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년 만에 문 닫은 현장감식 실습장 ● 유영철 사건 실마리는 해머에서 발견된 피해자 유전자 ● 법의관 현장감식 제도화해야 ● 시체 볼 줄 모르는 일반 의사가 검안서 작성 ● 국과수 부검의 19명이 한 해 6000건 부검 ● ‘파리로 범인 잡는’ 법의곤충학자, 국내에 딱 한 명 |
“시체농장만든다면 찬성할래요?” 국내 과학수사의 현주소를 취재하겠다고 서울경찰청을 찾은 기자에게 현장감식 전문가 박상선 반장이 밑도 끝도 없이 던진 말이다. “미국에는 시체농장이란 게 있어요. 시체 부패를 연구하는 곳으로 법의인류학연구소라고 합니다. 테네시 주립대학이 운영하는데 학교 근처 숲을 통째로 사용해요. 여기엔 무덤 발굴과 사체복구용으로 기증받은 진짜 시체들이 있습니다. 미국에선 과학수사관이나 FBI 요원이 되려면 누구나 여기서 교육을 받아야 해요. FBI 증거복구팀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문 채취, 혈흔 및 유골 분포 분석, 무덤 탐지 능력에 대한 평가시험을 치릅니다.” 박 반장에 따르면 테네시 시체농장은 “사망 후 피부 색깔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등 시체가 부패하는 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현장감식 실습장”이다. 테네시 시체농장은 2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이곳에서는 사체 부패 연구 외에도 물속에 버려진 시체가 얼마 만에 물에 뜨는지, 시체가 썩는 과정에 어떤 곤충이 생기는지, 시체가 부패하면서 인근 토양과 식물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등에 대해 연구한다. 현재 시체 200여 구가 있는데, 100% 기증받은 시체들이다. 절반은 사망 당시 그대로, 절반은 부검 후에 옮겨진 시체인데, 부패 연구를 위해 숲 곳곳에 자연상태 그대로 방치했다가 1년 후 뼈만 앙상하게 남은 유골들을 실내 연구실로 옮겨 보존한다고 한다. 미국의 범죄수사 TV 드라마 ‘CSI’는 과학수사의 진수를 보여준다. ‘CSI’는 ‘Crime Scene Investigation’의 약자로 범죄현장수사를 뜻한다. CSI 요원들은 범죄현장 감식 전문가이자 화학자, 곤충학자, 인류학자이다. 미국의 경찰은 과학수사를 위해 수년간 CSI식 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국립 과학수사학교만 하더라도 400여 시간이 넘는 현장실습 훈련을 강행한다. 전문지식이 부족해 단서가 유실되고 증거물이 훼손되어 미제(未濟)사건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훈련과정은 시 당국의 예산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범죄현장 감식요원을 키우기 위해 주(州)에서 특별예산을 편성하기도 한다. 테네시 시체농장은 연방정부에서 어렵게 따낸 100만달러의 자금으로 자선교육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경찰의 실태는 어떨까. 박 반장의 설명이다. “일선 경찰서 형사들 중에서 현장감식 수사관을 선발해요. 이들은 과학수사기법 2주, 감식전문기술 3주 교육을 받습니다. 몽타주 그리기, 최면, CCTV 분석, 범죄분석 등을 세부적으로 배워요. 하지만 미국처럼 현장실습장에서 체험학습을 하는 건 꿈도 못 꿔요. 현장감식 실습장도 없어진 걸요. 조직이 커지면서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거죠.” 한국에 현장감식 실습장이 생긴 건 2000년. 경찰청이 서울 마포에 있는 광역수사대 건물 내부에 신설했는데, 중고 가전제품과 가구 등을 지원받아 사건현장을 재현했다. 하지만 30평 남짓한 현장실습장은 4년 만에 마약수사대에 넘겨졌다. 지금은 서울 휘경동에 있는 수사보안연구소를 현장감식 실습장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장소도 좁고 시설도 보잘것없어 실습용으로는 부적합하다는 게 중론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국 233개 경찰서에 700여 명의 과학수사관이 활동하고 있다. 박 반장은 “미국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걸음마 수준”이라면서 “과학수사관이 된 후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 교관도 없고 교관이 있어도 교육받을 여건이 안 된다는 얘기다. 서울시내 일선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현장감식 요원은 3~7명이다. 하지만 현장감식 업무에 전념하는 요원은 거의 없다. 형사과에 소속된 이들은 살인사건뿐만 아니라 절도사건 현장에도 출동한다. 하루에 10∼15회 출동하므로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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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염색체에 대한 법정 공방 지난해 7월, 경남 거제시 옥포동 앞 도로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피살자는 39세 여성. 