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측…혜초…명성 화려해도 유적엔 쓸쓸함만 선현의 체취가 배어있는 시안
시안 곳곳에는 우리 선현들의 고귀한 발자국이 찍혀 있다. 그 자국들을 하나하나 추적할 때면 늘 그 분들의 훈훈한 체취를 가슴 뿌듯이 느끼곤 한다.
시안에서 처음 찾은 곳은 시내 동남쪽 24㎞ 지점의 교외 야산 기슭에 있는 흥교사(興敎寺)다. ‘호국흥국사’라고 씌어진 벽돌 정문을 들어서니 고색 짙은 대웅전이 나타난다. 안에는 금동와불상을 비롯해 당대부터 청대까지 조성한 불상들이 보인다. 눈길 끄는 것은 미얀마에서 보내온 높이 30㎝ 가량의 백옥좌불상이다. 아담한 체구에 통통한 얼굴, 금칠한 주름가사를 걸친, 청아하기 이를데 없는 불상이다.
시안에 올 적마다 행여 해초 스님의 부스러기 정보라도 얻을까
대웅전을 나서니 오른쪽 벽돌담장 너머 숲에 싸인 고탑 3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운데 우뚝 솟은 탑이 높이 23m나 되는 현장탑(玄##壯+大塔:일명 삼장탑)이다. 그 오른쪽은 기사탑(基師塔), 즉 규기탑(窺基塔)이고, 왼쪽은 측사탑(測師塔), 즉 원측탑(圓測塔)이다. 원측탑은 5층 현장탑보다 훨씬 낮은 3층 전탑이나, 그 주인공은 신라 왕손 출신으로 불학에 일가견을 이룬 원측(613~696) 법사다. 우리는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고 두손 모아 예를 올렸다. 1층에 법사의 진흙상이 새겨져 있다. 그는 15살 때 중국에 들어가 장안에서 고승들로부터 수학한 다음 인도에서 돌아온 현장삼장의 문하생으로 역경과 학문에 정진해 수제자가 된다. 스승과 더불어 우주만물의 본질을 인식하는 유식학을 깊이 터득해 중국 불교의 핵심인 법상종을 일으켰다. 법사는 산스크리트어 등 외국어에 비상한 재간이 있어 경전 번역에도 큰 업적을 쌓았다. 삼장의 다른 제자인 규기쪽이 ‘현장의 지식을 가로챘다’는 등의 터무니 없는 시기와 모략을 폈지만 원측은 <유식논서십권> 같은 명저들을 남긴 유식학 대가로 오늘날까지 명성이 이어진다.
신라왕손 원측 뛰어난 업적 찬사
필자가 절을 찾은 또다른 이유는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와 이 절에 보관해온 패엽경(貝葉經) 진본(너비 10㎝, 길이 80㎝) 을 보려는 것이었다. 패엽경이란 종이가 없던 시절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나는 탈라라는 나무의 잎사귀에 적은 불경본을 말한다. 초기 불경은 물론, 종이 연구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유물이다. 공교롭게도 절쪽에서는 유물 관리자가 열쇠를 지닌 채 외출했다며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문 틈으로 보관함을 흘겨보기만 했다.
