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꽃’ 전주장 되살려낸 대한민국 소목명장 1호 소병진
기술이 예술이 된 ‘쟁이’의 뚝심과 도전 한평생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소병진(61)은 좋은 가구를 ‘음양(陰陽) 화합’이라고 했다. 남녀가 꽉 껴안듯 서로 다른 재질의 목재가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것. 음양이 조화되면 남녀가 서로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나무의 화합 역시 제대로 이루어져 ‘한 살’(한 몸)이 되어야 비로소 아름다운 가구로 완성된다고 했다. 딴은 그렇다.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나무에 홈을 파서 끼워 넣는 결구법으로 만드는 우리 전통가구는 못이라는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무끼리 서로 얽혀 하나가 된 결과다.
그러나 나무의 화합이 늘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두 나무가 서로 파고들어 하나가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얽히고 나서도 뒤틀어지기 일쑤다.
“전주장(全州欌)을 만드는 데 꼬박 2년이 걸립니다. 서로 다른 재질의 나무를 깎아 아교로 붙인 뒤 꽁꽁 묶어 여섯 달을 두고, 그것을 반으로 가른 다음 매끄럽게 다듬고 잘라낸 뒤 또 여섯 달을 둬요. 이 조각들로 장이든 농이든 완전히 조립한 뒤에도 여섯 달 이상 묶어두고 사계절을 나도록 합니다. 계절에 따라 팽창하고 수축하는데, 그런 과정을 다 견디고 나야 온전히 한 살이 돼요.”
실제로 그가 만든 가구를 손으로 만져보면 하도 매끄러워서 이음새를 느낄 수가 없다. 남녀가 처음 만나 갈등 속에서 서로 맞춰가는 과정처럼 나무 역시 이렇게 완벽한 한 살이 되기까지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시간은 본격적으로 가구 제작에 들어가는 기간만 따져 2년이지, 원목을 들여와 노지에서 5,6년씩 비바람 맞혀 진 빼고 그 나무를 크게 켜서 다시 3년여 건조시키는 과정까지 합하면 10년 세월은 좋이 걸린다. 그리고 그 나무 수명까지 헤아려보면 시간은 100년 단위, 때로 1000년 단위로 넘어간다. 전주장의 매력은 앞면에 아름다운 나무무늬를 대칭으로 배열하는 것인데, 주로 느티나무와 먹감나무 무늬를 이용한다. 특히 잔물결 치듯 아른거리는 용목(龍目) 무늬를 얻으려면 500년 이상 되는 느티나무를 만나야 한다.
“용목은 오래된 느티나무가 고사(枯死)할 때 생깁니다. 사람 몸의 암덩이처럼, 종양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느티나무는 속으로 용틀임을 하며 세포가 말라가는 겁니다. 죽음과 맞서 싸운 나무의 흔적, 그것이 바로 용목이랍니다.”
수명을 1000년으로 치는 느티나무가 자연사, 즉 고사하면서 만들어낸 용목을 사용했다면 그 가구는 만드는 데 2년이 아니라 1000년이 걸린 셈이다. 한 나무가 가구로 다시 태어나기까지, 한 장인과 나무의 인연이 이렇듯 길고 무겁다.
열다섯에 공방에 들어가 2년 반 만에 기술 익혀
그가 나무와 인연을 맺은 것은 어쩌면 집안 내림인지도 모른다. 그의 고향 전북 완주군 용진면 녹동마을은 소(蘇)씨 집성촌이자 목수고을로도 유명했다. 특히 그의 할아버지 소진동과 문중어른 소팔룡은 이름난 대목이었다. 당시만 해도 농사를 지으며 목수도 겸했기 때문에 그의 할아버지는 일꾼을 스무 명이나 거느린 지주였는데 광복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식 열한 명을 뒷바라지하느라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지는 전주에서 전매국(당시 전매청)에 다녔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주에서 나서 자랐어요. 그러다 아버지가 직장을 잃으면서 낙향하게 되었고, 저도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고향마을로 돌아와서도 농사를 짓는 둥 마는 둥 하던 아버지는 목수일 한답시고 일 년씩 외지로 떠돌기 일쑤였고, 칠남매의 생계는 고스란히 어머니 몫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철따라 비단장사, 새우젓장사, 생강장사, 엇갈이장사(바구니를 이고 다니며 파는 장사)까지 하며 자식을 키워냈다.