사건 용의자는 택시 운전사 김모씨(39). 승객을 흉기로 위협, 거제시 하청면 실전매립지에서 살해하고 현금 40만원이 든 손가방을 빼앗은 혐의(강도살인)로 1심에서는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러나 김씨는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다. 지난 7월,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 재판에서 최대 쟁점은 혈흔. 피해자 손톱 밑에서 채취한 혈흔에서 드러난 성염색체의 유전자형 11개 모두 용의자의 타액에서 검출된 것과 일치했지만, 법원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검찰이 특별한 증거도 없이 무고한 사람을 살인범으로 내몬 꼴이 됐다. 이 사건을 심리한 부산고법 형사부 지대운 판사는 “피해자 손톱 밑에서 발견된 혈흔에서 남자에게 존재하는 Y염색체가 발견됐지만 이 염색체는 부계(父系)로 유전되는 성염색체”라면서 “이론상 증조와 손자가 같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Y염색체는 동일 부계인지를 확인하는 데 의미가 있을 뿐 개인 식별력엔 한계가 있다는 해석이다. 이 사건을 수사한 창원지검 통영지청 김재권 검사측은 “혐의선상에 오른 거제도 택시기사 500여 명 중 피고인만이 유일하게 성염색체가 일치했고, 그의 부계 7촌 이내의 혈족 중에 범행장소인 거제시에 거주하거나 그 시점에 거제시를 방문한 사람이 없다”며 김씨가 진범이라고 주장했다. 피고인의 부친과 조부가 범인일 확률은 거의 없다는 논리다. 대검 유전자감식실 이승환 연구관은 “Y염색체는 동일 부계 유전을 나타내지만 꼭 일치하는 건 아니다”며 “동성동본이라도 Y염색체가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선조 대에 피가 섞이거나 돌연변이가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법원이 수사기관의 무리한 조사와 피의자의 인권침해를 막겠다는 취지로 공판중심주의 도입을 선언한 지 2년6개월. 지난해 12월, 재판에서 피고인이 부인하면 검찰 신문조서를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온 뒤로 법원의 증거심사는 더욱 엄격해졌다. 사건현장에서 지문이나 족적, 혈흔 이 나온다고 해도 보강증거와 정황증거일 뿐 범행을 입증할 증거로 인정받지 못한다. 또 대법원 판례상 수사관의 증언은 피고인이 부인하면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지난 6월, 연쇄살인범 유영철에 대한 대법원 최종 판결은 증거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 계기가 됐다. 유영철은 노인과 부녀자 21명을 연쇄살인한 혐의로 구속돼 사형이 확정됐다. 대법원은 유씨의 범행 중 ‘이문동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문동 살인사건’은 지난해 2월, 서울 동대문구 한 골목길에서 한 여성(24)이 흉기에 찔려 살해된 사건이다. 유씨는 경찰과 검찰에서 자신의 범행이라고 진술했다가 공판과정에서 “경찰의 회유로 허위 자백했다”고 번복했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상처 부위와 유씨의 자백이 일치하지 않고 자백경위와 동기가 석연치 않아 범죄를 증명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은 우리나라 수사기관이 얼마나 자백에 의존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유씨가 사용한 범행도구 해머에서 피해자의 유전자를 검출한 대검 유전자감식실 이승환 연구관의 얘기다. “피해자의 유전자가 범행의 결정적인 증거가 됐어요. 조립된 해머 손잡이 틈새로 피해자인 황학동 노점상 안모씨의 유전자가 흘러들어가 있었어요. 국과수 1차 감정에선 발견되지 않았는데, 대검에서 해머를 분리해 찾아냈어요.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습니까? 만약 유씨가 자백하지 않았다면 범죄를 입증하기 힘들 뻔했지요. 달리 증거가 없었거든요.” 뇌물·조폭 수사의 어려움 검찰 내부에서는 법원의 엄격한 증거심사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는 이가 적지 않다. 대검 과학수사1담당관 김종률 검사는 “자백 위주의 수사는 자백 위주의 재판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법원의 과학재판을 강조했다. 피고인이 아무리 부인하더라도 재판부가 과학적 심증을 통해 과감하게 유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 검사는 또 “증거의 가치와 판단 과정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며 “영국 법정에서는 사건현장에서 발견된 족적이 유전자감식보다 더 중요한 증거로 받아들여진다”고 국내 법원의 판결풍토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우리나라 법원에서는 거짓말탐지기로 알려진 홀로그래프를 아직까지 증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법원이 수사기록보다 명백한 증거를 요구하면서 과학수사를 통한 명백한 물증확보는 수사기관의 지상명제가 됐다. 