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의사 김승호의 약초 이야기_02

醉月 2011. 6. 30. 18:05

수험생·정신노동자에게 좋은 총명탕 재료 석창포

계곡 바위틈에서 자라는 석창포.

 

청정한 계곡 주위로 수백 년 된 비자나무숲이 아름다운 전남 화순 천태산 개천사에서 금요일 저녁마다 속인(俗人) 열댓 명이 모여 경전을 읽는다. 주지스님이 숫타니파타 강의와 참선을, 도반 한 명이 태극권을 지도한다. 모두들 회색의 도시를 벗어나 졸졸거리며 물안개를 피우는 계곡을 찾아서 그 물로 목을 축이고 소슬한 산사의 정취를 누린다. 계곡 주변의 때죽나무, 찔레, 금은화 꽃향기가 한데 어우러져서일까. 세상을 잠깐 떠나온 것뿐인데 산사의 밤이 꿀보다 달콤하다.

 

요사채의 불빛도 꺼지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가 수를 놓는다. 이 산의 계곡 바위틈과 그늘진 돌무더기 위에 석창포(石菖蒲)가 도 닦는 은자처럼 숨어산다. 노자는 “곡신(谷神)은 죽지 않는다. 이를 현묘한 암컷(玄牝)이라 한다. 이 암컷의 문을 천지의 뿌리라 한다”고 했다. 천태산의 조그만 계곡들엔 ‘곡신’이 살아 있다. 멸종 위기의 반딧불이가 보이는 것이 그 증거다.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계곡과 하천에서 반딧불이가 살고, 그 계곡엔 반딧불이의 먹이가 되는 다슬기가 살고, 바위와 돌에는 이들이 먹고살 만한 이끼류가 붙어산다. ‘현묘한 암컷의 문’으로부터 나온 계곡의 물은 이들을 키우며 쉼 없이 흐른다.

 

천태산 골짜기는 생명을 키우는 순환의 고리가 끊기지 않아 스스로 그러하고(自然), 억지로 하지 않아도 다 하는(無爲而無不爲) 본연의 상태를 간직하고 있다. 곡신이 죽지 않고 현묘한 암컷의 문이 살아 있는 곳이라야 맑은 물과 이슬로 몸을 씻고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며 석창포가 산다. 청신한 창포향이 계곡 주위에 은은히 퍼지게 하는 일은 인위(人爲)로서는 어렵다.

 

머리 감는 데 쓰는 창포와는 달라

필자가 이곳에서 석창포를 처음 본 것은 수년 전의 일이다. 우연히 겨울등산을 왔다가 발견한 석창포는 한겨울에도 푸르고 싱싱한 잎줄기를 자랑했다. 잎사귀를 뒤척이면 은은한 향기가 손에 뱄다. 한의사가 약초의 실물을 직접 보고 그것이 자라는 곳을 살피는 순간의 기쁨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마치 숨은 보물을 찾은 듯하다고나 할까. 두어 뿌리를 캐 뿌리의 생김새를 보고 돌아와 부리나케 자료를 뒤졌다.

 

흔히 창포 하면 보라색이나 노란색 꽃이 피는 붓꽃과의 꽃창포를 떠올리기 쉽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꽃창포는 오월 단오에 잎과 뿌리를 우려내 머리 감는데 쓰는 창포속의 식물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다. 약재로도 쓰지 못한다. 약재로 쓰는 것은 천남성과의 창포인데 여기엔 두 가지가 있다. 창포(菖蒲)와 석창포다. 둘 다 물을 좋아하지만 창포는 주로 호수나 연못가의 습지에서, 석창포는 냇가나 산간 계곡의 흐르는 물가 바위틈이나 돌무더기 사이에서 자란다.

 

약용이라하지만 창포는 기미와 약성이 달라 약재로는 거의 쓰지 않는다. 단오에 머리감는 데 쓰는 정도다. 뿌리를 캐서 씹어보면 비린내가 난다. 맵고 알싸한 맛의 석창포와 확연히 다르다. 민간에선 비린내 나는 이 창포를 백창(白菖) 또는 수창(水菖)이라고 한다. 한때 약재상들이 이 창포을 썰어다가 석창포라고 유통시키는 일이 많았다. 서울 경동시장에서도 그런 사례가 흔했는데 요즘은 그렇게까지 지각 없지는 않다.

 

석창포의 잎줄기는 마치 양날이 선 칼, 검(劍)처럼 매끈하게 생겼다. 그 때문에 ‘수검초(水劍草)’라고 불린다. 옛날 도인들이 석창포를 가리키며 속인들이 잘 모르게 쓰던 은어라고 한다. 무더기로 자라는 모습이 흡사 부추와 같다고 하여 ‘요구’라고도 하는데 ‘곡술(曲術)’에 “요임금 시대에 하늘의 정기는 밭으로 내려와 부추가 되고, 음기는 감응해 창포가 되었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또 구절창포(九節菖蒲)라고도 한다. 석창포의 뿌리는 언뜻 지네처럼 보일 만큼 마디가 많은데, 한 치 길이에 아홉 마디(一寸九節)는 되어야 약효가 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비닐하우스서 대량 재배도

 

석창포는 직장인 등 정신노동자에게 좋은 성분을 담고 있다.

