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 속으로 난 길
─한시의 언어 미학
푸른 하늘과 까마귀의 날개 빛깔
연암 박지원의 <답창애(答蒼厓)>란 글에는 동네 꼬마가 《천자문》을 배우는 데 게으름을 부리자, 선생이 야단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야단맞은 꼬마의 대답이 걸작이다. “하늘을 보면 푸르기만 한데, ‘하늘 천(天)’ 자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 싫어요!” 《천자문》을 펼치면 처음 나오는 말이 ‘천지현황(天地玄黃)’이다. 그러고 보니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 했다. 꼬마의 생각에는 암만해도 하늘이 검지 않고 푸른데, 책 첫머리부터 당치도 않은 말을 하고 있으니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고 만 것이다.
저 까마귀를 보라.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하지만 홀연 유금(乳金)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石綠)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췻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이를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까마귀는 본디 정해진 색깔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린다. 어찌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겠는가.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버린다.
연암이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에서 한 말이다. 《천자문》이 푸른 하늘을 검다고 가르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았던가? 까마귀의 색깔 속에 감춰진 많은 빛깔을 관찰한 적이 있었던가? 연암은 이렇듯 시인에게 죽은 지식이나 고정된 선입견을 훌훌 털어버리고, 건강한 눈과 열린 가슴으로 세계와 만날 것을 요구한다. <답경지(答京之)>에서는 또 이렇게 적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 그늘진 뜨락에 이따금 새가 지저귄다.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외치기를, “이것은 내 날아가고 날아오는 글자(飛去飛來之字)이고,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하는 글(相鳴相和之書)이로다.” 하였다. 오색 채색을 문장이라고 말한다면, 이보다 나은 문장은 없을 것이다. 오늘 나는 책을 읽었다.
이른 아침 무성한 나무 그늘에서 노니는 새들의 날갯짓과 지저귐 속에서 연암은 글자로 쓰이지 않고 글로 표현되지 않은 ‘불자불서지문(不字不書之文)’을 읽고 있다. 새들의 날갯짓이 주는 터질 듯한 생명력, 조잘대는 울음소리가 들려주는 약동하는 봄날의 흥취를 어떤 언어가 대신할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은 이를 ‘생취(生趣)’ 또는 ‘생의(生意)’라 하였다. 말 그대로 살아 영동(靈動)하는 운치인 것이다.
생취나 생의가 없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사물의 심장부에 곧장 들어가 핵심을 찌르려면 죽은 정신, 몽롱한 시선으로는 안 된다. 시인은 천지현황의 나태한 관습을 거부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선입견에 붙박여 간과하고 마는 까마귀의 날개 빛을 살피는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 생동하는 물상 속에서 순간순간 포착되는 비의(秘儀)를 날카롭게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시는 언어의 사원이다. 시인은 그 사원의 제사장이다. 시는 촌철살인의 미학이다.
영양이 뿔을 걸듯
시인은 천기(天機)를 누설하는 자이다. 시를 쓰는 능력은 누구나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송나라의 유명한 평론가 엄우(嚴羽)는 그의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릇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다. 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시에는 별도의 지취(旨趣)가 있다. 이치와도 관계가 없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고 이치를 많이 궁구하지 않으면 지극한 경지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이른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이 윗길이 된다. 시라는 것은 성정을 읊조리는 것이다. 성당(盛唐)의 여러 시인들은 오직 흥취(興趣)에 주안을 두어, 영양이 뿔을 거는 것과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그 묘한 곳은 투철하고 영롱하여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마치 공중의 소리와 형상 속의 빛깔, 물속의 달,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말은 다함이 있어도 뜻은 다함이 없다.
시에는 별재(別才)와 별취(別趣)가 있다. 사변적 지식이나 논리적 이치만으로는 결코 시의 비밀에 접근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타고난 재능만 있으면 되는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어찌 해야 하는가? 엄우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不涉理路 不落言筌)’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덧붙인다. 언어에 끌려 다니지 말고 언어를 주재하라는 주문이다. 시인이 한 번 사변의 늪에 빠져들면 생취는 간데없고 진부한 관념의 시체들만 뒹굴게 된다. 이것은 시가 아니라 구호다. 표현의 기교에 지나치게 빠져도 안 된다. 언어를 매만지며 단어들의 질량을 느끼는 일은 시인의 큰 기쁨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시인의 정신을 본질 아닌 말단으로만 쏠리게 한다. 그 결과, 시인의 정신은 간데없고 가공된 언어만 판치게 된다. 이것은 시가 아니라 암호이다. 옛사람은 이를 조충전각(雕蟲篆刻), 즉 벌레를 조각하고 글자를 아로새기는 교묘한 재주에 불과하다고 깎아 말했다.
