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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2_로또

醉月 2011. 8. 7. 08:21
당첨의 비결, 있다? 없다! vs 현대과학 대 포천쿠키의 대결
»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화

당첨의 비결, 있다? 없다!

로또 번호는 수열에 불과…풍수지리.당첨번호 서비스 등은 ‘1등 환상’ 부풀리는 도구일 뿐, 신봉하지 말고 즐기시라

 

진중권 문화평론가

 

<꺼벙이>를 그린 길창덕 화백은 어린 시절의 어떤 체험 때문에 평생 복권을 사지 않았단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함락한 기념으로, 그 지역에서 약탈한 고무로 공을 만들어 소학교 학생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선생의 반에는 50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공이 하나 덜 왔다. 결국 학생들 전체가 제비를 뽑기로 했다. 공을 받을 확률은 50분의 49=무려 98%. 하지만 선생은 ‘꽝’을 뽑았다. 확률 98%의 게임에서도 당첨이 못 되는데, 복권은 닐러 무삼하리요. 그 뒤로 선생은 평생 복권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확률은 누적되지 않는다

 

당첨에도 ‘비결’이 있다나? 내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거기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유구한 전통에서 나온 비결로, 풍수지리학이라는 민족학문을 이론적 토대로 한 것이다. 길거리를 걷다 보면, 도처에서 보는 게 ‘복권 명당’이라는 글자. 로또를 판매하는 곳마다 1등 당첨자를 배출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게 다 대한민국 도처가 풍수지리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는 증거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 가설에 따르면, 그곳에서 복권을 사면 터줏대감이 로또의 뮤즈가 되어 숫자를 기입하는 손의 움직임을 이끌어주시는 모양이다.

 

또 하나는 서양 오랑캐의 비결로, 확률론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인터넷에 널린 게 “언론에서도 인정한 과학적 방법”으로 당첨번호를 알려준다는 광고. 그중 한 회사의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이른바 ‘랜덤워크 시스템’이라는 것을 사용한단다. 원리는 간단하다. 앞에 나왔던 당첨번호들을 분석해 각 숫자의 출현 빈도를 구하고, 그 빈도에 따라 랜덤하게 번호를 생성시킨다는 얘기다. 그 회사의 사이트에서만 1등 당첨번호를 적중시킨 게 무려 수십 번. 사이트에는 그 회사에서 골라준 번호로 행운을 잡은 이들의 사진이 증거물로 올라와 있다.

» '복권 명당'과 로또 당첨 가능성은 무관하다. 다만 구매자들은 1등에 가까워진다는 환상을 믿으며 좀더 행복해질 수 있을 뿐이다.

 

로또에 정말 비결이 있을까? 물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당첨의 비결’이 아니라 ‘판매의 비결’이다. 다른 복권과 다른 로또의 열풍은 당첨금이 누적된다는 사실과 관련 있을 것이다. 당첨자가 여러 차례 나오지 않을 경우 이월된 상금은 종종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비결은 혹시 ‘번호를 스스로 고른다’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게임에 사이비 자율성을 부여할 때, 참가자들은 자신의 주체적 노력과 능력으로 (부분적으로라도)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는 당연히 게임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당첨의 비결 중에서 풍수지리 버전은 워낙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논박이 불가능하다. ‘논’리를 사용해야 ‘논’박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논리적으로 반박이 가능한 것은 후자, 곧 확률론 버전이다. 당첨번호 찾아주기의 근본적 오류는 “확률은 누적되지 않는다”는 하위헌스의 원칙을 뻔뻔하게 위반한다는 데 있다. 주사위를 던져 세 번 연거푸 6이 나왔다고 해서 네 번째에도 6이 나올 확률이 커지는 것은 아니다. 그때도 6이 나올 확률은 여전히 6분의 1이다. 하지만 당첨번호 찾아주기 프로그램은 확률이 누적된다는 엉뚱한 전제 위에 서 있다.

 

황당한 것은, 이들 회사의 엉터리 논리를 반박하는 이조차 종종 같은 오류를 범한다는 점이다. 가령 “특정한 번호가 다른 것보다 빈번히 나오는 것은 우연일 뿐이다. 시행이 반복되면 그 번호 역시 결국 다른 번호와 출현 빈도가 같아질 것이다. 따라서 당첨번호 회사에서 골라주는 번호를 선택하면 외려 손해를 볼 수 있다. 반복되는 시행에서는 앞서 빈번히 나왔던 번호의 출현 빈도가 외려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세 번 연거푸 6이 나왔다고 해서 네 번째 시행에서 6이 나올 확률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확률은 여전히 6분의 1이다.

