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鄭道傳_佛氏雜辨

醉月 2013. 9. 7. 01:30

 目 次

01. 佛氏輪廻之辨

02. 佛氏因果之辨

03. 佛氏心性之辨

04. 佛氏作用是性之辨

05. 佛氏心跡之辨

06. 佛氏昧於道器之辨

07. 佛氏毁棄人倫之辨

08. 佛氏慈悲之辨

09. 佛氏眞假之辨

10. 佛氏地獄之辨

11. 佛氏禍福之辨

12. 佛氏乞食之辨

13. 佛氏禪敎之辨

14. 儒釋同異之辨

15. 佛法入中國

16. 事佛得禍

17. 舍天道而談佛果

18. 事佛甚謹秊代尤促

19. 闢異端辨

 

1. 佛氏輪廻之辨

人物之生生而無窮, 乃天地之化, 運行而不已者也.

사람과 만물이 계속하여 낳고 낳아 끝이 없음은 바로 천지의 조화가 운행하여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原夫太極 有動靜而陰陽生, 陰陽有變合而五行具.

원래 대저 태극이 동하고 정하여 음양을 낳고 음양이 변하고 합하여 오행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於是 無極太極之眞, 陰陽五行之精, 妙合而凝人物生生焉.

이에 무극 태극의 참됨과 음양 오행의 정밀함이 묘합하고 엉겨 사람과 만물을 계속하여 낳고 낳는 것이다.

 

其已生者, 往而過, 未生者, 來而續. 其間不容一息之停也.

이미 생겨난 것은 가서 과거가 되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와서 계속되는 것이니 그사이가 한 순간의 멈춤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佛之言曰 人死, 精神不滅, 隨復受形”, 於是 輪廻之說, 興焉.

불씨의 말에 가로되, “사람은 죽어도 정신은 멸하지 않아 다시 태어남에 따라 형체를 받는다하였으니, 고로 생사의 설을 알 수 잇다.

 

易曰 原始反終”, , 知死生之說.

역에 가로되, 처음을 근원 하여 마침을 돌이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생사의 설을 알 수 있다.

 

又曰, “精氣爲物, 游魂爲變”.

또 말하기를, “정기는 물이 되고, 유혼은 변이된다.”하였다.

 

先儒解之曰, “天地之化, 雖生生不窮, 然而有聚 必有散, 有生 必有死. 能原其始而知其聚之生, 則必知其後之必散而死. 能知其生也, 得於氣化之自然, 初無精神 寄寓於太虛之中, 則知其死也, 與其而俱散, 無復更有形象, 尙留於冥漠之內.”

선유가 그것을 해석하여 가로되, “천지의 조화로 인하여 비록 계속하여 낳고 낳아 끝이 없으나, 모임이 있으면 반드시 흩어짐이 있고, 생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 하였으며, 능히 그 처음을 근원 하여 모여서 생한 것임을 알면, 후에 반드시 흩어져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으며, 생이라고 하는 것이 기가 화하는 자연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애초에 정신이 태극의 가운데에 붙어 있음이 없다는 것을 알면,죽음이라는 것도 기와 더불어 함께 흩어져 다시는 형상이 명막함 속에 머무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하였다.

 

又曰, “精氣爲物, 游魂爲變.” 天地陰陽之氣, 交合, 便成人物, 到得魂氣 歸于天, 體魄 歸于地, 便是變了.

또 말하기를, “정기는 물이 되고, 유혼은 변이된다.”하였으니, 천지 음양의 기운이 서로 합하여 바로 사람과 만물을 이루나 혼기는 하늘로 돌아가고 체백은 땅으로 돌아간다 함에 이르면 바로 이것이 완전히 변한다는 것이다.

 

精氣爲物, 是合精與氣而成物, 精魄而氣魂也. 游魂爲變, 變則是魂魄相離 游散而變, 變 非變化之變.

정기가 물이 된다는 것, 이는 정과 기가 합하여 물을 이룸이니 정은 백이요, 기는 혼인 것이다. 유혼은 변이 된다는 것은 변하면 혼백이 서로 떨어져 산하여 변한다는 것이니, 變化이 아니다.

 

旣是變則 堅者 腐, 在者 亡. 更無物也.

이미 이 변했다는 것은 견고한 것이 썩었다는 것이오, 있던 것이 없어 졌다는 것이니, 다시는 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天地間 如烘爐, 雖生物 皆銷鑠已盡, 安有已散者復合 而已往者復來乎.

천지의 사이가 홍로와 같아서 비록 생물이라도 모두 다 녹아 없어져 버리는 것이니, 어찌 이미 흩어져 버린 것이 다시 합하여 질 수 있으며 가버린 것이 다시올 수 있겠는가.

 

今且驗之吾身, 一呼一吸之間, 氣一出焉 謂之一息.

이제 또 내 몸으로서 징험하면, 숨을 한번 내쉬고 한번 들이쉬는 사이에 기가 한번 나오니, 그것을 일러 一息이라고 한다.

 

其呼而出者, 非吸而入之也. 然則人之氣息, 亦生生不窮 而往者過 來者續之理, 可見也.

숨을 내쉴 때 나와 버린 것을 숨을 들이 쉴 때 그것을 흡입하는 것이 아니니. 그러한즉 사람의 기식 또한 계속하여 나오고 나와 끝이 없다는 것과 가버린 것은 가버리고 오는 것은 와서 계속되는 이치를 가히 볼 수 있는 것이다.

 

外而驗之於物, 凡草木自根而幹而枝而葉而華實, 一氣通貫. 當春夏時 其氣慈至而華葉暢茂, 至秋冬 其氣收斂而華葉衰落, 至明年春夏又復暢茂, 非已落之葉返本歸源而復生也.

밖으로 물로써 징험하면, 모든 초목들이 뿌리로부터 줄기 가지 잎 그리고 꽃과 열매에 이르기까지 한 기가 관통하여 봄여름을 당하여서는 그 기운이 불어나 꽃과 잎이 무성하고 가을과 겨울에 이르러서는 그 기운이 오그라들어 꽃과 잎이 쇠하여 떨어지나 이듬해 봄여름에 이르면 또다시 무성하게 되되, 이미 떨어져버린 낙엽이 다시 원래로 돌아가 소생하는 것은 아니다.

 

又井中之水, 朝朝而汲之 爨飮食者大煮而盡之, 濯衣服者 日曝而乾之, 泯然 無跡而井中之泉 源源而出無有窮盡, 非已汲之水返其故處而復生也.

또 우물 속의 물을 보라. 아침마다 길어 낸 물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불로 끓여 없애고, 옷을 세탁하는 사람이 햇볕에 말려 없애니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지만, 그러나 우물의 샘줄기에서는 계속하여 물이 솟아 다함이 없으니 이 때 이미 길어 간 물이 그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 다시 나오는 것은 아니다.

 

且百穀之生也, 春而種十石, 秋而收百石以至千萬, 其利倍蓰. 是 百穀亦生生也.

또한 백곡의 나옴도 봄에 열석을 파종하여 가을에 백석을 거두고 천만에 이르니 그 이익이 여러 배가 된다. 이는 백곡도 또한 계속하여 나온다는 것이다.

 

今以佛氏輪廻之說, 觀之凡有血氣者, 自有定數, 來來去去, 無復增損.

이제 불씨의 윤회의 설을 살펴보건대, 모든 혈기 있는 것들은 스스로 숫자가 정해져 있어서, 오는 것은 오고 가는 것은 가더라도 다시는 증가하거나 줄어듦이 없다.

 

然則天地之造物, 反不如農夫之生利也.

그러한즉, 천지의 만물 조성함이 농부의 이익 생산만 같지 못하다.

 

且血氣之屬, 不爲人類則爲鳥獸魚鼈昆蟲, 其數有定, 此蕃則彼必耗矣, 此耗則彼必蕃矣. 不應一時俱蕃 一時俱耗矣.

또한 혈기의 등속이 사람의 유가 되지못하면 새짐승물고기자라곤충이 되니, 그 수가 정해져 있어서 이것이 번식하면 저것이 반드시 줄어들고, 이것이 줄어들면 저것이 반드시 번식하는 것이니 일시에 함께 번식하고, 일시에 함께 줄어들지 않는 것이다.

 

自今觀之, 當盛世, 人類蕃庶, 鳥獸魚鼈昆蟲亦蕃庶, 當衰世 人物耗損 鳥獸魚鼈昆蟲亦耗損.

이제 살펴보건데 성한 세상을 당하여서는 인류도 번식하고 새짐승물고기자라곤충도 또한 번식하나, 쇠한 세상을 당하여서는 인물도 줄어들고 새짐승물고기자라곤충도 또한 줄어든다.

 

是人與萬物 皆爲天地之氣所生, 故氣盛則一時蕃庶, 氣衰則一時耗損, 明矣.

이것은 사람과 만물이 모두 천지의 기운이 소생시키는 바이니, 그러므로 기가 성하면 일시에 번식하고 기가 쇠하면 일시에 줄어드는 것은 명확한 것이다.

 

予憤佛氏輪廻之說, 惑世尤甚, 幽而質諸天地之化, 明而驗諸人物之生, 得其說 如此, 與我同志者, 幸共鑑焉.

나는 불씨의 윤회의 설이 세상에 더욱 의혹 시키는 것에 대해 분개하여, 천지의 조화에 깊이 근본하고 사람과 만물의 생성에 밝게 징험하여, 그 설을 얻음이 이와 같으니, 나와 뜻을 함께 하는 자는 共鑑하기를 바라노라.

 

或問 子引先儒之說, 解易之游魂爲變, 魂與魄相離 魂氣歸於天, 體魄降于地, 是人死則魂魄各歸于天地 非佛氏所謂人死精神不滅者耶.” 故者 四時之火 皆取於木, 是木中元有火, 木熱則生火, 猶魄中元有魂, 魄煖者爲魂.”

혹자가 나에게 묻기를 선유의 설을 인용하여 에 있는 游魂爲變이라는 것을 해석하여 가로되, 혼과 백이 서로 떨어져 혼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체백은 땅으로 내려간다 하고,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혼백은 각기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니, 불씨의 이른바 사람은 죽어도 정신은 멸하지 않는 다는 것 아닌가라고 한다면, 가로되 옛날에 사시의 불은 모두 나무에서 취하였으니, 이것은 나무 가운데 원래 불이 있어서 백을 따듯하게 하면 혼이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는 것이다.”

 

故曰, “鑽木出火”, 又曰, “形氣生矣, 神發知矣.”, 形 魄也, 神 魂也.

고로 가로되, “나무를 비비면 불이 나온다.”하고, 또 가로되, “형기가 생하면 신이 지를 발한다.”하니, 형은 백이요, 신은 혼인 것이다.

 

火緣木而存, 猶魂魄合而生.

불이 나무를 연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혼백이 합하여 생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火滅則煙氣升而歸于天 灰燼降而歸于地, 猶人死則魂氣升于天 體魄降于地. 火之煙氣卽人之魂氣, 火之灰燼卽人之體魄.

불이 멸하면 연기는 올라가 하늘로 돌아가고 회신은 내려가 땅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죽으면 혼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체백은 땅으로 내려간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연기는 곧 사람의 혼기요 회신은 곧 사람의 체백인 것이다.

 

且火氣滅矣, 煙氣灰燼不復合而爲火 則人死之後 魂氣體魄亦不復合而爲物, 其理 豈不明甚也哉.

또한 불기운이 멸하면 연기와 잿더미는 다시 합하여 불이 되지 않으니, 사람이 죽은 후에 혼기체백도 또한 다시 합하여 물이 될 수 없다는 그 이치가 어찌 더욱 명백하지 아니하겠는가 !

 

 

2. 佛氏因果之辨

或曰 吾子辨佛氏輪廻之說,至矣. 子言人物 皆得陰陽五行之氣以生.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의 불씨의 윤회설에 대한 변증은 지극하다마는, 자네의 말에, 사람과 만물이 모두 음양 오행의 기를 받아서 태어났다고 했다.

 

今夫人則有智愚,賢不肖,貧富,貴賤,壽夭之不同. 物則有爲人所畜役勞苦 至死而不辭者, 有未免網羅釣弋之害 大小强弱之自相食者. 天地生物 一賦一與 何其偏而不均 如是耶.

그런데 사람은 지혜로운 자, 어리석은 자, 어진자, 불초한자, 가난한 자, 부유한 자, 귀한 자, 천한 자, 장수하는 자, 요절하는 자 등이 같지 않으며, 동물의 경우에는 어떤 것은 사람에게 길들여져 실컷 부림을 받고 드디어는 죽음을 감수하기도 하고, 크고 작고 강하고 약한 것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잡아먹기도 하니, 하늘이 만물을 냄에 있어 하나하나 부여해 줄 것이 어찌 이렇게도 치우쳐 고르지 못하단 말인가?

 

以此而言釋氏所謂生時所作 善惡皆有報應者 不其然乎.

이렇게 보면 석씨의 이른바 살아 있을 때 착한 일을 하였거나 악한 일을 한 것에 보응이 있다.‘는 것이 과연 그렇지 아니한가?

 

且生時所作善惡 是之謂因, 佗日報應 是之謂果. 此其說不亦有所據歟,

또 살아 있을 때 착한 일을 하거나 약한 일을 하는 것을 이라 하고 다른 날에 보응을 받는 것을 라고 하였으니 이 말 또한 근거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曰予於上論人物生生之理 悉矣. 知此則輪廻之說 自辨矣. 輪廻之說辨則因果之說, 不辨而自明矣.

말하기를 내가 위에서 사람과 만물이 생생하는 이치를 앞에서 자세히 하였으니, 이를 이해한다면 윤회설은 저절로 변명될 것이요, 윤회설이 변명되면 인과설은 변명하지 않아도 자명해진다.

 

然子旣有問焉, 予敢不推本而重言之, 夫所謂陰陽五行者 交運迭行 參差不齊.

그러나 이미 질문이 나왔으니 내 어찌 근본적으로 다시 말하지 않으랴? 저 이른바 음양 오행이라고 하는 것은 엇바뀌어 운행되며, 서로 드나들어 가지런하지 않다.

 

故其氣也, 有通塞偏正淸濁厚薄高下長短之異焉 而人物之生, 適當其時, 得其正且通者 爲人, 得其偏且塞者 爲物, 人與物之貴賤於此焉分.

그러므로 그 기는 통함과 막힘, 치우침과 바름, 맑음과 흐림, 두꺼움과 얇음, 높고 낮음,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으니, 안과 물이 생겨남에 그때를 마침 당하여 그 바르고 통한 것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그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은 것은 물이 되나니, 인물의 귀천이 여기에서 나누어진다.

 

又在於人 得其淸者 智且賢, 得其濁者 愚不肖, 厚者富而薄者貧, 高者貴而下者賤, 長者壽而短者夭, 此其大略也.

또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 기의 맑은 것을 얻은 자는 지혜롭고 어질며, 그 탁한 것을 얻은 자는 어리석고 불초하며, 두꺼운 것을 얻은 자는 부자가 되고 얇은 것을 얻은 자는 가난하며, 높은 것을 얻은 자는 귀하고 낮은 것을 얻은 자는 천하며, 긴 것을 얻은 자는 장수하며, 짧은 것을 얻은 자는 단명하니 이는 그 대략이다.

 

雖物亦然, 若麒麟龍鳳之爲靈, 虎狼蛇虺之爲毒, 椿桂芝蘭之爲瑞, 烏喙菫茶之爲苦, 是皆就於偏塞之中而又有善惡之不同. 然皆非有意而爲之.

비록 물일지라도 또한 그러하니 麒麟, , 의 신령함, 虎狼 蛇虺의 독함, 椿, , , 의 상서로움, 烏喙, 菫茶의 씀은 모두 치우치고 막힌 가운데에서 취하였고 또한 선악이 같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러나 모두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易曰 乾道變化 各定性名. 先儒曰 天道無心而普萬物 是也.

주역에 이르기를 건의 도가 변화하여 각각 성명을 정한다.’고 하였으니 선유가 말한 천도가 무심히 만물을 두루 덮는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今夫醫卜 小數也, 卜者 定人之禍福 必推本於五行之衰旺.

오늘날의 의술이나 점술은 조그마한 술수지만, 점치는 사람은 복이나 화를 정하는데 반드시 행의 쇠퇴하고 왕성함을 근본으로 추구한다.

 

至曰 某人 以木爲命 當春而旺 當秋而衰 其象貌 靑而長 其心 慈而仁, 某人 以金爲命 吉於秋而凶於夏 其象貌 白而方 其心 剛而明, 曰水, 曰火, 莫不皆然而象貌之醜陋, 心識之愚暴, 亦皆本於五行稟賦之偏.

이 사람은 木命이니 봄을 맞아서는 왕성하지만 가을을 맞으면 쇠퇴하며 그 용모는 푸르고 길며 그 마음씨는 자비롭고 어질다.’하고 이 사람은 金命이므로 가을에는 길하나 여름에는 흉하며 그 용모는 희고 네모나며, 그 마음씨는 강하고 맑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때로는 水命을 때로는 火命을 말하며 해당시키지 않는 것이 없으니, 용모의 추함이나, 마음의 어리석고 사나움이 모두 오행의 품부가 치우침에 근거한다고 한다.

 

醫者 診人之疾病 又必推本於五行之相感 乃曰 某之病 寒 乃腎水之證 某之病 溫 乃心火之證之類 是也.

또 의사가 사람의 병을 진찰할 때에도 반드시 오행이 서로 감응함에 근본을 추구한다. ‘아무개 병은 한증이니 腎水의 증세라 하고 아무개의 병은 온증이니 心火의 증세라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런 유의 것이다.

