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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_04

醉月 2012. 4. 1. 09:10

파란만장 외길인생 걸어온 방짜 유기장 이봉주

“우리만의 뛰어난 합금기술, 반드시 지켜낼 겁니다”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방짜는 놋그릇을 주물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망치로 두드려 재질에 공기 틈새가 없도록 만들어내는 특별한 제작기법이다. 악기는 몰라도 방짜로 그릇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가진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전통 방짜 유기의 맥을 잇는 이봉주 대장(大匠)은 예부터 방짜 고을로 이름난 평안북도 납청 출신이다. 그러나 그가 방짜 기술을 배운 곳은 서울이다. 월남한 납청 출신 장인들의 공방에서 기술을 익혀 마침내 공방의 원대장이 된 그는 평생 놋그릇과 악기를 만들어왔다. 맨손으로 월남해 방짜 기술 하나로 크게 성공한 그는 우리 방짜 기술을 온전히 계승해낸 인간문화재이기도 하다. 물동이. 방짜 물동이를 쓰면 정수기가 따로 필요 없다.

 

이봉주(86) 옹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일본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926년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그는 광복의 혼란기에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고, 전쟁과 근대화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었다. 1948년 혈혈단신 서울에 도착한 스물두 살 청년 이봉주의 호주머니에는 겨우 고무신 한 켤레 살 돈밖에 없었는데, 지난해 그가 납부한 사업소득세는 1억8000만 원이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고 세상도 변해 그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로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삶은 달라진 게 없다. 오로지 방짜 유기와 함께하는 한길을 걸었고, 그 발길을 이끌어...   

 

죽음의 위기 모면하면서 삼팔선 넘어

 

본래 반상기는 주물로 제작하지 방짜로는 못 만든다. 그러나 이봉주 옹은 기계를 개선해 작은 그릇까지 방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위). 수복강령 등의 글자를 새긴 구절판.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다.

언제나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데 망설임이 없는 그는 월남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너 없으면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는 어머니의 만류로 그는 한 해 더 농사를 짓고 1948년 겨울, 송아지 판 돈 5000원을 들고 남으로 향했다. 아내는 어머니가 말리는 바람에 남게 됐고, 그것으로 그와 아내의 연은 끊어지고 만다.

“시동생들 돌보고 농사를 돕다가 1년 뒤에 가라는 시어머니 말씀을 차마 거스르지 못해 남은 아내는 평생 고아를 돌보며 살았답니다. 미국에 사는 육촌동생이 고향을 방문하고 알려주었어요. 88올림픽 이후 일본에서 북한으로 돈을 부쳐줄 수 있었는데, 아내는 2008년 여든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고향에서 쓸쓸하게 살다간 아내 때문에 그는 늘 딸들에게 “결혼하면 부모 말씀보다 남편 말을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첫 아내와는 비록 짧은 인연이지만, 그 인연은 그의 방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월남한 후 찾아간 양대 공방의 탁창여 방주가 바로 아내의 이모부였고, 이 인연으로 그는 방짜 유기의 길로 들어섰다. 이러니 그가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를 실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인도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남하할 때 이미 몇 차례 경험했다.

“삼팔경비대를 만나 도망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보니 칡넝쿨에 걸렸더군요. 숨어서 하나님께 이번에 살려주시면 평생 하나님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제 평생 그때만큼 간절하게 기도한 적이 없어요.”

12월에 비가 와 물구덩이 속에 숨어 있던 그는 차라리 자수를 할까 고민하다 잠이 들었고, 눈을 뜬 순간 무엇인가 펄쩍 뛰는 소리를 들었다. 알고 보니 노루가 지레 겁먹고 도망간 것이었다.

“그때 깨달았죠. 아무도 해치지 않는데 무서워하는 노루처럼 저 역시 저 혼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러자 두려움이 가시고 그는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때마침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아무도 다니지 않는 대로를 그는 활개치고 걸었다. 그는 그때의 깨달음이 그의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걸 맡기면 편안해질 거라는 약속 말이다.

예성강 상류에 도착해 함께 남하하던 일행과 안내인을 다시 만난 그는 새로운 난관에 부딪혔다. 강을 건너야 하는데 물이 빠진 조금 때라 물이 차오르는 사리 때까지 이레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숙박비도 바닥나기 시작했고, 언제 경비대가 들이닥칠 모를 상황에서 그는 다시 결단력을 발휘했다.

