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色다른 '청주' 길위에 서다

醉月 2014. 11. 26. 18:26


달천천 물길을 따라 ‘옥화 구경’의 제6경인 금관숲에서 제7경 가마소뿔을 지나는 길에서 만난 늦가을의 색깔들. 단풍 든 낙엽송의 노란색, 심어 기르는 단풍나무 어린 묘목의 붉은빛, 아직 바래지 않은 버드나무의 초록, 보드라운 억새의 흰색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를 연상케 했다. 얼마 전까지 이곳은 청원이었지만, 지금은 통합 청주시 땅이다.


모름지기 걷는 길에도 다 ‘맛’이 있습니다. 거친 돌길과 부드러운 흙길이 다르고, 경사진 가파른 길과 넉넉한 평지의 길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즈음에 제맛을 내는 길은 어디일까요. 충북 청주의 상당산성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을 그중 하나로 꼽습니다. 상당산성의 성곽 길은 능선을 따라 유연하게 오르내리며 휘어집니다. 이 길에 오르면 시야의 4분의 3쯤이 늦가을의 청명한 파란 하늘입니다. 나뭇잎을 다 떨군 펜화 같은 나뭇가지 사이로 톡 치면 ‘쨍’하고 금이 갈 것만 같은 파란 하늘이 펼쳐집니다. 그 길 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성곽 수축의 역사 같은 건 다 지워버린다 해도 좋겠습니다. 오로지 늦가을의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맛’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말입니다.

청주에서는 수암골의 골목도 걷는 맛이 훌륭한 곳입니다. 수암골은 겨울을 준비하는 산동네 마을을 벽화로 가꾼 곳입니다. 전국 곳곳에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은 골목들이 많지만, 이곳이 다른 벽화 마을에 비해 특별한 것은 그림들이 어둑한 골목을 환하고 밝게 장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벽과 담장마다 따스한 웃음이 절로 번지게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골목길에 놓인 연탄재에도 얼굴과 말풍선을 그려 넣은 창의적인 솜씨는 또 어떻고요. 겨울을 앞둔 이즈음 덧대고 기운 것들이 보여주는 따스함이 그곳에 있습니다. 이런 훈훈함은 청주의 육거리시장에도 있습니다. 시내 한복판의 난전에 이른 새벽부터 갖가지 먹거리를 펼쳐놓은 시장 사람들의 희망이 또 가슴을 따스하게 덥힙니다.

여기다가 달천천을 따라 이어지는 ‘옥화 구경’ 중의 제7경인 가마소뿔 일대를 보탭니다. 달천천은 속도를 늦춰야만 볼 수 있는 늦가을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깊고 거친 물의 기암 절경은 없지만, 낮은 수심의 느린 물이 부드럽게 흘러가며 유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가을이 저물어갈수록 달천천의 물빛은 파란 잉크색으로 짙어지고 천변의 버드나무 숲 너머로 심어 기르는 어린 단풍나무 묘목의 마지막 단풍이 꽃처럼 붉어지고 있었습니다. 푸른 물빛을 굽어보는 자리로는 구룡산 아래 절집 현암사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본래 옥화 구경이나 달천천, 현암사는 청원군이었지만, 청주와 청원이 지난 7월 합쳐져 ‘통합 청주시’가 됐으니 지금은 모두 ‘청주 땅’이랍니다.



# 하늘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 상당산성

▲ 상당산성의 남문인 공남문으로 오르는 길. 빈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가깝다. 나뭇잎이 다 떨어져 시야가 툭 터지는 늦은 가을 무렵부터는 상당산성의 성곽길을 걸으며 내내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걸을 수 있다.