검찰은 올해를 ‘과학수사 원년’으로 정했다. 검찰 내부에서 과학수사 역량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결과다. 내년까지 과학수사지원센터를 건립해서 컴퓨터, 회계, 유전자, 심리분석 등 과학수사를 위한 인적·물적 인프라를 확충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검찰이 과학수사지원센터 건립자금으로 정부에 요구한 예산은 약 260억원. 여기에는 디지털 증거분석시스템 등 각종 첨단장비 구입과 과학수사 전문요원 채용비용이 포함돼 있다. 한마디로 한국형 CSI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포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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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검찰 일부에서는 “첨단장비만으로 과학수사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볼멘소리도 흘러나온다. 강력사건과 기업비리, 정치인 뇌물사건은 과학수사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최근 뇌물사건 연루자들이 법원에서 잇따라 무죄를 선고받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통 특수부 검사로 통하는 조은석 울산지청 형사1부장. ‘경성비리사건’ ‘대양금고사건’ ‘나라종금사건’ 등 특수수사 경험이 많은 그는 “뇌물사건에는 진술밖에 없다”면서 “기업비리에 대해서는 과학수사하기가 정말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뇌물수수사건의 경우 돈을 줬다는 사람이 ‘줬다’고 시인해도 진술에 일관성이 없거나 검찰 진술과 법정증언에 조금만 차이가 나면 무죄판결이 나온다”면서 “회계장부를 압수수색하고 계좌추적을 해봐야 소용없다”고 했다. 자금 흐름의 종착지를 알아내는 데는 돈을 건넨 사람의 진술이 결정적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살인사건도 자백수사가 불가피한 경우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살인사건 용의자들은 법정에서 번복하려고 고의적으로 함정을 파놓고 자백하기도 한다”면서 “범행도구를 어디에 버렸는지 등 진범이 아니라면 알기 힘든 상황과 관련된 자백을 받았더라도 법정에서 부인할 경우에 대비해 따로 물증을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범인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거를 수집해야 하는데 범죄가 날로 지능화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현장이 더 많다. 일선 경찰서 형사들은 ‘수사 과학화’를 아무리 외쳐도 살인사건의 경우 자백수사가 불가피하다고 호소한다. 예컨대 국과수에서 피해자 몸에서 채취한 혈흔에 대한 유전자 감식을 한 결과 용의자 것으로 밝혀졌다고 해도 범인이라는 직접증거가 없고 용의자가 ‘나도 모른다’고 발뺌하면 그 증거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피의자의 마음을 움직여 자백을 이끌어내는 심리수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조직폭력배 수사도 과학수사가 힘든 분야로 알려져 있다. 강력통인 김홍일 부산지검 동부지청 차장검사는 “조직폭력배 수사에서는 과학수사가 논리적으로 안 맞는다”고 했다. 조폭 관련 살인사건의 경우 사람을 죽인 종범 뒤에 ‘죽여라’고 지시한 주범이 따로 있기 때문이란다. 김 검사는 “명령체계가 확실한 조직폭력배가 관련된 사건에서는 (자백을 얻지 않고서는) 과학수사로 진범을 잡는 게 힘들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과학수사의 출발점은 ‘현장’ 한편 법원측은 수사기관의 가학(加虐)수사에 대해 비판한다. 서울가정법원장 이동흡 판사는 “법관은 피고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재판해야 한다”면서 경찰의 가학수사 일화를 소개했다. “수사기록보다 공판기록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법정진술이 더 가치 있어요. 수사관들이 공적을 올리기 위해 사건을 잘못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불과 6년 전 일입니다. 살인용의자가 경찰에서는 자백해놓고 검찰에서부터 계속 부인하는 겁니다. 거짓말탐지기를 사용해봤죠. ‘진실반응’이 나왔어요. 결국 범인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왜 죽였다고 거짓말 했냐’고 물어보니 경찰이 조사할 때 팬티 바람으로 밖에 서 있으라고 했다는 거예요. 