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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김승호의 약초 이야기_10

醉月 2012. 3. 27. 10:27

항암, 강력 진통 효과…대약왕수(大藥王樹), 비파나무

 

한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비파나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집을 떠올리면 말 그대로 황량한 느낌이다. 전남 해남군 황산면 신성리. 얼마나 궁벽진지 황산면 장터로 나가려면 낮은 야산 잔등이로 난 길들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족히 20리를 걸었다. 보리와 고구마, 조, 고추, 담배, 면화 등 밭작물을 심었던 땅은 회백색의 박토인데다 희끗희끗한 곰팡이가 낀 갯돌 같은 게 많아서 흙이 반, 자갈이 반이었다. 참외나 수박 같은 것도 자라다 만 것처럼 자잘해 도시에서 파는 번듯한 제 크기의 과채를 좀처럼 기대하기 힘들었다

.

구황식물인 고구마와 감자가 그나마 잘되었다. 지금 봐도 한 해 농사라고 지어봐야 먹고살기 참 팍팍했겠다 싶은 곳이다. 키 작은 다박솔, 사스레피나무, 정금나무 같은 관목이 듬성듬성 자랐다. 황량한 느낌의 야산 두어 개를 더 넘으면 바다가 나왔다. 여름이면 이 바닷가의 암벽에 원추리가 많이 피었는데, 주변의 배경과 어울리지 않게 기다란 줄기에 노란 꽃을 매단 게 영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기잡이가 어려운 암석해안이라 겨우 진주고둥이나 소라 따위를 줍고 막 허물을 벗어 개펄 바닥을 기어 다니는 어린 뻘떡게(꽃게)와 장뚱어를 잡았다

 

 

그때 할머니가 단방약(單方藥)으로 먹였던 게 익모초와 비파였다. 소태맛처럼 쓴 익모초는 약이 되기는 했겠지만 비위가 약해서 도무지 먹지 못하자 비파를 따서 즙을 내어 먹였다. 고열로 인해 가뭄 든 논처럼 말라붙은 입안으로 들어오는 달콤새콤한 비파 즙은 감로수가 아닐 수 없었다. 더 먹일 것이 없어 속을 끓이던 조모가 나중엔 덜 익은 배까지 따서 즙을 내 주기도 했지만, 이것 역시 잘 익은 비파의 맛에 도무지 견줄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 감미로운 비파 즙 덕분에 어쩌면 병치레를 떨치고 빨리 회복됐으리라는 생각도 드는데, 왜냐하면 비파는 더위로 인한 병치레에 잘 부합하는 약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비파는 여름날 갈증을 풀고 가슴의 기운을 시원하게 내려서 상초의 열을 다스리며, 폐의 기운을 이롭게 하고, 오장을 윤택하게 한다. 조모가 ‘본초강목’에 나오는 이런 비파의 약성을 알고 있을 리 만무하지만, 경험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타 지역 사람들은 듣도 보도 못하는, 겨울이 그다지 춥지 않은 따뜻한 남쪽 해안지방, 해남이나 완도 같은 섬 지역에서나 구경할 수 있었던 비파는 어떻게 보면 퍽이나 귀한 과일이었는데, 시골집에 내려가도 때를 못 맞추면 천신(薦新)하기 어려웠던 그 비파를 그해에는 운 좋게 독차지하게 됐다.

 

더위로 인해 그렇게 된통 고생하고 집으로 올라온 나는 두 번 다시 해남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 후로는 방학 때 시골에 내려가지 않아도 됐다. 몇 년 뒤 홀로 되신 조모가 광주로 올라오셨고 삼촌이 선산까지 팔고 밤 짐 싸서 서울로 떠난 뒤, 시골집은 그 무렵 이농 바람으로 인해 버려진 농가들의 운명이 그랬듯, 지붕도 구들도 무너져내린 폐가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나도 그리움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30대 중반쯤 서울에서 일이 생겨 해남에 내려갔다가 짬을 내어 시골집을 찾았다. 구들장만 남아 있는 집터 안마당엔 이름을 알 수 없는 가시덩굴과 산딸기, 찔레나무 같은 잡목이 무성했다. 누가 다 베어버린 건지 마당 앞의 비파나무와 다른 과수들도 종적이 없어졌다.

 

그 뒤 언젠가 해남 연동의 녹우당에 갔다가 고산 윤선도박물관 앞에서 비파나무를 봤다. 마침 열매가 노랗게 익었다. 관리인의 눈을 피해 몰래 몇 알 따먹었는데 어렸을 때의 그 맛이 아니다. 아무래도 다디단 과일들에 익숙한 요즘 사람 입맛으로는 비파를 그렇게 맛있는 과일이라고 하긴 어려울 것 같다. 크기가 작아서 먹을 게 별로 없다는 것도 흠이다.

