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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방동규

醉月 2012. 3. 21. 10:14

원재훈 詩人이 쓰는 대한민국 구라열전 ⑥ ‘배추’ 방동규

싸움꾼 17명과 맞붙은 ‘17대1 전설’의 주인공, 그 진실은…

⊙ 백기완·황석영 등과 함께 ‘조선 3大 구라’ 중 하나로 꼽혀
⊙ 주먹패, 派獨 광부, 파리의 노숙자, 中東 근로자, 문화운동가로 파란만장한 삶
⊙ “진정성 없이 소위 민주주의 한다는 놈들은 사막의 똥파리보다 무서운 존재들”

원재훈
⊙ 50세.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 1988년 《세계의 문학》에 <공룡시대> 外 여러 편의 시로 등단.
  “맹수끼리는 한 우리에 같이 사는 게 아니야. 호랑이 사자 표범, 뭐 이런 것들을 한 우리에 두고 살라고 해 봐. 아마 금방 서로 잡아먹고 말거야. 맹수는 고독해야 하는데, 내 친구들은 맹수 같은 사람이 많았어. 자주 만나지는 않고 그저 가끔 연락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해.”
 
  맹수가 사라진 시대가 되었다. 야성이 넘치는 맹수 같은 남자들이 사라지고 있다.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디지털시대에는 자연이 없고, 그 자연 속에 사는 맹수도 없다.
 
  ‘방배추’ 선생의 일터인 경복궁을 거닐면서 그 옛날 산속을 누비던 조선 범 한 마리와 산책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굴곡 많았던 한 시대를 거침없이 살아온 배추 방동규 선생은 이제 팔순의 나이를 앞두고 있다. ‘배추’는 선생이 고교시절 배추장수처럼 허름하게 입고 다닌다고 해서 얻은 별명인데, 이제는 아호(雅號)처럼 느껴진다.
 
  선생은 평생을 온몸으로 노동하고 행동하면서 살아왔다. 백기완 선생은 친구 방배추의 몸을 두고 “노동과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라면서 “형식미학(美學)과 실질미학이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결합된 몸”이라고 평했다.
 
  방 선생은 전문적인 보디빌더는 아니지만 요즘도 ‘형식미학’인 보디빌딩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실질미학’인 경복궁 문화재관리 지도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원조(元祖) 구라’인 그에게 ‘구라’란 무엇인가 물었다.
 
 
  ‘구라’란 무엇인가
 
  “경험으로 말하는 걸 구라라고 하는 건데…, 상상력이 아닌 내 실제 삶에서 나온 말들이 재미있나 봐. 그래서 사람들이 ‘구라, 구라’ 하잖아. 지금은 ‘구라’라는 말이 뭐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인가 봐. 구라라는 이름을 쓰는 방송인도 있잖아. 그런데 ‘구라’는 옛날에는 아주 부정적인 말이었어. 사기꾼, 거짓말쟁이, 말만 잘하는 사람에게 ‘구라 친다’고 하잖아.
 
  호사가들은 백기완, 황석영, 그리고 나를 ‘조선의 3대(大)구라’라고 하는데, 앞으로 나는 구라대열에서 빠졌으면 좋겠어.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황석영, 정치적 신념이 있는 백기완에 비하면 난 가진 게 없잖아. 이젠 나 대신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해야지. 예를 들면 유홍준 교수 같은 사람이 이젠 진짜 조선의 구라야.”
 
  하지만 백기완·방배추·황석영 정도 되는 사람의 ‘구라’와 사기꾼들의 ‘구라’는 다른 것이다. ‘구라’라는 말에서 허풍, 사기의 이미지를 걷어내 버린 사람도 방배추다. 그는 재야(在野)의 ‘구라 중의 구라’다.
 
  방배추의 구라에 힘이 실리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의 몸과 주먹이다. 《사기열전(史記列傳)》의 <자객(刺客)열전>이나 <의협열전>에 실릴 만한 정의로운 주먹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매력적인 사람이다. 선생은 차(茶)를 마시면서 말했다.
 
