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_13

醉月 2013. 6. 18. 01:30

그윽한 대숲서 홀로 琴을 타니 달빛만이 知音일세

 김홍도 ‘죽리탄금도’… 금(琴), 성현과 군자의 멜로디

 

▲ 김홍도, ‘죽리탄금도’, 종이에 수묵. 고려대박물관 소장 ▲ 이경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탄금도’. 고려대박물관 소장 ▲ 작자미상 ‘구운몽도’ 8폭 병풍의 제5폭 정경패 장면의 부분. 경기대박물관 소장

그림을 보니, 대숲에 홀로 앉아 금(琴)을 연주한다. 혹은 줄도 없는 금을 안고 앉았다. 제왕과 성현도 즐겨 연주한 금. 옛 그림들 속에서 금을 연주한 인물들은 누구이며, 옛 그림 속 연주에는 어떤 선율이 울렸을까. 그 선율의 테마는 무엇이었을까.

‘금(琴)’이라는 현악기

옛 시문 속 금이라는 악기가 오늘날 ‘거문고’로 일괄 국역되는 데 대해 국악전공자들은 난색을 표한다. ‘학(鶴)’이 모두 ‘두루미’로, ‘규(葵)’가 ‘해바라기’로 번역된다고, 생물학적 관점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오역의 문제라기보다는 만물을 우리말로 바꾸려는 강박의 문제이며, 이 글에서 ‘금’을 ‘금’이라 부르는 이유다. 금의 연주는 ‘탄금(彈琴)’이라 한다. 줄을 뜯어 튕김을 뜻한다.

‘금’은 몇 줄로 된 악기인가. 요순시절 순(舜)임금이 ‘오현금’을 만든 데서 유래한다. 순임금은 탄금으로 ‘남풍가(南風歌)’를 불렀다.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근심을 풀어줄 수 있기를. 남풍이 제때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의 재산을 늘려주기를!’ 따뜻한 바람을 기다리며 백성을 축복하는 성군의 탄금은 역사 속 영원한 그리움이 됐다. 순임금은 효자로도 유명하다. 훗날 문자도의 ‘효(孝)’ 글자에 금이 반드시 들어가는데, 이는 순임금의 상징이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금은 두 줄을 더한 ‘칠현금’이었다고 한다. 고구려로 칠현금이 들어왔는데 왕산악(王山岳·6세기)이 ‘육현금’으로 개조해 연주했다. 고구려의 금을 일러 ‘거문고’라 부르게 됐고, 조선시대에도 육현금이 널리 운용됐다.

‘금’의 짝꿍은 ‘슬(瑟)’이다. 슬은 25줄이며 금보다 제법 크다. 12세기에 우리나라로 들어와 사용됐는데 오래 애용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과 슬의 소리조합이 오묘하여 ‘금슬’은 남녀의 화합을 상징한다. ‘시경’에 ‘처자와의 좋은 화합은 금과 슬을 연주하는 듯하다’고 한 데서 유래하는데,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군신의 화합과 백성의 교화로 금슬의 뜻을 확대해석했다.

‘금’은 고상한 악기로 통했다. 성현 공자(孔子)도 탄금을 즐겼다. 7일 동안 곡기가 끊어진 상황에서 공자가 금으로 마음을 다스린 일이 ‘공자가어’에 전한다. 제자 안회가 오현금을 연주하거나 제자 증점의 금 연주에 자연 속 즐거움을 말한 ‘논어’의 일화들이 모두 옛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제갈공명의 탄금, 조선후기 실학자 홍대용의 금 연주실력 등 금을 사랑한 현자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치세의 예악과 군자의 수양 및 유예(遊藝)의 측면에서 금이 중시됐기 때문이다.

옛 선비들이 여가에 즐긴 일 가운데 주색잡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림 그리고 시 짓는 일까지 몰두해 빠지는 것이 염려되곤 했는데, 나의 과문 탓인지 모르되, 금의 단련과 연주를 경계한 옛 글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소리의 감화로 마음을 다스리는 공(功)이 널리 인정된 터였고, 그 가운데 금은 고상한 감화를 보장하는 으뜸악기였기 때문이다.



 

 

죽리탄금, 자오(自娛)의 기운

김홍도의 부채그림 ‘죽리탄금(竹裏彈琴·대숲 속에서 금을 뜯다)’에 홀로 금을 연주하는 선비가 앉아 있다. 당나라의 대시인 왕유(王維·699∼761)가 펼쳤던 대숲 속 탄금 독주 퍼포먼스의 재현이다. 선비는 홀로 앉히고 그 뒤에 차 끓이는 동자와 그 앞에 커다란 바위를 포치해 대숲이란 연주무대를 입체적으로 안배했다. 작은 부채 속 깊숙한 공간설정이며 댓잎의 농담 및 시원스러운 여백 처리에서 예사롭지 않은 구성력이 엿보이는 그림이다. 화면 위 빈 곳 흘려 쓴 글씨는, 김홍도가 왕유의 시 ‘죽리관(竹裏館)’을 옮겨 적은 것이다.

