 속에서 자랐으며,
오랜 여행에서 잠시 돌아온 지금에도 여전히 나는 불자의 한사람이다.
나는 불자로서 떠난 그 여행에서 여전히 불자로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통하여 불교의 교리들에 대하여 가져왔던 몇 가지 의심을 풀 수 있었던 과학적인 근거들을 얻었으며,
불교와 과학의 일치성을 규명해볼 수 있었다. 내가 재가불자의 한사람이기 때문에
이 글은 다분히 불교적인 관점에서 쓰여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불교만이 아니라 이미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과,
다른 여러 종교의 세계관을 모두 고려하여 씌어졌으므로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무신론자이거나를 막론하고,
한시적인 생명을 받아 태어난 인간인 이상 무관심할 수 없는 탄생과 죽음
그리고 생명과 사후세계에 대한 약간의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몇 년 전에 직장에서의 업무상, 컴퓨터 통신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곧 개인적으로도 취미 차원의 통신 생활을 하게 되어 천리안의 통신 모임방에 글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의 법명이었던 벽운(璧雲)에서 통신의 아이디를 'clouds'로 만들었고,
통신 이름(대화명)을 '구름'이라 정했다.
처음으로 모임방에 나의 통신 이름인 구름으로 올린 글이 '삼청궁 선녀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나의 전생의 기억과, 그로 인한 인연으로 내가 접하게 된 어떤 고서(古書)의 내용을 간추려 올린 환단(桓檀) 시대의 역사 이야기다.
많은 분들이 그 내용에 대해 큰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개천록(開天錄)'이란 제목으로 다시 정리하여 연재를 하였고
두 번째로 이 <마음의 여행>을 연재했다.
다행히 나의 글들에 많은 통신 벗들이 관심을 표해 주었고 출판하기를 권유하므로
한 권의 책으로 선보이겠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책의 내용들은 내가 구름(clouds)이라는 이름으로
몇 년간의 통신 생활을 하면서 많은 분들과 교유했던 한 모임방에 연재했던
'전생과 윤회', '영혼과 귀신에 대하여', '기란 무엇인가?' 등의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가급적 이해하기 쉽게 쓸려고 노력했으나 그렇게 쉽게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마음의 여행'이지만 원래는 '삶과 죽음의 의문들에 대하여…'라고 붙였다.
삶과 죽음에 있어서 품을 수 있는 의문들과 그 답이 결코 쉽게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흥미삼아 서너 시간 내에 읽고 던질 수 있는 책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명의 삶과 죽음에 얽힌 의문들에 대하여 답을 얻고 싶었다면 이 정도의 수고는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나는 감히 이 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믿고 안 믿고는 여러분의 마음이다. 만약 나의 이야기가 사실과 다른 것이라면
나는 씻을 수 없는 구업(口業)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속죄하게 될 것이다.
이 글들이 연재되는 동안 여러 가지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통신 벗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1999년 6월 어느 날에.
벽운(碧雲) 이경숙 합장배례
목차
첫 번째 여행 - 우주론과 세계관
1. 우주론과 세계관
2. 세 가지 우주론
3. 우주론과 세계관의 관계
두 번째 여행 - 물질과 생명
1. 우주에의 출입구
2. 물질의 본질
3. 입자의 결합과 물질
4. 정보와 의식
5. 생명과 마음
6. 물질계와 정신계
세 번째 여행 - 생물과 영혼의 만남
1. 생물의 영화(靈化)
2. 영혼과 생물의 진화
3. 통합체로서의 영혼
네 번째 여행 - 영혼과 사후세계
1. 영혼이란 무엇인가?
2. 사후세계란 어떤 것인가?
3. 영혼의 교감
4. 영계와 귀신
5. 한국인의 내세관
6. 영혼과 초 현상
다섯 번째 여행 - 전생과 윤회
1. 전생과 윤회에 대한 의문들
2. 윤회하는 생명의 범주
3. 윤회하는 여러 세계
4. 영혼이 머무는 곳
5. 윤회의 시작과 끝
6. 윤회하는 여러 생의 자기
7. 윤회의 주체
8. 전생과 윤회의 증거들
9. 자기 전생의 확인
10. 원과 업
11. 인연과 자성
12. 중력과 업력
여섯 번째 여행 - 마음과 기(氣)
1. 마음을 찾아서
2. 기란 무엇인가?
3. 기의 감응
4. 기의 시원
5. 천부경
일곱 번째 여행 - 마음의 귀향, 반야
후기
참고 도서
첫 번째 여행-세계관과 우주론 1
생과 사의 문제는 어쩌면 지극히 종교적인 주제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영혼의 세계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다. 실제로 이 세계가 어떤 법칙으로 운행되며,
어떤 원리로 이루어졌느냐에 대한 설명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창조주의 존재, 천국과 지옥, 귀신과 영혼의 존재, 사후 세계 등등,
이런 문제를 풀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찾고자 해왔지만 아직까지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과학이 더욱 발달한다 해도 천국과 지옥을 발견해 낼 가능성은 없어 보이고,
인격신의 존재는 갈수록 부정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신 종교는 아니지만 초월적인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UFO라든지, ESP(초감각적 지각 현상)나 초현상, 초능력, 심령 과학 같은 것들이,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는데 게으른 기존의 종교들을 대신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종교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과학적인 증거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이미 발견되고 입증된 과학적인 결론들과 배치되는 교리를 고집하는 종교들은 그 전도(前途)에 상당한 불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제는 과학의 도전으로부터 안전한 종교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떠한가?
인연법과 윤회는 불교의 대표적인 교리 체계인데,
불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로 과학적인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가?
나는 불교의 선(禪)의 종지(宗指)인「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불성(見性弗性)」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러한 불립문자의 선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닫고 체험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세계 속에 머물 뿐, 그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길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연꽃 한 송이를 내밀어서 그 뜻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경을 수백 번 읽어도 이해하기 힘들다. 나 역시 불경을 수없이 읽었지만 그 뜻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하는 게 너무나 많았다.
물론 뜻이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지만 과연 어떤 이유로 그리 되는지를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인연은 왜 생기는가?
전생과 윤회가 사실이라면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도대체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전생의 '그'가 죽고 지금의 '내'가 태어나기까지 나(또는 그)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했던 걸까?
그 동안에 나는 극락에 있었을까? 기억을 못할 뿐이지 끔찍한 지옥에서 벌을 받다가 온 것은 아닐까?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 걸까? 내가 불전에 엎드려 간절히 빌 때 부처님은 나의 원망(怨望)을 듣고 계실까?
만약 듣고 계시다면 나는 언제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대답은 어떻게 나타날까? 여러 가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생겨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애초에 논리나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걸까?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이 우주의 경계까지 넘나드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선문답만으로 만족해야 하나?
정말 이심전심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걸까?
부처님께 삼천배를 해도, 암자에서 몇 달 동안 화두면벽(話頭面壁)을 해도,
그리고 고통뿐이었던 단식(斷食)으로도 나는 그 의문부호들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의문의 빗장을 조금씩 풀 수 있었던 것은 우주물리학과 양자론을 배우면서부터였다.
그공부는 내 마음의 의문들을 씻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남에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도 가져다주었다.
나는 마치 음계도 모르고 작곡의 이론도 배우지 못한 채 피아노 건반만 두들겨 온 셈이었다.
피아노 앞에 십 년을 앉아 침식을 잊고 건반을 두들긴다면 그것도 한 경지에 가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음악의 이론을 배우고 음계의 법칙을 배운다면 같은 시간에 훨씬 빨리 목적지에 갈 수 있고,
더 높은 차원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불교 해설서는 선사들의 어록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물리학과 양자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도 그래서였다.
염불을 하고 화두를 붙잡고 면벽수행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승려들도 물리학을 공부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명의 법칙을 설파한 부처님의 말씀은 생물학의 도움을 받아 더욱 풍부하게 해명될 것이고,
유식설(唯識設)을 아는 데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포함해 심리학 전반에 대한 이해가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다른 많은 비종교적 초월주의의 주장들이 겉으로는 입증주의(立證主義)를 표방하고
나름의 방법으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를 보여주려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격한 실험 환경을 견뎌낼 정도의 객관적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럼 불교는 과연 어떠한가? 전생과 윤회는 어떠한가?
좀 더 넓어진 과학의 지평은 우리가 품어온 많은 의문들에 대해 어떤 면에서는 종교보다도 더욱 확실한 대답을 주고 있다.
우주물리학과 양자론을 통해서 과학자들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여러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들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불립문자의 세계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등 진전된 과학의 도움으로도 생과 사의 문제를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리적인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또 하나의 세계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상 한쪽 세계의 결론만으로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이 아직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영혼과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의 대답이 이미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과 양립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둘 중 어느 하나는 틀렸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가.
과학과 종교 사이의 이 풀기 어려운 대립은 서로에 대한 외면이나 회피를 통해 더 강화되어 왔다.
그러나 외면이나 회피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이 세계에 대한 과학의 해명에 충분히 귀기울이는 것.
그래서 과학을 종교적 의문을 푸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주물리학이 이 우주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우주물리학이 설명하고 있는 두 가지 우주론과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이 책의 주제와 비슷한 문제를 다룬 "우주심과 정신물리학"의 저자인 이차크 벤토프가 설명한 우주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 번째 여행-세계관과 우주론 2
세 가지 우주론
1. 정상상태의 우주론
금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그럴듯한 우주의 모형으로 제시되었던 것은,
1940년대 허먼 본디(Hermann Bondi)와 토마스 골드(Thomas Gold), 프레드 호일(Fred Hoyle)이
제안한 '정상상태 이론(steady-state theory)'이었다.
이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무한하게 존재하는 우주를 말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정상 상태의 우주는 시작된 시점이란 게 없으며,
무한한 과거로부터 무한한 미래까지 현재의 모습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물질의 창조는 어느 한순간에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늘 새로운 물질이 창조되어 끝없이 넓어져 가는 우주의 빈 공간을 채움으로서
이 우주는 언제나 지금과 같은 밀도와 성질로 존재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연속적 창조 이론'이나 '고정론' 또는 '완전 우주의 원칙'이라고 불리는 이 우주론이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팽창에 따른 물질의 평균 밀도가 감소하지 않도록 매초마다 1cm세제곱의 공간에서 10의 -43승 그램
(우주 전체로는 1초마다 약 5만 개의 별이 새로 생김)의 비율로 새로운 물질이 창조되어야 한다고 했다.
특히 프레드 호일은 음(陰)에너지란 개념을 도입하여 물질이 창조됨으로써 우주 내에서 감소하는 양(陽)에너지를 보상하는 이론을 창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이론은 1965년 우주 탄생의 초창기에 발생했던 에너지의 잔해인 배경열복사(background heat radiation)가 발견됨으로써,
가치가 사라진 고전적인 우주론의 한 모형으로만 남게 되었다.
2. 대폭발의 우주론
오늘날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우주의 모형이 바로 대폭발의 우주론이다.
우주가 하나의 특이점에서 시작된 대폭발의 결과로서 나타났다고 보는 견해이다.
대부분의 우주 관측 결과들이 약 150억 년에서 200억 년 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대폭발
(Big Bang : 빅뱅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영국의 물리학자 프레드 호일(Fred Hoyle)이다.
빅뱅설에 찬동하지 않았던 그는 야유하는 뜻으로 '빅뱅'이란 우스꽝스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대폭발의 우주론은,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이 별빛의 적색편이(별빛의 적색편이를 발견한 사람은 베스토 슬라이퍼이다)가
그 천체와 지구 사이의 거리에 비례함을 알게되어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알아낸 후,
1965년에 미국의 벨 전화 회사(bell telephone Company)의 두 물리학자가 대폭발의 증거인 배경복사를
발견함으로써 오늘날 우주 물리학의 가장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된 이론이다.
다만 '우주 알(Cosmos egg)'이라고 부르는 특이점의 성격과 물리적 법칙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이 우주 알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대폭발로 비롯된 '팽창하는 우주'는 정상 상태의 우주와는 달리 필연적인 종말이 예고되어 있는 '끝이 있는 우주'이며,
그 종말이 어떤 법칙에 의해 어떤 모습의 최후가 되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또한 대폭발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수축 또는 최종적인 열사망(熱死亡) 이후에 이 우주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몇 가지 대립되는 설이 있다.
우주의 최후 다음에 다시 새로운 시작(New Big-bang)이 있으리라는 '끝없이 순환되는 우주'가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아직 과학에서는 태초의 이전과 최후의 이후는 가설의 단계이거나 불가지(不可知)의 세계로 남아있다.
만약 '끝없이 순환하는 우주'가 사실이라면, 매 시기에 존재하는 우주는 '시작과 끝이 있는 우주'이지만 전체적인 입장에서는 또다시 시작과 끝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시작과 끝이 있는 우주가 끝없이 탄생과 죽음을 되풀이하므로…).
3. 연속적 순환 우주론
이것은 물리학적으로 인정된 우주론은 아니다.
이차크 벤토프가 <우주심과 정신물리학>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저서에서 설명한 다소 독창적인 우주론이다.
이차크 벤토프는 빅뱅이 하나의 구심점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폭발이 아니라,
최초의 핵으로부터 제트 분사 방식으로 방향성을 갖는 폭발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분사되는 방향의 반대편에는 분사되어 팽창하는 모든 우주가 흡수되어 저장되는 핵의 반대
편이 있어서 연속적으로 우주를 빨아들이며,
한편으로는 흡수한 우주를 지속적으로 분사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우주 전체는 마치 도너츠와 같은 원환체를 이루는데,
바로 여기서 분사되는 출구가 화이트홀이고 우주를 흡수하는 입구가 블랙홀인 것이다.
우주의 핵은 화이트홀과 블랙홀이 등을 맞대고 붙어 있는 모양이며 우주의 창조와 파괴는 동시적이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개념이다.
즉 어떤 특정시기의 대폭발이 아니라 연속적인 분사 형식의 창조와 아울러 지속적인 흡수와 소멸이 이루어지는 무한 동력 기관과 같은 우주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화이트홀로부터 깔때기 모양으로 퍼져나가므로 당연히 최초의 분사 지점에서 멀어질수록 팽창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진다.
결국 블랙홀로 돌아가는 반환점 부근(깔때기의 가장 넓은 부분)에서는 폭발에 가까운 급격한 팽창을 가져온다.
그런데 우주의 밀도가 균일하며 우주의 각 부분의 팽창률이 고르다는 증거들이 계속 발견됨으로써 이 이론은 다소 상상적인 우주모형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차크 벤토프는 우주물리학자가 아니므로 그의 우주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히 철학적인 직관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우주론은 창조와 소멸의 동시성이라고 하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동양 철학의 우주관을 하나의 모형으로 도식화했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여행-세계관과 우주론 3
우주론과 세계관의 관계
이 우주가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 존재인가,
아니면 시작과 끝을 가진 유한 존재인가 하는 것은 종교 문제의 근본적인 토대를 이룬다.
생명과 죽음, 영혼과 사후 세계의 실상은 우주론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즉 우주가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라면 신의 존재도 시작과 끝이 있을 것이고, 윤회라는 것도 시작과 종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우주가 무한히 존재한다면 창조주로서의 신은 의미를 상실한다.
창조라는 것은 어떤 시점에서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윤회도 무한히 반복되는 것일 뿐,
윤회의 끝을 말하는 해탈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작과 끝이 없는 우주에서는 인연 역시도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히 영속되므로 시작이 없는 인연을 끝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작이 없는 것은 끝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해탈로써 인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은 인연은 최초의 시작이 있었다는 논리 위에서만 성립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최초의 시작'이란 것은 인연법과 모순을 이룬다.
인연법이란 과학 용어인 인과율과 같은 의미인데,
모든 것은 선행된 어떤 이유의 결과로 일어난다는 법칙이다. '
최초의 인연'이란 선행하는 어떤 이유도 다른 인연도 없이 생겼다는 얘기이므로 인연법 자체가 모순인 것으로 보인다.
우주가 무한히 영속하는 것이라면 인연 역시 무한히 영속하는 것이므로 해탈이란 불가능한 개념일 것이며,
만약 시작과 끝이 있는 우주라면 불교의 인연법은 출발부터 모순에 빠진다.
대비되는 또 하나의 종교인 기독교도 마찬가지의 패러독스를 지니고 있다.
우주가 무한영속의 것이면 창조주가 개입할 틈이 없어진다. 반면에 시작이 있는 우주라면
'시작 이전에 존재했던 신'이라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이는 창조주가 무한영속의 존재라는 뜻인데,
이 무한영속의 존재인 신은 우주를 창조하는 특정 시점을 갖지 못할 것이다.
시공간의 존재이전에 창조를 결심하거나, 창조할 순간을 선택할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계획을 했던 결심을 했던 간에 창조라는 것은 모두 시간적인 사건이며,
시공간 탄생 이전에 선행해서 존재한 신은 시간적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에 그 원인이 된다고는 하기 힘들다.
이러한 우주론에 따른 종교의 모순이 해결될 수 있는지,
아니면 모순된 가정에서 출발한 교리들이어서 부정되어야 할 것인지를 고찰해보는 게 이 책의 중요한 논지 가운데 하나이다.
두 번째 여행-물질과 생명 1
물질에서 생명으로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을 풀기 위해 선(禪)과 명상을 해왔고,
그런 와중에 초월적인 현상을 체험하고 지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과 사유의 세계에서 다시 구성하고 언어로써 조립하는 데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통증을 느꼈다.
마치 뛰어넘을 수 없는 하나의 장벽이 영적 체험의 세계와 인식의 세계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장벽의 실체가 무엇인지 몰라서 나는 오랫동안 방황해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 장벽은 바로 내가 어릴 때부터 관념적으로 사용해 왔던 언어였다.
뜻이 명확치 않은 여러 단어들이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계속 사용됨으로써
그 불분명한 단어들의 개념이 나의 사유를 방해해왔던 것이다.
예를 들어 영혼이란 말이 그랬다.
영혼이라는 말을 수없이 듣고 말하면서 살아온 까닭에 나는 영혼이란 단어를 잘 알고 있는 듯 했지만
실은 영혼에 대해 모호한 관념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물질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물질이란 말을 자주 쓰지만 과연 물질이 무엇인지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해선 제대로 모르고 있다.
생명이란 말도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이 생명인가?
생명의 의미는 생물학적인, 철학적인, 종교적인 차원에서 각각 달라진다.
그럼에도 어떤 때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를 구분하지 않은 채 매일 쓰고 있다.
언어의 뜻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사용해온 대가로 나는 이제 그 분명치 않은 언어의 울타리에 갇혀버린 것이다.
물질과 의식, 생명과 영혼,
삶과 죽음 같은 단어들을 명확하게 정리해놓지 않으면 내가 찾고자 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의문에 대한 답은
언어의 혼돈과 모순에 가로막혀 쉽게 찾아내기 힘들 게 분명해 보였다.
언어가 가져다주는 이러한 사유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정리가 필요한 몇 가지 말을 깊이 있게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인간은 왜 태어나며 왜 죽어야 하는지,
나는 언제부터 존재했으며 언제까지 존재할 것인지,
탄생이 나의 시작이며 죽음이 나의 끝인지, 죽음 이후에 내가 존재한다면
어디서 어떻게 살게 되는 것인지,
어려서부터 내가 믿어온 종교의 가르침들은 과연 그러한 의문들에 대해 올바른 답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은 어떠한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는 '탄생과 죽음, 그리고 생사의 이전과 이후에 대한 규명'이 될 것이다.
탄생과 죽음의 본질에 대한 접근은 생명과 영혼에 대한 파악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그리고 생명과 영혼의 본질을 확인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그것들의 시발점을 찾는 여행으로 이어진다.
생명의 시발점은 창조주의 마술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물질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생명체에 처음 영혼이 깃들이게 된 연유를 찾는 작업은 생명이 발현된 물질의 내부에 영혼의 씨앗이 될 무엇인가가 있었으리라는
가정을 배제하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
나는 생명과 영혼의 배양접시인 '물질'을 파악하는 것에서 생명과 영혼의 근원을 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여행의 시작을 물질에 두었다.
그리고 물질의 본질 속에서 생명과 영혼의 출발점이 아닐까 여겨지는 두 가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물질 그 자체를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였다.
이 여행의 시작부터 나를 혼돈의 언저리에서 맴돌게 했던 단어가 '물질'이었다.
나의 여행은 이 세계의 실상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을 극복하는 데서부터 첫 발짝을 내딛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결정은 아니었다.
광대무변한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여행의 출입구는 미세한 물질의 기본 입자들이 어지럽게 들어차 있는 터널 속이었다.
두 번째 여행-물질과 생명 2
물질은 생명적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물질인 육신과 비물질인 영혼으로 나누는 이분법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물질이라고 하면 으레 영혼이나 의식과 같은 비물질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비생명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다 보니 영혼이나 의식이 없는 단순한 물질로부터 생명이 어떻게 탄생하며,
물질에서 태어난 생명체에 그 생명의 사후에 물질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영혼이 어떻게 심어질 수 있느냐 하는 심각한 모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의문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창조주와 같은 절대적인 권능자의 개입을 피할수 없게 만든다.
불교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①로 불가지(不可知) 또는 불요지(不要知)한 일로써 대답을 피해버린다.
과연 생명은 전혀 비생명적인 물질로부터 어떠한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나 필연성도 없이,
기적과 같은 우연으로 어느 날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인가?
그런 기적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가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생명과의 연결고리를 전혀 갖지 않은 물질로부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생명이 나타날 수 있다고 믿는것보다는,
아무리 그 내용이 황당하고 신화적이며 비과학적이라 할지라도 '신의 작업'이라고 믿는 편이 훨씬 이성적인 태도가 아닐까?
물질을 비생명적이라고 보는 것과 함께,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또 한 가지 인식의 오류가 있다.
이 세계는 물질이 먼저 나타난 후에(그것이 신의 창조의 결과이던 물리학자들이 주장하는 대폭발이던 간에) 생명과 영혼이 나중에 생겼다는 믿음이다.
생명은'비생명적'인 물질에서 나왔고,
생명은 물질이 먼저 존재한 다음에 생겼다는,
두 가지 그릇된 믿음. 이 습관적인 믿음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생명과 죽음.
그리고 사후 세계에 대한 접근에서 모순의 벽을 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소립자 물리학의 발달은,
물질의 궁극적인 구조와 법칙을 거의 최종적인 단계까지 밝혀냈다.
이제 물질의 세계는 인간에게 더 이상 추측과 가정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물리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물질 세계에 대한 지식은 유감스럽게도
생명과 영혼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데는 별다른 도움을 주고 있지 못하고 있다.
오랜 세월 인간의 뇌리에 각인된 관념들은 수십 년 동안 쌓여온 과학의 업적만으로는 고쳐지기 힘든 모양이다.
물리학에서 관찰한 물질의 세계는 분명히 활동적이며,
살아있는 어떤 것들의 세계이다.
고정되고 움직이지 않으며 생명과는 전혀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죽어 있는 고요한 세계가 아니다.
전자와 미립자들의 운동은 신비로울 정도로 활기에 가득 차 있으며,
고도로 질서 잡힌 법칙에 따라 운동하고 있다.
그것의 궁극적인 실체는 영혼과 같이 존재가 의심스러운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이미 밝혀진 물질의 정체는 생명과 영혼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시사해주는 바가 분명하다.
물질은 그 자체의 성질이 바로 생명의 본질이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생명의 본질이 무엇이냐가 우선 정의되어야 하는데,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생명의 특성은 '자기복제의 능력', '영양의 섭취와 신진대사', '자극에 대한 반응'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불교는 생명을 '오온(五溫)'②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기독교는 창조주가 물질과는 별도로 창조한 가장 특별한 어떤 존재라고 설명한다.
이런 설명들말고도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아주 다양하다.
하지만 모든 생명 현상을 하나로 통합해서 설명한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바로 '정보(Information)의 능동적인 유지와 교환'이라고 말하고 싶다.
생명이란 '자기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상대방의 정보를 인식하며,
그 정보의 교환에 따라 활동하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세계는 물질로 구성된 세계라기보다는 '정보에 의해서 구성된 세계'이다.
불교가 설명하는, 인연법에 의해 나타났으나 그 본질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이며
제행무상(諸行無常)인 세계가 바로 '정보에 의해 유지되는 세계'이다.
불교의 인연이란 바로 모든 생명들(확대해서는 모든 물질들) 사이의 정보라고 말할 수 있다.
물질의 궁극적인 기본 입자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려는 인간의 정열은 마침내 수백억분의 1밀리 크기에 불과한
원자핵의 구조를 밝히는 데까지 이르렀다.
우리는 그러한 원자의 세계가 상식이 되어 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의 물리학이 물질에 관해 밝힌 결과에 따르면,
물질이란 바로 '정보(Information)와 힘(Energy)'이라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양자론에 따르면 원자 이하의 세계는 암흑과 혼돈으로 가득 차 있어서 예측할 수 없는(unpredictability) 불확정성(uncertainty)의 세계라고 한다.
원자 이하의 미립자들은 존재 자체를 규명하기 애매하여 과연 그것이 거기에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조차 의심스러운 허깨비임이 밝혀졌다.
물리학에서 볼 때 물질의 존재란 '특정 시점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질량X속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립자는 과학자들에게도 자신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이 유명한 하이젠베르그(Werner Heigenberg)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물리학적인 정의에 따른다면 미립자들은 존재한다고도,
또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허깨비들이다.
또한 그것들은 앞서 있었던 위치가 다음에 있게 될 위치의 원인이 된다고 볼 수 없는 유령과 같은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과학이 인과율을 부정하게끔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존재도 의심스럽고,
그 운동의 법칙이 이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불변의 법칙으로 여겨져 온 인과율조차 따르지 않는 미립자들이
서로 모여 우리 눈앞에 있는 거대한 우주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미스터리는 무엇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를 모순과 혼돈으로 인도하는,
양자론이 밝히는 중요한 한가지를 주의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물질의 기본 입자는 우리가 물질이라고 말할 때 연상하는,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으며,
무게를 가지고 실재하는'물체'로서는 증명과 확인이 곤란하긴 하지만,
그것의 실재(實在)를 확인할 수 있는 '정보와 힘'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미립자가 존재하는 위치와 속도에 대한 정보, 그리고 그 입자가 주위에 미치는 힘으로 우리는 그 입자의 존재를 파악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해 어떤 입자가 정보를 갖고
있지 않거나 에너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바로 그 미립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된다.
물질의 궁극적인 기본 입자인 미립자들이 바로 정보와 힘이라는 사실은 물질에 대해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개념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정보와 힘은 무형
이며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단지 힘은 느낄 수 있으
며 정보는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물질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의 물체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 힘(Energy)이 질량으로 모습을 바꾸기 때문이며,
힘이 질량으로 나타날 수 있는 데는 물질의 정보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정보는 모든 물질 입자들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규정한다.
양자가 양자일 수 있고 전자가 전자일 수 있는 것은 바로 물질이 가지고 있는 정보 때문이다.
미립자의 성질과 운동(진동)은 미립자의 자기 정보에 따른 것이다.
수천억분의 1밀리보다 더 작은 미립자들은 존재라고 할만한 것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도 자신에 대한 정보는 갖고 있다.
하나의 미립자가 단독으로 존재할 때의 성질로 볼 때 그것의 자기 정보는 매우 혼란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이 혼란한 상태의 정보는 미립자의 존재를 혼란스럽게 해서 미립자가 인과율에 따르지 않는 허깨비 운동을 하게 만든다.
원자핵의 주위를 도는 전자들의 운동은 교과서에 그려져 있는 그림처럼 궤도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핵 주위의 광대한 허공을 구름처럼 감싸고 있다.
원자는 단단한 알맹이와 같은 게 아니라 대부분이 전자의 구름 층으로 되어 있다.
원자의 크기는 수백만분의 1에 불과하며,
원자핵의 부피는 수백억분의 1mm에 지나지 않는다.
즉, 원자핵은 원자 크기의 1만분의 1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1만분의 9천9백99는 물체가 아니라 전자들이 돌고 있는 허공인 셈이다.
전자는 이 허공 속에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처럼 일정한 궤도로 회전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법칙 없이 그저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있다.
전자와 같은 미립자들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횡행하는 유령처럼 그 광대한 공간 속의 어디에도 있을 수 있고
어디에도 있지 않은 그런 상태로 원자의 부피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전자가 돌면서 만들고 있는 공간은 텅 비었으면서도 1백억분의 1mm 크기의 다른 입자 하나도 침입할 수 없는 철벽같이 단단한 공간이다.
텅 비어 있으면서도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바로 물질의 기본입자들이다.
이러한 입자들이 뭉쳐서 이루어진 모든 물질과,
그것들의 결합체인 물체들과 우주는 모두 '꽉 차 있는 허공'이라는 모순 위에 세워진 것들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나 무(無)는 바로 이러한 물리학적인 진공(眞空)과 아주 흡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무한히 작은 미립자들의 세계에서 수백만분의 1mm라는 공간은 광대한 크기의 공간이다.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앞서 말한 정보와 힘이다.
전자와 같은 미립자들이 허깨비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정보가 애매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원자핵과 그것의 둘레를 도는 전자는 광자라는 초미립자를 주고받음으로써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는데,
이 메신저(messenger)가 실어 보내는 정보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힘의 성격과 세기일 것이다.
이 정보를 통해 원자핵과 전자는 서로를 인식하게 되고,
그로써 결합상태를 유지한다.
그런데 광자는 물이 분사되듯이 연속적으로 오가는 게 아니라 권총을 쓸 때처럼 단속적으로 던져진다.
그 던지는 시간차는 수백만분의 1초에 불과하지만 그 정보의 전달자가 오가는 순간순간,
원자핵과 전자는 서로의 정보를 분실하는 극히 짧은 순간들을 경험한다.
이 찰나마다에서 전자는 자신의 정보를 확인하지 못하고 허깨비가 되는 것이다.
다음 순간 돌아온 정보의 충격이 전자를 뒤흔들 때 전자는 다시 존재하게 되어 새로운 위치에 나타나게 되고,
그 정보가 사라지면 다음 번 메신저가 도착할 때까지 전자는 비존재의 세계 속으로 잠시 사라진다.
미립자의 세계를 살펴볼 때에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모든 정보는 상대가 있어야 만이 확인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다른 어떤 입자도 없이 홀로 있는 입자는 자기 정보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정체성을 상실하고 곧바로 비존재의 상태로 떨어지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서로를 확인하는 정보의 내용은 바로 입자가 갖고 있는 힘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물질은 힘과,
그것의 성격과 세기를 전달해서 서로 교환하고 그 내용을 인식해서 반응하는 정보의 두 가지를 본질로 해서 존재한다.
힘과 정보, 이 두 가지는 사실 우리가 물질이라고 파악하는 어떤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양자론이 밝혀낸 물질의 실상은 이 세계가 반드시 타(他)가 있어야 아(我)가 존재할 수 있는 상대성에 바탕한 세계이며,
무형의 것에 의해 이루어진 허상의 세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세계는 일체가 무상(無常)한 공(空)이며, 오직 인연에 의해서만 나투어진 것이라는
불교의 직관은 오늘날의 과학의 증거들과 놀라울 만치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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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독화살의 비유 :
이 우주가 얼마만큼이나 크며, 언제 시작되었고,
왜 있게 되었으며, 이 세계에 종말이 있느냐 없느냐 등의 질문을 귀찮게 해대는 마라구마라라는 제자의 질문에
부처님이 답으로 들려주신 유명한 비유이다.
한사람이 독화살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다.
그 옆에서 친한 사람이 상처를 치료해줄 의사를 찾으려 하자 화살에 맞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치료를 받기 전에 누가 활을 쏘았는지부터 알아야겠소.
나한테 활을 쏜 사람이 큰지 작은지,
상류 계급 사람인지 하류 계급 사람인지,
그리고 화살촉의 재료가 무엇인지 알고 나서 치료를 받겠소.
" 이런 식의 쓸데없는 질문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독이 전신에 퍼져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이론에 매달리는 것보다 화살을 빨리 뽑아내고 상처를 치료하여 생명을 구하는 게 급하지 않겠느냐는 것에 비유해서,
우주적인 문제보다는 각 개인의 구원-고해로부터의 탈출-이 더욱 시급하다는 뜻이다.
② 오온(五溫) :
부처님이 인간을 설명할 때 쓴 말로,
인간은 색(色), 수(受), 상(像),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오온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마음의 귀향-반야' 편에서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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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여행-물질과 생명 3
입자의 결합과 물질
물질의 기본 입자는 '힘과 정보'라는 무형의 본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무형의 힘과 정보가 어떤 상대를 만나 서로를 인식하게 된 상태를 물리학적으로는 '입자들이 결합되었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결합되는 순간 입자들은 하나의 확인 가능한 물체로 시공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을 확인시켜주는 상대를 만나기 전의 입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으므로 힘과 정보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상대 입자를 만나 정보를 교환하면 두 입자는 서로 주고받은 정보의 관계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어 전자는 전자대로,
양성자는 양성자대로, 중성자는 중성자대로 실체가 있는 존재로써 모습이 나타난다.
만약 입자들 간의 관계(정보의 교환)를 단절시키면, 그 순간 물질의 실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힘(에너지)만 남게 된다.
에너지란 정보를 상실해 버린 물질의 잔해들이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맺어지는 입자들 사이의 결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하다.
결합된 입자들을 분리하려면 광속에 가깝게 가속시킨 입자로 충돌을 일으켜야만 가능하다.
인간이 이 일을 인위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입자가속기라는 매우 값비싼 장치가 있어야 하고
상당히 복잡하고 정교한 준비와 까다로운 절차가 뒤따른다.
실험의 결과로 분리된 입자들은 서로 간의 관계를 상실함으로써 에너지라는 무형의 상태로 변화하고,
하나의 물체로서 종말을 고한다.
물론 이와 반대되는 실험도 가능하긴 하다. 에너지를 물질로 복원시키는 실험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직 이 입자들 간의 상실해버린 관계를 복원시키는 기술을 갖지 못하였으므로,
실험의 결과는 물질이 만들어 진 흔적만을 남긴 채,
폭발과 함께 다시 에너지로 바뀌고 만다.
1초의 1백만분의 1이라는 찰나 동안에 물질이 있었던 흔적을 남김으로써 에너지가 다시 물질로 변화했음을 말해주지만
그것은 실로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한번 물질이 에너지로 바뀌면 물질의 두 가지 본질 중 하나인 힘은 에너지로서 시공간에 남는 것이 확실하지만
두 입자가 분리되기 전에 공유했던 서로의 정보는 다시는 되찾거나 복원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애초의 정보는 어디로 간 것일까? 형체가 없는 것이긴 하나 힘이 시공간에 존재하는 무엇이라면
정보도 어딘 가에는 그 흔적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입자들의 본질과 그것들의 결합과 분리,
그리고 존재와 비존재에 대하여 길게 논해온 이유는,
입자들의 붕괴와 동시에 그 형체와 함께 사라져버리는 정보의 행방을 추적함으로써
생명의 시발점과 영혼의 소재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여기에 물질들 간의 정보의 성격을 알게 해주는 또 한 가지 실험이 있다.
하나의 원자가 붕괴되면 두개의 광자가 튀어나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게 된다.
이 두개의 광자는 분리된 입자이기는 하지만 관계라는 정보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두 광자간의 거리가 몇 광년으로 벌어져 있어도,
둘은 하나의 정보체(情報體)로서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한쪽의 진로가 막혀서 정지하게 되면, 정확히 그와 동시에 몇 광년 떨어진 거리의 다른 쪽 광자도 멈추어 선다.
몇 광년의 거리에 떨어져 있는 하나의 광자에 어떻게 반대편 광자의 상황이 동시에 전달될 수 있느냐는 의문에 대해,
닐스·보아(Niels Bohr, 1885∼1962)는 이 두개의 광자는 관측자에게 관측되는 순간까지는 하나의 종합체(綜合體)라고 설명했다.
이 실험(존 벨의 이론적 근거에 따른 실험이라서 '벨'의 실험이라 불린다)은 현대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양자역학이 근본적으로 옳다면 정보의 초광속 전달이 성립한다는 가정을 실제 실험화한 것이다.
물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옳다면,
정보의 초광속 전달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최신의 실험 장치를 가지고 수차례에 걸쳐 수행된 실험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양자역학이 정확하다면 정보의 초광속 전달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결과를 입증해 보였다.
일부의 과학자들은 이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정보의 초광속 전달 가능성을 인정하기도 하며,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최소한 '초광속 영향'까지는 받아들이고 있다.
정보의 관계로 연결된 두개의 물질은 시공간 내의 거리가 아무리 떨어져 있더라도
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 아직도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통합체이다.
정보의 파동은 물질이나 에너지의 전달과는 달리 시공간상의 이동에 따르는 제약을 초월하는 것이다.
한번 관계를 가진 두개의 물질 사이에 연결된 정보의 끈은 시공간적인 거리가 무한대로 늘어나면 그 끈 역시 같이 늘어난다.
그리고 그 끈은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천 분의 1밀리이건 몇만 광년이건 똑같은 길이로 작용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물질의 본질 중 하나인 정보에 대해 매우 의미심장한 특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영혼과 영혼 사이의 의사소통 내지는 영혼의 이동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과학자들은 이 초광속(즉 시공간을 초월하는)의 정보 전달은 인정하지만
그때의 정보는 무작위적이어서 인간 또는 물질계에 어떤 의미 있는 정보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무작위적인 정보가 정신계(정보계)에서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정보일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의 자아 또는 영혼은 시공간의 법칙에 지배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 칼 구스타프 융 -
앞의 실험은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부정하기 위하여 동료인 포돌스키(Podolsky), 로젠(Rosen) 등과 함께 고안해낸
사고실험(세 사람의 머릿글자를 따서 EPR PARADOX라 부름)에서부터 발단되어 논쟁이 계속되어 오다가,
유럽 공동 원자핵 연구소(CERN)의 이론 물리학자 존 벨(John Bell)이 고안해낸 이론적 근거(벨의 부등식)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때 두 광자 사이의 정보 전달은 어떤 신호가 오가듯이 방향을 가진 전달이라기보다는 속도 개념을 가지지 않은,
일종의 통합상태의 유지로 보는 것이 정확해 보인다.
즉 분리된 두 광자는 시공간적으로 멀어진 거리와는 관계없이 정보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결합된 상태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정보의 전달이란 두 광자 사이의 거리를 달려가는 것이 아니므로
광속 또는 초광속이라는 속도의 의미를 초월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속도는 거리의 값이 있어야 산출이 되는 것인데 분리된 두개의 광자는 정보적으로는
거리가 없는 통합체이므로 정보전달의 속도는 의미가 없어진다는 이야기이다.
물질들을 연결해 주는 정보는 이처럼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정보의 통합성이다.
즉, 양성자와 중성자는 분리되어 있을 때는 각각의 고유한 힘과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이 둘이 결합해서 하나의 원자핵을 이루게 되면 양성자와 중성자로서는 가지고 있지 않던 통합된 새로운 물질의 성질을 가지고
하나의 원자핵으로 활동한다.
전자는 이 원자핵과 결합하는 것이지, 그 속에 들어있는 양성자나 중성자와 결합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원자핵과 전자가 결합되어 하나의 원자를 이루게 되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의 전자들의 성질은
통합된 원자의 특성 속에 묻혀버리고 양성자나 중성자 또는 전자의 성질들과는 전혀 다른 하나의 원자로서의 특성을 가진다.
모든 원자들을 구성하고 있는 양성자나 중성자 또는 전자들은 모두 동일한 힘과 정보들의 소유체이지만,
그 결합 방식에 따라 산소의 원자나 수소 또는 헬륨의 원자들은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짐으로써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이러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물질의 기본 입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상대와 결합하는 순간,
입자라는 유형의 물질적 결합만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모아져서 하나의 통합된 정보를 창출해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시공간 상에서 원자 이전의 입자들은 그 존재의 확실성이 의심스럽고 정보 또한 애매하여 위태롭게 깜빡거리는 상태라고 한다면,
하나의 핵과 전자들의 구름으로 만들어진 원자부터는 그 실체를 의심하기 어려울 만큼 확고한 시공간 상의 '존재'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원자는 그 존재가 뚜렷하여 자신의 정보를 관찰자에게 모두 나타낸다.
이 말은 질량과 위치와 속도를 가진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 비로소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벗어난 확정된 물질이 된다는 의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원자를 구성하는 입자들은 서로 분리되어 흩어지고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것들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이 시공간 상에 가물가물 위태로운 모습으로 깜빡거리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자에서부터 비로소 실재하는 하나의 존재를 말할 수 있다.
원자 이전의 입자들은 존재가 아니라 물질을 구성하는 전물질적(前物質的)으로서,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에 놓인 허깨비와 같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원자는 하나의 통합된 정보를 가진 존재이며,
각기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원자들이 만나게 되면 각자가 가진 정보에 따라 서로 결합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한다.
원자들이 결합하면 분자를 이루는데,
이 분자들은 역시 낱낱의 원자들의 성질과는 전혀 다른 통합된 고유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수소 원자 두개와 산소 원자 하나가 결합한 물분자는 수소나 산소와는 완전히 다른, 물의 성질을 가지게 된다.
두 개의 수소가 가진 정보와 한 개의 산소가 가진 정보가 결합해서 새롭게 창출해낸 통합된 정보가 바로 물 분자의 정보이다.
그런데 이 통합된 물 분자의 정보는 결합되기 이전의 산소나 수소보다 훨씬 복잡하고 조직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이 물 분자들은 같은 물 분자 동료들을 만나면 물이란 물질을 이루는데, 이때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분자가 가진 정보들이 통합된 하나의 상위 정보체를 형성해서 각각의 물분자에는 없던 빙점이나 비등점,
그리고 결빙될 때의 결정의 모양이라던가, 또는 표면장력과 같은 고도의 정보를 유지하면서 주위의 환경에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물들이 엄청난 양으로 모이게 되면 또다시 대규모의 정보체로써 행동을 통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다의 물이 달의 인력(인력이나 중력과 같은 힘은 일종의 대규모적인 정보와 같다)에 대해서 밀물과 썰물의 운동을 보이거나,
열이란 정보에 의해서 해류를 형성하는 것이 그런 예이다.
물질이 그 결합되는 단계에 따라서 보다 고도의 조직적인 정보를 만들어간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물질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어떤 필연성을 감지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물질은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무생물의 겉모습처럼 죽은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힘(에너지)과 정보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물질 상호간에 정보를 주고받고, 그것들을 결합해서 보다 고도의 새로운 통합적인 정보를 생성해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물질의 본질인 힘과 정보에서 우리가 생명과 영혼의 시발점을 찾고자 하는 것은 과연 어리석은 발상일까?
그러나 이 지점이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생명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결국은 창조주의 장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번째 여행-물질과 생명 4
정보와 의식
물질로부터 비롯되었음에 틀림없어 보이면서도,
분명히 일반 물질과는 다른 생명체의 특성 중의 하나가 바로 의식의 존재이다.
이 의식이 물질계에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으며, 의식이란 것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우리가 흔히 생각, 또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과 애매하게 겹쳐지면서도 약간은 그 쓰임새를 달리하는 이 의식은
영혼이라는 존재와 결부되면서 더욱 알 수 없는 세계로 남아 있다.
이 의식의 세계를 우리는 물질계와 대별해서 정신계라고 말한다.
산 것과 죽은 것의 차이점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우선 떠오르는 것은 이 의식의 존재이다.
물론 '의식이 없다는 것이 곧 죽은 상태'인 것은 아니다. 기절했거나 잠들어 있을 때,
의식은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죽은 것은 의식이 없는 상태'일까?
여기서 영혼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자와 그것을 부정하는 무신론자의 대답은 둘로 갈린다.
유신론자는 '죽음은 육신과 의식이 분리된 상태이며, 죽은 후에도 의식은 존재한다.
그리고 사후에 육신과 분리되어 홀로 존재하는 의식이 바로 영혼이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반면에 무신론자는 '죽음은 의식의 끝이며, 사후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것이다.
말을 바꾸어서, '의식이 없는 것은 무생명체'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단 그렇다고 대답할 도리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면 '의식이 있는 것은 모두 생명체인가'하면,
이것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대답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모든 생명체는 의식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어떤 대답이 가능할 것인가?
대답이 긍정이라면, 여러 가지 까다로운 질문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식물도 의식이 있는가?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은 어떤가? 개미나, 바퀴벌레는? 우리가 잘 아는 삼단논법으로 이 문제를 정리해보자.
A : 모든 생명체는 의식이 있다.
B : 박테리아는 생명체이다.
C : 따라서 박테리아는 의식이 있다.
만약에 A의 가정이 참이라면 C의 결론도 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박테리아가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의식의 개념은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A의 가정이 틀렸다고 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곤란한 질문을 만나게 된다.
식물이나 박테리아나 개미나 거미에게는 없는 의식이 우리 인간에게는 있다고 한다면,
생명체에서 의식을 가지는 존재는 어느 단계부터인가 하는 것이다.
식물이 아닌 동물부터 의식을 가진다면 A의 가정은 '모든 동물은 의식이 있다.'라는 것으로 바뀔 것이다.
이때 결론 C는 어떻게 될까?
머리카락 사이를 기어다니며 사람의 비듬을 갉아먹고 사는 잘 보이지도 않는 진드기도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A의 가정을 '모든 포유류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생쥐나 토끼는 벌레들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에서 우리는 이 가정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A의 가정을 영장류로 끌어올려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예 창조론자들의 주장처럼 '인간만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정하는 수밖에 없을 것인가?
생명체가 어느 단계에서부터 의식을 가지느냐 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의식이 영혼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로 추정되는 만큼 영혼의 세계를 짐작하는 데 이 문제의 해법이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역시 인간만이 영혼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사후의 세계는 모든 생명체 중에 오직 인간 영혼만이 존재하는 고립된 세계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모든 생명체에 이 의식의 존재를 확대해서 인정한다면,
영혼의 세계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영혼으로 득시글거리는 복잡한 세계로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실제와 가까울까?
의식이 생명체의 필요조건이냐 아니냐를 논하려고 하면 먼저 의식이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생명체에 국한된 것으로, 어쩌면 인간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면서 생각, 마음, 정신, 영혼 등 그 의미가 모호한 말들을 '의식'과 별 구별없이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의식은 그런 말들의 여러 의미를 포괄하기도 하지만 학문적인 개념으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의식이란 말은 원래 불교의 유식설에서 나온 것인데 그 의미가 확대되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 활동에 대한 가장 오래된 학문적 분석은 불교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하겠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보다 2천5백년 앞서 성립된 불교의 유식설은,
잠재의식의 존재를 겨우 어림잡은 근대의 정신분석학을 넘어서는 학문적 체계를 이미 수립해놓고 있다.
우리가 마음, 영혼, 정신 등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이 의식이란 말은
인간의 정신 세계를 여덟 가지 식(識)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유식설에서 여섯 번째 단계로 나오는 것이다.
유식설은 정신 활동의 영역을 전오식(前五識)과 후삼식(後三識)의 여덟 가지 식(識)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오식은,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하여 알게 되는 정보들을 말하는 것으로 육신에 종속된 정보의 수용과 해석을 의미한다.
눈으로 보고 느끼는 안식(眼識),
소리를 듣고 느끼는 이식(耳識),
냄새로 느끼는 비식(鼻識),
맛으로 느끼는 설식(舌識),
감촉으로 느끼는 신식(身識)의 다섯 가지이며,
이 전오식의 다음에 여섯 번째로 오는 제6식이 바로 의식(意識)이다.
유식설은 우리가 흔히 생각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의식' 속에 넣어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의식 속에 언어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기능, 기억의 사용, 판단, 주의 집중 같은 정신 활동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식에 감정과 의지와 정서적인 차원이 더해진 마음이라고 할 때는
이 여섯 번째의 의식에 일곱 번째의 식인 말나식(末那識)의 작용이 더해져야만 한다.
즉, 마음이라고 말할 때는 인간의 정신 활동 중 이성적인 부분을 말하는 의식과 감정적인 부분의 바탕이 되는
말나식의 작용을 합한 의미로 본다면 정확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의식은 마음보다도 생각의 뜻에 더 가까우며 좁게 정의한다면
전오식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를 종합하고 분석해서 판단하는 기능을 뜻한다.
안식이 눈을 근(根)으로 삼고 빛을 경계로 하고 이식이 귀를 근으로 하고 소리를 경계로 삼는 것이라면
의식은 두뇌를 그 근으로 하고 생각을 경계로 삼는 식이 될 것이다. 때문에 의식은 뇌식(腦識)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유식설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부터 들어온 정보들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총체적인 정보처리의 과정으로 의식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여섯까지의 식은 모두
육신(肉身)을 그 근으로 삼고 있는 것이어서 생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유식설에 따른다면 의식이란 육신의 사망(좁게는 두뇌라는 조직의 손상 또는 기능의 정지)과 더불어 소멸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여섯 가지의 식에는 사후에도 존재하는 영혼과 같은 개념은 아직 보이지 않으므로,
영혼이 될 수 있을 만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유식설의 여행이 조금 더 필요하다.
유식설이 의식의 다음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일곱 번째 식인 말나식(末那識)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식설에서 구분 지은 여덟 가지 식 가운데 하나일 뿐인 의식을 정신 활동을 총칭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확대시켜 사용함으로써,
의식과 마음을 동일시해왔다고 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말나식과 마지막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란 용어는 유식설을 공부한 불자가 아니면 거의 알지도 못하는 단어로 변해버리고 말아서
흔히 의식이란 말을 쓸 때는 이 말나식과 아뢰야식을 포함한 여덟 가지 식의 총체적인 정신 활동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말나란 말은 범어(梵語)의 '마나스'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마나스는 '생각하다', '궁리하다'라는 뜻인데, 이 마나스가 뜻하는 생각과 궁리는,
제6의식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며 감정, 본능, 정서 등에 가까운 것이다.
유식설에서는 '혜(慧)'가 이 마나스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혜는 불교의 용어인'지혜(智慧)'에서 나온 말이다. '지(智)'가 '의심을 끊는다'는'단의(斷疑)'로 설명되며,
혜는 '분석하고, 분류하며, 선택하는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말나식은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한 궁리로서 분석하고, 분류하고 선택하는 일을 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냐, 자기에게 즐거운 일이냐,'
하는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 보존적인 에고(Ego)에 기준을 둔 궁리를 말한다.
말나식은 곧 이기의 덩어리이며 에고의 화신인 것이다.
말나식을 일명 사량식(思量識)이라고도 하는데 사량이란 '헤아려 생각함'인데 말나식의 사량은 바로 자기 이익의 정도를 헤아려 생각함이다.
이 말나식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정신 활동이다. 모든 생명체가 이 말나식에 지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당연히 말나식은 여섯 번째 식인 의식에도 영향을 미치며,
의식 역시 어는 정도 말나식을 제어하는 힘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말나식과 의식 사이의 이런 영향 관계를 이해하고 보면 의식이란 인간만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좀더 정확히는 의식의 유무 차원을 떠나 의식이 말나식을 제어하는 힘을 가진 존재는 인간뿐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덟 번째의 식이 있는데,
그것이 아뢰야식(阿賴耶식)이다. 아뢰야는 역시 범어 아라야(Alaya)에서 온 말이다. 이 아라야는 '바닥에 깔리다', '
땅에 묻히다'의 뜻을 가진 말이 명사화한 것이다.
유식설에서는 이 말을「저장해놓은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해서, 이 아뢰야식을 저장된 식이란 의미로 일명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무엇을 저장해 둔 것이냐 하면,
최초로 등장한 생명체인 단세포 생물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혹은 어떤 단계의 생물까지) 수십억 년의 진화를 통한,
그리고 억겁의 세월 동안의 윤회를 반복한 모든 삶의 경험이 기억으로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방대한 정보의 창고가 바로 아뢰야식이다.
이 아뢰야식에 저장되는 정보는 불교에서 업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 우리의 경험 전부이다.
이 경험은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삼업이라고 하는데, 육체적으로 행한 신업(身業), 말로 한 구업(口業), 그리고 마음으로 생각한 의업(意業)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행하고 말하고 생각한 모든 것은 아뢰야식에 그대로 저장되어 보관된다는 의미이다.
이 삼업이 아뢰야식에 축적되는 것을 훈습(燻濕)이라고 말하는데,
향의 냄새가 옷에 배어들 듯이 스며드는 상태와 같다는 표현이다.
또한 이 아뢰야식은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경험을 축적하고 저장하는 장식(藏識)으로서의 역할,
저장된 내용에 따라 자기의 현재와 과거가 변화한다는 업의 소재지로 보이는 측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 아뢰야식이 말나식에 의해 '자기'라는 것에 집착된다고 하는 점이 그것이다.
위와 같은 아뢰야식의 특성이 사실이라면 이 아뢰야식은 우리가 흔히 '기억'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훨씬 확대된 의미를 가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기억'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태어난 이후부터의 경험을 그 범위로 하는데 반해,
아뢰야식은 억겁의 반복 윤회를 통한 전자기(全自己)의 모든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속에는 인식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수십억 년에 걸친 진화의 과정에서 습득한 생물학적인 모든 정보까지도 함께 들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의식'이란 단어의 의미를 그 말의 출처인 유식설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우리가 마음이나 생각의 뜻으로 쓰는 '의식'은 유식설의 여섯 번째 식이다.
유식설에서 이 '의식'은 다섯 가지의 감각 기관과 말나식(에고)과 아뢰야식(잠재의식)의 영향을 받으며,
또한 자신을 제외한 일곱 가지 식에 대해서 조절과 제어를 한다고 설명된다.
이런 설명 방식으로 볼 때 유식설은 현대의 정신분석학과 대단히 유사한 체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전오식이 각각 감각기관을 그 근으로 삼고, 식이 두뇌를 근으로 하는 데 반해서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근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많다. 생명체의 자기보존 본능과 이기심이 뇌조직의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가 하는 것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두뇌생리학은 '기억'에 따른 뇌세포의 활동과 기억의 원리는 어느 정도 밝히고 있으나,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있다는 수십억 년의 진화를 거친 전자기(全自己)의 기억에 대해서는 뇌의 활동과 연계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두뇌생리학에 따르면 갓 태어난 유아의 두뇌는 뇌신경계가 성숙되어 있지 않아서 축색(신경 섬유)의 미에린 초가 완성되어 있지 않고,
뉴론(neuron,신경세포) 간의 배선이 아주 기본적인 것만 이루어져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인간의 뇌에는 약 100억 개에 달하는 뉴론이 존재한다.
각각의 뉴론에는 수많은 짧은 수상돌기가 나 있고,
한 가닥의 축색이 뻗어 있어 정보를 보내거나 받게 된다.
두뇌가 활동을 계속함에 따라 유수섬유라 하는 수초(미에린 초)가 완성되어 마치 전선의 피복처럼 축색을 둘러싸게 된다.
그런데 수초가 완전히 감싸고 있지 않은 축색은 피복이 벗겨진 전선과 같아서 신경전류가 흐르지를 못하고 주위로 새나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100억 개나 되는 뉴론이 있어도 유아의 경우에는 이 축색이 완성되어 있지 않아서 뇌세포끼리의 배선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와 같은 것이다. 이 두뇌의 배선 작업은
그런데, 여섯 번째 식인 의식의 정신 활동을 정신 활동을 관장하는 두뇌 부위인
전두엽(창조, 의욕, 정조 등에 관여)과 측두엽(판단과 기억에 관여),
그리고 두뇌후두연합야(사고, 이해, 지각, 인식을 관장)와 같은 곳은 출생시에는 거의 배선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특히 전두엽은 평생 동안 배선을 계속하지만 완성을 보지는 못한다.
두뇌활동에 대해 밝혀진 이같은 사실들로 볼 때, 의식은 뇌라는 육체 조직의 성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의식은 두뇌활동에 그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기억에 관한 두뇌의 움직임을 살펴보도록 하자.
전오식의 작용으로 외부로부터 인지된 정보가 기록되는 장소는 뇌의 거의 전 영역에 걸치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설명한 100억 개에 달하는 뉴런(뇌세포)에서 뻗어나온 축색은 그 끝이 여러 가닥으로 갈라져 다른 뉴런의 수상돌기와 연결되어 있다.
약간 불룩한 모양을 하고 있는 이 부분을 시냅스(synapse)라 하며,
하나의 뉴런에서 다른 뉴런으로 전해지는 전기적인 정보가 이 곳에 이르면 시냅스 안의 소포에서 아세틸콜린이나 노르아드레날린과 같은
화학전달 물질이 방출되어 정보를 받는 뉴런에 전기적인 흥분을 일으키게 된다.
하나의 뉴런은 약 8천 개의 다른 뉴런과 이 시냅스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으며,
전기적인 흥분을 같이 일으키는 약 2천5백 개 정도의 뉴런이 집단 단위로 반응한다고 한다.
이것을 신경세포 집단이라고 하여 뇌 속에서 정보가 전달되는 기본 단위로 보고 있다.
이 뉴런 집단을 모듈(module)이라고 부르는데,
인간의 뇌 속에는 약 2백만 개의 모듈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의 모듈은 각기 20개의 다른 모듈에서 정보를 받고 또 20개의 다른 모듈에 정보를 건네준다.
이 모듈이 하나의 정보를 정리하는 단위이며,
이 모듈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특정한 전기적 흥분을 형성하는 패턴을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패턴이 만들어지면 이것은 일정한 기간 동안 유지된다. 이때 전기적 흥분의 강도가 강할수록 오랫동안 보존되며,
또 같은 패턴이 반복해서 형성될수록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남아 있다는 것은 특정 형태의 패턴이 전기적인 흥분을 유지한 채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전기적 흥분이 가라앉은 다음에도
특정한 패턴을 정의하는 하나의 부호가 별도로 정리되어 저장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부호를 호출하는 순간 동일한 모듈에서 같은 패턴의 전기적 흥분이 재생되어 기억을 되살릴 수 있게 만드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특정 패턴을 지정하는 부호를 상실했을 경우에는 기억이 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뇌에는 정보에 반응하는 모듈들의 집단과는 별도로,
한번 형성된 패턴의 호출 부호를 저장하는 영역이 별도로 있지 않나 추측된다.
컴퓨터에서 데이터 파일을 검색할 때 별도로 만들어 두는 인덱스 파일과 비슷한 개념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두뇌생리학 관점에서 볼 때 신생아의 경우는 기억의 장소인 두뇌에 형성된 패턴이 거의 없는 상태이므로,
탄생 이전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 어떤 장소가 두뇌와는 별도로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이 성립된다.
만약에 그 장소가 두뇌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이라고 하면 아뢰야식의 근(根) 역시 두뇌가 아닌 그곳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억겁의 생과 진화 과정을 통한 모든 기억은 어디에 저장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추론해보기 위해서 유식설을 조금만 더 개관해 보기로 하자.
불교에서는 기억을 종자(種子)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 종자를 본유종자(本有種子)와 신훈종자(新燻種子)로 구분해서 보고 있다.
본유종자는 바로 아뢰야식에 저장된 전자기(前自己)의 모든 기억과 경험이고,
신훈종자는 바로 현생에서의 체험과 기억들이다.
그렇다면 본유종자는 태어날 때 이미 뇌 세포 속에 패턴으로서 기명(記銘)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만약에 아뢰야식의 저장된 내용들이 두뇌를 근으로 삼는 것이라면 현생의 기억처럼 우리는 전생의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본유종자가 기명은 되어 있으나 재생이 안 되는 정보로 두뇌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
이 경우에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불러일으킨다.
즉, 이 재생 불가능한 정보들이 어느 단계에서 어떤 경로를 통하여 인간의 두뇌 속에 기록되어 지는가 하는 의문 말이다.
그런데 이 의문에 앞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단계나 경로를 따지기 전에 과연 한 인간의 아뢰야식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다가,
새로이 잉태된 생명의 두뇌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인가?
양친으로부터 전해지는 것이라면 부모는 2세의 아뢰야식을 형성하는 모든 본유종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가정이다. 한 인간의 본유종자는 자기 자신의 것이지 부모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유식설의 여덟 가지 식이 근으로 삼는 것을 살펴보면 전5식은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을 그 근으로 삼고
제6식인 의식은 두뇌를 근으로 삼으며
제7식인 말나식은 이 감각 기관들과 두뇌를 전부 포함하는 육신의 세포 하나하나에 모두 심어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제8식인 아뢰야식은 그 근으로 삼는 처소가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훈습이라고 하는 것은 향의 냄새가 옷에 스며드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이런 냄새는 사실 옷의 조직에 뿌리를 박는 것이 아니고
옷 주위를 냄새의 분자가 안개처럼 감싸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로 볼 때 다른 일곱 가지 식이 육신의 각부분에 뿌리를 박고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아뢰야식은 육신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어떤 기운과 같은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일곱 가지 식들은 육신과 분리해서 존재할 수 없는 반면에 육신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육신 주위를 안개처럼 감싸고 있는(즉 훈습된) 아뢰야식은
육신과의 분리가 가능한 유일한 영적인 요소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후(死後)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영혼이란
이 아뢰야식이 물질계가 아닌 별도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고 볼 때만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그 이유를 설명해 나가겠지만,
사후의 영혼을 의식과 같은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의식은 두뇌라는 육신과 결합되어 있는 육신적인 정신 활동이어서 생명이 끝남과 동시에 의식의 작용도 끝나는 것이다.
살아 있을 때에는 정보의 성격이 두뇌의 정보 처리 방식과 일치하지 않아서 결코 재생되는 법은 없을지라도,
새로운 탄생의 이유가 되는 비육신적인 정보 체계인 아뢰야식만이 사후에 존재하는 자기의 실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혼이던 아뢰야식이든, 물질계와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는 이 엄청난 정보의 덩어리는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를 고찰해보기 위해
나는 앞의 '물질의 본질'에서 물질의 본래 면목인 정보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생명체의 육신을 포함해서 시공간 상에 모습을 가진 모든 물체는 물질의 정보를 주고받는 상호 관계에 의해서
에너지가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 것으로 밝혔던 것이다.
태초에 에너지와 정보가 있었다.
양자 실험에 의해서 물질의 정보들은 입자들이 분리되어도 시공간을 초월해서 입자들을 연결시키고,
그 관계를 유지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미시 세계의 원리로부터 우리는 물질의 본질 가운데 하나인 정보가 시공간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며,
물리적 인 원리와도 무관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정보들은 물질계에서 작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시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물리 법칙을 따른다고 볼 때,
그런 법칙에서 벗어나 있는 정보들은 시공간적인 존재가 아닌 것이다.
앞에서 본 닐스 보아의 광자 실험에서 쪼개진 원자핵에서 튀어나간 두개의 광자는 몇 광년의 거리를 날아간다 할지라도
물리적인 세계에서 허용되는 최고 속도인 광속을 넘지 않으면서 멀어져 간다.
그러나 이 두 광자 중 하나가 정지하는 순간 거리에 관계없이 반대편의 광자도 정지한다면
분명히 두 광자 사이에는 분명히 정보가 전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보는 몇 광년의 거리로 멀어진 두 광자의 사이를 얼마만한 속도로 흐르는 것일까?
두 광자가 동시에 멈추었다는 사실은 정보가 전달되는데 걸린 시간이 0이었다는 이야기다.
시간이 제로라면 속도는 곧 무한대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입자는 광속에 제한을 받지만 두 입자 사이의 정보의 전달은 무한 속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공간 내에서 무한 속도인 어떤 존재는 그 시공간내의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움직이는 데 걸리는 시간이 0이라면 이 존재는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보는 아무리 작은 입자들 간의 것일지라도 이 우주의 모든 곳에 동시에 있기 때문에 조금의 시간도 걸리지 않는 절대 동시에
똑같이 양쪽의 입자에게 전달된다. 속도가 무한하게 빠르다는 것은 곧 두 지점간의 거리의 값이 0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광자 사이의 정보 전달이 시공간을 초월한다고 할 때,
정보의 전달 속도가 무한 속도인지 아니면 전달 거리가 무한소인지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 의문을 갖게 된다.
나는 후자가 보다 정확한 개념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한번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결합된 물질은 물질적인 존재로서의 거리는 시공간 내에서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정보적인 존재로서는 거리를 갖지 않는 하나의 통합체가 되는 것이다.
속도가 무한대이건, 거리가 무한소이건 무한이란 것은 물리적으로 따질 수 없는 양이어서 무한의 존재는 물리적으로는 부재(不在)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무한대의 속도를 가지고 특정 지점간의 이동에 걸리는 시간이 0인 물질, 또는 무한소의 거리를 가진 두개의 지점간의 정보는 시공간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물질의 입자들은 시공간내의 존재들이지만 그 입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모두 상대적인 관계에 의해서인데,
이 관계를 성립시키는 아(我)와 타(他) 사이의 정보는 시공간의 존재가 아니다.
존재하긴 하지만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입자가 분리된 이후에도 정보가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면 물질의 입자들이 시공간에 남아 있는 한,
모든 물질의 결합 관계는 정보의 세계(정신계)에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입자들은 시공간 내에서 이합집산을 반복하겠지만 결합의 기억들은 별도의 정보계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 정보들은 거리가 아닌 즉각적인 관계의 그물이다.
또한 물질의 입자들은 보다 상위의 물질로 결합될 때, 낱낱의 입자들이 가진 정보들이 결합하여 새로운 상위 정보를 형성하고,
그 통합적인 정보에 종속되는 새로운 물질로 바뀐다는 것도 알아보았다.
여러 개의 원자들이 모여 분자를 이룰 때뿐만 아니라,
분자들이 모여 하나의 물질을 이루게 되면 모든 분자들은 새롭게 형성된 물질의 속성을 지닌다는 것도 설명했다.
나무는 나무대로, 철은 철대로, 물은 물대로, 흙은 흙대로 각각의 고유한 성질을 나타낸다.
이러한 물질들은 전기적이거나 화학적인 여러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외부와 반응하게 되는데,
단순한 형태의 바꿈뿐만이 아닌 보다 조직적이고 규칙적인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분자들의 결합체인 물질에서 개개의 분자들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반응과 조직을 보게 되는 예는 자연계에서 수없이 많다.
유명한 화학 반응인 벨루소프-자보틴스키 반응(Belousov-Zhabotinski reaction)을 보면 시험관 속의 규칙적으로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도형을 그려낸다.
그런데 이러한 도형은 화학 법칙이나 물리적인 규칙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물질의 본래적인 조직성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물질은 그것이 가진 정보에 따라 외부와 반응할 때에 물리적인 법칙을 벗어나는 여러 모습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은 아닐지라도 물질이 가지고 있는 고도의 정보들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물리외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질이 가지고 있는 정보들이 보다 고도의 복잡하고 정교한 상태로 결합되어 가면서 정보계(생명 현상에 보이는,
의식이라는 특수한 정신 활동의 세계인 정신계에 대비하여,
그 이전의 비물질 세계를 편의상 정보계라고 이름 붙임)에는 이러한 물질들의 정보들이 축적되고 보존되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계의 정보들은 역시 물질계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다 상위의 정보계에 축적된 정보 구조들이 물질계의 에너지와 작용하면서 마침내는 생명이라는 가장 복잡한 물질적 구조물
과 의식이라는 고도의 정보 구조에 도달하게 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앞서 설명한 아뢰야식이란 본유종자는 생명체가 있은 이후에 생명체의 후신(後身)으로서 정신계에 존재하게 되었다기보다는,
생명이 물질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의 모든 물질들의 결합된 정보 구조들이 오히려 아뢰야식의 전신(前身)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물질들의 정보 구조가 생명이 최초로 발생할 때에 그 첫 생명의 아뢰야식이 되었을 것이다.
생명은, 에너지와 정보를 본질로 하는 물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영혼은 바로 그 물질의 정보 구조가 존재하던 정보계로부터 넘어온 것이다.
생명의 아뢰야식이 있기 이전에 물질의 정보 구조들이 정보계에 있었으며,
정신계는 비물질계에서 새로이 형성된 한결 차원이 높은 고도의 정보구조들이 모인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러한 정보들이 어떤 형태로 어떤 법칙에 의해서 어디에 존재하는가는 물리적인 관점에서 따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시공간의 법칙에 구속되지 않으며, 따라서 물리적인 의미의 존재 개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계를 생명계의 정신계와 물질계의 정보계로 나누는 것은 개념적인 구분이지 실제로 공간적인 위치의 구분은 아니다.
