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을 조망하는 최고의 전망대로 손꼽히는 경기 여주의 파사성에 올라 내려다본 풍경. 파사성의 성곽은 해발 230m지만, 높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장쾌한 경관을 보여주는 자리다. 왼쪽 강 상류 쪽이 여주 땅이고, 오른쪽 하류 쪽이 양평이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굽이굽이 흐르는 강, 그림 같은 산 여주
여주 최고 전망대 ‘파사성’
삼국시대에는 적군 관측 요충지
현재는 전망명소 양평까지 보여
해발고도 낮아 금세 정상 당도
자연보존의 순례길 ‘여강길’
지자체와 시민이 함께 만든 길
4대강 사업때 ‘생태탐방로’지정
숲그늘 많은 8코스 여름에 추천
포플러 줄지어 선 ‘강천섬’
남한강에 떠있는 거대한 초록섬
섬 둘레엔 양버들 하늘 찌를 듯
카페·식당 없는 자연친화 공간
무탈한 삶을 비는 ‘신륵사’
안전한 항해 기원하며 지어진곳
우리나라서 보기드문 강변사찰
나옹선사 부도전 한낮에도 호젓
여주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여주 사람들이 여주를 자랑할 때, 늘 꺼내 보여주는 시(詩)가 있습니다. 고려 때 문장가 목은 이색이 고향인 여주를 노래한 시입니다. 시의 한 구절이 이렇습니다. “여강의 굽이굽이 산이 그림 같아서(驪江一曲山如畵)/ 반은 단청 같고 반은 시 같네(伴似丹靑半似詩).” 단청을 반 닮은 게 여주의 산(山)이라면, 시를 반쯤 닮은 건 여주의 강(江)입니다.
여주에는 시처럼 여강(驪江)이 흐릅니다. 충주를 지나온 남한강, 원주를 거쳐온 섬강, 장호원을 흘러온 청미천. 이렇게 세 물 머리가 합쳐지는 여주 땅 점동면 삼합리에서부터, 남한강은 여강이란 이름을 하나 더 얻습니다. 삼합리에서 여강이 된 물줄기는 금사면 전북리까지 100리를 달립니다. 마음에 담으면 자세히 보게 되고, 자세히 보면 구분하게 되는 법. 옛사람들이 여강을 놓고 상류를 단강(丹江), 중간을 여강(驪江), 하류를 기류(沂流)로 나눠 불렀던 건, 그만큼 여강을 사랑했다는 증거일 겁니다.
‘강은 굽이굽이 흐르고, 산은 그림 같은’ 여주에는 ‘여주팔경(八景)’이 있습니다. 중국 소상팔경에서 유래한 팔경은 어디나 다 비슷합니다. 절집의 저물녘 종소리, 고기잡이 배의 불빛, 저녁밥 짓는 연기, 돛단배의 귀가, 내려앉는 기러기떼…. 그런데 여주팔경의 마지막 여덟 번째 경치가 좀 다릅니다. 보통은 ‘밤에 내리는 비’인데, 여주팔경은 ‘파사과우(婆娑過雨·파사성에 여름철 소나기 지나가는 모습)’입니다. 긴 장마의 코앞에서 여강을 굽어보는 파사성을 딛고 오르는 것으로 여주 여행을 시작한 이유입니다.
# 남한강을 굽어보는 최고의 전망대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자가 한반도의 패권을 쥐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 시절의 한강은 삼국의 치열한 격전지였다. 칼과 창의 시대. 전쟁은 성곽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방어의 요충지인 성의 입지 조건 중 하나가 ‘조망’이다. 일대의 지형과 적의 움직임을 쉽게 관측할 수 있는 장소 선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여주의 파사성은, 조망만 따진다면 남한강을 끼고 있는 성 가운데 단연 최고라 할 만하다.