“갯벌에 배를 밀고 갈 수 없다기에 제가 책임진다고 했습니다. 제가 해변 가까이 살아 갯벌을 좀 알지요. 감탕(펄)에 물을 뿌리면 아주 미끄러워져요. 그때 손쉽게 배를 밀 수 있습니다.”

마침 달도 없는 그믐밤이어서 오히려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도착한 예성강역은 당시 이남이었다. 그러나 남으로 오면 환영받을 줄 알았는데 일행을 기다리는 것은 서북청년단과 경찰 등이었다. 월남한 일행은 사상검증을 겸한 취조를 받았다.

“다짜고짜 ‘민청에 가입했느냐?’‘김일성의 20대 교지를 아느냐?’고 묻는데 모른다고 대답하면 마구 패고 끌고 가더군요. 그래서 저는 솔직하게 대답했지요. 민청에는 강제로 가입해야 했으며, 20대 교지를 다는 모르지만 신앙의 자유를 말한 4조는 안다고요.”

그러자 오히려 여관에 데리고 가 하룻밤을 재워주더란다. 정직함과 당당함이 신뢰를 얻은 것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배울 교훈을 월남하면서 다 깨우친 것 같다. 신에게 맡기는 겸손함과 과단성, 정직함이 살길이라는 것을. 이후 그의 인생은 이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기차에서 만난 교수 부인과 유기 공방에서 만난 탁 방주

예성강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지만 한밤중에 도착하는 서울에서 그가 갈 데라곤 없었다. 여관에 투숙할 돈도 없어 고민하던 그의 옆자리에는 연세대 교수 부인이 타고 있었다. 아이와 짐 가방 때문에 지게꾼이 없으면 집에 갈 일이 막막하던 부인에게 마침 일행 중 한 사람이 즉석에서 주선해 그는 부인의 집까지 짐을 들어주고 하룻밤을 기탁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 이밥에 쇠고깃국을 차려주었는데, 그때 난생처음 쌀밥을 배불리 먹어보았습니다.”

이튿날부터 그는 외삼촌 집과 아버지 친구 집을 찾아 나섰다. 북에서 부자로 살다 서울에서 어렵게 사는 외삼촌 집에 머물기도 어렵고, 대동청년단 소속인 아버지 친구 집은 폭력의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하루 만에 나오고 말았다. 다시 막막해진 그는 문득 아내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남한에서 이모부가 유기 공방을 크게 한다는 소리였다. 그는 서울에서 가장 큰 유기 공방을 찾았다. 바로 탁창여 방주의 공방이었다.

“정주에서 방금 내려왔다니까 다들 고향 소식이 궁금해서 제게 몰려와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그러다 탁 방주님이 김태옥 장로를 아느냐 하시기에 저의 장인이라고 했지요.”

정말로 아내의 이모부를 만난 것이었다. 그때부터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풀렸다. 당장 먹고 잘 곳이 없는 그에게 탁 방주는 “우리 집에서 살면서 공방 일을 함께 하자”고 제의했다. 이후 그는 전국 유기점에 수금하러 다니면서 공방 일을 익히고 탁 방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기술도 배웠다.

“탁 방주 님은 제게 제2의 아버지이자 스승, 은인입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기술을 배우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게 어찌 저의 능력이겠습니까? 사람은 때를 잘 만나야 하는데, 저에게는 그 시운(時運)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였습니다.”

 

   

달군 바둑을 화덕에서 꺼내는 이봉주 옹.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시간이 그에겐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그는 탁 방주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다. 지금 문경 그의 공장 마당 한가운데는 탁 방주의 공적비가 서 있다. 그 비각에는 특별히 총 5111㎏에 달하는 방짜기와 2290장을 얹었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이 모두 말렸다고 한다.

“구리기와를 얹으면 녹이 슬고, 기와에서 떨어진 빗물에 풀이 다 죽는다고 했어요. 그런데 웬걸요, 빗물이 떨어진 곳의 풀이 더 싱싱해요. 제가 금속학자에게 물어보니 당연하다고 해요. 방짜는 해로운 것을 잡는 기능이 있으니까 오히려 풀이 더 잘 자라는 거랍디다.”

 

18개월 만에 대장 기술 익히고 실패작도 잘 팔려

탁 방주는 북한에서 보부상을 지낸 이로, 처음 서울에 와서는 유기가게를 했다. 사업 감각이 뛰어난 그는 곧 이남에는 안성유기처럼 예쁜 주물유기는 잘 만들고 또 징이나 꽹과리 같은 악기는 방짜로 만들어내지만, 대야나 양푼 같은 큰 그릇과 요강 방짜는 부족하다는 사실에 착안해 납청 출신 기술자들을 불러 모아 양대공장을 차렸다.

