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도둑질하면 아들은 신고해야 할까
▲ ‘사부자송’, 작자 미상, 공부자성적도, 산동곡부문물편 |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자식은 부모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춰 보고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 옷 매무새는 단정한지, 얼굴 표정은 온화한지, 말투는 공손한지 거울을 보고 확인할 수 있다. 자식이 비뚤어지고 엇나갈 때 그 원인은 십중팔구 부모에게 있다. 자식이 들여다보는 거울이 흐리기 때문이다. 자식이 몹쓸 짓을 할 때 부모 된 이의 덕을 탓하는 것도 자식의 뿌리가 부모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대사구(大司寇) 벼슬에 있을 때 부자(父子)간 소송건이 있었다. 공자는 법 집행에 앞서 그 아버지와 아들을 옥에 가두고 3개월이 지나도록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얼마 후 아버지가 소송을 철회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소송을 제기했던 모양이다. 거울이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두른 격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화가 치밀어오를 때는 몰랐는데 감옥이라는 유폐된 공간에 격리되고 나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들이 곧 아버지라는 것을. 큰 부끄러움을 느낀 아버지가 소송을 철회한 것은 당연한 결말이다. 공자가 이들에게 즉각적으로 형을 집행하지 않은 것은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천륜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을 주고자 함이었다. 아버지가 반성하자 공자는 곧 부자를 사면했다. 공자의 이야기는 당시 권력자인 계손씨(季孫氏)에게 보고됐다. 계손씨는 공자의 직무태만을 나무랐다.
“사구(공자)가 나를 속이고 있다. 지난번 나에게 ‘국가는 반드시 효를 먼저 가르쳐야 한다. 나는 이제 하나의 불효한 자를 죽여 백성들에게 효를 가르쳤으니 또한 옳지 않은가’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저 불효한 자를 용서해 주다니 어찌된 일인가.”
제자 염유(冉有)가 공자에게 이를 고하자 공자가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윗사람이 도를 잃어 아랫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효로써 교화시키지 못하고 옥사만 다스린다면 이는 무고한 자를 죽이는 것이 된다. 삼군(三軍)이 크게 패한다 해도 그 병사들을 목 벨 수 없는 것이며, 옥에 죄수가 많다 해도 형벌을 마구 쓸 수는 없다. 왜 그렇겠는가. 위에서 교화가 행해지지 못하였기에 그런 것이지 백성들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릇 법령은 제대로 갖추지 아니한 채 죄를 다스리는 데만 집착한다면 이는 백성을 해치는 짓이요, 세금 거두기를 때가 없이 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포악한 짓을 하는 것이며, 시험해 보지도 아니하고 성과만 책임 지우는 것은 백성을 학대하는 것이다. 정치에서 이 세 가지 폐단이 없어진 뒤라야만 형벌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동문서답이다. 계손씨가 주장한 것은 일벌백계(一罰百戒)였다. 한 사람에게 벌을 주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고발하고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 싸운 콩가루 집안은 본보기로 처벌해야 다시는 불효막심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일 하라고 사구에 앉혀놓은 것 아닌가.
계손씨의 불편한 심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공자는 전혀 엉뚱한 대답으로 자신의 소신을 밝힌다. 옥사를 다스리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윗사람의 도덕 불감증과 제도의 허점이다. 위에서 솔선수범하면 아랫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윗사람을 본받게 되어 있다. 소송을 제기한 부자를 3개월 동안 외면했던 것은 서로에게 반성할 시간을 준 것이다. 스스로 반성함으로써 잘못을 뉘우친다면 백 마디 말이나 천 가지 형벌보다 더 값진 판결이라 할 수 있다. 백성을 가르치려 들지 말고 정치하는 너희들부터 정신을 차려라. 이 한심한 자들아. 이것이 공자의 대답이었다.
