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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사회에 활력 불어 넣는 청년귀농인들의 모습

醉月 2009. 11. 12. 10:15

농업 '골드오션' 개간하는 88만원 세대

농촌 사회에 활력 불어 넣는 청년귀농인들의 모습

많은 도시인들이 ‘귀농로망’을 가지고 있다. 그 로망은 간단하다. ‘언젠가 농촌에 귀농 혹은 귀촌하고 싶다’ ‘그러나 농사는 힘들어서 못 짓겠다’ ‘하지만 벌어놓은 돈이 많지 않아 조그만 돈벌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이다. 그런 로망에 대한 답을 찾아 한가위 합병호에 ‘달콤한 귀농’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실었다.

경남 하동, 전남 함평, 전북 남원 진안, 충남 서천, 충북 충주 등 전국 곳곳의 귀농인들을 만나고 그 답을 찾아보았다. 마을 사무장 등 일종의 사회적 일자리에 취업하는 방식, 농촌체험마을 등 도시인의 활용해 비즈니스 모형을 만드는 방식, 다양한 농가공품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식 등 다양한 답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귀농을 빨리 하면 빨리 할수록 경쟁력이 높다는 것이었다. 대체로 은퇴형 귀농은 전원생활형 귀촌에 가까웠고 청년 귀농이 정통 귀농에 가까웠다. 청년 귀농인들에게 농촌은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를 따로 전하기로 했다.

농림수산식품부 벤처농업대학 천안연암대학 귀농지원센터 전국농민회 등으로부터 청년 귀농인 사례를 추천 받았다. 그들 중 몇은 벌써 억대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농촌 총각은 장가를 못간다는 말도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서른 전에 대부분 결혼을 했고 미혼 총각들도 어여쁜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심지어 재혼을 앞둔 ‘돌싱(돌아온 싱글)’도 있었다. 그들은 농업 ‘골드오션’을 일구고 있었다.

    

ⓒ고형석

'고유나츨라워'의 고형록,유준영,나석운씨(왼쪽부터)충남 서천군에는 ‘관엽식물’을 기르고 있는 세 명의 농촌 총각이 있다. 고형록(32) 유준영(32) 나석운(30), 이들은 세 명의 성을 따 ‘고유나 플라워’라는 농장을 설립했다. 외딴 산골에서 비닐하우스에서 거주하며 꽃을 가꾸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꽃 키우는 산적’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서로를 다독이며 외로움과 불안함을 극복하고 있지만 아직 벌이가 시원찮다. 지난해 올린 순이익은 3천만원 정도였다. 셋이 나누면 1인당 천만원 정도고 월급으로 환산하면 83만원 남짓이다. 벌이만으로 본다면 이들도 영락없는 88만원 세대다. 그러나 이것은 이들의 출발점일 뿐이다. 농업기술센터에서도 이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고 지난 추석 전에는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도 이들을 방문해 격려하고 갔다.

    표고버섯 재배로 억대 수익을 거두는 이성희씨.같은 서천군에서 표고버섯을 재배하고 있는 청년 귀농인 이성희(29)씨는 이들의 10배 가까운 수익을 올리고 있다. 2002년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뒤 귀농하는 아버지와 함께 귀농한 이씨는 그동안 표고 농장을 5배 가까이 키웠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이제는 매년 표고버섯 50만개 약 600톤 정도를 생산하는 대농이 되었다.

이씨는 참나무 원목으로 표고를 재배하지 않고 톱밥으로 재배해 생산 단가를 낮췄다. 철공소를 운영했던 아버지와 함께 통나무로 톱밥 만드는 중고기계를 들여와 개조해서 사용했다. 그리고 수확이 한 계절에 집중되지 않도록 분산시켜 가격 등락에 대비하고 온라인 판매를 활성화 시켜 독자적인 판로를 개척했다.

올봄 이씨는 벤처농업대학에서 만난 동기 여학생에게 자신의 비전을 설명하고 결혼에 성공했다. 그는 “아내에게 시골에 시집온다고 해서 들에 나가서 일하는 것이 아니다. 서류 작업만 도와달라. 그것만 해도 큰일이다. 라고 역할을 명확히 설명해서 결혼에 성공했다”라고 말했다. 차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군산에서 아내와 백화점 쇼핑도 즐기고 영화 관람도 즐긴다.

