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산국립공원 송계계곡의 와룡대 주변에서 피서를 즐기는 모습. 국립공원에서는 계곡에서의 물놀이를 금하고 있지만, 송계계곡은 여름철 한시적으로 야영장이나 산장, 민가를 끼고 있는 계곡 구간에 한해 물놀이를 허락해 주고 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충주·제천 월악산 유물 답사
내세와 현세 잇는 ‘하늘재’ 아래
미륵대원지 ‘석조여래입상’ 정비
1000년 지킨 그자리 다시 우뚝
반쯤 눈감은듯한 표정 선명해져
제천 절집터 ‘사자빈신사지석탑’
4마리 사자와 범상치 않은 불상
옛절터 가는 길목길목 계곡 흘러
송계계곡 야영장서 물놀이 하고
와룡대 너럭바위에 앉아 발 담가
선녀 목욕한 ‘팔랑소’ 경관 만끽
만수계곡 끼고 이어지는 트레킹
서늘한 기운만으로 더위 사라져
충주·제천=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장장 9년 동안 보수 공사용 가건물에 갇혀 있었던 충북 충주의 미륵대원지 미륵불이 이제 막 가림막을 걷고 문을 열며 나왔습니다. 1000년을 섰던 그 자리에서 미륵불은 다시 1000년을 향해 섰습니다. 염천의 무더위에 월악산을 끼고 충주와 제천을 넘나들면서 불상과 석탑을 보러 떠나는 여행을 제안하는 건,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입니다. 믿는 구석의 뒤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월악산 계곡입니다. 지금 월악산 송계계곡에도, 만수계곡에도 차고 맑은 물이 가득합니다.
불상 정비와 석축 해체 보수 등을 위해 2014년 가건물 가림막 안의 철제 비계 속에 들어갔다가 9년 만에 나온 충주 미륵대원지의 석조여래입상. 10m가 넘는 큰 키의 불상은 하늘재를 넘어온 길손들이 가야 할 북쪽을 아득하게 바라보고 섰다.
# 미륵, 다시 1000년을 향해 서다
껑충하게 키가 큰 돌부처가 눈을 반쯤 감은 채 석실 안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섰다. 미륵의 표정에 감회가 서린 것처럼 보였던 건, 다시 마주 선 것이 9년 만이라서 그랬으리라. 충북 충주 미륵대원지의 석조여래입상이 정비와 석축 해체 보수를 위해 가건물의 가림막 뒤로 들어갔던 게 지난 2014년의 일이었다. 애초에 보수 공사는 2018년까지 예정됐는데, 일정이 차일피일 고무줄처럼 늘어졌다. 그러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지난 5월, 공사용 가림막 안의 철제 비계를 철거하고 가건물을 벗겨내면서 미륵불이 9년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1000년을 한자리에 서 있던 미륵불이 9년 동안의 다리쉼 후에 툭툭 털고 일어나서 이제 다시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
석조여래입상이 있는 자리의 공식 명칭은 ‘미륵대원지’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륵리의 옛 절터를 뜻하는 ‘미륵리 사지(寺址)’라 불렀다. 미륵대원지란 ‘미륵대원이 있던 터’를 말한다. 그렇다면 ‘미륵대원’은 뭘까. 조선 시대 교통 요지의 주요 도로에는 ‘역원(驛院)’이 있었다. 역(驛)은 관리들이 출장을 갈 때 타고 갈 말을 대는 곳이었고, 원(院)은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공공 여관이었다.
미륵대원은 ‘하늘재’ 아래에 있었다. 하늘재는 신라의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개척했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문경새재가 놓이기 전 하늘재는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늘재를 막 넘어온 이들이 미륵대원에서 묵어갔다. 하늘재 아래 설치된 공공 여관은 규모가 커서 그냥 ‘원(院)’이 아니라 ‘대원(大院)’이라고 불렸다. 미륵대원에는 사찰이 있었다. 이른바 ‘공공 여관의 부속 절집’이었던 셈인데, 절집이 부속 시설이 아니라 공공 여관과 한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륵리 사지에서 미륵대원지로 공식 명칭이 바뀐 연유다.
미륵불이 서 있는 미륵대원지 전경. 뒤쪽 산 능선의 잘록한 부분이 신라 아달라왕이 156년에 열었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개인 ‘하늘재’다.