충북 청주의 대표적인 명소는 단연 상당산성이다. 상당산성은 역사가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쯤이 산책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다. 먼저 역사적인 의미부터. 상당산성은 대표적인 조선 중후기의 석성이다. 본래 백제 때 토성으로 지어졌던 것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 견고한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성을 다시 쌓은 건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선의 전통적인 방어전략은 ‘외적의 침입을 국경에서 막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이런 전략이 처참하게 실패한다. 단 한 번 국경에서 패하자 속수무책으로 적군이 단숨에 한양까지 밀려 들어왔다. 이런 경험으로 조정은 국경이 뚫린 뒤에 적을 막을 방어기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영남과 호남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목인 청주에 상당산성이 다시 견고하게 쌓인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당산성에는 이렇다 할 싸움의 기록도 역사적 인물의 승전도 없다. 높고 단단하게 지어졌으되 역사 속에서는 그저 ‘서 있는 것’으로만 역할을 다했던 셈이다. 그리고 300여 년이 지난 뒤에 산성은 길이 됐다. 구불구불 능선을 따라 부드럽게 오르내리며 이어지는 산성이 ‘방비’란 본래 목적 대신에 걷기의 즐거움을 누리는 유순한 길이 된 것이다. 어디서건 해발 500m가 채 못 되는 상당산에 올라붙으면 성곽을 도는 4㎞짜리 이 길을 만날 수 있다.

상당산성의 성곽길에서는 하늘이 유독 가깝다. 골짜기를 안에 두고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벽의 길 한쪽이 수직으로 내려 깎은 높이 4∼5m의 직벽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나뭇가지들도 단풍으로 물든 나뭇잎을 다 떨군 뒤라 성벽 쪽으로는 어느 것 하나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다. 성벽 너머로 청주 도심 일대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산성의 남문 격인 공남문에서도, 동문인 진동문에서도, 또 서문인 미호문에서도 성으로 올라설 수 있다. 성곽을 다 걷고 제자리로 돌아오겠다면 어디서든 시작해도 좋다. 이렇게 성을 다 돌면 1시간 30분 남짓. 그중 일부 구간만 보겠다면 남문 아래 주차장 쪽에 차를 대고 공남문으로 들어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게 좋겠다. 동문을 거쳐 산성마을 쪽으로 내려오는 짧은 코스도 있고, 동암문을 지나 산성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미호문 쪽에서 내려올 수도 있다. 미호문에 오르면 청주시가지의 모습과 함께 가을걷이가 끝난 너른 들녘이 내려다보이고 그 뒤로는 겹쳐진 산들이 병풍처럼 아스라하다.

상당산성에는 산성을 딛고 가는 길만 있는 건 아니다. 흐려진 상당산성 도로에 최근 ‘상당산성 옛길’이 놓였다. 옛길은 본래 상당산성과 괴산을 잇는 길이자, 시내버스가 다니던 제법 분주한 512번 지방도로였다. 그러다 지난 2009년 산성터널이 생기면서 지방도로의 번호를 새 길에 넘겨준 뒤 이 길은 차량통행이 뚝 끊겼다. 청주시는 올 초부터 이 길의 차량통행을 막고 상당산성과 명암유원지를 잇는 산책길을 놓았다. 옛길은 옛길이되 ‘가까운 과거의 옛길’인 셈이다. 청주시는 이 길을 두고 ‘명품 산책길’이라고 설명하지만, 다른 계절이라면 모를까, 낙엽이 다 진 이즈음은 산성의 성곽을 끼고 걷는 길이 몇 배쯤 더 나았다.

# 잊힌 삶의 방식을 보다… 수암골 달동네

▲ 수변에 억새와 갈대가 가득 피어난 달천천의 물길. 겨울로 다가설수록 물빛의 청색이 짙어진다.

상당산성이 오래전부터 청주를 대표하는 명소로 꼽혀온 곳이었다면, 수암골은 최근 4∼5년 사이에 청주를 찾는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부쩍 잦아진 곳이다. 수암골의 주소는 청주시 상당구 중앙동 15통 3반. 비탈진 산동네의 거미줄 같은 골목에 처마를 맞댄 집들이 모여있는 동네다. 마을은 한국전쟁의 와중에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전쟁 당시 국군을 따라 내려왔던 피란민들은 한동안 우암산 3·1공원 자리에 주둔해 있던 육군병원 안에다 천막을 치고 지냈다. 피란민들에게 청주시는 목재와 흙벽돌을 제공했고, 피란민들은 그 걸로 가구당 스무 평 남짓의 집을 지었다. 그게 수암골 달동네의 시초였다.

