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한(漢)고조(高祖) 유방(劉邦)의 음주기

醉月 2010. 8. 16. 13:49
"걸출한 인재가 있어 천하를 얻을 수 있다"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중원의 패권을 놓고 벌이는 전쟁은 전술, 지략, 사람을 쓰는 법 등에서 그 흥미가 <삼국지> 못지않다. 아울러 그 영향도 대단하다. 특히 항우가 마지막 승부에서 유방에게 패하여, 싸움에서 진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라고 하며,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노래한 <해하가(垓下歌)>는 첸카이거(陳凱歌)의 <패왕별희(覇王別姬)>에서 또 한번 연출된다.

경극을 배우는 소년들이 눈 내리는 언덕에서 노래를 읊던 장면이 생각날 것이다. 그때 부른 노래가 바로 항우의 <해하가>다.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 하건만, 시운이 불리하니 천리마도 나가지 않는구나. 천리마가 나가지 않으니 어찌할 수가 없구나! 우여! 우여! 너를 어찌할꼬!(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또한 나이드신 어르신이 나무그늘 아래서 즐겨 두시는 ‘장기’가 바로 이 초한(楚漢)의 전쟁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장기는 말의 운용이 우리와 약간 차이가 나지만 장기판 중간에 초한을 나누는 공간을 둔 점이 다른데, 이는 곧 장강(長江)을 나타낸다.

각설하고, 항우와 유방의 전쟁을 읽다보면 절대강자였던 항우가 왜 유방에게 패했을까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사마천(司馬遷)은 이에 대해, 관중(關中)을 함락하고서 고향이 그리워 관중을 떠난 점, 의제(義帝: 즉 懷王)를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된 점, 자신의 공로와 사사로운 지혜를 앞세워 옛 것을 스승삼지 않은 점, 패왕의 공업이라는 명목 하에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하고 다스리려고 했던 점 등을 꼽았다.

아울러 항우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시운(時運)’탓을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필자는 어리석게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시운’의 중요성만 부각된다. 아! 이 어리석음이여!

한고조 유방하면, 중국인이 붉은 색을 좋아하는 문화가 연상된다. 한고조의 어머니가 유방을 잉태했을 때, 태몽에 붉은 해가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기·고조본기(高祖本紀)≫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어머니 유오(劉媼 당시에 이름을 알 수 없기에 아마 유씨 집안의 부인이라는 의미인 듯함)가 연못가에서 쉬면서 잠시 꿈을 꾸었다. 이때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번갯불이 번쩍하더니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 유방의 아버지가 달려가 보니 교룡이 부인의 몸 위에 올라가 있더란다.

이 이후로 유방의 머리위에는 항상 붉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고 ≪사기≫에서 전하는데, 아마도 하늘이 돕고 있음을 상징하는 듯 하다. 이리하여 중국인들은 붉은 색을 길한 색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이러한 관념은 또한 귀신이 붉은 색을 무서워한다는 전통적인 관념과 합쳐져서 중국인들이 붉은 색을 좋아한 것일 터이다.

이와 관련된 유방의 고사를 한번 보자.

유방이 장성하여 사수정(泗水亭)의 정장(亭長: 縣․鄕 아래의 관직임)이 되었다. 유방은 관아의 모든 관리를 깔보고 멸시했으며, 또한 술과 여색을 좋아하여, 항상 왕오(王媼)와 무부(武負)의 주점에 가서 외상술을 마셨고, 술에 취하면 드러눕곤 했다.

왕오와 무부는 그럴 때마다 언제나 그의 몸 위에 용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유방이 이들의 술집에 와서 술을 마시는 날이면 술이 평소의 몇 배씩 팔렸는데, 그 기이한 일을 본 후로는 연말이 되면 두 주점에서는 항상 고조의 외상장부를 찢어버리고 술값을 받지 않았다.

