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돌아온 산, 남산

醉月 2009. 12. 16. 08:47

반독재를 삼킨 거대한 우물

서울시의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 따라 옛 안기부 건물 모두 허물게 돼

 
남산 안기부 터를 처음 찾은 날, 하늘은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번개가 희번덕거리기 무섭게 천둥이 귀를 찢었다. 뇌우는 머리 위로 바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언제 덮칠지 몰랐다. 어느 순간 내가 갈가리 찢길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공포감은 인간을 극단적인 무력감으로 내몬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30년 전 수많은 이들이 그 공포감을 현실로 느끼며 이 공간으로 내몰렸을 것이다. 전직 국가정보원 고위 당국자와 전직 직원, 그리고 안기부 고문 피해자의 증언과 함께 남산 일대를 둘러보았다(증언하고 동행했던 이들의 신분은 밝히지 않기로 한다).

» 남산 안기부 본관이었던 서울유스호스텔 옆 터널 안쪽에서 바라본 안기부 ‘제5별관’. 이곳에서 35년 동안 수많은 이들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
 

6국, 민주화운동 대학생의 두려움 그 자체

서울 남산 소파길의 동쪽 끝. 대한적십자사 건물을 등지고 남산을 바라본다. 너른 주차장 앞에 서울특별시 균형발전본부(면적 2449㎡)라고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균형발전본부 건물에는 청계천복원추진본부도 함께 있다. 조화와 균형, 환경과 녹색을 이야기하는 지금의 명칭에서 두려움을 느낄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30여 년 전, 그곳은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에겐 두려움 그 자체였다. 이곳의 명칭은 ‘6국’. 학원 사찰과 수사를 담당했다. 2~3층에서 통상적인 조사를 받은 학생들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지하 1층과 2층에 끌려 들어가 고문을 당했다. 1975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도예종씨 등 8명이 이 건물 지하 보일러실에서 자행된 고문 끝에 조작된 혐의로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형 집행을 당한다.

대한적십자사도 한때 안기부의 공간이었다. 행정 업무 공간으로 주로 쓰였지만, 건너편 ㅅ호텔에 투숙한 사찰 대상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길을 건너 TBS교통방송(면적 1962.2㎡)과 서울시 소방방재본부를 지난다. 이 두 건물 역시 안기부 청사였다. 수사 기능과 행정 기능을 맡았단다. 소방방재본부 건물에는 유치장도 있었다고 한다.

» 지금은 서울시 균형발전본부로 바뀐 안기부 ‘6국’. 이곳은 대학가의 동향을 관찰하는 학원 사찰의 거점이었다.


이제 예장동 안쪽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나온다. 서울유스호스텔 방문을 환영한다는 수소 뿔 모양의 입간판을 지나는 길에 ‘준공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1996년 10월부터 두 달간 계속된 ‘남산 청사 이적지’ 공원 조성 공사의 준공을 알리는 기념비다. 왜 굳이 이전한 기관의 이름을 빼야 했을까. 아니 ‘남산’이라고 하면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를 충분히 연상할 수 있다는 뜻이었을까. 독재의 시간을 모르는 후손은 그냥 잊으라는 뜻이었을까.

서울유스호스텔을 향하는 길이 몸을 틀기 전,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은행나무 뒤로 벤치 몇 개 달랑 놓인 잔디밭이 보인다. 2007년까지 그곳은 시멘트로 바닥을 바른 농구장이었다. 99년 전 통감 데라우치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몰래 숨어 한일합방조약을 맺은 곳이라는 것을 기억할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기관의 이름을 뺀 준공 기념비와 표지석조차 없는 잔디밭은 ‘망각’을 유도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동산 허리를 돌아서면 눈앞에 서울유스호스텔이 들어온다. 길게 치솟은 통신용 철탑과 권위적으로 사각진 형태가 예사 건물이 아니란 느낌을 주지만, 누구도 그 과거를 알려주지 않는다. 1층 로비에 들어서면 ‘마음 공부 잘하여서 새 세상의 주인 되자’는 액자가 뒤통수를 친다. 독재의 시절, 취조와 고문의 목적은 대상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이었다. 새 마음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건물의 옛 용도를 아는 이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 남산 안기부 터로 올라가는 고갯길에 놓인 준공 표지판. ‘남산 청사 이적지’라고만 돼 있을 뿐, 어떤 청사가 있었는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유스호스텔 지하의 굳게 잠긴 문

서울시 중구 예장동 4-5번지. 이 건물이 여기에 들어선 것은 지난 1972년의 일이었다. 중앙정보부(안기부) 남산 본관. 여기는 1층부터 6층까지 대부분 행정 기능을 하는 사무실로 쓰였다. 탐지와 분류, 분석이 업무의 주요한 부분인 정보의 특성상 행정 사무실은 곳곳에 필요했다고 한다. 6층에는 정보부장실(안기부장실)이 있었다.

지난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여기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의 진실을 밝혀냈다. 지난 1973년 본관 앞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최종길 교수는 추락사한 것이 아니라,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옥상으로 가는 외부 계단에서 최 교수를 내던졌다는 증언을 받아낸 것이다.

본관 내부는 유스호스텔로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형태를 다 잃어버렸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공간은 있는 법. 유스호스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그대로 보존됐다. 두 단계의 계단을 내려가면 굳게 잠긴 문이 나온다. 이 문 뒤에는 지하 통로가 있다. 지하 통로는 유스호스텔 앞의 서울종합방재센터로 이어진다. 길쭉한 원통형 철탑을 모자처럼 쓴 방재센터 건물은 1층짜리 구조물로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면 지하 3층까지 이어진다. 그 옛날 안기부로 끌려온 이들은 본관 지하 통로를 통해 방재센터 건물 지하로 끌려갔다. 건물의 당시 명칭은 ‘제6별관’.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들이 ‘안기부 지하 벙커’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던 곳이다. 그만큼 수많은 조작과 고문이 이뤄진 현장이다. 당시 ‘제6별관’에는 아예 지상 구조물이 없었다. 건물의 존재 자체를 알 수 없도록. 지하 통로를 따라 지하 1층으로 끌려간 이들은 다시 지하 2층으로 옮겨졌다. 지하 2층에는 복도 양쪽으로 화장실이 딸린 4~5평 크기의 취조실들이 10여 개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중앙에는 대형 취조실이 있었고, 취조실을 밖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특수한 창문들이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지하 3층 한쪽에는 유치장도 있었다.

» 지난 1995년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이전한 직후에 촬영된 남산 일대 사진. 지금은 사라진 제1별관 모습이 보인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주요 인권침해·정치개입

제6별관보다 악명 높은 곳이 ‘제5별관’이었다. 방재센터 옆길을 따라가면 갑자기 터널이 나타난다. 100m 남짓한 터널의 끝으로 4층짜리 건물이 보인다. 지금은 서울시 남산 별관으로 쓰이고 있는 곳이다. 이 제5별관은 정보부 직원들도 수사용이었다고 인정하는 곳이다. 깜깜한 밤, 정보부 직원들에게 연행된 이들은 눈을 가린 채로 끌려오기 마련이었다. 이들이 처음 눈을 뜨는 곳은 남산 3호 터널 앞 대형 철제문. 육중한 철제문이 끔찍스런 소리를 내며 열리면 차는 곧바로 깜깜한 터널을 향한다. 깊은 밤, 위치를 알 수 없는 이들은 거대한 지하 공간으로 끌려가는 듯한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제5별관 앞 터널의 용도였다.

 

쿠데타 이틀 만에 중앙정보부 설치 착수

남산 안기부가 가장 세력을 넓혔을 때에는 2만4800여 평의 부지에 총 41개동이나 되는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KCIA라고 불렸던 중앙정보부를 만든 인물은 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였다. 박정희 소장과 함께 5·16 쿠데타를 일으킨 그는 쿠데타 이틀 만인 1961년 5월18일 육사 동기생(8기)인 육본전략정보과의 이영근·서정근 중령을 불렀다. “우리에게도 정보부가 필요하다, 이를 만들기 위한 법을 만들어달라.” 이 중령과 서 중령은 이화여고 앞 정동호텔에서 숙식을 같이하며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 일본의 내각조사실 같은 기관을 연구하며 한국형 정보부의 뼈대를 만들었다. 법은 6월20일 공표된다. 이 법을 토대로 만들어진 중앙정보부 초기 요원 수는 500명 정도였다. 독재를 연장하려면 감시와 처벌이 필요했다. 항거가 불가능할 만큼 겁줄 수 있는. 정보부는 날로 커져갔다. 요원이 가장 급격히 늘었던 때는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직후였다. 공안수사의 법적 완결성을 좀더 높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정보부는 법대 졸업생을 중심으로 300여 명을 한꺼번에 늘린 적도 있었다. 이렇게 늘어난 조직은 더 많은 건물과 사무실을 삼켰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3천여 명 정도로 불어났다. 안기부 요원은 전두환 정권과 김영삼 정권까지 이르면서 갑절로 규모가 늘어난다. 안기부는 남산의 공개성과 협소함 때문에 1995년 내곡동으로 청사를 옮긴다. 안기부 건물들의 소유권은 이때 모두 서울시로 넘어갔다.

» 옛 안기부 본관이었던 서울유스호스텔 로비 입구에 걸린 액자. 이 건물의 과거와 엇물려 생각하면 묘한 모순감이 든다.

» 옛 중앙정보부장의 관저를 서울시가 매입해 개조한 ‘문학의 집, 서울’

서울시는 안기부 이전 당시 남아 있던 건물 27동 중 23동을 해체했다. 대표적인 것이 1996년 8월 제1별관 폭파 해체였다. 본관 바로 옆에 붙어 두 번째 규모를 자랑했던 제1별관은 지금 시멘트 바닥만 텅 빈 공터로 남아 있다. 1961년 만들어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2011년 50주년을 맞는다.

서울시는 올해 3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내놨다. 서울시 균형발전본부 청사를 허무는 것을 시작으로, 2015년까지 서울시 남산 별관과 교통방송 건물 등을 모두 허문다는 계획이다. 유스호스텔로 쓰이는 본관 건물도 임대 기간이 지나면 철거해 녹지로 바꾸기로 했다.

 

2003년에도 인권기념공원 거부돼

지난 2003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와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등 18개 인권단체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안기부 본관을 유스호스텔이 아닌 인권기념공원으로 만들자고 요청했다. 이명박 당시 시장은 이를 거부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제 아예 그 공간 전체를 없애버리려고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정치공작과 인권침해를 오랜 세월 연구해온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현장인 아우슈비츠를 보존한 독일을 비롯해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불행한 역사를 기념관으로 만든 사례는 해외에도 많다”며 “남산의 옛 안기부 청사를 평화와 인권의 기념관으로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사라진 건물이 국치의 기억을 지운다

   ‘서울 중구 예장동 2-1번지’ 인근 합병 조인을 한 경술국치 현장 ‘통감관저’,
남산 중턱의 잔디밭으로 사라져…

 

 

» 청일전쟁 직후(1895년) 남산의
일본 공사관(○표시) 주변 모습(맨 위). 목조건물 2층 건물로 지어진 일본 공사관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설치된 통감의 숙소인 통감관저가 된다. 수령이 400년 된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를 사이에 둔 통감관저(○표시)에서 1910년 8월22일 한일합방조약이 맺어진다(가운데). 1910년 초, 한일합방조약을 이완용과 맺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성으로 부임하는 광경(맨 아래). 사진 맨 위부터 <사진으로 보는 서울 1> <서울행정사> <사진기록 일제의 침략>
“고바야카와(小早川), 가토(加藤), 고니시(小西)가 살아 있었다면 과연 오늘 저녁 저 달을 어떻게 볼 것인가.”

1910년 8월29일, 무너진 대한제국의 수도 경성. 남산 자락의 통감관저에서 거나하게 술에 취한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거만스런 표정으로 시를 읊었다. 이날 아침, 이른바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한일합병조약)이 정식으로 공포됐다. 꿈에 그리던 조선 합방이 이뤄진 날이었다. 데라우치는 400여 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이 실패했던 ‘조선 정벌’을 자신이 이뤄냈다는 자만감에 취해 있었다.

 

통감관저→총독관저→시정기념관

일주일 전인 8월22일의 일이다. 남산 기슭 ‘왜성대’ 중턱에 있던 통감관저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나타났다. 데라우치가 한일합방 전권위원으로 임명한 이완용이었다. 순종의 국새를 찍은 위임장을 받아 달려오는 길이었다. 역사학자 이이화씨는 <한국사 이야기>에서 이 순간에 대해 이렇게 썼다. “8월22일 (이완용은) 위임장은 뜻대로 받아냈다. 순종이 (위임장에) 옥새를 찍지 않으려 하자, 황후 윤씨가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황후 윤씨의 외숙부) 윤덕영이 달려가서 빼앗아 찍었다고 전한다.”

8월4일부터 이때까지 데라우치와 이완용 사이를 오가며 공작을 꾸민 자는 이완용의 비서였던 이인직이다. <혈의 누> <귀의 성> <은세계> 등의 신소설을 발표한 작가, 바로 그 이인직이었다.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이날 오후 통감관저 2층의 데라우치 침실에서 한일합병조약에 서명했다.

이 장소에 대해 <매일신보> 1940년 11월22일치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2층에는 17점의 사군자폭(四君子幅)이 걸려 있다. 이것을 보아가던 기자는 우뚝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방 안에 나섰다. 이 방은 합병조인실(合倂調印室). 이 방이 바로 30년 전 일한합병의 도장을 찍던 그 한순간을 가졌던 방인 것이다. 오늘의 조선을 낳아놓던 역사적 산실(産室)이요, 이 강산 백의인에게 새길을 밝혀준 봉화대(烽火臺)도 되었던 것이다. 여섯 칸 남짓한 방 안에 거울을 좌우로 이토공(伊藤公)으로부터 미나미 총독에 이르기까지 8대 통감 총독들의 흉상이 놓여 있고 중앙의 테블- 그 위에는 벼룻집과 ‘잉크 스탠드’가 있고 좌우로 네 개의 의자와 한 개의 소파가 놓여 있다. ‘자, 이것으로서 완전히 우리는 한 형제요 한 임군을 섬기며 나아갈 길을 연 것이요’ 하며 ‘허허허…’ 하고 소리를 높여 웃는 옛 어른들의 환영이 눈앞에 움직이는 것 같다.”