 

잘 쓰면 약, 못 쓰면 청산가리

몇 해 전 완도에서 이 비파나무를 개량해 열매를 크게 키워내는 데 성공했다는 얘기를 듣고 옛 생각도 나 수소문해 사봤다. 그런데 크기가 조금 더 크긴 하나 단맛이 더 있는 것도 아니고 기왕의 비파와 비교해 그만그만하다. 과일로서 돈 대접받기는 여전히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이 비파나무가 남쪽지방에서 수익 작물로 각광받으며 많이 재배되는 것은 과일보다는 열매와 잎이 가진 약효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중국에선 비파나무를 ‘대약왕수(大藥王樹)’라고도 하는데 비파열매, 비파 잎, 줄기와 꽃도 모두 약으로 쓴다. 약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대단한 약효가 있는 게 분명하다.

 

‘동의보감’에선 비파열매에 대해 ‘성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폐의 병을 고치고 오장을 윤택하게 하며 기를 내린다’고 했다. 약리적으로는 당류와 주석산, 사과산, 비타민 A, B, C가 풍부하다. 몸의 열을 내리고 손상된 체액을 보충하며 갈증을 풀고 구토증을 가라앉힌다. 그래서 여름에 더위 먹어 갈증이 심하고 땀이 그치지 않고 식욕이 없을 때 비파 즙이 효과가 좋다. 기관지염 초기에 쓰기도 한다. 기침이 심하고 누런 가래가 나올 때 비파열매를 살구씨와 귤껍질, 패모 등과 함께 쓴다. 그렇지만 이 정도를 가지고 대단한 약효가 있다고 하기에는 그렇다.

 

마트에서 파는 비파나무의 열매는 옛날의 그 맛이 아니다.

비파열매는 그렇다 치고 비파 잎은 어떨까. ‘성질이 평하고 맛이 쓰며 독이 없다. 기침하면서 기운이 치밀어 오르고, 음식이 내려가지 않고, 위가 차서 구토하고 딸꾹질하는 것과 갈증을 치료한다. 잎의 등 쪽에 솜털이 있는데 반드시 불에 구워 천으로 그 솜털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털이 폐로 들어가 오히려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역시 이 정도를 가지고 약왕(藥王)의 생색을 내기에는 그렇다.

 

자료를 찾아봤더니 비파 잎에는 ‘아미그달린’과 구연산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다. 아미그달린은 살구씨(행인)나 복숭아씨(도인) 등 과일의 씨앗에 많은 성분이다. 포도씨, 사과씨, 아몬드나 매실에도 이 성분이 있다. 청산(靑酸) 배당체의 일종인 아미그달린은 위장에 들어가 분해되면 시안화수소와 몇 가지 다른 물질로 바뀐다. 이 대목이 중요한데, 아미그달린이 가수분해돼 생긴 시안화수소는 흔히 청산가리라고 불리는 유독성 물질이기 때문이다.

 

이 시안화수소는 그러나 다량으로 섭취했을 때는 독성을 나타내지만 소량일 때는 우리 몸속에서 대단한 치료효과를 발휘한다. 살구씨나 복숭아씨를 한방에서 중요한 약으로 취급하면서도 한번에 다량을 쓰지 않는 것은 이 시안화수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말한 ‘파르마콘’, 곧 약이면서 동시에 독이다.

 

신묘한 약효, 비파엽 압찰법

가장 큰 효능은 진통작용이다. 신경통을 비롯한 웬만한 통증에는 다 효과가 있다. 또 진해 거담하는 효능도 뛰어나다. 최근에는 아미그달린이 시안화수소로 바뀌면서 강력한 항암작용을 한다는 연구도 나왔다. 아미그달린은 몸에 들어가기 전에는 전혀 독성이 없지만 위장에 들어가 시안화수소로 분해됐을 때의 치사량은 405mg 정도라고 한다. 이만한 양이 일시에 몸에 들어가려면 사과씨 250g을 모아서 한꺼번에 먹어야 한다. 그 독성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닌 듯하다.

 

비파 잎의 아미그달린을 활용하는 방법은 전탕해 먹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비파엽 요법’이라고 해 일본에서 민간요법으로 쓰였다는 비파 잎 압찰법이 유명하다. 일본 삿포로 철도병원의 후쿠시마(福島) 박사에 의해 발굴돼 알려진 비파엽 요법은 비파 잎을 불에 구워서 환부에 잎을 대고 문지르는 소박한 민간요법인데 거짓말처럼 보일 정도로 거의 만병을 치료하는 기적적인 효능을 발휘한다.

 

그는 이 방법으로 결핵성 복막염과 소아마비, 하복부와 허리의 농양, 소화불량으로 인한 각종 소모성 질환, 야뇨증 같은 증상을 치료했는데 암을 비롯한 각종 난치병, 성인병에도 뛰어난 효과가 있다고 했다. 비파 잎에서 나온 시안화수소가 가스 상태가 되어 몸에 흡수되면서 그런 효과를 낸다는 것인데 여기에 착안한 비파 잎 뜸이 소개된 바 있다. 필자도 한의원에서 이 뜸을 더러 활용하고 있는데 격외의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생각해보니 대약왕수란 이름이 허투루 붙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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