최근 이씨의 표고농장에 새로운 동업자가 나타났다. 바로 두 살 터울의 동생이다. 삼성그룹 계열사를 다니던 동생은 퇴직금을 표고 농장에 투자하고 동업자가 되었다. 영농팀장을 맡고 있는 동생 이희영씨는 “요즘 일하시는 아주머니들과 친해지기 위해 홈드라마를 애청하고 있다. 몸은 피곤한데 심리적 압박감이 없어서 좋다. 무엇보다 내 일이니까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20만㎡의 고구마 농사를 짓는 박종화씨.‘고구마 총각’으로 불리는 충남 예산의 박종화(28)씨 역시 짧은 기간에 대농으로 성장한 청년 귀농인이다. 연간 3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비결은 역시 기계화 영농이었다. 한 대 한 대 마련한 농기계가 벌써 일곱 대에 이른다. 카니발승용차와 인부를 실어나르는 봉고차, 그리고 고구마를 실어나는 트럭이 각 한 대, 대형과 소형 트랙터 한 대, 그리고 지게차와 대형 고구마 세척기가 있다. 냉장 창고까지 총 5억여원 정도를 시설과 기계에 투자했다.

이런 기계들을 바탕으로 어머니가 짓던 3천평 농사를 6만평으로 키웠다. 16년 동안 고구마를 길러온 어머니의 노하우를 계승해 철저한 품질관리 체계를 만들었다. 고구마를 12등급으로 선별해서 판매하면서 신뢰감을 얻은 것이 주효했다. 박씨는 “고구마 농사는 수익이 50% 이상이다. 수익이 눈에 보이는데 그것이 농사라서 포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나”라고 말했다.

고구마 농사를 지어 대학에 다니는 동생의 학비와 생활비까지 대는 아들이 대견스럽지만 박씨의 어머니는 아들이 농사를 싫어하게 될까봐 늘 근심이다. 그러나 혼자서 음악 들으며 트랙터 몰며 농사짓는 것을 즐기는 박씨에게 농사는 ‘취미’에 가깝다. 그렇게 일하다가 비가 오는 날이면 서울로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곤 한다. 

    '로컬푸드'운동을 일으키는 이재국씨.서천군의 또 다른 청년 귀농인 이재국씨는 또 다른 비전을 가지고 농촌에 왔다. 지역자활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그는 지역의 소농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가 내건 방식은 바로 ‘지역의 생산물은 지역에서 소비한다’는 지산지소 운동 즉, ‘로컬푸드’ 운동이다.

이씨는 유기농 농산물을 매개로 지역에서 생산자 조합과 소비자 조합을 결성해 유통망을 만들었다. 25농가가 생산하는 40가지 품목을 270가구에 배달한다. 농산물을 그대로 배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두부나 장류 등 가공품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더하고 있다. 여기에 ‘건강먹거리여행’이라는 농촌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생산자와 소비자를 서로 만나게 하고 있다. 

생산과 가공 그리고 직거래 매장과 소비체험을 엮어낸 이씨는 “이제 농업은 6차 산업이 되어야 한다. 1차 2차 3차 산업을 융합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역 생협 운동을 통해 지역의 소농을 살릴 수가 있다”라고 말했다. 생산자도 누가 먹는지 알고 소비자도 누가 생산했는지 아는 ‘얼굴 있는 먹거리’가 답이라는 것이다. 

이씨가 요즘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과수 분양’ 사업이다. 배나무 등 과수나무를 한 그루 당 20여 만원을 받고 도시의 소비자에게 분양하고 농민이 이를 대리 경작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고령인 농민에게 도시 소비자가 자본과 노동력을 보태 ‘합작농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기농 농산물 유통을 하는 박대희씨.전남 순천시의 박대희(25)씨 역시 유기농 농산물 유통을 하고 있다. 이재국씨와 다른 점은 판매망이 소비자 조합이 아니라 학교 급식과 인터넷이라는 점이다. ‘생기들녘’이라는 이름으로 농산물 유통사업을 하고 있는 박씨는 광주직할시와 보성 광양 순천 여수 일대의 학교에  친환경 농산물을 급식 식재료로 납품하고 있다.

2005년 박씨는 귀농한 아버지를 따라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농산물 유통에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농산물의 생산을 맡았고, 자신은 유통을 맡았다. 2억2천만원 정도의 비용을 들려 ‘저온냉장 보관창고’를 지었다. 지역 농가를 찾아다니며 열심히 유기농 농산물 재배 농가를 모아 100가구 정도의 작목반을 꾸렸다.