 

창포와 석창포는 겉으로 쉽게 식별할 수 있다. 창포는 보통 키가 60~90㎝ 정도로 자라고 잎줄기가 뿌리에서부터 곧게 선다. 잎맥이 있어서 꼿꼿하다. 뿌리가 대나무 뿌리처럼 굵고 마디가 성기며 통통하다. 석창포는 아무리 자라도 30~50㎝ 정도다. 가는 잎줄기가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자란다. 중국 청대 의가 이시진이 지은 ‘본초강목(本草綱目)’은 요즘의 어느 서적보다도 그 차이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못이나 늪지에 나며, 잎줄기가 부들을 닮고 뿌리가 굵고 높이가 두세 자까지 자라는 것은 니창포(泥菖蒲)다. 백창(白菖)이라고도 한다.

 

시냇물이나 산간 계곡에 나며, 부들 닮은 잎줄기에 뿌리가 가늘고 높이가 두세 자까지 자라는 것은 수창포(水菖蒲)다. 계손(溪蓀)이라고 한다. 이들과 달리 물과 돌 사이에 나며, 뿌리가 수척하고 촘촘한 마디가 있으며 높이가 겨우 한 자 남짓 자라는 것이 석창포다. 관상용으로 심기도 하는데 한 해가 지나 봄이 되어 잎을 잘라주면 자를수록 잎이 가늘어지고, 숟가락 자루처럼 뿌리의 마디가 변한다. 그 중 뿌리의 길이가 두세 푼, 잎의 길이가 한 치쯤 되는 석창포를 특별히 전포(錢蒲)라고 부른다. 약재로는 석창포를 써야 하며, 나머지는 모두 적당치 않다. 석창포는 새 잎이 묵은 잎을 대신하며 자라나므로 사계절 내내 푸르다.”

 

세간에 함초박사로 유명한 해남의 박동인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꽤나 까다로울 듯한 이 석창포를 엉뚱하게도 비닐하우스에서 대량 재배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유기농퇴비를 써 생육을 촉진시켜 2~3년이면 출하가 가능할 정도로 키워냈다. 신통방통한 일을 한 그는 이 석창포가 앞으로 대단히 주목받는 약재가 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왜 그런가 물었다. 그는 대뜸 “이젠 두뇌의 시대 아니냐, 바로 머리를 좋게 하는 약이 석창포다. 도시에 살면 스트레스가 많아 심혈관질환이 늘어난다. 그런데 석창포는 막힌 심장의 구멍을 뚫어주는 약이다. 또 눈을 밝게 하고 귀도 잘 들리게 하며 목소리도 잘 나오게 한다. 그러므로 현대인에게 갈수록 긴요한 약물이다”라며 거침없이 쏟아냈다. 걸걸한 그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보니 요즘 사람들에게 딱 필요한 약이다.

 

동의보감을 보면 “석창포는 심장의 구멍(心孔)을 열어주고 오장을 보한다. 구규(九竅: 눈, 귀, 코의 여섯 구멍과 입, 항문, 요도의 세 구멍)를 잘 통하게 한다. 눈과 귀를 밝게 하며, 음성이 잘 나오게 한다. 건망증과 치매를 낫게 하고 머리를 총명하게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냥 쉽게 읽을 일이 아니다. 바로 이것 아닌가. 현대인의 두뇌와 오관과 심장을 위해 자연이 꽁꽁 숨겨두었던 비약(秘藥)이 바로 석창포였다.

 

과거 신선술을 꾀하는 방사들에게 석창포는 불로장생의 약이었다. ‘도장경’에도 “수초(水草)의 정영(精英)이자 신선의 영약”이라고 기록할 정도고 ‘신농본초경’에도 상약 중에서 으뜸으로 치고 있다. 한나라 때 유향의 ‘열선전’에 나오는 상구자서의 이야기는 그런 불로장생의 고전적 ‘썰(說)’ 중 한 예다. 상구자서는 나이가 300살이 되도록 살면서 조금도 늙지 않았는데, 궁벽한 곳에서 돼지를 기르고 ‘우’라는 악기를 불며 살았다. 주변에서 그에게 불로(不老)의 술법에 대해 물으면 “석창포의 뿌리를 삽주와 함께 먹고 물을 마시면 배고프지도 않고 늙지도 않게 된다”고 했다.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황실의 귀인들과 부호들이 찾아와 석창포를 복용했지만 모두들 1년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우리나라의 ‘향약집성방’ 신선방도 이 얘기를 싣고 있다.

