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차길진의 산따라 강따라

醉月 2010. 11. 4. 08:55

[1화] 강화도 제①편 [하늘을 여는 땅 강화도]

강화의 바다. 검은 적자색이다.나그네가 되어 도착한 강화 다리 아래 펼쳐진 바다는 마침 썰물이 한창이었다. 물이 걷히자 여인네 속살처럼 드러나는 갯벌. 석양에 비친 강화 바다 빛깔은 오묘했다. 얼른 보기에 흙빛이지만 끈적한 잿빛 어딘가에 붉은 색을 품고 있었다. 검은 적자색은 낙조가 어루만질 때마다 부끄러운 듯 언뜻언뜻 드러날 뿐이었다.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인 서해안 갯벌의 하나가 강화 갯벌이다. 육지도 아니요, 그렇다고 바다도 아닌 것이 갯벌 아니던가. 나그네의 눈엔 땅과 물의 중간인 강화 갯벌에서 찬란하게 발현되는 광채가 왠지 평범해 보이질 않았다.

수천 년 전 고조선의 단군은 왕이자 제사장으로서 누구보다 우주의 기운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런 그가 대륙을 남하하면서 제천의식을 올릴 참성단 자리로 백두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과 같은 쟁쟁한 명산을 물리치고 잡은 혈 자리가 왜 하필 강화도였을까.

강화도는 단군시절에 김포와 연결되어있었다고 하지만 강화 바다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아시아 최고인 9m를 넘나들고 질퍽한 갯벌이 한없이 펼쳐져있어 배를 대기가 어려웠고, 겨울이면 한강, 임진강, 예성강에서 흘러 온 얼음조각 유빙(遊氷)이 바다에 가득해 배가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악조건이었다. 왜 이곳에 성소(聖所)를 만들고 하늘에 땅이 열렸음을 고했을까.

◇ 강화 바다 빛을 닮은 순무 김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더니, 나그네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인심 후하게 생긴 식당 아주머니는 이것저것 가뿐하게 한 상을 차려냈다. “이건 강화도에서만 나는 귀한 거예요. 다른 지방에 심으면 이 빛깔이 안 나고 여기서만 이런 빛깔과 맛이 납니다.”

아주머니가 정성스럽게 사발에 담아온 것은 강화 순무 김치였다. 머리가 양파처럼 둥글게 생긴 강화 순무를 보는 순간 그만 그 색깔에 감탄하고 말았다. 갯벌을 품은 강화 바다 빛을 엷게 담은 바로 그 적자색이 돌기 때문이다. 아주머니가 내온 건 김치가 아니라 한 사발의 강화도 기운(氣運)이었다.

어디 순무뿐이랴. 화문석을 짜는 왕골(일명 완초)도 다른 지방과 달리 키가 크고 굵으며 색이 유난히 희기에 임금님 진상품으로 올랐다. 강화 인삼은 또 어떤가. 고려 고종(1232)때부터 시작해서 고려인삼의 원산지였다. 명실 공히 세계 최고의 약초로서 고려와 조선의 국부로 나라를 먹여 살렸다. 식물조차도 뿌리를 두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귀물(貴物)로 변하는 강화도. 이 강력한 지기(地氣)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튿날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단군이 점지한 성소인 참성단(塹星壇)이었다. 참성단을 한자 뜻으로 풀이해 ‘구덩이(塹)를 파고 별(星)을 바라보는 단(壇)’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천문대 역할을 했을 거라는 설도 있지만 나그네는 글자 그대로 ‘참으로 성스러운 단’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단군 시대엔 한자가 없었으니 이두나 구결처럼 순수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후대에 그 한자의 뜻이 더해진 게 아닐까.

참성단으로 오르는 해발 467m 마니산은 세인에게 호락호락하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기암괴석이 정상을 향해 치솟아 있는 형상은 하늘을 향한 관문 같았다. 서쪽 기슭에는 조선시대 승려 기화(己和)가 자신의 당호(堂號)를 따서 ‘함허동천(涵虛洞天)’이라 이름을 붙인 절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동천이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하늘에 닿을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다. 단내 나는 거친 숨을 토하며 한발 한발 오르는 1004의 계단 길. 하늘이 나그네의 지극한 마음을 시험하는가보다.

참성단은 거친 돌을 다듬어 쌓은 제단으로 기단은 지름 4.5m의 원형이고 상단은 사방 2m인 정방형이다. 이는 상고시대부터 가지고 있었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기하게도 참성단은 북으로는 백두산 천지, 남으로는 한라산 백록담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두 자리에 이르는 거리가 같으니 강화는 전 국토의 기가 한곳에 모이는 있는 혈 자리다. 뿐만 아니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지구상에서 손꼽히는 곳이 아닌가.

밀물과 썰물은 달의 작용이다. 현대 과학은 지구가 태양 못지않게 달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바다의 밀고 당김은 바로 생명의 태반인 갯벌을 만들어냈다. 음양오행설을 빌리자면, 태양은 양이요 달은 음이다. 지구상에서 음기가 가장 센 곳의 하나가 강화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생명을 잉태하는 여자의 배꼽인 셈이다. 강화 바다의 거대한 오르내림은 바로 생명의 힘찬 맥동이었던 것이다.

인공위성이나 측량기구도 없는 그 미명의 시대에도 단군의 기감(氣感)은 기가 막힐 정도로 정확했다.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리는 성지로서 이만한 자리가 또 있을까.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나라를 열겠다는 개국의 웅지는 이곳 강화였기에 가능했으리라. 나그네는 펄떡펄떡 뛰는 지구의 배꼽 위에 서 있었다.

기운과 시기가 잘 맞아떨어지면 크게 생(生)하지만, 반대로 역풍을 만나면 처참히 멸(滅)하는 극생극멸(極生極滅)의 기운이 감아 도는 강화도. 조수 간만의 차이가 엄청난 것처럼 한반도의 역사는 흥망이 요동쳤다.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운 극생(極生)도 있지만 강화엔 극멸(極滅)의 역사도 엄연히 존재한다. 고려시대부터 천혜의 요새라는 이점을 안고 39년간 대몽항쟁으로 명성을 떨쳤고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던 강화는 조선 말 서양의 문호개방 압력으로 인해 격전지가 되었다.

◇ 극생극멸의 기운 감도는 신비의 섬

특히 고종 8년 신미양요는 강화의 비극이었다. 문호개방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략한 미국과의 전쟁 결과 미국 측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에 불과했던 것에 반해 조선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여 명이라는 학살 수준의 완패를 당한 것이다. 그 후 강화도는 대표적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왕조의 역사와 함께 명멸(明滅)하였다.

예로부터 참성단에서 올려지는 제천의식은 곧 하늘님의 자손이라는 사실과 민족의 자존을 확인하는 행사였다. 심지어 중화를 섬기는 유교가 정치 지배이념으로 정립되었던 조선시대조차도 가뭄엔 기우제, 나라에 우환이 있을 때 불길함을 해소하기 위한 해괴제를 지내기도 하여 종교 성지로서의 위상을 잃은 적이 없었다. 오늘날에는 전국체전의 성화 점화의식을 행함으로써 그 전통을 잇고 있는 민족의 성소다.

예로부터 나라에 위난이 닥치면 역대 임금들이 찾는 곳이 강화였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잉태할 곳을 찾는 연어의 회귀 본능과 다를 바 없다. 위기가 엄습하면 누구든 본능적으로 안전한 어머니 품을 찾게 마련이 아닌가.

그런데 나그네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민족의 성지 참성단을 직접 참배할 수가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조악하고 흉측한 철책이 가로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철책이라니. 군사적 목적과 관광객들의 훼손을 막기 위한 철책은 분단 철조망의 한반도를 고스란히 상징하고 있다.

신화나 전설은 영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역사는 사람들에 의해 지워지거나 왜곡될지언정 신화나 전설은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어 영원히 존재한다. 왕조 교체과정에서. 그리고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철저하게 우리 민족의 신화가 살아 숨 쉬는 상고사 기록을 멸실했다. 지금은 단지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다양한 80기 이상의 고인돌이 강화의 오랜 기원을 웅변하고 있다.

두 개의 다리로 이어짐으로써 단군 시대처럼 다시 육지가 되어 극생의 기운이 생동하는 강화. 강화 바다가 스크린처럼 변하며 나그네의 눈에 한반도의 미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서울=뉴시스】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2화] 강화도 제②편 [강화도 통일의 땅 미래의 땅]

 

<송악산, 개성>


강화가 키운 것은 왕골과 인삼뿐이 아니다. 강화의 배꼽은 걸출한 인물을 낳았다.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고려 무신정권의 1인자 최우, 그리고 비운의 왕 고려 고종이다.

고려산에서 태어난 연개소문은 당(唐)을 대파한 천하맹장으로 고구려 최고의 권력을 자기 가문에 집중시키는 바람에 그가 죽은 뒤 고구려도 멸망일로를 걷게 된다. 고려의 최씨 무인정권 역시 나라의 흥망성쇠와 함께 했다.

아버지 최충헌의 권력을 물려받은 최우는 몽골이 침략하자 수도를 강화로 옮겨 고려산에 고려궁을 짓는다. 강화 고려궁의 뒷산인 북산을 개경처럼 ‘송악산’이라 개명하고 궁궐의 배치도 개경과 똑같이 했다.

아들 최항, 손자 최의까지 항몽 의지를 꺾지 않다가 최의가 살해되자 무인정권 60년도 막을 내리고 이듬해 원(元)나라와 화친함으로써 고려는 굴욕적인 원의 섭정기로 접어들고 만다. 46년 재위 기간 동안 최씨 정권의 꼭두각시였던 고려 고종은 아이러니하게도 원과 화친을 시도하자마자 생을 마감한다.

고종의 능 앞에 선 나그네는 왕 노릇도 못하고 동가숙 서가식하다 간 그의 처연한 기운에 가슴 한 구석이 저려왔다. 휑하게 남은 고려궁터를 걷고 있노라니 바람결에 최우 영가와 고종 영가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최우 영가는 “내가 고려다. 내가 살아있는 한 고려는 건재하다”고 믿고 있었으며, 고종 영가는 “강화도는 감옥이었다. 나는 강화에서 단 한 순간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왕의 탄생과 죽음 함께한 섬

나그네는 연산군의 유배지이자 철종이 잠시 머물렀던 잠저소가 있는 교동도로 가기 위해서 창후리 선착장으로 향했다.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燕山君)과 25대 왕 철종. 같은 왕이었지만 둘의 운명은 천지차이였다. 연산은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와 죽었으며, 떠꺼머리 농사꾼이었던 철종은 졸지에 택군(擇君)되어 한양으로 떠난다. 도대체 강화의 무엇이, 왕을 만들기도, 또 왕을 죽이기도 하는 걸까.

교동도 월선리 선착장에 내리자 왕족 영가들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전남 해남 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政爭)에서 밀려난 선비들은 멀리 보내면 그만이었지만 왕족은 달랐다. 한양과 가까운 곳에 격리시켜 그들의 동태를 항상 면밀히 살펴야만 했고, 그러기에 교동도는 최적의 유배지였던 셈이다.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 왕 희종(熙宗)부터 조선시대 영창대군(永昌大君), 임해군(臨海君), 능창대군(綾昌大君) 등 11명의 왕족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으며 특히 연산군은 유배온 지 두 달 만에 죽어 이곳에 가묘를 썼고, 그의 아들과 부인도 이곳에서 명을 다했다.

“연산군 유배지는 말이 많습니다. ‘연산군 적거지’ 표지석이 있는 읍내리와 신곡동 신골, 그리고 영산골 등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인데요. 어디부터 가시겠습니까?”

동행한 지인은 내 얼굴만 바라봤다. 영능력자로서 후보지 1순위를 정해달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가만히 연산군 영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뒤 지체 없이 읍내리로 향했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 성곽의 흔적만 찾아볼 수 있는 교동읍성을 지나 연산군 유배지에 도착하자 가슴이 턱 막혔다. 늙은 오동나무가 드리운 옛 우물터 한 편에 ‘연산군 적거지’라는 초라한 표지석과 함께 녹슨 안내판이 서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연산군과 폐비 신씨를 모신 사당인 ‘부근당’이 보였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왕의 유배지치고는 너무도 초라했다. 사당에 향을 사르자 연산군 영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억울함을 호소했다. “내가 정말 나쁜 왕이었다면 나를 폐위시킨 그들이 명나라에 거짓을 고하지 않았을 거요. 나는 두 여자(폐비 윤씨와 인수대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죄밖에 없소.”

알려진 것처럼 색만 밝히는 패륜왕도 아니었다며 자신의 후궁은 오직 한 명뿐이었고, 애첩이자 요부로 알려진 장녹수(張綠水)도 빈도, 귀인도 아닌 겨우 정3품 소용(昭容)에 불과한 후궁으로, 그녀보다 왕비인 신씨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었다고 고백했다.

연산군 유배지로 알려졌던 신곡동 신골로 향했다. ‘신씨’가 많이 살아 ‘신골’로 불렸다는 이곳은 연산군이 아닌, 연산군의 아들 폐세자 황과 그의 부인이 최후를 맞은 비극의 장소였다. 폐세자 황은 유배지를 탈출하려다 목숨을 잃었고, 이를 지켜본 부인은 충격으로 목을 매고 말았다. 현재 그곳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들의 비통한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강화 인물들은 하나같이 강화 조수의 차이처럼 극생극멸했다.

나그네는 강화도와 동검도 사이를 시원하게 달리고 있었다. 별안간 자줏빛 평원이 눈앞에 펼쳐지는 게 아닌가. 장관이었다. 알아보니 자주색 꽃이 피는 칠면초라는 식물이 갯벌을 초원삼아 번성하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한 검은 자줏빛처럼 강화는 여전히 신비를 숨기고 있다.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였다. 갑비고차란 현대어로는 ‘갑곶, 갑곶이’가 되며, 두 갈래로 갈라진 물(바다, 강)가에 있는 곶으로 된 고을이라는 뜻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유입된다. 옛날엔 이 물을 모든 강의 할아비가 된다는 뜻으로 조강(祖江)으로 불렀다. 할아비강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한 줄기는 짠물(염하)로 흘러나가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흘러들어 예성강을 품는다. 아마도 이 큰 두 줄기의 하천을 보고 두 갈래 물인 갑곶이라고 했을지 모른다.

◇한강·예성강·임진강이 이룬 삼합수

그러나 강화 바다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 세 개의 강이 만나는 엄연히 삼합수(三合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동시에 강이 세 개가 만나는 삼합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세계 최대급의 조수간만의 차가 삼합수에 맥동치니 강화는 한반도, 나아가 지구의 배꼽된 것이다. 뛰어난 영적 능력의 소유자였던 단군(檀君)은 이런 엄청난 지기(地氣)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이야말로 국기(國基)를 세우고 백성과 더불어 수만 년을 살아도 될 땅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 아들(부루 夫婁·부소 夫蘇·부우 夫虞)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여 삼랑성(三朗城)의 전설을 낳게 했다. 나라의 첫째 조건은 역시 튼튼한 국방에 있다. 역사적으로 강화도는 우리나라 국방의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꼽힌다.

일찍이 삼랑성 안에는 군창(軍倉)뿐 아니라 조선실록을 보관했던 장사각(藏史閣) 등을 둬 유사시에 국가적 보루로서 몫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꼽았던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강화도는 분단 이후 남북대치 상황에서 최전방인 동시에 수도 서울을 지키는 최후의 요새가 되는 지역이 아닌가.

육지와 연결되어 극생(極生)의 기운이 가득 한 강화는 지금 제2의 개국을 준비하고 있다. 강화는 남으로 영종도를 북으로 개성을 거느리며 트라이앵글을 형성하고 있다. 영종도에는 세계 각국의 항공기가 드나드는 거대한 비행장이 마련돼 있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올림픽국제공항의 거대한 십자 주차장보다 훨씬 규모가 큰 영종도 비행장은 지금보다 세 배를 더 넓힐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자가용 비행기 시대 개인 전용기 격납고가 있어 아시아 물류허브를 넘어 첨단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지구촌 정거장의 기반시설을 완비하고 있다. 남북 경협의 핵심 사업이 개성공단에 위치한다. 최근 들어 삐걱거리고 있지만 대륙에선 최초 흑인대통령이 당선되어 오랫동안 정체된 한반도에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강화의 지하에는 삼합수가 실어 나르고 태평양의 거대한 조수가 빚어 낸 퇴적광물이 지하에서 숨을 쉬고 있다. 이 광물은 미래의 인류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의 광물이다. 인삼이 고려와 조선의 국부가 되었듯 이 천혜의 광물은 다가오는 제2의 개국에 밑천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강화에서 멀리 개성 쪽을 바라보았다. 나그네의 눈에 앞으로 4년 뒤, 그러니까 2013년의 광경이 펼쳐졌다. 개성은 서울 못지않은 행정의 요지로 건설의 망치 소리가 한창이었다.

