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밴쿠버 도심 한복판의 스탠리 공원. 거기서 그 목조 벤치를 만났습니다. “이정식을 사랑하고 영원히 기억한다.” 벤치의 등받이 동판에 새겨진 글귀가 그랬습니다. 자그마하게 영문으로 씌어 있었지만, 한국 이름이라서 그런지 대번에 눈에 들어왔습니다. 누군가 영원히 기억하고자 했던 ‘이정식’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주위를 둘러보니 거기뿐만 아니었습니다. 이곳저곳의 벤치마다 동판에 두세 줄의 아름다운 시구 같은 사연들이 새겨져 있더군요. 사연들은 거개가 추념의 그리움, 사랑의 환희 혹은 소중한 날의 기념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공원 보존을 위해 기부금을 낸 사람들을 위해 시에서 벤치에 저마다의 사연을 새겨준 것이라 했습니다. 서울 여의도공원의 17.5배에 달하고, 뉴욕 ‘센트럴파크’보다 더 크다는 스탠리 공원. 그러나 그 공원에서 감격했던 건 어마어마한 규모보다는 공원 잔디밭 자그마한 벤치에 새겨진 진심 어린 소박한 사연들이었습니다. 자연의 거대한 규모나 위용보다는 삶이 빚어내는 따스한 풍경에 먼저 눈이 갔던 것이지요. 캐나다에 대해 말하자면 ‘광활하고 빼어난 자연’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자연이란 사람의 삶을 정화하고 더 아름답게 해줄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빛나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캐나다의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쩌면 도시와 그 도시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 자연과의 경계를 지운 채 어우러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밴쿠버나 빅토리아가 ‘살고 싶은 도시’로 손꼽히며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대도시를 흔히 회색에 비유합니다만 캐나다에서만큼은 그게 통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도심에서 차로 20분 이내에 그라우스산, 캐필라노 출렁다리 등 원형 보존된 녹색의 울창한 숲이 파란 하늘 아래 지붕을 이루고, 밴쿠버섬까지 이어지는 바다에는 빛나는 코발트 융단이 펼쳐집니다. 그 위에서 따뜻한 삶을 채워가는 사람들의 도시에 ‘잿빛’이란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캐나다 밴쿠버까지는 8160㎞. 멀고도 먼 거리만큼이나 다녀오는 데 많은 비용이 듭니다. 캐나다 여행의 명소 중 브리티시컬럼비아주를 콕 집어 소개하는 까닭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웅대한 자연과 날렵한 도시의 모습을 한곳에서 다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그곳을 다시 가게 된다면 공원 벤치에 가장 먼저 찾아갈 것 같습니다. 일면식도 없지만 누군가의 따스한 기억이 담겨 있는 벤치에 앉아서 오래도록 자연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이런 따스한 벤치를 언제나 볼 수 있을까요. 그 벤치가 만들어진다면 거기에 어떤 글귀를 써넣으면 좋을까요. 밴쿠버와 빅토리아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 문득문득 부러움 혹은 아쉬움으로 질투가 나기도 했습니다. # 창공에서 내려다본 빅토리아의 푸른 살결
브리티시컬럼비아는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캐나다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주도는 흔히 밴쿠버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밴쿠버섬의 도시 빅토리아가 주도다. 면적은 남한의 10배에 육박하지만 인구는 약 400만 명. 캐나다에서 3번째로 많은 인구가 모여 살 만큼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유명하다. 캐나다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토론토와 나이아가라폭포를 묶는 코스나 앨버타주의 로키산맥을 도는 코스가 더 유명하지만, 이번엔 비교적 덜 알려진 브리티시컬럼비아의 밴쿠버섬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눈부시도록 파란 해변에서 등을 다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그 뒤로 하얀 눈 모자를 쓰고 있는 산들이 담대하게 펼쳐진 자연. 밴쿠버 도심으로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보고 느끼게 되는 여유로운 풍경이다. 일행은 수상비행기를 타고 빅토리아로 가기 위해 캐나다플레이스로 들어섰다. 수상비행기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교통수단이다. 표를 구매한 후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며 들뜬 호기심을 잠재울 무렵 바로 탑승시간이 됐다. 출발 전 귀가 멍해질 정도의 프로펠러 엔진 소리와 기름 냄새로 잠시 불편했지만 이내 푸른 물살을 하얗게 박차며 펼쳐진 밴쿠버의 전경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요금은 세금을 포함해 평균 18만 원으로 비싼 편이지만 이곳 아니면 수상비행기를 타는 새로운 경험을 어디서 또 해볼까. 날개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며 피오르 해안 위에서 그려내는 시시각각 다른 풍경스케치는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손에 잡힐 듯 바둑알처럼 납작 엎드린 많은 섬들을 지나 30분 만에 비행기는 새털처럼 가볍게 빅토리아의 푸른 내항 이너하버에 착륙했다. # 빅토리아에서 만난 싸이 빅토리아는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답게 영국적인 분위기가 짙다. 1897년에 완공된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의사당을 비롯해 1908년에 완성된 빅토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페어몬트 엠프레스 호텔 등 고풍스러운 느낌의 건물들과 빨간색의 2층 버스, 애프터눈 티 등은 영국의 영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빅토리아에서는 바다 안쪽으로 깊이 들어온 이너하버의 경관이 가장 빼어나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하늘로 비상하는 수상비행기 아래로 날렵한 요트와 카약이 햇살 듬뿍 바다 위로 미끄러진다. 그 사이 거리공연에서 춤추듯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마치 한 장의 맑은 수채화를 그려낸다. 잠시 산책로를 거닐다 익숙한 얼굴에 발길을 멈췄다. 비록 캐리커처로 그려진 가수 싸이. 반가웠다. 그가 이곳을 왔을까. 화가에게 물어봤다. “직접 얼굴을 보고 그린 건 아니지만 좋아해서 그렸다.” 그는 웃으며 ‘강남스타일’ 노래에 말춤까지 춰 보인다. 일행도 그를 ‘젠틀맨’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줘다. 이렇듯 빅토리아 사람들은 유쾌하고 여유로움이 넘친다. 도시는 아기자기하고 크지 않아 발길 머무는 대로 거닐며 구경해도 크게 부담이 없다. # 크고 화려한 꽃향기로 가득한 부차트가든