‘사부자송(赦父子訟·부자간의 소송을 해결하다)’은 두 가지 사건을 한 화면에 그렸다. 오른쪽은 공자가 병풍 앞에 앉아 소송을 제기한 부자의 얘기를 듣는 장면이다. 왼쪽은 공자가 나무 아래에서 사건의 진행 과정과 형벌의 적용에 대해 제자들에게 얘기하는 장면이다. 머리에 관을 쓴 모습은 공자가 관직에 있을 때만 볼 수 있다. 그림은 사건의 전개 순서에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어간다. 두 장면 사이에는 대각선으로 언덕을 그려 시간의 경과를 암시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논어’의 자로(子路)편에도 나온다. 섭공(葉公·초나라 대부)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 몸가짐이 바른 자가 있으니,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고발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기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주지만 정직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주희(朱熹·1130~1200)는 ‘논어집주(論語集注)’에서 이 부분을 ‘부자 사이는 서로 감싸주는 것이 천리와 인정의 지극함이다. 따라서 정직을 구하지 않아도 정직이 그 안에 있다’라고 풀이했다. 설령 아버지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 해도 아들은 아버지를 감싸주고 숨겨주어야 하는 것이 천륜이다. 가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공자의 입장은 맹자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맹자(孟子)’ ‘진심(盡心)’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도응(桃應)이 맹자에게 물었다. “순(舜)임금의 아버지인 고수(瞽瞍)가 사람을 죽였다면 순은 어떻게 했을까요.” 맹자가 말했다. “순임금은 천자(天子) 자리를 마치 헌신짝 버리듯 하고 몰래 아버지를 업고 도망가 바닷가 외진 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공자에서 맹자로 이어지는 유가(儒家)의 입장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감싸주는 것을 천륜으로 여긴 것이라면, 섭공의 입장은 묵가(墨家)에 가깝다. 묵가의 문인 중에 거자(鉅子) 복돈(腹敦)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들이 진(秦)나라에 있을 때 사람을 죽였다. 진의 혜왕(惠王)은 복돈이 연로한 데다 다른 아들이 없어 복돈의 아들을 처형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 말을 들은 복돈은 단호한 목소리로 “우리 묵가 문인들의 법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어야 하고 사람을 다치게 한 자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무릇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지 않도록 금지하는 것은 천하가 다 함께 지켜야 하는 공법(公法)입니다. 왕께서 비록 제 아들에게 은덕을 베푸셔서 옥리로 하여금 그를 처형하지 않게 하신다 해도 저는 묵가 문인들의 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복돈은 혜왕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마침내 자신의 아들을 처형했다. 임금의 사면에도 불구하고 법을 지키는 것에서는 예외를 두지 않았던 묵가의 단호하면서도 엄정한 행위를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온갖 흉악한 범죄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아들이 유흥비를 갚기 위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고등학생이 10만원 때문에 친구를 살해하고, 삼촌이 어린 조카를 강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한다. 이럴 때 공자 같은 법관이 있었다면 어떻게 판결했을까. 복돈 같은 묵가가 있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공자와 묵자는 대척점에 서 있지만 오늘의 우리들에게 죄인을 근본적으로 개과천선시킬 수 있는 접근법을 고민하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기득권에 맞선 공자의 실패한 거사
예타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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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 ‘예타삼도’, 1904년, 2책, 목판채색, 27.6×37.8㎝, 장서각 |
우리가 대통령을 뽑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바람에서다. 부자와 권력자의 뜻대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의 뜻을 배려해 달라는 소망에서다. 그런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이념도 다르고 세대도 다른 수많은 사람의 요구를 전부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러 계층의 사람을 고루 만족시키려면 적절한 균형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일정 부분 자신들의 손 안에 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쉽지 않은 얘기다. 새로 뽑은 대통령에게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통령은 기득권 세력에 휘둘려 거친 파도 속을 표류하는 난파선이 될 수 있다. 현실에서 무수히 확인할 수 있는 실정이다.
이런 사례는 역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왕이 훌륭한 성품에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명주(明主)라면 그 나라는 발전한다. 그러나 방탕하고 난폭한 폭군(暴君)이라면 발전은커녕 백성은 도탄에 빠진다. 성군(聖君)이나 폭군은 아닐지라도 어리석고 멍청한 왕(幽王)이나 도리를 모르는 부끄러운 왕(赧王)일 경우에도 백성의 삶이 팍팍하기는 마찬가지다.
공자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공자가 대사구(大司寇) 때 노나라 군주는 정공(定公)이었다. 당시 권력은 군주가 아닌, 실세그룹인 삼환(三桓·환공의 자손)이 쥐고 있었다. 삼환은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 등 세 가문으로, 그중 계손씨가 수장이었다. 이들은 공자가 태어나기 백여 년 전부터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국정을 주물렀다. 논어 ‘팔일’에는 삼환의 오만방자한 행태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다.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팔일무를 뜰에서 추게 했으니, 이것을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참을 수 없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에게만 허용된 춤이다. 일(佾)은 여러 사람이 줄을 지어 추는 춤으로 가로와 세로에 같은 인원이 정방형으로 배치된다. 팔일무는 가로와 세로에 여덟 명 씩 줄을 서서 모두 64명이 춘다. 고대 중국에서는 신분에 따라 의식에 쓰는 춤의 형식이 정해져 있었다. 천자는 팔일무, 제후는 육일무(36명), 대부는 사일무(16명), 사는 이일무(4명)를 추게 할 수 있다.