 

기억력 증진, 심장 강화

그런데 사실 현대인이 솔깃해할 석창포의 효능은 ‘불로장생의 영약’이 아니다. 그런 ‘썰’은 믿거나 말거나다. 그보다는 박동인씨의 말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석창포는 두뇌를 총명하게 하고 기억력을 증진시키며 막힌 심장의 구멍을 뚫어주고 이목을 밝게 한다. 매일매일 격심한 경쟁 속에서 스트레스에 치이고 극렬한 두뇌의 소모에 시달리며 뻐근해오는 심장을 걱정하고 살아야 하는 현대인에게 석창포라는 약물은 눈이 번쩍 뜨이는 영약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무슨 약리적 성분이 있어서 석창포가 이런 효능을 내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현대적 약리연구는 그 내용이 턱없이 부족하고 불만족스럽다. 석창포 뿌리에는 아사론이라는 휘발성 정유 성분과 페놀성 물질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것들의 효과는 심신을 안정시키고 흥분을 진정시키는 것이다. 장관에서 소화액의 분비를 촉진시키고 근육의 경련을 푸는 진경작용을 하기도 한다. 베타 아살론이라는 성분은 관상동맥의 혈류량을 증가시키는 작용을 한다.

 

요즘 화원에 가면 석창포 분재도 구입할 수 있다.

 

이런 몇 가지 약리적 이해를 가지고는 ‘신농본초경’과 여타 본초서에 쓰여진 개심공(開心孔) 보오장(補五臟) 통구규(通九竅) 총이명목(聰耳明目) 출음성(出音聲) 불건망(不健忘)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 고인들이 뻥이나 치며 없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이들은 아니었을 터이니까 믿을 수밖에.

 

최근 국내에서 나온 석창포에 대한 연구논문들을 보면 학습능력과 기억력 향상, 알츠하이머형 치매와 건망증 개선 등에 석창포가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자폐아들에게도 임상적 효과가 있다. 고무적인 것은 암을 치료하는 효능도 있다는 게 새롭게 밝혀졌다는 것이다. 석창포의 메탄올 추출물이 비장의 T림프구를 증가시키고 백혈병 암세포에 대해서 강한 세포독성을 발휘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바 있다. 암을 예방하는 효소를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험생을 둔 부모치고 ‘총명탕’을 모른다면 좀 이상할 것 같다. 이 총명탕의 주된 재료가 석창포다. 여기에 원지, 복신 등 두 가지 약물이 더 들어가 그 효과를 극대화한 처방이 총명탕이다. 중요한 것은 석창포 한 가지만으로도 두뇌가 맑아지고 기억력이 증진되는 효과가 크다는 것. 여기저기 연구결과가 많다. 고전적인 사례도 많은데, 갈홍의 ‘포박자’에 나오는 한중이라는 이의 얘기가 인구에 회자된다. 그는 석창포를 13년동안 먹고 추위를 모르게 됐고, 하루에 만언(萬言)을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아졌다고 한다.

 

석창포는 뿌리만 약효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잎과 꽃을 모두 약으로 쓸 수 있다. 잎을 달인 물로 머리를 감으면 모발이 윤기가 나고 비듬이 없어진다. 차로도 만들 수 있다. 창포잎을 덖거나 데쳐서 비빈 다음 건조시키면 창포잎차가 된다. 꽃 역시 잘 말려두었다가 뜨거운 물로 우려내면 향기로운 차가 된다. 모두 두뇌의 기능을 증진시키고 눈과 귀를 밝게 하므로 수험생이나 정신노동자에게 유용하다. 중풍이나 관상동맥경화 같은 혈관 질환을 예방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실 석창포의 약리적 쓰임새는 상당히 범위가 넓다. 앞서 이야기한 효능 외에도 조울증이나 정신분열과 같은 중증질환에도 효과가 있고, 비위의 기능이 떨어져 오심 구토가 심할 때도 쓰인다. 또 풍습으로 인해 열이 나고 오한이 들거나 관절과 근육이 쑤시고 아플 때도 쓰인다. 창포즙은 구강을 청결하게 하는 효능도 뛰어나다. 또 농이 멈추지 않는 궤양이나 피부염증 등에 분말로 만들어 뿌리면 쉽게 가라앉기도 한다.

 

문방오우의 하나로 불리기도

옛날부터 석창포는 문인과 학자들의 벗이 되어왔다. 뿌리를 차처럼 달여 마시면 머리가 맑아지고 기억력이 좋아지는 약효로도 그렇지만, 화분에 심어 곁에 두면 등불이나 촛불 아래서 글을 읽을 때 그을음과 연기를 흡수해 눈의 피로를 덜어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또 창포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눈을 씻으면 대낮에도 별이 보일 정도로 눈이 밝아진다고 해서 더 사랑을 받았다. 사계절 변함없이 푸름을 간직하며 수석과 어울리는 조촐한 운치를 지녀 중국과 조선의 글줄깨나 쓰는 선비치고 석창포에 대한 시를 남기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문방사우에 더하여 문방오우의 하나로 불리기도 했다.

 

김승호
1960년 전남 해남 출생
現 광주 자연마을한의원 원장
前 동아일보 기자 · 송원대 교수

 

요사이 이 석창포가 분재로 나오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서책을 가까이 하며 정좌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옛 선비의 모습들이 아주 잊히진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필자도 이번 주엔 개천사 계곡에서 소담한 창포 한 포기를 얻어 책상머리에 올려서 눈과 귀를 밝게 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