이제 이 생명과 생명의 특징인 마음의 작용에 대하여 살펴볼 차례이다.
두 번째 여행-물질과 생명 5
생명과 마음
생명은 특정한 물질들이 아주 특수한 형태로 뭉쳤을 때,
원래 비생명체였던 물질들의 정보가 서로 결합되어 이루어 진 통합적 정보의 구조를 가지게 되는 신비한 어떤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생명체가 가지는 자기에 대한 애착은 비생명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성질인데,
이 자기라는 것은 유식설의 8식 가운데 말나식에 깃들여 있다고 하는 에고 (Ego)이다.
생명체에게 자기에 대한 집착은 물질과 구별되는 두 가지 특성으로 나타난다.
자기 생명의 유지와 자기와 같은 생명체의 복제, 이 두 가지가 그것이다.
생명의 유지에는 끊임없는 에너지의 공급이 필요하므로 생명체는 자신의 외부 환경으로부터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어떤 형태로던지 영양을 섭취하는 것이다.
물질도 다른 물질과 결합과 분리 혹은 화학적 반응을 하지만
외부의 물질이나 에너지를 흡수해서 자기에게 필요한 특수한 성분으로 재생산해 내는 능력은 없다.
철이나 물 또는 바위나 모래 같은 것은 특정한 원자들이 특정한 형태로 결합되어서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이 물질들은 열이나 충격 또는 바람과 같은 외부의 힘에 의해 물리적 법칙대로 뭉치기도 하고 분리되기만 할 뿐,
그러한 외부의 환경에 대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즉, 모래는 현재의 모양을 그대로 가진 모래로 계속 남아 있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비생명체는 자기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하며 그것에 필요한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끌어오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정체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하여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어 두는 놀라울 정도의 집착을 보인다.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차이점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차이점들을 만들어 내는 근원적인 힘은 바로 이 '자기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한 집착은 바로 유식설의 말나식이라고 할 때, 생명체란 '말나식이 심어진 물질'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말나식은
정신계에 존재하는 아뢰야식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 아뢰야식은 최초의 생명체가 발생하기 이전에는 식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하나의 복합적이고 조직적인 구조의 정보로서 존재했을 것이다.
이 정보는 자연계에서 수백 억 년이라는 기간을 걸쳐 수천만 가지의 각기 다른 자연적 환경 속에서 우연에 의해 결합된 무량수의 유기적 결합물들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조직적인 유기화합물의 정보 구조들이 최초의 생명체에 말나식을 부여하게 되는 전(前) 아뢰야식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부처님은 무명(無明)이라 이름하고 인연의 시발점으로 보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한번 생명이라는 것으로 자연계에 인입(引入)된 말나식은 최초의 존재 이후에는 스스로의 집착력을 갖고 자신의 존재를 확보해 나갔는데,
자기복제라는 번식의 형태가 그것
이다.최초에 말나식이 부여한 것은 자연계에서의 개체의 존재를 위한 에너지의 섭취였을 뿐 자기 복제를 통한 생명의 유지 능력은 억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서서히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말나식이 깃들인 물질(최초의 생명체)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생명체가 아니라 반(半)생명체였을 것이다.
찰나지간에 생명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는 다시 비생명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이 때의 생명은 그 생명체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가 극히 소량이고 그것의 흡수나 이용이 완전치 못해서 생명과 물체 사이를 수없이 되풀이 오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외부의 환경이 극히 이상적일 때는 잠시 생명체가 되었다가 금새 무생물로 돌아가는 반생명체들이 지상에 엄청난 숫자로 나타났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와 같은 반생명체는 우리가 바이러스(Virus)를 들 수가 있다.
바이러스는 생명체의 세포 밖에서는 무생물로서 시간에 관계없이 존재하다가 생명체의 세포 속으로 들어가면 생명체와 같이 신진 대사를 하고 자기 복제를 행한다. 이런 반생명체가 생명 현상을 보였다가 물체로 돌아갔다가 하는 억겁의 반복을 되풀이하면서 점차로 정보의 구조가 한층
활기를 띠게 되고, 그에 따라 말나식을 더욱 강화하는 아뢰야식을 형성해 갔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반생명체로서의 모든 경험과 정보의 축적은 말나식을 강화해서 자신을 유지시키는 더 적합한 방법을 찾아내게 되었을 것이다.
반생명체 상태의 오랜 기간 동안 영혼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것들의 본유종자(아뢰야식)는 찰나지간에 깜빡거리는 위태로운 생명현상을 보다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갈 수 있는 방법-외부의 환경으로부터 보다 용이하게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는-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前) 생명체들은 개체의 수명만으로 끝나게 되었고, 그것들의 축적된 고도 정보체들은 드디어 개체의 존속을 보다 장기간 유지시킬 수 있는 경탄할 만한 길을 발견해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복제에 의한 위험의 분산이었다.
정신계에서 축적되면서 유지되는 아뢰야식의 영향으로, 말나식이 전(前) 생명체들에게 그들 자신 극히 취약하며 자신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항상 외부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할 정도로 복잡하게 발달하게 된 것이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나식의 무서운 집착은 우주적인 힘으로 생명체를 존속시켜왔다.
외부의 위험에 대한 가장 안전한 방어책은 수많은 자기를 만들어 놓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생명체는 생명 현상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 자신을 복제해 놓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자기 복제가 가능한 정보의 결합 방식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억겁의 세월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기복제가 가능한 방식으로 물질이 결합된 진(眞) 생명체만이 생명계에서 발전을 계속할 수 있었고,
그밖의 방식으로 물질이 결합된 반생명체들은 생명계의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반생명체들은 오늘날에도 수없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자기 복제를 하지 못하고 생명의 유지 기간이 극히 짧기 때문에 우리에게 발견되지 않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니면 생명 현상을 보이는 기간이 너무 짧은 찰나여서 비생명체로 보일 뿐인지도 모른다.
수없이 존재하는 전(前) 생명체로부터 이 시간에도 새로운 바이러스들이 탄생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뮐러의 실험은 그 실험 환경이 다분히 작위적이고 인공적인 것이긴 했으나
자연계에서 우연에 의한 유기 화합물의 탄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리고 물질은 완전히 비생명적인 것이 아니라 무형의 에너지와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으로부터
생명이라는 가장 복잡하고 고도로 조직적인 구조의 정보가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양자론의 실험 결과들과 유식설의 이론에서 물질의 정보들은 그 결합 관계의 내용들이 물질계가 아닌 또 다른 세계에 저장, 보관되며
다시 물질계로 순환된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게 되었다.
과학이 발견해낸 많은 새로운 사실들 때문에 생명의 발생을 추측해볼 수 있게 되었다.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2천5백년 전과는 모든 것이 달라졌고 그만큼 설명하는 방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과학의 기초인 양자론과 불교의 놀라운 정신 이론인 유식설을 결합시키는 이러한 가설을 무시하고
생명의 발생에 대한 타당한 이론을 세울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설을 정리해 보면 두 가지다.
우선, 모든 물질은 살아있는 활력(에너지)과 정보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그 자체가 이미 생명적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에너지는 물질계에서 존재하는 입자들로 나타나 우주를 구성하는 성분이 되며,
정보는 물질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보존되고 있다가 물질계와 교류되면서 생명 현상을 일으키고,
또 생명의 사후에도 아뢰야식으로 남아서 새로운 생명으로 전이되는 영혼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생명체 이전의 비생명체들 간의 정보들을 식이라고 할 수는 없으므로 생명 이전의 정보들은 바로 전(前) 아뢰야식으로 보아야 한다.
이 전(前) 아뢰야식이 최초의 말나식을 불러일으킨 것이 생명이며,
이 생명이 생명 현상을 중단한 이후에 정신계에 존재하게 된 정보가 바로 첫 생명의 아뢰야식일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에 우리는 유식설의 8식이 성립하는 순서를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물질의 본유종자로부터 최초의 말나식이 생겼고,
이 말나식이 존재했던 생명으로부터 아뢰야식이 나왔으며,
생명체를 구성하게 된 말나식과 점차 많은 정보가 덧쌓여간 아뢰야식은 오랜 세월을 통해 조금씩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을 인식하는 기관의 형체를 갖추는데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 기관의 발달은 각각의 기관에 근(根)을 둔 식을 개발하여 갔을 것이다.
이렇게 전5식이 형성됨에 따라 억겁의 세월 동안 이런 감각 기관을 통해 외부의 정보를 처리했던 경험은 마침내 다섯 가지 감각을 종합적으로 해석하는 하나의 기관, 즉 두뇌를 만들게 되고 뇌가 나타남에 따라 드디어 여섯 번째 식인 의식의 등장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본다면,
물질의 본유종자(에너지와 정보)로부터 아뢰야식의 전신이 생겼고 이것이 보다 복잡한 것으로 축적됨에 따라 말나식을 일으키고 아뢰야식과 말나
식의 작용으로 생명이 있게된 후에 전5식이 생겼으며 그 연후에 마지막으로 의식의 불타오르게 된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것을 동물의 발달 단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물들 중에서 최초로 신경섬유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강장동물(해파리, 산호, 말미잘)부터이다.
이 이전의 미생물이나 식물은 전오식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감각을 해독하고 판단하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말나식과 아뢰야식만이 존재하는 생명인 것이다.
강장동물부터 신경섬유망이 보인다는 것은 이 단계의 생물부터는 외부의 자극인 더위나 추위 또는 압박 같은 감각을 느낀다는 것이다.
감각을 느낀다는 이야기는 그 감각이 전달되어 어딘가에서 집중되고 처리된다는 의미이다.
그 다음으로 편형동물(플라나리아, 흡충, 디스토마), 연체동물(문어, 낙지, 달팽이), 환형동물(지렁이, 갯지렁이, 거머리), 절족동물(거미, 전갈, 갑각류, 곤충류)의 순서대로 신경세포가 발달하고 집단화되면서 뇌의 전신(前身)이랄 수 있는 뇌신경절이 보이기 시작한다.
뇌와 척수가 구별되기 시작하는 건 척추동물부터이다.
이와 같이 육신의 감각 기관과 감각의 해독 기관인 뇌가 발달함에 따라 의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6식인 의식은 반드시 전5식과 7식인 말나식, 그리고 8식인 아뢰야식을 전제로 하고서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전오식이 멈추어버린 사후에 의식이 존재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자고 있을 때나 기절했을 때 또는 마취를 당했을 때나 최면에 빠져있을 때도 전오식은 닫혀져 있는 상태이므로 의식은 없다.
꿈이라던가 영혼의 작용으로 보이는 어떤 현상들은 의식체의 활동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유사 의식이며 의식과는 분명히 다르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후 세계와 영혼을 다루는 뒷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지금 이 이야기들은 모두 사후에 존재하는 영혼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도입부인 셈이다.
또 한가지 생명체를 논할 때 생각해볼 일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체를 이루는 물질의 결합 방식이다. 생명의 등장기에는 셀 수조차 없는 무량한 가짓수로 유기체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 중에 많은 것들이 하나의 전(前) 생명체들로 생명계와 비생명계의 문턱을 넘나들었을 것인데,
현재 이 지구상에 생명체로서 존재하는 유기 물질의 형태는 오직 한 가지 뿐이다.
소수의 특정한 원소들이 특별한 한 가지 형태로 결합했을 때만 생명으로서 지속이 가능했던 때문일 것이다.
이 소수의 특정한 물질들은 스무 종류의 D형 아미노산, 다섯 종류의 핵산염기 그리고 D형 포도당이며,
특수한 형태란 바로 유명한 이중 나선형 구조인 RNA와 DNA의 결합 방식을 말한다.
왜 이러한 물질들이, 오직 그러한 형태로 결합되어야만 생명이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생물체의 경우, 이와는 다른 원소들이 다른 형태로 조직되어 만들어진 것은 발견되고 있지 않다.
박테리아로부터 고등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같은 물질이 같은 형태로 모인 똑같은 타입의 생명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상의 생명체를 모두 동일한 형태의 생명으로 보고 이것을 DNA 형식의 생명체라고 부른다.
다른 형태의 생명체를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세계에서 생명체가 될 수 있는 물질의 결합 방식은 오직 이 한 가지뿐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스무 종류의 D형 아미노산과 다섯 종류의 핵산염기와 D형 포도당이란 원소들을 재료로 해서 RNA와 DNA라는 이중 나선형 구조를 착오 없이 재현해서 결합하기만 하면 생명이 발생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즉 생명은 특정 물질이 특정 형태로 결합하기만 하면 무조건적으로 발생하느냐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다.
아마 인간이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원소들을 조립해볼 수만 있다면 그 결과를 가지고 그렇다 아니다를 말할 수 있겠지만 인간은 이와 같은 유기체를 조립할 수 있는 기술이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미 조립이 끝나 있는 하나의 RNA와 DNA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정보를 해독하는데도 역부족을 느끼는 정도다.
게놈이라는 유전자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지만, 인간의 유전자에 대한 정보가 완전히 해독되는 데는 앞으로 수십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설령 유전자 정보를 완전히 해독해 낼 수 있다 하더라도 수천 만개의 원소를 조립하는 기술은 영원히 가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인간은 겨우, 수천만 개의 소자가 극히 단순한 논리 회로로 연결된 손톱크기 만한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데까지 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가정이 허락되어, 인간이 이와 같은 유기물질을 그대로 조립해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리고 생명 현상이 발생하는 가장 적합한 환경--예를 들어 온도, 습도, 대기의 상태, 태양광선의 강도 또는 번개와 같은 전기적 충격--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 대로 재현해줄 수만 있다면 이 원소들이 결합했을 때 기계적으로 생성되는 통합적인 정보 구조 속에서, 어느 순간 이 유기 물질이 생명 현상을 나타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수십억 년이라는 세월을 통해서 자연이 발견해낸 하나의 우연적인 상황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은 모르고 있고, 설령 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재현해 낼 기술이 없기 때문에 생명의 창조는 불가능한 영역 속에 남아 있다. 게다가 자연은 인간의 실험실과는 달리 어떤 구조의 유기화합물을 수천억의 무량한 수만큼 대량으로 만들고 또 수억 년의 세월 동안 그 생산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대량의 장기적인 반복 실험은 인간의 실험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어떤 우연의 가능성이 1천억분의 1이라 할 때 실험의 횟수가 수천억 번 또는 수천억 번의 백배 천배에 이른다면 어떤 우연의 발생 가능성은 1백퍼센트일 것이다. 우리가 자연에서 만나게 되는 믿기 어려운 우연들은 자연이 되풀이한 실험의 회수와 기간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기적적인 것으로 보일 뿐이다.
우연이건 필연이건 생명의 탄생을 생각해 볼 때, 창조 또는 발생이란 말은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생명은 창조되거나 탄생한 것이 아니라 오직 발전해 왔을 뿐이며 우주의 모든 물질 자체가 본질적으로 생명인 것이다.
생명체를 이루는 유기체는 수백만 개의 원자들과 분자들이 반도체 메모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도로 복잡하고 특수한 상태로 연결되면서도 그 크기가 만분의 밀리밖에 안 되는 세포의 핵 속에 들어 있다. 나는 인간이 앞으로 이백 년, 넉넉하게 잡아서 삼백 년 후에는--물론 환경 파괴, 자원의 고갈, 핵전쟁 등으로 멸망하거나 문명과 과학의 진보에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면--이러한 유기체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생명의 신비는 모든 과학자, 철학자, 신학자들에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종교에서는 여러 가지 교리로 생명을 설명하고는 있지만 과학적 사실들과 부합되면서 교리체계 내에서 모순을 갖지 않는 경우는 불교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불교조차도 직관과 통찰에 의한 설명일 뿐, 각론으로 들어가면 설명이 아주 부족한 상태이다. 그래서 불교를 두고 "2층부터 옥상까지의 계단은 완비되어 있으나, 1층에서 2층으로 가는 계단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앞에서 살펴본 유식설의 경우에도 팔식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설명하고 있지 않다. 불교에서 말하는 식은 인간을 설명한 오온인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 중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고, 이 식을 따로 떼어 설명한 것이 유식설이다. 그런데 이 오온에 대한 설명 역시 불완전하며, 오온의 출발점인 색의 시작에 대해서도 설명이 없다. 12연기법도 마찬가지이다. 무명(無明)에서 시작해서 노?老死)에 이르는 12단계의 연기에 대해서는 그 뜻을 설명한 수많은 논과 소와 해설서들이 있지만, 정작 12연기의 출발점인 무명에 대한 명확한 정의나 설명이 빠져
있는 것이다. 바로 1층에서 2층으로 가는 계단의 부재다. 뒤에 가면 12연기에 대한 설명이 나올 것이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인 ‘마음의 귀향--반야’ 편에서 오온에 대하여 설명을 할 참이다. 나는 이 책이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지 못하는 많은 분들에게 계단은 못되더라도 하나의 디딤목 역할은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종교나 과학 또는 철학의 첫 번째 계단은 바로 생명의 근원이다. 그리고 마지막 종착지는 생명 이후의 일이다.
생명의 이전과 이후를 알고 현재의 생명에 대해 알게 된다면 이
세계의 전부를 아는 것이다.그러니까 첫 번째 계단은 생명의 근원, 그 시작을 아는 일이다. 이것을 알지 못할 경우,
아니 최소한 하나의 전제로라도 결정해놓지 않으면 다음 발자국을 내디딜 수가 없다.
어디서 온 것인지를 모르면서 어디로 가는지를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생명의 시작에 대한 이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서 나는, 생명이란 물질 본래의 진면목이었다고 대답하고 싶다.
즉, 모든 물질은 살아있는 존재이므로 우리가 특별히 생명이라 말하는 것의 특성과 그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살아 있는 활력(에너지)과 정보는 바로 생명의 본질과 상통하는 것이어서 물질로부터 생명이 나타난 것은 조금도 신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연적이고 지극히 당연한 일이 발생한 것일 뿐이다. 자기에 대한 집착(말나식, 무명)이 발생한 물질이 바로 생명체인 것이다.
물론 이것 외에도 생명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생물학자에게 던져 본다면, ‘자기복제의 능력’, ‘신진대사’, ‘자극에 대한 반응’등 여러 가지로 대답하게 될 것이다. 물리학자에게 물어본다면 생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서 고도의 ‘복잡성’과 ‘조직성’을 들지 모른다. 어떤 원시적인 단계의 단세포 생물조차도 인간이 만든 가장 정교한 기계보다도 더욱 복잡한 활동을 하고 조직적인 반응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물리학자는 설명할 것이다. 만약, 철학자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자유의지’나 ‘마음’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종교학자는 ‘영혼’이라는 말로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와 종교학자의 대답에는 중요한 문제가 들어 있다. ‘마음’과 ‘영혼’에는 별도의 정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혼에 대해서는 이 책의 두 번째 여행인 ‘영혼과 사후세계’에서 다루기로 하고 그에 앞서 마음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앞에서 나는 유식설을 기대어 의식이란, 육신을 근으로 삼는 전오식과 세세전생을 통하여 유지되면서 윤회하는 아뢰야식과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에 아뢰야식으로부터 발아되는 말나식을 포함한 칠식의 선재(先在)를 전제 조건으로 하여, 생명체인 한에만 유지되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육신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영혼이란 아뢰야식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우리는 영혼, 의식, 정신과 마음을 뒤섞어 쓴다. 그러나 그 중 어느 것도 ‘마음’의 실체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이 마음의 출처를 알기 위해서 앞서 말한 생명의 발생 과정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도록 하자.
물질이 결합할 때, 그 구성 원소의 정보들이 결합되어 상위의 통합된 정보를 이루게 되고, 이 고도로 조직된 정보 관계의 내용들이 본래종자로써 정신계에 존재하고 있다가, 특정한 물질이 특별한 형태로 결합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말나식을 일으킴으로서 생명현상이 시작된다고 하는 것과,
이 말나식과 아뢰야식은 신경 계통과 뇌라는 육신의 근에 선재(先在)하는 것이라야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아뢰야식과 말나식이 생기면, 생명체로서의 기본적인 정신은 갖추어지는 셈인데,
의식이 형성되기 전에는 마음이라는 것은 아직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눈, 귀, 코, 혀, 신체의 오근이 생겨 전오식이 눈을 뜨고,
이 전오식을 받아들여 해독하는 의식의 근인 뇌가 생기면서 전오식과 말나식, 아뢰야식의 상호 작용으로 의식의 불꽃이 타오
르기 시작한다. 이 의식이 전오식과 말나식, 아뢰야식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작용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여덟 가지 식의 총체적인 작용을 우리는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마음은 각 식의 근에 따라 일부는 육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일부는 정신계의 존재들과 뒤섞여 있는 상태이다. 아뢰야식은 뇌세포와 같은 육체 조직 속에 전기적인 신호나 신경 세포의 형성과 같은 물리적인 시그널(signal)이 아닌 무형의 영적인 시그널로 생명체와 결합되어 있다. 때문에 마음은 완전히 육체적인 것도 아니고, 완전히 영적인것도 아닌 두 가지 상태의 혼재물인 것이다. 아직까지 대뇌생리학은 마음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뇌에서 진행되는 전기적 신호의 활동이 어떻게 복잡한 심리 상태를 형성하고 우리의 마음에 전달되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어떤 심리학자나,
정신의학자나 물리학자도 마음을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적 화학 반응으로 단정짓지 않는다. 이런 뇌의 활동 결과로 형성된 의식을 성격, 정서, 의지 등의 고차원적인 정신 활동으로 전환하여 활용하는 마음은 전혀 별도의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물질계와 정신계를 통틀어서 가장 특이하고도 중요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철저하게 자기만의 것으로서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속하며,
다른 누구도 관찰할 수 없는 ‘기밀성’과 단위를 가지지 않아서 측정이 불가능한 ‘불가측성’이 그것이다. 이 말은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남의 마음을 측정하거나 엿볼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한 예로, 뇌파는 뇌에서 발생하는 전기적 신호의 성격을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
특정한 뇌파로써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는 없다. 수면 중의 뇌파 측정은 피측정자가 꿈을 꾸고 있는 중이라는 추측은 할 수 있게 해주지만 어떤 내용의 꿈을 꾸고 있는 지는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뇌파 측정도 그렇지만 거짓말 탐지기라는 것도 인간의 마음을 측정하는 장치는 아니다. 이것은 어떤 사실을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의 혈압이나 맥박의 수, 체온의 변화 또는 땀의 유무와 같은 생리적인 변화를 감지해
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의 근거를 제시해주는 기계 장치이지 정확하게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장치는 아니다.
그래서 법적으로도 거짓말 탐지기의 측정 결과는 참고 자료일 뿐 증거로 채택되지 못한다.
측정의 수단이나 감지의 방법이 없다는 면에서 마음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기는 아주 어렵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한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처럼 마음의 존재는 1인칭으로밖에는 말해질 수 없다.
마음의 존재는 마음을 가진 그 사람 본인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뿐, 타인에 대해서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미루어 알 수 있기는 하다. 마음을 가진 자기와 비슷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 말과 행동의 배경인 마음의 존재를 짐작하여 아는 것
이다. 그런데, 상대가 사람이 아닌 동물일 때, 우리의 판단은 애매해 진다.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의 경우,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확실히 있다고 입증하기도 어렵다. 하급 동물로 내려가면 갈수록 마음의 존재 유무를 짐작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하급 동물들은 그저 프로그래밍된 자동 기계와 비슷한 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식물이나 물체의 경우에도 마음의 존재는 무척이나 애매하다.
옛사람들은 성황당의 고목나무에 신비스러운 영이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런 영의 작용인 듯한 사건들도 가끔 있었다.
산행을 하는 산악인들은 모든 산에서 산의 마음을 느낀다고 한다.
물론 산신제나 용왕제를 지내는 무속인들은 산과 바다의 영을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최근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가이아 이론’은 지구 자체가 하나의 의식체로서 활동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음은 인간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산이건, 바다건, 지구이건 아니면 나아가서 우주 전체건 간에 자기 자신 외의 다른 대상의 것은 추측할 수 있을 뿐 그 존재를 입증할 수는 없다.
두 번째로 마음에는 단위를 부여할 수가 없다.
분노의 세기나 슬픔의 깊이나 기쁨의 정도를 나타낼 수 있는 측정 단위를 결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나 의심의 정도는 수치화가 불가능하다.
근래에 기(氣)를 통해서 마음의 측정 가능한 단위를 모색해 보는 시도가 있기는 하다.
생명체의 기를 열이나 압력 또는 무게와 같이 계측기를 통하여 측정하려고 하는 이러한 연구는,
그러나 아직까지 가시적인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물론 어떤 마음의 강도가 그대로 기에 반영되는 것이냐 하는 것도 밝혀진 바가 없다.
이 기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별도의 여행을 떠나 볼 생각이다.
이렇듯이 마음은 타인에게 관찰되지 않으며 계측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에 인간이 2백억 개에 달하는 뇌세포들 간의 전기적 신호 교환의 법칙과 비밀을 완전히 파악하게 된다 하더라도 마음 자체를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뇌세포의 전기적 활동의 결과인 의식과 육신이라는 형태로 구성된 수조개의 세포들 모두에 심어진 말나식과 육신 외적인 존재인 아뢰야식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현상이지 결코 뇌세포의 전기적 활동의 소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과 감정에 근본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것은 사실 그 사람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성격은 확실히 선천적이며, 교육이나 환경 등 후천적 영향으로 크게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격을 형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아뢰야식에 저장된 전(前) 자기의 모든 경험으로 보인다.
성격의 존재를 빼놓고 마음을 논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선천적인 성격이다. 그런데 이 성격이 육신을 근으로 삼고 있지 않은 아뢰야식에서 오는 것이라면 뇌의 연구만으로 마음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아뢰야식의 존재 때문에 이 마음은 그 소재지조차도 분명치 않아 보인다. 마음이 머리 속에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은 선(禪)의 수행을 통해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머리 속에
있는 것은 팔식 가운데 의식뿐인데, 의식을 비운 무의식 상태에서도 마음이 활동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을 잘 때, 전오식이 닫히는 순간 의식은 같이 잠들지만 말나식과 아뢰
야식은 잠들지 않는다.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 놓고 잠자던 주부가 아기의 조그만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는 것이나, 도둑이 들었거나 불이 났을 때 위험을 감지하고 눈을 뜨게 되
는 것은 잠자는 순간에도 말나식은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말나식이 의식에 경보를 내려서 의식이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아뢰야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성격과 말나식에 기반을 둔 에고(Ego) 모두에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 마음의 작용이 바로 감정이다. 분노, 슬픔, 기쁨, 우울 등의 감정은 뇌세포
의 활동이 아니라 오히려 뇌세포의 활동을 조절하거나 제어하는 화학 물질의 분비에 좌우된다. 그러나 엔돌핀이나 도파민과 같은 이러한 화학 물질은 두뇌의 어느 부분에서 그
분비를 명령하는지 전혀 밝혀진 바 없다. 성격에 따라 어떤 사람은 극도의 슬픔에 빠질 일을 어떤 사람은 태연하게 넘기기도 하므로 사람의 감정은 개인적으로 큰 폭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감정에 대해서 정신과에서 손쓸 수 있는 처방은 해당되는 감정에 작용하는 화학 물질의 분비를 억제 또는 촉진시키는 약의 투여뿐이다.
분명히 두뇌는 화학 물질의 인공적인 분비 촉진이나 억제에 따라 그 작용을 달리한다. 의식도 물론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로폰이나 모르핀 같은 마
약이나 알코올류는 두뇌에서 화학 물질이 분비되는 정도를 변화시켜 감정을 바꾼다. 그리고 감정의 변화는 판단과 결정 그리고 의지와 같은 제반 의식 활동을 모두 바꾸어 놓
는다. 따라서 두뇌에 근을 두고 있는 의식은 두뇌를 지배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두뇌의 화학 물질에 지배되는 존재로 보인다. 화학 물질의 강제적인 변화가 한 인간의 의식
작용을 흔들어놓는 데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화학 물질의 분비라는 정교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두뇌와 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지배자는 두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두뇌와 교감하면서도 시공간 상에 존재
하지 않는 말나식과 아뢰야식이 바로 그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잠재의식이라 명명하고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사실상 지배하는 마음으로 보았는데, 이 점에
서는 유식설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서로 맥을 같이하고 있다.
선수행에서 첫 번째 과정은 ‘의식을 파악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의식을 쫓아서 그것의 존재를 감지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그렇게 파악한 의식을 ‘놓아 버리는 일’이다. 의식
을 놓아 버리면 무의식 상태가 되겠지만, 이 무의식 상태가 곧바로 무아의 경지는 아니다.
아(我)란 말나식이어서 의식을 놓아버린 상태에서도 마음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말나식의 작용까지 지울 때에 비로소 무아의 상태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기에 대
한 집착을 지운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스러운 일이고 말나식을 지운 다음에도 아뢰야식은 남는다. 수십억 년의 세월 동안 자기를 형성해온 모든 것이 담긴 장식(藏識
), 이 아뢰야식 속에 자신의 무명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마저도 지워버린 상태가 바로 해탈이요 열반이다.
말나식, 아뢰야식의 두 식과 두뇌 사이에는 물리적으로 감지할 수 없는 교신 체계가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전파나 음파 또는 빛과는 전혀 다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제3의 형
태로 존재하는 신호 체계가 있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물질들 사이의 정보를 전달하는 끈과 같은 것이라고 나는 추정하고 있다.
두뇌에 근을 두고 있는 의식 때문에 우리는 마음이 두뇌나 육신에 붙어 있는 것으로 느끼지만, 아뢰야식은 시공간적인 거리로 육신에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1센티
도 아니고 몇백 광년의 거리도 아닌 무(無)거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뢰야식의 소재지를 말할 때 시공간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어떤 거리도 무의미한 것이다.
두 번째 여행-물질과 생명 6
물질계와 정신계
지금까지 생명체의 현재적인 정신 활동인 의식과, 생명체의 자아인 말나식, 생명체의 전신적(前身的) 본유종자인 아뢰야식을 설명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적 활동의 영
역은 비단 생명체뿐만 아니라 생명체 이전의 순수한 물질계에서도 존재하며, 영적인 활동의 전(前)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정신적인 요소들이 이미 물질계의 본질을 이루고 있음
도 살펴보았다.
본유종자는 생명체가 아닌 모든 물질들과 그것들이 만들어 낸 삼라만상의 모든 것에 심어져 있다. 이 본유종자를 물리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물질이나 물체를 그것일 수 있게 하는,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성질이 바로 본유종자인 것이다.
이 본유종자를 생명체에 대하여 말할 때,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비생명체인 사물에 대해서는 이 식을 인정하기 어려우므로 지금까지는 물질의 정보라고 총칭해왔다.
생명체의 식이 능동적이고 선택적인 정보의 유지와 교환이라면 비생명물질의 본유종자는 수동적이며 기계적인 정보의 유지와 교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물질계와 대별해서 정신계라고 말하는 세계는 생명체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이 우주 전체에 존재하는-생명체와 비생명체를 막론하고-모든 것들의 본유종자가 모인
곳이다. 이 정신계는 무형인 정보로만 이루어진 세계이며 시공간적인 위치와 넓이를 가지지 않아서 물질계와의 장소적인 구분은 의미가 없다. 물질계와 정신계 사이에는 거리
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있는 바로 그자리가 그 존재의 본유종자가 있는 자리이며, 동시에 그것은 우주의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무소부재(無所不在).
미립자 알갱이 하나의 본유종자나,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입자들의 본유종자를 합한 것이나 그 크기에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크기라는 개념은 시공간 상에서 물질의
존재를 논할 때 필요한 것이지 정신계의 구성체들에게는 위치, 속도, 무게와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는 개념이다.
물질계와 정신계는 한 우주의 시작인 대폭발 이전에 우주알(Cosmos Egg) 속에 모여 있었을 것이다. 우주의 모든 물질이 압축되어 한 점으로 돌아간 특이점은, 모든 존재가
에너지와 정보라는 두 가지 본질로 압축된 상태였을 것이다. 모든 물질의 구성 성분은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형태로 바뀌어 압축되어 있고, 그 모든 물질들의 정보가 하나로 뭉
쳐진 전 우주적인 통합 정보가 있었을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특이점에서 어떤 형태도 띠지 않는 초세계적인 성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양에서는 우주의 모체를 무극(無極
)이라고 부르는데, 이 무극으로부터 탄생된 두개의 기운을 태극(太極)이라 하여 양극을 음양이라 말하고 있다. 이 양극을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바로 물질과 정신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말을 바꾸면 에너지라는 한 극과 정보라는 하나의 극을 양극으로 갖는다는 이야기다. 동시에 에너지와 정보는 각각 상반되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가짐으로서 음양
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개개의 형상을 유지하지 못한 채 엄청난 에너지의 바다로 함몰되어 무형의 거대한 에너지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곳에 물질들이 붕괴되면서 흩어진 모든 정
보들이 하나의 거대한 통합 정보를 이루어 에너지와 정보가 하나로 뭉쳐져 있는 상태가 바로 무극이요, 우주의 특이점이다. 어떤 물질도, 공간도 시간도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
에너지와 정보의 형태로 환원되어 버린 상태이다. 한 점으로 응축된 우주 에너지와 하나로 통합된 우주 정보의 특이점은 최후에 하나로 결합되는 순간을 맞게 되며, 바로 그 때
에 시공간이 열리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낱낱으로 분리된 에너지와 정보들이 각기 결합하여 형체를 드러낸 물질과 공간은 결국 에너지와 정보로 분리되어 원래의 상태로 환원되면서 시공간의 종말을 맞게 된
다. 그러나 종말의 최후에 모든 통합된 에너지와 정보가 결합하게 되면 이 양극의 성질과 법칙은 다시 시공간을 만든다. 이것을 우주물리학에서는 대폭발(빅뱅; Big Bang)이
라고 부른다.
특이점이 대폭발을 일으키는 순간, 전우주의 응축된 에너지가 분출되면서 공간과 시간을 열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압축된 에너지들이 분산되면서 함께 쪼개진 우주 정보
의 낱낱들과 결합하게 되고, 이와 동시에 물질의 입자들이 에너지가 밀어낸 공간과 시간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 입자들은 각자의 정보에 의해서 다른 입자들과 결
합하기도 하고 붕괴하기도 하면서 최초의 인연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인연은 다시 통합적인 정보의 형태로 정신계에 환원되면서 이 세계를 인연의 그물망으로 펼쳐나가게 된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에너지로부터 물질이 나왔다는 물질의 기원에 대한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실험들을 했는데, 그 결과는 언제나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창조된 입자는 시공
간 내에서 존속되지 못하고 곧바로 격렬한 에너지의 방출과 함께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물리학자들은 이 물질의 창조와 동시에 벌어지는 소멸의 원인에 대해서 반물질
(反物質)이라는 가상적인 존재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즉 물질은 반드시 반물질과 함께 창조되며, 물질과 반물질이 쌍으로 만나는 순간 양자(兩者)는 에너지의 형태로 변하면
서 소멸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눈에 보이는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물질들은 대폭발 당시의 창조 과정에서 어떻게 반물질과 만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
물리학자들은 대폭발 당시의 엄청난 고열 상태에서는 약간의 물질이 반물질보다 많이 생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주물리학의 계산법에 따르면 대폭발의 분의 1초 때인 도
의 온도 속에서 공간 속에 뿌려진 10억1 개의 양성자(陽性子)에 10억 개의 비율로 반양성자(反陽性子)가 생겨서 10억 개의 양성자와 반양성자는 서로 결합되면서 사라졌고 10
억 개 가운데 살아남은 한 개의 양성자가 이 우주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우주에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의 10억 배에 달하는 물질이 창조될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가 존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계산 결과 반물질로 해서 소멸
된 입자들의 양과 현재 우주에 충만해 있는 에너지의 양은 일치한다고 한다. 특이점의 상태에서 모든 물질이 한 점으로 응축되었던 우주 에너지는 그 10억 분의 1로써 물질을
이루고 나머지 대부분은 에너지의 형태 그대로 이 우주에 충만해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에너지의 대부분이 물질로 변하지 못한 것은 반물질과 같은 입
증되지 않은 가상적인 존재 때문이 아니라 특이점에서 쪼개진 정보의 양과 에너지의 양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물질 입자의 본유종자가 될 낱정보들
의 수가 물질로 환원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에 비해서 10억 분의 1 정도였다고 보는 것이다.
에너지가 물질로 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물질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정보가 필요하다. 그런데 정신계에 존재하는 이 정보를 가져와서 결합하지 못하는 한 에너지는 절대
로 물질로 나타날 수가 없다. 모든 물질은 에너지와 정보의 결합체인데, 실험실에서 물리학자들은 두 가지 필요한 재료 중에서 에너지 한 가지만으로 물질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으므로 물질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에너지로부터 시공간에서 존속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물질을 창조하고자 하면 에너지를 정보(관계)를 가지고 결합
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결합은 물리 법칙이 아니라,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인연법(因緣法)의 세계에 속하는 일이다. 우주에 충만한 에너지란 본유종자인 정보를 가지지 못한 물질들이다.
물질은 언제라도 정보를 상실하게 되면 언제라도 다시 에너지의 상태로 돌아가 버리게 된다. 에너지와 정보의 분리를 실험실에서 성사시킬 수는 있으나 그 역의 실험은 불가능
한 상황이다.
물질의 입자는 본유종자인 정보에 따라서 자기와 남을 구별하며, 상대방과의 만남에 반응한다. 입자들은 어떤 상대는 밀어내고 어떤 상대는 받아들이면서 하나의 원자를 구
성하고 원자는 다시 서로 만나 보다 복잡한 분자로 변해간다. 이러한 만남에서 모든 입자의 반응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입자의 정보다. 이 입자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원자
를 이루는 것은 물질계의 근원적 힘인 중력과 정신계의 근원적인 힘인 업력(業力)의 작용 때문이다(이 중력과 업력에 대해서는 뒷장인 ‘전생과 윤회’의 여행 편에서 상세히 논
함).
물질의 입자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복합 구조의 물질을 이루게 되면 그 복합체 속의 낱낱의 정보들은 결합되어 한 덩어리가 되면서 하나의 통합적인 정보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통합 정보가 바로 복합 물질의 속성을 결정짓는다. 원자들이 모여 분자를 이루면, 각 원자들의 정보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약간 더 큰 분자의 통합 정보를 만들어 내고, 분자
들이 모여서 하나의 물질을 이루면, 물질이라는 통합된 정보 체계 속에 뭉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돌, 한 방울의 물도 모두 그것 자체의 속성을 나타내는 고유한 물질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정보는 물질을 구성한 원소들의 정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다.
물질계의 본질은 ‘에너지’이며, 정신계의 본질은 ‘정보’다. 시공간은 이 물질계의 에너지와 정신계의 정보가 결합하여 창조된 것이며, 시공간 내의 물질은 모두 에너지와 정보의 결합체이다. 다시 말해서 물질계와 정신계는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결합된 상태로서 시공간을 드러내고 있다. 때문에 시공간은 그 본질이 형체가 없는 공(空)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공간은 또한 두 가지 본질이 만나서 결합되는 상대성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세계이므로 무(無)라고 말할 수도 있다. ‘네가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는 세계’의 실상이 바로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이다. 반야바라밀에서는 이를「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물질과 생명, 그리고 의식과 마음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진실로 알고 싶은 영혼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정리가 필요한 개념들이었다.
이제 의식과 마음, 물질계와 정신계의 의미가 명확해졌으므로, 지금부터는 이러한 의식과 마음의 주체인 생물(生物)과 그것들의 진화(進化)에 이러한 정신세계가 어떻게 작용해 왔는지,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세 번째 여행-생물과 영혼의 만남 1
■ 세 번째 여행 ■
생물과 영혼의 만남
생물의 영화(靈化)
만약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있어서 개의 영혼을 수천만 개, 고양이의 영혼을 수천만 개, 사람의 영혼을 수천만 개, 이런 식으로 모든 생명체의 영혼을 미리 만들어서 준비하고, 수십만 종의 생물이 언제 어디서 짝짓기를 하는지 노려보고 있다가 타이밍에 맞추어 넣어준다고 믿을 수 있었다면 나는 기독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시스템을 전지전능한 조물주가 만든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웠고, 또 생명의 번식에 종사하는 조물주의 역할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조물주가 생명의 탄생과 생명체의 운명에 지속적으로 관여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신학자들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영혼을 넣어주는지에 대해서는 애매하게 얼버무리고 만다. 암수의 쌍이 2세를 만들기 위해 번식 행위에 열중하고 있는 순간인지, 모체 안에서 수정이 되는 순간인지, 출산의 순간인지, 두 살 땐지 세 살 땐지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심각한 문제다. 아주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종교란 의심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한 생명체에 깃드는 순간과 그 과정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생명과 영혼에 대한 설명 모두가 애매해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앞에서 우리는 생명 현상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그리고 최초의 생명체가 생기는 인연의 시발점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지금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모든 생물들과 우리들 자신의 영혼에 대하여 알아볼 생각이다.
하나의 본유종자인 아뢰야식이 비물질적인 순수 정보로 영계(靈界, 정보계·정신계 또는 의식계라고 해도 무방함)로 돌아가 있다가, 다시 이 세계의 생명체와 결합하여 환생·유전하게 된다면, 아뢰야식이 한 개체의 생명체에 결합되는 과정은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아뢰야식이든 영혼이든 어느 한순간에 새로 태어날 생명체와 결합되는 것이라면, 우선 그 시점이 언제인가가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는 시점은 몇 가지가 있다. 일단 부(父)의 몸속에서 정충이 만들어졌을 때, 이 정자 하나하나를 한 인간의 아뢰야식이 심어진 영혼적인 존재로 간주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자는 부모 중 한쪽의 유전인자일 뿐이다. 모든 2세는 부모 양쪽으로부터 소질과 유전적 특성을 이어 받는다는 점에서 수정되기 전의 정자 단계에 완전한 아뢰야식이 들어 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모체 내에서 수정되는 순간일까. 그러나 이것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수정란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수정의 다음 단계인 세포분열과 증식의 모든 단계를 완전한 영혼을 가진 존재로 생각하기란 어딘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조금 더 많은 단계를 거친 다음인 모체에서의 출산 시기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으나 이것 역시 논리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경우 임신기간은 10개월이지만, 출산은 앞뒤로 한두 달 정도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만일 10개월을 다 채우고 태어나는 순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태내에서 8개월 내지 9개월을 채운 태아는 영혼이 없는 존재이냐 하는 질문에 대답할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5개월이나 6개월 된 태아는? 자
꾸 소급해서 질문한다면 더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아니면 인간의 영혼은 출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다가, 성장과 함께 점차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것은 상당히 유물론적 관점의 발상이다. 이런 경우 사후에 육신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영혼이란 개념은 원천적으로 부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글은 영혼의 존재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을 근거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서 쓰이는 것이므로 이 경우는 논외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탄생의 과정에서 언제부터 영혼을 가지게 된 것일까? 앞에서 영혼의 핵심으로 설명한 본유종자인 아뢰야식은 세세전생 장구한 세월의 방대한 기록을 담은 정보의 세트(Set)여서 새로운 생명체와 접목되는 데는 상당히 정교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칠 것으로 추측된다.
새로운 경험이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축적되는 과정은 향을 태우는 냄새가 옷깃에 스며드는 듯하다고 해서 훈습(燻濕)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 역의 과정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즉, 아뢰야식이 새로운 생명체와 결합되는 과정도 똑같이 훈습의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모체 안에서 수정이 완료된 직후부터일 것이다.
하나의 정자는 박테리아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핵 속에 담긴 DNA의 형태로 유전 정보를 간직한 단세포 생명체이다. 이 생명체는 어버이의 형질 중 많은 부분을 담고 있는 운반체이지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생명체는 아니다. 어버이의 체외에서 난자와 만나 그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하면 길어도 24시간밖에는 지속 못하는 한시적인 생명체다. 난자는 조금 더 오래 살지만 이것 역시 단일 목적만을 위한 제한된 생명체여서 분리된 각각의 정자와 난자는 일반적인 단세포 생물의 본유종자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정자에 깃들인 말나식의 정보는 화학적 자극에 따라 일정한 방향(난자가 있는 쪽)으로 전력을 다해 헤엄쳐 가며, 난자와 상봉하는 순간 그 피막을 뚫고 들어가는 정도의 단순하고 원시적인 활동에 필요할 뿐이다. 이 단계에서 영혼의 존재는 의미가 없어 보이고, 하나의 아뢰야식(영혼)이 생명체의 씨앗에 그 인연의 그물망을 펼쳐 한쪽 깃을 걸치는 것은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로 보인다.
아뢰야식은 무명으로 일컫는 비생명 단계의 전(前) 아뢰야식에서부터 원시적인 단세포생물의 단계를 지나 고등한 인간에 이르는 모든 단계의 방대한 내용이 저장된 거대한 정보의 세트 같아서 이것이 생명체의 말나식과 의식을 뒷받침하는 영혼의 중추로 작용하려면 정보의 전체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육체라는 그릇이 반드시 필요하다.
영혼을 소프트웨어로, 육신(특히 두뇌)을 하드웨어로 보면 이해가 쉽다. 영혼은 수정란이 세포 분열 과정을 거쳐 원시적인 초기 동물의 단계에서 점차 고등 동물의 단계로 진화되어 감에 따라 매 단계에 해당하는 정보가 차례대로 훈습되어 들어간다. 즉, 모체의 뱃속에서 영혼이 가장 밀접하게 작용하는 감각 기관, 신경 조직, 뇌가 완성되고, 그에 따라 각 시점의 하드웨어(두뇌)에 맞는 소프트웨어(영혼)들이 스며드는 것이다.
여기서 ‘스며든다’는 훈습의 말뜻을 잘 생각해 보면 영혼과 두뇌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향기나 고기 굽는 냄새가 옷에 스미면 옷에서 그 냄새가 나게 되는데, 기실 냄새의 원천인 분자들은 옷에 묻어 있는 것이 아니고 옷 주변의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냄새의 분자들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옷의 주변 공기가 부옇게 퍼진 냄새 분자들로 싸여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영혼의 훈습도 두뇌 속에 물건처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의 주위에 그 정보들이 고착되어 모인다는 의미가 가장 적합하다. 그러니까 생명체의 두뇌가 의식을 형성함에 따라서 영혼은 측정 불가능한 교신 수단을 통해 의식과 교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비유해서 말한다면 두뇌는 영혼이란 냄새가 가득 밴 천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이 경우 영혼은 두뇌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천이 옮겨가는 곳에 냄새들은 따라다니지만 결코
냄새들이 천 속에 들어가 있지는 않은 것과 같다.
이러한 훈습 과정을 거쳐 모체 내에서 인간의 두뇌가 완성되면 이와 동시에 한 세트(Set)의 영혼이 모두 교감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이어서 인간의 성장에 따라 의식이 발달하면 영혼은 의식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의식의 형성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의식의 영향을 받아 영혼의 내용이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태내에서 인간의 두뇌가 완전한 하나의 세트를 구성해 가는 단계는 생물의 진화 과정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앞장에서 설명한 적이 있지만, 동물의 진화는 두뇌의 진화와 그 폭을 같이하고 있다. 수정란이 세포 분열을 마치고 급격한 자기 증식을 통해 하나의 생물체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뇌가 아니라 신경 섬유망(뉴런)이다. 뇌는 없고 신경섬유망만 있는 이 단계의 태아는 마치 강장동물과 흡사하다. 이때는 태아에게는 하나의 아뢰야식의 전체 내용 가운데서 강장동물 단계의 정보들이 훈습되어 들어간다. 이어서 신경 세포가 점차 집단으로 뭉쳐져 뇌의 전신(前身)이 되는 다발을 형성하면 이때의 태아는 편형동물의 단계를 재현한다. 계속해서 이 신경
다발이 뇌 신경절로 발달하면서 연체동물, 환형동물, 절족동물, 원색동물의 순서로 수십 억 년의 진화과정을 빠른 시간 내에 반복하는 것이다. 이때 물론 각 단계에 맞추어 영혼의 세 중 일부가 훈습된다.
뇌와 척수가 겨우 구별되기 시작하면 태아는 어류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이때는 척수와 뇌간과 구피질밖에 없다. 이 당시의 태아는 의식의 수준이나 육체적 기능이 그냥 어류이다. 인간이 되기 전의 어떤 단계가 아니라 바로 물고기 그 자체란 의미다. 만약 이때 아이가 유산되면, 어머니 뱃속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죽은 것과 같다.
그러고 보면 한 생명이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완전한 인간이 되기 이전의 일이라는 점에서 지나치게 슬퍼할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영혼의 훈습과정
이어 고피질이 더해지면 양서류 단계가 되고 아뢰야식의 농도는 계속 짙어진다. 그리고 신피질이 형성되면서 파충류 단계의 정보가 훈습된다. 이때 사산하면 어머니 뱃속에서 공룡 새끼가 한 마리 죽은 것과 같다. 신피질이 완성되고 대뇌변연이 추가되면서 드디어 포유류 단계에 이르고 이때의 태아는 그 영혼의 성격이 포유류의 단계에 와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한 인간의 영혼 중 가장 고급스러운 부분은 교감할 수 있는 수신체를 찾지 못한 상태이다. 대뇌변연계가 완성되고 신피질이 완전히 정착되어야 비로소 한 세트의 인간의 장식(藏識)이 훈습을 마치게 된다. 이때의 태아를 살해하면 한 인간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했다면 많은 의문이 풀리게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태내에서 단세포 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수십억 년 동안 진행된 생물의 진화를(물론 인간에 이르는 계통에 따른) 10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그대로 반복·재현한 끝에 태어난다. 생명이 발생의 시기에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는 이유는 바로 수십억 년 동안의 진화에서 체득한 모든 경험과 정보를 차례대로 새로운 생명체 속에 훈습하는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등 동물일수록 임신 기간이 길어지는 것이다. 모체 안에서 육체를 만드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 이식되는데 그만큼의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한 가지 질문이 생길 것이다. 고등 동물일수록 영혼의 훈습 기간 때문에 임신 기간이 길다면, 인간보다 더 임신 기간이 긴 동물은 당연히 인간보다 고등한 동물이 아닌가 하는 질문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임신 기간이 실제 필요보다 짧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모두 미숙아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물은 태어나면 스스로 걷게끔 되어 있고 부모의 보육 기간도 아주 짧다. 그러나 인간은 최소 몇 년 동안의 보육 기간이 필요할 만큼 심각한 미숙아의 상태로 태어난다. 왜냐하면 지
능의 발달과 비례하여 두뇌의 용적이 커지는데, 성숙에 필요한 만큼 모체 내에 더 머물러 있다가는 머리가 산도를 빠져 나오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숙한 상태에서 출산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의 훈습은 출산 이후에도 유아기를 통해서 일정한 기간 동안 지속된다고 볼 수 있겠다. 유아의 뇌파를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하루 중의 대부분을 수면 상태로 지낸다. 수면 중의 뇌파는 REM(rapid eye movement)과 NON-REM으로 나뉘며 REM은 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과학계의 정설이다. 즉 REM 수면 상태는 뇌에 자극이 주어지고 있거나 어떤 데이터가 처리되고 있는 중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태아나 유아의 경우 대부분이 REM상태라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성인의 경우는 대개 90분에 한 차례, 밤새 4-5회 정도가 REM 수면 상태이고 나머지가 NON-REM 상태이지만 태아나 유아는 그 반대이다. 즉, 외부로부터의 자극이나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거의 없는 태아나 유아의 두뇌 속에서 이처럼 격렬한 반응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정보의 유입이 대량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로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보의 정체는 무엇일까? 태어난 이후에도 아뢰야식의 훈습이 일정 기간 동안 계속되고 있다고 보아야만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10개월의 임신 기간 동안에 훈습이 되는 게 아뢰야식이라면 8개월이나 9개월 만에 조산을 한 미숙아들은 제대로 훈습이 안 된 상태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도 여기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뢰야식의 훈습은 반드시 태아가 모체 내에 있는 기간과 반드시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모체와의 분리 이후에도 태아의 아뢰야식은 계속 훈습되는데, 어쩌면 한 사람의 일생 동안 지속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 번째 여행-생물과 영혼의 만남 2
영혼과 생물의 진화
생물의 진화는 아뢰야식에 경험과 정보가 축적되는 단계에 따른다. 비생명체인 물질의 단계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나타나는 과정도 모든 물질의 본유종자가 고도화되고 복잡해진 결과라고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최초의 생명으로부터 고등한 인류에 이르는 진화도 이 생명체의 모든 경험과 지식이 누적되는 아뢰야식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다.
사실상 생물의 진화는 자연도태나 용불용이 아니라 이 아뢰야식의 작용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윈식 진화론이 자체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멘델의 실험 결과와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자연도태나 용불용은 모두 개체의 경험인데, 진화론은 각 세대의 개체가 체험한 자연도태나 용불용이 어떻게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후대의 형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설명해내지 못했다.
획득형질과 각 개체의 체험은 육체적인 유전 정보를 통해서 후대에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체험 정보들은 아뢰야식에 저장되었다가 다음 세대에 윤회하여 환생할 때 새로운 본유종자로서 형질을 결정짓기 때문에 후대에 전해진다. 유전 인자의 변화는 개체의 경험에 의해서 정자나 난자의 유전 정보 속에 새로 기록되어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 본유종자의 변화가 억겁의 세월 동안 생물의 유전 인자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진화의 원리이다.
그러니까 다윈의 진화론은 관찰된 결과에 의한 소급 추리에 지나지 않는다. 멘델의 교배 실험 역시 진화의 근본 요인인 본유종자를 다루지 않은 채, 단순히 각 개체의 유전 인자가 어떻게 계승되는지 알아본 실험이므로 진화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아뢰야식이라는 본유종자가 유전 인자를 변화시키는 데는 자연 상태인 경우, 수만 년에서 수억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바퀴벌레를 비롯한 몇몇 곤충과 어류들처럼 수억 년 전과 비교해서 거의 달라진 점이 없는 생물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이에 비할 때 인류의 진화는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진행된 것이다. 이것은 인류의 단계로 들어선 이후 아뢰야식의 내용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풍부해졌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이 생물의 진화에 작용하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거미가 한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주변 환경이 점차 사막으로 바뀌어 갔다. 각각의 거미는 환경의 변화를 인식할 능력이 없다. 그런데 비가 거의 오지 않으니까 많은 거미들이 수분 부족으로 죽게 되었다. 거미의 의식에는 ‘목이 마르다, 못 견디게 고통스럽다’고 하는 갈증의 기억이 새겨지고 이 체험의 기억들은 바로 거미의 본유종자인 아뢰야식에 훈습되었다가 그 지역에 사는 다음 세대의 거미에게 바로 환생된다. 그렇게 해서 새로 태어난 거미의 아뢰야식에는 전생에 겪었던 고통의 기억이 존재한다.
그런데 태어나서 다시 목말라 죽는 윤회는 그 지역이 사막으로 변해 가는 수천 년을 두고 반복된다. 목말라 죽은 거미들의 영혼에 갈증에 대한 기억이 계속 누적되면서 세세윤회를 반복하므로, 이 지역 거미들의 영혼은 갈증에 대한 아주 강렬한 염을 간직하게 된다. 갈증이 각인된 아뢰야식은 거미의 말나식과 의식에 갈증에 대한 대책을 강하게 명령하게 되고, 아뢰야식의 영향을 받은 말나식은 자기 보존 능력을 극대화시켜 신비스러운 육체적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말나식의 강렬한 염원은 생물체의 육체를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다. 인간 역시 정신력을 연마하여 어느 정도 육체적 변화를 실현시킬 수 있다. 단지 하급 동물은 인간과는 달리, 의식적인 집중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뢰야식과 말나식이 의식에 작용하는 기계적인 자기 보존력을 통해 장구한 세월에 걸쳐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윤회하는 영혼의 작용은 거미의 육체를 변화시켜 나가면서 물리적인 세계에서 실현 가능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경이롭다. 대자연의 신비 가운데 각 생명체가 환경과 주어진 조건에 맞추어 자신의 육체를 바꾸어나가는 것보다 더 경이로운 대목은 없을 것이다. 수천 년이 흐른 다음 사막에는 ‘물주머니 거미’란 새로운 거미가 탄생한다. 이 거미는 배의 일부분을 고무풍선처럼 변화시켜 한번 비가 오면 물을 잔뜩 채웠다가 다음 비가 올 때까지 그 물로 견딘다. 그런데 거미의 영혼은 어떻게 물주머니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을까. 왜 다른 방법이 아니었을까?
물주머니 거미의 진화 과정을 추측해 보자. 수분이 모자라게 된 거미는 가능한 모든 육체적 기능을 동원해서 애를 쓰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물의 본능적인 노력일 것이다. 거미의 가능한 오래 수분을 보존하고, 수분을 조금이라도 적게 소모하는 방향으로 몸을 적응시키려 할 것이다. 미세한 차이지만 신체의 여러 곳에 수분을 보관하고, 수분의 증발을 억제하기 위해 피부의 성질을 변화시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분을 덜 소모하려고 땅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일생에 걸친 거미의 이러한 육체적 노력은 다음 세대의 거미에게 유전되지 않는다. 획득형질은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막 지역에서 거미는 당연히 멸종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윤회를 통한 본유종자의 계승에는 갈증의 고통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모든 본능적인 노력의 경험이 들어 있어서 다음 세대의 거미의 영혼은 그 전 세대의 거미가 했던 경험을 이어 받아 같은 노력을 훨씬 쉽고 빨리 할 수 있게 된다. 수없는 세대가 반복되는 동안 배 주위에 보관했던 수분이 제일 오래간다는 것이 아뢰야식에 새겨진다. 이 기억은 계속 다음 세대로 이어져 점차 거미의 의식은 배 부분에 집중되고 그에 따라 배의 구조가 바뀌어가는 것이다.
신체의 여러 곳 중에서 가장 효과가 있었던 한 곳에 집중적으로 수분을 축적하는 기능이 발달하게 되는데 수많은 세대의 경험과 기억을 담은 거미의 영혼을 상정하지 않고는 이러한 기적을 설명할 수 없다. 만약에 거미의 영혼이 윤회하지 않는다면 한 세대의 생존 노력은 그 세대의 것으로 끝나고 만다. 경험이 전달되지 않으므로 거미는 환경에 맞추어 육체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그 지역이 사막으로 변함에 따라 멸종해 버렸을 것이다.
이런 자연계의 신비는 관찰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신의 존재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만큼 고도의 지능이 개입한 결과로 보이는 것이다. 생각의 능력이 의심스러운 저급한 동물들이 자연도태나 용불용의 경험 축적만으로 그토록 지능적인 해결 방법을 찾아 스스로의 육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는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박쥐는 어두운 동굴에서 살다 보니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대신 발달한 것이 신비스러운 초음파 탐지 능력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수수께끼에 직면하게 된다. 진화론으로 보자면 애초에 박쥐의 조상은 눈이 밝았으며, 초음파 기관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먹이를 찾기에는 눈이 너무 어두워졌고, 초음파 기관이아직 눈을 대신할 정도로 발달하지 않았던 단계에서 박쥐는 멸종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또 다른 한편의 의문은 박쥐가 어떻게 초음파 탐지기라는 정교한 육체적 기관을 설계하고 자신의 몸 속에 만들어 장치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손수 만들어주지 않은 것이라면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이 자연계에서 수도 없이 발견되는
것인가.
딱따구리의 경우를 보자. 딱따구리는 두꺼운 나무껍질 속에 들어 있는 벌레를 잡아내기 위해서 일초에 수십 번에 달하는 속도로 부리 짓을 한다. 나무 등걸을 쪼는 충격에 뇌가 견딜 수 있도록 딱따구리의 두개골은 특수한 완충장치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엄청나게 긴 혀는 깊은 구멍 속의 벌레를 잡아내기 위한 것이다. 이 혀를 보관하기 위해서 두개골 속에는 깊은 원형의 동굴이 터널처럼 뚫려 코와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에 긴 혀를 감아놓는다.
그런데 딱따구리의 생존 방식이 진화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두뇌의 완충장치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또 혀가 점차로 길어진 것이라면 거기에 맞추어진, 코 속과 두개골을 잇는 기다란 터널은 어떻게 완성된 것일까. 이러한 육체적인 장치가 완성되어 가는 도중에 먹이를 구하지 못한 딱따구리의 조상은 어떻게 멸종을 면할 수 있었을까?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생물의 진화와 생존 방식의 개발은 조물주의 작업이나 기적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스럽다. 자연도태설이나 용불용설을 가지고는 이와 같은 신비스하고 정교한 진화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아뢰야식이 있는 정신계의 또 다른 면을 엿볼 수 있다. 즉, 모든 개별적인 아뢰야식은 하나의 생명이 억겁 동안 윤회하며 체득한 경험과 지식의 총체이지만, 모든 물질과 생명의 본유종자 전체를 보존하고 있는 정신계는 그 모든 경험과 지식의 통합체로서 낱낱의 영혼들 모두의 정보가 총체적인 하나로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신계는 개별적인 영혼들의 집합이지만, 영혼들이 가진 개별적인 정보는 모두 공유되고 통합되어 있다. 개별성과 통합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 입자들의 낱낱의 정보, 그 입자들이 결합하여 형성한 전체 정보, 그리고 생명체가 세세윤회를 통하여 체득한 모든 경험과 지식이 통합되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정신계의 실
상이다. 앞의 예들에서 이러한 생각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우주의 모든 정보가 통합되어 있는 것을 이차크·벤토프는 ‘우주심(宇宙心)’이라고 불렀고, 불교에서는 불법(佛法)이라 하며, 기독교에서는 창조주인 여호와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신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정보의 통합성은 어렵지 않게 그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의 육체이다. 인간의 몸은 수조 개에 달하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하나 하나는 독립적인 핵과 염기와 단백질들로 구성되어 있는 독립적인 생명체이다. 이 세포들은 동일한 유전 정보를 가진 DNA를 함유하고 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신진대사를 하며 모두 정해진 수명이 있다. 심장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나 근육을 만들고 있는 세포나 피부를 이루고 있는 세포 그 각각은 모두 동일하다. 이 세포 하나하나는 독립적인 고유한 정보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데, 수조 개의 세포가 결합된 육체라는 하나의 유기체의 구성원으로서는 일관되고 정교한 통제를 받으며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통합체의 지령은 신경 조직이나 전기적 신호에 의한 것 같지는 않다. 각각의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신경망이 닿지 않으며, 전기적인 신호의 전달도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우리 몸 어디에 있든, 세포는 자신의 역할과 기능을 혼동하지 않는다. 이러한 통합적인 정보의 유지는 무엇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일까. 의식이 몸의 모든 세포에 일일이 지령을 내려 그 활동을 감시하거나 통제하든지, 노쇠한 세포를 새로운 세포로 대체하든지 하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매 순간 찰나지간에도 수조 개의 세포들은 통합적인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전혀 일탈하는 법이 없다. 현대의 난치병으로 불리는 암은 특정 세포가 유기체의 일원으로서 준수해야할 정보에 혼란이 일어나 생겨난 것이다. 암은 바로세포의 정보 혼란인 것이다.
유기체의 이러한 통합성은 너무나 복잡하고 정교해서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도저히 파악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육체 전체를 정신계로 보고, 수조 개의 세포들을 그 속의 개별 영혼(아뢰야식)으로 놓고 보면 정신계의 통합성을 이해할 수 있다. 육체는 단일한 성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뇌, 심장, 허파, 근육, 피부는 각기 독립적인 소규모 유기체를 이루고 있다. 심장에 속한 세포들은 허파에 속한 세포들과는 활동과 성질이 다르다. 그러면서도 인체 전체는 역시 하나의 유기체로서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이 통합체의 유지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관여하지 않는다. 전체는 자동적인 정보 체계에 의한 시스템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인체의 통합성은 정신계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신계 전체의 통합적인 총체물이-기독교의 인격신이 그러는 것처럼-개별적인 모든 영혼들에 지령을 보내거나 각각의 영혼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통제한다는 생각은 난센스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이 인체의 각 세포들을 직접 관리한다는 생각이 틀린 것과 같다. 인체의 어떤 부분에 장애가 있거나 손상이 왔을 경우, 의식이 그것에 대처하는 지령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장애가 일어난 부위의 세포들은 자동적으로 필요한 조처를 하게 되며, 이 과정에 의식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 또 그러한 지령 체계를 우리의 의식은 가지고 있지도 않다.
세포들의 장애 대처 활동이나 복원 기능들--예를 들어, 피가 났을 때 혈관이 막혀 피가 멈추거나, 상처 주위에 딱지가 앉아 상처받은 부위를 보호하거나, 상처에 새 살이 돋아나 아무는 것 등-은 의식의 개입 없이 행해진다. 눈이 멀게 되면 청각이 예민해지고, 신장 하나를 떼내면 남은 신장 기능이 확대되는 등, 신체의 다른 부위에서 발생한 손상을 보충하는 작용도 의식이나 신경 계통이 아닌 별도의 정보 체계가 인체라는 유기체를 유지시키고 있다는 증거이다.
정보 체계의 이러한 속성에서 우리는 정신계의 속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수조 개의 세포들을 한 치의 착오도 없이 통합시키고 있는 정보망의 기능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정신계의 통합성을 의심하지 않아도 좋을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신계는 이 우주 전체의 모든 정보를 통합한 상태로 존재하며, 그 통합성 내에서 개별 영혼들은 독립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 정신계의 통합성을 유지하고 있는 법칙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법일 것이다(이 인연법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논함).
세 번째 여행-생명과 영혼의 만남 3
통합체로서의 영혼
여기서 정신계의 통합성을 거론하는 이유는 바로 생물의 진화에 그 통합된 정신계의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거미, 박쥐, 딱따구리의 예를 들어 생물의 반복 윤회하는 영혼이 진화를 이루는 근본적인 힘이라고 설명했는데, 진화의 동인(動因)이 그것뿐이라면 많은 부분의 설명이 곤란한 채로 남게 된다.
박쥐의 영혼이 설사 수천억 년의 경험을 축적하고 윤회했다고 해도 박쥐의 경험 내용 속에 초음파 탐지장치를 고안해 내고 그것을 정교하게 설계해서 제작해낼 정도의 정보가 들어 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물주머니 거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거미의 본유종자에 배의 일부분을 물을 저장할 수 있는 탱크의 성질을 갖는 구조로 진화시킬 정도의 고차원적인 능력이 있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러한 능력을 발휘해서 생물의 생존 방식을 개발시키고 그에 적합한 육체적인 기능을 발달시키는 고도의 지적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전지전능한 절대자의 존재를 끌어온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적인 창조주의 존재는 더 많은 문제와 논리적인 모순, 그리고 풀 수 없는 의문들을 가져다준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올바른 답이 될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결국 이차크 벤토프가 말하는 우주심과 흡사한 것으로 결론이 나는 감은 있지만, 나는 그것이 판단하고 결정해서 어떤 행위를 하는 인격신은 아닐 거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상정할 수 있는 고도의 지적 존재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세계의 법칙과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을 근거로 나는, 그 주체가 바로 우리들 영혼의 통합체라고 결론짓고 싶다. 그러나 이 통합체는 수백 만 종에 달하는 생물의 진화에 의식적으로 개입하고 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박한 변화의 요구에 직면한 생물의 영혼들이 이 통합체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가져감으로서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체의 손상된 부위의 세포들이 각기 치유와 복원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체라는 통합적인 정보 체계 내에서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미, 박쥐, 딱따구리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생물들은 제각기 생존에 필요한 지식과 진화에 따르는 변화의 능력을 정신계의 통합체로부터 지원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통합체는 그러한 개개 생물의 작업에 의식적으로 관여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병균을 물리치기 위한 백혈구의 활약이나 상처 주위에 새 살이 돋는 것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영혼의 통합성에 대해서는 추가로 언급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정신계의 구조와 관련해서이다. 정신계는 그 전체가 하나의 통합적인 정보 세계를 이루고 있으면서 동시에 무량한 수의 개별적인 정신세계로 분화되어 낱낱의 영혼은 독립적으로 반복·윤회하는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낱낱의 영혼들은 인체의 세포들이 기관별로 성질을 달리하면서 모여 있는 것처럼 크고 작은 무수한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
우리가 크게는 대한민국이라는 국적을 가지면서 성별, 지역별, 연령별, 직업별로 나뉘는 것처럼 정신계의 영혼들도 성격을 달리하는 무수한 그룹에 복합적으로 소속되면서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집단영혼은 각 그룹별로 하나의 통합체를 이루어 개별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낱낱의 영혼도 이 집단 영혼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영혼의 다층 복합적인 집단화는 그룹별 통합체로서 정보 체계에 따라 생명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이런 소규모의 집단 영혼이 어떤 생물종의 유지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경우다. 즉, 집단적인 영혼의 통합체가 각 개체들을 하나의 유기체로서 생명계에 조직하는 경우다. 앞에서 예로 든 인체와 각 세포의 사이에 유기적인 통합을 독립된 생명체인 개체들의 집단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개미나 벌과 같은 곤충의 생활 방식이다. 개미를 예로 들면 이 집단 영혼의 통합 작용을 엿볼 수 있다.