관측하기 좋은 성은 그 자체로 훌륭한 전망대다. 여주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로, 망설임 없이 파사성을 권하는 이유다. 전쟁 때는 방어를 위한 관측이, 여행에서는 풍경감상의 전망이 된다. 전시를 대비한 관측의 요충지가 여행자를 위한 최고의 경관 감상 명소가 된 것이다. 전쟁이 없었고, 그래서 파사성을 쌓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의 파사성 자리에는 필시 전망대가 들어섰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삼국시대 지은 석축산성인 파사성에 오르면 발밑으로는 남한강 이포보가, 동쪽으로는 여주 시내가, 서쪽으로는 양평군 개군면 일대가 마치 거대한 두루마리 그림처럼 펼쳐진다. 낮춰잡아도 ‘해발 500m급 시야’인데, 파사성 정상부근의 실제 해발 고도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친다. 파사성이 있는 파사산의 최고 해발고도는 230.2m. ‘산’이라 이름하기도 민망한 정도의 높이다.
해발고도가 낮다는 건 접근이 쉽다는 뜻. 강변에서 산성 아래까지는 30분 남짓이면 오를 수 있다. 성으로 오를 수 있는 들머리는 두 곳. 절집 수호사를 통해서도 오를 수 있고, 이포보 전망대 쪽에서 보도 현수교를 건너와서 오를 수도 있다. 들머리에서 산성까지 거리는 800여m에 불과하다. 가파른 흙길이라 제법 숨이 차지만, 거리가 짧아 숨 고르기를 몇 번 하다 보면 금세 성에 당도한다.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사면을 오르는 석축 성곽 옆으로 난 오솔길로 파사성 정상까지 오른다.
산성 정상에 올라 옛사람들이 여주팔경의 여덟 번째 경치로 꼽은 ‘파사성에 여름철 소나기 스치는 모습’을 생각하다 이런 이미지를 떠올렸다. 여름 소나기 후드득 지나간 뒤에 풍기는 은은한 흙냄새, 청량한 초록의 산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 촉촉하게 젖은 앞산의 뻐꾸기 소리…. 상상만으로도 여름의 서정이 물씬 풍긴다. 파사성은 ‘여주팔경’의 하나면서, 4대강 사업 직후 선정한 이른바 ‘신(新)여주팔경’이기도 하다. 신여주팔경의 여덟 번째 풍경 ‘이포유락(梨浦遊樂)’은 파사성에서 내려다보는 이포습지 일대의 경관을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파사성은 여주에서 손꼽는 명소다.
# 길 너머의 의미로 진화하다… 여강길
여주에는 남한강 물길을 끼고 걷는 트레일 ‘여강길’이 있다. 강변의 서정적 경관과 서사적 스토리까지 두루 끼고 걷는 길이다. 대부분 행정이 만든 걷기 길이 만들 때만 요란하다가 이내 시들해지거나 관리가 안 돼 유명무실해지는 게 보통인데, 여강길은 다르다. 여강길은 시민들이 걸음으로 시작해 함께 걷고, 관리하고, 알리고, 다듬으면서 길 너머의 의미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여강길이 만들어진 과정을 보자. 여강길이 놓이기 10여 년 전부터 ‘여강 걷기’가 있었다. 처음 여강의 강변을 걷던 이들은 시민단체와 성직자들이었다. ‘남한강 정비’란 명분으로 벌이던 지방자치단체의 골재 채취 사업을 반대하면서 여강 일대를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멱살부터 붙잡는 ‘무조건 반대’보다 ‘강의 가치를 제대로 보자’는 게 걷기의 취지였다. 여강 곳곳이 아름다운 여울과 생명을 품은 습지로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시민단체가 걷던 여주의 강변길을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해준 건 4대강 사업을 추진하던 정부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부가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해준 여강길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수많은 이들이 찾아와 걸으면서 주목받고 이름을 얻었다는 것. 자연의 가치를 말하는 이들이 강변을 걸으면서 여강길은 ‘자연보존의 순례길’이 됐다.