춤은 단순히 즐기기 위한 오락이 아니었다. 예(禮)와 악(樂)은 고대 종법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틀이었다. 예는 음악으로 표현되고, 음악은 각 계층의 권력과 신분을 드러내는 엄숙한 형식이었다. 예악은 감상을 위한 축제나 문화제가 아니라 당시 신분사회를 확인할 수 있는 권력의 외양이었다.
공자가 계씨에 대해 분노한 것은 계씨가 제후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제후는 당연히 육일무를 써야 한다. 그런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다 보니 팔일무를 하게 해 천자의 권력을 넘봤다. 공자는 계씨의 행동이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고 판단했다. 계씨의 행동을 보고도 참아낼 수 있다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참지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공자는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지 않으면 나라의 질서가 바로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옛 성왕(聖王)이 정한 원칙과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원리주의자였다. 사회 안정의 정점에 군주가 있다고 믿었다. 삼환같이 무례한 자들은 안정된 사회질서를 깨뜨리는 자들이었다. 역대 군주도 삼환을 견제하고 왕권을 회복하고자 시도했다. 정공 이전의 소공(邵公)이 대표적이다. 소공은 계손씨의 닭싸움을 핑계로 그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쫓기는 신세가 되어 제나라로 도망가서 죽었다. 소공을 쫓아낸 계씨가 바로 뜰에서 팔일무를 추게 한 계평자(季平子)였다. 그가 바로 공자가 분노한 대부였다.
공자도 소공을 따라 제나라에 갔다 왔다. 공자는 외국으로 망명한 군주를 보면서 힘없는 사람의 말로가 어떤지를 생생하게 목격했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는 상태에서 기득권 세력에 대항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느꼈다. 공자는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제나라에서 돌아온 공자가 관직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제자들 양성에 전력한 것도 그런 현실적 제약 때문이었다.
소공이 죽고 정공이 즉위했다. 계손씨의 집안도 계평자에서 계환자(季桓子)로 바뀌었다. 공자는 대사구가 됐다. 공자는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공자는 삼환의 근거지를 제거함으로 해서 그들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삼도(三都)를 허무는 것이었다. 삼도는 계손씨의 비(費), 숙손씨의 후(郈), 맹손씨의 성(郕) 등 그들이 다스리는 세 도시를 뜻한다. 공자는 삼도를 허물 명분을 다음과 같이 정공에게 아뢰었다.
“신하는 병기를 감출 수 없고, 대부는 고을에 백치(百雉)의 성을 쌓을 수 없는 것이 옛날부터의 제도입니다. 그런데 계손씨와 맹손씨, 숙손씨의 성곽은 모두 이 규정을 넘어서고 있으니, 모두 그 제도에 맞게 성곽을 헐어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공자의 말을 들은 정공은 세 곳의 성곽을 예법에 맞게 헐어버리도록 했다. 공자는 계씨의 가신으로 있던 제자 중유(仲由)로 하여금 삼도를 허물게 했다. ‘예타삼도(禮墯三都·예법에 따라 세 곳의 성곽을 헐다)’는 그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성곽 위로 붉은 옷을 입은 정공이 공자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 성곽 아래서는 중유의 지휘 아래 군사들이 반항하는 세력을 쫓아내고 있다. 세 가문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고 싸움은 치열했다. 그림에는 위태로운 현장 상황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다. 단순히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한 삽도(揷圖)인 듯 위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공자의 무모한 도전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일지도 모른다.
공자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거사가 실패하자 어리석고 멍청한 왕(幽王) 정공(定公)은 공자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공자가 고국을 떠나 주유열국하게 된 배경이다. 공자 나이 55세 때의 일이었다. 공자가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14년 동안 노나라는 결코 안정되지 않았다. 여전히 삼환이 권력을 휘두르며 노나라를 좌지우지했다. 우리는 공자 시대와 달리 대통령을 5년마다 한 번씩 뽑을 수 있다. 능력이 부족한 대통령이라도 5년이면 바뀐다. 그런데도 국민의 삶이 그다지 바뀌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삼환 같은 세습귀족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