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시도자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예외 없이 자살 후 假死상태에서 무서운 고통을 겪고 있다.
‘현실보다 더 무섭고 괴로운 경험’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 1959년 서울 출생.
⊙ 성균관대 철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석·박사.
⊙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한림대 인문학부장, 일본 도쿄 고마자와대 연구교수 역임.
⊙ 現 한림대 철학과 교수, 生死學연구소(www.lifendeath.or.kr) 소장.
⊙ 상훈: 웰다잉 연구와 보급, 자살예방 활동 공로로 보건복지가족부 장관 표창.
⊙ 번역: 〈티베트의 지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등.
⊙ 저서: <마지막 선물: 웰다잉, 죽음이 가르쳐주는 삶의 지혜> <자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죽음>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
통계청이 2008년 9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07년 한 해 동안 한국의 자살자 수는 1만2174명이었다. 인구 10만명당 자살률로 계산하면 각각 21.8명(2006년), 24.8명(2007년)에 이르는 높은 수치다. 자살률이 충격적으로 증가했다고 말하던 외환위기 직후가 18.4명(1998년)이었으니 현재의 자살률이 얼마나 심각한지 실감할 수 있다.
자살은 수년째 20대와 30대의 사망원인 1위로 나타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한국의 자살률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0개 회원국 가운데 최고라는 사실이다. 자살률이 높은 나라라면 먼저 북유럽, 일본 등 잘사는 선진국들을 꼽던 우리들의 상식은 이미 낡은 것이 되었다.
지난 2003년을 기준으로 할 때 우리나라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은 22.6명으로, 세계적으로 자살률이 높은 헝가리(22.6명), 일본(20.3명)을 제친 지 오래다. 한국은 이제 자살률 세계 최상위의 고위험도 국가가 되었다. 경찰청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07년 자살자 수는 전체 1만3407명으로 통계청 수치보다 훨씬 많다.
통계청 자료로 보면, 1997년 말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 자살이 증가했다가 1999년부터 몇 년 간 잠시 소강상태를 거쳐 2002년 다시 증가세로 돌아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찰청 통계를 보면, 1997년 자살자 수는 9190명이었다가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인 1998년에는 1만2458명으로 자살률이 크게 증가했고, 그 이후에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를 보여 2005년에는 1만4011명으로 최고점에 달한 것을 볼 수 있다. 2007년에는 1만3407명으로 조사되었다. 통계청과 경찰청의 자료를 비교해보면 1997년에 3122명, 1999년에 4637명이나 차이가 났고, 2003년부터 2000여명 수준(2107명)으로 축소되었다. 2005년은 2000명, 2006년은 2315명, 2007년은 1233명이 차이가 났다.
조사 기관마다 서로 다른 자살률 통계
어떤 통계자료를 따르느냐에 따라 자살현황은 크게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결국 국가공식통계인 통계청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자살예방 대책을 수립한다면 차질을 빚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통계청의 통계 부실 이전에 사망신고서에 자살이라고 정확하게 기재하기를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 자살과 죽음에 대한 전반적인 의식 부족이 일차적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매년 자살자의 유서 등을 통해 자살 원인을 자세히 통계로 보고한다. 또 직업별, 배우자 유무별, 가족 형태별로 종합 분석한 뒤 책 한 권 분량으로 만들어 일반에 공개한다.
일본은 이렇듯 자살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사회적 대책을 수립하는 등 체계적으로 자살예방 대책에 힘쓴 결과 2003년 자살률이 20.3명으로 감소했다. 정확한 통계와 실태 파악이 선행되어야 제대로 된 예방대책을 수립할 수 있다는 선례인 셈이다.
경찰청 통계도 문제가 있다고 법의학 전문가인 한길로 박사는 지적하고 있다. 변사체가 발견되면 현장에 법의학 전문가가 직접 조사를 실시해 자살, 타살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현장조사 활동을 하는 법의학 전문가는 우리나라의 경우 최소 200명이 필요한 실정인데, 실제로는 한길로 박사 한 사람에 불과하다.