  “요즘에 나에게 관심들을 좀 가지는 것 같아. 그게 좀 이상해. TV에서도 부르고 말이야. 난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난 남에게 인생이나 뭐 그런 데 대해서 말을 할 자격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선생은 자신은 남에게 군림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정부나 권력기관을 혐오하고, 그 세력의 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선생에게는 아나키스트의 냄새가 났다.
 
 
  “다구리로 달려드는데 어떻게 이겨?”
 
  젊은 날 선생은 우리나라 주먹계의 ‘전설’이었다. 그가 만들어 낸 전설 중의 하나가 바로 ‘17대1 전설’이다.
 
  우리나라 조폭 영화를 보면 흔히 나오는 것이 주인공 혼자서 수십 명의 깡패들을 때려 눕히는 장면이다.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고 각목으로 얻어맞아도 다시 일어나 상대방을 제압한다. 그래서 주먹 좀 쓴다 하면 “내가 17대 1로 겨울바람 휘몰아치는 청계천 골목에서 애들을 손봐 줬다”고 허세를 부린다. 이 ‘17대1 전설’의 원조가 바로 방배추 선생이다.
 
  “그날을 난 분명하게 기억하지…, 날짜까지 말이야. 크리스마스 이브였어. 주한미군(駐韓美軍) 위로 방문차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한(訪韓)한 날이었지. 엄동설한. 영하 20도 이하로 추운 날씨였어. 미국 대통령이 온다니까 서울 시내에 비상이 걸려서 경비가 삼엄했었어. 장소는 을지로6가였는데…, 지금과 달리 그땐 허허벌판이었어. 거기서 주먹 좀 쓴다는 깡패 17명과 붙었어.”
 
  ―진짜 이겼나요.
 
  “어떻게 이겨? 졌지.”
 
  ―그럼, 그 이야기는….
 
  “그게 바로 구라야. 난 졌어. 무참하게 얻어터졌어.”
 
  ―그랬군요.
 
  “그럼. 백기완 같은 친구야 100명이 와도 나한테 안되지. 그런데 그놈들은 이른바 싸움꾼들이야. 전문가란 말이야. 전문가 17명을 어떻게 이겨? 어디서 한 방 들어오면, 그 자리에서 가는 거야. 내가 일본 검객(劍客)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도 아니고 말이야. 동네 개싸움이란 말이야. 룰도 법도 없어. 다구리로 달려드는데 어떻게 이겨?”
 
  ―그러다 잘못 맞으면 죽는 거 아닙니까.
 
  “나, 그때 죽다 기적적으로 살아났어. 사방에서 날아오는 주먹, 발길질에 기절을 했지. 귀 찢어지고 입이 찢어졌어. 여기 봐봐. 이 코 안에 상처와 귀 찢어진 거 보이지? 구두가 입으로 날아 들어오던 기억이 나. 그때 까무라쳐서 안 깨어나면 죽는 거야. 누워 있는데 어디서 말 달리는 소리가 나더라고. 그놈들이 다구리로 발길질하는 소리였지. 을지로6가 전후(戰後) 폐허에 개처럼 맞고 죽었었지.
 
  아마 난 그때 죽었어야 할 운명이 아니었나 봐. 어떻게 알고 왔는지, 아니면 순찰을 돌던 중이었는지, 경찰 덕분에 병원으로 옮겨졌어. 눈을 떠 보니 병원 침대 위더군. 그렇게 해서 살아났어.”
 
 
  ‘경신 배추’
 
  그러니까, 17대1의 전설은 구라다. 이 구라의 배경에는 주먹세계의 변천사가 있다. 이 사건 이전에는 절대 ‘다구리’로 달려들지 않았다고 한다. 1대1로 대결을 하던 시절에서 방배추 다구리 사건 이후 ‘다구리’가 생겨났다. 왜 ‘다구리’가 생겨났을까. 6·25전쟁을 거치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하든지 이겨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싸움꾼들의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중동 짱’ 전상일이라는 친구가 있었어. 독종이야. 이 친구는 ‘무조건 이기면 된다’는 친구야. 나처럼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냐. 작은 사카린 병에 청산가리를 넣고 다니면서 뿌렸어. 주먹 이외에 사시미칼 같은 흉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다구리도 등장했어. 그 전에 난 1대1로는 져 본 적이 별로 없어.”
 
