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가장 고귀하다
인간의 삶은 무척 복잡하고 미묘하다. 얼굴 모양처럼 성격도 체질도 마음도 제각각이어서 일정한 틀을 만들기 힘들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대 중국과는 다른 가치관으로 살기에 선악의 기준도, 인품을 평가하는 내용도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들이 갖는 공통점은 ‘사심’이 없다는 것이다. 백범 김구의 마지막 휘호는 ‘사무사(思無邪)’다. 김구는 이 글을 쓴 후 흉탄을 맞았다. 그래서 이 휘호에는 혈흔이 남아있다. 선비는 생각에 사심이 없는 사무사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사마천이 이야기하는 노중련은 전국시대 전란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선비의 본분을 지킨 인물의 전형이다. 제나라 사람인 노중련은 뛰어난 인물이었음에도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살았다. 그가 조나라에 있을 때의 일이다.
진나라의 백기가 조나라 군사 40만명을 몰살하고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다. 조나라는 진나라가 무서웠다. 진나라 군사들은 조나라 동쪽 한단을 포위하고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나라 효성왕은 주위 제후국들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안전부절못하고 있는데, 조나라를 도와주던 위나라의 객장군인 신원연이 평원군을 통하여 효성왕에게 말했다.
40만 몰살하고 포위
“진나라가 갑자기 조나라를 포위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이전에 진나라 소왕은 제나라 민왕과 힘을 겨루어 제(帝)라고 일컫다가 곧 제라는 칭호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제 제나라 민왕은 더욱 쇠약해졌고, 진나라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나라가 한단을 포위한 것은 틀림없이 한단을 욕심내서가 아니라 다시 제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신을 보내 진나라 소왕을 제로 높여 불러준다면, 진나라는 기뻐하며 군대를 거두어 돌아갈 것입니다.”
명분이 중요했던 시절이지만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이게 뭐 어려운 일인가 싶다. 시쳇말로 “형님”이라고 하면 봐주겠다는 이야기인데 평원군은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여기에는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국가 간 외교는 문장 하나로 참혹한 결과가 오기도 한다. 평원군 역시 당대 뛰어난 관리였지만 끙끙 앓고만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노중련은 평원군에게 그 제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물었다. 평원군은 “얼마 전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40만의 군사를 잃었고 지금은 한단까지 진나라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어 고민”이라고 했다.
노중련은 그의 태도를 보고 실망한다. 그리고 신원연을 만날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신원연은 노중련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의 평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나면 이길 자신이 없었다고나 할까. 마주앉은 자리에서 노중련은 한동안 침묵한다. 신원연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 진나라 군사에 의해 포위되어 있는 이 성을 왜 떠나지 않는가? 그리고 불안한 성 안의 사람들과는 달리 당신은 아무 것도 바라는 것 같지 않은 모습이다. 무슨 연유인가?”
그때 노중련은 춘추시대의 올곧은 선비인 포초를 예로 든다. 포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나무를 안고 굶어 죽었다는 인물이다. 노중련은 포초가 성질이 더러워서 이런 저런 꼴 안 보려고 죽었다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했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어 본론을 말한다.
“저 진나라는 예의를 내버리고 적의 머리를 많이 벤 것을 가장 큰 공적으로 숭상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군사들을 권모술수로 부리고, 백성들을 노예처럼 다룹니다. 그 같은 진나라 왕이 제멋대로 제가 되어 천하에 잘못된 정치를 편다면 나는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지 그의 백성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군을 뵌 것은 조나라를 돕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원연은 “선비로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있지만, 호랑이 늑대와 같은 진나라의 공격을 어떻게 막고, 어떻게 조나라를 도울 것인가”라고 묻는다. 노중련은 “위나라와 연나라가 조나라를 돕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신원연은 “내가 위나라 왕의 뜻을 가지고 지금 마주하고 있는데 어떻게 도울 수 있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아주 간단한 대답이 나온다.
선비와 장삿꾼의 차이
“진나라를 제라고 할 경우의 해악을 알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신원연은 그게 궁금했다. 진나라의 왕을 제라고 한다고 뭐 그리 대단한 해악이 올 것인가? 전쟁을 피하고 당장의 위기를 넘기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노중련은 전쟁도 없고, 진나라를 제라고 칭하지 않아도 되는 방책을 일러준다. 대화는 여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신원연은 “하인들이 주인을 따르는 이유는 힘과 지혜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주인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형세는 위나라가 진나라의 하인과 같은 존재”라고 솔직히 말한다. 그러자 노중련은 “그렇다면 내가 진나라 왕에게 위나라 왕을 삶아 소금에 절이도록 해볼까요”라고 했다.