명문대 의대 교수를 그만두고 ‘서울법의학연구소’를 설립한 한 박사는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경찰의 요청이 있을 경우, 직접 변사체 발견 현장에 나가 현장조사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한 박사는 지적하기를, 시체 감식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경찰이 현장에서 未詳(미상), 不詳(불상)으로 표기한 변사체 가운데 약 15% 정도는 자살일 것이라고 한다. 최근 들어 시체감식의 중요성을 인식한 경찰청은 전국의 경찰서에 검시관 59명을 배치해 변사체가 발견된 현장에서 주검과 그 주변을 철저히 조사하기 위한 노력을 벌이고 있다.
자살 현상과 관련 조사결과들을 놓고 보면, 자살률이 해마다 몇 %가 높아지고 있는가는 정작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정말 심각한 것은 자살의 ‘대기상태’에 있는 예비군이 우리 사회에 엄청나게 많다는 점이다. ‘자살은 현재 내가 부딪힌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판단에 따라 자살할 권리가 있다’, ‘죽으면 나의 모든 고통도 끝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살예비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당장은 자살하지 않겠지만, 어떤 풀기 힘든 어려움이 닥치면 바로 자살을 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자살대기상태’ 예비군
자살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미봉책이나 임기응변이 아닌,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내가 누누이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살 예방은 눈에 보이는 빙산의 얼음덩어리, 즉 자살 현상에 초점을 맞춘다고 해서 성과를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드러난 얼음덩어리 아래 숨어 있는 빙산의 몸체, 즉 죽음에 대한 오해와 우리 사회의 불행한 죽음 방식을 개선하지 않으면 해결되기 어려운 과제다.
자살자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유일한 탈출구가 죽음에 있기라도 하듯 너무 쉽게 자살을 감행한다. 자살자가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은 평소 죽음에 대해 아무런 이해도, 준비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급증하고 있는 자살 현상은 ‘자기 자신의 의지’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사회적 혐의가 짙은 느낌이다. 매일 저녁 뉴스에 거의 단골처럼 빠지지 않는 자살 소식만으로도 우리는 자살 문제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적 과제요, 발등에 떨어진 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사람들은 왜 자살하는 것일까? 지난 10년 간 한국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재 우리 사회의 자살은 연령과 계층, 성별을 가리지 않고 불특정 다수에게서 무차별적으로,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지나친 학습 부담으로 인한 중고생과 재수생의 자살이라든가, 인터넷 사이트의 공개적인 유혹, 경기침체 장기화로 인한 자살, 실직과 직장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 외로운 독거노인의 자살 등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자살이 날로 심각해지는 상황임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자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제시된 적이 없다.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사람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는 지금, ‘왜 자살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더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해답이 한시 빨리 명확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이 주제에 있어서 만큼은 죽음 문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生死學(생사학)의 관점이 효과적일 것이다. 생사학은 좀 더 본질적이고 전체적인 차원에서 죽음과 자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자살하면 눈앞의 고통에서 벗어나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붙들고 있는 자살 충동자들에게, 왜 자살해서는 안 되는지를 한 번도 일러주지 않은 채 한두 번의 상담만으로 마음을 바꾸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 기대는, 자살하면 위기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자살 충동자들의 기대만큼이나 막연한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죽음을 알면 자살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자살 사례들을 생사학의 관점에서 검토해 자살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다음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자살은 더 큰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둘째, 자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셋째, 자살은 고통의 끝이 아니다. 자살한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다. 넷째, 우리에게는 자살권이 아니라 인간답게 죽을 권리만 있다. 다섯째, 자살은 남은 사람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다. 여섯째,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영혼의 성숙을 위해서다.
자살하면 모든 고통이 소멸되고 평안해질까? 여러 사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작은 섬유회사 사장 S씨는 회사가 갑자기 어려워졌고 부인마저 경쟁회사의 이사와 함께 달아났다. 그는 자살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살하면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고, 死後(사후)의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자살을 감행했다.
