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한국인의 茶_02

醉月 2012. 8. 10. 06:34
역사의 혼란기에 맞물려 사라져간 한국의 차문화

한국차의 쇠퇴와 일본 녹차의 유입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 중엽까지 한민족은 외세의 침입과 민란이 다소 있었음에도 대체로 안정된 시대를 유지하였다.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면 문화는 고도로 성장한다. 한국차는 한국차로서 특성을 갖추게 되었고 다양한 모습으로 생활의 전반을 차지하였다. 이 시대에 조성된 문화의 산물이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국가 지정 문화재이고 선비들의 차시茶詩들이다. 차와 차문화는 한민족의 정신이 되었다. 차는 만물 앞에 주객의 대상을 초월하여 무한한 지혜에 도달하는 성품을 지녔다. 일체의 만물 앞에 주객의 분별이 사라질 때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실존을 경험한다. 실존은 무아無我의 평등이며 대우주를 한 티끌 속에 포함하게 하는 지혜이다. 한 민족의 독특한 문화는 바로 여기서 출발하였다. 한국차는 중국으로부터 주종차가 유입된 후, 1,000년이라는 긴 여정을 보내면서 한국차로 토착화되어 독보적인 특성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청천백일靑天白日이 무한히 지속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밝은 태양을 보여주기 위하여 비바람이 하늘을 가리기도 한다.



일본 차문화의 발달
19세기 후반, 세계가 2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제국시대로 접어들자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개혁 체제를 구축하고 20~30대의 젊은 무사집단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1854년 미국에 이어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봉건적인 구체제를 종식하고 산업사회로 개편을 시도하였다. 『동대사요록東大事要錄』에 의하면 일본의 차는 백제 스님인 행기(行基, 668~749) 보살이 일본에 처음 차를 전하였고 태평 원년(太平元年, 729) 성무천왕聖武天王때 차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일본은 그 후 백제 출신 승려 최징最澄이 805년에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와 심었다. 그리고 숭복사崇福寺에서 대승大僧 정영충正永忠이 손수 차를 끓여 차아천왕嵯峨天王에게 차를 올렸더니, 차를 마시고 기내幾內, 근강近江, 파력播歷, 단파丹波지방에 차를 심게 하여 처음으로 주종차가 시작되었다.


일본이 처한 기후풍토와 일본인의 정서에 맞게 토착화되기에는 수백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일본의 지리적 조건에 따라, 찻잎을 쪄서 초록색이 나게 하고 비린 향내를 나게 하는 것이 일본인이 선호하는 차였다. 특히 일본의 상류사회인 무사계급의 절도있는 생활풍습으로 잎차보다는 가루차인 말차가 발달하였으며, 이는 한 잔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권력을 장악한 무사계급이 엄격한 무사도에 차를 접합하여 권위적이고 형상적인 다도茶道라는 새로운 풍습을 창시하였다.


비록 기후와 토질은 달라도 19세기까지의 일본은 차나무뿐 아니라 차 만드는 방법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산업사회로 개편되자, 모든 것이 과학 시대로 접어들어 기계화되었다. 일본의 차 역시 기계화에 적응하도록 차나무를 육종 실험하여 뿌리가 옆으로 퍼지는 ‘야부기다’라는 차나무를 개발하고, 만드는 방법도 손으로 만들었던 차를 기계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 산업화된 방법과 차나무 개량종은 일본차의 궤도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 이러한 일본차의 물적 팽창은 전 국민에게 차를 공급하였고, 나아가 채소와 과일이 부족한 유럽에 차를 수출하였다. 이 차가 바로 녹차이다. 이러한 일본의 차문화를 보고 귀국한 유학생들은 일본식 차 생활을 답습함으로써 지성인의 수준을 과시하였다.



일본 녹차의 유입과 확산
우리나라는 16세기 이후 혼란기를 거치며 술이 차를 대신하여, 일반은 물론 사찰까지도 ‘차’라는 언어만 남고 차 본연의 모습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일본의 신사조를 배우고 돌아온 젊은 유학생 스님들에 의하여 일본식 차가 ‘차’로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중 대표적인 스님이 경남 사천 다솔사 최범술 스님, 경남 하동 쌍계사 윤기원 스님, 전남 해남 대흥사 응송 박영희 스님이다.


한국은 일제 식민지를 거쳐 1945년 해방이 되자 한국에 나와 살던 일본인들이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고 그들이 경영하던 기업체들과 농지들은 적산지로 남았다. 그중 일본인들이 심은 야부기다 차밭과 차 만드는 공장은 한국인 고용인들이 인수하여 이어받았다. 그러나 곧이어 6.25전쟁이 일어나 3년이나 동족상잔의 사변을 겪었고, 남한은 일제 강점
기에 일본 문화가 만연하다 미국식 서구문화로 바뀌었다.


한국차는 16세기 이후 혼란기에 술에 가려졌고, 일제 강점기 때는 일부 층에 일본차가 성행하였으며,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후 서양의 커피문화가 퍼져 곳곳마다 다방을 열고 주류를 이루었다. 한국은 실로 수백 년간 한민족의 진정한 문화 주체성을 상실한 채 혼란의 역사를 보냈다. 그러다가 1961년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예편하여 경제 개발 계획을 앞세웠으며, 근대화를 진행한 20여 년 만에 민주주의 뒤안길에서 국민생활이 경제적으로 다소 안정길에 들어갔다.


1980년대 와서 지극히 일부나마 커피 대신 차를 찾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러나 이 소수 사람들에게 손쉽게 부응할 수 있는 차는 과거 적산지의 차밭에서 생산된 차다. 큰 기업체가 새로 일군 차밭이라 하더라도 야부기다 일본종 차나무에서 따와 기계를 통해 만들어진 일본 녹차였다. 혹 손으로 차를 만들어 수제차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찻잎의 생산과 차를 만드는 과정은 일본 녹차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 대다수다. 차나무가 뿌리를 옆으로 뻗어 영양을 섭취하며 찻잎을 많이 나게 하자니 자연히 비료를 쓸 수밖에 없고 비료를 섭취한 찻잎은 조직이 유연하여 벌레 공세가 심하여지니 농약을 살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과학의 힘으로 대량생산된 찻잎은 짧은 시간에 기계로 차를 만들어 모든사람에게 편리하게 차를 보급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 중국뿐 아니라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목도되는 20세기 차의 현상이다. 그렇다고 차가 지나치게 고급화되어 일부 상류층만 향유하는 것또한 차가 그 기능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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