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는 1939년 4월. 절세의 미모를 갖춘 세계적 무용가 주은몽의 생일 파티가 경성에서 열렸다. 그녀의 별칭은 공작부인(孔雀夫人). 도쿄 히비야 음악당에서 대성공을 거둔 무용극 ‘공작부인’의 영향이다. 절세미인의 약혼자는 경성과 파리를 오가는 예술애호가 백영호. 55세의 백만장자 백영호가 20살 이상 나이가 어린 예비신부를 위해 명수대(지금의 흑석동 인근)의 주은몽 저택에서 성대하게 가장무도회를 열어준 것이다.
조선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가장무도회. 참석한 인사들은 모리스 루블랑의 소설 주인공 아르센 뤼팽, 중세의 기사, 빅토리아 왕조의 궁녀, 인도의 귀족, 집시풍 차림의 여자 등 각양각색의 분장을 하고 스텝을 밟았다. 비록 분장을 하고 있었지만, 명사들인 만큼 손님들의 정체는 어느 정도 식별이 가능하다. 그런데 도무지 모습을 가늠할 수 없는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주홍빛 옷으로 온몸을 휘감은 채 히죽히죽 웃으며 서있는 어릿광대가 바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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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첫 본격 추리소설 작가 김내성 선생. / photo 조선일보 DB
- 무도회가 절정으로 치달을 때, 꽃같은 아름다움으로 파티를 주관하던 공작부인이 “화장을 고치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지 5분쯤 뒤, 갑자기 “악!” 하고 장막을 찢을 것 같은 외마디 비명이 홀에 울려 퍼졌다. 비명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커다란 삼면 거울 앞에 무참히 쓰러져 있는 공작부인의 몸뚱이! 부인의 왼편 어깨 위엔 날카로운 비수가 박혀 있었고, 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어릿광대, 어릿광대…”라고 외쳤다.
무도회가 열린 저택은 한 길 반이 넘는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정문엔 경관들이 순회하며 지키고 서 있다. 따라서 정문 외에 나가는 길은 있을 수 없다. 경찰은 홀 안의 손님을 모두 한곳에 몰아넣고 취조하지만, 어릿광대로 짐작되는 인물을 찾지 못했다. 정문을 지키던 경비는 “어릿광대 복장을 한 사람은 들어온 적도, 나간 적도 없다”며 의아해한다.
공작부인 주은몽의 주변 인물들에게 발신인을 알 수 없는 공포의 편지가 날아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 피를 연상시키는 섬뜩한 색깔의 주홍색 편지가 요구한 대로 응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둘씩 처참한 시체로 변해가고, 베일에 가려져 있던 주은몽의 과거는 하나둘씩 껍질을 벗게 된다.
세계적 무용수 주은몽이 누구로부터 원한을 산 것일까. 살인귀는 대체 누구기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채 철통 같은 경비를 뚫고 들어와서는 천연덕스레 사람을 죽인 뒤, 유유히 사라질 수 있는 것일까. 확산되는 공포 사이로 “나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어디든 다 갈 수 있다”는 마인(魔人)의 비웃음이 울려 퍼진다.
“범인을 잡아달라”는 폭발적 요청에 따라 사건에 뛰어든 명탐정 유불란. 그의 추리 덕분에 신출귀몰한 마인의 정체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독자의 예측은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데….
