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강화도 제①편 [하늘을 여는 땅 강화도] 나그네가 되어 도착한 강화 다리 아래 펼쳐진 바다는 마침 썰물이 한창이었다. 물이 걷히자 여인네 속살처럼 드러나는 갯벌. 석양에 비친 강화 바다 빛깔은 오묘했다. 얼른 보기에 흙빛이지만 끈적한 잿빛 어딘가에 붉은 색을 품고 있었다. 검은 적자색은 낙조가 어루만질 때마다 부끄러운 듯 언뜻언뜻 드러날 뿐이었다. 강화의 바다. 검은 적자색이다.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인 서해안 갯벌의 하나가 강화 갯벌이다. 육지도 아니요, 그렇다고 바다도 아닌 것이 갯벌 아니던가. 나그네의 눈엔 땅과 물의 중간인 강화 갯벌에서 찬란하게 발현되는 광채가 왠지 평범해 보이질 않았다.
수천 년 전 고조선의 단군은 왕이자 제사장으로서 누구보다 우주의 기운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런 그가 대륙을 남하하면서 제천의식을 올릴 참성단 자리로 백두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과 같은 쟁쟁한 명산을 물리치고 잡은 혈 자리가 왜 하필 강화도였을까.
강화도는 단군시절에 김포와 연결되어있었다고 하지만 강화 바다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아시아 최고인 9m를 넘나들고 질퍽한 갯벌이 한없이 펼쳐져있어 배를 대기가 어려웠고, 겨울이면 한강, 임진강, 예성강에서 흘러 온 얼음조각 유빙(遊氷)이 바다에 가득해 배가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악조건이었다. 왜 이곳에 성소(聖所)를 만들고 하늘에 땅이 열렸음을 고했을까.
◇ 강화 바다 빛을 닮은 순무 김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더니, 나그네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인심 후하게 생긴 식당 아주머니는 이것저것 가뿐하게 한 상을 차려냈다. “이건 강화도에서만 나는 귀한 거예요. 다른 지방에 심으면 이 빛깔이 안 나고 여기서만 이런 빛깔과 맛이 납니다.”
아주머니가 정성스럽게 사발에 담아온 것은 강화 순무 김치였다. 머리가 양파처럼 둥글게 생긴 강화 순무를 보는 순간 그만 그 색깔에 감탄하고 말았다. 갯벌을 품은 강화 바다 빛을 엷게 담은 바로 그 적자색이 돌기 때문이다. 아주머니가 내온 건 김치가 아니라 한 사발의 강화도 기운(氣運)이었다.
어디 순무뿐이랴. 화문석을 짜는 왕골(일명 완초)도 다른 지방과 달리 키가 크고 굵으며 색이 유난히 희기에 임금님 진상품으로 올랐다. 강화 인삼은 또 어떤가. 고려 고종(1232)때부터 시작해서 고려인삼의 원산지였다. 명실 공히 세계 최고의 약초로서 고려와 조선의 국부로 나라를 먹여 살렸다. 식물조차도 뿌리를 두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귀물(貴物)로 변하는 강화도. 이 강력한 지기(地氣)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튿날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단군이 점지한 성소인 참성단(塹星壇)이었다. 참성단을 한자 뜻으로 풀이해 ‘구덩이(塹)를 파고 별(星)을 바라보는 단(壇)’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천문대 역할을 했을 거라는 설도 있지만 나그네는 글자 그대로 ‘참으로 성스러운 단’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단군 시대엔 한자가 없었으니 이두나 구결처럼 순수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후대에 그 한자의 뜻이 더해진 게 아닐까.
참성단으로 오르는 해발 467m 마니산은 세인에게 호락호락하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기암괴석이 정상을 향해 치솟아 있는 형상은 하늘을 향한 관문 같았다. 서쪽 기슭에는 조선시대 승려 기화(己和)가 자신의 당호(堂號)를 따서 ‘함허동천(涵虛洞天)’이라 이름을 붙인 절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동천이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하늘에 닿을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다. 단내 나는 거친 숨을 토하며 한발 한발 오르는 1004의 계단 길. 하늘이 나그네의 지극한 마음을 시험하는가보다.
