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의령. 좀처럼 외지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고 외진 곳입니다. 중년 이상에게는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 만취한 순경이 카빈소총으로 마을 주민 56명을 살해한 이른바 ‘우순경 사건’으로 기억되는 곳. 적잖은 명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매력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마 외진 땅이기도 하거니와 한 세대가 지난 뒤에도 상처처럼 남아 있는 총기 난사의 기억 때문이지 싶었습니다. 의령 땅의 궁벽함은 예부터 그랬던 모양입니다. 고려 때 공문을 지방에 전달하거나 벼슬아치의 여행과 부임 때 말을 공급하던 역(驛)을 주요 도로 30리마다 두었습니다. 그런데 의령에는 지남역 하나만 있었답니다. 전국에 역이 자그마치 525개나 됐는데도 의령 땅에는 역이 단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궁벽한 의령 땅을 굽어 흐르는 남강 인근에서 내로라하는 거부들이 줄줄이 났습니다. 대기업 창업주가 하나둘도 아니고 자그마치 넷입니다. 삼성그룹, LG그룹, GS그룹, 효성그룹의 창업주들이 이 부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게 다 의령 쪽 남강변의 강물에 둥실 떠 있는 솥바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로부터 의령의 솥바위에는 ‘주변 20리 부근에 부귀가 끊이질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는군요. 남강변 솥모양의 바위에 부귀의 기운이 뭉쳐 있다는 것이지요. 솥바위를 풍수지리에서 별자리로 보는데, 희한한 것은 삼성(三星), 금성(金星·LG, GS그룹의 옛 이름), 효성(曉星) 등 이곳을 태로 둔 이들이 일으켜 세운 기업 이름에 죄다 별(星)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대기업 창업주들의 생가에는 풍수지리에 관심 있는 이들이나, 부자의 기운을 받아 보려는 이들이 찾아듭니다. 하지만 부를 쌓는 일이란 게 다 사람 하기 나름이지, 어찌 풍수의 기운 때문만이겠습니까. 호사가들은 대기업 창업주의 집터에서 풍수의 혈과 좌청룡 우백호와 지세를 말하지만, 그렇게 따진다면야 그 마을의 주민들까지도 다 부자가 됐어야 맞는 일이겠지요. 그러니 거기서는 부자의 기운보다, 이들 가문이 누대로 펼쳐 온 나눔과 베풂의 정신을 봐야 할 일입니다. 의령의 산은 죄다 순하고 부드럽습니다. 기암절벽의 경관은 없지만 능선의 뼈대가 굵고 우직합니다. 의령의 산 중에서 첫손에 꼽히는 산이 한우산입니다. ‘찰 한(寒)’에 ‘비 우(雨)’자를 쓰니 우리말로 쓰면 ‘찰비산’이지요. 골이 깊어 한여름 소나기도 겨울비처럼 차갑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그 산에는 턱밑까지 차고 올라가 구분 능선을 감아 도는 드라이브 코스가 있는데 가히 일품입니다. 잘 포장된 산길을 타고 올라가 정상쯤에 서면 산 아래 폭염은 딴 세상 일이고, 서늘한 바람에 오스스 소름이 다 돋습니다. 게다가 의령에서는 먹거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깔끔한 국물에 메밀국수로 말아 내는 ‘의령소바’가 있고, 푹 고아 낸 ‘의령국밥’이 있습니다. 게다가 디저트로 망개잎으로 싼 달콤한 ‘망개떡’이 있지요. 단물이 오를 대로 오른 큼지막한 수박이나 비닐하우스에 파종해 이른 수확이 시작된 의령의 찰옥수수, 할머니들이 제집의 나무에서 따 장터의 좌판에 펼쳐 놓은 새큼달큼한 자두도 빼놓을 수 없는 의령의 맛이지요.