“제가 기술을 배우겠다고 나서자 탁 방주님이 적극 지원해주셨어요. 주물유기나 목공, 도자기 일은 장인과 보조 한 명만 있어도 그럭저럭 일을 해나갈 수 있지만, 방짜는 열한 명이 한 조가 되어 일해야 하니, 장인 하나를 키워내기가 쉽지 않지요. 더구나 총책임자인 원대장은 복잡한 제작 과정을 다 알아야 하는데, 한 과정을 익히는 동안 누군가 옆에서 불도 피워주고 달구어주고 붙잡아주고 때려주고 해야 하니 혼자 익힐 수가 없어요. 또 불 피우는 숯 값과 연습하다 나온 불량품은 주인이 다 감당해야 하니, ‘대장 하나 만들기 위해 주인 하나 망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불 때는 풀무꾼으로 안풍구와 밖풍구, 원대장을 도와주는 제질풍구가 있어야 하며, 원재료인 구리와 석을 정확히 합금하고 융해하는 겟대장, 녹여낸 바둑(바둑알처럼 납작한 원판)을 모루 위에 올려놓고 메질하는 앞망치대장, 달군 바둑을 세게 쳐서 넓히는 센망치, 바둑을 넓히는 집게잡이인 네핌대장, 달군 바둑을 메질하고 칼갈이도 해야 하는 곁망치, 제질(모양을 잡는 과정)이 끝난 뒤 가질(연삭·硏削)을 맡은 가질대장 등 방짜 제조 과정은 열한 명의 협업이 필수다. 기계 해머가 도입돼 인원을 줄여도 최소한 여섯 명은 필요하다. 이 중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일을 할 수 없다.

“인건비도 원대장이 100을 가져간다면 앞망치대장과 가질대장, 겟대장이 50, 곁망치는 30, 센망치는 25, 안풍구와 밖풍구는 20, 제질풍구는 10을 받습니다. 게다가 기술이 좋으면 ‘가정’이라고 특별수당까지 주어야 합니다. 북한에서 하루 임금이 쌀 두 되였는데, 공방 원대장은 쌀 두 가마니였으니 기세가 대단했지요.”

일제가 전쟁에 쓰느라 놋제품을 깡그리 걷어간 뒤여서 집집마다 놋그릇과 재떨이가 필요했고 수저, 대야와 요강은 혼수품이기도 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이 밀려드는데 원대장의 숫자가 워낙 적다 보니 기술 좋은 대장과 장인들의 ‘곤조(근성)’는 악명이 높았다. 방주는 늘 대장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차에 성실한 청년 이봉주가 기술을 배우겠다고 나섰으니 탁 방주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탁 방주 님은 직접 풀무질까지 하며 도와주셨지요. 모두 퇴근한 공방에서 친구 한 명의 도움을 받아가며 연습을 했습니다. 모양을 내는 제질을 어느 정도 익히고 거친 가장자리를 잘라내는 협도질과 테두리를 꺾는 기술도 배웠지만 제가 만든 대야는 세모가 되기도 하고 네모도 나오곤 했어요. 대야가 둥글지 못하면 벼름질과 가질하기가 힘드니 가질대장은 탁 방주에게 짜증을 내곤 했습니다. 당시 장인은 팔린 만큼 받는 도급제였기 때문에 물건이 안 팔리면 수입이 줄거든요. 그때도 방주님은 어떻게든 팔 테니 걱정 말라며 그들의 불평을 다 막아주셨지요.”

물론 그의 작품이 재고로 쌓이기만 했다면 탁 방주도 끝까지 그를 밀어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가 만든 못난 대야가 선임대장이 만든 예쁜 대야보다 더 잘 팔려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유기는 물건 값도 인건비도 근수에 따라 값을 매겼습니다. 그러나 소비자에게 팔 때는 물건 개수에 따라 돈을 받았지요. 그때 최동길이라는 유명한 유기상인이 있었는데, 혼자 거래하는 유기 양이 한강 이남에서 거래하는 양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어요. 이 사람은 이문을 많이 남기기 위해 가벼운 것을 선호했지요. 제가 만든 것은 모양은 없었지만 가벼웠으므로 제 것만 싹 쓸어가곤 했어요.”