# 텅 빈 절터가 경외감으로 묵직하다
미륵대원지에는 ㄷ자 형의 석실 안쪽의 미륵불을 비롯해 오층석탑, 사각 석등, 당간지주, 거북 모양 비석 받침돌 등이 남아 있다. 미륵대원은 사라지고 없지만, 이곳에는 다른 폐사지에서 만나는 사라진 절터의 적막함이나 애잔함이 없다. 폐사지의 흩어진 자취에는 세월의 부질없음 대신, 오랜 시간을 견뎌내며 남은 것들에 대한 경외감이 더 묵직하다. 경외의 무게중심이 미륵불에 있다. 옛 절은 다 사라졌을지언정 미륵은 1000년 넘게 살아 두 손을 모은 이들의 간절한 기도를 받아 주고 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해체 보수 이후 미륵불과 석실이 지나치게 말끔해졌다는 것이다. 보수 과정에서 미륵불과 석실 주위를 뒤덮고 있던 검은 이끼의 흔적을 다 지워버렸다. 보수 전의 미륵불은 목 아래와 위의 색깔이 달랐다. 미륵불의 목 아래는 돌이끼로 검게 변색된 반면, 얼굴은 어제 깎은 듯 말갛게 세수한 듯한 흰 얼굴이었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걸 두고 미륵불의 영험함을 얘기하며 종교적인 기적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보수 과정에서 이끼를 제거하면서 미륵불의 목 위와 아래의 색깔이 똑같아지고 말았다. 반쯤 눈 감은 듯한 미륵불의 표정도 덧칠한 것 같은 선 때문에 한결 선명해졌다. 말끔하고 명료해진 대신 세월의 흔적이 사라진 셈이다. 무너질 위기에 있었던 석실 보수는 필요했겠지만, 굳이 이렇게 시간의 흔적까지 지웠어야 했을까. 시간의 깊이를 보여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보수용 가건물을 철거했지만, 아직 미륵불의 보수가 다 끝난 건 아니다. 보수 작업은 오는 11월까지 계속된다. 미륵불 앞에는 출입 금지 차단막이 있어 불상 아래로는 접근할 수 없다. 불상 아래에는 동네 할머니들이 소원을 빌던 바위가 있다. 바위에 쌀알을 놓고 손바닥으로 비벼서 쌀알이 깨지지 않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속설이 깃들어 있는 바위다. 지금은 몇 걸음 뒤에서 볼 수밖에 없지만, 보수 작업이 끝나고 나면 반들반들 닳아 있는 바위에 손바닥을 겹쳐볼 수 있겠다. 가만 생각해보면 1000년 전의 소원과 지금의 소원이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월악산 덕주사의 약사전. 투박한 솜씨로 깎은 약사불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지역에 있던 정금사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다 놓은 것이다.
# 내세와 현세를 넘나드는 고갯길
미륵대원지는 하늘재 아래 있다. 본래 ‘계립령’이었던 고갯길 이름이 ‘대원령’으로 바뀌었고, 조선 시대쯤에 ‘하늘재’가 됐다. 하늘재는 이름과는 달리 고갯마루의 고도가 해발 525m에 불과하다. 인근에 포암산과 조령산, 주흘산 등 해발 1000m를 오르내리는 큰 산의 고도와 비교하면 ‘하늘’이란 이름이 무색하다. 그렇다면 왜 이 고개는 ‘하늘’이란 이름을 갖게 됐을까.
하늘재 북쪽, 그러니까 미륵대원지 쪽이 충북 충주의 미륵리고, 고개 너머 남쪽은 경북 문경의 관음리다. 미륵은 내세를, 관음은 현세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미륵리와 관음리 사이의 고개는 물리적인 고개를 넘는 길인 동시에 내세와 현세라는 관념적 공간을 넘나드는 길로 해독됐을 법하다.
짐작건대 하늘이란 이름은 그래서 붙여진 게 아닐까. ‘홍건적의 난’으로 몽진하던 고려의 공민왕도, 신라 망국의 한을 품은 마의태자도 여기 하늘재를 넘었다. 공민왕은 충주에서 문경으로 하늘재를 넘었으니 내세에서 현세로 내려갔던 셈이고,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향하면서 거꾸로 문경에서 충주로 향했으니 현세에서 내세로 올라갔던 셈이다.
나라 잃고 하늘재를 넘어온 마의태자의 행적은 일대에 수많은 전설로 새겨져 있다. 그중 하나를 꺼내 보자.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 왕건이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를 월악산 아래 덕주사에, 아들 마의태자를 하늘재 아래 충주 땅인 미륵대원지에 가뒀는데 서로를 그리워하던 공주는 동생 마의태자의 모습을 생각하며 남향으로 마애불을 새겼고, 마의태자는 북쪽의 공주 모습을 그리며 북향으로 미륵불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다른 버전의 전설도 있다. 마의태자가 덕주공주와 함께 월악산에 은거하다가 공주는 덕주사의 마애불이 됐고, 태자는 미륵대원지의 미륵불이 됐다고도 하고, 공주와 태자가 함께 미륵대원지에서 8년을 머물며 불법을 닦은 뒤에 미륵불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전설은 그저 전설일 따름. 덕주공주는 경순왕의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 오로지 전설 속에서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주목해야 하는 건 전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보다 망한 나라의 태자와 공주를 월악산이 받아줬다고 믿었던 백성들의 측은지심이리라.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 네 귀퉁이에서 사자가 받치고 서 있는 탑의 중심에 굵은 선으로 깎아낸 비로자나불을 앉혀놓았다.
