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곡 하나. 두부모처럼 산자락이 썩 하고 잘려나간 자리. 오랜 시간이 첩첩이 쌓인 퇴적암의 수직 바위를 타고 옥빛 폭포가 쏟아집니다. 여기는 강원 삼척의 통리협곡입니다. 공룡이 한반도를 어슬렁거리던 중생대 백악기 때부터 1억 년 동안 시루떡처럼 겹겹이 쌓이기 시작한 지층을 오래전에 어마어마한 물줄기가 깎아낸 곳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거대한 물줄기는 간데없고 단풍 물든 협곡에는 높되 가녀린 폭포 하나가 쏟아집니다. 우아한 자태의 폭포에 붙여진 이름이 바로 ‘미인(美人)’입니다. 삼척 관광안내지도에도 없는 꼭꼭 숨겨진 곳입니다. 협곡 둘. ‘바람의 계곡’. 그곳에 서서 처음 떠올린 이름이 그랬습니다. 강원 삼척의 지각산(1080m). 그 산 허리의 촛대바위가 우뚝 선 석회암 협곡은 까마득한 깊이감으로 아찔했습니다. 한껏 과장된 무협지 속의 세상으로 들어선 듯했습니다. 이쪽의 벼랑에서 소리를 지르면 반대편 협곡의 절벽에 소리가 닿아서 깊고 웅장한 소리로 되돌아왔습니다. 협곡의 위쪽에는 단풍이 이제 막 부싯돌을 켜고 있더군요. 타닥 하고 옮아붙은 단풍의 불꽃이 며칠 뒤면 맹렬하게 산 아래쪽으로 번져 산을 활활 태울 기세입니다. 강원 삼척이라면 흔히 바닷가 풍경을 먼저 떠올리지만, 삼척은 내륙에 백두대간의 동쪽사면을 이루는 거대한 협곡을 품고 있습니다. 서쪽에서부터 서서히 고도를 높인 한반도의 등뼈가 급경사로 뚝 떨어지는 자리에서 삼척 땅은 시작됩니다. 그러니 까마득한 협곡과 깊은 계곡이 즐비할 밖에요. 그 협곡에 가을 단풍이 화려하게 물드는 때가 딱 이즈음입니다. 사실 삼척 내륙의 가을 단풍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건 아무래도 도로 사정 때문인 듯합니다. 길을 지우고 본다면 삼척의 내륙은 바다보다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삼척의 바다 쪽은 영동고속도로와 7번 국도로 쉽게 가닿을 수 있는 반면, 삼척의 내륙은 국도를 따라 제천, 영월, 정선, 태백을 지나 백두대간을 숨차게 넘고도 한참을 구불구불한 산길을 더 들어가야 합니다. 설악산이며 오대산이 단풍놀이 행락객들로 북새통을 이룰 때도 이쪽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한반도의 단풍 물결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강원도 깊은 산중의 단풍은 벌써 좀 늦은 게 아닌가 싶지만, 여기 삼척 일대의 첩첩산중에는 며칠 더 있어야 ‘만산홍엽(滿山紅葉)’이 시작될 듯합니다. 삼척은 같은 위도의 내륙보다 가을이 늦은 편이어서 단풍의 물결도 한 박자쯤 쉬고 도착하니 이제 짐을 꾸려도 늦지 않습니다. 깊은 협곡의 산중까지 길이 좀 멀지만, 그 길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건 이즈음 삼척으로 향하는 노정에서는 눈 닿는 곳마다 모두 가을인 까닭입니다. # 미인폭포, 협곡을 흘러내리는 유연한 물굽이 강원 태백에서 삼척으로 38번 국도로 통리재를 넘어가면 거기 통리협곡이 있다. 흔히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통리협곡을 그랜드캐니언의 위용에다 대는 건 좀 터무니없다. 지질학적인 면이라면 몰라도 두 협곡은 크기부터 아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런 과장된 비유를 믿고 통리협곡은 찾은 이들은 열에 아홉, 아니 열 명 모두 실망했을 게 틀림없다. 그러니 통리협곡을 찾아가려면 먼저 그랜드캐니언의 이미지와 기대부터 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통리협곡은 왜 그랜드캐니언에 비유될까. 이유는 단 하나. 