그의 작품은 늘 바닥이 나니 그는 서둘러 자꾸 만들어야 했고,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운이다. 그러나 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인내다.

“일을 배우는 시기 어려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제질 풍구를 부는 아이와 교대하면서 풍구 부는 일부터 시작해 새벽에 일어나 숯불을 피워놓고 대장들의 심부름을 해야 했어요. 그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마음 졸여가며 일을 배웠습니다. 공방에서 제일 아래 계급이었던 거죠.”

결국 원대장이 되는 것은, 밑바닥에서 시작해 맨 위로 올라가는 일이었다. 어려운 훈련과정을 견디는 인내심과 훈련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행운이 따라야 한다. 노력한다고 누구나 원대장이 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겐 행운과 인내심, 이 두 가지가 다 있었다. 그 덕택에 그는 불과 1년 반 만에 원대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자 그가 일을 배우기 위해 비위를 맞춰야 했던 대장들이 이번에는 원대장인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쓰는 처지가 되었다.

  

6·25전쟁 겪고 탁 방주에게서 독립

 

“이만하면 됐나?” 문경 공방에서 만든 작품을 들고. 그의 작품에는 60년 이상 구리와 불과 망치와 함께해온 그의 인생이 담겨 있다.

원대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란이 터졌다. 미처 피란가지 못한 사이 한강다리가 끊겼고, 월남한 사람에겐 매우 위험한 상황이지만 생활력 강한 이북 사람답게 탁 방주와 그는 매일 개성까지 자전거에 놋그릇을 싣고 다니며 곡식을 팔아왔다. 곡식을 구할 수 없을 때는 풋고추라도 사와서 시장에 되팔아 쌀을 구했다. 폭격도 당하고 인민군에게 잡히는 위험까지 무릅쓰고 구해온 쌀은 그만큼 값이 나가서 탁 방주는 그때 귀한 골동품도 많이 사 모았다고 한다. 9·28수복이 되자 다시 놋그릇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타고난 사업가인 탁 방주는 잿더미가 된 서울에서 퉁점(주물공장)을 가동해 주물 유기를 생산해냈다.

“주부들이 불탄 놋그릇을 한 광주리씩 이고 오면 새 놋그릇 한두 개와 바꿔 주고 헌 놋그릇은 녹여 새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양대는 구리(순동)와 석(錫)의 합금 비율이 16냥 대 4냥 닷 돈, 대략 78대 22 비율인데 이를 지키지 않으면 메질을 견뎌내지 못해요. 그러니 기술자도 부족하고 급할 때는 합금비율이 비교적 자유로운 주물 제작이 하기 쉽죠.”

요즘은 구리합금으로 만든 그릇은 방짜든 주물이든 모두 놋그릇이라 부르지만 예전에는 구리와 석을 합금한 향동은 ‘놋’이라고 하고, 구리와 아연을 합금한 주동으로 주물 제작한 그릇은 ‘퉁’ 또는 ‘짐’이라고 구분해 불렀다.

어쨌든 탁 방주는 평화로운 때든 전시든 언제나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봉주는 전쟁통에 조마조마하게 사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중공군이 밀려오자 이번에는 고향친구들과 함께 일찌감치 피란길에 올랐다. 대구에서 과자장사를 하고 교인들과 함께 제주도로 피란 가서는 뻥튀기장사, 엿장사도 했는데 머리와 기술이 좋은 그는 과자를 직접 만들고 강엿 대신 흰엿을 만들어 남보다 돈을 잘 벌었다. 고생스러운 전쟁이었지만 피란길에 아내가 될 오화선을 만났다.

전쟁이 끝나자 놋그릇의 수요는 최고조에 달했다. 탁 방주의 공방에서 쉴 새 없이 일하던 그는 다른 장인들이 탁 방주에게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대립하자 은인과 동료 사이에서 갈등하다 마침내 밑의 대장들과 함께 자신의 공방을 냈다.

“제 생각만 하면 은인인 탁 방주와 함께하는 것이 맞는데, 쫓겨난 장인들은 원대장이 없으면 모두 실업자가 됩니다. 저는 고지식한 사람이라 동료의 청을 뿌리치지 못한 거지요.”

탁 방주는 이를 서운하게 여겼는지, 옛 동료를 통해 공장 매매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한참 뒤 그는 탁 방주를 찾아가 용서를 구해 두 사람은 관계를 회복했지만, 그때까지 그의 가슴 한구석은 늘 무거웠다.

