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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예산 소망여행

醉月 2014. 1. 9. 11:01

1200여 년 전 신라 때의 석공이 돌에서 꺼낸 마애불. 도톰한 눈두덩과 살짝 솟은 광대, 작은 입술이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생생하다. 충남 홍성의 용봉산 자락의 절집 용봉사 아래쪽 바위에 새겨져 있다.


신라 말엽 혼란의 시기. 백제 멸망 이후 홍성과 예산을 비롯한 충남의 서쪽, 이른바 ‘내포지방’ 사람들이 전쟁과 학정의 그 고된 삶을 견뎌냈던 건, 희미하긴 해도 결코 꺼뜨리지 않은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내포지방의 불국토를 이뤘던 용봉산의 석불들이 그 희망을 증거합니다. 산중에 들판에 저잣거리에 세워진 미륵에서, 이제는 풍화돼 다시 돌로 돌아가는 석불에서 그 희망을 읽습니다. 용봉산의 골짜기마다 스물일곱 개나 되던 옛 절이 스러지고 나서 그 터에 버려진 불상은 그대로 미륵이 됐습니다. 부처의 열반 이후 56억7000만 년 후에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미륵. 삶에 지친 이들은 희망의 불씨를 지피며 그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용봉산의 절집 아래서 만난 석불이 각별했던 건, 그 얼굴이 두루뭉술 판에 박은 불상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도톰한 눈두덩과 가는 눈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떠올려집니다. 희망은, 그리고 구원은 이렇듯 구체적이었을 겁니다. 신년 벽두에 홍성과 예산 땅으로 미륵을 찾아가는 여정을 권합니다. 미륵을 기다렸던 옛사람들처럼 삶이 아무리 고단하더라도 희망 하나만 품고 산다면 세상살이는 따스해지는 법이니까요.

능선을 따라 기암의 암봉들이 늘어선 충남 홍성의 용봉산. 해발 381m의 크지 않은 산이지만, 용봉산 자락과 골짜기에서 확인된 절터만 27개에 달한다. 경주의 남산이 신라의 불국토였다면, 용봉산은 ‘백제의 불국토’였던 셈이다.




# 56억7000만 년의 희망을 찾아가는 길

화염처럼 치솟은 충남 홍성의 용봉산 암봉 아래 자그마한 절집에서 스님이 내놓은 향긋한 다래순 차 한 잔으로 마음을 덥히고 내려서는 길. 바위 틈에 숨은 듯 서있는 그 부처를 만났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 석공이 돌 속에서 꺼낸 부처. 갸름한 얼굴에다 도톰한 눈두덩과 가는 눈. ‘다 똑같이 생긴’ 다른 불상과는 사뭇 달랐다. 1000년이 훨씬 넘는 세월에 그 앞에선 중생들의 간절한 기도를 저렇듯 새침한 표정으로 받아냈으리라.

▲홍성 산혜암의 석조약사보살입상. 둥근 얼굴에 머리 위에는 방형개석을 이고 있다.

충남 홍성과 예산. 그곳에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미륵과 부처가 있다. 폐사된 사찰터에도, 작은 마을 어귀에도, 고즈넉한 들판에도, 북적이는 저잣거리에도 세월과 바람에 깎인 미륵이 서있다. 건물 높이만큼 위풍당당한 것도 있고, 키가 껑충하게 큰 것도, 동글동글 자그마한 것도 있다. 새침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도,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도, 무표정한 것도, 아예 세월에 얼굴이 다 닳아버린 것도 있다.