농가를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박씨는 “농가에 찾아갔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아버지 바꿔라. 아버지랑 통화하겠다’라는 말이었다. 내가 책임자라고 말해도 믿지 않고 그냥 잔심부름이나 하는 사람으로 취급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꾸준히 신뢰를 쌓아갔다. 농민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자신도 농사를 짓는다는 점이었다. 농민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박씨와 결국 거래를 텄다. 요즘 박씨는 순천대 농업경제학과에 편입해 늦깎이로 공부하고 있다.

아버지 박주상(53)씨는 “농민들은 자기 고집이 강하다. 속으로 도둑놈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농민들을 설득하고 관리하는 아들이 대견하다. 요새는 아들이 더 낫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리는데 기분이 좋다”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농장에서 올리는 수입은 20~25% 정도고 아들이 유통을 통해서 얻는 수입이 75~80%를 차지하고 있다.  

   

 

'개군한우' 유통을 하는 김재훈씨.이성희씨와 박대희씨가 귀농한 아버지를 따라 귀농한 사례라면 김재훈씨(29)는 아버지의 가업을 잇기 위해 귀농한 사례다. 김씨의 아버지 김용봉씨는 양평 개군한우를 전국적인 브랜드로 일군 한우전문가다. 각종 특허를 보유하고 표창을 두루 수상한 아버지의 노하우를 계승하기 위해 과감히 귀농을 결심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그는 컴퓨터 게임 개발자로 4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건축학 전공을 살려 집 옆에 정육식당을 설계하고 시공한 그는 유통과 가공 분야에 역점을 두고 있다.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키운 소에 부가가치를 더하기 위해서다. 정육식당에서는 쇠고기를 1등급과 1+등급 1++등급으로 나눠서 따로 가격을 책정해 받고 있다. 고급 부위만 선호하는 소비자들 때문에 외면당하는 부위의 쇠고기로 육포를 개발하는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충남 연기군의 김민호(26)씨 역시 가업을 창조적으로 잇고 있다. ‘오색미’ 재배에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를 기계화된 영농으로 돕고 있다. 충남 연기군과 충북 청원군 전북 부안군 등 3개 도에 20만평 가까운 논이 있지만 이양기나 콤바인 트랙터 등 농기계를 이용해 가족의 힘만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서울에서 바텐더 생활을 7년 동안 했던 충남 공주시의 최숙종씨(32)는 아버지의 과수농업 노하우를 자신의 축산에 접목시킬 궁리를 하고 있다. 배와 사과를 먹인 한우를 길러 상품가치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최씨는 “3천평 축사에서 3년 안에 3억의 수익을 올려보겠다. 그래서 내 꿈인 열기구를 마음껏 즐기겠다”라고 말했다. 

   

꽃차와 꽃음식을 개발하는 박상호씨.

대농이 되거나 가업을 잇는 것 외에 취미생활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귀농하는 사례도 있다. 충남 예산군의 박상호씨(35)가 대표적인 사례다. 수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대학 강사로 일하던 그는 꽃에 관심이 많았다.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야생화 사진을 찍었다.  야생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던 그는 귀농하고 꽃차와 꽃음식 개발에 나섰다. 식물자원학 박사과정을 수료하면서 펜션을 지어 농촌체험마을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방문객들에게 꽃차와 꽃음식을 보여주며 홍보하고 있다. 내년부터 본격적인 제품 판매를 하기 위해 올해 냉장창고를 짓고 제품을 가공하고 있다. 

   

실패를 딛고 묘목 농사로 재기한 신중우씨.

‘청년 귀농’에 성공사례가 많기는 하지만 귀농이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귀농 9년차인 충남 연기군의 신중우(34)씨의 귀농 역사는 실패의 역사였다.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갑작스럽게 귀농을 결정한 후 그는 번번이 농사에 실패했다. 천운마저 따라주지 않아서 어렵게 지어놓은 비닐하우스가 폭설에 주저앉기도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 백만원의 성금을 모아서 보내주기도 했다. 

그가 얻은 교훈은 ‘대출은 덫이다’ ‘판매처를 먼저 생각하라’ ‘정보가 생명이다’라는 것이었다. 이후 함부로 대출을 받지도 않았고 판매처도 확보하지 못한 채로는 농사를 짓지 않았다. 정보를 모아 시장의 변동에 대비했다. 그렇게 마지막에 정착한 농사가 묘목농사였다. 2만평의 부지에 50여종의 수목을 심어 시장상황에 맞춰 출하하고 있다. 주로 가을에 씨를 거둬서 봄에 식목일에 맞춰 출하하지만 다양한 판매망을 통해 연중 판매하며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다.