» 남산 왜성대에 설치된 통감부 청사의 측면(왼쪽)과 전면(오른쪽)의 모습. 사진 왼쪽부터 <사진으로 보는 서울 1> <남아 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

한일합방 이후 한국통감은 조선총독으로 격상된다(1910년 8월29일까지 한반도에 존재하는 국가의 정식 명칭은 ‘대한제국’이었고 ‘한국’은 이를 줄인 말이었다. 일본 내각은 1910년 7월 내부 칙령을 통해 대한제국을 대신할 말로 ‘조선’을 택했다). 총독은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는 최고권력자였다. 관저도 총독관저. 왜성대 총독관저는 1939년까지 쓰이다가, 제7대 총독인 미나미 지로가 지금의 청와대 터로 관저를 옮기면서 ‘시정기념관’으로 탈바꿈한다. <매일신보>는 이에 대해 “메이지 18년 이곳에 새로이 터를 닦고 일본공사관으로서 등장한 이래 작년 9월 미나미 총독이 경무대 신관저로 이사하기까지 실로 50여 년의 묵은 역사를 가지고 있던 이 집을 시정 30주년의 빛나는 해와 함께 영원히 기념하고자 여기에 그 이름을 ‘시정기념관’으로 하고 역대 통감, 총독의 보배로운 유물을 진열하여 일반에게 공개”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1960년, 건물의 마지막 운명

통감부는 위치부터가 조선 정복을 목적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해인 1906년 2월에 설치된 통감부의 위치는 조선 왕조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를 정남에서 마주 보는 자리였다. 당시 대한제국의 본궁이던 경운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남산 아랫자락이었다. 통감부가 여기에 위치를 잡으니, 일본인들도 여기로 모였다. 궁성이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건물을 짓지 못하게 했던 조선의 오랜 관례를 묵살하고 일본인들은 남산 기슭에 집과 청사의 터를 잡고 대한제국의 왕궁을 내려다보았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1900년부터 1910년까지 일제에 의해 한성에 신축되거나 증축된 청사만 139개동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이 선호했던 건축양식은 자신들의 건축 방식에 르네상스 양식을 합친 ‘왜양절충형’이었다. 통감부 역시 이런 양식에 따라 지어졌다.

제국주의 일본이 세세만년 기념하고 싶었던 ‘합병조인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을 까맣게 잊고 있다. 경술국치의 터는 지금 남산 중턱의 잔디밭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근·현대문화재 전문가 이순우(47)씨는 3년간의 추적과 고증 끝에 경술국치 현장을 찾아냈다. 그가 확인한 경술국치의 터 주소는 ‘서울 중구 예장동 2-1번지 인근의 잔디밭’. 이씨의 설명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는 시정기념관을 민속박물관(1946년)으로 바꾼다. 6·25 전쟁 때 피난 갔던 국립박물관이 경복궁 석조전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1년6개월 남짓 임시 국립박물관(1953년)으로 쓰이던 때도 있었다. 이후는 연합참모본부 건물(1954년)로 쓰였다.”

» 통감부(○표시)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총독부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 식민지화의 거점이 된다(왼쪽). 같은 시기 일제는 경성시내를 꼼꼼히 기록한 지도를 만들어 식민지 경영의 틀을 닦는다(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사진으로 보는 서울 2> <정도 600년 서울지도>

<동아일보> 1960년 9월20일치에 이 건물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정부는 시내 중구 예장동에 있는 ‘연합참모본부 건물’을 개수 내지 증축해서 국무총리 관저로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동 건물은 신관과 구관으로 되어 있는바 한일합병조약 체결 당시 합병조인을 하였던 구관은 건물이 낡았기 때문에 허물어 버리고 신관만을 개수 또는 증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통감관저는 이 직후에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이곳에 중앙정보부를 설치하면서 이 일대는 일반인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변했다. 사라진 건물은 기억까지 지웠다. 그래도 복구해내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다.

이순우씨는 지난 2006년 이 잔디밭에서 통감관저 안에 서 있던 하야시 곤스케(1860~1939) 동상 받침대 판석 3점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상’(男爵林權助君像)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야시는 1899년 주한공사로 부임해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인물이다. 1936년에는 그의 업적과 희수(77살)를 기념해 관저 건물 앞뜰에 동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잔디밭 옆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도 이곳이 관저 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터의 은행나무는 서울시 보호수로

1926년 간행된 <경성의 광화>라는 책에 있는 이 은행나무에 대한 설명이다. “녹천정 부근에는 전설의 명목인 ‘대공손수’(大公孫樹·은행나무)가 있다. 수령 500년이 넘고, 높이는 (통감) 관저의 옥상에 닿아 있고, 가지는 남산 기슭을 덮고 있다.” 녹천정은 통감관저 바로 옆에 있던 조선시대 정자다. 녹천정 옆에 있다던 그 은행나무는 현재 서울시 보호수(고유번호: 서2-7, 중구 예장동 2-1)로 남아 있다.

이순우씨는 “지난 2006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이곳이 경술국치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우기 위한 활동을 벌였지만, 서울시와 중구청의 비협조로 중단되고 말았다”며 “지금이라도 서울시와 정부가 가진 문헌과 학계의 고증을 거쳐 경술국치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 한일합방조약이 맺어진 통감관저의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받침대 판석(왼쪽). 문화재전문가 이순우씨는 남산 옛 안기부 본청 아래 잔디밭 공원 인근(오른쪽)에서 이 판석을 찾아내 이 자리가 옛 통감관저 터임을 확인했다. 사진 왼쪽부터 이순우·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통감 관저는 이렇게 흔적조차 희미한 반면, 통감부 터에는 표지석이라도 남아있다. 한일합방 이후 통감부는 총독부로 바뀌고, 남산 총독부는 16년간 조선을 지배했다. 1926년 광화문의 경복궁 앞 옛 중앙청 터로 옮겨가기 전까지. 남산 총독부 터에는 지금 남산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들어서 있다. 남산 숭의여전 옆이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앞에 보면 통감부와 총독부가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1926년 총독부가 옮겨간 뒤 총독부 건물은 ‘은사과학박물관’이 된다. 이 땅에 들어선 최초의 과학박물관이었다. 해방 뒤 국립과학박물관으로, 1948년에는 국립과학관으로 거듭났으나 한국전쟁 도중 불타고 말았다. 정부는 1957년 이 자리에 한국방송공사(KBS) 건물을 지었다. 한국방송이 여의도로 옮긴 뒤에는 국토통일원 청사로 쓰이다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런 역사를 기억하고 찾는 이들은 드물다. 통감관저는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내년 2010년이 경술국치 100주년임에도.

 

“진보·보수 넘어 복원에 나서야”

이런 상황을 타개하자는 이들이 있다. 작가 서해성씨의 말이다. “경술국치의 통한이 어린 통감관저는 한일합병이 이뤄지던 지난 1910년 시기에는 2층 목조건물이었다. 한일 전문가들의 고증과 각계의 의지만 모이면 충분히 복원할 수 있다고 본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넘어 100년을 기억할 공간을 만드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


 

불과 100년, 역사가 통째로 사라진다

일제와 독재를 기억하는 남산의 역사 현장, 개발계획으로 허물지 말고 평화공원 조성을

»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옮긴 직후인 1995년의 남산 안기부 본부(왼쪽). 경술국치 직전에 찍힌 통감관저(동그라미 안). 이곳이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 김종수 기자· <서울행정사>
지금 그곳은 벤치 몇 개 달랑 놓인 잔디밭이다. 한때 그곳은 시멘트 바닥의 농구장이었다. 한 세기 전 그곳은 조선을 다스린 일본 통감의 숙소인 통감관저였다. 1910년 8월22일, 거기에서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는 조약이 맺어졌다. 통감관저 바로 옆에는 400년의 세월을 버틴 은행나무 거목이 버티고 서 있있다. 그때 일본인들은 “1592년 조선 정벌에 나섰던 임진왜란 당시의 가토 기요마사가 이 나무에 말을 매어두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몽진한 한양에 진을 친 왜군들은 남산 꼭대기에 성을 쌓았다. 꼭대기의 성은 사라져도 ‘왜성대’(倭城臺)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1890년부터 공공연히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그 왜성대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궁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공원을 짓고 그들의 신을 모시는 신사를 지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한반도를 삼킨 일본인들은 아예 그 동네 이름을 ‘왜성대정’(倭城臺町)이라고 불렀다.

 


 

1972년, 왜성대의 한쪽에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울 중구 예장동 4-5번지. 6층으로 들어선 그 건물의 이름은 중앙정보부 남산 본부였다. 지금 그곳은 서울유스호스텔로, 수많은 내외국 젊은이들을 맞고 있다. 서울시의 정책으로 독재의 공간은 젊음과 문화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유스호스텔 옆길을 따라오면 만날 수 있는 ‘남산창작센터’는 안기부 요원들의 실내체육관이었다. 남산창작센터에서는 매일 수많은 젊은이들이 노래하고 춤춘다. 남산창작센터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는 ‘문학의 집, 서울’이 있다. 널따란 정원이 딸린 2층 단독주택을 개조한 이곳은 원래 중앙정보부장 관저였다. 그 앞에 있던 정보부장 경호원들의 숙소도 2005년 ‘산림문학관’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과거 이곳이 어디였는지를 알려주는 흔적은 없다.

1년 뒤인 2010년 8월, 대한민국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다. 우리는 어떻게 100년 전 나라를 빼앗긴 순간을 기억해야 할까. 그 2년 뒤인 2011년 6월에는 중앙정보부 설치 50년을 맞는다. 이 역사는 또 어떻게 남겨야 할까. 서울시는 올해 3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밝혔다. 2015년까지 남산에 있는 옛 중앙정보부(안기부) 건물 등을 모두 허물고 녹지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과연 그게 옳은 길일까. 역사는 그대로인데, 역사를 증언할 건축물들은 계속 사라진다.


다시 남산을 본다. 조선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북쪽의 북악산을 현무로 삼고, 서쪽의 인왕산을 우백호, 동쪽의 낙산을 좌청룡으로 삼았다. 남쪽의 목멱산, 지금의 남산은 주작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두 날개를 활짝 펼친 붉은 봉황의 모습으로 주작을 그렸다.

왜성대와 안기부를 머리와 어깨에 얹고 있는 주작은 힘겹다. 남산의 주작이 다시 날기 위해서는 건물을 없앨 것이 아니라 바로잡아야 한다. 통감관저와 옛 안기부 청사를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식민과 독재에 묶인 남산의 사슬을 제대로 푸는 길이다. 그래서 남산은 평화를 상징하는 공원이 돼야 한다.

 

제국주의·군사독재 흔적 오롯한 ‘역사 창고’

남산 역사신탁운동을 시작하며…
역사 보존한다며 한일 강제병합·중앙정보부 공포정치 현장 철거는 있을 수 없는 일

<한겨레21>은 ‘남산을 평화공원으로’(774호 표지이야기)‘남산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776호 특집)를 통해 일본 통감관저 터 복원 및 옛 중앙정보부 건물 보존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와 관련된 시민사회의 움직임을 소개한 바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돌아온 산, 남산’이라는 제목의 기획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는 남산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국내외 역사신탁 사례, 전문가 기고, 심포지엄 등을 포괄할 예정이다. 연재의 총론격으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보내온 첫 글을 싣는다. 편집자.

» 남산 일대 중앙정보부·안기부 건물들과 통감관저 터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높이 262m. 아주 낮은 산이지만 남산은 참 특별한 산이다. 우리의 험난한 역사를 온몸에 새기고 있는 곳이 바로 남산이다. 지금 팔각정이 있는 자리 부근에는 국사당이 있었다. 나라에서 봄·가을로 두 번 이곳에서 제사를 모셨는데,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민중이 자신들의 복과 바람을 비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 국사당은 지금 남산에 없다. 일제가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며 자기네 신을 굽어보는 높은 곳에 국사당을 둘 수 없다는 이유로 인왕산으로 옮겨버렸기 때문이다.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상처 입은 산, 남산이 입을 열면 우리 민족의 수난사가 나온다. 옛날 서울의 사대부집에는 ‘수여남산’(壽如南山)이라 쓴 현판을 사랑이나 대청에 많이 걸었다고 한다. 이런 현판에 담은 마음이 어찌 개인의 장수만을 빈 것이겠는가. 나라의 명운이 위태로워지던 한말에 우리 모두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하기를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산을 빼앗겼다. 나라를 빼앗겼는데, 남산인들 온전했을까? 아니, 남산의 통감관저에서 데라우치와 이완용이 1910년 8월22일 강제 병합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남산은 곧 경술국치의 현장이었다. 그날 밤 데라우치는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고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이 세상에 있다면 이 밤의 저 달을 어떤 눈으로 볼까나”라고 읊었다. 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하에서 깨워 펄럭이는 일장기를 보여주라는 시로 화답했다. 남산부터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민족의 명산이 일본의 침략 교두보로

일본은 조선을 남산부터 먹어들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일본식 성을 쌓았다고 해서 ‘왜성대’라 이름 붙인 곳에 일본공사관을 짓고, 이곳(현재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일대)을 다시 통감부로 삼고, 1925년 경복궁 앞에 새 건물을 짓고 옮겨갈 때까지 남산의 북쪽 예장동 자락은 일제 통치의 중심부였다. 남산의 서남쪽에는 일본군사령부가 들어섰고, 필동 쪽으로는 헌병대가 자리를 잡았다. 후암동부터 남산 자락을 빙 돌아 필동·장충동까지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됐다. 일제는 장충단 위쪽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박문사’라는 절을 세웠다.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이었다. 장충단이 어떤 곳인가? 을미사변 당시 온몸으로 일본 낭인들을 막다 희생된 홍계훈 등 조선의 충신들을 기리던 곳이다. 일제는 그 장충단을 내려다보는 곳에 이토의 보리사를 세웠고, 얼마 뒤에는 상해사변 당시 침략의 선봉에 섰던 육탄 3용사의 동상을 세워버렸다. 조선신궁, 경성신사, 러일전쟁 당시의 사령관으로 군신으로 떠받들어진 노기의 신사, 그리고 지금의 해방촌에 있는 호국신사 등 우리 마음의 고향 남산에는 일본 귀신들이 우글거리게 되었다.

해방 뒤 남산은 잠시 우리 품으로 돌아오는 듯했으나, 권력자들은 남산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이승만은 남산에 자기 동상을 세웠지만, 겨우 5년 만에 4월 혁명이 일어나 동상은 땅에 나뒹굴었다. 일본은 조선인들이 훼손할까 두려워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을 세울 엄두를 내지는 못했지만, 통감관저 터에 러일전쟁 무렵 장장 8년간 조선공사를 지내며 강제 병합의 길을 닦은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1936년 그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세웠다. 그 동상도 해방이 되면서 허물어졌으니 남산은 살아 있는 자의 동상을 용납하지 않았다.

1961년 5·16 군사반란 직후, 반란 세력은 김종필을 책임자로 해서 중앙정보부를 창설했다. 김종필은 자신은 최고위원이 되기 위해 ‘혁명’을 한 것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장이 되기 위해 ‘혁명’을 했다고 공언할 만큼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애착을 가졌다. “혁명 과업 수행의 장애를 제거”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중앙정보부는 처음부터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다. 중앙정보부가 들어서면서 남산은 다시금 민중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아니, 남산은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운동권이 아닌 일반 시민 중에도 지금까지 국정원이 ‘나를 감시하고 도청하고 미행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피해망상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한국형 정신병의 대표적인 특징인 것을 보면 중앙정보부·안기부가 우리 현대사에 드리운 어둠의 깊이를 짐작해볼 수 있다.

중앙정보부가 군대 퀸셋 막사 몇 개에서 처음 시작한 자리는 바로 경술국치 현장인 통감관저 바로 뒤의 언덕이었다. 1972년 중앙정보부 남산본부(현재 서울유스호스텔 건물)가 들어선 곳은 그 옆이다. 땅에도 운명이 있는 것인가? 20세기 전반기 우리 역사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긴 경술국치의 현장이 20세기 후반 우리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 고문과 공작과 사찰의 본산인 중앙정보부 자리와 맞닿아 있다. 통감부의 고문정치(顧問政治)는 중앙정보부·안기부의 고문정치(拷問政治)로 이어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해방 뒤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군사독재를 낳았다고 말하지만, 제국주의 침략이 군사독재와 이렇게 맞닿아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서슬 푸른 중앙정보부·안기부가 버티고 있었기에 우리는 남산에 다가갈 수 없었고, 경술국치의 현장은 그렇게 내버려져 있었다. 제국주의 침략의 죄업 위에 군사독재의 죄업이 겹겹이 쌓이는 동안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고, 남산을 빼앗겼고, 민주주의를 빼앗겼고, 기억을 빼앗겼다. 우리의 찬란한 금속활자 문화를 꽃피웠던 주자소(鑄字所)가 있던 흔적은 중앙정보부 면회소로 전락한 주자파출소의 이름에만 처량하게 남아 있었다.