 

其命藥也 以其性之溫凉寒熱 味之酸鹹甘苦 分屬陰陽五行而劑之 無不符合 此吾儒之說 以人物之生 爲得於陰陽五行之氣者 明有左驗無可疑矣.

따라서 약을 쓸 때에도 그 약 성질의 ,,,과 그 맛의 ,,,를 음양 오행에 나누어 붙여서 조제하면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는 우리 유가의 설에 사람과 만물은 음양 오행의 기를 받아서 태어났다.’는 것이 명백히 증험되는 것이니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信如佛氏之說 則人之禍福疾病, 無與於陰陽五行 而皆出於因果之報應, 何無一人, 捨吾儒所謂陰陽五行而以佛氏所說因果報應定人禍福 診人疾病歟. 其說荒唐謬誤 無足取信如此 子尙惑其說歟.

과연 불씨의 설과 같다면 사람의 화복과 질병이 음양 오행과는 관계없이 모두 인과보응에서 나오는 것이 되는데, 어찌하여 우리 유가의 음양 오행을 버리고 불씨의 인과보응설을 가지고 사람의 화복을 정하고 사람의 질병을 진료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느냐? 불씨의 설이 황당하고 오류에 가득차 족히 믿을 수 없음이 이와 같거늘, 그대는 아직도 그 설에 미혹되려는가?

 

今以至切而易見者, 比之酒之爲物也, 麴蘖之多寡 甕之生熟 日時之寒熱久近, 適相當則 其味爲甚旨.

이제 지극히 절실하고도 보기 쉬운 예를 들어 비유해 보자. 술이라 하는 것은 국과 얼의 많고 적음과, 항아리의 덜 구워지고 잘 구워짐과, 날씨의 차고 더움과 기간의 오래됨과 가까움이 서로 적당히 어울리면 그 맛이 매우 좋게 된다.

 

若蘖多則 味甘, 麴多則 味苦, 水多則 味淡, 水與麴蘖 適相當而瓷甕之生熟日時之寒熱久近 相違而 不相合則 酒之味 有變焉.

그러나 만약 얼이 많으면 맛이 달게 되고, 국이 많으면 맛이 쓰고, 물이 많으면 맛이 싱겁다. 물과 국과 얼이 모두 적당하게 들어갔다 할지라도 항아리의 덜 구워짐, 잘 구워짐에나, 또한 날씨의 차고 더움이나 기간의 오래됨과 가까움에 서로 어긋나 합해지지 않으면 술맛이 변하게 된다.

 

而隨其味之厚薄 其用亦有上下之異, 若其糟粕則委之汚下之地 或有蹴踏之者矣.

그리고 그 맛의 좋고 나쁨에 따라 그 용도도 상하로 다르게 되며, 지게미 같은 것은 더러운 땅에 버려져 발길에 채이고 밟히게도 된다.

 

然則酒之或旨 或不旨 或上 或下 或用 或棄者 此固適然而爲之耳, 亦有所作因果之報應歟.

그런즉, 술의 그 맛있게 되고 맛없게 되는 것과, 상품도 되고 하품도 되는 것과, 쓰이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것이 모두가 다 일시적으로 마침 그렇게 되어서 그럴 뿐이니 술을 만드는 데에도 역시 인과의 보응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겠는가?

 

此喩雖淺近鄙俚, 亦可謂明且盡矣. 所謂陰陽五行之氣 相推迭運 參差不齊.

이 비유는 비록 비근한 것이기는 하지만 극히 명백하여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른바 음양 오행의 기는 서로 밀고 엇바뀌어 운행되어서 서로 드나들어 가지런하지 않다.

 

而人物之萬變生焉. 其理 亦猶是也.

그러므로 사람과 만물이 만번 변하여 태어나는 것이니, 그 이치가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聖人 設敎 使學者變化氣質 至於聖賢 治國者 轉衰亡而進治安.

성인은 가르침을 베풀어, 배우는 사람에게 기질을 변화하여 성현에 이르게 하는가 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게 쇠망을 바꾸어 치안으로 나아가게 한다.

 

此聖人所以廻陰陽之氣 以致參贊之功者 佛氏因果之說 豈能行於其間哉.

이것은 성인이 음양의 기를 돌이켜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공에 참여하여 돕는 까닭이다. 어찌 불씨의 인과설이 그 가운데에 용납될 수 있겠는가.

 

 

3. 佛氏心性之辨

心者, 人所得於天以生之氣, 虛靈不昧, 以主於一身者也. 性者, 人所得於天以生之理, 純粹至善, 以具於一心者也.

마음[]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가지고 태어난 기()로서, 허령불매(虛靈不昧:마음에 잡념이 없고 신령하여 어둡지 않음)하며, 이것이 한 몸의 주인이 되는 것이요, ()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가지고 태어난 이()로서, 순수(純粹)하고 지극히 선()하며 한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蓋心有知有爲, 性無知無爲, 故曰 心能盡性, 性不能知檢其心, 又曰心統情性, 又曰心者神明之舍, 性則其所具之理.

대개 마음[]에는 지각(知覺)과 행위(行爲)가 있으나, ()에는 지각도 행위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은 능히 성()을 다할 수가 있으나, ()은 마음을 검속(檢束)할 줄을 알지 못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마음[]은 정()과 성()을 모두 통합한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마음[]이란 것은 신명(神明)의 집[]이요, ()은 그 갖추어진 바의 이치[]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觀此心性之辨可知矣. 彼佛氏以心爲性, 求其說而不得, 乃曰迷之則心, 悟之則性, 又曰心性之異名, 猶眼目之殊稱.

이것으로 볼 때, 마음[]과 성()의 분변(分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저 불씨(佛氏)는 마음을 가지고 성()이라 하고서 그 설을 구하다가 되지 않으니까 이윽고 말하기를, “혼미[]하면 마음이요, 깨달으면[] ()이다.”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마음[]과 성()의 이름이 다른 것은 마치 안()과 목()의 명칭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였다.

 

至楞嚴曰圓妙明心, 明妙圓性, 以明與圓分而言.

능엄경(楞嚴經)에 말하기를, “원묘(圓妙)는 명심(明心)이요, 명묘(明妙)는 원성(圓性)이다.”하니 이는 명()과 원()을 나누어서 말한 것이다.

 

按楞嚴經曰 汝等, 遺失本妙. 圓妙明心, 寶明妙性, 認悟中迷言, 心則從妙起明, 圓融照了, 如鏡之光, 故曰圓明妙心, 性則卽明而妙, 凝然寂湛, 如鏡之體, 故曰 寶明妙性. - [?능엄경?(楞嚴經)너희들은 본묘(本妙)를 잃어버렸도다. 원묘(圓妙)는 명심(明心)이요, 보명(寶明)은 묘성(妙性)이니라. 깨달음을 얻은 경지에서는 말이 필요하지 않으니, 마음은 묘로부터 명()을 일으키는지라, 그 원융(圓融)하게 비춤이 거울의 빛과 같으므로 원묘는 명심이라 하고, 성품은 그 자체가 곧 명()하며 묘()한지라, 엉기어 고요하고도 맑음이 거울의 본체와 같으므로 보명은 묘성이라 한다.”고 하였다.]

 

普照曰 心外無佛, 性外無法, 又以佛與法分而言之 似略有所見矣. 然皆得於想象髣髴之中, 而無豁然眞實之見, 其說多爲遊辭而無一定之論, 其情可得矣.

보조(普照)는 말하기를, “마음 밖에 부처[]가 없으며, () 밖에 법()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또한 불()과 법()을 나누어 말한 것이다. 이는 통찰[]한 바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모두가 방불한 가운데 상상(想象)으로 얻은 것이요, 활연(豁然)히 진실되게 본 것이 없어, 그 설에 헛된 말[遊辭]이 많아 일정한 논()이 없으니, 그 실정을 알 수 있다.

吾儒之說曰 盡心知性, 此本心以窮理也.

우리 유가(儒家)의 설에 말하기를, “마음을 다하면 성()을 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것이다.

 

佛氏之說曰 觀心見性, 心卽性也. 是別以一心見此一心, 心安有二乎哉. 彼亦自知其說之窮, 從而遁之曰 以心觀心, 如以口齕口, 當以不觀觀之, 此何等語歟.

그런데 불씨의 설에서는 말하기를, “마음을 관()하면 성()을 보나니, 마음이 곧 성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따로 한 마음을 가지고 이 한 마음을 본다는 것이니, 마음이 어찌 둘이 있겠는가. 저들도 스스로 그 설의 궁함을 알았는지라, 이에 둔사(遁辭)하여 말하기를, “마음으로 마음을 보는 것은 마치 입으로 입을 깨무는 것과 같으니, 마땅히 관()하지 않는 것으로써 관()해야 하느니라.”고 하니, 이것은 무슨 말인가?

 

且吾儒曰 方寸之間, 虛靈不昧, 具衆理, 應萬事. 其曰 虛靈不昧者 心也, 具衆理者 性也, 應萬事者 情也. 惟其此心具衆理, 故於事物之來, 應之無不各得其當, 所以處事物之當否 而事物皆聽命於我也.

또 우리 유가(儒家)의 말에, “한 가슴[方寸]의 사이가 허령불매(虛靈不昧:마음에 잡념이 없고 신령하여 어둡지 않음)하여 모든 이치(理致)를 갖추어 만사(萬事)에 응()한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허령(虛靈)하여 어둡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요, 모든 이치를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성()이요, 만사(萬事)에 응한다고 하는 것은 정()이다. 오직 이 마음이 모든 이치를 갖추고 있으므로 사물(事物)의 오는 것에 응()하여 각각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함이 없는 것이니, 사물의 마땅하고 마땅치 않은 것을 처리함에 있어 모든 사물이 다 나의 명령을 듣기 때문이다.

 

此吾儒之學, 內自身心, 外而至於事物, 自源徂流, 一以通貫, 如源頭之水, 流於萬派, 無非水也. 如持有星之衡, 稱量天下之物, 其物之輕重, 與權衡之銖兩, 相稱. 此所謂元不曾間斷者也.

이것은 우리 유가(儒家)의 학문이 안으로는 몸과 마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밖으로는 사물에 이르기까지, 근원에서부터 말류(末流)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관통되어 원두(源頭;근원처)의 물이 만 갈래로 흘러도 물 아님이 없음과 같고, 눈금이 있는 저울을 가지고 천하의 만물을 저울질하면 그 물건의 경중(輕重)이 저울대의 저울눈과 서로 맞는 것과 같다. 이것이 이른바 원래부터 일찍이 간단(間斷)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佛氏曰 空寂靈知, 隨緣不變.

불씨(佛氏)는 말하기를, “공적(空寂)한 영지(靈知)는 연()을 따라 변하지 않는다.” 하였다.

 

按佛氏以爲 眞淨心隨緣是相 不變是性 如一眞金 隨大小器物 等是隨緣相也 本金不變是性也 一眞淨心 隨善惡染淨 等是隨緣相也 本心不變性也. - [: 불씨는 말하기를, “진정(眞淨)한 마음이 연()을 따라 변하는 것은 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성()이니, 마치 한 진금(眞金)이 크고 작은 그릇을 따르는 것은 곧 연()을 따르는 상이고, 진금 그 자체가 변하지 않는 것은 곧 성()인 것과 같다.” 하니, 하나의 진정한 마음이 선악(善惡)을 따라 더럽혀지거나 깨끗해지는 것은, 곧 연()을 따르는 상()이고, 본심이 변하지 않는 것은 성()이라는 것이다.]

 

無所謂理者具於其中, 故於事物之來, 滯者欲絶而去之, 達者欲隨而順之, 其絶而去之者, 固已非矣. 隨而順之者, 亦非也.

이른바 이()란 것이 그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지 않으므로, 사물을 대함에 막힌[]것은 끊어버리고자 하고 트인[]것은 따라 순종하고자 하는데, 그 끊어 버리고자 하는 것이 원래 잘못이거니와 따라 순종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잘못이다.

 

其言曰 隨緣放曠, 任性逍遙, 聽其物之自爲而已. 無復制其是非而有以處之也. 是其心如天上之月, 其應也 如千江之影, 月眞而影妄, 其間未嘗連續, 如持無星之衡, 稱量天下之物, 其輕重低昻, 惟物是順 而我無以進退稱量之也.

그의 말에, “()을 따라 되는대로 하고, ()에 맡겨 자연스럽게 한다.” 하니, 그 물()의 하는 대로를 따를 뿐이요, 다시 그 시비(是非)를 절제(節制)하여 처리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 마음은 하늘 위의 달과 같고 그 마음의 응함은 천강(千江)의 달그림자와 같으니, 달은 참된 것이요, 그림자는 헛된 것이어서, 그 사이에 일찍이 연속됨이 없는 것이며, 마치 눈금이 없는 저울을 가지고 천하의 만물을 저울질하는 것과 같아, 그 가볍고 무겁고, 내려가고 올라가는 것은 오직 물건에 따를 뿐, 자기가 진퇴(進退)하여 칭량(稱量)함이 없는 것이다.

 

故曰 釋氏虛, 吾儒實, 釋氏二, 吾儒一, 釋氏間斷, 吾儒連續. 學者 所當明辨也.

그러므로 석씨(釋氏)는 허무이고 우리 유가(儒家)는 진실이며, 석씨는 둘이고 우리 유가는 하나이며, 석씨는 간단(間斷)이 있고 우리 유가는 연속(連續)되는 것이다.” 하는 것이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밝게 분변(分辨)해야 할 것이다.

 

 

4. 佛氏作用是性之辨

- 불가에서 作用이다라고 한 것에 대한 논변 -

愚按, 佛氏之說, 以作用爲性, 龐居士, 運水搬柴, 無非妙用, 是也.

내가 생각하기에, 불씨의 설에서는, 작용을 성이라 여기는데, 방거사가 물을 나르고 땔나무를 옮기는 것이 신묘한 작용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말했으니 이것이다.

 

, 龐居士偈, 日用事無別, 唯吾自偶諧, 頭頭須取舍, 處處勿張乖, 神通幷妙用, - [: 방거사가 게송에서 말했다. 날마다 행하는 일이 별다름이 없으니, 오직 내 스스로 짝하여 일을 성취한다. 각각 모름지기 수용할 것을 취하고, 곳곳에서 어긋나지 말면 신통이 아울러 신묘한 작용을 겸하게 되니, 물을 나르고 땔나무를 운반하는 것이다.]

 

蓋性者, 人所得於天以生之理也, 作用者, 人所得於天以生之氣也.

대개 성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생겨난 이고, 작용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서 생겨난 기이다.

 

氣之凝聚者爲形質, 爲神氣, 若心之精爽, 耳目之聰明, 手之執, 足之奔, 凡所以知覺運動者 皆氣也.

기가 엉기어 모인 것이 형질이 되고, 신기가 되는데, 이같은 마음의 精爽이나, 귀와 눈의 총명함이나, 손의 잡음이나, 발의 달림은 무릇 지각하고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기이다.

 

故曰, 形旣生矣, 神發知矣, 人旣有是形氣, 則是理具於形氣之中.

그러므로 말하기를 이 이미 생겨났으면, 이 지를 발한다.’라 한 것이니, 사람이 이미 이 형기가 있으면, 곧 이 가 형기 중에 갖추어 진다.

 

在心爲仁義禮智之性, 惻隱羞惡辭讓是非之情, 在頭容爲直, 在目容爲端, 在口容爲止之類, 凡所以爲當然之則而不可易者, 是理也.

마음에 있어서 仁義禮智惻隱羞惡辭讓是非이 되며, 머리 모양에 있어서는 직이 되며, 눈 모양에 있어서는 단이 되며, 입모양에 있어서는 가 되는 류들은, 무릇 당연한 법칙이 되는 까닭에 바꿀 수없는 것이니, 이것이 이다.

 

劉康公曰, 人受天地之中以生, 所謂命也, 故有動作威儀之則, 以定命也.

유강공이 말하기를 사람이 천지의 중을 받아서 태어났으니, 이른바 명이다. 그러므로 동작위의의 법칙이 있어서, 이로써 명을 정한다라고 했다.

 

其曰天地之中者, 卽理之謂也, 其曰威儀之則者, 卽理之發於作用者也.

그가 말한 天地之中이란 것은 바로 를 일컫는 것이며, ‘위의의 법칙이란 것은 바로 가 작용에서 발하는 것이다.

 

朱子亦曰, 若以作用爲性則人胡亂執刀殺人敢道性歟.

주자 또한 말하기를 만약 작용을 성이라 여긴다면, 곧 사람이 거칠고 난잡하게 칼을 잡고 사람을 죽인다면 감히 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且理, 形而上者也, , 形而下者也, 佛氏自以爲高妙無上, 而反以形而下者爲說, 可笑也已.

또한 는 형이상의 것이고 기는 형이하의 것인데, 불씨는 스스로 높고 묘하고 무상하다라고 여기면서, 반대로 형이하의 것을 말하니 가소로울 뿐이다.

 

學者須將吾儒所謂威儀之則, 與佛氏所謂作用是性者, 內以體之於身心, 外以驗之於事物, 則自當有所得矣.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우리 유가의 이른바 위의의 법칙과 불씨의 이른바 작용이 성이다라는 것으로써 안에서는 신심에의 체험으로써 하고 밖으로는 사물에의 증험으로 하면, 저절로 마땅히 얻는 바가 있으리라.