 

【서울=뉴시스】 아비류 阿比留 성씨 가문의 묘
왜성과 달리 대마도 금전성은 성 안에 우물과 인공 개울이 있어서 장기 항전이 가능하다. 이는 한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토성들과 같은 특징이다. 나그네는 금전성이 백제식 산성임을 한눈에 직감했다. 왜 대마도에 이렇게 견고한 백제 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나그네의 눈에 부지런히 산성을 쌓는 백제인들이 어른거렸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을 당나라로 잡아가자 왜(倭)는 대대적인 원정을 준비한다. 왜는 매번 꺼져가는 백제를 되살린 세력이었기에 나당연합군은 부흥군의 근거지인 왜를 치기로 한다. 한반도에서 퇴각한 백제 유민과 고대 일본인들은 이에 대비하기위해 대마도, 규슈 등 서일본 각지에 백제식 산성을 쌓은 것이다(667). 대마도의 금전성은 그 최전선에서 맞서는 백제 결사대의 병참기지였다.

 

[서울=뉴시스】 경주와 마주보고 있는 와타즈미 和多都美 신사>


나당연합군을 막기 위해 대마국(對馬國)에 금전성(金田城)이 축성된 직후(667년) 동아시아엔 지금까지 없었던,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국제적인 큰 변화가 일어난다.
660년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고 크고 작은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력이 쇠잔해진 왜(倭) 안에서는 심한 국론분열이 일었다.
이토록 왜가 국운을 걸고 백제를 지원했던 까닭은 왜 천황가가 비류 백제계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이 백제로 건너가 백제 부흥운동을 지휘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전쟁에서는 그래도 의리와 인정이 있었지만 나당연합군의 양상은 판이하게 달랐기에 내심 두려움에 떨던 왜는 ‘다시는 대륙을 넘보지 말라’는 나당연합군의 협상을 받아들이고 만다.
백제계 왜가 급작스럽게 일본(日本)으로 국명을 바꾼다. 반도 백제와의 정치적 연관성을 끊는 선언이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도 이 시기(680년께)에 쓰기 시작함으로써 한반도의 백제와 완전히 결별하는 순간이었다.

◇ 나당연합군 협상 받아들인 백제계

이는 백제와 왜 사이의 전통적인 관계 단절과 격동의 동아시아에 새로운 질서를 알리는 대격변이었다. 동시에 일본이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반도의 백제와 일본열도는 공동체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668년 고구려까지 무너뜨린 신라는 당(唐)군을 축출하기 위해 반도 내의 고구려, 백제 유민에게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쓰지만 대마도와 규슈 지방의 백제 유민들은 적대시한다. 백제 유민들의 본방 수복 요구는 끝내 외면당하고 만다.

대마도 아소만 바다에는 와타즈미 신사(和多都美 神社)가 있다. 입구에 세워져있는 하늘 천(天)자 모양 5개의 문 중에 두 개는 바다에 세워져 조수에 따라 드러내는 모양을 바꾸는데, 이 문의 방향은 정확히 신라 경주와 마주하고 있다. 신라 침공을 격퇴하는 기원이 담겨있을 정도로 신라에 대한 적대감이 깊었음을 읽을 수 있다.
일본 개국 이후에도 대마도는 백제 유민이 정착하여 여전히 본방 수복 준비를 하며 통일 신라도, 고려도, 조선도, 일본도 아닌 마지막 백제로서 13세기 중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비류가문이 통치하다가 지금까지 흘러오게 된 것이다.
일본열도에 자리 잡은 백제인들도 그랬지만 특히 대마도와 규슈 백제인들의 잠재의식 속엔 늘 본국을 향한 향수가 자리 잡고 있다. 두 남자를 섬기는 여인 형국을 한 대마도는 한 남자가 두 남자로 분신(分身)한 역사의 산물이 아닐까.

일본 안내인은 서툰 한국말로 일행에게 물었다. “대마도에서 ‘친구’를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누군가 ‘토모다치’라고 하자 안내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마도에서 한국말 ‘친구’는 그대로 일본어 ‘친구’로 통합니다.”
이렇게 대마도에서만 통용되는 한국 단어가 3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역사책은 하루아침에 고쳐 쓸 수 있으나 사람의 몸에 밴 문화와 언어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문화와 언어는 살아있는 유적이다.
생각해보니 나그네가 금전성에서 맞닥뜨린 백제인 영가들의 언어는 호남지역 말도, 일본 말도 아니었다. 언젠가 구명시식에서 만난 고주몽 영가와 만주 영가의 말과 흡사했다. 부여가 분화한 고구려, 백제는 당연히 같은 언어권이었을 것이고 일본에서 살던 왕족이 백제의 왕으로 등극해도 통치가 될 정도이니 고대 일본 언어 또한 이질감이 없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초기 신라의 한 부족이었던 마한의 언어만 여타 부족들과 완전히 달랐다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되어있다. 일본서기는 신라를 ‘금(金)을 숭배한 흉노족’이라 기록하고 있다. 신라 문무왕 비석에도 문무왕 자신이 흉노의 후예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금석학의 대가 추사(秋史) 김정희도 자신의 성씨가 흉노족에서 왔음을 확인한 바 있다. 일부 한일 언어학자들도 현재 일본어는 고구려와 백제가 쓰던 만주어와 일본열도 토착민(오키나와)들의 말이 혼합된 말이고, 지금의 한국말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말이라고 밝히고 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 ‘연개소문’처럼 일본인의 이름은 네 글자이지만 한국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세 글자를 쓰는 것도 이런 영향일 것이다.

나그네가 이즈하라항 어시장에서 마주친 대마도 주민들의 얼굴 생김은 낯설지 않았다. 귀만 막으면 마치 부산 자갈치 시장 한 복판에 온 느낌이었다. 야요이시대부터 나라시대까지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이 약 100만 명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인구의 수준이나 교통수단을 감안해 보면 국가적인 대이동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한 인류학자도 이를 뒷받침한 적이 있다.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모습 등을 토대로 당시의 도래인(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의 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규슈지방 사람 대부분이 도래인이라고 발표했다.

이쯤에서 한일 간의 뜨거운 감자인 임나일본부설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고 있는 ‘일본서기’는 어디까지 진실일까.
양국의 팽팽한 대립을 무색케 하는 유적이 2000년 8월27일 경남 고성군에서 발견되었다. 고성군의 송학동 고분은 80년대부터 일본학자들이 일본식 묘제라고 주장해 한바탕 소용돌이가 일었던 유적지였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무덤은 내부가 이글거리는 태양의 광채처럼 온통 붉게 채색된 ‘빨갱이 고분’이었다.

◇ 가야·신라·백제·왜 유물 총집합된 묘

이러한 채색고분(장식고분)은 전형적인 일본(특히 규슈지방)의 무덤양식이었다. 공주를 중심으로 옛 백제지역에서는 간간히 일본과 관련된 유물이 발견된 적이 있지만 옛날 가야 지역이던 곳에서 일본식 무덤은 처음이었다. 무덤 양식은 고대 사회의 총체적 문화양식이자 결정적인 역사의 타임캡슐이기에 한일 양국 학계의 관심은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덤은 과연 고대 가야지방을 일본이 지배했었다고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것인가.

본격적인 발굴 2년 동안 일본 전문가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대부분의 부장 유물과 인골은 이미 도굴의 화를 입었지만 남겨진 부장품으로 한일 학자들은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가야, 신라, 백제, 왜의 유물이 총집합해 있는 고분이라는 것이다. 즉 철의 산지였던 소가야를 중심으로 각 고대 왕국이 결혼동맹을 통해 밀접하게 교류했다는 증거라고 추정했다. 임나일본부설의 해석을 두고 고대 일본이 삼국의 식민지였다거나 정반대로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상반된 요즘의 두 주장은 양국이 모두 역사에서 본방의 백제를 잃어버림으로써 발생한 역사의 해프닝은 아닐까.

[ 서울=뉴시스】 구한말 대유학자이자 구국항일투쟁의 상징인 면암(勉菴) 최익현 선생의 순국 기념비.
한반도에 뿌리를 둔 대마도의 역사는 애증으로 점철되어있다. 최익현 선생 순국비와 덕혜옹주 결혼 기념비는 가슴 아픈 우리 근대사의 단면이다. 구한말 대유학자이자 구국항일투쟁의 상징인 면암(勉菴) 최익현 선생은 호조참판에 오른 3년 뒤인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꿇어앉아 “조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며 다섯 가지 내용을 상소한다.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도끼로 자기 목을 베어달라는 것이었다.
목숨을 건 상소였지만 면암은 흑산도로 유배당하고 만다. 1894년 갑오경장 단발령이 공포되자 “내 목은 자를지언정 내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는 상소를 올린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73세의 면암은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전북 태인에서 직접 의병을 일으켰으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대마도에서 음식은 물론이고 왜구의 땅을 밟기조차 거부하며 조선에서 흙을 가져와 마당에 뿌렸다. 유배지에서 순국하자 선생의 유해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수선사(修善寺)에서 장례를 치른 후 부산항으로 이송되었다.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최익현 선생 순국비’를 세웠다. 나그네와 마주한 면암의 영가는 성성한 기개로 “임금의 아버지로서 덕이나 쌓을 것이지 국정에 관여하여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며 여전히 대원군에게 노여워하고 있었다.


[5화] 대마도제③편 [통신이 절실하다]

[서울=뉴시스】 필자, 조선 역관사 위령비>

이즈하라항 부근엔 최익현 순국비, 덕혜옹주 결혼기념비가 서있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조선과 일본의 우호를 상징하는 조선통신사비와 고려문이 세워져 있다. 한일 양국 갈등과 우호의 역사가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대마도는 애증의 한일 역사의 축소판이 아닐 수 없다.

1912년 고종과 귀인(貴人) 양씨 사이에서 태어나 유난히 고종의 귀여움을 받은 덕혜(德惠)옹주는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1919년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한다. 하지만 일제는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며 강제로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일본에서 모진 박해를 당한 덕혜옹주는 이때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는다.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31년 대마도 번주(藩主)의 아들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강제 혼인한다.

덕혜옹주 결혼기념비에는 ‘이왕가 종백작가 어결혼봉축 기념비(李王家 宗伯爵家 御結婚奉祝記念碑)’라고 적혀있다. 비록 기울어가는 조선이었지만 일국의 황녀가 일본의 일개 번주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왕래가 활발하던 에도시대에 대마도주는 알아주는 권세가였지만 에도막부 말기에는 조선통신사가 일본 본토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마도에만 머물 정도로 쇠락한 집안이었다.

◇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의 흔적

결혼 후 딸 마사에(正惠)를 낳지만 조발성 치매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후 계속 병상생활을 하다가 1953년 이혼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하나 있는 딸마저도 결혼에 실패하고 바다에 몸을 던지는 비극을 겪어야했다. 1962년 귀국하지만 이미 조선왕조는 사라진 뒤였기에 마지막 황녀가 된 덕혜옹주는 1989년 창덕궁에서 비운의 삶을 마감한다.

나그네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덕혜옹주 영가를 만난 적이 있다. 슬픈 눈으로 지난날을 회상하는 덕혜옹주 영가는 “나는 조선의 황녀로서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들은 저의 기를 꺾기 위해 교묘하게 괴롭혔습니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했었다.

나그네는 남북 대마도를 잇는 만제키 다리를 건너 북대마도로 향했다. 제주도의 약 5분의 2 정도 크기인 본섬과 98개의 작은 섬들로 구성된 대마도는 본래 커다란 하나의 섬이었다. 1900년 일본 해군이 대륙침략을 위해 군사용으로 아소만 근처에 인공 운하를 판다. 이때 만들어진 운하는 러일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905년 세계최강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항에 가기위해 대마도 앞 해협을 지나는 틈을 노려 일본 함대가 기습하여 발틱함대를 궤멸시키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장악하게 된다(쓰시마해전).

광개토왕이 기병과 보병 5만으로 대마도에 상륙한 이래 대마도는 일본열도의 해상 병참 요충지였다. 고모다(小茂田) 신사는 요충지였다. 고모다 신사는 고려시대 몽골군이 내습하였을 때 대마도주가 병사를 이끌고 직접 싸우다 이곳에서 수천 명이 모두 전사한 영령들을 모신 곳이다. 대마도는 크지 않은 섬이지만 한일 역사에서는 늘 분수령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약 200년간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사절단, 즉 조선통신사의 교류가 활발했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으로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대마도를 거쳐야했다. 에도시대 (1600∼1868)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만든 고려문이 있다. 대마도 주민들은 곳곳에 조선통신사가 방문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자랑스러워했다. 지금도 매년 8월에 ‘쓰시마 아리랑마츠리’란 축제가 열려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연되고 있다.

북대마도에 위치한 한국전망대를 돌아보고 있을 때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검은 비석이 나그네를 잡아끌었다. 조선역관사위령비였다.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면 주로 대마도에서 통역을 구했다. 대마도에서는 해마다 조선의 왜관에 유학을 겸하여 사람을 보냈는데 통계에 의하면 ‘대마도 남자의 절반이 일생에 한 번은 조선에 나왔다’고 하니 대부분이 조선어에 능통할 수밖에…. 대마도에서 통용되는 한국어가 300개가 넘고 한국식 성씨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역관사(譯官使)는 당시 일본 선비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친 일종의 교수였다. 1703년 음력 2월5일 한천석을 비롯해 108명의 조선 역관사와 4명의 대마도 선비가 탄 배는 아침 부산을 떠나 대마도를 향하고 있었다. 대마도 제3대 번주의 죽음을 애도하고 제4대 번주의 습봉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한 외교사절이었다.

저녁 무렵 대마도의 와니우라(鰐浦)로 입항하기 직전 항구를 바로 눈앞에 두고 갑자기 거센 폭풍이 불어 닥쳤다. 배가 침몰하여 전원이 익사하고 말았다. 조선역관사위령비는 그들을 기리고자 112명의 영혼을 상징하는 112개의 초석으로 비를 세웠다.

나그네는 이국땅에서 불귀의 객으로 떠난 영령들의 비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였다. 홀연히 한줄기 바람이 휘익 불어왔다. 조선 선비의 단아한 음성이 바람결에 실려 왔다. 근래 들어 조성된 자신들의 추모비를 고마워했다. 조일외교관의 임무 수행자답게 나그네에게 따끔한 충고 한마디를 남겼다.
“막으면 터질 것이요, 뚫으면 통할 것이다. 그것이 통신(通信)이오.”

말이 조선통신사였지 사실 그동안 한일 양국은 ‘통신’이 거의 두절된 상태였다. 667년 대마국(對馬國)에 금전성(金田城) 축성 무렵을 시발로 한 일본의 대륙봉쇄 영향인지는 몰라도 활발한 조선통신사 행렬 와중에도 일본인은 한양에 입성할 수 없었다. 오직 조선만이 일방적으로 열도에 문물을 전해야했다. 일방적인 통신은 반작용을 낳게 마련이다.

◇ 신분증만 있으면 누구나 토지 소유

급기야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같은 적대적인 방식으로 불통의 역풍을 맞았다. 알고 보면 지금 우리나라는 북으로는 철책, 남으로는 해협으로 장벽을 쌓고 있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누구 말대로라면 소통은 북쪽만이 아니라 남쪽도 시급할지 모른다.

일본은 백제와 결별했지만 대마도는 늘 어느 곳을 섬길지 눈치를 보고 있다. 강성했던 고려와 조선에 조공을 바쳤지만, 임진왜란이 터지자 일본을 섬겼다. 17~18세기 다시 조선이 융성하자 통신사를 맞이했다. 일본이 개화하여 강대한 제국이 되자 다시 일본이 되었다. 이처럼 대마도는 늘 강한 쪽을 섬겨왔다.

최근 한일 해저터널 착공이 또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수십 년 전부터 거론된 이래 교착상태다.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와 일본과의 역사적 앙금 때문에 대한해협엔 풍랑이 심하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세계자유무역체결이 한창인 지구촌 시대에 50㎞도 채 안 되는 해협을 못 건너고 있다니 우리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인도 대마도의 땅을 살 수 있습니다.” 누구 말대로 신분증만 있으면 국외 외지인도 얼마든지 대마도의 땅을 구입할 수 있다. 이는 일본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점이란다. 일본은 하와이, 남미를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 광대한 땅을 소유하여 일본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데 한국도 그런 식으로 대마도를 점거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나보다.

【서울=뉴시스】 덕혜옹주와 대마도주의 결혼 기념비.


일본 열도에서 독도 망언이 터질 때마다 심심치 않게 대마도가 입에 오르내리더니 급기야 얼마 전에는 우리나라의 지방정치인들이 대마도에 와서 영토에 대한 정치적 발언을 해 눈총을 받은 바 있다. 소유권의 주장은 얼른 듣기에는 솔깃할지 모르지만 국가 간 영토분쟁이 인류 역사상 유익하게 해결난 적은 없다.
바야흐로 문화영토권 시대다. 누구의 것인가보다 누가 선용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문화의 시대다. 돌연 나그네의 눈에 대한해협 바다 밑으로 자동차가 오가는 장면이 스쳤다. 왠지 앞으로는 한일 양국 간에 대마도가 독도보다 더 뜨거운 감자가 되리란 예감이 들었다. 나그네가 이런 저런 감회에 젖어있는 동안 아스라이 부산항이 눈에 들어왔다. 대한해협이 태평양보다도 넘을 수 없는 그렇게 깊은 바다인지 되뇌어보았다.

