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황교익의 味食生活_28

醉月 2012. 8. 7. 06:57

그 귀한 산나물 제발 비비지 말라

울릉도의 맛

울릉도 식당에서 나오는 산채비빔밥. 비빔밥에 여러 산나물이 들었는데, 그 옆에 내놓은 반찬에도 산나물이 있다.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평소와 다른 풍경과 더불어 낯선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지가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라면 그 기대와 즐거움은 더 커진다. 울릉도는 즐거운 음식 여행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린다. 강원 동해 후포항이나 경북 포항에서 뱃길로 서너 시간을 가야 닿는 그 섬에는 맛있는 무엇이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막상 울릉도 음식은 그다지 별스럽거나 맛있지 않았다. 토종 홍합인 섭, 현지에서는 따개비라 부르는 삿갓조개 같은 특이한 재료로 만드는 음식이 있긴 하지만, 갖은 양념으로 비벼 그 맛을 죽이고 있었다. 울릉도를 대표하는 오징어는 여느 동해안처럼 회로 먹는 것이 대부분이다. 오징어 내장을 끓이는 국은 다소 특이하게 보일 뿐 다시 먹고 싶은 맛은 아니었다. 울릉도 호박엿도 요즘 호박 함량이 줄어 예전 맛이 아니다. 그나마 건질 만한 것은 산나물인데….

 

울릉도 산나물은 확실히 맛있다. 울릉도 자연환경 덕분이다. 울릉도는 위도상 북쪽에 있는 편이지만 난류 영향으로 대체로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그래서 울릉도 숲은 한반도 남녘땅과 비슷하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는데, 이 눈 덕분에 나무와 풀이 잘 자란다. 나무와 풀 가운데 식용 풀, 그러니까 산나물이 끼여 있다. 봄이면 울릉도 전체가 산나물 밭으로 변한다. 봄날의 극심한 일교차는 산나물을 연하게 하고, 바다에서 올리는 해무가 섬을 수시로 덮어 산나물 향을 짙게 한다. 삼나물, 부지깽이, 미역취, 명이(산마늘), 고비, 고사리 같은 울릉도 산나물은 부드러움과 향에서 육지의 것이 따르지 못하는 그 무엇을 갖고 있다.

 

울릉도 식당에서는 이 산나물을 으레 반찬으로 낸다. 육지에서는 귀하지만 울릉도에서는 흔한 것이 산나물이다. 요즘엔 산나물을 많이 재배해 그 양이 넉넉한 편이기도 하다. 사실 이 산나물 몇 종류와 울릉도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 요리 하나 정도면 훌륭한 울릉도식 밥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울릉도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내기 시작했다. 산나물이 흔하니 이를 비빔밥으로 만들어 관광객에게 팔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산나물이 맛있으니 비빔밥도 맛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비빔밥 조리법이 과연 울릉도 산나물의 맛을 극상으로 이끄는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이 든다. 각종 산나물을 넣고 참기름에 깨소금, 고추장 양념으로 비비면 산나물 맛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비빔밥 안의 나물이 울릉도 산나물이든 육지 밭나물이든 각종 양념으로 비벼놓으면 그 맛이 비슷해진다.

 

울릉도 식당은 산채비빔밥을 내면서도 반찬으로 또 산나물을 낸다. 그 산나물의 종류가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비빔밥에 산나물이 들었을 텐데 여기에 더해 또 산나물 반찬을 내놓으니 ‘허비 밥상’이라 할 수 있다.

지역 향토음식 가운데 제일 흔한 것이 비빔밥이다. 산간이면 산채비빔밥, 뽕나무가 많으면 뽕잎비빔밥, 약초시장이 있으면 약초비빔밥, 치즈가 유명하다고 치즈비빔밥, 멍게 난다고 멍게비빔밥, 낙지가 잡히면 낙지비빔밥…. 온갖 재료를 넣고 양념을 쓱쓱 비비기만 하면 먹을 만하니 다들 이러는 것이다.

그러나 비빔밥은 정말 좋은 음식재료를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한다. 울릉도 산나물은 소금간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다.