미륵은 석가모니가 미처 구원하지 못한 중생들을 훗날 구원키로 약속받은 미래불이다. 신라 고승 원효의 계산법에 따르면 미륵은 부처가 열반에 들고난 뒤 자그마치 56억7000만 년 뒤에 도솔천을 건너 세상에 오기로 예정돼 있다. 세상에 와서 용화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돼 세 번의 설법으로 고통받는 중생들을 모두 구원해 준단다. 미륵의 도래를 믿은, 후세의 구원을 믿은 이들이 이 수많은 미륵불을 세웠을 것이다. 미륵불을 세우고 그 앞에 두 손을 모으며 미래 세상에서 올 구원을 기다렸다는 건, 역설적으로 질곡 같은 삶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래의 구원을 간절히 기원했던 건, 그만큼 삶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홍성과 예산은 인근의 서산과 태안을 함께 묶어 ‘내포(內浦)지방’이라고 부른다. 내포란 바다가 육지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온 지역이란 뜻. 이쪽에 미륵이 가장 많이 세워졌던 건 신라 말엽 때다. 덧없이 스러지고만 백제가 거기 있었다. 통일 신라 이전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선이었던 내포지방에는 전란이 끊이질 않았다. 후삼국의 전쟁도 이쪽이 주무대였다. 끝을 모르는 기나긴 전쟁의 복판에서 살았던 내포 사람들은, 그러나 희망을 믿었다. 그래서 언젠가 미륵이 내려와 자신들을 구원해 주기를 빌고 또 빌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00년. 이 땅의 삶은 여전히 혼돈스럽고 어지럽다. 이루지 못한 꿈과 욕망, 그리고 미래 세상의 구원의 꿈은 아직 여전하다. 신년 벽두의 여행지로 내포의 미륵불을 만나러 가는 여정을 권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소원은 소박하면 소박할수록, 그 소원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로 향하는 것일수록 그 여정은 더 따스하고 값지리라.

# 용봉산, 패망한 백제의 불국토를 이루다

내포지방의 미륵을 만나러 가는 여정의 중심은 마땅히 홍성 땅의 용봉산이 돼야 한다. 높이래야 해발 381m에 불과하지만, 용봉산은 능선을 따라 창처럼 세워진 기암이 늘어서 있어 한눈에도 범상찮은 기운을 뿜어내는 산이다. 산 이름에다 용(龍)과 봉황(鳳)을 함께 넣은 것만으로도 비범한 산세는 짐작되고도 남는다. 투석봉, 노적봉, 악귀봉, 병풍바위…. 일일이 이름을 외자면 숨이 찰 정도의 암봉들이 저마다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용봉산의 능선은 북쪽으로 예산의 수암산으로 이어진다. 암릉의 줄기는 수암산으로도 넘어가 비경을 빚어내는데, 수암이란 이름도 ‘빼어날 수(秀)’에 ‘바위 암(巖)’자를 쓴다.

▲홍성 용봉산 아래 용도사의 상하리미륵불. 각진 체구와 얼굴을 한 7.7m의 거대한 석불이다.

용봉산과 수암산이 이어지는 긴 능선에는 지금은 용도사와 용봉사 딱 두 곳만 남았지만, 오래전에는 골짜기마다 절집이 들어서 있었다. 한건택 충남문화재전문위원이 직접 확인한 용봉산의 절터만 무려 27곳에 이른단다. 신라의 경주에 석불들로 즐비한 남산이 있다면, 백제의 내포 땅에는 용봉산이 수많은 사찰로 불국토를 이루고 있었던 셈이다. 절집은 두 곳만 남긴 채 스러지고 없지만, 마애불은 도처에 남아 있다. 용봉산은 암릉의 산세만으로도 사람들을 불러들이지만, 마애불을 따라가는 행로를 이으면 그 여정은 더 풍성해진다.

먼저 산행 코스를 따라 용봉산 남쪽 아래부터 시작하자. 산행 들머리가 되는 절집 용도사에는 당당한 체구의 상하리미륵불이 우뚝 서있다. 떡 벌어진 어깨와 각진 얼굴의 불상은 높이가 7.7m, 어깨 폭도 4m에 달한다. 미륵불 바로 옆에 대웅전이 있는데도 주지 스님은 이른 아침부터 법당을 놔두고 미륵불 앞에서 예불을 시작했다. 후덕한 표정의 석불에서는 위압감보다 소박함이 느껴졌다. 금세라도 기도하는 이에게 손을 내밀 것 같은 그런 인상이다.

용봉산 남쪽 끝에 상하리미륵불이 있다면, 반대편 북쪽 예산의 수암산 자락에는 삽교석조보살입상이 있다. 두 개의 돌을 붙여서 세운 이 미륵불도 키가 8m에 달한다. 이 미륵불은 홍성의 상하리미륵불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홍성의 것이 두꺼운 몸매에다 다소 무뚝뚝한 인상이라면, 예산의 것은 키만 훌쩍 큰 여윈 체격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좀 불경스러울지는 몰라도 두 미륵불을 한꺼번에 이르자면 이런 표현이 딱 적당하겠다. 뚱뚱이와 홀쭉이….