춥고 겁에 질려 허위자백했다는 겁니다.” 최근 법원은 수사기관의 가학수사에 대해 엄중히 책임을 물었다. 살인사건에 연루돼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허위자백해 4개월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10대 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내린 것. 재판부는 이들에게 71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과학수사는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는 수사를 말한다. 과연 우리나라의 과학수사 역량은 어떨까. 대검 과학수사1담당관 김종률 검사는 “우리나라의 과학수사 수준은 미미한 상태”라면서 “몇천명이 해야 할 일을 몇백명이 맡고 있다”고 했다. “과학수사는 수사 분야에서 가장 뒤처져 있어요. 지금보다 100배는 더 투자해야 합니다. 기존의 발상과 인식으로는 답이 안 나와요. 수사기관이 전문적인 조사기법을 개발하는 것과 더불어 음성분석, 진술분석, 행동분석, 심리분석 인력을 확보하는 게 시급합니다.” 우리의 과학수사 인력은 선진국에 비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한참 뒤떨어져 있다. 국내 과학수사전문기관으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와 대검 과학수사과,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국방부 과학수사연구소 등이 꼽힌다. 과학수사 선진국인 영국의 경우 과학수사연구기관 FSS(Forensic Science Service)에서 활동하는 과학수사요원이 2300여 명에 이른다. 반면 우리의 경우 국과수 263명, 대검 과학수사과 25명, 경찰 과학수사요원 700여 명을 합쳐봐야 영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김 검사는 “이제 수사기관만의 힘으로 과학수사를 하긴 어렵다”며 “과학수사는 현장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찰 현장 초동수사 때부터 과학수사가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 검사가 말하는 과학수사는 경찰이 현장감식을 하면서 화학 물리학 생물학 의학 등의 자연과학을 접목하고, 몽타주와 폐쇄회로 분석, 지문감식, 거짓말탐지기, DNA 분석 등 첨단과학을 이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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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 전문가 빠진 현장감식 과학수사의 시작은 현장감식이다. 현장감식은 변사 현장에서 증거를 수집하는 일이자 수사의 기본 틀이다. 우리나라에선 경찰청 현장감식반에서 이 일을 하고 있다. 경찰이 사건 현장에서 수집한 증거는 국과수로 보내진다. 경찰청 현장감식반 관계자는 “전국 경찰에서 수집한 증거가 한곳으로 모이기 때문에 국과수 업무에 과부하가 걸린 상태”라면서 “각 지방 경찰청에서 간단한 감식을 할 수 있는 시설과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사건 해결 시간이 단축될 수 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사건 현장에 법의학자가 함께 출동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시체를 검사하는 검시(檢屍)가 죽음의 진실을 푸는 열쇠가 될 뿐 아니라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법의관이 수사기관으로부터 독립해서 검시할 권한이 없다. 또한 법의학 전문가가 현장에 나가거나 초동단계에서 검시에 참여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검찰의 의뢰를 받은 공중보건의나 일반의사가 검안서를 작성한다. 과학수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는 셈이다. 국내 법에 따르면 법의관은 검안서를 쓰지 못한다. 보건복지부가 현장검안(의료법 18조) 자격을 의료법에 종사하는 의사와 치과의사, 한의사로 제한했기 때문. 일반 의사가 검안서를 작성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부검 여부는 문외한인 검사가 결정한다. 검사는 사인(死因)과 사망 추정시간을 적은 시체검안서를 보고 부검을 결정한다. 그런데 사건현장에 나오는 검사는 거의 없다. 결국 부검은 검찰의 지휘를 받는 경찰의 몫이 된다. 반면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법의관이 사건현장에서 검시를 하고 검안서를 작성한다. 법의학자들은 “법의관이 처음부터 사건현장 수사에 참여해야 사망 원인과 사망 종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검시 전문가가 초기에 현장을 장악하면 의문사도 줄어든다는 것. 