얼마 뒤 그는 병원 침대 위에서 “오, 정신이 드나”하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간신히 눈을 떴다. 그는 假死(가사)상태에 있었던 7시간 동안 무서운 사후세계를 체험했다. 그는 현실보다 더 무섭고 괴로운 사후세계에서 구출된 것을 크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살 행위로 인해 커다란 고통을 겪은 그는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현실보다 더 무섭고 괴로운 경험
자살 시도자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예외 없이 자살 후 가사상태에서 무서운 고통을 겪은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현실보다 더 무섭고 괴로운 경험’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졸저 <마지막 선물>에서도 소개했던 ‘최면치료기법’을 통해 이미 여러 차례 밝혀진 바 있다. 정신과 전문의 김영우 박사는 최면치료기법을 통해 자살한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하는지를 자세히 보고하고 있다.
최면치료기법은 다른 치료방법으로는 좀처럼 낫지 않는 마음의 병을 앓는 환자들로 하여금 과거 삶에서의 기억과 감정들을 정리하고 이해하게 함으로써 환자를 괴롭히던 증상들을 크게 호전시키는 치료 방법이다. 최면요법의 역사는 짧지만 이미 수년 전부터 미국의 정신과 교과서에 수록되어 공인된 치료방법의 한 가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미국 국립보건연구원에서 ‘연구를 장려할 만한 새로운 치료법들’ 중 한 가지로 엄선한 것이므로 객관성과 효과를 믿을 만하다.
박씨는 45세의 남자 환자로서 만성적 두통과 불면, 우울과 무기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약물 복용과 상담치료 등을 오래 받았으나 별 차도가 없어 최면치료를 받고자 했다. 두 번째 최면치료 시간부터 前生(전생)퇴행을 시도하여 찾아낸 과거 삶의 기억 속에서 그는 중국의 부잣집 아들의 모습이었다. 그는 스무 살 무렵 아버지를 갑작스런 사고로 잃은 후 집안이 몰락하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며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음의 과정을 거치며 몸에서 빠져 나온 그의 영혼은 그렇게 맥없이 생을 마감한 자신의 결정이 큰 잘못이었음을 깊이 느끼고 반성했으나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이번 삶의 모습도 과거의 삶과 흡사한 것이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 그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큰형과 형수의 손에 자라나며 모멸감을 심하게 겪었다. 경제적으로도 쪼들리는 형편인데다 마음의 여유 없이 생활하며 성장기와 청년기를 보내는 동안 그의 외로움과 위축감, 우울감은 점점 깊어져 갔다.
마치 과거 삶에서 끝까지 성실하게 살며 극복했어야 할 어려운 문제들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어 재시험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돌이켜보면서 현재의 우울과 무기력이 과거 삶의 자살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지금의 어려운 여건이란 것도 과거의 삶에서 소화하고 극복하지 못했던 과제가 연장된 탓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치료 결과 환자는 현재 삶의 어려운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하나씩 풀어나가는 것만이 올바른 삶의 자세라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자살은 ‘고통의 끝’이 아니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자살하면 자신의 삶과 함께 모든 문제도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지니고 있다. 이렇듯 죽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음 이후가 있다는 생각에 대해 과학적으로 증명해보기를 요구한다. 과학이란 살아있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살아있는 인간의 관점에서만 이루어낸 학문이므로, 죽음문제는 과학의 연구 범위를 벗어나 있다.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단정하던 사람이 막상 자살로 생을 마친 후에 새로운 삶을 맞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사는 게 너무 허무하고 고통스럽다며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죽으면 지옥에 가거나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해 어떻게 해서든지 삶의 시간을 연장하려는 사람도 있다. 두 경우 모두 죽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죽음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은 결국 공포와 두려움이 얼룩진 표정으로 숨을 거둠으로써 남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만 남기게 된다. 그러나 죽음은 자연스런 삶의 과정이다. 진정한 의미의 적은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無知(무지)다.