 

속박확률, 마르코프 체인과 몬테카를로법

 

‘앞서 나온 당첨번호의 확률분포를 따름으로써 당첨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이나, ‘앞서 나온 당첨번호의 확률분포를 피해야 당첨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이나 모두 ‘선행 사건의 확률이 후행 사건의 확률을 속박한다’는 그릇된 전제 위에 서 있다. 수학적으로 명백한 오류임에도 이 착각이 지속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발생 확률이 선행하는 사건들에 구속되는 현상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령 가위바위보를 생각해보라. 여기서 다음에 어느 것을 내느냐는 앞의 사건에 심리적으로 구속된다.

 

사건이 앞의 사건에 확률적으로 속박되는 것은 자연 속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려고 러시아의 수학자 마르코프는 따로 속박확률의 이론을 만들어냈다. 당첨번호를 찾아주는 프로그램은 사실 하위헌스의 독립확률이 아니라, 마르코프의 속박확률을 전제한다. 한마디로, 기본 가정에서부터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당첨번호를 뽑는 것은 철저하게 랜덤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은 (마치 DNA의 발현처럼) 앞뒤 당첨번호 사이에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 양 가정한다.

 

이제까지 당첨번호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한 숫자는 ‘37’이고, 가장 적게 등장한 번호는 ‘22’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각 번호의 발생 확률을 구한 뒤, 그 확률분포에 따라 랜덤하게 생성한 숫자로 새 번호들을 생성해낸다. 이렇게 생성된 번호들은 랜덤하게 발생했지만, 적어도 확률분포라는 면에선 앞의 당첨번호들과 거의 동일하다. 이 확률분포의 동일성을 통해 생성된 번호들이 과거의 당첨번호들과 유사해질 수 있다는 발상이다. 이 원리는 초기 컴퓨터 예술가들이 컴퓨터로 예술작품을 시뮬레이션하는 데 사용한 것과 거의 동일하다.

 

초기 컴퓨터 예술은 ‘마르코프 체인’과 ‘몬테카를로법’을 사용했다. 먼저 마르코프 체인을 이용해 인간이 만든 음악에서 음렬의 속박확률을 구한 뒤, 몬테카를로법으로 얻어진 확률분포에 따라 새로운 음렬을 생성해내는 식이다. 이 경우 컴퓨터가 생성한 음악은 확률분포의 동일성을 통해 인간이 만든 음악에 어느 정도 근접하게 된다. 당첨번호를 생성하는 방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인간의 음악작품은 ‘정보’를 가진 구조물(neg-entropy)인 반면, 로또의 당첨번호는 애초에 ‘정보’가 없는(entropy) 수열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로또의 당첨번호는 ‘정보’가 아니다. 당첨번호 속에서 각 숫자의 발생 확률에 차이가 나는 것은 일시적 현상일 뿐, 추첨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질수록 그 차이는 점점 사라져갈 것이다. 엔트로피 증가에 의한 당첨번호의 열사(熱死)라고 할까? 그때쯤이면 물론 당첨번호 뽑아주는 사이트도 문을 닫아야 한다. 로또를 통해 더 부유해질 가능성은 수학적으로 제로다. 당첨금을 당첨 확률로 곱해서 얻어지는 숫자는 내가 로또 사는 데 쓴 돈의 50% 아래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수학적 명증성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계속 로또를 사는 걸까?

 

기대효용을 사는 사람들

 

로또를 사는 결정은 ‘기대가치’(expected value)가 아니라 ‘기대효용’(expected utility)에서 나온다. 즉 로또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그것을 사는 데 들인 비용보다 적을지라도, 추첨을 기다리며 환상에 젖는 행복은 분명히 존재한다. 당첨번호 서비스도 마찬가지. 그들이 정말로 당첨번호를 예측할 수 있다면, 애초에 그런 사업으로 돈 벌 생각을 했겠는가? 하지만 그들이 골라주는 번호가 내 로또의 당첨 확률을 높여준다는 환상 속에서 나는 좀더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로또와 당첨번호 서비스의 진짜 효용이다. 그러니 너무 지나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즐기시라. Good Luck!