공사가 끝난 지 10년이 넘은 4대강 사업은 아직도 시시비비의 대상이 돼서 때때로 재판정에 끌려나온다. 지금의 여강길에는 시민단체의 지분이 많긴 하지만,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며 생태 탐방로 조성을 적극 지원했던 당시 정부의 지분도 없지 않다. 모든 일엔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면이 있는 법. 4대강 사업은 생태 훼손 논란 속에서 진행됐지만, 치수 효과 외에도 초록으로 가득한 강변의 휴식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공도 있다. 어찌 됐든 11개 본 코스와 2개 보조 코스로 늘어난 여강길은, 시민들의 참여와 지자체의 지원으로 점점 더 좋은 길이 돼 가고 있다.
여강길 구간은 여주의 명소를 지난다. 여주의 명소가 대부분 여강을 끼고 있어서다. 여강을 조망하는 최고의 전망대인 파사성을 여강길이 모른 체하고 지나칠 리 없다. 파사성을 오르는 건 ‘여강길 8코스’다. 여강길 중에서 긴 코스는 20㎞가 넘는데, 파사성길 구간은 5.4㎞다. 산길이라는 걸 감안해도 본 코스 구간 중에서 가장 짧다. 게다가 성곽에 올라서면 그늘 없는 뙤약볕이지만, 그 전까지는 줄곧 숲 그늘을 걷는다. 이 코스를 여름에 권하는 이유다.
여주 강천섬의 양버들 군락. 하늘을 찌를 듯 자라는 양버들은, 옛 강변 마을이나 신작로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 강변에 늘어선 포플러의 추억
어느 순간, 다 사라져버린 풍경이 있다. 강변이나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키 큰 포플러나무가 늘어선 광경 말이다. 포플러는 중년 이상의 세대들에게 고향과 추억을 환기한다. 흙먼지 뽀얀 신작로 길에 도열한 포플러는 고향의 오래된 추억이자 기억으로 남아있다. 포플러나무에서 떠올리는 건 대개 이런 것들이다. 포플러나무 높은 가지 위에 깃들인 매미들의 순한 울음소리, 포플러나무 아래 천변에서 물놀이나 천렵을 하다 지쳐 빠져들었던 혼곤한 낮잠, 껑충하게 키 큰 포플러나무 이파리를 뒤집으며 지나가는 시원한 강바람….
몇 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동구밖에 서 있던 게 ‘포플러’가 아니라 ‘미류나무’가 아니냐는 것. 헷갈리는 게 또 있다. ‘미류나무’가 맞을까, ‘미루나무’가 맞을까. ‘양버들’이 정확한 이름이란 주장도 있다. 포플러와 미루나무 혹은 미류나무, 그리고 양버들의 관계는 어떻게 정리되는 걸까. 대체 뭐가 맞는 이름일까.
정리해보자. 포플러는 상위 개념이다. 특정 나무 이름이 아니라 ‘나무 종류’를 부르는 이름이다. 포플러라면 ‘포플러속(populus屬)’의 나무를 통칭한다. 포플러 종류 안에 미국이 고향인 ‘미루(류)나무’와 유럽에서 건너온 ‘양버들’이 있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태생이 다른 만큼 두 나무는 생태적으로는 완전히 다르다.
미루(류)나무와 양버들 중에서 우리나라에 압도적으로 많은 건 양버들이다. 싸리 빗자루를 거꾸로 꽂은 것처럼 생긴 나무를 보았다면, 십중팔구는 양버들이다. 미루(류)나무는 가지가 좀 더 옆으로 퍼져 부채꼴인데, 드문 편이다. 이번엔 ‘미류’와 ‘미루’ 중 어느 게 맞느냐는 질문의 답이다. 정답은 ‘미루’다. ‘미국(美)’‘버드나무(柳)’가 어원인 건 분명하지만, 미루나무란 이름이 널리 쓰인다는 이유로 표준어가 됐다.
