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와 습지의 수생식물이 강과 함께 어우러지는 경기 양평의 ‘세미원’의 경관. 물 건너로 보이는 곳이 두물머리다.
연꽃이 피기 전의 세미원은 관람객이 적어서 고즈넉한 강변의 서정적인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나무꾼 시인 기억공간… 경기 양평정초부 지겟길
어릴적 한시 곧잘 짓던 노비 출신
나무꾼 인생 지치고 고달팠지만
가난마저 완곡한 문장으로 남겨
생계용 땔감 구하며 시 읊던 곳
지겟길·마을길·숲길 코스 변신
화려한 경관조차없는 심심한 길
숙명처럼 여긴 초부의 일생 보여
잘 다듬어진 정원같은 곳 ‘양평’
저마다 취향 따라 즐기는 매력
옛 간이역의 정취 담은 ‘구둔역’
영화 ‘건축학개론’으로 큰 인기
레트로 느낌 가득해 사진명소로
가로등 하나 없는 ‘벗고개 터널’
고개 들면 별이 쏟아질 듯 반짝
양평=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경기 양평에 ‘정초부 지겟길’이 있습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재작년 말에 완공된 ‘걷기 길’입니다. 국토교통부가 주관한 개발제한구역 환경문화사업 공모에 선정돼 10억 원 중 9억 원을 국비로 지원받아 만들었답니다. 길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복원한 초당은 아동극 세트장을 방불케 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고, 나무로 시야가 막힌 자리에다 놓은 전망대는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습니다. 최소한의 고증이나 자문 없이 그저 관행처럼 만들어낸 걷기 길의 전형입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발걸음이 멈춰지는 건 여기가 ‘나무꾼 시인 정초부’를 기억하게 하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나마 길을 놓았기에, 비로소 실재(實在)의 공간에서 정초부의 이름 세 글자와 맞닥뜨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다음은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그 길을 다 걸었던 이유와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그의 시 얘기입니다.그 위에 여행자들이 발견한 양평의 낭만적인 명소 얘기도 한 스푼 얹었습니다.
‘정초부 지게길’에 세워놓은 표식. 맞춤법이 틀렸다.
세미원에 핀 수련과 노랑어리연꽃.
# 나무꾼 시인, 정초부를 찾아가는 길
정초부. 1714년에 태어나 1789년에 죽었다. ‘초부(樵夫)’는 이름이 아니다. ‘나무꾼’이란 뜻이다. 대대로 노비였던 그는, 죽을 때까지 나무를 해서 져다가 파는 나무꾼 일을 했다. 본디 이름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름이 ‘봉(鳳)’이라는 얘기도 있고, ‘이재(彛載)’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생전에 그는 한사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냥 정초부라 불리기를 원했던 건 신분제에 대한 비판도, 저항의 뜻도 아니었다. 노비도, 나무꾼도 그는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나무꾼의 숙명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오히려 자유로워졌다.
그는 시인이었다. 천민 출신이란 자신의 자리에 발을 딱 붙이고 살면서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가슴 뭉클한 시를 썼다. 그의 시는 서정적 묘사로 그려내는 회화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처연하다. 아름다운 장면을 묘사해도 그 뒤에 서려 있는 왠지 쓸쓸하고 슬픈 정서가 묻어난다. 궁핍하고 초라한 삶을 드러낼 때면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해서 오히려 통곡하는 것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더 푸르러(東湖春水碧於藍)/ 또렷하게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白鳥分明見兩三)/ 노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柔櫓一聲飛去盡)/ 노을 아래 산빛만이 강물 아래 가득하다(夕陽山色滿空潭)” -정초부의 시 ‘동호범주(東湖泛舟)’
시에 등장하는 ‘동호(東湖)’를 두고 지금의 옥수동 주변 동호대교 부근의 한강이라는 설이 있고, 여주 신륵사에서 바라본 여강(지금의 남한강)이란 얘기도 있다. 거기가 어디든 무슨 상관일까. 짤막한 칠언절구의 이 시는 회화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시각적 묘사뿐만 아니라 노 젓는 소리를 꺼내 청각적 이미지까지 끌어들였다. 시가 묘사로, 혹은 소리로 그려내고 있는 건 충만한 봄날의 정경이다.