“제가 칠남매 중 허리, 딱 중간이에요. 형은 선반일 하러 공업사에 취직했고 저 역시 어차피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어려울 바에야 얼른 기술을 배워 동생들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찍 철든 중학교 1학년생 소병진은 2학년이 되자 더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2학년이 끝나가도록 그를 기다려주었지만, 그는 가구공방에 다니는 8촌형 소병식을 따라 ‘전주중앙가구’에 들어간다. 목공부 소목반에 들어간 그때 그의 나이 열다섯, 1960년대 중반이었다.
“전주중앙가구는 소목장인 김석환 선생님이 설립한 공방인데 한강 이남에서는 제일 알아주는 곳이었어요. 김석환 사장은 그 자신 뛰어난 장인인데다 경영도 잘하는 사업가였습니다. 겨울이면 직원들이 오자마자 일할 수 있도록 미리 불 피워놓고 기다리는 사람이었어요. 또 조금이라도 잘못된 가구는 그 자리에서 부숴버릴 정도로 목수들의 실력을 키우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때 김 사장 밑에서 일한 사람치고 솜씨 없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도 다들 그 기술로 잘살고 있죠.”
보르네오 같은 공장제작 가구가 보급되기 전이던 당시 그곳에서 만드는 가구는 옛 방식대로 모두 손으로 만들되, 모양은 개량된 주택에 맞춘 신식 농이었다. 무엇보다 손기술, 곧 ‘솜씨’가 중요한데, 철저히 도제식이어서 기술을 배우려면 심부름과 청소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는 남보다 빨리 기술을 익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20리 길을 오가는 출퇴근 시간을 아끼려고 자주 공방 작업대에서 잠을 자고 아교 끓이는 연탄불에 밥해 먹으면서 남들은 10년은 돼야 배운다는 기술을 2년 반 만에 습득했다.
작업실에서 - 공부하고 싶은 욕심에 배운 한문 실력에 그의 솜씨가 더해져 어느덧 전각이 취미가 되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팠다.
이유 있는 은메달에 대한 씁쓸한 기억
‘기술’은 소병진의 특기이자 모든 것이다.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기술’이라는 한 낱말로 남을 것이다. 교복에 모자를 쓴 또래 학생들을 보고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지만, 기술이 곧 인생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는 행운아다. 처음 들어간 공방에서 솜씨 좋은 장인들을 만나 기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고, 배운 즉시 써먹을 수 있을 만큼 가구가 잘나가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기술을 배우고 계발해나가는 그 자체를 정말로 좋아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한 달에 겨우 한두 번 쉴까 말까 한 그 시절을 회상하는 그의 얼굴과 말투에 그토록 자랑스러움이 묻어날 리가 없다.
“노는 날 목욕하고 이발하고 영화 한 편 보면 기분 최고였지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잘 해나가고, 그 보답마저 바로바로 주어질 때, 사람은 미친 듯이 일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맞는 잠깐의 휴식이란 꿀처럼 달콤했으리라. 김석환 사장과 ‘백골반’(칠하기 전 원목 상태의 가구를 백골이라고 한다)의 어느 여름휴가 기념사진을 보여줄 때도 그의 얼굴은 영광스러운 순간을 회상하는 승리자의 표정이었다. 사진에는 김 사장을 비롯해 최규환, 이해민, 그리고 소병진과 그의 제자 서영길까지 차례로 번호가 매겨져 있다. 그의 기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이어지는지 계보를 그리고 싶었나보다.
소목 일에 몸담은 열다섯 살 이후 기술은 그의 인생에서 화두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기술이 곧 돈이고 독립이었다. 기술자가 되면 사장에게 월급을 받는 게 아니라 도급공으로서 만드는 만큼 돈을 받기 때문이었다. 기술을 빠르게 익힌 어린 그에게 김 사장은 비싼 공구 일습을 사주며 그를 기술자로 대접해주었다.