 

 

5. 佛氏心跡之辨

心者, 主乎一身之中 而跡者, 心之發於應事接物之上者也. 故曰 有是心, 必有是跡, 不可判而爲二也.

마음이라는 것은 한 몸 가운데의 주가 되는 것이요, 이라는 석은 마음이 일에 응하고 물에 접하는 위에 발하여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 이 있다.’고 하였으니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蓋四端五典萬事萬物之理, 渾然具於此心之中, 其於事物之來, 不一其變 而此心之理, 隨感而應, 各有攸當而不可亂也.

대개 사단이나 오전이나 만사,만물의 이치는 혼연히 이 마음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는지라, 그 사물이 옴에 있어서 변함이 한결같지 않으나 이 마음의 는 느낌에 따라 응하여 각각 마땅한 바가 있어 어지럽힐 수가 없는 것이다.

 

人見孺者匍匐入井, 便有怵惕惻隱之心, 是其心, 有仁之性, , 其見孺者也, 發於外者, 便惻然, 心與跡, 果有二乎. 曰羞惡, 曰辭讓, 曰是非, 莫不皆然.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어쩌나 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기 마련이니, 이는 그 마음에 인의 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어린아이를 볼 때 밖으로 발하는 것은 바로 측연한 것인데 마음과 이 과연 둘이겠는가? 羞惡辭讓이니 是非니 하는 것도 모두 이와 마찬가지이다.

 

次而及於身之所接, 見父則思孝焉, 見子則思慈焉, 至於事君以忠, 使臣以禮, 交友以信, 是孰使之然耶. 以其心有仁義禮智之性, 故發於外者, 亦如此. 所謂體用一源, 顯微無間者也.

다음으로 내 몸에 접하는 바에 비추어 보자. 아버지를 보면 효도할 것을 생각하고, 아들을 보면 사랑할 것을 생각하고,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으로 하고, 신하를 부림에는 예로써 하고, 벗을 사귐에는 신으로 하는 것, 이런 것은 누가 그렇게 시켜서 하는 것일까? 그 마음에는 인의예지의 성이 있기 때문에 밖으로 발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으니, 이른바 체와 용이 한 근원이요, 현과 미에 사이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彼之學, 取其心, 不取其跡, 乃曰 文殊大聖, 遊諸酒肆, 跡雖非而心則是也. 他如此類者, 甚多. 非心跡之判歟.

그런데 저들의 학은 그 마음을 취하나 그 을 취하지 않고, 표방하여 말하기를, “문수보살이 술집에서 놀았는데, 그 행적은 비록 그르나 그 마음은 옳다.”고 하는가 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유의 것이 매우 많으니, 이는 마음과 행적이 판이한 것이 아니냐?

 

程子曰 佛氏之學, 於敬以直內 則有之矣, 義以方外 則未之有也. 故滯固者, 入於枯槁, 疏通者, 歸於恣肆, 此佛氏之敎, 所以隘也. 然 無義以方外, 其直內者, 要之亦不是也.

정자는 말하기를, “불씨의 학에는 경으로 안을 곧게 함은 있으나, 의로써 밖을 방정케 함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막히어 고루한 자는 말라붙은데로 들어가고, 소통한 자는 방자한 데로 돌아가니, 이것은 불시의 교가 좁은 까닭이다.” 그러나 의로서 밖을 방정케 함이 없으면 그 안을 곧게 한다는 것도 결국은 옳지 않다.

 

王通, 儒者也. 亦曰 心跡判矣. 蓋惑於佛氏之說, 而不知者也. 故 幷論之.

왕통이란 사람은 유학자이면서도 또한 말하기를, “마음과 은 판이한 것이다.”하였으니, 불씨의 설에 미혹된 무지한 자다. 그러므로 여기에 아울러 언급해 둔다.

 

 

6. 佛氏昧於道器之辨

道則理也, 形而上者也. 器則物也, 形而下者也.

란 것은 이니 형이상의 것이요, 란 것은 이니 형이하의 것이다.

 

蓋道之大原 出於天而無物不有 無時不然, 卽身心而有身心之道 近而卽於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 遠而卽於天地萬物 莫不各有其道焉.

대저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와 물에 있지 않음이 없고 때에 그러하지 않음이 없으니, 곧 신심에는 신심의 도가 있어 가까이는 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에서 멀리는 천지만물에 그 도가 있지 않음이 없다.

 

人在天地之間, 不能一日離物而獨立. 是以, 凡吾所以處事接物者, 亦當各盡其道, 而不可或有所差謬也.

사람이 천지의 사이에 있으며 하루도 물에서 떨어져 홀로 서있을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대개 내가 일에 처하여 사물에 접하는 것이 또한 마땅히 각각 그 도를 다하여 혹시라도 어긋남이 있을 수 없다.

 

此吾儒之學, 所以自心而身而人而物, 各盡其性 而無不通也.

이는 우리 유자의 학문으로 마음으로부터 자신에게 타인에게 사물에 각각 그 을 다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다.

 

蓋道雖不雜於器, 亦不離於器者也.彼佛氏之道, 雖無所得 以其用心積力之久, 髣髴若有見處, , 如管窺天, 一向直上去, 不能四通八達, 其所見必陷於一偏.

대개 도라는 것은 기에 섞이지도 않고 또한 기에서 떠나지도 않는다. 저 불씨의 도는 비록 얻을 바는 없으나, 마음을 쓰고 힘을 쌓은 것이 오래되어 방불하게 본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것과 같으니 한결같이 위로만 향하여 올라갈 뿐, 능히 사통팔달하지 못하니 그 본 것은 반드시 한 쪽의 치우친데로 빠진다.

 

見其道不雜於器者, 則以道與器, 岐而二之, 乃曰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가 기에 섞이지 않는 것을 보고 도와 기를 나누어 둘로 하여 이에 말하기를 대개 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니, 만일 모든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案 此一段, 出般若經, 言 目前無法, 觸目皆如, 但知如是, 卽見如來 - [: 이 일단은 반야경에서 나왔으니 눈앞에 부딪히는 것은 모두 모두가 그러하다. 오직 이와 같은 것을 안다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必欲擺脫群有, 落於空寂, 見其道不離於器者, 則以器爲道, 乃曰 善惡皆心, 萬法唯識. 隨順一切, 任用無爲, 猖狂放恣, 無所不爲.

반드시 모든 존재를 파탈하려고 하다가, 공적에 떨어지는가 하면, 그 도가 기에서 떠나지 않음을 보고 기를 가지고 라하여 이에 이르기를 선과 악이 모두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의식이다. 그러므로 일체에 수순하되, 하는 일이 다 자연 그대로이기도 하고, 그와 반대로 미쳐 날뛰어 하고 싶은 대로하여 온갖 짓을 못할 것이 없기도 하다.” 고 한다.

 

案 善心將生, 隨順一切, 任用無爲. 惡心將生, 猖狂放恣, 無所不爲. 心之所有, 識乃爲之, 惟善惟惡, 非心無識, 非識無心. 心識相對, 善惡生滅. - [상고하건대 선심이 생겨나려 하니 일체에 수순하되 하는 일이 다 자연 그대로에 맞고, 악한 마음이 생겨나려 하니 미쳐 날뛰고 하고 싶은 대로하여 못할 짓이 없으니, 마음이 소유한 것 의식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선이나 악이나 마음이 아니면 의식이 없고, 의식이 아니면 마음도 없나니, 마음과 의식이 상대되어 선과 악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此 程子所謂 滯固者, 入於枯槁, 疏通者, 歸於恣肆者也. 然 其所謂道者, 指心而言, 乃反落於形而下者之器而不自知也. 惜哉.

이는 정자가 이른바 막히어 고루한 자는 고고한 데로 들어가고 소통한 자는 방자한 데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른바 도라는 것은 마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지만, 이는 도리어 형이하인 기에 떨어지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니 애석하다.

 

 

7. 佛氏毁棄人倫之辨

明道先生 曰, “道之外, 無物, 物之外, 無道, 是天地之間, 無適而非道也.

명도 선생이 이르기를 도 밖에 물이 없고 물 밖에 도가 없다. 이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어디를 가나 도가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卽父子, 而父子在所親, 卽君臣 而君臣在所嚴, 以至 爲夫婦, 爲長幼, 爲朋友, 無所爲而非道, 所以不可須臾離也.

부자에 이르러서는 부자의 친한 바에 있고, 군신에 이르러서는 군신의 엄한바에 있고, 부부와 장유와 붕우에 이르러서도 각각 도가 되지 아니하는 바가 없으니 이는 그것이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然則, 毁人倫去四大, 其分於道, 遠矣. 又曰 言爲無不周偏 而實則外於倫理, 先生之辨, 盡矣.”

그런즉 그들이 인륜을 허물어뜨리고 사대를 버린 그것이 그 도에서 분리된 점이 멀다 하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말과 행위가 주편하지 않음이 없건만 실은 윤리에 벗어나 있다.”하였으니, 선생의 말이 극진하도다.

 

, 四大 受, , , - [: 사대는 느낌, 생각, 지어 감, 의식이다.]

 

 

8. 佛氏慈悲之辨

天地, 以生物爲心, 而人得天地生物之心以生. 故 人皆有不忍人之心, 此卽所謂仁也.

하늘과 땅이 물을 생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았는데, 사람은 이 천지가 물을 생하는 마음을 얻어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두가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이다.

 

佛雖夷狄, 亦人之類耳, 安得獨無此心哉. 吾儒所謂 惻隱, 佛氏所謂慈悲, 皆仁之用也.

불씨는 비록 오랑캐이지만 역시 사람의 종류임에는 틀림없으니, 어찌 홀로 이러한 마음이 없으리오? 우리 유가의 이른바 측은은 불씨의 이른바 자비이니 모두가 인의 쓰임이다.

 

其立言雖同, 而其所施之方 則大相遠矣. 蓋親, 與我同氣者也, , 與我同類者也, , 與我同生者也.

그 말을 내세움은 비록 같으나 그 시행하는 방법은 서로 크게 틀리다. 대게 육친은 나와 더불어 가 같은 것이요, 사람은 나와 더불어 가 같은 것이요, 물은 나와 더불어 이 같은 것이다.

 

故 仁心之所施, 自親 而人而物, 如水之流 盈於第一坎以後, 達於第二第三之坎. 其本, , ,其及者, .

그러므로 어진 마음의 베푸는 바는 육친에서부터 사람에, 물에게까지 미쳐서 흐르는 물이 첫째 웅덩이에 가득찬 후에 둘째와 셋째의 웅덩이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그 근본이 깊으면 그 미치는 바도 먼 것이다.

 

擧天下之物, 無一不在吾仁愛之中. 故曰 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 此儒者之道, 所以爲一爲實爲連續也.

온 천하의 물이 모두 나의 仁愛 속에 있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친한 이를 친하게 한 뒤에 백성에게 어질게 하고 백성에게 어질게 한 후에 만물을 사랑한다.”고 하나니 이것은 유자의 도는 하나이고 실이며 연속이 된다는 까닭이다.

 

佛氏則不然, 其於物也, 毒如豺虎, 微如蚊虻, 尙欲以其身, 餧之而不辭,

불씨는 그렇지 않다. 그는 물에 대하여서는 표독한 승냥이,호랑이 같은 것에나 미세한 모기 같은 것에도 자기 몸을 뜯어 먹혀 가면서 아깝게 여기려 하지 않는가 하면

 

其於人也, 越人, 有飢者, 思欲推食而食之, 秦人, 有寒者, 思欲推衣而衣之, 所謂布施者也.

사람에 대하여서는 월나라 사람이냐 진나라 사람이냐를 가리지 않고, 배고픈 자에게는 밥을 먹이려 들고 추위에 떠는 자에게는 옷을 밀어 주어 입히려 드니, 이른바 보시(布施)라는 것이다.

 

若夫至親如父子, 至敬如君臣, 必欲絶而去之, 果何意歟. 且人之所以自重愼者, 以有父母妻子爲之顧籍也.

그런데 부자와 같은 지친에 대하여서나 군신과 같은 지극히 공경하여야 할 데에 대하여서는 반드시 끊어 버리려 드니 이는 무슨 뜻인가? 그뿐인가, 사람이 스스로 신중을 기하는 것은 부모 처자가 있어서 그것에 배려하기 때문이거늘,

 

佛氏 以人倫, 爲假合, 子不父其父, 臣不君其君, 恩義衰薄, 視至親, 如路人, 視至敬, 如弁髦, 其本源, 先失.

불씨는 인륜을 가합이라 하여, 아들은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신하는 그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아서, 은혜와 의리가 쇠박한지라 자기 지친 보기를 길가는 사람같이 보고, 공경해야 할 어른 대하기를 어린아이 대하듯이 하여 그 근본과 원류를 먼저 잃어 버렸다.

 

, 其及於人物者, 如木之無根, 水之無源, 易至枯竭, 卒無利人濟物之效. 而授劒斬蛇, 略無愛惜, 地獄之說, 極其慘酷, 反爲小恩之人.

그러므로 사람과 만물에 미치는 것이 뿌리 없는 나무나 원류 없는 물이 쉽게 고갈되는 것 같아, 끝내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만물을 구제하는 효과가 없다. 그런데 칼을 빼어 뱅을 죽이는 데는 조금도 애석함이 없는가 하면, 지옥의 설은 참혹하기 그지없으니, 도리어 은혜라고는 적은 사람이 된다.

 

向之所謂慈悲者, 果安在哉. 然而此心之天, 終有不可得而昧者. 故 雖昏蔽之極, 一見父母則孝愛之心, 油然而生, 何不亦反而求之,

앞서 이른바 자비란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 마음의 천리는 끝내 어둡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혼폐한 사람일지라도 한번 부모를 보면 효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유연히 생겨나는 것인데, 어찌 돌이켜 구하지 않고,

而乃曰, 多生習氣未盡除. 故 愛根, 尙在. 執迷不悟 莫此爲甚, 佛氏之敎, 所以無義無理 而名敎所不容者, 此也.

이에 말하기를 전생의 많은 습기를 다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애착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다.”라고 하니 미혹에 집착되어 깨닫지 못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불씨의 교는 의가 없고 리가 없는 까닭으로 명교[儒敎]에서 용납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런 까닭이다.

 

 

9. 佛氏眞假之辨

佛氏以心性爲眞常, 以天地萬物爲假合. 其言曰 一切衆生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猶如空華及第二月. 又曰 空生大覺中如海一漚發, 有漏微塵國皆依空所立.

불씨는 마음과 성을 진상이라 하고 천지 만물을 가합된 것이라 하여 그 말에 이르기를, “모든 중생과 가지가지의 환화가 모두 여래의 원각묘심에서 나왔으니, 마치 허공에 나타나는 꽃이나 물에 비친 달(희미한 달)과 같다.”하고, 또 말하기를 공이 대각 가운데서 나오는 것은 바다에서 하나의 물거품이 발하는 것과 같으니 유루와 미진국이 모두다 공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하였다.

 

佛氏之言 其害多端, 然滅絶倫理略無忌憚者, 此其病根也. 不得不砭而藥之也. 蓋未有天地萬物之前, 畢竟先有太極而天地萬物之理 已渾然具於其中. 故曰 太極生兩儀 兩儀生四象, 千變萬化 皆從此出, 如水之有源 萬派有注 如木之有根 枝葉暢茂. 此非人智力之所得而爲也. 亦非人智力之所得而遏也.

불씨의 말에 그 해가 많으나 그러나 인륜을 끊어 버리고도 조금도 기탄함이 없는 것이 이병의 근원이니 부득이 고쳐 주지 않을 수 없다. 대게 천지 만물이 있기 전에 필경 먼저 태극이 있어 천지 만물의 이치가 이미 혼연하여 그 가운데에 갖추어졌으니 고로 말하기를 태극이 양의를 생하고 양의가 사상을 생한다.”고 하였으니 천만 가지의 변화가 다 이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물에 근원이 있어 만 갈래로 흐르는 것과 같고 마치 나무에 뿌리가 있어서 가지와 잎이 무성한 것과 같으니 이것은 사람이 지혜와 힘이 얻은 바로도 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사람의 지혜와 힘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然此固有難與初學言者,以其衆人所易見者而言之, 自佛氏歿至今數千餘年, 天地昆侖於上者, 若是其確然也. 地之磅礴於下者, 若是其隤然也. 人物之生於其間者 若是其燦然也. 日月寒署之往來 若是其秩然也.

그러나 이것은 진실로 초학자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어려우니 그 모든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것부터 말하리라. 불씨가 죽은지 이미 수천 년이 지났다. 하늘이 땅위를 높이 덮는 것이 이와 같이 그 확연하고, 땅이 하늘 밑에 판판이 섞여 뻗는 것이 이와같이 그 뚜렷하며, 사람과 만물이 그사이에 태어나는 것이 이와같이 그 찬연하며, 해와 달과 추위와 더위가 가고 옴이 이와같이 그 정연하다.

 

是以天體至大 而其周圍運轉之度, 日月星辰逆順疾徐之行, 雖當風雨晦明之夕而不能外於八尺之璣, 數寸之衡, 歲年之積, 至於百千萬億之多 而二十四氣之平分與夫朔虛氣盈餘分之積, 至於毫釐絲忽之微而亦不能外於乘除之兩策.

이로써 천체는 지극히 크나 그 주위의 운전하는 법칙이나, 일월성신의 거꾸로 가고 바로 가고 빨리 가고 천천히 가는 운행은 비록 비바람이 불고 어두운 저녁을 당하여도 능히 8척의 선기와 몇 촌의 옥형에 벗어날 수 없고 해의 쌓임도 수 억년에 이르러도 24절기의 고루 나누어짐과 朔虛, 氣盈하는 여분의 쌓임이 아주 털끝 같은 미세함에 이르러서도 또한 능히 곱함과 나눔의 두 방법을 벗어 날 수 없는 것이다.