지난 6월,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은 의문사 발생률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건 현장감식 단계부터 검시 전문가의 참여를 의무화하는 법률을 제안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법안은 국무총리 산하에 검시위원회를 설치하고 수사기관이 변사체를 발견하는 즉시 검시관에게 통지해 수사에 참여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민간 법의학 전문기관을 설립한 한길로 법의학연구소 소장은 “죽음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부검의가 현장감식에 참여해야 한다”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현장에서 시체를 보고 나면 부검할 때 서류를 볼 이유가 없어요. 국과수에서 부검할 때 관련서류를 안 가지고 오는 경찰관도 있어요. 검찰에 보냈다는 겁니다. 심지어 사건현장에 가보지 않은 경찰관이 오는 경우도 있어요. 형사과 막내가 올 때도 있고요. 국과수 부검의들은 현장은 보지 못한 채 죽어라고 부검만 합니다.”
한 소장은 “법의관이 사건현장에서 시체를 볼 때의 직관은 과학”이라고 했다. “한번은 아내가 죽었다고 남편이 신고했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내가 죽어 있었다는 겁니다. 이 경우 남편이 ‘(아내가) 평소에 혈압이 높았고 당뇨가 있었다. 부검을 원치 않는다’고 하면 그길로 수사가 끝나버려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부인 몸에 멍 자국이 많았어요. 남편은 아내가 평소에 멍이 잘 드는 체질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누군가에게 맞은 자국이었어요. 죽은 지 하루가 지나면 색깔이 변하는 까닭에 이 분야에 지식이 없는 경찰은 잘 몰라요. 그래서 죽은 사람의 옷을 조사해봤어요. 짐작한 대로 피 흔적이 남아 있더군요. 입 안은 멍들어 있었고요. 십중팔구 누군가에게 맞아서 죽은 거였어요. 나중에 남편이 자백을 했다더군요. 술 먹고 들어와서 아내를 팼다는 겁니다. 결국 그는 폭행치사로 구속됐지요.”
시체에 붙은 곤충을 우편으로 보내 한길로 소장은 “법의관이 현장을 보면 수사방향을 정확하게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일반 의사들은 ‘죽었다’는 사실만 알죠. 반면 법의관은 딱 보면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있어요. 부검을 해봤기 때문에 외형만 봐도 속을 파악할 수 있는 거지요.” 한 소장은 국내 유일한 프리랜서 법의관이다. 고려대에서 법의학 교수로 일하다가 국과수에서 부검의로 일했다. 하지만 2년이 채 못 되어 국과수를 박차고 나와 지난해 민간 법의학연구소를 개원했다. 1년 365일 부검만 해야 하는 시스템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현재 한 소장은 서울경찰청을 비롯해 서울시내 4개 경찰서와 계약해 경찰과 함께 사건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개업의라 사망진단서를 발급하고 검안서도 쓸 수 있다. 법의학 지식이 없는 일반 의사의 경우 검안서에 ‘사인미상’이라고 적지만 그는 자세한 분석을 곁들인다. 각 경찰서에서 한 박사를 애타게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교통사고에서 살인사건에 이르기까지 이제껏 500건이 넘는 사건에서 검안을 담당했다. 하지만 벌이는 시원치 않다. 1회 검안비용은 3만원. 연수입이 6000만원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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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장은 “법의관이 현장에서 검시할 수 있게 돼도 법의관 수가 모자라 사건현장에 일일이 출동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답답해했다. 국과수에 소속된 부검의가 고작 19명이기 때문이다. 이 인원으로는 서울시내 살인사건 현장조차 소화할 수 없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연간 사망자수는 약 24만명인데, 그중 타살과 사인불명이 3만6000명에 이른다. 국과수 관계자는 “사건 규모로 보면 부검의가 300명 이상으로 늘어야 한다”고 했다. 부검의가 300여 명이 되면 한 해에 4만여 건을 부검할 수 있다고 한다. 