“남보다 더 많이 일했습니다. 만드는 만큼 돈을 받으니, 기술자도 좋고 사장도 좋아라 했지요. 일거리는 늘 쌓여 있었으니까요.”
새마을운동이 한창 벌어져 농촌집이 개량되고 양복을 입게 되면서 옷을 걸어두고 이불을 넣어두는 새로운 장롱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던 시기였다. 그때는 약혼하면 장롱부터 맞추러 왔다. 가장 큰 혼수품이었던 만큼 뭉칫돈이 들어왔고, ‘농방쟁이’(가구 기술자)라면 누구든 딸을 주려고 하는 ‘잘나가는’ 신랑감이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단순한 돈벌이 이상이었다. 늘 자기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도전해보는 데 서슴지 않는 그는 1971년 기능올림픽이 전주에서도 처음 열리자 가구제작 부문에 참가해 은메달을 받았다.
그런데 왜 금메달이 아니고 은메달일까?
“전주공고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심사위원 등 대회와 관련된 인사들이 죄다 전주공고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입디다. 금메달도 전주공고 조교가 차지했고….”
그는 지금도 억울한 표정이다. 기술에서 최고가 되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로서는 우선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것이고, 안 그래도 학교를 중퇴한 그이기에 더욱 비애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때 받은 상처 때문인지 그 자신 각종 대회와 공모전의 심사위원이나 시험 출제자가 된 오늘날, 심사만큼은 엄격하게 해 과거 자신처럼 억울한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
“그때 참가자가 스물네 명이었는데, 어쨌든 학교 출신 빼고 사회인 가운데서는 제가 최고였잖습니까. 그 자부심만큼은 대단했지요.”
은메달을 목에 걸고 시가행진까지 했던 그날 이후 그는 이 일이 자신의 길이라는 걸 확신했고, 정확히 21년 뒤인 1992년 드디어 가구제작 부문에서 명장 1호가 되었다. 그것도 마흔을 갓 넘긴 최연소 명장이었다. 어린 시절 그 확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전주중앙가구에서 기술자로 한창 날리던 시절, 그는 인생의 전기를 맞게 해준 또 한 사람의 은인을 만난다. 김 사장이 새 디자인을 계발하기 위해 서울에서 초빙한 소목 유춘봉이 그 은인이다. 남원 출신인 유춘봉은 당시 이름난 장인으로 제자를 세 명이나 거느리고 전주로 내려왔는데, 공방에서 함께 일하던 소병진을 지켜본 유씨가 어느 날 그를 부르더니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공장에서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걸 직감했지요.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쉬는 날 음료수를 사들고 유 선생님이 머물던 도토리골로 찾아갔더니 대뜸 저더러 ‘자네는 돈을 벌랑가, 기술을 배울랑가?’ 물으시더군요. 그래, 기술을 배우겠다고 했지요.”
유춘봉은 소병진이 전북에서는 더 이상 배울 기술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가능성 있는 젊은이가 전북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며 “기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서울 동일가구로 가야 한다”고 충고했다.
“동일가구라면 일본에 수출까지 하는 동양 최대의 가구공장이었습니다. 농방쟁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곳이었지요.”
유춘봉은 동일가구에 근무하는 후배에게 소병진을 소개해주기로 했고, 소병진은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김 사장에게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운을 뗐다.
“제가 일 좀 더 배워야겠다고 했더니, ‘네가 배울 게 뭐 있냐?’며 다른 공방에서 저를 빼가려는 줄 알고 돈을 더 올려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저는 사장님 배신 안 합니다. 동일가구에 갑니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네가 어떻게 거길 가?’ 그러기에 유 선생님 얘기를 할 수가 없어서 기능올림픽 메달 덕택에 취직이 됐다고 얼버무렸죠.”
곧 마음이 풀린 김 사장은 “그러면 3년만 배우고 오라”며 비로소 연장통을 내주었다. 목수에게 연장통은 신분증이나 마찬가지다. ‘마누라는 빌려줘도 연장통은 안 빌려 준다’는 것이 목수세계의 불문율일 만큼, 연장은 목수의 존재 조건이기도 하다. 목수는 연장이 있어야 목수인 것이다.