# 외진 땅 의령에서 만난 뜻밖의 명소들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지금도 ‘오지’ 혹은 ‘외진 곳’을 가늠하는 기준은 ‘길’이다. 번듯하게 넓은 길이 지나는 땅은 번성하기 마련이고, 그런 길과 멀어지면 오지가 되고 만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경남 의령은 예나 지금이나 외진 땅이다. 고려 때 벼슬아치들이 숙소로 삼거나 말을 빌리는 역이 전국에 525개가 있었을 때도, 의령에는 단 하나의 역만 있었다. 그때에도 의령 땅을 거쳐 가는 번듯한 길이 없었다는 얘기다. 지금도 의령은 남북으로 이어진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의 딱 중간쯤에 있다. 의령을 찾아가려면 이 둘 중 하나의 고속도로를 타고 단성IC나 영산IC로 나와 다시 국도를 따라 1시간 남짓을 더 달려야 한다. 의령 남쪽으로 남해고속도로가 가까이 지나긴 하지만, 그것도 함안까지만 왔다가는 멀어지고 만다. 그러니 의령을 딱 짚어 목적지로 삼지 않은 담에야 오가며 의령을 지나칠 일이 없고, 심지어 ‘의령’이란 이정표를 보기조차 쉽지 않다. 여행자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의령이 여행지로 매력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령에는 뜻밖의 명소들이 곳곳에 있다. 솥바위며 한우산, 일붕사, 곽재우 생가 등에 이르기까지 제법 볼만한 것들이 꽤 있다. 그중 가장 이름난 곳이 솥바위다. 솥바위는 남강변의 물가에 솟아 있는 솥 모양의 기암. 본래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의 전승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9일째 되는 날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경남 중서부로 진격하는 왜적을 잇달아 섬멸했는데, 그때의 전승지 중 한 곳이 바로 이곳 솥바위 부근이었다. 이런 연유로 솥바위 인근에는 붉은 옷을 입은 곽재우의 동상이 우뚝 서 있지만, 실상 솥바위는 임란 전승지보다 거부(巨富)와 관련된 전설로 더 유명하다. 솥바위에는 부근 20리(8㎞) 근방에서 부귀가 끊이질 않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물 위로 드러난 ‘솥두방때까리’(솥뚜껑의 의령 방언) 모양의 솥바위 아래 물속에는 다리가 셋이 있는데, 그 다리가 각각 향하는 방향 쪽에서 거부가 난다는 이야기다. 그 전설대로 솥바위 인근의 마을 세 곳에서 삼성, LG, GS, 효성의 창업주가 태어나 자랐다. 이들 모두 한 초등학교를 다녔다니, 솥바위의 영험함을 믿는다면 무릎을 칠 일이겠고, 그게 우연이라면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솥바위의 전설, 그리고 부자의 도리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8㎞의 원을 그리면 그 안에 의령 땅은 물론이고 진주와 함안의 끝자락도 들어간다. 진주 쪽의 원 안쪽 지수면 승산리는 LG그룹의 구 씨 일가와 GS그룹의 허 씨 일가가 누대로 살아온 곳이다. 여느 사람들에게 내보이거나 관람객들을 들이지 않는 곳이라 이정표나 간판도 없지만, 길게 이어진 흙담과 잘 관리된 품위 있는 고택들이 한데 어우러진 마을은 관광지로 꾸며진 웬만한 한옥마을보다 훨씬 더 낫다. 마을에서 가장 규모며 꾸밈새가 빼어난 곳이 LG그룹 창업주 고 구인회 회장의 생가다. 관리인이 상주하며 다듬어 놓은 한옥은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인다. 안채와 바깥채 사이의 너른 공간에는 잘 단장된 잔디와 빼어난 수형의 정원수가 심어져 있다. 옆집은 구인회의 큰집으로 집 안에 동생 구철회 전 LG창업고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구 고문은 구 회장의 친동생이지만 큰집의 양자로 적을 올리면서 이곳에 유적이 남게 됐다. 이 둘은 1931년 진주에서 자본금 3800원으로 LG그룹의 모태인 구인회 상점을 함께 열었다. 마을의 절반이 구 씨 가문의 집이라면 나머지 절반쯤은 GS그룹 승산 허 씨 일족의 고가다. 500년 넘게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린 승산 허 씨 집안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자금을 대고 학교를 세웠으며 가난한 이를 돌봤던 의로운 부자 가문이다. 구한말에 허씨 가문의 부를 일궈 낸 만석꾼 허준과 그의 아들 허만정(허창수 GS그룹 회장의 할아버지)의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마치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만석꾼 허준은 마을에서 의장답(義莊沓)을 운영했다. 