# 강에 뜬 섬의 숲길을 걷다
다소 장황하게 포플러 얘기를 꺼낸 건, 여주에 포플러가 줄지어 서 있는 섬이 있어서다. 구 남한강교 상류의 ‘강천섬’이다. 섬이라면 바다를 먼저 떠올리는데, 여주의 섬은 남한강에 떠 있는 하천의 섬, 즉 ‘하중도(河中島)’다. 여주에는 강천섬 말고도 남한강에 떠 있는 섬이 여럿이다. 이포대교 아래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화려한 꽃밭이 펼쳐지는 경관농업단지 당남리 섬이 있고, 여주보 위쪽에는 백석리 섬이, 세종대교 아래에는 양섬이, 구 남한강교 아래는 삼합리 섬이 있다. 대부분 섬 아닌 강변 습지였다가 4대강 공사로 샛강을 뚫고 둑을 쌓으면서 섬이 된 곳들이다.
이 중에서 가장 빼어난 섬이 구 남한강교 상류의 강천섬이다. 본래 여름철 홍수기에는 섬이었다가, 갈수기가 되면 드러난 땅이 뭍과 이어지는 습지였는데, 4대강 사업 때 강바닥의 토사를 걷어내 습지에 물길을 내면서 두 개의 다리를 놓아 완전한 섬이 됐다.
가평 남이섬 면적의 1.5배에 달하는 강천섬은, 섬 전체가 거대한 초록이다. 강천섬 한가운데 잔디밭은 ‘넓다’는 표현으로는 한참 모자란다. ‘광활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거대하다. 잔디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갈 엄두가 좀처럼 나지 않을 정도다. 섬 중앙을 열십(十)자로 구획해 목련과 은행나무, 포플러 등을 심어놓았다.
강천섬에는 봄이면 목련꽃이, 가을이면 은행나무 단풍이 근사한데, 여름에 가장 압도적인 건 포플러의 종류인 양버들이다. 섬 둘레 강변을 따라 양버들이 두 손을 모아 하늘을 찌르듯 가지를 일제히 치켜 올리고 서 있는 모습이 근사하다. 바람에 반짝이는 초록 이파리의 색감은 원색의 유화물감으로 이겨 그려 넣은 듯하다. 줄지어 선 양버들 너머로 햇살을 받은 강물이 은빛으로 부서지는 모습이라니….
강천섬은 자연 친화적이다. 설치 구조물이나 시설을 최소화했고, 카페나 식당 같은 상업시설도 없다. 그저 강과 나무, 산과 하늘만으로 편안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규모는 물론이고 경관이나 운치가, 선진국의 이름난 자연공원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우리도 이런 녹지가 있다’고 우쭐댈 수 있을 정도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섬 안에 그늘이 많지 않다는 것. 여름철이라면 이른 아침이나 해 질 무렵에 찾는 것이 좋겠다.
여강길도 강천섬의 이런 정취에 반해 섬 안으로 들어왔다. 보조코스인 ‘여강길 3-1코스’다. 평지인 데다 전체 코스 길이가 5㎞에 불과해 1시간 30분 정도면 다 걸을 수 있다. 여강길 코스를 따라 걷지 않고 섬 안으로 들어가 목책을 따라 숲을 걷거나, 강변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여강의 물길을 끼고 있는 신륵사의 강변 정자 강월헌과 모전탑. 강월헌은 나옹선사를 기려 지은 것이다.