아쉬움 달래며 절을 떠나 서남쪽으로 1시간쯤 달렸다. 혜초기념비가 있는 쩌우즈현 (周至縣) 진펀(金盆)댐 기슭에 이르렀다. 혜초는 인도에서 돌아와 만년 오대산에 들어가기 전까지 50여 년 동안 장안에 머물렀다. 스님만큼 오랫동안 장안에서 활동하면서 발자취를 남긴 한국인은 드물다. 스님은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로 꼽히는 <왕오천축국전>을 펴냈을 뿐 아니라, 천복사와 대흥선사에 주석하면서 밀교 연구와 전파에 한생을 바쳤다. 천복사에서 스승 금강지와 8년간 밀교경전을 연구하고, 대흥선사에서는 또다른 스승인 불공삼장의 강의를 수강하며 그의 6대 제자 중 한 사람이 됐다. 관정도량 등의 밀교의식을 주도했으며, 스승이 입적했을 때 그가 제자들을 대표해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을 짓기도 했다. 궁중 원찰인 내도량에서 ‘지송승’이란 중책을 맡고 황제가 사는 대명궁에 수시로 드나들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스님에 관한 우리의 연구는 너무나 미흡하다. 이런 송구함이 늘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아, 시안에 올적마다 행여 스님에 관한 부스러기 정보라도 얻을까 늘 귀를 쫑긋하고 다녔다. 지금 찾아가는 길도 그런 바람 때문이다. 꼭 10년 전 늦가을, 궂은 비 내리는 가운데 묻고물어 시안에서 150리쯤 떨어진 쩌우즈현 헤이수이취(黑水谷)에 있는 선유사의 옥녀담(玉女潭) 거북바위를 찾아갔다. 774년 1월 스님이 대종의 명을 받아 기우제를 지낸 곳이다. 철야기도 이레만에 마침내 명주실 같은 감로수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그때 선유사 관리원은 어쩌면 필자가 옥녀담을 보는 마지막 한국 손님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과연 선유사와 옥녀담은 몇 해 뒤 그 곳을 흐르는 흑하를 막아 댐을 만드는 통에 수몰되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댐이 지금의 진펀댐이다.
‘혜초기념비’ 지원 끊겨 4년만에 낡아
진펀댐 관리소는 고개마루에 있다. 이곳에서 나지막한 산기슭에 옭겨다 지은 선유사 탑과 2001년 세운 ‘신라국고승혜초기념비’ 정자가 아스라히 보인다. 우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유사 주지 창핑 스님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며칠 전 내린 비 탓에 질퍽거리는 황토흙과 풀숲을 헤치며 스님을 따라 갔다. 정자는 그런대로 아담해 보이나, 비석은 관리가 너무 허술하다. 세운지 4년밖에 안되었는데도, 비문 글자가 군데군데 떨어져나가고, 낙서마저 덮치니 마냥 몇 백년 된 낡은 유물처럼 보인다. 또 선유사는 탑만 뎅그러니 옮겼을 뿐, 시설은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오가는 길도 없다. 안타까운 마음에 이유를 물었더니, 스님은 수심어린 표정으로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기념비 제막식에는 몇몇 한국인들이 왔으나, 지금은 오는 한국인들이 별로 없다고 한다. 마음을 후비는 채근인 셈이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고 하니 한걸음에 거처를 다녀와 땀에 밴 옷을 새옷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정자 곁에는 ‘혜초기우제평’이라고 새긴, 옥녀담 거북바위에서 뜯어온 돌 한 덩어리가 놓여 있다. 그 돌 덩어리를 보는 순간, 수몰 전 옥녀담과 그 위에 가로 놓였던 다리, 그리고 다리 너머에 있던 선유사의 모습이 삼삼히 떠오른다. 정자에서 수몰된 터를 바라보니 물보라에 가려 온통 뿌옇고 갑문만 희끄무레하게 보일 뿐이다. 착잡한 심경 속에 50미터쯤 내려오는데, 웬 비석이 앞을 가로막았다. 당나라의 시와 미주(美酒)를 사랑했다는 일본 서예가를 기려 2년 전 세운 비석이다. 혜초 기념비보다 한결 깔끔하다. 별 연고도 없는 곳에 비를 세운 까닭이 무엇일까. 씁쓸한 의문을 남겨놓고 발길을 돌렸다.
