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한국 현대사의 어느 구석을 들춰봐도 미국의 흔적은 또렷하다.
5·18의 광주도 예외가 아니다. 1989년 6월 미 국무부는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미국 정부 성명서’를 내놓았다. 1988년 국회 광주특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이었다. 한국에서 광주를 직접 겪은 미 행정부의 두 고위 관리인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와 위컴 주한미군사령관도 각각 비망록 형식의 저서를 통해 나름대로 광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는 귀한 자료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광주가 흘린 피의 진실을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1980년 5월 주한 미 대사관은 한 달 동안 매일 평균 3∼4건의 비밀 전문(電文)을 워싱턴으로 타전했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이 ‘광주 보고’ 전문 가운데 일부는 그의 저서에도 실려 있고, 한국 학계나 언론계에 일부 내용이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12·12 쿠데타에서부터 5·18의 발단과 전개, 그 이후 상황을 미 행정부의 비밀문서만을 통해 시간대와 날짜순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신동아’는 이번 호부터 미 행정부의 비밀문서 발굴과 분석 작업을 하고 있는 KISON(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 : 한반도 정보서비스넷)과 공동 작업으로 5·18 관련 미 비밀문서를 통해 1980년 5월을 재구성하는 특집 연재물을 싣는다. 새로 발굴된 800매 가량의 광주 관련 미 비밀문서 가운데 가려 뽑은 1차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초기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의 오판, 5·18을 전후한 미국의 침묵과 분노, 진압군 특전사 병력의 이동 상황, 12·12로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 신군부와의 세(勢) 겨루기, 정보 공백 상태에서 판단마저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글라이스틴 대사가 ‘가장 균형 잡힌 광주 보고’라고 평가한 광주 체류 미 선교사의 현장보고 등이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첫 회는 ‘글라이스틴의 오판’ 편이다. 집필을 맡은 KISON의 이흥환 편집위원은 ‘미 비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2002년)을 발간한 바 있다(편집자).》
24년이 지난 1980년 5월 광주의 참극을 되짚어본다. 1980년 봄, 미국의 역할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미국이 한국 국내문제라는 이유로 아무리 거리를 두려고 해도 미국과 광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좁혀질 수 없다. 오히려 이 거리를 제대로 측정하지 않고서는 1980년 봄은 물론 광주 비극의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기 어렵다.
5월18일 광주에서 시작된 평화로운 시위가 유혈 참극으로 막을 내리는 과정에서 미국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미국은 무슨 일을 했고 무슨 일을 하지 않았나? 이는 미국이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한 물음일 뿐이다. 미국이 마땅히 취했어야 할 행동이나 취하지 말았어야 할 태도에 대해 묻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1988년 여름 한국 국회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해 겨울 외무부를 통해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 대사와 존 위컴 전 미 8군사령관에게 광주특위 출석 증언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해 12월2일 미 국무부는 이들의 특위 출석 증언을 거부하고 성명서로 답변을 대체했다. 국무부가 ‘배경 설명(Background er)’이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이 성명서와 이를 보충해 발간한 ‘광주 백서’가 지금까지 미 행정부가 보여준 공식 입장의 전부다.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장군이 각각 자신들의 저서에서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고 ‘광주사태’라는 용어 사용이 신군부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이 글에서는 1980년 5월 당시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광주사태’라는 표현을 쓴다 해서 과거사를 잘못 인식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해 ‘광주사태’로 표기함 : 필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국무부의 공식 문건인 ‘배경 설명’ 및 ‘광주 백서’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일부 민감한 부분은 사용한 어휘까지 똑같다.
미 정부 입장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귀한 기록을 남긴 글라이스틴 대사나 위컴 장군도 하고 싶었던 말은 하되 불필요한 ‘잡음’을 일으킬 만한 구석은 피해갔다. 그들의 글은 국무부의 ‘배경 설명’이나 ‘광주 백서’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서울은 예전처럼 조용하다’
개인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게 마련인 관련 당사자들의 증언만으로는 광주의 진실을 드러내기에 한계가 많다. 당시 상황을 기록해놓은 미 비밀문서들은 왜 이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수단들 가운데 하나다. 주한 미 대사관과 워싱턴의 국무부 사이에 오간 비밀 전문, 국방정보국(DIA) 보고서 및 백악관 상황실의 회의록 등을 통해 피비린내 나는 한국 현대사에 한미관계가 어떤 모습으로 삽입되어 있는지 들추어본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99년에 발간된 ‘뒤얽힌 관계, 영향력의 한계(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라는 저서에서 광주사태를 ‘한국에 영원한 상처를 남긴 사건으로, 한국전 이후 한국사에서 평화로운 시기에 발생한 가장 심각했던 위기’라고 규정하고 있다. 상당히 조심스럽고 신중한 표현이다. 사태 발생의 주체,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언급은 모두 피했다.
자신의 표현대로 글라이스틴은 ‘한국전 이후 가장 심각했던 평화시 위기’ 상황을 미국을 대표하는 대사 자리에 있을 때 맞았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한 지 반 년 뒤로, 연이어 터진 12·12 군부 쿠데타의 여파로 긴장 상태였으며, 계엄령 하에서 ‘1980년 봄’의 사태 추이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때였다.
비밀문서에 따르면, 19년 후에 발간한 저서에서 광주사태를 10·26이나 12·12보다 더 심각한 위기라고 평가했던 글라이스틴은 사태 초기에는 그 심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국무부에 타전한 대사관 비밀 전문에는 5월18일 유혈 진압이 시작된 지 사흘이 지난 5월21일까지도 광주 상황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실시된 첫날인 5월18일 오전 9시, 주한 미 대사관이 워싱턴의 국무부로 타전한 3급 비밀 전문(제목 : 5월18일 오전 9시 현재 한국 상황)은 ‘오전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된 후 서울은 예전처럼 조용하다’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오전 4시 통행 금지가 해제된 후 서울은 예전처럼 조용함.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군 병력이 경계를 서고 있는 정부 주요 건물에 무장 병력 수송 차량이 주둔. 오전 2시, 군 병력에 대학 구내 진입 지시 하달됨. 일부 인사가 체포되었다는 보고 들어옴. 김대중씨 부인과 접촉했던 서방 기자들에 따르면, 다수 군인이 김대중씨 집을 샅샅이 수색한 후 김대중씨를 연행해 갔음.」
이 문서는 김대중씨 외에 김종필 공화당 총재,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문익환 목사 등 주요 인사들의 연행 사실도 전하면서, 전문 마지막 부분에 광주를 언급하고 있다.
「5월18일 오전 4시 이후 AFKN 방송을 통해 한국 내 미국 시민들에게 활동 자제와 계엄령 준수를 주의시키는 대사 명의의 성명이 방송되고 있음. 광주, 부산, 대구 소재 미 문화원 보고에 따르면 모든 것이 평온함.」
소문 소문 소문…
5월18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국무부로 타전된 또 하나의 전문 역시 광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5월18일 서울, 학생/대학 상황’이라는 제목의 이 전문에는 ‘5월18일 자정 직후 서울의 모든 대학이 군 병력의 통제하에 들어갔다’는 내용만이 들어 있을 뿐이다. 이 시간 광주에서는 이미 시위 군중에 대한 무력 진압이 자행되고 있었다.
광주에서 시위 군중을 상대로 특전사 병력의 진압작전이 실시된 시간은 5월18일 오후 3시였다.
이날 오전 10시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 50여명이 특전사 부대원과 대치하던 중 투석전이 벌어졌으며, 오전 11시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작된 시위대의 연좌시위는 오후 2시가 넘어서면서 시위 군중이 1600여명으로 불어났다. 경찰이 진압에 실패하자 특전사가 투입됐다.
주한 미 대사관이 국무부로 발송한 전문에서 광주사태가 처음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5월19일 오후 5시부터다. 다음은 ‘5월19일 오후 5시 한국 상황’이라는 제목의 전문 가운데 주요 부분이다. 이 전문은 광주사태 초기 상황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미국의 이런 시각은 이후에 전개된 광주사태 전반에 대한 인식의 바탕이 되고 있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5월19일 하루 종일 광주를 제외하고 서울과 한국 전역이 조용함. 서울의 공공건물과 언론사에는 병력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음. 신민당과 공화당 중앙당사에도 군 병력이 배치되어 있음. 서울에서 학생 시위가 있으리라는 소문이 있으나 오후 5시 현재 아무 징후 없음.
5월18일 광주에서 발생한 폭동(riots)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며, 오후 3시 현재 수천 명의 군중이 길거리에서 시위중인 것으로 알려짐.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학생 한 명이 무장병력 수송 차량에 깔려 죽음.
광주 폭동과 관련해 서울에까지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특전사 병력이 착검한 소총을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학생 희생자가 다수 발생했음. 일부 광주 시민은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떤 북한인보다 진압군이 더 무자비하다(ruthless)고 말한 것으로 알려짐.
교토통신 보도와 광주 미문화원 보고에 따르면, 상당수의 일반 시민이 학생과 함께 시위에 가담하고 있음. 오후 5시 현재, 3000명 가량의 시위대가 군인 한 명을 인질로 잡았다는 경찰 보고가 있음. 잔인한 진압 소문에 대해 경찰은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음. 이런 소문들은 서울 및 기타 지역의 학생 및 일반 시민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음.
견해 : 서울에서 우리가 만나본 사람들 대부분은 계엄령 확대 조치에 실망하고 있음. 재야인사들도 실망감을 안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군부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는 입장임.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에는 이미 시기를 놓쳤으며, 일부 소수 인사들은 정치인들이 정부 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음.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미국이 군인들을 병영으로 복귀하도록 만들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으며, 학생들이 재결집해 군부 통제를 흔들 수도 있으리라고 보고 있음. 광주 폭동은 광주가 김대중씨의 출신지라는 점에서 더 큰 문제가 되고 있음.
보안사령부의 나중 보고에 따르면, 광주 폭동에 관련된 숫자는 소문보다 훨씬 적으며, 사실은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함. 」
이 문서는 광주사태에 대한 글라이스틴 대사의 초기 상황 파악과 관련해 중요한 점 세 가지를 알려준다.
첫째, 글라이스틴 보고가 사실이라면, 그는 광주사태 첫날에 발생한 특전사 부대의 무력 진압 사실을 하루가 지난 뒤에야 소문 차원에서만 알고 있었다. 글라이스틴은 자신의 책에서 ‘광주 미 문화원 보고를 통해 주한 미 대사관이 광주에서 일이 터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간은 5월18일 밤’이라고 적고 있다. 18일 밤에 첫 보고를 받았고, 이튿날 소문을 듣기 시작한 셈이다. 광주 미 문화원의 첫 보고가 글라이스틴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시킬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은 앞으로 더 살펴볼 문서 내용에서도 드러난다.
둘째, 신군부 통제하에 있는 한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광주사태를 ‘폭동’으로 인식했다. 폭동은 시위 군중이 일방적으로 무질서하게 ‘폭력을 행사(violent)’했을 때 붙일 수 있는 말이다. 계엄하의 한국 정부나 미 대사관의 광주에 대한 시각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5월27일 진압군 재투입에 대한 신군부와 미 대사관, 위컴 장군의 논의에서도 미국은 신군부에게 ‘최소한’이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진압 병력 동원’에 동의했다.
셋째, 사태의 원인, 동기 등 본질적인 문제가 파악되기 전에 광주가 김대중의 출신지라는 점과 전라도라는 지역 특성을 사태를 바라보는 중요한 틀로 인식했다. 이런 편향된 인식은 이후에도 그의 사태 판단에 크게 작용한다. 광주사태가 진압군 재투입으로 또 한번 피를 뿌리며 마무리되는 5월27일까지 국무부로 타전된 문서는 물론 이후의 사태 평가보고서에서도 전라도의 지역 요인은 자주 강조되고 있다. 글라이스틴의 책에서도 역시 이 점을 강조해놓았다.
넷째, 사태 발생 이틀째까지도 광주보다는 서울 상황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다. 글라이스틴은 자신의 책에서도 ‘서울 상황에 몰두해 있었다’고 쓰고 있다. 5월20일 하루 사이 국무부로 타전한 6건의 문건에서도 광주사태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5월19일 박동진 전 외무장관과의 한국 국내 정치 토론’ ‘체포된 정치인 명단’ ‘5월20일 내각 사퇴’ ‘5월20일 한국 상황 보고’ 등의 제목이 달린 문서가 광주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3장짜리로 된 ‘5월20일 오후 2시 한국 상황’ 문서 끄트머리에는 광주 상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광주를 제외한 서울 외곽 지역은 조용함. 광주에서는 질서 유지를 위한 군 병력의 강압적인 진압으로 상당한 분노심이 유발된 것이 틀림없음. 광주 진압군의 잔악성에 대한 소문이 계속 서울에 유포되고 있음. 경찰 보고에 따르면, 민간인과 군의 충돌로 (농아자라고만 신원이 확인된) 민간인 사망자 1명이 발생했음. 대부분이 민간인인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보고도 있음. 다수 부상자 발생과 잔악 행위에 대한 소문은 진압군이 총검을 사용했다는 것을 말해줌. 광주문화원 보고로는 착검한 병력을 보긴 했으나 무기가 사용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함.
군 병력이 학생들을 색출하려고 가정집과 공공장소를 무작위로 수색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음. 군인들이 체포된 사람들(prisoners)의 옷을 벗기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나 어디까지 옷을 벗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함. 체포된 사람 수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음. 광주에 투입된 특전사 병력이 전라도와는 전통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경상도 출신이라는 소문 때문에 지역 적대감이 확산되고 있음. 광주문화원의 오후 1시45분 보고에 따르면 도심에 민간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음.」
무자비한 무력진압 후 심각성 인식
이때까지도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보고한 광주 관련 정보의 거의 모든 것은 소문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미 국무부가 1989년 6월에 발간한 ‘배경 설명’ 성명서와 글라이스틴 개인의 기록에도 광주사태 초기에 주한 미 대사관이 접할 수 있는 정보라고는 광주문화원에서 보고되는 제한된 정보와 광주에서 12마일 떨어져 있는 미 공군기지로부터의 역시 제한적인 관찰 보고, 외신 보도뿐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위의 5월20일 오후 2시 발송 문서만 보더라도 진압군의 난폭한 진압에 대한 여러 종류의 보고가 있었음에도, 주한 미 대사관의 한국 정치상황 보고에서 광주에서의 사태 진전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주사태에 대한 미 대사관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건 5월21일부터. 그러나 이때는 이미 광주사태의 비극의 씨앗이 된, 시위 군중에 대한 강압적인 진압이 이뤄진 후 특전사 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시점이었다. 미국은 이후 광주사태에 대한 평가에서 첫 무력 진압이 이루어진 5월18일이나 27일의 전면 재진압보다는 5월21일을 사태의 정점(peak)으로 파악하고 있다.
진압군의 구타 장면, 체포된 시위대가 발가벗겨진 채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는 모습, 군화로 구타당하는 젊은이의 모습 등 광주사태 초기의 현장 모습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전하고 있는 대부분의 자료는 5월19일 또는 20일의 기록물들이다. 20일 오후가 지나면서 강경진압에 분노한 군중의 시위는 MBC 방송국과 시청을 점령하는 등 과격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고, 21일에는 시민들이 무장을 시작했다.
사태 초기 소문 차원의 정보에 의존해 광주사태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미 대사관의 판단대로라면 시민군과 무장 병력이 대치하는 사태로까지 번진 5월21일을 사태의 정점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5월21일 글라이스틴은 국무부에 총 6건의 문서를 타전한다. 청와대 동정, 신임 국무총리(박충훈) 임명 등 일반 보고 문서가 2건이고, 한국의 전반적인 상황 보고가 2건이며, 나머지 2건이 광주 관련 보고다. 5월18일 이후 독립적인 제목으로 광주 관련 보고가 타전된 것이 이때부터이며, 5월21일자 문서에서 비로소 광주사태의 원인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광주 폭동은 지역주의가 원인”
5월21일 문서 가운데 첫째는 광주 투입 병력의 시위대에 대한 발포 사실을 언급한 문서다. 이때부터 보고되는 시민군의 공공건물 파괴와 진압군에 대한 공격 사실은 소문의 형태가 아니라 미 대사관이 파악한 ‘사실’의 형태로 기술되고 있다.
「제목 : 5월21일 오후 2시40분 현재 한국 상황 보고
서울, 부산, 대구 계속 평온 유지. 광주 관련 소문 계속 유포중.
광주 : 5월20일 광주 도심에 시위 군중 8만∼10만 운집. 오후 7시 시위대가 특전사 병력과 공공건물 공격. 최소 5개 경찰서가 공격당함. 2개 방송국은 전소됨. 지방 계엄사령부와 시청, 우체국, 도청 등이 모두 포위당하거나 점령당함.
5월21일 늦은 아침, 광주의 한 미군 관찰자는 진압군이 발포했다는 사실을 보고함.
서울을 출발한 한국군 2∼3개 연대가 광주에 투입되고 있음.」
다음은 5월18일 이후 처음으로 광주 관련 제목을 독립적으로 붙이고 광주 관련 내용만 담고 있는 2장짜리 3급 비밀 문서다. 사태의 원인에 대한 언급도 처음으로 담겨 있다.
「제목 : 광주 폭동과 향후 정치적 안정
5월21일 오후부터 광주의 무질서 상태가 극도로 심각한 상태로 진행중임. 군부가 질서 회복을 위해 상당한 병력(considerable force)을 투입할 것으로 보이며, 향후 몇 년간 지속될 상처와 피해가 이미 많이 발생했음.
광주의 구호들은 여러 면에서 서울이나 기타 지역의 구호와 유사함. 그럼에도 왜 이 남부 지역 도시는 심각한 폭동 상태에 빠졌으며, 정부의 공공질서 유지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는가? 아마도 격렬한 광주 폭동에는 지역주의가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전라도민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스스로를 2등 시민이라고 느껴왔으며, 전라도의 정치 지도자인 김대중 구금 소식과 계엄 확대 소식을 접하고 민첩하게 정부 당국과 대치하려는 생각에서 시위가 가속화되었음.
경찰과 군은 이들에게 특히 가혹하게 대응했는데, 이는 정부 당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으나 전라도민은 그렇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음.
광주 폭동은 정치 환경에 반미 감정이라는 약물을 투여하게 되었음. 대다수 한국인들은 미국이 상황을 제어할 수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폭동의 부산물로 사상자가 발생하고 구타와 방화가 일어난 점 때문에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해 가졌던 생각이 훨씬 생생하게 깨져버렸음.
폭도들은 미국이 한국군을 지원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현재 발생한 일에 대해 책임이 있는 쪽으로 연결시키고 있음. 바깥에서 악역을 찾으려는 이런 경향은 향후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
앞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이 문서에서도 글라이스틴은 광주사태의 발생 원인으로 지역주의를 거론하고 있다. 전체 5개항 42행의 문서 분량 가운데 35행을 할애해 사태 원인과 향후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지역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 주한 미 대사관의 국무부 보고 문서의 끄트머리에는 모두 글라이스틴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전문을 글라이스틴 대사가 직접 작성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대부분은 정치 담당 직원이 작성하고 대사의 이름으로 보고되는 것이 전문 작성의 관례다. 그러나 대사의 의견과 상치되는 내용이 대사의 이름으로 보고될 수는 없으며, 대사에게 보도하지 않은 채 타전되는 전문은 있을 수 없는 것 또한 전문 작성의 관례다.
5월21일에 타전된 전문 가운데 ‘광주 위기’라는 제목이 붙은 문서는 지역주의에 근거한 원인 분석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
「제목 : 광주 위기
광주의 대규모 반란이 여전히 통제 불능이며, 최소한 지난 20년 사이에 국내에서 이와 유사한 사태에 직면해본 적이 없는 한국 군부에게 비상 상황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음.
직접적인 원인(immediate cause)은 김대중 및 전라도 출신 정치인들에 대한 정치 탄압인 것이 분명하지만, 현재로서는 모든 전라도민이 폭력에 가담하고 있으며, 뿌리 깊은 역사적 지역 적대주의를 반영하고 있음. 최소 15만명이 가담하고 있으며, 대규모 파괴가 이루어졌음. 최신 정보에 의하면, 폭도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와 탄약, 폭탄을 탈취했음. 한국군은 오늘 밤 군 병력을 시 외곽으로 철수시킬 계획임.
위컴 장군은 (폭도들의 : 옮긴 이) 침투에 대비해 내부 비상 수준을 강화하기로 동의했으며, 비공식적으로는 데프콘 3에 해당하는 비상 대책을 강구하고 있음.
우리는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도 논의했음. 사태 진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만약 그가 그렇게 할 의지가 있다면, 김대중뿐인데 그는 구금 상태이고 아마도 큰 양보를 받아내지 않는 한 도움을 주려 하지 않을 것임.
다른 어떤 인물(hero)도 나서려 할 것 같지 않음.」
시위 강경진압에서 시민군의 무장 대항이 전반부라면, 5월21일을 기점으로 광주사태는 후반부로 접어든다. 사태 전반부 내내 글라이스틴은 광주 문제를 심각하게 대하지 않았다. 제한된 현지 관찰 정보 때문이었다는 것이 글라이스틴의 주장이다.
그러나 당시 데이비드 밀러 광주 미 문화원장이 대사관과 전화로 처음 접촉한 시간은 글라이스틴의 말대로 5월18일 밤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점이었다. 심각할 만큼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으며 진압군의 난폭한 진압에 시민들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는 현지 상황도 전달되었다.
“이 사태는 당신네 정부가 막아줘야 한다”
하지만 글라이스틴이 사태를 심각하게 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이나 지난 5월21일이었다. 당시 미 대사관 무관이었던 제임스 영(James V. Young)은 2003년에 발간된 ‘한국 관찰(Eye on Korea)’이라는 제목의 비망록에서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5월20일 낮, 나는 약속도 없이 한 한국 육군 중령의 사무실에 들렀다. 그는 광주 출신이며 전두환의 참모를 지낸 바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사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주차장으로 가더니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광주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해 현지 사정을 전해 들었다는 것이었다. 부모님 말에 따르면 상황은 끔찍할 정도이며 특전사 군인들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사태를 당신네 정부가 막아줘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서둘러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5월20일 늦게까지도 우리는 광주의 비극이 어느 정도인지 확신을 못하고 있었다. 돈 블로티(Don Blottie) 대령(제임스 영의 상관 : 옮긴이)과 봅 브루스터(Bob Brewster)에게 바로 보고를 했지만 광주가 그 정도로 악화되어 있으리라고 믿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제임스 영의 이 증언은 위에서 살펴본 글라이스틴의 국무부 보고 문서에 나타난 바와 일치한다. 제임스 영은 5월20일 오후라는 시점은 이미 미국이 광주 상황에 영향을 끼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글라이스틴은 광주사태 초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대응하는 속도도 늦었고, 워싱턴에 사태의 진실을 보고하는 것도 늦었다. 그러나 글라이스틴은 무엇보다도 신군부가 주도하는 한국 정부를 크게 자극하지 않으려는 워싱턴의 대한국 정책을 충실히 따랐다. 5월18일과 19일 이틀 동안 광주의 참극보다는 서울의 정치 지형 변화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글라이스틴도 ‘서울 상황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주한 미 대사관만 광주에 비중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워싱턴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은 미 대통령선거의 해였고, 이란 인질 구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탓에 워싱턴의 봄은 이란 문제로 시끌시끌한 상태였다.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이 이란 사태에 대한 책임 등을 이유로 4월28일 사임했고 에드먼드 머스키가 새 국무장관이 됐다.
