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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사람도 품위가 필요하다

醉月 2011. 8. 14. 19:33
 청년층 1인 가구주가 꾸준히 늘고 있다. 과거 ‘독립생활’이 결혼을 준비하는 ‘과도기’였다면, 현재는 새로운 삶의 양태로 뿌리내렸다. 건강하고 품위 있는 독립생활을 원하는 이들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비는 무색인데 벽을 타고 배어나오는 물은 노란색이었다.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7월27일, 회사원 김원우씨(가명·29)는 출근 전 그 벽을 멍하니 한참 들여다봤다. 수직으로 창문에 내리꽂히던 빗줄기는 아무리 틀어막아도 별무소용이라 포기하던 차였다. 퇴근 뒤 ‘물침대’에서 잠들 자신을 상상하며, 김씨는 소설가 김애란의 단편소설 <도도한 생활> 한 장면을 떠올렸다. 서울의 반지하 방에서 아르바이트 생활자로 살던 주인공이 침수된 방의 물을 아무리 퍼내도 소용없었던 그 망연한 장면을. 그러다 그냥 포기하고 조율 안 된 피아노 건반만 가만히 누르던, 그 서러운 장면이 떠올랐다고 했다.

김씨는 서울 마포구 13㎡(약 4평) 남짓한 원룸에서 1년 전부터 혼자 산다. 취업과 동시에 부모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제 손으로 돈을 벌게 되면 다른 무엇보다 하고 싶던 일이 독립이었다. 이혼한 뒤로도 경제적 이유로 함께 살면서 으르렁대는 부모의 불화를 더 이상 목격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가장 좋았다. ‘비혼주의자’를  자처하는 김씨는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어머니를 아버지로부터 ‘구출’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로는 요원한 일이다. 김씨가 거주하는 방은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45만원. 정규직이지만 2000만원 초반대의 연봉을 받는 그에게는 지금의 삶도 다소 감당하기 버겁다.


   

ⓒ시사IN 조우혜
독립생활자는 식사를 대개 혼자 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되는 음식 재료들이 생기기 마련.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박경내씨(31)는 꼭 필요한 만큼만 돈을 번다. 최근에 구한 아르바이트는 서울 인사동의 소규모 액세서리 판매점이다. 일주일에 두세 번, 딱 8시간씩만 일한다. 손에 쥐는 돈은 한 달 40만원 남짓. “제가 직장 생활 해봐서 아는데요(웃음). 돈 많이 벌면 뭐해요? 어느 순간 제가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위해 살고 싶어요. 저보고 비아냥거리듯 ‘낭만주의자’라고 하는데요. 저는 그 말, 안 부끄러워요.”


“우리는 정말 ‘독립’한 걸까?”

경남 창원이 고향인 박씨는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부모의 뜻에 따라 지방대학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왔다. ‘이주’에 가까운 독립이었다. 그러나 부모가 무상으로 지원해준 서울 도봉구의 39㎡(약 13평) 남짓한 전세금 4000만원짜리 방은 요즘 들어 박씨를 근심하게 만든다. 부모는 서른을 넘기고도 결혼하지 않는 딸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전세금을 활용한다. “제대로 된 직업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을 거면 당장 전세금 빼서 내놓아라.” 박씨는 부모와 통화할 때마다 이 말을 반복해 듣고, 반복해 변명한다.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취집’은 너무 굴욕적이잖아요. 제가 가장 약한 부분이 전세금인 걸 알고 그러시는 걸 보면…. 아, 부모님 너무 치사하지 않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간섭 못 하시게 전세금이나 좀 벌어놓을걸 싶다니까요.”

단순히 1인 가구로 사는 것을 독립이라고 본다면 두 사람은 겉으로는 ‘번듯한’ 독립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1인 가구는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20.0%였지만, 2010년 조사에서 23.9%로 증가했다. 이를 연령별로 쪼개보면 1인 가구 중 20~30대 청년이 차지하는 비중은 37.5%나 된다. 청년들은 김원우씨나 박경내씨처럼, 혹은 더 다양한 각자의 사연으로 독립생활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을 한 꺼풀만 들춰봐도 ‘독립’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불완전함이 드러난다. 독립의 사전적 의미가 ‘다른 것에 예속하거나 의존하지 아니하는 상태’라 한다면, 김씨의 경우는 가족 문제에서, 박씨의 경우는 경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독립이다.