두 협곡이 모두 붉은빛의 퇴적암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화강암 절벽이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서 자갈과 모래, 진흙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붉은빛 수직 협곡의 느낌은 참 낯설다. 최대높이 279m에 이르는 까마득한 통리협곡의 지층은 공룡이 한반도를 어슬렁거리던 중생대 백악기 때 퇴적돼 이뤄진 것. 까마득한 과거에 이쪽에는 엄청난 크기의 강이 흘렀고 거대한 물길은 지층을 두부모처럼 잘라 협곡을 빚어냈다. 협곡의 지층이 붉은빛을 띠는 건 강물이 마른 뒤 퇴적층이 건조한 공기에 노출된 채 산화됐기 때문이다.ㅍ 통리협곡이 그랜드캐니언보다 나은 게 있다면 붉은 지층의 벼랑에 근사한 한 줄기 폭포가 걸려 있다는 점이다. 이름 하여 ‘미인(美人)폭포’다. 남편을 잃은 미인이 이 절벽에서 투신했다는 전설로 붙여진 이름이다. 폭포가 쏟아지는 절벽이 곧 통리협곡이니 미인폭포와 통리협곡은 같은 곳을 말하는 다른 이름인 셈이다. 삼척을 찾아갔대도 미인폭포는 자칫 지나치기 쉽다. 어찌된 셈인지 삼척시의 관광안내지도에도 협곡과 폭포는 없다. 관광지로 개발되기는커녕 변변한 안내판조차 없이 꼭꼭 숨어 있어 길 찾기가 쉽지 않다. 우선 자그마한 절집 여래사부터 찾는 게 순서다. 태백에서 38번 국도를 타고 가다 통리삼거리에서 427번 지방도로로 우회전해 왼쪽 소로를 찾아 들어가면 여래사 입구다. 차를 거기 대고 협곡 저 아래로 이어진 ‘갈 지(之)’자 산길을 한참 내려가면 작고 초라한 절집 여래사가 있다. 여래사 경내의 요사체를 지나서 만나는 법당 앞이 협곡과 폭포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다. 여래사에서 바라보는 미인폭포는 그 이름처럼 여성적이다. 대부분의 폭포들이 굵은 물줄기로 우르릉거리며 쏟아져 남성미를 과시하는 데 반해, 미인폭포는 가녀리고 우아한 미인의 자태를 보여준다. 50m 높이의 적벽 협곡 사이를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아래쪽의 바위를 타고 분수처럼 갈라져 퍼진다. 맑은 날이면 벼랑 이곳저곳에는 드문드문 단풍이 반짝여 운치를 더해주고 흐린 날이면 안개나 구름으로 뒤덮여 신비한 모습을 보여준다. 미인폭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폭포 아래 고여 있는 오묘한 물색. 마치 코발트 물감에다 우유를 부은 듯한 색감이다. 본디 석회암이 녹아들어간 물색이 푸른빛을 띤다는데 그 색감이 더없이 이국적이다. # 열차의 추억 그리고 거대한 은행나무
하지만 도계 주민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움직이고 있는 탄차보다는 ‘동네 개도 1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좋았던 시절의 추억담인 듯했다. 가을볕을 쬐며 삼삼오오 모여 있던 노인들은 마을의 내력을 묻는 질문에 모두 그 얘기부터 꺼냈다. 도계역에서 태백 쪽으로 넘어가는 심포리역 사이는 한때 영동선 열차가 400m가 넘는 표고차를 힘겹게 넘던 철로 구간이었다. 당초 줄을 묶어 열차를 끌어올리는 ‘인클라인’ 방식으로 운행되다 열차가 진행방향을 바꾸며 갈지자로 경사구간을 오르던 스위치백 철로구간으로 운행돼왔다. 그러다 73년만인 지난해 솔안터널 개통과 함께 철로 이설작업으로 이 구간의 선로는 폐선되고 말았다. 기적소리와 함께 고개를 넘던 열차가 순식간에 터널로 넘나들면서 속도와 효율을 얻은 셈이다. 하지만 도계에서 만난 이들은 지금의 빠른 속도보다는 느릿느릿 경사구간을 오르던 열차의 추억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했다. 폐선 구간에는 머잖아 리조트가 들어서게 된다. 16.5㎞의 폐선 구간에 관광열차와 산악형 레일바이크를 설치해 운행하는 철도테마 리조트 ‘하이원스위치백 리조트’가 이르면 내년 상반기 중에 들어서게 되는 것. 