미 국무무가 한국 문제로 고위 정책검토 회의를 처음 소집한 것은 광주사태가 후반기로 접어든 5월22일이었다. 이날 머스키 국무장관이 주재한 검토회의가 끝난 후 호딩 카터 국무부 대변인이 광주사태에 대한 미 정부의 입장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미국의 첫 공식 입장이었다.
5월22일 광주 상황만 후반부로 접어든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미국에게도 압력이 가해졌다. 5월22일 워싱턴에 타전한 글라이스틴의 전문에는 지금까지와는 천양지차로 긴박감이 배어난다. 다음은 신임 머스키 국무장관에게 발송한 전문 가운데 주요 부분이다.
「제목 : 광주 위기 관련, 미 정부의 후속 성명 건
호딩 카터의 5월21일(미국 시간 : 옮긴이) 성명은 도움이 되었으나 광주에는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았음. 상황은 극도로 심각함. 점점 더 많은 한국인이 미국의 입장을 알고 싶어하며, 한국 정부도 우리가 성명을 발표해주기를 원하고 있음. 보다 중요한 것은 위컴 장군과 본인이 한국 군부로부터 우리 정부의 입장을 밝힌 문안을 검열하지 않은 채로 배포할 것이며, 상황이 완전히 악화되지 않는 한 최소한 이틀 내에는 광주에서 강압적인 진압으로 우리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확약을 받았다는 것임.」
사태 호전될 것으로 오판
미국은 신군부와 신군부에 반대하는 한국민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입장 표명의 압력을 받은 것이다.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에 성명서에 포함시킬 4개항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성명서는 내일 기자회견 때 발표해 내일 이곳 신문에 보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로울 것임.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야 함.
-우리는 광주에서의 시민 분쟁(civil strife)에 경악하고 있음(alarmed)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극도의 자제심을 발휘,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를 추진할 것을 촉구함’
글라이스틴은 미 정부 발표문에 위의 2가지 사항 외에도 북한을 의식해 ‘미 정부는 한국 상황을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 세력의 기도에 대해서도 조약 정신에 의거, 강력하게 대처할 것임을 재천명한다’는 내용도 포함시키면서 ‘비화 통화기로 워싱턴 시간 오전 8시에서 8시30분 사이에 전화할 것임’을 머스키 국무장관에게 알렸다.
글라이스틴의 제안대로 이튿날인 5월22일(워싱턴 시간) 국무부 대변인은 글라이스틴의 문안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성명을 발표했으나, 언론을 통제하고 있던 한국의 신군부는 미국의 이런 입장이 일반에게 전달되는 길을 봉쇄해버렸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의 오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군부측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위컴은 이 일을 두고두고 비난하게 된다.
광주사태 초기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대응으로 일관하던 글라이스틴 대사는 5월21일을 기점으로 ‘극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인식을 하게는 됐으나 사태 수습 과정에서 또 한번의 오판을 하게 된다. 광주 질서 회복을 위해서는 계엄군 재투입이 불가피하다는 신군부의 주장에 ‘최소한의 무력 동원’을 용인한 것이다. 사실상 이 ‘최소한의 무력 동원’은 이미 5월22일 머스키 국무장관 주재 하에 열렸던 고위 정책검토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이었다.
신군부로부터 광주 질서 회복을 위한 진압군 재진입 계획을 통보받기 하루 전인 5월23일 글라이스틴이 국무부에 발송한 전문은 무력 진압의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쪽으로 파악하고 있다.
「제목 : 5월23일 오후 3시30분 현재 한국 상황
광주 상황이 늦은 속도이긴 하지만 호전되는 것으로 보임. 유재현 합참의장은 군 병력이 하루나 이틀 후 광주에 재진입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음.
견해 : 광주의 무질서 상태에 대한 무장 진압을 피하는 방향으로 지난 24시간 사이에 상황이 호전되었음. 하지만 진압군이 광주시로 평화롭게 성공적으로 재진입하기 전까지는 확실하지 않음. 광주시 재진입은 며칠 후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임.」
연합사 병력 ‘떼주기’ 합의
5월23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와 만났다. 이들간의 대화내용을 요약한 4장짜리 문서는 2급 비밀로 분류되었고 비밀 해제된 문서에는 박 총리서리가 말한 부분이 거의 삭제되었다. 주로 신군부에 대해 언급한 대목들이다. ‘국무총리서리와의 첫 회동’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요약 :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와 첫 회동을 가짐. 본인 요청으로 이루어진 회동이며, 본인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이후 미국의 대 한국 정책을 요약해 설명했음. 한국의 5월17일 계엄령 확대 정책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말했음. 시위를 확고하게 진압하는 것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정치 탄압을 수반한 것은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결국 광주에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는 데 일조한 것이 틀림없다는 견해를 피력했음.
그리고 우리(박 총리서리와 글라이스틴 : 옮긴 이)는 한미연합사 지휘하에 있는 병력을 광주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국 당국에 ‘떼주기(chop)’로 합의를 보았음.’」
글라이스틴 대사와 박충훈 총리서리의 병력 ‘떼주기(chop)’ 합의가 있었던 날, 광주에서는 시위대의 무기 회수를 둘러싸고 시민군 내부에서 강온파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광주시 전체로 봐서는 시민들이 거리 청소에 나서는 등 안정이 회복되어가고 있었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강경파의 주장대로 진압군 재투입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흘 후인 5월27일 오전 2시,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 작전이 개시되었고 광주사태는 또 한번의 피를 뿌리면서 마무리가 지어졌다. 새벽 5시23분이었다. 5월22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열렸던 고위 정책검토 회의(PRC, Policy Review Committee)에서의 결정 사항대로 ‘최소한의 병력’이 동원된 ‘질서 회복’이었다. 다음은 2급 비밀로 분류되어 있는 1980년 5월22일의 고위 정책검토 회의록 전문(全文)이다.
「정책 검토 위원회(Policy Review Committee) 1980년 5월22일
장소 및 시간 : 백악관 상황실, 오후 4시~5시15분
주제 : 한국
<참석자>
국무부 : 에드먼드 러스키 장관 (의장), 워런 크리스토퍼 차관, 리처드 홀부르크 동아태 담당 차관보/ 중앙정보국(CIA) : 스탠스필드 터너 제독, 존 홀드리지 중국 및 동아시아 담당/ 합참 : 데이비드 존스 장군, 합참 부의장 존 퍼스테이 중장, 육군 부참모장 존 베시 장군/ 백악관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 데이비드 아론/ 국가안보회의 : 도널드 그레그/ 국방부 : 헤럴드 브라운 장관,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 닉 플래트, 국제안보담당 차관보 데이비드 맥기퍼트
<결론 요약>
한국의 현 상황에 대한 충분한 논의 끝에, 최우선 순위는 향후 무질서 상태가 확산되지 않도록 필요한 무력을 최소한으로 사용해 한국 정부가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합의에 도달했음. 일단 질서를 회복시킨 후에는 정치 자유의 수준을 한층 높이도록 한국 정부, 특히 군부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음.
브레진스키 박사는 접근 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음.
즉, ‘단기적으로는 지원하되,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정치 발전의 압력을 가한다’는 것임.
머스키 국무장관은 결정지을 사안들을 제시했고 그 의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음.
1. 공개 성명 : 5월22일 성명으로 당분간은 충분하다는 데에 동의.
2. 광주 상황에 대한 미국의 자세 : 지금까지 우리가 취해온 행동 이상의 일은 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동의. 우리는 온건한 방법을 선택할 것을 조언했으나, 한국민이 질서 회복의 필요를 느낄 경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음.
3. 미국의 추가적인 군사조치 : 현재는 아무런 추가조치가 필요하지 않다는 데에 동의. 한국민은 우리가 해당지역에 조기경보기를 신속하게 배치한 것을 좋아하고 있음. 북한에 대한 미국의 비상경계 조치는 올바른 판단이었음.
항공모함 코럴 씨(Coral Sea)의 위치를 재검토중임. 현재는 필리핀 북부에 있으며 동쪽으로 이동중임. 항로를 동해상으로 재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음.
머스키 국무장관은 국방부에 차후 발생할 수도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 필요한 추가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함. 특히 머스키 장관은 폭력이 광주 외곽으로 확산될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와, 만약 한국군 재배치가 북한군 방어 임무에 지속적으로 위협이 될 경우 국방부가 대안을 준비해줄 것을 요청.
4. 미국인의 방한 : 수출입은행 존 무어 총재의 방한 문제가 토의됨. 글라이스틴 대사의 의견을 구하고, 무어 총재가 일본에 도착한 후 최종 결정을 하기로 동의함. 다른 방한 일정을 취소함으로써 한국인들에게 부정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실수가 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회의 참석자들 사이에 형성되었음(OPIC의 리월른 방한이 이미 취소된 바 있음).
5. 광주에서의 질서 회복 후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나 : 우리가 할 일은 광주 상황이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점에 동의했음. 만약 사망자가 적게 발생하고 잘 처리될 경우 조용히 정치 발전에 대한 압력을 가할 수 있을 것임. 만약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 경우 정책검토 회의를 재소집해 방법을 강구하기로 함.
6. 광주 이후의 목표 : 머스키 장관은 한국에서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좋긴 하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 목적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에도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청했음.
현재는 글라이스틴 대사를 재소환해서는 안 되며, 당분간 워싱턴에서 특사를 파견할 필요도 없다는 데에 동의했음.」
광주의 분노는 ‘아주 못되게 행동한’ 공수특전단과 중앙정부에 대한 것이었으며, 중앙정부는 광주가 보기에 형평을 잃고 있었다.
광주사태 기간 내내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는 현지의 반미(反美) 분위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반미 분위기 조성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이 신군부의 병력 동원을 ‘승인(approve)’해 주었다는 말이 나돌았기 때문이며, 미국이 사태 악화를 방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이를 방관하고 있다는 광주 현지의 인식도 반미 분위기를 북돋웠다.
주요 임무는 법과 질서 회복
미국의 역할에 대한 광주 현지의 인식이 어떻든 간에 반미 정서나 반미 움직임이 발생한 데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주한 미 대사의 몫이었다. 주한 미 대사는 한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워싱턴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미국의 국익을 해칠 수 있는 반미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주한 미 대사는 워싱턴에 설명을 해야 할 처지였다.
군과 시위대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던 5월23일 금요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반미 문제와 미국의 역할을 주제로 한 전문(電文) 한 건을 워싱턴으로 띄운다. 글라이스틴이 광주사태 기간에 워싱턴으로 발송한 전문 곳곳에 반미 감정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지만, 아래 두 장짜리 보고문에서는 반미 문제라는 단일 주제만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이 보고문의 제목은 ‘미국의 위치에 대한 한국 국내의 반응’이다.
『1980년 5월23일 09:03
제목 : 미국의 위치에 대한 한국 국내의 반응
1. 내용 전체
2. 우리는 현 한국 상황에서 미국이 취하고 있는 자세가 일부 지역에서 반미 움직임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음. 특히 미국이 공공질서 유지를 위한 특정 병력의 이동을 승인했다는 점이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될 수 있음. 아무런 무리가 방법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 곤혹스러우며 이 때문에 이런 비판이 더 커지고 있는 실정임. 이런 감정을 폭발시키기에는 미국이 더없이 편리한 희생양인 셈임.
3. 위의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내의 모든 미국인 근무자와 미군은 지역 문제(광주 건 : 옮긴이)를 언급할 때 극도의 주의를 요하고 있음. 미국의 입장을 묻는 질문을 받을 때에는 근무 요원 모두가 참고 사항에 언급된 공식 문안의 내용만 활용할 것이며, 한국 상황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는 관련되지 않도록 자제할 것임.
미국의 병력 이동 승인 건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을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현재 주요 임무는 법과 질서의 회복이라는 우리의 확신을 재확인할 것임. 우리의 이런 조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임.
4. 워싱턴에서 나오는 그 어떤 공식 언급도 위에서 언급된 사항들을 감안해 주의해 줄 것을 요망함. 예를 들어 국방부 대변인(미 펜타곤 대변인 : 옮긴이)이 공식 회견 자리에서 미국이 광주에 병력을 떼주었다(chopped)고 한 발언이 한국 조간지에 일제히 보도되었으며, 이런 일은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음.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반미 분위기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세를 낮추고 불필요한 언급은 삼가기를 요망함.』
신중한 글라이스틴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전 주한 미 대사였던 윌리엄 포터나 필립 하비브에 비해 더 신중하고 세심한 편이다. 특히 워싱턴으로 타전하는 문건의 표현이나 기술 방법에 있어 포터나 하비브에 비하면 워낙 완곡하고 조심스러워, 문맥을 잘 뜯어보아야 할 만큼 두드러져 보이는 용어나 어휘는 잘 선택하지 않는다.
물론 재외공관의 전문 작성 원칙과 관행을 벗어날 만큼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실한 문구를 선택하지는 않지만 전문 전체의 분위기가 꽤 차분하다는 것이 글라이스틴 재임시 주한 미 대사관에서 생산된 문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이런 성품이 광주사태 당시 미국의 행동 결정에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작용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원만하고 모나지 않은 원칙주의자로서 선비풍의 글라이스틴 대사가 박정희 시해에서 12·12 군부 쿠데타, 광주사태로 이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한국 정치 현실의 한가운데에 주역의 한 사람으로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뒷이야기는 풍성할 것임에 틀림없다.
광주사태 막바지에 현지 수습대책위원리에서는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행동’을 요구한 적이 있다. 광주 협상이 대책위 내 강온파의 의견 불일치로 난항을 겪고 있던 5월26일의 일로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하기 하루 전이다. 대책위에서 당시 ‘뉴욕 타임스’ 광주 취재 기자였던 헨리 스캇 스토우크스를 통해 미국에 중재를 요청했던 것이다. 주한 미 대사관은 당시 상황을 워싱턴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가 광주 특파원 헨리 스캇 스토우크스의 기사를 게재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음. 광주 현지의 학생 지도부가 스토우크스 기자에게 요청하기를 미 정부가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협상 중재역을 맡도록 해달라고 했다는 내용의 기사임. 서울 주재 ‘뉴욕 타임스’ 기자인 헨리 캄은 이 문제를 당 대사관 정보담당관에게 알려왔으며, 정보담당관은 캄에게 대사관은 그런 요청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통보했음.』
글라이스틴은 자신의 회고록에서도 이때의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고 썼다. 미국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한국 내부문제인 광주사태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미국은 광주에 관한 한 끝까지 제3자의 입장이기를 바랐고 그런 원칙이 행동반경을 결정지었다.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된 병력 이동 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대응에서도 이런 원칙은 끝까지 지켜졌으며, 5월27일 이후 전개된 전두환 정권 등장이라는 한국 정치에서도 미국의 원칙적인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 개입하지 않을 것”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광주사태를 전후로 전개된 한국 상황은 예측하기 힘들고 변화의 방향을 종잡기 힘든 일이 꼬리를 물고 터져나오는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가 한국에서의 사태 전개에 얼마나 곤혹스러워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두 건의 문건을 소개한다.
하나는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으로 사태가 막을 내린 5월29일 자신이 직접 작성해 머스키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문이다.
『1980년 5월29일 12:15
제목 : 〈한국 초점〉 최근 상황에 대한 한국인의 대응
전두환 및 그 그룹이 실제로 정권을 장악한 것과 관련해 한국인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를 워싱턴의 고위정책검토반이 궁금해하고 있으며 곧 주요한 고위정책 검토회의가 열릴 것이라는 점을 본인도 알고 있음.
본인이 이전 참고사항 보고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에게는 한국인의 반응이 아주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요소임. 만약 대부분의 한국 국민이 새롭게 부상한 권력 구조에 편안하게 적응해 살려는 의지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도 그 상황에 따라갈 수가 있음. 그러나 만약 한국민 대다수가 새로운 지도부를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며 새로운 권력과 대결 구도로 가게 된다면 우리의 입장에 변화가 있든지 아니면 우리는 개입하지 않을 것임.
불행하게도 현재 우리는 한국 국민의 여론 향배에 대해 어떠한 신뢰할 만한 판단도 내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님. 우리는 이 여론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정보력을 동원하고 있으며, 다음 주중에 이에 대한 보고가 있을 것임.
많은 미국인은 한국 국민들 사이에 (새로 부상한 권력층에 대해 : 옮긴이)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으나, 여러 증거를 종합해 볼 때 상황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님.
더 자세한 정보를 전하지 못해 유감이며, 우리 보고서가 제때 시간을 맞추지 못해 워싱턴이 당혹스러워한다는 점도 알고 있음. 그렇긴 하지만 우리의 정책은 미국의 예측이 아닌 현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보며, 한국민이 어떻게 반응하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좀더 시간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성이 있다고 봄.』
이 문건에서 알 수 있듯이 5월27일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해 사태가 마무리된 이틀 후에 워싱턴과 주한 미 대사관의 관심은 이미 광주가 아니었다. 광주 유혈참극의 발단이 된 초기 공수특전단의 시위대 가혹 진압 때 글라이스틴 자신의 표현대로 미국이 ‘서울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듯이 광주사태가 유혈 마무리된 후 미국은 다시 전두환 정권 등장이라는 정치게임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전두환의 언론플레이와 여론조작
광주사태 마지막 날인 5월27일 미 대사관이 작성한 ‘1980년 5월27일 오후 10시 현재 한국 상황’이라는 제목의 보고문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광주는 조용한 것 같음. 서울의 라디오 방송은 오후 3시 진압군의 광주 재진입으로 발생한 사상자 수를 수정 발표했음. 17명의 폭도가 사살당했고 295명이 체포되었다는 보도임. 군인도 두 명 사망했음. 사상자 수가 훨씬 많으며 진압군이 질서 회복을 위해 강경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서울에 퍼지고 있으나,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가택수사 같은 일은 군 병력이 아닌 경찰에 의해 진행되고 있음.
5월27일 계엄사령부를 통해 광주 현지의 팀 워런버그, 주디스 체임벌린, 데이빗 도링거 등 미국인 평화봉사단원 3명의 안전이 확인되었다고 보건사회부 장관이 통보해 주었음.
광주 현지가 상대적으로 조용해졌다고 판단, 당 대사관의 대기관찰(standby watch) 업무는 5월27일 오후 11시를 기해 종료함.』
이 짤막한 마지막 보고문은 광주사태를 보는 미 대사관의 입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한국 정부 당국이 발표하는 현지 정보에 의존하면서 광주 현지의 질서 회복이라는 피상적인 사태 파악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질서 회복이라는 이름 아래 사살된 광주 ‘폭도’의 숫자는, 실명이 거론된 평화봉사단원 같은 자국민 보호에 대한 미 정부의 열정적인 의지를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만든다.
글라이스틴은 위 전문을 타전한 같은 날(5월29일) 새로 등장한 상대에게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놓는다. 새로운 정치 게임의 시작이다. 광주사태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재개된 ‘서울 게임’을 시작하려면 12·12 사건 이후 누적되어 온 전두환 그룹과의 불편한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전두환 신군부의 일방적인 언론 플레이와 미국의 입장에 대한 여론 조작을 꼬투리로 잡았다.
『제목 : 5·17 관련 미국 대응에 대한 언론 조작
최근 전두환 장군은 언론사 발행·편집인 대표자 모임에서 미국이 12·12 사건을 사전에 통보받았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음.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한국 신문은 5·17 사건과 관련해 ‘이해한다’ 또는 ‘승인했다’는 본인의 언급을 곡해 보도했음.
본인은 당 대사관 언론 담당자인 노먼 반스에게 아래에 적은 구두 메시지를 전두환이 연설한 모임에 전달할 것을 지시했음. 전두환과 공개적으로 언쟁하기를 원치 않으며 이는 관련 발언 기록을 수정하는 데 과도하게 관련되지 않으려는 이유에서임. 아래 메시지는 구두로 전달된 것이며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음.
메시지 인용 : 본인은 몇몇 오해가 발생한 두 가지 사안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요구받았음.
첫째는 특정 사건(12·12를 지칭 : 옮긴이)을 미국 정부가 사전에 어느 정도 통보받았느냐 하는 것임. 위컴 장군과 글라이스틴 대사는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되기까지 수 시간 동안 (정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해간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었음.
미 정부는 전두환 장군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 사실을 공표 약 4시간 전에야 통상적인 소문 차원에서야 알게 되었으며, 글라이스틴 대사는 공식적으로 공표 30분 전에 통보받았음. 글라이스틴 대사는 또 비상계엄령 선포를 추인하는 국무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국무회의 개최 약 30∼60분 전에 통보받았음.
둘째는 5월23일 금요일 오찬모임에 대한 것임. 이 오찬모임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근 한국 상황과 관련, 양당 국회의원들에게 비공식적인 견해를 밝힌 바 있음. 글라이스틴 대사의 이날 발언 내용은 이튿날 ‘코리아 헤럴드’와 ‘코리아 타임스’에 영문으로 정확하게 게재되었으나, 일부 한국어 신문은 글라이스틴 대사가 5·17을 ‘이해한다’거나 ‘승인했다’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했음.
비상계엄령의 필요성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며, 학생시위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 글라이스틴의 첫 발언이었음. 그 다음 그는 정치 지도자 체포와 국회 해산, 그에 따른 정치 파탄 등에 반대한다는 강력한 의견을 개진했음.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런 자신의 견해가 5월18일 워싱턴 국무부 대변인의 공식 언급과 일치한다는 것도 국회의원들에게 상기시킨 바 있음.』
“가장 균형잡힌 기록이자 분석”
글라이스틴 발언의 왜곡 전달은 전두환 신군부와 글라이스틴 사이에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불신의 골을 깊게 파놓았다. 언론 조작 건 외에도 글라이스틴은 광주사태에 대한 미 국무부의 공식 입장 전달이 무산되는 등 신군부가 정치적 합의를 일방적으로 뒤집어버리는 바람에 곤혹스러운 사태를 여러 번 겪었다.
글라이스틴 입장에서 신군부는 ‘반칙’만 일삼는, 꼴도 보기 싫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위컴 장군(미8군 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위컴과 글라이스틴의 차이가 있다면 군인인 위컴은 끝까지 전두환에 대한 분노와 노여움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으나, 외교관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의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는 선에서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5월27일 새벽 5시30분, 광주는 마지막 피를 흘리고는 잊혀져버렸다. 이후 전개된 새로운 정치 상황을 보면 광주가 망각된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정치권이 그토록 바라던 ‘법과 질서’가 회복되었고, 정치가 재개되었던 것이다. 광주는 이런 점에서 새로운 정권 탄생 과정에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피의 제례’에 바쳐진 희생양이었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광주사태 배경으로 지역주의를 강조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유추할 수 있다.
광주는 군(軍)과 민(民)이 아무런 매개체 없이 직접 부닥친 사건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이 일방적으로 민을 건드렸다. 당시 신군부는 정권 창출에 방해가 될 만한 세력을 하나씩 제거해가는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우선 정치권을 동결시켰고, 학생시위를 원천 봉쇄했으며, 무엇보다도 일찌감치 12·12를 통해 군 내부의 정지(整地) 작업을 마무리했다.
