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문명의 샘 솟아나는 개발의 기운
오아시스 육로의 병목 둔황
시안을 떠난 비행기는 중원의 황토평원과 고비사막의 끝없는 모래 바다를 두 시간 남짓 가로질러 둔황 공항에 착륙했다. 백양 나무와 미루 나무 잎사귀들이 자동차 불빛에 어른거리는 포장 길을 10여 분 달려 둔황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은 흙벽돌로 지은 사막풍의 단층 건물로 사막의 나그네들에게는 제법 어울리는 숙박소다. 마침 안마당에 둔황 가무단의 공연이 한창이다. 악사들의 악기나 악곡, 무희들의 춤사위나 의상은 모두 이곳 막고굴 벽화에서 본떠와 한결 우아하고 고풍스럽다.
막고굴 답사의 화두, 그 황홍한 벽화들을 누가 그렸을까
중국 학자들은 둔황을 ‘인후’에 비유한다. 마치 입에서 식도와 기도로 통하는 목구멍과 같다는 뜻이다. 하서회랑을 거쳐 몰려드는 동방 문물이 이곳을 지나면 몇 갈래의 길로 갈라져서 시원스레 빠져나가며, 반대로 그 길들을 거쳐 밀려오는 서역 문물은 이곳을 어렵사리 지나서야 동방에 전해지기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우리말로 비유하면 병목이다. 병목이니만치 얽히고 설킨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크게 번성하다’란 뜻을 지닌 둔황은 깐수성과 칭하이성, 신장성이 만나는 교통요지로서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박과 참외 같은 과일이 많이 난다고 해서 과주(瓜州)라고 불렀으며, 월지와 오손족들의 방목지였다. 진나라와 전한 초에는 흉노가 차지했다가, 기원전 2세기 전한의 영역에 들어오자 하서 4군의 하나인 둔황군을 설치했다. 5호16국 시대에는 전량의 영지가 됐으며 모래가 많은 곳이란 뜻에서 사주(沙州)라고 고쳐 불렀다. 한때 단명한 서량의 도읍이 되기도 했다. 둔황이 도읍이 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5세기 북위가 점령했을 때는 둔황진으로 개명하고 수·당대에 다시 둔황군으로 원상복귀했다. 당나라 전반기에 전성을 누렸지만, 후반기에는 일시적으로 토번(티베트)에게, 11세기 초엽부터는 서하에게 190여 년 동안 점령당한다. 이때 1천여 년의 둔황 역사를 증언하는 막고굴은 땅속에 묻히고 만다. 서하를 멸망시킨 원대에는 사주로, 명대에는 사주위로, 청대에는 둔황현으로, 지금은 둔황시로 이름이 왕조 때마다 바뀌었다. 기복이 잦은 둔황의 연혁은 막고굴을 비롯한 주변 유적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면화 과일 원유단지 그리고 호텔들
오늘의 둔황이 뿜어내는 모든 기염은 실크로드의 재발견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그 밑그림은 영화로웠던 과거에 그려진 것이다. 어제의 둔황은 한마디로 문명의 보물고이자 성지다. 국가의 보호를 받는 보물만도 59곳이나 있으며, 명사산과 월아천은 전국 40대 관광명승지의 하나로 꼽힌다. 돈황의 명승유적 가운데 단연 백미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막고굴이다. 매번 찾을 때마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막고굴은 보면 볼수록 깊어지는 그 오묘함과 신비의 세계로 우리를 매혹한다. 보는 이들은 때로는 무아지경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황홀한 선경 속에서 헤매게 된다.
막고굴은 둔황에서 동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명사산에 있다. 이상야릇한 전설로 가득한 이 산의 동쪽 끝 깎아지른 절벽에 1.6km에 걸쳐 벌집 같은 석굴들이 뚫려있다. 바로 막고굴이다. 일명 천불동이라고도 한다.