 

미각 마비 음식 정말 맛있습니까?

빙수국수

절반이 얼음으로 덮인 빙수국수. 얼음은 미각을 마비시킬 뿐이다.

 

국수는 정말 다양하다. 지구촌 거의 모든 사람이 국수를 즐긴다. 이 다양한 국수 가운데 한국인은 특별나게 차가운 육수에 국수를 만다. 국수를 차갑게 먹는 나라는 여럿 있지만 얼음까지 넣어 극단적으로 차갑게 먹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도대체 한국인의 이 독특한 국수 식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한반도에서는 밀 재배를 많이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메밀은 흔했다. 옛날에 국수라 하면 메밀국수를 뜻했다. 메밀은 밀에 비해 글루텐 함량이 극히 적다. 글루텐은 반죽에 찰기와 끈기를 더하는 구실을 하는데, 글루텐이 적은 메밀은 반죽하기 힘들고 국수를 뽑아놓아도 쉽게 풀어진다. 메밀국수를 더운 국물에 말면 곧바로 죽처럼 된다. 그래서 메밀국수는 으레 차가운 국물에 말아 먹었다. 평양냉면과 막국수, 일본 소바도 그렇다.

 

한국인은 메밀국수 전통이 오래돼 차갑게 먹는 것에 익숙하다. 국수 재료가 밀가루와 감자 또는 고구마 전분으로 바뀌어도 차갑게 먹는 것은 여전하다. 밀가루 국수도 밀면이라는 이름으로 냉면처럼 먹고, 감자 또는 고구마 전분의 그 질긴 국수도 차가운 국물에 말아 먹는다. 좀 더 나아가면 냉라면과 냉파스타도 만들어 먹는다.

 

적당히 차게 먹는 것은 메밀국수 전통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차가움을 극단으로 몰아 아예 얼음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는 것은 당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그것은 인간이 맛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얼음국물이라 하니 감이 약하다. 국물을 얼려 빙수처럼 만들어놓았으니 여기서는 빙수국수라 하겠다).

 

맛은 혀로 감지된다. 혀에서 여러 맛 요소를 받아들이면 뇌에서 그 맛이 어떤지를 판단한다. 혀는 약간의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 톨의 소금, 눈곱만큼의 설탕에도 짜다, 달다를 금방 알아차린다. 혀는 몸을 보호하는 피부 조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감하다. 이 민감한 혀에 차가운 얼음을 대면 순간적으로 마비된다. 피부에 얼음을 대고 있으면 마비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혀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그러니 빙수국수를 먹으면 혀가 마비돼 맛을 느낄 수 없다. 오직 “시원하다”를 외칠 뿐이다.

 

맛도 느낄 수 없는데 왜 이런 빙수국수가 한국에 크게 번진 것일까. 한국인은 맛을 즐기는 일, 즉 식도락을 포기하고 사는 것일까.

맛있고 맛없음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이 아니다. 달고 짜고 시고 맵고 떫고 하는 감각만 있을 뿐, 그 맛들의 조합에서 미식과 악식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맛있고 맛없음의 분별은 교육과 경험에 의해 축적된다. 누군가가 어떤 음식을 지속적으로 주면서 “이거 맛있다” 혹은 “이거 맛없다”라고 자꾸 말하면, 그것을 맛있는 것 또는 맛없는 것으로 느끼고 기억한다.

 

빙수국수가 딱 그런 꼴이다. 빙수국수를 놓고 사람들이 맛있는 것이라고 줄기차게 말하니 빙수국수가 맛있는 줄 착각하는 것이다. 그 빙수가 자신의 미각을 점점 더 마비시킨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입에 넣는다.

필자는 유신 교육을 오롯이 받은 세대로,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박정희의 유신 안에서 그의 뜻대로 공부하고 또 살았다. 그때 나는 유신을 독재라 생각하지 못하고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여겼다. 유신 교육에 의해 자유의지가 마비된 채 그 긴 세월을 보낸 것이다. 혀를 마비시키는 빙수국수도 바로 그렇다.