“설마 마누라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지요. 솜씨 나쁜 목수가 연장 탓한다고 하는데, 사실 연장이 정말 중요해서 나쁘면 탓할 만도 합니다.”
동양 최대 가구공장에서 “저런 건 내 제자도 더 잘 만들어”
그는 소중한 연장통을 싣고 제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대한민국 최고 목수가 되자’는 굳은 결심 하나로, 아들과 떨어지지 않으려 울고불고 매달리는 어머니를 외면하고 올라온 서울. 그는 천호동까지 택시를 타고 동일가구로 갔다. 동일가구는 동양 최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3만 평 부지에 제재소가 두 군데나 있고 종업원이 500명, 수위만도 열명이나 되었다. 입구에서 사무실까지 가는데 연장통을 손수레에 실어 한참 가야 했다(목수의 연장통은 큰 여행용 가방과 맞먹는 크기다) .
“별천지에 온 기분이었죠. 가구제작 부문도 국내반, 청와대반, 수출반이 따로 있었는데 계장으로 있는 유 선생님 후배가 저를 보더니 어리니까 국내반으로 데리고 갑디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드는 걸 보니 시시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런 일은 제 제자도 이보다 더 잘합니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이번엔 청와대반으로 데리고 가더군요. 청와대에서 쓸 집기를 제작하는 곳인데 그곳에선 맨 의자 같은 것만 만들더라고요.”
실망한 그는 “외람되지만 이런 기술 배우려고 도급일 접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하고선 제자에게 “궤짝(연장통) 실어라, 돌아가자!” 하고 외쳤다. 그의 반응에 놀란 계장은 사무실로 들어가 한참 있다 나오더니 드디어 일본 수출반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그는 ‘백골’을 보고 가슴이 졸아들었다. 젊은 그의 눈에는 죄다 할아버지로 보이는 흰머리의 장인들이 만든 백골은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들 만큼 훌륭했다.
“전국 최고 솜씨들이 만든 것이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일본 사람들은 손맛이 들어간 가구만 찾기 때문에 모두 손으로 만든 것이었어요.”
열 명 남짓한 수출반에 합류한 그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원목에 대해 더 많이, 더 확실히 알게 되었고, 도면에 따라 제작하는 시스템을 익혔다. 그전에는 모든 작업이 그의 머릿속에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위에서 내려준 도면에 따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구 디자인에 눈을 뜨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는 디자이너를 붙잡고 시시때때 술도 사고 밥도 사면서 가구도안을 배웠다. 그런 면에서 동일가구라는 일터는 젊은 소병진에게 확실히 더 넓은 새로운 세계였고, 그곳에서 쌓은 경험이 훗날 아름다운 전주장을 되살리는 데 큰 몫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유춘봉이라는 이름 석자가 나올 때마다 ‘은인’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젊은이가 더 크게 피어나도록 넓은 세계로 이끌어주는 그런 눈 밝은 이가 없었다면 그는 그저 좋은 기술로 돈 잘 버는 농방쟁이에 머물고 말았을지도 모르니까.
다시 전주로, 그러나 사업에 실패하고
“동일가구에서 3년 정도 일했을 때, 뒤늦게 영장이 나왔습니다. 여기서도 처음에는 연장통을 내어주지 않기에 영장을 보여주며 복무 마치면 다시 오겠다고 하니 겨우 내주더군요. 평발이라 고향 전주에서 방위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근무가 끝나고 서울로 올라가지 못했죠.”
가끔 그는 그때 서울로 다시 갔어야 하는데, 그랬더라면 아마 공장장은 되었을 테고 좀 더 넓은 세계에서 살지 않았을까, 후회할 때가 있다. 그러나 외딴 사택에서 홀로 사는 서울 생활은 적적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서울 올라갔을 때 그토록 애달파했던 어머니에게 둘째아들 병진은 든든한 기둥이자 사랑스러운 효자였다. 그런 어머니와 동무들, 동료들이 있는 푸근한 고향의 품을 차마 떠나지 못한 그는 중앙가구점과 다시 인연을 이어갔다. 어찌 되었건 떠나기 전 김 사장과 한 3년 약속을 제대로 지킨 셈이었다.