 

孟子所謂天之高也 星辰之遠也, 苟求其故 千歲之日至可坐而致者 此也. 是亦孰使之然歟. 必有實理爲之主張也. 且假者可暫於一時 而不可久於千萬世, 幻者,可欺於一人 而不可信於千萬人, 而以天地之常久 萬物之常生, 謂之假且幻, 抑何說歟. 豈佛氏無窮理之學, 求其說而不得歟, 抑其心隘天地之大, 萬物之衆 不得容於其中歟. 豈樂夫持守之約 而厭夫窮理之煩 酬萬變之勞歟.

맹자가 이르기를 하늘이 높고 성신이 멀더라도 진실로 그 연고를 구한다면 천년 후의 동지라도 가히 앉아서 알 수 있다.” 한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또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것인가? 반드시 실한 이치가 있어 그렇게 되도록 주장하는 것이리라. 라는 것은 한 때에 잠시 가하고 천만년 동안 오래도록 갈 수는 없는 것이며, 이라는 것은 한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천만인을 믿게 할 수는 없는 것인데, 천지의 항구함이나 만물의 상생함을 라하고 이라 하니 억측컨데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불씨는 궁리의 학이 없어 그 설을 구하여도 얻지 못함인가? 아니면 그 마음이 좁아 천지의 큼이나 만물의 많음을 그 가운데에 포용하지 못함인가? 아니면 지수의 요약만을 좋아하고 궁리의 번거로움이나 만변에 수응한다는 수고로움을 싫어함인가?

 

張子曰 明不能盡誣. 天地日月以爲幻妄 則佛氏受病之處, 必有所自矣. 要之其所見蔽, 故其所言詖如此. 嗚呼惜哉. 予豈嘵嘵而多言者歟. 予所言之而不已者, 正惟彼心之迷昧爲可憐 而吾道之衰廢爲可憂而已耳.

장자가 이르기를 밝은 것은 다 속일 수 없다. 천지 일월을 환망이라 하니 불씨가 병을 받은 것은 반드시 유래가 있어서이다. 요컨대 그 보는 바가 가려져 있는 고로 그 말하는 바의 치우침이 이와 같은 것이다. 아아 애석하도다. 내 어찌 말 많이 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마는 내가 말을 그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저들이 마음이 미혹되고 어두운 것이 가엾어서 우리의 도가 쇠하고 폐할까 가히 근심스럽기 때문이다.

 

 

10. 佛氏地獄之辨

先儒, 辨佛氏地獄之說 曰, “世俗信浮屠誑誘 凡有喪事無不供佛飯僧云; ‘爲死者滅罪資福, 使生天堂, 受諸快樂, 不爲者, 必入地獄, 剉燒舂磨, 受諸苦楚,’ 殊不知死者形旣朽滅, 神亦飄散, 雖有剉燒舂磨, 且無所施, 又況佛法, 未入中國之前, 人固有死而復生者, 何故都無一人誤入地獄, 見所謂十王者歟, 此其無有而未足信也 明矣.”

선유가 불씨의 지옥설에 대하여 변석하기를, “세속에서 중들을 속이고 꾀이는 말을 믿고서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부처에게 공양하고, 중을 대접한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죽은 자의 죄를 없애고 복을 받아 천당에 태어나 쾌락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져 몸이 짤리고, 불태워지고, 찧이고, 갈리는 등의 갖은 고초를 받게 된다.’고 하는데, 이는 죽은 자는 육신이 썩어 없어지고 정신도 흩어져 버려서, 짜르고 불태우고 찧고 갈려고 하여도 그렇게 할 곳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모른 소치이다. 그리고 불법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도 죽었다가 다시 회생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째서 한 사람 지옥에 들어가 그들이 말하는 지옥의 명부 시왕을 본자가 없단 말인가? 지옥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며, 믿을 수 없는 말임이 분명하다.” 하였다.

 

或曰, “釋氏地獄之說, 皆是爲下根之人, 設此怖令爲善耳.” 程子曰, “至誠貫天地, 人尙有不化, 豈有立僞敎而人可化乎.” 昔有僧, 問予曰, “若無地獄, 人何畏而不爲惡乎.” 予曰, “君子之好善惡惡, 如好好色, 如惡惡臭, 皆由中而出, 無所爲而爲之, 一有惡名至 則其心愧恥, 若撻于市, 豈待地獄之說然後, 不爲惡乎.” 其僧黙然, 於此幷書之, 俾世之惑於其說者 知所辨焉.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석씨의 지옥 설은 모두가 근기가 낮은 사람들을 위해 그런 겁나는 지옥 설을 만들어 착한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이에 대해 정자는, “천지간에 가득찰 정도의 지성으로도 오히려 다 감화시키지 못하는 것인데, 어떻게 거짓말로 하는 가르침에 사람이 감화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옛날에 어떤 중이 나에게 묻기를, “만일 지옥이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무엇이 무서워 악한 짓을 안 하겠느냐?” 하기에, 내가, “군자는 마치 예쁜 여자를 좋아하듯이 선을 좋아하고, 고약한 냄새를 싫어하듯이 악을 싫어하므로, 모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한 번이라도 악하다는 말을 들으면 마치 사람 많은 시장에서 볼기를 맞는 것처럼 부끄러워한다. 어찌 지옥설 때문에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하였더니 그 중은 아무말도 못하였다. 여기에 이 사실을 함께 써서, 그들의 말에 현혹되는 세속의 사람들이 분별할 줄 알게 하고자 한다.

 

 

11. 佛氏禍福之辨

天道, 福善而禍淫, 人道, 賞善而罰惡, 蓋由人, 操心有邪正, 行己有是非 而禍福各以其類應之.

하늘의 도는 선한이에게 복을 주고 악한 이에게 화를 주며, 사람의 도는 선한 이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 벌을 주나니, 대개 사람에게는 마음가짐에 사특함과 바름이 있고, 행동함에 옳고 그름이 있어서, 화와 복이 각각 그 유에 따라 응하는 것이다.

 

詩曰 求福不回. 夫子曰 獲罪於天, 無所禱也. 蓋君子之於禍福, 正吾心而已, 修吾己而已, 福不必求而自至, 禍不必避而自遠.

그러므로 시경에 복을 구하되 되게는 하지 않는다.”하였으며 공자는, “하늘에 죄를 받으면 빌 곳이 없다.”하였으니 대게 군자는 화복에 대하여 자기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기 몸을 닦을 뿐이지만, 복은 구태여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고, 화는 구태여 피하지 않아도 저절로 멀어지는 것이다.

 

故曰 君子有終身之憂, 無一朝之患, 禍苟有自外而至者, 順而受之而已. 如寒署之過於前, 而吾無所與也.

그러므로 말하기를, “군자는 종신토록 할 근심은 있어도 하루 아침의 근심은 없다.”하나니, 밖으로부터 화가 닥쳐오더라도 순순히 그것을 받을 뿐이지, 추위나 더위가 앞을 지나가는 것처럼 하여 나 자신은 그것에 관여하지 아니한다.

 

彼佛氏則不論人之邪正是非, 乃曰 歸吾佛者, 禍可免而福可得. 是雖犯十惡大憝者, 歸佛則免之, 雖有道之士, 不歸佛則不免也. 假使其說不虛, 皆出於私心而非公道也, 在所懲之也.

그러나 저 불씨는 사람의 邪正이나 시비는 논하지 않고 이에 말하기를, “우리 부처에게로 오는 자는 화를 면하고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비록 열 가지의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면 화를 면하게 되고, 아무리 도가 높은 선비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화를 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령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 할지라도 모두 사심에서 나온 것이요, 공도가 아니니 징계해야 할 것이다.

 

況自佛說興, 至今數千餘秊, 其間事佛甚篤, 如梁武唐憲者, 皆不得免焉, 韓退之所謂, 事佛漸謹, 秊代尤促者, 此其說, 不亦深切著明矣乎.

하물며 불설이 일어난 후 오늘에 이르는 수천 년 동안에 부처 섬기기를 매우 독실하게 한 양 무제나 당 헌종과 같은 이도 모두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한 퇴지가 이른바, “부처 섬기기를 더욱 근실하게 할수록 연대는 더욱 단축되었다.”한 그 설이 또한 깊고도 간절하고 뚜렷하지 않은가?

 

 

12. 佛氏乞食之辨

食之於人, 大矣哉. 不可一日而無食, 亦不可一日而苟食, 無食則害性名, 苟食則害義理.

먹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크다. 하루도 먹지 않을 수 없고 또한 하루라도 구차하게 먹을 수 없으니 먹지 않으면 성명을 해치고 구차하게 먹으면 의리를 해치기 때문이다.

 

洪範八政, 食貨爲先, 重民五敎, 惟食居首. 子貢問政則夫子以足食告之. 此古之聖人, 知生民之道, 不可一日而無食, 故皆汲汲於斯, 敎以稼穡, 制以貢賦軍, 國有須祭祀, 賓客有給, 鰥寡老幼, 有養而無匱乏飢餓之歎, 聖人之慮民, 遠矣.

홍범팔정에서는 음식과 재화가 먼저고, 중민오교에서는 음식이 선두에 있으며, 자공이 정치를 물은 즉 부자께서는 넉넉히 먹는 것이다라고 이르니, 이는 예 성인이 백성을 살리는 길은 하루도 먹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알므로 모두 이것에 급급하여 곡식을 심고 거두는 것을 가르치고 조세와 군으로 통제했으며, 나라에 반드시 제사가 있고, 손님에겐 접대함이 있고, 홀아비와 과부, 노인과 어린이에게는 봉양과 양육함이 있어서 모자람이나 굶주림의 한탄이 없었다. 성인의 백성을 우려함은 멀기도 하다.

 

上而天子公卿大夫治民而食, 下而農工商賈, 勤力而食, 中而爲士者, 入孝出悌, 守先王之道 以待後之學者而食. 此古之聖人, 知其不可一日而苟食, 故自上達下, 各有其職, 以受天養, 其所以防民者, 至矣. 不居此列者, 姦民也, 王法所必誅而不赦者也.

위로 천자와 공경대부는 백성을 다스려서 밑으로 농공상고는 근면히 노력해서 중간의 선비된 자는 들어가서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우애로 선왕의 도를 지키고 후학을 기다려서 먹으니 이것이 옛 성인이 그 하루도 구차히 먹지 않았으므로 위로부터 밑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직책이 있었으며 천부의 자양을 받아 그 백성을 방비한 까닭이 지극했다. 이 대열에 끼이지 않은 자는 간사한 백성이다. 왕법의 반드시 죽여서 용서하지 않을 자인 것이다.

 

金剛經曰 爾時, 世尊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城, 乞食於其城中, 夫釋迦牟尼者, 以男女居室爲不義, 出人倫之外, 去稼穡之事, 絶生生之本, 欲以其道, 思以易天下, 信如其道, 是天下無人也, 果有可乞之人乎, 是天下無食也, 果有可乞之食乎.

금강경에 이르기를 이때 세존은 먹을 때가 되어 옷을 입고 식기를 가지고 사위성에 들어가 그 성중에서 구걸하여 먹었다. 석가모니는 남녀가 함께 사는 것을 의롭지 못하다고 하고 인륜이 밖으로 벗어났으며 농사짓는 일을 버려 생을 꾸려 나가는 근본을 끊고서 그 도로 천하를 바꿀생각을 했는데 만약 그 도를 믿는다면 천하에 사람은 없을 것이니 결과적으로 얻어먹을 사람이 있겠는가? 또 천하에 먹을 것이 없을 것이니 과연 얻어먹을 밥이 있겠는가?

 

釋迦牟尼者, 西域王之子也. 以父之位爲不義而不居 非治民者也, 以男耕女織爲不義而去之, 何勤力之有. 無父子君臣夫婦 則又非守先王之道者也. 此人 雖一日食一粒, 皆苟食也. 信如其道, 誠不食如蚯蚓 然後可也, 何爲乞而食乎. 且食在自力 則爲不義而在乞 則爲義乎. 佛氏之言, 無義無理, 開卷便見, 故於此論而辨之.

석가모니는 서역왕의 아들이다.아버지의 지위를 의롭지 못하다 하고 떠났으니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아니다. 남자는 밭갈고 여자는 베짜는 일을 의롭지 않다고 버렸으니 근면하게 노력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부자 군신 부부가 없으니 또 선왕의 도를 지킬 것이 없다. 이런 사람은 비록 하루 한톨을 먹어도 모두 구차하게 먹는 것이다. 그 도를 믿는 다면 진실로 먹지 않음이 지렁이 같은 연후에나 가당할 것이니 어떻게 구걸을 해서 먹는단 말인가?또 먹는 것이 자력으로 하면 의롭지 못한 것이고 구걸하면 의롭단 말인가? 고로 이에 논해서 판단한다.

 

佛氏其初, 不過乞食而食之耳. 君子尙且以義責之無小容焉. 今也, 華堂重屋, 豊衣厚食, 安坐而享之, 如王者之奉, 廣置田園, 藏獲文簿, 雲委過於公卷, 奔走供給, 峻於公務, 其道 所謂斷煩惱出世間淸淨寡慾者, 顧安在哉. 不惟坐費衣食而已, 假托好事 種種供養, 饌食狼藉, 壞裂綵帛, 莊嚴幢幡, 蓋平民十家之産, 一朝而費之. , 廢棄義理, 旣爲人倫之蟊賊而暴殄天物, 實乃天地之巨蠹也.

불씨는 처음에 구걸해서 먹었을 뿐이었다. 군자는 항상 의로써 책할 뿐, 조금의 용납도 없었는데 오늘날에는 화려하고 수많은 가옥 풍부한 옷과 음식을 앉아서 누리니 마치 왕 받드는 것 같다. 넓게 놓인 전답과 정원 저장한 것과 걷어들인 것의 문서가 구름처럼 쌓여서 공문서보다 많으며, 분주한 공급이 공무보다 빠르다. 그 도의 이른바 번뇌를 끊고 세간을 떠나 깨끗하고 욕심 없이 산다는 것이 돌아 보건데 어디에 있는가? 뿐만 아니라 앉아서 먹고 입을 뿐이며 좋은 일을 빗대서 일일이 공양하여 반찬과 음식이 이리저리 널려 있으며, 수놓은 비단을 찢어 발겨서 깃발을 장엄하게 하니 모두 평민의 열 집의 산물을 하루아침에 낭비하는 것이다. 슬프다 ! 의리를 폐기함이 이미 인륜을 좀먹는 벌레와 역적이며 천물을 마구써 탕진하니 실로 천지의 큰 좀벌레이다.

 

張子曰 上無禮以防其僞, 下無學以稽其蔽, 非獨立不懼, 精一自信, 有大過人之才, 何以正立其間, 與之較是非計得失哉. , 先正之所以深致歎息者, 豈偶然哉. 豈偶然哉.

장자가 말하기를 위로는 예의 없이 그 위선을 가리고, 밑에서는 배움이 없어 그 폐단을 조롱하니,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에 정순 해서 스스로 믿음이 있으며 크게 남들을 능가하는 재능이 없다면, 어떻게 그 간에 바로 설 것이며 더불어 시비를 비교하고 득실을 계산할 것인가? 슬프다 ! 선왕의 깊이 탄식함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어찌 우연이겠는가?

 

 

13. 佛氏禪敎之辨

佛氏之說, 其初不過論因緣果報, 以誑誘愚民耳.

불씨의 설이 그 처음에는 인연과 과보를 논하는데 불과하여 우민을 속이어 꾀어낼 뿐이었다.

 

雖以虛無爲宗, 廢棄人事, 尙有爲善得福, 爲惡得禍之說, 使人有所懲勸持身戒律, 不至於放肆. 故 人倫雖毁, 義理, 未盡喪了.

비록 허무를 종으로 삼아 인사를 폐기하였으나, 오히려 선을 하면 복을 얻고 악을 하면 화를 얻는다는 설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징계하고 권면하며 몸가짐을 바로하고 규율을 경계하는 바가 있어 방자함에 이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륜은 비록 어그러졌으나, 의리가 다 상하지는 않았다.

 

至達摩入中國, 自知其說淺陋, 不足以惑高明之士.

달마가 중국에 들어옴에 이르러 스스로 그 설이 낮고 비루 하여 족히 높고 밝은 선비를 미혹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於是, 不立文字, 言語道斷, 直指人心, 見性成佛.”

이에 말하기를 불립문자, 언어도단,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고 하였다.

 

其說, 一出 捷徑, 便開, 其徒, 轉相論述.

그 설이 한번 나오니 지름길이 문득 열리고 그 무리가 전하여 서로 논술하였다.

 

, 善亦是心, 不可將心修心, 惡亦是心, 不可將心斷心.” 善惡懲勸之道 絶矣.

혹은 말하기를 선 또한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닦는 것은 불가하며, 악 또한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절단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선악으로 징계하고 권면하는 도(권선징악의 도)가 끊어졌다.

 

, 及淫怒癡, 皆是梵行”, 戒律持身之道失矣, 自以爲不落窩臼, 解縛去械, 傲然出於禮法之外, 放肆自恣, 汲汲如狂, 無復人理, 所謂義理者, 至此都喪也.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음행, 성냄, 어리석음이 모두 범행이다라고 하여서 규율을 경계하고 몸가짐을 바로하는 도리를 잃었으나 스스로는 굴속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여기고는 속박을 풀고 형구를 제거하고 오만히 예법의 바깥에 나와 제멋대로 스스로 자만하며 급급하기가 미친 것 같아 다시 사람의 도리가 없으니 이른바 의리라는 것이 이에 이르러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

 

朱文公, 憂之, 西方論緣業, 卑卑, 喩群愚, 流傳世代久, 梯接凌空虛. 顧盻指心性, 名言超有無.