» ‘역사를 여는 사람들 ㄱ.’ 8월28일 오전 서울 남산 옛 안기부장 공관 자리에서 ‘남산 역사신탁’ 사업 발의식과 기자회견이 열렸다.왼쪽부터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서해성 소설가, 정상덕 원불교 교무, 법안 스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천정배 민주당 의원, 이해동 목사, 정진우 목사, 안상운 변호사.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경술국치 현장 뒤 언덕서 중앙정보부 창설

1995년 안기부가 서울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우리는 다시 남산에 말을 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남산은 공포의 남산이 아니다. 돌아온 남산을 어떻게 활용할까를 놓고 여러 가지 좋은 안이 나왔지만, 서울시는 이곳을 유스호스텔로 만들어버렸다. 그곳에 몸을 누이면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신음이 들려오지 않을까?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린다면 모를까, 과연 저기서 잠이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시는 2009년 3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남산의 생태 및 산자락 복원, 역사 복원, 경관 개선 등을 통해 시민에게 남산을 일상 속 공간으로 되돌려준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취지야 나무랄 바 없이 좋다. 그런데 예장동 자락에 대한 내용은 대단히 문제가 많다. 역사를 복원한다는 것이 계획의 목표에 들어가 있건만, 현재 남산에 남은 역사 유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안기부 건물들을 모두 헐어버린다는 것이다. 현재 서울시 균형발전본부가 들어 있는 옛 중앙정보부 6국 건물은 당장 오는 9월부터 철거한다고 한다.

‘역사를 여는 사람들 ㄱ’(이하 ‘ㄱ’)은 이런 시급한 상황 때문에 발기됐다(‘ㄱ’은 처음·으뜸이란 뜻이기도 하고 ‘기억’을 의미하기도 한다). 누구보다도 지선 스님, 문정현 신부, 법안 스님, 정진우 목사, 정상덕 교무 등 종교인들이 죄는 용서할 수 있지만, 죄의 흔적을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중앙정보부·안기부 건물의 보존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해동 목사나 강만길 교수처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분도 있고,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처럼 안기부에 근무했던 분도 있고, 박원순·김형태 변호사처럼 인권변호사로 변론을 위해 안기부를 드나들었던 분도 있다.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차이를 떠나 한번 훼손되면 돌이킬 길 없는 역사 유적을 지키자는 데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급하게 모인 것이다.

‘ㄱ’은 우선 서울시와 협의해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이 역사 복원이라는 취지에 맞게 진행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남산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인 안기부 건물을 헐어버리고서 역사를 복원한다고 표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서울시도 열린 자세를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중앙정보부·안기부 건물은 여러 채가 남아 있는데 ‘ㄱ’은 그중 중앙정보부 △남산 본관(현 서울유스호스텔) △지하취조실(현 서울유스호스텔 앞 서울종합방재센터) △수사국과 터널(현 서울시청 별관) △6국(현 서울시균형발전본부) 등 4개소는 반드시 보존해야 하며, 이 건물들의 영구 보존을 위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줄 것을 관계 당국에 요청할 것이다.

또한 ‘ㄱ’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2010년 8월29일을 목표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인 통감관저를 복원하는 사업을 진행할 것이다. 이 사업을 위해 ‘ㄱ’은 이 공간이 개발·용도 변경 등으로 훼손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 기금을 모아 매입(보존·복원)한 뒤 역사적으로 공공화해 후대로 전승하는 역사신탁 사업을 전개하려고 한다. 이 작업은 우리가 과거를 사서 미래를 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철거하고 표석만 세운다면?

부끄러운 역사일수록 함부로 지워서는 안 된다.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의 졸속 철거는 두고두고 가슴 아픈 일이다. 경복궁을 가로막고 지은 일제의 뜻을 알기에 건물을 헐 수도 있다. 그러나 헐 때 헐더라도 좀더 의미 있게 헐 수는 없었을까? 각 분야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계획을 세워 하나하나 그 성과를 집약하면서 헐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서울에서 열리게 될 남북 정상회담의 최고 이벤트로서 남과 북의 정상이 같이 일제 잔재의 상징인 총독부 건물을 해체하는 첫 망치질을 같이 할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비용이 들더라도 총독부 건물을 이전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박물관으로 쓰이던 건물을 유물 이전 계획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덮어놓고 헐어버린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역사 교육에서 현장성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힘을 지닌다. 만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건물들을 모두 철거해버리고 표석이나 하나 세워두고 나무를 심었다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역사의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 히로시마의 원폭 돔을 철거하고 기념관을 새로 멋있게 짓는다고 한들 앙상하게 남은 철골 구조물이 전하는 진한 감동을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는가? 대지의 기억은 한번 훼손돼버리면 돌이킬 수 없다. 대지의 공공성에는 생동하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어야만 한다.

필자는 2004년부터 만 3년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위원으로 일하면서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역사를 살필 기회를 가졌다. 위원회의 기본 사명은 중앙정보부·안기부가 행한 인권침해와 권력남용을 조사하는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이 기관들이 현대사에서 수행한 또 다른 역할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개발독재 시기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는 ‘정부 안의 정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 현대사의 큰 특징은 식민지와 분단을 겪은 한국이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나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했다는 점이다. 이곳 남산은 민주화의 주체 세력과 산업화의 주도 세력이 불꽃 튀게 만난 곳이다. 게다가 경술국치가 맺어진 곳이 바로 남산이다. 이곳 남산처럼 20세기 100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곳은 다시 찾기 어렵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우리가 살아온 내력을 차근차근 들려주기에 가장 좋은 곳이 남산이다. 현대사의 고난과 성취가 이렇게 한곳에 어우러진 곳은 여기 말고는 찾기 어렵다.

‘ㄱ’은 통감관저를 복원해 가슴 아픈 역사를 교육하는 현장으로 삼으면서, 그 옆의 안기부 건물들을 아시아 인권평화센터로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제국주의 침략을 겪었고, 개발독재로 심한 몸살을 앓았거나 앓고 있다. 한국은 큰 희생을 치렀고 아직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빨리 빈곤에서 탈출했다. 독재의 본산으로 고문 등 인권침해가 자행되던 공간이 내일의 인권과 평화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면, 그 자체가 고문 등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치유의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의 인권과 민주화를 향한 중대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산업화·민주화 동시 이룬 ‘한류’의 상징으로

한류가 왜 드라마나 대중가요에서만 나와야 하는가?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한 우리의 경험은 이 두 과제를 위해 분투하는 다른 나라에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다. 현대사의 상처를 보듬고 우뚝 선 남산은 인권과 민주화와 산업화에서의 한류를 창출하는 생산 현장이 될 것이다. 우리는 상처받은 남산의 회복을 통해 미래를 후대에게 신탁하려 한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지만…남길 곳은 남겨야”

20년 만에 남산 안기부 조사실 찾은 ‘통일의 꽃’ 임수경씨
“근처만 와도 속 울렁거리고 토할 때도 있어”
» 정확히 20년 만에 남산 안기부 6별관 지하 조사실을 다시 찾은 임수경(오른쪽)씨. 당시 조사실은 지금 서울시 문서고로 쓰이고 있다.
삶의 한순간이 그대로 역사가 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삶은 한 자락을 뚝 떼서 글로 옮기면 기사가 되고, 소설이 된다. ‘통일의 꽃’이라 불리던 임수경(41)씨. 1989년 6월 방북은 그 자체가 역사였다. 그해 8월15일,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는 순간은 질긴 분단 역사의 파단이었다. 그 뒤 20년, 그의 삶은 그대로 소설이었다. 질긴 역사의 끈은 그의 발목을 졸라매고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남산으로 동행해주셨으면 한다”는 제안에 거듭 고개를 저었던 이유다.

“제가 강남으로 갈 때는 아직도 남산 1호 터널을 안 넘어가요. 거기 근처만 가도 떨리고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때도 있었으니까요.” 시대가 남긴 트라우마(심리적 상처)다.

2009년 9월8일 <한겨레21>은 어렵사리 임수경씨와 서울 남산 옛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터를 찾았다. 그가 남산을 찾기로 결심한 것은 그날의 의미 때문이었다.

“정확히 20년 전이네요. 20년 전 오늘 여길 나와서 서울구치소로 갔죠.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는데, 그래도 남길 것은 남겨야죠.”

100촉 전구 빛나던 지하 조사실은 문서고로

1989년 8월15일 문규현 신부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내려온 임수경씨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커다란 헬기였다. 그를 태운 헬기는 단숨에 남산 국립극장 앞마당에 도착했다. 검은색 세단을 탄 안기부 요원들은 좌석 가운데 앉은 임씨에게 “고개 숙여!”라고 짧고 강하게 명령했다. 악명 높은 터널을 지나 도착한 곳은 대공수사실(안기부 6별관). 지금은 서울시청 별관으로 쓰인다. 시청 별관 앞에 선 임씨는 뒤쪽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조사받는 이들이 출입하는 곳은 뒤쪽에 가파른 계단이 있었어요, 아주 가파른. 그 계단을 따라 지하 2층으로 가면 조사실이 나왔어요.”

과연 그의 말대로 건물 뒤쪽 가운데에는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계단은 중간에 네 개의 중턱을 둘 만큼 길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지금은 서울시청 공무원과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공간이지만, 그는 자꾸만 밀어내는 척력을 느끼는 듯했다. 지하 2층은 서울시의 자료를 보존하는 문서고로 쓰이고 있었다. 임씨는 발소리까지 죽여가며 걸어 들어갔다. 이미 이름도 사라진 안기부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실체로 살아남아 있었다.

“여기에서 맨 왼쪽 끝 방으로 끌려갔어요. 방음 보드로 이뤄진 벽과 천장으로 온통 하얀 방이었어요. 100촉짜리 전구 두 개가 한꺼번에 켜져 있어 ‘하얀 지옥’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침대랑 욕조도 있었는데, 그게 다 고문용이었죠.”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때에 찌든 파란색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통일의 꽃’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20일을 갇혀 있던 방에는 ‘11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절 조사하던 조사관이 그랬어요. 그 방에 저 같은 ‘피라미’가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고. 이랬죠. ‘너 오기 바로 전에는 서경원이가 그 자리에 있었고, 문(익환) 목사가 있었어.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도 이 방 출신이고, (이중간첩 혐의로 사형당한) 이수근이도 이 방에 있다 나갔어.”

직접적인 구타나 고문은 없었다. “조사관들이 그랬어요. 검사들이 ‘임수경은 절대 때리지 말라’고 했다고. 대신 욕을 했죠. 답변이 마음에 안 들면 앉아 있던 의자 다리를 걷어찼어요. 그때마다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는 거죠.”

임수경씨가 여자라서 때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방북을 도운 혐의로 먼저 붙잡혀 지하 2층에서 조사받은 한양대 여학생 3명은 쏟아지는 매를 피할 수 없었다. 고문은 없었지만, 구타는 엄연한 조사 수단이었다. 그 여학생들은 국방색 군복을 입은 채로 조사를 받았다. 땀과 피, 눈물에 찌든 군복은 입는 자체가 고문이었다.

전세계의 눈이 쏠린 탓에 그에게는 쉽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조사관들이 그랬어요. 저는 특별 대접해서 ‘추리닝’ 입히는 거라고. 머리가 아플 만큼 때 타고 냄새나는 옷을 입혀놓고.”

조사관들은 13명이었다. 이들은 네 팀으로 조를 짜서 24시간 그를 취조했다.

»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눈자위가 발갛게 물든 임수경씨는 “20년 뒤에도 다시 찾아와볼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조사관들 문 열 때마다 들려온 비명소리

“조사관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옆방에서 터지는 비명소리가 새어 들어왔어요. 근데 그게 더 소름 끼치잖아요. 알고 보니 영식이 형(오영식 전 통합민주당 의원)이 그때 같이 지하 2층 조사실에 있었어요. 영식이 형은 정말 많이 맞았대요, 죽고 싶을 만큼.”

그는 그 조사실에서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이던 정형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만났다.

“정형근씨가 들어와서 이랬죠. ‘네가 백만학도 대표냐. 백만학도라는 이 나라 대학생들이 너를 대표로 인정하냐. 내 딸이 대학생인데, 자기는 너보고 대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던데.”

정형근 당시 국장은 임수경씨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거듭 파일과 서류로 책상을 내리치고 고함을 질렀다고 했다. 거친 욕을 할 때도 많았다고 한다.

“정형근씨가 나가고 나면 조사관들이 그랬어요.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면 평생 여기서 못 나간다. 너 여기서 안 나간다고 대한민국이 어떻게 알겠느냐. 너 하나 죽는다고, 없어진다고 대한민국이 큰일 나는 것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임씨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110호 조사실이 있던 쪽은 철제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자기를 자꾸만 밀어내는 공간을 그는 쉽게 떠나지 못했다. 굳게 잠긴 문 손잡이를 몇 번씩 돌려보는 그였다.

“여기가 얼마나 많은 청춘의 눈물과 피와 한이 맺힌 곳인데.”

계단을 올라 다시 정문 쪽으로 향했다. 정문을 통해 들어가니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휴게실이 보인다. 휴게실 건너편이 면회실이었다고 한다.

“당시 노태우 정권이 임수경은 인간적으로 조사한다면서 선전하려고 아버지·어머니 면회를 시켜줬어요. 부모님이 면회 온다고 하니까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더라고요. 제 별명이 ‘수도꼭지’거든요, 잘 울어서. 그런데 막상 부모님을 보니까 눈물이 안 나요. 뒤에 기자들이 가득히 서서 사진을 찍어대는데, 울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아, 내가 울면 노태우 정권이 내가 후회하고 있다는 식으로 선전하겠구나 싶어서.”

면회를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조사관들은 “독한 년, 부모를 만나고서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냐”며 욕했다고 한다.

 

잔인했으나 평범했던 조사관들

“그때 광주 출신이라는 한 여성 조사관이 그랬어요. ‘내 고향 광주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모두 사라져도 너 같은 빨갱이는 모두 없애야 한다’고. 그 사람도 이화여대 나왔다고 했어요. 근데 그때 날 조사하던 사람들이 모두 그랬어요. 사법고시 1차까지 합격했다가 2차에 결국 안 돼서 안기부 왔다는 아저씨, 경찰대학 출신이라는 아저씨. 그리고 절 조사했던 여성 조사관이 3명이었는데, 그 2명이 이대 출신이라고 했어요. 그냥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었죠, 공부 열심히 한, 좋은 대학 나온. 그 사람들을 지금 다시 만나서 묻고 싶어요. 우리가 그렇게 잘못했냐고. 그게 그렇게 인간을 말살시킬 범죄였냐고. 그렇게 조사하면서 당신들의 마음은 편했냐고.”