신원연은 발끈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면서 화를 낸다. 노중련은 국가 간 예의는 그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지만 진나라와 위나라는 둘 다 비슷한 국력을 가지고 있기에 몇 번 싸움에 패했다고 해서 바로 무릎을 꺾을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위나라는 진나라가 한번 싸워 이기는 것을 보고 진나라에 복종하여 진나라 왕을 제로 섬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삼진의 대신들을 추나라와 노나라의 하인이나 첩만도 못하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만약 진나라의 욕망이 제라고 일컫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면, 제후국들의 대신들을 마음대로 갈아 치울 것입니다. 그들을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들의 벼슬을 빼앗아 어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진나라 왕의 딸과 천한 계집들을 제후의 부인이나 첩으로 만들어 위나라 궁궐에 살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위나라 왕은 어떻게 편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장군 또한 무엇으로 지금과 같은 남다른 사랑과 신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제서야 신원연은 노중련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마침내 위나라에서 구원병을 보내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다. 평원군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그 자리에서 노중련에게 천금을 내놓으면서 포상을 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노중련은 다른 이들과 구분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천하에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덜어주고 재앙을 없애주며 다툼을 풀어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이것은 장사꾼의 행위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영예와 오욕의 갈림길
사기에 의하면 노중련은 이후 평원군을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건강한 사회에선 자신의 본분에 맞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구성원으로 움직인다. 노중련은 선비의 모습을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덜어주고 재앙을 없애주며 다툼을 풀어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장사꾼보다 보상을 더 바라고 그것을 두고 출세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근원이다.
사람들은 살다보면 참소, 즉 모함이나 누명을 쓰기도 한다. 연나라의 한 장군은 제나라의 요성을 함락시키고도 참소를 당했다. 장군은 처형될 것이 두려워 연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요성에 남았다. 제나라는 성을 찾으려고 공격했지만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는 1년 이상 버티고 있었다. 노중련은 그 장군에게 화살에 편지를 매달아 쏘아 올린다.
편지는 군주와 선비의 몸가짐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혜로운 자는 유리한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용감한 자는 죽음을 겁내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다. 충성스러운 신하는 자기 한 몸을 앞세워 군주를 뒤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어 “장군은 이 세 가지를 다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느냐 죽느냐, 영예냐 오욕이냐, 부귀냐 천함이냐의 갈림길에 있는 것”이라고 설득한다.
편지는 이어 연나라 제나라 진나라의 상황을 조목조목 설명한 뒤 “병력을 보존하여 연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지도한다. “연나라로 돌아간다면 환대를 받을 것이며, 정히 연나라로 돌아가지 않겠다면 차라리 제나라에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라. 이것이 이름을 알리고 실리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
“제가 듣건대 작은 예절에 얽매인 사람은 영화로운 이름을 이룰 수 없고, 작은 치욕을 마다하는 사람은 큰 공을 세울 수 없다고 합니다. 옛날 관중이 제나라 환공을 활로 쏘아 그의 허리띠에 있는 쇠고리를 맞힌 것은 임금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반역행위였고, 또 공자 규를 저버리고 그를 위해서 죽지 않은 것은 비겁한 행동이었으며, 몸이 포승줄로 묶여 수갑과 차꼬를 차게 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군주는 이런 세 가지 행동을 저지른 사람을 신하로 쓰지 않을 것이며, 마을 사람들도 그런 사람과는 사귀려들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관중이 옥에 갇힌 채 세상에 나오지 못하였거나 죽을 때까지 제나라로 돌아올 수 없었다면, 그는 끝내 부끄러운 행동을 하였다는 욕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노비조차 그와 비교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을 텐데,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야 어떻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관중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천하를 바로잡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했고, 공자 규를 위해서 죽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제나라가 제후들 사이에서 위엄을 떨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잠시의 굴욕은 참아라
또한 노나라 장군이었던 조자가 제나라와 세 번을 싸워 세 번 다 패하여 영토를 크게 잃었지만 그 굴욕을 참고 제나라 환공에게 칼을 겨누어 전쟁도 하지 않고 영토를 되찾은 일화를 이야기한다. 만약 조자가 전쟁에 패한 굴욕을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면 싸움에서 지고 포로가 된 장군이라는 오명을 썼을 것이다. 선비는 잠시의 굴욕을 참아 더 큰 뜻을 이루는 자다. 한신이 시정잡배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간 이야기 역시 같은 맥락이다.
명분이 중요하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름을 남기고 나라에 도움이 되며 실리를 얻는 것이다. 역사상 뛰어난 인물들은 순간의 굴욕, 치욕, 개망신을 극복하고 자신의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다.