주문공이 그것을 근심하여 말하기를 서방(불가)에서 연업을 논하니 낮고 낮으나 뭇 어리석은 이들을 깨우쳐, 흘러 전한 세대가 오래되니 사다리가 이어저 허공을 지났다. 돌아보며 심성을 가리키고 이름하여 유무를 초월했다 말한다.

 

, 佛說, 大略有三, 其初, 齋戒, , 有義學, 有禪學. 緣之名, 有十二, 曰 觸,,,,,,,,,,,. 業之名, 有三, 曰 身,,. 持心性謂卽心是佛見性成佛이요 超有無謂言有則云色卽是空,言無則空卽是色이라. - [상고하건대 불설이 대략 세가지가 있으니 그 처음은 재계, 후에는 의학이 있고, 선학이 있다. 의 이름은 열 두 가지가 있으니 말하기를 ,,,,,,,,,,,이다. 의 이름은 셋이 있으니 말하기를 ,,이다. 持心性卽心是佛見性成佛을 일컫는 것이요, 超有無는 유를 말하면 즉 색즉시공이요 무를 말하면 공즉시색을 일컫는 것이다.]

 

捷徑, 一以開, 靡然世爭趨, 號空, 不踐實, 躓彼榛棘塗, 誰哉繼三聖(按三聖謂 禹, 周公, 孔子.), 爲我焚其書.”

지름길이 한번 열리니 바람에 쓸리듯 세상이 다투어 달려가면서 공허를 부르짖으며 실재를 밟지 않고 저 잡목 숲 가시덤불 길을 밟고 있으니, 누구인가 ! 세 성인(상고하건대 세 성인은 周公孔子이다.)을 이어서 나를 위해 그 책을 불사를 자가.”

 

甚哉! 其憂之之深也. , 亦爲之, 憮然三歎.

심하도다 ! 그것을 근심함의 깊음이여. 나도 또한 그를 위하여 무연히 세 번 탄식하노라.

 

 

14. 儒釋同異之辨

先儒謂 儒釋之道, 句句同而事事異.

선유는 이르기를 유가와 불가의 도는 구절마다 같으나 일마다 다르다.”했다.

 

今且, 因是而推廣之, 此曰虛, 彼亦曰虛, 此曰寂, 彼亦曰寂. 然此之虛, 虛而有, 彼之虛, 虛而無. 此之寂, 寂而感, 彼之寂, 寂而滅.

이제 또 이로 인해서 널리 미루어 보면 우리(儒家)가 허라 하고 저들(佛家)도 허라하고, 우리가 적이라고 하고 저들도 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허는 허하지만 있는 것이요, 저들의 허는 허하여 없는 것이며, 우리의 적은 적하지만 느낌이 있는 것이고 저들의 적은 적하여 멸하는 것이다.

 

此曰知行, 彼曰悟修, 此之知, 知萬物之理具於吾心也, 彼之悟, 悟此心本空無一物也.

우리는 지와 행을 말하고 저들은 오와 수를 말한다. 우리의 지는 만물의 이치가 나의 마음에 구비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요, 저들의 오는 이 마음이 본래 공해서 일물도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此之行, 循萬物之理而行之, 無所違失也. 彼之修, 絶去萬物而不爲吾心之累也.

우리의 행은 만물의 이치를 좇아서 행하여 어긋나거나 잃음이 없는 것이요, 저들의 수는 만물을 끊어 버려서 내 마음에 연루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此曰心具衆理, 彼曰心生萬法, 所謂具衆理者, 心中原有此理, 方其靜也. 至寂而此理之體具焉, 及其動也, 感通而此理之用行焉. 其曰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是也.

우리는 모든 이치가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 하고 저들은 마음이 모든 법을 낳는 다고 하니 이른바 모든 이치를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마음속에 원래 이 리가 있어 바야흐로 그것()이 정할 때에는 지극히 고요하며 이 이치의 본체가 갖추어 지고 동하게 되면 느껴 통하여 이치의 작용을 행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해도 감지하여 드디어 천하의 연고에 통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所謂生萬法者, 心中本無此法, 對外境而後, 法生焉. 方其靜也, 此心無有所住, 及其動也, 隨所遇之境而生, 其曰 應無所住而生其心.

이른바 만법을 낳는다는 것은 본래 마음속에 이 법이 없는데 외경(外界)를 대한 후에 법이 생긴다. 바야흐로 법이 할 때에는 이 마음이 머물러 있는 곳이 없고 하면 만나는 바의 경계에 따라 생긴다는 것이니 그가 말하되, “머무르는 바가 없음에 응하여 그 마음이 생긴다.” 했다.

 

按 此一段 出般若經 言應無所住者 了無內外 中虛無物 而不以善惡是非介於胸中也. 而生其心者 以無住之心 應之於外而不爲物累也. 謝氏 解論語 無適無莫 引此語. - [이 일단은 반야경에서 나온 것으로 머무르는 바가 없음에 응하여라는 것은 내,외가 없어 가운데가 허하여 물이 없고 선악과 시비를 가슴속에 두지 않는 것이며, 그 마음이 생긴 다는 것은 無住之心으로 와 응하여도 물에 연루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사씨가 논어의 無適無莫을 해석하면서 이 말을 인용했다.]

 

又曰 心生則一切法生, 心滅則一切法滅, <按出起信論> 是也.

또 말하되 마음이 생하면 일체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일체의 법도 멸한다(기신론에서 나왔음)는 것이 이것이다.

 

此以理爲固有, 彼以法爲緣起, 何其語之同 而事之異 如是耶.

우리는 리가 진실로 있다 하는데 저들은 법이 인연따라 일어난다 하니 어찌 그 말은 같으나 내용은 이같이 다른가?

 

此則曰酬萬變, 彼則曰隨順一切, 其言似乎同矣. 然 所謂酬萬變者, 其於事物之來, 此心應之, 各因其當然之則 制而處之, 使之不失其宜也.

우리는 만변을 수작한다 하고 저들은 일체에 따라 수순한다하니 그 말이 같은 것 같으나 이른바 萬變이란 것은 어떤 사물이 올 때 이 마음이 그에 응하여 각각 그 당연의 법칙에 따라 制裁하고 알맞게 처하여 그로 하여금 그 마땅함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如有子於此, 使之必爲孝而不爲賊, 有臣於此使之必爲忠而不爲亂, 至於物, 牛則使之耕而不爲牴觸, 馬則使之載而不爲踶齕, 虎狼則使之設檻置阱而不至於齩人. 蓋亦各因其所固有之理而處之也.

만일 여기에 어떤 아들된 사람이 잇다 했을 때 그로 하여금 반드시 효도를 하여 효자가 되게 하고 불효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며 여기에 신하가 있을 때 그로 하여금 충신이 되고 난신이 되지 않게하며 물에 이르러서도 소는 그것으로 하여금 밭을 갈되 사람을 떠받지 못하게 하며 말은 그것으로 하여금 짐을 싣되 차거나 물지 못하게 하며 호랑이는 그것으로 하여금 우리를 설치하고 함정을 놓아서 사람을 물지 못하게 하나니 대체적으로 또한 각각의 진실로 가지고 있는 이치에 따라서 그것을 처하게 하는 것이다.

 

若釋氏所謂隨順一切者, 凡爲人之子, 孝者自孝, 賊者自賊, 爲人之臣, 忠者自忠, 亂者自亂, 牛馬之耕且載者, 自耕自載, 牴觸踶齕, 自牴觸踶齕, 聽其所自爲而已, 吾無容心於其間.

석씨의 이른바 隨順一切라는 것은 남의 아들이 된 사람의 경우 효자되는 사람은 스스로 효자되고, 불효자 되는 사람은 스스로 불효자 되며, 남의 신하된 사람의 경우 충성하는 자는 스스로 충신이 되고 어지럽히는 자는 스스로 난신이 되며 우마가 밭갈고 또한 짐을 싣고 하는 것이 스스로 갈고 실으며 떠받고 차고 무는 것도 스스로 떠받고 차고 물고 하여 스스로 하는 데로 들어줄 뿐이요, 내가 그사이에 마음을 씀이 없다 함과 같은 것이다.

 

佛氏之學, 如此, 自以爲使物而不爲所使, 若付一錢 則便沒奈何. 他此其事非異乎.

불씨의 학이 이같은지라 (저들)스스로가 물을 부리기는 하되 물에게 부림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에 돈 한푼을 주어도 곧 그것을 어찌할 줄을 모른다면 이는 그 일이 이상하지 아니한가?

 

然則天之所以生此人, 爲靈於萬物, 付以財成輔相之職者, 果安在哉. 其說反復, 頭緖雖多, 要之, 此見得心與理爲一, 彼見得心與理爲二, 彼見得心空而無理, 此見得心雖空而萬物咸備也.

그런즉 하늘이 사람을 낳아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고 재성과 보상의 직책을 부여함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 말이 반복되어서 두서가 비록 많으나 간단히 요약하면, 우리는 심과 리가 하나라고 본 것이요 저들은 심과 리가 둘이라고 본 것이며 저들은 마음이 공함으로써 이치도 없다고 보았고 우리는 비록 공하더라도 만물이 모두 이치를 갖추었다고 본 것이다.

 

故曰 吾儒一, 釋氏二. 吾儒連續, 釋氏間斷. 然 心一也, 安有彼此之同異乎. 蓋人之所見, 有正不正之殊耳.

그러므로 말하자면 우리 유가는 하나이고 불가는 둘이며 유가는 연속이고 불가는 간단인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이니 어찌 저들과 우리가 같고 다름이 있겠는가? 다만 사람의 보는 바가 옳으냐 그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四大身中誰是主 네가지 큰 원소로 된 몸가운데에 어느 것을 주라 하고

六根塵裏孰爲精 육근의 번뇌 속에 무엇을 정이라 하리오?

 

按 地水火風, 四大, 和合爲一身 而別其四大則本無主, 色聲香味觸法六根塵, 相對以生 而別其六根 則本無精, 猶鏡像之有無也. - [: () () (온기) (호흡) 이 네가지 큰 원소가 화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었으나, 그 사대를 따로 떼어 내면 본래 주가 없고 , , , , , 이 여섯 가지 번뇌가 서로 대경되어 생기지만 그 육근을 별도로 떼어 내면 본래 정이 없으므로 거울 속의 현상처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黑漫漫地開眸看 캄캄하고 멀고 아득한 당에서 눈을 떠보라.

終日聞聲不見形 종일 소리는 들려도 형체는 볼 수 없구나.

 

, 以慧照用則雖黑漫漫地開眸看, 暗中有明, 猶鏡光之暗中生明也. - [: 지혜로써 용에 비추면 비록 어둡고 아득한 땅에서 눈을 떠보아도 그 어둠 속에 빛이 있나니 거울 빛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냄과 같은 것이다.]

 

此 釋氏之體驗心處.

이는 석씨가 그 마음을 체험한 것이다.

 

謂有寧有跡 있다고 한들 어찌 자취가 있으며

謂無復何存 없다 한들 다시 무엇이 있으리요?

惟應酬 오직 물에 응하여 수작할 즈음에

特達見本根 다만 통달하여 본근을 본다.

  按 朱子詩 - [: 주자의 시이다.]

 

此 吾儒之體驗心處

이는 우리 유가가 그 마음을 체험한 경지이다.

 

且道心, 但無形而有聲乎. 抑有此理存於心, 爲酬之本根歟. 學者, 當日用之間, 就此心發見處體究之, 彼此之同異得失, 自可見矣.

또 도심은 본래 형체가 없는데 소리가 있겠는가? 또한 이 이치를 마음에 보존하여 두어 수작의 근본을 삼아야 할 것이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이 마음이 발현되는 곳에 나아가서 그것을 체험하고 궁구하면 피차간의 동이와 득실을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請以朱子之說, 申言之, 心雖主乎一身而其體之虛靈 足以管乎天下之理, 理雖散在萬物而其用之妙微, 實不外乎人之一心, 初不可以內外精粗而論也.

주자의 설로써 거듭하여 말하건데, 마음이 비록 일신의 주가 되나 그 체의 허령함은 족히 천하 지리를 주관할 수 있고 리가 비록 온갖 사물에 흩어져 있으나 그 작용의 묘미가 실로 人之一心을 벗어나지 아니하니 애초부터 어느 것이 안팎이고 정밀하고 조악함을 논할 수 없는 것이다.

 

然或不知此心之靈 而無以存之, 則昏昧雜擾而無以窮衆理之妙, 不知衆理之妙 而無以窮之 則偏狹固滯 而無以盡此心之全, 此其理勢之相須, 蓋亦有必然者.

그러나 혹 이 마음의 신령함을 알지못하여 이를 보존함이 없다면 곧 어둡고 뒤섞이어서 모든 이치의 묘함을 알지 못하여 궁구함이 없으면 편협 되고 막히어서 이 마음의 온전함을 다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그 의 서로간 需用이라서 또한 필연한 것이 있는 것이다.

 

是以, 聖人設敎, 使人黙識, 此心之靈 而存之於端莊靜一之中, 以爲窮理之本, 使人知有衆理之妙 而窮之於學問思辨之際, 以致盡心之功, 巨細相涵, 動靜交養 初未嘗有內外精粗之擇, 及其眞積力久 而豁然貫通焉, 亦有以知其渾然一致 而果無內外精粗之可言矣.

이 때문에 성인이 가르침을 베푸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 마음의 심령 함을 묵묵히 알아 단정하고 엄숙하고 정일한 가운데에 간직하여 이 이치를 궁구하는 근본으로 삼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이치의 묘함이 있음을 알아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하는 즈음에 궁구하여 마음을 다하는 공을 이루어 크고 작음을 서로 흐뭇하도록 하고 동함과 정함을 서로 길러 갈 뿐, 애초부터 어느 것이 안팎이고 정밀하고 조악함을 택하지 않게 하나니, 진실로 오랫동안 힘을 쌓아 활연히 꿰뚫음에 미치면, 또한 혼연일치를 알아서 과연 내외와 정조함이 없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今 必以是爲淺近支離 而欲藏形匿影, 別爲一種, 幽深恍惚, 艱難阻絶之論, 務使學者, 莽然措其心於文字言語之外 而曰 道必如是, 然後可以得之 則是近世佛學, 詖淫邪遁之尤者, 而欲移之, 以亂古人明德新民之實學, 其亦誤矣. 朱子之言, 反復論辨, 親切著明, 學者於此, 潛心而自得之, 可也.

지금에 와서 반드시 이것을 천근하고 지리하게 여겨 형체를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면서 따로 일종의 궁벽하고 황홀하고 까다롭고 막힌 논리를 만들어 배우는 자로 하여금 막연히 그 마음을 문자와 언어의 밖에 두도록 힘쓰게 하고 말하되, ”도는 반드시 이같이 한 후에 얻을 수 있다.“하니 이것은 근세 불씨학의 詖淫邪遁이 더욱 심한것인데 이를 옮겨와 옛사람의 명덕과 신민의 진실된 학문을 어지럽히고자 하니 그 또한 오류이다. 朱子의 말이 이 모든 것을 반복 논변하여 친절히 밝혔으니 배우는 자는 이에 잠심하여 스스로 얻어야 할 것이다.

 

 

15. 佛法入中國

按此以下 至事佛甚近秊代尤促 引用眞氏大學衍義說 - [: 여기서부터 부처 섬기기를 극진히 할수록 년대는 단축되었다까지는 진씨의 대학연의의 설을 인용한 것이다.]

 

漢明帝, 聞西域有神, 其名曰佛, 遣使之天竺, 得其書及沙門以來. 其書大抵以虛無爲宗, 貴慈悲不殺, 以爲人死, 精神不滅, 隨復受形, 生時所作善惡, 皆有報應.

한나라 명제는, 인도에 신이 있어 그 이름이 불이라는 말을 듣고 사신을 천축에 보내어 그 글과 중을 얻어 돌아왔는데 그 글은 대개 허무를 으뜸으로 삼고, 자비와 살생하지 않는 것을 귀히 여겨 말하기를, “사람은 죽어도 정신은 멸하지 않아 다시 형체를 받아 태어나는데, 살아 있을 때에 선한 일을 하고 악한 일을 한 바에 따라, 다 보응이 있다.”하였다.

 

故所貴修鍊, 以至爲佛, 善爲宏闊, 勝大之言, 以勸誘愚俗, 精於其道者, 號曰 沙門. 於是, 中國始傳其術 圖其形像 而王公貴人, 獨楚王英, 最先好之.

그러므로 수련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굉원 광활하고 수승 방대한 말을 잘 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였는데, 그 도에 정통한 사람을 사문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중국에 그 법이 전해져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런데 왕공 귀인으로는 유독 초왕 영이 가장 먼저 좋아하였다.

 

眞西山曰 臣按此佛法入中國之始也. 是時所得者, 佛經四十二章, 緘之蘭臺石室而已, 所得之像, 繪之淸凉臺, 顯節陵而已.

진서산이 말하기를, “신은 상고하건데, 이것은 불법이 중국에 들어온 시초입니다. 이때에 얻어 온 것은 불경 42장인데 난대 석실에 감추어 두었을 뿐이었고, 얻어 온 불상은 청량대와 현절릉에 그림으로 그렸을 뿐이었습니다.