와세다대학서 법학 전공한 유학파, 조선일보 기자로 신문에 소설 연재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을 향해 치닫던 1939년, 암담하기만 했던 식민지 조선의 손에 땀을 쥐게 한 소설이 있었다. 이름하여 ‘마인(魔人)’. 제목부터 기괴한 이 소설은 인터넷은 물론 TV가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 라디오가 일부 특수 계층의 사치품으로 여겨지던 식민지 조선 대중의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
1939년 2월 14일~10월 11일까지 약 8개월간 조선일보에 연재된 이 소설은 출간 5년 만에 18판을 찍었고, 광복 후 여러 출판사에서 판을 거듭해 가며 약 30판을 찍었으며, 1950년대와 1960년대 두 차례에 걸쳐 영화로 제작된 초기 출판 시장의 ‘초대박’이었다. 대구대 정혜영(45·현대소설) 교수는 “문맹률이 절반을 넘어서던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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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년 2월 14일자 조선일보. ‘마인’ 첫회가 실렸다. / photo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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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인’ 마지막회가 게재된 1939년 10월 11일자 조선일보. / photo 조선일보 DB
- ‘초대박’의 작가는 아인(雅人) 김내성(金來成·1909~1957)이다.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를 나온 뒤 일본에 유학, 1933년 와세다대학 독법학과(獨法學科)를 졸업한 그는 법학보다 문학에 관심을 쏟았다. 대학시절부터 추리소설 평론을 발표해 온 그는 1935년 일본 추리소설잡지 프로필 3호에 단편 ‘타원형의 거울’ ‘탐정소설가의 살인’ ‘연문기담’ 등의 작품을 실으면서 추리작가로 정식 데뷔했다. 김내성 선생은 1936년 귀국한 뒤 이듬해인 1937년 ‘탐정소설가의 살인’을 한국어로 각색해 분량을 늘린 ‘가상범인(假想犯人)’을 쓰면서 국내 첫 추리소설 전문 작가로 자리하게 된다.
선생이 조선일보와 인연을 맺은 것은 30살이던 1938년 12월이다.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사 출판부 기자로 입사한 것이다. 잡지 ‘조광(朝光)’의 편집을 맡으며 안정적으로 작품활동을 편 그는 프랑스의 아르센 뤼팽(Arsene Lupin)을 탄생시킨 작가 모리스 르블랑(Maurice Leblanc)의 이름에서 힌트를 얻어 소설 속의 명탐정 유불란(劉不亂)을 창조해 낸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마인’은 선생이 31세였던 1939년 작품. 1939년 2~10월까지 8개월간 조선일보에 연재되며 장안에 화제를 일으킨 이 소설은 “한국 추리소설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란 평가를 받으며, 그해 12월 장편소설로 출간됐다. 당시 조선일보 부사장 및 주필이었던 이훈구(李勳求·1896~1961) 박사는 ‘마인’ 서문에서 “아직까지 이렇다 할 장편의 탐정소설 한 권이 간행되지 못했다”며 “탐정소설로 조선 최초의 창작인 ‘마인’은 조선 문단이 사계(斯界)에 발사하는 한 거탄(巨彈)임이 틀림없다”고 평했다.
올해는 선생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 출생 100주년을 맞은 출판계는 그의 작품을 재출판 하는 등 선생에 대한 재조명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 비현실적 판타지 공간 만들어, 암담한 식민지 현실 잠시 잊게
- 조선 독자를 사로잡으며 최고 인기를 구가했던 ‘마인’은 일부 비현실적 요소로 인해 “판타지의 성격을 가졌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우선적인 것이 소설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가장무도회’ 장면이다. 카이스트 전봉관(38·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마인 속 경성과 경성문화’란 글에서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저택에서 가장무도회를 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그만한 저택도 당시 경성엔 존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상하이나 도쿄에는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며 댄스홀이 성업했지만, 유독 경성에는 광복 때까지 허가받은 댄스홀이 없었다”며 “풍속을 정화한다는 총독부의 정책으로 인해 사교댄스는 금지됐으며, 따라서 1930년대 명사들이 모여 무도회를 벌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라고 꼬집었다.