미국이라는 요소를 상대하는 데에도 신군부는 성과를 올렸다.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미8군 사령관은 12·12 이후 내내 신군부에 끌려다니기만 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확대하면서 정권 창출에 바짝 다가섰다. 남은 일은 대세를 굳히고 반발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공포 요법’의 필요성이었을 것이다.
광주사태의 발단을 공수특전단의 가혹 진압이라는 우발적 요인에서만 찾는 것이 과연 옳은가?
글라이스틴 대사가 미 국무부에 타전한 광주 관련 보고문건 가운데 ‘광주 폭동에 대한 내부자(insider)의 견해’라는 이색적인 제목의 전문이 한 건 포함되어 있다.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한 지 2주 후인 6월10일에 작성된 장문의 문건이다. 이 문건에서 ‘내부자’란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 있었던 한 미국인 선교사를 지칭하는 말이며, 원래 문건에는 선교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1993년 정보공개법(FOIA=Freedom of Information Act)이 발효되면서 이 문건이 비밀에서 해제될 때 이름이 가려진 채 공개되었다.
기록 당사자인 선교사는 ‘광주 지역에 오래 거주해 지역 사정에 밝으며, 광주사태 전 기간에 걸쳐 광주에 있었던’ 사람으로만 소개돼 있을 뿐 개인 신상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선교사의 생생한 현지 기록을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 중에서 가장 균형잡힌 기록이자 분석’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정보의 진위 여부와 가치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평가해야 할 자리에 있었던 주한 미 대사가 ‘가장 균형잡힌 기록이자 분석’이라고까지 언급한 것은 꽤 이례적인 평가다.
사태 당시 광주 현지의 생생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주한 미 대사 입장에서는 뒤늦게 입수된 것이긴 하지만(이 기록의 정확한 입수 시점과 입수 경로 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선교사의 이 현장 기록이야말로 귀한 정보였을 것이고, 정보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아 이 기록은 이후 미국의 광주사태 사후 평가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임에 틀림없다.
모두 10부로 구성된 이 기록은 5월18일 이전 상황에서 시작해 날짜별로 사태 전개를 기록하고 있으며, 5월19일 공수단 병력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한 상황과 시민 수습위원회 강온파 사이의 의견 대립 등 중요한 순간의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 진압 병력이 가혹 행위를 했는지 여부와 관련한 소문에 대해서는 ‘직접 목격했다’ ‘소문은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등 사실에 근거해 기술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한국 광주에서의 5·18 사건에 대한 요약된 회고’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기록 내용의 일부는 사태 당시와 이후 시민단체의 자료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알려졌으나 전체 내용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선교사의 원래 기록에는 특정 상황을 목격한 사람의 이름이나 직책 등이 밝혀져 있으나 이 문서에서는 가려져 있기 때문에 본문 번역에서는 000로 표시했음을 밝혀둔다.
다음은 5월19일 특전사 병력의 강경 진압을 전후한 초기 1주일 간 기록 가운데 주요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광주 시위가 참혹한 유혈 사태로 번지게 된 배경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록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으며, 광주사태 전 과정에서 ‘우발’과 ‘의도’의 경계선이 어디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먼저 사태 발단에 대한 기록이다.
『〈5월18일 이전〉
5월15일 목요일,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밤에는 횃불 시위도 있었다. 유신헌법과 계엄령 반대에 초점이 맞추어진 시위였다. 매달 15일에 있던 민방위 훈련이 이날은 취소되었고, 폭동 진압 경찰들이 포진했으나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포진한 위치에서 시위대를 관찰만 했다.
5월16일 금요일, 광주 일부 거리의 교통이 차단되었고 진압 경찰이 동원되었다. 밤의 횃불행진에서는 전두환의 이름이 거명되며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반대 구호가 나왔다(한국어를 잘 알아듣는 한 선교사는 시위대가 기독교 계통의 ‘내게 강 같은 평화’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진압 경찰의 움직임은 없었으며 시위는 자정이 되어서야 끝났다.
이곳 사정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전으로 출장을 가려 했던 선교사들에 따르면 대전행 버스표를 한 장도 구할 수 없었는데, 대전으로 이동하는 군인들 때문에 표를 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 선교사들은 토요일에야 기차로 대전에 갈 수 있었는데 대전행 기차에는 현역 사병이 대거 타고 있었으며, 그 군인들은 민간인 승객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등 포악한 행동을 취했으며 군인들끼리 서로 치고받아 피를 흘리기도 했다. 장교는 보이지 않았다.
5월17일 토요일, 광주는 조용했다. 일요일인 18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며 휴교령이 내려진다는 발표가 있었다.
〈5월18일 당일〉
광주에 있던 선교사들은 5월18일 일요일에 언제 어떻게 폭력 사태가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침나절에는 조용했으나 교회에서 돌아온 정오 무렵부터 일부 선교사들이 아침에 일어난 폭력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일요일 광주 시내에서 공수특전단 부대원들을 봤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침 9시에 봤다는 사람도 있고, 정오에 봤다는 사람도 있다.
일요일 오후부터 공수특전단 부대원들이 아무 까닭도 없이 청년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이 곳곳에서 목격되었다. 000와 000가 직접 그런 장면들을 목격했으며, 이들에 따르면 특전단 부대원들이 그냥 길을 걷고 있던 청년 몇 사람에게 잔혹하게 폭력을 가했다는 것이다(보다 자세한 내용이 필요하면 이야기해 줄 수 있음).
5월18일 하루 종일 또는 그 후 며칠 동안 선교사 가운데 그 누구도 민간인 신분의 진압 경찰이 시민들에게 잔혹행위를 가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며, 두 다리 혹은 세 다리 건너서도 그런 장면을 보거나 들은 사람은 없다. 진압 경찰은 공수특전단 대원들이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은 채 제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공수특전단 대원이 한 시민에게 잔혹한 폭력을 가할 때 이를 제지하려던 한 경찰관이 공수특전단원에게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나중에 들려왔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한 교통 경찰관이 네거리에서 공수특전단 부대원 한 명과 다투는 것을 000가 목격했는데, 군인은 택시에서 한 여자를 내리게 하려고 했고 경찰관은 그 택시를 그냥 보내려고 하면서 경찰관과 군인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것이다(이 장면을 목격했던 000 선교사는 가던 길을 가기 위해 그 현장을 떠났으므로 그 후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군인들의 행동은 실제 공격을 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술적으로 겁을 주려는 것일 수도 있다).
일요일 밤이 되면서 군인들의 무자비한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더 늘어났다. 일요일 오후 늦게 000는 광주 관광호텔 창문을 통해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남자들이 공수특전단원들에게 야경봉으로 두드려 맞고 발로 차이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이런 무자비한 구타는 이제 흔한 장면이 되었다.
광주사태 초기 상황을 전하는 이 선교사는 공수특전단의 ‘까닭 없는 잔혹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진압 대상이 시위 학생들이 아니라 일반 청년이었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선교사의 이런 관찰은 사태가 마무리되는 5월27일 이후까지도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으며,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곁들여 자신의 견해를 입증하고 있다.
필자는(이 글을 쓴 선교사 자신을 지칭 : 옮긴이) 일요일 오전에 시외의 시골에 나갔다가 오후 일찍 돌아와 밤에는 시내에 있는 교회에 들렀으나 그 어떤 불상사를 보거나 들은 바가 없다. 무자비한 구타 행위는 주로 특정 장소나 대로변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못된 전라도 놈들 죽이러 간다”
『〈5월19일 이후의 사태 전개〉
5월19일 월요일, 하루 전 일요일에도 공수특전단원들의 무자비한 구타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들렸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월요일에 집중적으로 나왔다. 필자의 가족들만 그런 불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남을 통해서라도 들은 바가 없는 것 같다.
심각한 폭력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맨 처음 들어온 것은 월요일 아침이다. 아마도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미 문화원장 데이빗 밀러가 관공서 건물을 방화하려는 시도(시도들?)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화로 알려준 월요일 오후에 처음으로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소규모의 저항이라고 할 만한 일이 처음 벌어진 것이다.
000의 목격담에 따르면 일요일 오후 3명의 군인이 한 행인을 구타하자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돌을 던졌다. 군인 한 사람이 계속 청년을 구타하는 동안 나머지 두 명의 군인이 돌을 던진 사람들을 쫓아갔으나 잡지는 못했다고 한다. 월요일에도 돌을 던지는 투석 저항이 이어졌다.
특전사 부대원들이 청년들을 찾아내기 위해 집을 수색한다는 보고를 처음 들은 것은 월요일이다. 시내버스를 세워 청년들을 내리게 한 다음 구타했다. 공공건물과 식당 건물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군인들이 개인주택도 수색을 하는지는 확실치 않다(광주 시민들은 특전사 부대원들이 개인주택도 수색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우리는 구체적인 사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음).
한 한국인 목사(필요하다면 이름을 밝힐 수 있음)는 특전사 부대원들이 강한 경상도 억양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못된 전라도 놈들(no-good cholla-do rascals)을 죽이러 간다’고 한 말도 들었다고 한다. 다른 목격자는 토요일 대전행 기차에 타고 있던 군인들처럼 기강이 해이해진 행동을 하는 특전사 부대원들을 보았다고 한다. 또 조선대학교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 술에 취해 있던 것이 분명하며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를 질러댔다고 한다.』
폭동이나 약탈은 전혀 없었다
『그 군인들에게는 의도적으로 식사가 제공되지 않았다는 소문도 있으며, 술을 먹였다는 소문도 있고, 또 거친 행동을 하도록 약을 먹였다는 소문도 있다. 소녀들의 옷을 벗겼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당사자들의 증언에 따른 것은 아닌 것 같으며, 우리가 직접 확인한 바로는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없다.
공수특전단 대원들이 학생들에게 가혹행위를 했다는 말을 듣기 이전에는 시위대가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동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으며, 가혹행위에 대한 얘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한 후에도 우리는 시위대가 폭력을 휘두른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장 진압 병력이 광주시에서 물러난 뒤에도 시위대들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동이 일어났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무장 병력이 시위대를 진압할 때를 빼고는 광주에서는, 예를 들어 미국의 마이애미 사태처럼 도심에서 폭동이 일어나 무질서한 약탈이 벌어진 적은 결단코 한 번도 없다.
우리가 알기로는 월요일(5월19일) 이후에는 광주 시내에서 공수특전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월요일 한밤중쯤 퇴각한 것으로 보이며, (전라북도에 주둔하고 있던) 다른 병력으로 대체되었다.
5월21일 수요일 아침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진압 경찰이나 군 병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길거리의 시민들이 시위 학생들에게 성원을 보내고 광주시 전체가 학생들의 시위를 거들고 같이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5·18 사건은 광주 시민 차원의 일이며, 학생들만의 시위로 한정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자신은 이런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지만, 이것이 사태의 진실이라는 점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수요일 아침, 남녀 청년들이 픽업 트럭과 버스, 군용차나 경찰차에 올라타고 시가지를 누볐다. 길가에는 젊은이와 노인들이 늘어서서 이들을 환영하며 성원을 보냈다. 필자는 한 여인이 차에 탄 청년들에게 음료수를 주는 것을 두 번이나 목격했다(술을 주는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며, 술에 취한 학생도 없었다).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비극적인 일이다. 우리는 사상자에 대한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나 공수특전단이 철수한 뒤로는 무자비한 잔혹 행위가 일어났다는 소리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진압 병력이 교체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광주의 상황이 무장 대치라는 형태에서 폭동 진압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광주 기독병원에 실려온 부상자 가운데 첫 사망자는 아이를 찾아 헤매다가 총검에 등을 찔린 사람이었다.』
선교사들이 시민 구타 막아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직간접적 개입 여부는 사태 내내 광주 현지의 논란거리였다. 하지만 5·18 이후 시위대의 구호에 ‘반미’는 섞여들지 않았다. 선교사의 증언에서도 ‘반미’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쓴 이 기록의 다른 부분과는 달리 미 평화봉사단원들의 활동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는 주관적인 평가를 덧붙이고 있다.
『평화봉사단 단원들이 이번에 진압 군인을 비폭력적으로 제지하면서 미국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한 단원은 군인한테 몽둥이로 구타당하고 있던 시민을 두 팔로 감싸 안아 구타를 막았다. 구타하던 군인은 그 시민을 내버려둔 채 다른 사람을 골라 두드려 패기 시작했고 그러자 평화봉사단원이 또 그 사람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함께 거주하는 우리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평화봉사단원들이 수많은 광주 시민이 미국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했다는 점에 아무런 이견 없이 모두 공감하고 있다. 그 단원들은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봉사해야 할 대상인 시민들과 생명을 같이 나누었던 것이다. 그들은 미국과 미국인이 진심으로 사태를 걱정하고 있음을 모든 이에게 보여준 셈이다.
우리 선교사들은 주님에 대한 복종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길을 지켰을 뿐이지만, 평화봉사단원들은 광주를 떠나라는 평화봉사단 상부의 지시에 거역하면서까지 광주 시민들 곁을 지켰다. 만약 평화봉사단 본부가 광주 현지에서 우리가 겪은 상황을 똑같이 겪었다면 봉사단 본부에서도 광주의 봉사단원들이 했던 일과 똑같은 일을 했으리라고 본다.』
5월15일부터 6월4일까지 20일간 광주 현장을 기록한 선교사의 이 증언은 광주사태 전 기간을 네 부분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고 있다. 5월18일 이전의 배경과 19일부터 22일까지의 사태 발단시기, 그 후 23일부터 26일까지 4일간의 협상기간, 마지막으로 27일 이후의 광주이다.
일부 기록에서 지칭 대상을 애매하게 표기하거나 표현이 또렷하지 않은 등 서둘러 작성한 흔적이 엿보이긴 하지만, 사태 전 과정을 시기별로 정리해 기술하고 자신의 견해를 설득력 있게 뒷받침하는 문장력이 돋보인다.
공산주의 사주나 불순분자 침투 없어
다음은 사태 전개 3기에 해당하는 23일부터 26일까지의 기록에 이은 증언의 마지막 부분이다. 필자 자신이 파악한 광주사태의 분석도 덧붙여져 있다.
『〈5월23일부터 26일까지의 상황〉
금요일에서 다음 주 월요일까지 나흘간은 군과 시민이 협상을 벌인 기간이다. 수습대책위원회라는 시민측이 주도권을 갖고 협상이 이루어졌다. 협상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도 단 하루도 총성이 들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000에 의하면 군인들의 광주 재진입이 협상을 통해 네 차례나 연기되었다고 한다.
금요일 아침, 한 선교사 가족은 뒷동산에서 두 명의 군인을 봤으나 서로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고 한다.
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한 강경파 학생들은 대다수 협상안 수용을 거부하지 않았으나, 일부 학생들은 협상에서 조금 더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살로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결사 항전을 주장했던 그룹을 지칭 : 옮긴이)이 문제였다.
진압군에 의한 광주 재점령은 사실상 군인에 의한 재점령을 반대하지 않았던 까닭에 상대적으로 큰 피를 부르지는 않았다고 본다. 실제로 진압군에 의한 광주 재점령을 반대한 유일한 그룹은 우리가 보기에는 자살그룹이었으며, 고등학생도 일부 이 그룹에 들어 있었다.
〈5월27일부터 6월4일까지〉
5월27일 화요일 여명에 광주시는 진압군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다. 진압군의 광주 재진입에 따른 후속 작전은 크게 보아 보복이라기보다는 끝까지 무기 반납을 반대한 사람들을 제거하는 조치였다. 5·18사건(incident)은 공산주의자들의 사주에 의한 것도 아니고, 불순분자들이 침투해 그 영향을 받아 일어난 일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광주를 재점령한 군인들은 그들이 공산주의 폭도를 상대로 작전을 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들었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진압군에게 그런 잘못된 정보를 주었다는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진압군이 공산주의자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희생자가 비교적 적을 만큼 자제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 : 옮긴이)이다.
5·18사건을 겪고 난 후 우리는 (피해자에 의한 : 옮긴이) 보복의 분위기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민측에 동정적인 한 소식통은 “시 당국과의 계약(협상 결과를 말하는 것 같음 : 옮긴이)은 당국에 의해 깨졌으며 약속은 이미 공허한 것이 되고 말았다(무효가 되었다)”는 말을 했다. 만약 당국과의 약속이 무효가 된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가 이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 만약 당국과의 약속이 정말 무효가 되고 말았다면 이처럼 조용하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이다.
약식으로 기록한 것이 이 정도의 장문이 되었다면, 말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을지를 생각해 보라. 마지막으로 한 가지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내 생애를 통해 한국인 친구들에게서 이처럼 경이로운 자긍심을 느껴본 적이 없다. 5·18을 겪으면서 내가 느낀 점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까지 내 나름대로 한국인의 특성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 한국인들을 겪으면서 가장 한국인다운 점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깨달았다. 한국인은 대가를 치러 선(善)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 선을 성취하려는, 도저히 믿기 힘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모든 일의 발단이 된 첫 비극 며칠 후 군인들이 보여준 자제심과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참혹했던 현실의 순간에 시민들이 보여준 자제력과 원칙을 존중하는 자세가 특히 그렇다.
잊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점을 강조하고 싶다.
① 광주는 폭동이 난무한 도시가 결코 아니었다. 시민들의 분노로 24시간 동안 일부 제한된 특정 지역에서 폭동 형태의 행위가 있긴 했지만, 그 시간조차도 광주시는 혼란스럽지 않았으며 광주 시민들은 이른바 폭동의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이런 파괴적인 격분의 와중에서도 시 전체는 차분했고, 시민들은 길거리에서든 집안에서든 아주 안전했다.
② 광주는 또한 학생들이나 반정부 시위대 때문에 위험했던 지역이 결코 아니었다. 위기를 맞아 한데 뭉친 도시였다. 그 위기는 외부로부터 닥친 것이었고 시민들을 결집시켰다. 시민들은 심지어 진압 경찰도 무고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광주의 증오는 아주 못되게 행동한 공수특전단과 중앙정부에 대한 것이었으며, 중앙정부는 광주가 보기에 전적으로 형평을 잃고 있었다.
③ 시민의 권리와 인권, 민주주의 발전은 광주의 분노의 핵심이 아니었다. 학생 시위대가 이런 것들을 목표로 삼았고, 시민들도 이런 것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광주 사건은 이런 일 때문에 또는 이런 일을 위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광주 사건은 시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행위 때문에 일어났고, 그런 행위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④ 한국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광주 사건 전 과정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느낀 점 한 가지는 시민 전체가 기적에 가까울 만큼 자제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소문과 사실 구분하려 애써
선교사의 이 13일간의 기록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쓴 것으로 봐야 한다. 주한 미 대사관의 요청에 의해 별도로 작성된 것인지, 아니면 필자가 자발적으로 작성해 대사관에 보낸 것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글 전개 방법이나 강조하는 대목들로 미루어 볼 때 광주의 진상을 알리려는 의도가 짙게 배어난다.
필요하다면 더 상세한 내용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고, 글 끄트머리에는 광주사태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논리적으로 기술해놓았다. 또 자신이 직접 확인한 사실과 간접적으로 확인된 사실을 구별 짓고, 소문과 사실을 구분하려고 애쓴 흔적도 역력하다.
작성일은 6월5일부터 6일까지 이틀간이라고 밝히고 있다. 5월27일 진압군의 광주 재점령으로 사태가 일단락된 뒤 사후 평가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사태 발단 시점, 진압군과 시민 수습대책위원회의 협상 핵심 내용 등 중요 사건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시간대별로 기술하는 방법을 동원하고 있기도 하다.
이 현지 증언록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광주 현지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함몰되지 않은 채 사태가 마무리된 지 10일 만에 사태의 발단, 전개, 마무리라는 기본 틀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전체 골격을 짜임새 있게 구성했다는 점이다.
최초 발포 시기, 전체 사상자의 대략적인 숫자와 피해 정도, 병력 이동, 수습대책위원회 활동 등 보다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는 필자도 밝혔듯이 요약된 기록이라는 한계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기록은 사태 전체의 성격을 규정하고 현지 분위기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해석한 것으로 귀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카터 대통령은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 보낸 축하메시지에서 “내년 초 새 헌법으로 선거를 치를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1989년 6월19일, 한국사에 영원히 남게 될 그야말로 ‘역사적인’ 공식문서 하나가 탄생한다. 이른바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미국 정부 성명서’라는 것이다.
1988년 여름 국회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이하 광주특위)를 설립하면서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와 위컴 장군에게 광주특위에 출석해 증언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미 정부에 의해 거절당했다. 그러자 다시 48개항의 서면 질의서를 미 국무부에 전달했고, 이에 미 정부가 ‘성명서’라는 이름으로 미국 입장을 전달한 것이 바로 이 문서다.
이 문서를 ‘역사적’이라고 한 것은, 담고 있는 내용이 광주 5·18의 진상을 밝히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도 아니고, 미 정부가 발표한 공식 성명서이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우선 광주특위의 질의 내용과 형식이 ‘역사적’일 만큼 유치하기 짝이 없다. 전문가들이 작성한 질의서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도대체 어떤 답변을 기대하고 이런 식의 질문들을 던졌을까 싶을 정도다.
- 한국군 특전사가 연합사 작전통제권에 속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 폭동 진압 임무인 ‘충정 작전’ 수행을 북한에 대한 공격 수행을 주임무로 하는 특전사 부대에 맡긴 근거는 무엇인가?
- 당시 위컴 장군과 글라이스틴 대사는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실권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 광주사태가 있은 후, 주한 미대사관은 공정한 선거를 통한 문민정부의 수립을 원했고, 한편 유엔군 사령부는 한국의 안보를 위해 군사정권 수립을 원했다는 설이 있다. 이것이 사실인가? 전두환씨가 권력을 강화하는 것을 위컴 장군이 도왔는가?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미 정부의 답변은 이런 것들이다. ‘결정을 내린 한국 당국에 물어봐야 할 것이다.’ ‘앞의 성명서와 논평을 참조하라.’ ‘그런 소문과 주장은 아무런 근거도 없고 사실이 아니다.’
특위는 신군부에 물어야 할 사항들을 미국에 물었고, 국가간 공식 질의서를 통해 술자리에서 입씨름하기에나 알맞은 질문을 던졌다. 결국 특위가 미 정부로부터 얻은 것이라고는 ‘제대로 알고나 물으라’는 식의 ‘훈계’ 정도였다.
“12·12 이후 미 국익 큰 변화 없다”
광주특위가 미국의 입을 통해 광주사태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정보나 자료를 얻고자 했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광주특위는 미국의 답변을 듣기보다는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추궁’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민주화를 원한다는 미국이 12·12와 광주사태를 지켜보기만한 속셈과 꿍꿍이가 무엇이었느냐는 게 정말 묻고 싶은 내용이었고, 결국 미국의 국익을 위한 잘 계산된 대응이었다는 것이 정작 듣고 싶은 대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광주특위는 질의를 할 적절한 주체가 아니었고, 질의 형식도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특위의 질문 가운데에는 이런 것이 들어 있다. ‘인권 옹호 정책을 펴던 카터 행정부였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미국의 국익이 한국 민주화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결과, 한국 군사당국의 폭력 사용(쿠데타)을 묵인했던 것이 아닌가?’