  이전에 방배추 선생이 싸움을 할 때는 싸워도 그 자리에서 도망가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한옥이 붙어 있는 골목에서 1대1로 붙었다. 주위에 둘러섰던 구경꾼들은 경찰이 출동하면 승자(勝者)가 도망갈 수 있게 경찰을 가로막았다고 한다. ‘방배추의 전설’도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당시 경찰에는 학생과(課)가 있었는데, 담당 형사는 방배추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구경꾼들은 방배추의 싸움이 싱겁다고 했다고 한다. 한 대면 그 자리에서 상대방이 뻗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퍼졌다. 한번은 그가 부산에 놀러 갔는데, 두 사람이나 “나 몰라? 내가 ‘경신 배추’다”라며 그에게 호기를 부렸다고 한다(방배추 선생은 경신고 출신).
 
  “허허, 정말 웃기는 일이야. 구라도 그런 구라가 없었지. 내 앞에서 나라고 하는데, 그럼 난 뭐야?”
 
  그는 왜 그렇게 주먹을 잘 썼을까.
 
  “유전적인 요인이 크지. 우리 집안이 운동을 잘하는 집안이야. 부친이 일제(日帝)시대에 와세다 대학 공대를 나온 엘리트였는데, 유도를 잘했어. 승마대회에 나가서 아마 전국 우승도 했을 거야. 공수도 검도 유도 육상 등 만능 체육인이었어. 고모도 이화여대에서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 뛰었지. 집안이 운동을 좋아해. 나도 운동만 하면 일등을 했어. 100m, 200m 등 육상종목에서부터 역도, 유도, 합기도 등 운동이라면 뭐든지 했지.”
 
  소년 방동규는 미군 군용(軍用)색을 얻어 와 모래를 넣고 권투연습을 했고, 동네 언덕 고목나무에 새끼를 꼬아 놓고 타격연습을 했다. 몸의 민첩성을 기르기 위해 막다른 골목에서 아이들에게 자갈을 던지라고 하고는 피하는 연습을 했다. 2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험한 장난을 한 것이다. 자갈을 맞으면 이마가 터지고 피가 난다. 그 자갈을 다 피했다고 한다.
 
  “어느 날 자갈을 던지기만 하던 친구가 자신도 한번 피해 보겠다고 하다가 자갈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어. 허허허.”
 
  그렇다면 싸움이란 무엇인가. 선생은 웃으면서 ‘싸움은 반칙이 원칙’이라고 운을 뗀다.
 
 
  “싸움은 반칙이 원칙”
 
배추 방동규의 평생 친구인 백기완.
  “싸움을 잘하려면 타고나야 해요. 후천적(後天的)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최홍만 같은 친구는 힘이 얼마나 좋아? 덩치도 크고 말이야. 그런데 격투기는 잘 안되잖아.
 
  격투기와 싸움은 또 달라, 싸움은 룰과 장소가 없어. 그냥 아무데서나 붙는 거야. 싸움은 반칙이 원칙이야. 싸움에는 심판이 없어. 김두한이나 시라소니는 타고난 사람들이야. 세상살이는 경기가 되어야지 싸움판이 되면 안 돼. 반칙이 난무하는 그런 싸움판에서는 유전적(遺傳的)으로 우수한 놈들이 승리하는 거야. 경기는 그와 다르지. 공부하고 노력한 사람이 이기는 거야. 나는 싸움판 같은 세상이 싫어서 싸웠는지도 몰라.”
 
  선생은 평생 지기(知己)인 백기완을 19살 때 만났다. 고등학교 시절 ‘경신 배추’로 유명한 선생에게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시험지를 바꿔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약한 아이들은 괴롭히지 않는다는 의협심이 있어서 공부벌레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그중에 한 친구가 미국 유학을 가면서 “좋은 사람이 있으니 소개해 주겠다”고 해서 만난 사람이 백기완이다.
 