리조트가 들어서게 되면 ‘현재진행형’의 탄광마을은 번듯한 관광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편리하고 쾌적하고 세련된 리조트에 밀려 탄광촌 사람들의 뜨거운 삶의 냄새는 금세 지워지고 말리라. 그렇게 되면 도계 주민들은 지금의 시간을 또 추억으로 되새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즈음 도계에서 꼭 들러봐야 할 곳이 늑구리의 은행나무다. 도계의 고사리역 구내를 지나 시멘트 포장 산길을 한참 오르면 거기 당당한 위용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 자리를 놓고 경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와 겨루는 나무다. 수령 1000년을 훌쩍 넘긴 나무는 중심 가지가 오래전에 죽어 썩었지만 죽은 줄기에서 돋아난 여러 개의 곁가지들이 수백 년을 자라 20m 높이까지 뻗었다. 가지들이 어찌나 촘촘하게 돋아났던지 얼핏 보면 은행나무 다발처럼 보이는데, 살펴보면 다 하나의 밑동에서 자란 것이다. 구렁이로 변한 스님이 이 나무를 지키고 있다는 전설이 아니더라도, 저 아래 탄광마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지켜보며 가을이면 주위를 온통 노란빛으로 물들이는 은행나무에서는 시간을 뛰어넘는 영험함이 느껴진다. # 단풍, 바람의 협곡을 물들이기 시작하다
그러나 덕항산 쪽의 등산로는 삼척시가 노후한 탐방로 시설정비를 이유로 1년째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기왕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산에 등산객들의 발길이 더 뜸해졌다. 그럼에도 지각산을 권하는 이유는 석회암 지형 특유의 암봉이 이룬 까마득한 협곡을 따라 단풍이 불붙는 모습이 숨 막힐 듯 아름답기 때문이다. 지각산은 먼발치서부터 형세가 범상치 않다. 우람한 흙산의 봉우리들이 마치 바위처럼 뾰족하게 서 있는데, 봉우리 하나하나가 어쩐지 무협지 속 풍경 같기도 하고 중국 계림의 산군(山群) 같기도 하다. 본격 등산이 아니라면 탐방로 출입통제로 간 길을 고스란히 되짚어 내려와야 하는 덕항산은 포기하고 지각산까지만 다녀오는 게 낫다. 지각산 정상까지는 모노레일이 닿는 환선굴 아래쪽에서 출발하면 편도 1.6㎞ 남짓. 그다지 길지 않은 구간이지만 만만하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처음부터 산길을 차고 오르는 등산로의 경사가 보통이 아니다. 정상까지 내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단풍의 협곡을 보겠다면 굳이 정상까지 갈 것도 없다. 오름 길에서 만나는 1, 2전망대까지만 다녀와도 충분하다. 힘이 부치거든 제1전망대에서 마주하는 풍경만으로도 보람은 충분하다. 지각산에서 최고의 풍경을 보여주는 구간은 촛대봉 아래로 뚫린 동굴을 지나 제1전망대에 이르는 구간. 동굴을 통과하면 깊은 협곡 건너편 능선의 바위와 숲이 어우러진 벽이 시야를 막아선다. 건너편 석벽은 이쪽의 소리를 메아리로 다 받아낸다. 협곡 자체가 거대한 울림통이 돼서 산행객들이 나누는 대화까지도 마치 돌림노래처럼 들린다.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 한 곡을 뽑으면 산이 목소리를 되받아 깊고 장중한 울림으로 돌려보낸다. 제1전망대라 이름 붙여진 바위에 올라서면 저 아래 촛대봉이 우람하다. 온통 숲으로 뒤덮인 봉우리가 마치 죽순처럼 솟아 있다. 그 봉우리 아래 이제 막 동굴을 통과한 사람의 모습이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데, 그 아래로 서늘한 협곡이 아찔하다. 지각산이 품고 있다는 ‘바람의 협곡’은 아마도 이곳 제1전망대에서 보는 경관을 말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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