유대인인 해나 아렌트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함’이란 개념으로 유대인 학살에 나섰던 독일인들의 심리 구조를 정의한 바 있다.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이주와 학살을 총지휘한 친위대 장교로, 전후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가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추적으로 붙잡혀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았다. 아렌트는 그의 재판을 방청하면서 아이히만을 피에 굶주린 학살자가 아닌, 권력자의 명령과 실정법에 충실했던 한 소시민으로 결론 내렸다. 문제는 그런 권력과 체제의 요구에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았던 양심과 사고 능력의 결여였다. 그런 모든 일에 ‘명분’과 ‘면죄부’를 준 전체주의 체제가 문제였다. 전체주의는 그렇게 고문을 당한 이들과 고문을 가한 이들의 영혼을 동시에 파괴한다.

 

“또다시 20년이 흐른 뒤 찾아와볼 수 있다면”

서울시청 별관을 나온 임수경씨는 뒤돌아서 다시 건물을 쳐다보았다. 눈자위가 조금씩 발갛게 물들고 있었다. 그 순간 임수경씨가 안내판 하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봐, 누구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야. 이젠 누구나 들어갈 수 있어.” 그 안내판에는 남산을 이용하는 이들을 위해 별관 화장실을 공개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어. 그런데 왜 그렇게 가슴을 졸여야 한 거지?” 그의 혼잣말이었다. 건물이 남긴 기억은 그렇게 강했다.

“이 건물을 떠나고 20년이 흘렀어요. 그 20년을 저는 통째로 잃어버렸어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정말 뭘 잃어버렸죠? 우리는 20년, 30년씩 잃어버렸잖아요. 그런데 그 기억을 잊지 않게 해줄 건물들도 다 없애버리면 어떻게 해요.”

그는 개인적인 소망도 하나 더했다.

“인생은 20년마다 한 번씩 바뀐다고 하죠? 20살에 이곳에서 제 인생이 한 번 바뀌었으니, 40살에 여기에 온 것으로 다시 한번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20년 뒤에도 꼭 다시 올 수 있도록 이 건물이 잘 지켜졌으면 좋겠어요.”

 

늘상 마주하던 ‘한양의 랜드마크’

빼어난 자연경관에 신성함까지 곁들여진 서민 주거 공간이자 양반들의 유람지
서울 남산의 역사와 경관은 서울 사람들의 삶과 자취를 반영한 거울이다. 조선시대의 영광부터 일제 시기의 굴욕까지 고스란히 겪었던 남산의 존재는 서울 주민들의 생활사를 응축한 단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 이래 남산은 수도의 공간적 중심지에 있었기에 정치·사회·경제·문화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남산은 한성부의 도시 공간 구조를 결정하는 데 큰 작용을 했다. 풍수 국면으로 한양의 내사산(內四山) 중에 하나인 남산은 북악산과 상대해 도성 공간의 축을 결정하는 요소였다. 남산의 지형을 따라 건설된 도성은 성 안과 밖을 가르는 주거 공간의 계층적이고 차별적인 분포를 나타나게 했다.

» 200여년 전 한성의 모습을 담은 <도성대지도>(작자 미상). 아래쪽 뾰족한 곳이 남산이고 위쪽으로 북한산, 인왕산, 북악산 등이 보인다. 사진 한겨레 자료

고려시대 ‘남경’ 지정 뒤 역사 무대에서 두각

구한말 조선을 찾은 영국의 여행작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1897)에서 “아름다운 남산으로부터 산에 둘러싸인 서울이 가장 잘 보인다”고 했듯이 남산은 한양의 랜드마크이자 왕궁의 방어적 요충지였고,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남산은 조선 왕실에 의해 국토와 왕경을 수호하는 진산(鎭山)으로서 작위를 가지고 제사를 받는 위엄스럽고도 성스러운 신산(神山)으로 대접받기도 했다.


자연미학이나 인문학적으로도 남산의 의미는 각별했다. 유토피아의 대명사라고 할 만한 청학동 골짜기가 있을 정도로 남산의 산수 경관은 아름다워서 조선시대의 문인 선비와 관료들이 풍류를 즐기고 도덕과 심성을 닦는 장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높이가 해발 262m에 불과한 나지막한 야산에 지나지 않던 남산이 역사의 무대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고려 문종 21년(1067)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이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하고 유수관을 두어 지방제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부터다. 당시 남경의 범위는 동으로 대봉(大峰·낙산), 서로 기봉(岐峰·안산), 북으로 면악(面嶽·북악산), 남으로 사리(沙里·용산 남단)에 이르렀으니, 이러한 공간 범위의 설정은 남산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역사에서 남산의 지리적 중요성이 명실상부하게 갖춰지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는 조선시대에 이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던 때부터다. 이씨 왕조가 주산을 백악산(현 북악)으로 삼고, 좌청룡 인왕산과 우백호 낙산 그리고 안산(案山)으로 남산을 삼아서 도성의 풍수적 국면을 형성하면서, 남산은 조선시대 한양의 랜드마크로 우뚝 섰던 것이다. 이름도 한양 도성의 남쪽에 자리잡은 산이라고 하여 남산이 되었으니, 목멱산(木覓山)·종남산(終南山)·인경산(仁慶山 또는 引慶山)·열경산(列慶山)·마뫼 등 다른 고유지명이 있지만, 위치를 가리키던 남산이라는 이름이 대표지명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남산은 한성에서 군사적 방어의 요충지이자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태조는 남산을 외적을 방어하는 방패로 삼기 위해 1396년에 도성을 쌓고 보수했다. 태종 6년에는 봉수대를 설치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다. 남산의 제1봉수는 양주 아차산과 대응해 경기도·강원도·함경도와 연결되었으며, 제2봉수는 광주 천천령에 대응해 경기도·충청도·경상도와 연결되었고, 제3봉수는 무악 동쪽 봉우리에 대응해 경기도·황해도·평안도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남산 기슭에 병영으로서 어영청의 분영인 남소영과 금위영의 분영이 자리잡기도 했다.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에 기인한 지정학적 가치 평가는 남산을 상징적 작위를 받는 신성한 산으로 탈바꿈시켰다. 태조 4년(1395) 12월에 북악산을 백악산신의 진국백으로,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작해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했던 것이다. 남산의 정상에는 조선 중기까지 봄과 가을에 초제를 지내던 목멱신사(木覓神祠)가 있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목멱신사가 도성의 남산 꼭대기에 있고 소사(小祀)로 제사 지낸다”고 했다. 남산 꼭대기에 자리한 목멱신사는 나라에서 제사 지내는 사당이라 하여 일명 ‘국사당’(國祀堂 또는 國師堂)이라고도 했다. 이 국사당 건물은 일제의 조선신궁 건립으로 헐리게 되어 현재는 인왕산으로 옮겨졌다.

남산의 자연 지형을 따라 수축된 도성은 한성의 성 안과 밖을 구획하는 공간 구조를 결정했으며 구획했다. 조선 태조는 1396년 4월에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고 같은 해 9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면서 행정구역을 도성(都城)과 성저(城底)로 구성했는데, 남산을 중심으로 서쪽의 인왕산과 동쪽의 낙산에 이르는 연결로는 성 안과 밖을 가르는 자연적인 기준이 되었다.

»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혼성여단이 주둔한 만리동 고개에서 바라본 남산과 경성 남쪽의 풍경. 남산 일대 풍경을 담은 가장 오래된 사진 가운데 하나다. 사진 한겨레 자료

한성의 성 안팎 경제 겸 방어의 요새지 역할

조선시대 한양의 도시 공간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현 세종로의 관아 공간과 종로의 상업 공간, 그리고 주거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주거 공간의 분포를 보면 종로 북쪽은 양반 관리의 주거지인 북촌(계동·가회동·원서동·안국동 등)이 있었으며, 중간의 청계천에는 중인 계층과 상인들이 누하동·적선동·사직동 방면에 살았다. 남쪽에는 하급관리와 세력이 없는 선비들이 남촌(회현동·필동 등)에 살았다. ‘남산골 딸깍발이’ 혹은 ‘남산골 샌님’이라는 말도 남산골에 살았던 선비들이 대체로 벼슬 자리가 없고 가난해 나막신을 신고 다녔지만 정신적으로는 고고한 기상을 지녔다고 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조선시대에 제도적으로 시행되었던 남산의 자연과 생태 보호의 배경에도 풍수가 뒷받침되고 있었다. 남산의 탁월한 식생인 소나무는 남산의 지덕을 보존하고 배양하는 중요한 식물로 여겨졌고, 소나무의 생육은 조정에서 적극적으로 관리되었던 것이다. 국초부터 남산은 소나무를 베지 못하는 금송(禁松) 지구로 지정·관리된 바 있었으니, 흔히 남산의 나무 하면 소나무가 떠오르는 것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태종 15년(1415) 4월, 산에 송충이로 인해 피해가 심하자, 한성부에 명해 송충이 구제에 나서도록 하고 서울 도성 사방의 산에 대한 관리를 엄하게 했다. <경국대전>에 도성 사방 산에 입산금지표를 세우고 벌목과 채석 등을 금하는 내용이 명문화돼 있으니, 오늘날 산악 관리와 개발·훼손을 제한하는 정책인 그린벨트의 시원이라고 할 만하다.

남산은 청학동이라는 아름다운 신선경도 있을 만큼 시문학이 꽃피던 심미적으로도 아름다운 경관의 산이었다. 더더욱 한성부의 생활권 내에 있기에 접근성이 좋아서 남산의 승경을 찾아 풍류를 즐기던 관료와 도덕을 연마하는 선비가 줄을 이었다. 남산에 있었다는 청학동과 관련해 세조 2년(1456)에 “세조가 청학동에 거동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가 있고,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1788~?)은 남산의 청학동에 관해 “도성의 남촌 필동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가운데로 한 줄기 산골물이 흐르니 곧 남산의 산록이다. 곁에는 금어영 화약고가 있다”는 상세한 변증도 했으며, 김정호의 <대동지지>(1864)에도 한양의 남산 남쪽(잠두산 북쪽)에 청학동이 있었다는 표기가 확인된다.

 

문인들이 인격을 닦던 ‘경관 텍스트’

이처럼 남산의 북쪽 기슭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이루어 많은 사대부들이 저택과 정자를 마련했다. 이행, 이안눌, 조현명, 이유원, 정원용, 조인영, 정광필, 김석주, 박영원, 조용화, 윤정진 등 수많은 관료와 학자, 문인들이 남산에 살거나 남산을 찾아 풍치를 즐기고 남산을 노래한 시문을 남겼다. 조선조 유학자들에게 산수는 나를 비추어보고 수기(修己)하는 ‘경관 텍스트’로 인식되었으니, 이러한 산수에 대한 태도는 자연지리적 환경을 자아의 정립과 인격의 수양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남산이 누렸던 영예와 문화는 일제 시기를 당해 굴욕과 생채기의 경관으로 새겨지게 된다. 해방과 전후의 혼란기를 거치고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심장과 같이 의연히 있는 남산을 바라보니 형언할 수 없는 감회가 메아리친다.

 

제국주의 통치 타운이 되다

통감부·헌병대사령부 등 탄압기구와 조선신궁·신사 입주한 식민지배 상징으로 탈바꿈
 
조선의 500년 도읍 한양의 남쪽 수호산인 남산이 왜색으로 오염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중반부터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으로 정국이 요동친 뒤 1885년 지금의 예장동(藝場洞) 일대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됐다. 본디 남산 주자동 막바지에 있던 평평한 넓은 잔디밭은 영문(營門) 군졸들이 기예를 연마하던 곳이었고, 단오절이 되면 청소년패가 씨름을 겨누던 곳이다. 그러기에 예장(藝場)이었다.

» 1929년 조선총독부는 서울 경복궁 안마당에서 조선박람회를 개최해 조선왕조를 우롱하며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당시 조선 8도에서 모여든 박람회 관광객에게 개화한 경성의 근대상을 보여주며 자연스레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한 것이다. 박람회 당시 제작된 일종의 관광 가이드인 이 지도에는 행사가 열린 경복궁 일대와 남산의 조선신궁은 강조돼 자세히 그려진 반면,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목숨을 잃은 서대문형무소는 나와 있지조차 않다. 사진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군대 머물던 터 다시 찾은 일본

그런데 임진왜란 중에 일본군 부대가 지금 조선호텔 자리인 남별궁에 지원부를 마련하고, 예장동에 일본군 1500여 명이 진을 치고 왜성을 쌓아 1년간 이곳에 주둔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이곳을 ‘왜장터’로 불렀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뒤 제국주의 침략자로 들어온 일본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정한론의 선구자로 기리며 이곳을 자신들의 성역처럼 여겨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남산 개조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신을 모시고 싶어했다.

1892년(고종 29년) 일본 거류민들은 남산 북쪽 기슭에 태양의 신, 일본 천황가의 시조신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신궁을 세우기로 계획했다. 먼저 1897년 3월17일 일본 공사는 조선 정부와 교섭해 공원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예장동 일대 3천여 평을 영구 임차했다. 그해 7월 이를 ‘왜성대(倭城臺) 공원’이라 명명하고 도로를 만들고 벚꽃을 무려 600그루나 심었다. 이곳에 뿌리박은 벚꽃처럼 자신들도 이 땅에 대대로 뿌리박을 심산이었다. 이듬해 일본 거류민은 본토의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사람을 보내 신궁사청에서 이른바 신체(神體)를 일부 떠받들어 돌아왔다. 결국 1898년 그 자리에 남산대신궁이 들어섰다. 한양의 수호산이 일제 침략의 교두보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훗날 조선신궁이 만들어지자 남산대신궁은 1923년 이름을 경성신사(京城神社)로 바꿨다. 경성신사는 개축 발의가 있어서 10여만원의 기금으로 다시 짓고 1929년 9월25일 천좌식(遷座式)을 가졌다. 일본 천황가의 시조신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와 국토경영시조(國土經營始祖)인 국진신(國津神), 조선국혼신(朝鮮國魂神)이라고 하던 대사귀신(大巳貴神), 그리고 소언명신(少彦名神) 등 넷의 신체를 모시고 조선을 영원히 자신의 땅으로 지켜주기를 일본 귀신들에게 빌었다.


남촌 50개동 가운데 30개동이 일본인 마을로

신궁과 신사의 건립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맞물려 진행됐다. 예장터와 그 주변 일대에는 일제의 각종 침략 기구들이 자리잡았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 총본부라 할 일본공사관과 조선통감부가 예장동에 자리를 틀었다.

애초 일본공사관은 1880년 서대문 밖 천연정 옆, 즉 지금의 서울적십자병원 자리에 있던 청수관을 사용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일본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는 일본으로 도망가고 청수관은 불타버렸다. 같은 해 8월 군사를 이끌고 다시 나타난 하나부사 공사는 성 안으로 들어가 남산 밑 금위대장 이종승(李鍾承)의 집을 공사관으로 삼았다. 그리고 부근 수십 호의 민가와 장악원의 건물을 징발해 사병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그 뒤 일본공사관은 다시 교동 박영효의 집을 거쳐 남산 기슭에 있던 녹천정(鹿川亭) 자리로 갔다.