  “처음 만났는데 눈이 초롱초롱하더라고. 나에게 ‘싸움을 잘한다던데 정말이냐’고 묻더군. ‘그렇다’고 했지. ‘그럼 몇 명이나 상대할 수 있냐’고 묻기에 ‘한 열 명 정도는 붙을 수 있다’고 했더니, 갑자기 일어나서 귀싸대기를 때리는 거야.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남자가 주먹을 한번 쥐면 3000만 동포가 웃고 울고 해야지! 에이, 이 새끼야 나가!’ 이러는 거야.
 
  그냥 황당하기도 하고, 좀 억울하기도 하고 해서 그 자리에서 나와 집에서 곰곰이 생각해 봤어. ‘감히 내 귀싸대기를 때려’ 하는 생각에 화도 났지만, 그 말이 맞더라고. 일주일 후에 찾아가서 ‘니 이야기가 옳다. 동무하자’고 했지, 허허. 그 친구는 내가 좀 삐딱하게 굴면 지금도 난리 난리야. 이젠 좀 지겹기도 하지. 허허.”
 
 
  사막의 똥파리들
 
배추 방동규 선생은 지금은 경복궁에서 관람객들에게 문화재 해설을 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노동은 신성(神聖)하다’는 말이 있다. 방배추 선생은 이 말에 대해 심하게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의 몸 절반은 노동으로 이루어진 몸이다. 노동으로 단련된 몸에서 나오는 말에는 힘이 있다.
 
  “그런 말을 하면 내가 그러지. ‘똥을 쌀 놈아! 노동은 신성한 게 아니야. 노동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거야. 안 하면 처자식이 굶으니까 하는 거야’라고. 하고 싶은 거 하는 거 있잖아. 예술, 문학, 요가, 마라톤 같은 거 말이야. 그런 건 며칠씩 해도 지겹지 않아. 하고 싶은 걸 하니까. 하지만 노동은 정말 하기 싫은 거야. 황석영은 소설 《객지》를 쓰기 위해 두 달간 노동을 했다고 하더군. 내가 그랬지. ‘임마, 그건 노동이 아니야. 노동을 알려고 애쓴 거지’. 위장취업하는 것도 노동은 아니야. 노동이 뭔지 알려고 하는 거지.”
 
  방배추 선생은 서독 탄광에서부터 노동을 했다. 하루 종일 막장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안 하면 굶어 죽으니까 하는 것, 그건 신성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하는 거다. 사는 거다.
 
  방배추 선생의 말을 ‘구라’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잘 들어 보니 그의 구라 절반은 근육에서 나온다. 형식미학과 실질미학이 절묘하게 어울린 몸에서.
 
  방 선생은 외국에 자주 나갔다. 독일에서는 광부 생활을 했다. 프랑스에서는 노동판 막일을 했고, 노숙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현대건설 근로자로 중동(中東)에서 일하기도 했다.
 
  “중동의 아랍에미리트에서 일인데 말이야, 사막을 가다 보면 신기루(蜃氣樓)가 나타나. 눈 앞에 바다하고 배가 보여. 거길 향해서 걸어가면 죽는 거야. 타 죽는 거지.
 
  사막은 맨발로 못 다녀. 영화 보면 주인공이 맨발로 사막을 하루 종일 헤매다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구출되는 장면 있잖아? 그거 진짜 구라야. 그럴 수가 없어. 맨발로는 10분 이상을 걸을 수가 없다고.
 
  공사 현장 컨테이너에는 24시간 에어컨이 돌아가. 그래도 실내온도가 28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아. 거기서 28도라는 온도에는 감기 걸려. 그 정도로 더운 나라야. 저녁 무렵에 온도계 들고 서 있는데 53도를 찍더라고. 어느 정도인지 알겠지?
 
  그런 곳에서 사람들에게 신기루가 보이는 거야. 아무데서나 안 보여. 너무나 절박하면 자신이 바라는 세상이 보이는 법이지.”
 
