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김경한_불편한 삼국지_05

醉月 2014. 2. 16. 09:16

관우 여색을 밝혔다

조조와 유부녀 두고 실랑이 벌인 호색한



관우도 장가를 간 적이 있을까? '삼국지연의'에는 관우의 부인 얘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마치 관우가 오로지 유비에게 충성하느라 수도승처럼 살아왔다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관우가 관평을 양자로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관우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전장을 떠돌아다니다 보니 미처 장가들 틈이 없었습니다."

과연 그랬을까? 평균수명이 마흔 전후였던 시절에 관우처럼 혈기 왕성한 장수가 나이 마흔이 되도록 장가를 못 들었을 리가 없다. 신분이 불안해 정식 장가는 못 들었다 해도 야합을 하거나 여자를 강제로 취하기는 했을 것이다. 장비가 나물 캐러 나온 하후연의 어린 조카를 납치해 부인을 삼았던 것으로 보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관우는 탁현 시절부터 처자가 있었을 것이다. 힘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탁현을 지배하던 조폭집단의 '넘버 투'였으니 여자가 없었을 리가 없다. 아마도 유비를 좇아 이리저리 떠돌던 과정에서 가족을 잃었거나 버렸을 것이다.

관우 역시 힘으로 남의 여자를 빼앗는 일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유비가 조조와 함께 하비성에서 여포를 포위했을 때의 일이었다. 하루는 관우가 조조를 찾아왔다. 의아해 하는 조조에게 관우는 여포의 부장 중에 진의록이라는 자가 있는데 성이 함락되면 그의 처를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했다. 조조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데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관우가 몇 번 더 찾아와 다짐을 받았다.

조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저 관우라는 사내를 이토록 애태우게 했을까. 여포의 항복을 받은 후 조조는 장난삼아 먼저 진의록의 처를 데려다 놓고 보았다. 대단한 미인이었다. 조조는 그녀를 취해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후일 조조의 비빈이 된 두부인(杜夫人)이 바로 그녀였다.

조조는 두부인을 꽤나 사랑했었던 것 같다. 두씨가 첩이 되었을 때 이미 진랑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조조가 진랑을 아들처럼 궁에서 키우며 심히 예뻐했다. 매번 손님들을 맞을 때마다 무릎에 안치고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세상에 나같이 의붓자식을 친아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연모했던 여인을 빼앗긴 관우는 깊은 원한을 품었다. 후일 관우가 조조의 후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에게 심복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아간 사람의 밑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미화된 영웅] 관우, 평범했으나 신이 된 사나이

관우(?~219)는 젊은 시절 친구의 원수를 갚아준다는 명목으로 고향의 세력가 한 사람을 살해했다. 관우의 고향인 하동군 해현에는 큰 소금 호수가 있었는데 매우 염도가 높아서 소금 산지로 유명했다. 내륙 지방인 산서성에 위치한 하동군은 소금이 귀했으므로 해현의 소금산업은 매우 큰 이권이었다. 관우는 이권다툼의 와중에서 어떤 사람의 청탁을 받고 한밤중에 담을 넘어 들어가 상대방의 실력자를 살해해 버린 것이다. 전형적인 협객의 행태였다.

이처럼 협객출신의 살인자가 어찌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영웅의 한사람이 되고 급기야는 신의 반열까지 오르게 되었을까? 관우는 사후에 '관공(關公)'으로 높여 불리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왕' '관제'에 이어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격상됐다. 심지어 관우를 모시는 민간신앙이 종교화해 *관성교(關聖敎)가 되었고, 그를 섬기기 위한 관제묘가 전 세계에 설치돼 있다. 중국 역사에서 인간으로서 신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공자와 관우 딱 두 사람뿐이다. 관우가 영웅이 되고 신격화하게 된 것은 그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관우는 육손의 표현 그대로 일생에 큰 성공을 이루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관우가 한때 *'만인지적(萬人之敵)의 장수'라 불릴 만큼 무용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다. 관우는 백마의 싸움에서 만명의 군중을 뚫고 돌진해 원소의 상장 안양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무용 차원의 일이었다. 관우는 군사지휘관으로서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독자적으로 작전한 하비성 수성전에서 그는 성을 지켜내지 못했다. 또 조인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출전했던 심구에서의 전투도 패전으로 끝났다. 형주 쟁탈전에서도 여몽·감녕 등 상대방을 압도하지 못했다. 관우가 유일하게 크게 성공을 거둔 작전은 양번을 포위한 후 우금의 칠군을 몰살시킨 일이었다. 그것도 실은 작전의 성공이었다기보다는 한수의 범람이라는 천재지변의 도움 덕이었다.