현재 국과수에서는 19명의 부검의가 한 해에 6000여 건을 부검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기에 부검의가 검시관으로 사건현장에 파견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윤외출 계장은 “과학수사는 경찰의 몫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법의학자를 비롯한 각 분야 전문가가 모두 현장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계장은 “산이나 들에 암매장된 변사체를 감식할 때에는 토양학자 곤충학자 등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사건현장 수사에 법의곤충학자와 토양학자가 참여하면, 잔인하게 훼손되거나 완전히 부패된 변사체라도 유골과 유품에 묻은 곤충과 토양을 분석해서 사망 추정시간 등 결정적인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는 것. ‘파리가 범인을 잡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국내 유일한 법의곤충학자인 문태영(고신대 생물학과) 박사는 “과학수사를 위해 정부 차원에서 법의곤충학 분야를 육성해야 한다”고 했다. “시체에 파리, 딱정벌레, 말벌, 개미, 거미 순으로 달려들어요. 파리와 딱정벌레만 해도 70종이 넘고 계절별로 달라요. 또 겨울철은 최저온도가 중요해요. 최저온도가 얼마냐에 따라 곤충분포가 달라져요.” 문 교수는 “지역별로 곤충이 다르기 때문에 도 단위로 법의곤충학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선진국엔 법의곤충학 박사가 많지만 우리나라엔 저밖에 없어요. 전공할 길이 없거든요. 전공한다 해도 미래가 보장되지 않아요. 감식반 형사들은 단기 코스로라도 법의곤충학 교육을 받아야 해요. 현장감식하는 걸 보면, 형사들 정말 무식해요. 전문적인 증거 채집 훈련을 받지 않아 곤충을 봉지에 한꺼번에 넣어버려요. 경찰이 현장에 들어가는 바람에 증거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어요.” 문 교수는 “국가 차원에서 예산을 따내 첨단장비를 갖춰야 하고 전문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웬만해선 (저를) 부르지 않아요. 갈 때까지 가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연락하죠. 현장에 가보면 단서로 삼을 만한 것들이 훼손돼 있어요. 보통 시체에 붙어 있던 곤충을 제게 우편으로 보내옵니다. 그런데 구더기는 오는 동안에 파리가 돼요.(웃음)” 지문 안 남기려 불 질러 8월31일. 서울경찰청 9층 회의실. “죄의식이 없으면 거짓말탐지기 반응이 잘 안 나타나죠?” “맞아요. 무식해도 안 나와요. 학력이 높을수록 반응이 잘 나타나요.” “우황청심환 먹고 했다던데….” “관계없어요. 가슴호흡, 배호흡, 땀, 혈압, 맥박을 세 번 이상 체크합니다.” 지난 6월 발생한 양천구 신정동 노상 살인유기사건에 대한 토론에서 오간 얘기다. 최근 서울시내에서 일어난 미제사건들을 전문가와 함께 풀어보는 일종의 대책회의였다. 신정동 사건은 26세의 여성이 공휴일에 병원에 간다며 집을 나간 뒤에 인근 초등학교 옆 노상에서 쌀 포대에 담긴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다. 3시간 동안 진행된 수사토론에는 관할경찰서 형사과와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직원, 국과수 부검의, 심리학자, 임상병리학자 등이 참여했다. 토론의 좌장격인 서울경찰청 주상용 수사부장은 오랜 수사경험을 통해 얻은 감(感)을 배제할 수 없다는 듯이 형사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릅니다. 살인사건 현장에는 직접증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육감을 발휘해야 해요. 자, 봅시다. 젊은 사람은 쌀 포대를 선호하지 않아요. 사체를 처리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준비를 했어요. 사체를 유기하면서 불필요한 행동을 했단 말이요. 게다가 죽은 사람한테 예우까지 갖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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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수사를 위한 이 토론장에서 단연 두각을 보인 분야는 범죄 프로파일링. 선진국에서는 일반화된 심리학 분야지만 국내에선 겨우 5년째다. 사회통계분석기법(SPSS)을 이용해 범행 시간대별로 범행과 범인 유형을 분석하는 일이다. 프로파일러로 일하는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범죄분석팀 권일용 경사는 토론이 끝날 즈음 이런 얘기를 했다. “증거가 부족하면 프로파일링으로 범인을 추론할 수밖에 없어요. 요즘은 현장에 증거가 거의 없어요. 유영철 사건 이후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 불 지르는 추세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외국자료까지 참고합니다. 전문 프로파일러가 많이 배출돼야 해요. 여러 명이 추측해야 오차범위를 줄일 수 있거든요.” 서울경찰청 현장감식전문가 박상선 반장은 미제사건 토론을 마치고 나오면서 기자에게 “과학수사계에 이공계열 출신 전문가를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화학 생물학 보건의학 등 이공계열 인력이 필요해요. 