엄우는 시인이 지녀야 할 미덕을 ‘흥취(興趣)’에서 찾는다. 앞에서 말한 ‘생취’와도 같은 뜻이다. 영양이 뿔을 건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는 본래 선가(禪家)의 비유로, 《전등록(傳燈錄)》에 설봉존자(雪峯尊者)의 말로 전해진다. 영양은 뿔이 둥글게 굽은 양인데, 잠을 잘 때 외적의 해를 피하기 위해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허공에 매달려 잔다고 한다. 그래서 영양의 발자취만 보고 따라가다가는 어느 순간 발자취는 끊어져버리고 영양은 간 곳이 없다는 것이다. 시인이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지 영양의 발자취뿐이다. 발자취가 끝난 곳에서도 영양은 그 실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정작 시인이 전달하려는 의미는 문면에 있지 않고 글자와 글자의 사이, 행과 행의 사이, 혹은 아예 그것을 벗어난 공중에 매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독자 또한 영양의 발자취에 지나치게 현혹되거나 그것만이 전부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시인이 쳐놓은 언어의 통발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안 된다.
흥취를 지닌 시는 어떤 시인가. 그것은 투철하고도 영롱하여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엄우는 이를 다시 몇 가지 비유로 제시한다. 공중지음(空中之音), 상중지색(相中之色), 수중지월(水中之月), 경중지상(鏡中之象)이 그것이다. 허공에 울려 퍼지는 소리나 형상 속에 깃들어 있는 미묘한 색채, 그리고 물속에 찍힌 달, 거울 속의 형상은 모두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물속의 달은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흔들려 사라지고 만다. 달의 실체는 하늘에 떠 있고, 물은 그 실체를 투영할 뿐이다. 공중으로 퍼져가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은 어떤가. 다만 짠맛으로 소금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을 뿐, 만지거나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다. 흥취 또한 이와 같다. 시인의 정신은 저만치 허공에 떠 있고, 언어를 통해 수면 위에 그 정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다. 한 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에게 느껴서 알게 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들지 않는다.
엄우는 ‘언유진이의무궁(言有盡而意無窮)’이란 말로 위 단락을 맺었다. 종을 치면 종소리는 긴 파장을 내면서 허공으로 퍼져 나간다. 이렇듯이 시는 독자로 하여금 읽는 행위가 끝나는 순간부터 정말로 읽는 행위를 시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시의 언어는 젓가락으로 냄비 뚜껑을 두드리듯 해서는 안 되고, 범종의 소리와 같은 유장한 여운이 있어야 한다.
허공 속으로 난 길
시는 시인이 짓는 것이 아니다. 천지만물이 시인으로 하여금 짓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시에서는 사물이 직접 말을 건넨다. 이옥(李鈺, 1760~1812)은 <이언인(俚言引)>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는 만물이 사람에게 가탁하여 짓게 하는 것이다. 물 흐르듯 귀와 눈으로 들어와서 단전 위를 맴돌다가 끊임없이 입과 손을 따라 나오니, 시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물은 제 스스로 성색정경(聲色情境)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 시인의 입과 손을 빌려 언어로 형상화될 뿐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때 시인은 사물의 몸짓을 언어로 전달하는 매개자일 뿐이다. 따라서 시는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 시인이 직접 다 말해서는 안 된다.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도록 해야 한다.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는 표면적 진술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엄우의 말대로 영양의 발자취일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진술에만 집착하는 독자는 시를 읽을 자격이 없다. 행간에 감춰진 함축, 단어와 단어가 만나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스파크, 그런 충전된 에너지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취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몇 수의 작품을 함께 감상해보자.
어젯밤 송당에 비 내렸는지 昨夜松堂雨
베갯머리 서편에선 시냇물 소리. 溪聲一枕西
새벽녘 뜨락의 나무를 보니 平明看庭樹
자던 새 둥지를 뜨지 않았네. 宿鳥未離栖
고조기(高兆基, ?~1157)가 지은 <산장의 밤비(山莊夜雨)>란 작품이다. 어찌 보면 무덤덤하기 짝이 없다. 간밤에 비가 와서 아침까지 새가 둥지에 틀어박혀 있다는 것이 시인이 말하고 있는 전부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속세를 떠난 호젓한 산중이다. 처음에 시인은 밤새 비가 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새벽녘 들창을 연다. 여느 때 같으면 동트기가 무섭게 조잘대며 시인의 잠을 깨웠을 새들이 오늘따라 잠잠한 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새들은 여태 둥지 속에 가만히 깃들어 있다. 녀석들은 왜 둥지를 떠나지 않고 있을까? 간밤 비로 숲이 온통 젖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시인은 간밤 잠결에 어렴풋하던 시냇물 소리가 실은 밤새 내린 비로 물이 불었기 때문임을 문득 깨달았다.