  중동 근로자 시절 겪었던 일에 대한 그의 구라는 계속된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사막을 횡단하는데 갑자기 똥이 마려운 거야. 사막에 차를 세우고 똥을 쌌지. 아무도 없으니까 가리고 뭐고 할 거도 없어. 모랫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몇 분을 못 버틸 정도니까 말이야.
 
  금방 똥을 한 무더기 싸고 일어나는데, 어디서 나왔는지 똥파리들이 나타나서 똥이 안 보일 정도로 붙어 있는 거야. 사방을 둘러봐도 도대체 이 파리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정말 신기하더군. 그 똥파리를 보니까, ‘산다는 것이 정말 처절하고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나더군. 지난 시절, 민주정권이 들어서자 여기저기에서 온갖 민주투사들이 나타났잖아? 그 모양이 사막의 똥파리 같더구먼. 먹고살기 위해 정말 무섭게들 기어들어 오더라고. 진정성이 없이 소위 민주주의 한다는 놈들은 사막의 똥파리보다 무서운 존재들이야.”
 
 
  棺 속의 돼지고기
 
  권력과 금력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똥파리가 난리를 부리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방배추 선생은 돈에 대한 생각도 남달랐다.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돈은 만지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선생이 사업을 계속했더라면 훌륭한 기업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 장사를 해서 150만환을 손에 쥔 적이 있어. 당시 동대문시장의 가게 자리가 30만환 하던 시절이니까, 그 돈이면 동대문시장에 가게 5채를 마련할 수 있는 돈이었지. 그 돈으로 가게를 얻어 가족들이 장사를 했으면 했는데, 아버지가 ‘어린 녀석이 공부를 해야지, 무슨 장사냐’며 그 돈을 압수해서 당신이 다 탕진해 버리셨어.”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여기가 저 세상인지 이 세상인지 헛갈릴 때가 있다. ‘이게 구라구나’ 싶었다. 하여간 이야기가 종횡무진 이어진다.
 
  “전쟁 때 순천에서 피란살이를 하면서 어린 내가 돈을 벌었어. 순천에서 돼지를 잡아 가지고 부산에 가져다 팔고, 부산에서 생필품 등을 사 가지고 와서 순천에서 팔면 이문이 많이 남았지. 장사는 그런 거잖아? 여기에서 싼 거 저기에서 비싸게 파는 거지.
 
  그때 여름이었는데 냉동차가 없잖아. 그래서 돼지 내장을 파내고 거기에 숯을 집어넣어 운반했어. 전쟁 통이니까 물건을 옮기는 데 반출증(搬出證)이 필요했지. 그래서 머리를 썼어. 상이군인(傷痍軍人) 한 명과 함께 돼지를 관(棺)에 넣고 그 관에 태극기를 덮어 운반했어. 그러니까 반출증이고 뭐고 필요 없었어. 군인들이 경례를 하고 경계까지 서 주었으니까.
 
  그렇게 부산에 가서 돼지고기를 팔고, 그 돈으로 군밤, 호떡, 사탕 같은 것들을 사 가지고 순천 와서 판 거야. 히트작은 뻥튀기 기계였어. 그때 순천에는 뻥튀기 기계가 없었어. 부산에 뻥튀기 기계가 있더란 말이야. 그걸 사 가지고 와서 팔았지. 그때 몇 배 이문을 남겼어. 없어서 못 팔았으니까.”
 
  방배추 선생은 ‘비록 성공이라는 잣대로 보면 실패라고 할 수 있더라도, 평생을 열심히 산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다. 구라만 치면서 일을 안 하는 사기꾼 같은 사람을 미워한다는 소리다.
 
  근로자로서 한 시절 열심히 살았던 그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노조(勞組)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정치권도 매섭게 비판한다.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하지만, 이건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싸움판이야. 일대일이 아니라 다구리로 달려드는 양아치 같은 짓을 하고 있어. ‘국민의 뜻’ 운운하는 건 국민을 팔아먹는 행위야.”
 