빅토리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바로 식물원인 부차트가든이다. 1904년부터 석회암 채석장을 운영하던 부차트 부부가 채석 후 남은 보기 흉한 터에 온갖 꽃과 나무를 심으며 가꿔 오던 것이 매년 10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선큰·장미·일본·이탈리아정원 등 총 4개의 테마로 이뤄져 있는데 이 중 선큰가든이 가장 유명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채석으로 생긴 커다란 웅덩이의 지형을 그대로 살렸고 이곳을 시작으로 정원이 형성됐다고 한다. 탁 트인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산책로 양쪽에 서 있는 측백나무 두 그루 주변으로 이국적인 관목들과 꽃이 어우러져 사람들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공원 산책 중 한국인 관광객들도 눈에 많이 보였다. 일본정원은 있고 한국정원은 없다는 아쉬움에 직원에게 만들 계획이 없냐는 질문을 했다. “정원 하나를 새로 조성하려면 많은 시간과 재정이 필요하고 한국 꽃들과 나무에 대한 사전 조사부터 구입, 관리하기까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다소 미안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비록 한국 토종 야생화를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국내에선 보기 힘든 크고 화려한 수많은 꽃과 식물이 있어 평소 그다지 관심 없는 사람도 그 향기에 취하며 꽃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곳이다. # 화가들의 열정이 낳은 슈메이너스 밴쿠버섬의 한가운데 슈메이너스에는 한때 큰 제재소가 있었다. 쇠퇴했지만 현재도 운영되고 있어 바다에 큰 목재들이 많이 떠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마을이 유명해진 것은 우리나라 통영 동피랑마을처럼 마을 벽 곳곳에 그려진 벽화 때문이다. ‘슈메이너스에서 태어난 최초의 백인 빌리 토머스의 초상화’를 비롯해 대부분의 그림은 이 마을의 역사적인 사건을 벽화로 담았다. 그중에서 원주민 초상화는 이 마을의 대표적인 벽화다. 여러 무명 화가들의 다양하고 디테일한 화풍 덕분에 마을 전체가 야외 미술관 같은 인상을 준다. 마을이 작기 때문에 가볍게 산책하면 짧은 시간에 재밌게 볼 수 있다. # 가공되지 않은 자연 팍스빌
나나이모 북쪽에 위치한 팍스빌은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밴쿠버 사람들에겐 가공되지 않은 숨은 매력의 휴양지로 인기가 많다. 7㎞가량 이어지는 아름다운 긴 해안을 따라 비치리조트, 피크닉과 오토캠핑을 위한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가족단위의 여행객이 많이 찾는다. 그중에서 타이 나 마라 리조트는 전용 해변에 캠프파이어 장비가 준비돼 있어 남다른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아침 썰물 때가 되면 갯벌을 찾은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모래 속 조개를 줍는 모습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밖에 팍스빌 근처에 있는 쿰스라는 마을을 들러도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겠다. 잔디 지붕 위에 ‘염소가 사는 마켓’이 있어 유명해진 곳이다. 염소가 얼굴을 자주 보여주지는 않지만 정작 먹이를 위해 심은 풀보다 관광객이 주는 먹이를 더 좋아한다. 한 아이가 지붕을 쳐다보며 당근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 # 아슬아슬 계곡 위를 걷다 밴쿠버는 명실상부한 서부 캐나다의 관문 도시다. 빅토리아가 품고 있는 바다와 정원의 수평적 아름다움을 봤다면 밴쿠버에서는 다양한 표정의 도시 모습과 연결된 산과 숲의 수직적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도심에서 차로 불과 20분 거리에 있는 캐필라노 출렁다리, 그라우스산 등 원시림의 수백 년 고목들이 잘 보존된 밴쿠버야말로 도시 속 힐링이 가능한 ‘살고 싶은 도시’의 매력을 충분히 발산시키고도 남는다. 밴쿠버 도심에서 차로 15분가량 이동하면 세계에서 가장 긴 캐필라노 출렁다리가 있다. 1889년에 처음 놓여졌는데 길이가 무려 137m, 높이는 협곡 바닥에서부터 70m에 달한다. 아찔한 협곡을 내려다보면서 출렁이는 좁은 다리를 건너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체험을 맛볼 수 있다. 이 다리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한마디로 수직의 미학이라 할 만하다. 하늘을 향해 죽 뻗은 장쾌한 침엽수림들이 형형색색 셀로판지처럼 서로 겹쳐 보이며 울긋불긋 장관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리를 바로 지나면 만나는 공중 산책로 ‘트리톱스 어드벤처’도 인상적이다. 30m가 훌쩍 넘는 삼나무의 10m쯤 높이에 지어진 나무집에서 출발, 나무와 나무를 연결한 7개의 흔들다리를 걷다보면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주인공이 된 듯하다. 여기에 지난해 또 하나의 아슬아슬한 체험이 추가됐는데, 수직의 화강암 절벽 끝에 돌출 계단을 설치한 ‘클리프워크’다. 아찔하게 좁은 다리를 천천히 다 지나면 협곡 위에 떠 있는 출렁다리 전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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