산이 있고, 그 속에 집이 있다. 방안에는 시인이 있고, 둥지 안에는 새들이 있다. 사방은 고요하고, 정신은 해맑다. 이른 새벽 들창을 열어 가만히 밖을 내다보는 시인의 시선 속에 떠돌고 있는 법열의 생취. 이것을 더 이상 무슨 언어로 부연할 수 있겠는가.
이웃집 꼬맹이가 대추 서리 왔는데 隣家小兒來撲棗
늙은이 문 나서며 꼬맹이를 쫓는구나. 老翁出門驅小兒
꼬맹이는 되돌아서 노인에게 소리친다 小兒還向老翁道
“내년 대추 익을 때까진 살지도 못할걸요.” 不及明年棗熟時
이달(李達, 1539~1612)이 지은 <대추 따는 노래(撲棗謠)>이다. 파란 하늘 아래 빨갛게 대추가 익어가는 촌가의 가을 풍경을 소묘했다. 이웃집 대추를 욕심내 서리를 하러 온 아이와 “네 이놈! 게 섰거라.” 하며 작대기를 들고 나서는 늙은이가 있다. 그 서슬에 놀라 달아나던 꼬맹이가 약이 올랐다. 달아나다 말고 홱 돌아서더니 소리를 지른다. 의미 그대로 번역하면 4구는 “영감! 내년엔 뒈져라.”가 된다. 그래야 내년엔 마음 놓고 대추를 따먹을 수 있을 테니까. 늙은이가 아무리 잰걸음으로 쫓아온대도 꼬마는 얼마든지 붙잡히지 않고 달아날 자신이 있었던 게다.
이 시의 주제는 무엇일까. 문면에 드러난 것은 대추 서리를 하다가 들킨 꼬맹이의 버르장머리 없는 말버릇이다. 그렇다고 이 시의 주제를 꼬맹이의 행동에 맞춰 ‘윤리의 타락을 슬퍼함’으로 읽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파란 가을 하늘과 빨갛게 익은 대추의 색채 대비, 커가는 어린 세대와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늙은 세대의 낙차,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정감 넘치는 시골의 정겨운 풍경이 마치 단원 김홍도의 붓끝에서 생동감 있게 펼쳐지는 듯하다.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의 <홍경사에서(弘慶寺)>란 작품을 함께 읽어 보자.
가을 풀 고려 때 절 秋草前朝寺
남은 빗돌 학사의 글. 殘碑學士文
천 년을 흐르는 물 千年有流水
지는 해에 돌아가는 구름을 본다. 落日見歸雲
1·2구에서 시인은 가을 풀과 고려 때 절, 남은 비석과 학사의 글을 명사로만 나열한다. 각 단어를 연결하는 서술어가 일체 없다. 때문에 시인이 말하려 한 것이 가을 풀에 묻혀버린 퇴락한 절인지, 가을 풀처럼 영락한 고려 때의 절인지 분명치 않다. 2구의 ‘잔비(殘碑)’와 ‘학사문(學士文)’도 그렇다. ‘잔비’는 빈터에 남은 깨진 비석이다. 거기에는 예전 이름난 학사의 글이 새겨져 있다. 시인의 의도는 퇴락한 절과 깨진 비석처럼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예전 명문의 허망함을 일깨우려는 것인가, 아니면 그 긴 세월이 지났어도 문장만은 아직도 빗돌에 남아 전함을 말하려는 것인가? 막상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을 시시콜콜 갈라 따지는 것이 오히려 시의 총체적 이해에 장애가 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여기에 3·4구가 이어진다. 천 년을 흘러가는 물과 지는 해에 돌아가는 구름. 이번엔 1·2구와 달리 천 년의 긴 세월과 저물녘의 한때가 나란히 놓임으로써 1·2구의 대응관계가 3·4구에서는 대립관계로 전이된다. 물은 천 년을 한결같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나 구름은 어떠한가. 그것은 언제나 잠시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변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닌가. 즉 3·4구는 천 년과 하루에서만이 아니라 물과 구름을 통해서도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4구의 ‘견(見)’의 주체는 누구인가. 시인 자신이거나, 천 년을 흘러가는 물일 수도 있다. 주체를 시인으로 이해한다면 3·4구는 자연을 통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착잡한 심회를 노래한 것이 된다. 또 주체를 물로 이해한다면, 천 년을 변함없이 흐르는 물이 덧없이 변화해가는 온갖 것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음을 뜻하게 된다.