# 나만 아는 명품, 사자빈신사지석탑
마의태자가 세웠다는 미륵대원지의 미륵불을 보러 나선 길이라면, 덕주공주가 바위에 새겼다는 덕주사 마애불도 함께 봐야겠다. 마애불은 제천의 월악산 아래 덕주사에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덕주골 코스에서 1.6㎞쯤 들어간 산 중턱에 있다. 덕주사까지는 차로 닿지만, 마애불을 보려면 1시간 가까이 계곡 길을 걸어야 한다. 마애불은 왜 절에서 멀리 떨어진 계곡 길 축대 위에 있을까. 이유는 절집이 옮겨 왔기 때문이다. 본래 덕주사는 마애불 앞에 있었는데 6·25전쟁 통에 불타고 말았다. 1970년 덕주사를 중건하면서 공사의 어려움 등의 문제로 본래 자리가 아닌 1.6㎞ 아래쪽에다 절집을 세웠는데, 그게 지금의 덕주사다. 불탄 절집을 산 아래에 다시 지으면서 마애불만 산 중턱에 홀로 남게 된 셈이다.
덕주공주 얼굴이 불상으로 남은 것이라 전해지지만 자태나 표정에서는 여성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마애불의 키는 13m로 10m가 살짝 넘는 미륵대원지의 미륵불보다 더 크고 인상도 더 무뚝뚝하다. 불상은 얼굴 부분만 약간의 양감이 느껴질 뿐, 아래의 몸통은 간략한 선으로 처리했다. 고려 시대 마애불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요즘 같은 폭염 속에서 등산을 해야 볼 수 있는 덕주사 마애불은 포기한다 해도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은 절대로 놓치지 말자. 석탑은 충주가 아닌 제천 땅에 있지만, 미륵대원지로부터의 거리가 5㎞ 남짓에 불과해 차로 7분이 채 안 걸린다. 석탑은 1000년 전쯤에 ‘사자빈신사’라는 절에 세워졌는데, 탑은 9층 가운데 5층까지만 남았다.
사자빈신사지석탑은 ‘사자빈신사’라는 이름의 절집이 있던 터에 세워진 탑이다. 절집의 이름은 대개 세 글자인데 ‘사자빈신사’는 다섯 자. 사자(獅子)는 백수의 왕으로 일컬어지는 동물을 말하고, 여기다가 ‘급할 빈(頻)’에 ‘빠를 신(迅)’을 쓴다. 부처 설법의 순간이 마치 사자가 포효하면서 기운을 뻗는 순간과 같다고 해 이런 이름을 붙였다.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부처의 자비를 나타내는 정신 통일의 경지를 일러 불가에서 ‘빈신사지삼매’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다.
석탑에는 2층 기단에 4마리의 사자가 늠름하게 서 있고, 한가운데 머리에 두건을 쓴 비로자나불이 앉아 있다. 그 모양이 다른 탑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해서 문외한의 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인다. 이름난 절에 있었다면 최고의 대접을 받았을 법한데, 외딴 마을 입구에 뚝 떨어져 있으니 알아주는 이가 별로 없다. ‘나만 아는 최고의 유물’로 여행의 갈피에 끼워 넣을 수 있다는 것. 사자빈신사지석탑이 매력적인 이유다.
# 여름 월악산 ‘믿는 구석’인 송계계곡
한여름 삼복의 무더위 속에서 월악산 자락의 옛 절터와 흩어진 절집을 찾아가는 여정을 권하는 데는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믿는 건 다름 아닌 월악산이 품고 있는 깊고 긴 계곡이다. 미륵대원지와 사자빈신사지, 덕주사는 월악산을 대표하는 송계계곡과 가깝다. 이즈음 송계계곡에는 맑은 물이 그득하다. 산이 크고 깊어 장마가 끝나고 난 뒤에도 한동안 계곡의 수량은 크게 줄지 않는다.