전 교수는 가장무도회가 열린 저택이 명수대에 있다는 설정에 대해 “명수대는 원래 경성부에 속해있지 않다가 1936년 시가지 확장 때 (경성부에) 편입된 곳으로, 당시 부호들의 별장이 밀집해 있었다”며 “당시 경성 제일의 부호로 알려졌던 천만장자 최창학의 초호화 저택에도 수십 명의 신사 숙녀가 어우러져 춤을 출 만큼 널찍한 공간은 갖춰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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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내성 선생이 기자로 일하던 1930년대의 조선일보 편집국 풍경. / photo 조선일보 DB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명탐정 유불란은 ‘점심 때가 되면 파나마 모자(1930년대 서양서 유행하던 중절모의 일종)를 쓴 차림으로 H그릴에 들러 마카로니와 오므라이스를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사람’으로 설정돼 있다. 대구대 정혜영 교수는 “이같은 서구적 정경은 수시로 택시를 잡아타는 등장인물의 모습과 함께, 테이블·런치·헤드라이트 등 빈번하게 사용되는 영어와 연결되면서 ‘마인’의 세계를 현실과 유리되는 비현실적 판타지의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평했다.
‘마인’의 판타지성을 부각시키는 또 다른 요소는 당시 경성에 탐정이란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전봉관 교수는 “당시 경성에는 오늘날의 흥신소처럼 운영되던 ‘고바야시(小林) 탐정사(社)’란 곳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이곳은 불법 영업으로 재판을 받아 사라지게 된다”며 “탐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경성에서 ‘명탐정 유불란이 사건을 맡아달라는 여론이 들끓었다’는 설정은 매우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하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당시 경찰은 일본의 앞잡이란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다”며 “탐정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1930년대 조선에서, 부정적 이미지로 고착된 경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보다는 탐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소설에는 고위직 경찰이나 순사부장 등 합리적 추리로 사건을 해결하려는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명탐정 유불란에 미치지 못한다. 전 교수는 “만약 경찰이 탐정의 역할을 대체했더라면 (독자들에게) 심한 거부감을 줬을 것이 분명하다”며 “이들은 직무에 충실한 사람으로 묘사되면서도 능력이 유불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독자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1930년대 경성 ‘손금 보듯’ 묘사, 생생한 추격전 현실로 착각하게
가장무도회로 상징되는 비현실적 상황을 사건의 배경으로 삼고,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탐정이란 직업을 내세워 판타지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간 작가는 일제시대 경성 거리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읽는 이의 머릿속에 한 편의 그림을 그려준다. 현실과 허구를 사실처럼 뒤섞은 이 같은 기법은 소설 속 사건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절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마인’에는 범인으로 몰리던 등장인물이 택시를 잡아타고 쏜살같이 한강인도교를 건너는 장면이 나온다. 그 뒤를 오토바이를 탄 순사부장이 맹렬하게 쫓아간다. 당시 택시요금은 1원. 7전이던 전차 요금에 비하면 비싼 교통수단이었다. 등장인물은 택시기사에게 팁을 주며 “최대한 빨리 달리라”고 요구한다. 전봉관 교수는 “그 시대엔 어디를 가든, 거리에 관계없이 택시요금은 무조건 1원이었다”며 “팁을 주고 기사를 회유한다는 설정은 상당히 현실적”이라고 했다.-
- ▲ ‘마인’의 배경이 된 1930년대 경성. / photo 조선일보 DB
