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지기 걷는 길에도 다 ‘맛’이 있습니다. 거친 돌길과 부드러운 흙길이 다르고, 경사진 가파른 길과 넉넉한 평지의 길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즈음에 제맛을 내는 길은 어디일까요. 충북 청주의 상당산성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을 그중 하나로 꼽습니다. 상당산성의 성곽 길은 능선을 따라 유연하게 오르내리며 휘어집니다. 이 길에 오르면 시야의 4분의 3쯤이 늦가을의 청명한 파란 하늘입니다. 나뭇잎을 다 떨군 펜화 같은 나뭇가지 사이로 톡 치면 ‘쨍’하고 금이 갈 것만 같은 파란 하늘이 펼쳐집니다. 그 길 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성곽 수축의 역사 같은 건 다 지워버린다 해도 좋겠습니다. 오로지 늦가을의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맛’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말입니다. 청주에서는 수암골의 골목도 걷는 맛이 훌륭한 곳입니다. 수암골은 겨울을 준비하는 산동네 마을을 벽화로 가꾼 곳입니다. 전국 곳곳에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은 골목들이 많지만, 이곳이 다른 벽화 마을에 비해 특별한 것은 그림들이 어둑한 골목을 환하고 밝게 장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벽과 담장마다 따스한 웃음이 절로 번지게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골목길에 놓인 연탄재에도 얼굴과 말풍선을 그려 넣은 창의적인 솜씨는 또 어떻고요. 겨울을 앞둔 이즈음 덧대고 기운 것들이 보여주는 따스함이 그곳에 있습니다. 이런 훈훈함은 청주의 육거리시장에도 있습니다. 시내 한복판의 난전에 이른 새벽부터 갖가지 먹거리를 펼쳐놓은 시장 사람들의 희망이 또 가슴을 따스하게 덥힙니다. 여기다가 달천천을 따라 이어지는 ‘옥화 구경’ 중의 제7경인 가마소뿔 일대를 보탭니다. 달천천은 속도를 늦춰야만 볼 수 있는 늦가을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깊고 거친 물의 기암 절경은 없지만, 낮은 수심의 느린 물이 부드럽게 흘러가며 유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가을이 저물어갈수록 달천천의 물빛은 파란 잉크색으로 짙어지고 천변의 버드나무 숲 너머로 심어 기르는 어린 단풍나무 묘목의 마지막 단풍이 꽃처럼 붉어지고 있었습니다. 푸른 물빛을 굽어보는 자리로는 구룡산 아래 절집 현암사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본래 옥화 구경이나 달천천, 현암사는 청원군이었지만, 청주와 청원이 지난 7월 합쳐져 ‘통합 청주시’가 됐으니 지금은 모두 ‘청주 땅’이랍니다. # 하늘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 상당산성
그러나 상당산성에는 이렇다 할 싸움의 기록도 역사적 인물의 승전도 없다. 높고 단단하게 지어졌으되 역사 속에서는 그저 ‘서 있는 것’으로만 역할을 다했던 셈이다. 그리고 300여 년이 지난 뒤에 산성은 길이 됐다. 구불구불 능선을 따라 부드럽게 오르내리며 이어지는 산성이 ‘방비’란 본래 목적 대신에 걷기의 즐거움을 누리는 유순한 길이 된 것이다. 어디서건 해발 500m가 채 못 되는 상당산에 올라붙으면 성곽을 도는 4㎞짜리 이 길을 만날 수 있다. 상당산성의 성곽길에서는 하늘이 유독 가깝다. 골짜기를 안에 두고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벽의 길 한쪽이 수직으로 내려 깎은 높이 4∼5m의 직벽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나뭇가지들도 단풍으로 물든 나뭇잎을 다 떨군 뒤라 성벽 쪽으로는 어느 것 하나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다. 성벽 너머로 청주 도심 일대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산성의 남문 격인 공남문에서도, 동문인 진동문에서도, 또 서문인 미호문에서도 성으로 올라설 수 있다. 성곽을 다 걷고 제자리로 돌아오겠다면 어디서든 시작해도 좋다. 이렇게 성을 다 돌면 1시간 30분 남짓. 그중 일부 구간만 보겠다면 남문 아래 주차장 쪽에 차를 대고 공남문으로 들어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게 좋겠다. 