» 경복궁 앞에 새로운 건물이 건립되기 전까지 조선총독부(위 사진 점선 안·현재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는 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왼편 위쪽에 명동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현재 서울 충무로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는 일제 식민지배 시절 공포의 상징이던 헌병대본부가 자리잡고 있었다(아래). 사진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1905년 일본은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한 뒤 예장동에 통감부 청사를 설치했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일본공사관이 있던 녹천정은 통감관저로 바뀌었다. 본디 이곳은 ‘청학동’이라 불렸다. 푸른 학과 더불어 신선이 사는 곳 아니던가. ‘매처학자’(梅妻鶴子)라 하여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아 사는 욕심 없고 깨끗한 곳, 연산·중종 때의 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절의가 높고 시문이 도도했던 청학도인 이행(李荇)의 집터가 있던 곳 아니던가.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공사관과 총독관저가 자리잡고 그 경내에 일본군사령부(한국주차군사령부)가 들어섰다. 이 때문에 청학동은 당시 사령관이자 훗날 제2대 조선 총독이 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대장의 이름을 따 ‘호도원’(好道園)으로 불렸다. 플라자호텔 옆 소공동은 훗날 장곡천정(長谷川町)으로 창지개명(創地改名)됐으니, 이 또한 침략자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1930년대 김광균의 시 ‘장곡천정에 내리는 눈’에 나오는 그 장곡천정이다.

을사조약 이후 예장터의 통감부 청사를 시작으로 지금의 제일은행 지점 자리에 경성이사청(일본공사관이 바뀐 것)이 들어서고, 지금의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있던 장악원을 허물고 동양척식회사가 들어섰다. 옛 수도방위사령부 자리이자 현재 남산골 한옥마을이 들어선 터에 헌병대사령부를 설치했다. 1910년대 일제의 이른바 무단통치 아래 가장 무시무시한 탄압 기구가 헌병대였다. 이들은 경찰 역할을 겸해서 조선인을 단속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탄압의 최선봉에 섰다. ‘군인 위에 헌병이 있다’고 하던 시절 헌병사령부 앞은 조선인은 감히 지나가기도 어려웠다. 주변 일대는 남산골 샌님 대신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 망국 전 한말의 뜻있는 선비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왜국의 사신 미야모토(宮本守一)가 녹천정에 들었다. 그 정자가 남산 주동(注洞) 마루턱에 있는데, 소나무가 우거지고 샘과 돌이 그윽하였다. 녹천정은 일찍이 한확(韓確)의 별장이었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전 판서 김상현(金尙鉉)이 살았다. 미야모토가 마침내 이 정자를 빼앗아 일본공사관으로 삼은 후로 일본인들은 야금야금 주동·나동(羅洞)·호위동(扈衛洞)·남산동·난동(蘭洞)·장흥방(長興坊)과 남쪽으로는 종현(鍾峴)·저동(苧洞)을 가로지르는 진고개 일대를 점거하여, 남촌 50개 동 가운데 30개 동이 온통 일본인 촌이 되었다.”

1906년에 설치한 경성이사청은 예장동 주변을 경성공원으로 만들고, 남산식물원 자리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회현동 일대에 30만 평을 영구 대여 형식으로 무상 임대해 1908년 한양공원으로 정하고 1910년 5월29일 개원했다. 퇴위한 고종은 칙사를 보내 치하했다. 허울 좋게 ‘한일공동공원’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 남산 북서쪽 사면에 대규모로 들어섰던 조선신궁(현재 남산 식물원 일대)의 전경과 입구 모습(위).

일제는 1916년부터 동쪽의 장충단, 남쪽의 성곽 밖, 한양공원, 왜성대공원 등을 포함하는 대삼림공원으로 벨트 라인을 만들고 그 안에 일본 통치의 상징이자 정신적 구심인 조선신궁을 세우려 했다. 1918년 조선신궁을 현재 남산식물원 일대에 건립하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하면서 한양공원은 폐쇄됐다. 남산 상선대를 무지막지하게 깎아버린 것도 이때였다. 1925년 조선신궁이 완성되면서 남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國祀堂·서울타워 언저리 성벽 안)은 인왕산 서쪽으로 쫒겨났다. 국사당은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백악(북악)을 진국백으로,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삼아 남산에 목멱신사(木覓神祠)를 두어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신궁 세워 ‘식민통치의 성지’로 둔갑

384개의 돌계단을 비롯해 웅장한 참배로가 있는 조선신궁은 조선인의 영혼마저 일본 천황을 위해 갖다 바쳐야 하는 곳이었다. 1939년 일제는 신궁 입구에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탑’을 세웠다. ‘천황 폐하’에 대한 충성 서약이 곧 황국신민의 서사다. 식민지 게이조(京城)에 사는 조선인과 학생들은 주요 행사가 있으면 이곳에 의무적으로 동원되어 황국신민서사탑에서 황국신민서사를 외어야 했고 신궁에 의무적으로 참배해야 했다. 학병·징병·징용으로 끌려가는 조선인들도 이곳에 와서 참배를 강요당하고 끌려갔다. 남산에서 가장 조선인의 한이 깊게 서린 곳이다.

그 밖에도 남산에는 러일전쟁의 일본 영웅으로 치부되던 노기 마레스케 장군을 기리는 노기신사(乃木神社) 등 여러 개의 신사와 동본원사 따위의 일본식 사찰이 곳곳에 자리잡았다.

나랏신도 쫓겨나는 판에 장충단인들 무사할 리 없었다. 1900년 9월19일 임오군란과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 죽은 관리와 군인을 제사 지내던 곳 장충단도 1910년 폐사되고 1919년 6월 장충단공원이 새로 조성됐다. 이어 가증스럽게도 일제는 1932년 공원 동쪽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라는 사찰을 짓고 그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붙였다. 박문사라는 이름은 이토의 이름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고, 춘무는 이토의 호이다.

일제는 1940년 3월12일 ‘경성시가지계획공원결정고시’를 통해 제1호 공원부터 제140호 공원까지 고시했다. 남산공원은 제9호 공원으로, 35만 평의 남산도로공원은 제132호로, 장충단공원은 제8호 공원으로 지정했다.

 

“남산에 올라 도성을 보니 가슴이 답답…”

잠시 일제 말기 남산을 상상해보자. 남대문으로 조선신궁 진입로로 올라가 정상에서 남산 기슭과 가장자리를 내려다보자. 조선신궁 앞에 남산공원이, 그 아래 시계 방향으로 동본원사(東本願社), 그 옆에 조선총독부와 총독관저, 일본군헌병대, 정무총감 관저, 장충동 쪽 박문사와 장충단공원, 다시 남으로 굽어 한강으로 돌아가면 서빙고 쪽에 공병대와 기병대, 연병장, 용산 쪽으로 오면서 사격장, 일본군 20사단 보병 제78연대와 보병 제79연대, 야포병대가 진을 치고 있다. 조선의 남산은 제국 일본의 통치기구와 침략기구에 갇히고 신궁에 짓눌려 있다.

길이길이 경사스러운 일들을 끌어들이라고 불렀던 남산의 다른 이름인 ‘인경산’(引慶山)이 무색하기만 하다. ‘한성팔영’(漢城八詠)의 하나인 남산에서 꽃구경하기(木覓賞花)는 어느덧 남산에서 사쿠라 구경하기(木覓賞櫻) 로 바뀌었다. 예로부터 일컫던 ‘남산팔영’(南山八詠)의 북궐(경복궁)을 가로지르는 구름은(雲橫北闕) 어느덧 조선총독부 건물에 묶여버리고, 바위 아래 그윽한 꽃(岩低幽花)은 간 데 없이 사쿠라꽃이 헤살거리며 흘러간다.

정신 맑은 자라면 그 누가 남산을 올라가 즐거우랴. 일본말만 쓰도록 강요당한 식민지 말기 남산에 올랐던 감상을 김병로(1887~1964)는 당시 보성전문학교 강의실에서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남산니 아갔데 가만히 스왔데 장안을 나가메루토 감슴이 답답하단 말야···.”

남산에 올라가서 가만히 앉아서 장안을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답답하더라는 것이다. 요컨대 남산아 너 평안하느냐, 이 말 아니었던가!

 

식민지배층의 특권적 공간 ‘남촌’

산자락인 남대문·명동·충무로에 대기업·은행·백화점 등 입주 일본식 신시가지 조성돼
국운을 다시 일으키려는 심사로 고종은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했다. 그에 앞서 1896년 8월 고종은 서울을 황도로 개조하기 위한 지시도 내렸다. 새로운 본궁 경운궁(덕수궁)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현재의 태평로에서 세종로로 이어지는 길, 동쪽으로는 을지로에 해당하는 구리개길, 동남쪽으로 현재의 소공로, 남쪽으로는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그렇게 해서 정비되었다. 미국 워싱턴을 본뜬 방사형 가로 체계로 서울을 재편하고자 했던 것이다.

»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초기에 자리를 잡았던 충무로 1~3가 진고개 지역을 ‘거주지의 으뜸’을 뜻하는 ‘혼마치’(本町)라고 부르며 시내의 중심가로 키워갔다. 이로 인해 전통적 중심지인 종로 쪽 대신 혼마치 일대가 서울의 중심으로 올라섰는데, 이는 현재의 ‘중구’라는 명칭에서도 확인된다. 사진 <서울 남촌; 시간, 장소, 사람>

비슷한 시기, 일본은 남산 아랫자락에 구축한 그들의 거점을 서울 중심부를 향해 확장하고 있었다. 고종의 황도 건설에 맞불을 놓은 격이다. 도시 개조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여기에 더해, 새로 연 ‘광화문~남대문 가로축’은 일제가 용산으로부터 서울로 침투하는 경로가 되었다. 서울은 점차 식민도시로 전락해갔다.

 

남산 중턱에서 기슭으로 확대된 일본인 구역

이는 일본인 거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으로 확인될 수 있었다. 본래 일본인의 성 안 거주는 허용되지 않았다. 1880년 서대문 밖 천연정(지금의 서울적십자병원 자리) 청수관에 연 공사관에 40여 명의 일본인이 기거한 것이 처음이다. 이듬해 임오군란으로 청수관이 불타자, 이들은 성 안으로 들어와 금위대장 이종승 집을 임시로 쓰다가 교동의 박영호 집을 사들여 공사관으로 신축했다. 이때 일한 인부 70명이 서울에 들어온 최초의 일본 민간인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인들은 1884년 갑신정변을 틈타 조정을 압박해 서울 입경과 거주를 정식으로 허가받았다. 이때가 1885년 2월이었다. 일본 공사관도 남산 기슭 ‘녹천정’ 자리로 옮긴 뒤였다. 일본인 거류 지역은 공사관 인근의 중구 예장동·주자동에서 충무로 1가에 이르는 진고개 일대로 지정되었다. 최초의 일본인 가옥 12동이 명동성당 후문 앞 일대에 세워졌는데, 그해 9월 일본 거류민은 20호 89명이었다.


» 식민지 시절 남촌은 최신식 건물들의 집합소였다. 그 가운데서도 조선은행(현 한국은행·맨 위), 경성우편국(현 중앙우체국 자리·가운데),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이 마주 보고 있던 한국은행 로터리는 최고의 명소로 꼽혔다.
이는 조선인이 모여 사는 북촌과 대비되는 일본인 거주지 ‘남촌’의 시작이었다. 지금의 예장동 일대인 남촌의 시작점은 300년 전 임진왜란 때 일본군 1500여 명이 성을 쌓고 1년간 머물던 ‘왜성대’라는 곳이다. 남촌의 등장은 300여 년 만에 일본인의 식민지 건설이 다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인 거류민 수는 빠르게 늘어 1884년 말 260호 848명에서 1895년 말 500호 1889명으로 배가 되었다. 청일전쟁을 이긴 일본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거류 지역을 본격적으로 확장했다. 진고개에서 남대문 사이에 새 도로를 냈다. 일본인 전용 종합병원을 신설해 무료 진료도 했다. 일본 상품 전문 진열소까지 설치했다.

일본인 거류지가 커지고 관리 업무가 늘자 일본 공사관은 1896년 주자동 6번지에서 충무로 1가 입구(현 신세계백화점 자리)로 확장해 옮겨갔다. 고종이 도시 개조를 지시한 해였다. 공사관의 이전은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지가 외진 남산 밑에서 번잡한 도심으로 옮겨진 것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에 거류지 개념에서 신시가지 혹은 신도시 개념으로 남촌의 확장이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이전 뒤 10여 년간 일본인 수는 약 5배가 늘어 1906년 1만 명을 넘어섰다. 한-일 합병이 되던 1910년 일본인은 서울 인구의 14%를 차지했는데 대부분이 남촌에 살고 있었다. 일본 공사관의 지위도 변했다. 정미7조약을 체결한 이듬해(1908년) 일본은 공사관을 통감부의 경성지부인 ‘경성이사청’으로 바꾸었다. 외교기관이던 공사관이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변화한 것이며, 남촌 또한 이방인의 거주지에서 식민지 지배층이 사는 특권적 공간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남촌의 변화는 우선 내부 정비로 나타났다. 한-일 합병 직후 총독부는 1910년 남대문에서 남대문 정거장에 이르는 도로를 개수했고, 1911년에 황금정(현 을지로), 1912년에 태평통(태평로)을 준공했다. 황금정은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을 청계천변까지 확장시키면서 본정통(충무로)과 함께 새로운 중심가로 부상했다.

 

1910년 서울의 일본인 비율 14% 달해

총독부는 한 걸음 더 나가 경성 도시 개조도 추진했다. 북촌과 남촌의 중심을 안국동과 을지로 3가에 두고, 각 중심의 방사형 도로망을 개설한 뒤, 남촌과 북촌을 파고다공원을 중심으로 통합하는 도시 구조의 개편이 시도되었다. 1908년엔 일본 황태자 방문을 맞아 남대문을 허문 뒤 서울역을 거쳐 용산에 이르는 남북축도 구축했다. 남촌이 서울 밖으로까지 확장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남촌 내부의 중심부는 충무로에서 명동(조선시대 명례방)으로 넓혀졌다. 일본인들은 충무로 1~3가의 진고개를 ‘거주지의 으뜸’을 뜻하는 본정(本町), 즉 혼마치로 부르며 중심가로 키워갔다. 충무로 1~2가에는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귀금속·잡화류·화장품·서적·문구류·식료품·화장품 등을 취급하는 고급 점포들이 즐비했다. 1910년대에 들어 충무로 상권은 인근의 명동으로 파고들었다. 1912년엔 명동 2가 85번지에 경성어시장이, 1919년엔 25번지에 공설시장이 문을 열었다. 동명도 일제식 메이지마치(明治町)로 바뀌었다. 혼마치와 메이지마치는 남촌을 상징하는 최고의 번화가였다.

이곳은 단순한 고급 소비지만 아니었다. 일본 공사관이 남대문통으로 옮겨오고, 또한 경성이사청으로 승격되는 것을 전후로 충무로·명동 일대엔 식민지 조선을 경제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기관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가령,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건물)은 1907~12년에 남대문로의 현재 위치에 건립되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현재 을지로 2가 외환은행 자리에 설치되었으며, 조선식산은행은 1918년 현 롯데호텔 신관 자리인 남대문로 2가에 세워졌다. 이후 남대문로는 동일은행, 천일은행, 조선상업은행, 조선신탁회사, 삼화은행 등이 들어서면서 조선의 최고 금융거리가 되었다.

1920년대를 지나면서 금융기관과 관련된 대기업체와 백화점이 대거 입지했다. 오늘날 증권거래소의 전신인 경성주식현물취급시장이 1920년 명동에 개설되었고, 현 한국전력의 전신인 경성전기주식회사가 남대문로 2가에 1927넌 준공되었다. 현재 신세계백화점이 된 삼정(미쓰이) 재벌 계열의 삼월(미쓰코시)백화점이 1927~34년 충무로 1가 현 위치에 건립되었고, 삼중백화점도 1932~33년에 충무로 2가 24번지에 문을 열었다. 1939년엔 미도파백화점의 전신인 전가옥(조지아)백화점이 들어왔다. 일제시대의 3대 임대빌딩 중 하나인 천대전 빌딩도 1932년 남대문로에 건립되었다.