후암미래연구소 대표 www.hooam.com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15호(1월19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6화] 모악산①편 [미륵신앙의 성지]


미인의 아미처럼 곱디고운 서쪽 지평선을 뒤로하고 탁 트인 호남평야를 달리다보면 별안간 산맥이 우뚝 가로막는다. 사방 백리가 넘는 평지에 가파르게 치솟아 호남정맥(湖南正脈)을 이루니 해발 793m 국사봉을 머리로 이고 있는 모악산(母岳山)이다.

모악산은 ‘평지돌출산’이다. 사방이 탁 트인 평지 돌출산은 선각자들의 보금자리다.
모악산은 ‘고려사’까지만 해도 ‘금산(金山)’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산 이름은 고찰에서 유래하는 경우가 많기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연유했다고도 하고, 사금(砂金)이 많이 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 미륵신앙의 메카 금산사

어떤 이는 정상 근처의 쉰 길 바위의 형상이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엄뫼’라고 부르다 금산으로 의역, 음역되었다고 하나 왜, 그리고 언제부터 모악이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주변 지명이 여전히 금구면(金溝面), 금평(金坪), 김제(金提)로 불리며 금산(金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모악산은 미륵의 땅이다. 모악산엔 미륵신앙의 메카 금산사가 있으며, 세상이 어지러우면 사람들은 여지없이 모악산에 모여들어 사회변혁의 이상을 충전해 갔다. 모악산은 이상세계를 꿈꾸는 수많은 인간 미륵을 품었다. 진표율사, 후백제의 견훤, 기축옥사의 정여립, 한국 불교 최고의 기승 진묵대사에서부터 근세의 전봉준, 증산 강일순, 보천교 차경석, 원불교 소태산, 대순진리회 조철제, 증산도의 안경전 등이 이 지역에서 태동했고 선도교, 태을도 등 증산계열만 해도 100여 개 종단이 난립했다.

그들 중에는 금산사 미륵의 현신임을 자처한 이도 있으며, 전용해의 백백교는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과연 미륵의 땅인 모악산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나그네는 금산사 쪽에서 출발해 전주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금산사 들어가는 사거리에 앞 뒤로 ‘해원(解寃)’ ‘상생(相生)’이라고 새겨진 거대한 돌비석이 장승처럼 나그네를 맞이했다. 강증산은 모악산을 가리켜 ‘신도안의 계룡산은 수탉이고 모악산의 계룡봉은 암탉인데, 이 암탉이 진계(眞鷄)’라 하였다. 흔히 풍수지리가들은 모악산의 형상을 오공비천혈(蜈蚣飛天穴)이라 한다.

오공(蜈蚣)이란 지네를 말한다. 모악산 정상에서부터 산이 겹치면서 아래로 구불구불 급하게 뻗은 모양이 지네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내려오면서 머리를 쳐든 형국이라 그렇게 부른다. 그 오공비천혈 최고 혈자리에 금산사가 자리 잡고 있다.

599년(백제 법왕1)에 창건돼 1400년이 넘은 금산사는 송광사와 더불어 동양 최고의 사찰로 수많은 말사를 거느리고 있는 미륵신앙의 성지다. 금산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나 인조 때 재건되었고 지금도 석련대, 당간 지주, 석종, 각종 탑 등 보물이 즐비하다.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상생신앙과 말세를 구제하러 미륵이 내려오기를 바라는 신앙으로, 이상사회를 제시하는 미래불인 미륵을 믿는 불교적 이상 사회관이다.

미륵의 금산사에는 백제의 혼이 깃들어 있다. 미륵신앙은 신라와 백제에서 국가의 통치 이념이었기에 양국은 치열한 자웅을 겨루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는 금산사와 함께 익산 미륵사를 세워(601) 왕권을 강화했다. 이에 맞서 신라 선덕여왕은 황룡사에 거대한 9층 목탑을 짓는다(645).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미륵전쟁에서 백제가 멸망(660)하자 익산의 미륵사는 서서히 쇠락했다. 그러나 모악산의 금산사는 백제가 망한 뒤에도 복신, 도침과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扶餘 豊)이 중심이 된 백제 부흥운동의 한 거점이 되었다.

금산사의 백미는 역시 웅장한 미륵전이다. 미륵전의 겉모습은 3층으로 되어있고, 내부에는 층이 없는 한 통이며 동양최대의 실내입불인 미륵불을 봉안하고 있다. 백제는 정복자인 신라에 의해 철저하게 지워졌기에 지하에 잠자던 공주의 무녕왕릉마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금산사는 거의 유일한 백제 유적이 될 뻔했다. 미륵전 건축에 전해지는 설화는 얼마나 어렵사리 백제 혼을 되살렸는지 엿보게 한다.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663)하고 꺼져가는 금산사를 중창한 건 진표율사(眞表律師)였다. 진표율사는 패망한 나라 백제의 김제평야에서 태어나(734) 12세에 금산사로 출가한다. 진표율사는 부안 내변산 꼭대기 천 길 낭떠러지 모퉁이에서 찐쌀 스무 말을 가지고 죽음을 각오하고 정진한다.

백제 부흥군이 마지막으로 완강히 저항하던 곳이 주류성(周留城)이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지금의 부안군 우금산성(울금산성)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표율사가 미륵불을 친견하고 깨우침을 얻은 곳을 ‘부사의방(不思議方)’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주류성 길목이었다. 마지막 백제 부흥군이 처참하게 스러져간 곳에서 미륵불의 계시를 받은 것이다. 진표율사는 부사의방에서 계시를 받은 후에 금산사로 돌아와서 미륵전을 짓기 시작한다.

◇ 백제의 멸망으로 쇠락한 미륵사

금산사에 커다란 연못(방죽)이 있었다. 진표율사가 이를 메우고 미륵장존불을 조성하려는데, 이상하게도 흙으로 메우면 다음날 어김없이 다시 파헤쳐지곤 했다. 연못에 사는 용이 파헤친다는 것이었다. 이때 지장보살이 현신하시어 진표율사에게 숯으로 연못을 메우면 용이 떠날 것이라고 방도를 알려 준다. 하지만 연못을 메우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숯이 필요했다.

그때 갑자기 마을에 눈병이 창궐했다. 진표율사는 묘안을 냈다. 누구든지 연못에 숯을 한 짐 쏟아 붓고 그 물로 눈을 닦으면 낫는다고 널리 알렸다. 연못은 순식간에 숯으로 메워졌고, 신기하게 눈병도 말끔히 나았다. 1985년 미륵전 보수공사를 위해 굴착기로 땅을 팠더니, 실제로 검은 숯이 나왔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만들어진 지금의 미륵불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塑造佛)이다. 하지만 처음엔 쇠로 만든 철불(鐵佛)이었다고 한다. 금산사 미륵불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불상들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의 작은 크기의 반가사유상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큰 대불(大佛)을 조성했을까. 그리고 왜 하필 대불은 수많은 부처 중 미륵불이었을까.

금산사 미륵불은 소수 귀족층의 밀교에서 민중불교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소승불교에서 값비싼 금은으로 만든 작은 불상을 귀족들이 혼자 모시며 예불을 드렸다면, 대불은 누구나 친견할 수 있어 누구의 소유도 아닌 우리들의 부처를 뜻한다. 아무리 높은 계급이라도 거대한 부처 아래 평등함을 상징하고 있다. 부처의 눈엔 이미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륵전 자리를 십시일반 숯을 날라 메웠던 일화에서 짐작하다시피, 철불을 만들 때도 민중들이 하나씩 불사한 숟가락 같은 쇠붙이들을 한데 녹여 모두의 부처님으로 현신시켰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미륵신앙은 소수 귀족계층에서 온 백성의 미륵으로 거듭났다.

금산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금산사 경내의 송대(松臺)에 5층 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석종(石鐘)은 종 모양의 석탑이다. 고려 초에 조성된 걸로 추정하는 석종은 매우 넓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인 방등계단(方等戒檀) 위에 세워져있다.

호남의 모든 사찰이 신라 승려나 왕족들이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금산사만은 백제 사찰임을 분명히 명기하고 있다. 백제 왕족의 복을 비는 것으로 창건된 금산사임에도 불구하고, 백제 법왕의 창건임을 밝힌 이유는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략적인 포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왕족이 아닌 민중들의 땀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모인 미륵불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금산사는 백제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미륵의 성지로 면면히 백제의 혼을 이어나갔다. 200여 년 뒤, 백제는 다시 금산사에서 후백제로 부활한다(900).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16호(1월26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서울=뉴시스】 백제혼 깃든 금산사 미륵전, 온화미소 민중염원>

 

[7화] 모악산②편 [인간미륵을 길러낸 땅]

 

후백제의 성문인 홍예문. 후백제 44년에 축조한 금산산성이라는 전설이 전하며 금산사 입구 현 위치로 이전 복원했다.>
백성들은 민심이 흉흉할수록 현실보다 미래에 기대하는 미륵신앙에서 위안을 받고 대안을 찾으려 했다. 민중들의 염원이 모인 모악산은 모든 사회 변혁운동 이념의 산실이었다. 미륵신앙은 이상사회의 통치이념으로 또는 민족종교로 변신하며 시대에 따라 옷을 갈아입었다.
견훤은 스스로 환생한 미륵임을 자처하며 완산주(지금의 전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세워 왕이 된다.(900)
견훤은 모악산 금산사(金山寺)를 자신의 복을 비는 사찰로 삼고 중수하여 백제의 계승자임을 선포한다. 견훤은 중국의 오(吳)·월(越)과 통교를 하는 한편 영토를 확장하였고 신라의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는 등 막강한 백제 재건에 성공한다.

◇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정여립

그러나 후백제는 너무 짧았다. 내부 분열로 부흥운동마저 실패했던 백제의 전철을 후백제도 그대로 답습하고 말았다. 견훤은 넷째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지만 이를 시기한 다른 아들들이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다음, 신검(神劍)이 왕위에 오른다. 3개월 후,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은 고려로 망명, 태조와 협력하여 10만 대군으로 후백제를 총공격했고, 격전 끝에 후백제는 고려에 굴복, 93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상세계를 향한 꿈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1546년 모악산 부근 금평 저수지 위 구릿골에서 태어난 정여립(鄭汝立)은 영국의 정치가 크롬웰보다 50년이나 더 앞서 공화정(共和政)을 주장한 걸출한 선각자였다. 통솔력이 있고, 명석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했던 정여립은 24살에 과거 급제하여 십수 년간 순탄하게 벼슬길에 오른다.
그러나 유학의 계급관료적인 폐단을 꿰뚫은 정여립은 왕권 체제 하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는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혈통세습이 아닌 능력세습’이라며 왕권의 세습을 반대하였고,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그리고 신분철폐를 주장한다.

너무 시대를 앞선 탓일까. 정여립은 선조왕의 미움을 사 관직을 떠나게 된다. 낙향한 정여립은 구릿골 일대 제비봉을 중심으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매월 보름날에 활을 쏘고 무예를 익히며 잔치를 베풀었다. 대동계원은 양반, 상놈, 승려 등 신분귀천이 없었다. 대동 계원 스스로 향토를 방어할 수 있는 군사훈련도 병행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향토방위대쯤 된다. 왕조 속에서도 모악산에 작은 공화국을 건설한 셈이었다.
정여립은 백제나 후백제가 세습 신분 계급을 근간으로 하는 왕조라는 한계 때문에 미륵 세상을 건설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신분이 아니라 개인 능력에 따라 등용하며, 민중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공화국이 정여립이 꿈꾸는 미륵 세상이었다.

1587년(선조 20) 왜군이 손죽도로 쳐들어오자, 정여립은 전주 부윤 남언경의 협조 요청을 받아들여 대동계를 즉각 출동해 왜군을 물리친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군대의 출동은 조정에 보고되고, 대동계를 중심으로 역성혁명을 준비한다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백성들 사이에선 벌써 ‘이가(李家)는 망하고 정가(鄭家)는 흥한다’는 정감록이 횡행했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안악군수, 재령군수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竹島)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고 만다. 무오·갑자·기묘·을사 4대 사화(士禍)를 합한 희생자보다 더 많은, 선비만 1000여 명이 처형당하는 피의 지옥이 연출되니,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등용에 제한을 당해야 했다. 이렇게 정여립의 거대한 미륵 세상 구현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무고한 원혼들의 저주였을까. 공교롭게도 3년 뒤인 1592년 조선은 비류의 백제가 세운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온 나라가 불타게 된다.(임진왜란)
임진왜란 때 호남평야를 지킨 것은 관군(官軍)이 아니라 의병(義兵)들이었다. 의병은 정여립이 대동계에서 조직한 향토방위대가 전신이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근래 역사가들 중에는 정여립이 이이(李珥)의 ‘십만양병설’에 자극받아 임진왜란을 미리 준비했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역모로 조작했다고 재평가하기도 한다.

금산사에서 서편으로 한 시간 가량 걸으면,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전주로 넘어가는 모악산 자락에 창건했다는 귀신사(歸信寺)가 나온다. 1992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양귀자의 소설인 ‘숨은 꽃’의 무대가 바로 귀신사다. ‘그는 귀신사에 있었다. 나는 그를 귀신사에서 만났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은 귀신사를 이렇게 소개한다.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이름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는 절이지만 조용하고 아늑해서 친구는 아들을 데리고 종종 그 절을 찾는다고 했다.” 뒤뜰에 엎드려 앉은 사자상 위에 남근석이 올려진 돌사자상이 이채롭다.

모악산 동쪽 구이면 원기리에서 선녀폭포 쪽으로 가다보면 전주 김씨 시조묘 입구에 전주김씨 종가에서 세운 공덕비와 정자가 있다. 군사정권시절 이 묘는 공공연한 국가기밀로 접근이 금지되었다. 이곳을 찾으러온 풍수지리가들은 덩치 큰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김일성(金日成)의 32대 조상 김태서의 묘가 위치했기 때문이다. 일명 ‘김일성 조상묘’는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접근 금지였다.

◇ 모악산에 자리한 ‘김일성 조상묘’

육관 손석우씨가 지은 ‘터’라는 풍수지리책에는 ‘이 묘의 지기가 발복하여 그 후손이 장기집권을 하게 되며, 그 운이 49년 만인 1994년 9월에 끝난다’라는 내용이 예언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 내용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예언한 날짜와 근소한 차이로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1994년 7월)부터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 모악산의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모악산을 동쪽에서 오르다보면 고려 밀교(密敎)의 본산지인 대원사(大願寺)가 나온다. 밀교의 특징은 불보살의 초월적인 가피력을 강조하는데, 병이 낫는다든지, 외적 침입을 격퇴한다든지 인간사의 각종 애환들을 치유한다. 강증산이 수도하여 도통했다는 대원사는 진묵대사(震默大師)의 자취가 여전하다. 진묵대사는 숱한 이적과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보였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으로까지 일컬어질 정도로 한국 불교사상 가장 신비로운 스님이다.

진묵대사는 전주의 장날에 가서 동중정(動中靜)을 시험했는데, ‘오늘은 장을 잘 보았다’하면 북새통인 장터에서도 내면의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이고, ‘오늘은 장을 잘 못 보았다’하면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곡차(穀茶)란 말도 진묵대사가 만들었다고 한다. 술을 좋아하던 진묵대사였지만, 같은 잔이라도 ‘술’이라하면 외면하다가 ‘곡차’라고하면 벌컥 들이켰다. 대원사에서 정상 쪽으로 도보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수왕사에는 지금도 송홧가루를 재료로 하는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가 빚어지고 있고, 진묵대사가 술을 빚었던 도구들이 전해진다고 한다.
어느 날 어머니가 아들 진묵을 보러 찾아왔는데, 그만 해가 질 때가 되어 밤길이 걱정되었다. 진묵대사는 어머니를 따라 나서지 않고 산문(山門)에서 배웅했다. 그런데 분명히 서산으로 져야 할 해가 집에 당도하도록 수 시간동안 걸려 있었다. 어머니가 대문을 열자 해가 뚝 떨어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진묵대사는 출가한 승려로서 대를 이을 손이 끊기어 그의 어머니 묘에 성묘할 사람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어머니 무덤에 고사를 드리면 병이 낫고 부자가 된다는 말을 퍼뜨렸다. 효험이 입소문을 타자 오늘날에도 많은 참배객이 줄을 이어 이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400여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잘 보존 되어 내려오고 있다.
후세들은 이 무덤 자리를 ‘무자손 천년향화지지(無子孫 千年香火之地)’ 즉 자손이 없어도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1000년 동안 이어지는 명당이라 부른다.
 