정초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시는 지금까지도 ‘18세기 최고의 서정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를 나무꾼이 지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양반 사회에서 일대 화제가 됐고, 정초부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 조선 후기의 화가 김홍도는 강을 건너는 배를 그린 산수화의 그림제목(畵題)으로 이 시를 가져다 썼을 정도였다.
# 나무꾼을 평생 숙명이라 여겼던 시인
그는 시인이었지만, 평생 일관되게 자신을 시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시가 알려지면서 명성이 높아져 여러 시모임에 초청을 받기도 했지만 자발적으로 참여한 모임은 거의 없었다. 마지못해 가는 식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모임을 계기로 양반 사회로의 편입을 시도하거나 교분을 이용한 특권을 모색했을 법한데, 그런 행적이 전혀 없다. 그는 평생 나무꾼 일을 놓지 않았다. 대대로 노비였던 그는 땔나무 파는 일을 숙명처럼 여겼던 것이다. 그의 시가 유독 쓸쓸하고 처연해 보이는 이유다.
“글로 쌓은 명성 늙어서도 나무하니(翰墨聲名老採樵)/ 두 어깨에 가을빛 쓸쓸하네(兩肩秋色動蕭蕭)/ 산바람 장안길로 불러 들면(山風吹入長安路)/ 새벽녘에 동성 제2교에 이를 테지(曉到東城第二橋)” -정초부의 시 ‘땔나무를 팔다(販樵)’
그는 늙어 죽을 때까지 나무꾼 일을 했다. 그는 양평과 가평 일대에서 나무를 해다가 물길로 한양까지 운반해 동대문 일대에서 팔았다. 피곤하고 지친 삶이었으리라. 시 속에서는 이른 새벽에 나무를 팔기 위해 다리 위에 선 늙은 그가 걸어 나오는 듯하다. 그의 가난이 체념처럼 묻어나는 쓸쓸한 시도 있다.
“산새는 옛날부터 산사람 얼굴을 알고 있건마는(山禽舊識山人面)/ 관아의 호적에는 아예 들 늙은이 이름이 빠졌구나(郡藉今無野老名)/ 큰 창고에 쌓인 쌀을 한 톨도 나눠 갖기 어려워라(一粒難分太倉粟)/ 강가 다락에 홀로 올라 보니 저녁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네(江樓獨倚暮烟生)” -정초부의 시 ‘환곡을 구걸하며(乞조)’
그는 끼니를 잇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굶주림을 해결하려고 관아에 가서 쌀을 꾸려고 하는데 호적 대장에 이름이 없다. 쌀을 꾸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와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시를 썼다. 정자에 앉아 술잔을 앞에 놓고 음풍농월하던 선비들의 시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부류의 시다.
그의 시에서 곤궁함이 드러나는 구절이 여럿이다. ‘낙엽 위에 쌀을 꾸는 편지를 자주 쓴다(黃葉頻題乞米書)’는 구절은 좀 직설적인 편. ‘아침 세끼 곡기를 끊은 건 신선이 되고자 함은 아닐세(三朝피穀未成仙)’라고 쓴 문장도 있다. 끼니를 이을 곡식이 없어 굶으면서 ‘신선이 되기 위해 굶는 게 아니다’라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썼다. 날을 벼린 칼날처럼 문장을 휘두르지 않고, 현실의 가난과 고통마저 이처럼 완곡하다.
정초부 지겟길의 일부 구간과 겹치는 남한강 자전거길의 부용 터널. 중앙선 개량사업 이전에 중앙선 기차가 다니던 터널이다.