송계계곡은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해 있어 자유롭게 계곡 물에 들어갈 수는 없다. 야영장이나 민가가 있거나 산장, 휴게소를 끼고 있는 곳에서만 물놀이가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자연 상태의 계곡에서는 물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지만, 편의 시설이 갖춰지고 안전 문제가 없는 곳에서는 물놀이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얘기다. 송계계곡에서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는 야영장이다. 송계계곡에는 닷돈재 야영장과 덕주 야영장이 있다. 주변 환경이 빼어나고 편의 시설이 잘 돼 있으나 여름 휴가시즌이면 예약이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야영장이 아니더라도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은 많다. 송계팔경의 명소인 와룡대와 팔랑소 등이 대표적인 물놀이 명소로 꼽힌다. 와룡대 주변 물레방아휴게소 앞은 너럭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계곡 물이 시원해 몸을 담그고 쉬기 좋은 곳이고, 팔랑소 산장 앞의 팔랑소는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했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계곡을 따라 여덟 개의 소(沼)가 있어 ‘팔랑소’라 부른다는 얘기가 있지만, 실은 바람을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나온 이름이다.
송계계곡에서 즐기는 물놀이에 가려져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청량한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을 걸을 수 있는 최고의 트레킹 코스가 송계계곡 인근에 있다. 포암산과 만수봉 사이의 작은 계곡을 따라가는 계곡 트레킹 코스다. 이 계곡은 물 맑기로 이름난 송계계곡의 최상류 물줄기 가운데 하나라 경관도 좋고, 깊고 서늘하다.
# 서늘한 기운과 물소리로 더위를 잊다
만수봉은 해발 938m로 월악산의 주 능선과 포암산의 능선 사이로 솟아 있는 암봉이다. 등산객 사이에서는 월악산 정상인 영봉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같은 산으로 통한다. 이즈음 같은 장마철에는 산자락에 풍경화처럼 내걸리는 만수폭포의 힘찬 물줄기가 인상적이다. 굽이굽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물줄기는 산 아래에서 올려다볼 수 있다.
트레킹 코스는 만수계곡을 끼고 이어진다. 계곡 길은 산행 코스와 연결돼 있지만 요즘 같은 날씨에 등산은 무리이니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만 걷고서 나오는 것이 좋겠다. 가볍게 걷겠다면 2㎞ 남짓의 잘 다듬어진 계곡 자연관찰로 코스를 택하는 것을 추천한다. 하늘을 가린 숲 사이로 계곡은 이어지고 그 계곡에 바짝 붙은 나무 덱을 따라 길은 이어진다. 맑은 물이 푸른 소에 담겼다가 바위를 타고 미끄러지는 구간도 있고, 크고 작은 물줄기가 와르르 쏟아져 내리며 폭포를 이루는 구간도 있다. 트레킹 코스는 계곡 양쪽으로 이어져 있다. 계곡 이쪽을 끼고 이어지는 길이 반환점 ‘마의태자교’를 건너서 계곡 저쪽으로 돌아오게 된다.
만수봉은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하니 만수계곡에서 계곡 물에 몸을 담글 수 없다. 계곡으로 내려서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는 손을 씻거나 탁족하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된다. 그저 물가의 바위에 앉아 풍경을 즐기고 물소리를 들으며 서늘한 기운에 더위를 식혀야 하는 것이다. 그게 가장 큰 약점인 듯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강점이기도 하다.
여름 피서철이면 송계계곡은 물놀이하러 온 피서객들로 북적거리는데, 계곡 출입이 금지된 만수계곡에는 행락객의 인적이 없다. 덕분에 언제 가도 맑은 물이 콸콸 쏟아지는 근사한 계곡의 풍경을 호젓하게 제 것처럼 누릴 수 있다. 물소리가 가득한 계곡에 들어서면 짙은 숲의 그늘 아래 서늘한 기운과 계곡을 따라 부는 바람만으로도 충분히 더위를 식힐 수 있다. 만수계곡 탐방로를 걷는 동안 호강하는 건 ‘귀’다. 만수계곡 주변에는 군데군데 나무 벤치를 가져다 놓은 ASMR존이 있다. 계곡의 물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자리다. 여기서는 소리 하나로 더위를 쫓을 수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서늘한 계곡에서 시원한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더위가 저만치 물러가는 느낌이다.
■ 월악산 원랑선사 탑비
월악산 영봉 아래 옛 월광사(月光寺) 터가 있다. 우리나라 탑비의 걸작으로 꼽히는 원랑선사 탑비가 이곳에서 나왔다. 일제강점기 반출돼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졌던 탑비는,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로비에 경천사 십층석탑과 함께 대표 유물로 전시돼있다. 탑비는 방탄소년단(BTS)의 유튜브 영상 배경에 등장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는데, 이를 계기로 제천시는 지난 3월 의림지 역사박물관 앞에다 실물 크기의 탑비 복제품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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