 

楚王英雖好之, 然不過潔齋修祀而已. 英 尋以罪誅, 不聞福利之報.

초왕영이 비록 불교를 좋아하였으나 재계를 정결하게 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은 이내 죄에 걸려 목 잘려 죽었고, 복리의 보답을 받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其後靈帝, 始立祠於宮中, 魏晉以後, 其法寢盛 而五胡之君, 若石勒之於佛圖澄, 符堅之於道安, 姚興之於鳩摩羅什, 往往尊以師禮, 元魏孝文, 號爲賢主 亦幸其寺, 修齋聽講, 自是至于蕭梁, 其盛極矣 而其源 則自永平始, 非明帝之責而雖哉.

그 후에 한의 영제가 처음으로 궁중에 사당을 세웠고, 위진 이후로 그 법이 점점 성하여, 오호의 임금으로서, 이를테면 석늑이 불도징에게, 부견이 도안에게, 요흥이 구라마습에게 이따금 스승의 예로써 받들었으며, 원위의 효문제는 현명한 임금이라고 칭하지만, 역시 절에 나아가 재를 올리고 설법을 들었으니, 이때부터 소량에 이르기까지는 그 성함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근원은 영평 연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영제를 책하지 않고 누구를 책하겠습니까?”하였다.

 

 

16. 事佛得禍

梁武帝, 中大通元年九月, 幸同泰寺, 設四部無遮大會 釋御服持法衣, 行淸淨大捨, 群臣以錢一億萬, 祈白三寶, 奉贖皇帝, 僧衆黙然, 上還內. 上自天監中, 用釋氏法長齋斷肉, 日止一食惟菜羹糲飯而已, 多造塔公私費損.

양나라 무제는 중대통 원년(529) 9월에 동태사에 나아가 사부대중을 모아 무차대회를 열고 어복을 벗고 법의를 걸친 후 청정대사를 행하니 모든 신하들이 돈 일억만을 가지고 삼보 앞에 빌고 황제의 몸을 굽혀 속죄하는데, 중들은 그대로 절을 받으면서 말 한마디 없었고, 임금은 궁궐로 돌아왔다. 무제가 천감연간으로부터 석씨의 법을 써서 오래도록 재계하여 고기를 먹지 않고 하루에 한 끼니만 먹는 것도 나물국에 거친 밥뿐이요, 탑을 많이 쌓아 공사간에 비용을 많이 소비하였다.

 

時 王侯子弟多驕淫不法, 上年老厭於萬機, 又專精佛戒每斷重罪 則終日不懌, 或謀叛逆事覺亦泣 而宥之 由是王侯益橫, 或白晝殺人於都街, 或暮夜公行剽掠, 有罪亡命匿於主家, 有司不敢搜捕, 上深知其弊 而溺於慈愛, 不能禁也.

이때에 왕후와 그의 자제들이 교만하고 음란하여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임금은 늙어서 정치에 권태를 느끼고 또 부처의 계율에만 오로지 정신을 써서 매양 중죄를 처단할 때에는 종일토록 괴로워하였고, 혹은 반역을 꾀하는 일이 발각되어도 역시 울면서 용서해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왕후들은 더욱 횡포하여 혹은 대낮에 도시의 거리에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혹은 어두운 밤에 공공연히 약탈을 자행하기도 하며, 죄가 있으면 망명하여 공주의 집에 숨으니 관인들이 감히 수사하여 잡지를 못하였다. 임금은 그 폐단을 알면서도 자애에 빠져 금하지 못하였다.

 

中大同元年三月庚戌, 上幸同泰寺, 遂停寺省, 講三慧經, 夏四月丙戌解講, 是夜同泰寺浮屠災. 上曰 此魔也, 宜廣爲法事, 乃下詔曰 道高魔盛, 行善障生, 當窮玆土木倍增往日, 遂起十二層浮屠將成, 値侯景亂而止, 及陷臺城, 囚上於同泰寺, 上口燥乾, 求蜜於寺僧, 不得竟以餓死.

중대동 원년(546) 3월 경술일에 임금이 동태사에 나아가 절에 머물면서 삼혜경을 강하기 시작하여 4월 병술에야 끝마쳤다. 그런데 이날 밤에 동태사의 탑이 화재를 당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마귀 때문이니 마땅히 불사를 크게 하리라.”하고 이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도가 높을수록 마귀가 성하고, 선을 행함에는 장애가 생기나니, 마땅히 토목공사를 크게하여 전날의 배로 증가시키리라.”하고, 드디어 12층탑을 기공하여 완성되어 갈 무렵에 후경의 난을 만나 중지되었다. 대성이 함락됨에 이르러서는 임금을 동태사에 가두어 두었는데, 임금이 목이 말라 그 절 중에게 꿀물을 요구했으나 얻지 못하고 마침내 굶어 죽었다.

 

眞西山曰 魏晉以後 人主之事佛, 未有如梁武之盛者也. 夫以萬乘之尊 而自捨其身, 爲佛之厮役, 其可謂卑佞之極矣. 以蔬茹麵食易宗廟之生牢, 恐其有累冥道也. 織官文錦有爲, 人類禽獸之形者 亦禁之. 恐其裁剪有乖仁恕, 臣下雖謀叛逆, 赦而不誅 剽盜肆行亦不忍禁, 凡以推廣佛戒也.

진서산이 말하기를, “위진이후의 임금 가운데 부처 섬기기를 양나라 무제 만큼 성하게 한 사람은 없었다. 대저 만승의 존귀함으로서 스스로 그 몸을 버려 부처의 머슴이 되었으니 그 비열하고 아첨함이 극심하다 할 것이다. 채소와 면식으로 종묘의 제사 지내는 생뢰와 바꾸었으니, 그것은 아마도 명도에 누됨이 있을까 두려워함이요, 직관이 비단에 무늬를 놓는데, 사람이나 금수의 형상을 놓는 것까지 또한 금하였으니, 그것은 가위로 재단할 때에 인,서에 어그러짐이 있을까 두려워함이며, 신하가 반역을 꾀하여도 용서하고 죽이지 않고, 도둑질을 자행하여도 차마 금하지 못하였으니, 이 모두가 부처의 계율을 미루어 넓히려고 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蓋嘗論之, 使仙而可求則漢武得之矣, 使佛而可求 則梁武得之矣, 以二君而無得焉, 則知不可求而得也 明矣. 縱求而得之, 戎夷荒幻之敎 不可以治華夏, 山林枯槁之行, 不可以治國家, 況不可求也. 漢武 貪仙而終致虛耗之禍, 梁武 佞佛而卒召危亡之厄 則貪佞之無補又明矣.

대개 일찍이 논하기를 신선을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한나라 무제가 얻었을 것이요, 부처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양나라 무제가 얻었을 것인데, 두 임금이 얻지 못하였음을 볼 때 그 구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이 명백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비록 구하여 얻는다 하더라도 오랑캐의 허황한 교로는 중국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구할 수 있는 것이랴 ! 한나라 무제는 신선을 탐하다가 마침내 국고를 텅 비도록 소모하는 화를 입고, 양나라 무제는 부처에게 아첨하다가 마침내 위망의 액을 초래하였은 즉, 탐하고 아첨하여도 도움됨이 없는 것이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且其捨身事佛, 豈非厭塵囂而樂空寂乎. 使其能若迦維之嫡嗣, 視王位如弊屣褰裳 而去之, 庶乎爲眞學佛者而帝也, 旣以簒弑取人之國, 又以攻伐侵人之境, 及其老也 雖慈孝如太子統, 一涉疑似忌之而至死貪戀如此, 又豈眞能捨者乎. 釋服入道, 旣可徼浮屠之福, 奉金贖還, 又不失天子之貴, 是名雖佞佛 而實以誑佛也.

또 그 몸을 버려가면서 부처를 섬기는 것은 티끌 같은 세상의 시끄러움이 싫어 공적 함을 즐기려 함이 아닌가? 그들이 과연 저 가유의 맏아들 석가처럼 임금자리를 헌신짝같이 보고 옷을 걷어붙이고 갈 수 있었다면 거의 참으로 부처를 배우는 사람들이라 하겠지만, 특히 양나라 무제는 이미 찬탈하고 시역하여 남의 나라를 빼앗았고, 또 공벌로써 남의 땅을 침범했으며, 급기야 늙어서는 그의 태자 소통 같은 자효한 아들도 한번 의심쩍은 일이 있음에 이를 끝내 못마땅하게 여겼다. 죽을 때까지 탐심에 연연하기가 이러했으니, 또 어찌 참으로 몸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옷을 바꿔 입고 수도에 들어가는 것은 이미 부도의 복을 맞이할 수 있다 하겠으나, 몸을 바쳐 속죄하고 돌아와서는 천자의 귀함을 잃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부처에게 아첨한다기보다 사실은 부처를 속이는 것이라 하겠다.

 

且其織文之非實, 猶不忍戕之, 彼蚩蚩之氓性命, 豈能鳥獸比, 而連年征伐, 所殺不可勝計, 浮山築堰浸灌敵境, 擧數萬衆而魚鼈之, 曾不小恤, 是名 雖小仁而實 則大不仁也.

또 그 비단의 무늬는 실물이 아닌데도 오히려 차마 해치지 못하면서, 저 어리석은 백성의 목숨을 어찌 조수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해마다 정벌하여 죽인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산을 만들고 둑을 쌓아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니, 이것은 비록 조그만 인의 이름은 있으나 실은 크게 어질지는 못한 것이다.

 

且國所與立, 惟綱與常, 帝於諸子皆任以藩維 而無禮義之訓, 故正德以梟獍之資, 始捨父而奔敵國, 終引賊以覆宗枋, 若綸若繹, 或摠雄師, 或鎭上游, 當君父在亂, 不聞有灑血投袂之意方, 且弟兄相仇, 叔姪交兵, 極人倫之惡, 此無他, 帝之所學者, 釋氏也.

또 나라가 존립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강과 상인데 무제는 여러 아들에게 다 변방을 맡기면서 예의를 가르침이 없었으므로, 정덕은 효경의 자질로 처음에는 아버지를 버리고 적국으로 달아났다가 마침내는 적병을 이끌고 들어와 국가를 전복시켰으며, (무제의 6째 아들)이나 역(무왕의 7째 아들,梁元帝)은 혹은 큰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거나, 혹은 상유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부왕의 난을 당하고 있었지만 피를 뿌리고 분연히 싸울 뜻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또한 형제끼리 서로 원수가 되고, 숙부와 조카 사이에 서로 싸워 인륜의 악이 극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다름아니라 무제의 배운 바가 석씨였기 때문이다.

 

以天倫爲假合, 故臣不君其君, 子不父其父, 三四十年之間, 風俗淪胥綱常掃地, 宜其致此極也. 使其以堯舜三王爲師, 不雜以方外之敎, 必本仁義, 必尙禮法, 必明政刑, 顧安有是哉.

천륜을 가합이라고 하기 때문에, 신하는 그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고, 아들은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아, 삼사십년 동안에 풍속은 모두 무너지고 강상은 땅에 떨어졌으니 이같이 극에 이르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로 하여금 요, , 삼왕[夏禹, 殷湯, 周文武]을 스승으로 삼아 방외의 교를 섞지 않음은 물론, 반드시 인의를 근본으로 삼고, 반드시 예법을 숭상하고, 반드시 형정을 밝히게 했다면 어찌 이 같음이 있으랴 !

 

 

17. 舍天道而談佛果

唐代宗 始未甚重佛, 宰相元載,王縉, 皆好佛, 縉尤甚. , 嘗問 佛言報應果有之耶. 載等 對曰 國家運祚靈長非, 宿植福業, 何以致之. 福業已定, 雖時有小災 終不能爲害. 所以安史 皆有子禍, 懷恩出門病死, 二虜不戰而退, 此皆非人力所及, 豈得言無報應也.

당대종이 처음에는 그리 부처를 중히 여기지 않았는데 재상인 원재와 왕진이 모두 부처를 좋아했고, 왕진이 더욱 심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묻기를 부처가 보응을 말했다 하는데 과연 있는가? 원재등이 대답하여 가로되 국가의 운수가 장구한 것은 일찍이 복업을 심은 것이 아니면 무엇을 가지고서 이르게 하겠습니까. 복업이 이미 정해지면 비록 때때로 작은 재앙이 있더라도 결국 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녹산 사사명은 모두 그들의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회은은 군문을 나와 병들어 죽었고, 두 오랑캐 즉 회흘 토번은 싸우지 않고 저절로 물러났으니 이것은 다 사람의 힘으로 미칠바가 아니니 어찌 보응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由是, 深信之, 常於禁中飯僧百餘人, 有寇至 則令僧講仁王經以禳之, 寇去厚加賞賜良田美利多歸僧寺. 載等, 侍上, 多談佛事, 政刑日紊矣.

임금이 이로 인하여 부처를 깊이 믿어 항상 궁중에서 승려 백여 명에게 밥을 먹여 주었으며 도둑이 이르면 중으로 하여금 인왕경을 강하여 물리치게 하고 도둑이 물러가면 후하게 상을 줘서 좋은 전답과 많은 이익이 중 또는 절에 돌아갔다. 원재등이 임금을 모시고 부처의 말을 많이 말하니 정사와 형벌이 점점 문란해졌다.

 

晉西山曰 代宗, 以報應爲問使, 是時, 有儒者, 在相位, 必以福善禍淫虧盈益謙之理, 反復啓告, 使人主, 凜然知天道之不可誣 而自彊於修德. 載等 曾微一語及此乃以宿植福業爲言 而謂國祚靈長 皆佛之力, 毋乃厚誣天道乎.

진서산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종이 보응에 대하여 물었는데 가령 유자를 정승의 자리에 두었더라면 반드시 선하면 복을 받고 음란하면 화를 받고 차면 이지러지고 겸손하면 더함을 받는다.’는 그런 이치를 되풀이해 아뢰어 임금으로 하여금 름연히 천도는 속일 수 없는 것임을 알아 덕을 닦는데 스스로 힘쓰게 하였을 것인데 원재등은 일찍이 한마디도 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고 드디어는 일찍이 복업을 심는 것으로 말하였으며, 국가의 원수가 장구한 것은 모두 부처의 힘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너무나 천도를 속인 것이 아닙니까?

 

夫唐之所以歷秊者, 以太宗濟世安民之功, 不可掩也, 而所以多難者, 以其得天下也, 不純乎仁義綱常禮法所在有慙德焉. 繼世之君 克己礪善者, , 恣情悖理者, 多也. 天有顯道厥類惟彰, 此之謂矣.

저 당나라가 오랜 역사를 지나온 까닭은 태종이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 공임을 숨길 수 없는 것이요, 천하를 얻을 때 환난이 많았던 이유는 仁義綱常에 순수하지 못했고 예법으로 보아서 부끄러워 할 만한 덕이 있었으며 세세손손 대를 이은 임금 중 이미 사욕을 이겨내고 선을 힘쓴자가 적은 반면 정을 빙자해서 이에 어긋난 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떳떳한 도가 있어 그 유에 따라 나타낸다는 말이 이것을 이름이다.

 

載等, 捨天道而談佛果, 是謂災祥之降, 不在天而在佛也, 爲治之道, 不在修德而在於奉佛也. 代宗 惟其不學, 故載等得以惑之.

원재등이 천도를 버리고 부처의 인과설을 말하는 것은 재앙이나 상서를 내리는 것은 하늘에 있지 않고 부처에 있으며, 다스리는 도는 덕을 닦는데 있지 않고 부처를 받드는데 있다고 하니, 대종이 오직 배우지 못했으므로 원재등이 미혹시킬 수가 있었다.

 

且夫安史之亂以其太眞蠱於內, 楊李賊於外醞釀而成之也, 而所以能平之者, 由子儀光弼諸人 盡忠帝室, 驅而攘之也. 其所以皆有子禍者, 祿山史明以臣叛君, 故慶緖朝義以子弑父, 此天道之所以類應者也. 回紇吐蕃不戰而自退 則又子儀挺身見虜, 設謀反間之力, 推跡本末, 皆由人事 而載等乃曰 此非人力所及, 其欺且誣, 顧不甚哉.

또 저 안녹산, 사사명의 난은 양태진이 안에서 좀먹고 양국충, 이림보가 밖에서 화를 빚어서 일어난 것이요, 그 난을 평정한 것은 곽자의, 이광필등 여러 사람이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물리쳤기 때문이요, 그들이 모두 다 자식에게 화를 당하였다고 하는 것은 안록산, 사사명 자신이 신하로서 임금에게 반역하였기에 그들의 아들인 안경서, 사조의가 그의 아버지를 시역한 것이니, 이것은 천도가 그 유에 따라 응하는 까닭이다. 회흘, 토번이 싸우지 않고 스스로 물러간 것은 또한 곽자의가 몸소 오랑캐를 만나 꾀를 부려 반간한 덕택이니 그 본말을 미루어 보면 모두 사람이 일에 말미암은 것인데 원재등은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그 속이고 속임이 살펴보건데 너무 심하지 않은가?

 

 

18. 事佛甚謹秊代尤促

元和十四秊, 迎佛骨于京師, 先是功德使上言 鳳翔寺塔, 有佛指骨相傳, 三十秊一開, 開則歲豊人安, 來秊應開, 請迎之.’ 上從其言, 至是, 佛骨至京師, 留禁中, 三日, 歷送諸寺, 王公士民, 瞻奉捨施, 如恐不及.