의장답이란 공공사업을 위해 사재를 털어 내놓은 땅. 이 땅에서 거둔 수익을 공공사업이나 장학금 등으로 썼으며 흉년에는 구휼을 했다. 아들 허만정도 못지않았다. 독립운동단체인 백산상회에 거금을 투자했고,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사운동’에 돈을 댔다. 일제 탄압이 서슬 퍼렇던 시절이었음에도 이순신 장군의 사당 충렬사를 중수하는 데 돈을 보태기도 했다. 성내리는 지주들이 많은 부자 동네였지만 6·25전쟁 당시에도 피해가 없었다. 마을 노인들은 아직도 광복 직후 동네 청년 30여 명이 죽창을 들고 친일 행각을 벌였던 지수면장을 죽이겠다고 몰려왔을 때 허만정이 ‘나를 먼저 죽이고 가라’며 그들을 막아섰던 일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덕에 면장이 목숨을 건졌다. 그는 또 6·25 당시 좌익과 우익 청년들을 설득해 살육을 막았다고도 전해진다. 같은 마을에 담을 이웃하고 살던 구 씨와 허 씨 집안은 자연스레 혼인으로 교류했다. 구 회장과 동생 구 고문의 처가 둘 다 허 씨 집안 사람이었다. 두 집안의 관계를 상징하는 곳이 지금은 구 씨 일가의 제사(祭舍)로 쓰이는 건물 입구인 ‘숙입문’이다. 담장길 안쪽의 숙입문은 250여 년 전 구 씨와 허 씨 집안이 혼인을 하며 만들어진 살림집 입구였다. 두 집안의 ‘인척’ 관계가 ‘동업’의 관계로 바뀐 것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허만정이 구인회 회장에게 사업자금을 내놓으면서. 그렇게 두 집안은 50년 넘게 동업을 유지해 오다 지난 2005년 LG와 GS그룹으로 분리했다. 새로 지어지고 있는 허 씨 종택을 지나 마을 뒷산 쪽에는 운치 있는 허 씨 가문의 정자 지신정이 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어 까치발로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지만, 담 안쪽 정자의 풍류 넘치는 모습은 탄성을 자아낼 만했다. 승산리 일대의 구 씨와 허 씨 일가를 돌아봤다면, 지수면사무소 앞의 지수초등학교에 들러 보자. 이웃 송산초등학교와의 통폐합으로 이름과 함께 학교가 옮겨 간 뒤 폐교되고만 학교 정원에는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과 LG그룹의 구인회 회장이 재학 시절 함께 심고 가꿨다는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학교 체육관인 상남관은 이 학교 동문인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기증한 건물이다. #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잘 지은 집 솥바위에서 남강을 거슬러 8㎞쯤 떨어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는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 선대회장의 생가가 있다. 다른 창업주의 생가와 달리 이곳은 관람객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생가 주변에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고, 마을 입구의 구멍가게에선 기념품이라며 한지로 만든 저금통까지 팔고 있다. 생가에는 국문과 영문 팸플릿도 비치해 뒀다. 당초 풍수에 관심이 있는 이들만 간혹 찾아왔는데, 생가를 찾는 관광객이 크게 늘어나면서 지난 2007년 아예 문을 활짝 연 것이다. 이 회장의 할아버지가 지었다는 생가는 소박하고 정갈하다. 마당에 심어 놓았던 잔디를 다 벗겨 내 소박한 맛이 더하다. 나란히 서 있는 바깥채와 안채는 호화롭진 않지만, 단정하고 기품이 넘친다. 문짝 하나도, 마룻장 한쪽도 흐트러지거나 휘어짐이 없다. 몇 차례 증개축을 거쳐 근래에 신응수 대목장이 복원한 집이라는데 ‘잘 지은 집’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다. 마당에는 야생화들이 심어져 있고, 안채 담벽에는 세 그루의 벽오동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다. 