고시원을 중심으로 청년 세대의 주거를 분석하고 있는 <자기만의 방>(이매진 펴냄, 2011년)의 저자 정민우씨는 청년 독립생활자의 비자발성에 주목한다. “집값은 상승하고, 취업은 어렵고, 자연스럽게 결혼이 유예된다. 현재 청년기의 생애 단계 자체가 지연과 유예, 불안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른바 ‘취업→결혼→출산·육아’로 이어지는(그리하여 인구 재생산에 기여하는) 표준적 삶은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미래가 됐다.” 청년 세대의 경우 예전에는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 잠깐 거쳐가는 시간을 독립생활이라고 표현했다면, 현재는 취업과 결혼의 시간이 지연되면서 독립생활 자체가 삶의 한 양식으로 틈을 비집고 들어온 셈이다.

박미정 재무상담사(리얼와이즈 멘토그룹)는 이렇게 비자발적 독립생활을 강요하는 사회를 ‘잔인한 사회’라고 규정했다. “재무 상담을 하다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결혼을 하고 싶지만, 집은커녕 아직 학자금 대출도 못 갚은 젊은이가 수두룩해요. 그런 이들을 소비자로 위치시키는 ‘골드미스’니 ‘초식남’ 따위 신조어가 생겼죠.” 박씨에 따르면 문제는 ‘결혼 못하게 만드는 사회’이다. “가만히 보면 개인-가족-이웃-지역사회-국가, 이 연결고리가 다 끊어져 있어요. 그게 독립인가요? 이건 파편화된 거지, 독립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비자발적 독립이 아닌 진정한 독립생활은 가능할까? 독립이라는 외피를 둘러쓴 ‘가사(假死) 상태’에서 깨어날 수는 없는 걸까? 스스로도 1인 가구주로 살고 있는 박미정씨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시작한 이가 마포 지역사회 생활공동체 ‘민중의 집’ 안성민 사무국장(35)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지난 5월 한 달간 민중의 집에서 열린 독립생활자 일촌맺기 프로젝트, ‘참삶 참경제 특강’이다. ‘독립생활자’라는 용어를 만든 것도 민중의 집이다. 400여 명이라는 ‘조촐한’ 회원의 회비로 운영되는 지역 기반 단체가 벌인 것치고 강좌에 대한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25명을 모집한 강좌는 10여 일 만에 마감되었다. 홈페이지 문의 댓글과 조회 수도 눈에 띄게 높았다. 독립해 잘 사는 법을 고민하는 청년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강좌를 기획하면서 박미정씨와 안성민 국장이 주로 고민한 것은 ‘돈’과 ‘관계’ 문제였다. 자신들을 포함해 대부분 빈곤 상태에 빠진 청년이 안정적으로 독립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이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과소비도, 사치도 않는데 왜 늘 가난할까


먼저 돈 문제. 가계부를 쓸 때마다 폭폭 새어나오는 한숨을 막을 길이 없던 황지현씨(23)는 이 강좌를 들으면서 자신감을 얻게 됐다고 말한다. 황씨는 부산에서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공부를 찾아 서울살이 2년째에 접어들었지만, 고향의 부모로부터 어떤 원조도 받지 않는다. 자료를 엑셀 서류에 입력하는 따위의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은 한 달에 50만원. 빠듯한 생활을 하다보니 “어떤 때는 밥 먹는 것조차 죄스러웠다”라고 황씨는 말했다. 


   
ⓒ시사IN 조우혜
독립생활자에게 맞춤한 영화들이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상영됐다(위).