세상을 바꾸려한 이상향 꿈들, 무산됐어도 정신만은 절절이.>

 

[8화] 모악산③편 [문화예술의 젖줄]

수왕사에 모셔진 진묵대사의 영정. /뉴시스 아이즈모악산이 품은 걸출한 인물들 중에 과연 누가 미륵의 세상을 펼쳤을까.
진묵대사와 같은 시대에 활약하던 유명한 승려가 서산대사인데, 혹자는 서산대사를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호국불교의 상징이요, 진묵대사를 철저한 은둔자로 대비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진묵대사의 일화는 미륵 세상을 구현하는 또 다른 차원의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엿보게 한다.

하루는 진묵대사가 저명한 유학자 김봉곡(金鳳谷)에게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빌렸다. 하지만 봉곡은 곧 크게 후회했다. ‘진묵은 불법을 통한 자인데, 만일 유도(儒道)까지 정통하면 대적하지 못하게 될 것이요, 또 불법이 크게 흥왕하여지고 유교는 쇠퇴하여지리라’며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책을 도로 찾아오게 했다. 봉서사 산문(山門) 어귀에 이르기까지 한 권씩 떨어져 있는 책을 모두 주워 거두어갔다.

◇ 유학에까지 통달했던 진묵대사

나중에 봉곡이 책의 내용을 물으니 진묵대사는 한 줄도 틀리지 않고 줄줄 외웠다. 산문에 이르는 동안 이미 책을 모두 독파하여 그때마다 한 권씩 버린 것이다. 이를 시기한 봉곡이 진묵대사가 깊은 삼매에 빠져있을 때, 유체 이탈한 진묵대사의 육신을 그만 화장해버렸다. 허공에서 진묵대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각 지방 문화의 정수를 거두어 모아 천하를 크게 문명케 하고자 하였으나 이제 봉곡의 질투로 인하여 대사(大事)를 그르치게 되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이제 이 땅을 떠나려니와 봉곡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질을 면치 못하리라.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갔느니라.” 그때부터 서양문명이 융성했다고 한다.

근대 천지공사는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에 의해 펼쳐졌다. 구한말 세계열강들이 한반도를 농락할 때, 들불처럼 일어난 것이 동학농민군이었다. 1860년 경주 출신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호남에서 미륵신앙이 더해지면서 급진 양상을 띤다. 백성이 주인이고, 터전은 내가 지킨다는 대동정신은 본래 동학의 지도부와 궤를 달리하여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우는 농민혁명군으로 거듭나 독자적인 무력혁명을 감행했다.

한편 증산은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모악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두승산 아래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일명 ‘손바라기 마을’에서 태어난 증산 강일순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때 김제에서 서당 훈장을 하면서 전봉준 등을 만나 동학농민군은 패망할 것이라 예견했다. 그의 예견대로 혁명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남기고 실패했다(1894).

외세는 그 공백을 틈타 더욱 기승을 부렸고, 증산은 절망에 빠진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골몰했다. 그때 논산의 김일부를 만나 후천개벽사상의 원리를 배우고, 모악산의 대원사에서 수도 정진하여 도통한다. 증산의 눈에는 조선 왕조 몰락의 근본원인이 누적된 원결(怨結)의 과보(果報)로 보였을 것이다.
금산 저수지 위에 위치한 구릿골(동곡리)의 광제국(또는 만국의원)에서 병든 사람과 사회를 치유하려 9년간 제자들을 모아놓고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벌인다. 천지공사의 핵심은 해원(解寃), 즉 그동안 쌓여온 하늘 귀신과 땅 귀신과 사람 귀신 등 모든 신명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증산은 고대 삼국으로부터 누적된 전쟁으로 인한 개인적, 집단적 원한과 신분 계급 왕조의 누적된 폐해가 불러온 과보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했다. 증산 나이 38세인 1909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신도들에게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였다. 대원사에서 도통한 증산이 최후엔 금산사 미륵불을 말한 것이다. 증산이 금산사 미륵불을 지칭한 것은 외양을 친견하라는 것이 아니라, 분별없이 민중 속에 살아 숨 쉬는 불성(佛性)을 보라는 것이리라.

증산이 죽기 1년 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 차경석(車京石)의 집에서 천지 굿이라는 큰 굿판을 연 적이 있다. 지난 역사 속에서 억압되었던 모든 여성들의 근원적 해방을 상징하며 후천이 개벽이 되는 가히 혁명적인 의식의 굿이었다. 차경석은 동학농민혁명의 십대 접주 중의 한 사람이었고, 평민두령으로 이름을 떨쳤던 차치구의 아들이며, 훗날 보천교(普天敎)의 교주가 된다.

보천교도는 조선총독부의 집계로도 170만 명을 웃돌았고, 전해 내려오는 얘기로는 700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때 인구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보천교 신자였던 셈이다. 실의에 찬 민중들에겐 큰 위안이 되었는데, 차경석(일명 차 천자)의 석연치 않은 죽음 이후 보천교는 일제에 의해 급격히 와해된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훨씬 규모가 컸던 십일전 건물은 경매되어 서울의 조계사로 옮겨져 대웅전으로 겨우 남아있고, 신도들이 숟가락 하나씩을 모아 만들었다는 1만8000근짜리 종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모악산이 후천세계의 중심지라 하여 증산을 믿는 사람들이 집단 이주했고, 수많은 종단이 들어섰다.

모악에는 상극이 공존한다. 가장 대중적인 부처가 있는가 하면, 가장 은밀한 부처도 있다. 그래서 모악만이 감히 해원상생(解寃相生)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호남은 ‘반역향(反逆響)’이란 멍에를 썼다. 미륵의 땅이자 반역의 땅 모악산. 상극의 평가가 엇갈리는 모악산의 진면목은 어떤 것일까.

◇ 태조왕건 ‘훈요십조’ 호남차별 명문화

후백제의 견훤과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여 승리한 태조 왕건은 왕권조차 평등한 미륵신앙을 두려워했을까. 호남 차별을 명문화한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겼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 지역차별을 명문화한 훈시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광주사태라 할 수 있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벌어지자 정여립의 출생지인 해발 300m 제비산은 ‘역모의 땅’이라고 하여 땅을 파헤쳐 숯불로 혈맥을 끊고, 그 근처엔 집조차 들어서지 못하게 했다. ‘연려실기술’엔 정여립을 지금의 사탄(악마)에 해당하는 ‘악장군(惡將軍)’이라 기록하여 극렬히 폄하하고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호남은 산발사하(散髮駛河)의 풍토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호남의 강들은 저마다 흩어져 흘러 호남 기질은 끈기가 없다는 뜻이다. 반면 영남의 물은 모두 낙동강으로 흘러 합심이 잘 된다고 했다. 이중환의 ‘택리지’도 ‘지금도 지역이 멀고 풍속이 더러워서 살 만한 곳이 못 된다’고 심각한 지역적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풍수지리를 논하려면 차별 없는 자연의 눈을 가져야하고, 적어도 중용(中庸)의 미덕쯤은 잃지 말아야한다. 큰 눈으로 본다면, 호남 강물이 서해로 흩어져 나가든 영남 강물이 한 곳으로 모이든 결국 모든 강물은 머지않아 하나의 바다로 모이게 되어있다. 산이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전체가 어울려 산하가 되는 것처럼, 평등 속에 차별이 있고 차별 속에 평등이 있다.

나그네가 본 평지돌출 모악산은 어머니의 풍성한 젖가슴 형국이다. 어머니의 젖을 빨며 꿈꾸는 아이처럼, 모악은 이상세계를 꿈꾸는 걸출한 인물들을 길러냈고 수많은 선각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왔다.
나그네의 지친 발걸음은 전주의 한정식 집으로 향했다. 지아비처럼 반기는 주인장의 환대 속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한 상이 차려져 나왔다. 동행한 지인들 그 누구도 전주가 맛의 본존임에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모악산이 품고 있는 전주는 명실 공히 예향의 고장이다. 전주대사습놀이를 비롯해 하나같이 문화의 근간이 되는 빛, 소리, 음악, 글, 종이, 풍악, 맛에서 최상을 아우르고 있다. 이런 문화예술의 ‘끼’는 솟아나는 샘물처럼 절대로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다. 활짝 핀 꽃의 향기처럼 주변에 널리 널리 문화의 젖줄을 공급한다. 그래서 미륵의 꿈, 모악의 꿈은 문화의 꽃으로 찬란하게 피어서 한 시도 진 적이 없다. 이것이 미륵의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모악산은 내게 아버지의 산이자 어머니의 산이다. 금번 경찰종합학교 교재 ‘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선친 차일혁 총경은 모악산 자락에서 태어났고, 묘소도 그곳에 있다. 나그네 또한 전주 출생이고, 젊은 시절 만행을 하면서 한동안 대원사(大願寺)에 머문 적이 있다.

 

[서울=뉴시스】 모악산 대원사. 뒤로 모악산 성상이 보인다>

 

[9화] 낙동강①편 [낙동강의 주인, 가야]

【서울=뉴시스】 대가야의 도읍지인 경북 고령군 지산리 가야 고분군. /뉴시스 아이즈낙동강은 남한에서 가장 긴 강이다.(521.1㎞)
육로가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 낙동강은 단순한 강물 이상이었다. 영남지방의 대동맥일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을 잇는 국제 해상무역의 중간 기지였다. 1세기부터 6세기까지 한반도 남부는 낙동강 수로 쟁탈전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倭)가 치열하게 자웅을 겨뤘고 끝내 낙동강을 차지한 신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잡았다.
통일 이후 비교적 잠잠했던 낙동강이 대운하 문제로 다시 꿈틀대고 있다. 낙동강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나그네는 이 의문을 품고 낙동강으로 향했다.

서기를 전후해 한반도에는 고구려(BC 37), 백제(BC 18), 사로(신라 BC57)에 이어 가락국(AD 42)이 자리 잡았다. 낙동강에 자리 잡은 주인은 제4의 제국이라 불리는 가락국(가야)이었다. 가야 연맹의 터전이었던 김해(금관가야 金官伽耶), 고령(대가야 大伽耶), 상주, 합천, 창령(비화가야 非火伽耶), 함안(아라가야 阿羅伽耶), 성주(성산가야 星山伽耶), 고성(소가야 小伽耶) 등은 모두 낙동강의 서쪽 지역에 위치한다. ‘낙동강(洛東江)’이란 명칭은 ‘가락국(또는 가야)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란 뜻이다.

◇ 최근 고대 가야 유물 발굴로 연구 활기

가야에서 직접 남긴 사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여타 사료에 조금씩 기록되어있는데, ‘삼국사기’에 약간 남아있는 기록은 승자인 신라 관점에서 왜곡이 극심하다. 다만 1075~1084년 금관주(金官州 김해지방)의 지사(知事)였던 문인으로 추측되는 사람이 편찬한 ‘가락국기(駕洛國記)’가 있었으나, 이마저 전해오지 않고 그 내용의 일부가 ‘삼국유사’에 요약되어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가락국기’가 한참 후대에 편찬되었고, ‘삼국유사’는 설화적인 윤색이 많은 야사(野史)라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광개토왕비문, 3세기 후반 중국에서 편찬된 ‘삼국지’와 7세기 이후에 쓰인 ‘일본 서기’에 남겨진 단편적인 사료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고대 가야 일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속속 축적되면서 한반도 ‘제4제국’으로서의 거대한 신비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나그네가 김해에 도착하자 모든 이정표는 수로왕릉과 왕비릉으로 통하고 있었다. 석탑을 받들고 있는 두 마리의 물고기를 그린 ‘쌍어문(雙魚文)’으로 유명한 수로왕릉은 김해시 한 복판에 위치한다. 각종 축조물들과 함께 5만9504.4m²의 대규모 공원으로 조성된 왕릉은 그 위용이 서울의 경복궁에 못지않았다. 도보로 몇 십분 거리에 ‘파사석탑(婆娑石塔)’으로 더 잘 알려진 부드럽고 단아한 수로왕비릉이 자리 잡고 있다.
나그네가 전에 본 백제의 유적지는 어딘지 쓸쓸하고 처연했지만, 가야의 유적지에서는 왠지 당당하고 늠름한 기운이 강했다. 모두 신라에 패망한 백제와 가야이건만 왜 그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고대 한반도 4개국 모두 건국 신화가 전하지만, 가락국만큼 신비하고 극적이진 못하다. 서기 42년(신라 유리왕 19) 금관가야 9부족의 추장인 9간(干)이 김해 구지봉(龜旨峰)에 모였을 때, 하늘로부터 붉은 보자기가 내려왔다. 보자기를 펴 금합(金盒) 안에서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를 얻었다. 반나절 만에 여섯 개의 알은 모두 사람으로 화하였다. 그 중 키가 9자(尺)이고 팔자 눈썹이며 얼굴은 용과 같이 생긴 인물이 생겼는데, 처음으로 사람으로 화했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였다. 황금알에서 나와 성씨를 ‘김(金)’으로 하고 그 달 보름에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김수로왕이다.

서기 48년 수로왕은 신하를 보내 포구에서 한 여인을 맞이하게 한다. 과연 바다의 서남쪽으로부터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한 척의 배가 다가왔다. 배 안에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이 타고 있었다.
허황옥은 본국에 있을 때 부모의 꿈에 옥황상제가 계시한대로 가락국왕에게 시집오기 위해 배를 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파도가 높아져서 배를 다시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해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비방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파사석탑이다. 허황옥은 석탑을 배에 싣고야 무사히 가락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엔 호락호락하지 않던 허황옥은 수로왕이 직접 마중 나온 것을 보고서야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신에게 바쳤다. 왕과 왕비는 설치한 장막에서 두 밤 한 나절의 허니문을 보낸 후 타고 왔던 배를 돌려보내고 대궐로 돌아왔다. 이후 수로왕비는 서기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묻힐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다했다. 이로써 가락국은 서기 42년부터 532년까지 10대에 걸치는 왕들이 이끄는 490년 왕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파사석탑 설화는 ‘삼국유사’ 등 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파사석탑이 현재의 수로왕비릉에 위치한 것은 1873년이다. 원래 호계사(虎溪寺)에 있다가 폐사(廢寺)된 뒤 부사 정현석이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 빛이 도는 희미한 무늬가 대리석처럼 박혀있는 파사석탑은 ‘신농본초(神農本草)’에는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해보니 피가 스미거나 굳지 않고 물방울처럼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확인 결과 가락국에서 나는 돌이 아님이 재차 확인되었고, 얼마 전 향토학자가 시험해보니 ‘신농본초’ 그대로 피가 스미지 않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현재 파사석탑은 탑의 부재(部材) 5층만 남아 있는데 그나마도 심하게 훼손되어있다. 일명 ‘진풍탑(鎭風塔)’으로 알려져 사람들이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조금씩 떼어가 배에 싣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 수로왕비의 국적 아유타국 의견 분분

과연 수로왕비가 왔다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은 어디일까. 기원전 1세기 인도에 있었던 아요디아 왕국이 건설한 식민국인 타이의 아유티야 또는 아요디아라는 설, 중국 사천성 보주(普州) 지역으로 집단 이주해 살던 허씨족이 이주해 온 것이라는 설,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분국인 아유타국이었다는 설, 낙랑지역에서 도래한 유이민 혹은 상인이었다는 설, 불교 동점(東漸)의 신앙과 결부된 표현일 뿐이라는 설 등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국외 인물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설화는 당시 가야국 연맹의 사회상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토착민이 아닌 이주민이었고, 결혼동맹을 통한 소국 연맹체였으며, 철(鐵)이 생산되고 운반되는 해상왕국임을 유추할 수 있다.
고대 국가에 있어서 철(鐵)은 곧 국방력이었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기구뿐 아니라 전쟁 무기의 재료였다. 철의 산지로서 명성 높았던 가야연맹은 고대 최상의 교통로인 낙동강을 확보해 이 해로를 통해 철을 수출하면서 일찌감치 해상왕국으로 자리 잡았다. 철의 바다란 뜻의 ‘김해(金海)’란 지명도 거기서 유래되었다. ‘삼국지’에는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일본열도로 가는 바닷길의 중심에 김해의 가야국이 기록되고 있으며 김해, 마산, 고성 등의 가야는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고대 동아시아의 중개 무역항이었다.