가을 풀은 여름날의 번화함을 뒤로하고 시들어간다. 그 풀과 같이 예전의 영화를 뒤로하고 퇴락한 절, 예전 학사의 명문을 새긴 비석에는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만 남았다. 그 글을 쓴 사람은 이미 가고 없는데, 그래도 글만은 아직 남았다. 천 년을 쉼 없이 흐르는 물, 물은 흘러갔건만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 위에 해는 지고 구름은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간다. 한 해가 가고, 하루도 가고, 구름도 왔던 자리로 돌아가고, 인간도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비석에 새겨진 글씨처럼, 흘러도 흘러도 그 자리에서 넘치는 강물처럼 모든 것은 또 그대로가 아니었던가.
위 시에서 서술관계가 생략됨으로 해서 발생되는 모호성(ambiguity)은 일상 언어에서처럼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되는 양자택일의 성격을 띠지는 않는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결과적으로 시의 함축과 내포를 더욱 유장한 것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스무 자에 불과한 짧은 시인데 담긴 함축은 참으로 심장하다. 한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대목이다.
이상 세 편의 감상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 시인이 글자로 말하고 있는 지시적 사실은 시에서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그 행간에 감춰진 울림, 언어의 발자취를 벗어나 허공에 매달려 있는 떨림이 중요하다. 그런 울림이 아예 없거나 그런 떨림을 외면한 시는 화려한 수사로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교언영색에 지나지 않는다. 천진(天眞)에서 우러나오는 흥취가 없는 시는 독자를 짜증나게 만든다.
눈과 귀가 있다 말하지 말라
한시는 이미지의 구성이 탄탄하고, 언외의 함축이 유장하다. 그로 인해 한시의 감상은 매우 지적이고 감성적인 바탕이 요구된다. 그 비밀은 아무에게나 알려줄 수도 없고, 아무나 알 수도 없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질뢰(疾雷)>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렛소리에 산이 무너져도 귀머거리는 못 듣는다. 해가 중천에 솟아도 소경은 못 본다. 도덕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하고, 속인은 왕도와 패도, 의(義)와 이(利)를 변별하지 못한다. 아아! 세상 사람들이여, 눈과 귀가 있다고 말하지 말라. 총명은 눈과 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조각 영각(靈覺)에 있다.
알아들을 수 있는 귀, 바라볼 수 있는 눈 앞에서만 예술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눈과 귀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정신의 심층부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을 일러 영각(靈覺)이라고 한다. 《채근담(菜根譚)》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고작 유자서(有字書)나 읽을 줄 알았지 무자서(無字書)를 읽을 줄은 모르며, 유현금(有絃琴)이나 뜯을 줄 알았지 무현금(無絃琴)은 뜯을 줄 모른다.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쫓아다니는데 어찌 금서(琴書)의 참맛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 홍양호의 글과 담긴 뜻이 서로 같다.
다음은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시로써 시를 논한 <논시(論詩)>란 작품이다.
시 지음에 특히나 어려운 것은 作詩尤所難
말과 뜻이 아울러 아름다운 것. 語意得雙美
머금어 쌓인 뜻이 깊어야지만 含蓄意苟深
씹을수록 그 맛이 순수하다네. 咀嚼味愈粹
뜻만 서고 그 말이 껄끄러우면 意立語不圓
뻑뻑해 뜻조차 펼 수 없으리. 澁莫行其意
그 중에도 나중으로 할 것은 就中所可後
아로새겨 아름답게 꾸미는 것뿐. 彫刻華艶耳
아름다움 어이 굳이 마다하랴만 華艶豈必排
또한 자못 곰곰이 생각해볼 일. 頗亦費精思
꽃만 따고 그 열매를 버리게 되면 攬華遺其實
시에 담긴 참된 뜻은 잃게 되느니. 所以失詩眞
오늘날 시 쓴다는 저 무리들은 爾來作者輩
시의 바른 의미는 생각지 않고, 不思風雅義
겉으로만 꾸며서 치장 일삼아 外飾假丹靑
한때 기호 맞추기만 구하고 있다. 求中一時耆
뜻은 본시 하늘에서 얻는 것이라 意本得於天
갑작스레 이루기는 쉽지가 않네. 難可率爾致
얻기가 어려운 줄 가만 헤아려 自揣得之難
인하여 화려함만 일삼는구나. 因之事綺靡
이로써 여러 사람 현혹하여서 以此眩諸人
담긴 뜻의 궁핍함을 가리려 한다. 欲掩意所匱
이런 버릇 어느새 습성이 되어 此俗寢已成
문학의 정신은 실추되었다. 斯文垂墮地
이백 두보 다시는 나지 않으니 李杜不復生
뉘와 함께 진짜 가짜 가리어볼까. 誰與辨眞僞
무너진 터 내 다시 쌓으려 해도 我欲築頹基