 

식민지 백성 현혹하던 고급 소비문화의 요람

» 명동과 을지로 입구 일대는 일제시대부터 금융과 쇼핑의 중심지였다. 맨 위부터 수많은 조선인의 원망을 샀던 동양척식주식회사(현 외환은행 본점 자리), 조지아백화점(현 롯데백화점 자리), 조선식산은행(현 롯데호텔 신관 자리).

남대문로가 금융과 대중소비의 요람으로 탈바꿈하는 것과 아울러 인근의 소공로와 명동 일대도 큰 변화를 겪었다. 당시 소공로에는 조선호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공회당, 사우공회의소, 은행집회소, 비전옥여관, 일본항공수송회사 객화취급소, 경성부 도서관, 기독교청년회 등이 들어섰다. 명동 일대에도 전가옥백화점이 들어 선 뒤 명동 입구에서 명동성당까지의 도로가 10m 폭으로 확장되면서 독립적인 상가가 형성됐다. 당시 명동은 충무로에 예속된 유흥오락가로 다방, 카페, 주점 등이 이미 밀집해 있었다.

이때부터 충무로 중심의 남촌은 명동과 남대문로 중심으로 점차 탈바꿈해갔다. 도심 집중이 가속화되자 일제는 예장동 통감부 자리에 있던 총독부를 1926년 경복궁 앞으로 신축해 옮겼고, 경성이사청에서 승격한(1918년) 경성부청(시청·현 서울시청 건물)도 1926년 현재의 위치(당시 경성신문사 터)로 신축해 옮겼다. 부청 자리엔 삼월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조선은행 앞 광장(일본인들은 줄여 ‘선은광장’이라 불렀다)을 중심으로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삼월백화점이 삼각축을 이루는 남대문통 랜드마크가 생겨났다.

1920년대 남대문통 시대가 열리면서 1910년대까지만 해도 엇비슷하던 북촌과 남촌의 경제력은 현격한 격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 상인들은 식민지 지배자로서 지위를 이용해 급속히 성장했고, 이는 도시 공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경성부 내 주요 공공건물 중 북촌에 위치한 것은 조선총독부 하나에 불과했고, 그 밖의 건축물 대부분은 남촌에 있었다. 남촌은 충무로 일대와 명동에서 인현동까지, 퇴계로 남쪽, 즉 남산동·회현동·예장동·필동·묵적동 일대에 걸쳐 있었다. 이들 지역의 주민 중 일본인 비율은 평균 90%에 달했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남촌 중심부인 충무로와 명동은 마치 일본을 옮겨놓은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일본을 거쳐온 서양의 신문화가 조선에 등장하는 무대가 이곳이었다. 여기서도 특히 백화점이 꽃이었다. 삼월백화점을 중심으로 밀집된 고급 상가들이 불야성을 이루는 충무로, 즉 혼마치는 경성 사람이면 누구나 가서 맘껏 소비하고 즐기고 싶어한 욕망의 해방구였다. 그러나 동시에 ‘내지인’으로 불린 일본인들이 식민지 지배층으로서 특권적 삶을 누리는 ‘선망과 배제의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 충무로·명동 일대의 백화점 등을 배회하며 옮겨다니는 무리를 ‘혼부라당’이라 불렀다. ‘혼마치를 방황하는 무리’란 뜻의 일본어 속어다. 모던보이나 모던걸의 겉모습을 한 이들은 제국주의를 통해 번진 자본주의적 소비욕망의 포로였지만, 동시에 탈권력화된 식민지 국민이기도 했다. 북촌에서 강(청계천)을 건너 혼마치로 몰려간 이들은 백화점을 배회하면서 고히(커피)와 칼피스를 마시고 재즈를 듣고 찰스턴을 추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북촌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꿈같은 남촌의 화려함을 뒤로한 채 돌아온 북촌은 더욱 깜깜하고 궁핍하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남촌의 화려함 뒤엔 ‘전통적 중심’ 북촌의 쇠락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서울의 도심 모습은 예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변화는 태평양전쟁 발발로 용산과 영등포가 도시 변화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 점이다. 1930년대부터 나타난 ‘대경성’이라는 이름과 함께 서울은 ‘대동아공영권’의 거점도시로 공간적 확장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남산 북쪽에 구축된 남촌과 남쪽에 조성된 신시가지가 연접되는 ‘대경성’의 한 현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전쟁에 패색이 드리워지면서 남촌의 화려함은 빛을 잃기 시작했으니 대경성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서민들 애환 맺힌 ‘정치의 광장’

1959년 8월25일 오전 10시께 남산 인근에 사는 부녀자 30여 명이 호미와 삽을 들고 남산의 한 공사장에 몰려갔다. 당시 주민들은 서울시 과학관 자리에서 공사 중인 육군 공병대와 충돌했고 공사는 중단됐다. 주민들은 공사로 인해 길이 막히면서 남대문시장을 다니는데 큰 불편을 겪게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앞서 5월 말부터 주민들이 서울시와 국회사무처에 항의를 해서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는데, 비가 오는 틈을 타 공사가 다시 시작되자 부녀자들이 나와 항의를 한 것이었다.

 

좌익에서 우익의 정치 집회장으로

» 일제시대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이승만 대통령 동상.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이 동상은 몸통 길이가 23.5척, 축대 높이를 합하면 81척으로 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동상이었다. (중략) 동상 건립에 필요했던 3억환가량의 자금은 전국 극장 입장권에 10~20환씩의 경축금을 부과해 해결했다”고 밝혔다. 동상은 1960년 4·19혁명 뒤 발파작업 끝에 해체됐다. 이승만의 호를 따 지었던 남산 정상의 우남정 또한 4·19때 파괴됐다가, 1968년 남산팔각정이라는 이름으로 재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이러한 시위의 근본 이유는 서울시청 맞은 편(현 서울시의회)에 있던 국회의사당을 남산으로 옮기기 위한 공사의 강행이었다. 국회의사당 신축을 위해 1959년 3월 중순 신축 부지의 나무들을 이승만 대통령 동상 뒤쪽으로 이식했고, 같은 해 7월부터 육군 공병대를 동원해 공사를 진행했다. 공병대는 1960년 6월 말까지 1차 공사를 끝낼 예정이었고, 건설 책임자들은 의사당 건립에서 한국의 전통적 축성 방식을 이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남산공원 자리에 의사당을 신축하고 장로교신학교 자리에 국회사무처 청사와 도서관 등 부속건물을 짓는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청사진도 나오지 않은 채 졸속으로 공사가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도로 문제도 해결하지 않은 채 진행됐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도시 서민들의 ‘폭력’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만약 남산에 국회의사당이 건립되었다면 서울의 모습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서울 남쪽의 복잡한 주거지와 상가·유흥가 단지로 둘러싸여 있던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지으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의 <애국가>에서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이었을까?

8·15 해방 직후 남산에서는 좌익 정치세력들의 정치 집회가 자주 개최됐다. 1946년의 3·1절 기념식은 그 신호탄이었다. 그해 3·1절 행사는 해방 이후 첫 번째로 맞이하는 행사였음에도, 반탁운동과 모스크바 3상협정 지지로 나누어져 있던 좌우익 세력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했던 것이다. 남산에서 행사를 마친 좌익 세력들은 남대문과 조선은행 앞을 거쳐 종로, 화신백화점 등으로 가두행진을 벌였다.

같은 해 12월29일에는 모스크바 3상협정 1주년을 기념하는 좌익 정치인들의 집회가 남산에서 열렸고, 이듬해 3·1절 기념식이 또 거행됐다. 그런데 1947년의 3·1절 기념식 때는 식후 남산에서 내려오던 좌파 그룹과 서울역에서 남대문을 향해 행진하던 우파 그룹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한 경관의 발포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당시 수도경찰청은 괴한들이 남조선노동당 본부가 있던 남대문 근처의 한 빌딩 옥상에서 우익 학생들을 향해 발포했는데, 이들이 노상에 낙하시킨 보자기에 소련 국기가 그려진 소련군표가 있었다고 하면서 모든 책임이 좌파에게 있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5월1일 메이데이 행사가 남산에서 개최됐는데, 행사 참여 학생 200여 명에게 퇴학 처분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말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면서 더 이상 좌파 그룹들은 남산에서 공개적으로 집회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남산은 이제 우파 그룹들의 행사장이 되었다. 대동청년단의 창립 1주년 기념식이 1948년 9월19일 남산광장에서 진행됐다. 1949년 8월9일에는 경찰관과 민보단(사회통제를 위해 조직된 준경찰조직)의 합동전투훈련 장소로 삼청공원과 함께 남산공원이 이용됐다.

남산이 훈련 장소로 이용될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과 달리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산 주변 지역은 비밀 아지트로 이용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김두한의 대한민족청년단 본부였다. 대한민족청년단 본부는 남산의 옛 동본원사 자리에 있었는데, 1947년 4월20일 수도경찰청이 돌연 이 본부를 수색했고, 이 과정에서 주검 1구와 부상자 10명을 발견했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우익 청년단체의 안가가 있었기 때문에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하기 위해 만났을 때 자신이 ‘남산’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던 것일까. 역설적이게도 김구가 암살된 직후 그 추종자들은 남산에 김구의 동상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우익단체 아지트도 들어서

남산 주변에는 유흥가들이 밀집해 있었다. 서울시는 1946년 12월 일제강점기 유흥가로 쓰였던 건물 26채 중에서 13채의 요정을 개방하고 여기에 2460명의 전재민을 수용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유흥가에 대한 르포가 1950년대 초까지 가끔 신문지상을 오르내렸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남산공원은 다양한 집회를 위한 공간으로 이용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매년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한 한-미 합동 예배가 남산에서 열렸다는 점이다. 이미 1946년 각파 기독교회들은 남산의 조선신궁 자리에 기독교박물관을 세우고 연합예배당을 신축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1953년 정전협정이 조인된 이후 부활절 행사가 한-미 합동으로 남산공원에서 매년 개최됐다.

» 이승만 전 대통령은 남산에 있는 자신의 동상 옆(현 백범 광장)에 국회의사당을 짓도록 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발로 공사는 유아무야되고 말았다. 사진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종교의 성지? 이승만의 성지?

1954년 4월17일 ‘촛불예배’로 시작된 부활절 행사는 이튿날 새벽 5시30분 테일러 주한 미8군 사령관과 함태영 부통령이 참석한 부활절 행사로 이어졌다. 이후 1955년 4월11일 부활절 행사에는 정일권 참모총장과 변영태 외무부 장관이 참석했으며, 1950년대 말까지 부활절마다 새벽 5시30분에 이승만 동상 앞에서 부활절 행사가 계속됐다. 당시 남산은 골고다 언덕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남산이 더욱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승만 동상이 들어서면서였다.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대통령의 약사(略史) 편찬 기념도서관, 기념체육관, 육영재단 건립 등을 추진하던 ‘80세 탄신경축위원회’는 행사의 일환으로 1955년 10월3일 개천절에 이승만 동상 기공식을 갖고, 이듬해 광복절에 완공식을 가졌다. 이 동상의 제작에는 2억6056만환의 예산이 투입됐는데, 이는 당시 공식 환율로 계산하면 52만달러가 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매년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 정부 재정과 국방비를 유지하고 있던 한국 정부로서는 대단한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면 왜 이승만의 동상을 남산에 세우려고 했을까? 이승만은 1950년 3월26일 76회 생일에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자신이 살았던 남산 지역에 대해 얘기했는데, 단지 그가 남산 근처에 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민족운동의 상징이던 김구의 동상을 세우려고 했던 것처럼 남산은 서울의 상징이면서 한반도의 중심을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59년 11월13일 남산의 팔각정 단청을 완성하고 이름을 이승만의 호였던 ‘우남정’으로 붙였다.

그러나 당시 남산의 실상은 ‘성지’가 아니었다. 서울 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남산에서 음독자살했다. 1958년 8월5일에는 ‘살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느니보다는 깨끗이 죽는다’는 유서를 서울시장과 서울시경국장에게 보낸 뒤 자살 미수에 그친 한 제대군인도 있었다. 1958년 11월1일에는 헌병대 소속 하사관이 음독자살한 채 발견되기도 했다. 또한 남산의 으슥한 곳에서는 변사체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서울의 상징’ 이면엔 서글픈 삶들이

남산 일대에 도시 서민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도 있었다. ‘남산동 변소사건’으로 알려진 1954년 6월의 일은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임신 7개월의 김송열씨는 지나다니는 데 불결하고 불편하니 변소를 허물라는 이웃집(판사)의 요구를 거절하고, 경찰이 변소를 허물자 판사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그런데 그 구속이 너무 가혹하다 해서 6월17일 석방되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서민들이 많이 모여살았기 때문에 남산에는 산불도 자주 일어났다. 1950년대 초에는 벌목이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1953년 이후에는 산불이 심심찮게 일어났고, 1959년 5월부터 1960년 1월 사이 산불이 집중적으로 발생하기도 했다.

남산이 하나의 상징이면서도 이렇게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내무부에서는 1954년 9월 남산공원과 장충단공원을 묶어서 현대적 대공원 설립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최초의 ‘재개발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 주택도 못 짓게 하고 학교와 교회도 철거하려고 했다. 물론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남산은 누구의 성지도 아니었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공간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의 중심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그 발가벗겨진 모습이 해방 공간과 1950년대를 통해 보여졌던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한국사

남산 남서쪽 기슭 ‘해방촌’

솔밭에서 월남민 모여사는 달동네로

‘해방촌’은 글자 그대로 8·15 해방 뒤 생긴 마을이다. 법정 명칭은 서울 용산구 2가이고, 행정동으로는 용산 2가동에 속한다. 용산 2가동에는 용산 2가와 더불어 용산 4가까지 포함돼 있다. 기슭을 내려온 평지에 조성된 미군기지가 있는 곳이 용산 4가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성저십리에 속해 한성부가 관할한 지역으로, 인가가 드문 솔밭이었다. 갑오경장 때까지만 해도 왕실과 문묘의 제사에 쓸 황소·양·돼지를 키우던 전생서(典牲暑)가 있었다. 일제는 남산의 북쪽과 서쪽 사면 기슭을 따라 각종 신사와 권력기관들을 배치시켰지만, 능선 너머의 남쪽 기슭은 크게 손대지 않았다.