‘삼국지’ 기록엔 백제나 신라보다도 가락국이 소상히 기록되어있을 정도로 4국 중 가야는 최강의 국가였다. 102년 8월 가락국의 수로왕은 경주로 쳐들어갔다. 사로국(신라)의 동북쪽에서 일어난 국경분쟁을 조정하기 위해서였다. 분쟁을 조정한 수로왕을 위한 향연이 베풀어졌는데 한 기부의 촌장이 참가치 않자, 이를 괘씸하게 여긴 수로왕은 노비를 시켜 그 촌장을 죽이고 가락국으로 돌아 왔다. 대가야의 수도인 고령 지산리 일대는 마치 경주를 연상시키듯 거대한 고분 200여 기가 밀집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고분에서 철괴(鐵塊)는 물론이고 금관, 철제 투구와 갑옷, 말안장과 말 갑옷 등 북방 기마민족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3세기 중반까지 이렇게 강성했던 가야연맹이 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영남 대동맥 낙동강은 가야의 마당, 철의 바다 누빈 해상왕국>

 

[10화] 낙동강②편 [통합 정신이 흐르는 合水의 강]

【서울=뉴시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영남지역의 모든 물은 낙동강으로 모여 흐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합수(合水)의 정신’이 낙동강에 있다.
역대로 낙동강을 차지한 자가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잡았다. 철기시대 최고의 자원인 철, 비옥한 퇴적 평야, 해상로 낙동강을 확보한 해상왕국 가야연맹은 3세기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맹주였다. 그런 가야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는 낙동강을 잃은 5세기 무렵부터다.

대륙에서 고구려가 강력한 중앙집권 왕국의 면모를 갖추면서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느슨한 연방국가 체제인 해양세력의 동맹이 깨진 때는 신라 제17대 내물왕(내물마립간 356~402 재위) 시절이다.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내물왕은 고구려에 긴급 구원을 요청한다. 경주 김(金)씨의 시조는 김알지로서 흉노족(스키타이족)의 후예다. 내물왕 역시 대륙계 혈통이었던 것이다.

광개토왕은 5만의 원군을 보내 파죽지세로 남하한다.(400)
고구려 별동대는 순식간에 임나가라(김해, 고령)의 성을 빼앗고 안라(함안)를 격파했다. 이때 고구려는 한반도를 통일할 국력이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대륙에 더 야심이 있었기에 남방으로 국력을 분산할 수 없어서 신라에 대륙계 친고구려 왕조를 세우는데 만족하고 물러갔다.

◇ 고구려 등에 업은 신라, 낙동강 장악

큰 변화가 일었다. 내물왕은 기존의 해양세력이 아닌 대륙세력 고구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부의 가야는 쇠약해졌고 고구려를 등에 업은 신라가 남부가야로 진출하면서 낙동강 유역의 세력 균형추는 급격히 기울었다.
낙동강의 주인이 된 신라는 해양국가에서 대륙국가로 급격히 탈바꿈한다. 본래 신라는 박, 석, 김씨가 돌아가며 왕을 했지만 이때부터 대륙세력을 등에 업은 김씨가 고구려 체제를 본 따 부자세습으로 왕위를 독점하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낙동강을 잃은 대가야는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522) 균형을 꾀하려하지만, 529년 서쪽의 백제가 섬진강을 따라 남하하여 다사(하동)까지 위협해오면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눈물겨운 외교를 펼친다. 결혼을 통한 대가야와 신라의 동맹관계는 끝내 파탄에 이르게 되었고, 가야는 최후의 동맹국으로 백제를 선택한다.

가야 최후의 결전은 554년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벌어졌다. 낙동강은 조금만 내륙을 거치면 섬진강, 금강, 한강과 모두 통할 수 있는 천연 수로였기에 낙동강 남부를 탈환하기 위해 백제, 대가야, 왜의 연합군은 관산성에서 신라를 향해 사활을 건 대공세를 감행한다. 그러나 관산성 싸움의 최후 승자는 신라였다. 이 전쟁에서 대가야연합군은 무려 4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낸다.

싸움의 참패로 마지막 남아있던 고령 대가야는 신라에 병합되어 멸망한다. 가야 유민들은 백제와 왜로 이주하고 신라에 투항하며 뿔뿔이 제 갈 길을 찾아갔다. 500여 년 왕국 가야는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학자들은 가야의 멸망원인으로 구심점 없는 소국으로 산재한 해양세력의 한계를 지적하곤 한다.

나그네는 고령의 대가야 박물관과 거대 고분군을 둘러보면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지배층의 무덤이 크고 화려하면 왕조의 최후가 가까웠다는 징조다.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희생이 극심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가야에 여타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까지 순장제도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그네가 가야 왕족고분을 둘러보고 있노라니, 왕족을 따라 무고하게 생매장당한 가야 백성들의 원성이 귓전을 울렸다. 가야는 당시 선진 이념인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었고, 왕을 신격화시켜 백성들과의 괴리를 자초했다.

반면 신라는 난랑비문(鸞郞碑文)에서 보듯 유불선(儒彿禪)을 모두 받아들일 정도로 국가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폭넓었다. 신라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을 모두 포용할 정신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 합수정신의 절정은 경주 감포 앞바다에 위치한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이다. 문무대왕은 김춘추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김유신의 둘째 동생인 문명왕후(文明王后)다. 문무대왕의 아버지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태종무열왕(604~661)인데, 성골(聖骨)만이 왕이 될 수 있는 신라의 골품제를 개혁한 최초의 진골(眞骨) 출신 왕이다.

치열한 삼국 통일 전쟁 와중에서도 김춘추가 왕족의 범위를 확대하는 혁명적 골품제의 모험을 감행한 이유는 자명하다. 김춘추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삼국 백성들에게 민족의 정체성과 통합의 의지를 확고하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했을 것이다. 내부의 혁명에 성공한 신라는 삼국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이념적인 우위를 선점하게 되었다.

이런 통합의 정신은 김춘추의 아들 문무대왕이 신라 왕위에 오름으로써 탄탄하게 계승, 발전되었다.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는 대륙계의 경주 김씨가 아닌 해양계의 김해(金海) 김씨다. 바로 가락국의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가야의 후예이니, 문무대왕 자신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간의 극적인 통합을 이룬 상징체였던 것이다.

◇ 대륙·해양세력 통합 이룬 문무대왕

문무대왕은 죽으면서 자신을 바다에 묻으라며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했으니, 과연 해양세력의 후예다웠다. 김해 수로왕비릉 내의 파사석탑(婆娑石塔)과 수로왕릉 안에 파사석탑을 호위하고 있는 두 마리의 물고기를 그린 쌍어문(雙魚文)은 600년이 지나 문무대왕 수릉(水陵)의 용으로 승천한 것은 아닐까.

결국 낙동강은 합수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한 신라에게 패권을 안겨주었다. 가야는 신라에서 다시 부활한 셈이다. 그래서 백제 유적지는 왠지 모르게 쓸쓸한 반면, 김해 가야 왕릉의 위용이 지금도 당당했을지 모른다.

낙동강은 신라의 삼국통일이후 안동까지 돛배가 드나들며 유유자적했다. 잔잔했던 낙동강이 다시 한 번 국제전으로 요동친 건 무려 1000년도 훨씬 지난 1950년 6·25에서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3개월 만에 아군은 낙동강까지 속절없이 밀렸다. 최후의 방어선이 낙동강에 설치되었다.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대구 북방 22㎞에 위치한 다부동에서 벌어졌다(다부동 전투).

다부동은 대구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였다. 북한군은 약 2만1500명의 병력과 T34 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을 총동원해 이른바 8,9월 공세를 퍼부었다. 국군 제1사단은 보충 받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 7600여 명의 병력으로 초반에 고전하다가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미 제1기병사단과 유엔군의 지원으로 B29 편대 (99대였다고 함)의 융단폭격을 전환점으로 다부동을 끝내 지켜냈다. 8월13일부터 55일간 전투 중에 무려 북한군 1만7500여 명, 아군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우리는 낙동강을 지켰기에 적화로부터 남한을 지킬 수 있었다.

나그네는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架山面) 다부리 유학산(遊鶴山) 기슭의 다부동전적비를 찾았다. 이제는 다부동전적비만이 묵묵히 그날의 피비린내 나는 전황을 웅변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세 명의 노인이 전적비문의 이름을 쓰다듬으며 먼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다부동전투의 참전 용사들이었던 것이다. 어제의 용사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낙동강은 남북으로 동서로 분열하여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작금의 시국을 한탄하며 천둥처럼 꾸짖고 있지는 않을까.

 

경상북도 칠곡군 유학산(遊鶴山) 기슭의 다부동 전적비>

 

[11화] 낙동강③편 [한민족의 정신적 탯줄]

【서울=뉴시스】 낙동강이 휘돌아 감싸는 안동 하회(河回)마을. / 뉴시스 아이즈.
뱃길 700리, 물길 1300리 낙동강의 발원지는 황지(潢池)다. 한민족을 뜻하는 백(白)자가 들어간 지명은 신성한 곳이다. 황지는 천황(天潢) 연못이란 뜻으로, 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와 한라산의 백록담(白鹿潭)을 잇는 한반도의 든든한 허리 태백산(太白山)의 배꼽을 의미한다. 배꼽의 단전(丹田)에서는 생명정기가 분출한다. 그래서 낙동강은 생명의 발원지로 우리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는 강이다.

예로부터 낙동강 상류 지방은 십승지(十勝地·풍수지리상 재난을 피할 수 있는 복된 터)로 알려졌다. 풍수가 격암(格庵) 남사고 선생은 낙동강에 절을 넙죽했다. ‘정감록(鄭鑑錄)’은 ‘사람의 씨앗은 양백(衿白·태백산과 소백산)에서 구하라’고 예언했다. 양반들은 앞 다투어 양백의 십승지에 터를 잡았다.

황지와 양백의 물줄기가 최초로 합류되는 춘양면 10리 아래부터 학문의 명당이라는 문패를 단 문명산(文明山·894m)이 자리한다. 문명산은 전형적인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 산세다. 이곳에서부터 크게 S자 형상으로 용틀임한 낙동강은 결국에 영남학파의 산실인 도산서원을 발복시켜 무수한 유림의 인재들을 조선 조정에 넘치게 했다.

문명산 남서쪽 용두산(龍頭山) 앞의 아담한 야산은 낙동강 용의 여의주에 해당하는 ‘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이며, 바로 퇴계(退溪) 이황 생가의 주산(主山)이다. 유림 정신의 산실로 물꼬를 튼 낙동강은 150리 더 아랫녘을 휘돌아 감아, 수룡(水龍)의 기세가 첫 용틀임해 터를 형성하니, 600여 년 이상 국반(國班) 발복의 대물림을 이어온 안동 하회(河回) 마을이다.

◇유림 정신이 피어난 학문의 명당

낙동강 수룡의 기운이 넘치는 안동에 발복지(發福地)를 잡으려는 선비들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고려말 미관말직에 불과한 류난옥이 문중의 발복지를 잡아달라고 풍수사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당시 하회마을에는 이미 허씨와 안씨들이 거주하고 있었기에 뒤늦게 터를 잡기란 어림없었다. 난감한 풍수사는 “3대가 적선을 해야지만 발복된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류난옥은 의심 없이 그 말에 따랐다. 길가에 초막(觀稼亭)을 짓고서 적선했다. 풍수사가 용해서였을까, 류씨의 정성에 하늘이 감응해서였을까, 비로소 3대째에서야 낙동강의 한 곳에 거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류씨는 허씨와 안씨를 제치고 발복을 터뜨리니 그가 바로 영의정으로 등극한 서애(西厓) 류성룡이다.

양백의 발복은 아래로 흘러내려갔다. 경상북도 구미에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쓴 금오산 기운과 낙동강의 기운이 화합하는 절묘한 지역에 고 박정희 대통령 생가가 자리 잡고 있다.
낙동강의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낙동강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낙동강의 쓰임새를 두고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고대 수로의 기능을 대운하로 복원하자는 주장과 생태계를 보호하자는 주장이 살벌할 정도로 팽팽하다. 과연 누가 옳을까.
나그네는 환경 전문가도 아니요, 그렇다고 국토개발 공무원도 아니다. 단지, 우리의 산하(山河)도 인간과 같은 생명체로서 우리와 공동운명체라는 풍수지리적 시각에서 낙동강을 바라보았다. 나그네는 낙동강을 낀 도로를 따라 을숙도에서 대구, 안동까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눈에 봐도, 낙동강은 중병을 앓고 있었다. 갈수기에 말라있는 강물은 이제 식수로도 쓰지 못할 정도로 누렇게 떠 있었다. 이러니 우리의 정신도 그와 같이 메말라 썩어 갈 수밖에…. 그래서 비무장지대처럼 무작정 보존만 하자는 개발 반대 의견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한다.

1999년 100여 개국이 모인 ‘물 부족 대책 국제회의’에서는 “2050년에는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물 부족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계은행은 “20세기 국가분쟁 원인이 ‘석유’라면, 21세기에는 ‘물’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물이 이제 더 이상 무한한 천연재가 아니라 석유와 같은 유한 자원으로 ‘물 전쟁시대’나 ‘물 거래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한국은 이집트와 같은 ‘물부족 국가군’으로 분류되었다. 식수 문제가 최우선이다.

우리나라는 총 강우량의 26%만 이용하는데 그치고 있다. 그 중 31%의 물은 그대로 바다로 유실되고 만다. 한반도 지세(地勢)가 대륙성 산맥을 골격으로 하는 가파른 동고서저(東高西低)의 경동지괴(傾動地塊)이기 때문에 비가 온 뒤 약 3일이면 서해 또는 남해로 물이 빠져나가 버린다. 강물이 내륙에 오래 담겨 있어야 기(氣)가 축양되는데, 기를 흡수할 여유도 없이 그만 설사를 하는 형국이다.

예로부터 ‘강물이 길어야 유장(悠長)한 인물이 나온다’ 했다. 강의 길이가 짧은데다 더욱이 강물이 설사하듯 급히 바다로 빠져나가 버리는 까닭에 세계를 호령하는 걸출한 인물이 나오기 어렵다. 설사 나오더라도 단명하고 만다. 게다가 우리나라 강물은 발원지가 모두 다르고, 흘러나가는 방향이 산산이 흩어진다는 안타까운 약점이 있다.

‘같은 물을 먹으면 생각이 같고, 다른 물을 먹으면 생각도 달라진다(同水同想 異水異想)’는 말이 있다. 옛날에는 같은 우물을 먹었기에 한 동네 사람은 문화도 같고 정서도 같았다. 같은 물을 먹어야 피를 나눈 형제처럼 된다. 그래서 명륜동, 광장동에서와 같이 같은 우물을 먹는다는 마을 ‘동(洞)’자를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수세(水勢)를 보자. 호남은 금강·만경강·동진강·영산강으로 강줄기가 분산되고, 영남의 낙동강은 호남과 등져 따로 흐르는 ‘이수이상(異水異想)’이다. 이북 지역의 압록강·임진강·예성강·청천강·대동강도 마찬가지이고, 중심의 한강도 그러하다. 낙동강은 영남을 하나로 모으는 합수(合水)라 하지만, 한반도 전체를 보자면 유감스럽게도 ‘이수이상(異水異想)’의 한 지류에 불과하다.

◇한반도의 물길 잇는 합수 이뤄야

발원이 서로 다른 물을 먹어서일까. 잘 알다시피, 고래부터 우리의 당파 파벌의 폐해는 지긋지긋하다. 고비마다 국운의 암적 존재였다. 지금도 지역별, 이념별, 학벌별 등 오만가지 붕당파벌이 난립하며 천형처럼 악순환 되고 있다. 물을 연결하고 인심을 하나로 모으는 ‘물길 잇기’가 지금처럼 긴요한 때도 없었다. 물길 잇기의 방법 중 하나로 20년간 이 분야를 연구한 청곡(淸谷) 김종회 선생의 ‘서해안 비보론(裨補論)’을 천거할 만하다.

비보론의 골자는 이렇다. 한강하구에서부터 금강·영산강을 거쳐 부산의 낙동강하구까지 한반도의 서남해안 강하구를 따라 ㄴ자 형태로 방조제를 쌓아 물길을 만드는 것이다. ㄴ자 물길은 서로 다른 발원지를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하구에서 모두 합수(合水)하게 된다. 개성은 살리고 한반도의 기는 모아 삼한(三韓)의 인심을 통합할 수 있다. 본류 강의 생태를 보호하면서도 바다로 버려지는 물을 저수할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인 물 부족에 대비할 수 있다. 인공 방조제 위로 고속도로와 철도를 가설할 수도, 운하로는 배가 다닐 수도 있어, 지금의 내륙 도로와 불필요한 중복이라는 논란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물류 인프라를 건설할 수도 있다.

환경론자들도 강력히 반대하는 ‘내륙 관통 운하’는 강의 발원지 정신을 말살해버린다. 이는 산의 정상에 쇠말뚝을 박아 정기를 막았던 처사를 연상시킨다.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자연적 경사도의 생태환경이 완전히 파괴되어, 마치 4대강이 거대한 욕조가 된다는 경고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또한 안보상으로도 치명적이다.

서해로 빠져나간 한반도의 기를 빨아먹는 곳은 중국의 산둥(山東) 반도다. 그래서인지 한반도는 1000년 이상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신세였다. 하지만 서남해 강하구를 잇는 ㄴ자 물길은 한반도의 기를 새지 않게 모아, 대륙의 기운과 해양의 기운을 조화롭게 융합하여 다시 흡수할 수 있다. 이상이 도선국사(道詵國師) 이래로 그 수많은 조선의 풍수가들의 숙원사업인 한반도 대개조론의 대략이다.