현장에서 지문을 채취할 때는 각종 화학약품이 쓰입니다. 화학을 전공했다면 학습효과가 빨라요. 이젠 감식기법도 자꾸 개발해야 해요. 어깨너머 배운 실력으론 안 돼요.” 첨단장비를 갖추는 것도 절실한 과제다. 이어지는 박 반장의 얘기. “감식은 ‘찾고’ ‘담는’ 일입니다. 일선 경찰서에서는 최첨단 등(燈)을 꿈도 못 꿔요. ‘가변광선기’를 이용하면 불빛의 파장에 정액이나 혈흔, 족적이 다 보여요.” 법의학자들은 “변사체 현장을 뛰는 감식반 직원들은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직원들의 건강이 특별한 원인 없이 나빠지는 것은 감식 업무 때문입니다. 오래된 시신에는 부패가스와 균, 해충이 많거든요. 또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살포하는 화학분말과 가스가 건강에 해로워요. 그러니 하루 빨리 안전장구를 갖춰야 합니다.” 거짓말탐지기 요원의 하소연 서울경찰청 현장감식반에서 4년째 범죄자 몽타주를 그리고 있는 주은정 경사는 “몽타주는 이미지에 불과하다”면서 “나이는 나타낼 수 있지만 환경에 따른 이미지 표현엔 한계가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똑같은 40대 여성이라도 서울 시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부와 시골 주부는 다를 수밖에 없는데 경찰청에서 쓰는 몽타주 프로그램으로는 농촌형, 도시형밖에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시형은 하얗게, 농촌형은 까맣게 표현된다고 한다. “완전히 딴판으로 나올 수 있어요. 피해자들은 대체로 겁에 질려 공황상태에서 순간적인 이미지만 기억하거든요. 데이터 구축이 시급해요. 선글라스, 머리스타일 등 유행에 맞는 데이터가 없어서 제가 직접 디지털 카메라로 찍거나 인터넷에서 찾아 포토샵 작업을 해놓아요.” 지난 6월1일, 경찰청은 과학수사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과학수사대상 제도를 신설했다. 법의학 법과학 과학수사 세 분야에서 각각 한국의 과학수사 발전에 공헌한 사람과 단체를 선정해 상을 주는 제도다. 과학수사 분야 수상자의 경우 경감까지는 특별승진 혜택도 있다. 그런데 과학수사대상 공모에 응모한 수사관은 겨우 6명에 그쳤다. 취재과정에 만난 과학수사계 직원들은 “첨단장비 예산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과학수사의 중요성을 외치기만 할 뿐 그것을 뒷받침하는 여건 조성엔 무관심하다는 불만이다. 과학수사계 업무는 수사를 지원하는 보조업무쯤으로 인식되고 직원들은 승진에서도 뒤처지는 편이라고 한다. 서울경찰청 현장감식반 관계자의 탄식이다. “과학수사가 제대로 안 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우선 부실한 인력구조입니다. 사람도 모자라는 데다 승진이 잘 안 되는 음지 부서이다 보니 우수한 사람이 오지를 않아요. 공조수사가 안 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공(功) 싸움하고 서로 책임을 미루느라 일선 경찰서간 미제사건에 대한 협조가 잘 안 돼요. 최근 광역수사단을 발족하기로 한 데는 이런 이유도 있어요.” 거짓말탐지기 수사는 수사관의 심리수사능력과 첨단장비가 결합된 과학수사의 결정체다. 현재 경찰이 보유한 거짓말탐지기는 총 36대. 일반 형사범뿐만 아니라 교통사고 조사에도 사용된다. 최근에는 7대를 아예 교통사고 조사 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거짓말탐지기 조사관으로 일했다는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조호남 경사의 하소연이다. “무엇보다 인력이 달려요. 요즘은 범행을 부인하는 경우가 많아 거짓말탐지기 조사 수요가 늘고 있어요. 하루에 4∼5건씩 요청을 받는데 1∼2건밖에 처리하지 못해요. 한 건에 적게는 한두 시간에서 길게는 네 시간씩 걸리는데, 대당 2500만원짜리 기계에 한 사람씩 붙어 있어야 합니다. 서로 안 하려 하죠. 수당도 못 받는 데다 온종일 구석진 방에서 일해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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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지난 한 해 동안 6분54초마다 폭력사건이, 17시간마다 살인사건이, 6시간마다 강도사건이, 5시간15분마다 강간사건이, 15분24초마다 절도사건이 접수됐다. 살인사건의 경우 서울시내에서 접수된 것만 215건이다. 서울·경기에서 발생하는 5대(살인 강도 절도 폭력 강간) 강력사건은 연평균 14만8000건에 이른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부천 여중생 피살사건,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사건 등 아직 범인이 검거되지 않은 사건이 쌓여 있다. 이 사건들의 경우 특정한 단서가 없고 직접증거가 없어 지역민을 대상으로 유전자감식조사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검찰과 경찰은 ‘유전자 감식정보의 수집 및 관리에 관한 법률’안을 법무부에 제출했다. 