 
  파리 센강변에서 노숙
 
  하지만 노동운동이나 정치권에 대한 비판보다 더 흥미를 끄는 것은 역시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이다. 파리에서의 노숙자 생활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 그건 독일에서 광부 일을 끝내고 프랑스로 공부 좀 하려고 간 거지.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더라고. 그래서 만리타향(萬里他鄕)에서 가진 것 없이 접시닦기를 비롯해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버티다가 결국 노숙자가 된 거야.
 
  센강변에서 노숙을 했는데, 한겨울 돌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자니까 춥고 배고팠지. 발바닥이 많이 시리더군. 그때 아홉 끼를 굶어 본 적도 있어. 집시들을 만나 같이 어울린 적도 있었어. ‘노래나 악기를 하는 것이 있느냐’고 묻기에 ‘못한다’고 했더니, 그냥 같이 다니자고 하는 거야. 집시들과 같이 다니면서 모자 들고 구걸도 하고 그랬어. 그때도 참 기가 막힌 일이 생겼어.”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있다. 노숙자가 되어 파리 시내를 배회하는데, 건물 담벼락의 하얀 종이에 적힌 한글 광고를 발견했다. 이런 내용이었다.
 
  <배추형! 고생한다는 소리 듣고 센강 찾아다녔는데 못 만났다. 이 건물의 옥상 방에 열쇠 있으니까 쉬고 있으세요.>
 
  “그런 쪽지를 건물 담벼락에 붙여 놓은 사람이 박진만씨인데, 그걸 내가 본 거야. 하여간 사람은 돌아다녀야 살 궁리가 생긴단 말야. 그래서 그 건물의 방에 올라갔더니 과연 열쇠가 있었어. 작은 방에 목침대가 있고 부엌이 붙어 있었어. 거기서 씻고 먹고 한동안 죽어라고 잤어. 그 사람이 나에게 큰 은인(恩人)이지.”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로 박진만씨와 사이가 소원해지고 파리를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박진만씨가 좋아하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진만씨는 집요하게 구애(求愛)를 했고, 지친 그녀가 피신을 한 곳이 바로 방배추의 방이었다.
 
  “그녀가 박진만을 피해서 내 방에서 일주일간 있었어. 남녀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그런 일은 정말 없었어. 그런데 그녀가 나를 나쁜 사람 취급 하는 거야. 지금 생각해도 여자의 마음은 참 알 수가 없어. 왜 자신을 보호해 준 사람을 그렇게 매도했는지…. 혹시 나를 좋아했나? 하하.
 
  하지만 난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를 건드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어쨌든 그 사실을 알고는 그 친구가 찾아와서는 난리를 치는 거야.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와 일주일간 동거(同居)를 했으니 뻔한 상상을 했겠지. 나하고 인연을 끊겠다고 하는 거야. 그때부터 파리가 싫어지더군.”
 
 
  센강에 비친 엄마 얼굴
 
  그래서 파리를 떠날 생각을 하고 옥탑방에서 나와 센강변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데 강물 위로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고 한다.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 하마터면 엄마를 찾아 강물로 들어갈 뻔했어. 엄마가 ‘동규야, 동규야! 고생하지 마라’ 하시더군. 그런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파리 생활을 더 이상 못 견디고 돌아왔어.
 
  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별로 후회하지 않아. 살고 싶은 대로 살았으니까. 그런데 단 하나. 효도를 못한 거. 그건 정말 후회스러워. 나는 효도를 하는 사람을 좋아해. 지금도 엄마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져. 그럴 때면 ‘나는 실패작이고 무능력자’란 생각이 들어. 그럴 때마다 ‘열심히 정성껏 살자’고 다짐하면서 운동도 일도 열심히 하고, 책도 열심히 읽어. 그런 말이 있잖아.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고. 이 말을 되씹으면서 이 세상을 살고 있어.”
 
  방배추 선생이 매우 망설이면서 해 준 이야기를 적어 보자. 그 일은 인생에 어쩌면 가장 큰 기회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일은 방배추가 지독하게 가난하던 시절에 일어났다. 방 한 칸에 아이들이 잠들어 있고, 아내가 인형에 단추를 달면서 살던 시절이었다.
 