동문을 거쳐 산성마을 쪽으로 내려오는 짧은 코스도 있고, 동암문을 지나 산성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미호문 쪽에서 내려올 수도 있다. 미호문에 오르면 청주시가지의 모습과 함께 가을걷이가 끝난 너른 들녘이 내려다보이고 그 뒤로는 겹쳐진 산들이 병풍처럼 아스라하다. 상당산성에는 산성을 딛고 가는 길만 있는 건 아니다. 흐려진 상당산성 도로에 최근 ‘상당산성 옛길’이 놓였다. 옛길은 본래 상당산성과 괴산을 잇는 길이자, 시내버스가 다니던 제법 분주한 512번 지방도로였다. 그러다 지난 2009년 산성터널이 생기면서 지방도로의 번호를 새 길에 넘겨준 뒤 이 길은 차량통행이 뚝 끊겼다. 청주시는 올 초부터 이 길의 차량통행을 막고 상당산성과 명암유원지를 잇는 산책길을 놓았다. 옛길은 옛길이되 ‘가까운 과거의 옛길’인 셈이다. 청주시는 이 길을 두고 ‘명품 산책길’이라고 설명하지만, 다른 계절이라면 모를까, 낙엽이 다 진 이즈음은 산성의 성곽을 끼고 걷는 길이 몇 배쯤 더 나았다. # 잊힌 삶의 방식을 보다… 수암골 달동네
허름하고 누추한 산동네가 명소가 된 것은 온전히 벽화와 TV 드라마의 힘이었다. 2007년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우중충하던 집과 담의 벽마다 화사한 벽화가 그려지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보잘것없는 허름한 산동네에 사람들이 몰려들도록 만든 기폭제는 TV 드라마였다. 달동네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덕에 1960,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 몇 편이 이곳에서 촬영을 했고, 그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수암골은 일약 드라마 촬영지의 명소가 됐다.
수암골에는 그러나 이웃 공동체의 따스한 온기가 아직 남아있었다. 이런 온기를 볼 수 있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골목 옆의 자그마한 공터로 나와 서로 팔을 걷어붙이고 김장을 하는 모습이나, 연탄배달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좁은 골목 안쪽으로 연탄 리어카를 합심해 미는 모습이 모두 이즈음의 풍경이다. 수암골 사람들은 혹독한 겨울을 ‘함께’ 견뎌야 한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수암골 주민들은 100여 명에 불과하지만, 마을에는 수암골번영회와 15통 동우회, 수암경로당 등 여러 모임이 있다. 철거를 비롯한 이러저러한 송사에 공동으로 대응하고자 만든 게 번영회고, 반상회 때마다 500원씩을 거두면서 만들어진 게 동우회다. 번영회와 동우회는 주민들로부터 돈을 거둬서 서로 경조사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남으면 1년에 한 번 관광을 가기도 한다. 어느 해인가 경로당에서는 닭 100마리를 잡아서 더 어렵게 사는 이들을 대접하기도 했단다. 따지고 보면 비슷한 사정의 이웃과 서로 기대고 연대하는 삶의 방식은 낯선 것이 아니다.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 혹독한 겨울을 건너가던 방식이 다 그랬다. 수암골에 가거든 예쁜 벽화를 골라 기념사진을 찍거나 드라마 촬영지만 보고 올 일은 아니다. 골목 안쪽 낮은 처마의 오래된 집에서 우리가 건너온 시간, 그리고 잊힌 이웃과의 따스한 연대를 추억해 보는 것이 수암골을 보는 좀 더 나은 방법이겠다. # 화려한 색감의 늦가을 풍경… 달천천 늦가을의 풍경으로는 달천천을 따라 이어지는 옥화 구경 일대를 빼놓을 수 없다. 옥화 구경은 제1경 청석굴을 시작으로 달천변의 아홉 곳 명소를 한꺼번에 부르는 이름이다. 본래 청원 땅이었으나 청주와 청원이 통합 청주시가 되면서 청주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게 된 곳이다. 옥화 구경의 아홉 곳 명소 중에서 대표적인 절경을 보여주는 곳이 제4경 옥화대(玉華臺) 일대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옥화대 일대에다 가을날의 달빛 아래 시심에 젖었다는 추월정이며, 세상의 모든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만경정,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정 등의 정자를 지어 후학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너무 늦게 찾아간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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