# 정초부를 묻고 오는 길에 시를 쓰다
그렇다면 노비였던 그는 어떻게 글을 깨치고 시를 쓰게 됐을까. 정초부는 지금의 양평 땅인 남한강을 끼고 있는 양근현의 명문가인 함양 여씨 가문의 노비였다. 함양 여씨 가문은 조선 숙종 때 영의정까지 지냈던 여성제의 집안으로, 조선 후기 양근 지역을 대표하는 양반가였다.
정초부는 함양 여씨 가문의 후손 여춘영의 소유였다. 여씨 집안에서는 한시를 곧잘 짓는 범상찮은 재주를 가진 정초부를 문중의 자제와 함께 교육시켰다. 특히 정초부보다 스무 살 아래였던 여춘영은 그를 단순한 하인으로 부리지 않고,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어 교감했다.
여춘영은 정초부를 노비에서 해방시켜 줬는가 하면, 정초부의 시를 앞장서 주위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나뭇짐을 하던 한낱 미천한 신분의 나무꾼 시인이 초부라는 이름으로 시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여춘영이 있어서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여춘영의 시문집 ‘헌적집’에는 정초부를 기리며 남긴 글이 있다. “…어릴 때는 스승, 어른이 되어서는 친구로 지내며 시에서는 오로지 내 초부뿐이었지”. 여춘영은 노비를 재산이나 가축쯤으로 여겼던 시대에 정초부를 스승과 친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정초부의 시적 완성은, 여춘영과의 이해와 교유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여춘영은 정초부가 일흔여섯의 나이로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기리는 열두 편의 시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절창은 여춘영이 정초부를 묻고서 돌아오는 길에 쓴 시다. 시에는 정초부의 불우한 일생과 죽음을 애달파하는 진심이 묻어난다.
“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黃로亦樵否)/ 낙엽은 빈 물가에 쏟아진다(霜葉雨空汀)/ 삼한 땅에 명문 가문 많으니(三韓多氏族)/ 다음 세상에서는 그런 집에 나시오(來世托寧馨)” -여춘영의 시 ‘초부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읊다’
정초부를 노비로 거느렸던 여춘영의 집이 중앙선 신원역 인근인 양평 강서면 신원1리 근처에 있었다. 지금은 중앙선과 국도 6호선 경강국도가 강으로 내려서는 길을 막아 버렸지만, 당시 신원1리 마을 아래에는 남한강의 주요한 나루 중 하나였던 월계나루가 있었다. 남한강을 타고 한양으로 가던 공물을 실은 뗏목이 마지막으로 정박하던 곳이다.
여씨 집안의 노비에서 풀려난 정초부는 여기 월계나루 근처 월계마을에 초막을 짓고 살아서 ‘월계초부’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여기 살면서 부용산 기슭에서 나무를 해서 동대문 밖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 정초부를 기리는 ‘정초부 지겟길’은 바로 이 일대의 산길과 마을길을 이어 만든 것이다.
정초부 지겟길의 초당. 정초부가 살았던 초당을 재현했다는데, 가까이 가보면 집이 아니라 나무판이다.
# 정초부 지겟길이 만든 나무꾼 시인의 공간
정초부는 여러 편의 시를 썼지만 제 이름으로 시집 한 편 남기지 않았다. 전하는 시들은 모두 다른 선비들이 자신의 문집에다 베껴 쓴 것이다. 신분차별의 시대에 노비 출신 나무꾼이 무엇을 남길 수 있었을까. 남기고 간 자취가 없으니 기릴 만한 공간도 없다. 설사 남겨놓은 게 있었다고 해도 온전하게 남아 있을 수 없었으리라. 팔당댐이 지어지면서 정초부가 살았다던 옛 마을 주변이 죄다 수몰이 됐으니까.
공간이 없으면 여행 목적지가 될 수 없으니 존재는 희미해지고 기억은 잊히는 법. 희미한 단서를 조합해서라도 ‘정초부 지겟길’을 놓는 게 더없이 반가웠던 이유다.