“이번에는 2년치 삯을 미리 받고 계약을 맺었어요. 그리고 제 공방을 따로 차려 중앙가구점에 납품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끝나갈 무렵까지 계속 잘나갔었죠.”
그러다 중앙가구점이 문을 닫는 사태가 생겼다. ‘방위성금’을 잘 내지 않아 위에 밉보인 김 사장은 결국 사업을 접게 되었고, 그 결과 납품처가 사라진 소병진은 직접 가구매장을 내게 되었다.
“전주 중앙동 제일 번화가에 큰 가구점을 마련했습니다. 이제 내가 만들고 내가 파는 사장이 된 거죠. 처음에는 장사가 제법 됐는데, 1980년대 들어 가구에 특별소비세니 뭐니 해서 장사가 점점 잘 안되기 시작하더군요.”
‘결혼은 사장이 되고나서 하겠다’고 결심한 대로 결혼하고 아이까지 생겼는데, 장사는 어려워지고 빚은 쌓여갔다. 어쩌면 그는 뼛속 깊이 장인이었지, 사업은 그의 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빚만 안은 채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마침 공장제작 가구가 쏟아져 나오는 시기였고,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던 동료들도 인테리어 사업으로 방향을 바꾸거나 한창 붐을 이루던 집짓는 일에 뛰어들어 문이나 창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아예 직업을 바꾸는 이도 있었다.
“살기 어려운 시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저도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한 3년 있다 오려고 했어요. 목공부 작업반장으로 가면 1억원은 만들겠다 싶어 서류까지 다 준비했는데, 떠나기 직전 아내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여기서 다시 해보자며 매달렸습니다.”
아내의 만류로 주저앉게 된 그는, 다시 가구에 매달렸고 마침내 명장 1호가 되었다. 그리고 명장이 되자마자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바로 전주장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전주장에 ‘꽂혀’
그가 전주장을 처음 만난 것은 동일가구에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인사동에 동일가구 전시장이 있어서 휴일이면 인사동에 곧잘 나갔는데, 어느 날 한 골동품 가게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특별한 장을 만나게 된다.
“느티나무로 만든 장이었는데, 자그마하니 아주 예쁘더군요. 전주장이라고 써 있기에 직원에게 물어보니 18세기 후반부터 전주 지방에서 쓰던 농이었는데 조선이 망하면서 맥이 끊어져버렸대요. 귀가 번쩍 뜨이면서 이게 바로 내 농이다 싶더라고요.”
그때 가슴에 새겨놓았던 전주장을 그는 잊지 않았고, 전주로 내려온 뒤로 전주장을 찾는 작업을 시작했다. 전주장이 있는 곳이라면 전라도와 서울 가리지 않고 다니며 박물관과 인사동 골동품 가게는 물론이고 개인집까지 찾아가서 사진을 찍고, 사진을 못 찍게 하면 치수를 재어왔다.
“나중에 보니 우리 고향마을에도 더러 있더라고요. 전주장은 하나도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이 없어요. 왜냐하면 집으로 목수를 불러서 그 집의 방 크기와 쓰임새에 맞게 만들도록 했으니까 같은 게 나올 수가 없지요. 그만큼 사람에게 맞춘 인간적인 가구란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전주장은 다른 지방 장보다 크기가 작은 편이고, 장 안에 비밀문갑이 달린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잘살던 전주 지방 안방마님들이 귀중한 패물이나 문서를 갈무리하기 딱 좋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만큼 실용적이면서도 외장은 화려하고 기품이 있어, 과연 전주장이 조선시대 후기 우리 전통가구의 결정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전주장의 가장 큰 비밀은 특이한 제작기법에 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전주 한지를 넣어 붙이는 적층기법으로, 가령 세 종류의 나무를 붙여 복판(가구 앞면의 틀에 끼워 넣는 넒은 면)을 만들 때 그 판면과 판면 사이에 종이를 배접해두는 방법이다.