이러한 판단은 공부를 하고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선비를 매우 혼란스럽게 한다. 노중련은 장군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경을 잘 알고 있었다. 장군을 위로하면서 요성에서 떠날 것을 부탁한다.
노중련은 장군에게 항복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와 저런 경우를 제시하고 선택하라고 한다. 저나 나나 다 선수인데 뭘 강요할 수 있겠는가? 뻔히 결과를 알면서도 우리는 번번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노중련과 같은 인물이 빛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보편적인 심리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장군은 비범한 인물은 되지 못했다. 노중련의 편지를 읽고 사흘간 흐느껴 울면서 망설였다. 무슨 말인지 다 알긴 알겠는데 그래도 치욕을 당할 것이 두려워 결국 항복하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노중련은 성 밖에서 장군의 마음을 다 읽고 있었다. 칼 한 자루 쓰지 않고 제나라는 요성을 다시 찾게 되었다. 사람들의 걱정거리를 제거하고, 군사들의 목숨을 보존했으며, 원하는 바를 얻었다. 이런 사람에게 어찌 높은 상을 주지 않으려고 하겠는가. 자신의 신하로 쓰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노중련은 모두 거절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귀로우면서 남에게 얽매어 사느니 차라리 빈천할망정 세상을 가볍게 내 마음대로 살리라.”
그는 뛰어난 지혜가 있어 일국의 재상 노릇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무거운 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짐을 지고 힘겹게 사는 인생을 누가 원하겠는가? 우리는 욕심 때문에 그것을 원하고 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선비는 이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노중련은 가르치고 있다. 욕심을 버려야 공적인 일을 할 수 있다. 공직에 근무한다는 것은 노중련의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 모든 부정부패는 보상을 바라는 심리에서 비롯된다. 보상이 이루어져도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원망을 품게 되고 그러한 마음이 부정부패를 정당화한다. “받을 것을 받는데 뭔 소리가 많으냐”고 한다.
가끔 도로에서 러시아워 시간에 길을 막아놓고 대형 공사가 벌어진다. ‘공무원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행정편의주의, 제 한 몸만 편하게 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일일 것이다.
몇 마리 되지 않은 닭이 마당에서 돌아다니는 풍경과 수많은 닭이 공장에서 사육되는 풍경이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같은 닭이 아니다. 인구밀도가 높아질수록 우리는 공장 속 닭과 같은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무서운 일이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공직자에게는 노중련의 정신이 필요하다.
남쪽바다와 같은 정신
노중련을 읽으면 조선시대의 남명 조식이 떠오른다. 어느 날 경상감사가 부임하면서 남명을 찾아와 인사를 올린다. 남명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감사는 조심스러웠다. 남명은 주역에 나오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라는 문장을 패검에 새겨두었다. 감사는 패검을 보고 말했다. “무겁지 않으십니까?” 남명은 대답했다. “뭐가 무거울 것이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그대의 허리에 찬 돈주머니가 무거울 것 같은데….”
앞으로 포상받을 생각하지 말고 정직하게 일하라는 남명의 은유다. 감사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재주가 없이 무거운 책임을 맡아 잘 해낼지 걱정입니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우리나라 성리학의 대붕인 남명 조식. 남명은 장자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남쪽바다를 말한다.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대풍이 일 때 (그것을 타고) 남쪽바다(南冥)로 날아가려 한다. 남쪽 바다란 곧 천지를 말한다.’
조선시대의 선비인 정여창의 호는 일두다. 여기서 ‘두’는 좀, 이와 같은 벌레를 말한다. 이처럼 선비들은 호를 질 때 되도록 의미가 작고 겸손하게 지었는데 남명이라는 호는 그 뜻이 크다. 그러나 사실 이 호는 매우 작은 호다. 남명은 세상 밖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자는 공자의 말씀도 유가의 경전도 아니다. 입신출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남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선비로서 대붕이 되어 세속적인 타협을 하지 않았다. 선비정신으로 넓은 바다를 이룬 것이다.
조식은 어린 시절부터 벼슬살이하는 아버지를 따라 전국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젊어서는 주로 서울에 머물렀다. 여러 선비와 우정을 나눴고 학문의 바다에서 물고기처럼 노닐었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당쟁의 시대였다. 그의 나이 열아홉에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는 광경은 비정한 현실정치에 대한 충격파로 다가온다.