유전자감식정보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은 DNA 분석기술을 이용해 강력범과 같은 특정 인물군의 감식정보를 관리함으로써 단서가 없는 미제사건 용의자를 검색할 때 활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입법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시민단체들이 유전자 정보은행(이하 유전자은행)을 개인정보 유출이라며 반대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검찰은 “유전자정보는 개인 식별력만 있을 뿐 바코드로 처리되기 때문에 인권침해에 대한 우려는 오해”라고 설명했다. 수형자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무고하게 용의선상에 올라가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유전자은행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연쇄살인범 잡은 유전자은행 유전자은행은 유죄가 확정된 범죄자의 혈액이나 구강내 상피세포 등에서 추출한 유전자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는 것. 이 시스템이 완성되면 사건현장에 떨어진 머리카락과 침에서 DNA를 추출해 정보은행에 등록된 유전자와 비교함으로써 용의자를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와 인권단체에서는 “사건현장을 지나가다 뱉은 침 때문에 살인범으로 몰리지 않겠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전과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하는 것도 인권침해라는 주장도 있다. 검찰과 경찰의 해석은 다르다. 공판중심주의에서는 머리카락이나 침이 사건현장에 있었다 해도 용의자가 될 뿐 진범으로 낙인찍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대검 유전자감식실 이승환 연구관의 얘기다. “DNA라고 해도 모든 정보가 담겨 있지는 않아요. 97%는 ‘정크 DNA’로 아무런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아요. 나머지 3% 안에 원하는 정보가 담겨 있어요. 유전자은행은 개인의 질병이나 성격을 담는 게 아닙니다. 개인의 주민등록번호에 준하는 식별번호와 DNA 아이디가 부여돼요. 무의미한 숫자만 나열돼 있기 때문에 누군지 알 길이 없습니다.” 국과수 유전자분석실 한면식 과장은 “유전자은행은 과학수사의 기본”이라고 했다. 현재 국과수 유전자분석실에 있는 유전자는 2000년 이후 미해결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3000여 건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유전자은행은 범죄자 200만명의 유전자 정보를 갖고 있다. 영국의 유전자은행에는 270만명 이상의 범죄자와 24만건 이상의 미제사건이 수록돼 있다. 이를 통해 9만4000여 건의 사건에서 용의자를 가려내 범인 검거율이 23%에서 43%로 올랐다고 한다. “지문으로는 신원확인밖에 못해요. 그래서 지문은 점차 효율성을 잃고 있어요. 범인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구하는 것이 바로 DNA분석기술입니다. 특히 강간범을 검거하려면 유전자은행의 도움이 꼭 필요해요.” 성폭력 범죄는 한 해 평균 25만건이 발생한다. 대략 하루에 685건, 한 시간에 29건, 2분마다 1건씩 발생하는 셈이다. 한 해 동안 접수되는 성폭력피해상담만 해도 2400여 건에 이른다. 일선 경찰서 형사과 관계자는 “과학수사를 위해서는 먼저 사회 전반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연간 24만3000여 명이 사망해요. 그중 변사자는 2만6000여 명입니다. 변사자 가운데 타살로 사망하는 사람이 800여 명입니다. 인권단체에서는 ‘사회보호법을 폐지해야 한다’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 ‘유전자 정보은행은 안 된다’고 하는데, 이런 풍토에선 과학수사 수준이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2001년 미국에서 잡힌 게리 리지웨이는 세계 1위의 연쇄살인범입니다. 1983년 미국의 성싱턴주 켄트 지역 그린강 주변에서 48구의 시체가 발견됐을 때만 해도 범인이 잡히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죠. 영구 미제사건이 될 뻔했어요. 그런데 현장감식을 통해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DNA를 채취해 경찰서에 보관했습니다. DNA 분석기술이 도입된 2001년, 범인과 리지웨이의 DNA가 일치한다는 게 밝혀졌어요. 유전자 정보은행이 왜 필요한지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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