한번은 유방이 정장의 직무로서 역도(役徒)를 역산(酈山)까지 압송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었다. 가는 길에 역도들이 도주하기에, 유방은 역산에 도착할 때면 모두 도망하여 한 사람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풍읍(豐邑) 서쪽에 있는 늪지에 이르러, 가던 길을 멈추고 술을 마셨다. 밤이 되자 인솔하던 역도들을 풀어주고, “그대들은 모두 도망치시오. 나도 이제 도망칠 것이오.”라고 하였다. 역도들 중에서는 고조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10명 남짓 되었다. 고조는 술을 더 마신 후 한밤중에 늪지의 오솔길을 지나면서 사람을 시켜서 앞을 살펴보게 했다. 그 사람이 돌아와서 “앞에 큰 뱀이 길을 막고 있으니 되돌아 갑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술에 취한 유방이 “사내대장부가 가는 길에 무엇이 두렵겠소?”라고 말하고, 앞으로 가서 칼을 뽑아 뱀을 두 동강으로 쳐서 죽였다. 다시 몇 리 길을 가서 유방은 술에 취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길에 드러누웠다.

뒤따라오던 사람이 뱀이 죽은 곳에 이르니, 한 노파가 한밤중에 통곡하는 것을 보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내 아들을 죽였기에 이렇게 통곡하는 것이오.” “당신 아들은 무엇 때문에 살해되었소?”하고 물으니, 노파가 말했다. “내 아들은 백제(白帝)의 아들이오. 뱀으로 변신하여 길을 막고 있었는데, 지금 적제(赤帝)의 아들에게 죽었으니, 그래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는 노파가 쓸데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여 혼내주려고 하자 노파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적제가 백제를 죽였다는 것은 곧 화덕(火德)을 지닌 요제(堯帝)의 자손으로서 진(秦) 문공(文公)이 꿈에 뱀을 보고 백사를 섬긴 진왕조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제패하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사기≫내용을 토대로 하여 거꾸로 한번 생각해보자. 유방은 커다란 포부를 가졌기에 그랬을지는 몰라도 상관을 무시하였고, 나아가 술과 여색을 좋아하여 술에 취해 술집에서 쓰러져 잘 정도로 행실이 바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또한 정장으로서 책무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여 자신도 역도와 함께 도망해야 했다. 그리하여 몸을 보전하기 위해 길을 막고 있던 백사 때문에 길을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아가 술기운이 올라 칼을 빼어 그 백사를 죽이고, 그 길로 자신을 따르던 역도들과 함께 진말의 농민봉기에 참여한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잔인무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자신이 압송하던 역도가 하나둘씩 도망해도, 이들을 엄벌로 다스리지 않은 점에서 그의 인물됨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가 있다.

그런데 ≪사기≫의 이러한 묘사는 오히려 필자의 의혹만 가중시킬 뿐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홍문연(鴻門宴)’을 보자.

회왕(懷王)은 여러 장수들에게 함곡관을 진입하여 먼저 관중을 평정하는 자를 관중왕(關中王)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유방이 먼저 함곡관에 들어갔지만 항우의 병력에 미치지 못했기에 곧 패상(覇上)으로 물러나 머물렀다. 그런데 유방의 좌사마 조무상(曹無傷)이 사람을 보내어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어 금은보화를 모두 차지하려 한다고 항우에게 알렸다. 항우는 화가 나서 유방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때 또 항우의 막내삼촌 항백(項伯)이 등장하여 유방을 돕게 된다. 항백은 장량(張良)과 친하였기에 장량을 찾아와 이 사실을 알렸는데, 유방의 대응이 놀랍다. 장량에게 항백과의 만남을 주선해주기 원하며, “그대가 항백을 불러주시오. 내가 그를 형으로 섬길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유방은 술잔을 들어 만수무강을 빌고 혼인관계를 약속하였다. 아울러 내일 홍문연에 참석하여 항우를 설득하기로 약속한다.


홍문연은 애초에 항우의 아부(亞父) 범증(范增)이 유방을 죽이기 위한 계책이었다. 이 자리에는 항우와 항백, 범증, 유방 네 사람이 합석하였다. 범증이 세 차례나 항우에게 눈짓을 보내도 일을 거행하지 않는다. 이에 범증이 밖으로 나와 항장(項莊)을 불러들여 검무를 추면서 기회를 보아 유방을 목베려고 하였다.

그런데 항백이 항장의 검무에 맞추어 칼을 빼어들고 춤을 추면서 유방을 보호하였다. 이때 장량이 번쾌(樊噲)를 만나 위급한 상황을 알리자, 번쾌가 단숨에 술자리로 박차고 뛰어든다. 번쾌는 항우가 내린 큰 술잔의 술을 단숨에 마시고 돼지다리를 칼로 잘라 먹는다. 이로 인해 술자리가 어수선해졌고, 이틈을 이용해 유방은 위기를 모면한다.