질문이라기보다는 추궁과 단죄에 더 가깝다. 특위가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만족했다면 미국을 상대로 하고 싶은 말을 했을지는 모르나, 정작 추궁과 단죄의 대상인 신군부에 광주의 참극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나 광주사태 규명을 위한 객관적인 자료는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광주특위의 이 질의서를 받은 후 미국은 질의에 직답하는 형식을 취하는 대신 먼저 75개 항목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밝힌 성명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특위의 질의에 대해서는 간단한 논평과 함께 성명서를 참고하라는 형식의 답변서를 첨부함으로써 특위의 질의서 자체를 평가 절하하는 노련미를 한껏 과시했다.
광주특위는 신군부의 일원인 노태우 정권하에서 가동되었기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입법부가 상식적으로 봐도 답변의 주체가 아닌 것이 분명한 미국 정부에 터무니없는 형식의 질의서를 작성해 보내고, 국가 공식문서로 훈계를 들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부끄러운 역사적 사건이다.
5·18은 광주에서 시작해 광주에서 끝난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미 정부도 위의 ‘성명서’ 서론에서 ‘미국의 견해와 행동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부터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과 이에 따른 일련의 사건 속에서 검토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12·12 쿠데타로 전면에 등장한 신군부를 미국은 못마땅해 했다. 그들이 사전 통보 없이 병력을 이동시킨 것은 미국을 직접 자극했다. 또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함으로써 한국 상황이 불투명해져 미국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신군부의 등장이 한국에서 자국의 국익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흠집을 낸 것은 아니라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었다.
다음은 글라이스틴 대사가 12·12 이후의 사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는 1980년 1월29일자 문서다. 12·12 사태 직후의 사태 분석이다.
『 한국에서 미국의 기본적인 이해관계는 변하지 않았음. 지난해 ‘목적과 목표’라는 제목으로 작성·보고한 문서에서 기술했던 대략적인 내용에서 큰 변동이 없음. 다만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본 틀은 크게 변했다고 할 수 있음. 그러나 박정희 암살과 12월12일의 정권 장악이라는 새로운 정치 환경이 조성됨으로써 새로운 게임을 치르게 생겼음. 지난 수 년 동안과는 전혀 다르게 한국 국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직접 개입이 요구됨.』
‘한국 - 대사의 정책 평가’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 앞부분 요약문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국의 한국 국내 문제 개입 정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 사회 내 여러 요소가 우리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바 우리의 행동수준을 잘못 계산했다가는 그 대가가 클 것임. 충분히 움직이지 않으면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며, 반대로 너무 많이 움직였다가는 강력한 국수주의자들을 자극할 수도 있음.』
글라이스틴 대사의 이런 사태 인식은 결국 신군부의 등장이 ‘새로 발생한 불안정 요소’이긴 하지만 미 국익에 큰 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워싱턴에서 한국 상황을 분석하는 그룹간에 이견이 있긴 했으나 글라이스틴 대사로 대표되는 미국의 이런 상황 판단은 광주사태에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통고만으로 작전통제권 회수 가능
새롭게 등장한 정치 세력인 신군부에 대해 미국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처음부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이런 내부의 자체 판단이 미국의 개입 수준을 낮추었고, 신군부에 대한 대응책을 검토한 워싱턴의 논의 결과도 미국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너무 많이 움직였다’기보다는 글라이스틴 대사가 우려했던 대로 ‘충분히 움직이지 않은’ 결과 광주사태를 겪으면서 반미(反美)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12·12 직후 워싱턴은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를 주축으로 여러 대응책을 논의했다. 당시 주한 미대사관 무관이었던 제임스 영은 자신의 비망록 ‘한국 관찰(Eye on Korea)’에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군사 쿠데타 이후 워싱턴에서는 대(對) 한국 정책을 검토하기 위해 연이어 회의가 열렸고, 여러 가지 대응 방안이 논의됐다.
첫째, 대한 군사 지원을 축소 또는 중단하거나 재조정하는 방안이었다. 주한미군의 일부 철수에서부터 전면적인 철수에 이르는 다양한 세부 조건도 더불어 논의되었다. 카터 행정부의 일부 참모들이 진작부터 주한미군 철수를 지지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12·12사건은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재론하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둘째, 한미안보공약의 상징적 모임인 연례안보협의회(SCM)를 연기하거나 취소하는 방안도 거론되었다. 미 국방부는 안보협의회 연기나 취소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정치와 안보를 연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셋째, 경제 제재였다. 그러나 이 대안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데, 경제 제재까지 취할 경우 상황이 더 나빠져 사회 불안이 가중되고 시위가 더 늘어나게 되면 결과적으로 군부가 더 강경한 조치를 취할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군사 지원 축소와 주한미군 철수, 안보협의회 연기 또는 취소 등은 워싱턴에서도 논란거리였다. 실제 이런 조치가 취해질 경우 워싱턴으로서도 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중대 사안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 두 가지 대안은 가능성으로만 거론됐을 뿐이고, 카터 대통령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가능한 한 강력한 내용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선에서 결론이 내려졌다.
제임스 영도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과 관련해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는 제약이 아주 많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워싱턴은 한국에 민간인 지도자가 이끄는 민주정부가 들어설 수 있도록 현 상황을 유지시키며 북한의 공격을 저지하고 한국의 신군부가 국방이라는 본래 역할에만 충실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세 가지 기본 지침을 만들었다. 미 정부 성명서에도 언급되어 있는 이 세 가지 기본 지침을 제임스 영은 비망록에서 ‘행군 명령’이라고 표현했다.
이 세 가지 지침 가운데 결과적으로 민간 민주정부 수립과 신군부의 정치참여 저지라는 두 가지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12·12와 관련해 카터 대통령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미국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긴 했으나, 신군부의 권력 장악 과정을 지켜보기만 하는 입장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낼 카터의 서신 초안은 12·12 발생 18일 후인 1979년 12월30일 당시 국무차관이었던 워런 크리스토퍼가 작성해 백악관에 보낸다. 크리스토퍼 차관이 서신 초안 앞에 붙인 친서 발송 제안서에는 다음의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의 주영복 신임 국방장관은 위컴 장군에게 한국 군부가 12월12일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음. 주 장관은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며, 군 지휘권이 확실하게 통제되고 있고, 한국 군부는 미국이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했음.
우리가 우려하는 사항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직접 재확인시킴으로써 최 대통령이 상황을 주도하게 만들고, 서울의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장군의 입지를 지원해 주는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임.』
카터 친서에는 신군부의 병력 이동에 대한 미국의 불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터뜨리는 불만이 아니라 실제 권력을 쥐고 있는 신군부에 대한 불만이자 경고였다.
『본인은 12월12∼13일에 일어난 사건에 매우 상심했습니다(deeply distressed). 본인은 한국군의 지휘체계가 무너진 것에 특히 우려하고 있으며 양국 정부가 위임한 한미연합사의 권한에 균열이 생긴 것과 일부 한국군 장교들이 연합사의 틀을 벗어나 직접 행동한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에 대해서도 강조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양국간의 긴밀한 협조 관계에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워싱턴과 신군부가 신경전을 벌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12·12사태 당시 신군부가 움직인 병력에 있다. 앞서 언급된 광주특위의 질의서와 미 정부 성명서의 핵심적인 주제 역시 이 병력 이동으로 발생한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OPCOM) 훼손 문제였다.
한미간 연합방위 체제를 유지하기 목적 위해 한미연합사(CFC)가 설립된 것은 12·12사태가 발생하기 1년여 전인 1978년 11월7일이다. 연합사의 작전통제권에 대해 미국은 광주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양국은 일정한 부대를 선정하여 한미연합사 사령관의 작전통제권 아래에 두지만, 통고만으로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으로부터 부대를 회수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여 국가별 통수권을 가진다. 연합사 사령관은 부대를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으로부터 회수하겠다는 통고가 있을 때 이에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없으며, 다만 그러한 결정이 연합사의 대외 방어력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지적할 수 있을 뿐이다. 일단 부대가 연합사 작전통제권에서 해제되면 연합사 사령관은 그 부대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가지지 않는다.’
이 해석에 따르면 한미연합사 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은 다분히 형식적이다. 옥스퍼드대학이 발행한 2001년판 미 군사 사전(Essential Dictionary of the U.S. Military)은 작전통제권(OPCOM)을 ‘병력의 구성에서부터 임무 하달, 목적 및 임무 수행을 위해 필요한 방향 설정 등 예하 병력을 지휘하는 데 따른 모든 수행 권리’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예하 부대 지휘관이 작전통제권자에게 통고한 후 특정 부대를 회수하거나 복귀시킬 수 있다면 작전통제권자가 실질적인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는 지휘체계로 보기 힘들다.
다만 한미연합사라는 연합방위 체제 에서 미군 장성이 연합사 사령관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작전통제권이 연합사 사령관에게 위임되어 있을 뿐이지 한미연합사 사령관의 실질적인 작전통제권의 내용을 적시해놓은 규정은 없다. 실제로 12·12사태 이전까지는 한미연합사 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이 시비의 대상이 된 적이 없고 시험의 대상이 될 만한 계기도 없었다. 그러나 위컴 사령관으로서는 실체 없는 신군부가 정식 지휘계통을 무시한 채 임의로 병력을 이동시킨 것에 대해 분개할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12·12에서 광주사태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한국군 병력 이동 상황에 대해 ‘사전에 통보받은 바 없고, 병력 이동에 대해 아는 바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특전사 병력을 포함해 한국군 이동 상황에 대한 사전 정보마저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해병1사단 이동 요청시 승인하게 될 것”
다음 문건은 광주사태 발생 11일 전인 1980년 5월7일, 주한 미대사관이 한국군의 병력 이동 상황을 국무부에 보고한 2급 비밀 전문이다.
『한국군이 우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아래의 병력 이동을 미 사령부에 통고했음. 한미 야전군 산하 제13특전여단을 임시 임무 수행을 위해 5월8일 서울 남동쪽 특전사령부로 이동시켜 제1특전여단과 함께 주둔시킬 것임. 이 2개 여단의 총병력은 2500명이며 학생 시위에 대처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중임.
미 사령부는 또한 포항에 있는 한국군 해병대 1사단이 대전 부산 지역에 투입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음. 해병 1사단은 한미연합사령부의 작전통제하에 있으며, 이동시에는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함. 현재까지 병력 이동에 대한 승인 요청은 없으나, 요청이 있을 시 유엔군사령부는 병력 이동에 동의하게 될 것임.』
같은 날 미 국방부에 보고된 전문에는 병력 이동 상황이 더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특전사 전체 여단 병력에 비상이 걸렸음. 13특전여단은 5월6일 서울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11특전여단 62대대가 5월7일 서울로 이동했음. 11여단 62대대가 서울로 이동한 마지막 대대 병력이며, 원주 지역에 주둔했던 11특전여단 61대대와 62대대는 서울로 이동하기 전에 광부들의 소요사태에 대비해 대기 상태에 있었던 부대임.
인천 주둔 5특전여단 병력을 수도권 지역 병력으로 간주할 경우, 7특전여단만이 유일하게 수도권 지역 외곽에 남은 병력임. 7특전여단 병력은 유사시 전주 및 광주 지역 대학들을 목표(targeted against)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며, 11특전여단은 5월4일 일요일 참모·지휘관 모임을 가진 바 있음.』
병력의 이동 현황뿐 아니라 내부 상황, 부대 이동 경로 및 이동 목표에 이르기까지 특전사 내부 상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 이 문서에서는 사실상 문서 내용의 기술 주체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누가’ 혹은 ‘어느 부대(또는 기관)’가 보고했다는, 모든 문단의 앞이나 뒤 주어 부분을 알아볼 수 없도록 까만색 먹띠로 가려놓았기 때문이다. 문서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내용을 전달한 보고자는 특전사 내부 인물이거나 최소한 특전사 상황을 상세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특전사에 대해 아무런 권한 없어
통칭 공수부대라 불리기도 하는 특수전사령부는 사령부 밑에 1·3·5·7·9·11·13의 7개 여단과 707 특전임무 대대, 특전교육단 등으로 구성된 부대다. 위 문서에 따르면 7개 여단 가운데 4개 여단이 이동중이거나 이동을 마쳤으며,
7여단을 제외한 나머지 6개 여단이 수도권에 집결해 있는 셈이 된다.
특전사 7개 여단이 동원된 것은 학생 및 민간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이동 목적지와 주둔지를 볼 때 이 사실은 더욱 명확해지며, 위의 문서에서도 특전사 부대 이동 목적이 시위 진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같은 문서의 다음 내용을 보면 특전사의 이런 목표가 아예 명시돼 있다.
『‘특전사의 모든 단위 부대는 소요 사태 진압을 위해 집중적인 훈련을 받아왔음. 특히 최루가스(CS Gas) 사용 훈련을 중점적으로 받았으며, 소요 진압을 위한 기타 특수 장비로 정규전 헬멧 위에 착용하는 스크린 마스크가 포함되어 있음.’』
특전사에 대해 일반인은 물론 특전사 부대원조차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특전사의 시위 진압 임무다. 특전사는 1958년 제1 공수특전여단이 창설된 이후 1972년에 3·5특전여단, 1974년 7·9특전여단, 1977년에 11·13특전여단이 추가로 창설되면서 현재의 7개 여단 체제가 구축되었다. 명칭 그대로 특전사는 적군을 상대로 특수전을 수행하는 부대이다.
그러나 한국군 사정에 정통한 한국과 미국의 군 관련 인사들은 국내 쿠데타 방지를 위한 진압 임무도 특전사에 부여된 고유한 임무의 하나라는 점을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있다. 국내 반대파의 정권 전복 기도를 늘 우려했던 박정희가 정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특전사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결국 시위 진압에 특전사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쿠데타 방지의 일환이며, 1980년 봄 특전사 병력이 전국적으로 대규모 이동을 했다고 해서 특별한 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비밀 전문에서도 밝혀져 있듯 특전사는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를 받지 않는 부대였다. 앞에서 언급된 미 정부의 ‘성명서’도 ‘미국은 특전사 부대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었으며, 한국군 특전사는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유사시 특수전 수행의 임무를 띤 부대가 연합방위 체제하의 작전통제권 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특전사가 평시 한국 국내용 병력이라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국 관찰’을 쓴 제임스 영도 특전사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한국 문제에 정통한 사람들은 이 특전사 병력이 쿠데타 방지처럼 정치적 목적을 띤 활동에 동원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위 문서에서 정보 보고자는 ‘특전사 병력의 서울 이동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밝히고 있다. 만약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면 수도권에 집중 배치되어 있던 특전사 병력이 서울로 진입했으리라는 것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특전사 병력의 이동 목적도, 수도권 지역 주둔 목적도 서울 진입이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일어났던 유혈사태가 서울에서 먼저 발생했을 수도 있다.
‘훈련의 봄’
시위 진압 경찰이 아니라 특전사 병력에 의한 시위 진압이 언제든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시위의 규모나 강도 면에서 일촉즉발의 발화점은 서울이었다. 그러나 특전사 부대가 투입된 곳은 시위대의 조직력이나 규모가 서울 지역보다 훨씬 덜했던 광주였고, 계엄령 전국 확대 실시에 때 맞추어 5월18일에 전격적으로 유혈 진압이 수행되었다. 서울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작 일은 광주에서 터진 것이다. 광주가 선택된 배경과 진압이 실시된 시점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이 문서의 오른쪽 여백에는 특전사 병력이 ‘봄에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음(heavy training in the spring)’이라는 수기 메모가 적혀 있다. 1980년 ‘서울의 봄’ 한편에서는 ‘훈련의 봄’이라는 또 하나의 면밀히 계산된 시나리오가 작동되고 있었던 셈이다. 광주 시위 진압에 투입되었던 특전사 부대원들도 ‘봄부터 고된 시위 진압훈련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 밝혀진 또 하나의 사실은 특전사 소속 606대대가 별도의 특수훈련을 받았고, 이것을 미 국방정보국(DIA)이 낱낱이 관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중에 606대대로 밝혀진 1개 대대가 모종의 특수한 훈련을 받고 있었음. 이 부대의 특이점은 소속 병력 전원이 머리를 기르고 있어 군복을 입고 있으면 의심스러워 보인다는 것임. 606 부대원들이 대학 구내에서 활용된 병력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했음.』
606부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의 문서 여백에는 ‘미국(국방정보국)이 이 특전사 부대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음’이라는 수기 메모가 기재되어 있다.
이 정도의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주한 미대사관과 주한미군이 12·12와 광주사태 때 한국군의 병력 이동을 포착 못했을 리가 없다. 연합사 내 한국군 지휘 계통을 통해 12·12 당시의 병력 이동을 통보받지 못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맞을 수 있지만, ‘병력 이동’ 사실 자체를 몰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쉽지 않은 대목이다.
광주사태 때의 병력 이동도 마찬가지이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한국군이 특전사 병력 이동 계획을 통보했다는 사실을 이미 5월 초에 워싱턴으로 보고했을 만큼 한국군 내 병력 이동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광주사태 때 미국이 신군부의 진압 병력 이동을 ‘승인’한 부대는 특전사가 아닌 20사단이다. 이 20보병사단의 포병대와 예하 3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은 이미 1979년 10월27일 한미연합사에서 한국 육군으로 넘어가 있었다. 한국군이 박정희 시해 사건 후 수습책의 일환으로 20보병사단을 서울로 파견하겠다고 위컴에게 통보했고, 위컴은 이에 동의했다.
(이 20사단의 병력 이동을 봐도 연합사 사령관이 가지고 있다는 작전통제권이라는 것이 형식적임을 알 수 있다. 연합사 사령관 입장에서 보면 ‘한국 육군이 20사단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겠다고 적절한 절차를 밟아 연합사 사령관에게 통보해온 것’이 되지만, 실제 20사단을 움직인 신군부 입장에서는 ‘20사단을 빼서 서울로 배치하되, 위컴에게는 통보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미 정부 성명서에 따르면 ‘한국군은 이 20사단의 포병대와 3개 연대 가운데 1개 연대를 나중에 각각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에 귀속시켰으나, 20사단의 나머지 2개 연대가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에 귀속되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되어 있다.
20사단 투입 승인요청은 위컴 끌어들이기
신군부가 광주 재진입 때 사용하겠다고 위컴에게 상의한 부대가 바로 이 20사단의 일부 병력이다. 20사단은 정규 부대로는 드물게 폭동진압 훈련을 받은 부대였다. 한국 당국은 “광주 시민들이 광주에 투입된 특전사 부대에 비해 20사단이 공격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협상이 실패할 경우 특별히 훈련된 20사단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특전사 부대를 계속 동원하는 것보다 낫다는 데 동의했다는 것이 미국측 입장이다.
이때 동원된 20사단은 이미 위컴의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20사단 예하 부대의 광주 이동을 위컴에게 통고할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가능한 한 광주사태에 미국을 깊숙이 끌어들이려 했던 신군부는 위컴에게 부대 이동을 통고했고 ‘승인’을 받아냈다.
위컴 입장에서는 이 20사단 병력의 광주 투입 결정이야말로 곤혹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미 12·12 사태 때부터 위컴에게 전두환은 불신의 상징적인 인물이었고 개인적으로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하급자였다. 위컴이 처음 전두환을 만난 것은 12·12가 일어난 지 3개월이 지난 1980년 2월이었다. 이 첫 만남에서도 위컴은 얻은 것이 없다. 전두환에게 정치적인 승리를 안겨주었을 뿐이다. 5월8일의 두 번째 만남 후에도 전두환과 위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을 뿐이다.
박정희 피살 이후 시시각각 정세가 급변하는 한국 상황에서 워싱턴의 최대 관심사는 물론 전두환이었다. 권력 실세로 자리를 굳혀가는 전두환을 인정할 것이냐의 문제를 놓고 워싱턴은 갈라졌다.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를 정치 파트너로 인정해야 하느냐를 두고 주한 미대사관과 주한 미군사령부의 의견도 일치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광주사태가 마무리된 다음에도 계속된다.
다음에 소개하는 두 건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비망록(2급 비밀)은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앉기 불과 한 달여 전인 7월 초에 작성된 것들이다. 전두환에 대한 워싱턴의 의견이 얼마나 극명하게 갈려 있었는지를 알게 하는 문서다.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와 국가안보회의 한국 담당 참모였던 도널드 그레그(전 주한 미대사) 사이에 오간 메모 형식의 비망록이다.
『백악관
2급 비밀
1980년 7월3일
비망록 수신 : 도널드 그레그
발신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주제 : 대한국 정책 선택 여부 검토
중앙정보국(CIA)의 스탠 터너(Stan Turner)가 선택 가능한 목록을 적어 첨부한 아래 문서를 보내왔음. 중앙정보국이 더 확실하게 준비를 할 수 있다고 한 정책 대안들임. 이 제안들이 검토해 볼 만한 것인지 판단해주기 바람.
첨부
제목 : 가능한 대한국 정책 대안들
1. 전두환이 민간인에게 주권을 넘기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공개적인 압력을 가할 준비를 한다.
2. 전두환에 대한 불만 표시의 방법 또는 위 1항의 조건 수용 압력의 방법으로 주한미군을 감축시킨다.
3. 1항의 조건을 수용하도록 전두환 개인에게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한다.
아래 항목을 기준으로 위의 조건들을 검토해야 함
1. 한국의 장기적인 안정
2. 보다 민주화된 제도로의 이행
3. 외교 경제 군사적 측면의 한미 관계
4. 북한의 반응
5. 대중국 관계
6. 미일 관계
7. 미소 관계
8. 아세안 반응』
이 문서를 보면 미국은 광주사태 이후에도 사적인 경로를 통해 전두환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압력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나, CIA를 비롯한 워싱턴의 일부 그룹이 전두환이 이끄는 군사정권 탄생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에 대해 도널드 그레그는 브레진스키에게 다음의 검토 답변서를 보낸다.
『국가안보회의
1980년 7월7일
비망록 수신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발신 : 도널드 그레그
주제 : 대한국 정책 선택 검토
본인은 이번에 CIA가 정책 대안 설정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함. 이유는 다음과 같음:
- 정책 검토위원회(PRC)를 포함해 지금까지 열렸던 일련의 한국 관련 회의에서도 이런 정책 및 다른 대안들이 이미 검토된 바 있음.
- 우리는 현재 취하고 있는 정책을 이제 막 수행하기 시작했으며, 정책 수행의 초기 결과가 아주 고무적인 것은 아니지만, 정책의 주요 부분을 재검토하기에는 때가 이른 것 같음.
- 만약 우리의 정책이 재검토되더라도 CIA는 이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는 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봄.
- 본인 견해로는 터너의 목록은 철저하게 준비된 것도 아니며 특별히 생산적인 것도 아님.
터너는 CIA 고객의 관심사에 부응하기 위해 CIA가 더 많은 분석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함. 이는 바람직한 현상임. 하지만 본인의 판단으로는 CIA가 전두환의 등장에 대한 북한의 반응을 분석하는 것이 더 유용할 것으로 봄. 그런 분석은 앞으로 또 열릴 수밖에 없는 한국 관련 회의에서도 유익하게 쓰일 수 있을 것임.』
도널드 그레그의 이 답변 가운데, CIA가 깊숙이 관여하지 말아야 하며 철저하게 준비된 문서가 아니라는 세 번째와 네 번째 항목 옆에 브레진스키는 ‘동의’한다는 메모를 적어놓았다.