승려말고도 장안에 발자국을 남긴 선현들로는 불원천리 이곳에 파견된 사절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건릉의 사절석상과 이현묘(李賢墓)의 예빈도(禮賓圖) 속에서 그들 면면을 찾아볼 수 있다. 시안 서북쪽 80km 지점에 있는 건릉은 당나라 3대 황제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묘다. 500미터의 참배길 동서 양쪽에 머리가 잘려나간 61기의 외국사절석상이 늘어서 있는데, 동군은 동쪽 나라, 서군은 서쪽 나라에서 온 사절들이라고 한다. 원래 사절의 국적과 이름은 각기 상의 등에 새겨져 있었으나 대부분 닳아 없어져 호탄국 등 4개국 사절만 확인될 뿐이다. 관심거리인 신라 사절은 복식과 체형상 특징으로 볼 때 긴 망토형 두루마기를 여며 입고 허리에 띠를 맨 동군의 제3열 제2상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 ‘혜초기념비’가 세워진 시안 쩌우즈현 진편 댐 기슭의 선유사에서 만난 주지 창핑 스님. 답사단을 보내며 아쉬운 듯 합장한 채 인사를 했다. |
늘어나는 한국 관광객 선현부터 찾았으면
이현묘의 예빈도에 등장하는 사절의 신분은 좀더 확실한 추정이 가능하다. 이현(654~684)은 고종의 여섯째 아들로서 장회태자로 봉해졌으나 어머니 측천무후의 박해를 받아 유배되었다가 자결을 강요당한다. 그의 형인 중종이 등극하자 동생을 복권시켜 건릉 곁에 묻었다. 그의 묘에서 발견된 예빈도는 묘길의 양쪽 벽에 그려진 것인데, 서벽은 파손되고, 동벽의 것만 남아있다. 이 남은 그림 속에 외국사절 3명이 보이는데, 그중 조우관(새깃을 꽂은 모자)을 쓴 사절이 하나 보인다.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는 지금껏 논란거리다. 벽화의 사료적 가치도 높고 하여 이 벽화를 소장한 산시성 박물관을 찾아갔다. 어렵사리 관리자인 판공실 주임을 만나 실물을 봐야할 필요성을 거듭 역설했다. 하지만 벽화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난 뒤로는 매주 월·수·금 오후 3~6시에만 전담자가 공개한다면서 오늘은 화요일이니 불가능하다고 잡아뗀다. 실물은 못 보고 현관 모사도에서 조우관을 쓴 사절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지금은 신라인 설에 무게가 쏠리지만, 고구려인이란 주장도 있다. 어쨌든 조우관을 쓴 사절이 한반도에서 온 사람임에는 틀림 없으니 그 정도 확신으로도 안도감을 느꼈다.
시안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은 날로 늘어난다고 한다. 몇몇 명소에만 현혹되지 말고, 선현들의 체취가 밴 곳들을 우선 찾아가 참뜻을 새기고 기리는 것이 후손들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삼국시대 1천여명 추정 서역문물·불교문화 길잡이로
중국 유학파 구법승들
학계는 6~10세기 1000명에 가까운 이 땅의 승려들이 중국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시대인 6세기 초중기부터 남조에 고구려의 의연·지황, 백제의 겸익·현광, 신라의 각덕·원광 등 다수의 구법승들이 파견된 기록이 보인다. 7~9세기 수, 당대는 가히 ‘입중구법’의 전성기로서 명랑, 자장. 의상, 원측, 도륜, 도증, 승장, 혜각 등 불교사에 남은 걸출한 승려들이 앞다퉈 건너갔다. 현장을 도와 법상종을 개창한 원측, 황룡사 구층탑을 세운 주역인 자장, 해동 화엄종을 일으킨 의상 등의 활약상은 익히 알려져 있다.
당대 장안 도심에 있던 자은사, 대흥선사, 보수사, 영감사 등 주요 사찰에서는 상당수 신라 승려들이 주석하거나 공부했다. 혜초나 원측처럼 황실의 신임을 얻어 고승대덕 반열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과 서역을 거쳐 ‘천축국’으로 불리던 인도까지 순례를 떠난 승려들도 많다. 인도 순례승하면 우리는 대개 혜초만을 기억하지만, 당의 승려 의정이 지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을 보면 인도에 갔다가 현지에서 입적한 아리야발마, 혜업, 현각 등의 낯선 신라 승려들 이름이 다수 언급되어 있다.
외국어에 능통했던 장안의 신라 승려들은 서역 불경을 번역하는 역경사업에 큰 공로를 남겼다. 귀국한 구법승들을 통해서는 서역에서 입수한 불경 번역본과 산물들이 국내에 전파되었다. 통일신라 말 중국에서 선종을 익힌 도의, 혜철, 체징 등은 귀국 뒤 이땅 곳곳에 선문을 열어 후삼국, 고려시대의 역사 전개를 이끈 정신적 주역이 되었다. 구법승은 ‘법수(法水)’로 불리운 서역·중국의 선진 불교 문화를 한반도에 터준 ‘파이프라인’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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