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고려 품에 안긴 귀화인들

醉月 2009. 12. 17. 09:13

고려 품에 안긴 귀화인들_정수일 교수

이방인 품어 속넓힌 겨레문화

10년 전 화산(花山) 이씨 종친회 대표들은 선조의 고향 베트남을 찾았다. 선조들이 고려 고종 13년(1226년) 망명한 지 780여 년만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이 모두 나와 환대하고, 정부는 베트남인과 똑같은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면서 왕손 예우를 깍듯이 했다. 이 나라의 왕조가 남긴 유일한 왕손이 금의환향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해마다 리 왕조 건국기념식(음력 3월 15일)에는 종친회 대표들이 초청되고, 3년 전에는 양국 예술가들 합작으로 ‘이용상 오페라’를 하노이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이웃과의 우의를 소중히 여기는 우리로서도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화산이씨 시조는 베트남 왕족

원래 화산 이씨 시조인 이용상(李龍祥)은 베트남 첫 독립국가인 리 왕조(1009~1226)의 9대 왕 혜종의 숙부이자 왕자 신분의 군 총수였다. 그는 한 척신의 권모술수로 왕이 폐출되고 왕족이 몰살 당하는 난국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뒤 배에 몸을 싣고 정처없이 떠났다. 어쩌면 최초의 베트남 ‘보트피플’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계절풍을 타고 바람부는 대로 흘러흘러 와닿은 곳이 바로 한반도 서해안 옹진반도의 화산(지금은 북한땅)이다. 비행기로도 5시간이나 걸리는 3,600여 km의 거리다. 때마침 몽골군이 이곳을 유린하자, 이 베트남 왕자는 섬사람들과 힘을 모아 침략자를 물리쳤고, 이 사실이 고려 조정에 알려지자 고종은 행위를 가상히 여겨 이용상에게 화산 일대를 식읍으로 내리고 본관을 화산으로 하는 이씨 성을 하사했다. 그래서 이용상은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지금도 화산 인근에는 이용상의 행적을 전해주는 유적이 남아있다. 몽골군 침입을 막고자 쌓았다는 안남토성과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찾아가 고국쪽을 향해 통곡했다는 망국단, 그리고 리씨 왕조의 시조 이름을 딴 남평리와 당시 베트남의 나라 이름을 본받은 교지리 마을이 그 유적들이다.

▲ 베트남 왕족출신인 화산 이씨 시조 이용상의 사적을 새긴 ‘수항문 기적비각’

성을 하사받고 귀화한 이용상 일가 중에는 걸출한 인물들도 여럿 배출되었다. 장남은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받고

차남은 안동부사를 지냈으며, 6세손 맹운은 공민왕 때 호조전서를 역임하다 국운이 기울자 고향에 은거하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충절을 지켰다. 지금 이용상 후예들이 남한에는 약 260가구에 1400명 가량 살고 있으며,

북한에는 더 많다고 한다. 화산 이씨 외에 베트남 귀화인으로는 이양혼을 시조로 하는 강원도 정선 이씨가 있다.

이 세가 중에는 고려 명종 때(1170~1197) 14년간 정권을 잡고 철권을 휘두른 6대손 이의민이 있다.

 

국내 275개 성씨 절반이 귀화성

이용상을 시조로 한 화산 이씨의 정착과 귀화, 후손들의 행적 등은 고려 귀화인들의 전형적인 한 사례다.

일반적으로 귀화란 외국인이 국내에 들어와 영주하면서 내국인으로 동화되는 것을 말한다.

귀화는 문명교류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동시에 그 양상이기도 하다. 일종의 인적 교류인 귀화를 통해

이질적인 문명이 전파되고 수용되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역사에도 정도나 형태 차이는 있어도,

귀화가 배제된 일은 거의 없으며, 그 양상은 나라의 개방성이나 국력과 크게 연관된다. 족보가 발달한

우리 나라의 경우, 275개(1985년 통계) 성씨가 있는데, 그중 귀화성이 무려 136개를 헤아린다. 시대별로 보면,

신라 때 40여 개,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각 60여 개와 30여 개인데, 그 가운데 절대다수인 약 130개가 중국계

귀화성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의 귀화성을 살펴보면, 중국계로 충주 매씨와 남양 제갈씨 같은 희성이 많으며,

몽골계로는 연안 인씨, 여진계로는 청해 이씨, 위구르계로는 경주 설씨, 회회계로는 덕수 장씨, 일본계로는

우륵 김씨(후에 김해 김씨로 바꿈)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투화(投化)’나 ’내투(來投)‘라는 말로 표현된 귀화가

가장 많이 성행한 셈인데, 이는 고려가 튼튼한 국력과 문화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귀화인에게 포용과 우대의 선정을

널리 베풀었기 때문일 것이다.

 

외교·외국어·문물전래 등 활약

▲ 화산이씨족보

고려 초기 약 100년 동안 출세를 위해 찾아온 중국인들과 유민, 포로 신분으로

온 발해인과 여진인, 거란인을 포함해 귀화인은 약 17만명에 달했다. 원제국 간섭

기를 전후한 후기에는 주로 파견이나 결혼, 포로처럼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들어

와 살다 귀화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중국인의 귀화기록은 3회밖에 없다. 일본인

귀화는 전기 3회, 후기 19회의 사례가 있는데, 후기의 경우는 모두 포로로 잡혀

온 왜구들이다. 특이한 것은 원제국의 후광 속에 색목인이나 회회인들이 귀화해

중세 서역인의 비조가 된 사실이다.