남에게 얽매인 부귀영화
그는 벼슬을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김해로 내려온다. 서른 살, 이미 완숙한 정신의 단계로 들어선 때다. 조식은 어느 날 밤 바닷가에 서서 남해를 바라보고, 장자의 ‘남명(南冥)’을 떠올렸을 것이다. 참새나 콩새가 선비랍시고 쥐꼬리만한 업적을 내밀며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소인배 사회에서 벗어나 대붕이 되어 남명으로 날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남명은 노중련의 “나는 부귀로우면서 남에게 얽매어 사느니 차라리 빈천할망정 세상을 가볍게 내 마음대로 살리라”라는 마음과 이어진다.
남명은 단성현감 벼슬을 사양하면서 왕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전하가 나라를 잘못 다스린 지 이미 오래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습니다.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고 백성들의 마음도 임금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자전은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다만 선왕의 고아이시니….”
남명은 추상같은 목소리로 권력을 비판했다. 이미 마음은 남쪽 바다로 날아갔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주위에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런 거침없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서 그는 당대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동갑내기 이황이 성리학 관념철학으로 깊이 들어갈 때 그는 원시유학의 실천철학을 내세웠다. 경상도에서 퇴계파와 더불어 남명파가 형성됐다.
가을 저녁,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남명은 ‘우음(偶吟)’이라는 시를 썼다.
사람이 선비를 사랑하는 것은(人之愛正士)
범의 가죽을 좋아하는 마음이네(好虎皮相似)
생전에는 죽이고 싶어 하지만(生前欲殺之)
사후에는 칭찬을 하는 것이네(死後方稱美)
이 시는 노중련의 정신과 다를 것이 없다. 세상은 선비의 굳고 바른 행동을 헐뜯었지만 그 사람이 죽은 뒤에는 지조가 있는 사람으로 칭송한다. 선비는 현실의 오염을 정화해주는 세정제다.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해준다.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나라에서는 사는 일이 고역일 수밖에 없다.
“험담은 무쇠도 녹입니다”
백범 김구는 해방정국에서 타계할 때까지 변함없는 ‘선비정신’으로 민족의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백범이 빛나는 이유는 정권 욕심에 눈이 어두운 어떤 정치인들과는 달리 사심이 없었다는 점에 있다. 김구는 임시정부 시절에도 정부의 문지기가 되는 심경으로 임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조국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다 숨졌다. 김구 서거 이후 우리 역사는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행로를 밟게 된다. 선비정신이 사라진 남과 북은 아수라장이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봉창 의사는 김구를 만났을 때 이런 심경을 토로했다.
“그저께 선생께서 다 해진 옷 속에서 많은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갈 때 눈물이 났습니다. 일전에 민단 사무실에 가보니 직원들이 밥을 굶는 듯해서 제가 돈을 내어 국수를 사다가 같이 먹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날 밤에 함께 자면서 하시던 말씀은 일종의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며 생각도 못한 돈 뭉치를 주시다니 프랑스 조계에서 한 발짝도 발을 내디딜 수 없는 선생은 내가 이 돈을 가져가서 내 마음대로 써도 돈을 찾을 수 없을 텐데, 과연 영웅의 도량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로부터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김구는 걸인의 몰골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그는 ‘나의 소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 소원이 뭐냐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김구는 자신의 영광이나 보상 대신 민족의 고통과 걱정거리를 덜어주는 삶을 살았다.
다음은 김구가 즐겨 읽었다는 시 구절이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 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디딘 발자국은
언젠가 뒷사람의 길이 되니라
제나라 사람인 추양은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죽을 처지가 되자 양나라 효왕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글에서 추양은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모함하는 일은 너무나 쉽다.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여자는 예쁘든 못생기든 궁중으로 들어가면 질투를 받게 마련이고, 선비는 어질든 어리석든 조정으로 들어가면 시샘을 받게 마련”이라며 정치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적었다.
“노나라는 계손의 말을 듣고 공자를 내쫓았고, 송나라는 자한의 계책만 믿고 묵적을 가두었습니다. 공자와 묵적의 말재주로도 참소와 아첨하는 사람들의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노나라와 송나라는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라도 녹일 수 있고, 헐뜯는 말이 쌓이고 쌓이면 뼈라도 녹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이 듣건대 의관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들어온 사람은 이익을 위해서 의로움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명예를 갈고 닦는 사람은 욕심 때문에 행실을 그르치지 않습니다.”
절망의 언덕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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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말하고자 한 선비정신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반드시 요구되는 덕목이다. 이러한 인물들이 있어 사람들은 절망의 언덕을 넘어온 것이다.
이것은 등대의 불빛이기도 하다. 인간관계는 나와 너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나를 알아야겠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는 ‘나는 누구인가’다. 사기열전은 수많은 고대의 인물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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