원화 14년에 불골을 경사에 맞아 들여왔는데, 이보다 먼저 공덕사가 아뢰기를, “봉상사 탑에 부처의 지골이 있어 전하여 오는데, 30년만에 한 번씩 탑문을 여는데, 탑문을 열면 그 해는 풍년이 들며 백성들이 편안하게 지낸다고 합니다. 내년에 응당 탑문을 열 것이니 청컨대 맞이하여 오소서.” 하였으니, 이에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 이 불골이 경사에 이르렀을 때 궁중에 3일 동안을 두었다가 여러 절을 거쳐가는데 왕공들과 사민들이 쳐다보며 받들어 시주하기를 남보다 뒤질까 봐 두려워할 정도이었다.

 

刑部侍郞韓愈, 上表諫曰 佛者夷狄之一法耳, 自黃帝至禹湯文武, 皆享壽考, 百姓安樂, 當是時, 未有佛也. 漢明帝時, 始有佛法, 其後, 亂亡相繼, 運祚不長 宋齊梁陳元魏以下, 事佛漸謹, 秊代尤促.

형부시랑 한유가 표를 올려 간하여 말하기를, “부처라는 것은 이적의 한 법일 뿐입니다. 황제로부터 우,,,무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수하였고, 백성들도 안락하게 지냈는데, 그때에는 부처가 있지 않았습니다. 한 명제 때에 비로소 불법이 들어왔는데, 그 후부터 어지럽고 망함이 서로 계속되어 나라의 운수가 길지 못하여, ,,,,,위등의 나라 이후에는 부처 섬기기를 점점 정성스럽게 하였는데, 나라의 연대는 더욱 단촉되어졌읍니다.

 

唯梁武在位四十八秊, 前後三捨身, 竟爲侯景所逼, 餓死臺城, 事佛求福, 乃反得禍, 由此觀之, 佛不足信 可知矣. 佛本夷狄之人, 與中國言語不通, 衣服殊製 不知君臣父子之情, 假如其身尙在, 來朝京師, 陛下容而接之, 不過宣政一見, 禮賓一設, 賜衣一襲, 衛而出之, 不令惑衆也. 況其身死已久, 枯槁之骨, 豈宜以入宮禁, 乞付有司, 投諸水火, 永絶禍本.” 上大怒, 將加極刑, 宰相裵度崔群等, 愈 雖狂發於忠懇, 宜寬容以開言路.” 乃貶潮州刺史.

오직 양무제가 48년 동안 제위에 있으면서 전후 세 차례나 몸을 부처에게 희사하였으나, 마침내는 후경의 핍박을 받아 대성에서 굶어 죽었으니, 부처를 섬겨 복을 구하다가 도리어 화를 얻었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부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는 본시 이적의 사람이어서, 중국과는 언어도 통하지 않고, 의복 제도도 다르며 군신,부자의 정도 알지 못하니, 가령 그의 몸이 아직 살아 있어서 경사에 들어와 조현 한다 할지라도 폐하께서는 그를 받아들이되 그저 선정전에서 한번 보고 손님으로 대접하는 예를 한 번 베풀고, 옷이나 한 벌 주어서 호위해 내보내는데 지나지 않을 것이며, 여러 사람들을 미혹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인데, 하물며 그의 몸이 죽은지 이미 오래 되었거늘 말라빠진 뼈를 어찌 궁중에 들어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비옵건대 유사에게 맡기시어 물에나 불에 던져 버려 화의 근본을 영원히 끊어 버리소서.” 하였다. 이에 임금이 크게 노하여 장차 극형을 가하려고 하였으나 재상 배도와 최군등이 말하기를, “한유가 비록 지나치긴 했으나 충성에서 나온 말이니 마땅히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셔서 언로를 열어 주시옵소서.”하니, 이에 조주자사로 좌천시켰다.

 

眞西山曰 按後世人主之事佛者, 大抵徼福田利益之事, 所謂以利心而爲之者也. 故韓愈之諫, ‘歷陳古先帝王之時, 未有佛 而壽考, 後之人主, 事佛而夭促.’ 可謂深切著明者矣, 而憲宗弗之悟也. 方是時, 旣餌金丹, 又迎佛骨, 求仙媚佛, 二者 交擧曾未朞秊, 而其效乃爾, 福報果安在耶. 臣 故幷著之 以爲人主溺意仙佛者之戒.”

진서산이 말하기를, “상고하건데 후세의 임금들이 부처를 섬긴 것은 대저 복전에 대한 이익을 구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이익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유가 간하여 옛날 제왕때에는 부처가 있지 않아도 장수를 하였는데 후세의 임금들은 부처를 섬기는데도 일찍 죽는다.’고 진술하였으니, 깊고도 간절하게 나타낸 말이라 하겠거늘, 그런데도 헌종은 깨닫지 못한 채 바야흐로 이때 금단 약을 먹고 또 불골을 맞이하였습니다. 신선을 구하고 부처에게 아첨하는 두 가지를 다하였으나 1년이 못되어 효과가 그러하였으니, 복전의 보응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신이 이 때문에 이 사실을 모두 아울러 임금된 사람으로서 신선이나 부처에게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19. 闢異端辨

堯舜之誅四凶, 以其巧言令色, 方命圮族也. 禹亦曰 何畏乎巧言令色, 蓋巧言令色, 喪人之心, 方命圮族, 敗人之事, 聖人所以去之 而莫之容也.

요순이 4흉을 벤 것은 그들이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좋게 꾸미면서 명령을 거스르고 종족을 무너뜨리기 때문이었다. 또 우가 말하기를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좋게 꾸미는 자를 어찌 두려워하랴?” 하였으니 대게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좋게 꾸미는 것은 사람의 본심을 잃게 하며 명령을 거스르고 종족의 친화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람의 일을 망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제거하여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湯武之征桀紂也, 一則曰 予畏上帝, 不敢不正, 一則曰 予不順天, 厥罪惟均, 天命天討, 非己之所得而辭也.

탕과 무왕이 걸과 주를 칠 때 탕이 말하기를 나는 감히 상제가 두려워 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으며 무왕이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죄가 주와 같다.”고 하였으니 하늘의 명과 하늘의 토벌은 자기가 사양할 수 없다는 뜻이다.

 

夫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害之一字, 讀之令人凜然. 孟子之好辯, 所以距揚墨也, 揚墨之道不距, 聖人之道不行. 故孟子, 以闢揚墨爲己任.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단을 깊이 파고들면 해로울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해롭다는 한 글자가 사람을 오싹하게 한다. 맹자가 좋은말로써 양주와 묵적을 막은 까닭은 양묵의 도를 막지 않으면 성인의 도를 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맹자는 양묵을 물리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其言曰 能言距揚墨者, 亦聖人之徒也. 其望助於人者, 至矣. 墨氏兼愛疑於仁, 揚氏爲我疑於義, 其害至於無父無君, 此孟子所以闢之之力也.

그의 말에 이르기를 능히 양묵을 막을 것을 말하는 사람은 성인의 무리이다.”고하니 그 사람들이 동조해 주기를 바란 것이 지극하였다. 묵씨는 똑같이 사랑한다하니 인인가 의심스럽고, 양씨는 자기만을 사랑한다 하니 의인가 의심된다. 그러므로 그 해가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는 데까지 이르므로 맹자가 이를 물리치고 자 힘썼던 것이다.

 

若佛氏 則其言高妙, 出入性命道德之中, 其惑人之甚 又非揚墨之比也. 朱氏曰 佛氏之言, 彌近理 而大亂眞者, 此之謂也.

그런데 불씨는 그 말이 고상하고 미묘하여 성명, 도덕 가운데 출입함으로 사람을 미혹함이 심하여 양묵이 견줄 바가 아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불씨의 말이 더욱 이치에 가까워서 진을 크게 어지럽힌다.”고 하였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以予惛庸, 不知力之不足 而以闢異端爲己任者, 非欲上繼六聖, 一賢之心也. 懼世之人, 惑於其說 而淪胥以陷, 人之道至於滅矣.

내 어둡고 용렬하면서도 힘이 부족함을 알지 못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으로 나의 임무로 삼은 것은 위로 여섯 성인과 한 현인의 마음을 계승하고자 함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이단의 설에 미혹되어 모두 빠져 버려 사람의 도가 없어지는 데 이를까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嗚呼! 亂臣賊子, 人人得而誅之, 不必士師, 邪說橫流, 壞人心術, 人人得而闢之, 不必聖賢. 此予之所以望於諸公, 而因以自勉焉者也.

아아 난신 적자는 사람마다 모두 죽일 수 있으니 반드시 사사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며, 사특한 말이 횡류하여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면 사람마다 물리 칠 수 있는 것이니 반드시 성현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는 내가 여러 사람에게 바라는 바이며 아울러 내 스스로 힘쓰는 것이다.

 

道傳 暇日 著佛氏雜辨十五篇, 前代事實四篇, 旣成, 客讀之曰 子辨佛氏輪廻之說, 乃引物之生生者,以明之, 其說似矣. 然佛氏之言, 有曰 凡物之無情者, 從法界性來, 凡有情者, 從如來藏來.

내가 틈을 내어 불씨잡변 15편과 전대 사실 4편을 지었는데 이미 이루어짐에 객이 읽고 말하기를 자네가 불씨의 윤회설을 변정하는데 있어서 만물이 생생하는 이치를 인용하여 밝혔는데 그 말이 근사하기는 하나 불씨의 설에 이르기를 만물 중에 물의 정이 없는 것은 법계성으로부터 왔고 정이 있는 것은 여래장으로부터 왔다.’고 하였다.

 

按 無情者, 猶巖石點頭之類, 法界, 如云無邊也, 有情者, 如本覺衆生, 心與諸佛性本爲如來也. - [: 상고하건대 무정이란 바윗돌이나 풀,나무와 같은 것이고, 법계란 무변이라는 말과 같으며, 유정물이란 본각이 있는 중생의 마음이 제불과 마찬가지로 성이 여래와 같다는 것이다.]

 

故曰 凡有血氣者, 同一知覺, 凡有知覺者, 同一佛性, 今子不論物之無情與有情, 比而同之, 無乃徒費辭氣 而未免穿鑿附會之病歟.

그러므로 말하기를 대게 혈기가 있는 은 다같이 지각이 있고 지각이 있는 은 다같이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제 자네는 의 정이 있고 없음을 논하지 않고, 같은 격으로 동일하게 말하니, 헛되이 말만 소비하고 천착하고 부회하는 병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하였다.

 

曰噫! 此正孟子所謂二本故也. 且是氣之在天地間 本一而已矣. 有動靜而陰陽分. 有變合而五行具.

이에 대답하여 아아! 이것이 바로 맹자의 말처럼, 근본이 두 개이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 기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본시 하나일 뿐인데, 이 있어서 음과 양으로 나누어지고, 변과 합이 있어 오행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周子曰 五行, 一陰陽也, 陰陽, 一太極也. 蓋於動靜變合之間 而其流行者, 有通塞偏正之殊, 得其通而正者爲人, 得其偏而塞者爲物, 又就偏塞之中 而得其稍通者, 爲禽獸, 全無通者爲草木, 此乃物之有情無情, 所以分也.

주자가 말하기를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하고 하고 변하고 합하는 사이에 그 유행하는 것은 의 다름이 있으니, 함과 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을 얻은 것은 이 되며, 가운데서도 그 조금 통한 것을 얻은 것은 금수가 되고, 전연 이 없는 것은 초목이 되나니, 이것이 바로 이 있고 없는 것으로 나누어진 까닭이다.

 

周子曰 動而無動, 靜而無靜, 神也, 以其氣無所不通, 故曰神. 動而無靜, 靜而無動, 物也, 以其囿於形氣 而不能相通, 故曰物.

주자가 말하기를 하되 함이 없고, 하되 함이 없는 것은 이니 그 기가 통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이라 하는 것이요, 하면 함이 없고, 하면 함이 없는 것은 이니 형과 기에 국한되어 서로 통할 수 없으므로 이라 하는 것이다.’하였다.

 

蓋動而無靜者, 有情之謂也. 靜而無動者, 無情之謂也. 是亦物之有情無情, 皆生於是氣之中, 胡可謂之二哉.

대개 동하여 정함이 없는 것은 유정물이라 이름이요, 정하여 동함이 없는 것은 무정물이라 이름이니, 이 또한 물의 정이 있고 없음이 다 이 가운데에서 생기는 것이니, 어찌 둘이라고 할 수 있으랴?

 

且人之一身, 如魂魄五臟耳目口鼻手足之屬, 有知覺運動, 毛髮爪齒之屬, 無知覺運動, 然則一身中, 亦有從有情底父母來者, 從無情底父母來者, 有二父母耶.

또 사람의 한 몸에도 혼백이나 오장이나 귀,,,,,발 등속과 같은 것은 지각과 운동이 있고, 모발,손톱,이 등속은 지각도 운동도 없으니, 그러면 한 몸 가운데에도 또한 정이 있는 부모로부터 온 것과, 정이 없는 부모로부터 온 것이 있으니, 부모가 둘이 있단 말인가?”

 

客曰 子之言是也. 然諸辨之說, 出入性命道德之妙, 陰陽造化之微, 固有非初學之士, 所能識者. 況下民之愚庸乎. 吾恐子之說, 雖精, 徒得好辯之譏 而於彼此之學, 俱無損益, 且佛氏之說, 雖曰無稽, 而世俗耳目習熟, 恐不可以空言破之也. 況其所謂放光之瑞, 舍利分身之異, 往往有之, 此世俗所以歎異而信服之者. 子尙有說以攻之也.

객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그러나 여러 변론한 말이 性命道德의 묘처와 음양 조화의 은미한데에 출입하여 진실로 초학의 선비들도 능히 아는 바가 없는데 하물며 아래 百姓들의 우매하고 용렬함에 있어 서랴? 나는 그대의 말이 비록 정묘하나 한갓 말하기 좋아한다는 나무람을 받고 피차(儒佛)의 학문에 손익이 없을까 두려워한다. 또 불씨의 설이 비록 헤아릴 수는 없으나 세속의 이목에 익혀 익숙하여 빈말로는 가히 타파하지 못할까 두렵다.(염려된다) 하물며 그 말하는 바 放光의 상서로움이나 사리로 분신한다는 기이함이 왕왕 있으니 이것이 세속에서 감탄하고 괴이하게 여겨 믿고 복종하는 까닭이다. 그대는 오히려 공박할 말이 있는가?”

 

曰所謂輪廻等辨, 予已悉論之矣. 雖其蔽之深也, 不能遽曉, 然一二好學之士, 因吾說而反求之, 庶乎有以得之矣, 玆不復.

말하기를 소위 윤회 등의 변론은 내가 이미 다 논하였다. 비록 그 폐단이 깊어서 능히 갑자기 깨달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한 두 호학하는 선비가 내 말에 (감응)하여 돌이켜 구한다면 거의 얻는 것이 있을터이니 이에 다시 군더더기를 부치지 않겠다.

 

至於放光舍利之事, 豈無其說乎. 且心者氣之最精最靈的, 彼佛氏之徒, 不論念之善惡邪正, 削了一重, 又削了一重, 一向收斂, 蓋心本是光明物事 而專精如此, 積於中而發於外, 亦理勢之當然也. 佛氏之放光, 何足怪哉.

放光과 사리의 일에 이르러서는 어찌 할말이 없겠는가? 또 마음이란 기의 가장 정묘하고 가장 신령스러운 것인데, 저 불씨의 무리들은 생각의 선악, 사정을 논하지 않고 깍기를 한번 거듭하고 또 깍기를 한번 거듭하면서 한쪽으로 수렴한다. 대개 마음은 본시 物事光明하고 專一하고 정묘하기가 이와 같아서 가운데에 쌓여서 바깥에 발하는 것 또한 理勢의 당연함이다. 불씨의 放光이 어찌 기이하겠는가?

 

且天之生此心者, 以其至靈至明, 主於一身之中, 以妙衆理而宰萬物, 非徒爲長物而無所用也. 如天之生火, 本以利人 而今有人焉. 埋火於灰中, 寒者不得熱, 飢者不得爨, 則雖有光焰, 發於灰上, 竟何益哉. 佛之放光, 吾所不取者, 此也. 抑火之爲物, 用之新新, 乃能常存而不滅, 若埋之灰中, 不時時發視之, 始雖熾然, 終則必至於灰燼消滅.

또 하늘이 이 마음을 낸 것은 그 至靈至明으로써 한 몸 가운데 주가 되어 여러 이치의 묘로써 만물을 주재케 한 것이니 한갓 물의 영장이 되어서 쓰이는 바가 없게 한 것은 아니다. 하늘이 불을 내어 본시 사람에게 이롭게 한 것과 같은데 이제 어떤 사람이 불을 재속에 파묻어 추운 자가 열을 얻지 못하고 배고픈 자가 밥지을 수 없다면 즉 비록 광염이 있어도 재 속에서 발하는 것과 같으니 마침내 무슨 익됨이 있겠는가. 부처의 放光을 내 취하지 않는 바가 이것이다. 또한 불의 물건 됨이 쓸수록 새로운 것이라 이어 능히 항상 보존해야 멸하지 않는 것인데 만약 재속에 파묻고서 때때로 꺼내보지 않는다면 처음에 熾然하다가 마침내는 반드시 재가되어 꺼지고 말 것이다.

 

亦猶人之此心, 常存憂勤惕慮之念, 乃能不死而義理生焉. 若一味收斂在裏 則雖曰惺惺, 着必至枯槁寂滅而後已, 則其所以光明者, 乃所以爲昏昧也. 此又不可不知也.