신음하는 낙동강, 절실하게 변화를 요구하는 낙동강의 신음소리가 나그네의 귓전을 때렸다. 이제 21세기 낙동강 합수의 정신은 발원지를 살리면서 한반도 전역의 강을 잇는 합수여야 할 것이다.

 

서남해안 강하구를 따라 만들어지는 'ㄴ'자 형태의 물길 잇기 개념도>

 

[12화] 월출산① [음양의 조화가 빚어내는 영암산]

【【서울=뉴시스】 영암에서 바라본 월출산./뉴시스 아이즈월출산은 일찌감치 호남(湖南)의 5대 명산으로 꼽혔다. ‘호남의 소금강(小金剛)’으로 주저하지 않는 우리나라 최남단의 명산. 그러나 월출산을 눈으로만 본다면 달의 한 면만 훑고 달을 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풍수지리(風水地理)의 발상지가 바로 월출산이며, 백제의 왕인박사와 고려의 도선국사를 배출한 걸출한 국사(國師)의 땅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엔 높고, 수려하고, 오묘하고, 장대한 산맥이 지천인데 왜 하필 말단인 아담한 월출산에서 한국과 일본의 건국 운을 튼 국가의 대스승이 탄생했을까. 나그네는 강력한 영(靈)적 에너지에 이끌려 달의 뒷면에 숨겨진 비밀을 훔쳐보는 양 대보름달의 안내를 받으며 남도로, 남도로 향했다.

월출산(月出山)은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의 경계에 솟아 있다. 소백산맥의 끝에 우뚝 솟은 월출산은 영산강을 낀 너른 들판에서 갑자기 용솟음친 평지 돌출산이라 체감 위용은 상상 이상이다. 강과 바다, 들판과 산이 동시에 보이는 최고봉인 천황봉(해발 809m)을 비롯해서 구정봉(738m), 장군봉(510m), 향로봉(743m), 도갑산(375m)으로 이어지는 산 전체가 기괴한 암석으로 장식되어 경탄하는 이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 시대를 떠나 '달이 뜨는 산'으로 유명

월출산은 이름에서부터 음기가 충만한 달과 같다. 백제와 신라 때는 월나산(月奈山), 고려 적엔 월생산(月生山)으로 불리다 조선 시절부터 월출산으로 굳어졌다. 시대와 명칭을 막론하고 월출산은 이름 그대로 ‘달이 뜨는 산’이 아닌 적이 없다.
대부분의 산들이 흙으로 이루어졌지만 설악산, 주왕산과 함께 월출산은 거대한 바위덩어리로 만들어진 돌산으로 힘이 넘친다. 스카이라인에 걸친 바위들은 울퉁불퉁한 톱날처럼 뾰쪽해서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화기(火氣)가 팽만한 남자의 산, 또는 양기(陽氣)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월출산은 이름에서부터 달이다. 여성을 상징하면서 음의 극점이다. 그런데 월출산은 단단한 바위산이다. 여기에 월출산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단단한 양기의 암석이 불꽃처럼 부드럽게 여성적으로 빚어짐으로써 상극의 음양이 날카롭게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절묘한 조화를 연출하고 있다. 남성적이면서도 여성적이고,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인 오묘한 기운을 내뿜고 있으니, 이 기운이 바로 월출산의 보이지 않는 뒷면이다.

산세(山勢)를 보자. 월출산은 정상인 천황봉과 구정봉을 연결하는 동서축과 같은 능선을 경계로 해서 북쪽인 영암과 남쪽인 강진의 산세는 너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영암 쪽의 산세는 너무 기가 세고 자못 웅장하여 무인적인 양의 기질이다. 이와는 반대로 강진 쪽의 부드러운 곡선미와 푹신한 흙산은 순탄한 산세로 문사적인 음의 기풍을 보여준다. 하나의 산이 음과 양을 동시에 품고 있다.
아래서 올려보면 남성이요, 위에서 내려 보면 여성이다. 남성처럼 굳고 꼿꼿하게 돌출한 사자봉(獅子峯) 등 바위 봉우리에 압도당하다가도, 억새밭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금세 포근해진다. 구정봉 주변 봉우리들은 오밀조밀한 여성미를 물씬 풍긴다. 월출산은 역(易)의 괘(卦) 가운데 하나인 지천태(地天泰)를 몸으로 입증하고 있다. 심지어 멀리서 보면 베일 것처럼 날카롭기만 한 천황봉마저도 정상에 오르면 딴판이다. 300여 명은 족히 앉을 만큼 넓은 반반한 바위가 갈려있어 안방처럼 넓기만 하다.

월출산은 거대한 바위로 만들어진 산이라서 항상 물이 부족하다. 그래서 산의 정상에 그것도 바위에 구멍을 뚫어 물을 머금고 있으니, 절구통 모양의 아홉 개 천연우물이란 의미로 구정봉(九井峯)이라 부른다. 이 바위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외양뿐 아니라 수화(水火)의 기운도 조화를 갖추었으니 명실 공히 음양을 모두 갖춘 산이 아니겠는가. 월출산은 적나라하게 이를 눈앞에서 증명한다.

구정봉으로 가는 길에 아가리를 쩍 벌린 거대한 야수와도 같은 형상을 한 베틀굴이 나타난다. 이 굴은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란한 여인들이 베를 짠 곳이다. 굴속으로 들어가면 드디어 여성의 음부 형상 바위가 적나라한 나신을 드러낸다. 그래서 음수굴, 음혈(陰穴)이라고도 부른다.

바람재를 지나 천황봉으로 향하던 나그네는 우뚝 솟은 대물 남근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금 떨어진 베틀굴을 마주보며 팽팽하게 서있는 모습이 너무도 남자의 급소를 닮은 모습이고, 돌의 중심부에는 깊은 골이 파져있고, 이층건물 높이의 남근석은 실제의 모양을 크게 확대한 모습 그대로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보는 이마다 경탄과 함께 자연의 조화에 갈채를 보내지 않는 이가 없다. 남근석 위로 돌을 던져 올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입소문이 퍼져 서로 던진 작은 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월출산 음양(陰陽) 조화의 극치미는 베틀굴과 남근석(男根石)을 지나 합체석에서 절정이다. 조금 더 가면 낯이 붉어지는 기암괴석이 떡하니 길을 막는다. 이름하여 ‘여근남근 합체석’. 그래서인지 베틀굴 바로 위 구정봉의 웅덩이 9곳엔 전설이 하나 전한다.

전설에는 ‘월출산 구림 마을의 동차진이라는 남자가 구정봉에서 하늘을 깔보는 언행을 하다 옥황상제에게 벼락을 아홉 번 맞고 죽었다’고 돼있다. 그러나 나그네에게 실토한 동차진 영가(靈駕)의 진실은 달랐다. 어리고 젊은 처첩을 아홉이나 거느리고 이곳에서 방탕한 짓을 벌이다 날벼락을 맞았다는 것이다. 주위 풍광은 곧 도원경(桃源境)이요,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이니 돈 많은 한량이라면 능히 침소를 벗어나 자연의 기운을 흡입하고 싶어 했음직하다.

◇ 다양한 형태의 인물상 가득

음양의 두 바위가 서로 사랑에 빠져 월출산의 수많은 석상들을 낳았다. 월출산의 기암 중에는 사랑을 맹세하는 연인바위, 입맞춤하고 있는 사랑바위, 아기를 가진 배부른 임신부바위, 단란한 모습의 가족바위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인물상이 끝없는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한다. 뿐만 아니라 산수경석(山水景石), 물형석(物形石), 무늬석, 색채석(色彩石), 추상석(抽象石), 전래석(傳來石) 등이 구석구석에서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어찌나 그렇게 부처의 얼굴을 닮은 바위는 유난히도 많은지…. 월출산의 별명 중 하나가 천불산(千佛山)임에 무릎을 치게 된다. 여기에 기기묘묘한 소나무까지 보태져 확대한 분재(盆栽)나 다름없다. 오죽했으면 월출산을 기암괴석의 박물관이자 수석(壽石) 전시장이라고 불렀을까.

일본의 어느 거물급 수석(壽石) 애호가는 값에 구애받지 않고 이 땅의 오묘한 자연석을 사들이고 있었다. 한국 산하의 아름다움과 축경(縮景)의 매력을 앉아서 감상하겠다는 심사다. 이런 그가 두고두고 아쉬워하고 있는 수석이 바로 월출산이다. 산 전체를 최고의 수석으로 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로선 월출산이 움직일 수 없는 산이라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월출산은 안개 낀 날이나 달밤에 올라야 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달빛에 드러난 기암괴석들의 실루엣이 당장이라도 살아 뛰어나올 것 같은 입체 영화관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라도 월출산일 게다.
음양의 기운이 화창하니 남녀가 만나 뜨거운 물을 분출한다. 월출산 온천의 효험이 탁월할 수밖에 없다. 피로 회복, 신경통, 류머티즘, 알레르기성 피부염, 만성 습진, 심장병, 피부병 등 월출산 온천의 효능은 곧 남녀 간 교류로 치유 가능한 질환 일색이다. 돌의 재질마저 신비한 약효를 지닌 맥반석이니, 한마디로 ‘기똥(氣通) 찬’ 산이다. 과연 풍수지리의 발생지답다.

월출산은 영암(靈岩)이요, 영암이 월출산이다. 기감이 예민한 사람은 월출산을 온 몸으로 느낀다. 월출산을 비추는 보름달과 그 빛을 받은 바위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적(靈的) 에너지를 섭취하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음양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 영기(靈氣)가 충만한 바위산인 월출산을 감히 영암산(靈岩山)이라 부른다.

 

<여근,남근 합체석>

 

[13화] 월출산②편 [國師의 땅]
천황사지에서 본 월출산. /뉴시스 아이즈
월출산은 여러 가지로 영암(靈巖)의 산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월출산을 가운데에 보듬고 있는 영암에는 세 개의 흔들바위가 있다. 운무봉에 하나, 구정봉 아래 하나, 그리고 도갑봉에 있다고 했다.
이 땅에서 영웅이 탄생하는 것을 두려워한 중국인들은 발본색원 차원에서 월출산으로 숨어들어 바위들을 밀어 떨어뜨렸다. 그런데 세 바위 가운데 하나가 묘하게도 스스로 처음의 제자리로 찾아 올라갔다고 한다. 그 바위를 신령스런 바위라 하여 바위가 있는 산과 함께 고을이름을 영암(靈巖)이라 부른다고 했다.

영암의 서기는 수석만 빚은 게 아니라 인간도 영험하게 빚었다. 4세기말만 해도 일본 열도의 왜(倭)는 백제 해상왕국 연방 중 하나였다. 고구려의 계속적인 침략을 받은 백제는 일본 열도 남부로 대규모 이주를 하게 된다. 이때부터 백제의 본격적인 일본 열도 개척의 역사가 시작됐다.

17대 아신왕은 지금의 일본인 왜에 태자 전지를 보내 백제의 안전을 도모했다. 왜왕은 13대 근초고왕의 왕명으로 왜 왕실에 머물고 있던 아직기(阿直岐)로부터 국사(國師)의 필요성을 듣고 본토(백제)에 훌륭한 학자를 청하게 된다. 아직기는 한 인물을 천거한다.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32세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왕인(王仁) 박사다.
왕인 박사는 백제 제14대 근구수왕(375~384) 때에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탄생하였다. 8세 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文山齋)에 입문해서 유학과 경전을 수학하고, 문장이 뛰어나 18세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다.

◇ 일본의 국사로 대접받는 왕인 박사

왕인 박사는 일본에 혼자 건너간 게 아니다. 경전뿐 아니라 도공, 야공, 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도일하였다.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 공예를 전수하여 일본인들이 큰 자랑으로 여기는 아스카(飛鳥) 문화의 원조가 되었다. 왕인박사의 묘지는 일본 오사카(大阪)부 히라카타(枚方)시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 열도 곳곳에 왕인박사의 신사가 조성되어 일본의 국사로 대접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근래 들어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영암일대에 왕인박사 유적지를 복원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월출산 서쪽 산 중턱에 왕인이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는 문산재와 양사재(養士齋), 학문을 수련할 때 쓰던 석굴인 ‘책 굴’, 일본으로 떠날 때 배를 탔던 상대포(上臺浦), 고향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마을을 돌아보았다는 돌정고개를 정화하고 있다. 왕인묘(사당)에는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매년 양력 4월 초에 제사를 지낸다.

이번엔 같은 고장에 백제가 아닌 신라출신의 걸출한 국사가 탄생한다. 신라 말, 500년의 고려국운을 점지했고, 풍수도참설을 통해 여전히 지금까지도 영감을 불어넣고 있는 도선국사(道詵國師)다. 도선은 탄생 설화부터 범상치 않다. 도선의 아버지는 ‘오이’였기 때문이다.

영암의 성기산(聖起山) 벽촌에서 처녀 최씨(崔氏)가 겨울철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물에 떠내려 오는 오이를 건져 먹은 뒤 배가 불러 낳은 아기가 도선이다. 도선은 하늘이 점지한 아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처녀가 애를 낳는 일은 경(墨刑)을 칠 일이었다.
최씨는 신생아 도선을 대나무 숲에 버린다. 그러나 비둘기와 독수리들이 날개로 감싸 보호했다. 갓난아기 도선이 버려졌던 숲은 영암의 구림촌(鳩林村), 즉 비둘기 숲 마을이다. 아기를 뉘었던 돌 이름은 국사암(國師巖)이다. 지금도 영암의 특산물 중 하나가 오이다.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달통한 반신(半神) 도선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비쳤을까. 도선은 국토의 모든 산봉우리를 부처로 보았고, 우리나라의 지형을 행주형국(行舟形局)으로 짚었다. 국토 전체를 태평양으로 향하는 배(船)의 꼴로 요약한 것이다. 국토의 산세(山勢)를 살피던 도선은 장차 나라가 변란과 내분으로 평안치 못할 거라고 예감했다. 동해안인 관동지방, 영남지방은 태백산맥으로 산이 높아서 무거운데, 호서 호남은 평야가 많아서 가볍기 때문에 동쪽으로 나라가 기울어진 까닭이다.

도선은 비방을 쓴다. 월출산에서 조금 떨어진 화순의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에 1000개의 불상과 1000개의 탑을 조성하려한다. 뱃머리에 부처로써 짐을 많이 실으면 배가 균형을 잃지 않을 것이며,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세우면 높은 탑은 돛대를 삼고, 천불은 사공이 되어 태평양을 향해 저어가면 풍파를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도선은 즉시 사동(使童) 하나를 데리고 와서 터를 다듬어 놓고, 도력(道力)으로 천상의 석공들을 불러 흙과 돌을 뭉쳐 천불천탑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천상의 석공들은 ‘다음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란 단서를 달고 도선의 청을 받아들인다.

도선은 시간이 부족할까봐 절의 서쪽에 있는 일괘봉(日掛峯)에 해를 잡아 매놓았다. 그런데 심부름을 하던 사동은 일에 짜증이 나자 꾀를 부렸다. ‘꼬꼬댁’하고 닭 우는 소리를 질렀다. 닭 우는 소리를 듣자 석공들은 그만 지체 없이 모두 천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석공들이 떠난 뒤 살펴보니 탑과 부처가 각각 천개에서 하나씩 모자랐다고 한다. 지금도 운주사 근처에는 세우지 못한 거대한 부부불이 땅에 누운 채로 와불(臥佛)이 되어있고, 탑과 부처는 흙과 잔돌을 섞어 뭉쳐서 만들다 만 것처럼 거친 석질이며, 일대 돌들은 옮겨지지 않아 불상과 탑신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 고려의 500년 국운 보장한 도선국사

사람들은 만약 사동의 실수만 아니었더라면, 거대한 와불이 일으켜 세워졌고, 천불은 사공이 되고, 천탑은 돛대가 되어, 운주사 일대는 큰 도읍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온 나라가 태평성세가 되었을 것이라며 못내 아쉬워한다.

하지만 도선은 왕건(王建)의 아버지에게 명당 양택(陽宅), 즉 집터를 잡아줬다. 온통 눈 천지가 돼도 왕건의 집만큼은 보송보송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송악(松嶽)을 왕도(王都)로 점찍으며 500년 국운을 보장했다. 왕도만 세운 게 아니다. 산천의 혈맥 곳곳에 절이나 탑을 세웠는데, 이를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 한다. 도선이 월출산에 세운 절이 월출산 서쪽의 도갑사(道岬寺)다.

도선은 사후에 고려 왕실의 왕사로 모셔졌다. 선종의 한 종파의 조사로 추대되었지만, 후대는 풍수지리설의 비조로서 더 의미를 두고 있으니, 도선국사는 시대와 종교를 초월한 국사로 받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호남출신 도선을 개국의 국사로 모신 왕건이 왜 훈요십조(訓要十條)에 호남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고 명문화 했을까. 일각에서는 ‘차령 이남’을 다른 지역으로 해석했거나, 정치적 의도에 의해 후대에 조작되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독자의 요청에 의해 나그네가 살펴보니, 왕의 정치적 성향이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편차가 있긴 했지만, 관리등용이나 고려 국사의 수에서 적어도 고려 때에는 공식적으론 특별한 지역 차별 자취는 찾지 못했다.