그윽한 대숲에 나 홀로 앉아,
거문고 타다가 휘파람 길게 불어본다.
숲이 깊으니 사람들이 모르지만
밝은 달이 비추어 주네.

獨坐幽篁裏(독좌유황리),
彈琴復長嘯(탄금부장소).
深林人不知(심림인부지),

明月來相照(명월래상조). - 왕유, ‘죽리관’

달 아래 대나무 숲에서 홀로 금을 연주하다 소리 높여 노래한다는 내용에는 다분히 당나라 시 특유의 주정적 낭만이 드러난다. 이러한 탄금의 연주를 따라해 본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옛 그림과 옛 시에서 수없이 재현되고 정착된 이미지다.

왕유는 40세에 벼슬을 접고 홀로 장안 근처에 별장을 짓고 이사해 늘그막을 지냈다. 그는 30세에 아내와 사별했으나 불심을 지녔기에 홀로 지냈다고 한다. 그의 별장은 사실상 여러 채 건물이 화려하고 번듯한 호화별장이었는데, 왕유는 소박하게 지냈노라 생각했고 후대인들도 그것을 인정했다. 별장 이름이 ‘망천장’이다. 망천의 명소를 읊은‘망천별업’ 20수가 유명한데, 그 가운데 ‘죽리관’이 널리 인용됐다. 중국 원나라의 ‘망천도’를 보면 죽리관은 천여 그루 대나무 속 우람한 건물인데, 명나라로 들면서 사람들은 죽리관의 풍경을 소박하게 그림으로써 그들 자신의 운치를 소박한 양 표현했다.

특별히 애호된 죽리관의 주제는 무엇일까. 홀로 연주하다 신이 나서 노래하며 달빛에 만족한다니, 건강한 자족이며 자오(自娛)이다. 달과 대숲의 무대에 단정하게 앉은 그림 속 연주자는 실로 의연하다. 남명선생 조식이 병석에 누웠을 때 한강선생 정구가 문병을 했다. 조식이 말했다. “고질을 앓다가 그대를 대하니 마치 왕유의 망천도를 감상하듯 황홀하구료.” 김홍도의 ‘죽리탄금도’를 보며 우리도 황홀한 기운을 느껴보면 어떠할까. 사실 조식은 그림은 보지 않은 채, 정구의 방문으로 연상된 기억 속 그림의 이미지로 큰 힘을 얻고 있다.

백아탄금, 지음(知音)의 우정

‘수용미학’은 문학이든 예술이든 창작자 못지않게 향유하고 수용하는 역할에 의미를 둔다. 책은 저자가 반을 쓰고 독서가 나머지 반을 완성한다는 프랑스 사르트르의 문학론도 비슷한 생각이다. 왕유의 탄금 독주가 그대로 흩어져 사라졌다면 어떠한가. 탄금이란 ‘청금’(聽琴·금 연주를 들음)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라, 달빛과 나누고 후대에 전한 것이리라. ‘청금’을 주제로 한 옛 그림도 탄금의 주제 못지않게 그려졌다.

‘청금’으로 유명한 이는 종자기(鍾子期)였다. 춘추시대 백아(伯牙)가 금을 연주할 줄 알았고, 그의 벗 종자기는 그 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백아가 연주하면 종자기는 “좋구나, 아아(峨峨·높고 높음)하여 태산 같구나” 혹은 “좋구나, 양양(洋洋·넘치고 넘침)하여 강물 같구나”라며, 백아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러다 종자기가 죽었고, 백아는 금줄을 끊었다. 마음과 능력을 알아주는 벗을 일러 ‘지음’(知音·음을 알다)이라 하니, 종자기의 청금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의 우정을 일러 ‘지기지우’(知己之友·자신을 알아주는 벗)라 한다. 백아와 종자기에 비견되는 우정의 주인공이 관중과 포숙아다. 관중은 불우했고 포숙아는 성공했다. 관중은 포숙아를 속여도, 포숙아는 관중의 심중을 헤아려 항상 도왔다. 관중은 포숙아를 일러 ‘지아자’(知我者·나를 아는 사람)라 불렀다. 그들이 추구한 우정의 수준이 이러했다. 그러나 누가 누군가에게 종자기나 관중이 돼주기 어렵고, 그런 벗을 얻기란 더욱 어렵다. 조선의 선비들도 탄금도를 보거나 금을 어루만지며 탄식을 토했다. “사람들은 모두 귀가 있지만, 종자기만 홀로 들을 수 있었지”(김맹성) “그대에겐 백아의 손이 없고, 나에겐 종자기의 귀가 없어요.”(장유). 혹은 “이 세상에 지음이 적다고 하지 말게. 청풍과 명월이 종자기라네”(신흠)라며 자오의 단계로 넘어서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그림기록을 살피면, 가장 많이 그려진 탄금도가 ‘백아탄금’이다. 서거정, 이승소, 김맹성 등이 백아탄금도를 감상한 기록을 남겼다.