택시를 탄 인물은 경성역(지금의 서울역)에서 남대문통으로 접어든다. 남대문통이란 경성역~남대문~종로~화신백화점(삼성증권 본점)에 이르는 1.5㎞ 구간. 이 거리는 남대문시장, 조선은행, 명치정(명동)주식시장으로 이어지는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였다. 택시는 남대문네거리에서 급히 좌회전해 태평통(지금의 태평로)으로 접어든 뒤, 남대문과 경성부청(지금의 서울시청)을 지나 광화문네거리까지 툭 터진 일직선 대로를 내리 달린다. 태평통 큰 길 양 옆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옥이 마주보며 서 있고, 조선일보 사옥 옆엔 덕수궁과 부민관(지금의 서울시의회 자리)이 서 있다. 범인으로 몰리던 인물은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택시에서 내려 황급히 골목으로 뛰어들더니, K여고 앞 막다른 골목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K여고는 경기여고를 가리키는 이니셜이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으리라. ‘마인’에는 이처럼 현대 드라마처럼 박진감 넘치면서도, 손금을 보는 것처럼 정교한 추격 장면이 자주 나온다. 전 교수는 “한밤중에 고속으로 벌어진 오토바이와 택시의 추격전 장면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며 “소설 막바지엔 이 사건을 취재하던 신문기자가 신문사 비행기를 몰고 괴한을 추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얼핏 황당한 설정 같아 보이지만 조선일보사가 1934년부터 비행기를 도입해 취재에 나섰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현실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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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원고료는 적어, 1937년 소설 3편 연재하고도 월 수입 40원
당대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김내성 선생은 하지만 소설의 원고료로 풍족한 생활을 하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일한국인인 히로시마여자대학 리켄지(국제문화학부) 교수는 1930년대 작가들이 받은 원고료에 대해 “신문사의 경우 200자 원고지 한 장에 30전, 장편소설의 경우엔 한 회에 2원이었다”며 “김내성의 경우 1937년 ‘가상범인’의 원고료로 180원가량, ‘마인’과 ‘태풍’의 고료로 320원 안팎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추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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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년의 서울 광화문.
이를 바탕으로 따져보면 김내성 선생의 원고료 수입은 약 500원가량. 리켄지 교수는 이를 한 달 평균으로 나눠 “월 40원 안팎의 원고료 수입을 거뒀을 것”이라며, ‘구인회’ 출신 문인 조용만의 1932년 기록을 들어 “(월 40원의 수입은) 생활하기에 풍족한 돈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경성야화’를 쓴 조용만은 “매일신보 학예부에 근무해서 받은 급여가 한 달에 70원”이라며 “너무 쌌다”고 적어놓았다.
‘경성야화’에 따르면 1930년대 후반 설렁탕 한 그릇 값은 10전으로, 40원이면 당시 설렁탕 400그릇을 사먹을 수 있는 가치를 가졌다는 말이 된다. 요즘엔 설렁탕 한 그릇에 6000~7000원가량, 40그릇을 사는 데엔 약 240만~280만원이 든다. 설렁탕 가격이 물가 변화를 이해하는 직접적 지표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이를 기준으로 당시 40원의 가치를 어림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리켄지 교수는 “이외에도 김내성 선생에겐 조선일보 출판부 기자로 근무하며 받는 보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단행본 출간에 따른 인세도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엔 ‘인세 보고’란 개념 자체가 희박했을 뿐더러 해적판에 대한 경계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인세로 인한 수입이 많았다고 보긴 어렵다. 리켄지 교수는 “1940년 총독부에 의해 조선일보 등 민족신문이 강제로 폐간된 뒤엔, (김내성 선생이) 화신백화점에 근무했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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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리소설의 역사
1908년 이해조의 ‘쌍옥적’ 첫 작품으로 꼽혀, 김내성 이후 침체, 30년 뒤에야 김성종 계승 - 한국 추리소설의 역사는 짧지 않다. 1908년 제국신문에 발표된 이해조의 ‘쌍옥적(雙玉笛)’을 최초의 추리소설로 본다면 111년이 된다. 그러나 그 역사에 비해 성취는 미흡한 편이다. 내재적 발전이나 역량을 축적할 틈도 없이 떠밀려서 온 결과로 해석된다.
추리소설 자체가 서양 문화의 산물이다 보니 초창기는 번안소설(飜案小說)이 주를 이뤘다. 번안소설은 외국작품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고쳐 쓴 것을 말하는데 코난 도일이나 에드가 앨런 포의 작품 등이 소개됐다.