고려의 품에 안긴 이들 귀화인들은 고려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고려사회를 함께

일구어나갔다. 그들에 의해 새 문물이 들어와 고려사회의 면모는 좀더 다채로워

졌다. 원래가 외국인들이었으므로 외국사정에 밝아 외교사절에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외교문서 작성이나 외국어 교육에도 종사했다. 고종 때 귀화한 동여진인

주한에 의해 여진문자를 가르치는 이른바 ‘소자지학(小字之學)’이 생겨났고,

귀화한 거란포로 수만명 중에는 뛰어난 의관제작자와 토목기술자들이 1할이나

되어, 그들이 제작된 의상과 기물은 전래의 질박함을 잃을 정도로 화려하고 정교

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까지도 말총으로 의관을 만드는 기술은 유목민 출신의

이들 거란 귀화인들이 남긴 유산이다. 의약과 악무 발전에 기여한 귀화인들도

다수 있었다.

 

특히 건국 초기에는 문신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조정에서는 중국계 지식인들을

적극 유치해 적재적소에 기용했다. 그 대표적 일례가 중국 후주의 쌍기(雙冀)다.

그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지방과 중앙의 사법관청에서 봉직하면서 후주의 개혁에도 참여한 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광종은 그의 건의에

따라 사상 처음 과거제도를 도입했으며, 그를 연거푸 세 번이나 과거제도를 총관하는 지공거(知貢擧)에 임명했다. 물론, 고려 전기에

유수의 귀화인들을 관직에 등용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요에 의한 선발이었고, 사대주의적인 남용은 아니었다. 광종은 중국계

귀화인을 지나치게 우대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 자신은 ‘불러보고 뜻에 맞는’ 자만을 골라서 기용했던 것이다. 사실상 쌍기 같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5품 이상의 품계나 고위관직에 기용한 예는 없다. 대부분 봉공(奉公)과 엄선을 거쳐 승진했으며,

명사를 기록한 <고려사> 열전에도 귀화인은 10명이 올라있는 정도다.

 

귀화인 건의 따라 과거제 도입

▲ 덕수장씨종파도 <공숙공약사>

덕수장씨종친회 고려시대 귀화가 어느 시대보다 성행한 것은 고려가 적극적인 귀화인

수용책을 편 결과다. 고려는 ‘내자불거(來者不拒)’, 즉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했는데, 궁극적 목적은 인재 등 인력 확보에 있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북진정책과 북방개척에 필요한 국방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발해유민과 여진계 귀화인

들을 받아들이고, 외교나 문반에 필요한 지식인들을 유치했다. 특히 후기에는 대몽

전쟁으로 인구부족(<송사> ‘고려전’에는 당시 인구를 230만명으로 추산)이 심화하자,

외국에 잡혀갔거나 외국으로 흘러간 유민들을 데려오는 이른바 ‘추쇄(推刷)’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유민들과 함께 귀화인에 대해서는 반드시 호적에 편입시키고,

성을 하사했다. 성을 하사할 때는 관직을 제수하고 작위를 주며 식읍을 함께 내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고려는 귀화인들을 안착시키기 위한 일련의 사회적 시책도 강구했다. 우선

일괄적으로 주택과 전답, 미곡과 의복, 기물과 가축 등을 나누어주었다. 고려 말엽에

와서는 토지제도 문란으로 토지가 부족해지자 투화전(投化田)이란 명목으로 전답

사여를 제한했다. 투화전은 생전에 경작하되 죽으면 국가에 반납하며, 관직을 맡거나

다른 전답을 소유할 경우는 가질 수 없게 규제했다. 그밖에 일반 귀화인들은 안전을

고려해 대체로 국경지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시켰으며, 범법자인 경우도

‘남계수로(南界水路)’, 즉 남방의 도서지대에 유배시키도록 하는 등 귀화인에 대해서는

배려와 함께 주도면밀한 관리조처도 취했다.

 

 

주체적 구심력 바탕 적극 수용책

▲ 덕수장씨의 재실인 풍덕사. 평택 팽성 분토골 소재, 2002년 10월 20일 건립, 덕수장씨종친회


흔히들 우리 겨레는 ‘한핏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씨 가운에 절반 가까이가 외래 귀화성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 혈통을 따질 때, 우리들 속에서 순혈과 혼혈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귀화에 의한 혼혈이 만만찮은

비중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110년 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1895년)의 저자인 벽안의 새비지-랜도어의 눈에 조선은 다민족의

혼혈사회로 비쳤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굳이 ‘한핏줄’이라고 말하는 것은 역대로 포용성과 융합성이 남달리 강한 한(韓)민족의

 ‘용광로’ 속에서 귀화인들을 ‘용해’시켜 적어도 생활문화나 가치관에서는 동질성이 확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나라들이 우리와

경우가 비슷하지만, 다민족화를 방치한 나머지 전근대적 민족갈등을 빚고 있는 사정을 감안할 때, 우리는 겨레의 역사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주체적 구심력이 강할 때만이 인간을 포함한 외래의 문물을 순기능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귀중한 역사적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