하나하나의 개미는 교묘하고, 고도로 합리적인 개미집을 설계하거나 건축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각 일개미들은 그저 본능적으로 흙을 들어내고 구멍을 파는, 자동 기계와 같은 움직임을 보일 뿐이다. 그러나 수천, 수만 마리의 개미가 각자 자기 일만 한 결과로 탄생하는 것은 경탄할 만한 구조학적인 법칙과 공간적 합리성을 담은 거대한 구조물이다
. 이 개미집 전체를 설계하고 그 구조와 기능을 부여해서 일개미들에게 건축에 따르는 노동을 명령하는 존재는 개미 사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개미들은 마치 설계도를 보면서 자기가 맡은 작업을 하는 건축 기술자들처럼 전체적인 건축물의 일부분을 맡아서 훌륭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건축물의 여러 공간에 대한 용도를 그 많은
개미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단 한 마리의 개미도 알을 보관하는 방에 먹이를 갖다 놓지 않으며, 애벌레가 자라는 방을 빗물과 태양 빛에 노출되는 입구에 정하지 않는다.
마치 수만 마리의 개미들이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처럼 하나의 통합된 정보 체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미들에게 일을 배분하고 각자의 역할을 지정해주는 명령자는 누구인가. 그러나 그런 권한을 행사하는 감독 개미는 보이지 않는다. 낱낱의 세포 활동을 제어하는 명령 전달 체계가 뇌나 신경조직에서 발견되지 않는 인체와 마찬가지로 수만 마리의 개미들도 가시적으로 확인되는 명령 계통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마 이 개미들의 감독자가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아니라는 데는 정통적인 기독교의 성직자들도 기꺼이 동의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개미를 통합적으로 움직이는 정보 체계는 개미의 생명계에 작용하는 개미들의 집단 영혼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뢰야식이 한 개체의 종자를 결정하고, 그것과 결합된 독립적인 영혼을 이루어내지만 그와 동시에 개별 영혼의 집단은 독립된 영혼에 대한 상위의 정보 체계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 영혼은 시공간에 나타나는 모든 물질에 작용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물론 물질의 비생명적인 정보들도 하나의 종자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이러한 물질의 정보들은 식(識)보다는 차원이 낮은 것이긴 하지만 그 수는 생명계를 한 알의 모래로 쳤을 때 백사장 전체의 양에 이를 만큼 대량으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비생명체라 하더라도 물질이 대량으로 결합하여 이루어진 거대 물체는 상위 개념이 아닌 대량 혹은 거대의 의미로서 집단적이고 통합적인 정보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큰 산이나 바다가 활동하는 의식체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거대 정보의 기운 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 지구를 비롯하여 모든 별들은 하나의 통합적인 정보의 주체로서 운동하고 있는 것이지 비생명적인 죽은 물체가 아니다. 생명체가 아닌 모든 사물들(식물 포함)에서 샤머니즘적인 영적 현상이 관찰되는 이유는 물질계가 생명계의 식과는 그 차원과 성격이 다르지만 정신적 활동의 영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비생명체인 물질계와 생명계는 이 정신계를 매개로 해서 밀접하게 결합되어 삼라만상과 우주의 법칙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계를 하나로 유지시키는 근원적인 요인이 바로 정신계의 본질인 정보이다.
이 장에서 나는 영혼이라는 말을 별도로 정의하지 않고, 정신계에 충만한 요소들을 영혼이라고 표현했다. 또 아뢰야식을 영혼이라는 말과 구별 없이 사용했다. 그러나 아뢰야식은 영혼의 본질적인 성격이지 아뢰야식이 곧 영혼은 아니다. 이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영혼에 대하여 논할 차례가 되었다.
네 번째 여행-영혼과 사후세계 1
■ 네 번째 여행 ■
영혼과 사후세계-1
영혼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영혼을 마음이나, 의식, 또는 기억 등으로 막연하게 이해하는데 그 어느 것도 영혼의 정확한 풀이는 아니다. 아마도 영혼은 독립적인 의미보다는 육체에 대비되는 의미로서 더 쉽게 파악이 되지 않을까. 생명은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가지가 결합된 것이고, 육체와 영혼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생명의 주체를 말할 때 우리는영혼을 지적하고 이 때문에 영혼의 개념은 다시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특히 영혼의 문제가 인간에 적용되고, 자기 자신의 문제로 거론될 때는 그 추상성과 애매함은 한층 심해진다.
그래서 영혼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영혼의 성질과 특성에 대해서는 모두 제각각의 생각을 갖고 있다. 대개 한 인간의 기억과 감정의 결정인 마음이 육체와는 별도의 존재로 유지되는 무색무취한 무형의 어떤 것을 영혼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육신과는 달리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는 영원한 자신을 영혼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영혼의 개념이 논리적으로 얼마나 모순되며 또 위험한 것인지는 거의 이야기되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종교의 근거 없는 교리에 의해서 그럴싸하게 고무되고 격려되어 확인할 필요도 없는 사실로 굳어져 왔다. 영혼에 대한 이같은 막연한 개념은 아주 어릴 때부터 거의 잠재의식처럼 되어 어떠한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굳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혼의 개념은 어떤 과학적인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으며 불교의 가르침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는 영혼을 혼백(魂魄)이란 다른 말로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은 혼과 백으로 양분되는 영혼을 의미한다. 혼(魂)은 다른 말로 넋이라고 하는 데, 사후에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어서 ‘넋이 나갔다’는 표현을 쓴다. 백(魄)은 다른 말로 얼이라고 하는데, 죽으면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서 ‘얼이 빠졌다’고 표현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영혼은 혼과 백으로 다시 나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인 무엇인가?
영혼을 사후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혼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듯하다.
① 영혼은 육체와는 별개로 존재한다.
② 영혼은 죽음의 순간에 육체와 분리된다.
③ 영혼은 육체와 분리된 다음에도 보고, 듣고, 말하고, 느낄 수 있으며 또한 생각을 할 수 있다.
④ 영혼은 사후에도 자신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⑤ 영혼은 육체와 달라서 한시적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한다.
이런 영혼관이 합당한 것인지는 영혼이 어떻게 생명체에 생길 수 있는지를 고찰해본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상당 부분 밝혀졌다고 여겨진다. 유식설에서 우리는 전오식과 제6식인 의식, 그리고 말나식은 육신을 근으로 삼는 것이어서 육신과 분리할 수 없음을 알았다. 즉, 육신에 결부되어 있는 일곱 가지 식은 육신이 그 기능을 정지하는 순간 같이 소멸될 수밖에 없음을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이 7식 중에서 전오식과 의식은 죽음이 아니더라도 수면 중이나 마취 중일 때처럼 육신의 기능이 정지될 때마다 일시적으로 활동을 멈추지만, 말나식만은 생명체가 죽는 다음이라야 활동을 멈추고 소멸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약물이나 화학적 작용으로 조절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전오식과 의식까지이며 말나식은 약물이나 기타의 수단으로 약화시키거나 변형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의식은 정신질환이나 뇌의 충격으로 손상을 받는다. 그러나 말나식은 그 근을 전신(全身)에 두고 있으며,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심어진 것이어서 육신이 생명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한 작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육신과 분리될 수 있으며 사후에도 정신계에 별도로 존속할 수 있는 영혼의 가능성은 아뢰야식을 제외하고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아뢰야식은 수십억 년의 진화를 통한 모든 경험과 지식을 담고 있는 장식(藏識)이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의 개념과도 어떤 면에서 일치한다.
그런데 아뢰야식은 그것이 환생해서 태어나는 새로운 생명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며, 영혼은 죽음에 이른 생명의 입장에서 자기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은 탄생과 결부된 개념으로, 영혼은 죽음과 결부된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탄생의 자리에 선 아뢰야식과 죽음 이후의 영혼이 갖는 차이는 살아있던 동안의 삼업(身業, 口業, 意業)의 결과가 새로운 내용으로 더해졌다는 점이다. 다시 한 생의 체험이 더해져 아뢰야식의 내용이 갱신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전 생의 경험이 더해진 아뢰야식은 새로운 생명으로 환생하기 전까지는 이전의 주인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하나의 아뢰야식에 자기 생애의 경험들을 더한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 아뢰야식의 주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모두는 한 사람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이다. 그 주인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장인 ‘전생과 윤회’에서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후의 아뢰야식인 영혼이 앞서 말한 일반적인 영혼의 개념과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혼의 개념은 ‘육신과 분리된 마음’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 마음이란 8식 전체의 총체적인 활동이므로 일곱 개의 식이 결여된 아뢰야식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우선 죽음을 통해 말나식이 소멸된 상태이므로 영혼은 ‘자기에 대한 집착’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영혼은 생전에 가졌던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며, 생전에 집착했던 모든 대상에서 애착이 사라진 상태이다. 생전의 배우자나 연인 혹은 부모와 자식들에 대해서도 애착으로 인한 괴로움을 느끼지 않으며, 그들의 불행에 대한 연민을 느끼지도 않는다. 격렬한 분노나 증오 또는 적개심과 복수심 따위도 깨끗이 소거되어 그런 모든 집착은 하나의 정보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물론 이들 정보는 아뢰야식이 7식과 결합된 생명의 정신 활동으로 재생될 때는 잠재의식 속에서 다시 살아나, 살아있는 사람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뢰야식에 기록된 분노나 증오 또는 적개심은 환생했을 때 성격의 포악함이나 잔인성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상태에서 그런 감정은 그저 하나의 기록으로 그칠 뿐이다.
두 번째 차이는, 의식의 소멸에 의해 ‘자기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7식과 유리된 영혼인 아뢰야식은 의식과 결부되어 있지 않아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자기 인식은 오직 생명체만의 능력이며 육신과 분리된 영혼은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본유종자는 인식의 주체가 아니며, 인식이란 이 본유종자에 신훈종자를 보태는 과정인 생명의 단계에서만 가능하다.
세 번째 차이는, 감각 기관들을 근으로 삼는 전오식이 활동을 하지 않아 육체를 벗어난 영혼은 외부와의 교감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즉, 영혼은 그 스스로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말하고, 감촉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마음을 영혼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실제 그대로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영혼이 인식하고 사고하는 주체로서 육체와는 관계없이 홀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많은 영적인 사건들을 알고 있으며 나 역시도 남달리 그런 사건들을 많이 접해 온 바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은 영혼과 귀신을 구별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흔히 신 또는 귀신이라고 말하는 존재를 죽은 자의 영혼과 동일 개념으로 보는데서 오는 인식의 혼란인 것이다(여기서는 일단 귀신과 영혼은 다르다는 정도만 이야기 하고 귀신에 대하여는 이 장의 마지막에서 별도로 설명함).
인간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는 순간 7식의 도움을 받지 못하므로 독자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하거나, 어떤 일을 결행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생명과 영혼의 관계로 넘어가 보자.
지금 베토벤의 교향곡을 담은 방송국의 전파가 공중에 흐르고 있다고 해도, 라디오를 켜서 그 전파의 주파수에 맞추지 않으면 베토벤의 교향곡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파 자체가 교향곡은 아닌 것이다. 영혼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은 베토벤의 교향곡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답은, 악보에 기록된 음표의 집합도 아니고 녹음해둔 테이프도 아닐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악기나 라디오 같은 하드웨어와 결합되어 소리로 들릴 때 비로소 존재하는 소프트웨어다.
영혼도 마찬가지다. 연주되고 있지 않을 때도 베에토벤의 교향곡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은 생명체가 생명 활동을 유지하고 있지 않으면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정신계에 보존되어 있지만 정신계는 시공간과는 다른 것이어서 ‘어디에’라는 위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생명체는 무수히 많은 낱낱의 살아 있는 세포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육신이란 하드웨어와, 무수히 많은 낱낱의 정보들이 조직된 식의 통합체인 마음이란 소프트웨어의 결합체이다. 인간의 두뇌를 음악을 듣는 오디오 장치와 같은 하드웨어로 놓고 보면, 마음은 음악이 담긴 여러 종류의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이 담긴 매체로는 레코드판, 테이프, CD, 그리고 라디오로 들을 수 있는 방송전파 등이 있다. 이런 것들은 다 음악이라는 정보가 담긴 데이터들이다. 그런데 하드웨어와 데이터만 가지고는 음악을 들을 수 없다. 여기에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어떤 주부가 음악을 듣는다고 하자.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때까지는 아이들을 위한 동요 테이프를 듣는다. 아이들과 남편이 나가고 나면, 집안 청소나 설거지를 하면서 듣기 좋은 경음악 CD를 듣는다. 집안 일이 끝나고 나서 에어로빅을 하는 시간이면 경쾌하고 빠른 체조 음악을 튼다. 그 다음에는 좋아하는 프로를 하는 시간이니까 라디오를 한 시간 듣는다. 이런 일련의 진행 순서가 바로 프로그램이다.
즉, 음악이라는 생명 현상은 ‘오디오 세트’라는 하드웨어와, ‘데이터(음악을 담은)와 프로그램’이라는 두 가지 소프트웨어가 결합되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달리 비유해 보자. 오케스트라는 많은 악기 외에도 음향 장치, 조명 장치 등 여러 가지 소도구들을포함한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 하프, 북 같은 악기는 모두가 하드웨어다. 그런데 악기점에 진열되어 있는 악기는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곧바로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쓰일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데 필요한 악기의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조직해놓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신은 악기점에 진열되어 있는 악기의 군집이 아니라, 교향곡의 연주를 위해서 최상의 방식으로 조직해 놓은 오케스트라의 악기 구성인 것이다.
한편 악사들은 자기가 다루는 악기에 대한 지식과 연주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악사들이 가지고 있는 음악에 대한 정열이다. 음악에 대한 정열이 전혀 없는 악사들의 오케스트라가 좋은 연주를 할 수는 없다. 악사들 개개인이 가진 연주에 대한 열망이 바로 우리의 육신 모든 곳에 심어져 있는 말나식이다. 그리고 악사들이 자신의 악기를 다루고 연주하는 지식과 능력은 바로 아뢰야식에서 빌려온 것이다. 자기 보존의 본능과 능력은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긴밀한 협조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악사들의 악보대 위에는 연주할 곡의 악보가 올려져 있다. 이 악보가 바로 아뢰야식이 가진 정보다. 아뢰야식은 엄청난 종류의 악보를 소장하고 있는 수집가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음악들 중에서 어떤 음악을 어떤 순서로 연주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그러니까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이 바로 의식이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악사와 악보 없이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의식 역시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무대 위의 지휘자가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은 아니다. 연주회의 성격을 정하고 그에 따라 프로그램을 짜는 것은 별도의 영역이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음악회의 진행자다. 이 진행자의 역할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다. 음악회의 진행자는 악기의 종류와 악사의 자질, 준비된 곡들과 지휘자의 의견을 종합해서 하나의 음악회를 만든다. 마음은 육신과 육신을 다스리는 말나식, 모든 선험적인 지식의 보고(寶庫)인 아뢰야식, 그리고 지휘자인 의식의 통합체인 것이다.
마침내, 지휘자의 손이 올라가고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면 거기 비로소 교향곡이 존재하게 된다. 이 연주되고 있는 음악이 바로 생명이다. 아뢰야식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악보들은 생명이라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이나, 끝나버린 후에는 그저 종이에 기록된 음표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이 악보들은 하나의 악단이 해체되고 난 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남으며, 또 다른 악단의 손에 넘어가면서 반복해서 사용된다. 물론 악보책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교향곡이 수록된 것, 유행가를 모아놓은 것, 경음악을 모아놓은 것,
영화 음악을 모아놓은 것 등 여러 종류의 악보책이 있을 수 있고, 각기 수록된 음악의 성격에 따라 필요로 하는 악단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런데, 악보책은 언제나 같은 내용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어떤 악단의 지휘자에 의해 새로운 곡의 악보가 추가되거나, 편곡되기도 하면서 그 전과는 다른 악보 책으로 변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유행가만이 실려 있던 것이 여러 지휘자를 거치는 동안, 교향곡이 자꾸 추가되어 나중에는 유행가보다 교향곡의 가짓수가 훨씬 많아질 수도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악보 책은 교향곡 모음이지, 유행가 모음이 아니다. 반대로 아주 훌륭한 악보가 담겨 있던 책이 형편없는 유랑 악극단 주변을 떠돌다가 낙서 반, 엉터리 음악반의 형편없는 책으로 바뀌는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영혼이 아무리 삼류, 사류의 엉터리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한장 한장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어딘가에서 옛날에 연주된 적이 있는 훌륭한 음악의 악보를 발견하게 마련이다. 이것을 찾아내어 자주 연주하게 된다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자재불성(自在佛性)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생명은 반드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형태로만 존재한다. 육체가 없는 영혼(사후의 영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달리, 하나의 기록되어진 정보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전생과 윤회’는 별도의 장에서 상세히 살피겠지만 영혼은 억겁전생을 두고 윤회하는 것이다. 한번 생명계에 나타났다가 돌아갈 때마다 새로운 데이터(기억)가 더해져서 고등 동물의 영혼은 수십억 년을 두고 무량(無量)한 윤회를 반복한 결과, 수많은 생의 기억이 되풀이 기록된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또 매시기 사용했던 육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 정보의 기록 형태도 매우 다양하다.
아뢰야식에 정보가 기록되는 훈습의 실체를 비유를 통해서 조금 더 알아보기로 하자. 컴퓨터는 처음에 릴 테이프(Reel Tape)를 기록 장치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8인치 디스켓①이 나왔다. 그 뒤에 5.25인치가 나오고 이어서 3.5인치가 나왔다. 크기는 작아지면서 용량과 처리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곧 2인치 디스켓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제는 CD(Compact Disk)도 사용하고 있다. 20년 전부터 컴퓨터를 사용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초창기에는 릴 테이프에 정보를 담았다. 물론 그 후 8인치 디스켓, 5.25인치 디스켓 등 새로운 기록 장치를 사용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수십 개의 릴 테이프와 수백 개의 8인치 디스켓을 비롯해서 20년 동안 수천 개의 기록 매체를 가지게 되었다. 지금 그가 가진 컴퓨터는 5.25인치 디스켓과 3.5인치 디스켓 장치가 달린 신형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어느 날 20년 전에 릴 테이프에 담아 놓은 정보가 필요해졌다. 이 정보를 이용
할 방법이 있을까? 이미 릴 테이프 장치가 있던 컴퓨터는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이 20년 전의 정보는 없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는 아직 릴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 단지 거기에 기록된 정보를 읽어낼 하드웨어가 없을 뿐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가 20년 전에 사용했던 구닥다리 컴퓨터를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면, 그 컴퓨터를 고치기만 하면 릴 테이프의 정보를 살릴 수 있다. 그런데 20년 동안 안 쓴 컴퓨터라면 작동이 되지 않는 게 보통이다.
사람이 전생의 기억을 살리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전생의 기억을 담은 카트리지(Cartridge)는 모두 보관되어 있다. 각각의 하드웨어에 따라 각기 다른 규격과 방식의 매체라서 그렇지 단 한 개도 분실되지 않고 세트로 보관되어 있다. 죽음과 환생을 반복한 수천만 번의 생의 기록이 수천만 장의 매체에 차곡차곡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정보의 집합체가 인간의 영혼이다.
그렇다면 수십억 년 동안 사용했던 수천만 유형의 하드웨어는 전부 버렸는가? 그렇지 않다. 하드웨어 역시 마찬가지로 단 하나의 유실도 없이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인간의 두뇌는 수천만 유형의 컴퓨터가 들어있는 거대한 하나의 세트다. 수억 년 전에 사용했던 구닥다리 컴퓨터도 한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 반드시 보관되어 있다. 문제는 20년 전에 사용했던 컴퓨터의 경우처럼 사용법을 모르거나 작동 가능한 상태로 되살릴 줄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오래 사용을 안 했다 뿐이지, 인간의 두뇌에 달려있는 장치는 기름을 치고 전기를 넣어보는 식으로 끈질기게 만지다보면 살아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보관 중인 카트리지를 넣고 엔터키(Enter Key)②를 치면 정보가 나타난다.
물론 컬러 모니터에 익숙해 있던 눈으로 펀칭 카드(Punching Card)③에 찍혀 나오는 정보를 읽으려면 고역이다. 카트리지만 고물인 것이 아니고 출력 장치도 구닥다리인 것이다. 요즘 컴퓨터를 쓰다가 20년 전의 펀칭 카드를 읽으려면 못 읽는다. 그래서 전생 중에서도 짐승이었던 시기의 기억은 못 살려내는 것이다. 살려내도 출력 정보가 너무 달라서 해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려내고 해독할 수 있는 전생의 정보는 자기가 인간이었던 때의 기록뿐이다.
인간의 하드웨어인 두뇌는 수십억 년 동안의 모든 장치들을 세대별로 그대로 가지고 있는 세트이고, 영혼은 그 각각의 장치에서 기록했던 수천만 개의 카트리지가 모인 세트다. 이 하드웨어 세트와 소프트웨어 세트의 결합이 바로 생명이다. 하급 동물일수록 하드웨어의 세트(두뇌의 구조)는 간단하고 보유한 소프트웨어의 세트도 그 가짓수가 빈약하다.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다.
뒤에서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마는 일단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를 덧붙이자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하여 움직이게 만드는 힘, 즉 컴퓨터를 동작하게 만드는 전기라는 힘이 필요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이 컴퓨터에 공급되는 전력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생명체의 기(氣)인데 이 기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설명이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요약한다면 생명은 육신이라는 하드웨어와 정신이라는 소프트웨어, 그리고 이 양자를 결합시켜 생명력을 유지하게 만드는 기(氣)가 작용하고 있는 한시적인 현상이며 죽음이란 오디오 장치에서 전원을 꺼버린 상태와 같다는 것이다.
이제 영혼이 우리의 사후에 어떻게 존재하며, 우리와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는지 알아볼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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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디스켓(Diskette) : 컴퓨터의 데이터(자료)를 기록할 수 있는 매체로서 사각형 종이 쟈켓 안에 마그네틱 으로 코팅된 종이처럼 얇은 원반이 들어있는데, 이 원반의 표면에 자
기장의 원리를 이용해서 데이터를 기록하고 읽는다. 원반의 직경에 따라 8인치, 5와 1/4인치 3.5인치 등으로 나뉜다. 요즘은 8인치를 쓰지 않으며 5와 1/4인치 짜리도 점점 사
라지는 추세이다. 3.5인치가 현재로서는 표준인 걸로 보이는데 앞으로는 더욱 작은 사이즈의 디스켓으로 바뀌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②엔터키(ENTER Key) : 컴퓨터에 명령문을 입력한 뒤, 실행을 지시할 때 누르는 키이다.
③펀칭카드(Punching Card) : 흔히 천공 카드라고도 하는데 종이에 구멍을 뚫어 문자를 입력하거나 출력하는 장치이다. 요즘의 컴퓨터는 대부분 키보드와 모니터를 사용하
므로 이런 펀칭 카드를 구경하기가 어려워졌다. 아주 옛날 방식의 컴퓨터 입출력 장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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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여행-영혼과 사후세계 2
영혼과 사후세계-2
사후세계란 어떤 것인가?
우리는 흔히 영혼의 세계(죽어서 가게 되는 장소)로 천국과 지옥, 극락 또는 영계와 같은 상상을 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면서도 영혼의 실체를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머리와 팔다리를 가진)으로 상상하는 엉뚱한 구석을 가지고 있다. 분명히 육체가 사멸된 다음의 이야기인데도, 육신의 이미지와 완전히 분리된 영혼에 대해서는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영계에서도 자기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며, 지금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지금의 자기와 별 차이가 없으리라고 상상하고 있다. 여기에는 기존의 종교들이 가르쳐온 사후 세계에 대한 추상적인 교리들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귀신(영계에 존재하는 영혼의 모습으로 착각)을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뿌리 깊게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예수와 베드로가 살아 생전의 모습으로 황금 궁전의 뜰을 거니는 천국이나, 죄를 지은 사람들이 죽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영원히 불에 타는 지옥을 사후 세계로 가르쳐왔다. 불교 역시 생전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극락과 지옥을 그려서 보여주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사후 세계가 가능할 수 있을까?
나는 영혼과 사후 세계가 영원히 초자연적이고 신비하며, 불가지(不可知)한 문제로 남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후 세계도 생명과 우주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며, 단지 아직까지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연한 추측과 만화 같은 공상이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의 전부이던 시기는 지나가고 있다. 이제는 죽음과 그 이후의 일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유추를 가능하게 해주는 많은 단서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사후 세계는 과연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앞에서 생명이란, 물질계와 정신계가 결합되면서 시공간 내에서 한시적으로 발현되는 특수한 현상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생명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주위의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들여야 하며, 한번 이 에너지의 공급이 끊겨 말나식이 정지되고, 의식이 멈추어버린 두뇌와 함께 소멸되고 나면, 두 번 다시 생명현상은 재현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에도 생각과 기억이 유지될 것인가? 생각과 기억이란 바로 마음인데, 과연 영혼은 마음을 가진 존재인가?
만약에 생각하고, 기억하는 영혼(마음을 가지고 있는)이 사후에도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생각’이나 ‘기억’이 생명체만의 특성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생명체가 아닌 상태에서도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으며, 자유 의지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존재하는 데 굳이 육신이 필요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된다면 생명도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마음이 살아있거나 죽어있는 현상과는 무관한 존재라면, 당연히 ‘생각’이나 ‘기억’은 뇌를 비롯한 여러 감각 기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볼 수밖에 없어진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생전의 기억을 유지한 채,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고, 이 생각과 기억을 가진 어떤 존재를 자신의 영혼으로 믿고 있다. 그렇다면 뇌라는 하드웨어가 기능을 정지한 다음에도 사고가 가능해야만 하는데, 과연 그럴는지는 의심스럽다.
나는 죽음이 일종의 잠자는 상태가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잠들기 전의 기억이 깨고 난 후에 이어지지 않는 잠’이다. 쉽게 말하면 ‘기억상실증을 유발시키는 특이한 사건’이다. 죽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가 흔히 삶과 죽음의 경계선으로 볼 수 있는 생리학적인 상태에는 세 가지가 있다. 식물인간, 뇌사 상태, 가사 상태가 그것이다. 식물인간이란 신체 기능의 자율적인 통제 이외의 모든 사고와 의식이 정지된 상태이다. 그러나 호흡, 심장의 박동 및 여러 가지 신진대사를 관장하는 뇌의 기능은 살아있다. 정확하게는 대뇌의 기능은 정지한 반면에 자율신경 계통을 관장하는 소뇌의 기능은 유지되고 있는 상태이다. 외부에서 영양을 공급해주고, 배설물을 치워주기만 하면 혼자 숨쉬고 스스로 심장을 움직이며 스스로 소화를 시킨다.
뇌사(腦死) 상태는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모든 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신체의 기본적인 기능조차도 발휘가 안 되는 상태다. 뇌사 상태의 사람은 인공적인 호흡 장치와 심장의 박동을 유지시켜주는 장비들을 제거하면 즉시 죽는다. 다시 말하면 죽어있는 시체의 심장과 허파를 인공 장치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는 상태다.
가사(假死) 상태란 심장이 멎고 호흡이 정지된 상태를 말한다. 물론 의학적으로는 죽었지만 심폐기를 이용해서 소생시킬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인공호흡이나 전기충격 등의 방법으로 심장이 멎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경우는 흔히 있다. 심장이 멎었다가 다시 뛸 때까지의 기간이 가사 상태다. 물론 심장이 다시 안 뛰면 가사가 아니라 뇌사가 된다.
삶과 죽음 사이의 이러한 문지방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후 세계에 대한 약간의 단서를 제공해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후 세계를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세 가지 상태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뇌사 상태에서 소생한 경우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의학적으로 뇌사는 완전한 죽음으로 간주된다. 식물인간의 상태에서 깨어난 경우 그 동안의 의식의 기억을 사후 세계의 체험으로 보기는 어렵다
. 가장 흥미로운 것은 가사상태에 빠졌던 사람들의 체험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사후세계를 보고 왔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수집된 수많은 사례들은 어떤 것들일까?
그들의 체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생리학적 체험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적 체험이다. 생리학적 체험은 거의 공통적인데, 동굴과 빛이 가장 자주 등장한다. 아주 어둡고 긴 동굴을 빠져나가 환하고 밝은 빛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대부분의 체험자들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
두 번째 의식적인 체험은 다시 두 가지 그룹으로 나뉜다. 하나는 자신의 육체가 육신을 떠나 누워있는 자신의 육신과 그 주변을 내려다보았다는 유체이탈의 체험이다. 가사 상태의 체험 중 유체이탈의 사례는 무척 많다. 또 하나의 그룹은 예수, 천사, 부처나 자신의 할머니와 같은 이미 죽은 사람들의 마중 체험이다. 그들은 대개 구름이나 황홀한 빛에 싸여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고 하는 상봉(相逢)의 스토리다.
그렇다면 이러한 체험이 과연 죽은 후의 체험인지, 죽기 전의 체험인지를 알기 위해서 생물학적인 죽음에 대해 알아보자.
가장 일반적인 확인법은 맥박의 유무이다. 즉, 심장이 뛰느냐 멈추었느냐가 기준이다. 맥박이 멈추었으면 일단 죽음인데,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확신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소생의 가능성이 아직 있기 때문이다.
눈동자가 빛에 대해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뇌사상태다. 비로소 완전히 죽은 것이다. 맥박이 멈추고 눈동자가 더 이상 반응을 하지 않게 되기까지는 약간의 시차가 존재한다. 심장이 멈춘다는 것은 몸의 각 부분에 더 이상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소 공급이 끊길 경우 가장 빠르게 파탄 상태에 이르는 신체의 조직이
바로 뇌세포다. 다른 조직은 산소가 완전히 차단된 후에도 10분 이상, 길게는 몇 시간도 견디지만 뇌세포는 1~3분 이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그리고 한번 손상된 뇌세포는 영구히 회복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심장이 박동을 멈춘 순간부터 1~3분 정도는 뇌가 활동을 유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반응이나 기능이 급격하게 저하되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최종적인 정지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맥박은 멈추어도 뇌가 아직 살아있으면 눈동자는 불빛에 반응을 보인다. 눈동자의 반사적인 반응은 뇌
기능의 존재 여부를 살피는 중요한 척도다. 이 찰나의 순간이 바로 가사 상태이다. 이 동안에 기적적으로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고 혈액이 돌게 되면 뇌도 다시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런데 가사 상태에 빠졌던 사람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여 터널의 끝에서 빛과 만났다고 말하고 있다.
이 터널과 빛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이 터널과 빛을 사후 세계의 입구에 실제로 존재하는 출입문으로 생각해왔다. 워낙 여러 사람의 체험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다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터널과 빛의 정체는 초음속 항공기가 등장하면서 풀렸다.
초음속 전투기 조종사들은 급선회나 급강하할 때 원심력에 의한 하중을 몸에 받게 된다. 톱 클래스의 조종사들은 9G(지구 중력의 아홉 배)까지 견뎌내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보통의 인간은 6G 이상의 중력이 몸에 가해지면 의식을 잃게 된다고 한다.
특히 이 하중의 방향은 비행기의 기수를 아래로 숙이면서 급강하할 때 발에서 머리 쪽 방향으로 작용하므로 온몸의 피가 머리로 몰려 순식간에 의식을 잃게 된다. 이때 눈앞이 새빨개진다고 해서 레드 현상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중력이 발쪽으로 작용할 때는 혈액이 아래로 몰려 뇌가 혈액 부족 상태에 빠지는데 이것을 화이트 현상이라고 한다. 화이트가 레드보다 훨씬 견디기 쉽다고 한다. 전투기가 하강할 때 기수를 바로 숙여서 내려가지 않고, 동체를 거꾸로 뒤집어서 내려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런 레드나 화이트 현상에서 조종사들이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터널이다. 이것은 뇌압(腦壓)의 갑작스러운 증가나 급격한 뇌빈혈 때문에 시신경이 기능을 상실하면서 눈의 조리개가 줄어들어 시야가 좁아지는 현상이다. 눈을 감고 있어도 이 터널은 계속 보인다고 한다. 보통 때의 넓은 시야가 망원경을 들여다보듯이 하나의 원으로 좁아지면서 그 원이 점점 작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좁은 기다란 터널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게 되는데 이때 조종사들은 아주 황홀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처음 고하중이 걸릴 때는 고통이 먼저 오지만, 이 터널이 생기는 순간부터는 아늑하고 편안한 고요를 느낀다. 이는 가사 상태의 체험과 대단히 흡사하다.
그래서 사후세계를 보고 왔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죽음의 체험자들은 공통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이 본 것은 사후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산소의 공급이 차단되어 급격하게 기능이 멈추어져 가는 두뇌 현상이 시각에 나타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 터널의 끝에서 보게 된 밝은 빛은 소생될 때, 다시 흘러들어 온 산소로 뇌가 기능을 회복하면서 보이는 현상일 것이다. 오래 꿇어앉아 있다가 일어서면 피가 통하지 않아 다리에 쥐가 나면서 전기가 통하듯이 쩌릿쩌릿함을 느끼
는데, 마찬가지로 뇌에 쥐가 나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겠는가? 굉장한 환각과 환상을 볼 것 같지 않은가?
산소가 다시 공급되면 제일 먼저 시신경이 살아나므로 갑자기 환하고 밝은 빛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뇌에 흘러 들어온 산소로 말미암아 파괴되기 직전의 뇌세포들이 살아나면서 시각 기능이 회복되는 데, 이 회복의 순간이 어둡고 긴 터널의 끝에서 보는 밝은 빛의 실체가 아닐까. 그러니까 어둠의 터널과 그 끝의 빛은 의식적인 체험이 아니라 생리적인 현상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두 번째로 얘기할 체험들은 생리적인 반응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영적인 것인데,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하나는 자기의 죽음과 그 죽음을 슬퍼하는 가족들을 자기 눈으로 보았다거나 누워있는 자신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는 유체이탈의 경험이다. 다른 하나는 생생한 꿈처럼 여러 장면을 본 경우이다. 내용은 사람마다 틀려서 어떤 이는 예수를 보고, 어떤 이는 천사를 보고, 어떤 이는 부처를 보고, 어떤 이는 죽은 가족 중의 누군가를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자기가 모르는 누군가를 보기도 하고, 꽃이 만발한 정원이나 물이 흐르는 강을 보기도 한다. 이것은 실재하는 세계의 장면이 아니므로 일종의 환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지만, 가사 상태로부터 최종적인 죽음으로 다가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작용의 환상이므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환시나 환청과는 다르다.
이런 체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살아 있는 육신과 영혼과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의식과 영혼이 육신의 생명력이 사라짐에 따라 어떤 영향을 받는지 알아보면 사후의 영혼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후에 보게 되는 저승의 광경은 무엇이고, 그리고 왜 그런 것을 보게 되는지 다음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영혼과 사후세계-3
사후에 보는 저승의 모습
인간의 육체가 기능과 구조가 상이한 여러 부분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종합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 활동(마음) 역시 8식의 결합체임을 유식설을 통해 알아본 바 있다. 그렇다면 팔다리와 여러 장기들이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8식도 각기 분리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죽은 후에는 육체가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그리고 약간의 석회질 등으로 분리되어 자연계로 환원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8식(마음)도 사후에는 생명체일 때의 통합성을 상실하고 낱낱의 식으로 분리되는 것이다. 어떤 것은 육체와 더불어
영구히 사라지고 어떤 것은 정신계에 남아 세세윤회의 본유종자로 유전하게 된다. 우리의 개념으로 볼 때 넋인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얼인 백(魄)은 땅으로 돌아가는, 영과 혼의 분리를 겪게 되는 것이다.
상상 속에서 한 가지 실험을 해본다면 이와 같은 마음의 분리를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런 실험은 현재의 의학 기술로 가능한 것이지만 도덕적인 문제가 걸려 있으므로 가상적인 실험이 되어야 한다.
사람을 대상으로 마취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눈과 뇌를 연결하는 시신경을 절단한다. 당연히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된다. 그 다음 귀와 뇌를 연결하는 청신경을 절단하면 귀머거리가 된다. 코의 후신경을 절단하면 어떤 냄새도 맡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는 혀의 미각신경도 절단한다. 당연히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척추신경을 절단하면 이 사람은 온몸이 마비되고 어떤 감각도 통증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상상이긴 하지만 상당히 잔인한 실험이다. 그런데 이렇게 했을 때 이 사람의 의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암흑과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철저한 적막과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는 절대 무감각의 세계에 빠져있지만 두뇌의 기능은 하나도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다. 이 사람은 두뇌로서 생각과 의식을 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의식 세계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 이럴 때 인간의 의식이 겪게 되는 분열과 붕괴의 사례는 많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사례로 헨리 영 사건을 들어보겠다.
미국 동부 연안에는 알카트레즈라는 유명한 감옥이 있다. 남북전쟁 때 북군의 요새였던 것을 감옥으로 개조한 것인데, 흉악범을 수용하는 악명 높은 교도소였다. 70년대 중반에 교도소 역할은 끝이 났고 현재는 유명한 관광지가 된 곳이다. 60년대 초반에 헨리 영 사건으로 전 미국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이 교도소의 지하 감방은 미국이란 나라에도 참혹한 인권의 사각 지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헨리 영 사건 재판 당시 재판부에 제출된 자료에 의하면 지하 감방에 3개월 이상 갇혔던 죄수의 절반 이상이 정신 이상을 일으켜 정신 병원으로 이감되었다고 한다. 지하 독방은 빛이 없는 암흑과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의 공간이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면 인간의 의식은 그 이전에 보고 들었던 기억 속을 헤매게 된다. 이 기억은 처음 얼마 동안은 또렷하게 의식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헝클어지기 시작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 기억의 기능이 떨어지고 연상이 불가능해지면서 마음은 공포와 조급함과 갑갑증으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에 이른다.
이럴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신과 의식의 사분오열 끝에 영혼이 망가지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어떤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하게 되어 마침내는 그 한 가지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백치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경우다. 헨리 영은 3년 3개월의 독방 생활 동안 오로지 조 디마지오가 나오는 프로야구만을 생각했고, 마침내 야구 외에는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빛과 소리 등이 차단된 독방 생활의 후유증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의 의식은 유식설에서 말한 것처럼 전오식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눈으로 보는 안식, 귀로 듣는 이식, 코로 맡는 비식, 혀로 느끼는 설식, 온 몸으로 느끼는 신식의 다섯 가지 감각이 살아있어야 의식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전오식 중 사람의 경우 의식이 가장 강력하게 의존하는 것이 안식과 이식이고 동물의 경우는 비식이다. 전오식이 완전히 차단되면 제6식인 의식은 고립 상태에 빠지고 곧바로 절망 상태에 이른다. 이럴 때의 의식은 고장난 등사기 같아서 기억의 창고 속에 있는 여러 영상과 음향들을 단속적이고 불규칙하게 끌어낸다. 그것들은 처음 한동안은 현실성이 있는 영상이다가 점차 비현실적이고 신비적
인 이미지로 조합되면서 경험한 바 없는 환상을 그려내게 된다. 동시에 전오식과 연결되어 있을 때는 잠재되어 있던 영계와의 교류가 강해진다. 결국 사람의 정신은 분열되고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일을 겪으면서 미치고 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경험을 우리는 매일 하고 있다. 잠을 자는 것은 전오식이 차단되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전오식이 닫히면 의식은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신비적인 영상의 경험을 끌어내는데 이것이 바로 꿈이다. 물론 이 상태에서 영계와의 교감이 이루어져 선몽이나 계시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전오식의 문이 다시 열리면 의식은 전오식에 사로잡혀 그것이 전해주는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 현실 인식은 바로 전오식이 가져다주는 정보들에 힘입은 것이다.
전오식이 차단되면 어떤 형태로든 의식의 왜곡이 시작되고 그 왜곡은 저장되어 있는 기억에 영향을 미치며 장기적으로는 의식의 파멸을 가져온다. 원효가 말한 일체유심조는 전오식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을 추구하여, 전오식과 분리되고 고립된 상태에서도 분열하지 않는 정신 상태를 말한 것이다. 전오식과 독립되어 자유로운 마음, 이것이 선의 지향이지만 수도와 참선을 통하지 않은 경우는 의식의 독립이 아니라 고립을 가져오고 정신의 자유 대신 정신 분열에 이르고 만다.
앞서 말한 가상적인 수술은 전오식을 인위적으로 하나씩 제거해 나간 것이다. 그래서 전오식을 의식으로부터 완전히 끊어버렸을 때 인간의 의식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헨리 영의 경우를 예로 들어 유추해 보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개의 식인 말나식과 아뢰야식은 어떨까?
말나식은 특정한 신체 기관을 근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에 심어진 자아이고 전오식과 의식을 하나로 통합하는 근원적인 생명력이다. 이 말나식이 있기 때문에 앞의 여섯 가지 식이 하나의 생명 현상으로서 종합되어 유지될 수 있다. 말나식은 육체의 형상과 동일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육신의 형태를 기억하고 있다. 뒤에 가서 다시 설명을 드리겠지만 귀신이 생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 말나식이 기억하고 있는 육신의 형상 때문이다.
말나식에 새겨진 육신의 형상은 특수한 능력을 가진 주술사나 영적인 수행(선이나 명상 또는 기수련 등)을 닦은 사람의 눈에 육신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육신의 크기와 형태를 그대로 지닌 어렴풋한 빛 또는 오로라 상태로 보이는 것이다. 이 오로라를 심령과학자들은 영혼의 실체라고 부른다. 이 영혼의 실체가 사후 육신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공개되기도 했다.
러시아인 킬리언(Semyon Kyrlian)과 그의 아내 발렌티나(Valentina)가 만든 킬리언 사진기가 유명하다. 킬리언·발렌티나 이전에도 심령술의 초기에 사진기를 이용해서 영혼을 찍는 시도는 꾸준하게 있어왔지만 1862년에 최초의 심령 사진을 찍었다고 알려진 보스톤 출신 조각가 윌리엄 멤러가 찍은 영상(靈像)이 합성 사진으로 밝혀져 사기 혐의로 고발된 이래 이중 노출을 이용한 사진으로 사람들을 속인 영국의 심령 사진가 토마스 허드슨의 경우 등 영혼을 찍었다는 사진들은 대개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사기 행각으로드러났다.
한편으로 이런 영혼의 촬영과는 성격이 다른 연구가 진행되어 왔는데, 그것은 생명체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오로라에 대해서였다. 최초의 연구결과는 영국의 의사였던 월터 카르나가 1911년에 쓴 “인간의 정황”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표되었다. 키르나 박사는 인체 주위에 발산되는 오로라는 불가시(不可視) 대역(帶域)의 스펙트럼인 자외선이며 이 발광체는 자석과 전기에 영향을 받으며 인체의 상태(건강의 정도)에 따라 폭과 빛깔이 변한다고 했다. 이 생명체의 오로라에 대해서 보다 확실하고 정확한 촬영방법을 고안한 사람이 바로 킬리언·발렌티나 부부였다. 킬리언 사진기는 감광지 위에 촬영할 물체를 올려놓고 매초 7만5천에서 20만회의 진동수를 가진 고주파를 방사하면 피사체의 오로라가 감광지에 전도되어 나타나는 원리에 의한 것이었다. 킬리언 사진기를 이용하여 구소련의 과학자들이 다양한 연구와 조사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밝혀진 중요한 사실 하나
가 있었다. 그것은 우연히 발견된 것이었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말나식과 영혼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소련의 과학자들이 나뭇잎 한 장을 킬리언 사진기로 찍고 그 잎의 일부를 잘라낸 다음 다시 찍었을 때 감광지에는 잘라낸 잎의 부분과 형상과 크기가 똑같은 오로라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게 된 것이었다.
생명체의 일부를 떼어낸 후에도 한동안 형상과 크기를 유지하는 오로라를 소련의 과학자들은 ‘바이오플라즘’이라고 이름 붙였다. 물론 이 킬리언 사진기에 찍혀 나오는 형상의 실체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영적인 존재로 판단하는 걸 부인하고 있다. 생체에서 발산되는 수분이 고주파 작용으로 형상화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이 바이오플라즘은 뒤에 가서 ‘영혼과 귀신’이란 것에 대한 규명에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육신과 말나식의 관계를 짐작케 해주는 사례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나 전투 중의 부상으로 팔다리를 절단한 사람은 한동안 잘라낸 부위에서 간지러움이나 통증을 느낀다고 한다. 마치 그곳에 팔다리가 온전히 붙어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이야기다. 잘려나간 육신의 신식(身識)은 그 육신과 함께 분리되어 버렸지만 그 신식을 결합시켜주고 있던 말나식은 자기에 대한 집착과 자기 보존의 에고적 힘으로 그 원래의 형상대로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래서 떨어져나간 팔이나 다리가 여전히 붙어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실제로 영적인 수련을 한 사람들은 생명체의 말나식이 만들어내는 빛이, 잘려나간 육신의 형상 그대로 그 자리에서 한동안 유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손가락이 하나 잘려나가면 그 부분에 손가락 형태의 빛이 그대로 유지되다가 차츰 약해지면서 서서히 사라진다. 신체의 각 부분이 손상을 입었을 때 가급적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는 것은 훼손된 부위의 말나식이 살아있어서 그 형상과 크기와 성질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과학은 신체의 손상 부위가 원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메카니즘을 거의 모른다. 신체가 어떻게 손상되기 전, 원래의 형태를 기억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는 것. 그러나 육신과 결합된 정신의 원리를 알고 8식의 존재와 그 작용을 이해한다면 이런 의문은 쉽게 풀릴 것이다. 육신은 그 속에 심어진 말나식에 의해서 원래의 형상과 조직의 성격을 기억하고 있다. 손상된 육신이 복구되는 시간이 말나식이 유지되는 기간보다 길어질수록 즉, 손상의 정도가 심할수록 복원 형태는 원상과 달라진다.
전오식은 육체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제거된 경우에도 이 식들을 결합시킨 말나식의 작용으로 일정한 기간 동안 식으로서의 잔상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 잔상이 소멸되어 가는 동안 그 식이 없는 상태로의 적응해 나가게 된다. 하나의 식이 파괴되면 다른 식의 기능이 향상되면서 보완을 한다. 전오식에 의지하는 의식은 그 식의 도움을 받지 않고 정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킨다. 갑자기 실명한 사람은 귀가 밝아지고 후각이 예민해진다. 의식은 앞으로 시각 정보가 자기에게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안식(眼識)이 없는 상태의 의식 체계로 전환한다. 이 전환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이 사람은 안식이 들어오지 않는 상태에 적응하지 못하고 절망과 우울에 사로잡혀 정신
이 병들게 되는 것이다.
이 적응 기간 동안 없어진 식은 그 잔상을 유지하여 의식의 적응과 전환을 도와준다. 전오식의 이러한 변화는 말나식에 기록되어, 잠을 잘 때나 기절을 했을 때나 마취를 당한 상태에서도 말나식으로 하여금 전오식의 존재를 확인하게 한다. 그래서 잠을 잘 때, 전오식이 ‘일시적’으로 닫혔다는 것을 인간의 육신은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손이 잘린 사람은 한동안 자명종의 소리를 듣고 없어진 쪽의 손을 뻗으려고 한다. 갑자기 실명한 사람은 잠에서 깼을 때 주위를 보려고 한다. 그러다가 이 식의 일부가 완전히 없어졌음이 말나식에 기록이 되면 그런 습관은 사라진다.
성직자나 주술사 또는 무속인의 경우 귀신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죽기 전 오랫동안 한쪽 다리 없이 불구로 살았던 사람의 경우는 귀신도 다리 하나가 없는 상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고 치료 도중에 죽은 사람은 죽기 전에 한쪽 다리를 잃은 상태이지만 귀신은 정상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다리 하나를 잃은 후에 곧바로 죽었기 때문에 이 사람의 말나식은 아직도 두 다리가 온전한 상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한쪽 다리 없이 불구로 생활하다가 죽은 사람인 경우에는 말나식에 한쪽 다리의 형상에 대한 기억이 소멸되어 귀신의 형상도 불구로 나타나는 것이다.
전오식은 그것이 근으로 삼고 있는 육신이 손상을 입으면 그만큼 소멸되며 각각의 식은 부분적으로 소멸되기도 한다. 두 눈 가운데 하나를 잃으면 안식의 일부가 소멸되는 것이고 팔다리를 잃으면 신식의 일부가 소멸되는 것이다. 전오식은 육신의 근이 손상을 입었을 때 즉시 소멸되지 않고 말나식의 기억에 얹혀서 한 동안 잔상이 유지된다. 다시 말해 근이 없어진 다음에도 말나식에 새겨진 기억에 의해 한동안은 그 식이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이야기이다. 전오식 중에 잔상의 유지 기간이 가장 짧은 것은 안식이라고 한다. 그 다음 이식이고, 비식, 설식, 신식의 순서다.
죽음은 이 전오식의 근이 한꺼번에 손상을 입어 기능이 정지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생전에 근의 일부분이 기능을 잃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식의 잔상이 일정 기간 동안 유지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부터 사람이 죽은 후 49일 동안은 저승에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돈다 하여 49재를 지내왔고 절에서도 이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하나의 의식(儀式)으로 집행하고 있다. 그런데 49일은 바로 한 인간의 모든 식이 그 잔상을 거두는데 걸리는 기간이다. 맨 먼저 안식이 소멸되는데, 여기에 일주일이 걸린다고 한다. 그 다음 일주일 동안에 이식이 사라지며 뒤이어 비식과 설식과 신식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전오식의 잔상이 모두 소멸되는 데는 ‘5×7=35일’이 걸린다. 전오식의 잔상이 꺼지고 나면 다시 일주일 정도의 기간이 지난 뒤에 제6식인 의식의 촛불이 꺼진다. 의식이 소멸되고 나면 마지막 7식인 말나식이 소멸되어 비로소 한 인간의 생명의 흔적이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죽음 후 이 일곱 가지 식이 소멸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7×7=49일’이어서 죽은 사람의 영이 영계의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49재를 지내는 것이다.
이 일곱 가지 식이 소멸되고 나면 마지막으로 제8식인 아뢰야식만 남는데 이 아뢰야식은 원래 육신에 근을 두고 있지 않아서 육신의 소멸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영혼의 구성체 중 육신에 근을 둔 것은 육신의 사망과 더불어 소멸되고 육신에 근을 두지 않은 완전히 영적인 부분만 사후에 남는다. 이것이 바로 아뢰야식이다. 이 아뢰야식은 다시 한 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더한 채 영계에 있다가 그 맺은 인연에 따라 다시 새로운 생명의 원인이 된다. 그렇게 해서 생은 반복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49일 동안 일곱 가지 식의 잔상이 서서히 약해져서 꺼져 가는 동안, 의식의 잔재물은 영계의 기운과 접촉하면서 영계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 통과의 의례가 끝나는 순간부터 의식은 영원히 잠들게 되는 것이다.
일곱 가지 식이 떠나버린 다음에 홀로 남은 아뢰야식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고통받는 존재가 아니다. 인연에 의해서 다시 생명이 되어 7식이 새로 더해질 때까지 그것은 고요한 침잠의 세계요 적막의 바다에 흐르는 파도며 기운일 뿐이다.
인간은 사후에 혼자서 강을 건너고 꽃밭을 지나고 저승에서 온 사람들의 마중을 받기도 한다. 각자의 삶에 따라서 부처나 스님의 안내를 받을 수도 있고 천사의 영접을 받을 수도 있고 조상을 만날 수도 있다. 염라대왕이나 사나운 괴물에게 시달림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꺼져 가는 의식이 영계와 만나면서 그려내는 환영이다. 그러나 보고 경험한 것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매일 꾸는 꿈의 내용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이 기간의 저승 여행은 각자 다른 체험이어서 어떤 사람의 것이 저승의 확실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다. 환희를 느낄 수도 있고 공포을 느낄 수도 있다. 편안한 마음이 되기도 하지만 극도의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공포나 죄의식 또는 불안에 사로잡히는 것은 일곱 가지 식의 덩어리가 아뢰야식과 분리되지 못하고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경우이다. 이것들이 구천을 떠도는 원귀가 되고 귀신이 된다. 49재를 지내는 이유는 영혼들을 편안케 해서 그 잔상들을 깨끗하게 지우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다. 그래야 영혼들이 가장 평온하게 안정되며 깨끗한 아뢰야의 바다에 한 송이 연꽃으로 떠있게 되는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인간의 마음은 유식설에서 말하는 여덟 개의 식이 모인 총체적인 현상을 일컫는 것이지 그 중 어떤 특정한 것을 떼어서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여덟 개의 식은 개별적으로 소멸될 수 있고, 하나의 식도 일부분씩 제거될 수 있다. 눈 하나를 잃으면 안식의 일부를 잃게 되어 원근의 판단력을 상실하게 되고 귀 하나가 멀면 이식의 일부가 상실되어 방향 감지력이 쇠퇴하게 된다. 팔 하나가 잘리면 그만큼의 신식이 소멸된다. 인간의 의식도 부분적으로 상실되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망가지기도 한다. 알츠하이머, 기억상실증, 분열증, 외상에 의한 정신장애 등은 모두 의식의 일부가 훼손되거나 망실된 결과다. 의식이 손상되면 전오식이 영향을 받는다. 안식이 혼란을 일으켜서 환상을 보기도 하고 이식이 깨어져 환청을 듣기도 한다. 의식이 완전히 파괴되면 전오식도 동시에 파괴된다. 뇌졸증에 의한 출혈로 뇌가 파괴되거나 뇌진탕이 심한 경우, 의식은 깨어지
고 전오식도 파괴된다.
식물인간은 전오식과 의식이 붕괴되고 말나식과 신식의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이고 뇌사상태는 말나식조차 파괴된 상태다. 물론 그 잔상들은 일정 기간 동안 존재하므로 그 동안 반의식 상태의 꿈처럼 저승 입구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영혼은 부분부분 또는 점진적으로 소멸될 수도 있고, 한꺼번에 소멸될 수도 있다. 육체의 일부가 상실된 사람이 불구이듯이 영혼의 일부가 훼손된 사람도 마찬가지로 불구다.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깨어지는 상태다. 육체는 육체대로 영혼은 영혼대로 분리되어 일부는 영원히 사라지고 일부는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는 상태이다. 육신은 그 형태가 바뀐 채 시공간이란 물질계에 돌아가 다른 생명체의 육신이 되고 영혼도 그 형태가 바뀐 채 정신계란 영계로 돌아갔다가 새로운 생명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살아 있는 생명의 영혼과 동일한 성격의 영혼이 남는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다. 살아 있을 때의 영혼과 죽은 후의 영혼은 살아 있는 육체와 시체만큼의 차이가 있다. 가장 완전한 존재는 살아 있는 생명체이지 사후의 영혼이 아니다. 그래서 한 생이 그토록 소중한 것이고 어떤 공덕이나 악덕도 살아 생전이 아니면 쌓을 수 없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사람의 몸을 받아 이생에 났을 때 수행을 통해 해탈했던 것이지 극락에서 해탈을 이룬 것이 아니다.
사후 영혼의 상태로는 어떤 발전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억겁 전생을 되풀이 나는 동안 공덕을 쌓아 마침내 부처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죽은 영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로지 살아있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람은 몸을 받아난 지금 무엇이든 해야 하는 것이다. 죽은 다음에 극락에서 도를 닦아 부처가 된 귀신은 없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이 한세상 쾌락과 욕망을 쫓아 해보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죽은 다음에 부처가 되어도 될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늦지 않을 것이므로.
그러나, 사후의 영혼이란 생명체의 영혼과 달리 일곱 가지 식이 소멸된 상태이므로 자유 의지가 없으며 즐거움이나 고통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다. 지금부터는 사후 세계의 체험담 중 유체이탈에 대해 살펴볼 생각이다.
네 번째 여행-영혼과 사후세계 4
영혼과 사후세계-4
유체이탈(幽體離脫)
유체이탈의 체험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례가 보고되어 있다. 유체이탈은 가사 상태나 돌발적인 사고 때 겪은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다음은 한 프랑스인의 체험이다.
그는 파리 교외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나타난 반대편 차량과 정면충돌을 하게 되었다. 충돌 순간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바로 그 순간 유체이탈을 했다고 한다.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됐다고 느낀 수십 분의 일초라는 짧은 순간에 그의 마음은 공포를 못 이겨 육신과 분리된 것이다. 분명히 ‘꽝!’하는 충돌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주위가 아늑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아주 고요하고 편안한 가운데 공중에 떠 있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한 자신의 차가 있었다. 앰뷸런스가 달려오는 장면도 보았다. 처참하게 부서진 차에서 사람들이 자기 시체를 끌어내고 있는 것도 보았다.
물론 이 사람이 의식을 회복한 것은 병원의 중환자실이었다. 그는 자신이 유체이탈을 체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말을 정리해보니 실제 상황과 거의 일치했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수집된 유체이탈의 체험은 대개 이런 식이다. 가사 상태에 빠져있을 때(어떤 사람은 마취되어 있는 중에) 누워 있는 자신을 천장 가까이에서 내려다보았다거나 의사들이 자신의 몸을 째고 수술하는 것을 보았다는 그런 얘기들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유체이탈의 체험이 가능한 것일까? 단순한 환각으로 치부하기에는 실제 상황과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 많이 일치한다. 그러니 이런 체험자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을 육체와 영혼이 합해져 있는 상태로 본다면,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상태다. 그렇다면 그 역은 어떠할까?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면 곧 죽음일까? 만일 그렇다면 유체이탈은 불가능하다. 유체이탈을 하는 순간 이미 죽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는 곧 죽음이다. 전오식과 말나식과 아뢰야식이 육신과 분리되면 그것은 완전한 죽음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생명체인 경우 팔식은 육신의 근에 뿌리 박혀 있어서 어떤 경우에도 이 양자를 분리할 수 없다. 선이나 명상 수도 중에도 전오식이나 의식의 분리를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전체 영혼 중 일부의 분리이지 영혼의 전체적으로 떠나는 죽음과는 크게 다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의식의 자기 망각상태-무아’ 또는 ‘의식의 분리’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영혼의 외출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유체의 이탈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른 사건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실제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의식을 잃은 채 실려와 수술을 받았다. 누군가 그의 안경을 수술실 옆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수술 직전에 한 간호사가 이 안경을 탁자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는 수술을 받고 깨어나서 안경을 찾았다. 아무도 찾지를 못했다. 그때 그가 말했다. 한 간호사가 자기 안경을 수술실 탁자 서랍에 넣는걸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간호사의 인상착의까지 말했다. 가족들이 그 간호원을 찾아가 물어보니 정말 그가 말한 그대로였다. 의식을 잃고 마취까지 당한 상태에서 어떻게 그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을까? 그 순간 그는 유체이탈을 했던 것일까? 물론 본인은 그렇게 믿고 있다고 한다.
한 가지 실화가 더 있다. 어떤 사람이 심장마비로 죽었다. 가족들이 몰려와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그런데 그때 그는 가족들이 자신이 누워 있는 침상 주위로 몰려와서 울던 광경을 자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이 자기 주위에 어떻게 모여 있었는지를 정확히 보았다는 것이다. 그는 사망 판정을 받고 영안실로 옮겨지는 도중에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나 그가 본 것을 이야기했는데, 실제 상황과 똑 같았다고 한다. 역시 그 순간 유체이탈을 했던 것일까?
육신과 분리된 영혼이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산 사람처럼 방안의 광경을 볼 수 있었던 것일까? 과연 영혼은 그런 것일까?
이차크 벤토프는 "우주심과 정신물리학"이란 그의 저서에서 ‘시간의 정지’를 통한 유체이탈(그의 표현대로라면 ‘의식의 여행’)이 가능하다고 쓰고 있다. 명상 수련을 통해서 주관적인 시간(자기 자신에게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하면 의식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디든 다녀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육신은 한 자리에 앉혀 놓은 채 의식만으로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바닷가를 산책하고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가정을 실제로 증명해 보이지는 못했다. 만일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어떤 사람의 의식은 객관적으로 같은 시간에 바닷가의 광경을 그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5시 40분 13초에 자기의 주관적 시간을 정지시키고 그 순간 마이애미 해변가를 의식체로서 갔다 왔다면 5시
40분 13초에 마이애미 해변가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증명해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이 움직이거나 파도가 치고 구름이 흐르는 데는 시간의 소요된다. 그런 객관적인 시간의 흐름을 경험한 의식이 멈추어 놓은 주관적 시간, 흐르지 않는 시간상의 지점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육신을 벗어놓은 상태의 의식은 안식(眼識)의 근과 경계를 갖지 못하므로 바다나 구름이나 사람을 볼 수가 없다. 앞의 가정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후 세계의 목격담이나 유체이탈의 체험담을 길게 다루는 이유는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이런 체험담의 주인공들이 가사 상태나 유체이탈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보았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실제로 이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시공간적인 실제)을 본 것이라면 눈과 시신경, 시각 정보를 해석할 두뇌 등 육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의식(또는 영혼)이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만일 그렇다면 영계는 걷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영혼들의 세계임에 틀림없다. 눈으로 본다는 것에는 이미 사유(思惟)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육체적인 시각 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영혼이 물질계의 경치를 볼 수 있다면 당연히 영혼은 물질계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물체에 대한 촉감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보는 것이 가능한 영혼이 듣거나 만지지 못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눈으로 보고 소리를 듣고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영혼이 생명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영혼을 보지 못하는데, 영혼은 우리를 내려다보고, 우리의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느끼지 못하지만, 영혼은 우리의 피부와 접촉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생명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엄청난 혼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영혼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무당이나 심령술사가 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보고, 듣고, 생각하는 영혼을 부릴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못할게 없을 것이다. 어떤 비밀도 알아낼 수 있고,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영매(靈媒)의 눈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명의 세계가 영계의 완전한 지배를 받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으려면, 앞서 소개한 체험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1848년 뉴욕주의 하이데스빌에서 폭스 가(家)의 세 자매가 영혼과의 교신에 성공했다는 ‘하이데스빌 사건①’ 이후 많은 사람을 매료시킨 심령학이 태동했다. 영매들은 영혼을 사람들 앞에 불러내어 영혼의 실재를 증명하는 강령회(降靈會)를 열었다. 하지만 3년 뒤 ‘하이데스빌 사건’의 주인공 세 자매 중의 둘째였던 마가렛 폭스가 ‘하이데스빌 사건’은 큰언니인 리어가 꾸며낸 거짓이었음을 고백했고, 그에 따라 심령학은 시발점부터가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다.
하이데스빌 사건 이후에 이름을 떨친 수많은 영매들의 강령술도 대부분이 마술의 트릭을 이용한 사기로 밝혀졌다. 사진기가 발명된 후에는 영매들이 찍었다는 영혼의 사진이 수없이 만들어졌지만 그것들도 대부분이 조작된 합성 사진들이었다. 영매들의 강령술을 보면 결과를 보기 이전에 벌써 사기극으로서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음을 알 수있다. 깜깜하게 불을 꺼버린 실내, 커튼 속에 숨듯이 들어가 앉은 영매, 영혼의 출현을 알리는 발자국 소리와 공중에 뜨는 테이블, 천장에서 뿌려지는 꽃잎들, 사람들을 건드리는 영혼의 감촉 등 강령술의 진행 과정은 마술사의 쇼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카퍼필드의 마술은 환한 대낮에 군중들 앞에서 한다는 점에서 심령학의 강령술보다 오히려 훨씬 진보된 트릭과 고도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과학자들이 확인을 위한 완벽한 준비를 갖추어 놓은 환경하에서 목격되거나 사진이 촬영된 귀신은 내가 아는 한 하나도 없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은 당연히 자기도 이 세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서양의 영매들보다는 오히려 우리 나라의 무당들이 귀신이란 존재와는 훨씬 실체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나라 무당들의 굿은 환한 대낮에 하지 결코 음침하고 어두운 밤에 하지 않는다. 불을 끈 어두운 커튼 뒤에서 마술을 하듯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대낮에 넓은 공터나 마당에서 굿을 한다. 귀신이 밤에만 나타난다는 것은 근거 없는 믿음이며 귀신의 출현은 밤낮의 구분이 없다. 귀신 목격담의 상당수는 대낮에 본 것들이다. 그리고 무당들이 모시는 신의 영험은 밤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중 구분이 없는 것이다.
이런 무속의 연구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귀신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귀신이 세상을 보는 것은 자신의 시각 기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신의 숙주(신딸-무당)인 무당의 눈, 즉 살아 있는 사람의 안식을 빌려서 본다. 영험 있다는 신을 모시는 무당들이 점을 치는 장면을 보면 이것을 잘 알 수 있다. 무당의 신은 점을 치러온 사람이 무당의 방에 들어서서 무당의 눈에 보이기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한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도 무당이 본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무당의 의식이 잠시 신에게 기능을 빌려주어야 가능하다. 무당들이 점을 칠 때 요령을 흔들거나 주문을 외우면서 잠시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은 무당 자신의 의식을 차단함으로서 무당의 전오식을 신에게 빌려주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무당의 의식이 희미해진 동안에 신이 무당의 안식과 이식을 차용해서 점을 치러온 사람에 대한 어떤 영감을 무당의 입을 통해 전달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무당이 모시는 신이 스스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존재라면 구태여 무당의 육신을 숙주로 삼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귀신들은 자기가 세상을 볼 수 없으므로 세상을 돌아다니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당이 보지 못한 사람이나 무당이 모르는 사건에 대해서는 귀신도 모른다는 것이 분명하다.
실종된 사람에 대한 점을 치면, 어떤 용한 무당의 귀신도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명하게 말해주지 못하고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리는 것이 고작이다. 만약에 실종자가 이미 죽은 경우라면 사자의 영혼과 무당의 신이 어떤 소통을 하는 것 같다는 사례들은 볼 수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애매하고 혼란스러운 수준이어서 사자의 죽은 경위나 장소, 현재 시신이 있는 장소, 살해한 상대방에 대한 정보 등을 정확하게 전하는 경우는 볼 수 없다.
실종자가 아직 살아있는 경우의 정보는 더욱 애매하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나온다. 가장 용하다는 무당의 경우에도 실종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정도의 확인에 불과하고 또 맞혔다 하더라도 맞거나 틀릴 확률이 50%나 되는 문제여서 실종사건이나 살인사건의 해결에 도움이 될 턱이 없다. 만약 귀신이 산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보고 들으며 혼자 이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는 그런 존재라면 우리 나라의 수사반장이나 정보기관의 책임자들은 모두 무당이 맡고 있을 것이다.
이 귀신의 정체에 대한 것은 뒤에 다시 자세히 논하게 되겠지만 일단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육신의 감각 기관이 정지된 사후의 영적인 존재가 오감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이 사람을 보는 게 가능할까? 이건 불가능한 상상이다. 그렇다면 영혼끼리는 어떤가? 생명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특수한 상대 인식 체계를 영혼이 가지고 있다고 추측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시공간 내에서가 아닌 영계에서만 기능할 것이다.