 

미식가 오해 말라 맛없는 것 먹는다

음식 글쓰기

미식가 아닌 사람이 없다. 사람들을 만나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디에 있는 어느 식당 음식이 맛있는지 줄줄 꿰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명색이 맛 칼럼니스트인 필자조차 그 방대한 식당 리스트에 두 손을 들 때가 있을 정도다.

식당 섭렵의 역사는 돌아가신 백파 홍성유 선생이 그 길을 처음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교통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을 그 시절에 백파는 전국 식당을 두루 돌아다니며 식당 정보를 이런저런 매체에 연재하고 또 책으로 엮었다. 백파 이후 식당 정보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미식가라고 여겼다.

 

1990년대 초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 필자는 잡지를 제작하고 있었다. 후배 기자가 그분들을 취재할 일이 있다고 해서 말미에 꼭 이 질문을 해달라고 주문한 적이 있다. “스스로 미식가라 생각하시는지요?”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후배 기자의 대답은 이랬다. “미식가라 하는 분은 없었습니다. 탐식가 정도이니 그리 봐달라고 했습니다.”

 

미식가(美食家)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음식에 대하여 특별한 기호를 가진 사람. 또는 좋은 음식을 찾아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 방점을 찍자면 ‘좋은 음식을 찾아’ ‘즐기는’ 정도가 될 것이다. 좋은 음식을 찾아 즐기는 일은 극히 개인적인 취미 행위라 할 수 있다. 자기 입에 들어오는 음식은 오롯이 자신의 감각에만 충실히 발동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식당을 돌아다니며 그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는 일은 일종의 노동이지 미식 행위라 할 수 없다. 진정한 미식가는 어디에 있는 어느 식당 음식이 맛있다고 주변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음식이 맛있다고 소문나면 다른 사람들이 몰려들 테고, 그럼 결국 자신이 즐길 몫조차 챙기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필자도 미식가는 아니다. 음식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돈벌이를 위한 노동일 뿐이다. 일반 독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양한 음식을 많이 먹어본 경험이 있으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두고 있다는 것 정도다. 나는 스스로를 탐식가(貪食家)라고도 하지 않는다. 음식 탐욕이 약한 편이다. 소식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한 번에 먹는 음식량이 적고, 입도 짧아 한 종류의 음식을 한자리에서 많이 먹지 못한다. 그렇다고 기호가 특별난 것도 아니다. 남이 못 먹는 것을 억지로 찾아 먹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다.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도 당장 달려갈 준비가 돼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앞에 닥치는 음식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도 필자의 머리는 늘 용량 부족이다.

 

미식가도 아니고 탐식가도 아닌데 맛칼럼을 쓰고 있으니 ‘·#52059;식가’라고 이름을 붙여볼까 하다 생각해낸 것이 악식가(惡食家)다. 악식가의 사전적 뜻은 ‘맛없고 거친 음식을 즐겨 먹는 사람’이다. 사전 뜻풀이대로라면 마조히즘에 빠진 사람으로 읽힐 수 있겠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는 악식가의 뜻은 다르다. ‘맛없고 거친 음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 맛칼럼을 쓰는 노동이 딱 그렇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취재가 곧 맛있는 음식에 대한 취재일 것으로 여기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취재하면서 열에 아홉은 맛없는 음식을 먹는다. 맛없는 음식이 나왔다 하면, 일반 소비자는 그 음식을 안 먹으면 되지만 필자는 그 음식이 왜 맛없는지 계속 먹으며 따져야 한다. 그래야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맛칼럼 쓰는 일은 미식이 아닌 것을 넘어 고역스러운 노동인 것이다. 인간 노동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지 않은가.

 

 

쥐치포 공장에서 본 쥐치포 잔해. 이 냄새를 한 번 맡으면 1년 정도 쥐치포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맛을 취재하는 현장은 보통 이와 같다.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원정선 화암팔경  (0) 2012.08.13
한국인의 茶_02  (0) 2012.08.10
한려해상 바다백리길  (0) 2012.08.03
李龍在의 맛있는 상식_08  (0) 2012.08.01
김동률·권태균의 오지 기행_06  (0) 2012.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