 

» 과학적 예측 이론과 미신이 꼽아주는 6개 숫자 중 어느 것이 당첨 확률이 더 높을까. 안타깝게도 양쪽 다 10번씩의 실험에서 1등을 맞히지는 못했다.

 

현대과학 대 포천쿠키의 대결

당첨 확률 814만5060분의 1, 6개의 숫자를 맞히려고 20주간 매주 10만원어치의 로또를 사 실험을 하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바이오및뇌공학과

 

나는 2007년 무렵 매주 10만원어치씩 20주 동안 로또를 구입한 적이 있다. 아니 무슨 과학자가 그런 비과학적인 행동을 하느냐고? 바로 이 글을 쓰기 위해서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중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포천 쿠키’를 꼭 받았다. 그 안에는 행운을 빌어주는 경구와 함께 행운의 숫자 6개가 담긴 포천 종이가 들어 있다. 대개 50 이하의 숫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미국 사람들은 이 번호를 로또에 사용한다(흥미롭게도 정작 중국 내 음식점에선 포천 쿠키를 주지 않는다. 포천 쿠키는 미국인들에게 동양적으로 어필하는 중국식 상업 전략이다).

내가 모은 포천 종이는 무려 200장. 나는 이 포천 종이들을 평소 지갑에 넣고 다니며 내 인생의 ‘승부 한 방’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 종이들을 지갑에 넣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했다.

 

회심의 평균 회귀 이론도 적용했건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중국 포천 쿠키의 마력을 믿을 리 없는’ 과학자다. 1부터 45까지의 숫자 중에 6개 숫자를 모두 맞혀야 하는 로또는 특별히 어떤 숫자가 선호될 리 없으며, 당첨 확률은 누구에게나 814만5060분의 1이다.

물론 지난 5월7일 440회차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1등 당첨번호에 가장 많이 나온 숫자는 1이다. 1등 당첨번호에 무려 67회나 등장했으며, 여기에 포함될 확률이 15%나 된다는 얘기다(그 뒤로 37, 17, 19, 20, 27, 2 같은 숫자들이 가장 많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로또가 특정 번호를 선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 번호가 당첨번호에 포함될 확률이 꾸준히 요동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요즘 몇몇 웹사이트들이 로또 당첨번호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예측해준다고 떠들지만, 들여다보면 대개 과학적 근거가 빈약하다. 그들은 순전히 지금까지의 당첨번호들을 통계적으로 분석해서 가장 당첨 확률이 높은 번호들을 추출해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또는 매회 독립 시행이다.

 

그런데 2007년 무렵 내 눈을 사로잡은 책이 한 권 있었다. 미국 사람이 한 회차에 등장하는 로또 번호들 사이의 관계를 분석한 책인데, 흥미롭게도 내 전공인 복잡계 모델링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꽤 그럴듯하게 보였다. 매회 로또 당첨 번호들은 서로 ‘복잡성’(엔트로피로 특정되는)이 최대화되는 방식으로 정해지더라는 것이다. 즉 1, 2, 3, 4, 5, 6 같은 숫자조합이 당첨번호가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얘기였다.

 

이 책은 내게 묘한 대결 심리를 부추겼다. 과연 현대과학과 중국의 포천 중에 어떤 것이 더 로또 번호를 예측하는 데 탁월할까? 과연 현대과학은 중국의 미신이나 영험한 믿음보다 더 그럴듯하게 로또 번호를 예측해줄 수 있을까? 나는 현대과학의 위용을 로또를 통해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중국 포천 쿠키가 추천해준 숫자로 매주 10만원어치씩 10주 동안 로또를 했다. 그리고 그다음 10주 동안에는 현대과학이 추천해준 숫자들로 매주 10만원어치씩 로또를 해보기로 했다. 과연 어떤 전략이 더 실적이 좋을까? 내겐 너무나도 궁금한 질문이었다.

 

과학적으로 로또 번호를 예측할 때 ‘평균으로의 회귀’ 이론도 적용했다. 우리나라에서 로또가 시작된 것은 2002년 12월, 따라서 회차가 별로 되지 않아 아직 평균으로 수렴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이럴 때 평균으로 회귀하려면 자주 나오는 숫자는 오히려 다음 회차에선 잘 안 나온다는 것이 평균으로의 회귀 이론의 메시지다(첫해 타율이 좋았던 선수가 ‘2년차 징크스’를 겪는 것도 같은 이유다).