또한 사람의 마음도 같은 것이다. 근심하고,애쓰고,두려워하고,염려하는 생각을 가져야 이에 능히 죽지 않고(마음의 작용) 의리가 생겨나는 것이니 만일 한결같이 수렴하여 속에 둔다면 즉 비록 惺惺할지라도 반드시 마르고 적멸한데 이르러서는 끝에 가서는 즉 광명한 所以가 혼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알아두지 않을 수 없다.

 

至於像設, 亦有放光者, 蓋腐草朽木, 尙有夜光, 獨於此, 何疑哉.

형상을 갖추는데 이르러서도 역시 放光이 있다는 것은, 대개 썩은 풀과 나무도 오히려 야광의 비침이 있거늘 유독 이것에 대해서만 의심을 하는가?

 

若夫人之有舍利, 猶蛇虺蚌蛤之有珠, 其間所謂善知識者, 亦有無舍利者, 是則蛇虺蚌蛤而無珠之類也.

무릇 사람에게 사리가 있다는 것은 뱀과 조개가 구슬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아서 其間(개중)의 소위 善知識이 또한 사리가 없는 것은 이는 즉 사훼나 방합에 구슬이 없는 것과 같은 종류이다.

 

世傳, 人藏蚌蛤之珠, 不穿不蒸者, 久而發之, 添得許多枚, 是生意所存, 自然滋息理也. 舍利之分身 亦猶是耳. 若曰有佛至靈, 感人之誠, 分舍利云耳 則釋氏之徒, 藏其師毛髮齒骨者多矣. 何不精勤乞請, 以分其物而獨於舍利, 言分身哉. 是非物性而何也.

세상에 전하기를 사람이 방합의 구슬을 뚫지도 않고 찌지도 않은 채 감추어 두고 오랬만에 꺼내보면 더해서 허다한 낱개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生意가 있는 곳에 자연히 증가하는 이치이다. 사리가 몸으로 나뉘어 지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다. 만약 부처에게 지극한 이 있어, 사람의 정성에 감동되어 사리가 나누어진다한다면 즉 석씨의 무리가 그 스승의 毛髮, 齒骨을 수장할 사람이 많을 것인데 어찌 정성껏 그 물건을 나누어 가질 것을 빌어 청하지 않고 유독 사리에 대해서만 몸이 나누어짐을 말하는가? 이는 물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或曰 舍利此甚堅固, 雖以鐵塊擊之不能破, 是其靈也. 然得羚羊角, 則一擊碎爲微塵, 舍利何靈於鐵而不靈於角也. 是固物性之使然, 無足怪者也.

혹이 말하기를 사리라는 것은 매우 견고해서 비록 쇠망치로 쳐도 깨뜨릴 수 없으니 이는 그 신령스러운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영양각을 얻어서 일격을 한즉 부서져 티끌이 될 것이니 사리가 어찌 쇠에는 신령스럽고 영양각에는 신령스럽지 못한가? 이는 진실로 물성이 그렇게 된 것이지 족히 괴이할 것이 없다.

 

今或以兩木相鑽, 或以鐵石相敲而火出, 然此尙待人力之所爲也. 以火精之珠, 向日而炷艾 則薰然而烟生, 焰然而火出, 固非人力之所爲. 其初不過, 熒熒之微, 而其終也. 赫赫然炎崑崙而焚玉石, 何其神矣哉. 是亦非其性之使然, 而有一靈物, 寓於冥漠之中, 感人之誠而使之至此歟.

이제 혹이 양목을 서로 비비거나 혹은 쇠와 돌로 서로 두드려서 불을 일으키나 이는 오히려 인력의 할 바를 기다린 것이다. 火精의 구슬로써 햇볕을 향하여 약쑥에 불사르면 즉 훈연히 연기가 나면서 불꽃이 일고 불이 피어나니 진실로 인력으로 한 바가 아니다. 그 처음에는 熒熒한 기미에 불과하지만 그 마침내는 赫赫해져서 곤륜산을 불사르고 옥석을 태우니, 어찌 신기롭다 하겠는가? 이 또한 그 물성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한 신령한 물건이 아득한 속에 붙어살다가 사람의 정성에 감동되어 이에 이르게 된 것이겠는가?

 

且火之益於人者, 抑大矣. 爨飮食則堅者柔, 烘坑堗則寒者熱, 湯藥物則生者熟, 飢可以飽, 病可以愈 以至鎔鐵作, 作斧作釜鼎, 以利民用, 作刀槍劍戟 以威軍用, 火之生也. 其神如彼, 火之用也. 其利如此. 子皆莫之重焉. 彼舍利者, 當寒而不得以爲衣 當飢而不得以爲食, 戰者 不足以爲兵器, 病者 不足以爲湯藥, 使佛有靈, 一祈而分數千枚, 尙以爲無益而廢人事, 擧以投諸水火, 永絶根本, 況復敬奉而歸依歟.

또 불이 사람에게 이익 됨은 크다. 음식에 불을 때면 굳은 것이 부드러워지고 온돌에 불을 때면 찬 것이 따뜻해지고 약물을 끓이면 날것이 익으니 배고픔을 배부르게 하고 병이 있으면 나을 수 있고 쇠를 녹여 쟁기,도끼,가마솥을 만드는데 이르러서는 백성이 쓰는데 이롭게 하고 ,,,을 만들어 군대가 쓰는데 이롭게 하니, 불의 생김이 그 신비함에 저와 같으며 불의 쓰임의 그 이로움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모두 중히 여기지 않는가? 저 사리라는 것은 추움을 당하여서는 옷이 될 수 없고, 배고플 때는 음식이 될 수 없으며, 전쟁하는 사람에게 병기로도 부족하고, 병자가 탕약으로도 삼을 수 없으니, 부처의 신령함으로 하여금 한번 기도하여 수천 개로 나눈다 해도, 오히려 이익 됨이 없어 인사만 폐하니 모두 물과 불에 던져서 영원히 근본을 끊어야 하는데 하물며 다시 공경히 받들어 귀의할 것인가?

 

. 世之人, 厭常而喜怪, 棄實利而崇虛法, 如此, 可勝歎哉. , 不覺下拜曰 今聞夫子之言, 始知儒者之言爲正 而佛氏之說爲非也. 子之言, 揚雄不如也.

! 세상 사람들이 떳떳함을 싫어하고 괴이한 것을 좋아하며, 실리를 버리고 허법을 숭상함이 이와 같으니 가이 한탄스럽구나.”하니 객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절을 하고 말하기를 이제 그대의 말을 듣고 비로소 儒者의 말이 옳고 불씨의 말이 그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대의 말은 양웅도 그러하지 못하다.”

 

於是幷書卷末, 以備一說焉.

이에 권말에 병서하여 일설을 갖춘다.

 

予嘗患佛氏之說 惑世之甚而爲之言曰 天之所以爲天 人之所以爲人 儒與佛之說 不同矣.

내 일찍이 불씨의 설이 세상을 매우 미혹시키는 것을 근심하여 하늘이 하늘됨과 사람이 사람됨에 있어서 유가와 불씨의 설이 같지 않다고 하였다.

 

自有曆象之後 寒署之往來 日月之盈虧 皆有其數 用之千萬世而不差 則天之所以爲天者定 而佛氏須彌之說誣矣

역상이 있은 후로부터 추위와 더위의 오고감과 일월의 영휴가 모두 그 일정한 수가 있어서 천만년을 써도 어긋남이 없는 것은 하늘이 하늘 됨에 정하여진 것으로써 불씨의 수미설이 다 거짓이다.

 

天以陰陽五行化生萬物 而所謂陰陽五行者 有理有氣 得其全者爲人 得其徧者 爲物 故五行之理在人 而爲五常之性 其氣爲五臟 此吾儒之說也

하늘이 음양 오행으로써 만물을 화생시키는데 이른바 음양 오행이라는 것은 리와 기가 있어서 그 온전한 것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그 치우친 것을 얻은 것은 물이 된다. 그러므로 오행의 이치가 사람에게 있어서는 오상의 성이 되고, 그 기는 오장이 되니 이것이 우리 유가의 설이다.

 

醫者以五行診其臟脈之虛實 而知其病 卜者以五行推其運氣之衰旺而 知其命 亦用之千萬世而皆驗 則人之所以爲人者定而佛氏 四大之說妄矣

의사가 오행으로써 장맥의 허실을 살펴서 그 병을 알고, 점치는 자도 오행으로써 그 운기의 쇠퇴하고 왕성함을 미루어 그 명을 알며 또한 천만년을 써도 모두 증험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사람됨에 정해진 것으로써 불씨의 사대설은 허망한 것이다.

 

原其始 不知人之所以生 則反其終 安知人之所以死哉 則輪迴之說亦不足信 予持此論久矣

그 처음을 근원 하여 사람이 태어난 까닭을 알지 못한다면 돌이켜 그 끝에 가서 어찌 사람이 죽는 까닭을 알겠는가? 윤회설 또한 족히 믿을 수 없는 것이니 내 이러한 이론을 가진지 오래이다.

 

今觀三峯先生 佛氏雜辨二十篇 其言輪迴及五行醫卜之辨 最爲明備 其餘論辨 亦極詳切而著明 無復餘蘊矣

이제 삼봉선생의 불씨잡변’ 20편을 살펴보니 그 윤회설 및 오행에 대한 의사, 복자의 변론이 가장 명백하게 갖추어졌으며, 그 나머지 논변 또한 지극히 상세하고 절실하며 명백하게 드러나서 다시 남은 것들이 없었다.

 

先生自幼讀書明理 慨然有行所學 闢異端之志講論之際 諄諄力辨 學者翕然聽從嘗著心氣理三篇 以明吾道異端之偏正 其有功於名敎大矣

선생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이치를 밝히고 개연히 배운 바를 행하되 이단을 물리칠 뜻이 있어 강론할 때에 순순히 힘써 변론하니 배우는 자들이 흡연(인심이 합하여 한 곳으로 향함)하여 듣고 따랐다. 일찍이 심기리3편을 저술하여 우리 유가의 도가 바르고 이단의 도가 치우침을 밝히었으니, 그 명교(유교)에 공헌함이 크다.

 

遭逢聖朝 彌綸王化 以興一代之治 所學之道 雖未盡行亦庶幾矣 而先生之心 猶歉然必欲堯舜其君民 至於異端 尤以不能盡闢而悉去之爲己憂

성조를 만나 더욱 교화를 경륜하여 일대의 다스림을 일으켰으니 배운 바의 도를 비록 다 행하지는 못하였으나 또한 거의 행하였다 하겠는데 선생의 마음이 오히려 모자라는 듯하여 반드시 그 임금과 백성을 요순임금과 요순시대의 백성과 같이하고자 하였으며 이단에 이르러서는 더욱 모두 물리쳐서 다 없애지 못함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았다.

 

戊寅夏 告病數日 又著是書示予曰 佛氏之害 毁棄倫理 必將至於率禽獸而滅人類 主名敎者 所當爲敵 而力攻者也 吾嘗謂 得志而行 必能闢之廓如也 今蒙聖知 言聽計從 志可謂得矣 而尙不能闢之 則是終不得闢之矣

무인년(태조7 1398) 여름에 병으로 수일 동안 휴가를 얻음에 이 책을 저술하여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불씨의 해가 인륜을 저버린 지라 반드시 장차 금수를 몰아서 인류를 멸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니, 명교(유교)를 주장하는 자로써 마땅히 적으로 삼아 힘써 공격해야 할 것이오 내 일찍이 뜻을 얻어 행하게 되면 반드시 저들을 깨끗이 물리치겠다고 하였으니 이제 성왕의 알아주심에 힘입어서, 말을 하면 들으시고 계획하면 따르시니 가히 뜻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아직도 저들을 물리치지 못할 것 같소.

 

憤不自已 作爲是書 以望後人於無窮 欲人之皆可曉也 故其取比多鄙? 欲彼之不得肆也 故其設詞多憤激 然觀於此 則儒佛之辨 瞭然可知 縱不得行於時 猶可以傳於後 吾死且安矣

스스로 분을 그치지 못하여 이 글을 지어 무궁한 후인들이 사람마다 모두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오. 그러므로 비유를 취한 것이 비루하고 자질구레한 것이 많으며 저들이 함부로 방자함을 얻지 못하게 하고자 이 글을 쓰는데 분격함이 많았소. 그러나 이를 살펴보면 유불의 분변이 명료해져서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당장 행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후세에 전할 수가 있으니 내 죽어도 편안하오.”하였다.

 

予受而讀之 亹亹不倦 乃歎曰 楊墨塞路 孟子辭而闢之 佛法入中國 其害甚於楊墨 先儒往往雖辨其非 然未有能成書者也

내가 받아서 읽어보니 모두가 적절하여 권태롭지 아니하였다. 이에 탄식하여 말하기를 양,묵이 길을 막음에 맹자가 말로써 물리쳤는데, 불법이 중국에 들어와서 그 폐해가 양주, 묵적보다 심하였다. 선유들이 이따금 비록 그 그릇됨을 변박하였으나 책을 이룰 만한 자가 없었다.

 

以唐韓子之才 籍湜輩從而請之 猶不敢著書 況其下乎 今先生旣力辨 以化當世 又爲書以垂後世 憂道之念 旣深遠矣

당나라 한유 같은 재주로써도 장적, 황보식의 무리들이 따라다니며 저서하기를 청하였으나 감히 저서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그 아래 사람들에게 있어서야? 이제 선생께서 이미 힘써 변론하여 당세를 교화하였고 또 글을 써서 후세에 드리웠으니 도를 근심하는 생각이 이미 심원하였다.

 

人之惑佛 莫甚於死生之說 先生自以闢佛爲死而安 是欲使人祛其惑也 示人之意 亦深切矣

사람들이 불교에 미혹됨이 사생 설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선생이 스스로 불교를 물리치는 것으로써 죽어도 편안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미혹됨을 물리치게 하고자 함이니 사람들에게 보이신 뜻이 깊고도 절실하도다.

 

孟子謂 承三聖之統 先生亦繼孟子者也 張子所謂 獨立不懼 精一自信 有大過人之才者 眞先生之謂矣 予實敬服而欲學焉 故書嘗所言者 以質正云. 洪武三十秊後五月旣望 陽村權近序.

맹자는 삼성(, 주공, 공자)의 계통을 잇는다고 하였으며 선생 또한 맹자를 계승한 분이다. 장자[張載]의 이른바 독립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정일하여 스스로 믿어서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가 있는자라고 한 것이 진실로 선생을 이름이다. 내 실로 공경하고 감복하여 배우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찍이 말한 바를 글로 써서 질정한다. 홍무(명태조의 연호) 31(태조7 1398) 5월 보름에 양촌 권근은 서한다.

 

三峰先生 所著經國典 心氣理及詩若文 皆行于世 獨此佛氏雜辨一書 先生所以閑先聖詔後人 平生精力所在而湮沒不傳 識者恨之

삼봉선생이 저술하신 <경국전>, <심기리> 및 시, 문등은 모두 세상에 행해지고 있으나 유독이 <불씨잡변> 한 책은 선생이 선성을 본받고 후세 사람을 가르친 것으로써 평생의 정력이 담겨 있는 것인데 인몰(죄다 없어짐)하여 전해지지 않으니 식자들이 이를 한탄하였다.

 

歲戊午 予以生員在成均館 吾同年韓奕 先生之族孫也 得此書於家藏亂袟之中 持以示予 觀其文辭豪逸 辯論纖悉 發揮性情 斥虛誕 眞聖門之蕃籬而六經之羽翼也

무오년(세종20 1438)에 내가 생원으로서 성균관에 있을 때 나와 동년(진사) 한혁이 선생의 족손이었다. 집에 소장된 정리되지 않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얻어 가지고 와서 보여주니 내가 살펴보건데 그 문사가 호일하고 변론이 섬세하여 두루 미쳤으며 성정을 발휘하고 허망한 것을 배척하였다. 진실로 성문의 울타리이며 육경의 날개이다.

 

予愛而寶之藏之久矣 今守襄陽 適時無事於公暇 校正謬誤三十餘字 命工刊 以廣其傳 行有志於吾道者 因是書而闢其邪 惑於異端者 因是書而釋其疑 則先生爲書 傳後之志 庶幾遂 而吾道亦且有所賴矣 是書之幸存而不泯 豈不爲吾道之大行哉

내가 애독하여 보배로 삼아 간직한지 오래다. 이제 양양 군수가 되어 마침 일이 없어 공사를 마친 여가에 잘못된 글자 30여자를 교정하고는 공인을 시켜 간행하여 널리 전하니 다행히 우리 유가의 도에 뜻이 있는 자는 이 글로 인하여 사특한 것을 물리치고, 이단에 미혹된 자는 이 글로 인하여 그 의심을 푼다면 선생이 이 글을 지어 후세에 전한 뜻이 거의 이루어질 것이며 우리 유가의 도 또한 힘입은 바 있을 것이다. 이 글이 다행히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어찌 우리 유가의 도에 커다란 다행이 아니겠는가?

 

景泰七秊午月 仲旬 金羅尹起畎 敬跋(按 金羅咸安君 別名)

경태(, 경종의 연호) 7(세조2 1456) 5월에 금라 윤기견이 공경하여 발문을 짓는다, <안 금라는 함안군의 별명이다>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중평의 우리 별 이야기_04  (0) 2013.09.12
韓日 동족론  (0) 2013.09.09
律坤_물과 빛과 소리  (0) 2013.09.05
노중평의 우리 별 이야기_03  (0) 2013.09.03
백민정_조선유학에 오늘을 묻다_07  (0) 2013.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