한 삼태기 흙조차 돕는 이 없네. 無人助一簣
시경 시 삼백 편을 외운다 한들 誦詩三百篇
어디에다 풍자함을 보탤 것인가. 何處補諷刺
홀로 감도 괜찮다 말은 하지만 自行亦云可
외론 노래 사람들은 비웃으리라. 孤唱人必戱
모두 32구에 달하는 긴 시다. 시의 참뜻을 벗어나 알맹이 없는 수식만 일삼는 당대 시단의 통폐를 매섭게 나무란 내용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는 세상, 현란한 기교로 대중의 기호에만 영합하는 시인들, 그들은 눈속임에만 급급하여 함축함양하는 공부는 내팽개친 지 오래다. 참다운 시정신은 이미 땅에 떨어져 회복의 희망도 찾을 길 없다. 어찌할 것인가. 이규보의 이러한 한탄은 오늘의 시단에도 여전히 유효할 듯싶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초의승 의순을 위해 준 말(爲草衣僧意洵贈言)〉에서 이렇게 말했다. “뜻이 본시 낮고 더럽고 보면 비록 억지로 맑고 높은 말을 하더라도 알맹이가 없게 된다. 뜻이 좁고 비루하면 비록 툭 터진 말을 한다고 해도 사정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시를 배우면서 그 뜻을 온축하지 않는 것은 거름흙에서 맑은 샘물을 긷고, 고약한 가죽나무에서 기이한 향기를 구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죽을 때까지 하더라도 얻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번드르한 거죽이 아니라 속 알맹이다.
이명과 코골기
다시 연암에게로 돌아가자. <공작관문고자서(孔雀館文稿自序)>의 한 토막이다.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 귀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놀라 기뻐하며 가만히 옆의 아이에게 말했다. “얘! 너 이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가 울리는구나. 피리를 부는 듯, 생황을 부는 듯, 마치 별처럼 동그랗게 들려!” 옆의 아이가 맞대고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명(耳鳴)이 난 아이는 답답해 소리 지르며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한 번은 시골 사람과 함께 자는데,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것이 게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탄식하거나 한숨 쉬는 소리 같기도 하며, 불을 부는 듯, 솥이 부글부글 끓는 듯, 빈 수레가 덜그럭거리는 듯하였다. 들이마실 때에는 톱을 켜는 것만 같고, 내쉴 때에는 돼지가 꽥꽥대는 것 같았다. 옆 사람이 흔들어 깨우자, 발끈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내가 언제 코를 골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왜 연암은 난데없이 이명과 코골기를 들고 나왔을까. 이명은 자기만 알고 남은 결코 알 수가 없다. 코 골기는 남들은 다 아는데 정작 자기만 모른다. 사람들이 안목이 없어 나의 이 훌륭한 작품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탄식하고 원망하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이명증에 걸린 꼬마다. 남의 적절한 지적에도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는 사람은 코 고는 버릇이 있는 시골 사람이다. 정작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명에는 쉽게 도취되면서, 자기의 코 고는 습관만은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연암의 말을 더 흉내 내면, 이명은 병인데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화이니, 만약 그가 병 아닌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면 그 으스대는 양을 어찌 볼 것이며, 코 골기는 병이 아닌데도 남이 먼저 안 것에 발끈하니, 만약 그의 병통을 지적해준다면 그 성내는 꼴을 또 어찌 차마 볼 것이랴.
예전 요동 땅에 정령위(丁令威)란 사람이 신선술을 익혀 신선이 되었다. 그 뒤 800년 만에 학이 되어 돌아왔으나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또 한나라 때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을 적에 뒷날 자신의 저술을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 장독대의 덮개로나 쓰일 것을 생각하며 탄식하였다. 막상 그가 죽고 나자 《태현경》은 세상에서 귀히 여기는 저술이 되어 낙양의 종이 값을 올렸다. 그런데 당사자인 양웅은 이를 보지 못하고 불우하게 세상을 떴다.
세상의 시인들이여! 그대들의 시는 정령위의 불로장생을 원하는가? 양웅의 기림을 받고 싶은가? 양웅의 성예(聲譽)를 정령위처럼 살아서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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