 

흥미롭게도, 중국 포천 쿠키의 예측력은 영험했다. 10주 동안 100만원어치 1천 개의 로또 번호쌍 중에서 무려 65개가 3개 이상의 번호를 맞혔다. 4개의 번호를 맞힌 경우도 무려 7번. 내가 번 돈은 90만원 정도, 물론 100만원을 투자했으니 손해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수익률이 높았다(우라나라 역대 최고 1등 당첨금은 407억2295만9400원이었다).

 

판돈 90% 회수한 포천 쿠키의 승

 

반면 현대과학의 예측력은 음식점의 포천 쿠키만 못했다. 3개 이상의 번호를 맞힌 경우가 54회, 4개의 번호를 맞힌 경우는 3회에 불과했다. 당첨금은 대략 60만원. 농협 언니가 매주 내 로또 용지를 검사하며 당첨금을 주며 나를 ‘뭐하는 사람일까?’ 신기해하며 보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이 로또 실험을 통해 현대과학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21세기 과학기술의 시대, 지식정보의 시대라고 하지만, 중국 포천 쿠키보다 예측을 제대로 못하는 걸 보며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꼈다(지면이 좁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 내 로또 번호 예측이론은 꽤 정교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어느 날, 우연히 로또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지난 당첨번호 리스트를 다시 보게 됐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만약 20주가 아니라 아직도 하고 있었다면 나는 과연 1등에 당첨될 수 있었을까? 그래서 포천 쿠키 번호와 과학적으로 예측된 번호 리스트 중에 혹시 그동안 당첨된 번호쌍이 있는지 무심코 확인해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몇 달 전의 당첨번호가 내가 과학적으로 예측한 번호와 무려 5개가 정확히 일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한 자리 숫자만 다른 경우에도 금액은 수백만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긴 했지만, 아직 현대과학은 죽지 않았어! 충분히 실험을 반복하면 현대과학이 중국의 포천 쿠키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흐뭇했다!

 

1971년 6월 미국 뉴저지주에서 처음 시작됐다는 로또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나처럼 흥분시켰을까? 로또복권 수탁사업자인 (주)나눔로또가 2010년 한 해 동안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로또 1등 당첨자들의 표본은 ‘평소 1만원 이하 구입에, 조상 관련 꿈을 꾸고, 85㎡(약 25평) 이하 아파트를 소유한, 고등학교 졸업 학력의 기혼 40대 생산직 관련 종사자 및 자영업자’라고 한다(‘인생 한 방’을 노리는 로또 구매자 중 여성보다 남성이 두 배나 더 많다!). 한때나마 로또는 이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으로 흥분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또 로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나처럼 낙담하게 했을까? 내 친구 중에는 당첨 횟수가 가장 적은 숫자인 ‘38’층 아파트에 살고 있다가 재수가 없다며 이사간 친구도 있고, 매주 3만원어치씩 20년째 로또를 하는 녀석도 있다. 그것도 매번 같은 시간, 토요일 아침 9시에.

 

일상의 탈출구 또는 절망적인 도박

 

어렸을 때 로또 당첨자에게 돈을 배달해주는 미국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직장을 그만두고 멕시코 칸쿤 같은 곳으로 이민을 갔다가 이혼하고 금세 돈을 탕진했다는 얘기부터, 암에 걸렸으나 수술비가 없어 전전긍긍하다 로또 당첨금으로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된 사연까지, 당첨자들의 인생은 참 굴곡이 깊었다.

 

사실 ‘로또’란 ‘확률상 당첨자가 나오기 마련이지만, 그게 ‘나’일 확률은 거의 없는 ‘심심풀이 도박’이다. 희망 없는 현대인들의 ‘일상의 탈출구’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탈출 확률이 낮은가를 보여주는 절망적인 도박이 바로 로또 아닌가? 그러나 나는 매주 로또의 번호를 정성스레 색칠하며 간절하게 TV 앞에 앉은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들이 제 월급으로 편한 집에서 안락한 가정을 이룰 가능성은 로또보다 낮기에, 그들은 가장 높은 확률인 로또에 매주 1만원을 걸고 있는 걸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