그레그는 8월14일 ‘한국 상황에 대한 미 정부의 대응’이라는 제목의 또 하나의 비망록을 역시 브레진스키 앞으로 보낸다. 다음은 3급 비밀로 분류된 이 비망록에서 주요 부분만을 발췌한 것이다.
『8월14일 마이크 아마코스트가 한국 사태를 토의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장시간의 회의를 주재했음. 워싱턴에서 휴가중인 글라이스틴 주한대사도 참석했으며, 이 회의에서는 다음의 두 가지 내용이 주로 토의되었음.
- 최규하 대통령이 곧 사임할 것이며, 전두환 장군이 수일 내에 대통령에 선출될 것임.
- 한국인들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샘 제미슨의 위컴 장군 인터뷰 기사를 미 정부가 전두환 장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쪽으로 곡해하고 있음.
장시간 토의 끝에 다음의 조치들을 상부에 건의하기로 의견을 모았음.
1. 위컴 장군을, 최소한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할 때까지 하와이에 며칠 더 머물게 한다(위컴 장군을 지금 한국에 돌려보내면 한국인들이 이를 한국 정부에 대한 미 정부의 지지로 받아들여 써먹게 될 것이며, 위컴이 언론과의 관계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될 것임).
2. 전두환은 궁극적으로 정권의 적법성을 워싱턴이 아닌 한국 국민에게서 얻어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임을 재천명하는 공개 성명서가 워싱턴에서 발표될 수 있도록 준비함.
3. 글라이스틴 대사는 2주 후 한국으로 귀임할 때 카터 대통령의 친서를 가져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음.』
“내년 초 새 헌법으로 선거 치르기를”
1980년 8월27일, 전두환은 간접선거를 통해 한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박정희 피살 이후 10개월 만이고, 12·12 군사 쿠데타 이후 8개월15일 만이며, 광주 5·18 이후 102일째 되던 날이었다.
육군 소장이었던 전두환이 한국의 대통령에 선출된 이틀 후인 8월29일 오전 2시14분, 주한 미대사관은 워싱턴의 미 국무부 장관실에서 타전한 두 장의 비밀 전문을 접수한다. 전두환 대통령선출자에게 보낼 카터 대통령의 메시지였다. 공식 대통령 서한(letter)이 아닌 일곱 문단짜리의 메시지(message)였다.
새로 탄생한 대통령선출자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긴 하지만, 카터의 이 메시지 어느 구석에도 축하의 문구나 의례적인 외교 수사는 단 한마디도 들어 있지 않다. 메시지 전체의 분위기는 분가해 나가는 말썽꾸러기 자식에게 마지못해 한마디 입을 여는 아버지의 훈계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이었고, 모든 문구는 ‘해야 할 일의 목록’ 같은 것이었다. 지시나 다름없는 형식이었다. 어쨌든 박정희 피살 이후 10개월 동안 워싱턴과 신군부 사이에 빚어졌던 분노와 갈등, 기(氣) 싸움과 감정 대립의 팽팽했던 긴장 관계가 매듭을 짓는 순간이었다.
카터의 이 메시지는 ‘한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책임을 맡게 된 귀하에게 본인은 개인적으로 ~’라는 말로 시작된다.
『- 한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책임을 맡게 된 귀하에게 본인은 개인적으로 양국간 이해에 아주 중요한 경제 및 안보 관계가 유지되기를 원한다는 우리의 열망을 확고히 하는 바입니다.
- 이번에 본인은 최근 한국에서의 사태가 우리에게 근심거리를 안겨주었다는 점을 귀하께서 인지하셨으면 합니다. 귀하께서 새 헌법안을 곧 제출해 국민투표에 부치고 내년 초 새 헌법하에서 선거를 치를 것임을 최규하 전 대통령께 약속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본인은 귀하가 직면한 어려운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치 단체를 발전시키고 한국 국민에게 보다 더 큰 개인의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귀 정부가 확실하게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빠른 시일 안에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 대통령 각하, 끝으로 본인은 앞으로 우리의 공동 관심사를 지지하면서 양국간 협조 관계가 강화되기를 진정 원한다는 점을 재차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미 카터.』
1981년 1월20일, 민주당의 카터 대통령을 밀어내고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된 공화당 정권의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한국에 다섯 줄짜리 편지 한 통을 발송한다. 5개월 전인 9월1일 역시 한국의 신임 대통령이 된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내는 초청 서한이었다.
《전두환 대통령께
1981년 2월1~3일에 귀하가 워싱턴을 방문하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귀하를 맞아 한·미 양국 관계의 현 상황은 물론 지역 문제에 대한 상호 관심사를 재점검하게 된 것을 본인은 기쁘게 생각합니다.
경의를 표하며,
로널드 레이건》
이 짧은 서한은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볼 때 국가원수간에 오가는 공식 대통령 서한 양식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수신자 이름에 붙이게 마련인 존칭(Excellency)마저 생략된 채 ‘To President Chun’으로 시작되는 이 서한은 공식 초대 서한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대통령 메시지 형식이었다.
한 장짜리라고도 말하기 힘든 불과 다섯 줄짜리 편지 하나로 전두환 대통령은 12·12 이후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되어 온 워싱턴과의 불편한 관계를 말끔히 씻어내게 된다. 이틀 후인 1월22일, 초청에 대한 감사 편지 형식으로 백악관에 발송된 전두환의 답장엔 의례적인 초청 수락 이상의 감사를 표하는 문구가 곳곳에 들어 있다.
《‘저와 제 아내가 워싱턴을 방문할 수 있게 초청해주신 1월20일자 서한에 감사드립니다. 초청에 응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국제 상황은 물론 여러 가지 양자 간 현안을 상의하기 위한 회동을 가졌으면 합니다.’》
레이건·전두환의 전격 회동
레이건은 불과 11일의 여유를 두고 전두환을 초청했고, 전두환은 이틀 만에 초청에 대한 감사의 답장을 보냈으며, 오라 했으니 가겠다는 답장을 보낸 지 열흘 만에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전두환-레이건의 워싱턴 회동은 이렇게 전격적으로 성사되었다. 파격적인 성사 과정이야 어떠했든 한·미 양국의 신임 대통령들이 만나는 자리인 만큼 형식은 ‘공식 방문(Official Visit)’이었다.
인사말 빼면 5분간 대화
다음은 1월27일 미 국무부가 작성해 백악관에 제출한 전두환의 2박3일짜리 워싱턴 방문 일정표 가운데 주요 부분이다.
《한국 전두환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 예상 일정
2월1일, 일요일
전 대통령과 일행은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을 개인 자격으로 방문한 후, 오후 4시 대한항공 편으로 앤드루 공군기지에 도착.
(군악대 연주나 도착 성명 없는) 비공식 도착이지만,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과 글라이스틴 주한 대사, 의전실장 대행 및 국무부 고위 관료들이 전 대통령을 영접함.
2월2일, 월요일, 백악관 회동
오전 10:40 레이건 대통령 내외가 전두환 대통령 내외를 맞아 백악관 발코니로 안내함(군악대 연주나 성명 없음). 두 대통령 내외, 발코니 사진 촬영 후 백악관 청실로 이동. 군 경호 요원들이 두 대통령을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
집무실에서의 두 대통령 회동은 간단하게 끝낼 것을 권함. 총 회동시간은 10분 미만. 헤이그 국무장관과 노신영 외무장관이 통역으로 배석.
12:00-오후 1:30, 백악관 오찬
오찬 참석 예정자 50~60명 명단 추후 제출(부인 대동).
주최측 미국이 주도하는 사교모임 형식으로 진행. 식사 끝나는 시간에 건배.
오후 2:00 기타 회동
오찬 후 한국 관리들이 미국측 상대 관리들과 회동.
국무장관이 전 대통령 및 노신영 외무장관과 회동.
저녁 : 한국측 만찬
주미 한국 대사(김용식 : 옮긴이)가 월요일 만찬 주최 예정. 미 국무장관 참석. 부통령 참석 권함.
2월3일, 화요일
오전 10:30 스미스소니언 학회 행사
스미스소니언 학회의 새 아시아관 건립과 관련, 학회가 아시아 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바, 전 대통령이 한국 국민들을 대신해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에 100만달러를 기부할 예정. 이 행사는 새 미술관에 대한 획기적인 재정 지원일 뿐 아니라 미국-아시아 관계의 상징적인 행사이므로, 레이건 대통령 내외 또는 부시 부통령 내외가 행사장에 잠시 모습을 나타낼 것을 권함.
참고 : 선물 관련
한국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 내외에게 줄 선물을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음. 양국 대통령 회동 전에 숙소인 블래어 하우스에서 의전실장 주재로 선물 교환할 것을 권함.》
전두환은 워싱턴을 뒤흔들었던 코리아게이트 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한국 대통령이었으며, 레이건이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맞이한 두 번째 외빈이자 첫 번째 국빈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의 방미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정상회담 자리에는 공식 통역관도 없이 한국의 외무장관이 통역으로 배석하고, 그나마 두 정상이 마주앉을 시간은 단 10분이었다. 양측의 통역 시간과 회동 앞뒤의 의례적인 인사말을 빼고 나면 길어야 5분. 서로 마주앉았다가 금방 일어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대통령이 직접 선물을 주고받는 시간마저 배정되어 있지 않았다.
1시간30분 동안 진행될 백악관 오찬은 국무부 문서의 표현대로 ‘주최측의 사교모임’이었고, 2박3일 워싱턴 체류 기간에 마련된 두 번의 저녁식사는 모두 김용식 주미 한국대사가 마련한 것이었다. 도착 둘째날인 월요일 오찬 후의 ‘기타 회동’ 일정은 백악관 회동에 참석하지 못한 한·미 양국 고위관리들이 서로의 상대역과 실무회담을 하는 자리였다. 이 일정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노신영 외무장관의 상대역은 알렉산더 헤이그 미 국무장관이었다.
한국 국민을 대표했던 전두환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서럽기 짝이 없는 대접이 아닐 수 없었다. 푸대접이라기보다는 무대접에 가까웠다. 국무부 문서는 이를 ‘신임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정상적인 예우’라고 표현했다. 이런 대접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냈어야 할 ‘한국의 국익’을 전두환 대통령 자신은 무엇이라고 보았던 것일까? 그렇게 해서라도 지켜야만 했던 ‘국익’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핵확산방지정책에 계속 협조해달라”
대통령 전두환을 미국에 보낸 서울의 분위기는 워싱턴의 이런 실제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안보에 대한 공통된 인식… 두 정상 의기투합’ ‘한·미 새 동반시대’ ‘철군 불안에 깨끗한 종지부’ ‘솔직하고 확신에 찬 연설… 분위기 휘어잡아’ ‘위트로 이끈 오찬장 화기의 폭소’ 등이 한국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한 전두환 방미 기사의 제목이었다.
따지고 보면 한국 언론의 이런 제목들이 모두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전두환은 방미를 계기로 한·미간의 서먹서먹했던 관계를 깨끗이 청산했다. 12·12도 덮어졌고, 광주도 잊혀졌다. 한·미간에 12·12나 광주는 더 이상 현안이 아니었다. ‘한·미 새 동반시대’ 개막이라는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전두환이나 레이건 모두 서로 만남으로써 잃을 것은 없었고 얻을 것은 많았다. 미국이 얻은 것은 국익이었다. 그러나 한국이 얻은 것도 국익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미국의 ‘승인’을 받아냄으로써 전두환 정권이 정통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 최대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 컸다.
다음에 소개하는 대화록은 전두환의 워싱턴 방문 직후인 2월5일, 국무부가 작성해 백악관과 주한 미 대사관에 동시에 발송한 1급 비밀(Top Secret)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양국 외무장관 사이의 실무 대화록이다. 세 장짜리로 약간 긴 글이긴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이 워싱턴 방문을 통해 얻고자 했던 ‘한국의 국익’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단서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대로 옮긴다.
《제목 : 한국 전두환 대통령 방미 관련, 국무장관의 블래어 하우스 회동
1. 1급 비밀 - 전체 내용
2. 2월1일 일요일 오후 헤이그 국무장관은 전두환 대통령과 앤드루 공군기지에서 블래어 하우스로 이동하는 동안 차 안에서 비공식적인 대화를 나누었으며, 이어 블래어 하우스에서 노신영 외무장관과 잠시 만났음. 이 자리에는 공로명 외무차관과 허화평 대통령보좌관이 배석했으며, 글라이스틴 주한대사도 참석했음.
노신영 : 2월1일자로 되어 있는 공동선언문 초안에 우리 정부도 이의가 없다. 우리가 마련한 공동선언문 초안에는 한국의 정치 안정을 위해 전두환 대통령이 취한 여러 가지 조치들을 인정해주는(endorsing) ‘정치적’인 문구가 들어가 있었으나 2월1일자 초안에는 빠져 있다.
헤이그 :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빠졌다. 하나는 전두환 대통령을 초청한 행위 자체가 여러 말을 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한국 내정에 대한 공개적인 언급을 자제하는 것이 레이건 행정부의 희망사항이기 때문이다.
노신영 : 이해한다.
(뒤이어 김대중 건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 교환 부분이 있으나 비밀문서에서는 삭제되어 있음. 다음에 보이는 헤이그의 말은 앞뒤 문맥으로 미루어보아 ‘김대중 건에 대해 미국이 압력을 넣지 않았으면 한다’는 노신영의 의견 피력에 대한 반응인 것으로 판단됨 : 옮긴이)》
“취임식에 최고위급 인사 보내달라”
《헤이그 : 미국이 그런 압력은 가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둔다. 한국이 김대중 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또는 내정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해 레이건 행정부가 공개적으로 조언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해줄 조언이 있다면 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전달될 것이며, 한국의 대외관계에 영향을 미칠 만한 현안에만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고,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전달될 것이다.
공항에서 같이 차를 타고 오면서 전두환 대통령께 한국이 이제는 국무부뿐만 아니라 백악관에도 친구를 두게 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렸다. 전두환 대통령께도 이미 설명했듯이, 한국이 우리의 핵확산방지 정책에 계속 협조해주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한국에 배치해놓은 핵무기는 그대로 둘 것이다.
한국이 현재 경제적으로 어려운데도 미국의 대외군사 판매와 F-16을 포함한 무기 공급에 협조해줘서 감사드린다. 우리가 중국과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에 대해 한국이 불편해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러시아와 관계를 진척시킬 때에도 한국의 입장을 반영하겠다.
노신영 :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다. 한·미 관계가 순항할 것으로 본다. 3월3일 서울에서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다. 미국이 최고위급 저명인사를 취임식에 파견해줄 수 있겠는가? 일본, 유럽 및 다른 나라들에도 미국이 최고위급 인사를 한국 대통령 취임식에 파견한다는 걸 널리 알려주었으면 한다.
헤이그 : 레이건 대통령께 상의드려보겠다. 고위급 인사를 대표로 파견하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
형식적인 워싱턴 일정
노신영과 헤이그의 이 대화는 양국 외교의 실무 수장 두 사람이 비공식적인 자리를 빌려 서로 속에 품고 있던 말을 주고받았다는 점에서 ‘허심탄회’하다 못해 노골적인 것이었다. 공식 회담에서는 거론하기 불편한 문제들을 까발려놓았던 것이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전두환의 정치일정표에 대한 ‘공개승인’을 받고 싶어했고, 내친김에 대통령 취임식을 기회로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한다는 ‘철인’까지 찍어줬으면 했다. 두 가지는 모두 불발이 되었다. 헤이그의 말대로 레이건 행정부는 전두환을 초청함으로써 ‘말’ 대신 ‘행동’으로 전두환 정권을 이미 ‘승인’했으며,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식에는 주한 미 대사만 참석했다. 백악관의 결정이었다.
노신영-헤이그의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국이 원했던 것은 이 두 가지 외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반면, 미국은 전두환 정권에 핵무기 개발 포기와 미국산 무기 구입이라는 두 가지 카드를 내밀었고 모두 받아들여졌다.
도착 첫날, 노신영과 헤이그는 이 비공식 회동에서 서로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을 받았다. 이후 전두환 일행의 워싱턴 일정은 거의 형식에 불과했다. 이튿날, 백악관에서의 레이건 ‘10분 면담’과 ‘사교 오찬’이 있은 뒤 오후에 국무부에서 전두환과 헤이그가 만난다. 한·미간 현안의 실제적인 토의는 한국 대통령과 미 국무장관 사이에서 이날 이루어진 셈이다.
美 학회에 100만달러 기부
전두환-헤이그 회동의 주요 내용은 미·중, 미·소, 미·북 관계 및 한국 경제 문제였다. 미국의 대(對)중, 대소 문제와 관련, 한국이 우려하는 점을 미국이 설득시키는 내용이었고, 통보하는 형식이었다. 이 자리에서도 헤이그는 또 한번 한국의 핵무기 개발 포기를 종용한다.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지 말라는 미국의 요구는 ‘핵 비확산 정책을 충실히 지켰으면 한다’는 표현으로 완곡하게 전달되고 있다.
좀더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헤이그의 두 번째 한국 핵 프로그램 발언은 2월6일자 미 국무부의 2급 비밀문서에 적혀 있으며, 하와이 호놀룰루의 미 태평양 사령부와 도쿄 및 베이징의 미 대사관에도 발송되었다는 점이 다른 문서와 다르다.
《헤이그 국무장관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한국은 원자력 발전에 필요한 핵연료 공급물과 기술을 미국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이 현명하게 핵 비확산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점에 대해 감사드린다는 점을 분명히 했음.》
전력생산용 원자로 가동에 필요한 핵물질은 미국이 대줄 테니 별도로 핵물질을 가질 생각은 안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헤이그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 전두환이 어떤 대응을 했는지는 이 문서에 언급돼 있지 않다.
전두환 정권에서 핵문제가 처음 거론된 시점은 방미가 확정되었던 1월22일이며, 이 문제를 처음 거론한 사람은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다. 1월22일자 ‘레이건-전두환 회담을 위한 협의사항 제안’이라는 제목의 2급 비밀문서에 글라이스틴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고, 워싱턴은 글라이스틴의 이 제안을 그대로 반영했다.
《핵 비확산 : 한·미 양국 모두 신행정부가 출범했으므로, 포드와 카터 행정부에서 채택된 핵 비확산의 입장을 다시 거론하는 것이 중요하며, 사적인 회동자리에서 언급하는 것이 최선일 듯함. 헤이그 국무장관과 전두환 대통령의 회동자리에서 언급될 수도 있음.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이 박정희 대통령과 합의한 대로 우리의 확고한 입장을 누그러뜨려서는 안 될 것임.》
전두환의 방미 대가는 컸다. 스미스소니언 학회에 주기로 한 기부금 100만 달러도 헤이그가 공식회담 자리에서 직접 감사를 표할 만큼 파격적인 거금이었다. 방미 후 미국이 추진한 대한국 후속조치들을 보면 전두환이 워싱턴에 풀어놓은 ‘보따리’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다음은 2월6일 국무부 동아시아담당 부차관보 마이클 아마코스트가 헤이그 국무장관에게 제출한 조치 각서(2급 비밀) 가운데 주요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와 관련, 몇 가지 취할 조치들은 다음과 같음.
-F-16 전투기 판매 : 한국이 F-16 구입을 희망한 것과 관련, 주한 미 대사관에 이를 확인할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작성해 발송하는 작업을 국방부와 협의중임.
-개량형 호크 미사일 대대 : 합참의장 베시 장군은 미 육군이 한국의 개량형 호크 미사일 병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결정했음. 우선 필요한 미사일 대대병력 관련 사항을 존 위컴 미 8군 사령관과 상의하고 있으며, 병력이 사실상 철수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므로 의회에 통보할 필요는 없음.
-쌀 : 한국 정부는 전두환 대통령이 워싱턴에 도착하기 전날 밤, 미국산 쌀을 추가 구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음. 이 쌀 추가 구입이 성사될 경우 지난해 가을 한국이 약속했던 미국산 쌀 구매 이상의 효과를 낳게 됨.》
美의 신군부 혐오감과 전두환 길들이기
전두환은 워싱턴을 다녀온 후 3월3일 12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1988년 2월 퇴임했다. 1980년 9월1일 11대 대통령 취임 때부터 따지면 재임기간은 7년5개월이다. 전두환에게 ‘백악관 친구’를 두게 해준 레이건의 재임 시기도 비슷하다. 레이건은 영면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고향 도서관에 ‘영웅’의 이름으로 묻혔고, 정치인으로서 미 정치사와 세계사에 굵직한 한 획을 그었다. 비록 획의 모양새 평가에는 이론이 있을지라도.
한국 언론의 표현대로 서로 ‘의기투합’했다던 레이건이 전두환을 ‘청와대 친구’로 끝까지 기억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퇴임 후 산사에 유폐되다시피 했고,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섰으며, 가재도구를 경매해 법정 추징 미납금을 마련해야 했던 한국의 이 전직 대통령과 레이건의 퇴임 후 행적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한국의 1980년대 현대사는 전두환 정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미 국무부의 한 문서는 ‘전두환의 집권 야망은 집요했고, 권력에 이르는 길은 짧았다’고 표현했다. 전두환의 집권과정을 보면 크게 두 갈래의 투쟁이 있었다. 하나는 국내의 반대파였고, 또 하나는 미국이었다. 미국의 눈에 비친 전두환의 싸움은 ‘신사적인 게임’이 아니었다. 미국은 이에 대해 곤혹스러워했고, 때로는 황당해했으며, 신군부에 대한 혐오감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가 곧 미국이었고 전두환이 곧 신군부였다. 당연히 신군부와 미국의 샅바싸움은 전두환과 글라이스틴의 신경전으로 나타났다. 글라이스틴도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의 이름으로 함구하고 있다. 글라이스틴은 비망록이라도 남겼으나, 전두환 전직 대통령이 입을 열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전두환과 글라이스틴의 신경전은 광주사태 이후 최고조에 달한다. 어쩌면 전두환이 무대접을 감수하면서까지 레이건이라는 ‘백악관 친구’를 두고 싶어했던 것은 박정희 시해사건 이후 12·12와 광주를 거치면서 미국으로부터 큰 정치적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광주 이후 전두환이 ‘장군’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본다. 이는 정치인 전두환이 겪었던 ‘90일간의 미국 수난사’이며, 워싱턴의 ‘전두환 길들이기 약사’이기도 하다.
1980년 6월에도 광주사태의 여진은 가라앉지 않았다. 미국의 고민도 계속되었다. 특히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로서는 ‘광주 이후’가 더 걱정거리였다. 광주 이후의 미국은 신군부를 도와 광주 유혈사태에 개입한 ‘방조자’이거나, 최소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모른 척한 ‘방관자’로 비쳐졌다. 심지어 사태를 부추긴 ‘선동자’라는 눈총까지 받고 있었다. 광주 지역의 일부 미국인들도 그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비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글라이스틴은 신군부의 일방통행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으면서, 반미 감정을 가라앉히고, 한국 국민에게 미국의 명확한 입장을 전달해야 하는 삼중의 부담을 안고 있었다. 전두환은 글라이스틴의 이런 고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전에 치밀하게 짠 각본에 따라 자신에 차서 거침없이 움직였다.