안채 옆의 흙으로 지은 광채에는 당시에 쓰이던 소박한 생활용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생가를 찾은 관광객들을 저마다 안채 왼쪽의 암벽을 먼저 찾는다. 암벽 면의 갈라진 바위에선 만(卍)자, 전(田)자, 거북이 모양 등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게 부자를 만든 상서로운 상이라 해 고개를 빼고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바위를 살핀다. 생가 바깥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기둥마다 붙여진 6개의 주련. 주련마다 내로라하는 옛 문인들의 글귀가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이 의외로 중국 당대 문장가들을 거명하며 글솜씨를 논한 것들이다. 그중 ‘맑은 가을 물을 정신으로, 옥(玉)을 뼈로 삼으며 / 문장은 바다처럼 넓고 글씨는 서까래처럼 웅장하다’는 내용을 담은 주련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솜씨다. 역시 솥바위에서 8㎞ 정도 떨어진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에는 효성그룹의 창업주 고 조홍제 회장의 생가가 있다. 고즈넉한 시골 마을의 복판에 자리 잡은 생가는 문이 잠긴 데다 담을 둘러치고 있어 안을 들여다보기 쉽지 않다. 풍수가들은 우물터와 대문, 그리고 생가 뒤편의 안산이 어우러진 빼어난 명당자리라는데, 문외한의 눈에는 한옥의 아름다움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 한우산, 봉황대… 드라이브로 즐기는 명소들 의령을 찾았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우산 드라이브 코스다. 한우산은 ‘찰 한(寒)’에 ‘비 우(雨)’자를 쓰니 ‘차가운 비의 산’이란 뜻인데, 한여름에도 겨울처럼 차가운 비가 내려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한우산에는 정상 턱밑까지 아스팔트 도로가 나 있다. 그것도 임도처럼 좁은 길이 아니라 차량 교행이 가능할 정도로 탄탄하게 놓은 길이다. 서로 능선을 맞대고 있는 한우산과 자굴산은 기기묘묘한 암봉이나 험준한 계곡은 없지만 제법 웅장하다. 특히 한우산의 찰비계곡은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른다. 여기서 잠깐 머물며 계곡의 시린 찬물에 발을 담가도 좋겠고, 한우산 너머 벽계계곡의 야영장에 여장을 풀어도 좋겠다. 한우산을 넘어 궁류면 쪽으로 길을 잡으면 찰비계곡과 벽계마을을 지나 봉황대가 있는 일붕사에 가닿는다. 일붕사는 근래에 지은 사찰이지만, 봉황대란 석벽을 끼고 있어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우람하게 치솟은 석벽을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신비로운 느낌마저 준다. 일붕사는 대웅전의 법당을 동굴 속에 들여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세간리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의 생가가 있다. 넓은 터에 들어선 생가는 너무 잘 지어진 탓인지 오히려 감흥이 떨어지는 편. 웬만한 관아보다 더 커서 예전의 고택이 과연 이랬을까 싶다. 정작 곽재우의 향기가 느껴지는 곳은 생가보다는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다. 곽재우가 의병을 모으거나 훈련시킬 때 쓴 북을 매어 두었다고 해 느티나무에는 ‘현고수(懸鼓樹)’란 이름이 붙었다. 500년이 넘은 고목이 드리운 그늘이 참 넉넉하다. 비슷한 나이를 먹은 은행나무 거목 한 그루가 곽재우 생가 앞에도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반들반들 새로지은 고택보다는 두 그루의 나무에 깃든 시간의 결과 깊이가 훨씬 더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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