국내 창작물은 192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나온다. 1926년 발표된 박병호의 ‘혈가사(血袈裟)’는 탐정이 등장해 경성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을 파헤친다. 1931년에는 최독견이 신민일보에 ‘사형수(死刑囚)’를, 1934년에는 채만식이 서동산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에 ‘염마(艶魔)’를 선보인다. ‘염마’에서는 셜록 홈스와 왓슨을 연상시키는 백영호와 오복이 콤비의 활약이 펼쳐진다. 이 시절 김내성은 한국의 첫 추리 전문작가로서 입지를 굳히는데 1939년에 발표한 본격물 ‘마인(魔人)’은 올해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복간되기도 했다.
광복 전 눈길을 끄는 또 한 명의 추리작가는 소파 방정환이다. 아동 문학의 선구자인 그는 북극성이란 필명을 사용해 1925년과 그 다음해 ‘동생을 찾으러’와 ‘칠칠단의 비밀’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모험소설 성격이 강하기는 했지만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얼마나 다양한 변용이 가능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광복과 곧이어 터진 전쟁의 여파로 1950~1960년대 추리 문단은 긴 침체기에 빠진다. 일찍 작고한 김내성의 공백도 컸고, 여가를 즐길 만큼의 여유가 없었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 했다. 간헐적으로 순문학 작가들이 추리소설을 발표했으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현재훈, 허문녕 정도가 명맥을 유지했다.
그 오랜 침묵을 깬 사람이 바로 김성종이다. ‘광복 전 김내성, 광복 후 김성종’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한국 추리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경찰관’으로 등단해 1974년에 걸작 ‘최후의 증인’을 내놓는다. 그는 분단 현실의 비극을 미스터리 구조에 녹여냄으로써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 받았다. ‘제5열’ ‘백색인간’ ‘라인X’ 등 내놓은 작품마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면서 독주체제를 굳혀갔다.
조금씩 성장하던 한국 추리소설은 1980년대 들어 전성기를 맞는다. 1983년 추리작가협회가 창립되면서 체계적 활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매년 단편집을 발간하고 추리문학대상을 제정했다. 스포츠신문에 추리소설 신춘문예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 잡지 창간과 신문 연재도 봇물을 이뤘다. 이상우의 ‘악녀 두 번 살다’, 노원의 ‘위험한 외출’ 같은 작품이 인기를 끌었고 작가군도 두터워져 정건섭, 이수광, 김남, 유우제, 강형원, 권경희 등 역량 있는 작가들이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전성기는 길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무분별한 출간에 따른 작품 수준의 저하, 선정성 시비가 발목을 잡았다. 여기에 외환위기까지 겹쳐 출판 시장이 위축되면서 급격한 내리막을 걸었다. 장편 공모와 신춘문예가 사라지자 작가 수혈이 어렵게 되고, 이는 곧바로 작품의 질 하락이라는 악순환을 가져왔다. 작가 개개인의 역량을 장르 전체에 대한 성장으로 연결시키지 못했고, ‘사회파’ ‘신본격’ 등 새로운 형태로 추리 문학을 발전시킨 일본과 달리 우리는 한국적 스타일을 확립하는 데 실패한 것도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2000년대 들어서도 고전은 계속됐다. 일상생활의 여유와 함께 미스터리 붐이 다시 일긴 했지만, 영·미 등 서구와 일본 작품에 자리를 빼앗겨 정작 국내 창작물은 더욱 설자리를 잃어갔다.
그러나 한국 추리소설의 미래는 어둡지 않다. 몇 년 새 인터넷 카페 모임을 중심으로 창작 열기가 뜨겁고, 콘텐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영화 등 타 장르와의 교류가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국내 대형 출판사들이 국내 작가 발굴에 큰 관심을 가지는 현상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정명섭 추리작가
1973년 서울 출생.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이며 2006년 역사 추리소설 ‘적패1’ ‘적패 2’를 출간했고, 2008년에는 ‘한국추리스릴러 단편선’ 작업에 참여했다. 현재 파주 출판 도시에서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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