5월31일,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간판을 걸고 전두환이 국보위 위원장이 되었다. 이제 신군부는 최규하 정부의 막후 조종자에 그치지 않고 전면에 나선 것이다. 같은 날, 계엄사령부는 광주사태 사망자 수가 170명이며, 1740명을 검거해 730명을 조사중이라고 발표했다.
“전두환이 불쾌해할수록 더 좋다”
이날 글라이스틴 대사는 59행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전문을 자신이 직접 작성해 워싱턴의 미 국무부에 타전했다. 여기에는 ‘한국 관련, 미 입장 직접 공개표명 위해 계속 싸우기(Fighting to Keep the U.S. Public Record Straight in Korea)’라는 이례적인 제목이 붙어 있다. 12·12나 광주사태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도 워싱턴에 보내는 전문 제목에 ‘fighting’ 같은 자극적인 단어는 잘 쓰지 않았을 뿐더러 단어 하나도 신중하게 골라 쓰는 편이었던 글라이스틴 대사가 ‘(신군부를 상대로) 계속 싸워야 한다’는 강한 표현을 쓴 것만 봐도 당시 그의 고민의 강도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77년 카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국무부의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를 맡아왔던 리처드 홀부르크, 같은 동아태국의 마이클 아마코스트, 한국과의 로버트 리치 등 세 사람 앞으로 보낸 이 전문에서 글라이스틴은 먼저 광주 이후의 한국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너무 많은 한국인들과 (광주)지역의 미국인들은, 미국이 광주에서 보여준 한국 정부의 거친 행동을 너그럽게 봐줬으며 심지어 부추겼다고 믿고 있음. 이런 오해는 광주사태를 진압하기 위한 병력 이동을 우리가 묵인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증폭되었음.》
글라이스틴은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방책으로 워싱턴에 두 가지 제안을 한다.
《이런 상황은 본인이 한국에 부임한 이후 처음 겪는 일로, 한국 국민들과 실제로 소통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음. 그러나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음.
하나는 카터 대통령과 머스키 장관, 국무부 대변인이 최근 발표한 공식 성명서들을 한데 묶어 (서울에서) 한국어와 영어로 언론에 배포하는 것임. 실제로 전달이 될지는 의문이지만 가능한 한 많은 한국 국민에게 그 성명서들을 배포할 것임. 또한 주한 미 대사관 명의의 표지를 붙여 지방의 미국인들에게도 발송할 것이며, 홍보효과를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주한미군 방송(AFKN)을 통해서도 성명서를 발표할 것임. 전두환 장군이 불쾌해하긴 하겠지만, 불쾌해하면 할수록 더 좋음.
또 하나는 의회를 활용하는 것으로, 이 전문 수신인 3인 가운데 한 사람이 처음으로 상·하원 동아태 소위에 출석해 증언하는 것을 워싱턴이 고려해볼 것을 제안하는 바임. 의회 출석 증언은 우리의 공식 입장을 제도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적어도 광주사태와 우리의 관계를 우리 국민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수단이 될 것임. 의회 증언이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지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적극 고려해 볼 것을 요망함.》
국무부는 글라이스틴의 의회 출석 증언 제안을 받아들였고 의회를 상대로 소위원회 개최문제를 협의했다. 국무부의 마이클 아마코스트가 미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 소위원회에 출석해 증언한 것은 글라이스틴의 제안 전문을 받고 25일째 되던 6월25일이었다. 현지 공관인 주한 미 대사관과 국무부, 미 의회가 미 국익 보호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결과였다.
위 전문은 미국의 ‘광주 이후 고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광주와 관련해 ‘왜곡’되어 있는 미국의 입장을 바로잡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 신군부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전두환의 집권 야망을 꺾으려는 의도는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12·12 이후 워싱턴의 일관된 태도이기도 했다. 적어도 신군부가 미 국익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집단은 아니라는 판단이 서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개발은행 이사회 불참 통보
전두환에 대한 워싱턴의 기본적인 시각은 불쾌감이었다. 신군부 등장 이후 워싱턴과 서울 사이를 오간 수많은 전문에서 한반도 안보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문서가 거의 없을 정도로 안보는 한·미간 현안이긴 했지만, 워싱턴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정작 한국의 불투명한 정치상황이었다. 신군부가 워싱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워싱턴은 ‘고삐’가 필요했다.
크리스토퍼 국무차관이 글라이스틴 대사 앞으로 발송한 6월20일자 전문은 워싱턴이 가지고 있었던 신군부 견제 수단들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제목 : 아시아개발은행의 대한국 차관 토의 이사회에 미국 불참
1. 전체 전문
2. 재무부 장관이 별도의 전문을 통해, 한국 인천항 제2 부두 개발 차관금 5400만달러 제공 건을 토의할 6월24일의 아시아개발은행(ADB) 이사회에 불참할 것을 아시아개발은행 미국측 디렉터에게 지시할 것임. 미국의 불참 의미를 한국 정부가 확실히 인지하도록 하기 위해 아시아개발은행 회의 개최 이전에 한국 고위급 인사에게 미 대표 불참 사실을 설명해야 할 것임. 따라서 주한 미 대사는 아래 사항을 전달받을 적절한 한국측 고위급 인사와의 회동 약속을 사전에 해야 할 것임.
3. 최근 한국에서 전개된 정치상황, 특히 계엄령 전국 확대와 정치지도자 구속, 정치 자유화 개입 및 민간 정부에 대한 군부의 통제 확대 등에 비추어볼 때, 미국은 6월24일에 열릴 아시아개발은행 이사회 회의에 불참할 것임. 이런 조치는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우리의 실망감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돼야 함.
이곳 주미 일본 대사관에도 이미 통보를 했으며, 한국 정부에 통보하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공표하지 말 것을 일본측에 요청했음.》
아시아개발은행 이사회 건을 한국 정부보다 먼저 일본 정부에 통보한 것은 아시아개발은행에 대한 일본의 막대한 영향력을 감안한 것으로 보이며, 이 전문 수신 참조란에는 주일 미 대사관에 우선 타전되었다는 것과, 아시아개발은행 본부가 있는 마닐라의 주 필리핀 미 대사관으로도 발송한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봐 주한 미 대사관에 앞서 주일 미 대사관에 이사회 불참 건을 먼저 타전했음을 알 수 있다.
ADB 차관 건은 워싱턴이 신군부를 견제할 수 있는 여러 고삐 가운데 하나였다. 국무부 동아태국 한국과의 로버트 리치가 매주 작성해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 홀부르크에게 보고한 ‘주간 상황 보고서-한국’ 문서 6월28일자만 봐도 국무부 한국과 담당자들이 작성한 10여건의 한·미간 현안이 간단한 배경 설명과 함께 명시되어 있다.
‘미 에너지부의 한국 프로그램 무산 위기, 한국 정치인 추가구속 및 김종필 공화당 총재 사임, 북한 괴선박 서해안에서 침몰, 한국 종교계 및 재야인사 접촉, 남북 대화채널 유지, 한·미간 미사일 개발협력, 전투기 판매(FX)여부 검토, 유엔의 한국 문제’ 등이 그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미간 외교 현안들이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가 워싱턴이 유리한 입장에서 신군부를 견제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신군부 존립근거 뒤흔드는 모험은 안해
다음은 이 현안들 가운데 한·미간 미사일 개발 협력과 한국의 FX 사업권 참여 여부 검토 항목을 옮긴 것이다.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해 미국과 거래를 해야 하는 신군부의 입장이나 신군부를 입맛에 맞게 견제해야 하는 워싱턴 입장에서 볼 때 이 군비 증강 문제야말로 굵직한 현안이 아닐 수 없었다.
《한·미간 미사일 개발 협조 :
국방부는 한국과의 지대지 미사일 개발 협력 건 추진을 위한 부처간 연석회의를 다음주에 소집했음. 이 회의에서 토의될 내용은 다음 세 가지임. (1)어니스트 존(HJ)과 나이키 허큘리스(NH) 미사일의 대한국 직접 판매 (2)한·미간 미사일 연구에서 확인된 연성 목표물에 대한 효율성 제고를 위해 어니스트 존 및 나이키 허큘리스의 분열 탄두 및 근접 도화선 공동 개발 (3)한국 정부가 추진중인 한국형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의 초기 20기 제작과 관련된 협력. (2)(3)번 항목의 두 프로그램은 무기 이전 정책(ATP, Arms Transfer Policy)에 위배되는 것으로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야 하는 것임. (1)번 항목은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 없으나 한국 정부가 큰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음. 현 단계에서 우리의 입장은 (1)(2)의 프로그램 추진을 지지하는 것이며 (3)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는 것임. 자세한 자문을 얻은 후 확고한 권고안을 선택할 것임.
전투기 판매(FX)
크리스토퍼 국무차관은 전투기 구입 경매 20개국 명단에 한국을 포함시킬지 여부를 결정하는 부처간 연석회의를 연기했음. 국무부의 군비통제 및 군축국(ACDA)은 역설적으로 군비 통제 차원이 아닌 정치적 고려 차원에서 한국이 포함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음. 동아태국은 한국 시장이 포함되는 것을 선호하므로, 다음 2주 동안에 한국이 포함되는 쪽으로 결정이 나기를 기대하고 있음.》
전투기 판매 건과 관련, 한국은 7월초 판매국 명단에 포함된다. 크리스토퍼 차관이 부처간 연석회의에서 이 문제를 재론하도록 니메츠 차관보에게 지시했고, 7월3일 니메츠 차관보는 미국의 전투기 생산업체가 한국과 상담을 할 수 있도록 승인한 것이다.
워싱턴은 신군부의 존립 근거를 뒤흔드는 모험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신군부 리더인 전두환의 집권 야망을 꺾어 보려는 노력도 물론 하지 않았다. 한국 국내 상황에 관한 한 미국의 입장은 지켜본다는 것이었다. 즉 미국이 설정해놓은 큰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한국 일은 한국인의 손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굴러가는지 지켜보겠다’는 미국의 이런 입장은 ‘우려한다’ ‘기대한다’ ‘희망한다’ ‘좋은 결과가 나오기 바란다’와 같은 완곡한 외교 수사로 포장되었으나, 정작 미국과 신군부는 동원 가능한 모든 인맥을 통해 직간접으로 서로의 의중을 탐색하는 작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광주사태 이후 신군부와 새로운 게임에 돌입한 1980년 5월 말에서부터 전두환이 한국의 11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들어간 8월27일까지 3개월 동안 서울에서 워싱턴으로 타전된 주한 미 대사관 전문의 대부분이 ‘배포금지(NODIS, No Distribution)’라는 기밀 등급으로 분류되어 있었던 것만 봐도 불투명하기 짝이 없던 한국 국내 상황 전개에 미국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배포금지’라는 기밀 등급에 속하는 문서는 정치 참사관 등 주한 미 대사관 소속 외교 관리가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글라이스틴 대사 본인이 직접 작성해 국무부로 보내는 문서이며, 국무부 행정 차관(Executive Secretary)의 허락 없이는 복사본을 만들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워싱턴 휴가를 끝내고 서울로 복귀한 글라이스틴 대사가 7월2일에 작성 보고한 NODIS 문서는 위컴 장군이 마련한 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육참총장, 문형태 국회 국방위원장 등과 나눈 얘기를 담고 있다. 미국과 신군부의 신경전이 펼쳐진 현장 보고서다. 다음은 문서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대화록이다.
《6월30일 저녁, 위컴 장군이 마련한 식사 자리에서 한국 상황에 대한 머스키 국무장관의 입장을 전하자 주영복 국방장관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음. 이희성 육군참모총장과 문형태 국회 국방위원장, 마이어 장군과 위컴 장군이 나중에 우리 대화 자리에 합석했음. 머스키 장관은 만약 한국의 새 정권이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경우 한·미 관계가 위태로워질 것으로 보고 있으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내 정치 일정을 신뢰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말을 전했음.
주영복 : 미국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글라이스틴 :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합당한 정치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직 한국 국민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영복 : 미국은 한국이 어떤 쪽으로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드렸다.
글라이스틴 : 한국 국민들은 장기적으로 새 정부가 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정부인지, 지금보다 정치적으로 더 융통성이 있는 정부인지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주영복 : 최규하 대통령이 약속한 정치 일정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보는가?
글라이스틴 : 정치일정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헌법이 채택될 것인지, 어떤 조건에서 그 헌법을 통과시킬 것인지, 그 헌법하에서 어떤 형태의 정부가 출범할 것인지 등에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계엄령하에서 국민투표를 진행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워싱턴의 입장을 신군부측에 충실히 전달해야 할 뿐 아니라 신군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워싱턴에 정확하게 보고해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머스키 국무장관이 7월2일자 NODIS 문서를 통해 전두환 장군을 만나 분명히 전하라면서 명시한 두 가지 지시사항을 이행할 사람도 글라이스틴 대사였고, 7월3일 박동진 외무장관의 개인면담 요청에 따라 사석에서 단둘이 나눈 대화내용을 워싱턴에 타전할 사람도 글라이스틴 대사였다.
그러나 글라이스틴의 전두환 견제도 8월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전두환의 집권은 기정사실화되었고, 그 첫 신호는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였다.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기 이틀 전인 8월14일 미 대사관이 워싱턴에 타전한 NODIS 문서에는 ‘한국 대통령직 교체(Korea Focus: Change in the Presidency)’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이 문서에는 지금까지 미 국무부가 모든 문서에서 ‘전두환’ 또는 ‘전 장군’으로 표현해왔던 인물에 대한 예우 문제를 언급한 부분이 들어 있다. 전두환은 13일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한국의 11대 대통령에 당선될 사람이었다.
전(전두환)은 ‘합법적’으로 선출될 것이므로 우리는 그를 대통령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최소한의 정상적인 예우를 해야 할 것임(treat him with at least the minimum normal courtesies).
전두환은 2차 비공개 회담에서 레이건을 앞에 두고 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를 한다. 이에 레이건은 “미국에서는 무력으로 정부를 뒤엎을 수 없다”고 뼈 있는 대꾸를 하는데…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레이건 미 대통령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번은 1981년 2월초 전두환의 방미로 이루어진 워싱턴 정상회담이고, 또 한번은 2년 후인 1983년 11월 중순 레이건의 방한으로 성사된 서울 정상회담이다.
이 두 정상회담은 장소와 시간이 다른 만큼 회담의 겉모습이나 기본 성격도 판이했다. 대통령이든 총리든 ‘아쉬운 쪽’이 상대방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첫 번째 워싱턴 정상회담 때의 전두환이 그랬고, 두 번째 서울 정상회담의 레이건이 그랬다. 어쨌든 전두환 입장에서 보면 첫 번째는 제 발로 워싱턴을 찾아갔고, 두 번째는 앉아서 레이건을 맞았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문서는 전두환-레이건의 서울 정상회담 대화록이다. 배석자 없이 두 사람만이 마주 앉는 소위 ‘비공개 단독 회담’의 대화록도 있고, 실무 관계자가 배석하는 ‘확대 정상회담’ 대화록도 있다.
1983년 11월 당시 한미 관계나 국제 정세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더라도 전두환-레이건 두 사람의 대화록은 마지막 한 구절까지 읽어볼 만한 재미가 있다. 대통령이라는 사람들이 만나면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양국 정상은 ∼을 재확인하고 ∼에 이해를 같이했다’ 따위의 외교적 수사가 덧칠해지기 이전의 ‘날것’이고, 두 정상간의 공동성명이니 합의문이니 하는 이름의 ‘문패’가 붙기 이전의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대화 속에는 격식을 차리기 위한 인사말이나 상대방에 대한 찬사가 들어 있긴 하지만, 이런 의례적인 인사말에 이어 본론을 끄집어내는 대화술도 엿볼 수 있다.
정상회담은 가장 치열한 외교전의 현장이고, 대통령은 한 나라의 국익을 대변하고 관철해야 하는 최고위급 외교관인 만큼 말 한 마디,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도 의미가 담겨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짧은 시간 안에 정치철학, 지도력, 성품, 국제 조류를 들여다보는 통찰력 등이 모두 드러나게 마련이다. 물론 말 속에 뼈가 들어 있을 것이고, 허튼소리인 듯싶지만 괜한 말 따위는 늘어놓을 시간조차 없는 것이 정상회담이기도 하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이론과 실제가 꼭 일치하란 법은 없다. 전두환-레이건 대화록이 그 이론과 실제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우선 두 사람 사이의 비공개 회동 대화록이다. 미 국무부의 2급 비밀 문서다.
“그레나다 개입은 평화유지의 최선책”
『다음은 1983년 11월12일 오후 2시30분, 한국 서울의 청와대에서 있었던 레이건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 간의 비공개 회동 대화 내용을 메모 형식으로 기록한 것임(통역관이자 외교관인 데이비드 스트라웁이 작성했음).
레이건 대통령 : 오찬석상에서 영부인(이순자 : 옮긴이)께도 말씀드렸듯이, 우리 미국과 전세계는 랭군 참사와 사할린의 대한항공기 격추사건 당시 각하께서 보여주신 신중한 대처에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베이루트 사건 때 각하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우리가 행동하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했더라면 그건 전쟁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저는 나카소네 총리를 만났을 때 일본이 북한을 응징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뻤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 점심식사 때도 말씀드린 바 있듯이 올해 우리는 두 번의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각하와 미 국민이 보여준 지지에 한국민은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1981년 각하를 뵈었을 때 저는 오늘날의 국제 상황이 아주 불확실하다는 점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지금은 국제 상황이 더욱 위험해졌습니다. 이 시대는 용기와 지도력을 갖춘 위대한 정치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각하와 같은 지도자를 갖게 된 점을 우리는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각하의 힘을 통한 평화정책을 지지합니다.
일부에서는 각하의 그레나다 개입(그레나다 침공 : 옮긴이)을 비판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평화를 유지하는 최선책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각하의 선택을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리고 전세계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각하께서 취한 행동의 동기와 정당성을 이해하리라고 믿습니다.
레이건 : 대단히 감사합니다. 워싱턴을 떠나기 하루 전날, (그레나다 침공을) 비판하는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가라앉을 만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레나다에서 구출된 400여명의 의과대학생들이 자신들을 구출해준 젊은 병사들과 해병들을 만나기 위해 백악관에 온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위험에 처해 있던 우리를 구해줘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젊은이들이 함께 자리한 것을 보길 잘했습니다.
우리는 그레나다에서 소련제 무기와 수백만 발의 탄알로 가득한 창고들을 찾아냈습니다. 갖가지 문서도 그 창고에서 나왔는데, 그것들을 모두 공개 전시하기 위해 앤드루 공군기지로 실어왔습니다. 워싱턴에 주재하는 각 나라의 대사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할 참입니다. 인구가 고작 10만명뿐인 이 작은 섬에 무려 1만5000명의 병사들이 있었다는 것이 상상이나 되십니까? 그레나다에 있던 수백 명의 쿠바인들은 단지 건설노동자였을 뿐이라는 쿠바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일부 문서도 찾아냈습니다. 그중에는 건설노무자 명단으로 보기에는 이상한 문서도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대공포 부대와 박격포 부대원의 명단이었습니다. 그들이 거주하던 막사도 모두 군대 막사였습니다.
전두환 : 가서 쉬실 시간이 되었습니다만, 내일 전선 시찰을 하러 가시기 전에 한 말씀만 덧붙였으면 합니다. 현재의 한미연합사령부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한 준비 태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전투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세네월드 장군(당시 미8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 : 옮긴이)과 워커 대사의 공이 큽니다. 두 사람은 우리의 문화와 관습과 특수한 환경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미연합사에 대해 저는 대단히 만족스러워합니다. 전세계의 어느 연합군보다도 협조체제가 잘 갖추어져 있다고 확신합니다.
레이건 : 그런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확인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국가적 비극 겪은 두 지도자의 동병상련
이것이 두 정상간의 이른바 ‘비공개 단독 회담’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한미 양국간 현안을 놓고 씨름하기보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자리다. 전두환과 레이건 사이의 이 정도 분위기가 양국 대변인 입으로 옮아가면 ‘화기애애’한 것이 되고, ‘신뢰와 우의를 바탕으로 진지한 대화가 오간’ 것이 된다.
레이건은 랭군 참사와 대한항공기 격추사건을 언급하며 한미일 3국의 공조와 우호관계를 재확인했다.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레이건의 동남아 순방 목적 가운데 하나를 짚은 셈이다. 대북 관계도 포함시켰다. 레이건은 이 사적인 자리에서 그레나다 침공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자신으로서는 당시 가장 곤혹스러운 외교 현안이었고, 전세계의 비판을 받고 있던 사안이었다.
전두환이 그런 그를 전폭 지지한다고 했으니 레이건으로서는 더없이 고마웠을 것이고, 이 참에 하고 싶던 하소연도 했다. 레이건이 한 얘기의 절반이 그레나다 건이다.
전두환은 ‘백악관 친구’를 손님으로 맞아 개인적으로는 햇수로 3년짜리 ‘우정’을 상기시켰고, 공적으로는 미국과 레이건의 정책을 지지한다는 한국의 입장을 분명하다 못해 노골적으로 밝혔다. 이만하면 문제 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최상의 분위기다. 랭군 참사, 베이루트 사태 등 국가적인 비극을 겪은 지도자끼리 동병상련까지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날 11월12일 오후의 전두환-레이건 단독 회담은 실무 오찬에 이은 첫 공식 회동이었고, 이튿날인 13일 오후에는 두 번째 회동으로 확대 회담을 갖는다. 그만큼 첫 회동 때의 분위기로 봐서는 한미간 현안을 논의하는 두 번째 회동 역시 일사천리로 진행되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첫 비공개 회담의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11월13일 회담록은 전두환-레이건의 12일 비공개 회담에 비해 훨씬 길다. 미 국무부의 2급 비밀문서 9장짜리이고, 확대 회담인 만큼 참석자 수도 많고 발언자도 다양해진다. 배석자들이 두 정상이 참석한 이 확대회담 자리를 빌려 한미간 현안에 대한 최종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식, 실무자인 양국 관리들이 현안을 거론하는 시점과 방식 등이 이채롭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대화록에서 주목할 점은 양국간 회담인 만큼 미국의 한국 시장 개방, ‘미국의 소리 방송(VOA)’ 송신기 한국 배치, 전력 공급, 공동성명 합의문안 최종 결정 등 양국의 국익이 걸려 있는 민감한 의제를 다루는 부분이다. 회담 진행이나 대화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서 전두환이나 레이건의 말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부분도 그대로 옮긴다.
“정말 무서운 것은 한국군 호신술 시범”
『주제 : 레이건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 간의 11월13일 회담
다음은 1983년 11월13일 오후 6시, 한국 서울의 청와대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 간에 있었던 확대 양자 회담 내용을 메모 형식으로 기록한 것임(통역관이자 외교관인 데이비드 스트라웁이 작성했음).