한번의 성공으로 한없이 우쭐해진 관우는 간적 조조를 도모해 중원을 되찾고 한실을 회복하겠다고 거창한 구호를 내걸었다. 능력 밖의 일인 줄 몰랐다. 관우의 교만한 성품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관우는 평소의 사인계급을 멸시했다. 난세에 수많은 사족 출신의 인사들은 비루한 목숨하나 지키고자 혹은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변절과 배신을 일삼는 경우가 많았다. 의리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협객 출신의 관우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행태였다. 관우는 늘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춘추'를 끼고 다니며 사인들의 의리 없음을 매도했다. 관우는 군량과 병력의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후방의 미방과 부사인을 협박했다. 대공을 이룬 후에 손을 봐주고야 말겠다고. 사실상 배반을 유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손권을 모욕한 일이었다. 협력을 구걸해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는 손권에게 동맹파기의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관우는 충의의 화신이요, 무인들의 신이 될 정도로 인격적으로나 실력적으로 뛰어났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저 흔한 협객 출신의 무장에 불과했다. 육십이 가까운 나이에도 마초와 비무를 하겠다거나 황충과 같은 병졸 출신과 같은 반열에 설 수 없다고 심술을 부렸던 것을 보면 미숙한 면까지 있었다.

[거짓말 벗겨보기] 관우에게 오관육참 사건은 없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조조를 떠나 유비에게 돌아가는 과정에서 다섯 개의 관문을 통과하면서 길을 막는 여섯 명의 장수를 목 베었다고 한다. 이른바 ‘오관육참장 설화'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관우는 조조의 사후적 허락이 있었기에 유비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관우가 조정에 의해 임명된 장수와 지방관들을 마구 죽이고 다녔다면 조조가 이를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다.


 

공손찬, 농성 전술에만 의지한 리더의 최후



공손찬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다. 지나치게 자신의 실력을 과신했을 뿐더러 세상 일이 다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이런 병이 생긴 것은 그가 키가 크고 인물이 매우 잘 생겼을 뿐더러 목소리도 우렁차고 미성이어서 보는 사람마다 흠모의 감정을 갖게 했기 때문이었다. 공손찬은 대단한 미남자여서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까지도 그에게 반하곤 했다. 유비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유비는 노식의 수하에서 동문수학할 때 공손찬을 만난 후 그를 추종했다.

공손찬이 출세의 길을 걷게 된 것도 그의 잘난 용모 덕분이었다. 공손찬은 출신성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요서군 영지현에서 제일 가는 부호였지만, 어머니가 기생 출신의 천첩이었다. 당시 자식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되어 있었으므로 공손찬은 정상적으로는 출세할 길이 없었다. 태수에게 뇌물을 바치고 나서야 겨우 군의 하급관리가 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손찬은 요서태수의 눈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되었다. 문벌이 지배하는 사회 풍조로 볼 때 거의 파격적인 일이었다. 아마도 태수의 딸이 그에게 반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태수는 공손찬을 키워주기 위해 노식 문하에 유학을 보내주기까지 했다.

고대에도 현대나 마찬가지로 인물이 출세에 큰 영향을 미치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자기가 잘나서 사람들이 무조건 따를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잘난 인물에 능력까지 뒷받침해 주었으면 좋았겠지만 공손찬은 능력이 부족했다. 공손찬은 제 생각대로만 일을 처리했으며, 과거 자신의 성공경험에만 의지했다.

공손찬이 *요동속국의 *장사가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공손찬이 수십 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새 밖을 순찰하러 나갔다가 갑자기 나타난 선비족 기병 수백 명에게 포위를 당했다. 버려진 관사에 의지해 버티던 공손찬은 사졸들을 모아놓고 결의를 다졌다.

“오늘 중으로 이 포위망을 뚫지 못하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다. 내가 앞장서서 돌파를 시도할 테니 귀관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나와 함께 싸우겠는가?”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결사적으로 싸워 포위를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공손찬이 이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자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널리 알려졌다. 공손찬은 변방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탁현 현령으로 승진했다.