참성단은 거친 돌을 다듬어 쌓은 제단으로 기단은 지름 4.5m의 원형이고 상단은 사방 2m인 정방형이다. 이는 상고시대부터 가지고 있었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기하게도 참성단은 북으로는 백두산 천지, 남으로는 한라산 백록담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두 자리에 이르는 거리가 같으니 강화는 전 국토의 기가 한곳에 모이는 있는 혈 자리다. 뿐만 아니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지구상에서 손꼽히는 곳이 아닌가.
밀물과 썰물은 달의 작용이다. 현대 과학은 지구가 태양 못지않게 달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바다의 밀고 당김은 바로 생명의 태반인 갯벌을 만들어냈다. 음양오행설을 빌리자면, 태양은 양이요 달은 음이다. 지구상에서 음기가 가장 센 곳의 하나가 강화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생명을 잉태하는 여자의 배꼽인 셈이다. 강화 바다의 거대한 오르내림은 바로 생명의 힘찬 맥동이었던 것이다.
인공위성이나 측량기구도 없는 그 미명의 시대에도 단군의 기감(氣感)은 기가 막힐 정도로 정확했다.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리는 성지로서 이만한 자리가 또 있을까.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나라를 열겠다는 개국의 웅지는 이곳 강화였기에 가능했으리라. 나그네는 펄떡펄떡 뛰는 지구의 배꼽 위에 서 있었다.
기운과 시기가 잘 맞아떨어지면 크게 생(生)하지만, 반대로 역풍을 만나면 처참히 멸(滅)하는 극생극멸(極生極滅)의 기운이 감아 도는 강화도. 조수 간만의 차이가 엄청난 것처럼 한반도의 역사는 흥망이 요동쳤다.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운 극생(極生)도 있지만 강화엔 극멸(極滅)의 역사도 엄연히 존재한다. 고려시대부터 천혜의 요새라는 이점을 안고 39년간 대몽항쟁으로 명성을 떨쳤고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던 강화는 조선 말 서양의 문호개방 압력으로 인해 격전지가 되었다.
◇ 극생극멸의 기운 감도는 신비의 섬
특히 고종 8년 신미양요는 강화의 비극이었다. 문호개방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략한 미국과의 전쟁 결과 미국 측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에 불과했던 것에 반해 조선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여 명이라는 학살 수준의 완패를 당한 것이다. 그 후 강화도는 대표적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왕조의 역사와 함께 명멸(明滅)하였다.
예로부터 참성단에서 올려지는 제천의식은 곧 하늘님의 자손이라는 사실과 민족의 자존을 확인하는 행사였다. 심지어 중화를 섬기는 유교가 정치 지배이념으로 정립되었던 조선시대조차도 가뭄엔 기우제, 나라에 우환이 있을 때 불길함을 해소하기 위한 해괴제를 지내기도 하여 종교 성지로서의 위상을 잃은 적이 없었다. 오늘날에는 전국체전의 성화 점화의식을 행함으로써 그 전통을 잇고 있는 민족의 성소다.
예로부터 나라에 위난이 닥치면 역대 임금들이 찾는 곳이 강화였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잉태할 곳을 찾는 연어의 회귀 본능과 다를 바 없다. 위기가 엄습하면 누구든 본능적으로 안전한 어머니 품을 찾게 마련이 아닌가.
그런데 나그네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민족의 성지 참성단을 직접 참배할 수가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조악하고 흉측한 철책이 가로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철책이라니. 군사적 목적과 관광객들의 훼손을 막기 위한 철책은 분단 철조망의 한반도를 고스란히 상징하고 있다.
신화나 전설은 영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역사는 사람들에 의해 지워지거나 왜곡될지언정 신화나 전설은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어 영원히 존재한다. 왕조 교체과정에서. 그리고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철저하게 우리 민족의 신화가 살아 숨 쉬는 상고사 기록을 멸실했다. 지금은 단지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다양한 80기 이상의 고인돌이 강화의 오랜 기원을 웅변하고 있다.
두 개의 다리로 이어짐으로써 단군 시대처럼 다시 육지가 되어 극생의 기운이 생동하는 강화. 강화 바다가 스크린처럼 변하며 나그네의 눈에 한반도의 미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서울=뉴시스】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2화] 강화도 제②편 [강화도 통일의 땅 미래의 땅]
<송악산, 개성>
강화가 키운 것은 왕골과 인삼뿐이 아니다. 강화의 배꼽은 걸출한 인물을 낳았다.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고려 무신정권의 1인자 최우, 그리고 비운의 왕 고려 고종이다.