 

사라지는 유기, 공방은 넘어가고

1960년, 전쟁 뒤의 호황이 끝나자 불경기가 시작됐다. 이듬해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산림보호법을 만들어 숯을 못 굽게 했다. 양대는 숯, 그것도 소나무로 만든 ‘솥숯’으로만 불을 땐다. 다른 숯을 쓰면 불똥이 튀어 데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당장 작업에 차질이 온 데다 일반 가정에서도 연탄을 쓰게 되면서 놋그릇에 녹이 슬기 시작했고, 때마침 스테인리스 스틸과 알루미늄 그릇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놋그릇은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방짜 그릇은 연탄가스 같은 유해한 성분에 즉시 반응합니다. 오히려 건강의 지표가 돼주는 것인데 불편하다고 등을 돌렸습니다. 방짜는 양조간장과 인공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을 담아도 색이 변합니다. 아파트가 생기고 건강을 챙기는 요즘에는 이런 방짜가 다시 환영받고 있어요.”

빚을 내 시작한 공장은 사업은 안되는데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그러나 이 일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으니 공장은 그와 가족의 생명줄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공장만은 구해달라고 다시 간절히 기도했으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응답도 듣지 못했고 공장은 결국 문을 닫고 만다.

“대신 제 마음 자세가 바뀌었어요. 차분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그게 응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집까지 팔아 빚잔치를 하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군요.”

그 뒤 노동판에도 나갔지만 마음을 잡지 못해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는 사이 아내는 호떡장사를 했다. 그러다 1960년대 말 그는 다시 일어섰다. 아내는 안되는 유기 공방은 그만두고 가게를 하자고 했지만 그는 공방을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사업이 잘될 때는 100만 원도 쉽게 꿀 수 있었지만 무일푼이니 5만 원도 빌릴 데가 없더군요.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1만 원씩 꾸었습니다. 이자도 못 주고 실패하면 원금도 못 갚는다고 말했는데, 모두 빌려주고 때로 더 많이 주기도 했습니다. 평소 신용 덕택이었죠.”

예전 대장들을 불러들여 염창동 그의 집 마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집에서 쇠를 녹여 바둑을 만든 다음 이를 리어카에 싣고 아현동 경기공고에 가서 해머를 빌려 네핌질(달군 바둑을 펴는 작업)과 우김질(편 바둑을 우겨서 형태를 만드는 절차)을 하고 다시 집에 갖고 와서 제질(본격적인 성형·成形)과 가질을 했다. 염창동에서 아현동까지 쇳덩이를 리어카로 실어 날라야 했지만 새로 일을 시작했다는 기쁨에 힘든 줄 몰랐다.

  

“이때는 잘 팔리지 않는 그릇 대신 징이나 꽹과리, 제금 같은 악기만 만들었습니다. 마침 대학가에서 농악이 붐을 일으키던 때라 만드는 족족 팔려나갔어요. 그것도 모두 현금 받고 팔았지요.”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그는 3년 만에 공장을 새로 짓고 백색전화를 놓고 자동차를 사게 됐다. 1979년 공장을 안양으로 확장해 옮겨 15년간 운영하는 사이, 시에서 시끄럽다며 나가라고 계고장을 세 번이나 보내왔다.

“안산 시화공단으로 옮겨 8년간 일하는 사이 안산 공기가 점점 나빠지더니 나중에는 일주일이면 녹이 슬더군요. 여기 문경에서는 몇 년이 되도 말짱한데 말이죠.”

그 사이 안양시는 전통문화를 우대하는 정책으로 바뀌어 방짜공방을 다시 옮겨오기를 바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북과 방짜 공장을 운영하는 장남이 대신 안양으로 갔고, 그는 3년여 준비 끝에 2003년 문경으로 옮겨왔다. 깨끗한 공기, 널찍한 대지에 기술자도 양성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춘 이곳이 그의 마지막 보루다.

 

다시 주목받는 놋그릇, 뛰어난 합금기술 보존해야

편리한 스테인리스 스틸과 플라스틱에 밀려났던 놋그릇은 시절이 바뀌면서 다시 새 국면을 맞았다. 인체에 나쁜 성분을 만나면 변색하는 신비한 효능이 알려지고 매스컴에 그의 방짜 기술이 소개되면서 방짜그릇을 찾는 사람이 점점 늘어갔다.