생명계에도 빛에 의한 시각이 사물 인식 체계의 전부가 아니다. 박쥐처럼 초음파를 이용한 식별 방법도 있고 방울뱀처럼 열 영상(熱映像)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은 식별하지 못하는 불가시광선(不可視光線)을 포착하는 동물도 있다.
그렇다면 육체를 떠나는 순간 영혼은, 살아서 사용하던 시각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인식체계를 가지고 사물을 보는 게 아닐까 추리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사후 세계나 유체이탈같은 현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각’과 똑같은 형태의 인식을 말하고 있다. 분명히 자신이 ‘눈’을 통해서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체험담에 근거한다면 시각이 아닌 다른 인식 체계를 상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체가 없는 영혼은 어떻게 세상을 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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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하이데스빌 사건 : 뉴욕주의 하이데스빌에 있던 폭스가의 집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똑똑”하는 소리가 매일 나는 것을 폭스가의 세 자매인 리어와 마가렛과 케이트가 듣게 되어 마침내 자매들은 소리로 그 음원인 영혼과 교신하는데 성공했다는 사건이다. 이 교신을 통해서 소리의 주인공이 그 집에서 살해된 행상인이며 지하실 바닥에 시신이 묻혀있음을 알게 되었고, 지하실을 파본즉 머리카락과 인골의 일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폭스가의 세 자매가 영혼과 교신하는데 성공한 1848년 3월 31일을 심령술 탄생의 날로 삼는다. 그러나 후에 큰 언니인 리어와 사이가 나빠진 마가렛이 이 날로부터 3년이 지난 1851년 4월에 <마가렛 폭스의 거짓 고백>이라는 책을 통해 이 사건이 큰 언니 리어의 지도에 따라 조작된 것이었다고 밝힘으로써 ‘하이데스빌 사건의 가치는 감소되었다. 그러나 그 3년 동안 심령술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영혼과 교신한다는 수많은 영매들이 출현하여 활발한 활동(사기극)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마가렛의 고백은 심령술의 엄청난 반향과 대중적인 호응을 잠재우지 못하고 심령술사들의 비난과 매도 속에 묻혀버렸다.
네 번째 여행-영혼과 사후세계 5
영혼과 사후세계-5
영혼의 교감
여기에 하나가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런 체험에 공통적인 상황이 있다는 점이다. 심장마비로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든,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었을 때든, 명상에 빠졌을 때든 공통의 상황은 ‘전오식이 활동을 멈추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단 죽음이나 유체이탈이 전오식과 나머지 식의 분리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엿볼 수가 있다.
앞에서 예로 든 헨리 영의 사건에서처럼 전오식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의식이 왜곡되어 정신이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현실과 비현실을 구별하지 못한다. 현실이 아닌 것을 보고 듣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계와의 비정상적인 교신이 낳은 결과이다. 전오식이 손상되거나 파괴되면 의식은 바로 고립감에서 탈출하기 위해 영계의 의식들과 교신을 하게 된다. 교신의 상대는 죽은 자의 영혼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의식과도 영적인 교감을 갖는다.
이때 여러 가지 일어나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여기서 논하고 있는 유체이탈의 원인이 되는 건 바로 타인으로부터의 차식(借識)이다.
차력사(借力士)들은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괴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차력(借力)은 외부의 신비한 힘을 빌려온다는 의미다. 비슷한 맥락으로 나는 차식을 말하고자 한다. 차식은 다른 사람의 식을 잠시 빌려온다는 뜻이다. 차식은 대부분의 경우 아주 순간적으로, 극히 단편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주로 안식이 그 대상이 된다. 다른 사람이 눈으로 본 것이 하나의 식으로 나의 의식에 넘어오는 것이다. 본인은 그 사실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자기의 눈으로 본 것으로 착각하지만 실제 자기의 눈은 감겨 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나 경치를 꿈속에서 보는 경우가 있다. 영계의 누군가로부터 차식이 이루어졌거나 아뢰야식의 기억이 재생되었기 때문이다. 영계에서의 차식인 경우 선몽이라고 말한다. 이런 차식은 본인이나 상대방이나 모두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속적이지 않고 잠깐 동안의 환상처럼 느껴지는 특징이 있다. 자기 안경을 간호원이 집어넣는 것을 본 환자의 경우도 기억하는 것은 바로 그 한 장면뿐이며,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그 광경을 보았다는 사람도 사건의 뒷부분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영화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장의 스틸 사진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앞에서 예를 든 병원에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유체이탈 체험자를 대상으로 실험과 분석을 했다. 이 결과는 유체이탈의 체험이 차식 현상임을 뒷받침해준다. 병원의 의료진들의 분석에 따르면 한 가지 사실이 공통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유체이탈 중에 영혼이 본 풍경은 누군가가 실제로 본 것이라는 점이다.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비밀스러운 장소나 아무도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장면을 보았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체험자들이 천장 가까이 떠 있는 상태에서 보았다고 말을 하므로 병원은 유체이탈이 과연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갓의 윗부분에 영혼에게 보이기 위한 인사말을 적어두었다. 그러나 유체이탈의 체험자들 중에서 그 인사말을 본 사람은 아직 없다고 한다. 모든 체험자들이 하나같이 천장 가까이 올라가서 내려다보았다고 하면서도 말이다. 실제로 영혼이 천장으로 올라가서 눈으로 보고 왔다면 그 인사말은 반드시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사후 세계의 체험들을 모아서 주의 깊게 분석해보면, 그 체험들은 모두 타인 혹은 영계와의 교감이지 육체를 떠난 영혼이 감각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한 일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런 체험들은 모두 꿈과 매우 흡사하다. 아니 꿈과 꼭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후 세계를 보고 온 사람들은, 생생한 꿈과 같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꿈에서 보는 모든 것은 의식 속에서 영적으로 재현된 영상이지 실제의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의식의 세계 속에 있을 때 인간은 극히 수동적이다.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무언가 하려고 애쓰는 마음은 있지만 꿈속에서의 행위는 마음과 따로 움직인다. 당위성도 없으며 논리적이지도 않다. 실제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뒤죽박죽의 거짓말 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지 않는다. 죽음 이후에 의식이 잔상으로서 영계와 만나 겪게 되는 모든 체험은 이런 꿈과 같다.
스스로 1백년, 2백년의 긴 세월이 흐른 것으로 느낀다 해도 실제 객관적인 시간은 극히 짧거나, 반대로 아주 찰나지간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이 생명의 세계에서는 수백 년의 시간일 수도 있다. 뇌파 측정으로 검사를 해보면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데, 인간이 꿈을 꾸는 시간은 1분에서 3분 정도로 아주 짧다. 그러나 꿈을 꾼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면 그 꿈의 시간은 아주 길다. 꿈속에서 하루 종일 겪었던 일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불과 수십 초에서 1분 사이의 짧은 시간 동안 의식 속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생명계의 시간으로 49일이 걸려 저승으로 돌아가는 죽은 사람의 영혼(마음의 잔상)이 겪는 일들은 수백 년의 기나긴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은 7식의 잔상이 사라지고 아무런 감각과 의지도 없는 아뢰야식으로서 평안과 고요의 바다로 돌아가게 된다. 자기가 지은 업보에 대해서 복락을 누리는 것도, 고통의 죄과를 치르는 것도 모두 아뢰야식의 기록된 인연에 따라 다시 생명체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전생의 업보를 치르고 있는 사바중생의 존재다. 자신의 부채 관계를 모르고 있다 하더라도 받을 것은 어김없이 받게 되고 갚아야 할 것은 반드시 갚게 될 것이다. 부채의 청산이 싫어서 그냥 죽어 버릴 수도 있겠지만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은 잠시 뿐이다. 다시 새로운 생에서 빚을 갚게 될 것이다.
“준 대로 받고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세계의 준엄한 법칙이다.”
네 번째 여행-영혼과 사후세계 6
영혼과 사후세계-6
영계와 귀신
나는,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설명되어야 하고 또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신비스럽고 초자연적인 현상일지라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와 법칙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현상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하는 것인데, 이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워 인정과 부정이 엇갈리는 몇 가지 현상이 있다. 절대자의 존재, 지옥과 천당의 존재, 영혼과 귀신의 존재 등이 그렇다.
나는 지옥과 천당은 그 현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또 인격을 가진 절대자에 대해서는 그 존재를 감지해볼 만한 현상이 확실치 않다고 생각한다.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도 절대자의 존재는 쉽게 확신하기 어렵다.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창조주라 말하는 여호와의 존재를 광신적으로 믿고 있는 신앙인들을 더러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체험은 과연 여호와를 증거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부정적인 입장에 서 있다.
물론 그들이 체험한 성령이라는 영적인 존재나 방언, 안수 치료 등의 현상을 모두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현상의 주체가 이 세상을 만들고 자유 의지로 주재하는 어떤 인격신이라고 연결지을 만한 타당성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나타나는 현상과 믿고 있는 신의 성격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현상이 절대자의 증거이냐 아니냐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큰 사고를 당하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 부처님의 가호냐, 하느님의 도움이냐는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렵다.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일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절대자의 증거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절대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일단 유보하기로 한다. 현상의 존재 자체가 애매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논하려고 하는 영계와 귀신이란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다. 귀신은 의심의 여지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특정한 종교에 관계없는 이 세계의 일부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다음은 직접 겪은 일이다. 집안의 어른 한 분이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서의 일이다. 어른이 입원한 중환자실 옆에는 보호자 대기실이 있고 24시간 보호자가 상주하도록 규정이 되어 있었다. 널찍한 방 하나에 여러 환자의 보호자들이 각자 담요나 이불을 가지고 와서 같이 지내고 있었다. 한 열흘 동안 지내면서 아주머니 한 분과 친해졌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거기 있게 된 경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아주머니가 병원 복도에서 고함치듯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엄마! 내가 엄마한테 못해준 기 뭐 있노? 할 만큼 해 줬잖나? 와 내 딸을 데려갈라 카노? 인자 고마 가라!” 보호자 대기실 안에까지 들릴 만큼 큰 목소리여서 나는 이 아주머니가 자기 어머니와 싸우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가보니 아주머니 혼자서 빈 복도에 대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조금 전에 침상에 누워있던 아주머니의 딸이 링거 주사를 꽂은 채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간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딸의 이야기기는 돌아가신 자기 외할머니가 같이 가자고 하면서 몸 위로 올라타고 목을 잡고 흔들더라는 것이었고 그러는 할머니가 무서워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는 것이었다. 그 전에도 계속 할머니가 나타났는데 자꾸 싫다고 하니까 그날은 몸 위로 올라타고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엔 아주머니를 볼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만나 물었더니 어젯밤 어머니 제사를 지내줬다고 하였다. 제발 손녀를 데려갈 생각 말라고, 어서 좋은 곳으로 가시라고 밤새 정성껏 제사를 올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손녀딸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전날 밤 외할머니가 나타나 "니를 꼭 델꼬 갈라 했는데 니 에미가 저리 말리싸니까 할 수 없다. 할미 혼자 가꾸마" 하고 사라지더라는 것이었다.
집안 어른이 돌아가시고 병원에서 탈상을 하던 날 그 아주머니한테 인사를 하러 올라갔더니 딸은 많이 회복되어 일반 병실로 옮겨간 다음이었다. 옮겨간 병실로 찾아갔다. 좋아진 모습으로 음식을 먹고 있어서 그때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학생은 외할머니 귀신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자기가 열흘간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던 사실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매일 그 학생의 어머니와 내가 자기에게 말을 건넸던 사실도 당연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 열흘은 학생에게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이건 신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처럼 귀신의 존재는 가끔씩 우리에게 실재하는 것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귀신을 만났거나 눈으로 보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귀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내가 수집한 수백 건의 귀신담 가운데 신빙성이 없거나 화자(話者)의 과장이나 꾸밈이 있어 보이는 부분을 추려내고 모든 귀신 사건의 공통점을 모아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귀신의 정체성에 대한 단서가 나온다.
우선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목격담의 대부분은 귀신은 예외 없이 죽기 직전의 모습이라고 증언한다. 즉, 마흔 살에 죽은 사람의 귀신이 20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 죽은 사람을 꿈속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다. 돌아가신 부모는 반드시 돌아가시기 직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꿈에서 젊은 시절의 부모 모습을 보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귀신은 죽은 후에 나이를 먹거나 젊어지거나 하지 않고 죽을 당시의 상태로 고착되어 있다는 말이다. 손자가 다섯 살 때 50세의 나이로 죽은 할머니는 그 손자가 70세가 되어도 여전히 50세 때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이 많은 손자와 어린 할머니 귀신이 만나는 수도 있는 것이다.
귀신을 육신과 분리된 영혼이라고 볼 때, 한 가지 의아스러운 일이 있다. 귀신이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주 어린 나이에 죽은 귀신이 아니면 벌거벗고 있는 귀신은 극히 드물다. 주술사나 무속인의 말도 그렇지만 귀신이 나체로 나타나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귀신은 왜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일까?
귀신들이 즐겨 입고 좋아하는 복장을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으나 대체적으로 몇 가지 유형은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남녀를 불문하고 흰색 한복 비슷한(귀신의 복장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보통 하나의 이미지로 보인다) 차림이 많다. 수의가 한복 형태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장례를 치르지 못한 사람의 경우는 죽었을 때 입었던 옷이라고 보면 틀림없는 것 같다. 남자 귀신 중에는 유난히 군복 차림이 많은데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이다.
인간은 몇만 년 전부터 무언가로 몸을 가리고 살아왔으므로 의복은 거의 신체의 일부와 다름이 없다. 의복은 말나식에 흡착된 제2의 육신과도 같아서 인간의 말나식은 의복을 육신의 일부로, 다시 말하면 옷을 걸친 그 감촉을 정상적인 육신의 상태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나식이 시현될 때는 반드시 옷으로 몸을 감싸고 나타나는 것이다.
귀신이 집착하는 대표적인 세 가지가 의복, 음식, 집(터)이다. 우리가 늘 말하는 ‘의식주’이다. 의식주는 육신과 말나식의 일부와 마찬가지 요소여서 귀신의 의식은 이것들에 커다란 집착을 보인다. 제사나 무속의 의식에서 음식, 옷이나 천, 또는 그런 것을 살 수 있는 돈을 준비하는 이유는 말나식이 자기의 일부로서 그것에 흡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귀신의 모습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른 점 하나는 괴기 영화나 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봉두난발(蓬頭亂髮)에 입가에 피를 흘리는 흉한 모습이 아니라 생전과 같이 단정한 모습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단정하고 깨끗한 모습의 귀신과 흉한 모습의 귀신을 분류해서 볼 때에 사후의 육신이 어떻게 되었는가와 나타나는 귀신의 형상은 분명히 상관관계가 있다고 볼 만하다. 시신을 잘 수습해서 장례를 치른 경우 귀신은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익사를 했거나 불에 타죽었거나 또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거나 전쟁터에서 죽어서 시신이 수습되지 못한 경우에 흉한 모습의 귀신으로 나타나는 사례가 많다.
이것은 바로 죽기 전이나 직후에 육신이 손상되면 그 손상된 형상이 말나식의 잔상에 남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죽음 당시의 상황이 의식에 새겨져서 그것이 말나식에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생각해볼 문제는 귀신의 출현 방식인데 귀신은 소리로만 나타나는 수도 있고 형상으로만 나타나는 수도 있고, 움직이는 영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정지된 화상으로 나타나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하게 해준다. 즉 사후에 인간의 7식은 그 소멸되는 시기가 일정치 않다는 것이고 어떤 식의 잔상이 나타나느냐에 따라 귀신의 출현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신식이 먼저 소멸되고 의식의 잔상만 남은 경우 귀신은 형체가 보이지 않고 산사람의 귀를 통해서 환청의 형태로 감지되며, 반대로 의식의 잔상은 이미 사라졌는데 말나식의 잔상만 남은 경우에는 움직이지 않는 정물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즉, 마네킹과 다름없는 의식 없는 상만으로 나타나는 귀신이 된다. 이런 귀신은 목격자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동작이나 의사 표시도 없이 그저 물끄러미 서있기만 하는 인형처럼 보인다. 또한 신식의 소멸 정도에 따라 뚜렷이 생전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소멸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의 귀신은 어렴풋한 안개나 사람 비슷한 하얀 형체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귀신이 여러 가지 다른 형식으로 사람에게 감지되는 이유는 바로 일곱 가지 식이 각기 소멸되는 시기가 다르고 ‘어느 단계까지’, ‘어느 식이 소멸된 상태냐’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일곱 가지 식이 모두 소멸된 상태에서는 어떤 모습으로도 귀신은 나타나지 않으며 무당이나 영매도 결코 불러낼 수 없는 저쪽 세계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물론 각자가 지은 업에 따라 새로운 생명으로 환생을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귀신은 어떨 때 보게 되는가.
수행을 오래 한 불자나 영적으로 높은 수준의 성직자는 뚜렷한 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귀신을 볼 수도 있지만 보통 사람은 대부분은 의식이 들떠있거나 흥분되어 불안정한 상태에서 귀신을 본다. 귀신을 보고 있을 때는 의식을 뚜렷이 하고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도 꿈속의 현상과 아주 흡사하다. 꿈도 ‘이게 꿈이구나’하고 생각이 들면 꿈에서 깨어나듯이 의식을 차려서 뚜렷이 봐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귀신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주술사나 영매나 무당이 귀신과 교통할 때 보면 일종의 반의식 상태에 빠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귀신은 눈에 보이는 영상이 먼저고, 그 다음 뇌라는 기관을 통해 해석된 시각 정보로서 귀신이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역순으로 보인다는 증거다. 먼저 의식적인 교감을 통해 귀신의 생전의 모습(말나식에 각인된 형상)이 살아 있는 사람의 의식 속에서 재생되고 그것이 눈을 통해서 특정 공간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자리는 실제 귀신이 있는 곳이 아니다. 의식이 재생한 영상의 촛점이 그 자리에 맺힌 것뿐이다. 마치 홀로그램으로 재현한 입체 형상과 같다. 홀로그램은 공간 속에 입체적인 영상을 재현해내서 마치 그 자리에 어떤 물체가 있는 것처럼 만드는 기술인데, 실제 그
물체의 상은 영사 장치의 건판에 담겨져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귀신은, 두뇌와 눈이라는 기계가 의식이라는 건판에 맺힌 상을 홀로그램처럼 공간 내에 투영해서 만든 허상이다. 이건 꿈과는 약간 다르다. 개인의 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상이므로 그 상을 만든 사람밖에는 귀신을 볼 수 없다. 그래서 귀신은 동시에 복수의 목격자를 만들지 못한다.
한 장소에 여러 사람이 있어도 귀신을 보는 것은 한 사람뿐이다. 영적으로 귀신의 존재를 여러 사람이 동시에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모습으로 특정한 행동을 하는 귀신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보인다.
한 귀신이 같은 장소에 있는 여러 사람의 의식에 한꺼번에 감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감응을 한다 하더라도 각자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 보게 된다. 사람마다 의식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귀신에 대한 감응이라도 의식을 통해서 만들어진 영상은 천차만별인 것이다. 흔히 귀신에 홀린 사람을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목도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주위 사람은 전혀 귀신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에 홀린 사람의 행동을 보고 당황해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귀신의 존재를 감지하는 경우는 대부분 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소리를 통해서다. 이식(耳識)은 안식(眼識)에 비해 단순한 시그널이므로 각자의 의식이 다르다 해도 감응된 소리의 성격이 비슷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시각적인 영상은 워낙 정밀하고 복잡한 정보의 조합이어서 똑같은 영상의 동시 재생은 불가능하다.
귀신의 목격담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바로 귀신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다. 귀신은 사후에 그 잔상이 사라지지 않은 인간의 의식과 말나식이다. 전오식과 의식과 말나식이 모두 꺼지고 아뢰야식만 있는 저승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떤 이유로 해서 의식과 말나식이 정신계에 잔상으로서 남아 있을 때 이것이 귀신으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의식의 잔상은 전오식이 소멸되었으므로 온전한 의식이 아니라 왜곡되고 비틀어진 상태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의식처럼 상세한 정보를 처리하지도 못한다. 혼란스럽고 압축된 이미지로 행동할 뿐이다. 생명체일 때 한시도 애착을 버리지 못했던 ‘의식주’와 자식들에 대한 집착만 두드러진다. 단순하고 압축된 집착으로 욕망을 추구한다.
귀신은 전오식의 소멸로 느끼는 고립감을 의식의 감응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 같은 처지의 영혼이나 가장 가까운 혈족인 가족의 의식과 전오식을 빌려서(이것도 일종의 차식(借識)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욕을 해결한다. 살아 있는 사람 중에 마땅한 대상이 없을 경우에는 물질의 식에 자신을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 공경하거나 받드는 물건에 많이 의지한다. 사람들이 받드는 고목나무나 큰 산, 바위 또는 바다의 식이 그 의지처가 되는 수가 많다.
귀신들은 사후에 마땅히 끊어야 할 집착과 욕망이 남은 상태이므로 윤회를 위한 단계인 저승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따라서 다음 생으로 환생이 안 된다. 절의 천도제나 무속의 천도굿은 모두 이러한 귀신들을 저승으로 보내기 위한 것이다. 생전의 의식과 말나식을 완전히 지워주는 의식인 것이다.
무속인들에 따르면, 완전히 저승으로 돌아가 버린 영혼은 불러낼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소환에도 대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영혼은 무속이 손댈 수도 없고 손댈 필요도 없다
. 우리가 전통적으로 3대까지 제사를 모시는 것은, 영적으로 특별한 수행을 하거나 지순하게 살아온 사람이 아닌 범부의 경우, 저승으로 돌아가지 않고 귀신으로 남아 있는 기간을 삼대 정도의 시간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귀신들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의식의 잔상이 희미해지고 집착도 약해져서 결국 저승으로 돌아가고 다시 환생하는 과정을 밟는다.
그런데 오랜 기간 영계에 머무르는 귀신들은 산이나 물 또는 나무 같은 비인간의 식에 결합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귀신들을 무속에서는 신(神)이라 부른다. 이미 저승으로 돌아갈 가망성이 없는 영혼들이다. 억겁의 무량한 시간의 개념으로 볼 때는 산도 무너지는 것이요, 바다도 마르는 것이어서 인연의 맺은 바 업보를 풀기 위해 돌아갈 때가 있겠지만 그 기간이 장구하므로 신으로서 대접해주는 것이다.
이 책은 무속을 다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귀신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정리하기로 한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들을 새삼 강조해 놓고 싶다. 귀신은 이 세계의 일부요 우리 생명의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생과 생 사이의 다리로서 건너야 할 세계이므로 그 실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귀신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존재가 아니다. 전오식이 없기 때문에 의식간의 영적인 교류나 살아 있는 사람의 전오식을 차식하지 않는 한, 시현되지 못하는 존재다.
귀신의 세계는 무시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도 없는 이 세계의 반면이다. 한층 명확한 법칙인 인연과 윤회에 비한다면 순간적이고 중간적인 존재의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에 미련과 후회가 없고 천수를 다하고 죽은 사람의 영혼은 49일 내에 의식의 촛불이 꺼지고, 그와 동시에 생의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평온한 안식의 세계로 돌아간다. 각자가 지은 인연과 업에 따라 또 다른 생명의 아침을 맞을 때까지.
네 번째 여행-영혼과 사후세계 7
영혼과 사후세계-7
한국인의 내세관
한국인의 내세관은 유교와 불교와 무속의 혼합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흔히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종교에 필수적인 내세관이 뚜렷치 않다는 이유다. 공자의 말씀 중에 사후의 문제나 내세의 구원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얼마나 천지신명에 의존했는지, 또 얼마나 제사를 중시했는지 염두에 둔다면 유교가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공자는 사후 세계나 영혼의 구원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공자는 다만 구원의 방법이 마땅치 않다고 본 것이다. 공자는 현실적인 사람이라 영혼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편에 섰다. 저승으로 돌아갈 자는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한 자는 제사로 위로해 준다는 간단한 길을 택했다. 공자의 내세관은 ‘효’ 속에 담겨 있는데, 귀신들의 세계를 정확하게 내다본 다음의 생각이었다. 유교의 ‘효’는 부모 생전의 모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까지 이어지는 받듦이다. 살아생전의 부모와 죽은 조상들에 대한 ‘효’가 같은 비중으로 강조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죽은 조상들에 대한 ‘효’가 더 중요시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내세에 대한 개념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생각이다.
부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사를 초극(超克)하려 했고 윤회의 사슬을 끊어버리려는 초인적인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그 길을 향해 굳세게 나아가라고 가르쳤다. 무속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 땅에 존재했던 것이다. 불교 이전의 무속은 천군과 제사장이 담당했는데, 하늘과 사람 사이를 잇는 행위였다. 이때의 하늘은 그야말로 영계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하늘 중 지고의 존재가 부처와 보살과 여러 신장(神將)들로 구체화되면서 대체되었다. 그리고 무속은 그 하위의 신들(조상신이나 기타 귀신들)과 교감하는 것으로 범위가 축소되었다. 옥황상제나 환인과 같은 최상의 영적 존재들이 한층 명확한 대상인 여러 부처와 수많은 보살로 구체화된 것이다.
유교나 무속은 모두 이 최상의 존재들을 살아 있는 사람과 직접 관계없는 것으로 파악하여 굳이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유교와 무속이 그 제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귀신들뿐이었다. 그보다 위의 존재들은 하늘의 뜻이나 천명 등의 개념으로, 훨씬 큰 의미에서 세계의 흐름에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개개 인간의 길흉화복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보았다. 유교와 무속의 공통점은 조상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불교는 한층 근원적인 생사와 윤회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러다보니 개개 인간의 구복적인 희구와 길흉화복을 경시하게 되어 사람들에게 다소간 불안감과 공허함을 주었다. 이 공백을 무속이 맡았다. 그래서 절에 삼신각이 들어서고 삼신에 대한 제가 같이 올려지게 되었다. 훗날 유교가 들어왔을 때 억불책이 도입되었지만 이것은 왕조 교체에 따른 정치적인 이유에서였고 종교적으로는 불교와 유교의 접목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가까이 하면서 많은 사찰을 건립한 것이나 세조가 원각사를 지은 것 등 실제로 왕실 자체는 불교에 의지한 바가 몹시 컸다. 불교와 유교와 무속이 내세관에 있어서 서로 배치되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교를 믿는 양반집에서 굿을 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무녀들도 대부분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 불교와 무속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무속이 빠진 불교는 중생들에게 너무 높고 먼 산이며, 불교가 없는 무속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세속적이다. 불교와 무속이 배제된 유교는 조상신을 믿는 숭조(崇祖)의 종교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경우 불교와 유교와 무속이 교리나 실천의 면에서 별다른 갈등 없이 혼재되어 사실상 분리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는 순수한 불교도, 순수한 유교도, 순수한 무속도 없다. 있다면 불교와 유교와 무속이 하나로 통합된 ‘한국인의 종교’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한국인의 종교’는 실제 영혼의 세계와 가장 많이 일치한다. 내가 보기에 한국인만큼 완전한 종교를 가진 경우는 없다.
기독교는 상당히 이질적이었지만 불과 1백년 만에 완전히 한국화 되었다. 한국인이 기독교화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한국화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에서 무속적인 요소를 빼버리면 껍데기만 남는다. 안수 기도나 구복적 모습이 한국 교회에 두드러지는 것은 한국인의 뿌리 깊은 내세관과, 영계와의 관계를 인간적이고 직접적인 것으로 보는 한국인의 신앙적 특성 때문이다. 사실상 기독교의 교리로는 귀신이 성립될 수가 없다. 죽으면 심판을 받고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야하는데, 그 어디로도 가지 않고 인간 세상을 떠도는 귀신의 존재를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불교가 그랬듯이 기독교도 결국 이 땅에 그럭저럭 적응을 해오고 있는 셈이지만, 아직 많은 혼란이 있고 극복해야 할 문제도 산적해 있다.
처음 이 책을 쓰면서 나는, 가능한 한 신비적이고 허황되게 들릴 수 있는 요소들을 배제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최대한 불자의 입장에 충실하고자 했다. 원래 부처님은 귀신의 세계를 가치 있는 것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윤회와 업보가 한층 중요한 문제이며 성불과 해탈이 근본적인 지향점이므로 귀신의 세계는 부차적인 영역에 속한다. 더구나 귀신들에게 빌거나 그들을 대접해서 어떤 이익을 기대하는 구복 따위는 전혀 논외의 이야기다. 그래서 사실 처음에는 이 책에서 귀신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으려고 생각했었다.
마음의 여행에서 내가 말하려 했던 것은 영혼의 본질이지 귀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귀신이란 생명의 세계와 영혼의 세계 사이에 있는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중간 존재이지 그것이 영혼의 정체는 아니다. 귀신의 특성을 영혼의 특성으로 착각하면 세계를 파악하는데 심각한 혼란을 겪게 된다. 영혼은 생명체가 가지는 현상이다. 사후의 영혼은 윤회와 인연의 뿌리가 되는 원형을 일컫는데, 생명체의 특성이 사라진 상태다. 사후의 영혼은 자유의지, 생각, 판단, 희로애락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며, 생명계와는 모든 직접적인 관계가 소멸된 아뢰야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판단하고 생각하며, 집착과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 나타나는 귀신은 생명체도 아니고 사후의 영혼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의 잔상이며 삶과 죽음 사이의 일시적인 중간 존재다. 귀신을 영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귀신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고, 반드시 살아 있는 사람이나 다른 물질의 식을 안식처로 삼아서 살아 있는 사람의 전오식과 의식을 매개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사람과의 인연이나 유대감이 끊어지면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한다. 귀신은 언젠가는 저승으로 돌아가야 하는 미망의 존재이다.
나는 이 글에서 생명과 영혼의 문제를 고찰하려고 했던 것이지 귀신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귀신의 존재는 우리 세상과 밀접한 영향 관계 속에 있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배제하고는 논의를 자연스럽게 전개하기 어려웠다. 귀신의 존재를 묵살하는 것은 2층 건물을 지으면서 계단을 안 만드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만약 지금까지 해온 귀신에 대한 설명을 받아들이기에 심각한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귀신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이 강하기 때문이며, 신빙성 없고 근거 없는 귀신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들었던 탓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특히 심령술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서구의 심령술이 보여준 불가사의한 현상들은 대부분 사기극으로 밝혀진 것들이고 좋게 말해서 카퍼필드류의 마술쇼라고 생각하기 바란다. 사실이 그러하므로...
네 번째 여행-영혼과 사후세계 8
영혼과 사후세계-8
영혼과 초현상
지금까지 영혼과 사후 세계라는 주제를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이제 정리를 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먼저 마음과 의식의 차이점을 설명했고, 이 마음과 영혼이 어떻게 다른 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의식을 포함한 마음은 생명체일 때만 존재하는 한시적인 현상이다. 죽음 이후에 생명계와 분리되는 순간 홀로 남게 되는 영혼은, 생명체의 마음을 구성하고 있던 한 부분인 아뢰야식이다. 그리고 하나의 자아(말나식)와 결합했던 아뢰야식이 그 자아의 기억이 새로 훈습되어 더해진 영혼으로서 정신계에 남게 된다. 나는 이 정신계의 영혼들이 하나하나 개체성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우주의 전체 정신계에 통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전(全) 우주적인 통합의 하위 단계에서 수많은 영들의 그룹에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아뢰야식에 저장되는 기억의 문제이다. 과연 기억은 두뇌라는 하드웨어와 분리된 상태에서 보존될 수 있을까? 갓 태어난 아이의 두뇌는 백지와 같아서 태어난 이후의 모든 학습과 체험이 두뇌에 새로운 연결고리들을 생성시키면서 저장되고 재생된다고 두뇌생리학은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윤회가 있다고 할 때, 또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인정한다고 할 때(필자의 경우도 포함해서), 과연 그 기억들은 죽음과 탄생사이에서 어떤 장소에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 저장되었다가 새로운 생명 속으로 훈습되어 들어오는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가 흔히 타고 난다고 말하는, 소질과 재능 및 성격은 신생아의 두뇌 어딘가에 저장되어져 있다고 보기가 쉽다. 그러나 그것들이 언제 생기는 것인지, 혹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리 의문을 갖지 않아왔다. 생후의 모든 기억은 학습과 체험을 통해 새로 준비된 하드웨어인 두뇌에 쌓여가겠지만 전(前) 학습적인 정보들은 어디에 있다가 새로운 생명에게 전해지는 것일까? RNA와 DNA속에 성격과 소질을 결정하는 정보가 들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신생아의 대뇌 어딘가에 훈습되어 들어간 것일까? 전생과 윤회를 여러 증거와 체험을 통해 인정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기억의 저장 장소가 두뇌가 아닌 다른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즉, 두뇌의 어딘가가 아니면
서 두뇌의 전기화학적 작용에 의한 사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영혼을 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식설이 말하는 훈습의 비유는 적절치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윤회되는 영혼(아뢰야식)은 공간적인 위치라는 의미에서 두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서랍 속에 물건이 들어가듯이) 두뇌의 작용인 의식과 교신(交信)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으로 생각된다.
물질이 어디에 정보를 저장하는지, 그 정보를 어떤 수단으로 상호 교환하고 있는지는 앞에서 광자(光子)라는 메신저의 활동으로 본 바 있다. 광자는 엄밀하게 말해 물질의 입자가 아니다. 그것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파동으로서 존재한다. 모든 물질들 사이에는 광자의 파동이 정보의 끈으로 존재하고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물질들를 연결시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광자가 전하는 정보를 수신하고 판독할 능력과 기술이 없다. 그것의 존재를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의 운동은 예측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아뢰야식과 의식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교감의 매개체가 물질들 사이의 정보 전달과 마찬가지로 광자인지, 아니면 우리가 아직 그 존재를 알고 있지 못한 다른 매개체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 사이에도 교신은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때 매개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텔레파시나 육감과 같은 정신적 교감도 이 매개체의 존재를 알 수 있다면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런 영적인 교감의 법칙이나, 그 매개체에 대해서는 뒤에 나올 ‘마음과 기’ 편에서 약간의 단서를 제공해볼 생각이다.
아무튼 육신의 모든 세포나 조직들에 대한 말나식의 작용이나, 의식과 아뢰야식 사이의 교신은 두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기적인 신호의 발생과 전달이라는 차원을 벗어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두뇌 속에서 진행된 전기적인 신호 처리의 결과로 우리에게 관찰되는 것은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며, 기계적인 장치로 측정되는 것에는 뇌파가 있다. 우리가 뇌파로서 측정하는 것은 파장이 그려내는 물결이며, 이 물결의 특징적인 무늬를 가지고 몇 가지 뇌파의 패턴을 구분해 보는 것이 고작이다.
이러한 패턴의 구별은 마치 우리가 공중에 떠다니는 전파를 장파, 단파, 초단파 등으로 나누는 것과 같다. 조금 더 세밀하게 들어간다 하더라도 라디오 전파, 텔레비전 전파, 무선 전화기의 전파 등으로 구별해 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전파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수상기를 통해서 영상이나 음성이라는 해독 가능한 정보로 전환시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뇌파를 수신해서 파형의 패턴으로 그 속에 들어 있는 정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의식과 아뢰야식 사이의 교신이 뇌파를 통한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의식의 내용이 뇌파에 담겨 있는데 우리가 해독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뇌파 자체는 정보가 아니라 정보처리에 수반된 전기적인 처리의 결과로 발생하는 의미 없는 전기적인 자장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그래서 사후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영혼인 아뢰야식은 살아 있는 생명체일 때에도 육신(예를 들어, 두뇌) 속에 인입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외부에 존재하며, 두뇌와는 단지 광자의 파동과 같은 정보의 공조에 의해 연결되고 있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따라서 죽음은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의 정보의 끈이 단절되고 그 공조가 막힌다는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원래 정신계의 존재인 영혼은 살아 있을 때나 죽은 이후에나 그 존재하는 장소는 변함이 없다. 영혼이 육신에서 이탈하여 저승으로 간다든가, 영계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난센스로 보인다. 영혼은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생명체와 교감을 이루고 있는 상태냐, 교감이 단절된
상태이냐의 차이로 보는 게 정확한 개념일 것이다.
아뢰야식은 생명체의 마음의 일부로서 존재할 때는 의식과 공조하여 생명계나 비생명계의 다른 영적 존재들과 교감을 일으키고, 의식이 여러 가지 초현상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초현상의 예로는 예감이나, 영감,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어떤 꿈, 전생의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예지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으로는 영적인 힘에 의한 가피(加被)와 원력(援力)의 작용이 있다.
이런 초현상은 모두 영적인 존재들 사이의 교감에 의해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영적인 교감 중에서 우리가 가장 흔하게, 가장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바로 꿈이다. 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의 비밀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창(窓)의 역할을 하고 있다. 꿈을 통해 보통의 사람들조차도 직접 영적인 세계와 접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꿈이 무엇인지 알아봄으로써 영계의 비밀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이후, 꿈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이루어진 바가 없다. 학문적으로 꿈은 미개척 상태의 황무지와 마찬가지다. 우리 나라에도 몇몇 유명한 해몽의 전문가들이 있다. 또 꿈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해몽법에 대해서는 여러 종류의 서적들도 나와 있다. 그러나 꿈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은 내가 과문해서인지 아는 바가 없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세 번이나 정독하고 그와 관련된 정신과학적·심리학적 해설서를 여러 권 읽었지만 나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공감하지 않는 편이다. 왜냐하면 “꿈의 해석”에 나오는 꿈의 예는 내가 늘상 꾸는 꿈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서양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꿈만 꿀까 싶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들의 역사의식과 가족 관계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외디푸스 콤플렉스만 해도 그렇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적대감, 심지어는 살의로 이어지던가? 내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모두 사랑과 애정의 대상이었지, 어느 한쪽이 성적인 사랑의 대상이고 다른 한쪽이 경쟁자로서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프로이트가 살았던 때, 서양인들의 가족 관계가 그들의 잠재의식에 양친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심었기 때문에 그러한 잠재의식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잠재의식이 프로이트가 수집한 수많은 망측한 해석의 꿈들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오랜 옛날부터 아들이 아버지를 예사로 죽이는 역사를 가져왔던 사람들이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아들에게 아버지는 독립된 개체였고, 언젠가는 경쟁해야 할(같은 수컷으로서) 상대일 뿐이었다. 그런 일그러진 가족 심리의 소산이 외디프스 콤플렉스이고 엘릭트라 콤플렉스다. 동양적인 가족 관계에서 아버지를 죽였으면 좋겠다는 심리를 느껴보고 자라는 사람은 술주정뱅이나 폭력 아버지의 아들뿐일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동양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예외적이고 비뚤어진 토대 위에 수립된 꿈의 분석법으로 생각된다.
지금부터 잠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컴퓨터를 비유로 사용하려고 한다. 컴퓨터에서 나는, 나의 논지에 적합한 비유를 참으로 많이 찾을 수 있었다.
스피드 디스크(speed disk)라고 하는 유틸리티(utility)가 있다. 하드 디스크(hard disk)①의 파일들을 재배열하여 하나의 파일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인 연결들을 물리적으로 가능하게 해주는 유틸리티다. 이 프로그램을 한번 실행시키고 나면 하드 디스크의 처리속도가 확실히 빨라진다. 그런데 이 스피드 디스크와 상관없이 컴퓨터 사용자는 한 번씩 하드 디스크를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즉 자주 쓰지 않는 정보는 백업 디렉토리(back-up directory)에 옮기고, 필요없어진 파일은 지우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파일들이 얽히고 파일의 가짓수가 너무 많아져 해당 정보를 찾는데 무척 시간이 걸리고 능률도 떨어진다. 나중에는 파일들이 깨지고 에러가 생기기도 한다.
인간이 자야하는 이유는 우선 생리학적 측면에서 하드 디스크(두뇌)의 정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피드 디스크를 한 번씩 돌려줘야 하드 디스크가 제 성능을 발휘하고, 가끔 파일을 정리해줘야만 필요한 파일을 신속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낮 시간 동안 사람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엄청난 양일 것이다. 시각 정보, 청각 정보, 체감 정보 등 바이트(byte) 수로 따진다면 수조(兆) 바이트의 정보가 무차별로 들어온다. 이런 정보들이 미처 정리되지 못하고 계속 쌓이면 뇌는 피로해지고 능률이 떨어진다.
이처럼 무차별하게 입력된 정보를 간추리고 정리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바로 잠이다. 이 작업 중에 사람은 꿈을 꾸는데, 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작업 중의 임시 실행의 결과로 나타나는 꿈과, 영적인 세계와의 교감에 의해 꾸게 되는 꿈이 그것이다.
우선 전자의 경우를 살펴보자. 우리가 하드 디스크의 정보를 정리할 때, 어떤 파일을 남겨둘까 삭제할까 망설이는 경우가 있다. 애매한 경우에는 한번 실행을 해보고 결정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의 실행은 정보나 프로그램의 가치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어서 풀(Full)로 돌려보지 않고 메인 메뉴(main menu; 정보의 목록) 정도만 보고 중지시켜 버릴 것이다. 혹은 여러 개의 데이터 파일(Data Files)을 가지고 있다면 몇 개의 데이터를 날리고 실행해보기도 한다. 테스트 런(Test Run)을 중간 중간 해보면서 파일을 정리하게 된다. 문서 파일의 경우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잠깐 불러내 읽어보고 삭제냐 보존이냐를 결정하기도 한다. 이때 불러낸 문서를 끝까지 다 읽어보지는 않을 것이다.
제목과 앞의 몇 줄만 읽어보면 된다.
이런 테스트의 실행결과가 화면에 잠깐 잠깐 보이는 것이 꿈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낮에 입력된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 정보를 확인해보는 부분적인 실행이므로 다소 황당하고 앞뒤 연결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이 꾸는 꿈의 90퍼센트 이상이 이런 쓸데없는 테스트 런의 부산물이다.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꿈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의 작용이라고 보고, 특히 잠재되고 억압된 욕망(그 중에서도 성적인 욕망)의 대리 실현이라고 파악했는데 실제로 우리가 꾸는 꿈의 대부분이 성욕과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정말 중요한 꿈은 후자이다. 즉, 영적 세계와의 교감으로 꾸게 되는 꿈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개개 인간의 영혼은 정신계에서 수많은 그룹들에 중복되어 속해 있다. 인간에 국한시켜 말하면 인간의 영혼은 우선 가족과 조상들이라고 하는 혈연적인 통합체의 일원이다. 그것은 보다 광범위한 혈연집단인 동성(同姓)의 문중으로 확대되고 최종적으로는 민족이라는 집단적인 통합령에 들어간다. 인간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통합령은 바로 혈연에 의한 그룹이며, 이것은 직계일수록, 세대차가 작을수록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두 번째는 바로 종교적인 집단령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혈연적인 집단령보다도 훨씬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그 힘도 엄청나게 작용할 때가 있다. 세 번째는 물질계의 거대 정보체들이다. 큰 산이나 바다, 또는 지구나 태양과 같은 거대한 물질 단위들은 생명계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힘으로서 작용한다. 이것은 생명체의 의식의 잔재가 남아 있는 영혼과는 그 성격이 틀리지만, 의사(疑似) 의식체로서 생명계에 비물리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컴퓨터에 비교하면 개개인의 영혼은 보다 상위의 대형 컴퓨터에 접속되어 있는 인텔리젼트 터미널(intelligent terminal)②이다. 즉, 개별 작동이 가능하면서 전체 시스템의 한 단말기(端末機)③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독자적인 CPU(central processing unit)를 가진 인텔리전트 터미널이 스탠드어론(stand alone)④으로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을 때는 상위(上位) 호스트(Host)⑤로부터의 인터럽트(Interrupt)가 안 된다. 이때는 단말기(端末機)가 아니라 퍼스널 컴퓨터(Personal Computer)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잠이 들면, 즉 퍼스널 컴퓨터가 단독 수행을 멈추면 상위의 호스트로부터 메시지 전달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꿈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인터럽트의 우선순위는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윗단계의 호스트부터다.
때문에 가장 자주 인터럽트가 걸리는 메시지가 바로 자기 가족, 즉 혈연에 의한 집단령의 경우다. 이것은 반드시 망자(亡者)로부터만 가능한 메시지가 아니라 살아있는 형제나 부모로부터의 메시지도 수신이 가능하다. 물론 무의식적인 송신도 이루어진다. 그래서 꿈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부모와 형제, 그리고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이다.
죽은 왕이나 대통령이 꿈에 보이면 아주 길몽인 이유는 보다 혈연적인 집단령의 상부로부터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꿈을 통해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영적 세계는 종교적인 그룹이다. 물론 이 종교적인 집단령에 소속되는 것은 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자기의 영혼이 그 세계로 지속적인 메시지를 보내야만 가능하다. 혈연적인 것이건, 종교적인 것이건 간에 인간이 그쪽 세계와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교감의 기회를 갖지 않으면 영계와의 교신은 점차로 무디어지고 마침내는 아무 데에도 소속되지 않는 고독한 영혼이 된다.
어떤 집단령에도 속하지 못한 홀로 된 영혼들은 인연법에 따른 환생의 기회도 쉽게 주어지지 않아서 아주 고립된 영적 존재로 남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영혼들도 하나의 그룹에 속하게 되기는 하는데, 그것은 바로 고립된 영혼들의 집단이다. ‘고립된 존재들이 모인 집단’은 그 자체가 이미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데, 집단에 속하지 못한 아웃사이더들의 무리라는 뜻이다. 이런 영혼들은 그들끼리는 잘 교감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하나의 집단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잡귀라고 말하는 고립된 영혼들은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폐쇄적인 사람들의 영혼과 주로 교감한다. 이 때 양자 사이에는 어떤 인연의 고리도 없다. 우연적인 교감이어서 대체로 그 결과는 영혼이나 인간의 양쪽에 모두 이롭지 못하다.
또 한 가지, 영혼이 영계에서 집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경우는, 생전에 아주 강한 집념을 가졌거나 원망, 증오 또는 복수심을 해결하지 못한 영혼들에게서 볼 수가 있다. 이런 의업(意業)이 너무 강하게 새겨진 아뢰야식은 그 업의 힘으로 말미암아 혈연이나 종교적인 집단령에 소속되지 못하고 고립되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서 하는 영가천도(靈家天導)의 의식은 바로 망자의 영혼(아뢰야식)에 남아있을 지도 모르는 이런 원념들을 살아있는 사람의 영력인 스님의 법력과 부처님의 원력(援力)으로 소멸시켜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종교를 믿는 행위는 사후에 우리의 영혼이 기거할 집을 짓는 행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집을 짓느냐 하는 것은 그 종교가 무엇이냐 하는 것과, 신앙하는 자세에서 결정될 것이다.
사후 세계로 가는 문턱에서,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여러 초현상은 모두 죽은 다음의 체험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의 영적 체험이다. 그리고 사후에 육신과 분리된 영혼은 의식을 포함하고 있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므로, 인식과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앞서 설명했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분명히 경험할 수 있고, 믿을 수밖에 없는 영계와의 교감에 따르면, 저쪽 세계의 영혼들은 확실히 우리와 같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사유하는 존재인 것처럼 다가온다.
예를 들어 꿈속에서 죽은 아버지를 만났는데, 마치 생시처럼 여러 얘기를 해주었다고 하자. 이것을 아버지의 영혼과 만난 것이라도 믿는다면, 꿈속에서 말하고 있던 아버지의 영혼을 마음 가진 존재로 여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무당이나 영매를 통해서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 그것이 무당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라면,
그리고 그 말투나 내용이 죽은 사람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면 어떨까? 우리는 영혼이 정말로 생각하는 존재로서 무당의 입을 빌려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게 될 것이다.
교통사고와 같은 재난의 와중에서 구사일생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이나, 부처님의 가피나 조상의 은덕을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적인 존재가 아니라 장식(藏識)으로 표현되는 아뢰야식을 그 본질로 삼고 있는 사후의 영혼이 어떻게 이런 현상들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일까?
이 문제는 영적인 세계가 시공간에서 일으키는 모든 현상을 면밀하게 관찰하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영적인 존재가 개입하여 일으킨 모든 사건은 그 실행이 살아있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아는 범주 내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꿈이라는 현상도 살아있는 사람의 정신 활동 중에 형성되는 것이며, 환상이건 실제적인 사건이던 간에 계시나 신적 존재의 출현은 살아 있는 사람을 관찰자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의 눈에 관찰된 모든 신적 존재들은 관찰되었다는 사실 외에 어떤 실제적인 실행도 이 세계에 해놓지 않는다. 오직 살아 있는 사람의 눈으로 관찰되었거나, 그 소리를 들려주었거나 어떤 느낌을 전했을 뿐인 것이다.
물리적인 세계 속에 물리적인 힘이 가해진 결과로서만 남을 수 있는 어떤 증거도 그들은 남겨 놓지 않는다. 영적이거나 신적인 존재는 오직 인간의 전오식을 통해서만 확인될 뿐이다. 병의 치료와 같은 이적(異蹟)들도 영적 존재의 직접적인 행사가 아니라 반드시 살아 있는 사람의 정신 활동이나, 직접적인 행동의 결과로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영적인 현상에서도 인간을 중간자로 삼지 않은, 영적 존재의 직접적인 행위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시각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자신을 나타낸 경우도 극히 소수의 사람이 관찰자인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영적 현상의 사례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성질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영적 존재가 의식적으로 보여주는 행위는 모두 살아 있는 인간의 의식이나 행위이며, 영적인 존재는 교감을 통해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영향력을 미치는 행위도 영적 존재의 자유 의지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인간의 마음이 불러일으켜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의식적으로 그러한 교감을 원하거나, 영적인 힘의 실현을 간구(懇求)하는 경우가 아니어도, 의식의 영역 밖에서 작용하는 마음의 일부분이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영계의 존재들과 교감을 가지고 그 결과가 의식을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위험에 처하거나, 죽음의 공포나 질병의 고통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간절히 원망(願望)하는 경우에 그러하다.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자신이 소속된 집단령의 강력한 반향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의식에 감지되는 영적인 존재는 스스로 하나의 주체인 것처럼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이 그 형상을 하나의 이미지로서 그려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화면 속에서는 각자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로서 움직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그 주체들인 실제의 배우들의 마음과는 전혀 관계없는, 움직이는 영상일 뿐인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 속의 영상들이 그 순간 생각이나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의식에 투영되는, 의식적으로 보이는 영적 존재의 모든 행위들은 그 영혼들의 자기 인식이나 자유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것은 관찰자의 의식이 만들어내는 조작된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러나 그 이미지의 원인이 되는 영적인 존재들은 분명히 있으며 그 영향력도 실제로 나타난다. 물론 그 실제적인 결과는 살아 있는 사람의 의식에 작용하여 나타난다.
불치의 병에 걸려 죽게 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나 부처님께 일심으로 기도를 드려 꿈이나 환상에서 예수나 부처를 보고 병이 나은 경우를 가정해 보자. 불치병이 완치된 데에는 분명히 영계에 존재하는, 기독교에 속한 집단령이나 불교에 속한 집단령의 작용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꿈에 예수나 부처가 나타난 그 순간, 실제로 영계에 있는 예수의 영혼이나 부처의 영혼이 하나의 인격신으로서 자발적인 의지로 그에게 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다. 예수의 영이나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그런 사람에게 갔던 사실도 모른다. 생명계에서 언제 누구를 고쳐줬는지, 그런 기억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꿈에 나타난 예수나 부처의 형상은 의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 교감을 의식이 해독할 수 있는 정보의 형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조작된 이미지일 뿐이다. 그 이미지는 의식 이전의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어서 그것을 감지한 의식은 자신이 만
든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영적인 존재와의 접촉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만든 영화를 보고 감탄하는 감독과 같다. 자기가 만든 영화라는 것을 깜빡 잊고 몰두하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영적인 존재들의 힘을 얻는 것은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이 원인이 되어 영계의 반향을 일으켜 실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그 영적 존재 스스로의 의지나 판단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그 힘의 행사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살아 있는 사람의 정신 활동이 작용해야만 가시화되는 것이다.
예수나 부처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도움은 예수나 부처가 자기를 특별히 어여삐 여겨, 직접 와서 도와주는 게 아니다. 자신의 영혼이 그들과 어떻게 교감할 수 있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은 특히 엄청난 위력이 있고 사바중생의 간구에 빛을 보는 것과 같은 속도로 반응한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영계에서의 존재는 사람들의 영혼과 대단히 용이하게 반응하는 특별한 것이고, 인간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력도 아주 크다. 그건 바로 중생의 고통에 대한 관세음보살의 자비의 원(願)이 그만큼 크고 강해서, 불교에 속하는 집단령에서 관세음보살이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심지어 미신이라고 비하하여 생각하는 무속조차도 영적 존재들의 개입 체험을 가질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종교는 모두 개인의 체험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현대의 종교가 과학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위축되지 않고 유지되어 가는 이유는 바로 그 종교를 신앙하는 개개인의 체험이 그러한 비판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과 사후 세계의 실상이 열려져가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개인의 영적 체험은 특정 종교가 자기들만이 진리임을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지 못할 만큼 모든 종교에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반드시 종교적인 차원에 국한되는 현상도 아니다. 정신계와 공존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불교는 이런 점에서 가장 진실된 실상을 알린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대개의 종교는 그 교리가 인간의 상상력으로 창작된 소설에 가까운 것이다. 물론 종교는 대중소설처럼 리얼리티에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다. 대중소설이 읽히는 것이 그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우냐가 아니고, 얼마나 재미있느냐에 달린 것처럼, 종교의 위력은 교리의진리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 체험의 강도와 사실성에 달려 있다. 때문에 아무리 황당무계한 교리에 기초한 종교라 할지라도 신도를 대량으로 확보하고, 신앙의 강도를 고취시킬 수만 있다면, 영계에 상당한 집단령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집단령이 다시 살아 있는 그 종교의 신자들에게 체험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역사를 가지면서 전승되면, 종교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토대를 갖게 될 것이다.
물론 교리 자체가 허술하고 논리적 토대가 취약하다면, 이러한 발전의 과정은 불가능할 것이다. 한 때의 신흥 종교처럼 금세 사라지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불교는 유일하게 이런 세계의 실상을 정확하게 설명해 놓은 놀랄 만한 학문이며, 하나의 과학이다. 상상력에 의한 가공의 소설이 아니고 이론적 체계이므로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복을 비는 일은 불교의 본질이 아니다. 부처의 가르침은 그런 것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온 ‘영혼과 사후 세계’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판단하고 결정하는 인격체인 어떤 초월자나 절대적인 권능자가 인간의 기도를 듣고 그 내용을 판단해서 소망을 이루어준다는 생각이 얼마나 억지스러운 발상인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죽을병에 걸렸는데 간절한 기도를 듣고 절대적인 권능자가 병을 낫게 해줬다고 하자. 절대자의 개입이 없었다면 죽었을 사람이 살아남으로 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을 살려달라고 기도한 바가 없는데도, 그 사람이 살아나는 바람에 모두 영향을 받는 것이다. 절대자가 일부러 살려준 이 사람이 어느 날 자동차 운전을 하다가 사람을 치어 죽였다면 그 사고로 죽은 사람은 절대자 때문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 된다. 한 사람을 살려준 절대자가 그 사람 때문에 죽어야 하는 사람한테는 억하심정이 있었겠는가? 아니면 그럴 줄 몰랐던 것일까?
한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고 그 기도를 들어주는 것은 그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천, 수만 사람의 운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절대자도 한 사람의 기도를 듣고 그 소원을 선택적으로 들어줄 수가 없는 것이다.
영계의 힘은 예외 없이 살아 있는 사람의 의식을 통해서, 살아 있는 사람의 자유 의지와 행동에 의해서 이 세상에 작용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인연법의 원칙인 자업자득의 법칙이다. 영계의 힘이 이 세상에 직접적으로 실행된다면, 그로 말미암은 모든 결과에 대해서 영계의 존재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세상일에 대해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책임을 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것이 세상의 법칙이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생명계가 아니라 귀신들의 세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적 존재의 영향력은 반드시 살아 있는 생명의 영혼이 불러서 가능하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의지로 전화된 다음 살아 있는 사람의 실행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힘이든, 부처의 가피든, 무당이 불러낸 관운장의 혼이든 간에 영적인 힘이 사용된 결과는 반드시 그 원인이 된, 살아 있는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게 인연법의 법칙이다. 부처가 죽을 목숨을 살려줬다 해도, 그 살아난 사람이 앞으로 저지를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모든 책임은 바로 그 사람의 업보로서, 본인이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다음 장인 ‘전생과 윤회’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업은 생명체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며, 그 업을 푸는 것도 생명체일 동안에만 가능하다. 사후의 영혼은 삼업의 주체가 아니다. 업을 가볍게 하는 것은 살아 있을 때가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의 한 생이 중요한 것이다.
한 사람의 운명이 바뀌면 많은 사람의 운명이 따라서 바뀐다. 자신의 삼업에 따라서 자신의 아뢰야식이 바뀌고, 아뢰야식이 변화하면 자성(自性)이 바뀌고, 자성이 바뀌면 운명이 달라지며, 달라진 운명은 다시 자신의 아뢰야식을 변화시켜가는 것이다. 아뢰야식이 바뀌면 인연이 바뀌고, 한 사람의 바뀐 인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인연이 새롭게 바뀐다. 자성을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을 경우 상위의 집단령에 호소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도다.
기도는 한 영혼의 염(念)이고 원(願)이다. 이 염원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영혼의 집단에 작용을 미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의 강력한 반향에 의해서 자신의 자성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염과 원이 무엇을 향한 것이냐에 따라서 반향은 자신의 조상일 수도 있고, 산신령일 수도 있고, 잡귀일 수도 있으며, 예수나 부처일 수도 있다.
반향되어오는 힘의 성격에 따라서 염원의 실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종교를 택해서 참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다.
다시 말해, 한 영혼의 원은 자신이 속해 있는 영혼의 집단을 흔들어 놓고 반향을 일으키며, 강한 염원이 일으킨 반향은 자신에게 작용해서 자기의 인연과 자성을 바꾸고, 운명을 변화시킨다. 이 경우, 한 개인의 영혼이 일으킨 영계의 반향은 반드시 영계 전체에 영향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염원의 작용도 전체 우주 의식을 바꾸어 놓는다.
한 인간의 운명이 바뀌면, 그 때문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한 남자의 운명이 바뀌어 그 전의 운명에는 없던 여자를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만약 그 아이가 히틀러라면 이 바뀐 운명은 전체 인류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겠는가? 모든 인류가 다 영향을 받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천만 명의 인간이 그 때문에 전혀 다른 운명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히틀러가 아니라 미미한 생을 살고 간 사람도 역시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가 없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후손들 중에서 누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나 부처가 한두 사람의 기도를 자의로 들어줄 수 없는 이유를 이제 충분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자성의 변화는 인연을 바꾸고, 그 인연이 바뀔 때마다 우주 전체의 인연의 그물은 다시 짜진다. 그 연기(緣起)의 바다는 고정되어 있는 완성된 그물이 아니라 매시 매초, 전체의 날줄과 씨줄이 새로 얽히는 운명의 천이다. 한 개인의 영혼은 우주 전체에 영향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생은 이 세계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 어찌 가볍게 여길 것인가? 나의 염과 원은 세상 전체의 연기를 바꾸고, 내 인생을 바꾸며, 동시에 전 인류의 운명을 바꾼다. 전 인류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사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변화는 분명하다. 그 변화는 새로운 인연의 씨줄과 날줄이 되어 나의 업으로 돌아온다.
부처님께 엎드려 간절히 간구하거나, 예수님께 눈물로 기도하면, 그 염원은 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병이 나을 수도 있고, 사업이 잘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영향을 받은 다른 모든 사람들(우주 전체)은 우리가 책임져야할 업이다. 그러므로 원(願)과 기도는 온 우주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은 원을 세워 부자나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가난해진 사람, 고통받은 사람이 생겨난다면 그 업은 당신의 것이다.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누가? 지금의 당신이나 혹은 내일의 당신이... 내일의 당신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주변으로 눈을 돌려 고통 받으며 불행하게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라. 그들의 삶이 바로 내일의 당신의 삶이다.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 1
■ 다섯 번째 여행 ■
전생과 윤회-1
전생과 윤회에 대한 의문들
만약에 전생이 있고 생명이 윤회한다면 전생을 밝혀줄 수 있는 증거는 과연 무엇일까? 티벳의 라마교가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법은 전생윤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대(前代)의 달라이 라마가 어린아이로 환생해서 세세토록 티벳을 지도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달라이 라마의 환생체로 생각되는 아이는 어떻게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전대의 달라이 라마에 관계된 일을 기억해내는 일일 것이다. 그가 사용했던 여러 가지 물건과, 그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 등 그가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내용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로써 달라이라마의 환생체임을 인정받게 된다.
누군가가 ‘나는 전생에 나폴레옹이었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그 증거로서 나폴레옹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그런 사실들을 말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는 과거의 나폴레옹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사람=그 사람의 기억’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가 라는 질문과 아주 비슷하다. 그렇다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전생의 자기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까?
현생의 나와 전생의 나, 이 둘은 어떤 관계에 있는 걸까?
어떤 사람이 사고를 당해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면 사고 이전의 그와 이후의 그가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라는 질문의 답과 같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우리는 결코 두 사람이 다르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의 어떤 사람이 자기라는 사실에도 역시 동의하기를 망설인다.
여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그를 알아보고 아는 척하는 것은 사고 이전에 잘알고 지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고 이전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 과거는 지금의 그에게 영향을 미친다. 기억나지 않는 가족들이 나타나고 친구가 나타나고 예전에 빚진 사람이 돈을 달라고 나타나기도 한다. 밀린 세금고지서가 배달되기도 한다.
이 사람은 기억나지 않는 사고 이전의 자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억이 안 난다고 해서 모든 부채 관계를 소멸시킬 수 있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세상에는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싶은 사람들이 아주 많을 것이다.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사람이 자기의 전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와는 다르다. 기억의 유무에 관계없이 전생은 현재의 자기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기억상실증 환자가 필사적으로 사고 이전의 자기를 떠올리려고 애쓰는 것처럼 우리는 전생을 알고 싶어한다. 그리고 전생은 알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전생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갖게 되는 몇 가지 의문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인간만이 윤회하는가? 아니면 다른 동물들의 영혼도 윤회하는가?
2. 인간과 동물은 서로간에 환생할 수 있는가?
3. 생명은 이 지구에서만 환생하는가?
4. 생명은 죽음부터 환생까지의 기간 중 어디에 머무는가?
5. 윤회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6. 윤회하는 각 존재들은 어떤 관계인가? 하나의 자기인가? 여러 사람인가?
7. 윤회되는 자기란 무엇인가? 윤회의 주체인 진아(眞我)란 존재하는가?
8. 윤회를 인정할 증거는 있는가?
9. 나의 전생과 내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10. 윤회의 진로를 자신의 힘으로 바꾸거나 정지시킬 방법이 있는가?
전생과 윤회에 대해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의문들은 이 정도일 것이다. 이 의문들에 대해 하나씩 알아보자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 2
전생과 윤회-2
윤회하는 생명의 범주
영혼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동물에게도 있는가? 그리고 동물들의 영혼도 사후 세계가 있는가? 이러한 종교적 논쟁은 오랫동안 이루어져왔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만을 특별히 자신과 같은 형상으로 창조하여 영혼을 선물하였으므로 영혼이란 인간만의 것이며, 따라서 천국이나 지옥 같은 모든 사후의 영적인 문제도 인간들에게만 해당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반면에 불교나 라마교 같은 동양의 종교들은 모든 생명의 뿌리가 같다는 만유일체의 사상으로 모든 생명을 동등하게 취급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생명은 박테리아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구조와 원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생명은 진화의 결과로 인간과 같은 고등한 지적 생명체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물질계와 정신계 사이의 영혼의 순환은 인간의 그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기본 법칙임을 고찰해왔다.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영혼의 윤회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공통된 업보다.
전생과 윤회에 대해 설명해놓은 책들을 보면 전생에 뱀이었던 사람, 여우나 토끼였던 사람, 개나 소와 같은 짐승으로 살다가 인간으로 환생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과연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어떤 사람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1970년 8월 28일 23시 30분에 번식에 필요한 행위를 한 결과로 태어났다면 그 순간의 그 사람은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이었다.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벌레는 지금의 자기와 어떤 관계일까? 자기였을까 아니었을까?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그 순간으로부터 최대한 48시간 이전에는 박테리아도 아닌 핵을 가진 하나의 단세포였을 것이다. 정자 세포라서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 최소 단위의 지나지 않았다. 이 세포는 자기인가, 아닌가? 나와 어떤 관계인가? 그 24시간 이전에 자기는 무엇이었을까? DNA를 구성하기 위한 흩어진 원소들이었다. 이 원소들이 아버지의 몸 속 어느 부위에서 하나의 정보를 가지는 띠를 구성하면서 꼬이기 시작한 과정은 기적과 같다. 원시 생물이 처음 생기는 것과 다름없는 기적적인 힘에 의해서 그렇
게 원소들이 뭉쳐지고 거기서 머리가 나오고 기다란 꼬리가 생겨났다.
정자는 부친의 소질이 암호화된 유전 정보를 세포핵 속의 RNA와 DNA에 가지고 있으며, 그것의 정체는 독립적인 영혼을 가진 생명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말나식이 분화된 하나의 분신들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생명체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에는 모두 말나식이 심어져 있고, 그 전체의 세포들은 독립적이면서도 통합적인 말나식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유기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생식 세포들은 다른 세포들과 똑같이 부모의 몸속에서 만들어질 때는 부모의 말나식이 그대로 심어진 부모의 육신 중 일부이다. 이것들이 성숙하여 하나의 정자와 난자로 완성되어 부모의 육신으로부터 분리되면 유기체에서 떨어져나간 독립적인 말나식이 된다. 하지만 이것의 기본적인 성격은 부모의 다른 세포들과 동일하다.
정자와 난자의 말나식, 즉 양친의 두 말나식이 수정을 통해 통합되는 순간 새로운 개체의 말나식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때의 말나식은 양친의 것이 아니라 환생할 영혼과 결합의 끈을 가지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수정되기 전의 수천만 마리에 달하는 정자들은 모두 부친의 세포들이며, 하루에도 수십만 개씩 죽고 새로이 보충되는 다른 세포들의 생성, 소멸과 다를 바 없다. 난자 역시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세포이지 독립적인 영혼을 가진 생명체는 아니다. 부모의 육체와 물리적으로 분리된 다음에도 다른 세포들 보다 조금 더 오래 생명 현상을 유지한다는 차이 뿐이다. 정자와 난자들은 아뢰야식이 깃들어 있지 않은 말나식의 분신들이라서 윤회하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저 생겨났다가 소멸될 뿐이며, 수천만 개의 정자 중 인연에 의해 난자와 만나게 된 하나의 정자만이 인간의 영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로 이때, 드물지만은 전생에 사람이었던 영혼이 짐승의 수정란에 발을 걸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생전에 짐승 같은 행위를 많이 했던 영혼이다. 그 영혼이 가진 아뢰야식의 내용이 짐승의 뇌와 교감할 수 있을 때 연결되는 것이다. 새로운 수정란에 영혼이 깃든다는 것은 전체가 다 들어가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윤회의 법칙 한 가지가 존재한다. 하드웨어인 육신과 소프트웨어인 영혼의 결합은 단계를 뛰어넘어 비약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죽은 영혼이 바로 물고기로 환생한다든가 개구리가 죽어서 다음 생에 인간으로 난다던가, 이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도 많은 수의 환생을 한 다음이라고 봐도 틀림없을 것이다. 기근과 내전으로 지옥 같은 참상을 겪는 나라들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짐승으로 태어난 삶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어 보일 정도이다. 이런 비참한 삶이 예정된 땅에 태어난 사람의 영혼은 한참의 윤회를 반복한 끝에야 문명국가의 시민으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윤회를 통해서 진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점점 고등한 단계로 옮겨가도록 되어 있지 거꾸로 퇴보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떤 면에서 인간의 단계까지는 퇴보가 없다. 그런데 인간은 짐승과 달리 의식적으로 사악함을 보이고 필요없는 잔인한 짓을 하므로 여기서부터 영혼의 퇴보란 것이 생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생명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영혼에 책임을 진다. 자기를 인식하는 유일한 단계인 인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생명은 진화의 벽을 뛰어넘거나, 아니면 퇴보하거나 하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대충 살다 죽으면 다음 생에도 대충 살다가 죽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크고, 이생을 잘 살면 다음 생에는 보다 지적이고 생활 단계도 향상된 삶이 예정된(그러나 100프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 날 가능성이 커진다. 못된 짓을 많이 하면 소말리아 같은 땅이나 북한 같은 곳에 태어나서 태어난 것 자체를 원망하게 된다. 이생에서 윤회의 법륜을 터득하고 우주와 생명의 법칙을 관조하게 되면 아마 다음 생은 이 지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곳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천국일까?
