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김동률·권태균의 오지 기행_02

醉月 2012. 3. 14. 10:26

사슴이 뛰어놀던 골짜기에 왜장의 전설이 되살아나고

우록마을

글·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권태균│ 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건너편 언덕에서 잡은 우록마을 전경.

 

1592년 임진왜란 와중에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한 왜군 장수가 조선에 귀순한다. 이후 그는 조선군에 합류해 의령전투에 참가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조정으로부터 큰 벼슬을 받는다. 광해군 당시 정헌대부까지 오르고 병자호란 때는 경기도 광주에서 큰 전과를 올린다.

이후 그는 조정에서 하사받은 경상도 오지의 땅(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 은거하다 세상을 떠났다. 주인공의 일본 이름은 사야가(沙也可). 왕실로부터 받은 한국 이름은 김충선(金忠善·1571~1642)이다. 현재 전국에 17대까지 대략 2000가구, 7000여 ...   

 

담장 넘어 들어간 비구니 절엔…

 

고시원.

 

녹동서원을 뒤로하고 가파른 산골짜기를 더 오르면 달성군청 직원도 소개하면서 혀를 내두르는 외진 곳이 나타난다. 대도시 주변에 숨어 있는 이른바 등하불명의 땅인 셈이다. 깊은 산이지만 얼음장 밑으로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듯 개울물을 거슬러 오르자니 작은 암자가 나타난다. 남지장사다. 신라 신문왕 시절 창건되었다는 남지장사는 마주 보는 팔공산의 북지장사와 더불어 지장보살을 모신 천년 고찰이다. 그러나 신라 시절의 영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지근의 비구니 사찰인 청연암에는 인적조차 없다. 그윽한 소리만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퍼지고 있다.

 

잠긴 절문을 무시하고 담장을 넘어 청연암으로 들어가봤다. 사찰의 방이며 마루에는 먼지가 자욱하다. 한때 다수의 스님이 기거했던 곳이지만 싸늘한 냉기가 돈다. 서너 개의 단지가 빈 부엌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한 방에는 전기담요와 함께 이불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다. 한때 한국인의 안방을 덮어주던 캐시밀론 이불이다. 마지막으로 절을 떠난 스님이 행여 객승이라도 찾아오면 쓰라고 마련해둔 것으로 짐작된다. 이리도 사려 깊게 배려해놓고 떠난 비구니가 누구일까. 무슨 사연으로 이 암자를 떠나야 했는지 궁금해졌다.

 

우록마을 가장 윗목에는 제법 예술적인 감각을 입힌 슬라브 건물 한 동이 산골짜기에 어울리지 않게 놓여 있다. 결혼 스튜디오 촬영이 유행하던 시절, 예비 신랑신부의 사진 촬영을 위한 상업용 건물로 쓰였다. 지금은 비구니 네 분이 살고 있다. 성철 스님이 그러했듯이 이들은 한 생각을 하기 위해 이 산속 건물을 임차해 밤낮으로 서슬 퍼렇게 용맹정진하고 있다.

 

그러나 산자수명하던 이 마을은 전원주택 서너 채가 들어서면서 다소 복잡한 모습을 띠고 있다. 집주인들이 주말에만 들러 평소에는 사람소리 듣기 힘들다고 한다. 인적 없는 우록마을의 하이라이트는 계곡에 힘들게 위치한 선유고시원이다. 예부터 고시생은 사람 발길이 뜸한 곳을 원한다. 덕분에 깊은 계곡에 위치한 우록마을이 선호되었다고 한다. 선대부터 선유고시원을 운영했다는 이걸(63) 씨는 워낙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탓에 한번 들어오면 밖으로 나가기 힘든 점이 고시생에게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고향 마을 건너편 산기슭에 토담집을 손수 지어 ‘마옥당(磨玉堂)’이라고 이름 붙인 후 고시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책값을 벌겠다고 울산 한국비료 공장 건설 공사장에 막노동을 하러 갔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이가 3개나 부러지고 턱이 찢어지는 불운을 겪으면서도 결국 합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 월간지 ‘고시계’에 실린 그의 수기다.

 

선유고시원은 옆 골짜기의 백록고시원과 더불어 30여 년 동안 서른 명이 넘는 판·검사를 배출했다. 백록고시원은 지금 온전한 형태가 아니다. 지붕은 무너지고 벽에는 곰팡이가 피어있다. 꿈자리가 사나울 정도다. 그 허물어져 가는 건물의 작은 방에 시 한 구절이 피곤에 절은 채 붙어 있었다.

 

벽에 붙어 있는 시 구절.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라는 시였다. 방의 주인공이 지금쯤 판·검사님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계시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시 구절을 붙일 때엔 꽤 힘들고 불안한 마음이었나 보다. 그 마음이 내게도 진하게 전해온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사랑도 그렇고 청춘도 그렇고 우리네 삶도 그러려니.

 

 

조선에 귀화한 왜장 사야가(김충선)의 정한이 담겨있는 녹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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