후대에서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도선의 풍수도참설을 오남용해서 지역 차별에 악용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 훈요십조의 지역 차별 문구도 그런 악의적 편견의 한 흔적일지 모른다.

나그네에게 지난해 10월 신기한 일이 있었다. 1981년에 처음 뵌 이후 만난 적이 없는 저명한 원로 한 분의 이름으로 귀물(貴物)이 도착한 것이다. 임종 직전, 그분은 유언을 남겼다. 자신이 평생 모으고 간직하던 소중한 소장품들을 필자에게 전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소장품들 중에서 개태사 주장자(柱杖子)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개태사는 고구려를 계승하고 후백제를 평정하면서, 백제인들의 민심을 달래고 새로운 통일된 세상을 건설하라는 도선국사의 뜻을 받들어 태조 왕건이 계룡산 아래 창건했다고 한다. 고인은 생전에 개태사 부근 터를 복원하다가 우연히 이 주장자를 발굴했고, 그 주장자는 틀림없이 창건당시 묻은 도선국사의 주장자라 굳게 믿었다고 하니, 유언이 되어서 필자에게 전해진 주장자는 참으로 기묘하지 않을 수 없다.

 

,구정봉 우물>

 

[14화] 월출산③편 [만물을 생성하는 태반의 땅]
국보 제144호 마애여래좌상 /뉴시스 아이즈
월출산의 바위들은 절리현상으로 생겼다. 지표가 형성될 때 땅위로 솟아오른 마그마가 식으면서 수축되는 과정에서 위아래로 갈라지는 수직 절리현상이 나타난다. 월출산은 동시에 수평절리까지 발생한 후 오랜 세월동안 풍화작용을 일으키며 지금의 돌밭이 생긴 것이다.

월출산은 금강산(金剛山)이기도 하다. 증산교(甑山敎)의 창시자인 강일순이 산운(山運)을 옮긴 덕이다. 증산은 백두산의 기운을 뽑아 한라산으로 옮겼다. 이어 덕유산에 뭉쳐있는 기운을 뽑아서 무등산으로 옮긴 다음, 금강산의 기운을 뽑아 월출산으로 옮겼다. 백두산에 천지가 있듯 한라산에는 백록담이 있다. 1만2000봉으로 이뤄진 금강산처럼 월출산에서도 1만2000의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금강산의 정기를 고스란히 품은 ‘복제 금강산’이 월출산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이 자리 잡은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국보144호)이 있는 산이 월출산이다. 월출산 마애여래좌상은 몸의 비례가 해학적이고 선이 투박하여 자연미를 거스르지 않고 있다. 사람이 만든 이 인공 석상조차 월출산에서는 자연산 수석 작품이 되었다.

◇ 통천문을 지나 펼쳐지는 신세계

산에 있는 모든 구름다리 중 가장 길다는 월출산의 출렁다리는 길이가 52m나 된다. 120m 높이의 하늘에 매달린 출렁다리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고 함께 건너가야 한다. 월출산 꼭대기에 오르려면 통천문(通天門)을 통과해야 한다. 등산이 아니라 비상(飛上)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바위 굴을 벗어나면 거기에 달나라, 하늘이 있다.

정상에는 월출산 소사지(小祀址)라는 제단이 있다. 통일신라 시대 이래 국가 차원의 천제(天祭)가 올려지던 곳이라는 표지다. 영험하지 않는 곳에 제천의식이란 있을 수 없다.
도갑산 아래 무위사(無爲寺)는 신라 고승 원효의 작품이라 전한다. 무위사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존재는 본존불 탱화다. 탱화 속 관음보살의 눈에 눈동자가 없다. 그 연유는 이렇다.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다음 그린 그림들이었다. 하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가 법당 안을 엿봤고, 파랑새는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입에 붓을 문 채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려던 새였다. 그래서 관음보살의 눈에 눈동자가 없다.

월출산은 두 얼굴의 별천지다. 영암에서 바라보면 악산(惡山)이다. ‘나쁜 산’이 아니라 ‘산세가 험한 산’이다. 강진 등 해안 쪽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고 순한 모습이다.
영암의 월출산은 돌과 뼈로 그린 동양화 한 폭이다. 흙산은 재물, 돌산은 인물을 허락한다. 영암에서 도인(道人)이 많이 나오고, 강진 등지가 부호(富豪)를 대거 배출하고 있는 원인이다.

강진의 월출산은 흙이 풍성한 육산(肉山)이다. ‘인물과는 인연이 없어도 부자는 많다’는 게 강진의 자긍 겸 자조다. 천불산(天佛山), 만덕산(萬德山), 억불산(億佛山), 그리고 조산(兆山) 등 어마어마한 돈의 액수가 땅이름으로 굳은 곳이 강진 주변에 유난히 많다.

영암에서 인물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 월출산 북쪽의 영암은 바둑황제 조훈현을 낳았고, 남쪽의 강진에서도 바둑의 명인 김인이 나왔다. 조훈현의 바둑은 자유롭고 신묘하다. 김인의 기풍은 온화하고 부드럽다. 월출산이 점지한 인걸들의 면면 또한 월출산 두 얼굴의 영향력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월출산의 이러한 양면성을 고루 흡입한 인물도 있다. 고려 초기의 문신 최지몽이 대표적이다. 경사(經史)에 통달했을 뿐더러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도 정통했다. 18세 때 태조 왕건의 해몽 요청을 받고 “장차 삼한(三韓)을 통합해 다스릴 길조”라고 풀었다. 매우 기뻐한 태조가 지어준 이름이 바로 지몽, ‘꿈을 안다’는 의미다.

최지몽은 도선이 태어난 영암 구림(鳩林) 마을 출신이다. 명필 석봉(石峯) 한호도 구림마을에서 글을 익히며 성장했다.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하며 촛불을 끈 한석봉 어머니의 타이름이 있던 곳도 구림마을이다.

월출산은 음양의 통합된 기운이 여러 방면에 걸쳐 다양한 문화를 꽃피게 했다. 월출산의 뛰어난 예술성 때문에 국내의 산들 중에서는 가장 많은 예술로 표현되어진 산이 월출산이다. 시나위 가락에 판소리 가락을 도입해 오늘날과 같은 가야금 산조의 틀을 만든 김창조에게 월출산은 예술혼이었다. 이이, 송익필 등과 함께 8문장으로 불린 최경창은 월출산 태생이 아니랄까봐 시와 서화, 피리 연주에 능한 예인이었다.

월출산에 올랐던 인물들은 하나같이 극찬일색이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달은 허공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서 오르더라’고 월출산을 묘사했다. 고산(孤山) 윤선도는 ‘월출산 높더니만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황 제일봉을 일시에 가리는구나’라며 월출산 선경(仙境)을 가리는 안개를 탓했다.
노산(鷺山) 이은상은 ‘월출산 구정봉(九井峰)이 창검을 들고 허공을 찌를 듯 늘어섰는데 천탑도 움직인다. 어인 일인고. 아니나 다를세라 달이 오르네’라면서 무릎을 쳤다. 이순신 장군도 ‘월출산의 명승을 상상하면 이 병란 중에서도 늘 생각이 난다’며 동중정(動中靜)했다.

오이로 잉태한 도선이 땅의 아들이라면, 주몽은 하늘의 아들이다. 예전에 구명시식에 등장한 주몽의 영가(靈駕)는 어찌 들으면 함경도 사투리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주문이다 싶은 말로 필자에게 ‘월출산의 500년 주기설’을 귀띔했다.

◇ 500년 단위로 위대한 인물 배출

주몽은 은빛 옷에 금·은으로 장식한 관을 쓰고 있었다. 움직여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머리에 꽉 맞춘 관이다. 주몽의 영가는 신하들을 대동하고 출현했다. 말발굽·말울음 소리, 몇 백 명이 빠르게 걷는 소리도 들렸다. 신하들은 대부분 무장한 군인이었는데 뜻밖에도 조그만 활을 갖고 있었다. 어른 팔 길이보다 약간 긴 정도였다. 강궁(强弓)이라고 해 엄청 큰 활만 상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주몽은 유독 ‘500년’을 강조했다. 왕인 박사 이후 500년이 흐른 뒤 도선을 등장시켜 한 시대를 풍미하게 했듯이 월출산은 500년 단위로 위대한 인물을 배출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500년 주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유명한 풍수가 손석우의 영가도 “월출산에서 황제가 난다. 475년간 계속되는 나라를 건국할 인물”이라며 생전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남북통일의 물꼬를 트는 인물이 월출산에서 난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손석우는 “음택(陰宅) 명당, 즉 아주 좋은 묏자리가 월출산에 숨겨져 있다”고 강조할 뿐이다. 그렇다고 월출산에 조상을 암장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월출산은 속인이 묻힐 곳이 아니다. 이곳은 신선들의 휴양지일 따름이다.

가수 하춘화 덕분에 월출산은 한결 친근해졌다. 하춘화의 ‘영암 아리랑’은 ‘월출산 아리랑’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풍년이 온다. 서호강 몽햇들에 풍년이 온다. 흥타령 부네. 목화짐 지고 흥겹게 부네. 달을 보는 아리랑. 임 보는 아리랑.’
달의 뒷면은 보이지 않는다. 월출산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음과 양이 교합하여 만물을 생성시키는 여성의 자궁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듯, 월출산의 서기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세인들에게 기암괴석으로 현몽하여 잠시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를 지배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궁금해 한다. 어떻게 생겼을까, 보이는 세계와 어떤 관계일까 하고 말이다. 혹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조금이라도 보고 싶다면, 영암의 월출산으로 가보시라.
그 곳에 딴 세계가 펼쳐져 있으니까.

, 천황봉 제단>

 

[15화] 금산① [최고의 기도 도량]

 

조선 태조 기단(祈壇)>


우리나라에는 3대 관음 기도 도량이 있다. 남해 금산의 보리암(菩提庵), 동해 낙산사의 홍련암(紅蓮庵), 그리고 서해 강화도 보문사(普門寺)다. 어떤 이는 낙산사와 보문사 대신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팔공산 갓바위를 꼽기도 한다.

감히 누가 보리암을 대신할 생각을 못하니 그 만큼 기도의 효험이 우열을 다툴 필요 없이 출중하다는 증거다. 그래서 경남 남해의 금산을 관음(觀音) 성지(聖地)라 한다.

나그네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연유로 금산의 보리암이 국내 최고의 기도 도량으로 타의추종을 불허하게 되었을까. 나그네는 금산을 향해 남해로, 남해로 달렸다.

금산(錦山·681m)의 중턱쯤 오르면 넘실거리는 남해 다도해 절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상주 해수욕장이 한 눈에 들어온다. 금산은 한려해상국립공원 내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주봉(主峰)인 망대를 중심으로 좌우에 기암괴석 봉우리들이 도열해 있다.

금산은 사람으로 치면 완벽한 미인이다. 어느 한구석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균형과 조화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오죽하면 ‘금산 38경’이라 했을까. 감상하고 음미할 미(美)를 8경도, 10경도 아닌 무려 38군데나 지닌 산계(山界)의 미스코리아 격이다.

◇ 국내 최고 기도 도량 금산 ‘보리암’

금산은 본래 이름이 아니다. 본명은 보광산(普光山)이다. 보문(普門)에서 ‘보(普)’자를 따왔다. 보문은 관세음(觀世音)의 별칭이다. 신라 신문왕 3년(683년) 이 산에 풀집을 짓고 수도하던 원효대사가 희뿌연 광채를 뿜으며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감동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는 보광산의 ‘광(光)’자로 기록됐다.

보광산을 금산으로 개명한 인물은 조선 태조 이성계다. 고려를 내리고 조선을 올리는 준비과정에서 이성계는 명산을 돌며 자신의 뇌파를 한껏 모아 기도했다. 백두산과 지리산의 산신(山神)은 이성계의 기도에 심드렁했다.

하지만 보광산은 달랐다. 원효대사의 기도처에서 200m 남짓 떨어진 삼불암(三佛巖)에서 치성을 드렸다. 이성계는 보광산신에게 약속을 했다. 새 나라를 열면 보광산을 비단으로 덮겠다고. 보광산신은 이성계의 청을 기꺼이 수용했다. 결국, 조선 개국에 성공한 이성계는 약속을 지켜야했다.

나그네는 이성계가 치성을 드리던 조선 태조기단(祈壇)에서 태조 영가(靈駕)와 마주쳤다. 주로 계룡산과 북한산을 오가던 태조 영가가 왜 금산에 나타났을까. 무슨 깊은 뜻이 있거니 예상했지만 지레짐작에 불과했다.

태조 영가는 “일은 무슨 일…. 하도 추워서 잠시 내려와 있을 뿐”이라는 답이었다. 영혼도 추위를 탄다. 남해군의 1월 평균기온이 1.7도, 2월에는 3.3도로 따뜻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겨울철이면 각 종목 운동선수의 전지훈련장으로 인기 높은 지역이 바로 남해다.

태조가 털어놓았다. “100일 기도를 올리면서 그랬지. ‘세상을 내게 주면 산을 온통 비단으로 덮어주겠다’고. 그런데 비단이 어디 좀 귀한가. 이 큰 산을 무슨 수로 다 감싸겠는가. 그래서 꾀를 냈지. 산 이름을 아예 금(錦)으로 바꿔버렸다네.”

태조 옆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정도전의 영가가 끼어들었다. 금산이라는 작명은 자신의 아이디어였다는 것이다. “비단이야 닳고 퇴색하겠지만 산 이름을 새로 내리면 영원할 것이라고 했더니 대왕(태조)이 반색을 하더라”는 고백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의 수사(修辭)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는 점을 재확인한 순간이다. 물론 영계는 물질보다 정성을 윗길로 치기는 한다. 숨진 부모가 좋은 영혼세계로 가도록 영계의 지폐, 즉 가짜 돈을 태우는 이들이 더러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니, 일리 있는 훈수가 아니겠는가.

이성계가 조선 건국을 기원하는 100일 기도를 올리며 매달린 절대자 셋은 환인과 환웅 그리고 단군, 이렇게 3대다. 이성계 영가는 “그렇지만 단군 할아버지와 석가모니가 반목한 것은 결코 아니다”고 강조하면서 조선 태조기단 위쪽의 삼불암을 보기로 들었다.

바위 셋 중 하나는 누워 있고, 둘은 서 있다. 이 바위 셋의 모습이 꼭 앉아 있는 부처 같다. 이성계 영가가 100일 기도를 하기 전까지 바위 셋은 죄다 누워 있었다. 기도를 마치자 바위 둘이 일어나 앉았다. 나머지 하나는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셋이 다 일어났다면 이성계는 조선의 국왕을 넘어설 수 있었다. 중국까지 손아귀에 쥔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단군과 석가가 각자 평가, 추후 맞춰 보고 공감한 이성계의 그릇 크기는 그러나 조선까지였다.

이성계가 기도 중에 금산에서 목격했다는 단군은 나그네가 친견한 단군과 정확히 일치한다. 단군상은 그림이든, 동상이든 긴 수염에 도포 차림의 노인으로 묘사돼 있다. 그러나 실제로 단군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혈기왕성한 청년이다.

민족의 시조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왕검은 실존 인물이었다. 적어도 영혼의 세계에서는 실체를 갖춘 젊은 무장(武將)의 모습이었다. 6척 거구에 살이 많이 찐 편이며, 얼굴은 붉고 눈이 작은 것이 단군 혼백의 외모상 특징이다.

나그네는 단군의 혼령과 여러 차례 만나 대화했다. 단군은 강력한 정신력, 즉 엄청난 뇌파를 가진 인물이다. 샤먼(무당)처럼 뇌파의 델타 파장 영역까지 넘나드는 굉장한 영능력을 갖추고 있다. 청동검으로 중무장하고 갑옷을 입었으며 투구를 쓰고 있다.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온 것도 아니다.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서 선진문명을 지니고 들어온 이민족이었다.

◇ 단군을 모신 성전 자리해

초혼에 응한 단군은 “아버지 환웅은 중국 북부에서 먼저 청동기 문명을 발달시킨 부족의 장군이다. 고(古) 아시아족이 살던 한반도를 침략하는 데 앞장섰던 전투부대 대장이었다”고 밝혔다. 한반도 북부를 평정한 단군 아버지(환웅)의 부대가 토착부족, 곧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상하던 부족 중 곰 부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 낳은 아들이 바로 단군 자신이라고도 했다.

단군은 또 “쑥과 마늘을 가지고 동굴에서 견디라는 이야기는 여염집 여자들과는 달리 밖에 나가 잡혼을 하지 않고 한집에 머물면서 지배자만 섬기게 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단군이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많다. “내게는 영(靈)과 육(肉), 정신과 물질을 모두 다루는 능력이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단군을 처음 청했을 때 하얀 도복을 입고 나타난 단군의 영혼은 다짜고짜 나그네더러 “무릎을 꿇어라”고 명했다. 아울러 “이런 일(초혼) 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내가 제일”이라며 나그네를 무시했다.