그런 천국이나 지옥은 있지도 않다.
이로써 두 가지 의문에 대한 해답은 풀어보았다. 영혼의 윤회는 인간만이 하는 것인가? 그리고 인간과 동물은 서로 환생하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의식의 윤회는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것이다. 윤회는 보편적인 생명 현상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다. 육체의 진화는 언제나 영혼의 진화와 함께 이루어진다. 그리고 육체의 진화 단계와 일치하는 영혼이 결합하여 한시적인 생명체를 이룬다. 그리고 영혼의 윤회는 단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육체가 진화하는 것처럼 억겁의 세월을 두고 아주 조금씩 점진적인 진화 과정을 밟는다. 영혼이 육체라는 옷을 계속해서 갈아입는 윤회를 반복하는 것은 영혼이 진화를 위해서 택하게 된 방법으로서, 바로 생명계의 가장 기본적인 메커니즘이다.
신비한 일도 아니고 특별한 현상도 아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생명이다. 그렇다면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전생이나 업에 대한 여러 가지 책들의 내용은 주의해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 터무니없는 내용뿐인 흥미 위주의 책들이 있어서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 어느 책에서의 내용 일부분을 살펴보자.
가족 사이의 근친상간을 비롯해서 온갖 음란한 생활을 하게 된 어떤 여자가 한 책의 저자를 찾아와서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하소연하므로, 저자가 이 여자의 전생을 들여다본즉 뱀이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까 바로 이전에 이 여자는 뱀이었는데 사람으로 환생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뱀이란 동물은 사람으로 바로 진화할 수 없다. 한참의 단계를 뛰어넘어야 영장류가 된다. 마찬가지로 뱀의 영혼은 절대로 인간의 뇌라는 하드웨어에 들어올 수 없다.
그녀가 전생에 침팬지였다고 해도 단계를 뛰어넘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하물며 뱀이라니… 뱀의 영혼은 억겁의 세월 동안 수천만 번의 윤회를 통하여 진화하는 과정을 밟지 않으면 인간으로의 환생이 불가능하다. 물론 그것을 뱀이 인간으로 환생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억 년 전에 뱀이었던 적이 있는 어떤 사람의 영혼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생명계의 원리를 정확하게 알면 이러한 황당한 이야기에 속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전생을 보면 또 다른 어떤 사람의 일생을 보게 되지, 거기에서 토끼나 뱀이나 여우를 보지는 않는다. 그런 짐승 단계의 전생 기억을 되살린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하다. 거꾸로, 인간이 다시 짐승의 몸을 받아 환생하는 경우도 드물다. 생명계에서 생명에 대해 못할 짓을 많이 한 인간은 짐승으로 환생하는 수가 있어서 부처님이 그것을 염려하신 것이다. 육도의 윤회[六道輪廻; 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지옥(地獄),인간(人間),천상(天上)]는 억겁의 시간이라는 개념을 기초로 해서 성립하는 것이며, 육도를 한번 윤회할 때마다 고루 거쳐 다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한 생명의 자성(自性)은 아뢰야식에 훈습된 전체의 내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고, 이 자성이 인연을 바꾸어 육도의 윤회를 결정한다. 그런데 인간 이하의 생명들에 있어서는 그 생애를 통해 아뢰야식의 내용을 크게 바꿀만한 일이 일어나기 힘들다. 때문에 짐승들의 아뢰야식이 인간에 근접하는 것으로 수준이 높아져가는 데는 수억 년 이상의 윤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장구한 세월을 통하여 인간의 것으로 모습을 바꾸어 온 어떤 영혼이 한 생의 내용 만에 의해서 바로 짐승의 것으로 변화하는 것도 역시 드문 일이다. 짐승의 자성이 인간의 것으로 바뀌기가 쉽지 않듯이, 인간의 자성이 짐승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도 갑자기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악업을 많이 쌓은 인간은 그 업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서 받게 된다. 사실 인간이 받는 업의 대가가 짐승으로서 치르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참혹할 수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여러 가지 악행의 정도를 볼 때에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데 충분할 정도로 끔찍한 삶을 살아가는 짐승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아귀나 지옥에서의 처벌도 생각해볼 수는 있겠지만, 이런 지옥의 개념 역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아귀와 수라, 지옥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 3
전생과 윤회-3
윤회하는 여러 세계
생명이란 것이 지구라는 작은 별 하나에만 존재한다면, 모든 영혼의 윤회도 당연히 이 에테르 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의 점보다 더 작은 이 지구만의 축제를 위해 광대무변한 우주가 배경 무대가 된다는 건 너무 거창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 이 우주의 다른 외계에도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곳의 생명들과 지구의 생명들은 공통된 하나의 윤회장(輪廻場)에 묶여 있을 거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외계의 생명체를 찾기 위해 인간이 노력한 역사는 아직 짧지만, 금세기에 들어와서 급격하게 발달한 인간의 과학 기술은 외계 생명과의 극적인 조우를 하게 될 가능성을 상당히 높여주고 있다. 또한 인간의 노력 외에도 이러한 외계의 생명체가 먼저 지구라는 별에 살고 있는 인간이란 지적 존재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어쩌면 외계의 지적 생명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지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구약에 그려진 신의 모습은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신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선을 타고 착륙한 우주인의 모습에 가깝다. “요한 계시록”의 몇 장면은 마치 ‘스타워스’와 같은 공상과학 영화를 보고 그대로 옮겨 적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과학 기술적인 묘사들을 배경에 깔고 있다. 생명체가 존재하는 외계가 아무리 광대한 우주 속에서 거리적으로 멀리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의식의 정보 전달이 우주의 끝에서 끝까지라도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양자론의 실험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광속으로 달리는 우주선으로 몇만 년을 가야하는 거리의 별이라도 영혼의 세계에서는 지척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천체의 생명들이 옮겨 다니면서 윤회하는 것에 거리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앞에서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하나의 타입인 것을 알았다. 만약에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 지구에서 오직 그 하나의 형식으로만 생명이 존재할 수 있었다면, 똑같은 물리 법칙 하에 놓인 다른 외계의 생명체도 똑같은 형식의 생명체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천체에서 가능했던 생명의 형식이 지구에서만 불가능했으리라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천체의 생명체가 기본적으로 같은 형식을 갖고 있다면 그 의식의 정보 형태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간의 윤회에 아무런 장애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로스웰의 필름이 사실이라면 필름 속의 외계인 여자의 영혼이 지구의 인간으로 환생할 수 없는 이유는 없어 보인다. 마찬가지로 지구인의 영혼도 다른 천체에 환생하는 것으로 믿을 만한 여러 가지 증거도 찾을 수가 있다.
부처님이 삼천대천세계의 수많은 세계를 말씀하신 것도 어떤 신비적인 영계나 신들의 나라가 아니라 이 우주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다른 외계를 말씀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당시의 고대인들에게 그런 설명은 이해되기 어려웠으므로, 도솔천이나 제석천 같은 땅 이름이 법신(法神)들의 영토로 설명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지구 이외의 장소에서 살아가는 생명체가 있다면 우리 지구상의 생명체와 얼마나 다를까?
생물학자들은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데, 그것은 생명체의 구조가 오직 하나의 방식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DNA방식의 생명체라 부른다. 박테리아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기본 정보를 담고 있는 DNA는 단 한 가지 형태뿐이다. 이것과 다른 형태 또는 다른 유기 물질로 정보 구조를 이루는 생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기본 구조가 동일한 생명체다. 인간이 아무리 우쭐거려도 기본적인 구조는 미생물들과 다를 바 없다.
왜 생명체는 오직 이 한 가지 형태로서만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은 아직껏 찾지 못하고 있지만, 외계에서 생명체가 만들어진다 해도 그것 역시 DNA 타입의 생명체이기 쉬울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을 것이고, DNA 생명체라면 진화의 방향도 거의 일치할 것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물론 자연 환경에 따라 생명체의 모습은 약간씩 다르겠지만 그 기능의 진화는 거의 일치하리라고 생각된다. 만약에 DNA 타입이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체계의 생명체라면 생명의 근본 개념이 다른 그 무엇일 것이다. 그런 생명체는 의식 역시 인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 생명계에서 활성화될 수 있는 것은 두뇌라는 정교한 하드웨어 장치가 있기 때문인데, 이 두뇌는 여러 종류의 기기들이 하나로 모인 오디오 세트와 흡사하다고 설명하였다. 오디오 세트는 라디오와 전축과 카세트장치와 CD장치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고 이 장치들은 모두 같은 성격의 기기들이다. 모두 전기로 작동되는 전자 기기들이며 또한 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하는 원리가 모두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모르고 있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어떤 기록 장치가 발명되었다고 한다면 이런 장치를 하나로 결합하기는 힘들 것이다.
전기 대신 원자로처럼 물속에 잠겨 있어야 작동되는 기계라면 결코 전자 제품들과 세트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외계에 생명체가 있더라도 같은 방식의 하드웨어가 아니라면 서로 호환성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생명체들 간에는 영혼의 윤회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반대로, 같은 계통의 생명체들 간에는 영혼의 윤회가 별 문제없이 이루어질 것이고, 영혼이 육체의 진화를 선도(先導)한다는 원리에서 볼 때, 같은 영혼이 깃들인 육체들의 진화는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전생을 확인한 여러 사례에서, 모든 환경은 지구와 다를지라도 외계의 지적 생명체는 지구의 인간과 별반 차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생관조(前生觀照)로 유명한 에드가·케이시(1877∼1946)①는 이런 사람을 만나면 모두 아틀란티스(Atlantis)②라는 가라앉은 대륙 출신으로 단정지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에 지적 생명체가 사는 다른 천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생명이 윤회하는 공간을 지구에만 국한시켜서 자기가 상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구라는 틀 속에 끼워맞췄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전생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해서 아틀란티스 사람들이 원자력을 이용해 불을 밝혔다고 하는 등 다소 황당한 기록이 남게 되었다.
에드가 케이시가 다른 사람의 전생을 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에드가 파일’이란 게 있다. 그 가운데 전생에 의사였던 사람의 예를 살펴보면, 에드가 케이시가 살아 있던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던(지금은 일반화되었지만) 수술법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내용이 나온다. 오늘날의 의사가 아니면 묘사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정확하게 미래의 수술법을 설
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으로서는 분명히 과거였던 전생의 회상이었는데도 말이다. 그가 살았던 곳은 아틀란티스가 아니라 다른 천체의 생명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외계의 생명계는 죽어서 영혼이 가는 영계가 아니라 윤회의 결과로 태어나게 되는 또 다른 생명계다. 환경이 달라도 지구라는 생명계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어떤 천체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끔찍하게 생각되는 환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생명이 처음 탄생하던 무렵의 지구가 그랬듯이. 만약 그런 곳에 태어난다면 그곳의 희망 없는 생명으로 몇천, 몇만 년을 윤회하다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지옥도 인연이 다하면 이별하게 된다.
이와 달리 지구보다 훨씬 좋은 환경을 갖춘 천체도 있다. 생명체가 그리 처절하고 절박하게 경쟁하지 않아도 여유롭게 살 수 있을 정도의 넉넉한 환경이다. 이런 곳을 도솔천이나 제석천이라 말하는데, 그 곳에 태어나도 물론 인연이 다하면 떠날 수밖에 없다. 제석천왕은 여러 생의 공덕으로 제석천에서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계도하고 있지만, 영원히 하는 것은 아니다. 제석천왕조차도 인연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인연이 다하는 날이 오게 된다. 인연의 그물에서 완전히 벗어난 부처만이 영원의 안식으로 우주와 함께 있는 것이다.
지구에서만 영혼이 윤회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체가 살고 있는 모든 천체가 육도윤회의 장이 된다.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 4
전생과 윤회-4
영혼이 머무는 곳
우리의 영혼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 과연 어디에 머물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영혼이 사는 나라’에 대해 묻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던 대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물질계와 정신계의 결합체인 시공간으로서 구현되어 존재한다. 분리된 두 세계는 그 어느 쪽도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이 허상의 세계에서 자기를 인식함으로써 실존하는 유일한 것이 바로 생명이다. 이 생명이야말로 두 세계의 만남이 창조해낸 최상의 존재다. 이 생명이 바로 두 세계가 결합한 증거이자 동시에 그것의 증인이 된다. 생명이 없다면 이 세계는 존재하는 증거도, 증인도, 의미도 없는 무(無)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이 없다면, 따라서 인식하는 존재가 없다면 수천억 개의 은하수와 영겁의 시간이 있다 한들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세계는 존재를 증명해 줄 증인이 필요하다. 세계는 관찰자가 없이는 존재하지 못하므로 필연적으로 관찰자를 만들었다.
통합된 우주 에너지가 인(因)이 되고, 통합된 우주의 정보가 연(緣)으로 작용한 우주적인 인연의 시작이 시공간을 만들면서 물리 법칙이 지배하는 자신의 분신들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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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우주의 응축된 에너지가 수천억의 무량한 원소들로 나타날 때, 우주의 모든 정보들이 마찬가지로 무량한 수로 나누어지면서 모든 입자들과 결합하여 그것들의 본유종자로 심어졌다. 허깨비처럼 보이는 모든 원소들은 물질계와 의식계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정신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에너지와 정보의 결합체인 물질 원소들의 본유 종자는 그 자성에 따라 낱낱의 정보로 존재함과 동시에, 그것이 뭉쳐진 세트로서의 집단 정보에 속하고 있다. 생명계의 영혼들과 마찬가지이다. 쿼크(quark) 같은 미립자는 하나하나의 정보체이지만, 이 미립자가 뭉쳐진 원자는 그것대로 하나의 상위 정보체이다. 이 원자들이 모인 하나의 분자 역시 원소의 상위의 통합적인 정보체이다.
앞서 설명했던 얘기를 되풀이하는 이유는, 마음과 영혼의 차이점을 좀 더 명확히 해야만 사후에 영혼이 어디에 있게 되는지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물질계와 정신계의 만남이 일으킨 불꽃이다. 이 불꽃은 오래 가지 않고 순간적이다. 마치 여름 장마철의 번갯불처럼 번쩍 하고 사라지는 허망한 것인데, 단지 우리가 그것을 꽤 길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 번갯불이 번쩍 비치고 나서 번갯불이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전하(電荷)를 가진 구름들이 다시 만나면 번개는 언제라도 재생될 뿐이며 달리 오고 가는 곳이 없다.
자아(말나식)란 이 생명의 번갯불이 비칠 때만 존재한다. 다음 순간, 자아라는 것은 찾을 길이 없다. 구름 속에 뭉쳐진 전하의 입자들뿐이다. 이 구름들이 부딪히면 나타나지만 그 전에는 번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아뢰야식)은 번개를 일으키는 구름 속의 전하들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이지만 생명의 근원이다. 영혼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인연에 따라 생명으로서 시공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말나식이라는 자기에의 집착을 만든다. 이 집착이 자아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말나식은 반드시 생명 현상이 지속되는 동안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사후의 영혼이나 물질의 정보들은 자기라는 것에 대한 집착을 갖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도 에고는 같이 잠들지 않고 언제나 깨어있다. 에고가 잠들어 있는 기간이 바로 죽음과 환생 사이가 된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얼마나 오래 잤는지 알지 못한다. 시계를 보고서야 겨우 알게 된다. 우리는 다시 태어났을 때, 얼마나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 다시 태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시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안다 해도 별 의미가 없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회사에 지각을 한다 해도 잠들었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늦지 않으려면 허겁지겁 서두르는 수밖에 없다. 자아가 나를 인식하는 것은 한 생명으로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다. 죽은 후부터 다시 생명의 불꽃으로 되살아날 때까지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잠들어 있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자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깨어나기 전에는 그 기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각을 하거나 너무 일찍 일어났거나 하는 것은 모두 깨어난 다음의 문제다. 일상의 걱정이나 번민도 모두 깨어났을 때 닥치는 문제다. 잠자고 있는 동안에는 어떤 고뇌도 번민도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그저 시간은 나와 관계없이 흐르고 이윽고 깨어날 아침이 온다는 사실뿐이다. 모든 문제는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닥친다. 영원히 잠들 수 있다면 모든 사건은 나와 관계없으리라.
그러나 우주의 아침은 어김없이 온다. 나는 일어나야 하고 어제 했던 그 고민들에 다시 빠지게 된다. 오늘 깨어있는 동안 해결치 못했던 문제들은 밤이 왔을 때 잠시 잊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는 어찌할 것인가? 무수한 새 아침으로 일을 미루고 매일 아침 깨어나면서 고민에 휩싸일 것인가, 아니면 깨어있는 오늘 그 일을 마무리해 버릴 것인가의 선택이 문제다. 자고 있는 동안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떤 고통스러운 일도 나를 쥐고 있지 못한다. 깨어 있는 지금이 문제고, 내일 아침 다시 깨어날 순간이 문제다. 사람들은 고통스러울 아침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한 밤을 걱정한다. 사후를 걱정하지 마라. 다시 태어났을 때를 걱정하라. 잠은 아무리 오래 자도, 깨고 나면 그 시간은 찰나이다.
하급 생명일수록 시공간적인 차원에서의 윤회 싸이클은 아주 짧다. 얽힌 인연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식들은 거의 찰나에 다시 환생한다. 거미 한 마리가 죽으면 시공간적인 개념으로는 바로 다음 순간 다시 거미로 태어나서 지상을 기어다니고 있게 될 것이다. 생이 짧은 만큼 죽음의 기간도 짧다. 필자가 나의 전생을 바라보며 느낀 시간 감각으로는, 인간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시간은 그 삶에서 차지하는 잠의 비율과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24시간 중에서 8시간 정도를 잔다. 60년을 살다 죽었다면 대략 시공간적으로는 2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영혼이 진화하면서 점차 모든 주기가 길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시공간이 팽창함에 따라 시간이 점점 느리게 가는 것과 동일한 법칙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세계 속에 나타난 사건을 통해 환생의 주기를 알아보자.
링컨은 1860년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케네디는 꼭 1백년 후인 1960년 대통령이 되었다. 링컨의 비서 이름은 케네디였고 케네디의 비서 이름은 링컨이었다. 두 사람이 죽었을 때 대통령직을 승계한 부통령의 이름은 모두 존슨이었다. 앤드루 존슨은 1803년생이고, 린드 존슨은 1903년생으로 꼭 1백년의 차이가 난다. 링컨을 저격한 부스와 케네디를 저격한 오스왈드는 다른 범인의 손에 의해 재판 전에 죽었는데, 둘은 같은 날짜에 태어났다. 또 부스는 링컨을 극장 안에서 쏘고 창고로 도망갔고, 오스왈드는 케네디를 창고 안에서 쏘고 극장 안으로 도망갔다.
같은 인연의 고리에 묶인 여러 영혼들이 윤회를 통해서 비슷한 삶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 링컨과 케네디의 경우는 유명한 인물이고, 또 역사적 사건이어서 하나의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제 살았던 삶과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공간상의 위치가 어제와 오늘이 다르기 때문에 사뭇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이다. 인간이 환생하는 주기는 시공간 상의 시간 개념으로 볼 때 평균 10년에서 100년 정도 사이로 생각된다. 태아로서 유산된 생명은 금방 다른 곳에 태어난다. 어려서 죽은 영혼은 그만큼 빨리 다른 곳에서 몸을 받는다. 어려서 죽을수록 자성이 약하기 때문에 그만큼 인연이 강하게 등을 떠밀어내는 것이다. 첫 아이가 유산(流産)되었을 경우, 둘째 아이의 의식이 앞의 아이의 의식과 동일할 때도 있다.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고, 태양계는 은하계에 속해있고, 은하계들이 우주를 이루고 있듯이 영혼도 집단령들인 많은 그룹에 중첩되어 속해 있다. 물질계가 중력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처럼 정신계는 업력(業力)이란 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물질계란 다른 말로 시공간이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중력장으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시간도 공간도 오직 중력에 의해서 떠받쳐지고 있다. 이 중력은 공간도 구부리고 시간도 잡아당긴다. 중력이 극대화되면 마침내 공간과 시간의 전부가 중력 속으로 함몰되어 사라져버린다. 시공간이란 물질계가 거대한 중력장의 바다라면, 정신계는 업장(業場)의 바다라고 할 수 있다. 인연도 자성도 이 업력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중력이 무한대의 힘을 지니면서 시간과 공간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처럼, 업력도 무자비한 힘으로 영혼들을 굴복시킨다.
시간과 공간은 힘이 아니며, 존재하는 힘은 중력이다. 마찬가지로 인연과 자성도 힘이 아니며 존재하는 힘은 업력이다. 두 세계는 중력과 업력이라는 두개의 힘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중력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끌어당기는 힘이요, 업력은 인연으로 모든 영혼들을 얽어매는 힘이다. 업력에 의해서 인연으로 연결된 자성들은 업장의 바다에 소용돌이치는 구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공간 상에 존재하는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부터 어디에’라는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업장의 바다는 인연의 끈으로서 시공간에 연결되어 있지만 크기도, 거리도, 위치도 없는 세계다. 인연의 끈이 닿아있는 한 지척에 있는 것이고, 그 관계가 끊어지면 바로 이 우주의 끝과 끝보다 멀리 있는 세계이다. 죽음과 환생 사이에 영혼이 머무르는 곳을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음에서 나온 우문임을 이해했을 것이다.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 5
전생과 윤회-5
윤회의 시작과 끝
윤회는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어디에서 끝나는가? 나는 언제부터 존재하며, 왜 존재하게 되었으며, 또 어디까지 가야 이 여행이 끝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 볼 차례다. 하지만 이 문제의 해답은 필자의 어설픈 설명보다는 부처님의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공부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 정확한 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얻으실 때 사용했던 방법이 바로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이다. 고해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 하니, 우선은 내가 고해의 바다로 떨어진 이유를 알아야했다. 그 이유를 알고 보니 인연이 있었음이다. 때문에 인연에서 벗어나야 윤회를 벗고, 윤회에서 벗어나야 고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연에서 벗어나고자 하니 인연의 시작을 찾아야 했는데, 마침내 그 시작을 깨달은 석가세존이 이를 일컬어 무명(無明)이라 했다. 무명이란 말은 불교에서는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십이연기법을 살펴보면 무명의 뜻은 최초의 인연, 즉 인연의 시작을 말한다. 석가세존이 십이연기에 대해 설법한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십이연기(十二緣起)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순관(順觀)
某靈靈駕 至心啼受(모령영가 지심제수)
汝從無始已來 至于今日(여종무시이래 지우금일)
無明緣行 行緣識(무명연행 행연식)
識緣名色 名色緣六入(식연명색 명색연육입)
六入緣觸 觸緣受(육입연촉 촉연수)
受緣愛 愛緣取 取緣有(수연애 애연취 취연유)
有緣生 生緣老死(유연생 생연노사)
憂悲苦惱(우비고뇌)
모령의 영가들이여, 지극한 마음으로 받아 들여라.
그대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있었고, 행을 쫓아서 식(識)이 일어났으며
식이 일어나매, 명색(名色)이 생겼고, 명색이 생기니 육입(六入)이 갖추어지고
육입을 갖추므로 촉(觸)을 느끼고, 촉을 느끼므로 수(受)가 뒤따르고
수(受)가 뒤따르니 사랑(愛)에 붙잡히고, 사랑에 붙들리니 취(取)하고자 하고, 취하고자 하니 가지게(有) 되고
가지게 되니 태어나게(生) 되고, 태어나고 나니 늙고 죽음이 따르고
근심과 슬픔과 고뇌가 있게 되었던 것이니라.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역관(逆觀)
無明滅卽 行滅(무명멸즉 행멸)
行滅卽 識滅(행멸즉 식멸)
識滅卽 名色滅(식멸즉 명색멸)
名色滅卽 六入滅(명색멸즉 육입멸)
六入滅卽 觸滅(육입멸즉 촉멸)
觸滅卽 受滅(촉멸즉 수멸)
受滅卽 愛滅(수멸즉 애멸)
愛滅卽 取滅(애멸즉 취멸)
取滅卽 有滅(취멸즉 유멸)
有滅卽 生滅(유멸즉 생멸)
生滅卽 老死(생멸즉 노사)
憂悲苦惱滅(우비고뇌멸)
무명을 없애면, 행이 사라지고
행이 사라지면, 식이 가라앉고
식이 가라앉으면, 명색이 없어지고
명색이 없어지면, 육입이 없어지고
육입이 없어지면, 축을 느끼지 못하며
촉을 느끼지 못하면, 수가 부질없고
수가 부질없음에, 사랑에 붙들리지 아니하고
사랑에 붙잡히지 아니하면, 취할 것이 없나니
취할 것이 없으면, 가진 것이 없어지고
가진 것이 없으면, 태어나지 않음이라.
나지 않으니, 늙고 죽는 일이 없고
근심(憂)과 슬픔(悲)과 고뇌(苦惱)를 멸하니라.
여기에 나오는 열두 가지 연기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마음의 귀향-반야’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십이연기의 전체적인 의미, 그리고 연기론을 통한 윤회의 시작과 끝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연기법은 유식론(唯識論)과 더불어 불교 철학의 양대 산맥인 윤회론의 골자를 이루는 내용이다. 따라서 십이연기야 말로 전생과 윤회라는 주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 대한 서적들을 보면 대개 십이연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아마도 필자가 앞에 그려놓은 십이연기도를 보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부처님은 십이연기를 순관(順觀, 그림에서 시계 방향)과 역관(逆觀, 그림에서 시계 반대 방향)을 수도 없이 반복하신 끝에 마침내 육도 윤회의 비밀을 깨닫고 정각(正覺)을 얻으셨다고 한다.
십이연기법을 앞의 그림처럼 읽어나가면 바로 현대적인 풀이가 된다. 먼저 순관(順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생명이 육도 윤회하는 고해 속에서 고뇌 번민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니, 까마득한 옛날에 인연(無明)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인연이 생기니 그것에 반응하는 본능(行; 부처님은 짐승들의 본능을 행으로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선 마지막 장에서 상세히 해설한다)이 생겼다. 본능이 생기니 이어서 나와 너를 구별하는 분별(識)이 생겼다. 이 분별심이 업이 되어 육체(名色)를 받게 되고, 몸을 받고 나니, 자연히 감각(六入 : 육경(六境)이라고도 한다. 여섯 가지 감각 또는 감각 기관을 말하는 것으로 눈, 코, 귀, 입, 신체, 의식의 여섯 가지를 가리킨다)이 생긴다. 감각을 갖추게 되니 나와 남으로 나누어져 만남(觸)이 있게 되고, 남과의 만남에서 내 것이라는 집착(受)을 하게 된다.
집착을 하게 되니 집착의 대상에 대한 사랑(愛)이 생기고, 사랑을 하게 되니 욕망(取)에 사로잡히며, 욕망의 불길은 소유(有)하게 만들어 마침내 소유(有)의 업이 뿌리가 되어 다시 태어나게(生) 되었다. 태어나고 나니 고뇌 번민을 떨칠 수가 없도다.”
십이연기의 순관(順觀)으로 육도 윤회의 이유를 알았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십이연기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십이연기의 역관(逆觀)으로 윤회의 짐을 벗고 해탈로 가는 길을 알아보자.
"옛날에 이 몸을 있게 만든 그 인연(無明)을 없애면 인연을 따라 일어났던 본능(行)이 사라지고, 본능(行)이 사라지면 나와 너를 구별하는 분별(識)이 없어진다. 분별심이 업이 되어 받았던 몸(名色)을 벗게 되니 몸을 벗으면 육체의 작용인 여섯 가지 감각(六入)이 사라지고, 감각이 사라지니 나와 남의 나뉨이 없어 만남(觸)이 없어진다. 남과 만나지 아니하게 되니 내 것이라는 집착(受)을 버리게 되고, 집착을 버리니 집착의 대상에 대한 사랑(愛)을 가질 이유가 없다. 사랑을 하지 아니하니 욕망(取)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욕망의 불길을 잠재우니 소유(有)할 필요가 없다. 아무 것도 소유(有)하지 아니하니 태어나야 할 업을 짓지 않게 되고, 태어날 업이 없으니 태어남(生)이 없다. 이렇게 태어나지 않
는데 무슨 고뇌 번민이 있겠는가?
십이연기는 무명에서 출발하여 무명으로 돌아와 끝난다. 여기서 부처님이 무명을 모든 인연의 시작인 무엇으로 말씀하셨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무명을 없앤다는 것은 인연의 원인을 없애겠다는 말이며, 소급해서 최초의 원인을 멸하겠다는 이야기다. 이 무명이라 이름지은 인연의 시작은 무엇일까? 과연 최초의 인연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인과론(因果論)이란 한마디로, ‘모든 것은 선행되는 이유의 결과로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이유가 있다면 이것은 논리적으로 인과론에 배치된다. 왜냐하면 최초의 이유는 아무런 선행되는 이유도 없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우주는 인과론적 우주인가? 거시적으로는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미시적으로는 인과론적 우주가 아니다. 물질은 인과 관계에서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분자의 세계는 분명히 인과론의 세계다. 분자의 생성은 반드시 그 선행되는 사건의 결과이고 분자의 이동은 반드시 인과론에 따라 이루어진다.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을 놓으면 떨어지리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인과론의 세계는 예측이 가능한 세계이다. 그런데 손에 쥐고 있는 물체를 놓았는데 이것이 공중으로 솟구칠지 밑으로 떨어질지, 오른쪽으로 날아갈지 갑자기 사라져버릴지를 예측할 수 없다면 이건 인과론의 세계가 아니다. 분자 이상의 세계는 물리적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예측이 가능하고 예측한 대로의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원자 이하의 세계에 들어가면 갑자기 모든 것은 예측 불가능해지고 인과론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원자핵을 싸고도는 전자의 움직임은 전혀 비인과적이다.
방금 있었던 위치가 다음에 있는 위치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전자는 허깨비처럼 그냥 여기저기 나타난다. 특정 지점에 있는 것을 관찰하는 순간엔 거기에 있지만 다음엔 어디에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미립자의 세계로 들어가면 이건 완전히 요술의 세계다. 미립자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다. 물리적인 존재란 특정 순간의 위치와 속도이다. 그러나 미립자들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다. 물질의 기본 단위인 미립자들이 전혀 선행하는 원인 없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져서 소멸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는 이런 허깨비들이 쌓아올린 허상의 세계이다. 존재하지 않는 물질들인 미립자는 반드시 관찰자의 의식이 있어야만 존재한다. 그리고 관찰자의 의식이 그 미립자의 선행 원인으로 작용해서 미립자를 움직인다. 시공간이란, 비인과론적인 미시 세계에서 출발해서 인과론적인 거시 세계를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계도 비인과론적인 낱낱의 정보에서 출발해서 인과론적 조직된 정보인 영혼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비인과론적인 낱낱의 정보들이 인과론적인 통합 정보(Set of Spirits)로 넘어가는 그 문지방을 찾아야만 인연의 출발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인연의 첫 출발점이 바로 무명이다.
미립자의 존재가 양자론으로서 파악할 때 공(空)이라면, 무명도 역시 공(空)이라 할 만한 것이다. 공(空)인 미립자들이 모여 만든 물질계가 결국 도달할 최종적인 특이점의 성격이 무(無)인 것처럼 정신계의 최종점이 될 인연의 끝인 해탈 역시 무(無)다. 이 세계는 비인과론적인 세계인 무(無)에서 출발해서 인연의 세계를 거쳐서 결국 비인연의 세계인 공(空)으로 돌아가는 세계다.
물질의 시작이 공(空)인 것처럼 영혼의 시작도 공(空)이다. 따라서 우주 의식도 시작과 끝이 있고 윤회도 시작과 끝이 있다. 인연의 세계에서 벗어나 공(空)으로 돌아가면 윤회도 끝난다. 스스로 끝내지 못하면 억겁의 세월을 우주와 함께 유전하는 것이 의식이다.
유전의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생명은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누리지만, 괴로움의 순간은 더 길고 즐거움은 덧없으며, 끝없이 태어나는 업에 사로잡혀 있다. 지금 내가 태어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처럼 다음 생의 태어남도 거부할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성을 닦아서 인연을 보다 좋은 것으로 만들어 그 여행이 덜 피곤하고 덜 고통스러운 길이 되도록 예비하는 것뿐이다. 가능하다면 이 고통스러운 여행을 그만 두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 6
전생과 윤회-6
윤회하는 여러 생의 자기
나는 수없이 많은 생을 아무 의미도 모른 채 반복하고 있는데, 어제 태어나 죽었던 나와 오늘의 나는 과연 어떤 관계란 말인가? 얼굴도 모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와 나는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오늘 내가 죽은 다음에 누군지도 모르지만, 내일 다시 태어날 어떤 사람을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량겁을 통해 되풀이될 생에서 지금의 생이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일까? 수천만 번 다시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이 한 인생에 얼마나 가치를 두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자칫 우리로 하여금 염세적인 패배감을 갖게 한다. 억겁 전생을 통한 윤회의 모든 경험이 하나의 세트로 저장되어 있고, 이승의 삶은 그것에 약간의 내용만 더해질 뿐이라면, 이 한 삶의 가치가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 그리고 이 한 생을 아무리 잘 산다 해도 수십억 년의 생 가운데 하나의 포지션(Position)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으로도 자신의 전체적인 삶을 바꾸지는 못하리라는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성의 변화가 쉽지는 않지만 한 생의 가치 또한 그리 작은 것만은 아니다.
이 문제를 컴퓨터에 비유해 보자. 퍼스널 컴퓨터의 운영 프로그램인 MS-DOS①는 처음에 360KB②짜리 5.25인치 디스켓에 담긴 1.0버전(Version)③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1.44MB④짜리 3.5인치에 담긴 6.x버전이 나왔고, 곧이어 윈도(Windows)로 발전했다. 앞으로 50년 후에는 이 MS-DOS가 어떤 형태로 변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영혼도 이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업그레이드(Up-grade)⑤되는 소프트웨어다. 지금의 생이 바로 최신 버전이다. 그 이전의 프로그램들이 버전별로 계속 수집되어 있다 해도가장 중요한 것은 최신 버전이다. 마지막 버전은 사실 그 이전 버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내용과 방식이 달라 보여도 그것에는 초기부터의 축적된 노하우(Now-how)와 개발 사상이 담겨있다. 그래서 누가 지금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운영 체계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윈도-98이라고 대답하면 되는 것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MS-DOS 1.0부터의 전체 버전을 설명할 것이다. 원도와 도스가 전혀 달라 보이는 OS⑥라 하더라도, 윈도는 도스를 개발해오면서 축적된 기술과 사상의 바탕 없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또 다른 예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워드프로세스 프로그램인 ‘아래아 한글’을 보자. 지금 소프트웨어 가게에 가서 아래아 한글을 달라고 하면 ‘한글 97’을 줄 것이다. 그게 한글이니까. 그런데 제일 처음 출시되었던 아래아 한글 1.0은 아래아 한글이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 그것도 아래아 한글이다. 그러나 3.0이 나온 지금 1.0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의 나는 나의 최신 버전이다. 죽고 나면 다음 생에는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겠지만, 이전 버전(Old Version)인 나의 바탕 위에서 업그레이드되므로 지금의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의 내가 최신 버전이 아닌 중간 버전이라면 나의 흔적은 나의 자성에서 희미한 정도밖에는 찾을 것이다. 중간 버전이란, 예를 들자면 아래아 한글 2.13 따위를 말한다. 내용이 아주 약간만 바뀐 버전이지만 이런 것은 대표성을 갖지 못한다. 게다가 실패 버전도 있다. 개발 도중에 실패해서 발표되지도 못한 채 사장된 버전들이다. 예를 들어 2.0을 가지고 3.0을 만들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바로 4.0을 만들었다면 4.0이전의 대표 버전은 3.0이 아니라 2.0이 된다.
만약 태어나서 세살 때 홍역으로 죽은 경우라면, 이것은 실패 버전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전의 삶이 자기를 대표한다. 스무 살 정도에 죽으면 중간 버전이라 할 만하다. 이런 삶은 자기를 대표하기 힘들다. 이 생을 어영부영 보내면 지금의 자기는 자신을 대표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중간 버전이 되고 만다.
내가 나의 전생을 떠올리면서 알게 된 사실은 정식 버전일수록 확실하게 살아난다는 사실이다. 대표성을 가질 만큼 치열하게 살았던 삶들이 우선 떠오르고, 희미하게 살다 갔거나 어려서 죽은 삶들은 중간 버전 내지는 실패 버전으로 거의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다. 수천, 수만 번의 환생 중에서 유독 서너 개의 전생만 기억나는 이유도 그것이 나를 대표하는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삶들의 성격이 현재 나의 자성을 이루고 있음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 생을 가장 파워풀한 최신의 버전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럼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나는 과연 어떤 관계에 있는 존재일까? 얼굴도, 이름도,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는 기억 저편의 어떤 사람을 자기라고 받아들이기엔 우리의 자아가 심히 불편하다. 기억나지 않는 두 살 때의 자기조차 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어머니 뱃속에 있던, 인간이지도 않았던 자기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의 자기에 대해 강렬한 애착을 가진다. 만약 자기가 여든 먹은 노인이 되었을 때의 사진을 누군가가 보여준다면 그 사진 속의 노인이 자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게 되어 있다. 물론 여든까지 산다면 말이다.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태내에 있을 때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두었다고 하자. 그 핏덩어리를 보여주면서 ‘이게 당신이오’ 하면 그것 역시 자신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매 순간 그는 그때의 모습을 자기라고 받아들이면서 자기에게 한없는 집착을 보인다. 몇십 년 전 사진으로 미리 보여주었을 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노인이 막상 자기가 되고 나면 그때는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세상 무엇보다도 그 모습의 자기에 집착한다. 그 모습의 어떤 사람만이 자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자기일까? 전생의 어떤 사람이나 어렸을 때의 자기나 이미 지금의 자기와는 너무도 다른 존재이다. 다음 생에 환생했을 때의 어떤 사람이나 여든 노인이 된 자기나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지금의 자기와는 전연 다른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생에서 시시각각 변해버린 매순간의 어떤 사람은 자기라고 생각하면서 전생과 내생의 어떤 사람은 한사코 자기라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들 전부가 매순간 변해 가는 자기이다. 이 말은 자기라는 고정된 정체성(Identity)이 없다는 말이다. 계속 변화하는 어떤 순간의 어떤 존재이지, 그곳에 불변하는 존재로서의 자기는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일생을 한 시간짜리 테이프에 담아 한번 돌려보라. 화면에는 제일 먼저 기저귀를 차고 우유병을 빠는 어린이가 보이고, 가방을 메고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보이다가, 그 다음에는 여드름이 숭숭 난 학생이 보이고, 어느 틈에 한사람의 어른이 보일 것이다. 잠시 뒤에는 어린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부모가 보일 것이다. 그 바로 다음에는 주름지고 등이 굽은 노인이 힘없이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곧 슬퍼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인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어떤 물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테이프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흘러가는 그 화면의 주인공 중에서 과연 누가 자기인가? 아무도 자기가 아닌가? 아니면 그 모두가 자기인가? 억겁 전생의 모든 나와 현생의 나와의 관계를 짐작해 보라. 불행한 노년을 보내는 한 노인이 탑골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자신의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고 있다. 내가 어릴 때 조금만 더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아냐 결혼했을 무렵에도 늦지는 않았어. 그때라도 정신차리고 열심히 일했었어야 했어. 술과 여자에 그렇게 빠질 일이 아니었어. 내가 사십 고개에 들었을 때, 그 때도 늦지 않았어. 아직도 기회가 있었어.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늦어버렸어. 아! 왜 이렇게 살았을까
… 바보처럼.
그러나 노인은 아직도 늦지 않았다. 늙고 추해진 그 옷을 갈아입을 때가 가까이 온 것뿐이다.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 그 삶을 위해 깨끗하고 정정한 원을 세우는 데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온 삶을 후회하면서도 새로운 삶에 대한 준비를 하는 데는 아무 생각이 없다. 이생에서의 모든 재산과 명예와 권력은 모두 자기 것이 아니다. 자기 것은 오직 자기가 쌓은 업뿐이다. 그것만이 다음 생을 위한 자기의 밑천이다. 빈손으로 긴 여행을 떠난다면 고달프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 여행을 위해 넉넉한 노자를 준비해야만 마음 놓고 먼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이웃에게 나누어 준 모든 것이 여행의 길마다, 모퉁이마다, 당신이 카드만 넣으면 현금이 나오는 현금인출기로 늘어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업만을 쌓은 사람은 여행의 길목마다 빚쟁이를 만날 것이고, 강도를 만날 것이다. 추운 겨울날 한 겹만 두른 속옷마저도 냉혹한 강도가 벗겨갈 것이다. 이생이 그리도 고달프거던 지난날 노자를 준비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기억 저편의 나여, 나를 위해 왜 아무 것도 준비해 두지 않았는가? 지금 내가 이토록 괴로울 줄을 왜 몰랐단 말인가?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 7
전생과 윤회-7
윤회의 주체
육도 윤회를 배워서 알고 있는 불자들 중에도 자아의 존재만큼은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몸을 바꾸고 태어나는 장소를 돌면서 육도를 윤회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내가 윤회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 윤회하는 ‘나’라는 실체는 존재하는 것이다. 매시간 변화하는 존재가 아닌 불변의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 게 아닐까? 즉, 진아(眞我, 아트만)를 고집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진아가 망상이며, 육도를 윤회하는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나’란 순간순간 바뀌는 존재이며, 어떤 불변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인연에 의해 잠시잠시 모습이 드러나는 허상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생명인 상태-그것도 인간으로서-에서만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고 생명은 말나식의 집착을 뿌리로 삼고 있어서, 내가 나를 인식할 수 있는 동안에는 자아에의 강한 애착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아에 대한 애착이 만든 환상이지 거기에는 애착을 가진 ‘자기’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있지도 않은 내가, 있지도 않은 나라는 존재에 애착과 집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앞에서 모든 개체 의식은 자기를 겹겹이 둘러싼 우주 전체와 하나임을 설명했다. 따라서 나의 진아가 허상이라면 우주의 모든 정신계가 다 허상이요, 세계 자체가 전부 허상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주 물리학은 이 우주에 최종적으로 남게 될 무엇을, 빅뱅 이전의 특이점으로 다시 돌아간 그 상태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은 우주 전체를 삼킨 거대한 블랙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시공간은 최종적으로 중력만을 남긴다. 시간도 공간도 모두가 빨려 들어가고, 하나의 거대한 중력의 심연만이 입을 벌리고 있는 시공간의 무덤이 바로 블랙홀이다.
물질계의 모든 것이 중력으로 변해버린 특이점에서 정신계의 모든 것은 하나의 통합되고 응축된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정신계의 본질은 정보이고, 모든 존재와의 관계이다. 정보들이 모든 존재의 자성인 영혼이며, 관계들은 바로 인연이라 부르는 것이다.
정신계의 본질은 자성과 인연이다. 중력이 모든 에너지를 한 점으로 압축하는 것처럼, 자성과 인연을 하나로 통합하는 정신계의 지배적인 힘이 바로 업력이다. 시공간의 종말은 중력의 구멍이요, 정신계의 마지막은 업의 심연이다. 그래서 최후에 이 우주에 남는 것은 아마도 중력과 업력이 될 것이다.
우주의 특이점이란, 삼켜진 모든 시공간과, 빨아들인 업의 압축물이다. 중력과 업력만이 남은 그 곳을 우리는 태극(太極)이라고도 하고, 불교에서는 진여(眞如)라고도 말한다. 진여는 범어인 Tathata의 의역(意譯)으로, 우주만유의 본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진여는 무명의 굴레를 벗지 못한 중생이든 우주 최고의 법신(法身)을 이룬 부처님이든 모두 똑 같아서 불생불멸(不生不滅, 나고 죽는 것이 없음)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 늘고 줄지 않음),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럽고 깨끗함이 없음)한 묘법(妙法)으로서 모든 존재가 다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며 여여(如如) 또는 여실(如實)이라 하기도 한다. 만유본연(萬有本然)의 자태이며, 거짓 없는 상주불변(常住不變)하고 평등보편(平等普遍)한 세계의 진성(眞性)이다.
원래 진여는 만고불변의 진리라 하여, 인연에 의해 세상이 나타나는 연기법의 이치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이것이 초기 인도의 소승 불교가 내세우던 연기진여(緣起眞如)이다
. 그러나 대승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의 본성은 무아의 이(理)로 돌아감으로써 차별의 현상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하나로 회귀하는 것을 진여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연기진여를 주장하는 초기 인도 불교의 사료인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이 아닌 불지경론(佛地經論)의 진여에 대해 설명한 것을 보면, 진여란 모든 현상의 본성이며 원래 일미(一味)인 본체가 여러 가지 상(相)으로 구별되어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 본체는 불일불이(不一不異, 하나가 아니면서 서로 다르지 않음)이며, 사고로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으며,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모든 거짓과 그릇된 것에서 떠나 있다.
우주의 본래 진면목을 뜻하는 진여는 불교에서 손감(損減)이 없다는 의미일 때의 실유(實有), 또는 증익(增益)이 없다는 뜻의 공무(空無), 이것만이 진실이라는 뜻으로 실제(實際) 등 여러 가지 가명(假名)으로 불린다. 반야경(般若經)의 법계(法界), 법성(法性), 평등성(平等性) 등도 진여를 가리키는 말들이다. 진여는 그 이름만큼이나 설명도 아주 다양하지만 어느 것도 진짜 이름이 아니며 어느 것도 정확한 오직 하나의 설명이라 할 수 없다고 여겨져 왔다. 우주의 본체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2천5백년이나 지난 오늘날의 우주물리학자들조차 우주의 통합된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물리학자들이 대통일 이론이라 부르는 특이점의 본성에 대해서는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 많다.
우주의 본성에 대한 이론을 가장 발달시키고 있는 것이 천태종인데, 천태종의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설명한 이른바 삼중설(三重設)이다.
제1중(第一重)은 인연에 의해 생겨난 현상계의 제법이 인연에 의해 거짓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체가 없는 현상계의 본질을 ‘공리(空理)인 실상(實相)’이라고 말한다.
제2중(第二重)은 실체와 가상(假象)의 모든 것을 제법(諸法)이라 하고, 이 실체와 가상을 초월한 절대 긍정의 ‘중도의 이치’를 세워서 이것을 실상(實相)이라 말하고 있다.
이 제1중과 제2중의 설을 대승 불교의 설이라 하는데, 이에 반해서 ‘제3중(諸三重)’은 현상적 세계의 일체를 즉공(卽空), 즉가(卽假), 즉중(卽中)의 제법(諸法)이라고 보고, 이 제법을 바로 실상(實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제3중의 설을 대승원교(大乘圓敎)의 설이라고 한다.
우주의 진면목인 진여와 제법의 실상에 대해선 여러 가지 해석이 있긴 하지만 이를 종합해 보면 불교는 이 현상계를 공리(空理)와 가상(假像)의 거짓으로 보고 있다. 불교의 현상세계관(現像世界觀)은 바로 진아(眞我)를 부정하는 무아(無我)의 깨달음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말나식이 일으킨 망상이며 거짓된 현상계의 신기루와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수십억 겁의 세월 동안 인연의 과(果)를 쌓아 올려서 이룬 자기의 자성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윤회하는 순간순간 몸을 받아 자기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지만 실제로는 그 어느 순간의 어떤 모습의 존재도 다 진실된 의미의 ‘자기’는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현상계의 존재인 ‘나’는 결코 ‘진여’가 아닌 가상(假像)일 뿐이다.
‘자기’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본래 공(空)에서 난 것임을 바로 보고, 이 허망한 ‘자기’가 나타나게끔 작용한 인연을 소멸시킨 여래(如來)의 법신(法身)만을 진여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허망하고 거짓된 ‘자기’를 벗어버리고 진여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있지도 않은 진아에의 집착 망상에서 깨어나 무아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
육도에 윤회하는 실체인 ‘진아(眞我)’란 없다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 8
전생과 윤회-8
전생과 윤회의 증거
지금까지 전생과 윤회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문들에 대해서 설명해왔는데, 그렇다면 과연 전생과 윤회에 대한 증거가 있는지 알아보자. 불교의 대표적인 교리 체계인 윤회론을 뒷받침하고 있는 근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비종교적 초월주의의 주장들이 겉으로는 입증주의(立證主義)를 표방하고 나름의 방법으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를 보여주려 하지만, 엄격한 실험 환경을 견뎌낼 정도의 객관적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것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윤회에 대해서만큼은 우리는 상당히 신빙성 있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고대로부터 동양의 선인(仙人)이나 도인(道人), 그리고 부처를 위시해서 여러 불교의 고승들이 심안(心眼)으로 볼 수 있었던 전생은 무시하기로 한다. 우리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보편적인 증거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천국을 보고 왔다’고 주장한다고 치자. 그 사람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가 보고 온 것이 천국인지 아닌지 확인하거나 검증할 방법이 없다.
미국의 한 목사가 쓴 “내가 보고 온 천국”이란 책은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의 공상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유치원생들에게 천국을 상상하여 글짓기를 시킨다고 해도 그 책이 설명하고 있는 천국보다는 더 그럴듯하고 멋진 곳으로 그려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떤 사람이 ‘나의 전생을 기억한다’고 말할 때 이런 주장은 확인이 가능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내가 환단(桓檀) 시대에 환인(桓因)을 모시고 살았던 선녀였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확인이 불가능할 것이다. 내가 삼청궁(三靑宮)①에서의 생활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아무리 그럴듯하게 해도 “내가 보고 온 천국”과 같이 그것을 뒷받침해 줄 아무런 증거도 증인도 없기 때문이다. 진짠지 거짓인지는 나만이 알고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서 삼청궁이 있었던 천계(天界)②의 유적지를 찾아내고 어느 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한 다음, 고고학자들이 탐사를 해본 결과 나의 말과 실제의 유적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면, 혹시 그곳에서 발견한 글이나 그림의 내용이 나의 기억과 일치한다면, 내가 전생에 삼청궁의 선녀였음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언젠가 통일이 된 후에 백두산과 바이칼 호수의 주변을 여행하면 전생의 기억이 당시의 유적들이 있는 곳을 기억나게 해주리라 생각한다. 그 곳의 산과 들, 그리고 물이 나의 기억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 곳은 가보면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나의 고향처럼 눈에 익은 풍경들이 펼쳐지리라 믿는다. 내가 삼청궁 궁녀였음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이것 외에 다른 것이 또 있겠는가?
따라서 전생에 대한 증거는 많은 사람들의 전생 기억 중에서 증거와 정황이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사례들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례들은 아주 많이 수집되어 있고, 그 중에는 도저히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는 것들이 상당하다.
에드가 케이시가 죽은 후인 1948년에 전생조사위원회가 미국에서 만들어졌으며, 이 위원회는 미국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단체로써 아직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미국의 외교 기관과 언론 기관 그리고 독자적인 정보 수집을 통해서 전생의 기억을 갖고 태어난 사람의 얘기가 들리면, 즉시 조사단을 파견하여 그 기억의 신빙성 여부를 파악한다. 그렇게 해서 부정할 수 없는 전생 기억의 사례들을 수집하면 참고 사진과 여러 사람의 증언을 첨부해서 파일로 보관해 둔다.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수집한 전생 기억의 사례는 약 3천 건에 달한다고 한다.
가장 확인하기 쉬운 전생 사례는 과거에 그 사람과 함께 생활했던 주위 사람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는 경우다. 예를 들어 60년대에 뉴욕에 살았던 어떤 사람이 죽어서 바로 시카고에 태어났다면, 그와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생존해 있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전생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가 쉽다. 일곱 살밖에 안된 아이가 그 전에 자기가 살았던 시카고를 기억해냈고 전생의 아내와 자식들을 알아보았다. 또 아내와 둘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고, 자기가 늘 가던 카페의 바텐더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게다가 술집에 남아 있던 약간의 외상술값까지 기억했다. 과연 이 사람의 환생을 부정할 수 있을까?
전생조사위원회는 전생의 사례가 진실인지 허위인지를 사려 깊고 용의주도하게 가려낸다. 나름대로 독특한 방법이 있어서 거짓으로 꾸며낸 전생은 이 위원회의 조사관 앞에선 단 몇 마디의 대화만으로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위원회가 진짜로 확인한 사례가 전 세계에 걸쳐 무려 3천 건에 달한다는 이야기다.
미국 버지니아대학의 교수인 이안 스티븐슨(Ian Stevenson)도 전생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유명한데 그는 개인적으로 세계 각국에 연락 기구를 갖고 사람을 보내어 확인한 천 건이 넘는 사례 중 부정하기 어려운 20건을 추려 “윤회를 암시하는 20가지 사례”란 책을 펴냈다.
확인이 불가능한 사례들은 그보다 훨씬 많다. 물론 그 이전에 에드가 케이시가 신비한 능력으로 다른 사람의 전생을 관조하고 기록한 ‘에드가 파일’에 대해선 접어 두고서라도 말이다.
에드가 케이시의 전생 관조에 대해서는 당시의 세계적인 의학자, 심리학자, 과학자들이 의구심을 가지고 연구한 바 있다. 학계의 권위자들이 내린 공통적인 결론은 에드가 케이시의 전생 관찰 내용이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에드가 파일을 통해서도 전생에 대한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지구가 아닌 다른 어떤 생명계를 추측할 수가 있게 되었다. 지구가 아닌 어떤 곳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가지 기술이나 문명의 서술이 놀랄 만큼 정확하다는 것을 오늘날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에드가 파일이나 전생조사위원회의 조사 사례집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몇몇 유명한 사건들도 있다.
현재 티벳의 망명 지도자인 달라이라마는 14대인데, 그는 어릴 때 전전대(前前代)인 12대 달라이라마의 생전 기억들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어서 세인을 놀라게 했다. 그의 스승이었던 ‘링 린포체’ 역시 열반할 당시 곧바로 자기가 환생할 것임을 예언했고, 이 링 린포체의 환생이 현 달라이라마에게 영적인 메시지로서 전달되었다. 달라이라마에 의해
소집된 조사단은 마침내 ‘텐진 초광’이란 어린이를 찾아내었는데, 링 린포체가 아니면 알 수 없는 1백8가지의 질문에 대해 단 한 가지도 틀리지 않고 통과했다. 게다가 그는 생전의 제자들인 조사단이 처음 찾아갔을 때 첫눈에 모두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하여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의젓함과 위엄으로 제자들을 다시 거두었다고 한다.
링 린포체의 환생인 텐진 초광 어린이는 몇 해 전에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바 있는데, 통도사는 그를 보러온 수십만의 불자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필자 역시 그때 통도사에서 그가 나누어준 실 한 오라기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이런 달라이라마의 확인 과정은 너무나 공개적이고 확실한 검증을 거치기 때문에 의혹이나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전생을 확인할 수 있는 논리적인 방법은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태어나거나 혹은 자신의 전생을 알게 된 사람의 주장을 확인해보는 것이다. 사람은 그 의식의 단계가 높을수록 윤회의 주기가 길어서 바로 이전의 생인데도 2백 년 전의 일인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죽은 지 한 달 정도의 시차를 두고 다시 환생하는 경우도 있다.
티벳의 라마교는 사람이 죽어서 다시 환생하는 데까지 길어도 49일을 넘기지 않는다고 믿는다. 불교에서 죽은 사람의 영을 위로하는 49재의 기간과 같다. 아마 라마교에서는 전생에 존재했던 의식의 촛불이 완전히 꺼지고 나면 곧바로 환생한다고 믿는 듯싶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전생 기억의 사례나 필자 자신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지구상의 시간으로 1~2백 년의 간격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가장 가까운 바로 앞의 전생이 그 어떤 기억보다 가장 생생할 것이라고 가정해본다면, 어떤 사람은 그가 기억하는 가장 최근의 전생이 몇백 년 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몇백 년 전 인물을 기억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사실성은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전생 사례의 보고들이 말해주는 한 가지 사실은, 죽은 시기와 환생까지의 기간이 짧은 사람일수록 그 기억이 또렷하다는 것이다. 간격(Interval)이 긴 경우에 전생의 기억은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처럼 전체적인 내용으로만 떠올라서 등장하는 엑스트라의 얼굴이나 사건들의 구체적인 장면은 희미할 때가 많다. 이런 전생의 기억들은 당사자에게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물론 권위 있는 조사기관에 의한 검증된 사례들이 가장 확실하겠지만, 그것들 말고도 유추에 의해 증거로 삼을 만한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전생 윤회의 증거로 특출난 천재들을 꼽는데 주저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모차르트나 이창호 같은 천재들이 바로 전생 윤회의 산 증거다. 분명히 교육의 결과가 아닌, 타고난 재능임에 틀림없는 그들의 능력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정말로 알 수 없는 수수께끼다. 작곡 이론을 배우기도 전인 일곱 살의 나이에 모차르트가 작곡했던 교향곡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차르트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의 전생에 음악가였던 누군가가 만든 음악이다.
서너 살짜리가 외국어를 자우자재로 말하는 모습을 우리는 흔히 본다. 그들의 능력이 나중에 그들을 탁월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전생으로부터 특별한 기억이 그대로 넘어왔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다섯 살에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연주하는 천재적 재능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능이라고 보기에는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구석이 많다. 어떤 사람의 가계(家系)를 조사했을 때 선대(先代)에선 찾아볼 수 없는 재능이 나타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물론 가계의 유전에 의한 천재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음악가의 집안에서 음악가가 많이 나오는 것처럼.
하지만 부모나 선대에선 전혀 음악에 관련된 적이 없는데도 그런 집안에서 천재적인 피아니스트가 나오기도 한다. 과연 이들의 재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누가 준 것일까? 왜 주었을까?
천재가 아닌 평범한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전생 윤회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늘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들은 다 경험했을 것이다. 아이가 자라서 말을 배울 때, 전혀 사용하거나 가르쳐준 적이 없는 단어나 말을 어느 날 문득 사용하는 것을 말이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 보라. 특히 언어 습득에 있어 놀랄 만한 비약을 거듭한다. 교육받은 내용을 뛰어넘어 상당한 수준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전생의 기억들이 훈습되어 그 정보들이 교육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한 아이의 자성이 태어나면서 결정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한 인간의 성격으로 대변되는 자성은 그의 전(全) 전생을 통해 결정된 채로 태어난다. 후천적인 환경이나 교육
으로 첨가되는 것은 그에 비하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사소하다.
마지막으로 가장 확실한 전생의 증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직접 자신의 눈으로 전생을 보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 9
전생과 윤회-9
전생의 확인
나의 전생을 알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의 전생과 내생을 본인이 확인할 방법이 있는가?
방법은 있다. 단지 쉽지 않을 뿐이다. 물론 이런 문제를 흥미거리일 뿐인 소설로 꾸며서 책을 내고, 남의 전생을 봐주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한테 가서 자신의 전생을 알아보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에드가 케이시는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전생에 뱀이었느니 여우였느니, 전생에 업이 있어서 뭔가를 풀어야 되느니,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기꾼이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전생을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금의 당신을 보는 것이다. 당신은 뱀이 환생한 것도 아니고, 토끼가 둔갑한 것도 아니다. 수십억 년 동안 진화해 온 당신의 자성을 대표하는 총결산이 바로 지금의 당신이다. 당신을 보면 당신의 자성을 알 수 있다. 전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는 지금의 삶을 보면 된다.
부모 복이 박하다면 전생에 효도하지 않았음이요, 형제 복이 박하다면 전생에 화목하지 않았음이고, 사람들을 잘못 만나 화를 당하거나 손해를 자주 본다면 남들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음이다. 어려운 고비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의 손길이 있거든 바로 전생에 많이 베풀었음이다. 이 생의 삶이 곤궁하다면 전생에 남을 곤궁하게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생의 삶이 편하다면 그만큼 전생의 공덕을 까먹고 있는 것이다. 까먹은 것보다 더 많이 공덕을 쌓지 않으면 내일은 오늘보다 고달프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올바른 원을 세우고 남을 위해 기도하고 남에게 해될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매시 매초에 당신이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하는 그 순간마다 우주의 그물이 다시 짜이고 있음을 생각하라. 지금의 자기를 보면 전생을 알 수 있다는 나의 설명에 적이 실망했을 것이다. 기대했던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으리라.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설명을 해보도록 하자.
정신과에서 치료의 방법으로 가끔씩 사용하는 것 중에 최면술이 있다. 프로이트가 환자의 치료에 매일 사용했던 방법이다. 내가 보기엔 프로이트는 일종의 최면술사였다.
아무튼 피시술자에게 최면을 건 다음 옛날로 기억을 되돌리면 아주 오래 전의 일도 떠오르게 된다. 어린 시절로 되돌리면 갓난아이의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기억을 못한다 해도 의식의 창고 속에는 낱낱이 모든 것이 보관되어 있다는 얘기다. 없는 것이 나오지는 못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최면술의 원리를 이용해서 자신의 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볼 수 있다. 일종의 자기 최면법이다.
최면술사에 의한 외부(外部) 최면은 어머니 태내에서 나왔던 그 시간까지가 한계이다. 그 이전으로 피최면자를 되돌리지는 못한다. 만약에 되돌린다면 그 사람의 의식은 전생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어머니 뱃속에서 반복 재현했던 수십억 년의 진화 과정이라는 해독 불가능한 의식의 세계로 떨어지고 만다. 계속 거슬러 올라가서 단세포 생물의 시기까지 가버리겠지만,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기 어렵다. 최면은 탄생의 시점에서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최면(自己催眠)은 이 단계를 넘어 전생의 문 안으로 자신을 데려갈 수 있다. 말로는 최면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 수행의 과정은 불가와 선가에서 행하는 수행들과 같다. 개념상 최면에 가깝기 때문에 굳이 최면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을 뿐이다.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이나 그 과정은 간단히 설명할 수 없으며, 그런 수행의 실제적인 방법을 설명하는 것은 이 책의 논지도 아니다. 그리고 불교나 도교 그리고 라마교나 요가 등 여러 종교나 문파가 택하고 있는 방법이 모두 다르다. 우리 민족 고유의 수행법인 단학(檀學)①이나 기공법(氣功法)②에 의해서도 전생의 문을 열 수 있다.
그러나 중간 중간의 체험은 언어로 표현해내기가 어렵고, 또 여기서 설명하기 시작하면 꽤 장황해질 것이므로 일단 스스로의 수행으로 자신의 전생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만 얘기하고자 한다. 좀 더 상세한 내용은 뒷부분의 ‘마음과 기’편을 참조하면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참고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린다면 영국의 알렉산더 캐논 박사 같은 탁월한 능력을 가진 최면 시술자는 외부 최면으로도 피시술자의 기억을 탄생이전으로 되돌려 전생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대학자였던 캐논 박사 사후에는 전생을 확인할 정도의 최면술을 시술할 수 있는 의사는 나오지 않고 있다. 캐논 박사의 최면술이 전승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단순한 최면술만이 아닌 어떤 영적인 능력을 겸비하였으므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부처님이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여러 신비한 능력을 설명하신 것 중에 자신의 전생을 보아서 알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이 있다. 캐논 박사를 만나지 못한다면 자신의 수행으로 그 능력을 얻어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하겠으나 자기의 전생을 확인하는 가장 손쉬운 길은 바로 지금의 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欲知前生事(전생의 있은 일을 알고자 하느냐?)
今生受者是(금생에 받는 것이 그것이다.)
欲知來生事(다음 생에 있을 일을 알고자 하느냐?)
今生作者是(금생에 짓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법화경(法華經)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 10
전생과 윤회-10
원과 업
사람은 매일 매시간 쉬지 않고 원을 세운다. 오늘 저녁에 예쁜 아가씨와 멋진 데이트나 했으면, 내일 시험에 좋은 성적을 받았으면, 지난주에 산 복권이 5등이라도 당첨되었으면, 지금 작성한 서류가 상사한테 결재를 받았으면, 누가 술을 사줬으면, 피곤한데 사우나에 가서 잠이나 실컷 잤으면…. 이 모든 것이 다 원이고 소망이다. 그리고 원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은 노력한다. 이 노력은 개인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의식과 연결된 말나식, 아뢰야식의 작용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 프로이트식의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개인의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은 오랜 기간의 진화를 통해 우주 의식(집단령)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의 뇌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두뇌라는 하드웨어 속에서 이러한 무의식을 찾는 것은 비행기가 날아오르는 힘을 비행기의 날개에서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행기의 날개를 아무리 분해해도, 그리고 나사와 볼트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봐도 거기에 비행기를 날아오르게 하는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은 아뢰야식이 속해있는 집단령과의 연결을 통해서 모든 우주에 영향을 미치거나 영향을 받으면서 이루어질 때도 있고, 또는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따라서 원이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영계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나 모사재인성사재천(謀事在人成事在天)이란 이러한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인간의 노력보다는 하늘의 뜻에 의한 결과가 아닐까 하고 생각되는 일들이 아주 많다. 하나의 작은 우연이 세계사를 통째로 바꾸어 놓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한 개인의 사소한 사건이 전 세계 인류의 운명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가?>br> 개인적인 원과 집단적 원이 개인 차원의 업과 집단 차원의 업을 만들어서 전체 우주의 운명을 결정해 간다. 모든 영혼의 원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업을 만들어낸다. 업은 인연으로서 다시 그 영혼에 작용한다. 의식의 세계에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물리적인 법칙처럼 존재한다. 영혼의 세계에서 작용은 원이고 반작용은 업이다. 원이 서면 반드시 업이 따른다.
그런데 업을 만들지 않는 원이 있다. 그것이 바로 ‘업을 짓지 않겠다는 원’이다. 이 하나의 원만큼은 업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업을 짓지 않겠노라는 원이 바로 ‘해탈심(解脫心)’이다.
업을 짓지 않겠다는 원을 세우려면 반드시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에 기초한 모든 원은 작용이므로 반작용을 부른다. 따라서 자기를 버려야만 반작용이 없어진다
. 자기를 버리겠다는 원은 이 우주에 대한 자기의 모든 작용을 소멸시킴으로써 자기에게 미쳐오는 반작용을 소멸시키겠다는 말이다. 생각해 보라. 작용이 없는데 어찌 반작용이 있겠는가?
업에서 벗어나고자 하면 업의 원인인 자기를 없애면 된다. 자기를 없애려면 자기의 모든 원을 버려야 한다. 모든 원을 버리기가 쉽지 않으므로 모든 원을 일단 하나의 원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좀 더 손쉬운 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 원이 바로 ‘모든 사물에 내가 도움이 되리라. 나는 모든 사물에 대하여 한없는 이타행(利他行)과 자비심(慈悲心)으로 시종하리라’는 원이다. 나의 성불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성불을 기도하는 원이다. 이타행과 자비심도 원이기 때문에 업이라는 반작용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선업(善業)이다. 그원으로 하여 고통받는 상대가 없으므로 그 업은 공덕(功德)으로 쌓인다.
수만 가지의 원을 버리기보다는 하나의 원을 버리기가 쉽다. 수십만, 수백만 가지의 모든 이기적인 원이라는 쓰레기를 자비(慈悲)와 이타(利他)라는 이름의 쓰레기 수거용 봉투에 담으면 그때는 하나의 봉투가 되므로 버리기가 쉽다. 이 봉투까지 버렸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되는 것이다. 해탈이란 그런 것이다.