# 티 없이 사는 마음을 생각하다
여주를 대표하는 첫 번째 명소는 단연 신륵사다. 우리나라 사찰 대부분이 산중 사찰인데, 신륵사는 보기 드문 강변 사찰이다. 낮고 부드러운 봉미산 남쪽 기슭 아래 여강을 끼고 있다. 강을 끼고 있는 건 신륵사가 주요 운송수단이던 한강 수운의 무사 안녕을 빌기 위한 절집이었기 때문이다. 그 단서가 신륵사에 깃든 여러 전설 속에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신륵사 들머리쯤 강변에 조선시대 한강의 4대 나루 중의 하나였던 조포나루가 있었다. 여주의 조포나루와 이포나루, 그리고 서울의 마포나루와 광나루가 한강의 4대 나루였다. 4대 나루 중 2개가 여주에 있었을 만큼, 여주는 한강 물길의 중심이었다. 강원 정선 아우라지에서 나무를 베어 띄운 뗏목도, 한양으로 올라가는 세곡선도, 한양에서 내륙으로 가는 소금 배도 모두 조포나루를 지났다. 장마철 물이 불면 아우라지에서 띄운 뗏목이 사흘 만에 조포나루에 닿았단다.
신륵사는 종교의 힘으로 뱃사람들의 안전한 뱃길을 이끌어주는 도량이었다.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아홉 마리 용이나 사납게 날뛰는 말은 강물의 범람을 은유한다. 포효하는 용과 말을 제압해 절을 세웠다는 건, 곧 거친 물길을 종교의 힘으로 잠재우겠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강에 바짝 붙여 지어진 누각 강월헌도, 강변에다 세운 삼층석탑과 전탑도 뱃사람들의 무사 안녕을 위한 종교적 기원의 상징물이었다. 한강의 물길을 따라가던 뱃사람들은 멀리 보이는 신륵사의 전탑을 바라보며 두 손 모아 안전한 항해를 기원했으리라.
한강 물길의 안전을 빌면서 뱃사람들이 부처님의 가피를 기원했던 장소가 또 있다. 강 건너편 흥천면 계신리에 부처울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마을 끝 강변의 4.5m 높이 바위 벼랑에 키 2.2m의 마애불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계신리마애여래입상이다. 고려 초쯤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니, 마애불이 이 자리에서 강을 내려다본 게 자그마치 1000년 세월이다. 보호각을 세우고 지붕을 씌운 마애불 뒤에는, 이 마애불에 의지해 자그마한 절집 석불암이 들어서 있다.
여강의 빼어난 경관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절집 신륵사도, 적요한 강변의 계신리의 마애여래상도 항해의 무사를 기원하며 지어진 것. 종교가 기원하던 건 뱃길의 안전한 항해였지만, 문득 생각해보면 항해는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여강을 바라보며 신륵사에서 입적한 고려말의 고승 나옹선사의 선시(禪詩) 한편을 떠올리는 건 그래서다.
신륵사 대웅전 앞의 구룡루(九龍樓). 근래 보수해 색 바랜 단청 부분과 새로 덧댄 누마루가 확연히 구분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 탐욕도 벗어놓고 / 성냄도 벗어놓고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 하네 /…”
신륵사를 찾은 여행자들은 강변의 정자 강월헌에만 올랐다가 돌아가지만, 단언컨대 신륵사의 가장 호젓한 아름다움은 조사당 뒤편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난 계단 너머 나옹선사의 부도전에 있다. 신륵사는 늘 관광객들로 떠들썩하지만, 나옹선사 부도와 부도비, 석등이 놓여있는 이곳은 한낮에도 새소리만 가득하다.
■ 천서리 막국수
파사성 아래 막국수로 이름난 천서리 마을이 있다. 천서리 막국수 촌은 과거 꿩고기 끓인 육수에 동치미 국물을 섞어 말아낸 국수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은 동치미에다 무, 다시마를 넣은 사골 국물을 섞는 등 식당마다 제 나름의 비법을 더해 육수를 만들고 있다. 막국수 촌 주변으로 다양한 상호의 막국수 집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흥원막국수와 강계봉진막국수가 양대 맛집으로 꼽힌다. 비빔 막국수의 칼칼하고 개운한 맛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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