고려산에서 태어난 연개소문은 당(唐)을 대파한 천하맹장으로 고구려 최고의 권력을 자기 가문에 집중시키는 바람에 그가 죽은 뒤 고구려도 멸망일로를 걷게 된다. 고려의 최씨 무인정권 역시 나라의 흥망성쇠와 함께 했다.
아버지 최충헌의 권력을 물려받은 최우는 몽골이 침략하자 수도를 강화로 옮겨 고려산에 고려궁을 짓는다. 강화 고려궁의 뒷산인 북산을 개경처럼 ‘송악산’이라 개명하고 궁궐의 배치도 개경과 똑같이 했다.
아들 최항, 손자 최의까지 항몽 의지를 꺾지 않다가 최의가 살해되자 무인정권 60년도 막을 내리고 이듬해 원(元)나라와 화친함으로써 고려는 굴욕적인 원의 섭정기로 접어들고 만다. 46년 재위 기간 동안 최씨 정권의 꼭두각시였던 고려 고종은 아이러니하게도 원과 화친을 시도하자마자 생을 마감한다.
고종의 능 앞에 선 나그네는 왕 노릇도 못하고 동가숙 서가식하다 간 그의 처연한 기운에 가슴 한 구석이 저려왔다. 휑하게 남은 고려궁터를 걷고 있노라니 바람결에 최우 영가와 고종 영가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최우 영가는 “내가 고려다. 내가 살아있는 한 고려는 건재하다”고 믿고 있었으며, 고종 영가는 “강화도는 감옥이었다. 나는 강화에서 단 한 순간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왕의 탄생과 죽음 함께한 섬
나그네는 연산군의 유배지이자 철종이 잠시 머물렀던 잠저소가 있는 교동도로 가기 위해서 창후리 선착장으로 향했다.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燕山君)과 25대 왕 철종. 같은 왕이었지만 둘의 운명은 천지차이였다. 연산은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와 죽었으며, 떠꺼머리 농사꾼이었던 철종은 졸지에 택군(擇君)되어 한양으로 떠난다. 도대체 강화의 무엇이, 왕을 만들기도, 또 왕을 죽이기도 하는 걸까.
교동도 월선리 선착장에 내리자 왕족 영가들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전남 해남 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政爭)에서 밀려난 선비들은 멀리 보내면 그만이었지만 왕족은 달랐다. 한양과 가까운 곳에 격리시켜 그들의 동태를 항상 면밀히 살펴야만 했고, 그러기에 교동도는 최적의 유배지였던 셈이다.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 왕 희종(熙宗)부터 조선시대 영창대군(永昌大君), 임해군(臨海君), 능창대군(綾昌大君) 등 11명의 왕족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으며 특히 연산군은 유배온 지 두 달 만에 죽어 이곳에 가묘를 썼고, 그의 아들과 부인도 이곳에서 명을 다했다.
“연산군 유배지는 말이 많습니다. ‘연산군 적거지’ 표지석이 있는 읍내리와 신곡동 신골, 그리고 영산골 등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인데요. 어디부터 가시겠습니까?”
동행한 지인은 내 얼굴만 바라봤다. 영능력자로서 후보지 1순위를 정해달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가만히 연산군 영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뒤 지체 없이 읍내리로 향했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 성곽의 흔적만 찾아볼 수 있는 교동읍성을 지나 연산군 유배지에 도착하자 가슴이 턱 막혔다. 늙은 오동나무가 드리운 옛 우물터 한 편에 ‘연산군 적거지’라는 초라한 표지석과 함께 녹슨 안내판이 서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연산군과 폐비 신씨를 모신 사당인 ‘부근당’이 보였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왕의 유배지치고는 너무도 초라했다. 사당에 향을 사르자 연산군 영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억울함을 호소했다. “내가 정말 나쁜 왕이었다면 나를 폐위시킨 그들이 명나라에 거짓을 고하지 않았을 거요. 나는 두 여자(폐비 윤씨와 인수대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죄밖에 없소.”
알려진 것처럼 색만 밝히는 패륜왕도 아니었다며 자신의 후궁은 오직 한 명뿐이었고, 애첩이자 요부로 알려진 장녹수(張綠水)도 빈도, 귀인도 아닌 겨우 정3품 소용(昭容)에 불과한 후궁으로, 그녀보다 왕비인 신씨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었다고 고백했다.