미국측 참석자 : 레이건 대통령, 슐츠 국무장관, 워커 주한 미 대사, E. 미즈, 제임스 베이커, M. 디버, R. 맥팔레인, R. 다먼, 폴 월포위츠, R. 맥나마, 개스틴 시거
한국측 참석자 : 전두환 대통령, 신병현 부총리, 이원경 외무장관, 김만제 재무장관, 류병현 주미 대사, 강경식 대통령비서실장, 김병훈 의전수석비서관(통역), 정순덕 정무수석비서관, 사공일 경제수석비서관, 황선필 공보수석비서관 겸 대변인, 박건우 외무부 미주국장
전두환 : 레이건 대통령과 일행이 한국에 오신 것을 다시 한번 환영하는 바입니다. 레이건 대통령께서 비무장지대의 경계초소(GP, Guardpost)를 방문하셨다는 것은 매우 놀랍고 전례 없는 일이었다고 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레이건 대통령께서 비무장지대에 가시는 것을 가능하면 막아보라고 경호원들에게 지시했었습니다. 어쨌든 대통령께서는 초소를 방문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초소는 북한에 가장 근접해 있는 곳입니다. 그곳의 병력은 밤낮으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적이 침투해 우리 병사의 목을 베어가기도 한 곳입니다. 아주 위험한 지역입니다.
세네월드 장군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장성급이라 하더라도 초소 지역을 방문하려면 특별 허가를 받고, 특수복을 착용해야 합니다. 따라서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레이건 대통령께서 그곳에 들어갔다 오셨다는 것은 사실 대단한 일입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대통령께서 그런 용기를 지니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각하께서 전선을 시찰하시는 동안 필요하다면 각하를 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포의 장막을 치도록 지시했고, 매분마다 상황을 보고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상황장교로 근무했던 한국전 때가 생각났습니다. 초긴장 상태였으나, 각하께서 리버티 벨 캠프에서 점심식사를 마치셨다는 얘기를 듣고는 긴장을 풀고 혼자 점심을 먹었습니다. 여러분, 자유와 평화 방위를 위해 용기를 보여주신 레이건 대통령을 위해 박수를 보내십시다.
레이건 :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곳에 가 있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걱정됩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는 사실을 그곳에 갔을 때는 알지 못했으니까요. 오늘 한국군과 미군이 같이 근무하는 것과 사기 진작된 모습을 보고 감명 깊었습니다. 정말 무서웠던 것은 한국군의 호신술 시범을 봤을 때였습니다. 15장의 기왓장을 한 주먹에 모두 깨부수더군요. 나라면 해머가 필요했을 텐데 말입니다. 시범을 보고 나서는 안심을 했습니다. (레이건 특유의 재담이 들어가 있는 부분으로 해석해야 할 듯하다 : 필자)』
“각하의 초소 시찰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
『전두환 : 미국 국민들이 비무장지대의 초소를 단순한 관광지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고,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 지역인지, 레이건 대통령께서 그곳을 방문했다는 것이 얼마나 획기적인 일인지를 미처 깨닫지 못할까봐 걱정스럽습니다. 각하의 방문으로 그곳의 병사들이 더 용기를 갖고 자신감을 얻었으리라 확신합니다. 오늘밤 병사들이 이렇게 말할 겁니다.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다. 미국의 대통령이 이곳을 다녀갔는데 어떻게 우리가 무서울 수 있단 말인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아주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다른 대통령들도 비무장지대를 시찰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전선을 시찰하시긴 했지만, 아주 위험한 지역은 아니었습니다. 너무 위험한 지역인 탓에 저 역시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로는 아직 가보지 않았습니다. 각하의 초소 시찰은 한미간 역사뿐만 아니라 자유세계의 역사에서도 길이 남을 것입니다.
레이건 : 저 혼자서만 간 것은 아닙니다.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같이 갔었지요. 정찰대가 위장한 채 개인 화기로 무장하면서 정찰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실감이 났습니다. 이 자리에서 논의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한 가지만은 꼭 말씀드렸으면 합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동맹국들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아주 긴밀히 협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봤듯이 한미 양국군처럼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긴밀하게 협력한 적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전두환 : 여러분 모두 어제 양자 회담을 잘 진행했으리라 믿습니다. 이 귀한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 우선 레이건 대통령께서 어떤 말씀이든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실 것을 제안합니다. 그 다음에 제가 간단히 말씀을 드린 후, 저희 외무장관과 제가 레이건 대통령과 슐츠 국무장관을 제 서재로 모셔서 비공개로 회담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나머지 분들은 양자 회담을 계속하시도록 하구요.』
전두환이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가 서론이고 탐색전이다. 레이건이 먼저 미국의 요구사항을 끄집어 내놓는다. 시간이 짧은 만큼 단도직입적이다.
“필리핀 재정 지원해달라”
『레이건 : 우리측 사람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일을 진척시켰는지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으나, 저희는 귀국에 석탄과 천연 가스를 공급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이 문제를 상의했고, 서로 정리가 됐다고 봅니다.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너무 어렵지 않으시다면 소련으로 송신시킬 ‘미국의 소리 방송(VOA)’ 송신기를 한국에 설치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벌써 토의가 됐을 것으로 봅니다.
슐츠 : 대통령께서 이 문제를 거론해주셨으면 했습니다. 그레나다에서 우리가 찾아낸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레나다 정부는 국민들이 말을 잘 안 듣는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들이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듣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을 봤습니다. ‘미국의 소리 방송’의 영향력이 아주 큽니다. 저희 대통령의 요청을 우호적으로 검토해주셨으면 합니다.
전두환 : 현 상황이 어떤가요?
이원경 외무장관 : 그 사안은 현재 토의중입니다. 관련 부처가 세심히 검토하고 있습니다. 국내법상 일부 개정이 필요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현재 신중하게 검토중입니다.
사공일 경제 수석비서관 : 에너지 문제에 대한 것인데, 저희는 지금 역청과 무연탄, 천연액화가스, 알래스카산 원유를 포함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며, 추후 한미 실무자급 회의에서 논의할 예정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장기 계획에서 일부 부정이 필요하지만 극복할 수 없는 문제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원자력 발전소 계획과 같이 검토되어야 할 사안입니다.
전두환 : 포항제철에서 미국산 석탄을 쓰고 있지 않나요?
사공일 :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 사용량이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후 사공일 경제수석비서관의 발언 부분은 비밀 해제에서 삭제되어 있음 : 옮긴이)
전두환 : 대통령께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레이건 : 특별히 더 드릴 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자유시장 신봉자이자 보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무역 장애가 제거되고 무역이 더욱더 개방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슐츠 : 몇 가지 문제를 언급했으면 합니다. 필리핀 지원, 특히 난관에 처해 있는 필리핀의 재정 문제와 관련해 한국측이 임시 융자를 해주기로 한 점에 감사드립니다. 일본은 벌써 이 임시 융자에 참가하겠다고 동의했습니다. 필리핀 지원에 대한 한국측의 결정도 아주 건설적이라고 확신하고 있고 저희도 그 점에 대해선 아주 기뻐하고 있습니다. 태평양권 문제에 대해서도 이번 경우처럼 모두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레이건 : 귀측 재무장관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줬다는 얘기를 듣고 기뻤습니다. 슐츠 장관이 말했듯이 아시아 지역을 진정으로 돕기를 원하고 지역내 분쟁 위협에 맞서는 아시아 국가의 노력을 지원하고자 한다면 이런 조치가 꼭 필요할 것입니다.
사공일 : (전두환 대통령에게) 필리핀이 일부 재정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미국 측에서 공동지원 참여를 요청해온 상태로, 많은 지원을 할 수는 없지만 안정이라는 이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했으면 합니다.』
“올림픽 전에 새 영사관 지어달라”
『전두환 : 우리가 그런 지원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빚도 많은데.
신병현 부총리 : 명목뿐인 지원입니다.
전두환 : 좋습니다.
맥나마 : 필리핀 지원 건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슐츠 : 대통령 각하, 워커 대사가 건설 건에 대한 요청이 있습니다. 1988년 올림픽이 개최되기 전에 새 영사관을 지었으면 합니다.
전두환 : 아직 해결이 안 되었나요?
이원경 외무장관 : 아직 협의중입니다. 큰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류병현 주미 대사 : 우리도 워싱턴에 한 채 지었으면 합니다. 워싱턴DC 당국의 협조를 얻어주셨으면 합니다.
전두환 : 슐츠 장관께서 이 문제에 협조를 해주십시오.
워커 : 공동 서명식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미국이 가장 원했던 부분은 레이건의 입을 통해 서두에 나왔고, 나머지 부차적인 현안들은 슐츠 국무장관과 기타 실무 배석자들이 거론하고 있다. 레이건이 옆에서 적시에 훈수를 두고 있다.
워커 대사의 발언 다음으로 이어지는 대목은 이 대화록에서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이자 가장 지루한 부분이기도 하다. 약 60분간 진행된 이 회담에서 한 사람이 가장 길게 한 발언이며, 9장의 문서에서 1장 반의 분량을 차지한다. 전두환-레이건의 서울 정상회담을 두고 떠돌았던 이런저런 말 가운데, ‘전두환이 상대방 시간을 제멋대로 물고 늘어졌다’ ‘회담을 좌지우지 일방적으로 이끌어갔다’ ‘레이건을 상대로 강의를 했다’ ‘선생이 학생(레이건) 다루듯 했다’는 해석이 나온 것도 이 대목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두환 : 세 가지 사안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렸으면 합니다. 레이건 대통령께서 보호주의에 반대하고 자유무역을 선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국에는 천연자원이 없기 때문에 무역을 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1930년의 보호주의는 경제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을 뿐입니다. 경제 전문가들 말을 들으니 무역이 물물교환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세계 경제를 이끌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보호주의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한국은 저개발 국가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비약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새로운 공업국가라고 말합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이제 선진 개발도상국입니다. 1986년에 가서는 우리 수입의 90%가 자유화될 것으로 봅니다. 오늘날 개발국 수준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둘째, 2차세계대전 이후 한국은 자유세계와 공산권 간 갈등의 한 사례가 되어 있습니다. 한국은 두 시스템 중 어느 쪽이 우월한지를 가늠할 수 있는 최적지입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우리는 미국의 영향권에 있었습니다. 한국전을 치르면서 우리나라는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레이건 대통령께서 국회 연설에서도 언급하셨듯이 미국은 우리에게 많은 지원을 했고 한국이 모델국가가 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 미국은 대단한 긍지를 가져도 된다고 봅니다. 한국은 시스템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장소입니다. 북한은 경제 사정이 아주 어렵습니다. 세계 경제가 좋지 않음에도 우리는 상대적으로 아주 잘해나가고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을 하나의 모델로 지목해도 좋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취임한 지 이제 2년9개월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각국의 왕과 대통령, 총리, 비동맹국 장관 등 모두 565명을 만났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우리의 성공 사례를 얘기하면서 미국과의 협력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사례를 따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제가 버마를 방문하고 인도와 스리랑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하려는 것도 비동맹국과의 외교를 하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아시겠지만, 한국이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세계 속에서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셋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다수 미국민과 이 방에 계시는 일부 분들조차도 한국을 일본과 동일시합니다. 일본의 GNP는 1조2000억달러가 넘지만 GNP의 1%만 국방비로 지출하고 있습니다. 외채도 없습니다. 사실상 일본은 채권국입니다.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입니다. 우리나라의 올해 GNP는 675억달러에 불과합니다만, 국방비는 GNP의 6%입니다. 대단한 수치입니다. 외채도 182억달러나 됩니다. 한국은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따라서 저희를 일본으로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전두환의 ‘강의’ 후 레이건은 미국의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전두환의 자기 과시에 정중한 감사를 표한다. 이어지는 비공개 회담에서는 서두에서부터 전두환의 2차 강의가 계속된다. 정상회담 자리에서의 대화인지, 앞에 후배 하나 앉혀놓은 술자리 대화인지는 독자가 판단한 일이다. 전두환의 2차 강의 후 레이건의 뼈 있는 듯한 대꾸도 흥미롭다.
『레이건 : 걱정 마십시오.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많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외국 수반들에게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니 감사드립니다. 그런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토를 탐내거나 다른 나라를 지배하려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추구합니다. 번영은 개인의 자질과 기업가정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번영하게 되면 평화를 위한 보다 나은 기회가 마련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희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 나라에 메시지를 전파시켜주고 계신 점 다시 감사드립니다.』
(오후 7시5분경 전두환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과 슐츠 국무장관, 이원경 외무장관 및 통역관들을 비공개 회담을 위해 자신의 서재로 안내함)
2차 비공개 회담
『전두환 :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르긴 합니다만, 제 재임 기간 2년9개월 동안 한국은 해방 후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었다고 봅니다. 사회 안정과 정치 안정 없이는 경제 성장이 불가능합니다. 이제 국민들은 일을 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북한의 첩자들입니다. 그들은 우리 학생들을 동요시키면서 반정부 인사라고 자처합니다. 저는 자유롭고 개방된 시스템을 원합니다. 통행금지를 없애고 고등학생들의 짧은 머리와 교복을 없앤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종교계의 반정부 인사와 다른 반정부 인사들을 대화를 통해 설득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행도 자유화시켰습니다. 제가 취임하기 전에는 한국계 미국인 반정부 인사들이 한국에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올 수 있습니다.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의 한국 동포들에게 말했듯이, 정부 비판을 한다고 해서 모국에 못 오게 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인들도 해외여행이 훨씬 자유로워졌습니다. 물론 일부 문제가 있긴 합니다. 그중 하나가 여행 자유화가 지급 균형 상황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하 일부 내용 비밀문서 해제에서 삭제 : 옮긴이)
“미국 TV에서는 탱크나 군인 안 보여”
『해방 이후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연장을 위해 헌법을 고쳤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길거리로 나와 폭력을 행사하면서 이 대통령을 하야시켰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집권 연장을 했고 마침내 폭력으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결국 국민들은 대통령이 바뀌는 것은 오로지 폭력으로만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건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물론 우리는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를 모방할 수도 없고 따라가서도 안 됩니다만, 저는 각하께서 국회 연설 때 제 임기가 1988년까지이고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누군가가 국회의원이 되기만 하면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교통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 임기 동안 이러한 생각이 고쳐지도록 교육시키려고 합니다. 꼭대기까지 모두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법을 어겼으면 저도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민주주의란 법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레이건 : 민주주의의 정신은 법에 따른 자유입니다. 선거로 당선된 사람들은 주인이 아니라 공복입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국회의원들은 그 점을 배워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누구나 정부를 비난할 자유가 있습니다. 투표를 통해 항의하고 바꿉니다. 하지만 무력으로 정부를 뒤집어엎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캘리포니아 주지사였을 때 닉슨 대통령이 물러났습니다. 미국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그러나 미국인들 사이에는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TV에서 탱크나 군인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최고 권력자 자리에 변화가 있었지만 우리가 뽑은 부통령이 업무에 아무런 차질이 없이 즉각 대통령 자리를 승계했습니다. 투표로 정부를 뽑았기 때문입니다.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국민을 설득해 선거에 이길 수 없으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만, 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침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제가 할리우드의 배우조합 회장이었을 때 공산주의자들이 조합을 통제하려고 든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네가 공산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았고, 저도 그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강력하게 대처했습니다.
여러 가지 말씀해주신 것 깊이 감사드립니다. 미국에 돌아가면 한국에 대해 잘 말하고 한국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있으면 논박하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늦은 것 같긴 합니다만, 슐츠 장관이 뭔가 말씀드릴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슐츠 : 공동성명문이 잘 되었습니다만, 한 문단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원경 외무장관 : (전두환 대통령에게) 미처 말씀드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슐츠 : 한 문장을 제안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풀릴 것 같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문제가 된 문장을 각하께 읽어드리고 말씀을 들었으면 합니다. ‘두 정상은 자유와 개방, 정치 안정에 기여하는 제도를 수호하고 강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확인했다’입니다.
전두환 : 저는 아무 문제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장관에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원경 : (전 대통령에게) 저희 쪽 문안은 조금 다릅니다.
슐츠 : 더 이상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전 대통령께서 문장에 동의하신다면 이 문제는 저와 이 장관이 따로 만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후 7시35분경 미 일행, 전두환 대통령 서재를 나옴)
군사정권 지원한다는 비판 의식
노련한 기지로 슐츠가 전두환의 직접 언급을 통해 해결한 문안은 공동성명 9항에 나오는 것이었다. 정상회담이 끝난 후 당시 한국 정부의 반대로 공동성명 문안 작성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는 한국 언론의 보도도 바로 이 9항의 문항을 말하는 것이었다. 미국측으로서는 인권 문제와 민주화 등 국내 문제로 비난을 받고 있던 전두환 정권에 어떤 방식으로든 재갈을 물릴 필요가 있었다. 바로 한 달 후면 선거의 해였고, 레이건 행정부가 한국의 군사정권을 지원한다는 미국 내 여론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두환-레이건의 서울 정상회담이 있었던 1983년 11월의 한국은 ‘해방 이후 가장 안정된 시기’라는 전두환의 표현과는 달리 심각한 갈등상황에 빠져 있었다. 무엇보다 광주사태의 그늘이 짙었다. 광주의 비극과 미국의 책임은 거의 동의어였다. 게다가 미 공화당 정권인 레이건 행정부의 전두환 정권 지지는 반미 정서를 부채질했고, 전두환 집권 이후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된 학생시위대의 구호에는 ‘반파쇼, 반미 투쟁’이란 용어가 빠지지 않았다.
‘좌경’ ‘용공’ ‘불온’이 전두환 정권의 애창곡이었고, ‘민족’ ‘민주’ ‘민중’ ‘통일’이 반독재 민주세력의 구호였다. 한미 정상회담 한 해 전인 1982년은 한미수교 100주년이 되던 해였고, 그해 3월 반미운동의 대표격인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터졌다.
전두환 정권이 내세웠던 ‘선진 조국 창조’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인권 문제로 구호조차 무색해졌고, 국내는 혼란 그 자체였다. 그럴수록 레이건 행정부와 전두환 정권은 밀착했고, 두 정권 모두 서로가 서로를 이용했다. 전두환-레이건 서울 정상회담 대화록의 백미는 어쩌면 두 정상 사이의 대화가 이런 한국의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일 수도 있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전두환 정권 탄생 과정에서 미국이 “얽혀 있기는 했지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이 말은 전두환 정권 탄생의 주체세력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입김을 막아냈다는 의미가 된다. 결과를 봐도 그렇다.
미국은 한국에게 무엇인가
전두환 정권의 탄생 과정은 한국과 미국 두 나라 관계의 기본틀이 어떤 얼개로 어떻게 형성돼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교본 노릇을 하고 있다.
1980년대 내내 한국의 지식층은 좀체 풀리지 않는 한 가지 질문을 끼고 살았다. ‘한국에게 미국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박정희의 죽음에서 12·12 군부 쿠데타, 광주의 비극,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탄생에 이르는 전 과정을 미국과 연결시켜 해석했고, 이 일련의 사태 전개에 미국이 어떤 형태로든 관련돼 있다고 보았다. 미국은 물론 관련설을 부인했다.
미국은 한국에게 무엇인가? 이 오랜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은, 미국이 박정희 죽음 이후 한국에 새로 등장한 정치세력을 어떤 시각에서 해석하고 상대했는지를 짚어봄으로써 얻을 수 있다.
전두환 정권의 등장은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로 이어지는 향후 20년간 한국의 국가 형태와 사회모형을 결정짓는 첫 단추였고, 신군부와 미국이 이 첫 단추를 끼운 양손이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한미 양국의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한국에 미국은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미국이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느냐를 먼저 물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전두환 정권 탄생과 미국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미국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과거형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미국이 지금은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현재형 질문의 답을 얻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동맹국 안보가 인권에 우선
주한 미대사 글라이스틴은 박정희 시해 사건 이후 전두환 정권이 탄생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워싱턴이 아닌 서울 현지에서 지켜봤다. 18년간 버텨온 박정희 정권의 붕괴, 권력의 순간적 공백과 그 공백을 채우려는 정치 세력의 부상, 군부의 하극상과 광주의 참극 등 글라이스틴은 불과 9개월 사이에 전개된 격변의 한국사를 몸소 체험했고 깊숙이 관여했다. 말 그대로 그는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글라이스틴이 1999년에 이때 겪은 일을 기록한 책을 펴내면서 붙인 제목은 ‘뒤얽힌 관계, 영향력의 한계(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다. 매사에 신중한 그의 성품을 반영하듯 단어 선택에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이 제목이야말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액면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광주 유혈사태 직후인 1980년 6월16일 글라이스틴이 직접 작성해 미 국무부로 보낸 아래의 전문에서도 ‘뒤얽힌’ 한미 관계와 미국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를 엿볼 수 있다. 이 전문은 당시의 한국 문제와 관련해 글라이스틴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던 국무부 내 3인 앞으로도 발송됐다. 동아태담당 리처드 홀부르크 차관보와 마이클 아마코스트 부차관보, 로버트 리치 한국과장 세 사람이다.
[한국 국민과 이곳의 미국인들은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핵심 사안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하거나 왜곡되게 알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점을 국무부도 알아야 한다고 봄. 이런 상황이 빚어진 것은 언론에 대한 심한 검열 탓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 여론을 포함해 모든 것을 조작하기로 작정한 전두환 그룹의 집요한 노력 때문임.
카터 대통령의 5월31일 유선방송 인터뷰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점을 강조한 대목이 빠지고 안보 이익의 지속성을 강조한 대목만 강조된 채 한국 국민에게 전달되었으며, 머스키 장관의 발언은 (미국이 한국을) 대체적으로 지지한다는 뜻으로 전달되었음.]
게다가 신군부 일부에서는 위컴 장군과 본인을 우리 정부의 정책과는 궤를 달리하는 인물로 비치도록 일을 도모하고 있으며, 한 명 이상의 서울 주재 미 특파원이 이 게임에 관여하고 있음.
이 보고서에서 언급된 카터 대통령의 5월31일 유선방송 인터뷰는 CNN 인터뷰를 말한다. CNN 인터뷰에서 카터는 “빠른 시일 안에 한국이 민주정부를 수립하도록 촉구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우리의 우방이 인권 기준에 맞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 정권을 전복시킬 수는 없다”고 했다. 민주정부 수립도 중요하지만 안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었고, 때로는 동맹국의 안보가 인권에 우선한다는 말이었다.
카터의 이 발언은 신군부를 고무시켰다. 불과 1년 전인 박정희 정권 때 카터의 입장과는 사뭇 달라진 것이었다. 카터는 임기 내내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주문처럼 외고 다녔다. 박정희와는 틀어질 대로 틀어졌고, 그가 살해되기 직전까지도 박정희의 군부독재 정권을 끔찍이도 혐오했다. 그런 카터가 박정희 정권의 후계자이자 유신체제의 상속자인 신군부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러나 카터의 태도는 광주사태 직후부터 바뀌기 시작한다. 신군부의 정권 장악이 확실시된 시점이다. 신군부는 광주를 재점령한 직후인 5월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이하 국보위)를 발족시켰고, 전두환은 국보위 상임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최규하 대통령이 6월12일 텔레비전 담화를 통해 정치개혁 일정을 발표했지만 이미 권력의 축이 신군부로 넘어갔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글라이스틴은 1980년 5월말에서 6월 사이의 변화된 상황을 저서 ‘뒤얽힌∼’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12·12 때는 신군부 실세와 접촉하기를 꺼렸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신군부의 고위급 실세와 접촉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최규하 대통령을 명실상부한 국가 원수로 대하는 것도 이제는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1980년 6월부터 한미 양국 정부간의 기본적인 의견 교류는 최규하 대통령이 아닌 전두환 장군을 통해 이루어졌다.’