이 상황이 이해되는가? 항우는 왜 범증이 세 차례나 신호를 보냈는데 이를 무시하고 유방을 목베지 않았는가? 항백은 항우의 삼촌인데도 장량과의 우의만으로 그를 보호하여 항백의 검무를 방해했을까? 번쾌가 대단한 장수이긴 하지만 홀로 항우의 진영으로 들어와 유방을 보호할 수 있었겠는가?

필자는 유방의 넉살좋은 점에 주목한다. 항백의 나이를 알고는 선뜻 형님이라고 부른다거나, 혼인관계를 약속하는 것 등이 아마도 패업을 이루는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뒤에 패업을 이루고 미앙궁(未央宮)을 건립하고 베푼 연회에서 태상황(유방의 아버지)에게 축수하여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당초에 아버지께서는 항상 제가 재주가 없어서 생업을 꾸려나가지 못할 것이고, 둘째 형 유중처럼 노력하지 않는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이룬 업적을 유중과 비교하면 누구 것이 더 많습니까?”

사실 부모가 보기엔 그의 재능이나 노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분명한 듯 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를 보완하는 융통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를 좋게 말하면 큰뜻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역량을 키운다고 하겠지만 나쁘게 말하면 게으르고 요령만 피운다고 할 것이다.

유방이 일찍이 패현의 정장으로 있을 때 현령의 친구 여공(呂公)이란 사람이 식객으로 와 있었다. 모두들 그의 명성을 듣고 인사하러 왔는데, 주리(主吏)인 소하(蕭何)가 이들을 관리하여, 진상한 예물이 천냥이 되지 않는 사람은 당하(堂下)에 앉으라고 하였다.

유방은 거짓으로 명함에 ‘하례금 만냥’이라고 써넣고 여공을 만났다. 이일을 계기로 여공의 사위, 즉 여후(呂后)를 아내로 맞게 되었던 것이다. 여공이 딸을 준 이유가 유방의 관상을 보니 ‘귀한 상’이라는 것이다. 이해가 가는가? 자신의 딸을 줄만큼 귀한 관상을? 어쨌거나 결과로 보면 유방이 그만큼 그의 환심을 살 정도로 사람을 끄는 능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백성들과 잘 어울린 모습은 황위에 오른 뒤에도 잘 나타난다. 기원전195년 가을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가 모반하여, 한고조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정벌에 나섰다. 다음해 회추(會甀: 지금의 안휘성 宿縣 서남쪽)에서 경포의 군대를 물리치고 돌아올 때, 고향 패현(沛縣)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패궁(沛宮)에 술자리를 베풀어 친구와 마을의 장로들을 초청하여 실컷 술을 마시고, 패현의 아이 120명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술이 거나해지자 고조는 축(筑)을 치며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불렀다.

“큰 바람이 일고 구름이 날리듯, 위세를 천지에 떨치며 고향으로 돌아왔네. 어찌하면 용맹한 병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까?(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이것이 그 유명한 <대풍가>다. 아이들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자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며 감상에 젖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렇게 술마시고 담소하며 10여일이 지나 돌아가려 하자, 패현 사람들이 전송하며 술과 고기를 가져오니, 또 3일을 더 머물며 술을 마셨다.

이로써 보면 유방은 틀림없이 인간성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인자한 마음, 융통성있는 넉살 등등으로 패업을 이룬다? 그것도 난세에……정말로 갈수록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러한 몰이해를 돕기 위해 마지막으로 고조가 천하를 얻은 까닭을 스스로 말한 것으로써 대신하고자 한다.

고조가 패업을 이루고, 낙양(洛陽)의 남궁(南宮)에서 주연을 베풀고, 자신이 천하를 얻은 까닭과 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을 허심탄회하게 물었다.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이에 답하니, 고조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려. 군영에서 계략을 짜내어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일에서는 내가 장량만 못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위로하며 양식을 공급하고 운송로를 끊기지 않게 하는 일에는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고, 백만대군을 통솔하여 싸움에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하는 일은 내가 한신(韓信)만 못하오. 이 세 사람은 걸출한 인재인데, 내가 그들을 임용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오. 항우는 단지 범증 한 사람만이 있었으나 그마저 끝까지 신용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항우가 나에게 포로로 잡힌 까닭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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