정초부 지겟길은 코스가 모두 3개다. 신원역에서 출발해 남한강 자전거 도로를 따라가다가 힐링치유의 숲으로 이어지는 왕복 5㎞의 ‘지겟길 코스’와 신원역에서 몽양 여운형 기념관과 정초부가 살았던 초당을 지나 강한정으로 가는 2.8㎞의 ‘마을길 코스’, 그리고 신원역에서 부용산 정상을 거쳐 초당을 연결하는 4.3㎞의 숲길 코스가 있다. 가장 짧은 마을길 코스가 1시간 30분쯤, 지겟길 코스는 2시간 남짓, 숲길 코스는 3시간 정도 걸린다.
이 길을 걷는 건 권하지 않는다. 길은 무성의하다. 오르막의 보상도 없고, 코스를 따라가 봤자 별다른 경관도 이야기도 없다. 작은 연못 옆의 습지에다 재현해놓은 정초부가 살았다는 초당은 한숨부터 나온다. 초당에 내부 공간이 아예 없다. 나무 패널을 세우고 그려 넣듯 만들었으니 문을 열면 벽이다. 더 어이가 없었던 건 ‘구름나루 전망대’다. 옛 월계나루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다 나무 덱 전망대를 세웠는데, 숲이 3면을 막은 전망대에서는 정작 강이 손톱만큼도 안 보인다. 전망이 전혀 없는 전망대라니…. 시인 묵객들이 들러 강변 풍경을 감상하며 노닐었다는 강한정도 저 아래 용담대교를 건너가는 차량의 소음으로 가득하다.
무성의하고 초라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버린 나무꾼 시인을 기릴 ‘공간’이라도 있다는 게 어딘가. 코스를 따라 걷기보다는 초당을 둘러보고, 말뚝처럼 세워놓은 시비 속 시를 읽으며 정초부를 추억하는 것으로도 거기 간 보람은 있다.
인근에 몽양 여운형을 기리는 몽양 기념관이 있다. 그곳은 꼭 들르자. 여운형은 함양 여씨 가문으로 정초부를 노비에서 해방시키고 그의 시를 널리 알린 여춘영의 일가다.
옛 기차역의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구둔역. 승강장과 철로까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누구에게나 좋은 여행지, 양평
양평은 수도권의 ‘잘 다듬어진 정원’과 같은 곳이다. 양평의 매력은 다양한 자원에 있다. 자원의 태반은 TV 드라마나 광고 등의 미디어가, 나머지 절반쯤은 여행자들이 발견해낸 곳이다. 자원의 발견이 가능한 건 전적으로 서울에서 가깝다는 조건 때문이다.
양평에는 내로라하는 관광지도 곳곳에 있고, 근사한 강변 풍경의 명소도 많다. 이름난 사찰도, 근사한 카페도, 널리 알려진 맛집도 있다. 너무 많다는 건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양평을 여행하자면 ‘고르는 일’은 필수다. ‘누구에게나 다 좋은’ 여행지는 드물다. 저마다의 취향에 따라 촘촘하게 코스를 짜서 움직이는 게 양평을 여행하는 좋은 방법이다.
여행 목적지로서 양평의 가장 큰 미덕은 누구나 각자에게 맞는 여행을 골라서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나이에 따라, 관심사에 따라 각자의 취향을 다 채워줄 수 있을 만큼 양평은 자원이 풍부하다. 젊은이 취향 일색의 다른 관광지와는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양평에는 새로 들어선 세련된 초대형 베이커리 커피숍도 곳곳에 있지만, 진한 향의 쌍화차를 내는 오래된 찻집도 있다. 막걸리와 미나리 전을 내는 노천 식당도 있고, 근사한 강변 풍경을 보며 스테이크를 썰 수 있는 고급 식당도 있다.
