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신화에서 용은 물을 관장하는 농경신을 상징한다. 거대한 물기둥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현상을 보고, 바다에서 지내던 용이 하늘로 오른다는 뜻의 ‘용오름’이라 부르는 데에도 우리 민족의 이런 정서가 녹아 있다. 사진은 지난 2003년 10월, 선종혁씨가 촬영한 울릉도 앞바다의 용오름.
‘저민의(渚旻義·焉旻義)’라는 괴상한 이름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이 낯선 이름의 주인은 고려 태조 왕건의 할머니다. 뭔가 비밀을 간직한 듯한 이름이지만 우리 말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탓인지 뜻이 모호하다. 하지만 음차하면서 선택한 한자에 뜻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늘로 날아오르다’, 서해용왕의 맏딸인 용녀(龍女)의 형상을 적절히 표현한 이름인 듯도 하다. 마치 <주역>이나 <용비어천가>의 하늘을 나는 용을 연상시킨다. 한데 용이 어떻게 왕건의 할머니가 됐을까? 용녀 저민의는 용 신화의 비밀을 탐색하는 우리를 의혹의 동굴로 유혹한다.
작제건이라는 명사수가 있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다. 보육의 둘째 딸 진의는 언니의 오줌 꿈을 산 덕에 마침 신라에 온 숙종과 인연을 맺는다. 숙종이 활과 화살을 남기고 떠난 후 작제건이 태어나는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 상태에서 태어나는 건국 영웅 주몽이나 유리의 전통을 잇고 있다. 숙종과 작제건의 관계는 물론 사실과 어긋나는 허구지만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선양하는 신화는 이렇게 조작된다. 이 신화를 기록한 <고려사>도 그것이 미심쩍었던지 민지의 <편년강목>을 인용하여 숙종이 아니라 난을 피해 오랫동안 외지를 떠돌아다닌 선종이라고 해명하는 주석을 달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그럴 듯한 신화로 분식될 뿐이다.
열여섯이 된 작제건은 고구려 건국신화의 유리처럼, 무속신화 <제석본풀이>의 삼형제처럼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는 당나라로 가는 도중에 서해용왕에게 발목을 잡힌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안개에 휩싸여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나온 점괘는 ‘고려 사람을 없애야 한다’는 것. 어쩔 수 없이 작제건이 바다에 뛰어내렸을 때 그를 맞이한 용왕은 부처의 형상으로 나타나 자신을 괴롭히는 늙은 여우를 제거해 달라고 요구한다. 명사수 작제건은 아버지의 활과 화살로 여우를 처치한다. 잠시 용왕과 작제건의 대화를 들어보자.
“그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오. 당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만나겠소, 일곱 가지 보물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돌아가겠소?” “제가 바라는 것은 동쪽 땅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그대의 후손 삼건(三建)을 기다려야 하오.”
여기서 삼건이란 ‘작제건-용건-왕건’이다. 곧 왕건에 가서야 왕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용왕의 대답에 머뭇거리고 있을 때, 뒤에 있던 한 노파(영웅의 조력자)가 놀린다. “왜 용왕의 딸에게 장가들겠다고 하지 않지?” 불현듯 깨달은 작제건은 용왕의 사위가 된다. 그는 용녀의 조언을 듣고 용왕의 신비한 버드나무지팡이와 돼지까지 덤으로 챙겨 가던 길을 되돌아온다. 용왕의 딸 저민의는 이렇게 하여 고려 왕가의 세계(世系)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려 건국신화는 이런 식으로 용의 핏줄을 끌어 들였을까?
황해도 장연군에 가면 용연면 용정리라는 곳이 있다. 지명부터 심상찮은데 내력이 없을 리 없다. 옛날 이 지역에 활을 잘 쏘는 김씨가 있었는데 어느 날 꿈에 황룡이 나타나 자기가 살고 있는 연못을 젊고 힘이 센 청룡이 뺏으려고 하니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꿈에서 깬 청년이 연못으로 갔더니 한참 후 과연 갑자기 물이 용솟음치면서 청룡과 황룡이 뒤엉켜 싸우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청년은 무서워 활을 쏘지 못했다. 황룡은 또 꿈에 나타나 같은 부탁을 한다. 다음 날 김씨는 드디어 청룡을 쏘아 죽인다. 그날 밤 황룡은 다시 꿈에 나타나 은혜를 갚겠다면서 물을 대줄 테니 연못 근처에 있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을 만들라고 한다. 그 후 황무지는 기름진 논이 되었다. 용늪(龍沼), 용못(龍淵), 용샘마을(龍井里)라는 이름이 그때부터 생겨났다는 것이다.