악취 나는 수많은 원을 하나하나 모아서 쓰레기 봉투에 담아 가는 청소의 과정이 바로 사성제(四聖啼)요 팔정도(八正道)다. 자신을 버리기는 어렵다. 어찌 쉽겠는가. 대신 자신의 수많은 원(Ego)을 다른 하나로 대체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것은 바로 부처에 대한 귀의(歸依)의 원으로 모든 이기적인 원을 대신하는 것이요, 자신이 부처님 앞에서 맹세하는 성불의 원으로 모든 집착을 대신하는 것이다. 자신에 기초한 모든 이기심을 버린 이타의 염원, 이것이 불자들의 원이다. 반면에 기독교나 무속, 그리고 여타의 종교들은 대부분 그 기도와 소망이 자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기적인 원이다. 구원의 원도 이기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모든 기도는 또 하나의 업을 만들뿐이다.
주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서 그의 왼편에 앉기를 희망하고, 상 받을 것을 기대하며, 영생과 죄의 사함을 갈구하고, 구원을 얻어 지옥의 형벌을 피하고자 기도하는 모든 것은 이기적인 원이요 소망이다. 불자들은 그런 원을 세우지 않는다. 사바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성불하고 해탈하기를 기원한다.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대신하기 위해서 자신이 지옥의 불에 들어가기를 부처님께 맹세하는 원이다. 나를 바쳐 남을 구제하고자 하는 원이다. 남이 아닌 나, 네가 아닌 내가 구원받고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기도가 아니다. 만약에 어떤 기독교인이 이와 같은 간절한 소망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이 절이 아니고 교회라 하더라도 그의 공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기적인 원이라고 하는 쓰레기들을 자비의 원이라는 하나의 봉투에 모두 담아서 버리고 가자. 그러면 어디에, 어떻게 버릴 것인가? 그 쓰레기 전부가 자기다. 그렇다면 쓰레기가 스스로를 버릴 수 있겠는가? 목사님이나 스님한테 그 봉투를 안겨주면서 ‘이것 좀 치워주세요’라고 할 것인가? 목사님이나 스님은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이 아니다. 지성으로 쓰레기를 담는 사람에겐 그것을 버릴 곳이 보이는 법이다.
기독교는 죄에 대한 심판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 있음을 경고한다. 심판하는 자와 심판 받는 자로 나뉜다. 하지만 한 인간의 생에서 착한 일과 악한 일의 무게를 달아본다면 과연 그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까? 하나의 죄가 1만 가지 선행을 무위로 만들어버리는가? 아니면 1만 가지 죄를 한 번의 참회로 면제받을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세계에는 선악도 없고 죄도 없다. 따라서 남에 의한 심판도 없으며 처벌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물리적인 법칙처럼 정확하게 나타나는, 작용에 대한 반작용만이 있을 뿐이다. 창조주나 부처님이 물리적 현상에 간섭하지 않는 것처럼 원과 업의 인과응보에도 관여치 않는다. 염라대왕, 십이지옥, 저승사자, 귀두나찰 따위들은 모두 부처님께서 유치원생(중생)들에게 들려주신 동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계의 원리와 영계의 실상에 비추어볼 때, 육신과 분리된 영혼들이 생명체일 때 저지른 행위에 대해 천국의 보상이나 지옥의 형벌을 받는다는 생각은 넌센스로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최소한 불교의 교리상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개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이란 윤회하는 생명으로서 생명계에서 받게 되는 공덕과 업보를 말하는 것이지 영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런 영계의 모습들은 유식설과도 배치되며, 인연법과도 모순을 이룬다. 공리(空理)와 가상(假像)으로 보는 제법의 실상과도 어긋난다.
우리가 선이다 혹은 악이다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죄와 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구별심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지 이 세계 자체에는 죄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기준이 없다.
선악을 구별하는 초월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인과응보의 법칙만 존재하고 있다. 이 업보의 원리는 제삼자의 판단이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자기 이외의 타에 고통이 되느냐 아니냐에 따른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일 따름이다. 타에게 고통을 주는 자신의 모든 원과 행위는 악업이 되고, 타에게 이로움과 도움과 기쁨을 주는 원과 행위는 선업이 된다. 고통은 고통으로, 기쁨은 기쁨으로 되돌아온다.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 11
전생과 윤회-11
인연과 자성
생명계에 나타나고 영계로 돌아가는 반복 윤회에 있어서, 환생의 자리와 시기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생각해 보자. 육도의 윤회는 모든 생명이 지은 자신의 업에 따라 정해진다. 삼업(三業)은 모두 자기의 자성을 이루는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전해지므로 생명계의 인연이란 바로 아뢰야식 간에 기억하고 있는 서로의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보는 호오(好惡)와 친소(親疎)에 관계없이 그 맺어진 관계의 강도에 따라서 결합의 정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좋은 인연이던 나쁜 인연이던 정보의 결합은 그 성격을 따지지 않으며 오직 관계의 강약이 있을 뿐이다. 이 인연을 담고 있는 정보의 총체적인 성격이 바로 자성이다. 따라서 자성은 인연을 결정짓고, 하나의 자성을 둘러싼 인연의 그물망은 바로 자성을 구속하고 그것의 진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럼 인연과 자성의 관계를 알아보자.
인연은 이 세계의 원리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이며, 정신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법칙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인연법을 제법의 실상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불교의 교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나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말해지는 직관적이고 실천적인 경험의 세계를 중시한다. 동시에 이 세계와 우주의 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과학적인 깊이를 갖고 있다. 전자(前者)를 실상론(實相論) 또는 본체론(本體論)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연기론 (緣起論) 또는 인연론(因緣論)이라고 한다.
인연론은 불교가 이 세상의 만법과 실상이 생기고 변화하고 멸하는 일체의 현상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다. 공리(空理)와 가상(假像)의 세계가 눈앞에 드러나 있는 이유와, 진아(眞我)가 없는 내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인식하는 존재로서 태어나 있는 이유를 인연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인연(因緣)은 범어의 Hetu-pratyaya를 의역한 말이다. 인연은 불교의 용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능생조성(能生助成)’으로 풀이되어 있다. ‘나게 만들고, 이루어짐을 돕는 것’이라는 뜻이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모든 것의 원인과 결과를 인과로 말할 때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요인이 바로 연(緣)이다. 예를 들어 나무의 씨앗은 인(因)이 되고, 생겨 있는 그 나무는 과(果)가 된다. 이때 종자가 싹이 트도록 도와주는 햇빛과 비와 흙 같은 간접적인 원인들이 바로 연(緣)이 되는 것이다. 세상만물은 이러한 인과 연이 있음으로 해서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설명되는 것이다.
인연법의 철학적인 해석은 아주 다양하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구사론(俱舍論)의 업감연기(業感緣起), 유식론(唯識論)에서 설명하는 뇌야연기(賴耶緣起), 기신론(起信論)의 해석인 진여연기(眞如緣起), 화엄경(華嚴經)의 설(設)인 법계연기(法界緣起) 등이다.
업감연기는 업이 선업과 악업의 결과를 감(感)하여-여기서 ‘감’이란 말의 의미를 적절히 설명하는 표현이 마땅치 않은데 구사론에서는 업의 소감(所感)이라는 것을 도입하여 업(業)을 하나의 ‘무의식적인 판단자’로서 인연의 본질로 보고 있다-선악의 업력에 의해서 결과를 감(感)하여 인과순환(因果循環)이 무진(無盡)하게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이 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업력에 대하여는 다음 장의 ‘중력과 업력’에서 다시 설명될 것이다).
뇌야연기는 삼라만상이 모두 존재의 본유종자를 담은 아뢰야식 중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장식(藏識) 속에 선업과 악업의 모든 내용이 종자(種子)로서 집착하여 유지되었다가 제법(諸法)이 종자에 힘을 부여해서-종자에 부여되는 힘이 바로 업력이다-연기된다고 하는 설이다. 필자는 이 책에서 뇌야연기의 이론을 많이 좇고 있다.
진여연기는 마치 고요한 바다에서 바람이 연(緣)이 되어 파도를 일으키는 것과 같이, 진여에서 무명이란 최초의 연이 인연의 천파만파를 일으켰다고 설명하며 진여에 무명이란 인연을 일으키는 연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설이다. 나는 이 진여연기에서의 진여를 우주의 응축된 대에너지로 생각하며, 무명을 에너지로부터 물질이 나타나게 만드는 정보의 관계들, 즉 태초의 통합된 우주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법계연기는, 우주의 가장 작은 티끌 하나하나가 모두 만법(萬法)을 구비하고 있으며, 그 모두에 연기의 원인들이 내재되어 있어서 한 법만이 모든 연기의 근원은 아니라고 보는 설이다. 불교에서 티끌이라고 말하는 가장 작은 존재를 원자나 미립자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입자도 전체 우주와 다름없이 고유한 에너지와 정보를 지닌 살아 있는 존재들임을 생각할 때, 진여연기에서의 진여는 통합된 우주를 설명해 준다. 또한 법계연기에서는 낱낱으로 나누어진 모든 존재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된다. 통합된 우주 전체의 에너지든, 한 원자가 가진 에너지든 그 성질에서 다름이 없는 이상, 전체 우주의 실상인 진여에 연이 있다는 설명이나 나누어진 티끌마다에 연기의 관계가 들어있다는 말은 모두 똑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뇌야연기는 생명계의 정신세계를 다루는 유식설에서 나온 이론이기 때문에 인연법을 생명계에 국한시켜 설명하므로 인연의 근원이 아뢰야식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아뢰야식이란 것이 결국 물질들의 정보에서 발전된 것이고, 좀 더 통합되고 차원 높은 생명체의 본유종자를 일컫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세 가지 인연론이 결국은 모두 동일한 설임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마음의 여행에서 더듬어왔던 것이 바로 세 가지 인연론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과 똑같은 셈이다. 마음의 여행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의 실상을 찾아 떠난 여행이다(네 가지 인연론 가운데 처음에 나온 업감연기는 업력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므로 다음 장에서 따로 다루기로 한다).
인연론을 빌려서 이 세계의 실상을 설명하는 데는, 어느 설을 빌더라도 ‘처음의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진여이든, 태극이든, 공이든, 불법이든,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무언가는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주의 인이 있어야 그 다음 연을 말할 수가 있다. 저자는 2천5백 년 전의 인도인들이 직관과 영감으로 말했던 이것을, 오늘날에는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유추할 수 있을 만큼 우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므로 이 여행을 떠났다.
우주물리학과 양자론을 비롯해 과학적 발견들을 토대로 생각해 볼 때, 우주 최초의 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우주가 생기기 전에 존재했던 어떤 것으로 상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모든 우주가 하나의 점(특이점)으로 모였을 때, 존재할 수 있는 형태인 ‘에너지’라는 것 외에는 달리 찾을 수 없었다. 이 에너지가 모든 물질의 근원이고, 물질이 거기서부터 나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지금에는 더 이상 진여라든지, 실유(實有)라든지 하는 철학적 용어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모든 물질의 씨앗인 우주 에너지를 진여라 하고, 그것을 이 세상의 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작용해서 이 세상을 있게 만든 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 또한 양자론의 업적에 힘입어 물질간의 관계를 결정짓는 정보(Information)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에너지를 인으로 하고 정보를 연으로 하여 생긴 과(果)가 이 세계라고 한다면, 불교의 과학적인 해석에서 과히 빗나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과 연은 우주라는 하나의 과(果)로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여전히 인은 인으로서 연은 연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둘은 항상 인연이라는 하나의 법으로서만 존재할 것이고, 분리된 인과 연을 생각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사고 속에서는 논리적인 분리가 가능할 것이다.
우주의 인인 에너지가 만든 것이 시공간이다. 그리고 우주의 연인 정보가 만든 것이 바로 정신계이다. 이 시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삼라만상은 에너지와 정보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인과 연을 분리하고 나면 어떤 물질도 구성되지 않으며 우주 자체가 모습을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이 둘이 분리된 세계는 상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인과 연이 작용하는 바를 알아보기 위해 이 둘을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인인 에너지는 바로 시공간으로, 모든 물리적인 존재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이 시공간을 그래프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시공간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에 의해 모든 위치가 결정되는 상대적인 세계이다.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이후 물리학적 관점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부정되었다. 또 과거세(過去世)와 미래세(未來世)는 그냥 쫙 펼쳐져 있을 뿐이며, 단지 내가 그 좌표상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분리할 수 없으며, 이 공간과 결합된 시간은 우리의 전통적인 시간 개념에서 벗어나고, 시간과 결합된 공간 역시 지극히 상대적인 회의(懷疑)의 대상임을 잘 알고 있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 상대적으로 작용하며, 서로간에 치환(置換)될 수가 있다. 시간이 빨라지면 공간은 줄어들고, 공간이 늘어나면 시간은 느려진다. 시간과 공간은 우주의 에너지가 두 가지 상대성으로 나타난 것이어서 시공간의 크기는 우주 에너지의 총량과 동일하다. 에너지 불변의 원칙에 의해 우주 에너지의 총량은 항상 일정하므로 시간과 공간은 서로 연동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한쪽의 값이 줄면 다른 쪽이 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전체의 값은 언제나 일정하여 불변인 것이다. 에너지가 시공간을 만든 직후에는 공간이 작았으므로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흘렀다. 지금의 영원과도 같은 긴 시간이 몇백만 분의 1초 동안에 지나갔으며, 공간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점차로 시간은 느려져서 지금과 같은 속도로 시간이 흐르고 있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는 중이므로 아주 조금씩 시간이 느려지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앞의 그래프에서 y축의 시간과 x축의 공간은 반비례하는 관계이며, 하나의 증가는 다른 하나의 감소로 나타나고 이 두 함수의 합은 언제나 일정하다. 그런데 이 그래프에서 만약 어느 한쪽의 값이 무한소로 작아져서 마침내 0이 되는 순간을 상상해 보자. x축의 공간이 무한히 작아지는 경우, 이것은 중력에 의해 모든 물질이 압축되어 마침내 하나의
점으로 축소되는 블랙홀이나 우주 전체의 종말인 대압축이 그런 것일 게다. 이 경우 공간이 무한히 작아져갈 때 시간은 무한히 빨리 흐르게 될 것이다. 하나의 별이 블랙홀로 움츠러드는 마지막 순간에 그 별의 주위에서 시간은 무한히 빨리 흐를 것이고, 이 지구상에서의 영원이 한 순간에 지나가버리게 될 것이다.
마침내 모든 공간이 0으로 돌아가면 시간마저 그곳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잠들어버리게 된다. 즉 공간이 0이 되는 순간, 시간도 0이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시공간은 모두 거대한 중력이라는 하나의 힘으로 돌아간다. 그 한 가지 에너지 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시간이 무한히 느려지는 경우도 상상해볼 수 있다. 이것은 블랙홀의 반대 현상으로 우주의 비산(飛散)이 될 것이다.
만약 우주의 팽창력이 중력을 훨씬 초과한다면 우주는 지금보다 상상도 못할 정도의 폭발적인 속도로 팽창해서 사방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다. 공간이 급속도로 늘어나면 시간은 한없이 느려질 것이다. 마침내 시간이 정지하는 순간이 오면 우주가 팽창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가 된다. 드디어 시간이 정지하면 공간의 확대도 끝난다. 그 순간 시공간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상태에서도 남는 것은 우주가 비산해 간 모든 에너지일 뿐이다.
대압축이든 대비산이든 시간과 공간은 어느 한쪽의 무한대가 다른 쪽의 무한소를 의미하며, 하나의 값이 0이 되면 그 순간 시공간은 한꺼번에 0이 된다. 공간의 값이 먼저 0이 되는 것으로 우주의 종말이 진행되면 대압축의 종말이 될 것이고, 시간의 값이 먼저 0이 되는 것으로 진행되면 끝없이 팽창을 계속한 다음의 아득한 심연 속으로 비산할 것이다. 우주물리학은 후자보다는 전자 쪽의 가능성이 더 많다고 보는 듯하다.
사실 물리학이라기보다 상식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얘기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우주의 인인 에너지계의 법칙으로서 그것의 연인 정신계의 실상을 유추해 보려는 목적 때문이다. 만유의 본체인 에너지와 정보는 각각이 드러낸 현상은 다를지언정 그 기본적인 법칙은 쌍둥이처럼 같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에너지의 현상을 보면 정보의 실상 또한 틀리지 않게 미루어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주의 실상으로서 에너지가 시간과 공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시공간을 만들었다면 정보도 역시 뭔가 상대성을 갖는 두 가지로 정신계를 이루었을 것이다. 유식설을 비롯해서 인연론과 그 외의 물리학이나 생물학적인 모든 면을 뒤져보았을 때, 그 두 가지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연(因緣)과 자성(自性) 뿐이라고 여겨진다.
인연과 자성의 상대성에 의해서 존재하는 정신계를 그래프로 그려보면 다음의 그림과 같이 시공간 그래프와 똑같은 그림이 나올 것이다.
정신계의 법칙은 물리적으로 계측 가능한 수단이 없으므로 앞에서 살펴 본 시공간의 법칙들을 이 그래프에 그대로 대입해서 짐작해 보는 게 가장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시공간의 그래프에서 에너지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가지 상대성의 결합으로 나타났듯이, 정보는 인연과 자성이라는 두 가지 상대성의 결합으로 볼 수 있겠다. 생명체의 경우 아뢰야식이라고 말해도 좋은 우주의 정보는 모든 존재의 본유종자인 자성과, 그 자성이 타와 맺은 모든 관계에 대한 정보인 인연의 두 가지로 구별된다. 물론 시간과 공간을 나눌 수 없는 것처럼, 자기적인 정보(자성)와 상대적인 정보를 분리할 수 없다. 그것이 정신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구분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처럼 인연과 자성은 서로 상대적으로 작용하며, 서로간에 치환(置換)될 수가 있다. 인연이 복잡해질수록 자성은 약해지며 자성이 강해지면 인연은 단순해진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자성이 복잡해지면(차원이 높아지면) 인연은 약해지고, 자성이 단순해질수록 인연은 강해진다고 해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우주 정보는 자기 정보와 타와의 정보로 구성되므로 인연과 자성의 값의 합은 항상 일정한 것으로 보인다. 인연의 값이 늘면 자성의 값이 줄어들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정신계 전체의 정보값은 총량에서 에너지와 똑같이 불변이다.
처음으로 시공간이 나타났던 시점에서는 시간의 값이 무한대였고, 공간은 무한소와 같았다. 때문에 우주물리학에서 모든 물질이 만들어졌다고 계산한 대폭발 이후의 10의 32승 분의 1초란 지금과 같은 흐름의 시간이 아니라, 사실상 억겁의 세월에 해당하는 장구한 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시기의 정신계는 인연의 값이 무한소였으므로, 자성의 값이 무한대에 가까웠다. 엄청나게 빨리 흐르는 시간과 엄청난 자성의 힘이 우주의 모든 물질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진여연기에서 진여의 바다에 무명의 바람이 불어 첫 파도가 일었던 그 때는 인연이 아니라 자성만이 정신계의 모든 것이었다. 대폭발 직후 10의 32승 분의 1초라는 억겁과도 같이 엄청나게 긴 시간이 흐르는 속에서 무량한 수의 입자들이 자성에 따라 모습을 나타내고 그것들이 서로 만나고 결합하기 시작하면서 인연의 값이 증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세계는 시공간적인 측면에서는 공간의 값은 증가(팽창)하고, 시간의 값은 감소(느려짐)하고 있으며, 인연의 값은 증가하고, 자성 값은 점차로 감소하는 도중에 있다.
에너지와 정보의 그래프에서 양 측면 중에서 같은 축에 놓인 것끼리는 증감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공간과 인연은 같이 늘어나거나 줄어들며, 시간과 자성도 마찬가지이다. 공간이 팽창한다는 물리적 현상은 인연이 증가하고 있다는 정신계의 현상과 보조를 같이하며, 시간이 느려지고 있다는 물리적 현상은 자성이 약해지고 있다는 정신계의 그것을 반려로 삼고 있다는 말이다. 공간의 팽창이라는 과(果)는 인연의 증가라는 연이 불러오는 현상이랄 수도 있는 것이다.
인연은 모든 존재 사이의 관계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에 나와 타가 존재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것으로 보이고, 자성이라는 것은 시간의 속도에 맞춰지고 있다고 보인다. 생명계의 자성이라 할 수 있는 아뢰야식은 그 본질이 기억이며, 기억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성립되는 개념이다.
인연과 자성의 그래프에서 시공간의 경우에 해 보았던 것처럼, 어느 한쪽의 값이 무한소로 작아져서 마침내 0이 되는 순간을 상상해 보자. y축의 값이 무한히 작아지는 경우,
즉 자성의 값이 점점 약해져서 마침내 무한소가 된다면 우주의 시작과 반대의 상황이 될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인연뿐이므로 이 세계는 모든 존재가 자성을 상실하고 인연의 파도에 휩쓸리는 죽어버린 세계가 될 것이다. 마침내 자성이 무(無)로 돌아갔을 때는 동시에 모든 인연도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시공간적인 우주의 종말과 마찬가지로 정신계도 똑같이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시공간이 무한히 팽창한 결과로 오는 우주의 종말은 모든 자성이 소멸되면서 찾아오는 정신계의 종말과 같은 의미가 된다. 반대로, 공간이 축소되고 압축되는 우주의 종말은 모든 인연이 소멸되어 오로지 자성만이 존재하는 정신계의 최후가 될 것이다.
시공간은 시간과 공간 중에서 어느 한쪽의 값이 0이 되면 동시에 공(空)으로 돌아가며, 정신계는 인연과 자성 중에서 어느 한쪽이 소멸되면 전체가 무(無)로 돌아간다. 시공간과 정신계는 공간과 인연, 시간과 자성이 각각 결합하여 증감을 같이하므로 시공간과 정신계는 탄생과 성장과 소멸의 운명을 같이하게 되어 있다.
인연과 자성의 두 가지 상대성에 의해 정신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불교가 말하는 해탈이나 열반에 대한 설명을 물리적인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실상이 없는 이 세계에 생명을 만들고 그 생명을 반복 윤회의 굴레에 매어두는 것은 바로 우주의 인에 연이 작용한 결과의 허상이며, 그 인과 연이 무엇인지는 지금까지 고찰해 왔던 바다. 인연에 의한 세계의 본성을 한마디로 나타낸다면 그것은 바로 상대성이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기 전에, 그것도 2천5백 년이나 전에 이미 동양인들은 이 세계를 상대성의 세계로 파악하고 있었다. 현상계가 공리요 가상인 이유는 상대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주불변하며, 평등보편한 우주의 본체인 진여란 바로 상대성에서 벗어난 절대성의 존재인 것이다. 생명계가 윤회의 고(苦)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이런 상대성의 세계에 상대적인 존재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회의 세계에서 진여의 세계로 돌아가는 해탈이란 이 상대성을 극복하는 길이 된다. 절대성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게 보이는 한 가지 길은 바로 정신계의 두 축에 있다. 자성 값이 극대화될 때 인연 값은 극소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마침내 자성이 무한대의 값을 가지는 순간 인연의 값은 0이 될 것이고, 그러면 비로소 상대성의 굴레가 파괴되고 우주 본연의 모습인 진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해탈이란 자성의 힘으로 인연을 소멸시키는 과정이다. 그리고 절대성의 세계로 돌아간 바로 그 자리가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자리이다. 해탈이란 한 존재에 있어서의 현상계의 종말이며 우주의 붕괴이다. 시간과 공간, 인연과 자성의 모든 것이 진여의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곤혹스러워 하는 문제가 있다. 물리적인 인과율(因果律)에 따르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결정론을 비켜갈 수 있으며 자유 의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뉴톤의 역학적 세계에서 물리적인 세계는 정교한 시계 장치와 같아서 하나의 톱니바퀴가 움직이면 반드시 다른 것도 그 방향에 따라 돌게 되어 있다.
원인과 결과의 연결이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정확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관점에서의 이 세계는 최초의 톱니바퀴가 회전하는 순간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결정론적인 세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인간의 자유 의지란 착각에 지나지 않다고 보였던 것이다. 물리적인 법칙의 세계와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의 결과를 고집하는 철학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오랫동안 존재해서 이 둘을 갈라놓고 있었다.
양보는 물리학에서 먼저 나왔다.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은 뉴튼 역학의 근본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양자론은 물리적 세계가 인과율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개했고, 상대성 이론은 어떤 물리 법칙도 절대성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혔다. 비인과론적이고 상대적으로 밝혀진 이 세계는 비로소 자유 의지가 숨쉴 수 있는 곳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최소한 우리 인간이 기계적인 결정론에 의해서 운명지어진 기계의 부속 장치는 아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세계가 인과론에 따라 결정되느냐, 아니면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적 미래가 열려 있느냐 하는 논쟁은 정신계의 상대성을 살펴봄으로써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인연은 이 세계를 인과론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보이도록 하는 축이고, 동시에 자유 의지라는 자성과 상호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인연과 자성의 두 가지 값의 밸런스에 의해 유지되는 이 세계는 결정론적인 측면과 자유 의지가 작용하는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다.
생명계의 인연과 자성을 놓고 볼 때, 이런 두 측면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의 생명이 체험했던 모든 내용은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그대로 저장되면서 자기라는 하나의 자성을 이룬다. 그리고 이 체험의 과정에서 자기 외의 모든 것들과 가졌던 관계의 정보들은 인연의 그물망이 되어 모든 자성들을 그 속에 담고 있게 된다.
따라서 인연이란 자성을 이룬 체험들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성격을 지니며, 바로 자성을 이룬 그 모든 업이 만든 것이나 다름없어진다. 때문에 인연과 자성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므로 자성의 모습이 바뀌면 거울에 비치는 인연의 형상도 달라진다. 또한 자성이 현상계에서 겪게 될 체험들은 인연에 따라서 결정되므로 인연이 자성을 형성해 가는 연이 된다. 인연에 따라 움직이는 자성은 결정론적인 존재일 뿐이지만 자성은 스스로 인연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 자성이 스스로 지향하는 바를 가지고 자신의 인연을 새로 쌓음으로서 인연의 주체로 움직이게 된다는 의미다.
우리의 위치란 시간과 공간의 상대적인 함수 값이며, 운명이란 인연과 자성의 상대적인 함수 값이다. 이 위치와 시간적-공간적 위치와 운명이 바로 현재의 나를 결정하고 있다.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인연을 변화시켜야 하고, 인연을 변화시키려면 나의 자성을 바꿔야 한다.
해탈을 원한다면 인연을 소멸시키거나 자성을 무한대에 가깝도록 강화시키는 방법이 있다. 자성의 강화는 나의 의지의 힘으로 업력을 구부릴 수 있는 데서 생긴다. 자성의 값을 무한대로 만들면 인연은 0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y축상에 있는 존재가 된다. 반대로 자성이 약하면 인연의 값이 무한대가 되어 인연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x축상의 존재가 될 것이다. 대개의 하급 동물들은 x축상의 생명이며, 인간은 두 축 사이의 공간에 위치하고 있다. 인연이란 폭군과 같기 때문에 가급적 자성을 수정처럼 갈고 닦아서 y축에 다가가는 것이 자유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
이제 시공간과 정신계를 지배하는 두 가지의 궁극적인 힘에 대해 알아볼 차례이다.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 12
전생과 윤회-12
중력과 업력
이 세계 전체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질계의 좌표와, 인연과 자성이라는 정신계의 좌표가 겹쳐져 있는 세계이며, 공간 좌표는 인연 좌표, 시간 좌표는 자성 좌표와 증감을 함께 하면서 현상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알아보았다. 비유해서 표현하자면, 시공간이란 광대무변한 바다에 인연이란 바람이 불고, 그 바람에 의해 자성이란 파도가 굽이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시공간의 바다를 이루는 모든 존재들은 인연이란 바람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바다, 죽어있는 바다의 물과 같은 것이다. 이 연기의 바람이 어떻게 시공간에 나타나는지 알 수 있는 하나의 물리학적인 개념이 바로 ‘질서’다. 이 자연계의 질서가 어떻게 나타나고 유지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연기가 시공간에서 작용하는 법칙을 짐작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은 질서의 양을 측정하기 위해서 ‘엔트로피(entropy)'라는 가상의 수학적 단위를 고안해냈는데, 엔트로피는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의 배열이나 질서의 정도를 나타낸다. 엔트로피가 높을수록 무질서가 증가하는데, ’열역학의 제2법칙‘에 따르면 엔트로피는 독립적인 물리 공간 내에서는 언제나 증가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엔트로피가 낮아지려면, 즉 무질서가 감소하고 질서가 증가되려면 반드시 증가한 질서의 양만큼 에너지가 소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에너지가 추가로 공급되지 않한 독립적인 물리 공간 내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우주를 하나의 닫혀 있는 물리 공간으로 보고 ‘열역학의 제2법칙’을 적용시킨다면, 이 우주는 최초엔 최대한 질서 상태를 갖추고 있다가 점차로 무질서해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우주알(대폭발 이전의 특이점)은 최대치의 질서 상태였으며 무시무시한 대폭발마저도 굉장한 정도의 질서였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폭발 상태가 결코 질서 있는 상태였을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우주는 갈수록 조직적이고 질서 있는 천체의 운행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우주에서 탄생한 생명은 고도로 질서 잡힌 존재인 것이다. 어떻게 이 우주는 열역학 제2법칙을 거스르면서 대폭발의 무시무시한 혼돈과 무질서로부터 질서정연하게 운행하는 별과 은하수와 모든 물질과, 그리고 경이로운 생명이라는 초질서적인 존재로 진행해 올 수 있었을까? 열역학 제2법칙은 우주 전체에 대해서는 들어맞지 않는 것인가? 열역학 제2법칙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의문에 물리학자들이 제시하는 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닫혀있는 물리적 공간이기는 하지만 확대되고 있다는 하나의 변수가 작용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중력의 존재다. 중력이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를 낮추는데 필요한 에너지원이 아닐까 하는 것이 질서 잡힌 우주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이다.
위의 그림을 통해, 질서 잡힌 상태에서 무질서로 진행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이 중력의 존재 때문에 마치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끊임없이 공급되고 있는 상태처럼 질서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주의 질서는 모두 중력이 만들어낸 것이며, 시간과 공간은 중력이 만들어낸 질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공간이 아닌 정신계에서, 인연은 우주의 초기에 최대한 복잡한 상태에서 시작되었을까, 아니면 아주 단순한 상태에서 시작되었을까? 우주의 처음에는 어떤 인연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첫 순간 그토록 복잡하게 얽힌 상태로 시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 갈수록 약해져야 할 인연이 왜 우주의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복잡한 인연의 그물을 짜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리적 세계에서는 중력의 힘이 최대한의 무질서에서 질서를 창조했듯이, 정신계에서도 가장 단순한 최초의 인연으로부터 오늘날의 복잡하기 그지없는 인연의 그물이 짜일 수 있도록 작용한 힘이 존재했을 것이다. 시공간의 중력에 해당하는 정신계의 궁극적인 힘은 바로 업력이다. 중력은 모든 물질을 서로 끌어당기는 힘으로 나타나고, 업력은 모든 존재가 서로 관계를 맺도록 강제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중력과 업력에 의해 모든 물질은 합쳐지고 모든 존재는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중력의 비밀을 풀지 못하면 우주에 대해 알아낼 것이 하나도 없으며, 업력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전생과 윤회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모든 물질이 최종적으로 중력에 의해서 특이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블랙홀) 모든 인연도 업력에 의해서 최초의 무연(無緣)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물질계의 특이점인 ‘블랙홀’과 의식계의 특이점인 ‘무연’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블랙홀 내에 어떤 인연이 남아 있을 것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고, 인연이 다해버린 시점에 시공간이 존재
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주의 최초인 대폭발 당시에는 이 우주가 최대한의 무질서, 무인연인 상태였고 열역학 제2법칙은 중력이 존재함으로써 적용되지 못하고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가 오히려 낮아져 왔다. 인연은 단순해지는 쪽으로 가야하는 법칙에도 불구하고 업력이 작용함으로써 점점 복잡하게 얽혀져 왔다고 하는 사실이다.
엔트로피가 낮아지는(질서가 증가하는) 우주는 생명체를 조직함과 동시에, 복잡해지는 인연과 상승 작용을 일으켜서 마침내 ‘생명’이라고 하는 우주에서 가장 복잡하고 질서정연한 존재를 탄생시켰다. 생명은 물질계의 질서와 정신계의 인연이 서로 손을 잡고 만들어낸 것이다. 그와 아울러 모든 생명은 탄생한 그날로부터 자신의 출발점이 된 인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무량겁의 진화를 통해 더욱 더 복잡한 인연의 그물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다.
중력이 물질을 모을수록 질서가 생겨서 별이 만들어졌다가 그 중력이 너무나 강해지면 스스로 별을 우그러뜨리고 마는 것처럼, 업력은 모든 인연을 끌어당겨 얽어매서 생명의 윤회를 가능케 하지만 마침내 얽힌 인연이 감당 못할 정도로 복잡해지면 모든 인연을 삼켜버림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원점으로 되돌려버린다.
인연을 하나의 질서라고 했을 때, 시간이 흐를수록 인연은 언제나 약해지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인연은 공간과 같은 축에 놓여 있으며, 우주의 탄생 이후로 공간이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인연도 더욱 늘어나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우리는 인연이 증가하고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연이 더 이상 관계를 맺을 수 없을 정도로 한계 상황에 부딪히면 ‘인연의 사망(무인연)’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엔트로피가 최대한 높아져서 더 이상 무질서해질 수 없는 상태일 때 이것을 ‘열사망’이라고 하는 것처럼, 인연이 다해버린 상태인 ‘무연’을 우리는 인연의 최종점으로 볼 수 있다. 우주의 종말은 시공간의 ‘열사망’과 정신계의 ‘인연소멸’이 동시에 진행된 결과인 종착점이다.
여섯 번째 여행-마음과 기 1
■ 여섯 번째 여행 ■
마음과 기-1
마음을 찾아서
우리는 보통 ‘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음의 주인이며, 생각하는 어떤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믿고 있는 마음을 찾아 나서게 되면 나의 믿음은 의심스러워진다.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 사실인가? 나는 나의 주인인가? 만약에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라면, 나는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마음은 찾을수록 행방이 묘연해 진다.
‘내가 생각을 한다’는 것은 실제와 차이가 있다. 단지 몇 초 동안이라도 나는 마음대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부터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한다고 해보자. 그러나 결심한 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마음먹은 바 없는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생각은 저 혼자 나타나는 것이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생각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다른 생각에 몰두하여 어떤 생각을 잠시 잊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생각에 몰두한다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잡념들이 그 생각을 방해하며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이 곧 자기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들여다볼수록 혼란에 빠지게 된다. 마음이 마음을 돌아보면 거기에는 거울을 마주 세운 것처럼 무한히 많은 상들이 늘어선다. 실체를 가늠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토마스 라이드(Thomas Reid)는 ‘자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생각하고, 심사숙고하고, 해결하고, 행동하고, 고통받는 그 무엇이다. 생각 자체‘나’인 것은 아니며, 행동 자체가 ‘나’인 것도 아니고, 느낌 자체가 ‘나’인 것도 아니다. 나는 생각하고, 행동하고, 고통을 느끼는 무엇이다.‘라고 말했는데, 과연 나는 생각하는 무엇일까? 고통받는 무엇인 것일까?
나의 자아와 생각은 별도의 것인지, 아니면 나의 생각이 바로 나의 자아인지 그것도 명확한 것 같지 않다. 고대로부터 동양에서는 마음을 제대로 알고 확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천적인 방법들이 발달해 왔는데,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마음에 달려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방법론인 선은 불교가 있기 전부터 인도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도 선의 수행을 정각(正覺)을 위한 방법으로 받아들였으며, 제자들에게도 늘 권하였다. 선은 범어인 ‘dhyaoa'의 의역(意譯)으로 중국인들은 이 말을 사유수(思惟修) 또는 기악(棄惡)이라고 번역했다. 사유수란 ‘생각하는 법을 닦는다’는 뜻이며 기악이란 ‘악을 버린다’는 의미다. 중국인들이 받아들인 선의 의미는 ‘생각하는 바른 방법을 닦아 악을 버리는 것’이었다.
선은 원래 고대 인도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철학에서 발생한 것으로 우파니샤드에서부터 선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불교 이후에 선은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한층 발전하게 되었다. 범부선(凡夫禪)과 외도선(外道禪)으로 구별되었으며, 실천 방법에 있어서는 부정관(不淨觀), 자비관(慈悲觀), 수식관(數息關) 등이 선정법(禪靜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도교에서도 수행의 방법으로 선을 받아들였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고대부터 지감법(止感法), 조식법(調息法), 금촉법(禁觸法)의 삼법(三法)이라는 수행론이 있어서 불교의 선과 함께 행해져왔다.
부정관의 선은 인간의 육신을 부정(不淨)한 것으로 보고, 육신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탐욕과 번뇌를 끊음으로서 마음을 흐리게 만드는 집착을 끊고 참마음을 얻을 수 있다
고 본 것이었다. 불교의 부정관은 삼법 또는 단(丹)이라 불리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도학수련의 금촉법(禁觸法)과 유사하다. 육신의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 마음을 찾는 첩경이라고 보는 방법이다. 자비관의 선은 마음속에서 자비심을 일으켜세워, 이타의 자비를 원으로 세움으로써 삿된 욕망을 떠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수식관의 선은 마음을 한 殆?집중하여 동요되고 산란한 마음을 바로잡는 방법으로서, 자신의 호흡을 세는 것으로 모든 생각을 대치시켜서 정신을 통일하고 생각의 방해를 없앨 수 있다고 본 방법이다.
어떤 실천 방법을 택하건 간에, 선은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함이 그 목적이다. 사성제(四聖啼)의 진리는 결국 생명체의 모든 고뇌와 고통은 마음에 그 원인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여 오히려 마음의 노예가 됨으로써 마음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범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선은 마음에게 자기가 주인임을 알리고 마음의 항복을 받는 과정이며,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를 가리는 과정이다. 선은 자기와 마음과의 싸움인 것이다.
선과 같은 마음의 수행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심각한 자기의 분열을 넘어 통합의 완성을 체험할 수 있게 되며, 마음의 실체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자기와 마음의 싸움은 무엇이 자기이며, 마음은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마음을 굴복시키고자 하면 우선 마음이 어디 있는지 파악해야 하며, 마음이 어떤 것인지 관찰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와 마음을 둘로 분리시키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관찰하는 자기’와 ‘관찰되어지는 자기’의 둘로 분열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어느 것이 관찰하는 자기이며, 어느 것이 관찰의 대상인 자기인지 분명해야 하는데, 관찰하는 자기를 뚜렷하게 정하는 것이 바로 화두(話頭)다.
화두는 바라보는 마음과 바라보아야 할 마음의 경계가 뚜렷해질 때까지 바라보는 마음을 하나로 결정해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하나의 명제를 정해서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겠다고 하면, 그게 바로 화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화두를 생각하는 마음을 자기로 두고, 자기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제멋대로 올라오는 화두 이외의 모든 생각이나 잡념 등을 관찰해야 할 대상인 마음으로 두는 것이다.
하나의 화두를 붙들고 있으려고 정신을 집중시켜도, 마음 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일어난다. 문득 문득 오만 가지 생각이 구름처럼 피어나고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선(禪)을 행하는 자기에 대한 의혹이 또 하나의 마음에서 일어난다.
문득 배뇨 욕구를 느끼기도 하고 시장기를 느끼기도 한다.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고, 등의 어딘가가 가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선방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 때문에 문득 화두를 놓치기도 한다. 벽을 기어가고 있는 벌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와 마음이 산란해지고, 입에 고인 침을 삼켜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두워져 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꽤 지났구나, 이제 저녁이 되었겠는걸’ 하는 생각이 떠오르고, 멀리 산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에 ‘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문득문득 치미는 수많은 생각들은 화두를 붙잡고 있는 자기를 흔들고 방해한다. 계속해서 1천 가지 1만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이다.
분명히 화두를 붙잡고 있는데, 화두가 아닌 생각들은 누가 불러오는 것일까? 화두를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나인가? 아니면 화두가 아닌 홀연히 일어나는 생각들이 나인가? 선은 자기 속에서 자기가 나뉘는 정신의 분열이다.
이 분열에는 심각한 고통이 따른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다른 생각들을 막을 수가 없다. 오히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그 생각이 더욱더 많은 생각들을 무차별적으로 끌어온다. 생각을 하지 않도록 특별히 놓아둔 육신이 생각의 단절에 더욱 큰 장애로 드러나게 된다. 몸을 움직이면 생각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어서, 선은 몸을 조용히 앉힌 상태인 좌선(坐禪)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좌정한 육신 때문에 정신이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육신은 오관(五管)을 통해서 쉴새없이 오감(五感)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오감은 전오식이 되어 의식으로 하여금 계속 육신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 마음이 아무리 화두를 붙잡고 정진하려 해도, 신식(身識)은 시도 때도 없이 작동한다. 추위와 더위, 갈증과 배고픔, 다리의 통증, 등의 가려움, 가득 찬 방광, 졸림 등은 생각으로 바뀌어서 계속 의식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안식은 ‘무엇이 보였다’, ‘무엇이 있다’라는 생각이 나타나게 만든다. 이식은 ‘어떤 소리가 들린다. 저게 무슨 소리일까, 저 소리는 어떤 메시지일까?’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선을 수행하다 보면 인간의 마음이란 오식에 포위되어 사로잡힌 존재이며, 한시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오식은 말나식과 결합되어 있어서 끊기 너무 어렵다. 체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 가장 끈질기고 강하다.
이런 생각의 태풍 속에서, 화두를 지키려고 하는 진짜 자기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보인다. 생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선의 초기 단계에서는 제멋대로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상념들을 그것이 일어나는 그대로 조용히 관조하므로서 객관화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서 참된 자아로부터 생각의 분리가 가능한 것이다. 생각을 주체적으로 관찰하는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주인이 아닌 객(客)의 위치에 생각을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성격의 생각들 중에서 가장 분리하기 힘든 것이 바로 말나식으로부터 오는 육신의 욕구다. 주체적인 의식은 상념을 대상으로 바라보고, 그것들의 움직임과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육신의 오관으로부터 생기는 본능적인 욕구와 감각은 바라보는 대상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찰의 주체인 의식적인 자아는 쉽게 본능적인 욕구와 감각에 자리를 양보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통이다. 사람은 고통을 하나의 대상으로 객관화시킬 수가 없다. 아무리 화두를 강하게 세우고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려고 해봐도, 치통이 극심하면 참선을 보류하고 치과를 먼저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상념들과는 달리 말나식에서 오는 생각들은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것들과 싸워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목마름, 배고픔, 수면 욕구 등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육신의 구속은 마음을 찾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다.
참선도 배가 부르고 물을 마신 다음에야 가능해지는 것이다. 말나식을 흡족하게 만들어 놓지 않으면, 말나식은 자기가 아닌 어떤 마음도 주인의 자리에 앉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충분히 만족된 다음에야 말나식은 자리를 비켜준다. 충족되지 못한 말나식이 날뛰고 있을 때는 어떤 힘으로도 그것을 다스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말나식은 영원히 만족하는 법이 없다. 변덕스러우며, 만족한다고 하더라도 순간적이다. 말나식이 잠시 돌아앉은 순간 우리 자신은 주인이 될 수 있지만, 임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나식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을 얻기 위한 싸움에 동원되는 처절하고 극단적인 방법이 바로 고행이다. 말나식과의 싸움은 고통과의 싸움이다. 말나식과의 전쟁은 말나식이 요구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철저하게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밥을 먹어야한다는 생각을 단식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의 일어남을 불와(不臥)로 거부하는 것이다. 이성(異性)에의 욕구를 금욕으로 거절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말나식의 대답은 격심한 고통이다. 말나식이 들이대는 고통과 자기 의지와의 싸움이 바로 고행이다. 고행이라는 전쟁에서 말나식은 전오식을 자신의 군대로 사용한다. 단식을 하는 중에는 비식이 비상하게 활동하여, 아주 미미한 음식 냄새도 온 영혼에 충격을 줄 정도로 강하게 전달한다. 금욕을 하노라면, 안식은 자신의 정보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의 성적인 장면을 불러일으켜 의식의 스크린에 비춘다. 신식은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곤두서서 말나식과의 전쟁을 포기하도록 함성을 지른다. 그 함성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내가 바로 너의 주인이다. 말나식이 바로 너 자신이다. 자신과의 싸움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아의 의지로 고통을 극복해낸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말나식의 시위에 굴복하고 만다. 극단적인 고행은 자신과 말나식을 분리시키는 방법으로 선택된다. 어떤 고통으로도 주인인 마음을 굴복시킬 수 없을 때, 말나식은 객관화된다. 생명적인 욕구 자체가 주체적인 정신에 종속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이런 사례를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이런 타인의 사례에서 자신의 싸움에 필요한 힘을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공안(公案)이다. 공안을 화두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공안은 화두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선사(先師), 고승(高僧)들이 삼았던 화두와 선 수행의 사례를 자기의 것으로 삼을 때 이를 공안이라 한다. 앞서 깨우침을 얻었던 훌륭한 스님들의 질문을 자신의 질문으로 삼아,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공안의 시초는 바로 부처님의 염화미소(拈花微笑)다. 어떤 사람이 정성을 다해 바친 연꽃 한 송이를 부처님이 높이 들어 보였을 때, 오직 마하가섭 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지었다고 하는 거염화(擧拈花)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바로 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공안으로 삼게 된 최초의 것이다.
화두를 붙잡은 면벽 수행이건, 설산의 고행이건 그 목적은 마음의 발견에 있다. 자기에 대한 발견과 성찰이 목적인 것이다. 이런 수행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마음은 우리를 깨우쳐 성숙시키고 올바른 생활의 길로 인도한다. 그런 깨우침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 마음은 자기의 주인이 아닌데도, 마음이 일으키는 대로 쫓아서 살아온 어리석음에 대한 반성이 그것이다.
마음을 조용히 관조해보노라면 스스로 관객이 되어,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주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주인으로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그 실상은, 술주정뱅이 남편과 버릇없고 사고뭉치인 아이들에게 휘둘리며 살아온 주부의 삶에 비유할 수 있다. 자기를 잊은 채 온갖 고생을 겪으며 살면서도 정작 집에서 뛰쳐나가지 못하는 불쌍한 주부의 삶, 그것이 우리 자신의 삶인지도 모른다. 그저 참고 인내할 뿐, 스스로를 가족에게 종속된 존재로 생각한다. 마음이라는 집을 떠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용감한 여자들은 과감하게 그 집을 뛰쳐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집에서 나왔을 때야 비로소 가족을 자기와 분리될 수 있는 타인으로 느끼게 된다. 생각은 주부를 괴롭히는 가족에 비유할 수 있다. 결코 자기가 아니며, 한집에 동거하는 존재들일 뿐인 것이다. 술주정뱅이 남편과 사고뭉치 아이들이 밖에 나가 있는 동안은 그나마 편한 시간이지만 그들이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집안은 시끄러워지고 불화가 생긴다. 남편의 이름은 분노, 슬픔, 증오, 적개심이다. 아이들의 이름은 고뇌, 번민이다. 그러므로 주부의 이름은 분노와 슬픔의 아내요 고뇌와 번민의 어머니인 것이다. 그들만 아니라면 주부는 원래의 자기 이름을 가진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부의 원래의 이름은 기쁨, 평화다.
집을 나온 주부는 이전에 이웃의 비난이 바로 남편과 아이들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웃사람들은 정작 주부인 자기에게 손가락질하지 않았던가? 남편과 아이들은 직장이나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며, 집에 돌아와 있는 시간은 잠깐이다. 하루 종일 집을 지키는 주부야말로 그 집의 주인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했는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남편이 주인이었다. 아이들은 또 온갖 것을 요구하고 종처럼 부리지 않았던가? 우리가 꼭 이와 같다. 분노라는 남편이 들어오면 분노에 휘둘리며, 증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분노다. 그러나 분노는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지 않는다. 분노는 객이다. 주인이 아닌 객은 한번 나가버리고 나면 어디로 가버렸는지 찾을 수도 없다.
분노가 떠나 버린 뒤, 그는 후회와 자책에 사로잡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분노를 붙잡아 처벌할 수 없으므로 법은 그 사람을 처벌할 수밖에 없다. 손님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주인이 책임을 지는 꼴이다.
‘사형 제도란 가장 악한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 가장 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란 말이 있다. 잔인성에 사로잡혀 살인을 저지르던 순간의 살인범을 처형하는 경우는 없다. 언제나 회개하고 참회하여 가장 선한 상태가 된 인간이 교수대에 선다. 살인을 저지르던 순간의 그와, 교수대에 섰을 때의 그는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마음이 그의 것이라면, 동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수시로 바뀌는 것이어서 언제나 착한 사람, 언제나 악한 사람이란 없다. 악인도 마음 속에 동정심과 자비심이 들어와 있을 때는 선행을 한다. 선한 사람도 분노나 욕정에 사로잡혀 악행을 하기도 한다. 사람은 순간 순간의 마음에 사로잡힌 꼭두각시라고 할 수 있다. 본심과는 무관한 일들을 저지르면서 살아가고 있는 꼭두각시 인형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다.
여자를 강간하는 순간, 강간범은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의 노예다. 욕정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그는 강간이라는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피동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강간했다’보다는 ‘욕정이 그를 강간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강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욕정이 아니라, 그라는 사람이다.
우리는 모든 집착과 욕망을 끊어버림으로써 마음이란 다루기 힘든 가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이라는 집은 생명체로서 내가 존재하는 전제다. 그러므로 마음을 완전히 떠난다는 것은 태어난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모든 욕망과 집착을 벗어버리고 마음을 지워버리는 일에는 생사의 초극이 수반된다. 마음이란 집을 떠나는 것은 바로 해탈심이며 열반이라 말할 수 있다. 해탈이라는 안식처를 준비하지 않는 한, 마음이란 집을 떠나는 것은 잠시일 뿐이다.
그렇다면 현명한 주부가 택할 길은 무엇인가? 바로 남편과 아이들을 잘 통제하여 평화스러운 집이 되도록 가꾸어 나가는 것이다. 가족과 자기를 한 몸으로 착각하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 주부가 술주정뱅이인 남편이나 사고뭉치 아이들과 같이 놀아버리면, 가족전체는 불화와 불행의 늪 속으로 잠기게 될 것이다. 현명하게 눈을 뜨고 있는 주부의 의지만이 가정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
“천하를 다스리기는 쉬워도, 한 가지 자기 마음을 다스리기는 어렵다”
여섯 번째 여행-마음과 기 2
마음과 기-2
기란 무엇인가?
마음을 찾는 여행이 바로 선이다. 그런데 마음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면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 가지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선이나 명상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이 신비스럽고 이상한 현상을 우리는 기(氣)라고 부른다. 이제 내가 마음의 여행 중에 체험했던 기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순서다.
불교식의 참선, 요가난다의 초월명상, 도교의 선도수행이나 단전호흡 등, 마음을 찾고 그것을 바르게 하는 데는 여러 길이 있을 수 있다. 어떠한 길을 가든, 마음을 다스리려면 수도자는 우선 육체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육체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구하고 바란다. 그 집착과 욕구를 제어하지 않고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다. 마음과 육체는 둘이면서도 하나로서 생명이라고 하는, 우주에서 가장 신비로운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마음이라는 정신계의 현상과 육신이라는 물질계의 조직체를 하나로 결합하여 생명이라는 더욱 고차원적인 통합체로 만들어주는 근원을 우리 선인(先人)들은 기라고 보았다.
기를 생명력의 근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기가 흐르는 것을 살아있다고 하고 이 기가 막힌 것을 죽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때문에 동양에서는 기가 생명의 척도요 살아있음의 증거였다.
기는 바로 영혼의 실체인 정보의 활동이며, 물질(생명체를 포함한)이 시공간 속에서 존재로서 발현되는데 필요한 두 가지 힘 중의 하나이다. 그 두 가지는 앞서 설명했다시피 만물이 서로 당기는 에너지와 만물이 서로를 알리려고 하는 정보다. 이 ‘서로를 당기는 힘’은 물리적인 에너지로서 측정되며 ‘서로를 알리려는 힘’은 바로 기라고 하는 것으로 감지된다.
에너지는 그 발원 물질의 성격을 담고 있지 않은 ‘힘’이어서, 석유를 태운 열이나 나무를 태운 열이나 에너지로서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석유의 기와 나무의 기는 다르다.
소나무를 태운 열과 참나무를 태운 열과 향나무를 태운 열은 서로 다르지 않으나 소나무의 기와 참나무의 기와 향나무의 기는 다르다. 에너지는 질량의 다른 모습이며, 기는 정보의 다른 모습이다. 물질은 에너지와 정보로서 존재하며 물질은 자체로서 바로 생명적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으면 기의 실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불가능하다.
물질은 에너지와 정보의 교환에 의해 하나의 존재가 되고 물질이 물체를 이룰 때 매 단계에서 보다 통합적이고 복잡한 정보 체계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질량(에너지)은 반드시 다른 상대와 정보를 공유하고 있어야 만이 물질로서 시공간 내에서의 존재로 남을 수 있는데 이 공유 상태의 활성화된 정보가 바로 기이며 이 양자가 분리되면 기는 비활성화된 정보로서 정신계에 남게 되고 물질은 에너지로 바뀐다.
기와 에너지의 비교를 조금만 더 해보자. 열에너지는 칼로리로 환산해서 계량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러나 어떤 열에너지를 감지해서 이것이 무엇을 태운 결과로 생긴 열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너지로서의 열은 세기만이 측정될 뿐 성격에 따른 차이는 없다. 사막에 사는 사이더와인더라는 뱀은 동물이 내는 체온을 감지해서 먹이를 찾고 공격하는데, 동물의 체온과 비슷한 온도의 물건을 헝겊에 싸서 던지면 이 뱀은 바로 문다. 즉 온도의 고저만을 감지할 뿐 열의 성격은 구분치 못하는 것이다.
이 뱀의 이름을 딴 공대공 미사일이 있다. 공군의 전투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미사일이 바로 적기가 내는 열을 추적해서 명중시키는 사이더와인더다. 이 미사일을 회피하는 방법도 역시 열을 이용하는 것인데 플래어라는 장치는 열추적 미사일이 따라오면 엔진의 배기열보다 더욱 강한 열을 발산하는 발열탄을 사출해서 적의 미사일이 이 열원을 따라가도록 기만하는 것이다. 미사일의 시커는 적기의 제트 엔진에서 나오는 열과 플래어가 뿜어내는 열의 차이, 즉 열의 성격을 구분하지 못하며 가장 높은 열을 내는 물체를 따라갈 뿐이다.
에너지로서의 열은 온도의 고저와 열의 양을 측정할 수 있을 뿐 열의 성격은 구분할 수 없다. 이것은 물리적인 모든 에너지가 마찬가지이다. 열이든 소리이든 빛이든 운동 에너지이든 모든 에너지는 세기만을 갖는다. 만약 열에너지에 고유한 성격이 있다면 열추적 미사일은 보다 정교한 추적 장치를 갖게 될 것이고 플래어와 같은 기만 장치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야간에 사물을 볼 수 있는 장치로서 열영상 장비가 있다. 이것의 원리는 사물이 각자 자기의 온도에 따라 적외선을 방사하므로 이것을 가시광선으로 바꾸어 캄캄한 밤에도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체가 내는 적외선의 파장은 물체의 온도에 따를 뿐이어서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과 같도록 정교하게 만든 마네킹에 옷을 입혀 놓으면 열영상 장치는 산사람과 마네킹을 똑같이 보여준다. 온도가 같기만 하면 적외선의 파장은 동일하다. 마네킹 속에 넣어놓은 전열선이 내는 열인지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인지 적외선 파장의 분석으로는 구별이 불가능 하다.
그러나 기는 이런 에너지와 분명히 다르다. 모든 기는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기의 세기뿐만이 아니라 성격과 발산체를 구별할 수 있다. 어떤 차단벽을 세워 놓고 그 뒤에 열을 발산하는 물건을 두었을 경우, 우리는 전해져 오는 열만으로 차단벽 저 쪽에서 나무가 타고 있는지 석탄이 타고 있는지 또는 전기로 내는 열인지를 알 수 없다. 또한 전해져 오는 온도와 열량을 잴 수 있는 측정 장치는 만들 수 있어도 그것이 어떤 열인지 구분해서 알아맞힐 수 있는 측정 장치는 만들 수가 없다.
하지만 차단벽 저편의 물체로부터 발산되는 기라면 구별이 가능하다. 기의 발산체가 살아 있는 사람인지, 식물인지, 광물인지, 사람이 것이라면 그것이 살기(殺氣)인지, 애정(愛情)인지, 적의(敵意)를 담고 있는지 호의(好意)를 담고 있는 지를 가릴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기가 물리적인 힘으로 측정되지 못함으로써 과학자들로부터 실체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일반인들 역시도 믿기 어려워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는 기가 왜 물리적으로 측정되거나 확인되지는 않을까. 왜 그럴까?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等價原理)는 아다시피 ‘질량은 바로 에너지와 값이 같다’는 것이다. 질량이 곧 에너지라는 이야기는 당시의 과학자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었으나 이제는 질량이 바로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곧 질량이라는 것이 과학적, 실험적으로 증명되어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을 비롯해서 질량과 에너지를 서로 치환시키는 실험에 몰두했던 앤더슨(C.D.Anderson)이나 세그레(P.W.Segre)와 같은 유명한 학자들조차도 이 세계의 또 하나의 요소인 정보(정신)의 존재를 간과하고 있다. 원래 물리학은 질량과 에너지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했고 이 두 가지가 우주를 이루는 본질인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등가원리 이후에 질량과 에너지가 같은 것이라고 밝혀지자 이제 물리학적으로 우주는 한가지로 이루어진 것으로 변해버렸다. 즉 질량이며 에너지인 어떤 것이 우주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는 한 가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에너지 또는 질량이라고 말하는 것과 정보(정신)라는 것의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앞에서 에너지는 정보를 상실한 물질이라고 설명했다. 유감스럽게도 물리적인 질량 개념은 정보의 요소를 빠트린 것이라는 허점 때문에 양자물리학이 더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가져왔다. 때문에 물리학은 물질에 대한 규명을 할 뿐, 물체와 생명에 대해서는 답보 상태다. 물질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보는 입자들 사이에서만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모든 것과 정보를 교환하며, 물체를 이룸에 따라서 점차 복잡하고 다층적인 정보 체계를 이룬다. 물리적으로 물질의 분자 구조를 파악해서 철, 수은, 규소 등으로 밝힐 수 있고 분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물리학은 그런 물질들이 섞인 물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물리학자에게 벽돌 두 장을 주고 차이점을 설명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까? 물리학자는 우선 그 벽돌을 잘게 부수어서 성분에 대한 조사를 할 것이다. 모래가 몇 퍼센트인지 흙이 몇 퍼센트인지 금속 성분은 어떤 것이 얼마나 섞였는지 강도는 어느 정도인지 등을 밝혀서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분석은 원래의 벽돌이 무엇이냐에 대한 답과는 거리가 멀다. 흙과 모래와 짚을 섞어 반죽해서 구운 벽돌이라고 하면, 벽돌에 들어간 원래의 흙은 흙대로 모래는 모래대로 짚은 짚대로 자기의 고유한 성질(정보)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들을 반죽해서 하나로 뭉쳐놓아도 물리적으로는 각각의 구성 물질은 고유한 성질을 가진 채 엉겨있을 뿐이다. 모래가 다른 것으로 변한 것도 아니고 짚이 쇠로 변한 것도 아니다. 벽돌을 분석해 보아야 구성 성분과 혼합 비율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구성 성분에 대한 규명이지 벽돌에 대한 규명은 아니다. 부수는 순간 이미 벽돌은 벽돌일 수가 없다. 때문에 정보(정신)라는 개념을 가지고 생각할 때는 구성 물질의 성분에 대해 분석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 가능하다.
벽돌에는 고유한 기가 있다. 붉은 벽돌과 시멘트 블록과 흙 벽돌은 서로 기가 다르다. 화강암과 대리석의 기도 다르다. 화강암과 대리석을 부수어서 그 가루를 서로 섞어서 쌓아 놓으면 그 가루 더미에서는 화강암도 아니고 대리석도 아닌 새로운 기가 발산된다. 옥은 옥대로 구리는 구리대로 물은 물대로 고유한 기가 있다. 같은 물이라도 청탁(淸濁)과 성분에 따라서 기가 다르다. 동양인들은 이런 사실을 수천 년 전부터 알고 있어 왔지만 서양인들에 있어서 물은 H2O 한 가지 뿐이다.
한국 인삼의 신비한 효능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기 위해 분석적인 방법들을 동원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인삼의 몇 가지 고유한 성분이 추출되어 알려졌지만 그것이 인삼인 것은 아니다. 인삼을 갈아서 원심분리기에 넣고 파악한 성분들을 인삼의 구성 비율대로 섞은 것을 먹으면 인삼을 복용한 것과 같은 효능이 있을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인삼의 효능은 성분들 각각의 약리 작용이 아니라 인삼의 총체적인 기에서 나온다. 인삼과 산삼을 구성 비율로 분석하면 몇 종류의 성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삼의 효능과 산삼의 그것은 천양지차가 있다. 예로부터 중국은 고려 인삼을 귀하게 여겨 공물과 교역의 가장 중요한 품목으로 삼았다. 중국인들은 인삼을 가져가 재배를 해보려고 했지만 인삼은 한국 땅 외에는 인삼으로 자라지 않는다. 인삼과 비슷하게 생긴 엉뚱한 식물 뿌리일 뿐이다. 요즘도 중국에서 수입되는 인삼은 약재상에서 인삼으로 치지도 않는다. 왜 그럴까? 중국의 흙과 우리 나라의 흙을 원심 분리기에 넣고 분석해서는 별반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인삼은 중국 흙에서는 도라지가 돼버린다.
한국과 중국의 인삼은 기가 다르다. 자란 땅의 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삼의 효능은 성분이 아니라 인삼의 기를 먹어서 체내에 흡수하는 데서 나온다. 서양의 약학은 이 사실을 도외시하고 있다. 인삼의 성분을 화학적으로 제조할 수는 있지만 인삼 본래의 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므로 같은 효능을 가진 인공 인삼을 공업적으로 생산하는 건 불가능하다
. 그것이 가능하다면, DNA를 구성하는 원소들을 이중나선 구조로 조립하기만 하면 생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인삼을 구성하는 모든 성분을 밝혀서 그 비율대로 준비하는 것은 인삼을 창조(?)하기 위한 첫 단계의 작업임에는 틀림없다. DNA를 구성하는 원소들을 유전자 형태대로 조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원소들을 꿰맞춘 유기 물질이 어느 순간 자기 복제를 할 때까지 기도를 할 것인가? 인삼 성분의 혼합물에서 잎이 나오도록 굿을 할 것인가? 부수어서 모래와 시멘트와 흙과 짚 성분으로 나누어 버리면 벽돌은 이미 그 벽돌이 아니고, 갈아서 원심 분리기에 넣고 돌리면 인삼은 이미 그 인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성 성분들이 물리적으로 흩어지는 순간 그 물체의 기도 같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성분 물질들을 물리적으로 한번 분리시키고 나면 그 구성분들을 다시 하나로 모은다 해도 기라는 측면에서는 원래의 물체와는 달라진다. 부수었을 때 생긴 골재 더미와 원래의 건물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부숴버린 건물의 골재 더미로 원래의 건물을 다시 지을 수 없는 것처럼 한번 분리시킨 성분 물질로써 원래의 물체를 그대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기라는 측면에서는 그렇다.
최근에 복제양 둘리가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복제한 양과 원래의 양은 같은 양인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두 개체는 같은가? 외모와 육체적 특질은 일란성 쌍둥이보다도 더 동일하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양이 아니다. 그것은 기라는 점 때문이다. 원래의 양과 둘리는 태어난 시간과 자란 시기가 다르다. 배양된 상황도 다르다. 때문에 두 양의 기는 유전자의 동일성과 관계없이 다르다. 기가 틀리면 두 양은 다른 양이다. 물론 아뢰야식의 경우에는 두 양의 동질성이 있을 것이다. 하나의 아뢰야식을 두 생명체가 공유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복제되어 유전자가 같은 두 생명체는 다른 아뢰야식의 존재냐 하는 것은 좀 더 규명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러나 기에 국한시켜 말할 때 이 둘은 같을 수 없다.
물질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정보는 물리적인 결합만이 아니라 단지 위치적인 결합만으로도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고 공유하며 그 구성 성분들의 정보가 공유되면서 새로운 정보를 형성한다. 바닷물과 강물을 하나의 병에 섞어 놓으면 전혀 새로운 기가 생긴다. 물을 흙에 부어 반죽하면 흙의 정보와 물의 정보가 섞이면서 혼합물의 새로운 정보를 만든다. 진흙 덩어리의 기가 생긴다.
이 기는 입자들의 물리적인 결합 상태와 혼합물로서의 구성 요소의 두 가지에 따라 성격이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기라는 것은 어떤 물질이 결합한 상대를 인식하는 정보가 활성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인식 정보의 공유는 생명체이거나 비생명체이거나에 관계없는 모든 것의 본질이다. 돌은 돌로서, 돌과 흙이 쌓인 흙무더기로서, 쓰레기 더미는 쓰레기 더미로서, 산은 산으로서, 지구는 또 지구라는 하나의 통합체로서 고유하면서 중첩된 기의 발산체다. 확대하면 태양계는 태양계의 기가 있고 은하계는 은하계의 기가 있으며, 이 모든 기의 통합체로서 우주의 기가 있다.
기의 본질은 에너지와 함께 물질을 구성하는 정보다. 그 정보는 끊임없이 자기의 정보를 주위에 전달하고 주위의 정보를 받아들이며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면서 새로운 통합 정보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 정보의 활동과 작용이 감지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느끼는 기라는 것이다. 때문에 에너지만을 물질의 본질로 간주하는 물리학은 이것의 존재에 대해 무지하며 무지하므로 부정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기를 인정하는 것은 ‘모든 사물은 본질적으로 정신력을 가진 생명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구의 기독교 신앙과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구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우리 앞에 던져지는데 그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즉, 생명체란 기가 흐르고 있는 상태이며 비생명체는 기가 멈추어있는 상태이라는 것이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멈추어 있는 상태의 기란 없다. 모든 기는 상대와의 주고받는 활동 속에서 발산되고 있는데, 하나의 폐쇄회로 속에서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다면 그것을 생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과 같은 크기로 돌로 새긴 사람의 조각이 있다면,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기가 있고 돌로 만든 조각에는 기가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조각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대리석의 기가 있고 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옥의 기가 있다. 또 같은 대리석이라고 해도 대만산 대리석과 이탈리아산 대리석의 기가 다르며, 같은 대리석으로 조각한 것이라 해도 누가 조각한 것이냐에 따라 조각품의 기가 달라질 수 있다.
한 스님의 달마도가 수맥을 차단한다 해서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모든 달마도가 그런 기운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성화(聖畵)도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십자가나 마리아상에서도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십자가나 마리아 상은 아니겠지만...
이런 사물에서 영적인 기가 특별하게 나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하다. 하나는 1천 년 전 사람인 달마의 영적인 기운이 그림 속에 들어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림을 그린 스님의 기가 그림 속에 인입된 경우이다. 후자라면 스님이 달마가 아닌 소나무나 난초를 친다 해도 같은 현상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라면 달마도만의 신비스러운 현상이 되겠다. 그러나 달마의 영적 기운과 교감할 정도의 스님이라면 스님의 그림에는 이 양자가 모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조각된 돌이나 그림과 살아 있는 사람의 차이는, 조각이나 그림의 기는 물체 내부에서 흐르지 않으나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는 기가 인체라는 패쇄 회로 속에서 순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의 흐름이 막혀서 정지하면 생명체는 죽음의 상태로 바뀐다. 당연히 생명체일 때의 기와 시체의 기는 달라질 것이다. 물론 순환하는 기이건 정지된 기이건 자신의 외부로 기를 발산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구리나 옥돌과 같은 물질의 기는 사람의 몸에 전해질 수 있고 이 기가 사람의 몸에 전이되면 사람의 기는 약간 성질이 바뀌게 된다. 물론 사람의 기를 이런 물질에 전이시켜 물질의 기를 바꿀 수도 있다. 시중에 판매되는 기공제품(氣功製品)의 대부분이 사람의 기나 자연 상태에서 채집한 좋은 기를 주입한 것이다.