전국을 돌며 만난 청년 귀농인들은 특징이 있었다. 끝없이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벤처농업대학이나  농업기술센터와 같은 전문 교육기관은 물론 근처 대학에 편입하거나 대학원 과정에 등록해 꾸준히 자기개발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밤낮없이 노력하며 그들은 농업 ‘골드오션’을 개척하고 있었다.

 

농사짓지 않는 귀농인 필요하다

농촌에서는 농사 잘 짓는 사람만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농사 잘 짓는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농사 말고 다른 것을 잘하는 사람도 많아야 한다. 

 농촌에 ‘먹고살기 위해’ 내려오는 생계형 귀농은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대규모 초기 투자를 한 경우는 더욱 그렇다. 농업 생산을 통해 생계를 해결하기에는 현재 농촌의 ‘파이’가 너무 작고 위험 부담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농촌 적응에 실패하고 돌아가면 지역에 사는 주민 또한 상처를 입는다. 농촌 주민이 귀농·귀촌인에 대해 ‘문제가 많은 사람’ ‘쉽게 떠날 사람’이라는 인식을 깊이 가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새로 농촌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이런 인식을 깨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농업을 둘러싼 현실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농산물 개방은 계속 확대되고 시장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며 정부 지원은 점점 엄격해지고 있다. 농업 생산만으로 소득을 얻고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농산물 가격 변동을 예측하기 힘드니 미래를 설계하기도 어렵다. 이런 현실에서 농촌 주민들과 경쟁을 피해 ‘골드 오션’ 영역을 개척하며 공생하는 길을 찾으려는 지혜로운 귀농·귀촌인도 늘고 있다.

도시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들은 사무와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나다. 또 오랫동안 갈고 닦은 나름의 전문 분야가 있다. 게다가 도시민의 성향을 농민들보다 잘 안다. 이런 장점을 잘 살리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다. 그래서 농산물의 가공이나 유통, 교육·문화·복지·환경 따위 영역에서 주민과 공생하며 살 수 있는 길이 많다.

   

충남 전자상거래연구회에 속해 있는 청년 귀농인들이 귀농의 보람과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농촌 사회에 안착해 안정적인 수입을 올린다.

최 아무개씨(59)는 30년 은행원 생활을 접고, 제2의 인생 설계를 위해 조기 은퇴한 뒤 3년 전 농촌에 정착해 사무직에 종사한다. 그는 농촌에 들어오기 전 도예와 염색, 명상지도 등 ‘중간 경험’을 5년 정도 거쳤다. 현재는 그 경험을 살려 도시민들이 농촌에 정착하는 과정을 도와주고 조언을 하는 단체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이처럼 농촌에는 각종 단체의 사무국장 구실을 제대로 수행할 사람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배 아무개씨(47)는 농업 생산과 도·농 교류, 직거래 판매를 연계해 농촌에 정착한 사례다. 그녀는 현재 포도 과수원과 펜션을 운영하면서 농산물 가공 기술도 열심히 배우고 있다. 농촌에 오기 전에는 대기업의 환경기사와 스테비아 비료판매 영업을 했다. 지금 그녀는 전공(환경공학)을 살려 무농약 인증을 받은 포도를 팔면서 도·농 교류 체험활동과 연계된 직거래 판매를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다. 남편과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식들은 아직 도시에서 살지만 조만간 가족 전원이 농촌으로 이주하는 날을 꿈꾸며 열심히 생활한다.

최근 들어 늘어난 ‘사회적 일자리’ 성격의 제도를 적극 활용하는 귀농인도 많다. 아무래도 낯선 농촌생활에 바로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제도가 체험마을의 마을 사무장 제도다. 정부에서 예산 지원을 받아 도·농 교류 체험을 적극 추진하는 마을은 전국 농촌 어디에나 있다. 마을 사무장은 그런 마을 사업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대개가 귀농·귀촌인이 맡고 있다. 주민이 서류 정리와 체험 진행, 직거래 유통에 서투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라북도 진안군에는 마을 사무장 6명 외에도 군 독자 사업인 마을 간사 13명, 산촌 생태마을의 산촌 매니저 3명, 마을 조사단 23명, 평생학습 지도자 11명 등 100여 명이 사회적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일자리 제도는 귀농·귀촌인이 농촌에 정착하는 데 중요한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이 귀농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농촌 지역에서도 다양한 전문가 필요해

그리고 농촌에는 의외로 건축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지역의 토박이 토목 건축업 체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 흙 건축이나 스트로베일(압축 볏짚으로 집을 짓는 방식), 빈집 수리 등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서 아무개씨(50)는 15년 전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부인과 함께 농촌에 정착한 건축 시공자다. 그는 근대 이후의 잡지를 전문적으로 수집해온 취미를 살려 현재 1만 권 넘게 모은 잡지를 전시할 수 있는 박물관 건립을 꿈꾼다. 평소에는 텃밭 농사를 하면서 틈틈이 주문이 있으면 건축 일을 주도한다. 지난해에는 마을 이장도 떠맡아 ‘처음으로 국가의 녹을 먹는 사람’이 되었다며 “이장까지 맡았으니 나는 성공한 귀농인이다”라고 자랑한다.