‘과소비’나 ‘사치’는 꿈꿔본 적도, 해본 적도 없는데 왜 늘 돈이 부족한 걸까. 황씨는 우연히 접하게 된 독립생활자 특강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수강생 20여 명과 각자 재무제표를 작성하고 사연을 나누다보니 문제가 보였다. “강의를 듣다보니 도시라는 공간이 이미 결정한 소비 수준이 있더라고요. 많이 버는 것보다, 내가 가진 한도 내에서 잘 쓰는 법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실제 생활에는 곧바로 적용하지 못하고 노력하고 있긴 한데, 마음이 덜 불안하다고 해야 할까요?”(63쪽 기사 ‘혼자 살려거든 신용카드부터 버려라’  참조)

한 달 과정의 강의가 끝난 뒤, 박미정씨는 수강생들에게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네시스 펴냄, 2009년)를 들이밀었다. 책을 매개로 격주로 만나는 후속 모임을 통해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였다. 관계는 지속 가능한 독립생활을 위한 또 하나의 키워드다. 돈이 부족해도 그 틈을 메워주는 것이 사람 간의 관계이다.

이를테면 서울 마포에 사는 안성민 사무국장은 월급의 30% 이상을 월세로 소비한다. 그러나 비싼 방세를 대신해주는 ‘관계’가 동네에 있기에 불만은 없다. “생각해보면 저 같은 경우는 제가 살고 있는 방의 월세가 제 월급에 비하면 비싸지만, 그 이상으로 관계가 주는 효용이 크거든요. 예를 들면 식비 같은 것들. 혼자 먹으면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되는 음식 재료 따위를 모아서 함께 먹을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동네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안씨가 보기에, 대개의 독립생활자는 지역에 뿌리내리기보다는 부유하는 존재였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묶어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그 결과 특강을 마친 뒤로도 독립생활자 소모임이 이어지게 됐다. 지난 7월12일 민중의 집에서 시작한 소모임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끔 열려 있다. 참석자는 조금 일찍 모여 밥 한 끼를 나눠 먹는 것으로 그날의 모임을 시작한다.

7월26일 저녁, 소모임 멤버가 식탁을 꾸렸다. 실수로 간을 하지 못한 감자볶음, 누군가 집에서 가져온 가지볶음, 지난해 민중의 집이 회원으로부터 기부받은 김장김치, 옥상 텃밭에서 기른 청양고추로 만든 간장절임…. 집에서는 어쩐지 잘 해먹지 않게 되는 밥, 늘 혼자였던 식탁이 아닌, 여러 사람의 젓가락이 분주히 움직이는 식탁 위에서 각자의 생활사 역시 반찬이 된다.

식사 후에는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를 해 설거지를 맡는다. 별것 아닌 일에 까르르 웃음이 번졌다. “지극히 작은 한 명 한 명이 모이는 게 시작이죠. 사람이 자본주의의 도구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상처받지 않고 우리의 인간됨을 지키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공부를 계속하려고 해요.”


‘연대’를 꿈꾸는 독립생활자

그런가 하면 민중의 집은 주머니가 가난한 독립생활자를 위해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 마을극장과 의기투합해 ‘친구 하는 영화관’을 7월 내내 열기도 했다. 혼자 사는 나, 일하는 나, 반려동물과 사는 나, 결혼 압박을 받는 나, 통장 잔액이 별로 없는 나…, 이런 독립생활자들의 자연스럽고 다정한 만남을 위한 맞춤 영화들이 성미산 마을극장 송유림 프로그래머(26)의 고민을 거쳐 상영됐다.

‘친구 하는 영화관’의 7월 마지막 상영작은 <파니 핑크>(1994년).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 파니 핑크는 관객에게 말을 건다. “저는 파니 핑크예요. 여자의 행복에 꼭 남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겠죠. 하지만 올해 서른이 되었고. 혹시 이런 말 아세요? 서른이 넘은 여자가 남자를 만나기는 원자폭탄을 맞기보다 어렵다는…. 전 혼자 살아요. 예! 혼자 사는 게 좋아요. 하지만 원했던 건 아니에요.”

영화 속 그녀처럼 독립생활자도 많은 걸 바랐던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유예의 시간 혹은 혼자서도 오래도록 잘 살고 싶은 ‘욕망’의 시간. 이 시간을 건강하게, 품위 있게, 고립되지 않게 살아가고자 하는 독립생활자들의 연대가 지금 막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