사람은 그가 누구건 그가 살아온 모습과 살아온 마음 그대로 죽음을 맞게 된다. 삶을 더 의미 있게 살면 살수록 죽음을 맞는 순간 역시 더 평안하고 후회 없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바로 지금 이 삶에서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죽음의 순간이건 죽음 이후건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롭게 죽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거나 성냄, 집착, 공포 같은 감정으로 마음이 크게 혼란스럽다면, 평화롭게 죽을 수 없음 또한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고자 한다면, 올바르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지금의 이 삶에서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고 자기 삶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일이 중요하다. 인간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죽음의 순간과 죽음 이후에 대가를 치르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죽음을 맞는 방식과 직결되므로, 잘 사는 사람만이 잘 죽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죽음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가장 불행한 죽음인 자살을 선택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자살 사례 또는 자살 충동자들을 조사해보면 자살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개인적 이유, 둘째는 사회병리 현상 또는 사회구조적 문제, 셋째는 자살과 죽음에 대한 오해 등이다. 개인적 이유와 사회적 문제가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자살은 자살의 원인을 쉽게 제거하기 어렵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개인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부딪히는 좌절이란 사람들의 삶 속에 늘 일어나는 일이다. 사회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자살 역시 사회 분위기와 제도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해결이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자살예방교육 실시해야
그러나 세 번째 자살 동기, ‘죽음과 자살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진 자살의 경우, 자살예방교육을 통해 당사자가 가진 잘못된 죽음관이나 자살관을 바꾸기만 하면 자살 충동을 상당 부분 치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살다가 극심한 어려움에 부딪히면 자살로써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살하면 자기 삶도 끝나고, 고통도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는 것을 가르치기만 해도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는 두 딸과 어머니 생각에 자살을 잠시 유보해 둔 상태에서 수업을 듣게 되었다. 수업시간에 죽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말을 듣고 그는 너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지긋지긋한 이 삶을 자살로 끝낼 수도 없다는 말이냐, 그럼 나는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는 식으로 처음에는 격하게 반응했다. 자살을 잠시 유보해 두었다가 언젠가 때가 되면 자살하리라는 희망을 그는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살한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면서, 또 그런 마지막 기대가 무너지면서 수업 듣는 내내 혼란에 휩싸였다. 책을 많이 읽었던 그는 수업시간에 추천해 주었던 책을 차분히 정독하는 등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자살예방 워크숍에서 자신의 아픈 과거, 교육에 의해 바뀐 자신의 삶을 증언하기도 했다.
자살은 정말 예방해야 하고, 자살예방교육이 필요하고, 자신도 자살예방 도우미 역할을 하겠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교육에 의해 자기는 완전히 바뀌었지만, 친구들에게 전해주려고 해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소연한다. 친구들은 교육 받기 이전의 자기 생각과 대동소이했지만, 교육을 받은 이후 자살과 죽음을 바라보는 자기의 시선은 너무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대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자살예방교육 수강생 695명에 대해 첫 시간과 마지막 시간에 동일하게 실시한 의식조사 결과 상당수 학생들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잘 살아야 편안하게 죽는다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 당장 직면하고 있는 문제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는 자살이 해결책이 된다거나 우리에게 자살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 죽으면 고통도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살률이 아무리 높다 해도 대책을 임시방편이나 미봉책으로 세워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살자들이 자살충동을 심각하게 느끼면, 그 때부터는 자살을 막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자살 예비징후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나 자살에 대해 체계적이면서 심층적인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자살예방교육 수강자들이 자살과 죽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쉽게 바꾸듯 자살률도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다.
자기 판단에 따라 자살해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자살이 해결책이라는 생각, 죽으면 고통도 끝이라는 생각을 바로잡는 자살예방교육이 절실하다. 한 학기 교육만으로 수강자들의 의식이 어렵지 않게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죽음과 자살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해 자의적으로 막연하게 상상하다가, 교육을 통해 왜 자살해서는 안 되는지를 알게 되자마자 쉽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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