당 숙종의 아들 작제건, 용왕의 적을 없애고 그의 딸 용녀와 혼인, 고려 건국신화속 끌어들여
이 전설은 우선 두 가지 상징적 정보를 제공한다. 물을 대주겠다는 용의 말처럼 용은 물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이고, 동시에 논농사와 관계가 깊다는 것이다. 용이 물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는 것은 <훈몽자회>에 보이는 용의 순우리말 ‘미르’의 말뿌리(어근)인 ‘밀’이 ‘물’과 어원이 같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물의 많고 적음이 특히 문제가 되는 농사가 논농사, 곧 벼농사이다. 그래서 용은 일찍부터 벼농사 지역에서 수신으로 숭배되어왔다. <후한서>에는 오늘날 중국 윈난 지역에 거주하는 애뢰이(哀牢夷)들이 자신들을 용의 후손이라고 믿기 때문에 머리를 짧게 자르고 문신을 한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빠이족(白族)을 비롯한 이 지역의 여러 민족들이 용을 자신들의 시조라고 이야기하는 신화를 전하고 있다. 이들이 거주하는 윈난 지역이 쌀농사의 한 기원지로 추정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용정리 전설을 보면 황룡과 청룡이 우물의 주도권을 두고 싸운다. 이 전설에서 두 용은 노소(老少) 관계의 대립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같은 유형의 다른 전설을 보면 노소가 아니라 선악이 문제가 된다. 전북 김제에 있는 벽골제에 얽힌 전설에서는 백룡이 벽골제를 수호하는 용이고 청룡은 풍우를 일으켜 농사를 망치고 인명을 해치는 나쁜 용이다. 이런 선악의 대립은 다른 전설에서도 ‘황룡(백룡) 대 청룡(흑룡)’의 대결로 되풀이되고 있다. 용신이 이렇게 대립쌍으로 등장하는 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농사의 흉풍을 결정하는 강우량 때문일 것이다. 모셔야할 좋은 용과는 달리 쫓고 다스려야할 악룡이란 태풍을 동반하고 퍼붓는 폭우, 농사를 망치는 비바람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물을 관장하는 풍요신에서, 왕권 상징으로의 변형은 때론 영웅 숭배 강요, 불행한 역사를 낳으니…
용신은 논농사의 풍요만을 관장하는 신은 아니다. 용신은 수신이기 때문에 해안지역에서는 풍어를 관장하는 신이기도 하다. 용정리 전설과 같은 유형의 이야기가 충남 서산 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예를 통해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황금산 앞 바다의 신인 황룡과 칠산 앞 바다의 신인 청룡이 조기 떼를 두고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공씨 성을 가진 청년이 황룡의 부탁을 받는다. 그런데 그는 실수로 청룡이 아닌 황룡을 쏘게 되었고, 그래서 황금산 앞 바다에서는 더 이상 조기가 잡히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공씨의 실수 때문에 이야기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전개되지만 어쨌든 용신이 풍농만이 아니라 조기 떼까지 관장하는 풍어신이었음은 분명하지 않은가.
마치 천지창조의 공간에서 미륵과 석가가 벌였던 주도권 다툼을 연상케 하는 이 ‘용과 용의 대격전’의 다양한 변형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창세신화의 대결과는 달리 둘 사이에 인간이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용정리 전설의 명사수 김씨나 벽골제 전설의 조연벽(趙連璧, 김제 조씨의 시조) 장군, 혹은 서산 지역 전설의 공씨가 그런 인물들이다. 이들 영웅들은 말하자면 신의 요청에 의해 신들의 싸움에 개입하여 선한 신을 도와 악한 신을 물리치는 존재들이다. 물론 실패하는 영웅도 있지만 대개의 영웅들은 용을 도와주고 용의 도움을 받아 옥토를 일구거나 높은 지위에 오른다. 조연벽과 같은 영웅이 시조로 신성화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들 전설들과 작제건 신화는 다소 차이가 있다. 대지가 아니라 바다가 무대라는 점은 서산 지역의 특성을 감안해 유사성을 인정해주더라도, 용과 늙은 여우의 싸움이라는 점은 사뭇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용을 도와 용의 적대자를 제거한 후 그 보답으로 용의 도움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결코 다르지 않다. 이 동질성이야말로 저민의를 통해 고려 건국신화에 용의 피가 흘러드는 사건을 해명하는 데 더없이 긴요하다. 영웅과 짝이 된 용, 영웅을 도와주는 용은 단지 풍농과 풍어의 신이 아니라 영웅의 힘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닌가. 용은 영웅을 따라 권력의 상징으로 승천하는 것이다. 서해용왕의 맏딸 저민의는 작제건과의 결연을 통해 왕권의 근원이 되었다. 아니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고려 건국신화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과의 짝짓기를 통해 용신 저민의를 고려 왕권의 배후로 포획한 것이다.
용이 왕권의 상징으로 우리 신화에 출현한 것은 기록으로 볼 때 삼국시대이다.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천신 해모수의 수레를 끄는 오룡(五龍)이나 신라 혁거세의 왕비 알영을 낳은 계룡(鷄龍), 백제 무왕의 아버지인 지룡(池龍), 혹은 호국룡이 좋은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천신이 중심인 삼국시대의 신성 체계에서 왕권의 보조적 신격으로 존재했다. 이런 변두리의 용신이 고려시대에 와서 가장 중요한 왕권의 상징으로 솟아오른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으리라. 신라 중엽 이후 확산되어간 논농사와 그에 동반되었을 용신 신앙, 예성강 일대의 해상세력으로서 용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 왕건 집안의 내력, 그리고 이미 용을 황실의 상징으로 일반화하고 있던, 당 숙종으로 표상되는 중국의 영향 등등.
그러나 용이 풍요의 신에서 권력의 신으로 변형되는 것이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다. 선룡을 도와 악룡을 물리쳐 풍농과 풍어를 일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영웅 숭배를 강요하는 ‘용비어천가’로 만들어지는 일은 민중들에게 종종 불행한 역사를 초래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용은 줄다리기에 응축되어 있듯이 풍요의 상징으로 함께 ‘땡길’ 때 신명이 넘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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