허름하고 누추한 산동네가 명소가 된 것은 온전히 벽화와 TV 드라마의 힘이었다. 2007년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우중충하던 집과 담의 벽마다 화사한 벽화가 그려지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보잘것없는 허름한 산동네에 사람들이 몰려들도록 만든 기폭제는 TV 드라마였다. 달동네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덕에 1960,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 몇 편이 이곳에서 촬영을 했고, 그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수암골은 일약 드라마 촬영지의 명소가 됐다.

▲ ‘벽화마을’로 알려진 청주 수암골의 비탈진 골목의 연탄재. 말풍선을 넣은 그림이 그려졌다.

수암골의 벽화에는 유독 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골목길에서 술래잡기를 하거나 말타기 놀이를 하고 합창을 하는 벽화 속 아이들의 표정은 밝다. 그림 속의 아이들은 아마도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었을 테지만, 그 골목에 정작 아이들은 없다. 젊은이들이 다 산동네 아래로 내려가고 수암골의 쉰여덟 가구에는 대부분 골목을 오르내리기조차 버거운 노인들뿐이다. 가파른 골목길의 빙판과 긴 겨울을 걱정하며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있는 노인들의 달동네 마을. 이곳에서 벽화 속의 아이들처럼 환한 웃음과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수암골의 벽화 골목과 누추한 산동네에 딱 붙여 새로 지어진 전망 좋은 대형 카페를 둘러보면서 마음이 불편했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수암골에는 그러나 이웃 공동체의 따스한 온기가 아직 남아있었다. 이런 온기를 볼 수 있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골목 옆의 자그마한 공터로 나와 서로 팔을 걷어붙이고 김장을 하는 모습이나, 연탄배달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좁은 골목 안쪽으로 연탄 리어카를 합심해 미는 모습이 모두 이즈음의 풍경이다. 수암골 사람들은 혹독한 겨울을 ‘함께’ 견뎌야 한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수암골 주민들은 100여 명에 불과하지만, 마을에는 수암골번영회와 15통 동우회, 수암경로당 등 여러 모임이 있다. 철거를 비롯한 이러저러한 송사에 공동으로 대응하고자 만든 게 번영회고, 반상회 때마다 500원씩을 거두면서 만들어진 게 동우회다. 번영회와 동우회는 주민들로부터 돈을 거둬서 서로 경조사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남으면 1년에 한 번 관광을 가기도 한다. 어느 해인가 경로당에서는 닭 100마리를 잡아서 더 어렵게 사는 이들을 대접하기도 했단다.

따지고 보면 비슷한 사정의 이웃과 서로 기대고 연대하는 삶의 방식은 낯선 것이 아니다.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 혹독한 겨울을 건너가던 방식이 다 그랬다. 수암골에 가거든 예쁜 벽화를 골라 기념사진을 찍거나 드라마 촬영지만 보고 올 일은 아니다. 골목 안쪽 낮은 처마의 오래된 집에서 우리가 건너온 시간, 그리고 잊힌 이웃과의 따스한 연대를 추억해 보는 것이 수암골을 보는 좀 더 나은 방법이겠다.

# 화려한 색감의 늦가을 풍경… 달천천

늦가을의 풍경으로는 달천천을 따라 이어지는 옥화 구경 일대를 빼놓을 수 없다. 옥화 구경은 제1경 청석굴을 시작으로 달천변의 아홉 곳 명소를 한꺼번에 부르는 이름이다. 본래 청원 땅이었으나 청주와 청원이 통합 청주시가 되면서 청주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게 된 곳이다. 옥화 구경의 아홉 곳 명소 중에서 대표적인 절경을 보여주는 곳이 제4경 옥화대(玉華臺) 일대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옥화대 일대에다 가을날의 달빛 아래 시심에 젖었다는 추월정이며, 세상의 모든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만경정,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정 등의 정자를 지어 후학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너무 늦게 찾아간 탓일까.