“1980년대 들어서자 반상기를 방짜로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쇄도했어요. 본래 작은 그릇은 주물로 제작하지 방짜로 못 만듭니다. 작은 간장종지를 어떻게 큰 망치로 두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가 누군가. 늘 새 기술에 도전해온 그는 공구를 개량해 반상기까지 방짜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만든 방짜 제기 일습은 몇 백만 원에서 1000만 원을 훌쩍 넘는 것까지 있다. 그런데도 사가는 사람이 점점 느는 추세다. 본래 방짜로 만들던 물동이나 대야, 양푼, 좌종(절이나 성당에서 치는 앉은뱅이 종)은 물론이고 생선회를 싱싱하게 유지해주는 찬합과 꽃의 수명을 늘여주는 꽃병도 만들었다.

악기 역시 그가 만들기 좋아하는 품목이다. 1980년대 초반 방짜로 심벌즈를 만드는 미국 질디안 사를 방문한 그는 한국의 징을 그들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한국에 방짜 기술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더군요. 방짜 기술을 가진 나라는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예요. 중국과 인도네시아, 터키, 미국 정도인데 징은 심벌즈보다 만들기가 힘들고 더구나 그릇을 방짜로 만드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어요. 미국의 질디안 사도 터키인 후손이 세운 회사였어요.”

그의 기술에 반한 질디안 사는 그와 기술자들을 초청했다. 그러나 이민을 준비하던 1983년, 작업하다가 조수가 때리는 망치질에 튄 쇠붙이가 눈에 들어가 시력을 잃게 되면서 이민도 포기했다. 그러나 그해 좋은 일도 있었다. 그의 방짜 기술이 무형문화재(77호)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 뒤 문화재청은 그의 기술을 보존하기 위해 작업과정을 영상으로 담아갔고, 그 자신도 이 귀한 기술이 길이 전해지길 바라는 뜻에서 ‘납청양대’라는 책자를 펴냈다.

“지난해, 방짜 기술이 없는 일본 나라의 정창원(일본 국보를 모아둔 곳으로 신라와 백제 유물도 많이 보관돼 있다)에서 방짜에 관해 면담을 요청해왔어요. 두 사람이 왔는데 한 명은 만드는 과정을 기록하고, 한 사람은 성분을 분석하더군요.”

보통 구리에다 주석을 17%까지 섞을 수 있는데 우리 방짜 기술로는 특이하게도 22%까지 합금해낸다. 그 황금비율 덕택에 우리 징과 종은 소리가 아름답고 그릇은 신비한 효능을 갖게 됐는데, 비결은 뭘까? “그냥 조상 하던 대로 했을 뿐”이라는 게 그의 단순명료한 대답이다. 정창원 측은 그의 협조에 보답하는 뜻으로 8세기 후반 나라시대 동대사(東大寺)를 지을 때 우리나라에서 보낸 기술자들이 선물로 가져간 유기 사진을 컴퓨터에 담아 와 보여주었다. 주물로 만든 밥그릇과 접시가 각각 450점, 방짜 숟가락 700여 점이 얼마나 잘 보관되어 있었는지 그릇 사이에 끼워둔 종이의 글씨까지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글씨를 읽으며 반가운 사실을 확인했다. 종이에 적힌 각 유기의 질량이 모두 근수로 계산돼 있었던 것이다.

“양대 공방에서는 작근법이라고 해 합금비율이나 무게를 모두 근수로 계산해왔어요. 그러다 ‘관’을 쓰게 됐고, 오늘날에는 킬로그램을 쓰지만 저는 늘 우리 전통 단위는 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관’은 일본에서 건너온 단위가 아닌가 싶어요.”

그는 우리 방짜 기술이 꾸준히 현대화되더라도 전통기술이 무엇이었는지 그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자와 전문가들이 제대로 연구하길 원한다. 전통유물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본이 부러운 모양이다.

“제가 사진에 담긴 유기를 직접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공개하지 않는 작품이라며 이를 보려면 ‘천황폐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늘 그렇듯 우리나라의 뛰어난 장인들이 기술을 개발하면 우리 자신은 등한히 하는데, 일본은 그 기술을 받아들여 보존하고 더욱 발전시키는 모습을 다시 확인하는 것 같다. 조선시대 초기, 이 땅의 장인들이 획기적인 은 제련법을 개발했을 때도 그 기술을 받아들이고 은 보유량을 엄청나게 늘려 국부를 쌓았던 나라는 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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