기를 물체에 집어넣는 과정은 자석의 가까이에 쇠붙이를 갖다 대면 자성이 전이되어 쇠가 자석으로 변하는 것과 흡사하다. 차이라면 쇠붙이의 자력은 물리력으로서 측정이 가능하지만 기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차이 뿐이다.
또 한 가지 기의 특성은 전기에 대한 도체의 그것처럼 외부의 기에 대한 저항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저항은 자성(自性)이 강한 물건일수록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특히 자성이 강한 것 중의 하나가 옥이다. 그래서 옥돌로는 기공제품을 만들기가 무척 어렵다. 가장 손쉬운 것은 은이나 구리 그리고 유리제품이다. 유리는 자성(自性)이 거의 없어서 기를 넣는 대로 쉽게 받아들인다. 구리도 쉽게 기를 집어넣을 수 있는 재료이다. 물도 기를 쉽게 받아들인다. 물이나 은, 구리 같은 것은 모두 전기를 잘 통하는 성질이 있는 도체다. 그러나 유리 같은 절연체에도 기가 잘 통하는 것을 볼 때에 반드시 전도성과 통기성(通氣性)이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은 기가 전기적 특성과는 다른 것으로 보이는 일면이다.
전기적 반응은 전도체만이 일으키지만 기라는 것은 전도체이건 비전도체이건 금속이건 나무이건 흙이건 우주의 모든 물체에 예외 없이 나타나는 기운이다. 이 기운은 대별하면 화수목금토의 오행으로 나눌 수 있고 각각은 양의 기와 음의 기로 나뉜다. 오행 상극의 이치는 이 기의 작용을 깨달아 밝힌 것이다.
전기는 도체를 통과할 때에 반드시 열을 발생시킨다. 도체의 저항이 전기 에너지를 열로 바꾸기 때문이다. 기의 통과에도 이런 저항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기가 충돌할 때에도 어떤 기운이 생긴다. 그것은 열이 아니라 오행의 기가 서로 반응하면서 생기는 새로운 성질의 기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심각한 의문이 생긴다. 기가 어떤 물체의 정보라면 기가 바뀌면 물체가 변화하는가이다. 구리 조각에 어떤 기를 주입하면 이전과 이후의 구리는 분명히 기의 세기와 성질이 바뀐다. 그런데도 구리는 여전히 구리이며 물리화학적인 구리의 분자 구조나 질량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이 기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비유해서 구리에 전기가 통하고 있다 해도 구리는 여전히 구리이다. 전기를 통하다가 끊어도 그 전이나 후의 구리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전기가 통하고 있을 때의 구리는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물건이다. 또 자성(磁性)을 갖게 해서 자석이 되더라도 원래의 쇠는 금속으로서 변함이 없다.
기도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기가 주입되더라도 본래의 자성(自性)은 바뀌지 않으며 본유자성과 주입된 기가 조화된 새로운 기의 발산체가 된다. 그것은 전자석(電磁石)의 원리와 비슷하다. 즉 코일을 감은 도체에 전기를 흘리면 도체가 자석이 되는 것과 비유해서 말할 수 있겠다. 사람의 기를 물건에 주입시키면 전기를 흘리고 있는 도체에서 자성이 발생하듯이 물건에서도 같은 기가 발산되는 것이고 금속으로 자석을 만들 듯이 특정한 기의 발산체를 만들 수도 있다. 자석의 자력이 소모되는 힘이 아니듯이 이런 물체에 주입된 기도 시일에 따라 약해지거나 소멸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물질은 의식적이지 않더라도 서로의 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영향을 받는데, 사람은 의식의 집중으로서 자신의 기를 타인이나 다른 물체에 전달할 수가 있고 또 다른 물질이나 타인의 기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것은 에너지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외부의 열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열에너지로 사용해서 살아간다. 인체는 영양소를 분해해서 발생하는 생물적인 에너지를 사용하지만 그것만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며 외부의 열도 받아들여서 사용하고 있다. 동사(凍死)는 몸속에서 만들어내는 열보다 주위에 빼앗긴 열이 더 많아서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죽음이다.
독일은 2차 대전 중에 차가운 바닷물에 빠져 얼어죽기 직전의 조종사를 살려내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유대인을 피실험자로 삼아 여러 가지 생체 실험을 행했다. 이 연구 중에 밝혀진 것은 동사자의 생명을 되살리는 방법 중에 온수에 담그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었던 것이 따뜻한 사람의 몸으로 안아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해 준다. 하나는 외부의 열이 인체에 그대로 활용된다는 것이다. 생명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공급되는 열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얼어서 기능을 정지한 인체의 기능이 다시 동작하기 전에 외부의 열만으로 회생을 한다는 것은 인체가 외부 에너지를 내부의 것처럼 이용한다는 이야기다. 특기할 사실은 온수보다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이 훨씬 효과적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온수에 담그는 것과는 달리 살아 있는 사람이 안았을 때는 열과 함께 기가 전해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인체가 자신의 열(에너지)과 주위의 열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 주의의 사물과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 또한 기는 물리적인 에너지와도 상호 영향을 받는다. 같은 물체에서 나오는 기도 여름과 겨울에 서로 다르다. 기온에 따라 이의 움직임이 바뀌는 것이다. 절대온도(섭씨 -273도)에서 물질이 증발하는 이유는 물질의 정보가 소멸되기 때문이다. 기는 온도가 높으면 활발해지고 낮아지면 둔해진다. 그래서 사물의 기가 가장 생동하는 시기가 봄이다.
추위에 몸의 열을 빼앗기면 얼어죽는 것과 같이 기도 일시적으로 과다하게 소모하거나 빼앗기면 탈기하여 죽음에 이를 수 있다. 기의 수련에서 체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기를 단기간에 타인이나 다른 물질에 쏟으면 피곤해진다는 것이다. 이때의 피로는 몸을 많이 움직였을 때와 비슷하다. 그리고 소모된 기의 보충은 근육 에너지를 사용했을 때처럼 음식물의 섭취가 필요하다. 물론 기의 운행이나 집중을 위한 명상도 도움이 된다. 음식물뿐만 아니라 주변의 기를 흡수하여 소모된 기를 보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주변이란 의미는 공간적인 위치 개념의 주변이 아니다. 기는 정신의 영역인 정보계의 것이어서 역시 그것의 보충도 시공간 내가 아니라 정신계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공간적인 주위라는 의미는 자기가 기를 끌어올 수 있는 정신계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기 수련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그 영역은 우주의 근원에 가까워진다.
부처나 예수의 기가 그러한 우주의 근본기(根本氣)였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지고지순한 기는 능히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지구에서 살므로 지구라는 혹성의 고유한 기를 늘 받고 있다. 동시에 자기가 사는 집에 가까이 있는 산의 기운도 받고 있으며 발밑의 땅의 기운도 받고 있다. 물론 가까운 강의 기운도 받는다. 가족들의 기도 서로 주고받는다. 우리가 모여 사는 한민족이라는 혈연 공동체 전체의 기운의 일부이면서 그 기운에 자신의 것을 보태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광활한 전우주의 기운도 받는다. 부모와 형제의 기운은 물론, 2천5백년 전에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기도 우리는 받을 수 있다. 예수의 기도 마찬가지이다.
산과 물과 바람의 기운을 따지는 풍수지리는 근거 없는 미신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다. 물론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땅에 사는 우리 자신의 기다. 산의 기가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나의 기도 역시 산에 영향을 미친다. 묘지 터가 죽은 이의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면 죽은 이의 기 역시 자기가 묻힌 땅의 기를 바꾸는 것이다. 풍수지리가 절대적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상대성 때문이다. 어떤 흉가도 부처가 살면 명당이다. 부처가 터를 골라 살 것이며, 고승이 묻히는 자리에 따라 극락에 가고 지옥엘 가겠는가? 이 땅이 아무리 빼어난 금수강산이라 할지라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축생처럼 살면 축생계요 사막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부처처럼 살면 극락정토가 될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기가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 보자.
과학적 방법으로 수소 분자 하나의 질량이나 에너지는 밝힐 수 있으나 수소로서의 특성을 갖게 하는 정보의 내용은 밝힐 수가 없다. 단지 어떤 특성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수소이다라고 정의될 뿐이다. 그런 특성을 나타내게 하는 정보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이 불가능하고 또 물리적으로 조합해낼 수도 없다. 이미 수소로서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수소인줄 알 수 있으나 수소가 가진 정보를 만들어서 수소를 창조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수소와 산소를 결합시켜서 우리는 물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물의 성질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가 없다. 물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내용은 영원히 불명이다.
뉴튼의 만유인력은 모든 물체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 힘을 우리는 중력이라고 부른다. 우주의 근원적인 에너지가 바로 중력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우주의 종말에 가서 중력이라는 하나의 힘으로 뭉쳐진다. 따라서 에너지의 본질은 물질간에 서로 당기는 힘이다. 우주 에너지가 중력으로 나타난다면 우주의 정보는 무엇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정신계에서 정보는 업력으로 작용한다고 앞서 설명했다.
그런데 시공간 내에 발현되는 현상으로서의 정보는 기라고 정의할 수 있다. 모든 물질의 에너지는 서로 당기려는 힘인 중력으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물질의 정보는 서로에게 자신을 알리려는 힘으로 나타난다. 에너지는 만물을 끌어당기고 정보는 만물간에 서로를 알린다. 이 물질의 정보가 아(我)를 타(他)에 알리려는 힘을 나는 업력(業力)이라고 하여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 이 정보의 근원적인 전달력을 나는 기라고 본다. 중력이 물질의 본질이라면 기도 물질의 본질이다. 우주는 서로를 당기는 중력만으로 성립한 게 아니라 중력과 정보의 전달력이라는 두 가지 힘으로 성립되어 있다.
모래를 뭉쳐서 벽돌을 만들면 벽돌은 크기, 즉 질량만큼 중력을 갖는다. 동시에 벽돌을 구성한 모든 물질의 정보만큼 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질량과 에너지는 등가인 것과 마찬가지로 정보는 기와 등가다. 즉 정신력이 기인 것이며 정신력은 우주 만물에 내재하고 있음이다.
중력이나 열과 같은 에너지는 그 세기를 측정할 수 있다. 1백칼로리의 열이 할 수 있는 일의 양은 일정하다. 지구의 중력이 물체를 끌어당기는 중력 가속도 역시 일정하다. 이것은 물리적인 법칙에 의해 하나의 고정적인 값을 가진다. 그러나 기는 정보이며 정신력으로서 서로를 알리고 또 알고자 하는 힘이다. 정보의 전달력(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물리적인 측정 장치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기는 세기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가 내포하고 있는 정보의 내용이라는 문제가 있어서 물리적인 측정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어떤 물질을 규명하는데 분석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분자의 구조를 분석함으로서 우리는 어떤 물질인지를 판정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몇 가지 간단한 실험이나 목측으로서도 알 수 있겠지만 사실 금속이나 나무도 천차만별인 것이어서 분석적인 방법에 의하지 않고는 정확한 판별이 불가능하다. 톱밥만한 나무의 조직을 가지고 이것이 참나무인지 오동나무인지 향나무인지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를 통해서 이것을 판별하는 것은 분석법보다 쉽고 빠르다. 향나무와 오동나무는 각각 기의 성질이 다르며 기공수련을 했고 여러 나무의 기를 아는 사람이면 조그만 목편을 가지고도 어떤 나무인지를 가려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기의 측정과 판별을 자동적으로 해낼 수 있는 장치의 개발이 이루어진다면 물체가 발산하는 기의 성질이나 파장 또는 진동을 분석해서 그 물체가 무엇이며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의 측정법과 장치의 개발은 요원한 일로 보이고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앞서 설명한 것처럼 마음이란 남이 절대로 알 수 없는 기밀성을 가진 것이고 기가 마음과 유사한 정신적인 정보라고 볼 때에 계측의 방법이 난감해진다는 것이다. 마음이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 바뀌는 것처럼 기도 수시로 바뀌는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우리 어머니들이 정안수를 떠놓고 군에 간 아들의 무운을 빌 때에 반드시 새벽에 길어온 물을 가지고 했던 이유는 같은 물이라도 새벽에 길은 물이 더욱 기가 맑고 깨끗하다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물건은 태양의 운행과 달의 운행 그리고 우주 자체의 기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데 따라 하루 중에도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보름달이 뜰 때에 강력 사건이 많이 발생한다는 통계는 달의 기운이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증거이다. 어떤 물질의 질량이나 물체의 구성은 바뀌지 않고 불변이라도 그것의 기는 측정하는 시기와 우주적인 조건의 상태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는 것이 그것의 측정을 어렵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다음의 문제는 이 기가 생명체의 것일 때는 감정에 해당하는 정보를 갖는다는 점이다. 생명체가 느끼는 분노나 연민이나 슬픔이나 정욕 같은 것은 측정의 단위를 부여하기가 불가능한 힘이다. 적개심 또는 살의와 같은 정보는 단위를 가진 값으로 산출하기가 애매한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수긍을 할 것이다.
기에는 생명체의 감정적인 정보가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이 자신을 보존하고 종족을 유지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생명력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의 씨앗이 발아해서 싹을 틔우는데 필요한 생명력이 정확한 값으로 계산될 수 없는 것이다.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정욕의 세기가 열이나 전기 에너지처럼 계산 가능한 값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질량의 값인 에너지는 질량이 측정 가능하므로 산출될 수가 있다. 그러나 정보의 값인 기는 정보의 계량이 불가능하므로 그것의 산출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실제적인 힘으로 현상계에 존재하므로 생명력의 고양에 쓸 수도 있으며 전기나 열과 같은 에너지로서 물질계에 작용시킬 수도 있다. 물론 기가 에너지로 발현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기도 계측이 가능할테니까. 기가 에너지로서 물질계에 작용한다는 의미는 물질계의 에너지를 특정한 형태로 특정 장소에 작용하도록 만들 수 있다
는 뜻이다. 실제의 힘으로서 나타난 에너지와, 그것을 나타나게 만든 기를 혼동함으로서 사람들은 기의 정체에 대해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를 전기와 같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열에너지와 비슷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전자파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정보인 기는 계측 가능한 형태로 나타날 수가 없다. 다만 그런 실제적인 에너지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동양의 선인(仙人)들은 기의 성질 가운데서 생명력에 가치를 두어 기를 강하게 함으로써 건강을 지키고 정신을 바로잡는 수도와 양생의 방편으로 삼았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세계로서만 보존되어 온 반면 서양인들은 보편적이고 증명적인 시각에서 기의 실체를 연구해 왔다.
미국 예일대학의 해부학 교수인 해롤드 박사나 소련의 세르게이예프 박사와 같은 사람 들은 기를 일종의 전기적인 에너지장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러한 생체의 에너지를 측정하는 장치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 에너지장은 특수한 장치를 통해서 오로라와 같은 빛으로 확인이 된다고 하여 이런 오로라를 촬영하는 장치가 소련의 전기기술자인 킬리언과 그의 아내인 발렌티나에 의해 개발되기도 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했다.
그러나 나는 킬리언 사진기에 의해 촬영된 오로라가 기라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킬리언 사진은 생명체를 놓고 찍은 것이며, 기라는 것은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구별 없이 만물에 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킬리언의 영상이 기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오로라는 기가 빚어내는 현상 중의 하나이지 그것이 바로 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70년대 후반부터 부쩍 활발해진 중국의 연구는 기를 미립자상태의 적외전자파 또는 일종의 생물 전류로서 파악한 논문들을 내놓고 있으며 이것을 뒷받침할만한 사례들도 무척 많다. 외국에서 이루어진 기의 연구 중에서 구체적인 사례 가운데 한 가지가 소련의 유명한 초능력자인 니나 그라기나다. 구소련은 심령 과학자들을 동원해서 기의 발산으로 요인을 암살하거나 적성 국가의 지도자들을 원격으로 마인드 콘트롤하여 정책 결정을 조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기나 심령 현상에 의한 초능력에 대해서도 상당히 축적된 자료를 가지고 있다.
소련 사람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초능력자인 니나 그리기나는 염력으로 개구리의 심장을 멎게 만들기도 했다. 1970년 3월 10일 레닌그라드의 세르게예프 교수의 측정 하에 행해진 실험에서 심전계와 연결된 개구리의 심장을 15분간의 정신 집중으로 멈추게 만들었는데, 이때 개구리의 심전도의 변화기록을 살펴본 세르게예프는 갑작스런 전류의 충격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형태를 나타냈다고 한다. 인간의 기가 전기적 에너지로서 나타나는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니나 그라기나의 마인드 파워(기능력)를 영국의 초물리학 연구실장인 벤슨 하버드는 자기의 팔을 잡은 그녀의 손에서 견디기 힘들 정도의 열기를 느꼈으며 그 열 현상은 적외선 필름에 찍혔다. 하버드는 그녀의 마인드 에너지를 감각적으로는 순수한 열이고 성질로서는 전기라고 말했다.
1979년에 “소련에 있어서의 초심리학”을 저술한 라릿사 비렌스카야 여사는 “니나 그라기나의 심리, 물리학적 효과-주변물체에 대한 원격 영향력”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니나가 물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어떤 수단에 의해서 3백80그램의 물건을 2미터 움직일 수 있었고 30그램의 물체를 공중에 띄우기도 했다는 실험 관찰 결과를 발표했다. 니나의 실험에서 그녀와 그녀가 움직인 물건의 사이에 여러 차단제를 사용했는데 물, 종이, 유리, 플라스틱, 도자기, 납이나 알미늄 판 등의 차단은 힘의 행사에 장애가 되지 못했고 다만 진공 상태의 투명 상자 속일 때는 힘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실험의 결과로 볼 때에 니나의 힘은 전기와 비슷하면서도 전기와는 사뭇 다른 무엇이라고 느끼게 만든다. 우리 나라와 중국의 기 수련자들이 시현하는 능력들을 살펴볼 때도 전기적인 힘과 비슷하게 보이는 것도 있으며 전기와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힘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 기 능력자가 기를 외부로 발산할 때 수련의 방법과 본인의 체득한 경지와 수준의 차이에 따라서 약간씩 상이한 형태와 성격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현상 중에서 수상쩍은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건 염력(念力)이라고도 하는 정신동력(精神動力)이다. 니나 그라기나가 보여준 초능력 중에서 물체를 공중에 띄우거나 옮긴 것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니나 그라기나는 자신의 여러 능력 중에서 이 물체 이동이나 공중 부양에 대해서는 보여주기를 무척 꺼려했으며, 특히 엄밀한 실험 환경 속에서의 시현은 한사코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체가 이동하는 데는, 물체의 질량×속도만큼의 힘이 가해져야 한다. 그리고 힘의 전달 매체가 필요하다. 당구공 두 개가 부딪힐 때처럼 운동 에너지를 가진 물체로부터 전달을 받거나 바람과 같은 공기압에 밀리거나 고속철처럼 자기력에 의한 부양이거나 자유 낙하와 같은 중력이거나 간에 물리적인 힘의 개입 없는 이동은 ‘관성의 법칙’에 위배된다는 점에서 시공간내에서 구현될 수 없는 것이다.
앞서 말한 전기나 열과 같은 것은 물리적 세계에 존재하는 에너지이고 기가 이런 물리 세계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모으거나 발산하게 하는 원초적인 작용이 된다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공중부양이나 공간이동은 그 실제적인 작용력이 물리 세계에 존재하는 형태의 힘이 아니라는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이것이 정말 가능하다면 기가 물리적인 에너지를 움직일 뿐만 아니라 기 자체가 물리적인 힘처럼 시공간 내에서 작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물리학의 근본 토대가 무너지고 만다. 아인슈
타인의 ‘등가의 원리’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등가의 원리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다.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우주 질량의 합과 같으므로 우주의 전체 에너지 양은 불변이라는 원칙이다. 따라서 모든 물리적인 에너지는 물질의 질량에서 나온다. 그런데 만약 질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정보계의 힘(기)이 물리적인 힘으로서 물리 세계 내에 인입된다면 그때마다 우주 에너지의 총량은 미세하나마 증가한다는 말이 되어 버린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기가 시공간 내에서 어떤 물리적 에너지를 동원하여 사용하게 되면 소모된 에너지는 시공간 내에서 보충된다. 기 능력자의 신체에서 칼로리가 소모되어 그만큼 피곤하게 된다. 손으로 돌을 들어올린 것이나 기를 이용해 에너지를 동원한 것이나 양자는 모두 물리 세계의 에너지라는 데는 동일하다. 그리고 그것은 소모되는 만큼 물리 세계 내에서 보충된다. 에너지는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형태만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기가 직접 에너지로 사용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물리적이지 않은 힘이 물리 세계의 어떤 물체에 작용해서 물리적인 힘이 가해졌을 때처럼 옮기거나 띄울 수 있다는 것은 물리 법칙의 수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어떤 기 수련 단체의 사람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세로 공중에 떠오를 수 있다고 떠벌이고 다닌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 공개했고, 언젠가는 직접 시연을 하겠다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해보인 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보려고 갔던 사람들은 모두 실망만 맛보고 돌아와야 했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공중부양이 아니라 앉은뱅이 뜀뛰기 같은 것이었다.
기를 이용해서 물리적인 에너지를 응축해서 신체의 아래에 작용시켜 공중에 뜬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는 논리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예외없는 원칙이다. 사람의 몸이 바위 위에서 뜬 채 머물고 있다면 그 순간 신체와 바위 사이에는 서로 밀어내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가 공기를 압축시켜 몸과 바위 사이에 눈에 안 보이는 방석을 깔았다 치더라도 그 주변의 공기압력의 변화는 분명히 물리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사람의 몸은 뜨면서 바위 위의 돌가루들은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건 공기압과 같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건 무엇인가? 가능한 일인가? 당연히 불가능하다.
무협지에서 흔히 나오는 장풍을 할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도 장풍의 시현은 물리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장풍을 상대에게 보내서 밀어낸다면 상대가 밀리는 것과 똑같은 힘을 장풍을 보내는 사람도 받는다. 그렇다면 체중이 같은 두 사람인 경우 상대가 밀리는 만큼 자기도 밀리게 된다. 이건 공력과 상관없는 문제이다. 만약 여러 사람한테 장풍을 보내면 상대방들이 밀리기 전에 자기가 먼저 뒷걸음치게 된다. 여러 사람을 합한 것보다 더 무거운 초헤비급 중량의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장풍의 위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밀려서 자빠지는 것은 장풍을 보내는 사람 쪽이 될 것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까지도 초월하는 초자연적 힘이 물리 세계 내에서 구사될 수 있다면 이것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깨고 등가원리를 파괴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장풍이 우주를 파멸시키게 될 것이다.
과거 영매들이 강령회에서 테이블이나 의자를 공중에 부양시키는 장면을 흔히 연출했는데 알려진 바와 같이 그것들은 모두 사기였다. 마술의 트릭과 완전히 똑같은 것이었다. 마술 쑈보다 훨씬 컴컴한 곳에서 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마술보다 더 유치하고 조잡한 사기극이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기가 물리 세계 내의 에너지를 움직일 수 있지만 물리적이 아닌 어떤 힘으로 기가 직접 발현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그것은 사기라고 단정지어도 좋을 너무나 많은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기의 느낌은 어떠한지 알아보자. 필자의 경험적으로 그것은 소름이 끼치는 느낌과 흡사하다. 혹은 급박한 상황에서 몸이 느끼는 전율과 같은 것도 있다. 더러는 열처럼 뜨겁게 느껴지는 것도 있다. 가장 일반적인 느낌은 몸에 전기가 흐르는 기분과 비슷하다. 자연계의 광물들 중에서 전기가 가장 잘 통하는 물질인 금, 은, 구리에서 인간이 체감할 수 있는 기가 강하게 발산된다는 데서도 기와 전기의 연관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아마 그것은 인체가 일종의 전기적 원리로 움직이는 구조이기 때문에 도체와의 교감이 쉬운 탓이 아닌가 싶다.
은반지나 은수저, 또는 은식기가 특별히 몸에 좋다고 하는 건 은의 기운이 인체에 잘 작용하기 때문이고 구리판을 몸에 부착하는 기 치료법을 시행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래서다. 금반지나 금목걸이, 금팔찌들도 착용법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아직 과학적인 검증이 남은 문제이기는 하나 기 수련을 어느 정도 한 사람들은 이런 전도체 물질에서 기가 강하게 발산됨을 안다. 비전도체인 광물이나 목재 또는 흙의 기는 전기적이지 않은 특성을 보인다. 그것은 오히려 바람과 같은 기운이다.
생명체, 특히 동물의 기가 전기와 비슷하게 발현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얼마나 전자 제품과 동일한 원리로 기능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동물의 육체는 하나의 전자제품이라는 것이다.
도체에 전선을 감고 전류를 흘리면 도체 주위에 자장이 형성된다는 것은 플레밍의 법칙이다. 이때 전선을 감아 놓은(코일)속의 도체(심봉, 주로 구리를 많이 사용한다)를 왕복시키면 자장이 변화하면서 심봉의 움직이는 횟수에 따른 주파수를 가진 자장의 물결(파동)이 생겨난다. 심봉을 단순한 도체가 아닌 자석으로 만들어 코일 속에서 회전시키면 코일에 전기가 발생해서 흐른다(이것이 발전기의 원리이다). 왜 이런 물상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인간의 기가 이런 원리에 지배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몸은 하나의 도체이고, 늘어놓았을 때 수십만 킬로미터나 되는 신경망은 도체에 감아 놓은 코일과 같다. 미세한 전선으로 도체를 겹겹이 감아 놓은 코일에 전류가 흐르고 있는 것이 신체다. 신경망의 신호 전달 원리는 전선에 신호가 흐르는 원리와 완전히 같다. 그것이 생화학적 전기라는 차이 뿐이다. 때문에 도체(신체)의 주위에 당연히 자장이 발
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특히 강하게 발생하는 것이 두뇌이고 뇌조직에서 감지되는 것이 바로 뇌파다. 그러나 이러한 전기적 자장은 두뇌만이 아니라 인체의 전부에서 발산되고 있다. 생명체는 이런 기의 자장에 쌓여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가 신경망을 통해 흐르는 생물 전기가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국한시켜 말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그렇지가 않다. 기가 외부로 발산되어 일종의 에너지장으로서 나타날 때의 흔한 형태가 신체의 생물학적 전기라는 것이지 기가 전기적인 에너지인 것은 아니다.
그러면 우리 몸 속의 기의 흐름은 어떠한지 알아보자. 어떤 기공사들은 기를 호흡과 관련된 에너지의 순환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도 기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생각일 뿐이다. 우리가 호흡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것은 대기 중의 산소이다. 이 산소는 에너지원이 아니라 몸 속의 영양소를 태워서 에너지를 얻게 만드는 하나의 촉매다. 산소가 몸 속에서 흐르는 경로는 혈관계라는 하나의 패쇄 회로를 이루고 있다. 폐에서 핏속으로 용해되어 흡수된 산소는 심장으로 간 다음 심장의 박동력에 힘입어 인체의 모든 곳까지 치밀하게 뻗친 혈관을 따라 흐르고, 다시 심장으로 되돌아오는 확실한 경로를 가지고 있다.
산소의 흐름이 기라고 하면 기는 혈관계와 그 흐름을 같이 할 것이다. 그러나 기는 피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별도의 경로를 가지고 있다. 신경망도 하나의 패쇄 회로인데 이 신경 조직과도 다른 경로를 따라 기는 흐른다. 그렇다면 우리 몸에서 전기적인 에너지장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근원인 신경계도 아니고 호흡을 통해 받아들인 산소의 공급경로인 혈관계도 아닌 별도의 패쇄 회로가 인체에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현대의 의학계와 과학계에 이설이 분분하다.
동양 의학에서 고대로부터 응용되어온 경락계는 실체의 증명이 안 되었던 관계로 양의학에서 미신 같은 취급을 당해오기도 하였다. 60년대에 북한의 의학자인 김봉한씨가 경락계를 기술적으로 촬영했다하여 세계의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도 있지만 아직까지 확고한 학설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경험적으로 전승되어온 기맥과 경혈의 위치가 명확하게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는 에너지장으로서는 신경망이 일으키는 전기적인 힘을 발현하고, 내부적인 힘으로는 산소를 흡수하는 호흡계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지만 실체는 둘 다 아닌 별개의 정보망이다.
생명체는 신경망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더욱 치밀한 무형의 정보망으로 조직된 유기체다. 신경은 단지 자극의 전달과 두뇌의 명령을 쌍방향으로 전달하는 전달 체계이지 이것이 생명을 유지시키는 근간은 아니다. 신경망은 뚜렷하게 형태를 가진 조직으로서 몸 속에 회로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하나의 다발을 이루어 척추 속을 통과하고 있다. 신경은 의학적으로 확인과 구분이 가능한 것이므로 특정한 부위의 전달을 담당하는 신경을 끊을 수도 있다. 또 사고로 말미암아 척추를 다친 사람은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되고 뇌출혈 등으로 신경 조직이 손상당하면 신체의 일부가 마비된다. 또 소아마비와 같은 병을 앓은 결과로 한쪽 다리의 감각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신경조직이 끊기거나 손상을 입어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신체 부위라 할지라도 생명체의 일부로써 그것이 유지되는 한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별도의 정보망이 존재하고 있다. 뇌졸증이나 사고로 척추를 다쳐 신경망이 차단된 육신일지라도 그 부분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면 곧 지혈이 되고 딱지가 앉으며 시간이 흐르면 아물게 되는 복원력은 살아있으며 그 부위의 모든 세포들은 정상적인 생성과 교체와 소멸을 똑같이 해내고 있다.
신경이 통하지 않아도 손톱은 모양을 기억하고 그대로 자라며 모발이나 털들도 변함없이 자라고 똑같이 빠지는 것이다. 신경이 죽었다 하여 손발톱의 세포가 자기의 성질을 잊어버리는 법은 없고, 근육 세포는 근육으로, 지방은 지방으로, 뼈는 뼈로, 혈관은 혈관으로 각기 자기의 자리를 변함없이 지킨다. 설사 두뇌가 그것에 지령을 보낼 수가 없다 하여도 유기체로서의 생명은 육신의 모든 세포를 차질 없이 관장하고 있다.
이러한 유기체로서의 통합성을 유지하는 정보는 신경망과는 별개의 것이다. 수조 개에 달하는 인체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를 결합시켜 각자의 자리에서 기능을 다하도록 유지시키는 정보는 신경망보다 훨씬 치밀하고 근원적인 것이다. 이것은 정신적인 정보 체계여서 과학적인 조사나 측정으로서는 그 흐름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떤 현미경을 가지고도 수천 분의 일 밀리에 불과한 세포들을 연결해주는 무형의 정보망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이 정보망은 말나식이란 생명력의 흐름이며, 그것은 생명체의 구석구석에 있는 모든 세포가 처한 상황과 상태를 파악하고 관리하며 필요한 지령을 차질 없이 내리는 최상층의 지령탑이다.
말나식의 흐름인 기는 신경계와 호흡계뿐만 아니라 림프계와 호로몬계와 면역 체계까지 움직이며 혈관 속의 수억 개의 백혈구들을 하나의 명령 체계로 지휘하기도 한다. 기라는 것은 수십만 수백만 마리의 개미떼가 하나의 지능체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조직도 육체적인 구성도 없는 오직 정신적인 정보다. 그리고 이 정보는 생명체라는 하나의 패쇄 회로 속을 끊임없이 돌면서 생명체의 모든 세포에 서로의 정보를 전달한다. 이 무형의 힘이 의식적으로 모아지고 집중되어 강화될 때에 육신의 전기적 특성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물리적인 에너지장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개인적인 체험으로 하나의 흐름을 느끼게도 만든다.
기는 몸의 모든 부분에 대한 제어와 통제를 하므로 이 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할 때는 해당 부위의 기능이 저하됨은 불문가지다. 병이 나거나 몸이 아프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정보의 흐름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며 어느 부위의 정보가 생명체 전체에 신속하게 전달되지 못함으로서 필요한 유기체적인 통합적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력의 약화다. 말나식의 힘이 떨어졌다는 얘기와도 같은 것이다. 기가 약해지거나 흐름이 둔해지면 신경이 쇠약해지고 호흡계도 약해져 혈행이 둔화되고 호로몬계도 이상을 일으키고 면역 체계도 약해지며 성욕도 감퇴하는 등 생명 자체의 쇠약을 가져오는 것이다.
에너지는 정보의 전달과 공유에 의해 물질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물질의 힘이란 결국 에너지와 정보의 상호 작용이다. 생명이 물질 본래의 성질에서 기인한 것인 만큼 생명의 힘도 마찬가지로 에너지와 정보의 상호 보완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생명력의 약화란 ‘에너지의 약화’와 ‘정보 흐름의 둔화’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에너지의 쇠퇴는 정보의 흐름을 약화시키고 정보의 둔화는 에너지의 약화를 가져오는 상호 작용이 있다. 에너지가 강하다 해도 그것을 유기체의 전 조직에 전달하는 정보의 흐름이 차단되거나 둔해지면 에너지는 효율적으로 배분되거나 사용되지 못하여 한 곳에 뭉쳐 있거나 또는 강하고 약한 곳으로 나뉘는 불균형을 가져온다. 이것이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병이다.
이것은 인체만이 아닌 모든 유기적인 조직체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걸프전을 볼 때 이라크의 군사력이 전체적으로는 막강한 수준이었지만 다국적군의 초기 공습 때 지휘통신 시설이 타격을 받음으로서 이라크의 군사력은 무용지물로 변했다. 인체의 기란 바로 한 국가의 기간 통신망과 같은 것이다. 인체의 신경망은 국가로 비유한다면 전화국의 유선망이라 할 수 있으며 기의 흐름은 무선통신 시설로 볼 수 있다. 곳곳에 세워진 무선 중계국 시설이 바로 인체의 경혈(經穴)이다.
전화국 시설이 폭격으로 파괴되어도 방송국이 건재하다면 국민들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필요한 정보를 들을 수 있고 유선과는 별도의 시스템을 가진 무선 전화기가 유선 전화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선진화된 국가일수록 무선 통신에의 의존도가 더욱 높은 것처럼 인체라는 정밀한 조직체는 유선망인 신경 계통보다도 오히려 무선 통신인 기의 흐름이 더 중요한 상위의 정보 전달 체계다. 신경의 일부가 마비되면 그 부분만 쓰지 못할 뿐 생명 자체는 위험하지 않지만 기의 흐름이 막히면 인체의 모든 기능이 약화되거나 정지한다.
서양 의학이 침술이나 지압 등 동양의 전통 의술을 회의적으로 보는 이유는 모르스 부호를 전송하는 유선 통신밖에 모르는 19세기의 사람이 무선 전화기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통화하는 상대 사이에 서로를 이어주는 전선이 발견되지 않는데 어떻게 통화가 가능하냐고 의심스러워하는 것과 같다. 기는 정신계의 정보여서 무선 통신과 마찬가지로 인체 내부에서 흐르며 통신선이 필요하지 않다. 이것이 경락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다.
물론 이 무선 정보와 같은 기도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인체의 곳곳에 중계국과 같은 단말점을 가지고 있다. 기의 중계국인 경혈이 기능을 상실하면 기의 흐름은 그곳에서 막히고 몸에는 이상이 온다. 어떤 경혈이 특정한 장기나 몸의 부위와 직결되는 이유는 해당 장기에 대한 정보를 인체 전체에 송신하고 또 다른 부분의 정보를 그 장기에 송신하여 주는 중계국이기 때문이다.
간이 나빠지면 간의 상태에 대한 정보가 갑자기 급증해서 중계국인 간의 경혈에 과부하가 걸리고 곧바로 그 경혈에서 기의 흐름이 둔화된다. 침이나 지압은 이 중계국에 걸린 과부하를 해소시켜주는 것이다. 자극이나 압력이 경혈의 막힘을 뚫어주는 원리는 아직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으나 침의 자극이 기라는 정보의 흐름을 소통시켜 주는 효과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간의 경혈이 뚫린다는 것은 간의 이상 상태에 대한 긴급 정보가 인체 전체에 원활하게 전달된다는 것이며 정보가 제때에 원활하게 전해지기만 하면 인체는 이 상황에 대하여 자신의 생명력, 즉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하여 간의 구원에 나선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약물이나 수술보다도 훨씬 안전하고 근본적인 치료법이다. 아무리 많은 군대와 대포를 가지고 있어도 어느 전선이 위급한지에 대한 정보 전달이 차단되면 쓸데없이 놀고 있는 군대가 있으면서도 전쟁에서는 지게 되고, 적은 수의 군대라도 정보 통신이 원활하다면 위급한 전선에 전 병력을 집중하는 것으로서 이길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신경망은 이런 인체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통신 시설이 아니다. 신경은 정보 통신 시설이라기보다는 압점, 통점, 온점 등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센서이며 인간의 의식이 내리는 명령을 신체 각 부위에 전달하는 부수적인 통신망일 뿐이다. 신체의 모든 장기와 수조개의 세포 하나하나의 상태와 이상 유무를 조직 전체에 빈틈없이 전달하는 보다 근원적인 최상층의 통신 시설이 바로 기이다. 이것은 경혈을 통해서 전신에 중계되며, 이 중계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한 인체는 건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신경이 마비되어도 말나식은 존재하지만 기가 정지하면 말나식은 소멸된다. 물질은 기가 흐르지 않으므로 말나식이 없는 존재이며 그래서 생명체와 구별될 수 있는 것이다.
생명력의 근원인 기의 실체를 알지 못하므로 기의 쇠퇴가 가져온 각 부분의 증상에 대해서 대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의학은 기의 흐름을 열어주는 것을 처방의 우선으로 삼는다.
단전호흡은 기를 강화하고 운행을 순조로이 하기 위한 방법이지만 호흡법 만으로 기공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기는 근원적인 생명력 자체이므로 산소를 흡수하고 노폐물을 토해내는 호흡법이 기를 강화해 주는 것은 아니며, 안정된 호흡으로서 집중할 수 있는 의식이 기를 느끼고 강화하는 근본적인 요체이다. 기는 생명력의 근원인 말나식의 흐름이어서 제6식인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기가 의식에 영향을 줌과 동시에 의식 역시 기를 제어하고 조절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기의 흐름은 혈관이나 신경망 같은 가시적인 조직을 통하는 것이 아니어서 혈관이나 신경이 없는 미생물이나 식물에게도 존재한다. 이 말은 신경망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식물과 같은 생명체는 감지 기관(sensor)인 신경망이 없어 뜨거움, 추위, 통증 같은 것을 느낄 수 없다 해도 적대감, 친근감, 공포 등은 기로써 감지할 수 있다. 두뇌와 같은 뚜렷한 지령 기관이 없어도 식물은 일조량이나 기온의 변화 또는 땅속의 영양분이나 수분의 정도를 자기 몸의 전 조직에 동시에 전달하고 전체적인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오식과 의식이 없는 미생물이나 식물도 말나식만으로도 하나의 의식체와 같은 면을 보인다는 것이다. 기 수련을 한 사람이나 무속인들은 나무나 숲에서도 이런 기를 느끼며, 때로는 사람의 의식과 같은 감정적인 느낌을 강렬하게 받기도 하는 것이다. 기는 반드시 인간이나 동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가진 것이며 비생명체인 물질에서도 약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니나 그라기나나 혹은 다른 기 능력자들의 사례를 보고 그들이 나타내는 현상에 따라 기를 ‘열에너지다’, ‘전기적인 에너지다’, ‘적외선이다, 혹은 전자파다’라고 속단하는 것은 기의 본질을 모르는데서 오는 오류다. 그들에게서 감지되는 것은 기가 아니라 기가 일으킨 에너지이며 기는 전기적인 에너지도 일으킬 수가 있고 열에너지도 일으킬 수가 있으며 기타 신비한 초능력으로 보이는 물리적인 에너지의 응축과 투사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어떤 성격의 에너지를 움직이던 그것은 결과로서 나타나는 현상이지 실체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의식을 집중해서 에너지를 변화시키는 것은 의식체인 생명체 중에서도 의식을 자기 의지로서 통제할 수 있는 사람만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물의 기는 상호 영향을 미치지만 주변의 에너지장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아니한다. 때문에 의식이 없는 물체나 기계 장치를 이용해서 기의 작용에 의한 에너지의 변화를 만들어보려고 하는 노력은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측정 가능한 에너지의 변화가 있어야 물리적인 계측이 가능할 텐데 어떻게 해야 기가 에너지를 변화시키는지 기와 에너지와의 상호 작용에 대한 법칙을 알 수 없고 또 물질의 기를 움직일 방법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섯 번째 여행-마음과 기 3
마음과 기-3
기의 감응
물질 상호간에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광자다. 광자는 일종의 파동으로 설명되고 있다. 빛이든, 전파이든, 소리이든 모든 정보는 기본적으로 파동에 의해 전해진다. 따라서 생명체의 기도 정보이기 때문에 그 본질은 파동일 것이다. 모든 파동은 고유한 장폭, 파장, 파형을 가지고 있다. 파동에 의한 정보를 수신하고 해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파동의 수신체가 필요하다.
전파의 경우를 예로 들면, 수신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공중에 퍼져나간 전파는 전도체인 물질에 부딪히면 그 도체의 내부에 그 전파와 똑같은 주파수의 전파를 생성시킨다.
이것을 공조라고 말한다. 레이더는 전파를 발사해서 그것이 어떤 물체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것을 재수신해서 그 반사체의 거리와 방향을 아는 장치다. 이때 돌아오는 반사파는 발사된 전파가 부딪혀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반사체 내부에서 공조되어 발생한 공조파가 전파의 입사각과 직각을 이루면서 방사된 것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레이더에 수신되는 반사파는 반사체 내부에서 만들어진 전파이다. 때문에 발사된 전파와 공조하지 않는 비전도 물질은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전파를 수신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방송국에서 송신한 전파를 안테나에서 받아들이는 개념이 아니라 안테나에서 똑같은 주파수의 전파를 공조해서 만들고 이 공조된 전파를 앰프가 증폭하는 것이다. 모든 전파는 반드시 발신 전파에 공조파를 일으키는 수신 장치인 안테나가 있어야만 수신되고 해독이 가능하다. 우리가 사는 공간에는 수만 가지 주파수를 가진 전파들이 날아다닌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이 가운데 특정한 주파수에 채널을 일치시킴으로써 오직 한 가지 정보만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안테나는 모든 전파에 대해서 공조파를 만들어내지만 앰프에 입력되어 스피커에 전달되는 시그널은 한 가지뿐이다.
우리 몸은 안테나와 마찬가지로 전파에 대해 전도체이므로 이런 전파들에 대해서 의식은 못하지만 모두 공조파를 내고 있다. 그 전파가 워낙 미약하므로 우리 몸은 끊임없이 공조를 하고 있어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에 무선전화기나 모니터의 화면에서 방출되는 전자파가 인체에 유해하다고 알려져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인체가 전파에 공조하는 수신체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생명체에서 발산되는 기도 하나의 파동으로 우리에게 수신되고 있다. 기는 사람마다, 동물마다 각자 고유의 주파수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주변 사람이나 동식물로부터 방사되는 기에 대해서 어김없이 공조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의식을 못하지만 반사파를 내보내고 있다. 단지 그런 타 생명체의 주파수에 자신의 채널을 맞추고 있지 않으므로 느끼지 못하고 그 정보를 해득하지 못할 뿐이다. 이처럼 우리의 육신은 쉼없이 주변의 생명체와 기를 주고받고 있다. 다만 전파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기의 수신을 느끼지 못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도 기를 전파나 소리처럼 기계 장치로 수신하여 측정하거나 분석할 수 없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미립자 간의 정보 전달자가 광자라는 점에서 기도 하나의 파동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광자의 특성조차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광자의 움직임을 계측하는 기술이 없다는 점이다. 광자와 같은 초미립자는 허깨비와 같아서 관찰자의 측정 결과에 따라 위치가 결정된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의 세계에 있는 존재다. 광자와 같은 초미립자는 관찰자의 의식이 작용하는 측면이 있을 정도로 정신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존재다. 물질의 정보가 광자의 활동이고 기가 물질의 통합적인 정보가 활성화된 상태라면 기는 광자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와 같은 초미립자의 세계에 대한 규명이 선행되지 않는 한 기를 수신하거나 계측하는 기술이 개발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기에는 측정이 불가능한 감정이란 정보를 내포하고 있다는 이유이다, 물론 생명체의 기인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에너지라면 그 세기에 단위가 있고, 전파는 주파수와 출력의 강도를 측정할 수 있고 빛도 그 밝기와 파장을 구별할 수 있어 계측이 가능하지만, 생명체의 감정은 단위를 부여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어서 계측이 불가능하다. 분노의 세기를 측정할 수가 없고, 정욕의 온도를 잴 수 없으며 슬픔의 깊이를 단위로 표시할 수가 없다. 이런 감정들은 불계측적인 힘에 속한다.
물리학에서는 질량과 에너지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은 존재의 범위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물리학적 관점에서는 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1백20도의 정욕에 사로잡혀 괴로워했다’, ‘어떤 콩잎은 20마력의 힘으로 싹을 틔웠다’는 식의 표현이 가능하다면 기도 물리적 존재의 세계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측정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하나의 씨가 발아하는 힘을 단위화 하거나 정욕의 세기를 재는 것은 현재로는 불가능하다. ‘육체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정신력은 몇 칼로리인가?’하는 문제에 답을 낼 수 있다면 새로운 의학이 열릴 것이다.
실험을 해보면 식물이 사람의 기를 느끼고, 반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주 가위를 들이댄다든지, 가지를 자르겠다는 적대적인 기를 반복해서 보내면 그 꽃은 곧 시들고 만다. 반대로 애정을 가지고 늘 들여다보면 오래도록 싱싱함을 유지한다. 화원 내에 모차르트의 음악을 틀어놓으면 꽃의 수명이 훨씬 길어지고 꽃봉오리가 더 커진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이것은 입증 가능한 현상의 세계이다. 생명체의 기는 성격에 따라 타 생명체에 이롭기도 하고 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생체의 기를 수신하고 계측하거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한 연구가 여러 나라의 연구소나 제약회사 등에서 진행 중이다. 그러나 기의 성격상 생명체가 아닌 기계 장치를 통한 계측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의식과 같은 차원의 세계인 기의 실체는 마음의 정체가 오리무중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밝힐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마음을 가진 살아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느끼듯이 정신계의 정보인 기도 결국 살아 있는 사람의 의식으로만 감지될 뿐인지 모른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그가 드러내는 행동이나 말로서 짐작한다. 마음과 행동은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이다. 기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에너지의 형태로 감지된다 해도 내면의 기는 알 수 없다.
서양의 첨단 과학으로도 기에 대해 밝혀내지 못하고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정신적인 수련과 수행을 통한 마음의 경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서양인들은 기를 표현할 적당한 어휘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기는 물리적으로 측정할 방법을 가질 수 없어서 일부의 사람들은 다소 허황된 것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기는 실제로 체험할 수 있고, 단련에 의해서 그 힘을 강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어서 존재를 의심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근자에 와서 많은 과학자, 의학자들이 기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고, 또 활발한 연구가 진행 중에 있기도 하다. 사물에 대한 접근에서 직관적이고 체험적인 동양에서는 수천 년 동안 기를 치료와 건강에 사용해오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노력에는 무관심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 기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험적이고 논리적인 서구의 입장에서는 개인의 체험은 믿을 바가 못 되는 것으로 여기므로 과학적인 규명을 하겠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노력들이 결실을 얻어 우리가 기를 전파처럼 이용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나는 생명의 비밀이 다음 세기 중에 풀린다면 그것은 두 가지 문을 통해서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유전 공학이며, 다른 하나가 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 수련을 행하는 기공에 대해서 알아보자. 동양에서 기 수련이 전승되어온 이유는 생명에 대한 동서양의 접근태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기에 대해서 서양이 오랫동안 무지하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융성으로 서양은 죽음 이후의 구원에 의지했고, 동양은 죽음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양인들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삶의 무한한 연장이 가능하다고 본 신선 사상과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파악한 불교적인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교와 불교가 공통적으로 취한 방법론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두 가지 요소인 늙음과 질병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지 않고 자신 속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죽음에의 인도자를 마음으로 본 것이었다. 도교는 어지러운 마음으로 보았고, 불교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보았다. 마음을 원인으로 보았으므로 마음의 실체를 탐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 기의 존재였다. 노여움, 탐욕, 정욕, 슬픔과 같은 어지러운 마음이 인간을 늙고 병들고 죽게 만든다고 생각한 도가의 선인(仙人)들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탐진치(貪盡稚)와의 싸움에 몰두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생명력의 근원인 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기는 의식의 세계에서 감정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감정의 변화는 그대로 기에 반영되며, 이 기의 상태가 바로 인간의 생명력을 좌우한다. 동양에서는 이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불로장생이란 감정의 제어와 마음의 평화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실천적 방법으로 올바른 운기조식(運氣調息)을 위한 여러 가지 수행법들이 나오게 되었다. 선과 명상, 단전호흡, 요가, 고행 등이 그것이다.
이런 방법들을 통해서 기를 제어하고 통제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을 기공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궁극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첫 단계의 방편이다. 영적 도약의 기초 단계인 기공을 본래의 목적과 관계없이 뚝 떼어내서 하나의 국민체조처럼 보급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필요한 영적 훈련과 인격의 수련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 기공을 무술처럼 연마한 하나의 기능공들이 나타나게 되고 기를 치료나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기치료사들은 수행의 목적을 기운의 증폭과 외부방사에 둘 뿐, 내면적인 인격의 성숙이 따라가 주지 못하고 있다. 일종의 불법 무면허 의료 행위자들로 볼 수도 있겠다. 이들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기도원에서의 안수 치료도 그 내용에서 이와 비슷한 것들이 많다.
기적처럼 보이는 병의 치료는 생명체 사이의 기의 전달과 공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과, 영계의 힘이 시술자의 기를 통해서 발현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겉으로 봐서는 어떠한 경우에 해당되는지를 알기 어렵다. 예수가 병자의 몸에 손을 얹어 낫게 한 성서 속의 이적이 전자인지 후자인지는 가름하기 어렵다. 안수 기도도 때로는 시행자의 기가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고, 기치료사의 기공에 영계의 힘이 실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기를 영계의 힘이 생명계에 작용하는 매체라고 보면, 생명계가 영계에 작용할 때의 매체도 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가 그 성질에서 전기와 흡사한 무엇이라면 그 방사는 전파와 비슷할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우주가 빅뱅 이후에 최초의 몇 분 동안 방사했던 전자파의 잔해들이 수백억 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배경 복사로서 감지되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전파는 한번 방사되면 소멸되지 아니하고 영원의 시간 동안 우주 저편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미국의 민간 자본이 호주의 들판에 세운 직경 2백미터의 거대한 안테나가 있다. 외계의 지적 생명체가 보냈을지도 모르는 전파를 수신하기 위한 것이다. 매일 약 6백만 개의 전파를 수신해서 자동적으로 분류하고 있다. 수십억 광년의 거리를 달려온 미약한 전파들이 해독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먼 외계의 생명체들이 방출한 기도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을지 모른다.
2천 년 전에 해탈한 석가세존의 기나 예수의 기도 지금까지 우주 공간에 남아 우리에게 수신되고 있을지 모른다. 미약한 전파는 공간에서 소멸되기도 하지만 아주 강력한 전파는 수십억 년의 시간에 걸쳐 광대한 우주 공간에 흔적을 남긴다. 대성인(大聖人)의 기는 우주의 대폭발과 같은 강력한 에너지로 정신계에 영원히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 몸에는 매 시간 셀 수도 없는 각기 다른 주파수의 전파들이 충돌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위의 생명체가 뿜어내는 기의 방출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몸은 매 시간 수천, 수만의 주위 생명체가 방출하는 각기 다른 주파수(감정과 성격)의 기에 휩싸여 있고, 그것들 하나하나에 동일한 공조 주파수의 기를 만들어 대응파를 방출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전혀 못 느끼고 있는 것이다.
생명체가 평소의 일상생활에서 외부로 방출하는 기는 가까이 위치한 사람에게도 아주 미약한 영향만을 미칠 정도의 강도여서 방출과 동시에 거의 소멸된다. 그만큼 무시해도 좋은 양이다. 그러나 철천지한을 품고 증오를 불태우거나, 격렬하게 분노하거나, 사무치는 원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평소보다 수만 배 강렬한 기를 방출한다. 이렇게 방출된 기는 전파와 같이 영원의 순간까지 우주의 저편으로 날아간다.
지극한 자비와 사랑의 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우주에는 2천5백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가 방출한 자비와 원력의 가피가 아직까지 충만해 있고, 2천 년 전 십자가에 몸을 바친 그리스도의 사랑의 파장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아득한 저편에서 수십억 광년의 거리를 달려 온 전파들이 안테나에 잡혀 해독되고 있는 것처럼 부처의 자비원력에 주파수를 맞추는 사람은 부처를 만나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맞추는 사람은 성령의 충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위대한 성인(聖人)의 기는 영겁의 세월을 넘어서 광대한 우주의 곳곳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충만하여 수천억의 생명에 자비와 사랑의 가피를 베풀어준다. 사악한 인간이 비슷한 강도로 뿜어놓은 독소도 마찬가지로 온 우주에 가득해 다른 생명들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다. 신과 악마가 이 세계에 같이 공존하는 이치다. 한 인간이 착하게 살면 1만 명의 인간이 은덕을 입고, 한 인간이 악한 짓을 하면 그 여파가 자손에게 미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여섯 번째 여행-마음과 기 4
마음과 기-4
기의 시원
마음의 여행을 통해서 나는 불교와 물리학의 개념들을 설명에 많이 인용했다. 그런데 기에 대한 언급은 불교에는 나오지 않는다. 현대 과학이 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대로다. 그렇다면 기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무엇인가. 중국의 시조인 황제(黃帝)가 자부진인(紫府眞人)의 가르침과 소녀(素女)의 도움을 받아 썼다는 "황제내경(黃帝內經)"에 기에 관한 기술이 처음으로 나온다.
기(氣)란 글자는 원래 쌀 미(米)가 없이 사용되어 구름을 뜻했다. 후에 운(雲)자가 구름의 뜻으로 대신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기란 글자는 기운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힘 또는 움직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황제는 지금으로부터 4천6백 년 전의 사람이다. 당연히 황제의 시대에는 기라는 글자가 구름의 뜻으로 쓰이고 있었으므로 기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따라서 황제가 "황제내경"을 썼다는 것은 전설상의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황제내경개론(黃帝內經槪論)"이 씌어진 약 2천3백 년 전 전국 시대의 것으로 보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이 "황제내경개론"의 4장이 "황제내경"이다).
"황제내경"은 자연계에는 본래적인 규율과 질서가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음양(陰陽)과 운기(運氣)에 관하여 설명한 책인데, 기라는 말을 오늘날의 의미로 쓰고 있는 최초의 문헌임에 틀림이 없다. 또 "황제내경"에서부터 생명을 기의 순환으로 보는 동양 의학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이 책 이후로는,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 "제병원후론(諸病源候論)" 등의 고대 의학서들이 기와 인체를 다루고 있다. 의학서는 아니지만, "포박자(抱朴子)"나 "여씨춘추(呂氏春秋)" 같은 고전에도 기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인도에서 불교가 나올 무렵인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에서는 기가 인체의 중요한 개념으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불교는 오로지 초점을 마음 한 가지에 맞추고 있다. 유식설에서도 의식과 아뢰야식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고, 말나식은 끊어야 할 육신의 욕망이나 집착으로 보았다.
그래서 육신을 다스리는 말나식과 그것의 현상인 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측면이 있다. 부처님의 생존 시기부터 기원 후 4세기말의 구마라집(鷗摩羅什)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초기 근본불교의 선 이론인 사선론(四禪論)의 어디에서도 기의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참고로 이 사선론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초선(初禪)은 가장 초보적인 생리적 욕구인 식욕과 음욕을 다스리고, 마음을 한 군데 정하여 마음의 경망을 피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제2선은 초선에서 닦은 마음의 경솔한 움직임을 완전히 그치게 하며, 기쁘고 경사스러운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나는 가운데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하는 경지다. 제3선은 2선의 경지를 더욱 깊게 해서 기쁘고 즐거운 감정의 물결조차도 고요한 가운데 가라앉혀 적정(寂淨)의 묘락(妙樂)을 느끼는 경지다. 제4선은 3선에서 얻은 묘락마저도 버리고, 오로지 정념(正念) 한 가지에 집중하는것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불교의 수행관은 철두철미하게 마음에 집중된 것이어서 신심(身心)의 조화인 기가 끼여들 여지가 없다. 훗날 양무제(梁武帝) 때의 달마대사를 조종(祖宗)으로 하는 중국 선도 직관으로 일체를 관통하는 심경일여(心境一如)의 유심적인 선이었다. 그후 선의 육대조(六代祖)인 혜능(慧能)과 남악(南嶽), 마조(馬祖)를 거쳐서 백장대지(百丈大智)선사가 선원(禪院)을 연 이래로 오늘까지, 불교 선은 오직 마음을 바라보는 것일 뿐 육신의 생명력인 기를 다루지 않는다.
우리 나라의 불교선도 통일신라 시대에 선문구산(禪門九山)을 세우고 선종의 꽃을 피운 이래, 보조국사, 태고보우화상과, 나웅, 무학을 비롯한 걸출한 선사들이 많았지만 누구도 기를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교가 들어오기도 전부터 우리 민족의 신앙 체계로 자리잡고 있던 삼신교(三神敎 :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으로서, 배달교, 신도(神道), 신교(神敎), 선도(仙道), 선교(仙敎), 신선도(神仙道), 신선교(神仙敎), 단학(丹學)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세계 최고(最古)의 경전이라 말해지는 "천부경(天符經)"과 "참전계경", "삼일신고"의 세 가지 경전이 그 교리를 구성하고 있다.)가 중국의 황제(黃帝)를 앞질러 기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체계도 "황제내경"보다 한층 발달된 것이었다. 우리 민족의 옛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가 환웅천황 시대인 기원전 3897~3804년경에 문자로 기록된 것이라 하므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중국의 "황제내경"보다 길게는 3천5백년, 짧게는 1천2백년을 앞선 것이 된다. 적어도 기와 그것의 수련에 대해서만큼은 우리 나라가 그 시원 국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 나라는 예부터 불가의 스님들 외에도 수많은 진인과 선인들이 살았던 도향(道鄕)이었다.
"삼일신고"에 기록된, 기에 관한 최초의 가르침을 원문을 옮겨 소개하고자 한다.
人物同受三眞 曰性命精 人全之物偏之 眞性無善惡 上哲通
(인물동수삼진 왈성명진 인전지물편지 진성무선악 상철통)
眞命無淸濁 中哲知 眞精無厚薄 下哲保 返眞一神
(진명무청탁 중철지 진정무후박 하철보 반진일신)
惟衆迷地 三妄着根 曰心氣身 心依性有善惡 善福惡禍
(유중미지 삼망착근 왈심기신 심의성유선악 선복악화)
氣依命有淸濁 淸壽濁妖 身依精有厚薄 厚貴薄賤
(기의명유청탁 청수탁요 신의정유후박 후귀박천)
眞妄對作三途 曰感息觸 轉性十八境 感喜懼哀怒貪厭
(진망대작삼도 왈감식촉 전생십팔경 감희구애노탐염)
息芬爛寒熱震濕 觸聲色臭味淫抵
(식분란한열진습 촉성색취미음저)
衆善惡淸濁厚薄 相雜從境 途任走墜 生長肖病歿苦哲
(중선악청탁박후 상잡종경 도임주추 생장소병몰고철)
止感調息禁觸 一意化行 返妄卽眞發大神機 性通功完是
(지감조식금촉 일의화행 반망즉진발대기신 성통공완시)
이상이 "삼일신고"에서 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마음에 대한 불교의 유식설 이상으로, 기에 대한 의미 깊은 시사를 우리에게 던져 주는 내용이어서 그 뜻을 잘 새겨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구절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人物同受三眞 曰性命精 人全之物偏之 眞性無善惡 上哲通 眞命無淸濁
中哲知 眞精無厚薄 下哲保 返眞一神
사람과 만물(물질)은 삼진(三眞 : 세 가지 본성 또는 진여의 세 가지 모습)을 똑같이 받아 난 것이니, 그것이 바로 성(性)과 명(命)과 정(精)이다. 만물이 한 가지로 치우쳐 생겨난 것이 사람이니, 그 성(性)의 참된 모습은 선(善)하고 악(惡)함이 본시 없는 것이라, 이것을 아는 것이 상(上)의 깨달음으로 통(通)이라 한다. 그 명(命)의 참된 모습은 맑고(淸) 탁(濁)함의 구별이 없는 것이라, 이것을 아는 것이 중(中)의 깨달음으로 지(知)라 한다. 그 정(精)의 참된 모습은 두텁거나(厚) 빈약한(薄) 차별이 본시 없는 것이라, 이것을 아는 것이 하(下)의 깨달음으로 보(保)라 한다. 이 삼진(三眞) 하나로 돌아가면 그것이 참된 신(神)이 됨이다.
이 "삼일신고"의 첫 문장은 우리의 삼신교가 불교보다도 명확하게 인간이 물질과 그 본(本)을 같이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어 놀랍다. 인간을, 물질의 성질이 하나로 압축되어 비롯된 전체상(통합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의 앞에서 생명의 시원을 물질에서부터 찾으려 했던 것과 같은 직관과 통찰에 바탕한 인간관이고 생명관이다. 불교에서 오온(五蘊)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삼신교에서는 삼진(三眞)으로 설명하고 있다.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을 성, 명, 정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내 생각으로는 오온의 개념보다는 삼진의 개념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마음의 귀향-반야’에서 설명되는 오온과 이 삼진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진성이 선악이 없고, 진명이 청탁이 없으며, 진정이 후박이 없다는 부분은 불교의 연기설에서 말하는 진여(眞如)와 그 의미와 설명법에서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만약 “삼일신고”의 연대가 환웅 시대가 맞다면 석가모니의 혈통이 동이족이었으며, 불교의 철학적 뿌리가 우리 민족이라는 재야 사가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두 번째 구절의 뜻을 알아보자.
惟衆迷地 三妄着根 曰心氣身 心依性有善惡 善福惡禍 氣依命有淸濁
淸壽濁妖 身依精有厚薄 厚貴薄賤
사람이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삼망(三妄)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며, 이 세 가지 망집(妄執)은 바로 마음(心)과 기(氣)와 몸(身)이다. 마음(心)은 성(性)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라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있으며, 선한 마음은 복이 되고, 악한 마음이 화를 부르는 것이다. 기(氣)는 명(命)에 의한 것이니, 맑고 탁함으로 나뉘므로, 맑은 기는 장수(長壽)를 이루고 탁한 기는 단명(短命)하게 만드는 것이다. 몸(身)은 정(精)에 의한 것이니 후하고 박함이 있으니, 몸이 후하면 귀하게 되고 몸이 박하면 천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세 가지 망(妄)은 인간을 미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세 가지 원인인 망집(妄執)을 일컫는다. 불교에서 하나로 말하는 무명(無明)이나 셋으로 나누어 말하는 탐진치와 같은 맥락의 원인 분석이다.
세 가지 진성(眞性)인 성과 명과 정은 본시 선악이 없고, 청탁이 없으며, 후박이 없는 평등 보편한 것인데, 이 삼진(三眞)에 의해 나타난 현상은 각각 마음과 기와 몸으로서 선악과, 청탁과, 후박을 가지는 차별적인 존재로 나타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 역시 진여와 현상계를 구별지어 설명하는 불교의 교리와 완전히 일치한다. 마치 불교가 삼신교의 표절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삼일신고"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가름하는 것은 마음이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명을 결정하는 것이 기이며, 사람의 귀하고 천함을 좌우하는 것이 몸이다.
여기서 우리 민족의 삼신교와 동양의 삼대 정신인 유불선의 차이를 엿볼 수가 있다. 마음, 기, 몸 중에서, 오직 마음 하나에 매달린 유심론(唯心論)이 불교라면, 기를 튼튼히 해서 불로장생하는 신선의 길을 찾는 것이 도교라 하겠고, 입신의 처세를 올바로 해서 귀하게 될 수 있는 양명을 가르친 것이 유교로 보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삼신교는 이 세 가지를 편중됨이 없이 모두 하나의 사상 체계 속에 다루고 있다. 즉, 우리 민족의 고유한 신앙을 동양의 삼교(유불선)가 그 뿌리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유불선은 수입된 외래 종교가 아니라 우리로부터 전해져간 사상 체계가 세계로 분파된 다음 보다 완성된 형태로 되돌아 온 것인지도 모른다.
세 번째 구절의 뜻을 알아보자.
眞妄對作三途 曰感息觸 轉性十八境 感喜懼哀怒貪厭 息芬爛寒熱震濕
觸聲色臭味淫抵
진망(眞妄 ; 三妄 → 心, 氣, 身)이 만들어 내는 삼도(三途)가 있으니, 이를 일컬어 감(感)과 식(息)과 촉(觸)이라 한다. 이 세 가지가 성질을 바꾸어 열여덟 가지 경계를 나타내니, 감(感)이 성질을 바꾸어, 기쁨(喜), 두려움(懼), 슬픔(哀), 분노(怒), 탐욕(貪)과 싫어함(厭)으로 나타난다. 식(息)이 성질을 바꾸어, 향기(芬), 문드러짐(爛), 차가움(寒), 뜨거움(熱), 건조함(震), 젖음(濕)으로 나타난다. 촉(觸)이 성질을 바꾸어, 소리(聲), 보이는 것(色), 냄새(臭), 맛(味), 욕정(欲情)과 맞닿음(抵)을 만드는 것이다.
이 구절의 내용은 불교의 사대(四大), 육경(六境), 오온(五蘊)의 설을 한 문장으로 집약 해 놓은 듯하다. 석가세존 이전부터 인도에서는 세계를 구성하는 네 가지 원소를 지(地),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로 설명하는 사상이 있었다. 지는 단단함으로서 모든 물질을 의미하고, 수는 습기로서 물질 속의 생명의 기운을 말하고, 화는 열기로서 만물을 숙성시키는 기운이며, 풍은 움직이며 살아 있는 힘을 의미한다.
지, 수, 화, 풍의 네 가지 요소가 모여서 우주의 삼라만상을 이룬 것이라고 하는 이론이 바로 적취설(積聚設)인데, 불교는 이 적취설을 계승하여 그대로 받아들였다. 반면에 사대사상(四大思想)인 적취설에 대립되는 또 하나의 이론인 전변설(轉變設)은 삼라만상을 구성하는 우주적인 마음이 있어 이것을 범(梵)이라 하고 이 범(梵)이 성질을 바꾸고, 변화하여 만물을 생성시킨다는 이론이다.
불교는 세계를 이루는 근본 요소에 대한 전래의 두 이론 중에서 적취설을 택하여 이 사대(四大)가 인연에 따라 뭉쳐서 나타나며, 인연이 다하면 본래의 모습인 사대(四大)로 돌아간다는 인연법의 재료로 삼은 것이다.
육경(六境)이란 신체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인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의 오근(五根)을 통하여 들어오는 다섯 종류의 정보를 오경(五境)이라 하고 이 오경이 정리되고 해석되는 것을 전오식(前五識)라 한다는 것은 앞에서도 설명한 내용이다. 이 오경에 여섯 번째인 의식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정보를 더해서 육경(六境)이라 한다. 이 육근과 육경을 합하여 십이처(十二處)라 하기도 한다.