단풍이 다 지고 난 뒤의 옥화대 일대 풍경은 실망스러웠다. 짐작건대 조선의 선비들이 ‘가을 달빛 아래 시심에 젖었다’는 때는, 지금처럼 늦가을이 아니라 가을의 초입쯤이었던 모양이다.

옥화 구경 중에서 늦가을에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제6경인 금관숲을 지나 7경 가마소뿔에서 달천천을 바로 옆에 두고 이어지는 길을 꼽을 수 있겠다. 가로수로 심은 사과나무에 탁구공만 한 사과가 열려있는 길을 따라가면 내내 물 건너편으로 황홀한 색감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물 가까이에는 억새가 치렁치렁하게 꽃술을 날리고 있고, 그 너머로는 일대의 농가들이 심어 기르는 단풍나무 어린 묘목이 이제 막 잎을 선홍빛으로 붉게 물들이고 있다. 어린나무라 단풍이 늦은 건지, 일대의 기후가 그런 건지는 알 수 없되, 작은 단풍나무의 선홍빛 단풍은 붉은 꽃밭을 연상하게 했다.

단풍나무 뒤로는 낙엽송들이 노랗게 물들어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갖가지 색의 물감을 한데 짜놓은 팔레트처럼 달천의 물길을 따라 풍성한 색감의 풍경이 펼쳐지는 이 길은 차로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무래도 아쉬웠다.

이곳에다가 딱 한 곳을 더하자면 구룡산 허리쯤에서 대청호를 굽어보는 자리에 들어선 절집 현암사다. 대청호의 호안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철계단을 디디고 흙길을 지나 20분만 걸으면 가을빛으로 물들어 출렁이는 대청호를 바라보는 가장 아름다운 전망대가 거기 있다. 아홉 마리 용이 모여있는 산세라고 해서 이름 붙은 구룡산의 허리춤에 절집 현암사가 있다. 가파른 절벽을 다듬어 마당을 낸 현암사의 대웅보전 앞에 서면 만수위의 대청호를 끼고 첩첩한 산들이 마치 섬처럼 떠 있다. 나뭇잎을 다 떨군 이즈음에는 거칠 것이 없다.

어찌나 시야가 좋은지 물 건너편의 청남대가 대통령 별장으로 쓰이던 시절, 기관원들이 경호를 위해 상주하기도 했단다. 현암사까지만 해도 더할 나위 없지만, 내처 구룡산의 정상인 삿갓봉까지 오른다면 호수를 둘러싼 산자락을 모두 발아래로 두는 자리에 설 수 있다. 고작해야 373m의 높이에 불과하지만 그만한 높이로 마주하는 경관이 황송해질 정도다.



# 상당산성 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 청주나들목에서 내려 36번 국도를 타고 도청을 지나 영플라자(옛 청주백화점)에서 좌회전해 국립청주박물관을 지나면 상당산성이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청주 나들목에서 내려 현대자동차청주서비스센터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동부우회도를 타고 대전·보은·상당산성 방향을 지나서 찾아가도 된다.

산성 남문 쪽에 제법 넓은 주차장이 있다. 남문을 지나서 산성 안쪽의 산성마을에도 자그마한 저수지를 끼고 차를 댈 수 있는 주차장이 있다. 산성마을 안의 식당들도 주차장을 갖추고 있는 집들이 많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청주에서 유일한 특1급 호텔인 라마다플라자청주호텔(043-290-1000)이 상당산성에서 가깝고 시설이 좋다. 명암파크호텔(043-257-7451)도 괜찮다. 흥덕구에는 뉴베라관광호텔(043-235-8181∼4), 리호관광호텔(043-233-8800)이 있다. 상당산성 안쪽의 산성마을에는 청국장으로 이름난 집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손꼽히는 맛집이 송학정(043-255-8535)이다. 서문동의 경주집버섯찌개(043-221-6523)와 상주올갱이집(043-256-7928) 등도 이름난 맛집으로 꼽힌다. 상당구 내덕1동의 가화한정식(043-221-0231∼2)은 격식을 갖춘 한정식을 내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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