최 아무개씨(40) 또한 건축 설계를 주업으로 하다 귀농한 사례다. 초기에는 농업만으로 생계를 꾸리려 했지만 농지 구입이 만만치 않은 현실을 알고 국공유림을 임차해 산양삼 재배에 장기 투자하는 쪽을 택했다. 남는 시간에는 농촌에서 건축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나 이장들의 부탁을 받아 조그만 건축 설계를 해준다. 그것만으로도 연간 4000만원 정도의 순수입을 올린다. 앞으로 건축기사의 1인 창업을 지원하는 건축학교를 여는 게 포부다. 자기 집을 손수 지으려는 농민이 많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농림수산식품부의 전원마을에 입주해 편리한 주거공간을 확보하면서 제2 인생을 설계하는 사람, 산촌 유학을 매개로 아이들과 함께 아예 농촌에 정착하는 사람, 휴양림 숲해설사로 일하며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 등 새로운 귀농·귀촌 사례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여성이 귀농을 두려워하랴

귀농 취재를 위해 남원시 산내면에 갔을 때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젊은 여성 혼자서 귀농한 사례가 심심치 않게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미술학원 강사를 하다 귀농한 정혜지씨를 비롯해 환경운동을 하다 한옥을 짓고 귀농한 김해경씨 등 다양한 ‘처녀귀농인’을 만날 수 있었다. 실상사귀농학교에도 여성 수강생이 2명이나 있었다.

‘처녀귀농인’은 지리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귀농 취재 중 전국 각지에서 사례를 접할 수 있었다. 전남 보성의 강선아씨(25)가 대표적인 경우다. 유기농 쌀농사를 30년 넘게 해오며 ‘강대인 생명의 쌀’ 브랜드를 일군 강대인씨의 장녀인 선아씨는 가업을 이으며 여성 농업경영인으로 자리 잡았다. 어머니(벤처농업대학 5기)와 선아씨(7기)와 아버지(8기)는 같은 대학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가업인 유기농 벼농사를 잇고 있는 강선아씨.2007년 봄 건강을 위해 단식을 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자 선아씨는 농사일을 돕기 위해 집에 왔다. 한 달만 돕고 아버지가 회복하면 대학에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세 달이 되고 1년이 되면서 결국 귀농에 이르렀다. 그 이유에 대해 강씨는 “어떤 사람이라도 여기에 있다 보면 욕심이 날 수 밖에 없다. 아버지가 이러놓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것을 계승해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강대인 생명의 쌀’은 보통 쌀보다 2배의 가격에 팔리고 색깔있는 쌀은 4배의 가격에 팔린다. 

독일로 교육학 유학을 가려던 계획도 포기했다. 어머니는 농사일이 힘들다며 유학을 가라고 했지만 선아씨는 농사일을 택했다. 농사일 틈틈이 벤처농업대학과 전남생명농업대학에서 농업 경영에 대해서 배우고 지금은 순천대에서 산지마케팅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아버지가 일군 유기농 논을 ‘경관농업’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오색 논밭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논에 하트모양이 나타나도록 만들기도 했다. 배우고 싶었던 교육학은 독학하면서 ‘농촌 체험교실’로 응용하기 위한 방안을 찾고 있다.

황미자(45)씨는 농민운동을 했던 아버지의 정신을 잇기 위해 귀농한 사례다. 밤농사 버섯농사 논농사 밭농사를 혼자 일구는 ‘처녀농군’이지만 짬짬이 지역사회를 위한 일을 벌이고 있다. 체계적인 활동을 위해 군산대에서 사회복지학 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그는 “농사 일이 한가할 때가 있다. 그때 공부도 하고 봉사활동도 한다”라고 말했다. 여장부 스타일인 황씨는 따르는 청년 귀농인이 많다. 이들은 큰누님같은 황씨에게 귀농 관련 상담을 하고 함께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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