연산군 유배지로 알려졌던 신곡동 신골로 향했다. ‘신씨’가 많이 살아 ‘신골’로 불렸다는 이곳은 연산군이 아닌, 연산군의 아들 폐세자 황과 그의 부인이 최후를 맞은 비극의 장소였다. 폐세자 황은 유배지를 탈출하려다 목숨을 잃었고, 이를 지켜본 부인은 충격으로 목을 매고 말았다. 현재 그곳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들의 비통한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강화 인물들은 하나같이 강화 조수의 차이처럼 극생극멸했다.
나그네는 강화도와 동검도 사이를 시원하게 달리고 있었다. 별안간 자줏빛 평원이 눈앞에 펼쳐지는 게 아닌가. 장관이었다. 알아보니 자주색 꽃이 피는 칠면초라는 식물이 갯벌을 초원삼아 번성하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한 검은 자줏빛처럼 강화는 여전히 신비를 숨기고 있다.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였다. 갑비고차란 현대어로는 ‘갑곶, 갑곶이’가 되며, 두 갈래로 갈라진 물(바다, 강)가에 있는 곶으로 된 고을이라는 뜻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유입된다. 옛날엔 이 물을 모든 강의 할아비가 된다는 뜻으로 조강(祖江)으로 불렀다. 할아비강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한 줄기는 짠물(염하)로 흘러나가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흘러들어 예성강을 품는다. 아마도 이 큰 두 줄기의 하천을 보고 두 갈래 물인 갑곶이라고 했을지 모른다.
◇한강·예성강·임진강이 이룬 삼합수
그러나 강화 바다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 세 개의 강이 만나는 엄연히 삼합수(三合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동시에 강이 세 개가 만나는 삼합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세계 최대급의 조수간만의 차가 삼합수에 맥동치니 강화는 한반도, 나아가 지구의 배꼽된 것이다. 뛰어난 영적 능력의 소유자였던 단군(檀君)은 이런 엄청난 지기(地氣)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이야말로 국기(國基)를 세우고 백성과 더불어 수만 년을 살아도 될 땅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 아들(부루 夫婁·부소 夫蘇·부우 夫虞)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여 삼랑성(三朗城)의 전설을 낳게 했다. 나라의 첫째 조건은 역시 튼튼한 국방에 있다. 역사적으로 강화도는 우리나라 국방의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꼽힌다.
일찍이 삼랑성 안에는 군창(軍倉)뿐 아니라 조선실록을 보관했던 장사각(藏史閣) 등을 둬 유사시에 국가적 보루로서 몫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꼽았던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강화도는 분단 이후 남북대치 상황에서 최전방인 동시에 수도 서울을 지키는 최후의 요새가 되는 지역이 아닌가.
육지와 연결되어 극생(極生)의 기운이 가득 한 강화는 지금 제2의 개국을 준비하고 있다. 강화는 남으로 영종도를 북으로 개성을 거느리며 트라이앵글을 형성하고 있다. 영종도에는 세계 각국의 항공기가 드나드는 거대한 비행장이 마련돼 있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올림픽국제공항의 거대한 십자 주차장보다 훨씬 규모가 큰 영종도 비행장은 지금보다 세 배를 더 넓힐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자가용 비행기 시대 개인 전용기 격납고가 있어 아시아 물류허브를 넘어 첨단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지구촌 정거장의 기반시설을 완비하고 있다. 남북 경협의 핵심 사업이 개성공단에 위치한다. 최근 들어 삐걱거리고 있지만 대륙에선 최초 흑인대통령이 당선되어 오랫동안 정체된 한반도에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강화의 지하에는 삼합수가 실어 나르고 태평양의 거대한 조수가 빚어 낸 퇴적광물이 지하에서 숨을 쉬고 있다. 이 광물은 미래의 인류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의 광물이다. 인삼이 고려와 조선의 국부가 되었듯 이 천혜의 광물은 다가오는 제2의 개국에 밑천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강화에서 멀리 개성 쪽을 바라보았다. 나그네의 눈에 앞으로 4년 뒤, 그러니까 2013년의 광경이 펼쳐졌다. 개성은 서울 못지않은 행정의 요지로 건설의 망치 소리가 한창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