남쪽 끝과 북쪽 끝에 하나씩의 미륵이 있다면 산의 가운데쯤에는 관음보살이 있다. 용봉산과 수암산 능선의 딱 중간쯤에 있는 절집 용봉사. 그 위쪽에는 신경리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바위면을 파내고 그 안에 불상을 돋을새김했는데 유연한 조각 솜씨가 돋보인다. 이 불상은 앞으로 기울여 조각돼 있는데, 그 앞에 서서 불상과 눈을 맞추면 왜 애써서 이렇게 기울여 조각했는지를 금세 알 수 있다. 용봉사 아래쪽에도 바위에 글과 함께 새겨놓은 마애불이 또 하나 있다. 기사 첫머리에서 소개한 그 불상이다. 용봉사의 석불 중에서 유일하게 조성한 시기가 명확하게 확인되는 미륵불이다. 미륵불을 새긴 건 신라 말인 799년.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1215년 전의 일이다.

# 미륵의 하생을 기다리던 간절한 기원

용봉산의 빈절골에도 마애보살입상이 있다. 인적이 없는 계곡의 무성한 조릿대 덤불을 뚫고 이정표 하나 없는 길을 찾아가는 길이다. 산중을 헤매다가 넓적한 바위에 얕게 돋을새김돼 있는 불상을 찾았다. 꾹 다문 입에 한 손을 들고 있는데, 자취 없는 담쟁이 덩굴이 허리춤을 휘감고 있다. 그 위쪽으로 빈절골의 옛 절터가 있다는데, 도무지 길이 없어 접근이 불가능해 발길을 되돌렸다. 빈절골 아래에도 가마바위골 절터가 또 있다고 전해진다. 거기서 불상과 석탑이 몇 개 무단으로 반출됐고, 30년 전쯤 발견된 머리가 없는 불상은 공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졌다. 그것 말고도 용봉산 아래에 있었다던 27개의 옛 절터마다 불상이나 석탑을 모셔 두고 있었을 터이니 얼마나 많은 불상들이 실려 나갔던 것일까.

도난당한 석불이라면 홍성의 용산리미륵불을 빼놓을 수 없겠다. 강인한 인상의 이 석불은 길가의 언덕 위에 벽돌담을 두른 채 서있는데, 지난 1989년 감쪽같이 도난당했다가 한 달여 만에 되찾았다.

도난당한 석불은 온양역 인근의 석재상에게 팔려 나갔는데, 마침 기차를 타고 가던 주민이 기찻길 옆 석재상에 뉘어져 있던 석불을 우연히 발견해 되찾아왔다. 석불을 찾아온 뒤 마을 주민들은 산중에 있던 석불을 길가로 옮기고는 주위를 담장으로 둘러쳤다. 홍성에는 이것 외에도 홍성읍 내법리에 광경사지석불좌상이, 홍북면 내덕리에 석불좌상미륵불이 있다.

홍성에서 예산 쪽으로 건너가면 미륵을 기다리던 이들의 간절한 염원이 서린 자취가 있다. 봉산면 효교리의 매향비. 고려 말 혼란의 시기. 왜구들은 들끓고, 지역 토호들의 학정이 판을 치던 당시에 민초들은 미륵을 기다리며 갯벌에 향나무를 묻었다. 현실 세상의 고통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56억7000만 년이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억겁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다. 그래서 갯벌에 묻었던 향나무가 1000년 뒤에 물 위로 떠오르면 미륵이 오고, 그때 미륵 앞에 1000년 묵은 향을 피워 올린다는 믿음을 가졌다. 매향비란 바로 그곳에 향나무를 묻고 매향의식을 치렀음을 징표하는 비석이다.

비석은 ‘도라지가든’이란 상호의 식당 한쪽의 밭에 버려지듯 놓여 있었다. 구원을 기다리던 백성들의 꿈이 변변한 안내판 하나 없이 나뒹굴고 있다. 간척사업으로 바다는 멀리 물러나 버렸고, 1000년이 지나서 떠오른다던 향나무는 땅속에 묻혔을 것이다. 미륵 도래의 염원으로 향나무를 묻고 매향비를 세운 지 800년 남짓. 땅속에 묻히고만 향나무처럼,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매향비처럼 미륵은 영 오지 않을 것인가.