글라이스틴은 국보위 출범 이후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1980년 9월1일)하기까지 3개월 사이에 전두환을 세 차례 만났다. 세 차례 모두 국무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실세와 접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말에 걸맞게 글라이스틴은 연이은 회동을 통해 신군부와 본격적이고 ‘실질적인 거래’를 하게 된다. 워싱턴의 훈령에 따른 것임은 물론이다.
전두환-글라이스틴의 첫 번째 회동(6월4일)과 두 번째 회동(6월24일) 사이인 6월21일, 크리스토퍼 국무차관은 신군부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거래의 목적과 전략을 글라이스틴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는 전문을 타전한다. 이 전문은 한국의 정치 발전과 민주화 등 기존에 강조했던 내용 외에 현실(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중시하는 부분이 곳곳에 삽입돼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지시 문건과는 성격이 판이하다.
[발신: 국무부 장관
수신: 주한 미대사 (즉각 전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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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문제 쟁점-한국 지도자들에게 미 정책 전달 지시
1. 전체 내용 2급 비밀
2. 한국 외무장관과 전두환 장군과의 면담 약속을 잡아 아래 기술한 미 정부의 대(對)한국 정책을 전달할 것. 6월4일 전두환 장군과의 회동 이후 변화된 상황에 대한 추가 평가보고서 제출 요망. 아래 내용은 기존의 우리 정책을 재확인하고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은 아님.
이 전문은 국방부 및 국가안보회의와 상의해 작성된 것이며 모두 동의한 내용임을 참고할 것.]
“실질적 차원에서 그와 거래해야”
[3. 우리의 목적과 전략:
전두환 장군과 그의 동료들이 군을 동원해 한국정부를 성공적으로 통제하고 있고 단합된 군부가 이런 조치를 지지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나, 우리는 현재로서는 다음 사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결정했음. 즉 현 체제에서 나타나고 있는 수용하기 힘든 행동을 완화시키고, 헌법에 기초한 합법적인 정부가 되도록 하며, 정치와 행정에 대한 군의 관여를 감소시키고, 분별 있는 경제정책들을 시행토록 하며, 야당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탄압을 억제시키는 것임.
동시에 우리가 한국의 현 정권과 지나치게 동일시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현 정권의 행동이 완전하고 정상적인 한미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행동인지를 지켜보겠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임을 지적해주어야 함.
4. 시나리오
(A) 수감돼 있는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을 포함해 아래 적시된 모든 지시사항을 전두환 장군에게 전달해야 함. 우리는 6월4일 전두환 장군과의 회동 때 전 장군이 언급한 내용이 이행되는지를 주시해왔으며, 최근의 일들이 양국간의 중요한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해왔음.
(B) 전두환 장군을 만나기 전 6월23일 월요일에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날 필요가 있음. 화요일 마닐라의 아시아개발은행이 실시할 대한국 차관 제공 여부 투표에서 우리가 기권하리라는 점을 월요일 한국 정부에 통보해야 하며, 통보할 내용은 추후 지시할 것임.
5. 전두환 장군과의 회동:
이번 회동의 구체적인 목적은 실질적인 차원에서 그와 거래해야 한다는 점을 우리가 암묵적으로 인정했음을 그에게 전달하는 것이며, 아울러 그의 행동 여하에 따라 관계가 규정된다는 점을 그에게 이해시키는 것임.
전체적으로 평이한 내용인 듯 보이는 이 전문은 그러나 구석구석에 미국의 변화된 입장이 뚜렷하게 반영돼 있다. 우선 크리스토퍼는 이 지시 전문에서 전두환의 신군부가 권력 장악에 성공했음을 인정하면서, 미국이 전두환과 ‘실질적인 차원에서의 거래’를 원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크리스토퍼는 또 머지않아 가시화될 새 정권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놓았다.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것에 반대는 하지 않겠으나 다섯 가지 조건은 충족시켜야 한다는, 미국의 희망사항 목록인 셈이다. 이 희망사항이 위 전문에서는 미국의 ‘영향력’이라는 말로 표현돼 있다.
첫째는 ‘수용하기 힘든 행동의 완화’다. 제멋대로 하는 행동은 이제 자제하기를 바란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둘째는 ‘헌법에 기초한 합법적인 정부’다. 새로 출범하는 정부는 최소한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인데, 미국이 신정권 출범을 인정한 이상 법의 테두리를 벗어남으로써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셋째, ‘정치와 행정에 대한 군의 관여 감소’다. 군이 정치와 행정에 손대서는 안 된다는 말은 꺼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차선책으로 군이 최소한만 관여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분별 있는 경제정책 시행’이다. 신정권이 자유시장 체제에서 벗어나는 경제체제를 택할 경우 한국이라는 시장에서 미국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다섯째로 제시된 것이 ‘야당 지도자들에 대한 탄압 억제’다. 정치권의 권력투쟁마저 막을 수는 없으나 정치 자체는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쿠데타는 아니다”
아시아개발은행 차관건(件)과 관련해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의 훈령대로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났다. 글라이스틴은 자신의 책에 ‘박 장관은 언짢아하는 기색이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고 적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의 대(對)한국 차관은 인천항의 제2부두 개발에 쓰일 5400만달러짜리였다.
최규하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물러난 것은 8월16일이다. 6월초부터 8월16일까지 두 달 보름 남짓한 기간에 워싱턴과 전두환의 줄다리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워싱턴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전두환 정권의 출범을 전제로, 한국의 새 정권을 자국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권력 실세와의 접촉 횟수를 늘렸고, 신군부는 수구적인 자세이긴 했지만 이미 다져놓은 발판을 더욱 확고히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최규하 하야 이틀 전인 8월14일 워싱턴 시각 밤 10시30분, 크리스토퍼 국무차관이 도쿄의 주일 미대사와 하와이 호놀룰루의 미 태평양사령관 앞으로 긴급 전문을 보낸다. 주한 미대사관과 백악관에도 이 긴급 전문이 두 곳에 타전되었음을 통보했다. 제목은 ‘최 대통령 하야’였다.
[전두환 장군이 한국 대통령직에 오르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일 것이라는 여러 조짐이 지난 몇 주 사이에 감지되었음. 대통령 권한을 이미 상당 부분 탈취했고, 4성 장군으로 진급할 것이며, 최 대통령을 비난하는 소문을 퍼뜨리는 등 한국 언론을 통해 귀가 따갑도록 그런 얘기가 많이 들렸음.
어제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최 대통령은 8월16일 하야할 예정이며, 통일주체국민회의가 8월18일 서울에서 소집돼 전두환을 새 대통령으로 선출하게 될 것임.
주미 일본대사관에도 통보했으며 추가 정보가 입수되는 대로 전달할 것임. 이 긴급한 사태 진전에 미국이 어떻게 적절하게 대처할 것인지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음.
서울은 태평양사령관과 태평양사령부 정치국에도 한국의 정치 진척 상황에 대한 보고와 분석 자료를 전달할 것. - 크리스토퍼]
글라이스틴은 이때 워싱턴에 있었다. 한 달 전인 7월15일에 휴가차 귀국한 그는 한 달 보름 남짓 미국에 머물다가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사흘 전인 8월28일에 서울로 귀임했다. 최규하가 하야하고 전두환이 4성 장군으로 진급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글라이스틴은 미국에서 지켜보았다. 이 기간에 주한 미대사관 업무는 부대사였던 존 몬조의 책임하에 있었다.
합법정부 요구는 체면치레용
몬조 부대사가 최규하 하야 직전인 8월14일, ‘한국의 대통령직 변동’이라는 제목을 붙여 국무부에 타전한 4장짜리 비밀 전문은 당시의 한국 상황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여러 통로를 통해 보고한 바 있듯이, 최 대통령이 8월16일에 하야하고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8월21일에 새 대통령에 선출되리라는 것은 확실시됨. (마이크 킴(Mike Kim)이나 다른 사람을 임시 대리인으로 활용하는 것은 더는 의미가 없는 듯이 보임.) 현재 활용되고 있는 방법론은 헌법에 기초한 것이며 사태의 성격을 ‘쿠데타’로 규정할 수는 없음. 진전된 사태는 전혀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사료됨.
헌법 개정 작업은 계획대로 진행될 것으로 보이며, 9월말이나 10월초에 새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될 것이고, 새 헌법하의 대통령 선출은 1981년 1월초 또는 2월쯤에 시행될 것임.]
몬조는 전두환 정권의 탄생을 ‘쿠데타’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워싱턴이 희망했던 대로 합법적인 절차를 밟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 길은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것이 가장 손쉽고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었다.
미국이 이 절차를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 광주사태 이후 국보위가 출범한 직후부터 미국은 전두환을 파트너로 인정했고, 이때부터 전두환은 평탄한 길에 들어섰다. 미국이 요구한 ‘합법적인 절차를 통한 정부 구성’이라는 조건은 체면치레용 형식이었던 셈이다.
“다수 한국민은 전두환을 현실로 인정”
하지만 미국은 한국 대통령의 이름이 바뀌는 순간까지 전두환에 대한 견제의 끈을 놓지 않았다. 위 보고서에는 몬조 부대사의 분석이 이어진다. 역시 현실을 중시하는 시각에 무게가 실려 있다.
[두 가지 사항을 지켜보아야 함. 한국 국민의 반응과 미 정부의 적절한 대응임. 본인의 판단으로는 대다수 한국 국민은 이 변화를 수동적인 자세에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 전두환의 대통령직 탈취를 현실로 인정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임.
전두환과 화해를 추구해온 세력은 보다 현실적인 정부 구조가 갖춰지게 된 것을 환영할 수도 있으며, 전두환을 계속해서 반대하는 세력은 ‘마지막으로 바랐던 요행’이 사라지는 것으로 볼 것임. 정치권과 언론, 대학 등 군부정권을 전통적으로 반대해온 세력은 내부적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으며 위축된 채 낙담하는 모습임. 이들이 이번에는 조직화돼 움직일 것 같지는 않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예를 들면 대학이 다시 문을 열었을 때) 힘을 과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아님. 특히 예기치 않은 사태가 터지면(예를 들어 학생 희생 등) 힘을 과시할 수도 있을 것임.]
‘대다수의 한국 국민은 이 변화를 수동적인 자세에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몬조는 파악했다. 만약 대다수의 한국 국민이 정반대의 움직임을 보였다면 미국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국무부 비밀문서를 통해 미국의 대 한국 외교정책의 기본 성격과 방향을 들여다보는 순간만큼은 이런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그리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한국의 정치군인들이 군부라는 이름으로 정치 전면에 나섰을 때까지 미국은 최규하를 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군부라는 신흥세력을 제거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미국은 관망했다. 단 우려 섞인 관망이었다. 최규하의 지도력을 안심할 수준으로 보지도 않았고 신군부를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규하에게 등을 돌리지도 않았고 전두환을 아주 외면하지도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공백을 메우려는, 최규하와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두 신흥 정치세력에 미국은 각각 한 손을 내밀 준비만 하고 있었던 셈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세력을 선택하는 현실주의는 미국 외교정책만의 특징도 아니고, 미국의 대한국 외교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현실주의 자체가 외교의 기본이고, 카터 행정부가 아무리 인권과 민주화의 가치를 부르짖었어도 이 외교의 기본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1980년 6월초까지의 7개월이 미국이 최규하의 지도력을 시험해보는 기간이었다면, 6월초부터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9월초까지의 90일은 전두환의 정치력을 지켜보는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10개월 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미국은 신군부의 성격을 파악했고, 미 국익에 도움이 될 세력인지 아닌지를 면밀히 검토했다. 한국에 새로 들어설 정권은 미국과 동맹이라는 이름의 한솥밥을 먹을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자격 요건은 갖추었다는 것이 미국의 최종 판단이었다.
위컴의 ‘뉴욕타임스’ 인터뷰 왜곡
전두환의 손을 들어줌과 동시에 미국은 향후 대응책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몬조의 보고서에도 그 대응책이 드러나 있다.
[우리의 대응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음. (A)이제는 전두환과 같이 지내야 하며(We will have to live with Chun), 아마도 오랫동안 그래야 할 것임. (B)미 정부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정부 수립을 향해 한국 정치가 질서 있게 발전해나가는 것을 지지한다는 점을 한국 정치권 전체에 분명히 해두는 것이 우리의 장기적인 이익에 도움이 될 것임. (C)전두환의 정권 장악 과정에서 우리가 도구로 활용되지 않았다는 것, 특히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이 미 정부의 승인하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함.
한국인들은 위컴 장군의 발언을 믿고 있으며(전두환이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위컴 장군의 발언을 기술적으로 활용했음), 우리가 기꺼이 전두환을 선택했고 그가 대통령직에 오르기 전 우리와 최종적으로 상의했다는 입증 자료로 간주되고 있음.
일부에서는 이 사안을 과거 박정희가 처음 등장했을 때 미 정부가 마지못해 묵인했다는 시각과 대비시켜 보고 있음. 우리가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지 않는 한 이런 잘못된 인식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분노로 확산될 우려가 있음.]
위컴 장군의 발언이란, 위컴이 익명을 전제로 8월7일 AP통신 및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 한 인터뷰를 지칭하는 것이다. ‘전두환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한국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면 우리는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한 미군 고위 관계자’가 발언했다는 것이 인터뷰 기사였다. 미 정부의 내부 방침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언론을 상대로 한 인터뷰치고는 표현이 거칠었다.
그렇지 않아도 위컴의 발언이 주목되는 와중에 이튿날 전두환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군 고위 관계자’가 위컴이라는 점을 밝혔다. 누가 봐도 미국이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꼴이 됐다.
이때 글라이스틴은 뉴욕에서 휴가중이었고, 위컴은 호놀룰루의 태평양사령부를 거쳐 워싱턴에 가 있었다. 위컴 발언의 파문은 걷잡을 수 없었다. 몬조도 위 보고서에서 위컴 발언의 파문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위컴에게 한국 귀임 날짜를 연기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는 것은 본부에서도 잘 인식하고 있으리라 봄. (한국 전두환 그룹의) 시나리오가 막을 내리기 전엔 위컴이 한국에 귀임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게 본인의 제안임. 만약 위컴이 최 대통령의 사임 발표 직전에 한국에 돌아온다면 그가 전두환에 대한 워싱턴의 최종 축하 메시지를 가지고 온 것으로 읽혀질 수 있기 때문임.
위컴이 귀임을 연기하게 되면 전두환의 행동을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경고를 전달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점을 본인도 깊이 인식하고 있으나, 최근의 언론 보도를 감안할 때 어쨌든 우리의 그런 메시지를 전달할 사람으로 위컴이 적임자인지는 우려됨.]
최규하의 사임 발표 하루 전인 8월15일 몬조 부대사는 짤막한 전문을 워싱턴으로 타전했다. 한국 정부로부터 최규하의 대통령직 사임을 공식 통보받았다는 내용이다.
[1. 청와대의 최광수 비서실장으로부터 최 대통령의 사임을 통보받은 후 국무장관의 지시사항을 전달했음. 최 실장은 우리의 견해를 전달하겠다고 했으나,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이해를 구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음.
2. 전두환 장군과의 회동 약속을 추진중임.
3.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인 로젠크랜스 장군이 주영복 한국 국방장관으로부터 8월16일 최 대통령의 하야 발표가 있을 때 군 비상 발령의 윗단계인 데프콘3을 발령했으면 한다는 요청을 받았다고 통보해 왔음. 로젠크랜스 장군은 데프콘3가 불필요하다고 보고 있음(본인도 같은 생각임). 로젠크랜스 장군은 이 문제와 관련해 위컴 장군과 상의할 것이며, 최종 단계에서는 태평양사령부의 롱 제독 및 브라운 국방장관과도 상의할 것임.]
최 대통령의 사임 소식에 워싱턴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몬조 부대사에게 보낸 8월15일자 크리스토퍼 차관의 전문은 워싱턴이 내린 결론을 세 가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고 있다. 미국이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관련돼 있다는 인식을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과제로 제시됐다.
[1. 서울에서 제출된 아주 훌륭한 분석 보고를 바탕으로 오늘 아침 현상황과 향후 조치들에 대해 부처간 장시간 회의가 있었음. 우리의 결론은 다음과 같음.
- 서울에서 지적했듯이, 전두환 장군이 곧 대통령직에 오르리라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로 보임.
- 그러나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도록 우리가 뒤를 밀어주었다는 그 어떤 의구심도 배척해야 함(이와 같은 맥락에서 위컴 장군의 한국 귀임은 연기될 것이지만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을 것임).
- 향후 보다 자유스러운 정권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희망을 강조해야 함. 또한 헌법 개정 및 국민투표 일정이 차질 없이 이행되길 바란다는 입장도 강조해야 함.
2. 최광수 비서실장이나 박동진 외무장관과 면담시 아래 사항들을 우리와 상의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시켜야 하며, 국무장관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함.
- 한국 지도부가 지난주 위컴 장군의 발언에 미국 정부가 전두환 장군을 승인하거나 지지한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오해해서는 안되며, 한국 언론 보도든 성명 형태든 위컴 장군의 발언 내용을 곡해하려는 그 어떤 조작에도 우리는 단호히 대처해야 할 것임.
3. 전두환 장군과의 회동 약속을 가능한 한 빠른 시일에 잡아야 하며, 미 정부 정책과 관련된 최근의 언론 보도에서 야기된 그 어떤 잘못된 인식도 불식시켜야 한다는 점을 위에 언급한 정책 지침을 기준 삼아 명심하길 바람.]
전두환은 9월1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이틀 전 카터 대통령은 한국의 신임 대통령당선자 전두환에게 축하한다는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들어있지 않은 메시지 한 장을 달랑 보냈고(‘신동아’ 2004년 7월호 연재 기사③ 참고), 같은 날 이미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지 보름이 다 돼가는 전직 대통령 최규하에게도 편지 한 장을 발송했다.
카터가 최규하 앞으로 보낸 친서는 최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카터에게 사임 통보 편지를 발송한 것에 대한 답신 형식이었다. 아무리 9개월의 단명 대통령이었다 해도 최규하는 한때 카터가 지지를 약속했던 지도자이다. 하지만 카터의 이 편지에는 외교 수사로 치장된 찬사만 그득할 뿐, 정상끼리 주고받을 법한 사적인 정감의 흔적이라고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축하사절로 아무도 안 보내
[한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신다는 것을 통보해주신 8월16일자 편지에 감사드립니다. 귀하께서는 지난 30년간 귀국의 여러 공직을 거치며 사심 없이 봉직해 오셨고, 최근에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현대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수행하셨습니다. 막중한 업무를 맡으시는 동안 귀하가 보여주신 정신과 헌신적인 노력에 존경을 표하며, 귀하의 노력이 한국의 민주적인 정치 제도 발전에 밑거름이 될 것을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
이제 인생의 다른 무대에 들어서시게 될 귀하의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지미 카터.]
카터 행정부는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에 축하사절로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취임식 사흘 전에 서울로 귀임해 있던 글라이스틴 대사만이 미국을 대표해 취임식장에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취임식에 참석한 다음날 글라이스틴은 취임식 광경을 워싱턴으로 이렇게 보고했다.
[1. 9월1일 전두환이 한국의 제11대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했음. 취임식이 있던 날은 임시 공휴일이었으며, 취임식이 있은 후 한국 및 외국의 고위층들이 공식 취임연 만찬에 참석해 새 대통령을 축하했음.
2. 전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기존에 언급했던 것과 다른 내용이 담겨 있지 않았음. 강력한 정부를 주장하는 간단한 논리가 제시되었고, 이미 제시되었던 목표를 추구하겠다는 약속이 담겼음.
3. 개인 견해 : 취임식 날의 공식 행사는 매끄럽게 진행됐으나, 축제 분위기는 없었음. 국민들은 공휴일의 쾌청한 날씨를 만끽했고, 궁과 공원에 인파가 북적였음. 하지만 대통령 취임식 날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며 그저 평소 햇볕 좋은 일요일을 즐기는 것 같은 분위기였음.]
강경파와 신중파의 대립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이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신군부를 상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라이스틴의 이런 견해는 워싱턴과 종종 충돌을 빚었다. 카터 대통령과 밴스에 이어 새로 국무장관에 앉은 머스키는 신군부를 강경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홀브룩 차관보와 글라이스틴은 새로 등장한 권력의 움직임을 ‘신중하게 살펴보자’는 입장이었다.
신군부를 통제하는 한 방법으로 한국을 배제한 채 북한과 대화하겠다는 워싱턴의 강경한 입장이 서울로 전달되었을 때 글라이스틴은 ‘사임하겠다’면서 버텼다. 카터 행정부가 김대중 구명에 지나치게 집착하자 글라이스틴은 김대중 문제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신군부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충고했다.
머스키 장관이 끝까지 김대중 구명건을 물고 늘어졌을 때 말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도 바로 글라이스틴이었다.
글라이스틴의 말처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이 한계는 미국이 스스로 설정한 한계이기도 하다. 글라이스틴은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막기 위해 미국이 과격한 조치를 취한 적은 없다’고 했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자제된 영향력은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한 미국의 치밀한 계산법에 따른 것이다. 글라이스틴은 이 뒷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며, 신군부가 정권 장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이런 ‘자제된 영향력의 한계’를 적절히 활용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집권기의 한미 관계를 결정짓는 또 하나의 요소는 이란 인질 사태였다. 카터 행정부는 이 인질 사태에 외교의 총력을 기울였고, 한국의 사태 변화에 정신을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서울의 사태는 빠르게 진척됐다. 신군부는 정권 장악 시간표에 미국의 이런 한계를 충분히 감안했다.
또 미국 대통령선거 기간이었다. 재선을 노리던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 등 민감한 외교 현안을 맵시있게 처리하는 데 실패했다. 공화당의 보수세력은 물론 민주당으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다. 카터는 이미 정치적으로 심한 타격을 받은 뒤였다.
정치적으로 절름발이가 돼 있던 카터. 주한미군 철수가 이미 물 건너갔다는 판단. 미국 내부의 이런 복합적인 요인을 전두환의 신군부는 충분히 활용했다. 게다가 카터 행정부는 끝까지 한국의 인권 문제와 민주화에 집착했고, 글라이스틴의 지적대로 김대중 구명 건은 오히려 미국에 대한 전두환의 저항력을 키워주었다.
전두환 정권은 집권 과정에서는 카터의 민주당 행정부를 상대했고, 집권 이후에는 레이건의 공화당을 상대했다. 그리고 미국에 등 돌리지 않았다. 신군부의 이름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이미 이 신흥 정치세력은 민주당 정권이든 공화당 정권이든 미국에 칼을 들이댈 정치세력이 아니었다.
나중에 신군부라는 이름을 얻긴 했지만, 전두환 등 한국 군부내 정치 군인들의 이름은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주요 관리대상 명단에 들어 있었다. 미국의 이익에 크게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이 세력권의 인맥은 미국의 잠재적인 동반자들이었다.
미국은 신군부의 존재를 부인하지도 않았고, 정권 장악 기도를 꺾으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미국이 신경 썼던 것은 신군부가 입을 옷차림새였다. 남의 피를 묻혀가며 빼앗아 입었다는 남의 옷을, 더구나 다른 옷도 아닌 군복을 입고 나타난 사람에게 공개된 자리에서 버젓이 악수를 청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미국의 기본 입장이었다. 결국 전두환은 6개월 동안 새로 옷을 해 입었고, 1981년 2월2일 레이건의 초청을 받아내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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