공손찬의 이 경험은 후일 몇 번의 싸움을 통해 더욱 강화됐다. 유우가 십만의 대병으로 역경을 포위했을 때, 공손찬은 유우군의 방심한 틈을 노려 반격을 가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부터 고립된 성에서 농성하다가 적이 해이해진 틈을 타 반격을 가하는 전술이 그의 주특기가 되었다. 공손찬은 창의력이 부족했으므로 늘 이 전술을 들고 나왔다. 이 전술은 그 후에도 몇 번 더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은 이 답답한 전술 때문에 패망하고 만다. 유주의 반군과 국의가 이끄는 원소군이 역경에서 공손찬을 포위했을 때에도 공손찬은 농성 전술을 다시 들고 나와 승리를 거두었다. 농성전이 해를 넘기자 군량이 떨어진 원소군과 유주반란군의 연합군 병사들이 흩어져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원소가 대대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공격에 나서자 공손찬은 다시 역경에 틀어박혔다. 공손찬은 끝까지 농성했으나 원소는 단단히 준비를 마친 후였다. 해를 넘겨가며 공격을 계속해 결국 열겹의 성으로 이루어진 역경을 함락시켰다. 최후의 순간에 공손찬은 처자식들을 다 목매어 죽인 후 누각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비참한 최후였다.

[미화된 영웅] 공손찬, 과대망상에 가까운 의심증 시달려

공손찬은 원소와의 싸움에서 연전연패한 후 역경이라는 거대한 성채를 수축하고 그곳에 틀어박혔다. 역경이 소재한 역현은 역하를 통해 발해와 연결돼 각종 물자의 수송과 운반이 용이했다.

그런데 이 역경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열겹의 성채와 열겹의 참호로 이루어졌다. 각 성채 위에는 누각과 누대를 세웠는데, 그 높이가 5~6장이나 되었다. 한 가운데에 있는 높은 누각은 높이가 열 장이나 되었다. 당시의 도량형을 기준으로 볼 때, 중앙의 누각 높이는 약 22.3m에 달하는 셈이었다. 공손찬은 이 성 안에 삼백만 석의 곡식을 쌓아 놓았다.

공손찬은 휘하의 여러 장수들에게 성벽과 누각을 구역별로 할당해 주고, 가족들과 함께 그곳에 거주하면서 각자 책임 하에 성을 방어하게 했다. 이러한 누각과 누대의 수가 천개나 되었다.

엄청난 규모의 성곽과 누각을 축조하고 삼백만 석의 곡식을 쌓아놓기 위해 엄청난 물자와 인력이 동원됐다. 공손찬이 유주 백성들을 무한대로 수탈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술상의 이점만 생각했지 백성들의 삶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이 공손찬의 특성이었다. 역성 수축이 완료된 후 공손찬은 큰소리 쳤다.

“예전에 나는 손가락을 한 번 휘저으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소. 지금 보니 그것은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소. 힘써 농사를 지으면서 양곡을 축적하고 병사를 휴식하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소. 병법에 의하면 누각이 백 개면 공격이 불가능하다 했소. 지금 우리는 누각과 망루가 천개나 되오. 이 곡식들이 다 떨어질 때쯤이면 천하의 대사가 결정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이 거대한 성곽도 공손찬의 패망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원소군이 진격해 역경을 포위하자 공손찬의 별장들이 그를 배반하고 속속들이 원소군에 항복했기 때문이다. 공손찬은 처첩들 이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공손찬은 자신이 거주하는 중앙의 높은 누각에 철문을 만들어 달아 안팎의 출입을 차단하고, 그 안에는 가족 이외에는 비첩과 여종들만 거주하게 했다. 밖에서 보고할 일이 있으면 성문 밖에 달아놓은 바구니에 문서를 가져다 놓게 한 후, 성중의 비첩들이 물 길듯이 끌어올렸다. 공손찬은 또 처첩과 여종들에게 큰 소리로 말하는 법을 연습시키고는 지시할 일이 있으면 이들에게 고함을 질러 명을 전달하게 했는데, 그 소리가 수백 보까지 들렸다 한다.

[거짓말 벗겨보기] 조자룡, 공손찬 구해준 적 없다

공손찬이 계교싸움에서 원소군의 선봉장 국의에게 대패했을 때, 조자룡이 나타나 그를 구해준다. 이 싸움에서 국의는 조자룡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국의는 원소군의 맹장으로 원소의 하북 제패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자신의 공적을 과시해 교만하게 행동했으므로 원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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