이경윤(李慶胤·1545∼1611)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화첩 속에 ‘탄금도’가 있다. 달빛 아래 홀로 앉은 탄금. 그 시절의 ‘산수탄금도’를 보고 감상한 정문부(鄭文孚·1565∼1624)의 시로 미뤄보면, 이 그림이야말로 백아의 탄금을 그린 듯하다.

고요하던 깊은 못 여울 일러 우는데,
금을 안은 사람이 이 가운데 앉았구나.
소리 없음의 오묘함을 이미 터득하였으니
아양 곡조의 탄금을 연주하지 말라.

靜作深潭鳴作湍(정작심담명작단),
抱琴人坐此中間(포금인좌차중간).
已將心會無聲妙(기장심회무성묘),

莫把峨洋絃上彈(막파아양현상탄). - 정문부, ‘산수탄금도’

물 흐르는 언덕 위에 금을 안고 앉은 인물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 연주자가 ‘아아’ 혹은 ‘양양’하게 금을 뜯어도 알아들을 종자기가 없고, ‘소리 없음’(無聲)의 묘함이 그 차원을 넘어선다. 이경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그림의 금에는 줄이 그려져 있지 않다. 지음(知音)이 없으니 지극한 고요의 묘를 즐기는 탄금과 청금. 귀의 감각을 넘어선 마음의 만남이다.

봉구황(鳳求凰)의 탄금, 구애의 세레나데

우정뿐이겠는가. 남녀 간의 사랑에도 탄금은 군자의 고상한 수단이었다. 한나라의 대문장가 사마상여가 금을 연주하며 ‘봉황가’를 불러 미인 과부 탁문군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은 이야기가 중국 남송대에 편찬된 ‘옥대신영’에 전한다. 봉황이란 태평한 세월로 날아드는 상상의 새로,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이다. ‘봉황가’의 가사가 노골적이다. ‘봉이여 봉이여 고향으로 돌아오네. 사방을 헤매다 그의 암컷 황을 찾아서∼’라며, 멋진 남성이 제 짝을 찾고 있다는 곡조를 부르자, 탁문군은 그날 밤으로 도망쳐서 사마상여의 품에 들었다. 훗날 두보가 ‘돌아온 봉새가 황새를 구하는 뜻’이라 사마상여의 기상을 기린 뒤로, 이 노래는 ‘봉구황’이라 불린다.

금이 동양의 남성적 현악기라면 서양의 남성적 현악기로 대표악기는 피아노다. 미국영화 ‘프리티 우먼’이나 한류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남자

 주인공의 피아노 연주가 여자 주인공의 마음을 강력하게 이끄는 설정도 유사한 예다.

조선시대 소설 ‘구운몽(九雲夢)’에는, 지상으로 내려온 천상인물 양소유가 여덟 선녀를 차례로 거느리기까지 여덟 가지 연애술이 펼쳐진다. 그 가운데 세 번째 여인 정경패를 얻고자 양소유는 여도승으로 변장하여 정경패의 집에 들어 금을 연주한다. 정경패가 규방을 나오지 않는다기에 낸 묘책이다. 정경패가 등장하자 양소유는 사마상여의 ‘봉구황’을 뜯는다. 정경패가 황급하게 자리를 피한다. 연주자에 대한 의심도 있었지만, 홀연한 사랑의 감지로 그녀의 마음이 벌써 요동쳤기 때문이다. 구운몽 그림 중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한 여성이 금을 연주하는 장면이 곧 이것이다. 구운몽은 17세기 소설이며, ‘구운몽도’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 화려한 채색민화 스타일로 널리 제작됐다.


‘탄금도’에 담긴 바람

탄금이란 군자의 교양이요, 성현이 즐긴 고품격 선율이었다. 그러나 잘 자란 오동나무로 제작된 금을 소유하고 훌륭한 연주력까지 갖추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멋진 금을 훌륭하게 연주하고픈 선비들의 바람이 그림으로 그려졌다. 탄금주제의 옛 그림에는 최고연주자의 현이 울린다. 현의 울림 속에는 성현군자의 여유, 충만한 시인의 내면, 지상최고의 우정, 그리고 연애의 황홀함 등의 테마가 연주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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