그렇다. 단군왕검의 영력(靈力)은 대단하다. 금산에도 바로 이 단군을 모신 성전(聖殿)이 있다.
원효는 고승(高僧)일 뿐 국가 권력자가 아니다. 후세의 이성계에게 보광산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가 금산이라 개명했으니 한편으로는 단군왕검의 산이 부처에게 넘어갔다 되돌아온 셈이 아닌가.

알고 보면 금산은 어디나 기도처다. 해골바가지의 퀭한 두 눈을 쏙 빼닮은 쌍홍문(雙虹門)이 있다. 홍(虹)은 무지개, 따라서 쌍무지개 문이다. 예쁘고 부드러운 것을 즐기는 동서남북 사방의 신선이 한데 모여 사선대(四仙臺)에서 신선놀음을 하면서 바위에 거대한 구멍을 둘씩이나 뚫은 결과란다.

금산의 명치에 해당하는 쌍홍문은 금산을 드나드는 관문이며 자연이 만든 보리암 일주문이다. 옛날엔 천양문이라 불렀으나 신라 초기 원효대사가 ‘두 굴이 쌍무지개 같다’ 하여 쌍홍문이라 부른데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한다.

석가세존은 돌배를 타고 오른쪽 쌍홍문을 통과해 인도로 가기도 했다. 이름은 문(門)이지만 굴(窟) 속으로 들어간다는 기분으로 쌍홍문을 지나면 천장에 구멍 셋이 입을 벌리고 있다. 여기에 공이질하듯 돌을 던져 모두 골인시킨 사람의 소원 한 가지를 금산 산신령이 들어준다. 가장 잘 해결되는 소원은 득남이다.

,금산의 단군 성전>

 

[16화] 금산②  [무사들의 혼이 담긴 땅]

 

,보리암과 관음상>


온몸을 비단으로 휘감은 듯 아름답게 솟아 있는 금산(錦山·681m) 주봉의 왼쪽 대장봉(大將峯) 벼랑 아래 독수리 둥지처럼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암자가 바로 그 유명한 기도 도량 보리암(菩提庵)이다.
보리암은 신라의 원효대사가 세웠다. 보리암이 자리 잡은 터는 금산의 정맥이다. 겉보기에만 위태로울 뿐 절대 흔들림이 없다. 별 넷을 단 대장처럼 위엄과 기상이 넘치는 돌 봉우리다.
보리암과 대장봉을 뭉뚱그리면 선인대좌(仙人大坐)의 형국이다. 천계(天界)의 신선(神仙)이 내려와 남해를 굽어 살피는 꼴이다.

평일에 날씨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리암을 찾는 이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허전하거나 간절할 때 조상의 묘를 찾듯 보리암에 들러 염원하는 이들은 한 가지 소원만큼은 반드시 응답받을 수 있다.
시원스런 다도해가 한 눈에 펼쳐진 보리암. 나그네는 절경에 말을 잃었다. 절경은 침묵이요, 침묵은 절경이라. 바다 쪽으로 한 눈에 보아도 세월의 흔적이 유구한 삼층석탑이 남해를 바라보고 있다.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인도의 허황옥 공주가 월지국(月支國), 즉 인도에서 배로 실어온 파사석(婆娑石)으로 세운 탑이다. 귀국하면서 배의 바닥에 깔았던 돌이다. 허 태후가 인도에서 돌아올 때 풍파가 뱃길을 막자, 태후는 배에 파사석을 실었고 덕분에 풍랑을 헤치고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절절한 러브스토리 지닌 상사암

파사석으로 만든 보리암 삼층석탑은 그래서 진풍탑(鎭風塔)으로도 통한다. 닭 벼슬의 피를 파사석에 떨어뜨리면 굳지 않는다. 태우면 유황 냄새가 난다. 영기(靈氣)를 잔뜩 머금은 돌이다.
영석(靈石) 탑답게 삼층석탑은 과학 상식을 비웃고 있다. 탑의 기단석(基壇石) 위에 나침반을 놓으면 침(針)이 요동을 친다. 실험 삼아 탑의 남서쪽 귀퉁이에 나침반을 놓아 보았더니 남쪽을 가리켜야 마땅할 남침이 어처구니없게도 북쪽을 향했다. 위쪽 돌에 올려놓으면 아예 고장이라도 난 듯 나침반은 멈춰 섰다. 보리암 삼층석탑은 인간에게는 불가사의(不可思議)다.

금산 신령(神靈)은 깎아지른 보리암벽에 차(茶)를 심었다. 이름하여 ‘암차(巖茶)’다. 보리암 낭떠러지 위에 자라는 차나무에서 딴 차다. 원효, 조선 태조 이성계, 사명대사 등 금산과 인연이 있는 한국사의 스타들이 예외 없이 맛본 차다. 득도와 건국을 도운 차다.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따는 찻잎인지라 암차의 기성(氣性)은 여느 차와 비교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탁월하기만 하다.
보리암 절벽을 등지고 남해를 바라보고 있는 해수관음보살상은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근래작이다.

미산(美山)답게 금산은 러브스토리도 품고 있다. 상사암(相思巖)의 사연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더욱 절절하다. 주인집 딸을 짝사랑하여 홀로 애를 태우다 죽어 구렁이가 돼버린 머슴. 이 구렁이는 주인집 딸을 친친 감은 채 풀어주지 않았다. 딸의 부모는 신의 힘을 빌리기 위해 굿을 했다. 불가항력으로 구렁이는 딸에게서 떨어져 나와 벼랑 아래로 투신, 자살했다. 화풍병(花風病), 즉 상사병으로 죽은 이 머슴 구렁이는 요즘 일종의 매파신(媒婆神) 노릇을 하며 대리만족하고 있다. 상사암에 올라 사랑을 기원하면 이룰 수 있다.

그렇다고 금산을 추파나 던지는 미인계(美人計) 산으로 여긴다면 실수다. 금산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이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호국지색(護國之色) 쯤이 적절하다. 금산 38경 중 으뜸인 제1경이 바로 정상의 봉수대(烽燧臺)다. 왜구(倭寇)의 침입을 가장 먼저 체크한 조선시대 땅끝 마지막 망대(望臺)가 금산 봉수대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경계경보를 발령하며 이 나라의 남단 최전방을 지켰다.
금산은 이 땅의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단군왕검의 영토다. 그런데 금산에는 ‘부소바위’라는 게 있다. 진시황의 아들 부소(扶蘇)가 유배당한 곳이라는 것이다. 진시황의 아들 20여 명 중 첫째가 부소다. 동생들과 달리 아버지가 하는 일에 시시콜콜 간섭하고 걸핏하면 반대하다가 중국 북쪽으로 보내져 평생 변방을 지키도록 했다.

그렇다면 금산에 있는 부소바위는 무엇인가. 진시황이 장남 이름을 하필이면 ‘부소’라 짓는 바람에 빚어진 오해일 따름이다. 요즘은 덜 하지만 옛날 우리나라에서 ‘중국 것=좋은 것’이었다. 모화(慕華)에 빠진 채 제 나라를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비하했을 지경이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中原)’이고 나머지는 죄다 오랑캐인데, 개중에서 비교적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족속이 동이(東夷)였다는 게 중국 생각이다. 중국의 동쪽에 살고 있는 오랑캐들, 이것이 ‘동방예의지국’에 숨겨진 정체다. 우리 역사는 모르면서 중국사는 정사에서 야사까지 두루 꿰고 있는 지식인들이 과거 왕조시대에는 많았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는 송악산이 있다. 송악산의 옛 이름은 부소산이다. 백제의 수도 부여에도 부소산이 있다. 부소는 ‘풋소’의 한자 표기다. 풋소는 ‘소나무’를 뜻하는 옛말이다. 금산 부소바위에 관한 한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산 이름뿐 아니다. 단군의 둘째 아들 이름 또한 ‘부소’다. 결국 부소바위는 애초부터 우리 것이었다.

금산과 진시황이 하등 무관한 것은 아니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꾸던 진시황은 서불(徐市)을 인솔대장 삼아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을 바다 가운데 있는 삼신산(三神山), 오늘날의 금산으로 파견했다. (‘市’는 ‘시’가 아니라 ‘불’로 소리 낸다. ‘앞치마 불’ ‘사람이름 불’이다)
그러나 금산 어디에도 불로초는 없었다. 서불은 제주도로 갔다. 진시황의 명령을 이행 못한 터라 귀국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은 ‘서불이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데서 비롯됐다. 성철 스님은 서불과 함께 금산으로 온 일행을 동남동녀 각 3000명, 모두 6000명으로 봤다. 동시에 서불의 야욕도 간파했다.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진시황의 약점을 이용, 처녀 총각 6000명을 이끌고 남해 섬에 정착해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생전의 스님은 또 “서불이 만든 나라가 일본이라는 말도 있다”고 귀띔했다.

◇남해의 짙은 기운, 걸출한 무관들 배출

금산, 그 중에서도 보리암 기도는 효험이 확실하다. 특히 공직이나 관직에 꿈을 품고 보리암에서 기도하면 뜻을 이루는 수가 많다. 근대 인물로 거물급 공직자 중 최치환이 좋은 본보기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에서 태어난 최치환은 ‘금암(錦巖)’이라는 아호를 쓸 정도로 금산을 사랑했다. 6·25전쟁 때 영남의 최후 방어선 군경 합동 총사령관으로 나라를 지켰다. 경찰 고위직과 공보실장(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지위), 대한축구협회장, 경향신문사장, 국회의원(5선) 등을 역임했다. 남해와 육지를 잇는 남해대교 건설을 추진했고, 112 범죄신고 전화도 그의 작품이다. 필자의 왕고모 할머니가 남해의 최씨 집안으로 출가, 금산 보리암에서 치성을 올려 얻은 아들이 바로 최치환이다.

남해 출신의 무관(武官)들이 출중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남해는 거제, 제주와 함께 조선 시대의 3대 유배지였다. 승승장구하다 꺾인 인걸들의 회한이 짙게 밴 탓에 남해인의 기운은 매우 센 편이다. 강한 기(氣)가 양(陽)으로 작용한 결과가 전국 제일의 향학열과 무병장수다. 국내의 폭력조직은 물론 일본의 야쿠자 중에도 남해 태생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금산 음(陰) 기운의 영향이다.

태백성(太白星), 즉 금성이 영롱한 빛을 발하는 새벽녘이나 오후 3~7시에 금산 보리암에서 기도를 올리면 양기(陽氣)를 흠뻑 취할 수 있다. 점심시간대나 심야는 피해야 한다. 불기운이 강할 때라 쇠기운(金氣) 덕을 봐야 하는 기도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조폭의 우두머리를 원한다면 모를까.
결국 금산의 영험한 기도 효과는 지맥을 능가하는 무사들의 인맥이 응축된 영기(靈氣) 덕분이었다.

,보리암 3층 석탑>

 

차길진의 시크릿 가든(1) 하얀 까마귀가 존재하는 뜻


‘과연 영가가 찾아왔을까?’
구명시식(救命施食)에 처음 동참한 이들은 대개가 이렇게 반신반의한다.

‘부왕, 부왕, 부왕.’ 놋쇠 징이 세 번 울리면 구슬픈 가락의 살풀이가 이어진다. 초보 동참자들은 가무가 이어지는 동안 허공과 영단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혹시 영가가 왔는가 하고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정하고, 나를 믿고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긴가민가 하는데 종교가 다르고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할까.

그날 구명시식 자리엔 한 중년의 부인이 앉아있었다. 딸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그녀. 딸이 세상을 떠난 후, 지난 14년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딸을 잊은 적이 없었다. 누가 세월이 가면 잊혀지고,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날이 가면 갈수록 오히려 더욱 그리움이 뼈저리게 사무쳤다.

대학에 다니던 딸은 해외여행 중이었다. 캐나다를 들러 미국에 도착했다. 뉴욕을 둘러보던 딸은 그만 맨해튼에서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비보를 전해들은 여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창 꽃다운 나이에 이국 만 리에서 비명횡사를 하다니. 여인은 남편을 원망했다. 남편이 산소를 이장한 직후에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영혼에 대한 믿음 천차만별

나는 딸의 말을 전했다.
“엄마가 좋아하면 나도 좋아하고, 엄마가 싫어하면 나도 싫어해.”

어머니는 날카로운 창에 찔린 듯 몸을 움츠렸다. 놀라서 커진 눈으로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그 말은 딸애가 미국에서 죽기 바로 직전에 저와 통화했던 말이예요”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남자친구가 있었죠?”
“네.”
“같은 학교 다니던 장택(가명)군이지요?”
“네, 맞아요. 하도 오래되어서 저도 이름이 가물가물했는데…. 정말 딸애가 오긴 왔군요.”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업장도 두껍지 않은데 아직도 환생하지 않은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딸은 비록 이승의 몸이 아니었지만 남자친구를 사랑했기에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친구의 딸로 태어날까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손자로 태어나기로 했다며 어머니와의 재회를 약속했다.

딸 영가는 어른스럽게 어머니를 위로했다. 명이 다해서, 죽을 때가 되어서 죽은 것이니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라는 것.
“그런 줄도 모르고 공연히 남편만 증오했네요.”
구명시식을 마친 뒤, 눈 주위가 아직도 촉촉이 젖어 붉게 충혈된 중년의 부인은 객쩍게 한숨을 쉬었다.

그 날 구명시식 가무단의 14년 된 장구가 갑자기 찢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수명이 다해서 그렇다고들 했지만, 내 눈엔 분명 다른 이유가 보였다. 과거 재벌이었던 한 분이 동참했는데, 안타깝게도 명이 짧았다. 영계에 명을 늘려달라고 실랑이를 벌이면서 힘겨루기가 오갔고 그 와중에 가죽 장구가 툭 하고 터진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그는 알기나 할까. 여느 부자들처럼 그 분도 구명시식을 장터에서 거래하는 물건처럼 인색한 씀씀이를 보이며 나를 씁쓸하게 했다.

부자로 죽지 말고, 부자로 살라고 늘 이야기 해왔으나 제대로 실천하는 이의 숫자는 허탈할 정도다. 같은 현장에 있으면서도 영혼의 세계를 향한 믿음은 역시나 천차만별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까마귀는 검은색일까. 사람들은 하얀 까마귀를 본 적이 없으므로 까마귀는 모두 검은색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하얀 까마귀가 단 한 마리만 있어도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논제는 성립되지 않는다.

실상 지구상에는 하얀 까마귀가 출현했다는 기록이 있다. 1999년 안동에서는 검은 까마귀 수백 마리 속에 섞여 놀던 하얀 까마귀가 일반인들에게 목격됐다. 도쿄 우에노 동물원은 72년 만에 하얀 까마귀를 관람객들에게 공개해 화제를 낳았다.

영혼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마치 하얀 까마귀 존재처럼, 영혼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단 한 사람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영혼의 존재가 입증되었다면 영혼은 존재하는 것이다.

영혼의 문제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범위에 있다. 어쩌면 증명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마음이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유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파스칼의 말처럼 마음이 영혼을 안다면 굳이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오랜 세월동안 영혼의 문제 때문에 힘들어했다. 물론 어렸을 때는 이를 알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영혼을 보는 능력이 있는 줄만 알았다. 유난히 말문이 느렸던 나는 일곱 살 무렵에나 말을 할 수 있었고, 그제야 영혼이 내 눈에만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영혼을 안다면 과학적 증명 이유없어

“저기 무섭게 생긴 할아버지가 날 쳐다봐요”라고 말하면 부모 혹은 집안 어른들은 “도대체 뭐가 보인다는 거니?”하고 되물으며 나를 걱정했다. 나는 아직도 그 눈빛을 잊지 못한다. 솔직히 영혼보다 그들의 날카로운, 근심에 가득 찬 눈빛이 더 무서웠다. 나를 두고 쑥덕이는 목소리도 싫었다. “병원에 데려가 봐라” “산 너머 무당집에 가서 물어봐라” “굿을 하면 낫는다더라.”

어느 날부턴가 나는 자연스럽게 영혼을 봐도 어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영혼이 무언가를 말해도 나는 묵묵히 듣기만 할 뿐 대화하고 있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이제 더 이상 영혼을 보는 아이가 아닌 평범한 아이인 척 연기를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내겐 비밀이 많아졌다.

그 때부터 비밀은 내 삶의 일부분이 됐다. 매일 다른 영혼들이 찾아와 살아생전 말하지 못했던 비밀들을 말하고 사라졌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가족에 대한, 베일이 가려진 역사에 대한 비밀들은 무려 60여 년이 넘는 시간동안 차곡차곡 쌓여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기묘한 비밀정원을 만들었고, 나는 그 정원을 홀로 산책하며 영혼의 신비를 만끽해왔던 것이다. 이제 그 비밀의 정원을 독자 여러분과 산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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