“계절에 따라 습도와 온도가 달라지고 또 난방으로 가구 판재가 조금씩 수축하고 팽창하면서 갈라지는 폐단을 막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이지요. 우수한 우리 닥나무 종이가 습기와 건조의 격차를 조절해주는 겁니다. 이 기법으로 특허까지 받았답니다.”
그런데 이 기법은 옛 장수의 투구와 갑옷을 종이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우리 전통 종이가 매우 질기고 변함이 없으며 나무와 아주 잘 결합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활용한 것이다. 이렇게 그의 창의력과 기술로 재현해낸 전주장은 그 결과 원래 전주장보다 더 튼튼해졌다.
또 전주장의 화장면(앞면)에 들어가는 길상 문양이나 장석 하나까지 연구와 검증을 거쳐 정통 그대로 살려내는 데 주력하는 그는 농과 장의 제작법을 고루 응용한 전주장 특유의 까다로운 짜임새대로 일일이 다 짜 맞추고, 장석은 너무 번쩍거리지 않게 밀랍 처리하고, 진흙으로 색을 내고 동백기름으로 꼼꼼하게 마무리한다. 이 아름답고 까다로운 전주장을 하나하나 손으로 만드는 데 그는 그동안 쌓아온 기술과 공력을 남김없이 쏟아 부었다. 그렇게 해서 재탄생한 전주장이 뛰어난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명품이자 예술품이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맥이 끊긴 전주장을 이렇듯 충실히 되살린 그는 한편으로 전주장을 알리는 길에 나섰다. 이미 명장 칭호를 받은 그가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한 것도 그 때문이다. 10년에 걸쳐 전주장을 연구하고 재현해나가는 동안 그는 해마다 출품했는데, 처음에는 번번이 낙선했다.
“전문가들도 전주장을 잘 모르니 상을 받기 어려웠던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꾀를 내었지요. 전주장의 유래와 역사 등을 적은 설명문을 함께 제출했더니 관심을 갖고 보아주기 시작하더군요.”
2001년 처음 선(選)에 들기 시작해 이듬해 장려상, 2003년에는 문화예술진흥원장상을 거쳐 마침내 2004년 대통령상을 받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전주장이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인사동 라메르 전시관에서 첫 전시회를 열고서다.
“대통령상을 받은 그해 라메르에서 초대전 제의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전시할 작품이 없는 겁니다. 전주장은 많이 만들어야 한 해 대여섯 채밖에 못 만드니 여분의 작품이 없었어요. 초대전 제의받은 그날부터 팔지도 못하고 만들기 시작해 5년 동안 만든 것을 모아 겨우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 사이 빚은 1억원이 되었지만 ‘천년의 꽃’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 전시회로 그의 명성과 전주장의 인기는 단번에 치솟았다. ‘소병진’이라는 이름이 곧 ‘천년의 꽃’ 용목으로 만든 전주장을 뜻하는 ‘브랜드’가 된 것이다. 이제는 코엑스에서 전시를 하고나면 전국의 심미안들이 그에게 연락을 해온다. 일 년에 몇 채 만들지 못하지만, 일 년에 몇 채만 팔아도 이제 작업을 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전주장과 시작한 제2의 인생, 아직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그가 전주장에 빠져 있는 사이 그의 아내는 백화점에서 옷을 팔아 두 아들을 키워냈다. 다른 동료들처럼 인테리어 사업을 하거나 잘 팔리는 보통 가구를 제작했더라면 손쉽게 돈을 벌었을 테지만 그는 굳이 어려운 길을 택했고, 그 때문에 고생한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전주장에 매달려 사느라 돈을 잘 벌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목수는 늘 목재를 확보해두어야 하기 때문에 나무 사는 데 돈을 많이 쓰게 됩니다. 그러니 빚이 생기고, 아직도 다 못 갚았네요.”
그가 확보해둔 목재를 계산에 넣는다면 그의 재산은 엄청나다. 일제강점기 백두산 적송을 베어 만든 관공서 건물을 헐어 나온 고재(古材)는 이제는 구할 수도 없는 재목이고, 몇 백 년 된 느티나무, 화장판을 장식할 먹감나무, 전주장의 울거미(틀)로 쓸 참죽나무 등도 기회가 될 때마다 사서 모아두었다. 이 나무들은 지금 목재보관소와 제재소 마당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몇 년째 진을 빼고 있고, 그의 공방 입구에는 그 나무들을 켠 편편한 목재가 켜켜이 쌓인 채로 건조 과정에 있다.