오온(五蘊)은 인간의 다섯 요소인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말한다. “삼일신고”와 불교의 이론 체계의 흡사함은 놀라울 정도다. 두 가지 이론 체계 사이에는 차원의 나눔에서 중복과 혼재가 있긴 하다. “삼일신고”의 삼진(三眞), 삼망(삼妄), 삼도(三途)와 십팔경(十八境)은 그 구분에서 불교와 약간의 차이는 있어 보인다. 그러나 사대(四大), 육경십이처(六境十二處), 오온(五蘊)의 설과 전체적으로는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구절은 마음의 여섯 가지 작용, 기의 여섯 가지 나타남과, 몸의 여섯 가지 받아들이는 느낌을 나누어 놓은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삼일신고의 마지막 구절을 보도록 하자.
衆善惡淸濁厚薄 相雜從境 途任走墜 生長肖病歿苦哲 止感調息禁觸
一意化行 返妄卽眞發大神機 性通功完是
착하고 악한 것, 맑고 탁한 것, 그리고 후하고 박한 것이 모여 서로 뒤섞여 경(境)을 쫓아 일어난 것을, 삼도(三途 ; 感, 息, 觸)가 믿고 따라가다가 같이 미혹으로 떨어지므로 나고, 자라고, 병들고, 죽는 고뇌에 쌓이게 되는 것이다. 지감(止感)과 조식(調息)과 금촉(禁觸)을 한 뜻으로 행하여, 세 가지 망에 반하여 일대신심(一大神心)을 일으키면 이를 성통공완(性通功完)이라 한다.
이 부분은 마치 불교의 사성제(四聖啼)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사성제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의미로, 원시 불교의 교리에서 대강(大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고제(苦啼)는 인생은 괴로움이라는 진리이며, 집제(集啼)는 이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과 탐욕에서 비롯되었다는 진리이며, 멸제(滅啼)는 이 애착심을 끊어야 한다는 진리이며, 도제(道啼)는 인생고를 멸하고 열반에 들기 위해서 행해야 하는 실천적인 방법들을 설명한 진리다. 팔정도(八正道 :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와 육도(六度 :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그리고 삼학(三學 : 계, 정, 혜)을 그 바른 길로서 제시하고 있다.
"삼일신고"는 선악, 청탁, 후박이 뒤섞인 세상을 말하고 있고(고제에 해당), 그러한 세상의 원인인 열여덟 가지의 경에 의한 감, 촉, 식 삼도의 맹종을 설하고 있고(집제에 해당), 삼망에 반하는 일대신심의 발동(멸제에 해당)으로 성통공완(불교의 열반이나 해탈에 상응하는 삼신교의 목적 경지)에 이르기 위한 실천적인 방법으로서 지감과 조식과 금촉(도제에 해당)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지감(止感)이란 감(感)의 여섯 가지 경계인 기쁨, 두려움, 슬픔, 노여움, 탐냄, 싫어함을 멈추라는 것이며, 조식(調息)이란 기를 잘 다스려 향기와 구린내와 차고 더움과 건조하고 습함을 잘 조절하라는 가르침이며, 금촉(禁觸)이란 삿되고 허망한 모든 소리, 색깔, 냄새, 맛, 음욕, 접촉을 끊으라는 것이다. 팔정도, 육도, 삼학의 가르침과 거의 다르지 않다. 단지 불교가 마음이라는 한 가지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는 반면, 삼신교는 마음과 기와 몸을 삼분해서 균형 잡힌 설의 체계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한 차원 높아 보인다고 할 것이다. 오히려 "삼일신고"의 지감, 조식, 금촉은 불교의 사선론(四禪論)보다 더욱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수도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불교 이외의 선(禪) 수행은 이 "삼일신고"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기의 수련을 목적으로 하는 단전호흡이나, 단학 및 동양의 무예들은 그 이론적인 근원을 조식법(調息法)에서 찾고 있다.
"삼일신고"와 "황제내경" 이후에 노자, 장자, 맹자 등은 이 기를 우주만물의 근원으로 보고 여러 학설을 이루었다. 노자는 우주의 원리인 도(道)에서 음기와 양기가 나오고 이 음양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화합이 생겼으며 그 화합의 결과로 만물이 생성되었다고 하였다. 장자는 사람의 생사를 기가 모이고 흩어진 결과로 설명하였다. 불교가 유심론이라면 노장 사상은 기 일원론이며 기야말로 천하만물의 근원이라 가르쳤다. ‘일체유심조’가 아닌 ‘일체유기조’였던 것이다.
특히 맹자는, 기는 사람의 의지로서 주재할 수 있는 것이며 온몸에 빈틈없이 가득 찬 힘이라고 설명하여 기를 수행으로 주재하는 기공의 학문적 체계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 중심의 세계관에서 천기와 기상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간추린 오운육기론(五運六氣論), 땅의 기운을 감지하여 이롭고 불리함을 예측하는 풍수지리(風水地理), 인체를 축소시킨 소우주로 보고 인간과 우주를 동일한 법칙에 의한 변화체로 간주한 동양 의학의 철학적 토대인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등이 성립되었다.
여섯 번째 여행-마음과 기 5
마음과 기-5
천부경(天符經)
"천부경"은 원래 옛 환인의 가르침이 구전되어 오다가 신시개천(神市開天) 이래로 녹도문(鹿圖文)으로 쓰여 역대 환웅의 시대를 거치면서 전승되어 왔던 세계 최고(最古)의 경전이며 "삼일신고", "참전계경"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3대 경전 중 으뜸이 되는 것이다.
"천부경"은 고조선 멸망 후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 사람들이 고문자로 새겨진 큰 비석을 백두산 기슭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아무도 그 뜻을 풀지 못하다가 당대(唐代)의 석학으로 해동 공자라 불리던 최치원이 이 비문을 보고, 그것이 환국의 옛 문자인 가림다로 적힌 것임을 알아보고 이를 한자로 번역하게 되어 비로소 "천부경"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최치원의 해문(解文)은 전해지지 않으며 여든한 개 글자의 번역된 원문만이 전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그 뜻을 풀지 못하여 "천부경"의 해석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그러나 기실 "천부경"은 어려운 문장이 아닌 지극히 평이한 서술로 쓰인 것이다. 다만 뜻을 고도로 압축하여 숫자로 표현했기 때문에 얼핏보면 난해한 경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뜻을 알기 어려운 구절은 하나도 없다. 나는 한자를 조금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뜻을 알 수 있는 "천부경"을 두고 마치 기문난경(
奇文難經)이나 되는 것처럼 온갖 이설이 난무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시중에 나와 있는 해설서라는 책들은 띄어 읽는 법조차 틀린 것이 많고 그 풀이에 이르러서는 차마 말로 표현키 어려운 억지와 억측으로 점철되어 있어 보기가 심히 망하다. 재야 사가들이나 민족 종교의 지도자라 하는 사람들까지도 "천부경"을 일컬어 ‘해석이 불가능한 신비하고 오묘한 경전’이니 ‘뜻은 알 수 없지만 지고지상의 위대한 경전’이라는 식의 근거 없는 미화를 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우리 나라에서 "천부경"의 뜻을 제대로 설명한 사람이나 책은 없다.
그러나 ‘진리’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어려운 것은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진리’란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다. "천부경"의 가르침이 바로 그렇다. 분명하고 명확하다. 오해의 여지가 없다. 지금부터 그토록 난해하고 뜻을 알기 어렵다는 "천부경"을, 과연 그러한지 살펴보자.
우선 천부경의 전문(全文)을 먼저 보자. 천부경의 해석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끊어 읽는 단락의 구분부터가 정확해야 한다. 아래에 적어놓은 대로의 끊어 읽기가 가장 정확한 구분이다. 이래야 운률이 맞는 계송이 되고 정확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
析三極, 無盡本(석삼극 무진본)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一積十鉅, 無櫃化三(일적십거, 무궤화삼)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大三合六, 生七八九(대삼합육, 생칠팔구)
運三四成, 環五七(운삼사성, 환오칠)
一妙衍, 萬往萬來(일묘연, 만왕만래)
用變, 不動本(용변, 부동본)
本心本太陽, 昻明(본심본태양, 앙명)
人中天地一(인중천지일)
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
첫 구절부터 그 뜻을 알아보자.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
여기서의 일(一)이 무엇인가를 놓고 많은 학자들이 여러 해석들을 내놓고 있는데, 시중의 여러 책에서 나열한 것만 해도 십여 가지 해석이 넘는다. 그것도 사람마다 책마다 전부 제각각이며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게 태반이다. 하지만 "천부경"은 그렇게 중구난방 떠들 이유가 없이 문장의 뜻이 분명하다. 이 일(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바로 다음 문장에 그대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즉, 天一一地一二人一三(천일일지일이인일삼)이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한자들은 초등학생도 아는 것들이다. 해석을 하려고 애쓸 이유가 없다. 한자 그대로 풀어 하늘(天)은 ‘1’과 ‘1’이라는 두 개의 수로, 땅(地)은 ‘1’과 ‘2’로, 사람(人)은 ‘1’과 ‘3’이라는 수로 표현하겠노라는 설명이다.
조금 자연스럽게 풀어보면 ‘하늘(天)의 수는 일일(一一)이요, 땅(地)의 수는 일이(一二)요, 사람(人)의 수는 일삼(一三)이다.’가 되겠다. 천지인, 삼신(三神)의 수를 한 개가 아닌 두 개의 숫자로 표현한 것은 "천부경"의 절묘한 압축법의 백미인데, 그것은 뒤에서 설명하기로 하자. 삼신에 전부 들어가 있는 ‘1’이라는 공통수를 제외하고 보면 하늘과 땅과 사람을 표현하는 고유 숫자는 각각 ‘1’과 ‘2’와 ‘3’이다. "천부경"은 전체에 걸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이 세 숫자로 쓰고 있다. 따라서 "천부경"에서 ‘1’이란 숫자는 바로 하늘이란 단어이다. 땅과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첫째 구절의 뜻은 어려울 게 없다.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 즉 ‘하늘은 시작됨이 없이 시작된 하늘이다’라는 뜻이다. 우주물리학에서 말하는 ‘끝과 시작이 없는 우주’와 같은 뜻이다. 이 첫구절과 시종대구(始終對句)의 관계에 있는 마지막 구절을 같이 보면 뜻이 한층 명확해 진다. "천부경"의 마지막 구절은 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이다.
따라서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 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은 ‘하늘, 즉 우주는 시작됨이 없이 시작되고, 끝남이 없이 끝나니라’라는 우주에 대한 직관이다. 바로 ‘우주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요, 결론이고, 정의다.
천부경의 이 여섯 글자가 바로 동양적 우주론의 핵심이고 골자임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시작이 없는 우주, 끝이 없는 우주. 이것이 1만년도 전에 우리 조상들이 밝혀 놓은 우주의 실체라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고 하는 유치한 서양의 우주론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훗날 불가(佛家)의 세계관이 여기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천부경"의 첫 구절을 보면 누구나 떠오르는 게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불교의 모순적(矛盾的) 설명인 반어법(反語法)의 유래를 이에서 찾을 수 있음이다. 반야심경의 핵심이 되는 유명한 구절인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과 같은 표현법인 것이다.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는 구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은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라는 불교의 통찰과 ‘시작되지 않고 시작된 하늘, 끝나지도 않고 끝난 하늘’이란 천부경의 가르침은 의미뿐만 아니라 표현의 수사법적(修辭法的)인 기법까지도 쌍둥이처럼 닮은 것을 알 수 있다.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반어법에 의하지 않고는 석가모니도 이 세계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광대무변한 우주가 한 알갱이의 티끌과 같다’는 말이나 ‘영겁의 세월이 찰나와 같다’는 말들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세계의 실상은 모순이 아니라 우주 자체가 그러한 모순의 토대 위에 서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짐에 따라, 환단 시대의 우주관이 얼마나 무서운 통찰력에 의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작됨이 없이 시작된 우주, 끝남이 없이 끝나는 우주’는 오늘날의 우주물리학이 내릴 수 있는 결론과 다르지 않다. 과학은 우주에 대해서 이것과 다른 어떤 결론도 끌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 이유로 꼽는 대폭발(빅뱅)도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폭발의 원인이 되는 우주 알의 이전(以前)이 가정되지 않고서는 빅뱅에 의한 우주의 탄생도 있을 수 없고, 중력에 의한 우주의 최후도 모든 것의 최종적인 마지막, 최후의 최후는 아닐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빅뱅의 앞에도 무엇인가가 있었고 우주의 종말 이후에도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 우주물리학의 추정이다. 우주도 환생과 유전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 우주의 탄생과 소멸에 대해서 천부경의 열 글자 외에 어떤 결론이 가능할 것인가?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 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 이것은 현대 우주물리학의 결론임과 동시에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양적 우주관의 근본이었다.
불경에는 석가세존이 설법을 하는 자리에 세상의 많은 신들이 자리를 함께 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자리에 환인(桓因)이 있다는 점이다. 부처의 설법시에는 시방삼세, 삼만팔천 대천세계의 모든 신들과 보살들과 선인들이 초대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상석에 자리잡는 이가 바로 환인(桓因)이다. 어떻게 석가모니 당시의 인도인들이 환인(桓因)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 신기한 일이거니와 환인이 불가(佛家)의 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서방 정토를 다스린다는 아미타불도 아니고 지옥을 통치한다는 염라대왕도 아니고 제석천왕도, 도솔천왕도 아니며 보살들과도 성격이 다른 높은 반열의 상제(上帝)로 등장하는 이가 환인이다. 다른 부처나 천왕, 보살 등은 석가세존의 설법 자리에 으레 자리를 같이 하지만 환인만큼은 아미타경과 같은 아주 특별하고 지고한 설법을 할 때만 자리를 함께 한 기록이 나온다. 이를 통해 볼 때, 붓다와
당시의 인도인들이 마음속에 모셨던 우주의 신들 중에 환인이 있었으며 환인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불경의 어디에도 환인에 대한 소개나 자세한 설명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천부경"과 불교의 우주관을 같이 놓고 볼 때 적어도 불교는 동이족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불생불멸, 색즉시공과 같은 맥락의 우주관은 현대의 우주물리학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우리 민족의 삼신 사상과 불교 외에는 어떤 고대의 철학이나 종교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인도의 왕녀 허왕옥이 불교의 모토(母土)를 찾아 신라에 온 것은 왜였을까? 이미 인도인들은 석가세존의 모국이 어디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왜 인도인들은 만리 바다를 건너 궁벽한 반도 끝의 조그만 나라 신라에 공주를 보내 부처님의 사리를 전했을까? 다 부처님의 전생 인연에 의한 귀향이 아니었을까?
신라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쌍어 문양(물고기 두 마리가 주둥이를 맞대고 있는 형상이다)이 인도인의 신앙적인 상징임은 한 민족과 불교의 혈연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붓다의 초상과 조상(彫像)들이 보여주는 인종적인 특성은 아리안이 아니라, 동이족이었음을 보여준다. "천부경"을 만든 환인 천제의 인연이 그대로 불가로 전해졌음이다. 천부경은 불경보다 5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 다음 구절을 보자.
析三極, 無盡本(석삼극, 무진본)
이 구절에서의 삼(三)이란 숫자는 앞서 설명한, 사람(人)을 지칭하는 수가 아니고 숫자로서의 석 삼(三)이다. 세 개의 극이 무엇인지 알려면 바로 뒤의 구절을 먼저 해석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이므로 잠깐 보류해두고 다음을 먼저 보기로 하자.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이 구절은 천지인 세 가지를 대신해서 사용할 수를 밝혀놓은 것이다. 천지인은 각각 ‘1’, ‘2’, ‘3’이라는 고유수를 가지면서 동시에 ‘1’이라는 공통수를 모두 가지고 있다. 왜 "천부경"은 천지인을 ‘1’, ‘2’, ‘3’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1,1’, ‘1,2’, ‘1,3’이라는 두 수의 조합으로 나타내었을까? 여기에 수자를 이용한, "천부경"의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표현의 압축법을 발견할 수 있다. "천부경"의 위대성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경이로운 표현 방식에 있다. 글로 풀어서 쓰자면 수백, 수천 줄의 문장이 되어야 할 것을 수자를 이용해서 단
지 몇 글자만으로 대신해 버린 것이다. 불과 81글자만으로 하늘과, 땅과, 사람의 관계를 밝힌 "천부경"의 기술 방법에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어쨌건 그 이유를 알려면, 다음 구절을 가져와서 두 줄을 같이 보면 된다. 바로 뒷 구절은 다음과 같다.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자, 이 두 구절을 다음과 같이 나란히 놓고 보면 무언가 보일 것이다.
天一一地一二人一三(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天二三地二三人二三(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천지인 각각에 네 개씩의 숫자가 쓰였다. 그것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천(天)에 사용된 수 : 일일이삼(一一二三)
땅(地)에 사용된 수 : 일이이삼(一二二三)
인(人)에 사용된 수 : 일이삼삼(一二三三)
천지인은 각각 자기 고유의 수(천=1, 지=2, 인=3)를 두개씩 가지고 있고 자기 외의 두 가지 수를 하나씩 갖고 있다. 천을 예로 들면, 천의 고유수인 ‘1’이 두 개이고, 땅의 고유수인 ‘2’와 사람의 고유수인 '3'을 하나씩 갖고 있다. 지는 땅의 고유수 ‘2’를 두 개, 하늘과 사람의 수인 ‘1’과 ‘3’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사람은 어떨까? 마찬가지로 고유수 ‘3’을 두 개, 천과 지의 고유수 ‘1’과 ‘2’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수로 표현된 위의 두 구절을 뜻으로 읽으면 이런 문장이 된다.
“하늘, 땅, 사람은 고유수 ‘1’, ‘2’, ‘3’이 서로 다른 수이듯이 각각 달라 보인다. 그러나 기실에 있어서 천, 지, 인은 근본이 같은 것이다. 각자의 고유수를 두 개씩 가지고 있으면서 나머지 두 가지의 고유수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늘은 하늘이면서 땅과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땅은 땅이면서 하늘과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사람은 사람이면서 하늘과 땅의 본성을 갖고 있다”
이렇게 길고 장황하게 설명해야 뜻이 통할 이야기를 "천부경"은 숫자를 사용해서 단지 12글자로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어떤 장문의 설명도 사실 열두 개의 수를 이용한 "천부경"의 두 구절보다 적절한 표현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건너 뛰었던 앞의 문장, 析三極, 無盡本(석삼극, 무진본)을 돌아보면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세 개의 극이 나뉘었어도 그 본은 다함이 없다(변함이 없다)”란 뜻이다. 여기서의 극(極)은 ’진여(眞如)‘, ’우주알(물리학적으로)‘, ’무극(無極)‘ 등으로 말해지는 우주의 본체이다. 이 원우주가 세 개로 나누어진 것이 천지인의 삼신(三神)이다. 주역으로 말하자면 적청황(赤靑黃)의 삼태극(三太極)이다. "천부경"은 삼신이 현상계에 나타난 모습이 달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유일체의 사상이 여기서 나왔음을 볼 수 있다. 불교의 진여 개념과 다르지 않다. 하늘과 사람이 같은 것이라는 이 사상은 그대로 불교의 자재불성으로 이어졌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역(易)의 기본 원리가 되었다. 천지인의 삼극(三極)에 음(陰)과 양(暘)과 중(中)을 대입시켜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이것이 주역(周易)의 제일 원리이고, 주역은 "천부경"과 "삼일신고"에서 시작된 환역(桓易)이 그 뿌리인 것이다. 불교의 진아일여(眞我一如)나 우리 한사상이 지향하는 삼신합일(三神合一)의 상태가, 우주 본래 자리, 그대로의 본모습인 태극이다. 곧 무진본(無盡本)인 것이다.
이와 같이 "천부경"에 숫자가 사용된 이유는 뜻을 알 수 없는 기이하고 신비스러운 주문이어서가 아니라 수백, 수천 줄의 문장으로 설명해야할 것을 극도로 압축하기 위한 방법에서 나온 것이다.
그 다음에 "천부경"에서 가장 의미있고 중요한 한 구절이 나온다.
一積十鉅, 無櫃化三(일적십거, 무궤화삼)
“1이 열 번 쌓여도 상자가 없어서 3으로 변한다”라고 글자 풀이가 되는 구절인데, 이대로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1’이 하늘이고 ‘3’이 사람을 뜻하는 수라는 것을 알고 읽으면 그 의미를 금세 알 수 있다. 즉, “하늘이 열겹으로 쌓인 것이 담을 상자가 없어서 사람으로 화한다”는 뜻이다. 조금 다듬어서 문장을 만들면, “사람은 하늘의 정기가 겹겹히 쌓인 끝에 마침내 탄생하게 된 것이다”라는 말이다.
여기서 동양 사상의 정수(精髓)가 되는 하나의 외침이 나왔다.
!!!!! 인간은 하늘이 모습을 바꾼 것이다. !!!!!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이 바로 천부경의 가르침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을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하라 했던 유교의 인본주의 사상이 여기서 발원되었음이다. 공자가 동이족이었다는 것이 우연한 일이겠는가? 불가의 자재불성, 중생이 곧 부처란 사상이 여기서 나왔음이다. 하늘이 있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변한 것이 사람이니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궁극의 가르침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것이 1만 년 전 고대인의 종교관이었다고 누가 믿을 것인가?
우리 민족의 종교적 차원은 태양신을 섬기거나 창조주를 찾던 타민족들의 그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있었다. 유불선을 포함한 동양 사상을 단하나의 말로 압축하면 바로 ‘인간’이란 두 글자가 된다. 하늘의 기가 쌓이고 충만한 과정을 거쳐 인간(혹은 생명이란 말로 대치해도 되겠다)으로 화한다는 이 말은 이 우주에서 생명이 모습을 드러내는 원리를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겹겹이 하늘이 쌓인다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주의 응축된 기의 발현으로 생명과 인류의 출현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우주의 근본기(根本氣)가 모습을 바꾼 존재다.
언젠가 현대 과학이 생명의 탄생을 밝히게 되는 날이 온다 해도, 과학자들이 이 이상의 말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란 하늘을 담아놓은 그릇(櫃 : 상자)이다”. 그 그릇을 함부로 하고 가볍게 대해서야 되겠는가? 모든 사람이 다 하늘일진데.
서양이 신본 주의라면 동양은 인본 주의다. 서양이 신과 인간을 대립 관계요 종속 관계로 본다면 동양의 그것은 일체 관계요 수평 관계이다. 사람이 곧 하늘인데 어찌 사람 밖에서 신을 찾을 것인가? 마음 밖에 부처가 있겠는가? "천부경"의 전체 문장은 그 뜻이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이 한귀절도 없다. 모든 것을 가장 분명한 문장으로 말하고 있는 경전이다. 이래도 이 천부경이 해석 불가능한 괴기문(怪奇文)이라 할 것인가?
바로 뒤에는 천지인의 세 가지 수가 아닌 다른 숫자들이 처음으로 나온다.
大三合六, 生七八九(대삼합육, 생칠팔구)
여기서 ‘대삼(大三)’이란 천지인의 셋을 말하는데 그 수들을 합하면 6이란 뜻이다. 하늘의 수 ‘1’과, 땅의 수 ‘2’와, 사람의 수 ‘3’을 합하면 6이다(1+2+3). 이 세 수의 합이 필요한 이유는 천지인은 나누어진 것이라도 본래 그것은 하나이기 때문이고, 나뉘었을 때는 ‘1’과 ‘2’와 ‘3’이지마는 그 전체는 ‘6’이라는 하나로 통합됨을 의미하고 있다. 때문에 천지인은 합일된 상태로서는 모두 ‘6’이란 숫자로 말하게 된다. 하늘도 ‘6(1+2+3)’이요, 땅도 ‘6(1+2+3)’이요, 사람도 ‘6(1+2+3)’이다. 천지인은 근본에서 같은 존재이다.
이 천지인이 하나로 합일한 조화에서 세상 만물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7’, ‘8’, ‘9’는 세 개의 숫자를 주욱 나열함으로서 세상 만물을 문학적인 표현처럼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천지인이 조화롭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멸칠팔구(滅七八九)가 될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다음의 구절을 보자.
運三四, 成環五七(운삼사, 성환오칠)
글자대로 풀이하면, “3이 4를 움직여 5와 7로 가락지(둥근 반지)를 이룬다”가 된다. 여기서 ‘3’은 알다시피 ‘사람’이다. 그렇다면 ‘4’는 무엇일까? 이 ‘4’의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5’와 ‘7’을 보자. ‘5’와 ‘7’은 ‘6’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수다. 앞에서 ‘6’이란 수는 천지인이 합일한 큰 수였다. 바로 ‘우주 전체’를 뜻하는 수이다. ‘5’와 ‘7’이라는 수가 ‘6’을 사이에 끼고 있듯이 대우주를 가락지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바로 ‘5’와 ‘7’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이 움직여 이 우주를 둘러쌀 수 있는 것. 그건 바로 인간의 ‘기(氣)’ 뿐이다. ‘부처의 대자대비한 기’와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답이 없어 보인다. 물론 ‘인간의 위대한 정신’으로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후의 구절들은 평이하고 쉬운 문체로서 하늘(우주)에 대해 말하고 있다.
一妙衍, 萬往萬來(일묘연, 만왕만래)
하늘은 묘하고도 넓어서 만물이 드나들며,
用變, 不動本(용변, 부동본)
쓰임은 변해도 근본 자리는 바뀌지 않으니,
本心, 本太陽, 昻明(본심, 본태양, 앙명)
본래 마음, 본래의 큰 빛은 밝고도 밝다.
人中天地一(인중천지일)
사람 가운데 하늘과 땅이 하나이다.
사람 속에 천지가 합일되어 들어 있다는 뜻인데, 이 대목에서 하늘을 ‘1’이란 수가 아닌 ‘하늘 천(天)’으로 쓴 것은 마지막의 ‘일(一)’이 하늘이 아닌 ‘하나’ 또는 ‘합일(合一)’의 의미로 쓰였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늘(신)의 피조물인 것이 아니라 하늘이 사람 속에 내재한다는 사상이다. 불교의 자재불성, 동학의 인내천, 유교의 ‘인(仁)’이 여기서 나왔음이다(‘仁’은 하늘과 땅이 사람(人)과 함께 있는 형상의 글자다). 지구상에 이보다 더 인간을 존중하는 종교나 사상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환(桓) 사상’을 이어받은 석가는 ‘천상 천하에 유아독존’이라 말했다.
"천부경"의 가르침을 하나로 말하면, 그것은 ‘천(天)’도 아니고 ‘지(地)’도 아닌 오직 ‘인(人)’이란 한 글자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받들라는 인본주의의 지평이다. 한 인간이 우주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천부경"의 마지막 문장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다. 앞서 말한 대로 ‘우주는 끝남이 없이 끝난다’이다.
일곱 번째 여행-마음의 귀향-반야
■ 일곱 번째 여행 ■
마음의 귀향-반야
지금까지 나의 마음은 물질과 생명, 시공간과 영계, 전생과 현생, 사후 세계의 실상을 찾아 과학과 종교와 내면의 많은 곳을 돌아다닌 여행자였다. 그 길고 고단한 여행의 끝에 결국 돌아가 쉬고자 귀향을 결심하게 되었다. 바로 이 여행을 처음 떠날 때의 그곳인, 내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고향에 돌아오기까지 긴 여행의 이야기를 써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고향의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내 마음의 고향은 ‘반야(般若)’다. 반야는 원래 범어(梵語)인 ‘prajna'의 음(音)을 한문으로 옮긴 것이다. 파야(波若) 또는 발야(鉢若)라고도 한다. 뜻을 풀이해서 지(智), 혜(慧), 명(明)으로 말하거나, 지혜(智慧)나 청정(淸淨) 또는 원리(遠離)라 하기도 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 47권에는 반야에 대한 설명이 있다.
‘반야는 지혜이며, 모든 지혜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지혜여서 무상(無上), 무비(無比), 무등(無等)한 지혜이며, 이보다 더 높은 지혜는 없다.’
그래서 반야를 부처님의 삼덕(三德)의 하나이고, 육바라밀(六波羅密)의 제일로 치는 것이다. 같은 “대지도론(大智度論)”의 18권에서는 ‘제법의 실상을 아는 것이 반야’라고 하였고, ‘만유의 실상을 실험하여 증명하는 것을 반야’라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진실무상(眞實無常)한 지혜를 성취한 자를 부처라 하는 것이다.
이 반야는 “오부반야경(五部般若經)”이나 “팔부반야경(八部般若經)”의 수많은 경전에서 설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반야경”으로는, 당(唐)의 현장법사(玄裝法師)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密多經)” 6백권이 있고, 그 밖에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 “소품반야바라밀경(小品般若波羅密經)” 등 대단히 많다. 전체 불경 중 약 1/3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한 경(經)이다.
“반야경(般若經)”은 불경 중에서 가장 내용이 방대한 경전이면서, 동시에 그 밖의 어느 경도 가지지 못한 반야의 정수(精髓)를 별도로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密多心經)”이며, 줄여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반야심경”은 불과 260글자에 지나지 않는 짧은 경이지만, 이 “반야심경”이야말로 팔만대장경의 진수(眞髓) 중의 진수요, 석가세존의 80년 설법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바 중생들이 이 경을 마음의 안식처로 삼아 심경(心經)이라 하였고, 나 역시도 이 심경을 내 마음의 고향으로 삼는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불교는 수많은 경전을 가지고 있다. 율(律)이 있고, 논(論)이 있고, 소(疏)가 있으며, 어록집과 수행기와 문답집이 있다. 이 방대한 경해어림(經海語林)을 뒤지다 보면 길을 헤매기 십상이다.
8만 권의 대장경을 언제 다 볼 것인가? 법화경(法華經), 화엄경(華嚴經), 금강경(金剛經), 천수경(千手經), 아함경(阿含經), 관음경(觀音經) 등…. 수많은 불경 중에서 전생과 윤회를 아는데 반드시 필요하며, 이 세계의 실상을 압축하여 설명해 놓은 최종적인 결론이 바로 "반야심경"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불경 중에서 가장 짧은 것이 "반야심경"이며,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이 "반야심경"이다. 이 반야의 가르침을 우리가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세계의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전생과 윤회의 비밀도 엿볼 수 있으리라.
대부분의 불교 경전들은 거의가 일정한 격식과 틀을 갖추고 있다. 석가세존 당시에는 필사(筆寫)의 관습이 별로 없었고,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 적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다. 따라서 주로 제자들의 기억력에 의해 보존되었고, 암송(暗誦)을 통하여 구전(口傳)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부처님 생전의 말씀을 생생히 기억하던 제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남에 따라, 그 가르침들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그래서 사문(師問)들이 모여 서로의 기억을 정리하고 다듬어서 문자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
니까 모든 불경은 부처님의 친문(親文)이 아니며, 제자들의 기억을 모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불경의 첫머리는 언제나 여시아문(如是我文)으로 시작된다. 즉,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로 시작되는 것이다. 결코 부처님은 이러이러하게 말씀하셨다가 아닌 것이다.
혹시라도 잘못된 기억으로 부처님께 누를 끼칠까 두려워한 기록법이다.
그 다음에는 기록자가 그 말씀을 들은 당시의 상황에 대한 배경 설명이 나온다. 대개의 경우 이 부분은 읽는 사람이 질릴 정도로 장황하게(황당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과장이 섞여 있다) 쓰인다.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부처님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자리에 어떻게 앉아 계실 때...로부터 시작해서, 그 자리에 누구누구가 있었고, 누구는 어디서 왔으며, 또 누구는 무슨 일로 왔으며... 등등, 읽는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해 보는 것 같은 동일 구조의 글들이 한없이 반복된다. 즉, 불경은 도입부의 사설이 너무 길어서 읽는 일 자체에 희열을 느끼지 않으면 그 속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운 책인 것이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지겨워서 참아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불교를 알고자 하면 이런 불경을 끝까지 한 글자도 빠트리지 않고 수없이 되풀이 읽을 수 있는 인내력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지겹던 그 끝없는 반복들이 되풀이 읽는 동안에 영혼에 울리는 음률이 되고 음악이 된다. 아마 옛날의 인도인들은 이러한 지리한 경문의 독송(讀誦)에서 법열(法悅)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에는 부처님께 설법을 요청하는 청설의식(請設儀式)이 나온다. 대개는 부처님을 찬탄하고 숭상하는 경배(敬拜)의 노래이며, 부디 어떤 내용을 설해주십사 하는 간절한 청원의 게송(揭誦)들이다. 그 게송들 역시 경탄할 만큼 끝없이 이어지는데, 고대 인도인들의 어휘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페이지들을 다 넘기면, 이번에는 부처님의 답가(答歌)가 나온다. 이것 역시 길고 길어서 나 같은 사람은 듣다가 자게 될 정도다.
그런 다음에나 그 경전의 알맹이인 부처님의 설법이 나온다. 어떤 경우 그 설법은 실로 몇 마디가 채 안 되는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불경은 과대 포장된 상품처럼 포장지를 수백 번 벗겨낸 후에 남는 조그만 물건 같다는 느낌을 줄 때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많은 포장지들은 자체로 훌륭한 그림이어서 한 장 한 장 음미해 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소중한 선물이 된다.
이렇게 불경의 일반적인 형식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반야심경"의 파격성 때문이다. "반야심경"은 다른 불경들과는 달리 서두의 도입부가 생략되어 있다. 처음부터 대뜸 불교철학의 정수와 요체를 곧바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몇 종류의 범어본(梵語本)과 한역본(漢譯本)이 전해지고 있다. 전체적인 의미는 같으나, 형식과 문장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중 우리 나라에서 표준으로 쓰이는 것은 당대(唐代)의 삼장법사 현장(玄裝)의 번역본이다. 나도 이 글에서 현장본을 중심으로 삼고 있음을 밝힌다.
현장 번역본 "반야심경"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시어 오온이 모두 공인 것을 살펴보셨으며, 일체가 고액인 것을 깨달으셨다.)
이 문장만으로 본다면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의 깨달음에 대한 기록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이 경은 관자재보살이 사리불(舍利佛)에게 반야바라밀을 설명한 것이다. 즉, 이 경의 화자는 관자재보살이며, 상대는 사리불이다.
몇 종의 다른 번역본을 종합하여 관자재보살이 이경을 설하게 된 연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왕사성(王舍城) 영취산(靈鷲山 : 혹은 기사굴)에 계실 때 광대심심(廣大甚深)이라고 불리는 깊고 높은 삼매경(三昧境)에 드셨다. 그 자리에는 문수사리(文殊師利), 관세음(觀世音), 미륵(彌勒), 관자재(觀自在)와 같은 일체지(一切智)를 체득한 대보살들이 함께 있었다.
그 중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수행하여 마침내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깨닫고 일체의 고액을 벗어나 있었으므로 부처님의 제자 중 ‘지혜 제일’이라고 불렸던 사리불이 관자재 앞으로 나아가 ‘만일 수행자가 반야바라밀다를 올바로 수행하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대해 관자재보살이 사리불에게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방법을 일러준 것이 바로 이 “반야심경”이 된 것이다. 현장의 번역본은 이와 같은 전후 사정을 모두 삭제하고 오로지 반야바라밀다의 정수만을 곧바로 던지고 있는 데, 현장은 나머지를 군더더기로 생각한 것 같다.
구마라집의 역본에는 관자재보살이 관세음보살로 기술되어 있기도 한데, 여기서 이 경을 설한 사람이 관세음이냐 관자재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 경은 석가세존이 직접 설하신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 경이 석가세존의 가르침을 초극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깨달음을 빌려 석가세존의 가르침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초월해버린 것이다. 석가세존이 직접 말하기 어려웠던 것을 관자재라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자신의 방편(方便 : 중생의 이해를 위하여 설했던 낮은 단계의 가르침)들을 짧은 사자후(獅子喉)로 허공에 날려보낸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첫 문장으로 돌아가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하여 오온이 모두 공인 것을 살펴보셨으며, 일체가 고액인 것을 깨달으셨다’는 뜻을 살펴보자.
문장의 구조로 볼 때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수행하여 깨달은 내용은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한 것’이며 이것을 알고 나서 ‘일체(一切)의 고액(苦厄)’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 반야바라밀의 수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장 속의 오온(五蘊)은 무엇인가? 부처님이 사람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를 설명한 것이 오온이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를 이름이다. 여기서 ‘색(色)’은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요소들을 총칭한 것이다. 완성된 인체의 전체상일 수도 있으나 수조 개에 달하는 세포들을 비롯해서 그 세포들의 단위가 되는 원소들의 개념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두 번째의 ‘수(受)’는 물질적 요소가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모든 유형의 힘(압력, 열, 빛, 소리, 인력 등), 정보, 관계를 포함한다. ‘색’이 있음으로서 당연히 외부 세계로부터 영향받는 모든 것, 또는 그 영향을 받아들이는 작용과 그 기관들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눈, 코, 귀, 혀, 신체, 의식’의 여섯 가지 문으로 불교에서는 육근(六根)이라고 말한다.
이때 수정체와 각막 등으로 이루어진 신체 조직의 일부로서 눈은 ‘색’에 들어가지만, 빛을 받아들여서 상을 맺고 그것을 뇌로 전달하는 작용으로서의 눈은 ‘수’에 포함되는 개념이다. 세포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일 때 육근은 ‘색’에 들어가는 물건이지만 그것들이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 육경(六境 : 빛, 소리, 냄새, 맛, 감촉, 육감)을 받아들이는 작용은 ‘수’이다.
예를 들어, 회로판, 반도체, 케이스의 결합체인 라디오는 그 자체로 물체인 ‘색’이지만, 라디오를 켜서 전파가 수신되어 음악이 흘러나오고 말소리가 나는 과정 및 그에 따르는 각 부분의 작동(전기의 흐름과 제어)은 ‘수’이다. 원자핵은 ‘색’이지만 두 개의 원자핵이 끌어당기거나 밀쳐내는 작용을 하여 서로 간에 미치는 영향은 ‘수’가 되는 것이다. 나무라는 물질에 열을 가하면 빛을 내고 타는데, 나무 자체는 ‘색(色)’이요 불에 타서 빛이 나고 형태가 변하여 마침내 재가 되는 과정은 ‘수’인 것이다. ‘색’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으며 반드시 외부와 ‘수(受)’를 일으킴으로써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색’과 ‘수’는 모든 물질계의 법칙이며 우리가 물질이라 할 때에는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에너지는 ‘색(色)’이고, 정보와 관계가 ‘수’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물질은 ‘색’과 ‘수’의 결합체인 것이다.
물질인 ‘색(色)’과 ‘수(受)’가 오온(五蘊)의 다음인 ‘상’을 가지고 있을 때 ‘생명(生命)’이 된다. 즉, 생명은 ‘색(色)+수(受)+상(想)’의 결합체인 것이다. 여기서 ‘상’이란 무엇인가?
‘색(色)’이 받아들인 ‘수(受)’를 감지하여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단백질이 햇빛을 받아들이는 것은 ‘색(色)’과 ‘수(受)’이다. 그런데 받아들인 햇빛으로 광합성(光合成)을 하는 것은 이미 생명(生命)이다. 광합성처럼 ‘수(受)’에 대한 ‘색의 반응’을 ‘상(想)’이라 한다.
불 속에 한 장의 종이와 살아 있는 벌레 한 마리를 넣었을 때 불에 타면서 종이가 오그라드는 것과 뜨거워서 벌레가 발버둥치는 것은 결코 같은 움직임이 아니다. 열이라는 외부의 힘은 동일해도 종이가 오그라드는 것은 단순한 ‘수’지만, 벌레가 몸부림치는 것은 뜨겁다고 느끼는 ‘상’이 있기에 그 차이는 하늘과 땅 보다 크다. 물론 종이(펄프)가 아닌 살아 있는 나무를 태운다면 거기에는 ‘상’이 있어 뜨거움을 감지할 것이다. 그런데 벌레처럼 몸부림치지 않는 것은 식물에게는 아직 ‘행’이 없기 때문이다. ‘행’이 없이 ‘색’과 ‘수’에 ‘상’이 더해져 있는 생명을 ‘미생물로부터 식물까지’로 보면 된다.
여기에 ‘행’이 더해지는 생명체가 바로 동물이라 이름하는 것들이다. ‘행’은 ‘상’으로 말미암아 나타난다. 배고프다는 느낌은 ‘색’인 육체가 ‘수’인 어떤 느낌을 받아 ‘상’으로 감지하는 것이다. 배 주변에서 오는 정보가 배가 고프다는 신호인지, 배탈이 나서 아픈 신호인지를 감지하여 구별하는 것이 ‘상(想)’이다. ‘상’이 이 정보를 배가 아픈 것으로 감지하면 아픈 배 위로 손을 가져가 쓸어내릴 것이다. ‘상’이 ‘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에 ‘상’이 그 정보를 배가 고픈 것으로 감지하였을 때는 무언가 먹을 것을 찾아 몸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행’은 ‘상’을 따라 일어난다.
‘상’에 무조건 반응하여 일으키는 ‘행’을 우리는 본능적 행위라고 말한다. ‘상’은 ‘색’이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모든 것(受)에 대하여 선악(善惡)과 호오(好惡)의 판단을 하지 않으며 그 반응에 예외를 두지도 않는다. 모든 짐승은 배고프면 무조건 먹는다. 배가 고픈데도 먹이를 앞에 두고 참는 짐승은 없다. 발정기에 짝을 만나면 무조건 결합하지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짐승은 없다. 짐승의 행위는 ‘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응이다. 따라서 ‘색+수+상’에 ‘행’이 더해진 것이 짐승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오온의 마지막 요소인 ‘식’이 더해질 때, 그 생명체를 우리는 인간이라고 부른다. 즉, 인간은 ‘식’을 가진 존재이다. ‘짐승만도 못한 놈’, ‘인간도 아닌 놈’ 등의 욕을 듣는 사람들은 ‘식’이 없어서 그저 ‘상’의 일으킴대로 ‘행’이 나타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식’은 오온의 다섯 가지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이다. 왜냐하면 ‘행’은 ‘상’을 쫓아 일어나며, ‘상’은 ‘수’를 받아 일어나고 ‘수’는 ‘색’이 있음으로써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식’은 ‘행’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며 오히려 ‘행’을 일으키는 ‘상’의 내용을 검증하고, 그 타당성을 판단하며,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상’들의 우선 순위를 자의(自意)로써 정하여 그 ‘상’이 일으키는 ‘행’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물질에서 생명체로, 최초의 생명체에서 동물로의 발달 과정은 순차적이지만,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발달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임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개념이다. ‘식’을 가진 인간만이 선악(善惡)을 판단하며, 본능의 요구에 대해 타당성을 검증한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단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오온이다. 그런데 이 오온이 모두가 공(空)임을 깨닫게 되면 일체의 고액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가르침은 무슨 뜻인가. 역으로 말해 일체의 고액은 오온이 공임을 모르는데서 비롯된다는 의미다. 인간 자체가 공이라고 할 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집착할 아무 것도 없다. 그리하여 집착하여 구할 것이 없을 때 일체의 고액도 없다는 가르침이다. ‘이 세상에 진실로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깨달음만이 일체의 고액을 벗어나는 길임을 밝히고 있다.
오온이 공일 때 나는 공일 것이며, 내가 공이라면 내가 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공일 것이다. 이것을 알면 구할 것이 없고, 구할 것이 없으면 집착할 것도 없다. 집착할 것이 없으면 고액 역시 없을 것이리라.
"반야심경"의 다음 대목을 보자.
사리자(舍利子)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며 공이 즉 색이며 수상행식 역시 이와 같으니라.)
여기서부터 관자재보살의 사리자에 대한 대답이 시작된다. 색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물질 세계(현상계)의 비생명계를 말한다. 이 비생명계는 현상계의 일부로서 현상계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오온의 하나이다. 오온은 ‘색, 수, 상, 행, 식’으로 ‘색’은 비생명인 물질, 수는 색계(色界) 내에서의 개체간의 관계로서 아(我)와 타(他)와의 관계에서 받게 되는(동시에 주게 되는) 모든 것이다. 흔히들 사람의 느낌이라고 풀이하지만, 오온에서의 ‘수’는 사람의 느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만물의 ‘수’를 뜻한다. 즉 두개의 원자가 서로 만나서 깨지거나 합칠 때의 작용과 반작용도 수에 포함된다.
nbsp; ‘상’은 물질이 특정한 순간 특정한 조건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이며, ‘행’은 ‘색’이 ‘색’에 대하여 ‘색’의 세계 속에서 ‘색’에 대하여 작용하는 모든 것이다(‘수’는 수동적 관계이며 ‘행’은 능동적 관계다). ‘식’은 앞의 사온(四蘊)을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오온 중 ‘색’(물질 그 자체, 재료)과 ‘상’(물질이 이루어 놓은 형태, 구성물)은 유형의 세계이며, ‘수’(수동적 관계)와 ‘행’(능동적 관계)은 무형의 세계이며, 마지막의 ‘식’은 이 유무형의 세계(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를 인식하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 수 있게 하는)것이다.
오온이 모두 공임을 깨달은 관자재보살이 오온 중의 하나인 ‘색’만을 들어 ‘색’이 곧 공이라고 설명한 까닭은 무엇일까? 오온은 그 자체로 유형인 물질계와 무형인 관계, 그리고 형태를 논할 수 없는 의식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 모두가 공이라고 설명하기 전에 우선 오온의 첫째이며 물질계의 근본인 ‘색’이 공임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색즉시공’은 오늘날,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에 따라 설명하는 것이 더욱 적합하리라 생각된다. 이 경이 설해지던 당시에는 물질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신비하고 비유적인 설법으로 대신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이 이룩한 업적은 더 이상 모호하고 비현실적인 설명이 필요 없도록 해주고 있다.
즉, 모든 물질은 과학적 증거로 보아서 공인 것이다. 앞의 여행에서 본 것처럼 양자역학이나 우주물리학은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물질이 존재하지 않음을 밝혔고(측정의 불확정성과 비인과론적 존재성, 그리고 반물질에 의한 소멸이라는 물질의 세 가지 측면에서), 현재 존재하는 모든 물질조차도 비존재의 잔해임을 알게 해 주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는 나타나지 못하고 소멸된 세계의 10억분의 1이라는 잔해에 불과한 것이다. 소멸되어 버린 세계에 비교할 때 한 알의 모래와 같은 작은 규모의 세계일 뿐이며, 이것 역시 찰나에 소멸될 필연적인 운명에 놓여 있다. 그리고 사라지기 전이라 할지라도 그 본질은 이미 소멸되어 버린 세계와 같이 무(無)인 것이다.
물론 부처님이나 관자재보살은 물질이 공인 것을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설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한마디, ‘색즉시공’을 말하기 전에 팔만의 경을 설해야만 했다.
그러나 과학이 증거를 제시해 주는 오늘날에는 이 구절을 설명하는데 굳이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비유가 필요하지 않다. “물질의 본질은 무(無)이고 이 세계의 실상은 공(空)이다. 이것은 과학적 관찰의 결과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nbsp;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라는 말은 물질이 모두 공이므로 그 물질이 모여서 이루고 있는 모든 형상도 공이며, 물질 사이의 모든 관계 역시 공이며, 따라서 공인 것을 인지하는 의식 역시 공이다라는 의미다. “반야심경”의 이 구절이야 말로 허상의 실체인 세계를 극명하게 정의 내린 한마디다. 그 다음의 대목들은 이 한마디에 대한 부연에 지나지 않는다.
사리자(舍利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사리자여 모든 법이 공한 것이어서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더해지지도 줄어들지도 않느니라)
여기서 제법이라 함은 불법을 포함한 모든 세계의 원리와 원칙 일체를 포함하는 것이다. 제법이 공하다는 것은 불법조차 공하다는 것이며, 부처님의 깨달음, 가르침, 가르침을 쫓고자 하는 노력, 깨달음으로의 구도(求道), 이 모든 것이 다 공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하면 오온이 모두 공인 것을 깨닫는데 그것을 깨닫게 되면 제법이 모두 공상임을 알게 되므로 반야바라밀다 역시 공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야바라밀다는 공상인 제법을 초월하는 법인가? 아니면 그것 역시 공상이라고 하는 제법에 속하는 것인가?
불교의 위대함은 바로 이 궁극의 차원, 지고의 깨달음조차도 모두 공임을 인정하고 있다는데 있다. 즉 제법무상을 가르치는 교설은 교설 그 자체가 제법으로서 무상한 것에 포함되므로 무상한 것이 무상을 가르치는 무상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은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그 본질이 공이어서 존재하고 있다고 증명할 수 없는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세계를 파악하는데 따르는 필연적인 모순(근본모순)인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모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솔직함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nbsp; 그렇다면 모든 것이 공이고 모든 것이 무상하며 일체가 무인 이 세계에서 불교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깨달음이 가지는 가치는 무엇이며, 깨닫고자 하는 노력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불교는 가지고 있는가? 계속해서 반야심경을 읽어보자.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더해지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이 세계는(제법이라고 할 때 법이란 말속에는 이 현상계의 모든 삼라만상-물질과 물질들이 이루어낸 형상과 그것들을 그 자리에 있게 하는 원리와 법칙-이 포함되어 있다) 공상이어서 생겨남이 없고 멸하지 않는다고 관자재는 말한다. 만약 이 세계가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어서 공상이라고 한다면 없어질 때까지는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세계는 언젠가 없어질 무엇이 아니다. 왜냐하면 없어질 무엇이 생겨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영구불변한 것이 없고 인연법에 따라 잠시 나투어 난 것이라 헛되고 헛되다고 가르쳤는데, 여기 “반야심경”을 설한 관자재보살은 영구불변하지 않고 언제나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헛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헛되고 말고 할 것이 생겨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세계는 멸할 것이기 때문에 헛된 것이 아니고 생겨난 적이 없기 때문에 멸할 것도 없다는 것이며, 이 불생불멸의 개념 앞에는 헛되다는 생각이 자리잡을 여지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다. 생겨나서 스러져가는 존재가 헛되고 무상한 것이지
생겨나지 않은 것이 무상할 리 없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제법무상을 말하고 있지만, 제법조차 불생이며 불멸인 까닭에 무상할 턱이 없는 것이며 무상하고 아니하고 할 제법이 생겨나 있지도 않은 것이다. 있지도 않은 제법을 무상하다고 말하는 이 반야의 마음 역시 생겨나 있지 않고 멸할 이유가 없는 것이어서 우리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있지도 않은 오온을 모두 공이라 말하고, 있지도 않은 제법을 무상하다 하고, 있지도 않은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수행하라고 하고, 있지도 않은 부처가 있지도 않은 광대심심이라는 삼매에 빠져 있고, 있지도 않은 사리불이 있지도 않은 관자재보살에게 있지도 않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법을 묻고, 있지도 않은 관자재 보살이 있지도 않은 사리불에게 모든 것은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있지도 않은 내용이 바로 이 “반야심경”이라 할 것이다.
제법공상이라 할 때 제법공상을 말하는 관자재보살도, 그것을 듣고 있는 사리불도 제법공상을 깨닫는 반야바라밀도 역시 공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더해지지도 줄어들지도 않느니라". 뒷구절은 사족에 다름 아니다. 불생(不生)!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시고(是故) 공중무색(空中無色)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무안계(無眼界) 내지 (乃至) 무의식계(無意識界) 무무명(無無明)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 내지(乃至) 무노사(無老死)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그래서 공 안에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이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이 없는 것이며, 색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법이 없으며, 눈으로 보는 세계가 없으며, 의식으로 감지하는 세계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하는 일도 없으며, 늙고 죽는 일도 없고, 늙고 죽는 일이 다함도 없으며, 고집멸도의 사성제도 없고, 알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으며, 얻으려고 애쓸 것도 없느니라)
“반야심경”은 계속해서 14가지에 대한 없음(無)을 열거하고 있다. 그런데 "반야심경"이 무로 단정짓고 있는 이 14가지는 석가세존이 팔만의 경을 통해서 누누히 설법해온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반야심경”을 두고 석가세존의 모든 가르침을 송두리째 뒤엎고 있는 파천황(破天荒)의 궁극설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 가운데는 물질이 없고 수상행식(여기까지 오온의 전부)이 없으며 눈, 귀, 코, 혀, 신체, 의식의 육근과 육근이 외부와 작용하는 보이는 것 즉 소리, 냄새, 맛, 촉감, 인지의 육경(이 육근과 육경을 이 세계가 넘나드는 12처라고 한다)이 무이며, 보이는 세계도 무이며, 인지하는 세계(의식의 세계)도 무이며, 인연이 시작되는 최초의 시발점(무명)도 무이며, 그 인연이 다하는 종착점(무명진)도 무이며, 늙고 죽음도 없으며(무노사), 늙고 죽는 것을 초극하는 것도 없으며(무노사진), 사성제도 무이며(무고집멸도), 깨달음도 없으며(무지), 따라서 얻을 것도 없고(역무득), 따라서 얻으려고 애쓸 것도 없다(역무소득고)"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의 부정이다. 완전한 부정이며, 티끌 하나 그 속에 포함될 것을 허락치 않는 진공(眞空)의 가르침이다. 석가세존이 수십 년 동안 설했던 교리에 대한 가차없는 파괴이며, 부처니 깨달음이니 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부정이다. 석가세존이 이 세계의 구성 요소로 설명했던 오온이 없음, 그것이 있음으로써 실체가 없는 세계가 실체로써 존재할 수 있다고 설명했던 12처가 없음, 이 세상 모든 것이 그것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던 인연이란 것이 없음,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가 없음, 불교의 목적인 깨달음이 없음,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즉, “반야심경”은 불교의 모든 것들, 인연법, 유식론, 사성제에 의한 수행, 깨달음, 해탈에 대해서 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보리살타(菩提薩唾)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密多故) 심무가애(心無佳碍) 무가애고(無佳碍故)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구경열반(究境涅槃) (모든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울 일이 없으며, 허망한 세상을 실체로 여기는 몽상에서 멀리 비켜나게 되므로 생사를 초월하는 높고 밝은 경지를 이루는 것이니라.)
불도를 닦는 모든 보살들은 이 반야(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말은, 반야의 진리란 앞에서 본 것처럼 일체가 공이며, 어떤 것도 구할 수 없고, 구하려 들 필요조차 없음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가애(자신을 옭아매고 마음의 자유를 구속하는 집착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의미다. 마음을 자유롭지 못하게 구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낄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모든 두려움은 죽음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인데, 나고 죽음을 이미 초탈한 대진리광명의 경지에서는 어떤 일도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태연한 척할 수 있는 사람은 있겠지만, 진실로 삶과 죽음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그 모든 게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꿈이었음을 알고, 마음에 한점 가애가 없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보살이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이런 생사초월의 열반 경지에 갈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삼세제불(三世諸佛)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密多故)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 多羅三貌三菩提) 고지(故知)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 시대신주(是大神呪) 시대명주(是大明呪) 시무상주(是無上呪)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진실불허(眞實不虛) 고설반야바라밀다주(故設般若波羅密多呪) 즉설주왈(卽設呪曰) 아제(褐帝) 아제(褐帝) 바라아제(波羅褐帝) 바라승아제(波羅僧褐帝) 모지사바하(菩堤娑婆訶)
(과거의 모든 부처들과, 현세의 모든 부처들과, 미래의 모든 부처들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니,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반야바라밀다가 가장 지극하고, 가장 밝으며, 가장 높으며, 비교할 바 없는 것이어서 능히 일체의 고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며, 진실 되고 거짓이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며, 때문에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외워야 하는 것이다. 이 주문을 말하자면, 바로‘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이니라.) 여기서 삼먁삼보리는 범어(梵語)인 ‘삼먁삼보리(Samvaksambodhi)'라는 말을 소리나는 그대로 한문으로 옮긴 것이다. 한자를 우리 식으로 읽으면 ’삼모삼보제‘가 되어버리는데, 이것은 한자를 중국 사람들이 읽었을 때 ’삼먁삼보리‘라고 발음되도록 현장이 번역한 것이므로 한자 원문을 따질 필요 없이 그냥 ’삼먁삼보리‘로 읽으면 된다. 뜻은 앞에서 나온 구경열반이나 해탈의 경지와 같은 ’무상성등정각(無上性等正覺)‘으로 번역하고 있다. 더 이상 위로 올라갈 경지가 없는 가장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말한다.
불교의 많은 교리는 그 목적을 중생의 계도에 두고 있다. 그래서 불교의 지혜를 말하는 바라밀다에는 수없이 많은 종류가 있다. 여러 바라밀다는 모두 그것을 구하는 자와 구하는 목적에 따라 바라밀의 성격이 다르다. 사바세계의 중생이 구하는 지혜가 따로 있고, 부처의 길을 가는 보살들이 구하는 지혜가 따로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이 반야바라밀다를 삼먁삼보리로 칭한 이유는, 반야의 정신이 바로 부처가 되고자 하는 보살들의 의지처이고 열반의 정상에 오르는데 필요한 자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바라밀들과는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
중생들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사성제요, 팔정도요, 삼학이지 반야가 아닌 것이다. 오온을 배우는 정도면 충분하지, 오온이 공임을 아는 지혜가 일상의 삶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물며 십이연기도 헛것이요, 사성제라는 것은 있지도 않으며, 불법조차도 공이라는 일체개공을 깨닫는 지혜는 잘못하면 허무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때문에 이 반야는 정각을 추구하는 보살들이 반드시 깨닫고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하는 최고 경지의 각(覺)이다. 부처가 되는 순간은 부처란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부처가 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경지이다. 해탈을 하겠다는 정진과 일념조차도 공으로 돌아가 버린 다음이라야 열반의 문은 열린다. 티끌 하나도 존재하는 자리에 삼먁삼보리의 꽃이 피지 않는다. 그것은 일체공, 일체무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화엄의 세계다.
중생은 나무관세음을 외울 때, 원력의 가피를 얻을 수 있고, 천수경을 읽음으로서 지헤의 문을 열 수 있다. 그러나 부처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관세음보살에 의지해서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자신이 관세음보살이나 삼세의 제불보다 위에 서리라 결심한 사람이 천수경을 외워서 얻을 것은 없을 것이다. 석가세존의 손에 의지한다면 석가모니불의 아래 자리까지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계단일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서 갈 수 있는 경지는 부처 너머일 수 없다. 부처를 초월하는 유일한 지헤가 바로 이 반야바라밀이다.
불교는 석가세존 80년 설법의 모든 것을 의미 없고 쓸데없으며 불필요한 공론(空論)으로 돌림으로서 부처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 삼세제불의 모든 가르침에서 얻을 것이 없고, 얻으려할 것도 없으며, 제법이 공상이어서 불법조차도 공상이라는 극한의 부정을 넘어서는 극한의 긍정을 반야바라밀은 보여주고 있다. 이 반야가 아니었다면 불교는 부처라는 신과 그 신에 머리를 조아려 복을 비는 수억만의 중생으로 나뉘는 유신론적 종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직 반야의 횃불이 있어서 그 전도몽상의 암흑에서 나아갈 한줄기 길을 비추고 있음이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이 주문은 속세에 몸담고 살아갈 중생이 외우는 주문이 아니다. 부처가 되고자 결심한 구도자가 외우는 주문이다.
뜻을 풀이하면, ‘가세 가세, 어서 가세, 저 피안(彼岸)을 향해서, 열반의 세계로…’이다. 그러나 이런 주문은 구태여 뜻을 옮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소리나는 대로, 노래 자체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화엄의 바다에 배를 띄우고, 저 피안을 향하여 떠나려는 모든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이제, 저 영혼의 노래를 부르면서 오랜 시간 떠났던 마음의 여행에서 돌아와 쉬려고 한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후기(後記)
나는 개인적으로 종교적인, 또는 영적이라고 할 만한 체험들을 많이 했다. 전생의 일로 간주해도 좋을 만큼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꿈들과,
우연이라고 돌리기엔 너무나 들어맞는 예감들과, 앞길을 보여주는 선몽들의 체험이 그런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종교, 또는 사후 세계나 외계의 존재 같은 불가지한 대상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한 사람들은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 또 그런 사람들의 책들도 많이 읽어본 바이다.
내가 어느 날 잠깐 죽어서 천국엘 갔었는데 그곳이 어떻게 생겼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보았고 하는 등의 교회 간증록과 비숫한 것에서부터, 마치 에드가 케이시처럼 사람의 전생을 볼 수 있는 초능력이 있노라는 확신하에 오직 자신의 체험기일 뿐인. 엄밀히 따지면 상상으로 써낸 소설에 다름없는 전생의 이야기, 또는 개인적이고 피상적인 가사상태의 체험이나 괴기담에 가까운 귀신이야기 또는 불가사의한 심령과학계의 이론 등 수없이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일을 겪었다’는 체험의 기록 또는 ‘나는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초능력자로서의 자부심은 그의 주장에 어떠한 논거도 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개인의 체험은 그 자신에게는 금강석과 같은 믿음의 근거가 되겠지만 알다시피 그런 개인의 체험은 수천, 수만 가지의 사례를 수집할 수 있고 그 각각이 모두 일치하는 하나의 세계를 뒷받침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리 신빙성 있는 것으로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무리 열정적이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영적인 체험으로 그가 믿는 종교를 증거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한 개인의 영역일 뿐 진리의 증거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와 정반대 되는 교리의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 중에서도 그와 비교해서 결코 약하지 않은 개인적 체험의 사례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신자의 영적 체험과 기독교신자의 영적 체험은 어느 쪽의 사례가 더 많으냐로 진리와 허위를 나눌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양쪽의 체험자들의 믿음의 강도로서 진리를구분할 것인가? 양쪽의 체험이 다 진실한 것이라면 불교와 기독교는 둘 다 진리인가? 아니면 분명히 어느 한쪽의 체험은 거짓이고 날조된 것인가?
내가 보기에 모든 종교는 예외 없이 그 종교 내에서 독특한 영적인 체험을 쌓아왔고 그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진실 되고 거짓 없는 개인의 체험들로 보인다. 그러한 개인적 체험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진리인가? 아니면 모두 허위인가? 어느 한쪽이 진리라면 나머지는 허위일 수밖에 없어 보이는 개인적인 체험의 세계는 우리에게 많은 당혹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자기가 믿는 종교의 체험은 신성한 성령의 임함이요, 타종교의 체험은 악마의 장난이라고 매도함으로써 마음이 편할 수 있는지가 나는 지극히 의문스럽다.나는 나 자신의 체험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에서 이 여행을 시작하였다. 나의 체험이란 남에게는 예외적이고 신비스러운 흥미거리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여행을 나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시작하였지만 그것을 설명해줄 수 있는 객관적이고 보편성 있는 근거를 찾아가는 긴 여행이었음을 밝힌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한 번도 나의 개인적인 체험을 논거로 사용한 바가 없다.
글의 중간에 나의 그런 개인적인 체험들을 끼워 넣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때가 많았지만 끝까지 그것을 자제하는데 성공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개인적인 신비한 체험을 끌어들이지 않고서 내가 설명하고 싶었던 대부분의 문제에 대한 접근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여행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은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신데 감사를 드리고 앞으로 더욱 가치 있는 발견이 있는 여행을 하게 된다면 그때 또 다시 이 여행기를 보충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
마산에서, 이경숙 합장배례
참고도서 목록
참고도서 목록
1. 영원한 자유의 길 : 성철 스님/백련선서간행회/1990
2. 한단고기 : 임승국/정신세계사/1994
3. 한단고기 : 김은수/가나출판사/1986
4. 배달전서 : 송원홍/신광문화사/1987
5. 천부경과 한의 원리 : 황기운/경인문화사/1985
6. 천부경 : 최동환/하남출판사/1991
7. 천부경 : 문재현/바로보인/1997
8. 불교의 바른 이해 : 허순규/동선사/1992
9. 불교성전 : 성전편찬회/동국역경원/1989
10. 알기 쉬운 반야심경 : 송원/상아/1997
11. 반야심경 해설 : 고성훈/우리출판사/1985
12. 반야심경 : 라즈니쉬/일지사/1996
13. 반야심경 : 법성/큰수레/1996
14. 불교경전의 이해 : 이재창/경학사/1998
15. 과학시대의 불교 : 미즈하라 ?지, 대원정사, 1988
16. 중론 : 나가르주나(용수), 서문문고, 1996
17.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 김용옥, 통나무, 1989
18. 경전의 성립과 전개 : 미즈노 고겐/시공사/1996
19. 생명의 기원에 대한 일곱 가지 단서 : 스미스, 그레이엄 케언스/두산동아/1994
20. 생명의 기원 : 오파린, A,I./한마당/1990
21. 종의 기원 : 다윈/집문당/1997
22. 다윈 이후 : 제이로드, 스티븐/범양사/1994
23. 마음과 물질의 대화 : 베이트슨, 그레고리/교려원미디어/1993
24. 선의 근원 : 김무득/두리출판사/1995
25. 참선 입문 : 기쇼지 이지야/해뜸/1989
26. 한국선 : 박경진/치국평천지사/1995
27. 과학기술과 정신세계 : 유아사 야스오/범양사/1988
28. 과학은 지금 물질에서 정신으로 흐르고 있다 : 울프 트레드 A./고려원미디어/1997
29. 명상 : 라즈니쉬, 바그완슈리/한마음사/1994
30. 기 : 강대봉/언립/1994
31. 기 - 인체가 내뿜는 에네르기 : 유아사 야스오/화계/1991
32. 기 단학 : 이승헌/행림출판사/1988
33. 기란 무엇인가? : 마루야마 도시아끼/정신세계사/1994
34. 생명과 우주의 신비 : 쇼어, 윌리엄 H/예음/1994
35. 자기로부터의 혁명 : 크리스나뮤르티, J./범우사/1994
36. 전생과 인연 : 은영선/기린원/1997
37. 괴담의 과학 - 유령은 왜 나타는가? : 나카무라 마레아키/전파과학사/1991
38. 놀라운 가설 : 영혼에 관한 과학적 탐구 :크릭, 프란시스/한뜻/1996
39. 영혼과 심령의 세계 : 로이 스테만/자유시대/1991
40. 생의 의문에서 그 해결까지 : 광덕/불광출판부/1986
41. 과학과 종교 : 오창희/생능/1989
42. 시간의 역사 : 스티븐 호킹/청림출판사/1992
43. 시간과 화살 : 스티븐 호킹/두레/1992
44. 4차원의 세계 - 초공간에서 상대성 이론까지 : 쓰즈키 다쿠지/전파과학사/1995
45. 가이아의 시대 : 러브락, 제임스/범양사/1995
46. 새로운 양자 생물학 : 사키기와 노리유키/전파과학사/1994
47.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 : 폴 데이비스/정신세계사/1989
48. 철학속의 과학여행 : 베네슈 호프만/동아출판사/1989
49. 우주심과 정신물리학 : 이차크 벤토프/정신세계사/1994
50. 상대성이론의 세계 : 콜먼, 제임스/다문/1993
51. 마음의 진화 - 미생물에서 인간까지 : 데닛, 대니엄 C./두산동아/1996
52. 물리철학 : 플랑크, 막스/전파과학사/1991
53. 물리학의 ABC : 후쿠시마 하지메/전파과학사/1995
54.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 윌버, 켄 편저/고려원미디어/1996
55. 중력현상의 합리적 이해 : 김영식/과학과 사상/1994
56. 현대물리학 - 그 새로운 이해 : Serway 외/회론당/1996
57. 우주의 역사 : 스무트, 조지 외/까치/1994
58. 코스모스 : 세이건, 칼/학원사/1997
59. 티끌 속의 무한 우주 : 정윤표/사계절 출판사/1994
60. 블랙홀과 우주 : 노비코프, 이고르/동아출판사/1996
61. 가이아 - 생명체로서의 지구 : 러브록, J.E/범양사/1996
62. 무신론과 유신론 : 히사마쯔 신이찌/열린 책들/1998
63. 정신분석 입문 : 지그문트 프로이트/민성사/1994
64. 꿈의 해석 : 지그문트 프로이트/오늘의 책/1994
65. 무의식의 분석 : 칼 구스타프 융/홍신출판사/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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