막고굴은 4세기 중엽 전진 시대에 악준이란 승려가 처음 뚫기 시작했다. 이후 원대까지 1천여 년간 각 왕조에 걸쳐 계속 뚫고 지은 것이다. 지금 남은 석굴은 550여 개이며, 소상과 벽화가 있는 굴은 474개다. 전체 석굴 안에는 4400여 구의 소상과 연면적 약 4,500㎡에 달하는 벽화가 있다. 이 벽화들을 1m 폭으로 나열하면 무려 45㎞(약 112리)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소상이나 벽화에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것이 이른바 ‘둔황문서’다. 한문,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소그드어, 쿠처어, 호탄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문서는 모두 합쳐 3만여 점이나 된다. 문서의 내용을 보면, 불교 관련 내용이 중심이지만, 동서 교류 관계를 전해주는 <왕오천축국전>이나 <인도제당법> 같은 진서, 마니교와 경교의 경전도 있으며, 지어 사원의 경영기록이나 호적, 토지문서 같은 공사(公私)문서도 있다. 그 보물들은 근 백년 동안 명맥을 이어오는 ‘둔황학’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고 있다.
제국주의 장물로 팔려간 숱한 유물들
1899년 헝가리의 로치가 처음 막고굴을 탐방한 이래 숱한 이방인들이 탐험이란 이름 아래 이 비장의 보물고에 앞다퉈 모여들었다. 더러는 순수한 탐험심에서 왔지만, 대부분은 도적의 오명을 스스로 뒤집어쓰는 행각을 벌였다. 영국의 스타인은 석굴 주지인 왕원록 도사를 꾀어 사경류 20상자와 회화류 5상자를 마제은(馬蹄銀,:말굽 모양의 중국 은화) 40닢과 바꾸어 런던으로 보냈다. 프랑스의 펠리오도 역시 왕 도사를 매수해 사경류 1500여 권이 든 24개의 상자와 회화 직물류 5상자를 헐값에 사들여 프랑스로 직송했다. 약삭빠른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뒤이어 왕 도사가 숨긴 잔여 문서 중 500여 권의 사본을 챙겨갔다. 뒤질세라 러시아의 올덴부르그, 미국의 워너도 한달음에 달려와 같은 수법으로 각각 벽화 10장과 20여 장을 뜯어갔다. 무모한 외국 편취자들에 의해 할퀴고 뜯기고 찢긴 상처는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신비한 문명의 샘 솟아나는 개발의 기운-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둔황 유물을 가져간 나라들은 현재 엄연한 주인이 장물을 되돌려달라고 해도 ‘문화유산의 보편적 가치’ 운운하면서 앙탈을 부리고 있다. 문화유산은 어디에 있든 창조자 주인에게 되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저들 박물관의 공동(空洞)에 안달이 나 남의 유산을 사취해놓고는 아닌보살하는 것은 공분을 피할 수 없는 행위다. 우리도 이러한 뼈아픈 경험을 겪고 있지 않은가.
막고굴에 관한 연구나 기사는 안내원 말대로 수레 몇 대에 실어도 다 실을 수 없을 정도다. 필자가 그간 몇 차례 찾았지만, 갈 때마다 새록새록 느껴지고 안겨오며, 얻게되는 것이 있어 마냥 신비스럽기만 하다. 이번 여정에는 일반 공개하는 몇몇 굴에다 특별히 보고싶은 5굴을 합해 모두 15굴을 둘러봤다. 답사의 화두 중 하나는 과연 그 뛰어난 벽화를 누가 그렸는가 하는 화사(畵師) 찾기다. 벽화에 돈 많고 권세있는 귀족·실력자들의 공양이나 시주로 그려졌다는 기록은 있어도, 누가 그렸다고 밝힌 것은 어디에도 없다. 왕조 때마다 전해오는 몇몇 명화가들로는 그 엄청난 그림들을 그릴 수가 없었을 터이니 분명 수많은 화사들의 위대한 지혜가 빚은 결과물일 것이다.
민중 화공들이 만든 ‘사막이 대화랑’
막고굴 북쪽 끝에는 벌집처럼 뚫린 동굴군이 있다. 조사 결과 물감 그릇과 안료 등이 남아있는 점으로 미루어 화공들 주거지였음이 밝혀졌다. 그들은 어리 같은 비좁은 방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새우잠을 자면서 위대한 ‘사막의 대화랑’을 일궈냈다. 장경동에서 발견한 조승자(趙僧子)의 ‘전아계(典兒契)’란 문서에는 공장도료(工匠都料, 도편수)인 그의 살림이 하도 구차해 아들을 6년 동안 친구에게 전당 잡히고 보리 20석과 좁쌀 30석을 얻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다른 한 장의 문서에는 공장들의 고달픈 처지를 이렇게 시로 토로하고 있다.