“제 한평생 다 쓰고도 남을 양이지요. 제 아들까지 쓰고도 충분할 거예요. 본래 목수는 스승이 준비한 목재를 쓰고, 자기가 마련해둔 나무는 제자가 쓰게 됩니다. 나무가 충분히 마르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옛 건물에서 나온 고재가 좋답니다.”
그는 이미 전주장을 이을 제자를 키워냈다. 둘째아들 소중한씨가 대학에서 가구디자인을 전공하고 일본 유학까지 마쳤다. 아들이 본격적으로 가구 일을 시작하게 될 때 그는 재래식 공방을 현대식으로 바꿔 기계로 할 수 있는 과정은 기계화해 가격단가도 낮출 예정이다. 지금 그가 공들여 만든 전주장은 삼층장이 2500만원 선으로, 명품의 가격으로는 결코 과하지 않으나 일반인이 사기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저야 계속 손으로 만들겠지만, 일반 보급형 전주장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이 전주장을 쓰면 좋잖아요. 보급형은 제가 손으로 만드는 것의 반값이면 되지 않을까요?”
아직 청년 같은 생기가 감도는 소병진의 얼굴은 언뜻 보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전통가구 장인이라고 해서 후줄근한 차림새도 아니다. 오히려 전주에서는 알아주는 멋쟁이로, 그가 디자인해 맞춰 입은 양복이 전주 남자들 사이에 크게 유행한 적도 있다.
“일가 중에 양복점하는 이가 있었는데, 여름이면 아교냄새가 몸에 배는 목수 일하다가 그이의 양복점에 들어서면 어쩌면 그리 깔끔하고 멋져 보이던지, 목수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패션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을까요?”
아직도 해보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꿈이 많은 그는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청년처럼 뛰고 있다. 여전히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고, 우석대학교와 부여 전통문화대학 등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한편 각종 공모전과 미술대전의 심사위원과 기획위원, 여러 협회의 이사 등등 수많은 일과 감투를 감당하며 바쁘게 산다. 공부를 중간에 그만둔 아쉬움에 오래전부터 한문 붓글씨를 배워왔고 지금은 취미로 전각도 하는데, 그 사이 또 동국대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방송통신대학까지 졸업했으며 지금도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공부가 무르익으면 전주장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해낼 작정이다. 그래서 언젠가 전주장 전문 박물관을 만들어 선배들에게 물려받은 옛 목공도구와 전주장의 자료를 한데 모아 전시하고, 누구든 전주장을 배울 수 있도록 공방도 마련하는 게 꿈이다.
그의 인생을 돌아보건대, 그는 아마 이 꿈도 이루지 싶다. 그는 꿈을 이루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뚜렷한 목표와 이를 향해 나아가는 나날의 노동, 현명함과 함께 어려운 조건에도 굴하지 않는 끈기로 이루어진 것이 성공이라면, 그가 사는 방식이 꼭 그렇다.
<전주장의 화장면 울거미 짜맞추기 과정>
● 가구의 앞면 틀(울거미)은 참죽나무와 적송 고재를 붙여 만든다. 두 목재를 아교로 붙인 다음 끈으로 꽁꽁 묶는다.
붉은 겉면이 참죽나무다.
● 끈으로 묶은 다음 쐐기를 박아 더욱 단단하게 조여준다. 이틀이 지나면 아교는 완전히 붙지만 이 상태에서 여섯 달을 둔다.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 끈을 풀고 반으로 타기 위해 먹금을 넣는다. 먹통의 줄을 튕겨 금을 표시하지만 최근에는 줄그므개로 금을 긋기도 한다.
● 조립할 조각 모양대로 45도 자를 대고 금을 긋는다.
● 조각도, 끌 등으로 끌구멍을 낸다.
● 그어놓은 금대로 잘라낸다.
● 홈에 잘 끼워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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