# 눈물 섞인 기도를 만나다

예산 땅에도 도처에 석불과 미륵이 있다.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덕산면 상가리의 남연군묘. 남연군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다. 상가리미륵불은 그 묘를 등지고 서있다. 대원군이 본래 가야사 절터를 허물고 그 자리에 아버지의 묘를 쓰자, 노한 석불이 돌아앉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당대의 세도가가 지은 호화스러운 묘에 뒤돌아선 미륵불에다 사람들은 과연 어떤 소망을 빌었던 것일까.

미륵과 불상을 찾아 내포지방으로 떠난 여정에서 예산의 수덕사를 뺀다면 아니 될 말이다. 예산 덕숭산의 수덕사는 조성 연대가 확인되는 국내 최고의 목조건축물인 대웅전이며 절집의 고즈넉함이 워낙 이름난 곳이라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

수덕사를 찾는 이들은 대개 대웅전만 둘러보고 돌아서지만, 수덕사의 진면목은 오히려 절집 뒤편 덕숭산 어깨에 있는 정혜사를 비롯한 산내 암자에 있다. 남매탑 위로 장엄하게 저무는 해를 만날 수 있는 정혜사는 스님들이 동안거를 지내는 동안 출입이 통제돼 아쉽지만, 그 곁의 만공 스님을 기리는 만공탑과 그 아래 향운각, 그리고 거대한 석불은 놓치지 말 일이다. 만공탑과 향운각도 근대의 것이고 만공 스님이 세운 석불도 1924년에 조성된 것이다. 석불은 관음보살상이지만 산길을 짚어 거기까지 오른 이들은 석불을 관음이 아닌 미륵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해가 저물 무렵, 한 할머니가 고무신을 신고 산길을 올라와 산중의 석불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백팔배를 하고는 불상 앞에 엎드린 할머니의 눈물 섞인 기도가 어찌나 간절했던지, 감히 그 사연을 물을 수 없었다. 기도는 고통에서 시작되지만, 그 끝은 희망이다. 내포 땅의 그 수많은 미륵들은 그것을 증거한다. 오랜 세월에 무너지고 지워져 비록 돌로 나뒹굴고 있을지라도…. 할머니의 굽은 등 뒤로 짧은 겨울 해가 노을과 함께 뉘엿뉘엿 기울었다.


■ 홍성 용봉산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당진갈림목에서 당진∼영덕 간 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고덕나들목에서 나가 덕산·고덕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홍성·삽교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충남도청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용봉산이 보인다. 미륵을 보러 가는 산행은 들머리를 용도사 쪽으로 잡는 게 좋다.

용봉초등학교 뒤편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용도사에 닿는다. 용도사에서 출발해 정상을 지나 노적봉, 악귀봉을 지나 용봉사 쪽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능선에 올라 수암산으로 건너가서 예산 삽교의 세심천온천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따라가면 된다.

용봉산에서 예산의 수덕사까지는 차로 20분이 채 안 걸린다. 수덕사의 대웅전 왼편으로 덕숭산의 만공탑과 관음보살상에 닿는 산길이 있다. 홍성과 예산 땅 구석구석의 미륵불을 찾아가려면 군청의 문화예술과에서 지역의 문화재를 소개한 핸드북을 받아가는 게 요긴하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예산 덕산온천 쪽의 리솜스파캐슬(041-330-8000)이 첫손으로 꼽을 만한 숙소다. 리솜스파캐슬에는 온천물로 스파를 즐길 수 있는 시설 ‘천천향’이 있다. 가족여행이 아니라면 예당호 주변의 라노스모텔(041-332-8801)도 추천할 만하다. 예당호생태공원이 모텔 바로 앞에 있어 습지에 놓인 덱을 따라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이즈음 예당호에는 철새들이 날아들었다. 홍성에는 군에서 관리하는 용봉산자연휴양림이 괜찮다. 4인·6인·10인실을 두루 갖추고 있어 가족여행이나 단체여행에 적합하다.

예산에서는 덕산온천 부근의 ‘고덕갈비’(041-337-8700)가 첫손으로 꼽히는 맛집이다. 메뉴는 딱 한 가지, 한우암소갈비만 낸다. 예산군 광시면 광시리와 하장대리 일원에 조성된 광시한우마을은 50여 개의 한우정육점과 음식점이 밀집해 저렴하게 한우맛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