그래서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이곳은 숲으로 둘러싸인 산림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곳에 1946년께부터 북쪽에서 내려온 주민들이 자리잡게 되면서 생겨난 마을이 곧 해방촌이다. 1945년부터 월남한 사람들은 당시 비어 있던 일본의 육군관사(한때 육군형무소)를 집단적으로 점거해 살기 시작했다. 이 관사들은 필동 2가에 있던 일본 주둔군사령부가 1908년 용산에 새로 건립된 청사로 옮겨오면서, 현재의 용산고 남쪽으로 길을 따라 대규모로 건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사람들이 무단으로 육군관사에 들어와 살자 퇴거명령을 내렸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미군정은 건물을 뜯어가도 좋으니 관사 터는 비워줄 것을 다시 요구했다.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자 1946년 미군은 이들을 강제로 퇴거시켰다. 이렇게 해서 쫓겨난 사람들이 현재의 해방촌 중 윗동네(이태원 쪽, 초기의 용산동)에 터전을 잡았다. 해방촌은 이렇게 시작됐다.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약간 아래쪽(후암동 쪽, 초기의 신흥동)에 또 하나의 거주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착자는 대부분 평북 선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선천은 기독교 선교가 일찍이 시작된 덕택에 기독교인이 많고, 또한 광산이나 해상무역 등으로 자산가들이 많던 지역이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선천 사람들은 북한의 공산주의 통치에 자연스럽게 반발했고, 이를 피해 남쪽으로 대거 내려왔다. 내려온 사람들 중 교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면서 교회 맞은편에 천막을 치고 살기 시작했다. 거주자가 점차 많아지자 이들은 1947년 사회부 장관과 교섭해 임시 천막 40여 개를 얻어 지금의 해방촌 자리에 정착했다. 이때 정착한 사람들은 400여 가구에 달했다. 이들이 자리잡은 곳은 바로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였다.

 

“이렇게 가까이에 역사의 현장이…”

통감관저 터·중앙정보부 건물 찾은 대학생들
“데이트 장소의 아름다운 추억이 아픈 역사에 대한 분노로 바뀌어”
지난 10월31일 오전에 남산을 찾았다. 서해성 교수의 ‘현대정치학 입문’ 수업 현장 답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학생들에게 친구들과 함께 참여하라고 했기에, 수업을 듣는 학생과 그 친구들까지 100여 명이 손을 맞잡은 채 남산을 걸었다. 우리처럼 서 교수도 친구를 모시고 왔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였다. 가을비에 흩날리는 은행잎이 예쁜 남산이었다.

» 10월31일 서울 남산 옛 중앙정보부 건물 앞에서 한신대 학생들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악명 높은 고문 장소였던 5별관 앞 터널은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남친과 자물쇠 달기 위해 처음 찾았던 남산

사실 전통사회에서 남산은 민중이 신성시하면서도 의지하는 공간이었다. 자신들의 복과 안녕을 기원하며 사람들은 남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남산은 사람처럼 제삿밥을 먹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대한제국은 나라와 백성을 빼앗기는 국치를 당했고, 해방 뒤엔 일상적인 국가 폭력이 자행되는 공간이었다. 1910년 그날 부동산 매매하듯 나라를 넘기는 도장을 찍었다는 통감관저 터와 중앙정보부 건물 여러 채를 두루 돌아보았다.

내가 처음 남산에 간 것은 남자친구와 함께 자물쇠를 달기 위해서였다(요즘 젊은이들은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는 의미에서 남산 전망대 울타리에 자물쇠를 채운 뒤 열쇠를 버리곤 한다-편집자). 하지만 두 분의 설명을 들으며, 남산 데이트의 추억은 나라 잃은 분노와 인권 말살의 공포로 변하고 있었다. 우리는 빗속에서 고기 ‘육’자라는 6국과 중앙정보부가 처음 들어섰다는 둔덕 위, 본관, 지하고문실 들머리를 차례로 살펴보았다.

“고등학교 때 근현대사, 특히 현대사를 상대적으로 적게 배운 것 같다. 우리 역사의 중요한 공간이 우리 주변에 이렇게 가깝게 있을 줄은 몰랐다.” 동행한 친구가 말했다. 나 또한 남산에 중요한 역사가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내 발밑의 땅이 남산이라는 것이 새삼 경이로웠다.

마지막으로 악명 높은 고문 장소였다던 제5별관으로 향했다. 별관은 반드시 터널을 지나야 했다. 이동하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대화로 터널 안은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이건 여기서 고통받은 사람들의 비명 소리야.” 서 교수의 한 마디에 소름이 돋았다.


외면해왔던 과거를 여는 열쇠 찾았으면

“간첩이 줄어들던 시절에는 어부가 물때를 아는 것을 국가기밀 누설이라고 몰고, 해병대는 뭐하는 곳이냐는 평범한 아줌마의 질문을 군사기밀 수집이라고 죄를 씌워 간첩으로 잡아다 고문했습니다.” 5국 앞에서 한홍구 교수의 설명을 듣는 동안 빗발이 유난히 거세어졌다. 급히 이야기를 끝내고 밥을 먹기 위해 유스호스텔로 향하는 터널에서 남자친구와 이곳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친구는 얼마 전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을 싸이월드에 올려놓았다. 멋있어서 올린 것이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그는 “독재·고문을 했던 것은 분명 나쁜 짓이지만 나라를 성장시켰으니 잘했다”며 “우리나라가 후진국이었으니 박정희 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왠지 거슬렸지만 그때는 딱히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이제는 좀 다른 얘기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남산에 처음 올라 채우고 온 자물쇠는 남산의 역사에 대한 우리 세대의 무관심이 채운 자물쇠는 아니었을까. 이다음에 남산을 찾았을 때는 우리가 외면해온 과거를 여는 열쇠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바람이 불자 빗물에 젖은 소나무가 무거운 어깨를 털어내고 있었다.

 

독재정권의 개발 빙자한 학대

제3공화국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남산 파괴가 이뤄졌다. 첫 번째 대규모 훼손은 세운상가 개발이었다. 종묘에서 남산에 이르는 축인 이 지역은 일본인 동네가 들어섰다가 이른바 ‘도시소개대강’(都市疏開大綱)에 따라 철거된 지역이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어지럽게 버려져 있던 것을 콘크리트 근대화의 표본으로 개발한 것이 그 흉측한 세운상가였다.

이 축은 남산의 직접적인 일부는 아닐지라도 북악과 한강을 잇는 풍수지리 축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서울 전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볼 때 남산을 지탱하는 동맥 같은 것이었다. 이런 곳을 시멘트 87만 부대와 철근 7천t을 쏟아부어 21만1200㎡(6만4천 평)의 콘크리트 상자로 막아버렸으니 이는 향후 남산 훼손의 비극을 알리는 천둥소리 같은 전주곡이었다.

» 1994년 외인아파트(오른쪽 위)가 철거되기 전 한남동 쪽에서 바라본 남산의 모습. 외인아파트와 하얏트호텔(왼쪽 위)에 가려진 남산의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다. 한겨레 자료

남산을 ‘반공의 메카’로 키운 군사정부

세운상가가 들어선 것과 비슷한 시기 종남산은 반공주의의 메카로 개발됐다. 제3공화국은 ‘반공’을 국시로 삼아 아시아 반공의 종주국이 되고 싶어했고 남산을 그 심장부로 낙점했다. 1962년 아시아반공연맹 임시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하면서 반공자유센터를 짓기로 한 것이다. 결국 장충단 일부와 울창한 녹지 6만여 평을 밀어낸 자리에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이 들어섰다. 원래는 더 큰 복합단지로 계획됐으나 아시아반공연맹 참여국들이 내기로 했던 분담금을 내지 않자 국제회의장을 포기한 결과였다.

그 부지가 왜 하필 남산인지에 대한 답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가 없었다. 오직 왜 남산이면 안 되는가라는 서글픈 역설만이 유효했다. 여기에서 선임자의 중요성, 즉 “쌓인 눈 위에 처음으로 난 발걸음을 뒤따르는 사람이 쫓아 밟게 된다”라는 만고의 진리가 다시 한번 확인된다. 적어도 남산에 대한 인식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제3공화국은 최소한의 양심과 미래 비전, 역사의식과 객관적 판단력이 결여된 제1공화국의 사생아일 뿐이었다. 남산이 안 되는 이유가 없는 한, 국유지였던 남산은 정권 맘대로 쓸 수 있는 내 집 안마당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남산이 안 되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전임자인 제1공화국이 너무도 확실하게 각인시켜놓았던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이라곤 전임자의 고마운 횡포를 방패 삼아 남산의 빈 곳을 골라 종횡무진 갉아먹는 무법의 약탈뿐이었다. 재향군인회관과 중앙공무원교육원 등이 장충단 일대에 잇따라 들어섰고 자유센터 코앞에 국립극장이 세워졌다. 남산 본자락에 훨씬 더 깊숙이 칼자국을 낸 것이다.

이런 건물들을 합하면 이른바 ‘신기념비주의의 종합선물세트’를 이루게 된다. ‘신기념비주의’란 2차 세계대전 이후 슈퍼파워로 급부상한 신제국 미국의 정치력을 과시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지어진 대형 공공건축 경향을 일컫는 말인데, 미국의 지배하에 놓인 제3세계 독재국가나 공산주의 국가로 바이러스처럼 번져나갔다. 서양의 고전주의와 근대양식을 콘크리트 거석 구조로 부풀린 뒤 그것을 권력의 힘과 동일시하는 전체주의 양식의 전형이다. 여기에는 공산주의에서 극우반공주의에 이르는 여러 종류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실리게 된다. 이런 시설이 하필 남산 기슭을 파고들면서 한국 현대사의 질곡은 본격화된다.

 

서울의 심장부를 외국인에게 내준 꼴

종남산의 동쪽 기슭이 포화상태가 되자 남산 훼손은 남쪽으로 옮겨갔다. 어린이회관, 남산공원, 외국인 주거단지, 외인아파트, 하얏트호텔 등이 연달아 들어섰다. 어린이회관과 남산공원은 서울시 전체의 부족한 땅 사정 아래에서 시민을 위한 공원시설을 세운 것이니 최소한의 타당성은 가질 수 있었지만, 나머지 세 시설은 외국에 남산의 심장, 나아가 서울의 심장을 내준 격이었다. 외국인 단독주택단지·외인아파트·하얏트호텔의 부지는 남산을 배경으로 삼고 한강을 내려다보는, 서울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명당이자 심장부이다.

외국인 단독주택단지는 하얏트호텔에서 남산체육관 사이 10만2300㎡(3만1천 평)의 경사지에 50채로 이루어진 단지였다. 소월길 위쪽으로 울창한 숲 속에 남향을 받으며 고급 주택들이 들어섰으니 서울 시내에서 이런 입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던 명당 중 명당이었다. 이 단지는 동쪽으로 외인아파트 두 동으로 이어지며 절정을 이룬다. 1972년에 16층·17층의 고층 아파트로 완공됐는데 높이로나 시설로나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건물이자 아파트였다.

이 두 곳은 당시로서는 서울 시내의 별천지였다. 이 일대만 지나가면 마치 외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외인아파트보다 더 깊은 숲 속에는 미8군의 종교휴양시설이 들어 있다. 기도소를 중심으로 한 산림 속 휴양시설이다. 단독주택단지와 외인아파트는 현재 식물공원으로 바뀌었지만, 지금도 축대가 많이 남아 있다. 경사진 부지에 단독주택을 짓기 위한 노력의 흔적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경관을 가장 해친 것은 하얏트호텔이었다. 공사가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일본 자본이 들어와 5년만인 1978년에 준공됐다. 무려 106m의 둥근 원호가 남산을 병풍처럼 막고 서 있다. 한남대교를 넘어 강북으로 들어오는 길에 남산타워와 함께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다. 정작 남산은 눈에 안 들어오고 두 건축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아마도 남산을 ‘학대’하고 있는 형국이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강북 쪽으로 조금 더 진입하면 외인아파트까지 가세해서 남산 학대의 절정을 이룬다

능선 하나 파내는 데도 신중을 가해야 하는 법인데, 그 전형을 남산에 해댔으니 이를 무슨 말로 설명할 것인가. 더욱이 그곳이 서울의 심장부인데, 이런 곳을 식민지에서 탈피한 지 30여 년이나 지난 뒤 외국인들에게 자진 납부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외국인을 위한 시설, 특히 고급 시설이 필요한 것까지는 이해한다 해도 왜 하필 그곳이 남산의 남쪽 자락이어야 했는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외인아파트와 하얏트호텔은 향후 전개될 능선 파괴의 교본이었다. 두 건물이 완공된 때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 아파트는 거의 5층짜리였다. 고층 아파트는 그 수도 적었을뿐더러 압구정동 같은 평지에 지어졌다. 이런 시절, 남산을 파헤치고 고층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서울 시민들은 건물을 저렇게도 지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산도 저렇게 했는데 다른 곳의 이름 없는 능선쯤은 아무리 파내고 훼손한들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아파트를 짓기 위해서라면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자연에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흉악한 인식을 머릿속에 각인시킨 격이었다.

박정희는 국토 전체에 대해서는 자연보호와 산림녹화를 국가정책의 우선순위에 놓았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벌거숭이로 벗겨진 전국의 산에 나무를 열심히 심고 가꿔 지금의 푸른 숲을 일군 주역은 분명히 박정희였다. 그러나 유독 남산에 대해서만은 잔혹하리만큼 훼손을 했다. 순수한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고, 근대화에 따라 각종 공공시설을 지어야 하는 필요성은 급박했을 것이다. 돈도 땅도 없는 상태에서 남산은 제일 먼저 털어 쓸 수밖에 없는 저금통으로 인식됐을 터다. 여기까지는 최소한의 상식적 논쟁의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대목이다. 흔히 얘기하는 개발론 대 보존론의 논쟁 대상이 될 수 있다.

 

산림녹화 내세웠지만 유독 남산엔 잔혹

문제는 외국인 시설과 중앙정보부 건물이다. 이는 개발론에서 허용될 수 있는 진정성의 범위를 한참 벗어난 만행이다. 여기에서 박정희의 이중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근대화에 대한 그의 충정은 이해되지만 그에게 최우선 순위는 국가 근대화가 아니라 자신의 독재권력 유지였다는 이중성이다. 남산에 가한 학대를 보면 단순히 역사인식이나 문화의식이 없다는 말 정도로는 설명이 안 된다.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 가능한 모든 수단은 총동원했으며 남산도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공과(功過) 논쟁에서 과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차지하는 데 안타깝게도 남산이 그 중심에 있다.

 

중정 건물 보존 미묘한 메아리

남산 옛 중앙정보부 6국 철거 내년 6월 이후로 늦춰… 서울시장 선거 쟁점 떠오를 듯
올해 허물기로 돼 있던 서울 남산 옛 중앙정보부(중정) 건물이 그 생명을 시한부로 연장받았다. 서울시는 “균형발전본부 청사(옛 중정6국)를 올해 안에 철거할 계획이었으나 내년 6월 이후로 늦추기로 했다”고 지난 11월19일 밝혔다.

» 내년 6월까지 철거가 미뤄진 옛 중앙정보부 6국 건물. 끌려온 이들이 심하게 치도곤을 당하곤 했는데, 그 때문에 고기육(肉)자를 써 ‘육국’이라고도 불렸다. 군부독재 시절 학원사찰의 거점이던 이 건물에는 현재 서울시 균형발전본부가 입주해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시는 지난 3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통해, 올해 서울시 균형발전본부 청사 철거를 시작으로 2011~2012년 소방재난본부와 교통방송 건물까지 철거해 공원과 지하 주차장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을 보면, 중정과 관련한 모든 ‘흔적’은 2015년까지 남산에서 사라지게 된다.

 

시민단체·<한겨레21> 지적 뒤 나온 발표

이에 학계와 전문가 등은 시민단체 ‘역사를 여는 사람들 ㄱ’(이하 ‘ㄱ’)을 만들어 남산의 중정 건물 등을 보존하자는 운동을 펼쳐왔다. 역사 교육을 위한 박물관으로서의 보존 가치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한겨레21> 또한 774호 표지이야기776호 특집 기사를 통해 기존의 ‘유적’을 온전히 보듬은 평화공원으로 남산을 재편할 밑그림을 기사화한 뒤, 기획연재 ‘돌아온 산, 남산’을 통해 ‘ㄱ’과 공동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현장인 아우슈비츠를 보존한 독일을 비롯해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불행한 역사를 기념관으로 만든 사례는 해외에도 많다”며 “남산의 옛 안기부 청사를 평화와 인권의 기념관으로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물론 서울시는 지난 10월까지도 올해 안 철거 의사를 공공연히 밝혔다.