  방배추 선생과 인연이 깊던 선우휘(鮮于煇) 《조선일보》 전 주필이 ‘어떤 사람’과 같이 찾아왔다. 그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지만 그건 말하기 힘들다고 했다.
 
  “선우휘 선생과 ‘어떤 사람’이 제안을 했어.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심복이 필요한데 내가 적격인 것 같으니 그 밑으로 들어가라는 얘기였어. ‘이 고생 그만해라.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집 걱정 할 필요 없다’고 하더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어.”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그 자리에서 거절했어. 제안을 한 사람이 그러더군. ‘넌 소인배다. 네가 들어가면 주위에 있는 사람 여럿이 잘살게 된다. 넌 자존심 때문에 이 좋은 기회를 버리느냐’고 하더군.
 
  그래, 난 소인배야. 차라리 소인배가 낫지. 배신자보다는 말이야. 이런저런 사유로 박정희(朴正熙)·전두환 정권 시절에 여러 차례 감옥생활을 했어.”
 
  선생은 잡혀 가서 고문을 당했던 이야기를 했다. 고문을 하기 전에 일단 그들은 야구방망이를 드는데, 야구방망이에는 ‘국산 거짓말 탐지기’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청와대를 향해 ‘각하,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복창하고 고문을 하기 시작하더군. 난 싸움꾼이라 몸이 강해. 그런데 고문을 견디는 인간의 몸은 없어. 언젠가 방송국에서 촬영을 하면서 뇌파검사를 했는데 고문 이야기가 나오면 뇌파가 일직선을 그리면서 멈춘다는 거야. 뇌에 아무런 반응이 없어. 그 기억이 너무나 힘들어서 몸이 지워 버린 거야.”
 
  방배추 선생은 나중에 자신을 고문했던 이근안을 광화문에서 만났다고 한다.
 
  “소주 한잔 마셨지. 이근안이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하더군.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너를 고용한 국가를 원망한다’고 했지. 술값이 모자라서 아내에게 돈을 가져오라고 해서 술값을 내 주고 헤어졌어. 아내에게서 ‘미친 거 아니냐. 원수라면 원수인데 술값까지 내고 그게 무슨 짓이냐’고 지청구를 들었어. 하지만 그렇게 그와의 악연을 정리하고 싶었던 거야.”
 
 
  “오늘을 그저 열심히 사는 거야”
 
  방 선생은 “사람은 용서가 되지만 고문이라는 행위는 지금 생각해도 무섭고 이가 갈린다”고 했다.
 
  “고문을 이겨 내는 몸은 없다는 거야. 천하의 그 누구라도 고문 앞에서는 인간성, 자존심, 심지어 본성마저도 파괴되고 말아.”
 
  방배추 선생을 두 번 만났다. 한 번 만나서 글을 쓰려는데 조금 더 듣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고, 괜히 한 번 더 뵙고 싶기도 했다. 두 번째 만나는 날은 산책을 하면서 경복궁에서의 이야기, 요즘의 근황을 들었다. 부암동에서 역시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다.
 
  “경복궁에서 야간순찰을 하면서 지난 세월 여기에서 살았던 왕과 왕비, 뭐 대단한 사람들이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걸 보지. 여기저기 나무가 있던 자리 있잖아. 원래 저기는 전부 건물이 있던 자리야. 모두 사라지고 나무를 심어 놓은 거지. 조선의 왕들도 저렇게 가고 없는데, 나 같은 늙은이 하나 사라진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오늘을 그저 열심히 사는 거야. 순찰 돌고, 운동하고, 밥 먹고….”
 
  방배추 선생에 대한 느낌은 만나기 전과 후가 너무나 달랐다. 막연히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에 대한 이야기들, 전설적인 영웅의 이미지는 없었다. 검소하고 소탈한 건강한 근육질의 노인이 있을 뿐이었다.
 
  선생과 헤어져 경복궁을 나섰다. 뒤돌아서서 경복궁을 바라보는데 선생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설픈 ‘구라’ 치지 말고 건강하고 소박하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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