명소 중에서 먼저 구둔역 얘기부터. 구둔역은 중앙선의 폐역이다. 중앙선은 한반도 남부 내륙을 종단하는 철도다. 서울과 경주를 잇는다고 해서 ‘경경선(京慶線)’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구둔역이 세워진 1940년에는 중앙선이 아니라 경경선으로 불렸으니 구둔역의 시작은 ‘경경선 보통역’이었다. 도로망이 확대되고 차량 보급이 빠르게 이뤄지면서 구둔역은 1990년 간이역으로 전락했고, 이어 중앙선 전철화와 복선화로 선로가 1㎞ 북쪽으로 이설되고 일신역이 새로 지어지면서 문을 닫았다.
# 추억 보는 폐역, 그리고 별 보는 터널
폐역이 된 구둔역을 찾아낸 건 전적으로 여행자들이었다. 여행자들은 코스모스 피는 옛 간이역에 대한 정취와 향수를 담고 있는 구둔역을 양평의 명소로 발견해냈다. 결정적인 건 2012년 영화 ‘건축학개론’이었다. 이 영화는 구둔역을 첫사랑의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으로 해석했고, 구둔역은 일약 명소가 됐다.
구둔역은 옛 기차역을 추억하며 레트로 느낌의 공간을 즐기는 곳이다. 이곳을 찾는 이들의 목적은 십중팔구 ‘사진찍기’다. 이른바 ‘사진 명소’의 대부분은 프레임 안의 풍경만 그럴듯해서 직접 눈으로 보면 ‘가짜’라는 배반감이 드는 반면, 여기 구둔역은 역광장과 역사, 승강장 등에서 빛바랜 레트로 느낌이 아우라처럼 번진다. 실제로 대합실과 사무실, 숙직실 건물과 기차 승강장과 좌우 철로 각각 150m 전체가 2006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다만 무신경하게 잠가놓은 역사와 실패한 관광 자원화 사업의 어지러운 흔적, 그리고 역 구내에서 기괴하게 녹슬어가는 폐열차가 적잖이 눈에 거슬린다. 행정이 뭔가 해보려다 더 망쳐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양평에서 여행자들이 발견해낸 곳 중 또 한 곳이 양동면 금왕리의 벗고개 터널이다. 벗고개는 금왕리에서 가현리로 낮은 목을 넘어가는 고개인데, 정상 부근에 터널이 있다. 이 터널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별 보는 곳’으로 이름났다. 이곳이 별 보기에 좋은 건 빛 공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벗고개 터널 일대는 주변은 물론이고 터널 안에도 조명이 없다.
여기가 별 보기 명소가 된 이유는 또 있다. 벗고개 터널에서 찍을 수 있는 특별한 별 사진 때문이다. 어두운 터널 안쪽에서 터널 바깥을 향해 사진을 찍으면 타원형 터널 밖 너머 하늘에 떠 있는 쏟아질 것 같은 별을 담을 수 있다. 차량 통행이 워낙 뜸한 곳이긴 하지만, 야간에 별 사진을 찍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차로에서 별을 보는 건 금물. 금왕리 쪽 벗고개 터널 직전에 차를 세울 수 있는 비포장 공터가 있다.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이라면 이곳에서도 쏟아질 듯한 별을 볼 수 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정보 하나 더. 벗고개 터널과 함께 서울 근교에서 별 보러 가기 좋은 곳으로 꼽히는 곳이 경기 가평의 화악 터널 쌈지길과 경기 연천의 당포성이다.
■ 연꽃이 없어도 좋은 세미원
서울에서 정초부 지겟길이 있는 신원리로 가는 길에 ‘세미원(洗美苑)’이 있다,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는 옛 성현의 말을 이름으로 삼은 ‘경기도 제1호 지방 정원’이다. 두물머리를 마주 보고 있는 세미원의 대표식물은 연꽃. 세미원의 연지(蓮池)에 홍련과 백련이 가득 피어나는 한여름이 가장 인기 있다. 세미원 연지의 초록 연잎들 사이에서 수련과 노랑어리연꽃은 이미 개화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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