그러던 서울시가 방침을 바꿔 다음달부터 ‘남산 예장자락 재정비사업 타당성 조사 및 기본설계 용역’ 사업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내년 6월까지 계획된 이 조사로 모든 철거가 보류되며, 조사의 진척도나 결과에 따라 철거가 더 미뤄질 수도 있다.

“타당성 조사는 철거 이후 조성될 주차장의 수용 규모, 여러 시설들의 적절한 교통 흐름 예측 등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시 실무자는 설명한다. 특히 “균형발전본부 청사가 철거될 경우 신청사 입주 때까지 임대료를 내고 별도 건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 등을 고려해 철거 시기를 늦춘다”고 강조한다.

명쾌하진 않다. 불과 10개월 전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 발표 당시, 기존 시설의 예상 임대비조차 계산하지 못했다면 더 비판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정이 추가됐다는 분석이 뒤따르는 이유다.

백현식 서울시 남산르네상스담당관은 “임대비 등의 문제로 철거 계획은 올 4월에도 한 차례 미뤄진 적이 있다”며 “이번 타당성 조사는 중정 건물을 철거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도 “용역 조사 기간에 각계 의견을 듣고 감안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8월부터 건물 보존 운동을 본격화해 온 ‘ㄱ’은 고무된 표정이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소설가 서해성씨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오세훈 시장이 내년 6월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부담을 가졌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후보들에 보존 공약 요구할 것”

‘ㄱ’은 현재 시민 모금을 진행 중이며, 옛 중정 건물 4곳을 직접 사들인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자연유산을 사들여 보관하는 내셔널 트러스트에 비견될 수 있는 역사 신탁(History Trust) 운동이다. 서해성씨는 “직접 구입한다기보다 공동 주인으로서 보존 비용, 사용료 등을 함께 나눈다는 개념으로 추진 중”이라며 ”건물 철거가 서울시장 선거 시기 이후로 미뤄진 만큼 차기 후보들에게 이 건물들의 보존을 공약으로 요구할 방침”이라고 말한다.

 

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되다

완곡어법(婉曲語法)이 있다. 어떤 대상을 직접 지칭하는 대신 모호하고 우회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표현법을 말한다. ‘남산’은 중앙정보부(중정)의 완곡어법이었고, 중앙정보부장은 ‘남산의 부장’이었다. 권위주의 시대 중정은 권력과 공포의 대상이었고, 언제부터인가 국민은 중정 대신 남산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중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한국에는 마땅히 정보기관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장면 정권하에서 이후락이 지휘하던 중앙정보위원회(79호실) 정도가 있었지만, 단순한 정보수집팀에 불과했지 국내외 정보의 수집과 판단, 공작과 수사를 전담하는 어엿한 정보기관은 아니었다. 5·16 쿠데타 이틀 뒤인 5월18일, 김종필은 육군본부 전략정보과에 근무하던 이영근과 서정순을 불러 정보부 창설을 위한 법을 입안하라고 지시한다. 김종필의 지시가 있은 지 불과 한 달 만인 6월20일 중앙정보부법이 공포된다. 중앙정보부법을 기초했던 이는 박정희 소장의 법무참모였던 신직수였는데, 이후 신직수는 유신헌법을 기초한 뒤 제7대 중정 부장이 되어 유신체제 수호의 최전방을 지휘한다.

» 나무에 반쯤 가려진 옛 중앙정보부 수사국. 서울 남산1호 터널 바로 옆에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남산에 산재한 중정 건물 40여 개

중정이 창설되자 김종필 부장과 두 명의 차장은 서울 태평로 사무실(국회 제3별관)을 썼다. 2국은 남산 북쪽 숭의학원 인근에 있던 이후락의 정보연구실 건물을, 3국은 무교동의 서린호텔 자리, 서울분실은 남산 3호 터널 입구의 사무실을 썼다. 당시는 초창기여서 6개 실·국이 모두 들어설 수 있는 건물을 확보할 수 없었을뿐더러 보안상의 이유로 조직을 한 곳에 집결해서도 안 되었다. 중정 본청 부지 마련을 위해 이영근이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며 찾아낸 곳은 동대문구 이문동 부지(실제로는 성북구 석관동 산 1-5번지 의릉터)였다.

중정은 발족과 더불어 의릉터 전역과 이웃 토지 일부를 포함해 13만 평의 부지를 점령해 중정 청사터로 사용했다. 조선시대 왕이 누렸던 절대 권력에 대한 동경이었을까? 중정이 의릉(경종)터에, 이후 국가정보원이 영릉(세종)터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의릉터가 중정의 소재지였다.

그러나 서울의 동쪽 교외에 위치한 의릉터와는 별도로 남산 중턱, 정확히는 중구 예장동 4-5번지 일대에 또 하나의 정보부가 있었다. 의릉 본청이 자료 수집·보관, 교육·훈련, 해외 업무 등 배후적 기능을 담당한 반면, 남산 중턱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별관에는 대공 및 국내 정치를 다루는 중정의 핵심 부서가 모두 입주해 있었다. 중정 부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도 석관동 청사보다 예장동 청사에서 주로 근무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4개 동에 불과하지만, 서초구 내곡동으로 국정원 청사가 이전하기 직전까지 남산에 산재하던 중정 건물은 무려 40여 동에 이르렀다. 1972년 남산 본관이 준공되기 전부터 중정 부장들은 본청이 있던 석관동이 아닌, 청와대를 마주 보는 남산 중턱의 집무실에서 근무했다. 대통령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기 위해서다.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세간의 호칭이 생긴 것은 이 때문이다.

중정이 남산에 들어선 뒤 남산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대한제국 시대 이래로 남산은 공원(한양공원)이었다. 그러나 정보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남산은 휴식과 충전이 아닌 공포와 억압의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를 주도한 이가 ‘남산 멧돼지’로 불린 제4대 중정 부장 김형욱이다. 김형욱은 6년3개월 동안 남산의 주인으로 군림하면서 정권 수호에 앞장선다. 김형욱 재임 기간 중 발생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목록만 봐도 그가 박정희 장기 집권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알 수 있다.

 

정권 유지 첨병이었던 ‘남산의 부장들’

1963년 7월 김형욱은 중정 부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지휘한다. 그해 10월15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 박정희는 민주정의당 후보 윤보선을 겨우 15만6026표(1.5%)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는데, 선거 승리의 일등 공신이 김형욱이었다. 김형욱은 야당을 분열시켜 후보가 난립하도록 했고, 특히 자유민주당 후보였던 송요찬을 석연찮은 이유로 구속한 뒤 후보를 사퇴하도록 했다. 김형욱은 1967년의 이른바 6·8 부정선거에서도 신민당의 재정을 후원하던 김재화를 협박해 신민당 전국구 후보에서 사퇴시켰다. 김재화의 사퇴로 선거자금 유입이 차단된 신민당의 선거운동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김형욱은 주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조직사건을 발표해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무산시켰다. 1964년 8월의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과 1967년 7월의 동백림 사건이 대표적이다.

조직사건은 피의자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45회 국회 법사위 회의록(1964년 10월21일)을 보면, 도예종을 비롯한 인혁당 관련자 26명 중 20여 명이 전기 또는 물고문을 당했다. 심지어 김형욱 본인도 그의 회고록 <혁명과 우상>에서 인혁당 수사가 무리한 수사였음을 토로했을 정도다. 동백림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시인 천상병은 친구인 강빈구가 독일 유학 중 동독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막걸리 값으로 1500원을 받은 것이 빌미가 되어, 간첩과 내통하고 간첩자금을 수수한 ‘국사범’이 되었다. 중정에서 받은 극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시인은 출소 뒤 폐인이 돼버렸다.

»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위세를 떨친 ‘남산의 부장들’. 왼쪽부터 김형욱, 이후락, 신직수.

미군이 사용하던 남산의 원형 콘센트 막사 2개 동(개당 100평)에서는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것을 제외하고는 불가능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순진무구한 시인 천상병의 경우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로 얼마든지 국사범이 될 수 있었다. 당시의 남산은 최종길 서울대 교수처럼 동생이 중정 감찰실 직원이어도 앞일을 알 수 없는 곳이었는데, 하물며 간첩 혐의로 끌려간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 김형욱의 중정은 부당한 선거 개입, 야당(정치인) 탄압, 간첩단 사건, 고문, 협박, 시장경제 질서 교란(<경향신문> 강제 매각) 등 정권 안보에 앞장서는 정보기관의 전형을 창출했고, 청와대를 마주하고 있던 남산의 콘센트 막사에서 그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

 

영구 독재 꾀한 ‘풍년사업’ 주도하기도

‘포스트 김형욱’ 시대의 남산은 그 역할이 더욱 증대되었다. 남산은 7·4 남북 공동성명을 계기로 반공의 수호신에서 남북 화해의 선도자로 변신을 준비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비밀리에 ‘풍년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만의 총통제와 프랑스의 드골헌법을 근간으로 중정에서 초안을 마련하고, 법무장관 신직수의 수정을 거쳐 유신헌법이 완성되었다. 국가의 골간인 헌법이 국회가 아닌 남산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당시 한국 정치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풍년사업의 성공으로 남산은 더욱 강력해졌다. 박정희가 경제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이후락과 신직수는 국가 안보를 전담했다. 긴급조치를 통해 남산은 강력하고 난폭해졌다. 그럴수록 남산에 대한 국민의 공포는 커져만 갔다. 최종길 사망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등이 이 시기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법률가 출신 신직수가 남산의 부장이 되자 남산은 법질서 확립을 전면에 내세운다. 1975년 3월18일 국가모독죄를 신설한 형법 개정안이 날치기 통과되었다. 이 법은 국내외의 외국인 또는 외국 단체 등을 상대로 사대적(事大的) 행위를 한 모든 사람을 처벌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국내외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하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또한 이 법은 국내의 야당 정치인들이 외신기자나 국제 인권단체 인사와 접촉하려는 시도 자체를 봉쇄했다. 신직수 시대 남산이 법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한 대표적 사건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이미 1964년에 고초를 겪었던 제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이번에는 긴급조치 4호 아래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돼 다시 구속되었다. 고문수사가 이루어졌고, 사건 발표 1년 만에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사형 확정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2007년 1월23일 서울중앙지법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이 사건은 법률가 출신 정보부장하에서 가혹한 고문수사를 통해 만들어진 ‘법살’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김종필이 씨를 뿌리고, 김형욱이 싹을 틔웠으며, 이후락과 신직수가 꽃을 피우고, 김재규가 종말을 선언한 남산의 중정은 전두환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 1981년 1월 중정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출범했지만, 안기부의 새로움이란 중정의 ‘정보 및 보안 업무의 조정·감독 기능’을 ‘기획·조정’으로 변경하고, 반공법 위반 범죄에 대한 수사권까지 확보하는 것이었다, 남산은 정권이 바뀌고 명칭이 바뀌었지만 본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국민의 머릿속엔 여전히 억압과 공포의 상징인 남산이 있을 뿐이었다.

유학성(11대), 노신영(12대), 장세동(13대), 안무혁(14대), 배명인(15대), 박세직(16대), 서동권(17대), 이상현(18대), 이현우(19대), 김덕(20대)을 거쳐 권영해(21대)에 이르기까지 11명이 남산의 부장 자리를 거쳐갔다. 그 사이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1982년 12월), 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1985년 9월), KAL 858기 폭파사건(1987년 12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1990년 10월), 남한조선노동당 사건(1992년 10월) 등 굵직굵직한 조직사건들이 발생했고, 그 사건 현장에는 남산의 안기부가 있었다.

 

“남산이 남산을 떠나야만 했던 상황”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정권과 체제 수호의 상징이던 안기부가 서울 도심의 한복판 남산에 계속 머물러 있기에는 안기부도 국민도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민주화와 함께 세상이 변했고, 남산도 변해야 했다. 안기부의 청사 이전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국가 정보기관으로의 변화라는 시대적 요구에 안기부가 부응한 결과다. 손정목의 표현처럼 “남산이 남산을 떠나야만 했던” 상황이 온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우리에게 남산의 경험과 이미지가 반드시 부정적으로 작용했던 것만은 아니다. 남산은 국민에게 이른바 ‘형성적 경험’(formative experience)을 제공했다. 남산의 폭력성을 직접 체험하거나 목격한 다수의 사람들이 남산 체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들은 폭압적 국가기구와 권위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중정과 안기부에 대한 부정적 경험이 이른바 민주화세력을 형성하고 민주화를 달성하는 긍정적 힘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명박 시대의 국정원이 새겨둘 만하다.

육영재단의 뿌리도 남산

‘거대한 흉물’ 강제 매각 뒤 능동으로 이사

»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
과거 개발독재 시절 위정자들은 큰 공간이나 건물이 필요할 경우 남산을 곶감 빼먹듯이 이용했다. 지금은 동국대의 일부가 된 중앙공무원교육원, 재향군인회관 등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동생 근령씨와 관련해 종종 언론을 타는 육영재단도 그 시작은 남산이었다.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씨가 주관하는 재단법인 육영재단이 출범하면서 남산 중턱에 어린이회관(현재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사진)을 짓기 시작했다. 이듬해 7월 지하 1층 지상 18층짜리 거대한 건물이 지어졌고, 언론은 “동심의 궁전” “여기는 우리들 세상” “동양 최대의 어린이회관”이라며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그런 축포와 달리 어린이회관은 불편함이 많았다. 교통편이 나쁠 뿐만 아니라 남산 중턱에 있어 어린이들이 걸어 올라가기 힘들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어린이회관을 국립중앙도서관에 넘기고 어린이회관은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옆으로 이전하도록 지시했다. 장소가 비좁아 여의도 쪽 새 이전지를 물색하다 졸지에 산으로 올라가게 된 국립중앙도서관으로서는 ‘폭탄’을 맞은 셈이었지만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1974년 정부(국립중앙도서관)는 8억4천만원에 어린이회관을 인수하고, 을지로 1가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 터는 8억3600만원에 롯데그룹에 특혜 매각돼 롯데호텔이 들어섰다. 육영재단은 8억4600만원으로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부지 3만여 평을 할애받아 지하 1층 지상 4층 연건평 5200평의 번듯한 새 회관을 지어 이사했다.

겉으로 보기엔 각 기관의 독자적 판단에 따른 자연스런 거래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내무국장 등을 역임한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이같은 삼각거래에 얽힌 뒷이야기를 소개하며 “이런 일련의 독재 행위를 당시 어떤 매스컴도 보도하지 않았고 따라서 일반 시민은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며 “제3·4공화국 정권이 어떤 것이었는지 박 대통령의 절대권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어린이회관에 부적합했던 건물이 도서관에 적당할 리 없었다. 구조적으로도 적합하지 않고, 지하 서고 또한 너무 습해 장서가 변질·부패될 우려가 컸다. 또 장소가 협소해도 증축이 불가능했을뿐더러, 이용객이 찾아오기에도 너무 멀었다. 결국 국립중앙도서관은 1988년 서초구 반포동 현재 위치로 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