“공장은 재주를 배울 필요가 없나니(工匠莫學巧) /
재주가 있으면 남의 부림이나 받게 된다(巧卽他人使). /
내 몸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 신세이고(身是自來奴) /
아내 역시 벼슬아치들의 노비로다(妻亦官人婢).”
노예 신세에 있는 공장들에게는 재주가 오히려 화근이 된다는 역설적인 부르짖음이다. <역대명화기>에는 당나라 때의 명화가 염립본(閻立本)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싣고 있다. 어느날 그는 태종의 봄 놀이에 함께 행차했는데, 연못에서 노는 진귀한 새를 그려보라는 명을 받는다. 그는 땀을 흘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연못 주변에 엎드리기까지 하면서 그려 바쳤다. 그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훗날 아들에게 “화가로서 유명하게 되어도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심부름꾼과 다름없다. 그림을 배워서는 안된다”라고 훈계를 했다고 한다. 명화가의 경우가 이러했으니, 일반 화공들의 처지야 더 말할 나위 없이 비참했을 것이다.
막고굴에 남은 불후의 화폭들 하나하나는 모두 천대받고 멸시당하는 민초 화공들의 손끝에서 나왔다. 인류의 거룩한 문명들은 모두 노동하는 민초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일시에 천하를 발호하던 군주도 죽으면 한 줌 흙이 되어 쓸모 없는 해골만 남기지만,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공장들은 불후의 작품을 남겨놓는다. 돈과 권력만을 능사로 여기며 학문과 예술, 민중을 업신여기는 세태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목구멍 닮은 협곡 1천km 동서교역 사활 걸린 생명선
둔황과 하서회랑
하서회랑은 동쪽의 공업도시 란저우에서 한·당 때 설치한 하서사군인 우웨이(무위), 장예(장액), 주취안(주천)을 거쳐 둔황으로 길게 이어지는 거대한 협곡 길이다. 전한 시대 장건이 이 길을 지나 실크로드를 개척한 이래 서쪽 끝 둔황을 거쳐온 서역 문물과 동쪽 장안에서 내보낸 중국의 문물이 서로 오가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 서역 교역의 사활이 걸린 생명선이었던 만큼 기원전부터 청대까지 회랑의 패권을 둘러싸고 역대 중국 왕조와 흉노, 토번(티베트), 위구르 등 이민족들 사이에는 전란이 그칠 새 없었다. 기원전후 흉노나, 8세기 토번, 10~11세기의 탕구트 족처럼 이민족이 회랑을 점령하면 당장 실크로드는 가로막혀 서역 주둔군이나 사신들이 수십 년 간 고립되곤 했다. 역대 중국 왕조의 서북 국경선이 한결같이 둔황을 기점으로 목이 홀쭉한 자루처럼 형성된 것은 하서회랑의 독특한 지정학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 국경수비의 대명사인 만리장성의 서쪽 끝이 이 회랑의 서쪽 지아위관(가욕관)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중국, 서역 문화가 융합 되는 길목이던 하서회랑은 고래로 동서 교류의 화려한 결실을 꽃피운 무대였다. 서역의 불교 회화와 조각, 공예 양식이 이 길을 거쳐 둔황과 맥적산 석굴, 뤄양의 룽먼 석굴로 전파되었다. 하서회랑의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한 막고굴 벽화들은 그 정수다. 회랑 중심부에서 인도인 도용과 동로마산 은제 접시들이 출토된 것도 이 지역 문화의 국제성을 말해주는 증거다.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녀 저민의가 왕건의 할머니가 된 까닭 (0) | 2010.01.06 |
---|---|
정수일_조선인들의 눈에 비친 세계 (0) | 2010.01.05 |
金秉模의 考古學 여행_05 (0) | 2010.01.04 |
정민_한시의 언어 미학 (0) | 2010.01.03 |
金秉模의 考古學 여행_04 (0) | 2009.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